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교활한, 교활한 인간.
증오에 찬 고함이 울려 퍼졌다.
- 그때로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 네가 용보다도, 신들보다도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느냐?
- 아니. 너희는 이 땅을 떠도는 가장 미천한 괴물보다도 못해.
- 내가 네 영혼까지 갈가리 찢을 것이다!
콰콰콰쾅!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다른 쪽 벽에서 또 다른 용의 다리가 땅과 벽을 부수고 빠져나왔다. 나를 짓누르는 공기의 압력도 더욱 강해졌다.
그 팔이 나를 잡으려 거세게 움직였기 때문에 나는 플라이를 거두고 땅으로 내려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땅에서 검은 덩어리들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기껏 7서클을 써서 전부 터트렸는데 주눅조차 안 든 건가……. 아깝군.’
보통의 존재라면 윈드 하트의 효과를 보았을 때 압도되었겠지만 흑룡에게는 그다지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윈드 하트를 쓰느라 소모된 내 마력이 아까웠지만 그래도 유완과 크란을 지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는 생각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까보다는 그래도 수가 좀 적어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다시 슈페리어의 막대기를 뽑아들어 마력을 주입해 검으로 만들었다. 검은 이미징을 딱히 하지 않아도 되는 무기이다 보니 방금 전처럼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을 때에는 오히려 검을 쓰는 것이 내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실드.”
다시 한번 실드를 두른 뒤 나는 내 쪽을 향해 내리치는 거대한 꼬리를 피해 블링크를 썼다. 이어서 한 번 더, 또다시 나를 집요하게 쫓는 꼬리 끝을 피해 옆쪽으로 블링크를 쓰는데 갑자기 누군가에게 어깨가 잡혀 뒤로 밀쳐졌다.
“유완?”
“이쪽보다는 위로 올라가서 차라리 팔을 잘라.”
유완이 위쪽 벽을 뚫고 나와 있는 용의 팔 두 개를 눈짓으로 가리켜 보이면서 우리에게 달려드는 검은 덩어리들을 검으로 거세게 베었다. 진흙처럼 뭉개진 덩어리는 잠시 경련하다가 질척하게 녹아 사라져 버렸다.
“이쪽에 시간을 빼앗길 필요 없어. 아래쪽은 나와 저 녀석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까 너는 위쪽으로 가. 네게 구해져야만 할 정도라면 애초에 따라오지도 않았어.”
빠르고 냉정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완의 눈은 내가 아래쪽과 위쪽을 전부 상대하느라 정신이 분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파악한 자의 눈빛이었다.
“어느 쪽이 네 목표인지를 잊지 마.”
“…….”
기껏 마력을 소모해 가면서 구해 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만한 차가운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유완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유완도, 크란도 모두 내 목숨과 승리를 최우선으로 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녀석들은 만약 여기서 죽게 되어도 전혀 나를 원망하지 않을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나도 저 녀석들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지만……. 결국은 유완의 말이 맞다. 유완과 크란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흑룡의 본체였다. 용을 죽이는 것도 성공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하려고 드는 것은 셋 다 죽는 길이나 다름없을 수도 있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유완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꽉 잡고 있던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 뺨에 손가락을 대어 뭔가를 훔쳐내 주었다. 검은 액체가 유완의 손가락 끝에서 주르륵 떨어지는 것을 보니 내 얼굴이 현재 얼마나 엉망일지 안 봐도 대충 알 수 있었다.
똑같이 더러운 상태라도 잘생긴 유완과 달리 나는 지옥에서 막 기어 올라온 살인마 같은 꼴일 텐데도 유완의 눈빛은 이 모든 상황을 잊게 만들 만큼 다정했다.
“…죽지 마라.”
나는 그 말만 남긴 뒤 유완의 머리 위로 휙 날아온 용의 꼬리를 향해 마력 검날을 평소보다 훨씬 길게 뻗어 아래에서 위로 힘차게 올려쳤다. 소드 오브 윈드로 무게를 가볍게 해 두었던 덕분에 꼬리를 베지는 못해도 튕겨낼 수는 있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꼬리가 튕겨 나간 사이를 틈타 플라이를 쓰자 꼬리가 나를 따라오려 꿈틀댔지만 타이밍 좋게 유완이 비늘 사이를 후벼팠으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크으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아무래도 유완이 찌른 부위가 제대로 흑룡에게 타격을 준 모양이었다. 나는 흑룡이 잠시 멈칫한 이 타이밍에 연속으로 타격을 줄 만한 마법을 제대로 써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쓸 만한 마법 리스트를 뒤졌다.
용에게 통할 만한 마법은 웬만한 위력으로는 안 된다.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역시 슈페리어의 마법뿐이었다. 6서클의 인페르노와 블리자드는 범위가 큰 마법이라 특정 대상을 살상하는 데에는 좋지 않다. 인페르노로 용의 꼬리를 태우기는 했지만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던 것이 그 좋은 증거였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내가 써야 할 것은 7서클. 그중에서도 가장 적절한 것은…….
“너, 꽃보다 부드러운 얼음이여.”
주문이 힘을 가지고 발현되는 것과 동시에 또다시 마력이 껑충 빨려 나갔다. 상당한 현기증이 찾아왔지만 나는 묵묵히 손가락을 뻗어 반 이상 빠져나와 있는 용의 양발을 가리켰다.
“미친 바람의 자락을 타고 죽음을 피워낼 춤을 추라. 프리징 플라워!”
그러자 새하얀 얼음 조각이 공중에서 형성된 뒤 날아가 발끝에 푹 박혔고, 잠시 후 그 얼음조각에서부터 뻗어 나온 냉기가 거대한 다리 주변을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범위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 크-으-으아아아아아!
검은 비늘이 새하얗게 얼어가고 얼음이 점점 두꺼워지며 비늘 사이의 살이 쩍쩍 벌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피가 비처럼 떨어져 땅을 적시고 분노에 가득 찬 고함이 머리가 터지도록 웅웅거렸다.
‘역시 이쪽이 더 효과적이군.’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져 가는 용의 발을 보며 나는 씩 웃었다. 슈페리어도 말했지만 용의 비늘은 바깥쪽에서 오는 공격에는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높은 방어력을 보인다. 하지만 비늘로 보호할 수 없는 틈새나 그 안쪽까지도 그러하지는 않았다.
- 내가, 이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네놈 따위는!
- 죽인다. 반드시 죽이겠어!
용의 발이 얼음꽃에 찢겨 피를 흩뿌리면서도 위협적인 발톱을 휘두르며 나를 공격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나는 여유롭게 플라이를 이용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 공격에 당할 일이 없었다.
‘저 녀석이 원거리 공격을 쓴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야…….’
“체인 라이트닝!”
빈틈을 타 아래쪽에서 용의 피를 먹고 더욱 꾸물대는 검은 덩어리들을 향해 체인 라이트닝을 두어 방 갈기자 유완과 크란 주변에 여유가 생겼다. 뭐, 이 정도는 해 줘도 되겠지.
‘아직까지 우리 중에서 중상을 입은 사람도 없고, 이 정도면 정말 성공할지도 모르겠군.’
처음엔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지금 나는 7서클의 프리징 플라워를 유지하면서 몸 전체에 두른 열 겹의 실드와 플라이, 거기다 4서클의 체인 라이트닝까지 쓰고 있는데도 머릿속이 아주 깨끗했다. 예전이었다면 두통에 이어 코피라도 흘리면서 물러났을 텐데 말이다.
여기에 오기 전 에어리얼 서번트가 강제로 깨지면서 피를 한 번 뱉어냈었기 때문에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온 것인데, 어쩐지 몸이 힘든 것과는 별개로 가면 갈수록 정신은 더욱 명확해지고 머릿속도 잘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친 듯이 싸우면서 몸이 점점 깨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을 보면 역시 내 천직은 이렇게 자유롭게 싸우는 것이었나 보다.
용의 고함이 땅을 부술 듯이 진동했다. 나는 기어이 하나의 거대한 꽃처럼 피어나고 만 얼음꽃이 용의 다리 하나를 잘라내는 것을 보았다.
쿠웅…….
천천히 분리되어 먼지를 일으키며 땅으로 떨어진 살덩어리는 거의 언덕 하나만 한 크기로 보였다. 얼어붙은 피가 공중에서 뚝뚝 떨어졌다. 용이 크게 신음했다.
사지를 하나 잃은 것은 이쪽으로선 대단한 선전이다. 7서클은 그 이름에 맞는 강력한 효과를 드러낸 것이다. 그로 인해 상황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낙관했었으나, 잠시 후 그 생각이 오만임을 깨닫게 되었다.
쾅, 쿠르릉, 콰콰콰쾅!
잠시의 침묵 뒤 흑룡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지진을 일으키며 몸을 드러냈다. 날개와 머리 일부분이 무너진 땅과 절벽 속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날카로운 뿔로 뒤덮인 긴 주둥이와 내가 어둠 속에서 보았던 새빨간 눈동자 한쪽이 먼지 속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윽.’
엄청난 압박 때문에 순간적으로 플라이를 유지하던 것이 힘들어져 몸이 공중에서 휘청거렸다.
‘…젠장.’
내 정신은 여전히 명확했다. 하지만 공기 중에 가득 찬 불길한 기운의 밀도가 너무 강해진 것이 문제였다. 마치 손에 만져질 것처럼 짙어진 기운이 전신의 피부를 쿡쿡 찔러 이미징을 유지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다.
마법을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도 마치 수압이 깊은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무겁고 느렸다. 이것이 드래곤의 힘이란 말인가?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현재 내 몸에 가해지고 있는 압력의 수위를 확인하고 있는 도중 흑룡의 날개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날개는 박쥐의 것과 비슷해 보였지만 박쥐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했다. 마치 대형 선박의 돛처럼 보이는 강인한 피막이 굵은 뼈대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다만 내가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멀쩡한 부분은 한쪽 날개뿐이라는 것이었다. 용의 날개가 접혀 있었을 때에는 몰랐지만 천천히 펴지는 것을 보니 한쪽은 멀쩡한 것에 비해 다른 한쪽은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긴 상태였다.
다섯 개의 뼈대 중 두 개는 완전히 부러져 형체도 없고, 피막도 찢겨나간 지 오래라 있어야 할 부분이 텅 비어 있는 광경은 몹시 그로테스크했다. 저런 날개로는 무슨 짓을 해도 날지 못할 것이다. 내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테지만 나는 흑룡이 누구에게 그 상처를 입었을지가 조금 궁금해졌다.
‘역시 슈페리어와 싸울 때 입은 상처인가.’
하지만 그런 상념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완전히 쭉 펴진 용의 날개는 단 한 번의 퍼덕임만으로 내가 이전까지 사용했던 모든 바람 속성 마법들을 다 합친 것만큼의 위력을 발휘했다.
“윽……!”
처음에는 분명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용이 불러낸 검은 덩어리들조차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쓸려나간 돌풍에 직격타를 맞은 순간 실드도 소용없을 정도의 압력에 호흡이 강제로 멎었고, 육체가 너무나 손쉽게 내 제어를 벗어났다. 플라이로 견디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지레짐작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쉽게 돌풍에 휩쓸려 공중으로 내팽개쳐진 몸이 순식간에 핑글 돌며 아래로 떨어졌다.
아찔한 추락감이 몸을 감쌌다. 하필 머리가 아래쪽을 향한 상태로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위와 아래가 어디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 정신 차려! 플라이를 써! ]
머릿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슈페리어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로브가 뒤집어진 채 펄럭이며 시야를 감싸 눈앞이 온통 검었다.
[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실드도 소용없어! 빨리! ]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혼란 속에서 입을 여는 것이 쉽지 않았다.
“플, 라이.”
처음에 중얼거린 주문은 먹히지 않았다. 명확한 이미징 없는 주문은 그저 마력만 소모했을 뿐 제대로 발휘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내게는 거의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충격이 상당했다. 그것이 도리어 정신을 조금 명확하게 만들었다.
“젠…장, 플라이!!”
입술을 씹으며 뱉은 주문과 함께 몸이 덜컥 멈추었다. 시야가 옷으로 가려진 상태라 나는 일단 몸이 공중에 멈추는 이미징을 강렬히 염원했다. 바람이 미친 듯 불어 몸이 휘청대긴 했지만 더 이상 낙하하는 기색은 없었다. 나는 겨우 이미징을 바꾸어 몸을 바로 세웠다. 그와 동시에 바람이 엄청나게 몸을 때렸지만 소매로 얼굴을 가리니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이 바람 속에서 눈을 뜨고 다니는 건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시야를 나누는 수밖에.
“에어리얼 서번트!”
바람에는 바람. 내 부름에 응답하여 나타난 에어리얼 서번트로 인해 시야가 둘로 나뉘었다. 나는 눈을 감고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를 내 눈 대신 쓰기로 했다.
나는 현재 아슬아슬하게 절벽 벽에 부딪히기 직전 멈춘 상황이었고, 유완과 크란은 어딘가의 바위틈에 숨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쉽게 죽을 녀석들이 아니니 이 정도로 아마 큰 타격은 입지 않았을 것이다.
용은 날아오르려는 것처럼 몇 번이고 계속 날갯짓을 하는 중이었으나 찢겨진 날개는 돌풍만 불러일으켰을 뿐 몸을 띄우지는 못했다.
일단 저걸 멈추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내려 땅에 발을 딛고 섰다. 부서진 돌이나 바위가 돌풍에 휩쓸려 날아다니는 중이라 위험하기는 했지만 플라이를 유지하지 못해 추락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여차하면 실드가 어느 정도는 막아줄 것이라 믿으며 몇 겹을 더 두른 뒤 손을 올렸다.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라 진짜 내 눈으로 보는 것만큼 거리감이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 쓰고자 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너, 꽃보다 부드러운 얼음이여. 미친 바람의 자락을 타고 죽음을 피워낼 춤을 추라. 프리징 플라워!”
다시 한번 7서클 마법을 사용하면서 또다시 온몸의 기운이 엄청나게 빨려 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이번에도 효과가 있었다. 내가 원했던 대로 용의 날개 끝에서부터 돋아난 얼음 조각이 순식간에 뼈대를 타고 나선형으로 주르륵 내려가 돌풍을 일으키는 날갯죽지 부분을 완전히 감싸고 얼려 버렸다.
빠드득, 드드드득,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얼어가는 얼음과 계속 움직이고자 하는 용의 몸부림이 부딪쳐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바람은 한결 멎었다.
“후우, 후우, 하.”
나는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 이마를 닦으며 프리징 플라워가 엄청난 압박에 지지 않도록 더욱 마력을 보탰다. 전신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내 마력을 빨아들인 프리징 플라워가 한층 날카롭고 두껍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뿌드드드득!!
- 크, 르르, 르, 아, 아아아아아!!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거의 다 봉쇄했다고 생각한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던 용의 날개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힘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부분을 한 번에 펴 버렸다. 나는 관절을 뚫고 봉쇄 중이었던 얼음꽃이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며 머리가 부서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크윽……!”
[ 조심해! ]
슈페리어가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한창 진행 중이었던 7서클이 무너진 대가는 엄청나게 컸다. 눈앞이 새카맣게 변한다 싶은 순간 나는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간신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기절하는 것은 면했지만 내상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포션을 불러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주박에서 벗어난 용의 공격이 더 빨랐다.
-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이따위 것으로 나를 또다시 묶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돌풍과 함께 주변 땅에서 또다시 검은 덩어리들이 솟아올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향해 네 발로 기어 달려드는 덩어리들을 피해 옆에 있던 바위 뒤쪽으로 겨우 몸을 날렸다. 에어리얼 서번트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해제해야 했다.
‘젠장!’
“포션!”
빠르게 저장의 반지를 낀 손을 뻗어 남은 포션을 불러냈지만 한시도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었다. 병을 입에 물고 급하게 뽑은 검으로 덩어리들을 베어내면서 포션을 삼켰으나 이번에 베인 놈들은 사라지지 않고 잘리면 잘린 대로 꾸물거리며 도로 합쳐지면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진흙으로 만든 인형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용이 점점 더 모습을 많이 드러낼수록 공기 중의 압력은 더 높아지고, 그에 따라 그가 만들어 낸 검은 덩어리들도 더욱 강력해지는 것 같다. 땅에 있으면 이놈들과 싸우며 용까지 상대해야 하고, 하늘 위에 있으면 무시무시한 돌풍을 아무런 방어벽도 없이 맞이하는 리스크를 져야 하다니… 완전히 등 뒤에 절벽을 두고 싸우는 느낌이었다.
일대 다수로 상대하기에는 이블 아이만한 것이 없지만 그것은 마물 한정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나는 저 검은 덩어리들에게 과연 이블 아이가 통할지 의심스러웠다.
“슈페리어. 저 자식들에게 이블 아이가 통할까?”
[ 아니. ]
검은 덩어리들을 베고 옆으로 빠르게 달려 이동하면서 묻자 신속한 답변이 들려왔다.
[ 흑룡의 힘으로 만들어 낸 그림자들은 마물이 아니니 통하지 않아. ]
역시 그런가…….
여기서 시간을 끌수록 나는 점점 더 불리해진다. 용은 이제 거의 모든 신체가 드러난 상태였다. 머리가 완전히 드러나고 목과 묻혀 있는 몸통까지 빠져나오면 놈을 막을 수 있는 수단도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
[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비늘이 없는 급소를 노려. ]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슈페리어가 조언을 주었다.
[ 어차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방법이 최선이야. ]
“비늘이 없는 급소……? 읏, 차.”
실드로 막고 있는 안쪽, 바로 발밑에서 또 솟아난 검은 덩어리가 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빠르게 검으로 잘라낸 뒤 밟아 뭉갰으나 잡혔던 부분은 이미 검게 변해 약간 녹아내린 상태였다.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발목이 약간 따끔거렸기에 먹다 남은 포션을 대충 뿌려주었다.
“젠장.”
슈페리어가 말한 ‘비늘이 없는 급소’란 어디일까. 굳이 가까이 다가가야만 공격할 수 있는 곳인가?
신중하게 다른 바위 뒤로 몸을 숨긴 뒤 돌풍 사이로 희미하게 들여다보이는 용을 살펴보았다. 절벽 안쪽에서 새빨간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며 나를 찾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
나는 벼락같이 슈페리어의 말이 어느 부위를 뜻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렇군. 눈이 있었어.”
[ 입 안도 있지. ]
슈페리어가 한 군데를 더 알려주었다.
[ 하지만 불이나 독을 뿜을 수 있는 입 안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보단 눈이 백 배는 나아. ]
그것은 그렇다. 나는 또다시 기어오는 놈들을 향해 체인 라이트닝을 쏘고 몸을 굴려 피했다.
이 돌풍을 피해서 눈치채지 못하게 코앞까지 다가가려면… 역시 인비져빌리티와 플라이를 함께 쓰는 것이 최선일 것 같다. 에어리얼 서번트를 꿰뚫어 보았던 용이 인비져빌리티로 투명해진 나도 볼 수 있다면 이것 또한 별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현재 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기회가 여러 번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미루어볼 때 용은 타격을 입을 때마다 점점 강력해지며 묻혀 있던 몸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미 여러 번의 기회를 썼고, 이제 남은 기회가 거의 없었다.
‘시간은…… 29분 남았군.’
29분 뒤면 내가 죽는지 저놈이 죽는지가 결정된다. 그 차갑고 간단한 사실이 나의 정신을 단단하게 일깨워 주었다.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드래곤인데 지금까지 상대했던 모든 적 중 거의 최고의 능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여태까지와 같은 이미징만으로는 이길 수 없어.’
지금껏 내가 용을 상대한 방식은 거의 슈페리어의 마법 자체의 강력함에 의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큰 타격을 입히기 힘들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큰, 더욱 압도적인, 그리고 더욱 정밀한 힘이 필요했다.
아마 마법을 여러 개 쓸 만큼의 시간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강력해질 놈의 특성상 일단 용의 머리 근처까지 가면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결정타를 먹여야 했다.
결정타……. 결정타라.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마법의 이름들, 그리고 그것들을 응용해 내가 할 수 있을 방법과 예상 효과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갔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쓸 수 있는 조합이 수백 개는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이것? 아니면 저것? 그것도 아니면……. 아니, 그것보다는 역시…….
미친 듯이 생각하다 보니 머리에서 김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마력을 회복시키는 포션을 하나 더 꺼내 마셨다. 그리 큰 회복은 되지 않겠지만 정신이 조금 말끔해지는 정도의 효과는 있었다.
“후우.”
다 마신 병은 마침 옆쪽에서 달려들던 검은 덩어리의 머리통에 던졌다. 처음에는 진흙 속에 파묻힌 것처럼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못하고 사라졌던 병이 잠시 후 꾸물대는 덩어리 속에서 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검은 덩어리가 몸부림을 치며 유리 조각을 뱉어내기 위해 굴러다니다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틈을 타 입가를 대충 문질러 닦다가 아무 생각 없이 그 검은 덩어리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문득 지금껏 떠올린 적이 없었던 새로운 생각이 내 머릿속에 번개처럼 떠올랐다.
‘……혹시 그런 방법도 통할까.’
테스트를 해 볼 만한 상황이 아니니 이 방법이 얼마나 통할지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 방법이 몹시 괜찮은 듯 여겨졌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내쉬자 슈페리어가 뭔가를 느꼈는지 다시 말을 걸어왔다.
[ 어떻게 할지 마음은 정한 거야? ]
“응.”
[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면 나도 미리 그대의 계획을 알 수 있을까? ]
나보다 경험이 많은 슈페리어가 내 계획을 듣고 조언을 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과연 뭐라고 평가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달려드는 검은 덩어리들을 검으로 때려잡으면서 짧게 내 계획을 말해 주었다. 슈페리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상인데. 아무 할 말 없는 거냐?”
[ ……아니. 음.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대는 이미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잖아? ]
“없어.”
[ 후우. ]
깊이 한숨을 내쉰 슈페리어를 보니 내 발상이 확실히 그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내 머릿속에서 간만에 듣는 슈페리어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 아하하하하. 정말이지, 그대의 무모한 발상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
“…….”
[ 어차피 성공률은 그대가 얼마나 마법의 기본을 잘 다룰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지. 이런 미친 짓은 그대의 전문이었잖아? 그 집념이 어디까지 통할지 한번 시험해 봐. 죽기밖에 더 하겠어? ]
“그래. 그 말을 가급적이면 네게도 적용해 보면 좋겠, 는데 말이야.”
대답을 하면서 검은 덩어리들을 힘껏 베어 쳐낸 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땅을 딛고 섰다.
“유완, 크란!”
돌풍 때문에 내 목소리가 거의 묻히긴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검을 쓰는 놈들이란 직업 특성상 육체 능력이 극한까지 올라가 있을 것이므로 청력도 나보다는 나을 터였다. 과연 내 생각대로 잠시 후 흙먼지 사이에서 사람 그림자 같은 것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녀석들도 자기 자리에서 검은 덩어리들을 상대하랴, 몸을 지키랴 많이 바빴을 것이다. 여기까지 와 준 녀석들에게 고마운 마음 반, 지금부터 할 일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 반의 묘한 마음으로 나는 배에 힘을 주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지금부터 광범위 마법들을 써야 하는데 너희들에게 영향이 안 가도록 조절할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알아서 몸들 잘 지키길 바란다! 최대한 용과 멀리 떨어져!”
들었을까?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들었으리라 믿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머릿속으로 지금부터 사용할 마법들을 떠올렸다.
“인페르노! 바람을 타고 무엇이든 마음껏 태워라. 블리자드! 네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어디든 가라!”
쿠와아아아악!
엄청난 소리와 함께 인페르노와 블리자드가 내 양옆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마법 모두 오늘 여러 번 사용했지만 이번의 쓰임새는 여태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자율성에 모든 것을 맡긴 거대한 규모의 마법. 그것은 그 언젠가 슈페리어의 기억 속에서 두 마법이 압도적인 기세를 흩뿌리며 수많은 적들을 상대했던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용이 불러일으킨 바람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인페르노와 블리자드는 오히려 그 바람을 타고 몸집을 불렸다. 토네이도처럼 자라난 불기둥이 검은 덩어리들을 휩쓸고 다니는 동안, 그 옆에서는 용이 일으킨 바람에 뒤섞인 눈보라가 검은 덩어리들과 부서진 바위를 얼려 깨트리기를 반복했다.
불과 눈보라가 드넓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날뛰어 대니 제대로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불에 얼음에 바람, 거기다 그 세 가지가 합쳐져 생겨난 수증기까지 깔리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 크아아아아아아!
인페르노와 블리자드에 꼬리나 날개가 휩쓸렸는지 용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이전에 인페르노의 불꽃을 껐던 때처럼 용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훅 하고 뿜어져 나왔지만 이번에는 워낙 두 마법의 규모가 커 한 번에 진화가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용이 뿜어낸 검은 안개마저 난리통에 합쳐져 시야를 더욱 가리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옥 같은 아수라장.
하지만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한 적절한 첫 번째 타이밍이었다.
“플라이!”
나는 곧바로 몸을 띄워 위로 날아올랐다. 인페르노와 블리자드는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의지가 큰 마법들이기에 내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덕분에 동시에 다른 마법들을 사용할 때 아주 편했다.
그 특성 덕분에 바로 이번 계획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높이. 더 높이…….’
나는 최대한 빠르게 몸을 띄우는 데 집중하여 순식간에 인페르노와 블리자드의 사정권보다도 위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용이 묻혀 있는 위치보다도 더 위로 올라오니 아래쪽의 아수라장이 한눈에 전부 보였다.
용은 아직 내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좋아……. 이제 여기서.’
나는 지체하지 않고 양손을 올렸다.
“스톤 엣지!”
주문을 외쳤지만 잠시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력은 여태까지 중 가장 엄청난 속도로 빨려 나가고 있었다. 마치 온몸의 기력 하나까지 전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세로 마력이 사라지는 감각을 버티며 이미징을 유지하기 위해 집중하는 건 지금까지 한 일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밑에서 인페르노와 블리자드가 여전히 난리를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마력이 빨려 나가는 것이 조금씩 멈춘 순간,
- 쿠르르르르르…….
내려다보이는 땅 전체가 격렬한 진동과 함께 불길하게 떨렸다.
나는 부디 유완과 크란이 내 말을 듣고 제대로 몸을 피했기를 바라며 손을 크게 들어 올렸다 내렸다.
그와 동시에 땅이 울렁이다가는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바윗덩어리들이 흙더미와 함께 일어나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 쿠와아아아악!!!!
모든 것이 작게 보일 만큼 높이 올라온 내 눈에 그것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보였다. 내가 머릿속에서 떠올린 이미지 그대로 흙더미로 이루어진 해일이 땅 전체를 뒤집어엎으면서 용의 드러난 신체를 내리쳤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내 등에 쾌감과 비슷한 소름이 쭉 달렸다.
스톤 엣지는 고작 5서클이다. 하지만 땅속을 뒤집을 수 있는 그 위력을 제대로 사용한다면 그 어떤 높은 서클의 마법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아군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마음껏 쓸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점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렇게 사용해 본 적이 없었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 결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미칠 듯 머리가 아팠지만 그보다 기분이 좋은 것이 더 컸다. 땅이 부서지는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용이 지르는 고함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한참 동안 불과 눈보라, 그리고 흙먼지가 호우처럼 내리꽂히는 소리만이 영원할 것처럼 들려왔다.
한참 뒤, 나는 겨우 먼지가 잦아들면서 드러난 땅에 시선을 주었다.
아래쪽은 그야말로 폐허 그 자체라 할 만했다. 용이 불러냈던 검은 덩어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제대로 디딜 만한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서져 갈아엎어진 공간 속에 붉은 피와 검은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덩어리가 드러난 것이 보였다.
뿔과 이빨로 무장한 머리, 단단한 비늘로 철갑처럼 두른 사지, 긴 목, 그리고 몸 전체를 감쌀 만큼 긴 꼬리.
절벽과 땅속에 걸쳐 묻혀 있던 거대한 흑룡의 신체가 드디어 전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아…….”
그것을 확인한 순간 머릿속이 아찔했지만 나는 간신히 플라이를 유지하며 버텼다. 용은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땅에 묻혀 있던 육신 전체가 뚫고 나오는 바위와 흙더미에 휩쓸려 골고루 타격을 입었을 테니 지금까지처럼 금방 기력을 회복하지는 못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만들어낸 광경들에 잠시 한눈을 판 순간이었다.
골짜기 전체를 뒤덮다시피 누워 있던 용이 문득 번쩍 눈을 떴다.
“…….”
그 붉은 눈동자가 하늘 위에 떠 있는 나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무언가가 등 뒤에서 날아와 그대로 나를 꿰뚫었다.
“헉…….”
머리가 하얗게 타는 듯한 충격이 한 번, 그리고 두어 번 더 느껴졌다.
‘실…드가 전부 깨졌어?’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짧은 순간에 열 장이 넘는 실드를 뚫고 원거리 공격을 하다니.
나는 내 배와 오른팔, 그리고 왼쪽 허벅지를 뚫고 나온 검고 날카로운 힘의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내 공격이 놈에게 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명 흑룡은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정도 공격을 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렇군……. 이게 드래곤의 힘인가.
“쿨럭…….”
나는 피를 토하며 휘청이다 그대로 떨어졌다. 머릿속에서 붉은 경보가 울리는 것처럼 슈페리어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무어라 말하는 것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플라이……. 플라이를 다시 써야 하는데.’
몸이 낙엽처럼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통에 제대로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한없이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허공으로 날아 흩어지는 내 피를 희미하게 보고 있던 와중, 갑자기 몸이 엄청난 충격과 함께 텅 하고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허억…….”
혹시 땅에 떨어진 것인가 싶었지만 아직 나는 공중에 있었다. 미스트 내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의 수치는 아주 낮은 편이라 그나마 충격 정도로 멈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누군가 다가와 내 몸을 끌어안아 품에 안았다.
“…하아, 하아…….”
머리 위에서 다급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눈을 뜨자 유완이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어떻게…….”
“정신 차려. 곧바로 뽑아야 하니까.”
어떻게 나를 멈추게 한 것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배에 박힌 거대한 검은 조각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흙먼지로 범벅이 된 채 유완이 나를 조심스럽게 거대한 바위 뒤에 내려놓았다. 나는 거기에서 겨우 검을 땅에 박아 몸을 의지한 채 피를 토하는 중인 크란을 볼 수 있었다.
‘아……. 그렇지. 성사 때문에…….’
크란의 성사 스킬은 내가 죽음에 이를 만한 부상을 입었을 때에 그것을 제가 대신 받아내는 희생 스킬이다. 내가 공격당하자마자 바로 죽지 않은 것은 아마 그래서인 모양이었다.
“카프. 괜찮아?”
크란이 숨을 헐떡이며 겨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크란이 안심한 듯 제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냈다.
“깜장검사가 늦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어떻게 된…….”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크란이 찡그린 얼굴로 웃으며 내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아니 그게… 성사가 발동되기는 했는데……. 흑룡이 쏜 그게 너한테 계속 박혀 있어서 데미지를 절반씩 나눠 받은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 바로 뽑아야 해.”
“그러면…….”
너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묻기 위해 입을 열자 크란이 고개를 저으며 내 입을 막았다.
“나는 치유 스킬이 있고 체력도 많으니까 괜찮아. 하아. 하……. 이 정도론 안 죽어. 어쨌든… 지금 바로 뽑을 거니까 절대 기절하지 마. 충격이 좀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한 뒤 크란이 유완에게 눈짓을 했다. 유완이 고개를 끄덕인 뒤 내 배와 옆구리를 뚫고 있는 검은 조각을 한 손으로 잡았다. 배 속의 장기가 전부 뒤틀리는 것 같은 충격 때문에 이를 악물자 유완의 눈빛이 검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으……윽!”
꿀럭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조각이 뽑혀나갔다.
“디바인 포스!”
크란이 곧바로 내 배에 대고 스킬을 쓰자 흰빛이 흘러나오며 상처에 흡수되었다. 그와 동시에 크란이 한 번 더 피를 토했지만 내 배에 댄 손은 결코 떼지 않았다.
유완이 이어서 팔에 박힌 것을 빼내자 크란이 다른 한 손을 뻗어 그곳에도 빛을 부었고, 마지막으로 허벅지에 박힌 조각을 빼낸 뒤에는 배에 흘려보내던 빛을 그쪽으로 옮겼다.
“하아… 하아…….”
숨이 좀 차고 아프긴 하지만 시각적인 효과에 비해서는 별것 아니다. 나는 이보다 더한 아픔도 알고 있었다. 게임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자 유완과 크란이 동시에 놀란 얼굴로 나를 도로 눕히려 했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
“…시간이 없어.”
용이 아직 충격으로 인해 얌전하지만 이제 곧 다시 움직일 것이다. 그 전에 내가 세운 계획대로 모든 일을 끝내야 했다. 시야 한쪽에서 흘러가고 있는 남은 시간은 이제 16분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도 이 상황을 위한 마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멀쩡한 왼손을 들어 내 몸에 대고 스스로에게는 여태까지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던 슈페리어의 7서클 마법을 실행했다.
“시간의 축복을 받은 모래여, 숨결이 다할 때까지 나를 두르라.”
희미한 중얼거림이었지만 마법은 문제없이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었다. 누워 있던 주변의 땅이 울렁이더니 검은 흙먼지들이 안개처럼 뭉쳐져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약간 징그러운 효과에 놀랐는지 크란이 “뭐, 뭐야?” 하고 입을 벌리는 것이 보였다.
“인클로우즈 샌드!”
주문이 완성되자마자 몸을 감싼 흙이 일제히 검은 빛을 내며 흡수되었다. 잠시 후 나는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나를 막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이 마법은 부상을 당했을 때 흙으로 상처 부위를 막고 마력이 다하기 전까지 기력을 불어넣어 주는 효과가 있었다. 엄청난 마법이지만 지속적으로 소모되는 마력이 큰 편이라서 큰 부상을 당했을 때 이외에는 쓸 일이 없어 여태까지는 내게 써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나도 이 마법보다는 차라리 얼마 되지 않는 효과라도 포션 쪽을 썼을 터였다.
“카프…… 괜찮아?”
크란이 나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겉모습이 좀… 무서워졌는데.”
상처를 입은 부위를 검은 흙이 대신하다 보니 피부가 상당히 얼룩덜룩한 모습으로 변한 상태였다. 하지만 뭐 살아 있는 것이 우선 아니겠는가. 나는 피식 웃은 뒤 크란에게 체력 포션을 내밀었다.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네가 마셔.”
“으응….”
평소였으면 거절했을 텐데 그냥 받는 것을 보면 아까 괜찮다고 했던 말은 역시 진실이 아니었다. 나는 크란이 지친 얼굴로 늘어져 포션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유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유완도 여기저기 너덜너덜했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유완.”
“응.”
유완이 순종적인 맹수처럼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 부탁한다.”
크란은 아마 이제 더는 싸울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보호할 이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서로 싸울 생각은 없었는지 유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란을 절대로 죽게 두지 마. 그리고…….”
나는 용이 있을 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15분 후면 전부 끝날 테니 최대한 먼 곳으로 피해 있어.”
“……내가 더 도와줄 것은 없는 건가?”
검푸른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나를 향한 염려와 걱정.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유완이 별로 납득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방금 구해 준 걸로도 이미 충분히 빚을 졌어. 여기까지 도와줘서 고맙다.”
“…….”
“그래도 정 도와주고 싶으면 이따가 15분 후에 내가 성공했을 때 데리러 와 주든가.”
내 발로 걸어서 너희들을 찾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하는 말을 삼키며 중얼거리자 유완이 피식 웃었다.
“반드시 갈게.”
“응. 이따가 보자.”
나는 블링크를 사용해 몸을 날렸다. 등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 그극…… 그그극…….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에도 그랬지만 용의 신체를 코앞에서 보는 것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기분이었다. 움찔거리며 조금씩 움직이려 애쓰는 거대한 육체는 살아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자연재해 덩어리처럼 보였다.
불길한 검은 안개가 흙먼지 사이로 응집되어 흐르는 것을 피해 조심스럽게 걸어가는데, 갑자기 앞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실드!”
두 번은 안 당한다. 나는 아까 나를 꿰뚫었던 것과 비슷한 조각들이 실드에 막혀 퍽퍽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위쪽에서 십여 개의 검은 조각들이 유연하게 날아왔다.
“블링크, 블링크, 플라이!”
재빨리 몸을 옮겼지만 그 조각들은 유도탄이라도 되는 것인지 나를 쭉 따라오며 날아다녔다. 플라이를 이용해 공중으로 날아올라 피했더니 이제는 숫제 수십 개의 조각들로 늘어나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하고 있었다.
-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다니는군.
흑룡이 그르렁거리며 중얼거렸다.
- 분명히 죽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 정도로 죽을 만큼 만만하진 않거든.”
- 그런가? 그렇다면 어디 한번 증명해 보아라!!!
이제까지와는 고함에 실린 압력도 전혀 달랐다. 용이 내지른 고함을 들은 것만으로도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하고 코피가 주르륵 흐를 정도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인클로우즈 샌드에 조금 더 힘을 보태는 이미징을 떠올렸다. 그러자 몸의 상처를 감싼 검은 진흙에서 빛이 나며 이내 코피가 멎고 몸 상태가 다시 나아졌다. 마력 소모가 조금 더 많아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는 범위 내였다.
나는 점점 늘어나는 검은 조각들을 피해 위험천만한 각도로 하늘을 날았다. 아슬아슬할 때까지 절벽을 향해 돌진하다가 충돌하기 직전에 위로 휙 날아오르자,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조각들이 콰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벽에 틀어박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새로운 검은 조각들이 다시 가세하여 나를 쫓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정신없이 날아다녀야만 했다.
- 멍청한 인간이여.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시간이 점점 줄어 마침내 10분의 벽이 깨졌다. 나는 계속해서 움찔거리며 육신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흑룡이 드디어 천천히 다시 날개를 펴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 나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도망만 다니다 죽게 되겠구나!
“…….”
아주 오랫동안 바위처럼 굳어져 있었을 검은 비늘에서 흙먼지가 후두둑 떨어지며 골짜기 일대가 뿌옇게 변했다. 흑룡이 천천히 긴 목을 움직이며 머리를 들고 있었다.
‘8분.’
나는 남은 시간을 가늠하며 계속해서 날았다. 간혹 스피드가 빠른 검은 조각들이 내 몸을 두른 실드에 튕기거나 아슬아슬하게 몸을 스치기도 했지만 아직 위험할 정도로 나를 따라온 녀석은 없었다.
- 쿠구구궁…….
용이 하나 남은 팔을 움직여 땅을 짚었다. 산맥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둔중한 소리와 함께 지진이 일었다.
‘…5분.’
내 뒤를 쫓는 검은 조각들은 이제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수준으로 많아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피하기 위해 플라이를 써 본 이래 최고의 비행 실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아래로, 위로, 옆으로 정신없이 방향을 꺾는 동안 수없이 많은 공격이 실드에 부딪치고 튕기기를 반복했다.
- 쿵……!
- 쿵………!
- 쿵…………!!
용의 비늘이 차르르 떨리며 머리끝에서부터 꼬리 끝까지 후르르 일어섰다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오랫동안 위에 쌓여 있었던 먼지가 모두 쓸려나간 뒤 드러난 것은 윤기가 흐르는 갑옷을 두른 것만 같은 압도적인 존재였다.
용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3분…….’
드디어 완전히 세 발로 땅을 딛고 선 용이 긴 목을 쭉 뻗어 위를 향했다. 나를 노려보는 거대한 붉은 눈동자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공기 전체를 억누르는 것 같던 압력이 그 순간 두 배는 더 강해졌다. 순간적으로 속도가 느려지는 바람에 나를 쫓는 검은 조각들에게 뒤덮일 뻔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이미징을 더욱 강하게 바꾸어 벗어날 수 있었다.
‘2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나는 용이 긴 주둥이를 열어 입을 천천히 벌리는 모습을 보았다.
검은 터널 같은 입 속에서 검붉은 안개 같은 불길한 기운이 천천히 생성되고 있었다.
마침내 벌어진 입의 크기가 사람 몇 명 정도는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남은 시간, 1분!
나는 플라이를 멈추었다. 그리고 시야에 똑똑히 보이는 용의 검은 입 속을 향해 기다렸던 주문을 외쳤다.
“블링크!”
다음 순간, 나는 엄청난 압력과 열기가 느껴지는 검은 공간 속에 있었다. 몸이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은 압력 속에서 다음 주문을 외친 것은 그야말로 의지를 넘어선 집념에 가까웠다.
“너, 칼날보다 부드러운 불꽃이여. 맹독의 꼬리가 되어 심장까지 꿰뚫으라, 스콜피온 파이어!!”
- 쿠화아아아악!!!
내 가슴 속에서 뿜어져 나온 전갈 꼬리 같은 날카로운 불꽃이 빛을 뿌리며 눈앞을 향해 뻗어나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 불꽃이 뿌리는 찬란하고 뜨거운 빛.
그리고 흑룡이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뿐이었다.
육체가 전부 녹아내리고 구겨지는 것 같은 충격 속에서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스콜피온 파이어에게 마력을 쏟아부으며 버텼지만, 결국 무언가에 부딪쳐 어디론가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비통한 용의 비명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울려 퍼졌다…….
“……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멍하고 몽롱했던 의식이 점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헌!”
마침내 완전히 눈을 뜨자마자 느낀 것은 전신에서 올라오는 따끔따끔한 고통과 뭔가가 불에 탔을 때 나는 탄내였다. 손끝을 까딱여 보자 그 따끔거림이 한층 더 심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기까지 확인한 뒤, 느리게 눈을 굴려 옆을 보았다.
“…….”
유완이 나를 품에 안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지 않은 것을 보면 내가 성공한 모양이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입꼬리를 힘들게 올려 웃자 유완이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죽은 줄 알았다.”
“죽은 줄 알았다면서… 왜 왔는데?”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끔찍하리만큼 쉬어 있었다. 미스트를 하면서 몸 상태가 이렇게까지 최악이 된 것은 정말 처음이라 조금 신기했다.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니까.”
약속이니까 왔다는 둥의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유완의 답은 언제나처럼 내 예상을 벗어났다.
나는 약간 근질근질한 기분을 느끼며 유완의 시선을 피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좀 부끄러웠다.
“……흑룡은?”
“내가 여기에 왔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유완이 간략하게 대답하며 내 몸을 안아 올렸다.
“윽……. 좀 살살…….”
“직접 봐. 네가 만든 풍경을.”
나는 유완의 품에 안긴 채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뭐야, 이게.’
용이 있었던 골짜기는 이제 검은 돌무더기만이 가득한 빈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 거대한 육신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지만 어쩐지 저 검은 돌무더기가 그가 남긴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초토화되고 돌무더기만 남은 풍경을 보니 이것이 내가 한 일이 맞는가 싶어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으나 일단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맞기는 한 것 같았다.
나는 한참 동안 뻥 뚫린 골짜기를 바라보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몸에 힘을 뺐다.
“……그래. 내가 이긴 게 맞나 보다.”
“응.”
유완이 내 몸을 조심스럽게 추슬러 안았다. 나는 로브 바깥으로 드러난 내 손과 발이 전부 새카맣게 변해 있는 것을 보고 대체 무슨 꼴이 되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죽지 않은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유완에게 온전히 몸을 맡겼다.
“크란은?”
“그 녀석은…… 위쪽에.”
유완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 고개를 드니 까마득한 절벽만이 보였다. 우리가 아까 마신의 신전을 통해 끝없는 계단을 따라서 내려온 그 거리를… 설마 그 짧은 시간 안에 도로 갔다 왔다는 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유완이 친절히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절벽을 타고 올라가서 내려놓고 다시 왔다.”
“……그래.”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라… 그것도 부상자를 동반한 상태에서 말이지.
어떻게 한 것인지 몹시 궁금했지만 그것은 내가 올라갈 때에 곧 밝혀질 일이다 싶어 더 묻지 않았다.
- 띠링!
그때,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인식한 듯 퀘스트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