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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진홍의 손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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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부에 위치한 작은 산골 마을 페리시니.
그곳에는 막 10세가 된 소녀 지르니트 페어차일드가 살고 있습니다.
소녀는 깊은 바다와도 같은 진한 색의 길고 긴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그 눈동자는 진주를 담은 것마냥 반짝입니다.
피부는 또 어떻습니까?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게 고급스러운 비단을 만지는 기분이 들 겁니다.
주변에서도 인형 같다, 조각상 같다는 말은 수십번을 들었을 거에요.
하지만 이런 빛나는 외모들을 가졌음에도, 외모를 사용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작은 변방 마을에서 뛰어나봤자 외모를 사용한 출세의 길은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저,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아가는 게 소녀의 가장 큰 낙입니다.
소녀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소녀 본인, 그리고 남동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소녀가 부모님의 농사를 돕고 있을 때에, 온 세상이 흔들리는 듯한 경험을 합니다.
그렇지만 소녀는 항상 침착했습니다.
약간은 남달랐다고 말을 할 수 있겠네요.
또래의 아이들보다 조금은 더 성숙하고, 작은 마을이라는 세계 안에서 보호받고 살면서도 항상 미래를 생각하는 철이 일찍 든 아이였어요.
이런 큰 지진과도 같은 현상에는 그저 냉정하게 가족들을 넓은 들판으로 데려가 엎드리는 것으로 대처했죠.
하지만 소녀는 이 지진이 정확히 뭘 뜻하는지까지는 알지 못했어요.
주변에서는 신의 천벌이니 뭐니 떠들지만, 소녀는 이미 신들은 자취를 감추고 세계의 뒤편에서 자신의 할 일만 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소녀는 지금보다도 훨씬 어렸을 적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책을 읽어왔거든요.
그래서인지도 모릅니다.
소녀가 일찍 철이 들고, 무엇이든 잘 알고 있으며, 모든 일에 침착한 이유가 말입니다.
가끔 이 마을에는 여행에 지친 모험가도 찾아옵니다.
소녀가 듣기로 만나는 모험가마다 성지를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모험가들에게 들어온 이야기 때문에, 그 성지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신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소녀는 그곳에 가는 모험가만 봤을 뿐입니다.
성지라는 곳에 갔다는 모험가들은 다시는 이 작은 마을에 돌아오지 않았죠.
확실치는 않지만, 소녀는 성지라는 곳이 사실은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뭐.. 다른 모험가에게 물어봤을 때는 그곳에 워프 포탈이라는 게 있어서, 돌아갈 때는 편히 돌아간다는 반전이 숨어있었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소녀에게 이 일화는 적당히 즐거운 이야기였습니다.
약간 힘 빠지는 이야기였을 뿐이에요.
"촌장은 어디 있는가!!"
평소처럼 모험가들이 마을에 찾아왔습니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세네 명이 아니라 거의 군대 수준의 인원이 찾아왔다는 것이었겠죠.
소녀는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사실,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한 거에요.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바로 마을의 대표를 만나러 가는 일도 적었으니까요.
그래서 소녀는 조심스럽게 어른들의 눈을 피해서 대표의 집에 다가가 벽에 귀를 댔습니다.
소녀가 듣게 된 내용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세계에 재앙이 뿌리내렸다."
단순하지만, 언뜻 보기에도 불길한 말이었습니다.
저 모험가들 말대로 재앙이 찾아왔다면 소녀의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소녀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 화목한 가족과 언제까지고 함께하고 싶었을 거에요.
저 말의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미 소규모로 여행을 하는 그들이 군대를 형성해 마을을 찾아온 일부터가 안 좋은 일의 징조였던 것이에요.
소녀는 왔던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곤 동생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어요.
보통의 아이들이었다면 부모를 먼저 찾았겠지만, 소녀는 철이 일찍 들었던 탓도 있고 동생과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세상 누구나가 알아도 상관없을 수준의 비밀이지만 소녀의 세계는 아주 자그마하거든요.
"누나?"
"괜찮을 거야, 그렇지?"
"무슨 일이야?"
소녀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소녀의 동생 역시 조용히 그 손길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어요.
둘이 떨어지게 된 건 수십 분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할까요.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모험가들이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킬 때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족과 함께 이동하던 소녀가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니 동생이 사라진 거였어요.
소녀는 자신이 손을 꽉 잡고 있어서 놓칠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고 장담했었죠.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네요.
"아빠, 엄마 저.. 동생 찾아보고 올게요!!"
"지르니트!!"
소녀는 부모의 만류에도 사람들의 대열을 빠져나가 동생을 찾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의 무리에서 떨어진 직후였을까요.
그 순간, 천둥·번개라도 친 듯한 섬광에 귀가 먹먹해지고 중심을 잃어 넘어집니다.
소녀는 정신을 잃을뻔하다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 아픈 걸 꾹 참고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무릎이 까져 피가 흐르고 있지만, 일찍이 철이 들어버린 소녀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소녀 자신이 아픈 것보다는 뒤돌아 보고 난 뒤에 보게 된 풍경에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죠.
그 자리는 방금까지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 모험가들이 있던 곳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아빠? 엄마?"
혹시 소녀는 자기를 두고서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하며 이리저리 절뚝거리며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있을까.
건물 뒤에 숨어있을까.
상자 안에 숨어있는 건 아닐까.
한참을 찾아다녀도 사람들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상황.
소녀는 생에 처음으로 당황했습니다.
"다, 다들 장난치지 말고 어서 나와요..!"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습니다.
그러던 중에 소녀의 뒤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직감이 말해주기를 절대로 돌아봐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녀는 만에 하나 가족이나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나타난 거라고 믿고 뒤를 돌아봤어요.
소녀가 돌아본 그곳에는 성인 남성 둘을 합친 것보다 큰, 날개 달린 까만 무언가가 서 있었습니다.
날개 달린 그림자가, 지옥에서 찾아온 악마라면 모를까... 소녀는 그것을 보고 신이 보낸 사자나 천사 같은 존재는 아닐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형용할 수 없는 그림자를 보자마자 느꼈어요.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생각은 그렇게 해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쉽지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발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를 않았거든요.
당장의 두려움 때문에 조금 전까지 소녀가 애달프게 찾던 부모님과 남동생은 어느샌가 머릿속에서 지워졌습니다.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들을 볼 기회조차 사라지는 거니까요.
그림자가 손을 뻗어오는 걸 보고서, 소녀는 눈을 질끈 감습니다.
"그렇게 겁먹으면 살아남을 가능성마저 죽여버리는 것을 모르는 겁니까."
이곳에는 지르니트밖에 없었을 테지만 뜬금없이 자기 또래 소녀의 목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는 성숙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작은 소녀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주변을 둘러보니 마을이 불타고 있어 하늘을 주홍색으로 물들였습니다.
약간 화상을 입을 정도로 덥다는 것만 뺀다면 지르니트에게 별로 문제가 될 건 없었어요.
이제는 주인이 없는 집들이니까 말이죠.
추억이 수없이 깃들어있는 마을이겠지만 혼자 남았는데 어쩌겠습니까.
어쨌든, 지르니트 앞의 소녀는 웬만큼 이쁘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지르니트의 외모를 무시하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날개 달린 그림자와 같은 세상에서 온 듯한 지옥의 외모… 아니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말입니다.
그 소녀 역시 지르니트와 같은 바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길이마저 보통 예사로운 게 아니라 땅에 끌릴 정도였죠.
"구해줬으면 적어도 그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누구세요..?"
자신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누군지부터 물어보는 지르니트를 보고 소녀는 한숨을 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친절하게 답해줬어요.
"탈리안이라고 합니다."
"저를 왜 구해주신 거에요?“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했으니까요, 가족분들의 일은 유감이에요."
"가족? 가족.. 아."
탈리안은 지르니트의 아픈 부분을 건드려놓고도 무심하게 다른 장소를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지르니트가 울기 시작해도 그저 조용히 앞에서 서 있기만 했어요.
약간의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있다면 울게 놔둬서는 안 되지만, 아픈 곳을 건드려서는 안 되지만.. 양심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지르니트는 그렇게 한참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아, 동생.. 동생은요?!"
"이 주변에는 당신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지르니트.. 지르니트 페어차일드에요."
"…그래요, 질."
자신밖에 없다는 말에 지르니트는 이로써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화목하던 가정도 사라졌고, 마을 사람도 사라졌으며, 마을 건물들은 잿더미가 되어 있습니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곤 하지만 지르니트는 보호자가 없다면 몬스터에게 죽기보단 굶어서 죽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지르니트가 할 줄 아는 게 많은 철든 소녀라지만 그래봤자 10대 초반의 꼬마아이니까요.
다 무너져내린 마을에서 제대로 먹을 음식이나 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인지 다시 한번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샘을 힘껏 쥐어짜는 거 아닐까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
이 행동이 탈리안이라는 소녀의 마음을 움직일지 누가 알겠어요.
지금까지처럼 운이 좋다면 탈리안이 자신의 보호자가 돼줄 거라고 머리를 굴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아, 제가 더 이상 뭘 해야 한다는 걸까요..."
"저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
솔직히 얘기해서, 지르니트는 미래에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저거 보세요, 탈리안의 옷자락을 힘껏 잡고선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
반드시 날 데려 가달라고 방금까지 눈물이 흘러내렸던 촉촉한 눈망울로 쳐다보는 것까지.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까.
"…제 손을 잡으세요."
탈리안은 작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이죠, 그렇게 불쌍한 소동물처럼 엉겨 붙던 지르니트가 손을 잡길 망설이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요.
불길은 점점 더 강해져 이 일대를 다 태워 가고 있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탈리안은 조용히 반응을 관찰하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해오지 않아요.
계속되는 침묵에 탈리안이 손을 거둬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가족들의 무, 무덤…! 만들어주세요..!"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생각해보도록 하죠. 손, 안 잡을 거면 저 혼자 갈 거예요."
그게 탈리안의 마지막 통보였습니다.
지르니트도 알고 있어요, 자신이 요구하는 게 억지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들의 품에 안기는 건 싫을 거거든요.
반강제적으로 지르니트는 탈리안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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