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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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무헌아. 잠깐 통화 가능해? ]

나는 혼자서 무인 택시를 타고 새턴에 가던 중 날아온 민후의 문자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 응. ]

무슨 일인가 싶어 곧바로 대답하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는 안내창이 떠올랐다.

[ 하하. 바쁜데 미안! 오늘도 토렐리트 쪽에서 수련을 계속 하는 건가 싶어서. ]

“아… 아마 그럴 것 같은데.”

나는 현재 현실 시간으로 3일째 꼬박 토렐리트 탑에 틀어박힌 채 슈페리어와 8서클에 해당하는 이동마법들을 연습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빨리 끝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지만 처음 써 보는 종류의 마법인 데다 8서클씩이나 되고 나니 아무래도 진도를 나가는 것이 영 쉽지가 않았다.

슈페리어는 내게 그 조급증을 버려야만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매번 조언했지만…… 중간중간 명상을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 그렇구나……. 오늘로 모든 조직 개편이 다 끝날 것 같아서 혹시 잠깐이라도 들러줄 수 있을지 물어보려고 했지. 뭐, 네가 못 올 가능성을 대비해서 마법사들을 이끄는 역할은 매직토피아 길마라는 그 사람한테 대리로 부탁했으니까 너무 걱정은 마. ]

민후의 얼굴은 쾌활해 보였지만 얼굴은 현실임에도 게임 속만큼이나 피곤해 보였다. 그가 지금 미스트에 접속할 수 있는 한계 시간을 전부 사용해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기에 그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미안.”

[ 응? 아니아니. 사과할 필요 전혀 없어!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이 아니니까. 길드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이 네 수련을 응원하며 뭐든 도울 기세라는 것만 알려줄게. 하하. 그 사람들이 엄청나게 협조적이라 내 일이 반은 줄어든 것 같다니까? ]

“…그래도 미안.”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일주일 하고도 이틀 정도밖에 없다. 그 안에 8서클을 해결하고 마지막 남은 마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은 뒤, 현재 미스트를 뒤집어엎고 있는 놈들과의 전쟁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면 자꾸만 마음이 급해지고 초조해졌다.

크란도, 유완도, 키온 형도, 다른 이들도 모두 나서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만 아직도 혼자 틀어박혀 수련을 해야 하다니……. 이보다 더 미안한 일이 또 있을까.

나의 거듭되는 사과를 들은 민후는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웃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입을 열었다.

[ 페일 나이츠와 NPC 군단들이 날뛰고 있어서 난리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가 인원을 나누어 지키고 있는 대도시들은 멀쩡해.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그런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어서 그놈들을 전부 때려잡고 마신을 찾아내는 거라고. 미스트에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온 날부터 놈이 부활한 건 맞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에 실체가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어. ]

마신의 실체라……. 나는 슈페리어의 마지막 기억 속에서 보았던 마신과의 싸움을 떠올렸다. 하늘 위에서 뭔가 천둥 번개가 번쩍이고 목소리가 울리는 것으로밖에는 보지 못했는데, 그걸 생각해 보면 마신에게 딱히 실체랄 만한 것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글쎄… 실체는 딱히 없는 것 같던데. 슈페리어의 기억에서 본 바로는 그냥 천둥 번개에서 목소리만 들렸던 것 같아서.”

[ 그래? 그러면 천둥 번개가 유난히 많이 치는 곳이 그놈이 있는 곳인가? 그걸 어떻게 불러내서 싸워야 하는 거지? ]

민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피식 웃은 뒤 이전부터 그에게 조언해 주려던 말을 해 주기로 했다.

“그보다……. NPC 마법사들을 조심해.”

[ NPC 마법사들은 왜? 페일 나이츠 편에 붙은 자들이라면 소속이 위저드 타워에서 일하던 NPC들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데. ]

“그자들 중에 흑마법사도 있을 확률이 커.”

나는 흑룡을 죽이러 가기 전에 마주쳤던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가르친 제자 마법사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위저드 타워 소속이면서도 흑마법을 쓰고 있었고, 그것에 한 점의 거리낌조차 보이지 않았었다.

슈페리어가 가르쳐 준 바에 의하면 흑마법의 특징은 시전 속도가 보통 마법에 비해 훨씬 빠르고 강력하며, 주로 파괴적인 마법에 특화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이들이 현재 우리를 공격하는 NPC 마법사들 중에 한 명도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마도 여럿 더 있겠지만 어떠한 사유에 의해 지금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한 나의 경험과 생각을 말해 주자, 민후의 표정이 몹시 심각해졌다.

[ 그렇구나. 그 부분은 생각지 못했어. 요약하면 페일 나이츠 쪽과 손을 잡은 마법사들의 대빵이 또 하나의 슈페리어고, 그자는 흑마법도 쓸 수 있으며 위저드 타워를 장악하고 자기 제자들에게 흑마법을 가르쳐 지금 잘 써먹고 있단 거지? ]

“응.”

[ 확실히 엄청난 상대네. 타락한 전설의 마법사라……. ]

민후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 아직 안 나타나서 참 다행이지만 그것도 뭐 시간문제겠지. 내가 그자한테 죽기 전에 어서 수련을 끝내고 돌아와, 무헌아! ]

“노력하마.”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하자 민후가 모처럼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 그래. 그래야 무헌이지. 네가 가기 전에 잘 설득하고 가서 그런지 깜장검사 그놈도 의외로 일을 잘해 주고 있거든. 너는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해. 혹시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

내 걱정을 줄여주기 위함인지 최대한 밝은 얼굴로 말해 주는 민후를 보니 마음속이 뜨거워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마워.”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날 이후, 미스트 대륙 내의 세력 판도가 또다시 바뀔 줄은 예상치 못했던 때의 일이었다.

세이버스 길드의 출범 소식과 그로 인해 뒤바뀐 대륙의 분위기 때문에 영향을 받은 건 유저들뿐만은 아니었다.

황폐해진 키잘키르스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법 도시 비스탈레, 그리고 비스탈레 내에서도 유독 가난하고 허름한 작은 마을 레쥴에 살고 있던 NPC 주민들은 심각한 얼굴로 어느 집에 몰래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어서 오게. 볼드.”

“오, 오랜만이야 렉스. 레밀 너도, 많이 컸구나.”

“안녕하세요, 아저씨.”

외팔이 렉스는 사랑스러운 딸 레밀, 그리고 나이 든 어머니와 함께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는 얼마 전,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들을 놀라게 하며 출입이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숲속에서 살아 돌아온 기적의 사내였다.

그의 손님 중에는 그와 함께 살아 돌아온 볼드, 그리고 다른 동료들도 있었다.

그들은 인사를 길게 나누지 않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이는 집주인이자 손님들을 불러 모은 외팔이 렉스였다.

“다들 콜로세움을 운영하던 놈들이 완전히 손 떼고 도망갈 거란 소문은 들었겠지? 내가 오늘 확인하고 왔는데 진짜더군. 내부가 완전히 텅 비었어.”

“그게 정말이야? 이제 키잘키르스텀의 그 마물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오는 건가…….”

비스탈레의 명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암살자 집단 Born이 운영하던 콜로세움이었다. 지금껏 그게 있었기에 그나마 무차별 대전에 참가해 보고자 하는 여행자, 즉 유저들이 방문하여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는데 아예 운영을 중단했다니. 웅성대며 불안한 눈길을 주고받는 이들 사이에서, 외팔이 렉스가 목소리를 높여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레밀과 어머니를 모시고 여길 떠나 안전한 곳으로 갈까 해.”

“안전한 곳?”

“그런 곳이 있어?”

사람들의 의문 어린 눈길을 받은 렉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콜로세움 쪽을 확인하러 갔다가 여길 떠나는 마지막 여행자가 하는 말을 엿들었어. 중부에 있는 대도시 자그레브에서 대단히 정의로운 이들이 길드를 만들어 요즘 일어나는 일에 대한 해결을 도모하고 있다더군.”

“자그레브라니… 너무 멀잖아!”

“정의로운 이들이 길드를 만들어? 그건 대체 어떻게 믿고?”

난색을 표하는 이들의 얼굴을 둘러본 렉스는 긴장감과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딸과 노모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손님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나도 믿기 힘들었지. 그런데 말이야, 그 길드에 어떤 대단한 마법사가 있다더라고? 궁금해서 자세히 들어 보니까 아무래도 그 사람이… 내가 아는 분인 것 같아서 말이야.”

“뭐? 설마…….”

렉스와 함께 마법사 카프로스에게 구출되었던 이들이 일제히 그 말에 반응했다.

“확실하지는 않지. 하지만 그분이라면 이런 정의로운 일에 나서실 만하지 않나?”

그분이 맞다면 나는 이번에야말로 은혜를 갚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는 렉스의 얼굴을 본 주민들은 일제히 침묵했다.

“어차피 이곳에 있어 보았자 지금처럼 몸을 사리며 숨어 사는 것밖에 못 해. 그러느니 모두 뭉쳐서 그곳으로 가는 게 낫지. 거기로 가면 분명 우리가 도울 일도 있을 거야. 어때, 친구들. 같이 가겠어?”

“…….”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이내 하나둘 굳은 의지가 떠올랐다.

다음 날 새벽, 제법 많은 주민들이 짐마차를 끌고서 비스탈레를 떠나 자그레브로 향했다.

비슷한 시각, 미스트 대륙 남쪽의 작은 바닷가 마을 하이류.

그곳의 숨겨진 지하 마을에 살고 있던 노파 티지엔 또한 손자 사치의 손에 행운을 기원하는 부적 팔찌와 그의 어머니가 젊은 시절 사용하던 단검을 선물해 주었다.

“사치야, 그 길드라는 데 가서 은인들에게 은혜 갚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나 깨나 몸을 조심해야 한다. 너희가 옮기는 게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잊으면 안 돼. 눈이 뒤집어진 것 같은 마법사 놈들도 조심하거라.”

“알아요. 조심할게요, 할머니!”

그들이 사는 하이류 마을 지하에서는 오래된 용의 사체가 변화하며 생성된 디란델나이트라는 특수한 광물을 캐낼 수 있었다. 강한 폭발력을 지닌 그 위험하고도 귀한 물건을, 하이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협박하는 NPC 마법사들에게 넘기는 대신 세이버스 길드 쪽에 몰래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전 그들의 자식들을 구해준 이들 중 하나였던 루크레이신이 근처의 도시까지 내려와 잠시 길드 가입 신청을 독려하는 모습을 본 이가 있었던 덕에 결정은 여느 때보다 훨씬 빠르고 신속했다.

할머니에게서 단검과 팔찌를 건네받은 사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와 함께 디란델나이트를 운반해 갈 친구들이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자!”

“언니, 오빠들 잘 다녀와!”

카프로스와 루크레이신, 키온에게 비밀 퀘스트를 주었던 소녀, 우시에가 떠나는 젊은이들의 등 뒤로 아쉬움을 담아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전달한 디란델나이트는 무사히 세이버스 길드 측에 도착하여 이후 대장장이 유저들에 의해 전투 능력이 없는 생활형 유저들을 위한 보호용 폭탄으로 재생산되었다. 그리고 세이버스 길드의 길드마스터 크라토스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를 원하는 생활형 유저라면 길드원이 아니라 해도 누구에게나 그 폭탄을 제공해 주겠다 밝히면서 또다시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 외에도 세이버스 길드를 만든 일곱 구성원들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NPC 주민들이, 페일 나이츠와 시저를 돕는 NPC들에게 대항하여 계속해서 용기 있게 떨쳐 일어났다.

크란에게 도움을 받은 대장장이 NPC들이 페일 나이츠 길드를 따르는 이들에게 무기 수리와 판매를 거부하는가 하면, 키온과 팔튼 덕분에 목숨을 구한 루그의 사제 NPC들이 세이버스 길드에 가입하려 하는 사제 유저들을 상대로 특별한 축복 아이템을 내려 주기도 했다.

커뮤니티에서 특히 화제가 된 건 루크레이신의 뒤를 따라 세이버스 길드에 투신한 전 Born 소속 암살자 NPC들의 소식과 운오와 위험한 거래를 해오며 신뢰를 쌓은 NPC 거상들이 세이버스 길드 소속에게 상시 할인을 해 주겠다고 밝힌 부분이었다.

덕분에 세이버스 길드가 하는 일이 없다며 욕하던 의견은 다소 줄어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세이버스 길드의 소식을 접해 들은 이가 또 하나.

“아빠. 저예요.”

드워프 미다한은 돌아올 답을 기다리지 않고 철의 장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작업실의 문을 열었다. 묵직한 철문 안에는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앞에서 땀을 흘리며 망치를 두드리는 마스터 체무킨이 있었다.

“미다한? 무슨 일이냐. 다 끝나기 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죄송해요. 하지만 이번에는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이런 말을 전하러 올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산맥의 주인이 저흴 찾아왔거든요.”

그 말에 철의 장인은 처음으로 쥐고 있던 망치를 멈추었다. 그는 딸의 뒤에 서 있는 길고 붉은 머리칼의 신비로운 존재를 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드워프처럼 생겼으나, 그의 내면에는 용이 깃들어 있음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염룡 코르의 뜻을 전하고자 왔습니다.”

드워프들의 바로 옆에서 산맥 깊은 곳에 깃들어 오랫동안 함께해 온 염룡 코르. 그러나 그가 분신을 보내 직접 의견을 전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체무킨은 미다한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아낸 뒤 천천히, 그리고 기다렸던 순간이 다가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지요.”

코르의 분신이 미다한과 함께 체무킨의 앞에 앉았다. 그는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얼마 전 코르가 보낸 인간들에게 뜻을 보내신 줄로 압니다. 용족을 믿을 테니 처음부터 움직이기를 바란다. 그렇게 전하셨지요.”

“그렇습니다.”

“현재 이 땅에 남아 있는 종족 중 사멸하거나 떠나지 않은 것은 엘프와 드워프 둘뿐. 그리고 그 두 종족 모두 코르에게 같은 뜻을 전하였습니다.”

엘프들 또한 드워프들과 같은 뜻을 전했다는 말에 미다한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러나 체무킨은 예상했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코르는 저를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앞으로 이곳에서 여러분을 지키며 무엇이든 함께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엄청난 무게감을 지닌 약속이었다. 미다한이 숨을 삼켰다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염룡께서는… 당신만을 보내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같은 이들이 엘프를, 그리고 인간들을 향해서 이미 여럿 길을 떠났지요. 대륙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코르의 눈으로 판단한 뒤 마지막으로 여기에 온 겁니다.”

드워프의 모습을 한 코르의 분신이 미소를 지었다.

“코르의 이름과 정체를 세상에 남기지는 않으면서 확실한 움직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것참 든든하군요. 우리가 무얼 준비하는지 이미 다 아시고 계셨던 모양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체무킨은 무심한 얼굴로 코르의 분신과 악수를 나누었다.

“원수에게 불의 복수를 하고 다시 한번 북부의 아름다운 광맥을 되찾기 위해, 그리고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켜 준 인간 친구들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돕기 위해, 우리 드워프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마스터의 작업실 밖에서는 도시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드워프들이 생기 넘치는 태도로 전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이게 도끼야? 몽둥이지! 날이 엉망이잖아!”

“99개는 여기 있는데 하나는 어디 갔어! 뭐? 네가 먹었다고?”

“그래 가지고 어디 몬스터나 마물 놈들하고 싸울 수나 있겠냐!”

오랫동안 조용했던 오르겐 산맥 내부의 광산에서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한 그 움직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광석을 캐던 유저들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진동이 되었다. 좋지 않은 조짐일지도 모른다며 커뮤니티 내에서는 걱정의 의견이 많았으나, 그래도 어딘가에는 그런 소식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만 하는 이들이 꼭 있는 법이었다.

“여기에 어제 파다 만 광석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 갔지……. 앗.”

미스트 대륙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거나 말거나 오늘도 곡괭이를 둘러메고 광석을 캐기 위해 오르겐 산맥 내부로 들어왔던 어느 유저는, 모자에 달고 온 라이트 아이템이 하필 내구도를 다하는 바람에 갑작스레 어둠 속에 갇히게 되었다.

“아 짜증 나네. 여분을 안 가져왔었나? 여기 광명의 돌 남는 분 없어요?!”

“이거 쓰지 그래.”

“엇, 가, 감사합…….”

어둠 속에서 누군가 던져 준 예상치 못한 자비에 당혹해하며 고개를 돌린 유저는, 눈높이가 맞는 곳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얼어붙었다.

“귀, 귀신?”

“어딜 보는 거냐? 여기다, 얼간이 인간아.”

유저는 그제야 들고 있던 빛나는 돌을 아래로 내렸다. 인간보다 머리 둘 정도는 더 작지만 다부진 몸을 지닌 이종족이 심통이 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굳은 유저를 보며 드워프가 쯧쯧 혀를 찼다.

“고맙다는 말도 안 하는 거냐? 그래, 뭐 기대도 안 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오랜만에 밖에 나오는 거라서 말이야. 혹시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어?”

“…….”

토렐리트 근처에서 드워프 종족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은 전 세계의 미스트 유저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커다란 거창을 들고서 모습을 드러낸 마스터 체무킨과 드워프 전사들은 인간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히 자신들의 목적을 밝혔다.

이 놀라운 소식을 듣자마자 그들을 만나기 위해 달려간 키온은 크게 웃으며 체무킨과 손을 잡고 전폭적인 동맹을 약속했다.

세이버스 길드에 또 하나의 놀라운 동맹자 집단이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야? 오늘따라 집중을 잘 하네.”

슈페리어가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뜬 채 중얼거렸다. 나는 현재 토렐리트의 슈페리어 도서관 안에 누워 마법을 수련하기 위한 정신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게임 시간으로 10일에 가까운 시간을 초조함 때문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보내다가 오늘따라 잘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어서 끝내기 위해서는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말라고 했던 건 너잖아.”

“그야 그랬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 또한 나도 알고 있으니까.”

슈페리어는 그렇게 말하며 근처의 나무 그루터기 위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언제나 맑고 바람이 살랑였던 슈페리어의 정신세계는 요즘 밤만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 들어와 보았을 때에는 깜짝 놀랐었지만 슈페리어가 워낙 태연했고, 밤이 된 것 말고는 아무런 날씨의 변화도 없어서 지금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낮과 밤……. 개인적으로는 그 변화가 슈페리어의 내면의 변화 같은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부정적인 의미로라면 더더욱 그렇고.’

나는 지난 10일간 이곳에서 내내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은 채 이동 마법을 연습했다. 슈페리어가 먼저 읽어 두라고 말했던 책에서 얻은 마법 두 개의 이름은 각각 ‘텔레포테이션’과 ‘오픈 게이트’였다.

책의 설명에 의하면 텔레포테이션은 오로지 나 자신을 머릿속에 떠올린 장소 어디로든 이동시킬 수 있는 마법이었고 오픈 게이트는 두 개의 장소를 잇는 문을 열어 일정한 시간 동안 누구든지 통과시킬 수 있는 마법이었다. 심지어는 물건만 던져놓는 것도 가능하다는 설명이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쉬워 보이지만 문제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을 이미징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하늘을 나는 것이라면 모를까, 공간과 공간을 도약하는 이미징을 대체 어떻게 해야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단 말인가. 슈페리어가 하는 것을 볼 때에는 쉬워 보였던 것이 내가 하려니 단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마력은 마력대로 들어가고, 조금 성공하려는 듯하다가 깨지기가 일쑤인 상황 속에서 지치고 초조한 바람에 그동안 시간을 계속 낭비했지만, 오늘은 다르다.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 이상 나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든 이 마법들을 성공시킬 생각이었다.

“슈페리어.”

“응?”

“혹시 이미징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 같은 건 없을까.”

바닥에 정좌하고 앉은 채 명상을 끝내고 나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슈페리어에게 정중히 부탁하자 눈을 크게 떴던 슈페리어가 잠시 후 아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별일이네. 그대가 나에게 그런 걸 다 부탁하다니. 어지간히 절박하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내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흥미롭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말해준다 해도 어차피 이미징이란 건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야. 나의 마법이 그대의 마법이 될 순 없어. 그래도 듣고 싶어?”

그야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여태껏 슈페리어에게 마법을 배우면서도 이러한 질문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동 마법은 애초에 첫 단추조차 내가 제대로 끼우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이라도 붙잡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부탁합니다.”

사부님께 예전에 대련을 부탁했던 때처럼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자, 슈페리어가 “응? 뭐야. 새삼스럽게 이러지 말라고.” 하며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그냥 알았다고 하면 이야기해 줄 생각이었어. 머리까지 숙일 필요는 없다고.”

“나는 원래 스승님께 부탁할 때에는 이렇게 했어.”

“스승님? 나 말고 또 스승님이 있었던가?”

스승님이라는 말에 슈페리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보며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여기엔 안 계시지만… 내게 어릴 때부터 검을 가르쳐 주신 분이 계셔.”

“흐음. 그랬구나. 어린 제자에게 머리를 땅에 숙이는 부탁을 받고서야 가르쳐주다니, 그도 참 대단한 사람인데?”

슈페리어는 아무래도 내가 뭔가 학대를 당하며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낌새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줄줄이 설명할 수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일어나 봐. 내가 처음 이 마법을 성공했을 때의 경험을 말해 주지.”

나는 슈페리어가 이끄는 대로 일어났다. 슈페리어는 내 곁에서 몇 발짝 걸어가는가 싶더니, 잠시 후 작은 바람소리만을 남기고 모습을 감추었다.

“이게 텔레포테이션.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에는 블링크와 비슷하지. 블링크를 할 줄 안다면 비교적 쉬워.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블링크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곳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면 텔레포테이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도 거리의 제한 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야. 자, 이렇게.”

잠시 후 슈페리어는 몇십 미터 떨어진 나무 위에 서 있었다. 그가 나뭇가지 위에 기댄 채 빙긋 웃었다.

“요령만 있다면 대륙 끝에서 끝으로, 건물 밖에서 건물 안으로, 산꼭대기에서 바다 밑으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지. 단, 그대가 알고 있고 가본 적이 있는 장소여야만 해.”

그렇게 말한 뒤 슈페리어는 다시 내 눈앞에 슥 하고 나타났다. 힘들어 보이는 기색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포인트는 바로 ‘장소’를 기억하는 거야. 알겠어?”

“……장소?”

“그래. 그대가 가고자 하는 장소를 얼마나 정확히 원하는지 이미징해야만 해. 그곳의 풍경, 소리, 냄새, 온도, 심지어는 바닥을 딛고 섰을 때의 느낌까지도.”

풍경, 소리, 냄새, 온도, 촉감……. 그건 말 그대로 오감 전부가 아닌가.

나는 여태껏 막연히 가고자 하는 장소를 떠올리면서 몸이 이동하는 이미징을 성공하는 것에만 포인트를 두려 했었는데, 슈페리어가 말한 포인트는 전혀 다른 부분이라는 점에 조금 놀랐다.

“이동하는 것에 대한 이미징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건가?”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고위 서클일수록 마법에 깃든 존재하고자 하는 힘이 강력해서, 일단 목표로 하는 지점이 완성되면 그다음의 과정까지는 쉽게 이룰 수 있어. 이 마법의 경우는 이동하는 과정 자체는 그리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야.”

그랬다니……. 여태까지 삽질만 해 온 것이 한심해 한숨을 푹 내쉬자 슈페리어가 낮게 웃음을 흘리며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차피 며칠 더 고생했으면 그대도 알아냈을 지점이라 쉽게 가르쳐 준 거야. 그대는 좀 몸이 한계까지 고생한 뒤에야 방향을 전환하는 습관이 있잖아? 몸이 편하려면 머리를 먼저 써야 해.”

“…….”

그건… 즉 노가다도 좋지만 일단 머리를 잘 쓰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건가. 내가 현재 비효율적으로 10일을 흘려보낸 것은 맞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슈페리어는 내가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몸을 빙글 돌려 앞을 보고 섰다.

“자, 다음은 오픈 게이트.”

그가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곧바로 눈앞의 바닥에 복잡한 마법진이 떠오르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놀라운 것은 눈앞에 있는 것 말고도 몇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똑같은 마법진과 공간의 일그러짐이 하나 더 생겨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검게 소용돌이치는 구멍은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커지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슈페리어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잠시 후 그가 몇십 미터 떨어진 곳의 구멍으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 나를 따라 들어와 봐.”

나는 그의 말을 따라 조심스럽게 검은 구멍 안으로 발을 옮겼다. 체감으로는 그저 한 발짝 옮긴 것 같은데 다음 순간 나는 몇십 미터 떨어진 슈페리어의 앞으로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어지러움도, 몸에 이상이 생긴 느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문을 통과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픈 게이트는 두 개의 장소에 문을 만들어 연결하는 것.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포인트는 이번에도 장소야.”

슈페리어가 손을 휘저어 오픈 게이트를 없앴다. 그의 손길을 따라가는 것처럼 불어온 바람이 들판을 휘젓고 밤하늘을 향해 훅 날아갔다.

“두 개의 장소를 정확하게 떠올린다. 누가 시작이고 누가 끝인지를 정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정해진 시간 동안 그 두 개의 문은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 알 수 없이 이어진 것과 같으니까 말이야.”

슈페리어가 자신의 양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서로 맞닿는 움직임을 취했다. 네 개의 손가락이 만든 네모난 모양은 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이 이어진 도형처럼 보였다. 그가 손을 들어 그 구멍 사이로 나를 장난스럽게 바라보며 윙크를 했다.

“장소를 모두 정확하게 떠올리지 못하면 문이 만들어져도 이상한 곳으로 튕겨 나가거나 아공간에 빠져 죽을 수 있어. 누군가를 방심한 상태에서 죽이고 싶다면 이만한 마법이 없지.”

“…….”

“그 어느 마법보다도 정확한 이미징이 필요한 것이 바로 이동 마법이야. 섬세한 조절과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은 강력한 제어력이 필요하니 그대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자, 이제 좀 감이 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슈페리어가 이렇게까지 자세히 설명해 줄 줄은 몰랐기에 내심 놀란 상태였다.

“고마워.”

“한 번만 성공하면 그 다음은 쉬워. 자, 해 보라고.”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느껴지는 주변의 감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서늘한 밤공기. 발목을 간지럽히는 풀숲. 간혹 멀리서 바람에 스치는 나무들이 내는 솨 하는 소리.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슈페리어의 가느다란 호흡과 체온.

“처음에는 제대로 서클을 그리면서 하는 게 좋아. 서클이 완성되면 마법 자체에 깃든 힘이 좀 더 안정적으로 지탱되니까.”

슈페리어가 집중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른손을 위로 올려 느릿하게 원을 그렸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에는 내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완성된 원과 마법진 사이로 초록빛 수식 세계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이동하고자 하는 곳은…… 슈페리어의 뒤쪽에 있는 바위 위. 나는 그곳에 앉아 자주 명상을 했기에 거기에 닿는 감각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좋아.’

“대지를 벗어난 발걸음에 날개를 달라. 찰나의 도약이여, 나의 명에 따라 그 손길을 접고 몸을 숙이라.”

여태까지 다른 마법들을 쓸 때처럼 공기가 휘몰아치는 소리는 없었지만 손끝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마력이 빨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몸에 힘을 주어 그 압력을 감당하면서 마법의 이름을 완전히 끝맺었다.

“텔레포테이션!”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바위 위를 떠올렸다. 단단하지만 약간 울퉁불퉁하게 딛고 설 수 있는 땅, 그늘진 곳이라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서늘한 공기, 흔들리는 나무에서 풍기는 풀냄새, 그리고.

그리고……!

- 슈와아아악!

몇 번이나 그 풍경을 필사적으로 떠올렸을까. 갑자기 엄청나게 강한 압력이 손끝에서부터 내 전신을 집어삼키며 앞쪽으로 확 빨아들였다.

“아……!”

넘어질 것 같은 감각에 놀라 비틀대며 눈을 뜬 순간, 나는 눈앞의 풍경이 방금 전과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내가 원했던 대로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축하해. 바로 그 감각이야. 이제 좀 알겠어?”

슈페리어가 멀리서 나를 보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나는 그제야 내가 성공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력 소모가 엄청나기는 했지만 7서클 공격 마법을 전방위로 뿌려댔을 때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이 마법이 8서클인 이유는 조금이라도 이미징이 흐트러지면 곧바로 사용자가 위험해지는 고위 마법이기 때문일까.

‘뭐… 공격 마법과 다른 마법을 1대1로 비교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확실히 내가 그동안 여러모로 마력이 많이 늘고 발전을 이루어내기는 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도 조금 찾아들었다. 더 이상 마법 한 번 썼다고 마력 부족으로 휘청거릴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그건 그렇고, 뭔가에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 드는 게 원래 보통인가?’

손끝에서부터 머리, 배꼽까지 뭔가가 잡고 끌어당기는 것 같다가 마지막에 등이 밀리는 것 같아 넘어지겠다 싶었는데 그게 제대로 된 마법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가 그것에 대해 묻자 슈페리어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마음에 망설임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몸이 본능적으로 다른 힘을 빌려 이동하는 걸 거부하고 있어서 그렇게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가져.”

“음…….”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펴 보자 슈페리어가 가까이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몇 번 더 시험해 보고 다음 단계인 오픈 게이트로 넘어갈까?”

거대한 독수리를 닮은 몬스터가 자그레브 상공을 날았다. 워낙 높은 곳에서 날고 있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그 몬스터의 발에 사람 한 명이 안정적으로 매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모두 깜짝 놀랐으리라.

거기에 매달려 있는 남자, 운오는 아래를 내려다보다 적절히 뛰어내릴 만한 순간이 왔다 싶었을 때 몬스터의 발목을 놓고 아래를 향해 망설임 없이 뛰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고도 남을 만한 높이에서의 활강이었지만 그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민첩하게 자그레브 안쪽의 거대한 나무 위로 떨어져 자세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고 정확한 이동이었다.

나무 위에서 내려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이버스 길드의 길드하우스 후문으로 들어선 운오는 마침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금발의 성기사를 발견하고 찌푸린 얼굴로 어깨를 툭 때렸다.

“저 왔습니다.”

“우와악 깜짝이야! 아, 뭐야. 고딩이 너냐…….”

기겁을 하고 놀란 크란이 뒤를 돌아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마법사 로브 차림의 여자에게 “나머지는 이따가 얘기하죠.” 하고 말하고는 그녀가 나간 뒤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 뭔가 좀 찾았으니 온 거지?”

“귀찮은 일은 다 떠맡겨 놓고 많은 걸 바라시네요.”

운오는 그동안 세이버스 길드의 발라 모냐크 지부를 책임지며 그곳에 살고 있는 엘프 쪽 NPC들과의 교류를 했다. 하지만 눈앞의 망할 남자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운오에게 일거리를 한 가지 더 늘려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궁수 겸 헌터라는 직업을 살려 적들의 동태를 살피면서 특정한 상대의 동향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정말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오늘 결국 운오는 찾던 놈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고, 그러자마자 곧바로 그곳을 떠나 자그레브로 온 참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 고생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크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피로한 기색이 가득한 제 얼굴을 가리켜 보였다. 그가 실제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운오는 독설 대신 무시를 해 주었다.

“아무튼 시저를 찾긴 찾았습니다.”

“역시 제대로 찾아온 것 맞잖아. 그래, 그래서 어디에 있어?”

크란이 크게 웃으며 운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운오는 그의 손을 냉정하게 쳐내며 코끝을 찡그렸다.

“손대지 마세요. 시저는 현재 자그레브와 토렐리트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도시 메포니아에 있습니다. 다른 페일 나이츠 길드원으로 보이는 놈들은 별로 없지만… 조금 특이사항이 하나 있더군요.”

“메포니아…… 들어본 것도 같고. 흐음. 특이사항은 뭔데?”

크란이 허리를 숙이고 탁자 위에 펼쳐 둔 미스트 대륙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며 운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곳은 위저드 타워의 총 본산입니다. 본산이라기엔 작지만 아무튼 중앙 위원회가 있는 도시더군요. 중앙 위원회는 오로지 NPC들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일반 유저들은 그 존재조차 거의 모르는 곳이지만, 그곳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던 저희 쪽 NPC들에게서 정보와 도움을 좀 얻었습니다.”

크란은 심각한 얼굴로 운오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는 건 거기에 마신에게 붙은 NPC 마법사들이 거의 다 있을지도 모른단 거잖아? 시저 놈이 거길 가서 뭘 하려고 그러지?”

“모르죠. 아무튼 오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리고 도시 분위기가 아주 안 좋은 걸 봐서는 오늘 전화로 말하셨던 대로 거기에 가담한 마법사들은 이미 전부 흑마법사가 되었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크란은 오늘 게임에 접속하기 전 운오에게 개인적으로 전화하여 알렸던 정보를 확인한 것이 기쁜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잠시 침묵을 지켰다. 평소에는 주변에 자주 몰이를 당하는 만만한 인상의 그였으나, 본질까지 그렇지는 않다는 것쯤은 운오도 이미 알고 있었다. 크란이 저런 얼굴을 할 때는 주로 현재 정세를 다각도로 생각해본 뒤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였다.

“아마 거기에 타락한 마법사가 있을 테니 접촉을 했겠지. 최종보스 두 놈의 접촉이라…… 생각만 해도 별로 기분이 좋진 않네.”

“…….”

“아무래도 오늘 저녁, 아니면 내일쯤 뭔가 일이 생기겠어. 어느 쪽으로 먼저 쳐들어올지 모르니 곧바로 발라 모냐크로 돌아가서 대비해 줘. 아, 그리고…….”

깔끔하게 지시를 내린 크란이 갑자기 반짝반짝 빛을 뿌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엘프분들은 뭐라고 하셔? 우리 도움을 받아서 옮기겠다고 확답한 거 맞지?”

운오는 약간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크란의 예상이 맞긴 하지만 그것을 순순히 알려주자니 약간 아니꼬웠던 것이다. 그에게는 같은 성별로 하여금 그렇게 이유 없이 재수 없게 느끼게 만드는 면모가 있었다. 루크레이신과도 비슷한 재주였다.

“……네. 준비는 거의 다 끝났습니다. 아마 언제 놈들이 발라 모냐크로 오더라도 저희 쪽에서는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았어. 수고했다, 고딩아!”

운오는 그동안 그에게 하려다 잊었던 말을 지금에야말로 해 줄 때임을 느꼈다.

“저기, 그동안 말하려다 말았습니다만 전 이제 졸업해서 더 이상 고딩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호칭은 이제 그만 접어두세요.”

“어? 너 졸업했어? 언제?!”

“그건 지금 알아서 뭘 어쩌시려고요?”

“아니. 미리 알았으면 꽃다발이라도 보내 줬을 것 아냐.”

“혼자 졸업 잘 했으니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호칭만 바꿔주세요.”

운오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도 크란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런 면에서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신경줄이 두꺼운 남자였다.

“흐음… 고딩이가 아니면 뭐라고 부른다? 대딩이? 학식이? 아, 혹시 바로 취직했으면 사식이라고 해야 하나?”

“다 필요 없으니 있는 이름이나 똑바로 불러주세요.”

운오는 날카롭게 대답한 뒤 한숨을 내쉬며 도로 제가 들어온 창 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먼저 갑니다. 바로 연락해야 하는 상황이면 메시지를 보내두세요.”

“하하하. 알겠어. 잘 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간 운오는 금세 기척을 감추고 사라졌다. 크란은 그의 빈자리를 지켜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대충 대비는 해 뒀다지만 그래도 역시 불안하네. 주변 의견도 좀 들어봐야겠지.”

방 밖으로 빠져나간 크란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길드원들을 받아주며 천천히 나아갔다. 길드하우스 바깥으로 나가 뒤쪽에 이어져 있는 너른 연병장으로 향하자 수많은 이들이 와글대며 모여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길드하우스 자체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바로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크란은 이곳을 세이버스의 길드하우스로 선택했다. 사람들을 모아 적절한 스스로의 위치를 주지시킬 만한 훈련을 하기에 알맞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중앙에 현재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갑옷에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망토를 두르고, 거대한 검까지 찬 남자는 마치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흑기사 그 자체였다.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 탓에 시선을 모으는 그를 잠시 아니꼽게 바라본 크란은 거침없이 나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야, 깜장검사. 잠깐 나 좀 보자.”

“…….”

세이버스 길드 내에서 길마 크란과 검사단장 유완의 사이가 별로라는 것은 이제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 된 지 오래였다. 둘 다 다른 방향의 잘생김을 지녔기에 붙어 있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는 이들도 많았지만, 크란은 그런 관심만은 몹시 사양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므로 유완을 인적이 없는 건물 옆 빈 공터로 불러냈다.

“아까 고딩이가 왔다 갔는데, 시저가 이 근처의 도시에 있대. 그런데 그곳이 NPC 마법사들의 총 본산이 있는 곳이라나 봐. 대충 그놈들이 이제 뭘 할지 짐작은 되지?”

“…….”

기껏 열심히 설명을 해 주어도 유완의 반응은 언제나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내리거나, 고개를 살짝 흔들거나 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카프의 앞에서는 잘만 말하더니, 남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안 하려 드는 놈의 싸가지 없음을 매우 저주하며 크란은 열심히 속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최종보스 두 놈이 접촉했으니 아마 오늘이나 내일 안에 소식이 올 거라는 게 내 생각이야. 너라면 어디부터 치겠어?”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PK를 불사하겠다는 눈빛으로 물은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유완은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부 다.”

“흠?”

“굳이 한 곳에 집중할 이유가 없으니까.”

유완의 말은 선문답처럼 짧았으나, 크란은 그가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번개 같은 예상도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흐음……. 그렇네. 역시 네가 보기에도 그놈들의 목적은 파괴 말곤 없는 모양이지?”

여태 페일 나이츠와 NPC 군단들은 작은 마을부터 천천히 없애기 시작해 점점 더 큰 도시로 나아가 공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큰 도시를 치지 않는 그 태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표했으나, 크란은 그들의 모습에서 몰이사냥을 떠올렸다. 이대로 간다면 각 대도시에 대륙 대부분의 인구가 몰려들게 된다. 그때 독 안에 든 쥐들을 일망타진하듯이 동시에 성째로 파괴할 수 있다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목표 달성이 될 터였다.

상대편에 전설의 마법사가 있고, 그를 따르는 다른 마법사들이 많이 있다는 점 또한 크란의 그러한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마법사는 일대 다수에 절대적으로 강한 직업이다. 그런 그들이 모인다면 사람들을 몰아넣은 네 개의 도시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지독하게 잔혹하고 오만한 방식이지. 사람들을 완전히 쥐 떼 취급하는…….’

누구 머리에서 나온 사이코 같은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증오가 절절히 느껴지는 방식이라고 크란은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각 대도시에 많이 모일수록 이쪽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최적의 조건을 갖출 수 있어.’

결국 사람들이 쫓기고 쫓겨 대도시로 피난을 오고 있는 현 상황은 페일 나이츠 쪽에도, 세이버스 쪽에도 장단이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크란은 언젠가 올 대난투를 대비하여 각 도시마다 세이버스의 지부를 만들고 따로 길드원들을 모집했다. 연합 전투보다는 각 도시별로 그간 만들어진 특성을 살려 그곳을 주 거점으로 삼던 이들끼리 뭉쳐서 지키게 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현재까지는 비교적 잘 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존재했다.

“그런데 대체 그놈들이 그렇게 죄다 부숴서 얻는 게 뭘까. 다 죽이고 다 부숴 봤자 남는 건 빈 땅뿐이잖아. 마신이 그런 걸 원하나?”

지금껏 페일 나이츠와 NPC 군단들이 벌인 전투는 전부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전쟁에서 이겨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이 세상을 그들의 뜻대로 지배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지배를 할 만한 토대는 남겨 두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걸리는 곳에 있는 모든 건물과 사람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은 풀 한 포기조차 없도록 만들었다.

아군의 목숨조차 고려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분명한, 완전히 파괴만을 위해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유저들은 게임을 한번 뒤집어엎어 보자는 생각이 재미있어서 그 짓에 동참할 수 있다 쳐. 근데 NPC들은 대체 왜 이 상황에서도 그놈들을 따르는 거냔 말이야. 난 정말 그게 궁금해. 답을 알 수 있다면 우리에게 좀 더 유리하게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글쎄. …의외로 답은 간단할지도 모르지.”

유완의 예상치 못한 답에 크란은 조금 놀랐다.

“왜? 뭐야. 너, 뭔가 알고 있어?”

“상대는 흑마법사다.”

그것도 세계 최고의 천재 마법사였다가 타락해 버린.

유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말을 덧붙였다.

“세뇌보다 강력한 지배 마법은 일도 아니야.”

“어……. 전에 카프가 마물들 움직일 때 썼던 그런 것처럼 말이야? 사람도 그렇게 지배한다고? 한둘도 아닌데 그게 가능해? 그 카프도 마물 두 마리 지배하면서 엄청 힘들어 보였는데……. 무슨 아이템까지 써서 도움을 받았었잖아.”

“그건 그자가 두고 간 것이었지.”

퀘스트를 수행한 보상으로. 그 말을 들은 순간, 크란의 머릿속에서 유완이 하고자 했을 말이 번뜩 이해되었다.

“그래, 알겠다. 그쪽에 그런 아이템이 남아도는 것 같다 이거지? 그쪽엔 NPC 흑마법사들도 많을 테니까 나눠서 한다면 뭐… 가능은 하겠네. 아무튼 그렇다는 건 현재 그쪽 편에서 움직이는 NPC들의 대다수가 지배 마법에 걸려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건데, 그걸 풀 순 없을까?”

유완도 그것까지는 알 수 없는 듯 아무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크란도 그가 그런 답까지 주기를 바라지는 않았기에 괜찮았다. 그래도 제법 얻은 수확이 많아 속이 시원해진 참이었다.

“뭐, 좋아. 상대가 바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다면 우리도 단순하게 나가면 되니까.”

“…….”

“우리가 할 일은 카프가 올 때까지 잘 버티는 것뿐…….”

“길마님!! 여기 계셨군요!”

대화를 마무리하려던 크란의 뒤에서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란을 도와 길드의 일을 자주 도와주던 유저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왔어요, 왔어!”

“뭐가요?”

“자그레브 성 저 멀리서부터 새카맣게 마물들하고 사람들이 돌진해 오고 있다니까요!”

크란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유완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남자는 서로 말없이 시선을 마주친 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뛰어나갔다.

“마법사 여러분! 각자 연습했던 대로 위치를 잘 잡으세요! 다른 원거리 공격수 분들과 겹치면 안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연습했던 대로만 해요!”

자그레브 성문 근처는 난리도 아니었다. 서둘러 도시 안쪽으로 도망쳐 들어가려는 비전투 유저 및 평범한 NPC들 사이로 미리 훈련받은 세이버스 길드원들이 마구 뛰어나오느라 여기저기 아우성이 넘쳤다. 크란은 그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폼으로 씩씩하게 마법사들을 지휘 중인 아르카나를 보고 재빨리 그들이 대기 중인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전부 배치한 겁니까? 상황은 어떻습니까.”

“지금 아무 스킬도 안 쓰고 그냥 뛰어올라오신 건가요?”

단 세 번의 도약만으로 벽을 밟고 까마득한 성벽 위로 올라온 크란을 보며 아르카나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우고 도로 냉정한 표정이 되어 성벽 너머의 먼 곳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운 좋게 마침 마법사들이 배치 연습 중이었어서 발견이 빨랐어요. 저어기, 보이시죠? 새카만 부분.”

그녀가 가리킨 곳은 자그레브 성에서 적어도 몇십 킬로미터쯤은 떨어져 보이는 아주 먼 곳이었다. 그러나 크란은 뛰어난 시력 보조스킬을 가진 성기사 유저였기에 곧바로 정신을 조금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그곳의 풍경을 망원경처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정말이군. 하늘 전체에 마물, 그리고 밑은 NPC 마법사들과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인가?’

사람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았으나 마물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다행한 점은 그 사이에 시저나 또 하나의 슈페리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과연 정말 그것을 마냥 다행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이곳에 없다면 그들은 다른 도시로 향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디일까. 운오가 있는 발라 모냐크? 키온과 팔튼이 담당하는 토렐리트? 루크레이신이 맡은 톨랑인가? 크란은 잠시 그것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이를 꽉 악물고 몸을 돌렸다.

“무조건 성에서 가장 먼 곳에서 최대한 많이 처리해야 합니다! 미리 연습했던 대로 시작합시다! 마법사분들을 부탁합니다, 아르카나 님!”

“맡겨두세요!”

크란은 밑으로 뛰어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벌 떨고 있는 치안 경비대 NPC들 대신 성문을 걸어 잠근 세이버스 길드원들이 그동안 연습했던 대로 각자 모이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깜장검사!”

크란은 그 사이에서 검사단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유완에게 다가갔다. 검을 빼들고 있던 유완이 흘긋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쳤다.

“미리 말했던 대로 지금이 네 차례야. 알고 있겠지.”

“…….”

본래 이런 상황이 오면 원거리 공격을 담당하는 마법사들과 궁수들을 비롯한 이들이 성벽 위에서 먼저 폭격을 가하고, 그 틈을 타 근거리 공격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소수가 나가 적들을 상대해 최대한 수를 줄이기로 되어 있었다. 퍼붓는 화살과 마법을 피해 정확히 적들만 사살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을 지닌 자는 많은 길드원들을 통틀어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역시 유완을 따라갈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나도 나가야겠지만…….’

길드마스터는 가장 뒤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황을 맞추어 지시를 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크란은 아쉬움에 입술을 깨물며 유완에게 눈짓을 했다.

“가.”

유완은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예상대로 근거리 공격조와 검사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남자들에게도 공평하게 매력을 발휘하는 뛰어난 외모 덕분도 있었지만, 그의 압도적인 실력 또한 팬들을 다수 만든 원인이었다.

유완이 검을 든 손을 위로 슥 올리자 일사불란하게 서 있던 검사단과 근거리 공격조 사이에서 몇 명이 뛰어나와 그의 뒤에 섰다. 그 과묵하고 멋진 유완 단장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기색이 가득한 눈빛들이었다.

“몸은 알아서 지키십시오. 이상.”

“넵!”

“아아, 부럽다! 나도 진작 레벨 좀 많이 올려둘걸!”

유완과 함께하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속닥임과 함께 성문이 조금 열렸다. 유완은 제 뒤를 따르는 이들과 함께 성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성벽 위에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이제 몰아치는 바람의 힘은 모든 것을 삼켜버릴 폭풍의 상처! 나의 제물이 되어라! 더스트 윈드!!”

“피보다 붉게 타오르라, 지금! 시간보다 빠르게 꿰뚫을 수 있도록! 파이어 볼트!”

“타오르는 위대한 자연의 힘, 지금 이 순간 상처의 각인을 남기라! 파이어 볼!”

제일 크게 5서클의 더스트 윈드를 시전한 아르카나의 뒤를 이어 매직토피아 길드원들이 일제히 불꽃 마법을 썼다. 다른 마법사들 또한 각자 쓸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 파이어 볼을 쓰자 모든 불꽃들이 일제히 합쳐져 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 쿠화아아아악!

“우와!”

바람과 합쳐진 불꽃이 잠시 후 거대한 토네이도가 되는 것을 보면서 압도된 이들이 입을 떡 벌렸으나 크란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한 마법들을 수도 없이 써대는 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좋아! 바람 방향이 좋다! 이 기회를 타서 전부 쏘아!”

적들을 향해 날아가는 불꽃 폭풍 사이로 궁수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은 이가 손을 높이 올렸다. 마력을 실은 각양각색의 화살과 무기들이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불꽃폭풍 사이를 뚫고 비처럼 쏘아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적은 물론이요, 밖에 나가 있는 아군의 목숨도 장담하기 힘들어 보이는 공격이었으나 크란은 유완의 목숨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놈이 여기서 죽는다면 객관적인 전력 손실에 마음 아파할지언정 사적인 마음으로는 기뻐할 수 있을 정도의 앙금은 아직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걸맞게도 유완이 이끄는 고레벨 검사들은 멀쩡히 살아남아 적진에 도착했고, 불꽃과 화살들을 피해 적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좋아. 수가 많은 마물들한테 휘둘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군. 조종하는 마법사들을 먼저 처리하는 게 중요하지.’

크란은 성벽 위에 올라선 채 멀리서 귀신같이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과 마법사들만 골라 썰고 있는 검은 그림자를 뒤쫓아 살펴보았다. 알아서 잘해 주고 있으니 안심할 수 있을 듯했다.

“길마님! 자그레브 안쪽에서 NPC들이 폭동을 일으켰답니다!”

그때, 성벽 아래로 달려온 다른 길드원이 다급히 크란을 불렀다. 그동안 준비하면서 위험해 보이는 NPC들이나 페일 나이츠 길드원으로 밝혀진 이들을 전부 격리하거나 쫓아냈음에도 역시 완벽하게 없애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뭐… 여기까진 예상한 바야.’

크란은 그의 앞에 착지한 뒤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어느 쪽이죠? 갑시다.”

“네!”

바깥은 유완이, 그리고 안은 제가 처리한다. 단순하지만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었다.

크란은 저를 안내하는 길드원들을 따라 빠르게 뛰어갔다.

***

세 시간의 접속이 끝나 먼저 캡슐 밖으로 나온 나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진제환을 보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하는 약간의 걱정을 느꼈다.

‘나는 수련만 했으니 혹시 나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 테고…….’

빈자리에 앉아 30분 정도를 더 기다렸지만 진제환의 캡슐이 아직 잠잠했으므로 나는 휴대폰을 켰다. 진제환이 나올 때까지 가볍게 미스트 커뮤니티들을 살펴볼 생각이었지만 예상외의 소식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메인 페이지를 본 순간 모든 생각이 싹 달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대도시들이 전부 공격당했다고? 지금?’

현재 진행 중이라는 말과 함께 무시무시한 속도로 올라오는 게시글과 캡처, 동영상들은 하나같이 마물과 페일 나이츠, NPC들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대도시의 현황을 담고 있었다. 나는 몹시 놀라 그중 몇 개의 글을 클릭해 재빨리 살펴보았다.

[ 죽을 뻔했어요! 그래도 다행히 세이버스 길드 분들이……. ]

[ 아 진짜 한동안은 접속하지 말까봐요! 세이버스 분들이 꼭 제 원수 갚아주시길요! ]

[ 현상황 : 자그레브 세이버스 길마 혼자서 날뛰는 NPC 수십 썰고 평정끝……. ]

다행히도 공격은 당했으나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피해가 아주 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진제환이 캡슐을 열고 드디어 밖으로 빠져나왔다.

“공격당했다면서.”

“……응.”

진제환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로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낀 듯 잠시 제 옆구리 쪽을 슥 매만지더니,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고 천천히 걸어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과연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 약간 불안했으나 윤석호가 이곳에 없으니 나로서는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겼어? 다치진 않았고?”

“이겼어. …일단은.”

“일단은, 이란 건 무슨 뜻이야.”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진제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은 그냥 찔러 보려고 온 것 같아서.”

“찔러 보려고?…….”

그렇다는 건… 진제환이 보기엔 오늘은 놈들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우리 쪽 전력이나 대응 방식을 살펴보려고 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긴, 시저나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나타났다는 말은 없었으니 일리가 있어 보이긴 하는군.’

진제환은 나에게 수련이 언제 끝나냐든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고마웠지만 오늘 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 나니 역시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뭐… 내일이면…….’

나는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첫 동시 공격 직후 물러간 적을 보며 각 도시를 지키던 세이버스 길드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공격이 온다 해도 아마 최소 내일, 혹은 며칠 뒤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때까지 전력을 다시 가다듬고 좀 더 단단히 대비를 하면 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예상이 우습게도, 다음 날이 되기 전날 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 충격. 발라 모냐크 괴멸사태! ]

[ 웬 노인 마법사가 나타나서 도시 전체를 폭발시켜 버렸어요! 영상있음! ]

[ 사막 너머에서도 폭발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던데… 불타는 걸 봤다는 분도 있구 혹시 거기에 뭐 있나요?? ]

나는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올라오고 있는 미스트 커뮤니티들의 새 글을 보며 입을 벌렸다.

‘…대체 이게…….’

올라온 글들에 의하면 이 놀라운 사건은 많은 유저들이 자고 있었던 새벽에 일어났다. 발라 모냐크의 도시 안에 홀연히 나타난 노인 마법사가 양손을 들어 무어라 외쳤고, 그러자마자 유성 같은 것이 우수수 떨어져 도시 전체가 대비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괴멸했다는 것이 올라온 글들을 모아 합쳐 본 결과 도출한 전말이었다.

부서진 도시를 만족스럽게 감상한 그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고, 이후 사막 건너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는 글들이 몇 개 있었다.

사막 너머. 나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유저 중 한 명이었기에 불안감이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이루미네…….’

발라 모냐크에 단신으로 나타나 엄청난 마법을 쓰고 사라질 만한 노인 마법사는 또 하나의 슈페리어밖에 없다. 그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과거의 친구이자, 일부러 그녀를 위해서 숲에 가두어 놓았다고까지 말했던 이루미네가 사는 곳까지 찾아가 불을 질렀을까? 정말로?

지금 당장 미스트에 접속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제 막 일어났을 뿐이었다. 어서 씻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허둥지둥 일어나는데, 딱 맞는 타이밍으로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 여보세요. 무헌아? ]

전화를 건 것은 당연하게도 민후였다.

[ 어젯밤에 발라 모냐크가 당했다는 소식 봤어? ]

“…응. 어떻게 된 거야?”

[ 하아. 완전히 허를 찔렸어. ]

민후가 허탈한 표정 반, 분한 표정 반으로 앞머리칼을 쓸어올렸다.

[ 그 자식들, 일단 조무래기들을 보내서 우리 대응을 살핀 뒤에 가장 만만한 곳부터 가서 본보기로 박살내 버린 거야. 하필 운오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런 짓을 해 버려서 제대로 막지도 못했어. ]

“…….”

발라 모냐크 담당이었던 운오도 이 소식을 일어나서야 접했겠지. 현재 그의 심경은 감히 추측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나였다면 아마 분노와 후회로 이성을 잃었을 테니까.

[ 아, 그리고 톨랑에는 시저가 나타났다가 그냥 휘젓기만 하고 사라졌다고 하더라. ]

“시저가?”

이루미네에 대한 걱정이 꽉 찬 와중에도 나는 그 소식이 머릿속을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 응. 사실 그 자식 어제도 여기저기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긴 했어. 아무 짓도 안 하고 금방 사라져 버려서 다들 긴가민가하느라 소식이 안 알려졌을 뿐이지만……. ]

민후가 찌푸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 자식, 아무래도 뭔가 찾고 있는 것 같다고. ]

시저가 뭔가를 찾고 있다. 민후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나에게는 달리 받아들여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왜?”

[ 그렇지 않으면 각 도시마다 한 번씩 들어와서 돌아만 보고 나가는 짓을 왜 반복하겠어? 이전에도 다른 작은 도시들을 계속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뭔가 할 일이 있는 줄 알았지. 설마 대도시에 와서도 그러고 있을 줄이야… 역시 뭔가 찾고 있는 게 분명해. ]

민후는 그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만 한다면 곧바로 제가 먼저 찾아내겠다고 말할 마음이 만만해 보였지만 나는 차마 거기에 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저가 찾는 것이 아무래도 나일 것 같다는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하겠는가.

민후는 그 이후에도 어제의 전투와 관련한 몇 가지 가벼운 소식을 전해준 뒤, 나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수련이 끝난 뒤에 돌아올 때에는 안전에 유의하라는 말을 남겼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제 존재를 힘차게 알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승조가 날 찾고 있다.’

승부를 내기 위해서.

그가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몹시 고무되는 일이었지만 과연 내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상이 가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되었다.

‘어차피 미리 걱정해 보았자 소용없겠지만…….’

승조가 시저이고 내가 카프로스인 이상 만나기 싫더라도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언제, 어디에서인가가 문제일 뿐이었다.

나는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새턴으로 향했다. 여태까지처럼 진제환과 함께 둘만 회의실에서 접속을 할 줄 알았는데, 오늘은 윤석호가 간만에 미리 와 있었다.

“진제환 씨보다 먼저 오셨군요, 강무헌 씨.”

그의 안색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한결 좋아 보였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어서 내려왔습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한시 빨리 접속하여 이루미네의 소식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는 했으나 윤석호가 언급한 ‘좋은 소식’이란 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에 앉자 윤석호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간 알아본 결과, 놀랍게도 지난 2주 사이에 갑작스레 모든 ReL 프로젝트 참가자 분들의 건강이 전부 이전 수준으로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강무헌 씨가 아니셨다면 이 사실을 조금 더 늦게 알게 되었겠지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깜짝 놀라 반문하자 윤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에 계신 분에게까지 연락을 모두 하여 확인했습니다. 일단 큰 시름은 덜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직까지 확인 작업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은 지금의 체제를 계속 유지할 겁니다.”

곧바로 내 캡슐을 돌려 달라고 말하려 했던 것을 미리 읽은 듯한 말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윤석호는 내 생각 따위는 바로 알 수 있다는 듯 낮게 웃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강무헌 씨에게 최대한 양보했으니 이 이상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뭐라고 하셔도 말이죠.”

“……네.”

선생님에게 혼이 나던 어린 시절과 비슷한 기분으로 대꾸하자 윤석호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이전에 했던 약속도 아마 곧 지킬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약속 말입니까?”

“이런. 벌써 잊으셨습니까? 강무헌 씨에게 피해를 입힌 범인들을 찾아내어 죗값을 치르게 해 주겠다고 말씀드렸던 것 말입니다. 그간 아주 잘 진행되고 있었거든요.”

그보다 중요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 어느새 잊고 있었는데, 그사이 윤석호는 바쁜 일을 처리하는 와중에 그것까지 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 윤석호를 보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잘 진행되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윤석호 같은 이가 저리 기뻐한다는 건 아마 상대측은 정확하게 그 반대란 뜻이겠지. 내겐 그것만으로 충분하게 여겨졌다.

“하하. 표정을 보니 전혀 관심이 없으셨나 보군요.”

윤석호는 눈치 빠르게도 내 심경을 알아채고는, 모든 결과가 잘 끝난 뒤에 다시 한번 알려주겠다고 말하며 눈을 살짝 찡긋했다.

“다음에는 오늘보다 더 좋은 소식을 드리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아무쪼록 조심해서 플레이하시길 바랍니다.”

더 좋은 소식……? 의미심장한 말에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윤석호는 성큼성큼 회의실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진제환이 보인 묘한 행동에 대해 물어봤어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진제환이 갑자기 옆구리 쪽을 쓰다듬었던 것이 영 신경이 쓰여서 혹시 싱크로율에 문제가 생겼던 것인지를 물어보려고 했었다. 나는 다음에 꼭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한 뒤 내 캡슐 쪽으로 다가갔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캡슐 중 왼쪽 것이 내 캡슐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진제환의 캡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진제환은 어제와 다름없이 건강해 보였다.

‘어제 그건 기분 탓이었나?’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아……. 발라 모냐크에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가서 완전히 날려 버린 것 같던데, 봤나 해서.”

네 몸이 걱정되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무작정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을 입에 담자 진제환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래도 서쪽 사막에 있는 엘프 마을도 부서진 것 같아 걱정이야.”

“…대신 가서 살펴볼까?”

진제환이 친절한 제안을 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프 마을의 수장인 이루미네는 내 스승이야. 가려면 직접 가야 해.”

이루미네라면 늦더라도 내가 직접 오기를 바랄 것이다. 그녀의 성격을 감안하면 분명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진제환은 내 말뜻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또 하나의 슈페리어를 만나면, 무모하게 버티지 말고 당장 도망쳐.”

나는 접속하기 전 진제환에게 조용히 경고를 했다.

“미친 사람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 거기다 실력까지 있으면 더 그렇지. 그러니까 조심해.”

“알겠어.”

진제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녀석이니 내 말을 어길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미약한 걱정을 숨긴 채 캡슐에 들어갔다. 곧 의식이 검게 가라앉으며 미스트의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

“…후우.”

정신세계가 아닌 곳에서 실제로 텔레포테이션을 써본 것은 처음이라 상당히 긴장되었지만 나는 무사히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엘프들이 살고 있는 곳, 서쪽 사막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기뻐했어야 마땅한 일. 그러나 나는 내가 텔레포테이션을 쓰기 위해 떠올렸던 곳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폐허를 보며 멍하니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

뜨거운 모래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 전부 불타버린 나무의 잔해를 때렸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전부 새카맣게 탄 흔적뿐이고 살아 있는 것의 흔적은 느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설마 했던 것이 사실이 되어 내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나는 긴장된 발걸음을 떼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무가 거의 다 타버린 탓에 위치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애써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엘프 마을이 있었던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 또한 본래의 동화 속 마을 같은 아름다움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반쯤 부서진 집들과 타다 만 잔해들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주인을 잃은 잔해를 보며 조금씩 떨리는 손을 웅크려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전에 몇 번 방문한 것뿐이지만 이곳의 엘프들이 얼마나 나무를 사랑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남아 있었다면 이 숲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 없으니 이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설마…….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그럴 리 없다. 아닐 것이다.

‘이루미네에게 설마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 걸음이 나중에는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의 달리기가 되었다. 나는 멀리 보이는 이루미네의 동굴을 보며 제발 내가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기를 매우 바랐다.

다른 엘프들은 어떤지 몰라도 이루미네는 이곳을 나갈 수 없다. 슈페리어의 기억 속에서 그는 이루미네를 일부러 이곳에서 나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이루미네는 분명 숲이 불타거나 부서졌다 해도 쉽게 나갈 수 없었을 텐데…….

‘……젠장.’

나는 겨우 도착한 이루미네의 동굴 앞에서 숨을 골랐다. 안은 일단 부서지거나 상한 것 같지는 않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거대한 동공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언제나 이루미네가 앉아 있었던 자리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

맙소사. 설마 정말로 이루미네가 해를 입은 것일까.

‘아니면 설마 이곳의 엘프들과 함께 슈페리어에게 끌려갔다거나…….’

온갖 불길한 상상 속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말을 제대로 한 적은 없지만 나는 이루미네에게 내심 많은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NPC가 아니었고, 내게 수많은 도움과 적절한 조언을 주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그간 미스트를 하며 얻은 변화의 반절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제자라 부르며 희미하게 미소 짓던 그 얼굴이 아직도 이렇게 선명한데, 그런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응? 거기, 구면인 인간이 아닙니까?”

충격에 빠져 멍하니 서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껑충하니 큰 키에 긴 귀를 드러낸 실루엣이 보였다.

“…아…….”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오시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가까이 다가오자 비로소 얼굴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그는 엘프 마을의 수호하는 화살, 킬 라질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과 팔에 나 있는 엄청나게 큰 상처를 보며 간담이 조금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이루…미네는……?”

“…엘 카라나 님 말입니까?”

그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순간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렇군요. 그분이 걱정되어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다행히 무사하시긴 합니다. 당신이 오셨다는 것을 안다면 기뻐하시겠군요.”

이럴 수가. 나는 엄청난 안도로 인해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다른 엘프분들도 무사하십니까?”

“대체로는 무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뒤 킬 라질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손짓을 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두고 온 물건들을 가져가기 위해 잠시 들른 것입니다. 곧 돌아가야 하니 따라오시죠.”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는 몸을 돌려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그를 따르기 위해 블링크까지 써야만 했다. 그는 동굴 밖으로 나가 내가 여태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던 길로 향했다. 묵묵히 그 길을 걷다 보니, 문득 몸이 어떤 막을 통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주변의 풍경이 갑자기 훅 바뀌었다.

‘…이 느낌, 이루미네의 동굴의 다른 쪽 갈림길로 갔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데.’

그렇다는 건 이건… 이루미네가 만들어 둔 장치인가? 일단 주변 풍경은 이전까지의 매캐한 냄새가 나는 다 타버린 숲이 아니라, 푸르게 반짝이는 울창한 숲으로 바뀌어 있었다. 킬 라질은 이전보다 훨씬 생기가 느껴지는 얼굴로 나아가 마침내 드러난 새로운 마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전의 엘프 마을과 거의 흡사하게 생긴 그곳에는 엘프들이 경계를 풀고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저기서 상처를 입은 이들이 보이긴 했으나 그래도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을 보면 목숨이 위험한 정도는 아닌 듯해 안심이 되었다.

나는 나를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엘프들을 지나 그 마을 한가운데 있는 작은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흐음? 이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손님이구나.”

문을 열자 작은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옷차림이 이전과 달리 활동적인 차림으로 바뀌었고, 길었던 금발도 싹둑 잘린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이루미네였다.

“이루미네…….”

“왜 그런 얼굴로 보느냐. 내가 죽은 줄 알았어?”

농담이라기에는 대단히 뼈가 느껴지는 말을 하며 웃은 이루미네가 제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다행히도 나는 죽지 않았단다. 그만 감동하고 앉아.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프단 말이지.”

“그러면 손님을 데려다드렸으니 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킬 라질이 나간 뒤 나는 이루미네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루미네는 무릎 위에 어떤 글자로 쓰여 있는지 모를 책을 놓은 채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는 항상 심드렁한 무표정만을 짓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당황스러울 만큼 싱그럽고 생기가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제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발라 모냐크를 부수고 엘프의 숲까지 불태웠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뭐, 네 말이 맞을 거란다. 도시가 먼저 부서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숲은 어제 갑자기 그 운명을 다해 버렸지.”

이루미네는 그렇게 말을 시작해 빠르게 어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자는 정말 당당히도 들어오더구나. 나를 보면서도 한 치의 감정조차 내보이지 않았어. 인간적인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끔찍한 존재였지.”

그녀의 말에 의하면 갑작스레 마을 한복판에 나타난 또 하나의 슈페리어는 문답무용으로 마법을 사용해 마을을 불태웠다. 많은 엘프들이 그를 쫓아내려다 부상을 입었고, 이루미네는 자신 외에 다른 엘프들을 도망치게 했으나 본인은 죽음을 각오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또 하나의 슈페리어는 그녀를 죽이지 않고 마을만을 불태운 뒤 보관 중이었던 여러 아이템을 들고 사라졌다는 것이 설명의 끝이었다.

“그 숲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게 말이야. 내 힘으로 지탱하고 있었던 숲이 전부 없어지고 나니 놀랍게도 내가 그곳을 벗어나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 뭐니? 중요한 보물들을 송두리째 빼앗긴 건 안타깝지만, 자유를 얻었으니 마냥 슬픈 일만은 아니야. 어차피 물질로 대체할 수 없는 진짜 중요한 것들은 우리의 안에 있기도 하고.”

이루미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제야 그 숲이 이루미네를 가두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아 하는 탄성을 낮게 내질렀다.

숲이 불탄 것은 분명 엘프들에게는 끔찍한 일이었겠지만, 덕분에 이루미네는 그녀를 500년간 묶고 있었던 주박에서 벗어났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정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래. 정말로 걱정했나 보구나. 설마 이렇게 빨리 달려올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

이루미네가 쿡쿡 웃었다.

“지금 네가 들어온 이 숲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마련해 두었던 곳이야. 정확한 위치는… 발라 모냐크의 동북쪽 부근이지.”

“예?”

아주 잠깐 걸었던 것 같은데 설마 내가 그렇게 먼 거리를 이동해 왔단 말인가. 당혹하여 반문하자 이루미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가 500년 전 나를 가두었지만, 나 이외에 다른 동족들은 움직일 수 있었기에 이곳을 미리 준비할 수 있었던 거야. 나라고 언제까지나 그곳에 얌전히 갇혀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

“……그랬군요.”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좀 어렵기는 했지. 최근에 염룡과 네 친구들의 도움이 더해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적절한 시기를 맞출 순 없었을 거야.”

염룡 코르는 그렇다 치고… 내 친구들의 도움이라니?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깜박이자 이루미네가 설마 몰랐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너는 몰랐었니? 인간들의 도움을 받는 일로 우리 쪽에서 제법 시간을 많이 끌어 그쪽에서 답답해했을 텐데.”

“음, 제가 최근에는 계속 수련만 하느라…….”

“그랬구나. 그러면 감사 인사는 대신 전해 주렴.”

나는 그러겠다고 답하며 새삼스레 이 모든 일을 통솔하고 있었을 크란과, 발라 모냐크와 엘프들을 담당한 운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제대로 합류하지 못하고 수련만 하는 사이에도 다들 정말 잘해 주고 있었다.

“그동안 내게 가해졌던 부담감이 줄어들어서 이젠 마음대로 어디든 갈 수 있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이루미네가 다정한 얼굴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그를 심판하러 갈 수도 있다는 뜻이야.”

“아…….”

“그렇게 하지 않은 건 그 일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하는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실린 무게가 너무 무거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루미네는 다정하고도 강인한 눈빛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대신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망설임 없이 밖을 향해 나서기로 결정했단다. 저 철의 종족들이 이미 그러하듯이.”

“운오 님, 여기도 완전히 난리네요.”

운오는 접속하자마자 엉망으로 짓밟힌 세이버스 길드 발라 모냐크 분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를 책임지는 일은 딱 질색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적임자가 없다는 말에 붙잡혀 시작한 분점 담당자.

나름대로 열심히 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오늘 아침의 허탈함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높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접속도 때려치우고 싶어 몇 번이나 고민하다 돌아온 것이었다.

“이상하게 그 노인 마법사에게 피해를 입은 부분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복구가 안 된다는군요. 그놈들 똘마니한테 당해도 그렇다고는 하던데… 실제로 보니까 정말 충격이네요.”

운오의 옆에서 일을 거들던 길드원 한 명이 좌절한 얼굴로 무너진 벽 위에 주저앉았다.

“대체 뭐 하는 새낀지… 제가 있었을 때 왔어야 했는데. 이 망할 새끼…….”

그의 심경이 곧 운오의 심경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운오는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침묵했다. 사실 모두에게 비밀로 몰래 사서 가꾸어 왔던 운오의 집도 새벽 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언젠가 카프로스 형을 초대할 생각으로 들떠 있었던 것이 바보 같이 느껴질 정도로 허망한 소멸이었다.

‘…정말로 내가 있었을 때 왔어야 했는데.’

운오는 이를 뿌드득 갈며 손안에 쥔 검과 등에 멘 활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있었다면 이 도시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으리라. 다른 7영웅의 기억 퀘스트 유저들처럼 전투에 엄청나게 능한 것은 아니지만 운오에게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궁술이 있었다.

딱 등 뒤의 활과 화살 한 개만 있었더라도. 그랬으면 그놈이 이곳을 부수기 위한 마법을 쓰기 전에 머리를 꿰뚫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저 사막 너머 어딘가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는 말을 들었지만 도시 전체의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라 아직까지 확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살아 있는 NPC들을 수습해 피난시키고 유저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 주던 운오는, 문득 맑았던 하늘이 어느샌가 상당히 어두워져 있는 것을 깨닫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언제 이렇게 커진 거지?’

며칠 전 대륙 전체에 비가 온 이후로 미스트 대륙에서 먹구름과 천둥 번개, 그리고 비는 꽤 흔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 먹구름과 비가 향한 곳에는 반드시 몬스터나 NPC들의 공격이 향한다는 추측이 정설처럼 퍼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고작 작은 도시를 덮을 정도의 먹구름 이야기만 들어보았지, 설마 대도시 전체를 어둡게 뒤덮은 구름을 보게 될 줄이야. 운오가 막 불길한 기분을 느꼈을 때, 기다렸다는 듯 하늘 먼 곳에서부터 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였다.

- 콰쾅!!

“……우와아악!”

갑작스러운 천둥 번개에 놀라 누군가 비명을 질렀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다시 고개를 내렸을 때 운오는 저 멀리 아무도 없었던 곳에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의 그림자를 보았다.

쇠구슬처럼 차가운 눈동자, 피에 젖은 검을 든 손. 그리고 특징적인 은발.

“…시, 시저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자 시저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가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모두가 순간적으로 소름을 느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나, 잠시 후 폐허가 된 발라 모냐크는 이전보다 더한 아비규환으로 변하고 말았다.

“사람 살려!!”

“아니 씨발, 왜 로그아웃이 안 돼? 전장으로 선포되었다고?? 무슨 소리야?!”

운오는 시저를 피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들의 말대로 현재 이곳은 ‘전장’으로 선포된 상태라 일정 시간 동안 로그아웃을 할 수 없다는 안내가 떠오른 참이었다. 저항해 보려던 유저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저에게 전부 죽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기가 질려 공포에 사로잡혔다.

발라 모냐크의 세이버스 길드는 거의 괴멸 상태라 이 상황에서도 모을 만한 인원이 없었다. 운오 혼자서 그를 상대해야만 했다.

‘하필 상성도 더럽게 안 좋은데, 빌어먹을.’

운오의 전공은 건물 위나 몸을 숨길 수 있는 먼 곳에서 상대를 저격하는 것이었지 이런 식으로 정면 승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무너진 건물투성이라 어딘가 지지대를 찾아 활을 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계속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기에 운오는 적당히 멀리 떨어졌다 싶었을 때 걸음을 멈추었다. 반파되기는 했어도 3층이 넘는 건물이 눈앞에 있었다. 가볍게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가자 아비규환이 된 도시 전체의 모습이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을 양 떼처럼 단신으로 몰이사냥 중인 시저의 모습도.

‘…저 자식. 정말 재미없다는 얼굴로 하고 있잖아?’

그의 얼굴을 이제야 제대로 본 운오는 기가 막혔다. 그는 성의 없이 칼을 휘두르는 와중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찾는 듯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제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썰어 버리는 것은 그에게 그저 부차적인 일에 불과한 듯했다.

‘오냐. 그 잘난 NPC들도, 길드원들도 안 끼고 단신으로 온 걸 꼭 후회하게 해 주마.’

운오는 등 뒤에서 활을 꺼내 손에 꽉 쥐었다. 시위를 단숨에 쭉 당겨 귀 아래까지 늘리자 손안에 빛나는 화살 모양의 빛이 소용돌이치며 생성되었다.

“죽어.”

가볍게 중얼거리며 시위를 놓자 맹렬히 날아간 빛의 화살이 무너진 건물들 사이를 이리저리 꺾으며 날아가 시저의 뒤통수에 내리꽂혔다.

“…….”

아니, 내리꽂힐 ‘뻔했다.’

화살은 시저의 손에 잡혀 그대로 소멸되었다. 운오는 그가 정확히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전에 몸을 낮추고 옆 건물로 뛰었다. 거기에서 다시 한 번 더 활을 쏘고, 빠르게 이동해 다른 건물에서 또다시 활을 쏘았다. 보통 사람의 몇 배는 빠르고 민첩한 운오는 이동하면서도 화살을 쏠 수 있었으나 시저는 괴물 같은 힘으로 그것들을 모조리 잡아내었다. 물론 그도 무사한 것은 아니라 팔을 감싼 건틀릿과 드러난 뺨에 상처가 생기기는 했으나, 애초에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부상이었다.

‘젠장!’

또다시 날린 화살이 이번에는 시저의 옆구리에 박혔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흘긋 내려다보고는 제 손으로 뽑았을 뿐, 그다지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귀찮군.’

그가 중얼거리는 것이 아주 먼 거리임에도 눈에 잘 보였다. 운오가 이를 갈았을 때, 시저가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에게서 빠져나온 검은 기운이 기묘한 덩어리가 되어 순식간에 운오를 향해 쇄도해 날아들었다.

“윽!”

운오는 그것을 피해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그것은 화살을 맞았음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몸집을 키워 운오를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건물 아래로 떨어지느냐, 기묘한 검은 덩어리에게 얻어맞느냐의 기로에서 운오가 슬슬 다른 방법을 써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번쩍 하는 빛과 함께 근처의 바닥에서 붉은 마법진이 생겨나더니, 그 위로 사람 하나 정도가 드나들 것 같은 공간이 검게 일그러져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마법인가?’

반사적으로 그곳에서 물러나려던 운오는, 잠시 후 그 구멍 안에서 쑥 튀어나온 발을 보고는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검은 로브로 감싼 신발. 어쩐지 어디선가 본 것처럼 익숙했다. 적어도 그는 여태까지 한 번 본 아이템은 잊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이내 기억할 수 있었다.

‘…카프 형?’

잠시 후 긴 로브 자락이 완전히 그 구멍 밖으로 빠져나왔다. 깊이 눌러쓴 후드 사이로 드러난 창백한 턱과 핏기가 적은 입술이 운오를 보고는 살짝 벌려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도 여기서 운오를 마주칠 줄은 몰라 당황한 모양이었다.

“형…….”

“위험해.”

운오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그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튀어나온 불꽃이 운오의 뒤통수를 막 물어뜯을 것처럼 달려오던 시저의 검은 기운에 정통으로 박혀 터져 버렸다.

- 콰쾅!!

검은 기운은 그 마법 한 방에 깔끔히 소멸되었다. 운오는 뒤를 돌아본 뒤 다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앞을 보았다.

“대체…….”

“아, 잠깐 좀 옆으로 물러나 줘. 곧 들어올 다른 사람들도 있어서.”

“…네? 다른 사람들이요?”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싶었으나 잠시 후 아직까지도 소용돌이치고 있던 검은 구멍 안에서 빠져나온 다른 이를 보자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이 또다시 찾아왔다.

“시라비 렌?”

“응? 마중이라도 나온 겁니까? 그런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모습이 엉망이군요, 운오.”

시라비 렌을 필두로 안면이 있는 엘프 궁수, 전사들이 차례차례 그 구멍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운오는 그동안 여러 가지 목적으로 엘프 마을에 드나들면서 많은 엘프를 만나고 제법 잘 알게 되었다고 자신했으나, 이건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엘프들은 지독히 폐쇄적인 종족이었다.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않는 지도자 이루미네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운오는 아직 완전히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들로 인해 자신들의 존재를 여간해서는 외부에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원칙을 깨고 여기에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운오가 당황스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마침내 건장한 엘프 청년들이 빠져나오는 것이 끝나고 가느다란 발이 그곳을 새로이 빠져나왔다. 활동하기 편하도록 입은 옷과 짧은 금발, 등에 찬 긴 활 때문에 운오는 순간 그 사람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인간들은 50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구나.”

맙소사. 엘프의 수장 이루미네까지 이곳에!

당혹으로 범벅이 된 운오의 시선을 마주한 카프로스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가는, 이내 몸을 돌려 시저 쪽을 바라보았다. 시저 놈 또한 이 예상치 못한 상황이 놀라웠는지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설명하자면 기니까 나중에 하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을 살짝 휘저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던 마법진과 검은 문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거두절미하고, 시저가 언제 나타난 거냐?”

“그러니까… 10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단신이라니, 어지간히 우습게 본 모양이군.”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뒤 카프로스는 허리춤에서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막대기를 꺼내 꽉 쥐었다. 그러자 반투명한 검날이 막대기에서부터 죽 자라나 훌륭한 장검이 되었다.

“아가, 저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어둠의 기운이 질식할 것 같은 정도인데. 혹시 저 녀석이 그 녀석이냐?”

“네. 우연이 겹친 모양입니다.”

“호오, 그렇군.”

여유로운 태도로 가만히 시저를 지켜보던 이루미네는 팔짱을 끼고 섰다.

“보아하니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어. 대충 쫓아내고 갈 길 가자꾸나.”

카프로스가 검을 든 채 천천히 걸어가자 주변의 분위기가 한층 고요해졌다. 그는 시저와 2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막 시저가 검을 든 손을 움찔 움직였던 순간, 갑자기 그의 뒤쪽에서 큰 고함이 들려왔다.

“중요한 순간에 무모한 짓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길마님?”

순식간에 훌쩍 뛰어 시저와 카프로스의 사이를 가로막고 선 것은 유들유들한 인상의 붉은 머리 남자였다. 그의 눈이 뒤쪽에 있는 엘프 무리를 보고 잠시 커지는 것을 운오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나 참. 적당히 치고 빠지기만 하자고 했지, 이런 특수상황에서까지 날뛰면 좋지 않습니다. 할 만큼 했으니 돌아가죠.”

“내가 왜.”

시저가 으르렁거리자 붉은 머리 남자가 하하 하고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라뇨. 그쪽에서 지금 재료가 필요하다고 부르니까 그렇죠. 갑시다. 자자 여러분, 우리 길마님이 잠깐 누굴 좀 찾느라 실례했습니다?”

그는 시저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품에서 꺼낸 어떤 돌 같은 아이템을 높이 들어 올리며 그의 팔을 쥐었다. 그러자 잠시 후 빛이 번쩍하더니 시저와 남자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허망한 퇴장이었으나 뒤늦은 안도감만은 크게 찾아왔다. 운오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후우…….”

“괜찮아? 피투성이인데.”

카프로스가 다가와 운오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운오는 그제야 전신이 먼지와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음을 알아차리고 더욱 지친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대체 여기 이분들을 어떻게 다 데려온 겁니까? 제가 저분들께 세이버스와의 동맹을 맺어 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올 수 있는 건 겨우 한두 사람뿐이리라 생각했었단 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말해 주세요.”

대답을 듣기 전에는 반드시 일어나지 않겠다는 기세로 불타는 운오의 눈을 보며 카프로스가 약간 난감한 듯이 피식 웃었다.

“음… 그게 말이야.”

그로부터 한 시간여 뒤, 전 세계의 미스트 커뮤니티는 지금껏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엘프 종족 NPC들의 목격담과 캡처 사진으로 인해 또다시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 중앙에 서 있던 카프로스 또한 덩달아 온갖 소문의 주인공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자, 여러분. 무려 이! 동! 마! 법!을 배워 온 우리 대마법사 카프로스 님께 큰 박수!”

나는 크란의 주도하에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는 사람들 사이에 선 채 민망함을 있는 대로 느끼고 있었다. 시저가 사라진 뒤 운오에게 엘프들을 연결시키고 단신으로 자그레브로 돌아오자마자 받은 환대가 이 모양이었다. 크란은 이동마법을 통해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가, 그것이 바로 내가 여태 수련했던 8서클이란 것을 깨닫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8서클이라니……. 전 정말 상상도 못 하겠어요. 대체 어떻게 쓰는 건가요? 나중에 꼭 마법사단에 들러서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으응.”

“우와아!”

그동안 나 대신 마법사들을 지휘하느라 애썼다는 아르카나가 눈을 빛내는 모습에 미안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자, 멀리서 마법사들이 환호를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직토피아 길드원들만 해도 충분히 많다 싶었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이 몇 배는 늘어나서 상당히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유완을 보면 그런 내 부담 정도는 사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마법사 유저들의 수보다 훨씬 많은 검사들이 유완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보면 부담스러워서 접속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유완은 전혀 그런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당당히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녀 사람들의 탄식을 샀다.

“널 보자마자 그 시저가 도망갔다며. 게다가 최초로 엘프들까지 모습을 드러내 줬잖아. 그것도 이루미네까지! 그것만으로도 이번 전투의 가치는 충분히 있었어.”

크란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밝게 말해 주었다. 좀 과장되었긴 해도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긴 하지만 엘프들이 온 건 크란과 운오의 덕이 더 크다 느껴졌기에 온전히 내 공이라 하기에는 멋쩍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말은 운오한테 해 줘.”

“그 녀석이 나한테 말했을 땐 엘프들이 동맹은 가능해도 전력은 한 명 정도나 겨우 올 수 있을까 말까라고 했었다고. 거기다 이사 예정이란 장소도 안 알려주려고 해서 얼마나 설득이 힘들었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수십 명이 올 수 있었던 건 네 마법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것 아냐?”

틀렸다. 크란 이 녀석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좋게만 봐줄 셈이다. 나는 더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루미네는 앞으로 우리와 함께 계속 싸울 거라고 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나눠.”

“정말? 그분께서 직접? 대박이네.”

“혹시 드워프와 엘프 말고 또 나타날 이종족이 더 있는 건 아니죠? 이번엔 놀라기 전에 미리 말씀해 주세요!”

신이 난 크란의 곁에서 토끼 같은 인상을 지닌 길드원이 질문했다. 음…… 뭐라고 답해 줘야 하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리스트를 꼽아 보았다.

“음… 저도 다 아는 건 아닙니다. 엘프와 드워프 외의 다른 종족이라면… 드래곤밖에 못 만나 봤습니다.”

“드래곤밖에라뇨!”

“미쳤다. 드래곤이래!”

본의 아니게 회의장은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크란은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문득 표정을 바꾸어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면 이제 앞으로 전력 손실이 좀 더 적어질 거라 기대해도 되려나.”

“전력은 왜?”

NPC들의 합류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세이버스 길드의 대부분은 유저들로 이루어져 있다. 유저들이라면 죽어도 하루, 혹은 3일 정도면 전부 되살아나 돌아오는데 전력 손실을 걱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뜻으로 얼굴을 보자 크란이 고개를 저었다.

“어, 카프. 아까 봤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몰랐어? 이번 전투로 인해 밝혀진 사실 중에, 놈들이 만들어낸 ‘전장’에서 죽은 경우 아무것도 복구되지 않는다는 사항이 있어. 건물도, 들판도, 죽은 NPC들도 복구되지 않은 건 당연하고 심지어는 유저들도 접속 불가 상태만이 계속된다지 뭐야. 무시무시한 일이지?”

접속 불가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언제까지?”

“평소처럼 하루면 재접속이 될 줄 알았던 사람들이 본 안내창에는 ‘이 전쟁의 결말이 드러날 때까지’라고 나와 있었다고 해. 아무튼 우리가 최종 보스 놈들과 마신을 쓰러트리면 다시 접속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죽지 말아야겠지만, 하고 답하는 크란의 얼굴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불규칙적으로 몇 시간에 한 번씩 돌아가며 침공이 계속되고 있어. 아마 우리의 전력을 깎아먹을 생각이겠지. 처음에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그놈들 먼저 살을 전부 발라먹게 할 셈이었는데, 아무래도 우리 쪽엔 비전투 유저들이 많잖아?”

크란이 눈에 잘 띄게 표시된 네 개의 대도시를 가리켜 보였다. 키잘키르스텀은 처음부터 유저들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기에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고, 남은 도시는 반파된 발라 모냐크, 토렐리트, 톨랑, 그리고 우리가 있는 자그레브까지 총 네 개였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도시를 지키는 인원과 밖으로 나가 놈들의 본거지를 수색하고 먼저 한탕 해주는 인원을 나눌 거야. 매일같이 난전이 되겠지만 그쪽이 더 빨리 결론이 나겠지. 물론 그 전에… 손 한번 까딱해서 도시 전체를 박살 내는 그놈과 시저가 다 함께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크란의 지시는 분명 합리적이었고, 효과도 있었다. 크란은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나와 유완, 자신이 비전투 유저들을 지키기 위해 안에 남아 있도록 했고 길드원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여 불규칙적인 마물들과의 싸움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날 새벽에는 톨랑이 터져 나가고 말았다. 이번에도 물론 또 하나의 슈페리어와 그의 제자 마법사들의 짓이었다.

비옥한 강을 끼고 있어 더없이 밝고 아름다웠던 상업의 도시 톨랑이 먹구름 속에 뒤덮인 채 누군가의 손길 한 번에 불바다가 되어버리는 광경을 본 유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겁에 질렸다. 톨랑마저 쓰러지고 나자 남은 이들은 더 이상 본래의 본거지에 머물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 뭉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 멀쩡한 토렐리트에서는 다음 차례가 자신들일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매일 수백 명이 넘는 이들이 도시를 탈출해 자그레브로 향했다.

그나마 엘프와 드워프를 비롯한 뛰어난 NPC 실력자들이 지키는 부근에서는 페일 나이츠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래 봤자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이 머물 수 있는 땅은 점차 줄어들어만 갔다.

수없이 여기저기서 이어지는 난전과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의 악랄한 PK 플레이, NPC들의 폭동, 전장을 휘젓는 사신 같은 시저의 소식. 처음에는 이 전쟁을 단순히 재미있는 컨텐츠로 여겼던 이들이 서서히 짜증과 분노에 사로잡히기까지는 1주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자의로 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로그인을 하지 않겠다는 유저들도 날이 갈수록 늘어갔기 때문에 미스트 대륙에는 갈수록 사람 숫자가 줄어 갔다. 정말로 참여하는 이들보다 바깥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수가 더욱 많아지자 실시간으로 미스트에서 일어나는 전투와 전쟁 상황을 중계하는 유저들의 채널이 큰 인기를 끌었다.

게임에 관심이 없던 평범한 사람들도 이쯤 되자 미스트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다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점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개발진들이 이것을 의도하고 시작한 것이라면 정말로 대단하다고 말하였고, 누군가는 흔하고 조잡한 전쟁놀이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현재 미스트의 한국 서버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미스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새턴 본사의 이사들조차 차마 무어라 입을 열지 못할 정도의 열기였다.

***

“요즘 네가 하던 게임 화제가 아주 대단하더구나.”

나는 신정석 의사와 마주 앉자마자 들은 말에 대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퇴원할 때에 했던 뇌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온 자리에서 갑자기 시작부터 미스트 이야기라니……. 그에게는 비밀로 하고 현재 미스트를 플레이 중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양심이 찔리는 화제였다.

“……네.”

“이런. 재미있어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구나? 그러면 검사 결과부터 설명해 주마.”

신정석 의사가 미소를 지으며 홀로그램 화면을 켰다. 나는 두 개의 입체 뇌 그림을 보았다. 왼쪽, 오른쪽 둘 모두 노란색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이 똑같아 보였다.

“왼쪽은 네가 입원할 때 검사했던 뇌 활용도, 그리고 오른쪽은 퇴원할 때 검사했던 뇌 활용도란다.”

“둘 다 비슷해 보이는데요.”

불안한 나의 답을 들으며 신정석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 사이에 내가 알아낸 것이 하나 있는데, 한번 보겠니?”

그가 이번에 손을 뻗어 끄집어낸 것은 낡아 보이는 종이였다. 거기에는 바닥을 한 번 쳤다가 갑자기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 그래프가 제일 눈에 띄게 그려져 있었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보기 힘든 외국어로 쓰여 있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약 20년 정도 전에 우리나라에서 보고되었던 어느 소아 환자에 대한 기록이란다. 내가 너의 상태에 대해 조언을 얻고자 발로 뛴 끝에 겨우 얻어냈지.”

신정석 의사는 나를 위해 그 기록의 내용을 쉽게 알려주었다.

“사고로 인해 재활 치료로도 다 낫지 못할 다리 부상을 입은 환자였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더니, 다시 몇 달 뒤에는 씻은 듯이 나아 제 발로 걸어 퇴원했단다. 후유증은 전혀 없었고, 애초에 부러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회복되었어. 당시 담당의는 이 일을 아주 기이하게 여겨서 학계에 보고했지만 원인을 명확히 알아낼 수 없었단다. 그런데 내가 그때의 기록을 보니, 그때 실시했던 뇌 검사 항목이 지금의 너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걸 발견했단다. 그때 그 환자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뇌 전체가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더구나.”

“…….”

신정석 의사는 나의 멍한 표정을 보며 또 다른 홀로그램 차트를 켰다. 거기에는 내 것과 흡사한 색을 띤 또 하나의 뇌가 있었다.

“그리고 이건, 네가 궁금하다고 말했던 이선빈 환자의 퇴원 직전 검사 결과란다. 그 소년의 담당의도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보고를 고민하고 있었어. …그래서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이 세 가지 경우가 모두 같은 원인과 결과를 수렴할 것이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기로 했다.”

“그렇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제 상태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신다는 겁니까?”

신정석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 미상으로 상태가 점점 나빠지던 것이 아니라, 세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 똑같은 자극을 뇌에 받아 똑같은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먼저 일어난 기적 같은 결과가 네게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지. 사실 나는 그 자극의 원인이 아무래도 네 게임 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새턴에 직접 문의를 할 수가 없으니 무어라 확신할 순 없겠구나.”

그렇게 말한 뒤 신정석 의사는 마지막으로 내 다리 모양의 그림을 켰다. 한때 거의 전체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던 그 그림은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대다수가 초록색으로 변해 있는 중이었다.

“내가 그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된 건 바로 오늘의 이 검사 결과 때문이란다. 너는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네 다리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 그것도 계속해서.”

네가 원한다면 이 결과를 새턴 쪽에 알리고 문의해 보아도 괜찮겠지. 신정석 의사가 해 준 마지막 말이 내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병원을 나서 새턴으로 향했다.

‘……다리가, 변화하고 있다고?’

정말인가 싶어 짚어 본 무릎은 이전과 별다른 것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거짓은 아닐 테니…….

나의 검사 결과에 대해 들은 윤석호의 반응은 그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침착하고 정중했다.

“그렇군요. 나쁜 변화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다니 정말로 다행입니다.”

“…설마 이미 그런 결론이 나올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대단히 침착하시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마 그럴 것이라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윤석호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규명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결론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말을 아끼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굳이 진제환이 저 대신 싱크로율을 올리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플레이해야 할 이유는 없어진 것이 아닙니까?”

이 기회를 틈타 신경 쓰였던 문제를 처리할 생각에 목소리를 높여 보았으나 윤석호는 그 문제에서만큼은 대단히 완강했다.

“안 됩니다. 그것을 해제하시겠다면 저는 강무헌 씨의 접속을 허가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지금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진제환 씨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여 제가 지고 있다는 말이 더 걸맞으리라는 점을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군요.”

“…….”

진제환을 위해서는 내가 접속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쪽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승부를 내지 못한 시저를 떠올리면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란 놈은……. 결국 진제환에게 기대기만 하고 있군. 꼴사납게…….’

한숨을 푹 내쉬자 윤석호가 기운을 내라는 듯 내 팔을 살짝 두드렸다.

“이제 3일 정도 남았던가요? 마지막까지 부디 접속해서 이루고자 하셨던 것들을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그 이후는 아무리 부탁하셔도 결과가 확실히 나올 때까지는 불허할 테니까요.”

2주간 임시로 허용된 접속 기간의 마지막 3일. 그것을 굳이 확인시켜주는 남자의 너구리 같은 성격에 치를 떨며 나는 대답 대신 돌아서서 회의실로 향했다.

***

요즘 미스트에 접속할 때마다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늘 무언가가 불타는 것 같은 매캐한 냄새였다. 불길하고 어둑한 하늘을 보면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그런 것보다는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쏟아지는 소식들을 접하는 것이 더욱 머리가 아팠다.

“카프로스 님! 오셨네요.”

나보다 먼저 접속해 있던 아르카나의 얼굴이 오늘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을 보니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오시기 전에 일어난 전투에서 우리 마법사들이 몇 명 로그아웃 당했어요.”

내가 24시간 접속해 있을 수는 없다 보니 실질적인 전투 참가도 그만큼 적은 편이었는데, 때문에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마음이 늘 좋지 않았다.

“크란은?”

“길마님은 마물들 상대한다고 나가 계세요. 아, 그리고 엘프분들이 카프로스 님을 찾는다고 하시던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길드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길드하우스에 사람이 많이 줄어들었다. 고작 2주 사이 엄청난 속도로 황폐해진 땅과 도시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그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활기가 넘쳤던 시장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기에 포션이나 약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

같이 접속한 유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그 녀석도 지금은 전장에 있는 모양이었다.

‘싱크로율이 높은 상태에서의 전투는 조심해야 하는데…….’

알아서 잘 하는 녀석이라는 것을 알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쉰 뒤 텔레포테이션을 썼다.

“왔느냐?”

운오와 함께 자그레브로 이동한 엘프들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집 한 채를 빌려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도 유저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피하기란 힘들었지만 그들은 특유의 담담함으로 모든 것을 태연하게 흘려 넘겼다. 이루미네는 그 대표주자였다.

나는 활을 손질하고 있던 이루미네를 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우리가 살펴볼 수 없는 곳을 향해 떠났던 염룡의 분신에게서 소식이 왔거든.”

이루미네가 활을 놓고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루미네는 현재 게임 바깥에서 그녀의 팬클럽이 생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무어라 말할까. 도저히 알려줄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륙 전체를 뒤덮은 마기가 거의 폭발 수준에 다다랐어. 아마 또 하나의 그가 바라는 것이 이 상황이었을 거야.”

“마기…… 말입니까?”

“대표적으로, 죽은 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지. 더 강력한 자들이 죽을수록 더 많은 마기가 나와. 어둠의 신은 그 기운을 무엇보다도 좋아한단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지지. 이 날씨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야.”

“그러면 그동안 그들이 굳이 사람들을 골고루 돌아가며 조금씩 죽이고 파괴했던 건 이걸 위해서였단 겁니까?”

“염룡과 드워프들, 그리고 나의 생각은 그러해.”

이루미네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들 입장에서도 가능하면 한 번에 화려하게 목적을 달성하고 싶겠지. 마신이 가장 강해졌을 때에 세계를 뒤엎고 싶을 거야. 죽이는 숫자를 조절하며 교묘하게 진행한 덕분에 이제 와서 늦추기는 어렵게 되어버렸지만… 그 덕에 생길 단 한 번의 기회가 있다는 걸 염룡이 알려주었어.”

단 한 번의 기회라고……?

“그게 뭡니까?”

한 글자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신중하게 묻자 이루미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것은 그들이 마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제물을 바치고, 그 결과 어둠의 신의 육체를 통해 이 세계에 현현시키기를 원해서야. 500년 전의 어둠의 신은 단지 그의 정신과 관념만이 이 세계에 소환되었을 뿐, 육신을 얻지는 못하였어. 하지만 이번에 만약 육신까지 얻게 된다면 그 다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더 이상의 재생이 없는 완벽한 멸망. 이루미네의 냉철한 눈빛이 답을 알려주었다.

“그는 이 세계를 붙들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분리를, 즉 완전한 멸망을 원해. 그것을 위해 벌써 수만 명을 죽였고 내게서 가져간 보물들까지 사용했을 테니 더 거리낄 것이 없겠지. 그러니 이 불길한 기운이 최고에 달하는 날, 그가 어둠의 신을 소환하는 것을 찾아내어 저지해야 한다. 그의 제물이 어둠의 신의 정신과 합쳐질 때를 노려 없애야만 해.”

“…….”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만든 제물이 어둠의 신과 합쳐질 때를 노려 없애야 한다니. 이게 가능한 퀘스트이기는 한 것일까? 중압감이 어깨를 누르는 것 같았으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을 알아낸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드워프들이 우리들을 위한 무기를 만들어 보내고 있다. 염룡은 마지막 남은 드래곤으로서 세계를 지탱하고 있지. 우리 엘프는 너를, 그리고 이 세계에 희망을 되찾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지원하마.”

그들은 유저와 다르다. 한 번 잃은 목숨은 돌이킬 수 없을 확률이 높았다. 어떤 NPC들은 한스와 친구들처럼 계속 되살아나기도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몸을 조심하여 물러나 있으라고 권해야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한 번도 직접적으로 묻지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수없이 의심했지만 너무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해 참아왔던 한마디였다. 말하고 나서 금방 후회했지만, 이루미네는 오히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너는 마법사야.”

“…….”

“강하게 부르는 자에게는 세계도 응답을 한단다. 그것이 바로 태초의 마법. 그것만을 잊지 않는다면 네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아. 지금까지 널 보아 온 내가 장담하마.”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꺾이면 안 돼. 마법은 결국 마음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니까.”

그 말을 가슴에 깊이 새긴 채 나는 모두가 있을 자그레브 성 바깥쪽을 향해 텔레포테이션을 썼다.

“우왁! 카프! 언제 온 거야?”

하필 도착한 곳이 크란의 앞이라 내게 검을 휘두를 뻔했던 크란이 기겁해 펄쩍 뛰었다.

“아까 왔는데 이루미네와 잠시 이야기를 하느라. 스크류 볼.”

- 퍼펑!!

“쿠아아악!!”

크란의 뒤에서 달려들던 마물의 머리를 터트려 버리자 주변의 놈들이 움찔하며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주변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핀 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들 물러서 주십시오. 이블 아이!”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 뒤, 나는 잔해만 강처럼 남긴 채 사라진 마물들을 뒤로하고 페일 나이츠 길드원 몇 명을 로그아웃시킨 뒤 모두와 함께 길드하우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하는 일임에도 사람들이 매번 동영상을 찍어가며 감탄하는 것에는 잘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무시하는 스킬이 꽤 늘어난 상태였다.

“다들 회의실로 와 줘. 이루미네에게 들은 말을 전달하고 싶어.”

“응? 뭔가 좋은 소식이라도 있었어?”

피에 범벅이 된 얼굴을 닦고 있는 크란과 유완의 뒤로 운오와 루크레이신, 그리고 토렐리트를 떠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의기소침한 키온 형과 팔튼 형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나는 간만에 한자리에서 보는 모두의 얼굴을 살핀 뒤 이루미네가 해 준 말을 최대한 자세히 전달했다. 우리도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기는 했으나 드래곤과 타종족의 의견을 모두 모아 종합한 의견의 파워는 상당해서, 순식간에 분위기가 훅 무거워졌다.

“마기가 폭발할 때를 노려 제사를 지낼 거라고? 정말 가지가지 하네.”

키온 형이 기가 막힌 얼굴로 고개를 젓자 루크레이신이 동의한다는 듯 “게다가 한 번밖에 없앨 타이밍이 없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요.” 하고 말했다.

모두들 접속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자그레브를 포위하고 공격해 대는 놈들을 상대하느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럼 결국 그 자식들이 어디 있는지 추적해야 한단 거잖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놈들을 어떻게 찾아?”

“그러게요. 이젠 퀘스트가 다 끝나서 시저의 위치도 못 찾고 있잖아요.”

“역시 마신의 신전이 있는 키잘키르스텀인가?”

“폐허가 된 도시 중 한 곳일지도 모르죠.”

“그렇게 치면 어딘들…….”

그들이 제사를 지낼 장소가 어디일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을 때,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또 하나의 슈페리어는 용의주도하게 계속해서 사람들을 죽이며 마기를 가득 채워 왔다. 그가 바라는 것이 마기가 폭발하는 순간이라면, 더 많은 죽음이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

더 많은 죽음을 볼 수 있는 곳. 그것은 즉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공간.

‘……그런 곳이 하나밖에 더 있나?’

내가 추측해 놓고도 순간적으로 피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여 있으며 늘 성문이 닫혀 있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공간. 뒤엎으면 곧바로 가장 높은 수치의 마기가 폭발할 그곳. 그것은 바로…….

“…여기야.”

“엉?”

“카르야, 방금 뭐라고?”

나는 조용히 힘을 주어 목소리를 내었다.

“여기밖에 없어.”

“……카프. 그놈들이 제사를 지낼 곳이, 여기라고 말하는 거야, 지금?”

크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빛을 보면 이미 내가 하려는 말을 이해한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며칠째 계속해서 몬스터와 NPC들로 주변을 감싸고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 아무도 못 나가게 하려던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어. 가장 많은 죽음을 보기 위해서는… 이곳이 최적이야.”

“…….”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루크레이신 홀로 휘유 하고 휘파람을 가볍게 불었다.

“소름 돋네요.”

“소름뿐이냐? 난 지금 그 악랄한 할배 마법사 자식 목을 조르고 싶어.”

“시저가 일부러 이곳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군. 완전히 우리를 가지고 놀았어.”

나는 모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루미네는 더 강력한 자들이 죽을수록 더 많은 마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키온 형과 팔튼 형이 토렐리트에 남아 있던 유저들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우리 쪽에 합류한 것이 게임 날짜로 어제. 우리 모두가 모였으니 아마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유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일 터였다.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만약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면, 더 이상 좋은 타이밍이 또 있을까?

‘안 돼.’

한시라도 빨리 대비해야 한다. 나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마치 그것을 노린 것처럼, 창밖에서 엄청난 굉음 소리가 울려 퍼지며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아악!’

“설마 벌써 온 거냐?!”

키온 형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모두 일제히 바라본 창밖은 어느새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먹구름이 가득 메운 채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중이었다.

비명 같은 세찬 빗소리와 폭발음에 섞인 고함.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상! 각자 단단히 준비하세요!”

크란이 일사불란하게 우왕좌왕하는 길드원들을 지휘하는 동안 나는 길드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세찬 비가 얼굴을 때리고 순식간에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도 하늘에 높이 떠 있는 또 하나의 슈페리어의 모습만은 아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콰르릉. 천둥 번개에 섞여 한순간 밝게 보인 그의 얼굴이 웃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저자를 상대로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정말로?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완벽하게 9서클 마법의 해답을 잡지 못한 내가?

본질은 결국 내게 마법을 가르쳐 준 슈페리어와 같은 자를 상대로!

“카프.”

익사해 버릴 것만 같은 긴장감이 내 전신을 집어삼키려던 순간, 유완이 내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유완…….”

그의 얼굴을 보고 조금 안도감을 느꼈을 때, 갑자기 귓가에서 이상한 잡음이 들려왔다.

- ……아, 아. 두 분.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나는 흠칫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그것이 실체 없는 목소리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혹시나 싶어 유완을 보니 나와 같은 것을 들었다는 눈빛이 되돌아왔다.

- 윤석호입니다. 지금은 두 분의 캡슐에 연결하여 직접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들리신다면 대답해 주세요.

“들립…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 순간에 갑자기 캡슐에 연결해야만 할 일이 뭐란 말인가. 의심스럽게 대답하자 잠시 후 윤석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지켜본 바 이후의 전투는 너무 위험합니다. 난전인 데다 도중에 사망할 가능성이 너무 높아졌습니다. 안전을 위해 지금 로그아웃하시는 편을 택하셨으면 하여 급히 연결한 겁니다.

뭐라고? 나는 입을 벌린 채 저 멀리 떠 있는 또 하나의 슈페리어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유완을 보았다. 유완은 내 기색을 살피듯 신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립니까. 지금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 혹시라도 사망할 정도의 부상을 입게 된다면 충격은 강무헌 씨께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계실 텐데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항의하기 위해 벌렸던 입을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초조함과 슬픔, 다급함이 가슴속에서 마구 맴돌았다.

-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이 앞에는…….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때, 유완이 윤석호의 말을 가로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버틸 수 있으니 상관없고,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 진제환 씨. 그건 너무 무모합니다.

“싱크로가 최대로 튄다 해도 충격에 의한 일시적인 심장마비 정도가 최대 피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라면 상관없습니다.”

- 진제환 씨!

“제 안전을 이유로 무헌을 협박하지 마십시오. 저는 처음에 전부 동의했고, 이 이상은 듣지 않겠습니다.”

유완이 뭔가를 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이자 윤석호의 목소리가 끊겼다. 나는 멍하니 유완을 바라보았다.

“…유완. 방금 너…….”

심장마비가 괜찮다고 한 거냐?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유완이 미소를 지었기 때문에 순간 모든 생각이 멈추고 말았다.

“신경 쓰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하지만…….”

“최대 심장마비라는 것뿐이야. 일시적이라 안 죽는다. 보통은 캡슐에서 빠져나왔을 때에 컨디션 난조를 조금 겪는 정도야.”

빠르게 설명한 유완이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 순간 마구 날뛰던 생각들이 갑자기 뚝 끊겼다. 머릿속이 조용해진 것만으로도 주변이 열 배는 더 고요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둠과 빗소리, 그리고 유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같았다.

“…넌 정말 바보 같은 놈이구나. 대체 왜 그러는 거냐.”

“내 마음대로 하는 것뿐이야.”

유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공짜는 아냐. 물론 대가는 있어.”

“뭔데.”

뭐든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묻자 유완이 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언젠가, 네게. 꼭.”

이 자식은… 정말 바보가 분명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대신 비에 젖어 뺨 위로 늘어진 유완의 검푸른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유완이 내 손의 온기를 느끼는 것처럼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손목을 잡아 그대로 손바닥을 제 입술 위로 가져다 대었다. 물기에 젖은 뜨거운 감촉이 현실만큼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장소가 아니었다면 곧바로 끌어당겨 눕혔을 것 같은 기분이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어쩐지 불안했던 것들이 좀 가시는군.’

알고 한 일은 아니겠지만 나는 유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유완.”

“응.”

“우리가…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유완의 눈동자 속에서 창백하게 질려 있는 내 얼굴을 보았다. 잠시 후 유완이 입술 끝을 부드럽게 올려 미소를 지었다.

“의미 없는 질문이군. 내 심장마비를 각오하고 갈 정도라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겠지.”

“…….”

부드러운 위로도, 포옹도 아닌 도발하는 듯한 말투.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예전에 한창 그와 경쟁하며 미스트를 하던 때를 떠올리게 해 기분이 차분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내가 너무 멍청한 질문을 했어.”

이 단 한 번의 기회 위에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의 무게가 올라가 있다고 생각하면 긴장이 되지만, 그것들을 모두 덜어내고 나서 보면 결국 단순히 내 마법을 성공시키느냐 마느냐의 기로일 뿐일 수도 있다.

도전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살아 있는 희열을 느꼈던 나는 어디로 갔는가.

‘…그 나는 아직 내 안에 있어.’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유완의 뺨에서 손을 떼어냈다.

“가자. 혹시라도 싱크로 안 튀게 조심해.”

우리는 비명 소리가 크게 울리는 자그레브 중심부로 뛰어갔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제 좀 죽어라, 이 자식아!”

나는 그 와중에 열심히 욕설을 내뱉고 있는 익숙한 키온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쪽으로 뛰어갔다. 적어도 열 명이 넘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시저가 몇 명의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붉은 머리칼의 부길마도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또 하나의 슈페리어는 움직이지 않은 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 새파란 마력 소용돌이가 미친 듯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마 제물을 바치기 위한 준비인 듯싶었다.

‘누가 얌전히 바쳐질까 보냐.’

그 전에 우선 시저를 상대해야 한다. 나는 손쉽게 세이버스 길드원 한 명을 베고 돌아선 시저와 눈이 마주쳤다.

“…….”

이전에 토렐리트에서 마주쳤을 때에 시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도 그럴까.

짧고도 아주 긴 것 같은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침묵이 끊긴 것은 키온 형이 날아와 시저에게 바위도 깨트리는 내려차기를 시전했을 때였다.

“스가의 일격!”

지진이 난 것 같은 쿵 하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으나 시저는 부드럽게 몸을 피했기에 푹 꺼진 것은 애꿎은 땅뿐이었다. 그 뒤를 이어 팔튼 형이 대검을 휘둘러 시저의 곁에 있던 페일 나이츠 길드원 둘을 동시에 저세상으로 보냈다.

“나이스 샷이다, 팔등아!”

키온 형이 엄지를 내밀며 빗물을 닦아냈다.

시저는 제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루크레이신의 단검을 발로 차 막아내고 몸을 돌려 크란의 스킬을 튕겨냈다. 뒤늦게 참여해 직접적으로 검을 맞댄 유완과 힘으로도 지지 않았다. 거의 1초도 쉴 새 없이 싸우고 있음에도 몸놀림이 조금도 느려지지 않는 것을 보면 괴물은 괴물이었다.

“젠장, 불공평하네. 저 자식은 이런 환경일수록 오히려 더 쌩쌩해진단 말이야.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잖아.”

키온 형이 큰 소리로 불평하며 주먹을 휘둘러 대자 주먹 모양대로 쏘아져 날아간 돌풍이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그 틈을 타 어딘가에서 자리를 잡은 듯한 운오가 활을 쏘아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을 원샷원킬로 머리만 쏘아 처리했다.

“크아악!”

푸른빛과 흰빛을 띤 오러검들이 부딪칠 때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거리가 먼 폭발음이 귀가 멀도록 울려 퍼졌다. 이런 난전 속에서는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것도 일이었다.

처음에는 몇 명 안 되어 보였던 페일 나이츠 길드원들은 죽여도 죽여도 어디에선가 자꾸만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이어 NPC 마법사들과 마물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와 뒤섞이자 혼란은 한층 더 가중되었다. 시저는 어느 순간 그 틈에서 모습을 감추었는지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더 이상 뭉쳐 있는 건 의미가 없겠어.”

팔튼 형이 멀리서 크게 소리쳤다.

“조금 분산해서 편하게 싸우자고! 난 이 자식들 처리하고 온다! 다들 알아서 시저를 쫓아!”

그가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몇 개의 사지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아군과 적군이 뭉쳐 있는 상황에서 싸우는 것이 부담스러울 만도 해 보였다.

“카프. 저거 보여?”

그 틈을 타 적을 베면서 내게 다가온 크란이 하늘 위에 떠 있는 또 하나의 슈페리어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손에 뭔가 들고 있어. 머리 같은 거.”

“…….”

그 말대로였다. 노인 마법사는 긴 머리칼과 수염을 흩날리며 양손에 둥근 머리를 들고 웃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것이 아마 이전에 보았던 다크 나이트의 머리이리라 짐작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광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기분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저 미친놈한텐 절대로 지지 말자. 알겠지? 조심해서 싸워!”

크란은 그 말만을 남긴 뒤 적들을 베며 흘러갔다. 나는 인비져빌리티를 쓴 채 손에 걸리는 대로 적들을 죽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아이스 스피어. 체인 라이트닝. 매직 블레이드.”

전기와 불꽃, 얼음과 칼이 내 주변으로 파도처럼 춤을 추며 적들을 일사불란하게 처치했다. 나는 쉴 새 없이 낮은 서클들의 공격 마법을 사용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 어둡고 비가 많이 내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튼 계속해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라이트닝 볼트, 매직 실드, 체인 라이트닝, 스톤 엣지.”

우르릉, 쿠르릉, 콰콰쾅 하는 소리와 비명들을 뒤로하고 간혹 날아오는 눈먼 마법 공격에는 디스펠을 쓰면서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세찬 빗소리와 천둥 번개 사이로 문득 누군가의 고함을 들었다.

“…와! ……디에 있어!”

한 골목을 더 돌아가자 수많은 시체를 발밑에 깔아뭉갠 채 번들대는 눈으로 무어라 소리를 치고 있는 시저가 보였다. 나는 드디어 시저를 찾아냈다는 사실보다, 그가 외치고 있는 말에 더 신경을 빼앗겼다.

“나와! 강무헌!!! 어디에 있어!”

시저 또한 비에 젖을 대로 푹 젖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일수록 더더욱 강해진다던 키온 형의 말처럼 그의 전신에서는 압도적인 오라가 흘러내렸고 쥐고 있는 검 끝에서는 거의 전기 공격을 연상케 할 정도로 폭발적인 기운이 넘실댔다.

“약속을 지켜!! 여기에 있겠지, 나와!”

“…….”

그 외침은 내 심장을 긁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걸어서 앞으로 다가갔다.

쏴아아. 하늘에서 퍼붓는 물줄기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뿌옇게 만들었으나 내가 시저를 발견한 것처럼 시저 또한 나를 발견했다. 우리는 빗줄기를 사이에 둔 채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네가 찾던 것이 나라고? 이제 겨루어 보자고 말하면 되는 건가? 내 정체를 알아차리고 무어라 따지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어지럽게 망설이는 동안, 시저가 천천히 검을 고쳐 잡고 위로 치켜올리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 그러고 보니 너는 슈페리어 퀘스트 유저였지. 제일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잊고 있었군.”

시저가 젖은 머리칼을 이마 위로 거칠게 쓸어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사나운 짐승의 것처럼 번들댔다.

“지금 내가 인내심이 없어서, 봐줄 마음 따위 없어. 얌전히 죽어.”

그가 검을 내리치는 것과 동시에 뻗어나온 거대한 검기가 주변의 건물 한 채를 통째로 갈라 무너트렸다. 나는 간발의 차이로 블링크를 사용하여 그것을 피했지만 아주 미세하게 스친 기세만으로도 뺨이 터져 피가 흐르는 것에는 놀랐다.

그야말로 미친 짐승처럼 날뛰는 공격이라 할 만한 검기. 나는 그것을 경계하며 양손을 올렸다.

“너, 칼날보다 날카로운 불꽃이여. 맹독의 꼬리가 되어 심장까지 꿰뚫으라, 스콜피온 파이어!”

- 푸화악!

시저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온 전갈 꼬리를 닮은 불꽃이 엄청난 기세로 그를 찔렀다. 시저는 손쉽게 옆으로 살짝 몸을 틀어 그것을 피했지만, 나는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스콜피온 파이어를 빠르게 한 바퀴 돌렸다. 바닥의 축을 중심으로 한 바퀴를 돌리자 불꽃의 사정권에 있는 모든 나무와 건물들이 일제히 부서지고 타 재가 되는 것이 보였다. 시저라고 예외일 수는 없어서, 약간 다리와 팔에 불꽃이 스치면서 갑옷과 옷이 순식간에 부식되어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나는 그가 잠시 멈칫한 틈을 타 슈페리어 막대기를 들고 헤이스트를 쓰며 뛰쳐나갔다. 말없이 소드 오브 그라비티를 건 채 내리치자 시저가 반사적으로 검을 받아냈다가 움찔 떠는 것이 보였다.

“스크류 볼!”

떨어지기 직전 이름만으로도 곧바로 쓸 수 있는 마법을 불러내 뒤통수도 한 방 갈겨줄 셈이었으나 불행히도 그것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시저가 파랗다 못해 새카만 오러검을 덧씌우고 나에게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 콰콰콰쾅!

하마터면 목이 잘릴 뻔했다. 간신히 나를 스쳐 지나간 검기가 또다시 뒤쪽의 뭔가를 부수었다. 나는 여태까지 써 온 마법과 검을 모두 아낌없이 사용해 시저를 상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머리 위에 정말로 상대해야 할 상대인 슈페리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간의 내 목표나 마찬가지였던 시저와의 1대1 대결을 소홀히 하거나 도망갈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 어둠과 빗속에서 마법과 검기가 일으키는 빛에 의지해 얼마나 싸웠을까. 나는 어쩐지 시저와 나의 싸움에서 점차 약간 익숙한 자들끼리 대련할 때 같은 패턴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마법을 쓰고, 시저가 깨트리거나 받아친다. 시저가 검기를 쓰면 나는 피한다. 내가 마법검을 쓰면 시저가 다시 받아치고, 피하는 것의 연속. 복잡해 보여도 결국 한번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나니 남은 것은 박자를 맞추어 춤이라도 추는 것 같은 멍한 기분뿐이었다.

극도의 집중 속에 빠져들면 느껴지는 이 기분.

나는 이것을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인가?

처음에는 상처받은 짐승처럼 으르렁대던 시저도 어느 순간부터는 조용히 나를 상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호흡과 빗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듣지 않은 채 계속해서 싸웠다.

그 완벽한 호흡이 깨진 것은 누군가가 나타나 나의 편에서 시저를 함께 공격해 주기 시작했을 때였다. 등골을 섬찟하게 하는 새파란 검기에 놀라 옆을 보니 검은 갑옷 때문에 마치 어둠 속에 녹아든 유령 같아 보이는 유완이 숨을 헐떡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설마 날 찾아다녔나?’

유완이 끼어든 덕분에 시저와 나의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하아, 하아.”

“하아… 하…….”

나는 볼을 타고 흐르는 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을 닦아낸 뒤 시저를 보았다. 시저는 어쩐지 약간 찌푸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마법사. 너.”

그가 무언가 묘한 눈빛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을 때, 유완이 옆에서 나를 강하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카프. 팔에 상처가 심해.”

“……어?”

나는 그제야 유완이 잡아당긴 내 양손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시저와 여러 번 맨손으로 검을 부딪치다 보니 그의 검기가 튀겨 상처를 입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 이로 뚜껑을 따고 내 손에 붓는 유완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팔자가 좋군.”

그 모습을 본 시저가 비웃음과 함께 검을 휘두르자, 유완이 곧바로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들어 날아온 검기를 막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바람이 옷을 찢을 듯한 기세로 폭발했다.

본래라면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 폭발.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뭉쳐져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입힐 정도가 된 시저의 검기는 갈기갈기 찢겨져 폭발한 그 순간에 나를 가로막고 있던 유완과 내 몸을 난도질하며 지나가 버렸다.

“윽……!”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감싸며 바닥에 엎드렸다. 옷이나 몸이 좀 베이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죽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상태를 가늠해본 뒤 고개를 들자, 나를 거의 감싸는 형태로 무릎을 꿇은 채 웅크려 있는 유완이 보였다.

“…유완. 괜찮아?”

나는 유완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잠깐 고개를 들려는 듯했던 유완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유완?”

나는 조심스럽게 유완의 뺨을 잡고 올려 보았다.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그 순간, 내 몸과 닿아 있던 유완의 손이 움찔 떨리며 몸 전체가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일순 흐릿하게 스파크가 튀었다.

“유완?!”

방금, 방금 그건 뭐지? 혼란에 빠져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자, 겨우 유완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거의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 검푸른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무, 래도.”

“뭐라고?”

“방금, 싱크로. 가.”

유완이 찌푸린 채 무어라 말하는 것이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잠시 후 유완의 몸이 한 번 더 감전된 사람처럼 파지직거리며 흐릿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괜찮, 으니. 안심.”

“유완!”

몸을 만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품속에서 그대로 로그아웃되어 사라지는 유완을 보며 얼어붙고 말았다.

“아…….”

거센 비만이 전신을 때리며 끝없이 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간신히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왜 아직도 시저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뒤늦은 작은 의문 속에서 나보다 더욱 멍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시저의 크게 뜨인 눈이 보였다.

“…….”

설마.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았다. 본래대로라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완벽하게 얼굴을 덮어주는 기능이 있었던 후드의 절반 이상이 검기 때문에 잘려나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거의 벗겨진 것이나 다름없는 천 쪼가리 사이로 비에 젖은 머리칼과 얼굴 피부가 그대로 만져졌다.

‘아…….’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 이런 방식으로 드러나고 만 것일까. 최악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헌.”

끝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시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강무헌.”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저가 약간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강무헌……. 너였어?”

네가 그 마법사였어?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중얼거림이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울려 퍼졌다. 나는 그때서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덮은 의미가 없는 후드를 완전히 뒤로 넘기고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시저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을 깜박이지조차 않은 채 보고 있었다.

“…그래. 나였어.”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지독하게 잠겨 있었다.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것처럼 음울한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울려 퍼졌다.

“네가, 어떻게…….”

“이미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지. 나라고 처음부터 너와 접촉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그래도 접촉하면서… 역시 나는 널…….”

무어라 말하려던 목소리가 목 안에서 뭉그러졌다. 이런 말을 지금 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 때문에 허무하게 로그아웃되고 만 유완의 걱정으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나 때문이다. 전부 내가 욕심을 부려서. 내가!

“…아직, 승부 결과가 안 나왔지.”

나는 서늘하게 내뱉었다. 시저가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나를 보았다.

“미안. 지금 바로 결과를 내야겠어.”

“강무헌.”

“여기서는 카프로스야. 네 적이고, 마법사다.”

그것만 생각하라는 뜻으로 내뱉은 말을 과연 시저가 얼마나 알아들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이상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미칠 것 같은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극한으로 치달은 상태에서의 이미징은 어떠한 형태가 되는가. 나는 이전에 그것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슈페리어의 마지막 기억 속, 마신을 상대로 미친 듯이 형태도 주문도 잃어버린 마법들을 쏘아대던 그의 모습이 아마 지금의 나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비명을 지르는 가슴속과 달리 지독하게 차가워진 머리를 느끼며 양손을 올렸다. 서로 다른 속성의 두 마법이 아무런 준비 없이 곧바로 손 위에 나타났다. 마력이 부족할 때 느껴지는 현기증도, 고통도 없었다.

나는 숨을 쉬는 것처럼 내가 아는 모든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시저를 공격했다. 이상하게도 시저는 아까 전까지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내 공격을 받아내기만 할 뿐, 반격을 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그가 이 환경 속에서 강해진다 해도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마침내 내가 손바닥 안에서 뿜어낸 스콜피온 파이어를 닮은 불꽃으로 그의 배를 꿰뚫은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일순 전부 회복되면서 세찬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콰르르릉. 귀가 찢길 듯한 천둥 속에서 나는 잠시 내 몸에 기대고 있는 시저의 무게를 느꼈다. 손안의 불꽃이 사그라지자 빈틈 사이로 뜨거운 것이 울컥울컥 새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일방적이라 해치웠다는 느낌조차 안 드는 승부였다.

“……왜 아무 반격도 안 해?”

조용히 묻자 시저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나라고 알 것 같아……?”

“…….”

“내게 3년 전 일을 복수할 생각이었다면, 완벽한 장면이었어, 강무헌. 완전히 날 가지고 놀았다고. 즐거웠어? 그래, 즐거웠겠지.”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시저가 귓가에서 낮게 웃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졌어……. 어차피 널 상대로 한 시점에서 정해진 운명이나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겠군. 발악해도 결국 이 꼴이야. 하지만 질 때 지더라도 이것만은 들어야겠어. ……그 자식 대체 뭐야.”

대체 뭔데 네가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든 거야. 시저의, 승조의 중얼거림이 뜨겁게 울려 퍼졌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다면야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다. 나는 시저가 사라지기 전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아주 작은 속삭임을 들은 시저가 멍하니 눈동자를 움직여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시저의 울 것처럼 찌푸린 얼굴을 보며, 어쩐지 이 이상 그의 속내를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곧 어깨에 걸쳐져 있던 시저의 무게가 스르르 사라지고, 내 손은 갈 곳을 잃은 채 털썩 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비틀거리며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 그대. 지금의 상태로는 절대로 저치를 상대할 수 없을 텐데, 괜찮은 거야? ]

그때, 머릿속에서 웅웅대며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하늘 위에서 아까보다 훨씬 더 커진 마력의 소용돌이 속에 잠겨 있는 또 하나의 슈페리어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올려다본 순간 그 또한 나를 내려다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에 오싹함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린 순간, 그가 있는 곳에서부터 엄청나게 많은 수백 수천 개의 번개 줄기들이 자그레브 전체로 내리꽂혔다.

태어나 처음 듣는 끔찍한 폭발음과 함께 자그레브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수십 개의 건물이 동시에 무너지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멀지 않은 곳에서도 비명이 울려 퍼지다 멈추었다.

아마도 방금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반응하듯이 또 하나의 슈페리어를 감싼 푸른 마력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몇 배로 더 커졌다. 이제는 완전히 창공 전체를 뒤덮은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풍경이 아닐까.

나는 다리를 끌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간혹 핏자국 같은 검은 웅덩이들이 보였다.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 혼자 남겨진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겨우 잔해를 넘어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잘 보이는 곳까지 나오자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크 나이트의 잘린 머리를 든 채 무어라 주문을 외우고 있는 중이었다.

[ 마신 강림이 거의 완성되었군. ]

귓가에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9서클. 이제 남은 것은 9서클을 완성해 또 하나의 슈페리어를 막는 것뿐인데… 내게 그 정도 마력이 남아 있었던가? 정신이 없어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혼란 속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오로지 슈페리어의 나지막한 목소리뿐이었다.

[ 그대. 지금껏 나에게 신체의 권한을 어디까지 넘겼었는지 기억해? ]

“……무슨. 말을.”

슈페리어가 무어라 속삭이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반문하자 그가 후 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 그동안 말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지금까지 그대가 내게 넘긴 부분들을 합치면, 사실 마법을 쓰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어. ]

비록 이 보잘것없는 막대기 안에 들어 있는 나라도 말이야.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갑자기 내 몸에 번개가 내리꽂히는 듯한 충격이 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대에게는 미안한 일을 했어. 하지만 더 이상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해 주길 바라.”

내 입인데,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목소리이지만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멀리서 무어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온 형인가? 아니면 크란?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돌릴 수 없으니 누구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돌처럼 굳은 채 멋대로 움직이는 내 손끝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대를 가르친 건 사실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지도 몰라. 적어도 몇 달 전부터는 확실히 그랬었지.”

내 입술이 움직여 낯선 말을 했다.

“나를 원망해. …정말로 미안.”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입을 내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무력하고 당황스러울 줄이야. 덕분에 이성을 차릴 수 있었던 것까지는 좋았지만 후폭풍은 남달랐다.

참으로 이 게임을 하면서 별 경험을 다 해 보는군.

“…무, 슨. 짓을. 할, 셈이야.”

힘겹게 노력해서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것이 놀라웠는지 ‘내 얼굴’이 스르르 움직여 미소를 짓는 것이 느껴졌다. 웃는 것조차 내가 아니라니……. 참으로 적응되지 않는 감각이었다.

“역시 그대야. 아직까지도 내 힘을 누르고 움직일 수 있는 정신력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뭐 내 후인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만.”

이 자식 보게. 내가 정말 네 후인이기는 한 거냐?

그 누구도 저런 말을 하면서 이런 짓을 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대체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 셈인가. 이것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짓이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 슈페리어가 이 짓을 하고 있는 이유가 계획적으로 생성된 것만은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방금 전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내 몸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슈페리어의 움직임은 지극히 침착했으며 부드럽고 안정적이었다.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슈페리어가 내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인가. 알 것 같으면서도 짐작할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감쌌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정말이지,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자, 안에서 지켜보고 있도록 해.”

내 목소리를 통해 부드럽게 대답한 슈페리어가 손을 올려 가슴에 얹었다. 그 안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 나는 손발과 입까지 전부 봉인되는 것 같은 강렬한 압력을 느꼈다.

시저와 유완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유완, 아니. 진제환.

너도 지금 이 순간을 보고 있을까.

한 마디 말조차 전하지 못한 채 나는 슈페리어가 내 몸을 이용해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곧 거대한 푸른 기운에 감싸인 노인의 앞에서 멈춘 슈페리어가 내 입술을 이용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한다고 모든 것이 바뀔 것 같은가?”

“…네가 뭘 아느냐? 어리고 무지한 필멸자야.”

흰 머리칼과 수염을 마구 뻗친 채 휘날리면서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번들거리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망쳐버린 세계를 구하고 나도 구원받을 마지막 길이니 나를 방해하지 마라.”

“망쳐버린 세계라…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거든.”

“……뭐?”

처음으로 내 존재에 의문을 품은 듯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고개를 들어 똑바로 나를 보았다. 내 몸을 움직이는 슈페리어가 노래라도 부르는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 나는 내 모든 것을 바쳐 세계의 선과 닿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기원했지. 하나는 증오스러운 저 마신을 영원히 봉인해 주기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직이 말을 이어나가던 입술이 잠시 멈칫했다.

“…다른 하나는, 모두가 죽어버린 이따위 세상의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기를. 그리하여 영원히 멈추어 버리기를.”

“…….”

“정신이 나가 자신이 무엇을 기원해 버린지조차 모른 채로.”

내 입술이 고통에 찬 통곡 같은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정말로 멍청한 자가 아닌가. 천재라고, 세상을 구원할 자라고 그렇게나 떠받들어졌으나 결국 한 일이라고는 그따위 반 푼어치밖에 없었어.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세계가 정말로 변하지 않고 서서히 멈추어 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겁이 나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 자기 자신을 둘로 나누어 어떻게든 진행을 멈추어 보려 했지만, 그것도 이렇게 보기 좋게 실패했다네!”

슈페리어의 웃음이 천둥소리에 뒤섞여 크게 울려 퍼졌다.

“실패자. 위선자. 거짓말쟁이! 제가 만든 결과를 직시하는 것이 두려워 도망쳐버린 이상주의자! 그게 바로 너와 나의 정체야!”

“닥쳐!”

다크 나이트의 머리를 든 노인 슈페리어가 고개를 저으며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 않아. 그러니 책임을 져야만 하는 거야! 모두 부숴 버리면 돼! 그래야만, 그래야만 이 고통에서 모두 벗어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슈페리어가 내 손을 움직여 또 하나의 슈페리어의 뺨에 손을 올렸다. 주름진 피부와 수염의 감촉이 손끝을 통해 느껴졌다. 슈페리어는 내 입술로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것 봐. 마신의 영원한 봉인을 바랐지만 결국 그 봉인을 네 손으로 풀었지. 그렇다면 멈추어 버린 세계도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어째서 하지 못하나?”

“……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입을 벌렸다.

“무슨, 헛소리를……. 너는 대체 누구야. 넌 누구냐고!”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 이가 ‘나’ 외에 또 누가 있나?”

나는 슈페리어가 나의 시선을 이용해 노인 슈페리어의 품에 안겨 있는 친구의 머리를 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심경까지는 느낄 수 없었으나, 슈페리어는 말없이 한참 동안 그 머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9서클 마법도, 강림한 신도 결국 진실로 영원을 약속하지는 못해. 그러니 이제 포기하고 우리가 갔어야 할 지옥을 향해 가자. 500년을 살아남은 망령들에게 남은 길은 그것뿐이야.”

슈페리어가 팔을 벌려 또 하나의 자신을 품에 안았다. 분명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 말의 내용이 너무 충격이었기 때문인지 또 하나의 슈페리어는 그저 멍하니 부릅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아. 너는, 너는……. 너는……!”

“……오픈 게이트.”

내 목소리이자 슈페리어의 목소리로 완성된 주문이 끝난 순간, 눈앞에 검은 문이 열렸다. 어딘가에 있을 반대편 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 슈페리어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깨닫고 비명을 질렀으나 슈페리어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어 노인 슈페리어를 공중에서 툭 밀쳤다.

너무나 간단한 움직임이었다. 그저 허공에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을 뿐인, 잠깐만 이미징을 집중했다면 다시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을 작은 움직임.

하지만 나이 든 노인은 그 순간 제 뒤에서 검은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문을 보지 못했고, 그 순간 안에 삼켜져 사라지고 말았다.

소리도, 진동도 없었다. 그저 그것이 끝이었다.

나는 슈페리어가 오픈 게이트 마법을 가르칠 때에 웃으며 말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가고자 하는 두 장소를 전부 똑바로 지정하지 않으면, 영원히 아공간을 헤매거나 죽게 된다.

“…….”

한 사람이 사라졌지만 천둥 번개와 비, 그리고 주변을 가득 메운 마력의 폭풍만은 그대로였다. 나는 어느새 내 품 안에 노인 슈페리어가 안고 있었던 다크 나이트의 머리가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문 안으로 밀치기 직전에 빼앗은 것인가? 하지만 어째서 이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슈페리어가 내 입을 이용해 아주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신을 되살리는 제물은 이 머리다. 그러니 이것과 함께 여기에 가득 모여 있는 마기들을 전부 없애 버려.”

“……뭐?”

드디어 내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혹하고 있는 사이 내 오른손이 스르르 내려가 허리춤에서 슈페리어 막대기를 꺼내 쥐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아직도 내 앞에 오픈 게이트가 닫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슈페리어. 설마.”

“그동안 즐거웠어.”

내 입술이 움직여 나와는 전혀 다른 어조로 쓸쓸하게 중얼거리는 것을 느끼는 기분을 대체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지 마.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없어졌으니 다 끝난 거잖아.”

[ 아니. 진짜로 끝이 나기 위해서는 이제 나도 사라져야 해. 그것이 500년을 질질 끌어온 이 지리멸렬한 미련의 끝을 장식할 대미거든. ]

머릿속에서 슈페리어가 낮게 웃었다. 너무나 밝은,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 나 좋을 대로 그간 그대를 많이 이용했어. 어리광도 부렸지. 하지만 그래도 그대에게 진짜로 스승 대접을 받았을 때에는… 아, 이래서 다들 제자를 들이고 가르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

“안 돼.”

그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너무나 힘없고 약하게만 들렸다.

이렇게 지금 가면 나는.

나는.

“…아직 배울 게 많은데.”

간신히 내뱉은 중얼거림이 허무하게 흘러나와 사라졌다.

[ 내 탑이 있잖아. 아이아가스와 함께 그 도서관을 남겨둘 테니까 열심히 책 읽고 배워. 이런 친절한 스승님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

그런 건 없어도 된다. 나는 슈페리어가 이런 자살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오른손의 제어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도 되찾아올 수가 없었다.

‘젠장……!’

[ 그대는 내 최고의 제자이고 후인이었어. 마지막 가는 길에 그대를 만나 다행이야. ]

내 오른손이 슈페리어 막대기를 쥐고 천천히 오픈 게이트 안으로 다가갔다.

[ 아,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데 마법이 힘들 땐 기본이 무엇인지를 항상 기억하라고. 자, 그러면 정말로 안녕이다! ]

오른손이 슈페리어 막대기를 툭 떨어트렸다. 문양이 새겨진 막대기가 아공간 안으로 사라지며 순식간에 빛을 잃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 몸의 모든 지배권을 되찾았고, 오픈 게이트도 닫혀 버렸다.

나는 멍하니 허공에 다크 나이트의 머리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미징이 크게 흔들린 탓에 몸이 휘청거리며 떨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다시 기어올라올 수 있었다.

“…….”

모든 것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슈페리어의 마지막 말만은 지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품속의 머리와 주변을 가득 메운 이 푸른 마력들을 단숨에 없애는 마법.

내가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던 단 한 번만 사용 가능한 9서클.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데.’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슈페리어가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마법의 기본을 떠올리라고 했었지. 마법의 기본. 그것은 즉…….

‘상상하는 것.’

슈페리어를 처음 만났을 때에 그 답을 듣고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진 상상은 가장 기본적인 것.’

오래전 슈페리어 퀘스트를 하다 얻었던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가장 기본적인 마법이 불꽃 마법이기 때문에 역대 9서클 사용자 중에는 불 마법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된 사람이 많다던 내용이 있었던가.

불. 불 마법이라면 나도 눈 감고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슈페리어의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닮은 불꽃.

나는 다시 한 번 품속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슈페리어가 안고 떠나버린 지난 500년의 세월을 이제 내가 마무리해야만 한다. 사람이 죽으면 불에 태워 화장을 하듯이, 나도 그가 남긴 흔적들을 모두 태워 보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듯했다.

나는 더 이상 9서클로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다크 나이트의 머리를 들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불꽃. 뜨겁고 영롱한,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불.

붉지만 희고, 희지만 푸른.

파이어 볼, 파이어 볼트, 파이어 월처럼 불꽃이라는 단어 뒤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붙어 하나의 마법이 되지만, 나는 그런 형태에 구애되지 않는 가장 순수한 불꽃을 원했다.

“……파이어.”

작은 중얼거림이 끝난 순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의식이 하얗게 변해 갔다.

그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현장을 중계하던 미스트 유저들의 화면 속에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아름다운 불꽃이 찍혔다. 마치 오로라처럼 하늘을 수놓아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사라진 그 불꽃은 그저 너무나 아름다워서, 아무도 그것의 정체를 차마 묻지 못했다.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평소와 같이 맑고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띠링!

- 마신의 부활이 최종적으로 저지되었습니다.

- THE MIST 대륙의 멈춰 있던 시간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 멈추어 있는 동안 나뉘어졌던 평행 세계가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 마신의 부활에 사용되기 위해 살해당한 모든 것들이 되살아납니다.

- 잠겨 있던 바다와 신대륙에의 길이 열립니다.

- 싸움에 참여해 주신 모든 유저분들께 감사드립니다.

THE MIST,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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