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다 보니 문득 몸에 오한이 들었다.
추위에 떨며 이불을 끌어당겼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작게 기침을 하다 겨우 눈을 떴다. 몽롱한 시야 너머로 밝게 반짝거리는 것이 보여 뭔가 했더니 몇 개의 홀로그램 화면이 허공에 떠서 바쁘게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출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화면들 앞에 등을 약간 구부린 채 앉아 있는 안경 쓴 남자의 뒷모습이 하나.
‘……아. 그렇지.’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가 진제환이라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오늘은 내가 검도장에 첫 출근을 했던 날이었다. 원래는 이틀 전 이루어졌어야 했을 일이었지만 여러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오늘 하게 되었는데, 진제환은 그런 나를 심각하게 걱정해 바이크를 끌고 데리러 왔다가 나중에는 여기에서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본래는 저녁만 먹고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또 불이 붙어서…….
‘나 참…….’
처음으로 몸을 섞은 것이 이틀 전인데 그 이틀 사이에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또 하다니. 진제환이야 그렇다 쳐도 나도 참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부담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번 불이 붙으면 거절할 수가 없다니 평소의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진제환과 하는 것이 허리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좋기는 하다. 심지어 할 때마다 더 좋아져서 잠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했을 때는 처음으로 앞에 손을 대지 않고도 이상한 기분을 느꼈었다. 진제환은 그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는데, 아무리 보아도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내가 이 관계의 진행 속도를 제지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이유가 단순히 쾌감 때문만은 아니다. 아까 하면서도 생각했었지만, 나는 요즘 진제환과 있을 때 마음이 상당히 안정되는 것 같았다.
본래 성격은 내게 보여주는 것보다 더 거침없을 녀석이 그 성질을 죽이고 내가 싫어하는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옆에 있어 주는 것이 고마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요즘 스스로 감내하기 어려운 일들을 상당히 많이 겪은 상태라 누군가의 온기가 특히 그리웠기 때문일까. 둘 다 아니라면 그냥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는 상대라는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나는 요즘 혼자 있는 것보다 둘이 있을 때가 더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오밤중에 일어나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저 녀석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진제환은 내 접속 헤드를 무릎 위에 올려둔 상태였다. 그곳에 연결된 선들이 바닥에 놓여 있는 VT수첩으로 이어지는 것이 어둠에 묻혀 희미하게 보였다.
‘내 접속기기 조사라면 이제 다 끝난 거 아니었나?’
조금 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려 했지만 서늘한 새벽 냉기가 코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그만 재채기가 나와버렸다. 입을 막고 재채기를 한 다음 고개를 들자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진제환과 눈이 마주쳤다.
“……나 때문에 깬 건가? 미안하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저은 뒤 진제환의 머리 너머로 계속해서 숨 가쁘게 글자가 올라가고 있는 홀로그램 화면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뭐 하고 있었던 거냐.”
“아.”
진제환이 제 뒤쪽의 화면을 슬쩍 돌아보더니 손을 휘저어 밝기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그냥. 혹시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르니 좀 더 조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아무리 그래도 자다 말고 나와서 조사를 하다니, 피곤할 텐데…….
묘한 기분이 되어 바라보자 진제환이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 충분히 잤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파악한 진제환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훑었다. 간지러운 촉감 때문에 슬며시 눈을 감자 따뜻한 손가락이 눈가로 내려와 그 부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더 자.”
너도 그냥 더 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눈빛을 보니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냥 자리에 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진제환이 하우스 컴퓨터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령하는 것이 들려왔다.
“실내 온도를 좀 더 높여. 무헌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 하지만 지금이 적정……. ]
“조용히 해.”
[ ……. ]
무어라 말하려던 하우스 컴퓨터가 진제환의 말에 입을 딱 다물었다. 역시 성격이 이상하다 해도 결국은 주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컴퓨터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삼키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곧 다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무헌아, 지금 뭐 해? ]
나는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민후의 메시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현재 나는 검도장에 나와 아이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 장난을 치던 인우와 세종이에게 사이좋게 내려치기 300번씩 시키고 나서 막 한숨을 돌리려 앉았더니 온 메시지가 이것이라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 일하는 중인데. ]
[ 일? 무헌이 네가? 무슨 일? 언제부터 일했는데? 왜 나한텐 안 알려줘?! ]
연속으로 이어서 미친 듯이 도착하는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조금 현기증이 났으므로 나는 화면을 멀리 보내 놓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 보니 민후에겐 내가 현실에서 정확히 뭘 하고 사는지는 말을 안 했었던가?
[ 꽤 됐어. 그냥 운동하는 거 가르쳐. ]
[ 무슨 운동?! ]
이 자식, 집요하기가 이를 데 없군…….
나는 그냥 뭉뚱그려 대답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하고 솔직하게 답장을 썼다.
[ 검도. ]
[ 검도 할 줄 알아?!?!!! ]
[ 옛날에 했었어. 사범 자격증이 있어서 아르바이트로 가볍게 하는 거야. ]
[ 몰랐어!!! 그래도 진짜 멋지다. 어디서 해? 나는 못 배워? ]
음… 왠지 이 대화의 흐름에서 기시감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예전에 진제환이 내가 검도하는 곳에 따라왔을 때의 흐름과 뭔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침묵하고 있자 민후의 메시지가 이어서 한 개 더 도착했다.
[ 아, 그보다 지금 시간 괜찮으면 미스트 공식 홈페이지 들어가 볼 수 있어? ]
[ 왜? ]
[ 왜겠어? 당연히 내 동영상이 공개됐으니까 그렇지. ]
뭐? 나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우와 세종이가 벌칙을 다 끝내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잠깐 영상 하나 보고 오는 시간 정도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테니 괜찮으리라.
서둘러 휴게실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마자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뒤를 돌아보자 남색 도복 차림의 진제환이 이마에 약간 맺힌 땀을 닦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구석에서 혼자 단련을 하는 진제환은 내가 조금이라도 자리를 비우려 할 때마다 어디선가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바로 옆에 붙어 있고는 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 말했지만, 소용이 없는 걸 보면 이전에 있었던 괴한 침입 사건이 진제환에게 필요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아니. 잠깐 휴게실에서 좀 볼 게 있어서…….”
“뭘?”
생각해 보니 진제환도 어차피 미스트를 하니까 영상을 볼 거라면 같이 보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녀석의 도복 자락을 끌고 휴게실로 향했다. 진제환이 따로 무언가 더 묻지 않고 얌전히 끌려와 주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휴게실 안을 거의 꽉 채운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놓고 홀로그램 모드로 미스트 공식 홈페이지를 켰다. 곧 휴대폰 위쪽에서 생성된 빛이 엷은 막으로 변하면서 홈페이지 화면이 나타났다.
민후의 말대로 그곳에는 10분 전쯤 업로드된 새로운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내가 무엇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알아차린 듯 진제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같이 볼 거냐?”
혹시나 싶어 마지막으로 묻자 진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화면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영상을 재생했다.
[ ……. ]
그러자 순식간에 쭉 늘어나 두 사람이 충분히 볼 만큼 커진 화면 속에서 곧 빛이 암전하며 음울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여신께서 직접 그분의 선봉에 설 성기사를 지목하시다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500년 전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일이 아닙니까. ]
[ 하지만 사실입니다. 신탁이 내려왔으니 여신의 종들은 따라야겠지요. ]
어둠이 조금 밝아지며 드러난 곳은 새하얀 돌로 쌓아 올린 신전 기도실이었다. 얼굴을 베일로 가린 여신상 앞에 선 몇 명의 사람들이 심각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루그 신전인가… 옷을 보니 사제들이군.’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없긴 했지만 루그의 사제는 루그의 성기사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아 유저들 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이었다. 도시를 지나다니다 보면 자주 눈에 띄었던 푸른색 사제복 덕분에 나는 빠르게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 애초에 그 신탁이 진실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한단 말입니까? 최고 사제님께서 직접 받은 신탁도 아닌데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사제가 고개를 저으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주변에 둘러선 이들의 분위기는 상반되어 있었다. 몇 명은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으나 나머지는 모욕당한 사람처럼 분노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 어떻게 여신을 모시면서 그런 불경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 신탁을 받은 이가 비록 나이 어린 사제라고는 하나 저도 그 순간 강림했던 성스러운 빛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자는 여신의 종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
[ 말이 심한 것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
날카롭게 대꾸한 이는 사제들 중앙에 앉아 있던 머리칼을 단정하게 위로 틀어올린 여성이었다. 입은 사제복은 같아도 그녀의 말에 실린 무게가 남달라서인지 신탁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던 이도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 루그께서는 그분의 종들로 하여금 오로지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교단 내에는 여신의 뜻을 함부로 의심하고 선이 아닌 다른 가치를 따르려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지요. ]
[ 지금 제가 그런 자라고 말하려는 것입니까?! ]
[ 그러면 아닙니까? ]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순간적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 당신이 기도를 멀리하고 더러운 뒷골목을 헤매며 수상한 마법사들과 몇 번이나 만났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알았다면 오산입니다. 오늘 여신의 뜻을 부정한 것을 보면 그 속내는 뻔하지요. 북쪽에서 밀려오는 어둠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 여신께서 움직이려 하시는 것을 막고 우리 교단을 분열시키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
[ 어찌… 그런 모욕적인 말을……. ]
긴 수염을 부르르 떨며 남자가 고개를 저었지만, 여자는 웃음기 하나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그 시선에 진 것처럼 고개를 슬그머니 숙인 건 남자 쪽이었다.
[ 나, 루그의 두 번째 지팡이 킬레인은 여기에서 선언합니다. 이 순간 이후로 우리는 여신이 지목하신 바로 그 성기사와 뜻을 함께합니다. 이를 부정하는 자들은 교단에서 즉시 파문할 것이며 두 번 다시 여신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긴 수염을 기른 남자와 그의 곁에 앉아 있는 이들은 찌푸린 표정을 참지 못했다.
[ 지금 여신께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 성기사가 저 문 뒤에 있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를 정식으로 팔라딘으로 임명하려 합니다. ]
[ 팔라딘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어린 자에게 어떻게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
[ 500년 전 마지막 팔라딘을 맡았던 팔라딘 디그너티는 18세에 그 자리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나가시오. 말리지 않을 테니. ]
[ 이건 완전히 협박입니다! 나는… 나는 결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
긴 수염을 기른 사제는 결국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본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올렸다.
[ 들어오시오, 신의 부름을 받은 자여. ]
무거운 나무문이 천천히 열리며 긴 울음소리를 냈다. 모든 다툼이 멈추었고 긴 그림자가 빛 사이로 드리워졌다. 단단한 금속으로 뒤꿈치 부분을 덧댄 부츠가 흰 돌로 이루어진 바닥을 절도 있게 밟을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규칙적인 그 발걸음이 천천히 가까워져 마침내 사제들의 앞에 당도했을 때, 그의 발만을 비추던 카메라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 드디어 얼굴을 드러내었다. 당연히도 그는 크란이었다.
[ 고개를 드시오. ]
영상 속에서 유난히 성스럽고 신뢰감 넘치게 빛나는 얼굴을 보니 내가 알던 크란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색이 연한 금발에 피처럼 붉은 눈동자다 보니 더 그런 느낌이었다.
[ 우리는 당신을 팔라딘으로 임명하기로 했습니다. 팔라딘이 된다면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곧 여신의 역사가 됩니다. 젊은이에게 맡기기에는 우려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지요. ]
크란은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 하지만 여신께서 당신을 선택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신의 종으로서 그분의 선택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이제부터는 여신의 선봉에 서는 자가 되었다는 책임감을 가지십시오. 알겠습니까? ]
크란이 입을 벌려 무어라 대답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단호하게 끄덕이는 고개를 보면 대답이 무엇이었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좋습니다. 이리로. ]
여자가 일어나 뒤쪽에 있는 제단 위로 올라갔다. 긴 수염의 사제와 뜻을 함께하는 듯한 몇 명의 사제를 제외한 다른 사제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 제단 앞에 양옆으로 줄을 맞춰 늘어서자 기도실은 순식간에 엄숙한 분위기로 변했다. 크란은 늘어서 있는 사제들 가운데로 나아갔다. 그의 시선이 잠시 긴 수염의 사제 쪽으로 향했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맨 앞으로 나아간 크란은 검을 검집째로 뽑아 앞에 놓은 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긴 망토가 펄럭이며 바닥 위를 덮었다.
[ 모든 이의 상처를 돌보시는 자애로운 여신이여. ]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것에 반응하듯 제단 위에 걸린 작은 여신상이 빛나기 시작했다.
[ 당신의 위대한 지팡이들 맨 앞에 설 기사가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
파아아앗 하는 소리와 함께 여신상에서 더욱 강한 빛이 폭발하자 기도실 안은 새하얗다 못해 푸르른 빛으로 가득 찼다. 여자는 그 빛을 소중하게 양손에 물처럼 담은 뒤 크란의 앞에 다가가 그의 머리 위에 빛을 쏟아부었다.
밑으로 쏟아진 빛을 맞은 크란의 몸이 흰빛에 먹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지켜보는 다른 사제들의 얼굴에는 경외심만이 가득했지만 긴 수염을 가진 사제만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 루그의 이름을 등에 질 가장 영광된 자, 팔라딘 디그너티의 뒤를 이어 500년 만에 팔라딘이 될 그를 축복해 주시고 부디 저희의 앞길을 밝혀주십시오. ]
마침내 빛을 전부 쏟아부은 여자가 크란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기도문을 외웠다. 그녀가 기도문을 외우는 동안 다른 사제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된 다른 기도문을 중얼거렸고, 모든 목소리가 조화롭게 일치한 순간 거대한 울림이 퍼져 공간을 가득 채웠다. 색색 유리로 장식된 작은 유리창들 너머로 흘러들어온 빛까지 합쳐져 장엄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 팔라딘께 어둠을 꺼트릴 영광이 함께하기를. ]
[ 함께하기를. ]
모든 목소리가 일치해 기도를 마무리하자 빛도 서서히 사그라졌다. 크란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머리 위에 푸른빛이 햇살처럼 동그랗게 퍼져 나오는 것을 모두가 볼 수 있었다. 그의 앞에 세워져 있는 루그 여신상의 머리 위에 씌워져 있는 것과 같은 생김새였다.
[ 성스러운 후광이 임하셨군요. ]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 여신께서는 당신을 허락하셨습니다. 팔라딘이여, 이제 우리는 어둠의 힘을 퇴치하는 것에 있어 당신의 뜻을 여신의 뜻처럼 여기며 따를 것입니다. 부디 최선을 다해 그분의 선택에 부끄럽지 않은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
크란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평소의 크란처럼 빙구 같은 미소가 아닌 약간 싸늘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 팔라딘, 이제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는 무얼 할 생각입니까? ]
[ ……. ]
그 말을 들은 크란이 검집을 도로 허리띠에 매단 뒤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기도실의 문이 열리며 바깥의 풍경이 일제히 영상 속에 드러났다. 숲속에 비밀스럽게 위치해 있는 작은 신전 바깥은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이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중이었다. 몸에서 불길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들 때문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고, 사제들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가득 찼다.
그것을 본 긴 수염의 사제가 속 시원하다는 듯 웃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 그러게 내가 뭐라고 말했소? 팔라딘을 세우고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겠다는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결국 선택의 신전까지 오고야 말다니. 여신의 뜻이라는 말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이제 끝이요. 당신들은 여기에서 전부 저세상으로 돌아가 줘야겠어. ]
[ 당신, 기어이 여신의 뜻을 배신하는군요. ]
[ 그래. 나는 나의 진정한 주인을 본 순간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신 따위는 믿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어둠의 주인만이 나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도 초개같이 바칠 것이야. ]
여자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친 긴 수염의 사제가 바깥을 포위한 이들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 전부 죽여! 죽여 없애라! ]
[ ……후후. ]
심각한 분위기였지만 재미있다는 듯 웃은 크란의 목소리에서 그런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우, 웃어? ]
기막힌 얼굴로 노려보는 긴 수염의 남자를 흘긋 쳐다본 크란이 막 기도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검은 옷의 남자 한 명을 향해 가볍게 검을 뽑아 휘둘렀다. 거리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크란의 검 끝에서 쏘아져 날아간 흰빛이 순식간에 적을 가르고 그 뒤의 문까지 가르면서 폭발해 버렸다.
콰콰쾅!!
[ 으아악! ]
[ 이, 이게 무슨! ]
혼비백산한 긴 수염의 사제가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크란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사제들에게 눈짓을 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 얼굴을 마주한 사제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제단 위로 올라갔다.
바로 그것이 크란이 원했던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마지막 사제 한 명까지 전부 제단 위로 몸을 피하자 크란은 절도 있는 몸짓으로 어깨를 돌렸다. 긴 망토가 한 바퀴 부드럽게 돌아 등을 감쌌다. 영상 속이라 분위기를 전부 선명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적들을 바라보는 크란의 눈빛에 자비가 조금도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표정만 보아서는 그다지 큰 전투를 앞에 둔 사람 같지 않았지만 눈은 달랐다. 밤하늘을 빛내는 번개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감추어졌다가 다시 드러났을 때, 엄숙했던 영상의 분위기는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었다.
[ 어둠을 따르는 자들을 모두 집행한다. ]
영상 속에서 처음으로 크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든 검에서 흰빛이 폭발했다. 반파된 기도실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크란을 막을 수 있었던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화려한 살육의 장이었다. 크란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적들은 거의 반항다운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스러져 갔다. 그러나 본래대로라면 잔인하기 짝이 없어야 할 장면이 검에서 흘러나오는 성스러운 흰빛으로 이루어진 각종 스킬들 때문에 거의 묻혔으므로, 영상을 보는 입장에서 느껴진 것이라고는 그저 압도적인 힘뿐이었다.
‘저 녀석, 저렇게 강했었나?’
함께 싸울 때 보았던 스킬들도 몇 개 있었지만 여기서 처음 보는 스킬도 많았다. 크란이 땅에 검을 꽂고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검신을 타고 땅으로 내려가 태양 빛이 뻗어 나가듯 폭발하는 흰빛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마지막 남은 검은 옷의 남자마저 결국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크란은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상쾌하게 검을 넣고 기도실 안으로 들어왔다. 긴 수염의 사제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크란을 보고 있었다.
[ 어, 어떻게… 그 많은 이들을 단신으로……. ]
그는 결국 말을 끝내지 못한 채 크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얼굴이었다.
[ 감사합니다, 팔라딘. 과연 여신께서 선택한 기사답군요. ]
제단에 피신해 있던 사제들이 내려와 크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크란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이 긴 수염의 사제에게로 가 닿자 머리를 틀어올린 여성 사제가 그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 저들은 곧바로 파문될 것입니다. 여신께서 내려주신 은총을 잊은 자들에게 용서는 없습니다. ]
[ ……. ]
크란도 그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기도실 중앙에 있는 여신상은 방금까지 일어난 전투가 마치 허상이었던 것처럼 말갛게 빛나는 중이었다.
[ 우리는 마신의 힘이 되살아나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저지할 것입니다. 그러니 팔라딘이여, 당신은 뒤를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
사제들이 크란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영상 속에 비친 크란은 사람들의 뜻을 양어깨 위에 당당히 짊어진 리더처럼 보였다.
이윽고 영상이 천천히 크란의 웃는 입매를 비추었고, 서서히 어두워지며 암전되었다.
[ 어둠을 따르는 자와 막으려는 자. 당신은 어디로 향할 것입니까? ]
[ 에피소드 3. 기억의 재래 ~ 일곱 번째의 재래 ]
마지막으로 살짝 떠올랐다가 사라진 문구를 마지막으로 영상 재생이 끝이 났다.
“…….”
나는 조용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진제환은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까 대화를 나누다 말았던 민후와의 메시지 창을 도로 열어 답장을 입력했다.
[ 지금 다 봤다. ]
[ 봤어? 어때? ]
민후의 답이 곧바로 도착한 것을 보니 상당히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은 뒤 아마 민후가 바라고 있었을 답을 해 주었다.
[ 멋있던데. ]
[ 그치? 하하핫. 내가 좀 한 멋짐 해. ]
[ 언제 찍은 거냐? ]
[ 얼마 안 됐어. 너희를 다시 만나기 거의 바로 전쯤. ]
[ 얼굴 공개한 건 괜찮고? ]
혹시나 싶어 묻자 민후가 잠시 후 답을 보냈다.
[ 괜찮진 않겠지. 그래도 앞으로 시저에게 대항할 세력을 모을 때 내가 길마로서 구심점이 되어야 하니까 얼굴을 알릴 겸 공개해 달라고 했어. ]
그런 의도가 있었군……. 새삼스럽지만 매우 대단한 결정이었다. 나라면 아마 민후 같은 입장일 때 아무리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 해도 얼굴을 공개하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 그래. 힘내라. ]
[ 하하. 무헌이가 멋있다고 해 줬으니까 힘낼게. 그러면 일 잘하고 다음에 나도 찾아가 보게 어딘지 알려줘! ]
민후는 기어이 내가 일하는 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포기하지 않은 채 메시지를 마무리했다. 화면을 내려다보며 조금 골치 아프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 얼굴을 보았는지 진제환이 말을 걸었다.
“그 녀석인가?”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녀석이라는 게 민후를 지칭한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진제환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신났겠군.”
“어떻게 알았어?”
“뻔하니까.”
나와 민후가 이야기한 내용을 보지도 않았을 텐데 확신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조금 웃음이 나왔다. 역시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해도 진제환은 민후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둘이서 좀 더 사이좋게 지내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두 녀석 다 공교롭게도 내게 고백한 이상 그건 아주 힘들 것이란 사실도 이제는 알았다.
적어도 민후는 내 생각을 안다면 잔인하다고 여기겠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나는 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는 동안 몸이 식어서인지 무릎이 평소보다 좀 더 나무토막 같았다. 한 발짝 내딛자마자 비틀거리는 나를 빠르게 부축한 진제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았다.
“…괜찮아? 혹시 아픈 거라면 지금 바로…….”
“괜찮아. 여기 있는 동안 몸이 식어서 그런 것뿐이야. 병원은 그렇게 자주 가고 싶은 곳이 아니니까 됐어.”
부축한 팔 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진제환의 힘은 강했다. 나는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는 놈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다고 했잖아. 지나친 걱정은 그만해.”
“……응.”
“손 풀어.”
“…….”
그제야 진제환이 겨우 허리를 감은 손에서 힘을 뺐다.
“무헌. 무리하지 마라.”
“무리한 적 없어. 지금까지도 계속 입만 움직여서 지도하고 있었던 건 뭘로 본 거냐?”
지구 최고의 과보호 부모 같은 소릴 지껄이는 녀석을 향해 피식 웃은 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사범님! 저희 다 끝났어요! 이제 놀아도 돼요?”
인우와 세종이가 멀리서 손을 붕붕 흔들며 팔짝팔짝 뛰어댔다. 땀투성이가 된 녀석들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마음이 들어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그래, 그러면 다음은 머리치기, 손목치기, 허리치기 동작 100번씩만 하자. 각 범위는 머리부터 어깨, 주먹부터 어깨, 허벅지부터 겨드랑이까지인 것은 알고 있겠지? 정확하게 해야 한다.”
“으악. 너무 많아요!”
“놀 정도로 기력이 남아 있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한 번이라도 범위를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
“너무해요!”
아이들이 악악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결국 녀석들이 시킨 대로 따라 주리란 사실을 알았다. 인우와 세종이는 나이치고 실력이 좋은 편이었다. 근성도 좋고 눈치도 좋은 녀석들이 오랜만에 온 내 가르침을 싫다고 뻗댈 리 없으니 결국에는 징징대면서도 내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결국 아이들이 어깨를 늘어트리고 사이좋게 죽도를 들고 사라진 뒤 나는 참고 있던 웃음을 삼켰다.
‘저 녀석들을 직접 가르쳐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어릴 적에는 사부님께 직접 하나하나 자세 교정을 받으면서 검도를 배웠다. 사부님은 나를 위해 연습 상대도 얼마든지 해 주셨고 이해를 잘 못할 때는 손수 몇 번이나 시범을 보이는 것도 개의치 않으셨다. 그 때문인지 나는 이런 식으로 멀찍이 서서 말로만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진짜 가르치는 것 같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 모두 내 몸이 건강했다면 아주 쉽게 할 수 있었을 일들인데…….
아쉬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제환의 시선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진제환은 내 약한 모습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이런 마음까지 대놓고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검도장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한 뒤 함께 바이크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내 휴대용 접속기부터 쥐고 조사하는 진제환은 방금 전까지 힘든 운동을 마친 사람답지 않게 차갑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원하던 답을 얻었음에도 진제환이 계속해서 저 안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본인은 혹시나 놓친 것이 있을까 봐 조사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했지만 단지 그것뿐이라기에는 너무나 치열해 보이는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진제환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진제환이 내가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듯이 나 또한 진제환에게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관계는 내가 여태 사귀어 왔던 친구 관계와는 다르다. 각자 비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신뢰와 신뢰 이상의 감정이 비밀 위를 촘촘히 감싸 얽혀 있었다. 진제환과 진짜로 피부를 겹쳤던 그날부터 나는 내 마음속에서 가장 견고한 벽 하나를 녀석을 위해 열어두기로 했다.
어쩌면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이다. 지금까지는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유완과 크란을 이끌고 지도 위의 붉은 점이 반짝이는 곳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생각보다 매우 짧고 빨랐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을 뚫는 건 어렵지만 한 번 가본 길을 다시 가는 것은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그사이 몸에 두른 아이템들을 대폭 바꾸면서 능력치도 엄청나게 오른 덕에 나는 이전보다 훨씬 컨디션이 좋아진 상태였다.
엄청나게 많은 몬스터와 마주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키자르 산맥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마물들은 간혹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가는 동안 마주친 녀석은 없었다. 유완은 아마도 그것이 마물들을 통제하는 기운이 흘러나오는 본거지에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어둠의 기운이 강한 곳에 있을수록 마물들은 잘 돌아다니지 않는다.”
“왜?”
“그것들을 곧바로 통제해서 사용해야 하는 이가 주변에 있다는 뜻이니까.”
“흠…….”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마물은 일반 몬스터와 다르다. 일반적인 몬스터들은 각자 서식지가 있고 그곳에서 살아가지만, 마물은 정상적으로 이 땅에서 서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신의 힘으로 마계에서 소환된 존재라는 것이 그동안 내가 슈페리어의 기억을 보면서, 또 유완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이었다.
아마 유완이 말한 ‘마물들을 곧바로 통제해서 사용해야 하는 이’란 마물을 소환한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소환하여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을 테니 제 주변에 두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이곳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것은 시저일 수도 있고 그 외의 페일 나이츠 기사단의 누군가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또 하나의 슈페리어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제4의 존재이거나…….
‘뭐가 되었든 곧 목적지에 도착하니 조심해야겠지만.’
혼자라면 몰라도 지금은 마물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박사가 따로 없는 유완과 성기사라는 직업 특성상 어둠과 관련된 쪽과는 상극인 크란이 양옆에 있었으므로 매우 든든했다. 유완과 크란은 지닌 속성은 정반대인데 각자의 이유로 마물 처리에 자신 있는 녀석들이란 것이 새삼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프.”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앞서 나가던 크란이 목소리를 낮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쪽에 뭔가가 보이는데.”
“어디.”
나는 발소리를 죽여 크란의 곁으로 다가갔다. 지금껏 걸어온 고요한 숲의 저편, 커다란 절벽 아래로 이어지는 넓은 공터에 뭔가 움막 같은 것들이 가득 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로 바삐 돌아다니는 것들은 내가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었다.
키는 작은데 원시인처럼 풀이나 나무껍질로 엮어 만든 옷 쪼가리를 걸치고 있었고, 생김새는 오크와 뿔 달린 산양을 반씩 섞어둔 것처럼 닮았다. 나름의 언어 체계도 있는지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모여서 대화를 하는 것도 보였다.
“…저게 뭐지.”
“마물의 일종이다. 이름은 굴락.”
내 곁으로 다가온 유완이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고 지능이 높은 편이다. 그 지능을 통해 떼를 지어 무기를 사용하면서 공격할 수 있지. 영리하기 때문에 웬만한 눈속임은 통하지 않고 수가 많아서 빠르게 처리하기가 어렵다.”
“전에 상대해 본 적이 있어?”
“아니.”
쉽게 볼 수 있는 놈들이 아닌 것 같아서 물어보니 유완이 고개를 저었다. 상대해 본 적이 없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안단 말인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유완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을 보탰다.
“본 적은 없지만 다크 나이트 패시브 스킬 덕분에 바로 알 수 있다.”
“직접 본 적이 없어도 적용되는 거냐, 그 스킬.”
“과거의 다크 나이트로부터 이어진 정보의 기억이라는 설정이라서.”
유완은 참고로 굴락의 등급은 AAA+등급이라고 말해 주었다. 무력이 뛰어나지 않은데도 지능을 잘 사용하는 것이 높은 등급을 매긴 이유라는 듯했다.
“그런 녀석들이 떼를 지어서 여기에 있다는 건… 확실히 적의 본거지에 다다르긴 한 모양이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크란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거의 마을을 이루고 있으니 빠르게 처리하기는 어려워 보여. 돌아서 가기도 어려울 것 같고……. 카프, 어떻게 할 거야?”
“아무래도 탐색이 먼저겠지.”
나는 그렇게 말한 뒤 가볍게 눈을 감았다.
“에어리얼 서번트.”
- 후우욱!
곧 내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바람 한 줄기가 나의 의지를 따라 소리 없이 앞으로 날아갔다. 감은 눈꺼풀 안쪽에 비치는 것을 통해 나는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약간 부담을 느꼈을 6서클 마법이지만 슈페리어의 로브 때문인지 몸이 아주 가뿐했다. 머리도 맑아서 에어리얼 서번트를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낄 수 없었다. 새삼스럽지만 좋은 능력을 가진 아이템의 효과란 참 놀랍다고 생각했다.
여태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래서 다들 좋은 아이템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자… 더 앞으로 나아가 볼까. 마물들을 피해서 안쪽으로…… 옆으로. 다시 앞으로… 위로……. 음. 저건 뭐지?’
굴락들은 자신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날아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넘기는 듯했다.
덕분에 마음대로 굴락들이 지어 놓은 움막 사이를 헤치고 날아다니던 나는 문득 보이는 어떤 것을 알아차리고 에어리얼 서번트를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만들었다.
‘……우리…인가?’
그것은 어디로 보나 단단한 철로 만든 커다란 짐승 우리였다. 굴락들이 직접 옮길 수는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큰 짐승 우리 안에는 몇 마리의 굴락이 갇혀 있었다. 갇힌 굴락들은 힘없이 앉아 있었는데, 나머지 굴락들이 그 앞을 지나면서도 일절 못 본 것처럼 무시하는 것을 보니 감옥 역할이라도 하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마물이 그 정도의 사회화가 되어 있을 수 있나?’
의아해하며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동안 갑자기 주변 굴락들이 시끄러워졌다.
“끼이이! 끼이!”
“끼이이익!”
그와 동시에 움막 사이에 있던 바위틈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로브를 걸친 인간이었다. 산맥 안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보는 인간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긴장해 몸에 힘을 주었다.
“끼이이, 끼이이!!”
그는 자신을 두려워하며 멀리 도망치는 굴락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천천히 걸어 굴락들을 가두어 둔 우리 쪽으로 향했다. 나는 혹시나 그가 멀리 숨어 있는 나와 유완, 크란을 눈치챌까 싶어 잠시 눈을 뜨고 둘에게 눈짓을 했다.
“…누군가 저곳에 왔어. 몸을 낮추자.”
“누구?”
“그건 아직 몰라.”
유완과 크란이 내 말에 따라 천천히 몸을 낮추어 나무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나 역시도 큰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어 앉은 뒤 다시 눈을 감고 온전한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끼아아! 끼익!!!”
우리 안에 갇혀 있던 굴락들은 언제 그렇게 얌전했느냐는 듯 발광하며 몸부림쳤다. 빠져나가고 싶은 것인지 창살을 잡고 흔들거나 매달리는 놈도 있었지만 로브를 입은 남자는 그것을 보면서도 한 치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시끄럽군. 사일런스.”
“끼……!”
남자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팟 하고 흘러나온 붉은빛이 우리 전체를 감쌌다. 그러자마자 굴락들은 입을 열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놈들이 깜짝 놀라 목을 부여잡고 뒹굴거나 비명을 질렀지만 무슨 짓을 해도 소리가 되어 나온 건 없었다.
‘마법……인가?’
나는 남자가 사용한 것이 마법인지, 아니면 특수한 스킬인지 알 수 없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손을 한 번 휘젓지도 않고 사용한 것을 보면 스킬일 가능성이 높은데, 효과나 느낌은 마법에 가까워 보였다. 물론 마법이라 해도 숙련도가 높아지면 서클을 그리지 않고 주문을 외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다지만, 적의 목소리를 일제히 빼앗는 마법이라면 그리 간단히 수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것 같은데 말이다.
그가 마법사라면 엄청난 실력자일 것이고, 아니라 해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일 듯했다.
‘확실한 건… 유저는 아닌 것 같군.’
굴락들을 조용히 만든 남자는 다음으로 잘 파악할 수 없는 짧은 단어를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허공에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푸른 연기가 굴락들을 가둔 큰 우리를 감쌌다. 잠시 후 그 거대한 철제 감옥이 무중력 공간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둥실거리며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게 마법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마법일까?
아무리 보아도 마법 같은데, 그는 여전히 서클을 그리지도, 주문을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내가 남자의 정체를 추리하는 동안 그는 손쉽게 들어 올린 우리를 앞세우고 느릿하게 걸어 바위틈 안쪽으로 도로 돌아갔다.
따라가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따라가 보기로 하고 에어리얼 서번트의 움직임에 더욱 집중했다.
‘좋아. 에어리얼 서번트, 앞으로 좀 더 나아가라.’
거대한 절벽이 벌어진 틈새는 말이 틈새일 뿐 거대한 우리도 둥둥 떠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었다. 남자는 그곳을 아주 쉽게 지나쳐 더욱 어둡고 불길한 길을 향해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둥둥 떠 있는 우리 안에서 굴락들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그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인 듯했다.
한참을 걸어 드디어 절벽의 반대편으로 빠져나온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에어리얼 서번트를 움직여 몰래 그를 따르고 있던 나는 혹시나 들킨 것인가 싶어 몹시 긴장했다.
“늦었어, 얀.”
그러나 그가 쳐다본 것은 내가 아니었다.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에서 벗어난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로브 차림의 남자가 씩 웃으며 우리 속의 굴락들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이놈들인가?”
“예에. 매번 직접 가서 가져오는 것도 지겹네요. 밀로 님은 언제 여기로 돌아오신 겁니까?”
우리를 들고 온 남자가 느릿하게 대꾸하자 새로 나타난 남자가 낄낄 웃었다.
“오늘 왔지. 뭐… 지겨운 것도 이해는 하지만 마스터가 듣는다면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 생각만 하고 끝내도록 해라. 자, 가자구.”
얀과 밀로. 나는 두 사람의 이름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었다. 두 남자가 입고 있는 로브는 색만 조금 다를 뿐 디자인은 아주 흡사했다. 그렇다는 건, 그들이 서로 같은 집단에 속해 있다는 뜻일까?
과연 이들은 뭘 하는 자들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걸까.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단단히 결계가 쳐진 산맥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인간들이라……. 어쨌든 아마도 나와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일 확률이 높겠지만 그래서 더더욱 정체가 궁금했다. 그들이 말한 ‘마스터’란 존재 또한.
에어리얼 서번트의 위치가 점점 더 멀어질수록 내게서 빠져나가는 마력 양도 늘어났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 정도는 모래사장에서 한주먹 퍼다 흩뿌리던 것이 양동이 하나 정도로 늘어난 수준에 불과했으므로 안정적으로 정신을 집중해 그들을 따라갈 수 있었다.
“얀, 그러고 보니 그건 어떻게 되었어?”
말없이 앞서 걷고 있던 밀로라는 남자가 얀이라 불렀던 남자에게 물었다.
“얼마 전 산 아래의 덜떨어진 놈들이 마물들을 빌려 갔다가 임무에 실패했던 것 말이야.”
“아, 그거 말이죠.”
얀이라는 남자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중이라더군요. 저희가 좀 더 강한 마물을 보냈어야 한다면서 난리도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한심한 녀석들이야.”
밀로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길드의 이름만 믿고 모인 녀석들이 마스터의 관대한 배려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우리를 제 하수인 취급하다니. 지금은 마스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가만히 있지만 때가 오면 그 녀석들을 반드시 잘게 찢어 마물의 먹이로 던져주겠어.”
“꼭 좀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군요. 그거라면 저도 구경하고 싶으니까 말입니다.”
얀의 대답에서 진심이 넘쳐났다. 거기까지 들은 뒤 나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길드의 이름만 믿고 모인 녀석들’이 혹시 페일 나이츠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마물들을 데려갔는데도 임무에 실패했고, 그것을 적반하장으로 따질 만한 집단이라면 얼마 전 내가 만났던 이들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한 내 생각을 뒷받침해 주듯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법사 학회 쪽은 이제 한동안 조용할 거야. 이번에 제대로 손보고 왔거든.”
“아직도 마스터를 경배하지 않는 놈들이 남아 있습니까? 그건 그것대로 놀랍군요.”
“마법사 학회의 늙은이들이 다 그렇지. 머리는 굳어서 전부 제 말만 옳다고 떽떽거릴 줄만 알잖아.”
“아직까지는 그래도 이용할 만한 모양이군요. 조금만 더 똑똑하게 굴었다면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하게 해 주셨을 것 아닙니까?”
“흐흐. 사실이긴 한데 자네 입에서 들으니 내가 너무 나쁜 놈 같군그래.”
두 사람이 언급하는 마법사 학회라는 건 아마도 각 도시에 흩어져 있는 위저드 타워를 관장하는 곳일 확률이 높았다. 마법사 학회를 저리 쉽게 언급하는 것을 보면 저들은 역시 마법사가 맞긴 한 듯했다.
그렇다는 건 내가 배운 적 없는 마법들을 주문도 없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NPC 마법사가 둘이나 여기에 있단 거군……. 순식간에 긴장도가 높아졌다.
나는 문득 이전에 토렐리트에서 갑자기 죽어 사라졌던 마법사 베르먼을 떠올렸다. 슈페리어의 탑 1층에서 홀로 연구를 하던 괴짜 마법사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에 타 죽었다던 의문의 살인사건……. 그때 토렐리트 위저드 타워 측에서는 단순히 원인 불명이라는 말만 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사 학회 소속 마법사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을 입에 담고 있는 저들을 보니 아무래도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베르먼은 저들에게 살해당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데 말이야. 아까부터 왠지 등 뒤에서 간질간질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며 따라가는 동안, 갑자기 밀로가 방금 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말을 걸었다.
“무슨 기운 말입니까? 전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분명 뭔가 느껴진다구. 쥐새끼처럼 자꾸 주변을 맴도는… 뭔가가 말이야. 블러드 체이스!”
- 파앗!
밀로가 내 쪽, 정확히는 에어리얼 서번트가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고 주문을 외쳤다. 그와 동시에 밝은 빛이 터져 나왔고 나는 아차 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졌을 때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뭘 하신 겁니까?”
얀이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묻자 밀로의 얼굴에 멋쩍음과 미심쩍은 기색이 떠올랐다.
“아니… 분명히 뭔가 있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이상하네.”
“생물을 감지하는 마법은 어렵고 위험하니 그렇게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신 건 당신이 아니십니까?”
“지금 같은 경우는 다르지.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곳이니 최대한 신중을 기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밀로는 여전히 에어리얼 서번트가 있는 쪽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감이 엄청나게 좋은 녀석이군.’
그가 사용한 마법이 살아 있는 생물을 탐지하는 마법이라 정말로 다행이었다. 만약 디텍트 매직을 썼다면 꼼짝없이 에어리얼 서번트의 존재가 탄로 났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혹시 몰라 약간 더 거리를 두고 나서 둘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좀 더 들어본 결과 나는 그들이 미스트 대륙 마법사 협회 소속의 마법사이며, ‘마스터’라는 사람을 따라 이곳에 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마스터’는 평범한 마법사에 불과했던 그들에게 아주 새로운 마법들을 알려주었다는데, 그 결과가 바로 내가 본 긴 주문 없이 사용 가능한 마법들인 것 같았다.
밀로는 얀의 선배였고, 두 사람은 각각 ‘마스터’의 명에 따라 서로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밀로의 임무는 마법사 협회의 다른 마법사들을 ‘설득’하는 것이었고, 얀의 임무는 마물들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굴락들을 가지러 온 것도 그 일환인 듯했다.
“다 왔군요. 같이 들어가시겠습니까?”
“그럴까?”
걸음을 멈춘 얀이 밀로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주변은 아직도 절벽 사이로 이어지는 깊은 산속인데 뭘 다 왔다는 것인가 싶었으나 잠시 후 얀이 손을 휘둘러 굴락들이 들어 있는 우리를 움직이면서 그 생각은 깨져 버렸다. 얀의 손길을 따라 움직인 우리가 그의 앞에서 갑자기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가듯이 스르르 사라진 것이다.
‘설마…….’
그리고 뒤이어 얀과 밀로도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면서 우리와 똑같이 스르르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에어리얼 서번트를 움직여 그들이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혹시 에어리얼 서번트가 마법이라서 그들이 간 곳으로 들어갈 수 없을까 봐 걱정했지만, 놀랍게도 그들이 사라졌던 곳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주변이 일그러지며 풍경이 훅 하고 변화하는 것이 보였다.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는 첩첩산중이었던 곳이 거대한 골짜기 위로 변했고, 얀과 밀로는 그 골짜기 위의 절벽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는 거대한 건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곳도 키자르 산맥에 속하는 곳인가?’
주변에 풀이나 나무는 전혀 없었다. 온통 검붉은 바위뿐인데다 희뿌연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이 자욱하게 깔려 있어 분위기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된 폐허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얀과 밀로를 뒤따라가며 주변 풍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곳의 지형은 상당히 특이했다. 일단 얀과 밀로가 걷고 있는 길 아래로 끝도 없이 펼쳐진 무저갱 같은 거대한 골짜기가 아무리 보아도 자연적으로 생긴 골짜기 같지는 않아 보였다. 산맥 한복판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지나치게 크고 둥근 구멍 같은 골짜기 가장자리로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들이 서로 이어지며 가느다랗게 감싸고 있는 형상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구멍 아래를 내려다보다 보니 어느새 얀과 밀로가 저만치 멀어져 있었기에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에어리얼 서번트를 움직였다.
“언제 와도 이곳은 참 으스스해.”
다시 따라잡고 나니 마침 밀로는 얀에게 말을 걸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흑룡의 저주일까? 아니면 어둠의 신이 강림한 장소라서? 둘 중 뭐가 정답이라고 생각해?”
흑룡의 저주와 어둠의 신이 강림한 장소. 나는 본능적으로 그 단어들이 내 퀘스트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것을 느꼈다. 흑룡은 아마도 마신의 기사와 함께했던 그 흑룡을 말하는 것일 터이고 어둠의 신이란 것은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토대로 생각해 보았을 때 분명 마신일 것이다. 그런데 저주라는 건 또 뭐지?
‘아무튼 여기가 마신이 강림한 장소라는 건가?’
“글쎄요… 둘 다일지도 모르죠. 그리고 지금은 그 둘을 전부 되살리기 위해 저희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으스스하다는 말은 삼가 주세요.”
둘을 전부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즉 마신과 흑룡을 되살리기 위해 이들이 행동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깨달음의 불이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마신과 흑룡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할 만한 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적어도 내가 알기로 그럴 만한 이는 둘뿐이었다.
하나는 시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또 하나의 슈페리어다.
나는 눈앞에서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 따위는 모른 채 걷고 있는 얀과 밀로가 말한 ‘마스터’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또 하나의 슈페리어겠지.’
생각해 보면 그는 옛날 위저드 타워에서 내 전직시험을 치러 주었던 노인 마법사이기도 했다. 위저드 타워는 마법사 협회 소속이니 이전에 이루미네가 말했듯이 또 하나의 슈페리어도 정체를 숨기고 마법사 협회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일 터였다.
그가 마신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그동안 마법사 협회에서 활동하며 저를 따르는 제자들을 만들었다면, 그리고 그 제자들이 마법사 협회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며 키자르 산맥에서 마물들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무시무시하기는 하지만 앞뒤가 모두 들어맞았다.
이 얼마나 대담하고 무시무시한 행동력인가.
그동안 또 하나의 슈페리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지만, 지금만큼 그의 존재가 소름끼치게 느껴진 것은 또 처음이었다. 지금껏 내가 아는 슈페리어는 마법에 대해서는 천재이지만 워낙 자신의 뛰어남을 잘 알고 있는 탓에 사회성은 좀 떨어지는 면모가 강했다. 그 이미지 때문에 또 하나의 슈페리어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마법사 협회 소속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에게 동료나 부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여태 넘겨 버렸던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그는 이 대륙에서 그런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부하들을 만들었을까? 어디서부터 그의 손이 닿아 있는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아닌 것일까. 나는 하나도 확신을 가지고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점에 전율이 들었다.
만약 얀과 밀로 같은 자들이 더 있다면 앞으로 필수불가결하게 일어날 전쟁에서 얼마나 어려워질지 불을 보듯 뻔했다. 적진에 마법사가 슈페리어 하나뿐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달라붙어 싸울 수 있지만, 주문도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수준의 NPC 마법사들이 더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도 마법사이기에 마법사의 전투가 얼마나 다수를 상대로 강력해질 수 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만약 또 하나의 슈페리어와 시저 쪽 협력자들, 그리고 크란이 만든 길드에 들어온 우리 쪽 사람들이 전쟁을 치르게 되었을 때 얀과 밀로 같은 수준의 마법사를 몇 명이나 상대해야 한다면 우리가 입을 피해는 말도 못 할 만큼 커질 터였다.
‘…이건 반드시 크란에게 이야기해 줘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얀과 밀로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내가 충격에 빠져 있는 동안 그들은 어느새 절벽 위의 건물에 도착한 상태였다. 오래된 티가 나는 거대한 건물은 대부분 검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왠지 낯이 좀 익었다.
내가 여기에 와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그런 적은 없었다. 그러면 어디선가 봤다는 것인데……. 슈페리어의 기억 중 하나인가? 아니면…….
“위대하고 잔혹한 어둠의 신이시여.”
열심히 기억을 더듬는 동안 앞으로 나선 얀이 굳게 닫혀 있는 검은 문 앞에서 양손을 벌리고 주문을 외우는 것 같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비천한 종에게 부디 자비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 쿠구구구궁…….
그가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검은 문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안쪽으로 열렸다. 열리면서 슬쩍 보니 그 문은 두께가 적어도 수십 센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열 수 없을 듯한 문이었다.
느릿느릿하게 열린 검은 문이 완전히 열리고 나서 드러난 안쪽은 죽음 같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혹시 그 안에 또 하나의 슈페리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에어리얼 서번트를 곧바로 없앨 생각이었다.
“마스터는 오늘 이곳에 방문하지 않으셨나?”
그때 밀로가 매우 시기적절한 질문을 했다. 얀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셨을 겁니다. 3일간 자리를 비운다고 하셨으니까요.”
나에게는 다행히도 또 하나의 슈페리어는 이곳에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안심하고 그들을 따라 에어리얼 서번트를 천천히 다시 움직였다. 혹시 에어리얼 서번트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까 봐 긴장했지만 들어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여태까지처럼 얀과 밀로의 뒤에 붙어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아무런 제약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검은 돌로 만든 긴 복도 양옆으로는 의미를 알기 힘든 부서진 조각상의 흔적이 보였다. 천장과 벽에는 붉은색으로 그려진 그림이 규칙적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반쯤 지워진 탓에 그냥 얼룩처럼 보이는 것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중앙에 큰 기둥이 있는 거대한 홀과 흰 돌로 쌓아 올린 제단이 방문자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얀은 여기까지 계속해서 가져온 굴락이 든 우리를 앞세우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멈춰선 곳은 큰 기둥 뒤쪽의 제단이었다. 나는 그 앞에 있는 기둥 쪽에 에어리얼 서번트를 숨기려다가, 문득 그 기둥에 음각으로 빼곡하게 어떤 문양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만들어졌음이 분명한 그 문양을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머릿속에 몇 달 전의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아…….’
나는 이것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미스트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개되었던 두 번째 퀘스트 영상 속에서였다.
시저가 주인공이었던 그 영상 속에서 내 기억에 제일 크게 남아 있는 것은 시저가 마신의 목소리를 듣는 장면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 전에 그가 폐허의 건물 안에 방치된 어떤 기둥에 손을 대자 폐허였던 것이 순식간에 복구되며 기둥에 새겨진 수많은 문양들이 빛나는 장면도 분명 중요하게 비쳐졌었다.
이 기둥은 바로 그 영상 속에 나왔던 기둥이었다.
‘여기가 시저가 마신을 깨웠던 바로 그 장소였군…….’
기둥은 지금은 빛나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혹시나 에어리얼 서번트가 거기에 닿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싶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내가 정말로 퀘스트의 막바지에 이르러 가장 위험한 적의 본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때, 앞쪽에서 불길한 붉은빛이 번쩍 빛났다.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를 돌려 보니 흰 제단 위에 굴락들이 든 우리를 올려 둔 얀이 밀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어둠의 신께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다 끝내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했었지?”
“글쎄요… 이십 분 정도?”
“꽤 길군. 이 신전 안에는 시간을 보낼 만한 곳도 없는데 난 뭘 하면 되지?”
밀로가 코끝을 찡그리자 얀이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죠. 저 빛이 마물들을 전부 녹인 뒤에야 의식이 끝나니까 말입니다.”
“이 짓을 매일 하려면 너도 참 지겹겠어……. 그래도 이제 거의 끝났지? 이걸로 몇 번째였던가?”
“995번째죠. 앞으로 다섯 번만 더 하면 됩니다.”
얀의 대답에 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문득 제단 뒤쪽에도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벽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벽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빛이라고는 전혀 없이 새카만 어둠으로 감싸인 공간 속에 있어서 처음에는 그곳에 계단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지만, 굴락들이 갇힌 우리를 감싼 빛의 세기가 한층 더 강해진 덕분에 그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볼 수 있었다.
붉은빛 사이로 어른거리는 그 공간은 아주 기이하고 불길하게 보였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대체 무엇이 나타날까.
나는 잠시 이곳에서 얀과 밀로의 대화를 더 들으며 상황을 지켜볼지, 아니면 저 계단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지 고민했다. 치열한 고민 속에서 이긴 것은 결국 후자였다.
‘의식을 끝내려면 이십 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으니 그 안에 다녀오면 되겠지.’
나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움직여 밑으로 향했다. 희미한 붉은빛이 사라지자 계단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캄캄해졌지만 지금 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람의 몸이 아닌 바람인 에어리얼 서번트였기에 대강의 방향만 가지고도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아래로, 더 아래로 공간을 더듬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도대체 이렇게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을 신전이라고 밀로가 말했으니 아마도 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마신의 신전일 것이다.
마신의 신전이라……. 나는 이전에 슈페리어에게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동안 매로 변해 나를 떠나갔던 슈페리어는 북쪽에서 느껴지는 어둠의 기운 속에서 옛날에 제가 없앴던 마신의 신전이 다시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며 치를 떨었었다. 그때 슈페리어가 보았던 곳이 이곳일까? 에어리얼 서번트의 눈을 빌리는 중이라 슈페리어에게 말을 걸 수 없었지만 아마도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까마득한 절벽 위에 세워진 마신의 신전 아래에 이 정도로 깊은 공간이 있다는 건… 내가 지금 내려가고 있는 곳의 끝에는 어쩌면 절벽 아래쪽에 있던 그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검은 골짜기가 존재할지도 모른단 뜻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심장이 두근대며 뛰기 시작했다. 흥분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호기심과 긴장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에어리얼 서번트를 움직여 밑으로 내려갔다. 사람의 속도였다면 훨씬 느리게 내려갔겠지만 바람에게는 속도의 제한이 없었다. 까마득한 다이빙을 아무렇지도 않게 성공한 에어리얼 서번트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졌을 때 드디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곳은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골짜기 아래가 보이는 곳이 아니었다. 어둡고 깊어 얼마나 넓은 것인지 파악되지 않는 검은 공간만이 존재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새하얗게 빛나는 공간이 있었다.
왠지 묘한 느낌이 들었으므로 나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움직여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빛나는 공간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알 수 있게 되었다.
‘저건……?’
내가 하얗게 빛나는 공간이라 생각했던 것은 불투명하게 굳어 있는 얼음 덩어리였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큰 얼음 덩어리가 둥둥 떠 있는 것만 해도 기묘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안에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심장이 점점 더 크게 뛰는 것을 느끼며 나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얼음 덩어리 가까이로 보냈다. 가까워질수록 더욱 확실히 보이는 그 얼음 덩어리 안의 사람은 일단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확실히 없었으며, 불투명한 얼음 속에 있음에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붉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
처음에는 붉은 머리칼만 보고 슈페리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이 사람의 얼굴을 본 것은 퀘스트 기억 속에서 본 짧은 순간들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알아보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그는 옛날에 마신의 기사라 불렸던, 그리고 슈페리어의 잃어버린 동생이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를 들여다보았다. 너무 큰 충격 때문에 예상했던 이십 분이 지났는지, 아닌지조차도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신의 기사……. 마신의 기사라…. 그의 끝이 어떠했었지?’
생각해 보니 나는 그가 슈페리어와 싸우던 시절, 그리고 어려서 마신 추종자들에게 끌려와 마신의 기사로서 재탄생했던 시절에 대해서는 기억을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전쟁 이후의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그에 대해 추측할 만한 정보라고는 이 퀘스트를 처음 시작했던 때에 들었던 전설뿐인데, 거기에서도 관련이 있을 만한 부분은 ‘마신이 죽자 마신의 부하인 마룡은 긴 울음소리를 내며 북쪽으로 날아갔다.’는 부분뿐이었다.
사실 이 전설에 마신의 기사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마신에 대해서만 나오기 때문에 마신의 기사의 이름은 지워져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보아왔던 퀘스트 기억 속에서 ‘마룡’이라 불렸던 흑룡은 언제나 마신의 기사와 함께였다.
심지어 꼬마 유령을 만났던 퀘스트에서 보았었던 기억 속에서도 그는 마신의 기사와 함께가 아니었던가. 그가 아직 마신의 기사라는 이름을 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도 흑룡은 그의 곁에 있었다.
‘심지어 사이도 아주 돈독해 보였고 말이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마신이 죽자 마룡이 북쪽으로 날아갔다는 부분이 아마 내가 알 수 있는 마신의 기사의 최후에 대한 최선의 정보이리라 생각했다. 마신이 죽었을 때라면 마신의 기사도 죽은 상태였을 테고, 북쪽으로 날아간 흑룡은 아마 이 키자르 산맥으로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마신의 기사의 시체도 역시 흑룡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 쿠구구구구…….
그 순간 느껴진 기이한 파동 때문에 나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지진과 비슷한 깊은 울림이 느껴지며 눈앞의 얼음 덩어리가 약간씩 흔들리고 있었다. 위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러나 내가 에어리얼 서번트를 도로 움직이기도 전에, 갑자기 눈앞에 가로 모양으로 스르르 생성된 새빨간 빛이 잠시 후 엄청나게 커져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뭐지?’
처음에는 그것이 빛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빛 속에서 세로로 쭉 찢어진 새까만 그림자가 똑바로 움직이면서 나를, 정확히는 내 시야를 대신하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눈동자. 그것은 아주 거대한 생물의 살아 있는 눈동자였다.
새빨간 빛이라 여겼던 것은 홍채 부분이었고 검은 그림자는 동공, 그저 검은 공간이라 여겼던 것은 내 키만큼 거대해 보이는 검은 비늘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깜박이지도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는 탁한 기름이 낀 물처럼 번들거렸고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불꽃처럼 타오른다고 생각한 아주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천둥처럼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침입자.
- 너는 누구냐!
엄청난 광풍이 몰아쳤다. 에어리얼 서번트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크나큰 악의의 소용돌이가 칼날처럼 공간을 찢어발겼다. 나는 에어리얼 서번트가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에 의해 그대로 소멸되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쿨럭.”
“카프!!”
갑자기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기침을 하자마자 크란이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내가 기침과 함께 토해낸 것은 붉은 피였다.
6서클짜리 마법이 힘도 한 번 못 쓰고 단숨에 소멸당한 반동은 상당히 컸다. 각종 좋은 아이템을 두른 지금도 피를 토할 정도인데 이전이었다면 대체 상태가 어땠을까. 나는 입을 문질러 닦고 서둘러 포션을 삼켰다.
“대체 뭐야. 너무 오래 눈을 감고 있길래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갑자기 피를 토하다니…….”
“흑룡을 봤어.”
거두절미하고 대답하자 크란이 눈을 크게 떴다.
“흑룡?”
“저 마물들의 서식지 너머에 있는 건 마신의 신전이야. 그 안에는 흑룡과 마신의 기사의 시체가 있고.”
서둘러 포션을 한 병 다 마시고 나니 그제야 울렁거리던 배 속이 좀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크란의 뒤쪽에서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유완에게 말을 걸었다.
“마신의 신전이나 흑룡, 마신의 기사의 최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어?”
나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고, 크란도 샤인 나이트의 후인이니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완은 다르다. 그는 다크 나이트의 후인이니 뭔가 다른 정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유완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신의 기사의 최후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흑룡이 마신의 기사에게 집착했던 건 분명해.”
그건 나도 안다고 말하려 했지만 유완의 다음 말을 듣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다크 나이트의 기억에서 보기로 용은 동족을 죽이면 서서히 미친다고 하더군. 그런데 흑룡은 마신의 기사를 위해서 동족을 여러 마리 죽였어.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지금도 흑룡이 살아 있다면 완전히 미친 상태겠지.”
“음…….”
그것은 나도 얼마 전 꼬마 유령을 만났을 때에 보았던 기억 속에서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 기억 속에서 마신의 기사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고, 복수를 위해 자신을 납치해 온 마신의 추종자들을 죽였다. 그리고 흑룡은 그의 옆에서 그 행위를 묵인했으며, 마신의 기사를 위해 동족을 죽였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미칠 것을 알면서도 부탁을 들어줄 정도의 집착이라……. 그렇다면 내가 마지막 퀘스트로 해야 할 일이 설마 그들과 관련된 것일까?
단신으로 미친 용을 상대하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타이밍 좋게 들려온 띠링 하는 소리가 모든 생각을 가로막았다.
- 띠링!
- 산맥의 지하에 잠들어 있던 오래된 존재가 깨어났습니다!
[ 산맥의 지하에 잠들어 있던 오래된 존재가 깨어났습니다! ]
“응? 이게 무슨 알림창이야?”
아무래도 내 눈앞에 떠오른 짧은 알림창은 나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인 크란이 긴장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안내창이 떠올랐다.
-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