〈 2화 〉 진홍의 손길 (2)
* * *
지르니트는 탈리안의 손에 이끌리는대로 몸을 맡겨 걸어가고 있습니다.
불길이 번져가는 마을에서 소녀와 여자아이가 어떻게 빠져나왔냐 하면, 탈리안이 실로 강력한 마법사 비슷한 것이었기 때문 아닐까요.
정말 그녀가 마법사인지는 그 누구도 알 길이 없습니다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르니트를 구해냈다는 것에 있습니다.
마을 사람과 모험가들을 한순간에 한 줌의 먼지조각도 남지 않게 처리해버린 날개 달린 그림자, 그 불길함의 상징과도 같은 것을 단 한 순간에 소리도 없이 없애버린 탈리안.
그러니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탈리안에게 뜨거운 화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이렇게 탈리안의 손짓 한 번이면 강한 바람이 불어 화염 속에서 길을 만들어내니까요.
뭐 새파란 머리카락 색에 걸맞은 힘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두 명은 마을을 빠져나와 길고 긴 시간을 말 한마디 없이 숲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체감상 한두 시간은 걸어 다닌 것 같은데, 이쯤이면 서로 어색해서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런데 여러 가지 따져보면 서로 말이 없을 수밖에 없긴 합니다.
탈리안은 지나가다가 우연히 구해주게 된 소녀가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는걸 지나칠 수 없었을 뿐이었어요.
지르니트는 어느 순간 찾아온 재앙이라는 녀석에 모든 걸 잃어버린 불쌍한 꼬마이니, 슬픔이라는 감상에 젖어있을 수밖에요.
서로 상대방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기도 하고, 그럴 생각도 없으며, 그럴 여유를 갖기 힘든 겁니다.
그 여러 가지를 따져봤을 때 결국 입을 먼저 뗀 건 지르니트였습니다.
"저, 탈리안.. 언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 상황에서는 참 적절하고 예리한 질문입니다.
지르니트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겠죠,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불청객이 끼어들어 평화로운 일상을 망쳐버렸으니까요.
다시는 그 일상을 지내지 못한다는 생각과 언제 또 안 좋은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탈리안을 의심하는 것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게 살펴보자면 지극히 정상적인 거에요.
"수도의 외곽에 있는 산속에 저의 집이 있어요,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지르니트의 의심과는 달리 꽤나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생기가 없어 보이는 무표정과 성격을 고려해보면, 산속에 살고 있다는 게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명심해둘 게 있다면 탈리안이 말하는 수도는 거리가 꽤 된다는 겁니다.
지르니트가 살고 있던 북동부의 작은 마을인 페리시니는 대륙 맨 끝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에 수도는 대륙의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 지르니트로부터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계속 걸어가실 거에요..? 다리 아픈데…."
"버리지 말아 달라면서요.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당연하게도 불만을 토해내면 그에 합당한 까임이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이미 탈리안으로써는 지르니트에게 충분한 호의를 보이다 못해 평생을 고마워해도 부족할 은혜를 베풀어줬으니까요.
이렇다 할 능력도 없는데 불평불만을 하면 혼나는 게 당연하죠.
혼나고 시무룩해지는 지르니트를 버리고 가지 않는 것만 해도 상당히 참고 있는 것일 겁니다.
탈리안이 그 정도로 매정한 부류의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요.
"…쯧."
그런데 탈리안이 갑자기 혀를 차며 불편한 기색을 보입니다.
뭔가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게 아닐까 걱정하는 지르니트가 불쌍해 보일 정도네요.
당장 의지할 곳이라고는 탈리안밖에 없으니 그녀의 행동거지, 말투, 기분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입을 다물게 되고, 걷다가 발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탈리안이 멈추어 서선 지르니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도 다시 앞을 향해 걷습니다.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거슬리는 꼬맹이를 구해줬더니 의기소침한 모습에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신경이 쓰이지만, 딱히 해줄 만한 게 없는 거예요.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하자면 이런 거네요.
서로 신경 쓰고 있는데 한 명은 버려질까 봐 두려워 소극적으로 되었어요.
한 명은 저 귀여운 소동물 같은 꼬마아이를 어떻게든 해주고 싶은데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한마디로 답답이들이에요.
"기다려보세요."
탈리안이 갑자기 손을 놔버리고선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갑자기 의지할 곳이 사라진 지르니트는 극히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옷자락을 양손으로 꼭 잡아 놓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떨고 있는 것처럼요.
그 모습이 마치 사시나무가 떠는 듯 하네요.
"…찾았다, 이리 오세요. 질."
자신을 질이라고 부르는 탈리안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가선 멋대로 안겨버립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탈리안은 갈 곳 잃은 팔을 허공에 띄워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적당히 시간이 흐를 때쯤에야 자신이 지르니트… 질이라는 별명 나름 귀엽네요, 앞으로는 질이라고 칭하죠.
어쨌든 질을 걱정시켰다는 걸 눈치챘는지 머리에 손을 얹어 천천히 쓰다듬어 줬습니다.
탈리안이 묘령의 소녀임에도 그 나이에 비해 작은 것처럼 보인다고는 하지만, 10살의 질보다는 큰 게 당연합니다.
질은 탈리안의 품 안에 쏙 들어갔습니다.
"…진정됐나요? 그만 나와주세요,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귀찮은 걸 무릅쓰고 마나의 맥을 찾은 거니까."
이러나저러나 역시 탈리안은 심성이 나쁜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뭣 하러 마나의 맥을 찾았는지는 곧 알게 되겠죠.
질이 품 안에서 나오자마자 탈리안은 눈을 감고 한 손을 정면으로 뻗어 조용히 서 있습니다.
질은 탈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발밑에서 반짝거리는 빛들이 떠오르는걸 보게 됐습니다.
책을 많이 읽어봤고, 수많은 모험가를 만나며 얻게 된 지식으로 그것이 정령과 마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마법이라도 쓰려는 걸까요.
그 화려함에 기대를 품고 바라보고 있는데 아주 일순간, 정말 짧은 0.01초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찰나의 순간.
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날개 달린 그림자를 봤던 때보다 더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어요.
게다가 태양보다 밝고 포근하게 따뜻하던 마나와 정령이 검게 물들었습니다.
"어, 언니..?"
"집중하는 중이니 조용히 해주세요."
질이 당혹스러움에 탈리안을 불러보았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집중하는 데 방해라는 태도를 취하면서 마저 할 일을 합니다.
곧이어 검게 물든 마나와 정령들이 무서운 속도로 지면의 어떤 포인트에 모여들어 온갖 수식이 들어간 진을 형성했습니다.
진이 완성되고 나서는 마나는 물론, 정령마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탈리안의 마법이 어떤 것에 근간을 두고 있는지는 몰라도, 질이 보기에는 그만큼 대단해 보이는 게 없습니다.
진은 서서히 빛나며 공중에 사람이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의 타원형의 거울을 만들어냈습니다.
신기하게도 아주 얇은 마나로 이루어진 거울일 뿐인데, 그 너머로는 탈리아나 질의 모습이 아닌 다른 장소를 비추고 있었어요.
나무로 지어진 산속 별장의 모습과 그 앞에 소박하게 꾸며진 화단, 그 주변으로는 자그마한 울타리가 별장을 보호하듯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탈리안은 말없이 질의 손을 잡고 이끌었습니다.
방금까지의 섬뜩한 느낌은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이 말끔히 사라진 뒤였고, 질 역시 아무런 거부감 없이 탈리안을 따라갔어요.
뭐… 탈리안이 거울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걸어갈 때는 약간 놀라기도 했지만, 곧 그게 거울이 아니라 워프 포탈이란 걸 알게 되었죠.
"언니, 마법사에요?"
"제 이미지를 고려해보면 마법사로 불리기보단 마녀로 불리는 게 더 어울릴 거 같네요."
마녀라는 말에 질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했습니다.
이 타이밍에 질의 짧은 인생 속에서 떠올릴 기억이라면 가족, 마을의 사건·사고, 모험가 이런 것 밖에 없겠죠.
그리곤 입을 떼서 하는 말이….
"화염의 마녀는 어때요?"
"…나쁘지 않네요."
화염의 마녀라 칭하지만, 그녀가 마을을 빠져나올 때에 화염을 거두어들였던 걸 생각하면 꽤나 어울리지 않는 작명 센스입니다.
그리고 정면에서 얼굴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질은 탈리안이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지은걸 눈치챘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을 거라고 예상 가능한 부분이에요.
철이 일찍 들어버린 질로서는 굳이 사연을 캐묻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예의라고 알고 있으니까요.
"일단, 이곳이 질… 당신이 지낼 곳이에요."
"..언니는요?"
질은 꽤 크기가 큰 별장과도 같은 집에서 혼자 지내게 될까 봐 불안했나 봅니다.
앞에 보이는 집은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의 그 어떤 것보다 고급스러워 보였으니 부담이 될 만도 했습니다.
그 앞의 소박한 화단과 울타리가 언밸런스한 조화를 이루는 것만 빼면 완벽했어요.
이런 곳에서 질 혼자 지낸다면 외로움과 공포에 잡아먹혀 365일 내내 눈물로 밤을 지샐 겁니다.
새로운 곳에 지내며 놀라고 즐거운 것도 하루 이틀이죠.
그렇지만, 탈리아가 누구입니까? 우연히 지나가다가 괴상한 생명체가 마을을 습격하는 것을 보고선 이름 모를 여자아이를 구해준 심성 착한 마녀입니다.
그.. 조금 말을 까칠하게 하지만, 질을 혼자 놔둘 리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이곳은 제가 오랫동안 살아온 집이기도 해요."
"아, 다,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질, 당신 탄내가 좀 심하게 나네요. 이건 씻지 않으면…."
"네?"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탈리안, 질은 갑자기 공중으로 들려지는 그녀의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보다 더 위에 꽤 큰… 아니 질보다 5배는 더 큰 물방울이 둥둥 떠 있습니다.
말 안 해도 알 거예요, 질도 저게 바로 자신에게 떨어질 거라고 알고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점점 얼굴이 창백해지고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벌벌 떨기 시작했는데.
하지만 꼬마아이가, 10대 후반의 미소녀를 힘으로 이길리는 없지 않습니까.
잡혀있는 손을 빼려고 해도 절대 그러지 못하는 게 정상인 겁니다.
"으으, 흐아아!! 놔주세요!! 놔주세요오!!!"
"…버블 캐논."
쏴아아!
"으브브븝!!!"
아무래도, 화염의 마녀라는 칭호는 다시 거둬가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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