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게… 뭐야.”
진서환은 제 앞으로 도착한 서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자식이, 윤석호가 내게 법적 대응을 했다고?”
서류 안에는 여러 가지 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지만 진서환은 그것들을 전부 읽지 않았다. 반쯤 찢겨져 나간 종이더미 사이로 그 서류를 들고 온 비서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려고 이전에 포럼에서 만났을 때 나를 협박한 거였어?”
진서환의 머릿속에 지난번 서울 국제 게임포럼에서 마주쳤던 윤석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진서환이 지시한 모든 행동을 알고 있다는 듯 굴던 그 남자의 역겹고 여유만만한 모습.
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떨며 제대로 잠들지 못한 것이 며칠이었던가.
“젠장.”
진서환은 들고 있던 나머지 서류까지 전부 내던졌다.
‘내가 지시했던 일들에 증거는 없어. 어차피 전부 추측과 협박에 불과한 짓거리야.’
윤석호의 과거를 캐고 주변을 들쑤시는 것을 저만 했을 리 없다. 본보기 삼아 겁을 주려 나선 모양이지만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해 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돈이야 넘칠 만큼 있으니 유능한 변호사를 많이 선임하면 될 일이고, 그렇게 한 뒤에 신경을 끄면 되겠지만 마음 쓰이는 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사실을 아버지가 보고받아서는 안 돼.’
진전성 회장은 뼛속까지 능력주의자였다. 진전성 회장에게 ‘그 게임’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하고 있으며 새턴에서 신경 쓰고 있는 퀘스트 또한 이전에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손을 쓰고 있다고 말해 놓고, 사실은 거의 진척이 없었던 데다 심지어는 제가 손을 쓴 사실을 상대방이 알게 되었다는 것을 들킨다면 큰일이 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임 쪽보다 윤석호 쪽에 더 집중한 것이 잘못이었나.’
처음 목적은 그 게임 내의 정보를 모조리 수집하고, 새턴이 중요시 여기고 있는 퀘스트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갑자기 진제환이 빠져나가면서 모든 것이 이도 저도 아니게 변해버렸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진제환은 그간 아주 많은 정보를 제공해 왔었기에 그가 빠져나간 이후부터 진서환의 게임 내 조사는 지지부진했다.
그런 상황에서 좀 더 파고들 만한 기미가 보인 것이 윤석호 쪽과 관련된 것이었기에 당연히 그쪽으로 손을 쓴 것뿐인데, 어쩌면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분노가 치밀었다.
‘이게 다 그 녀석 때문이야.’
진서환은 머릿속으로 진제환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 빌어먹을 녀석이 갑자기 무슨 마음을 먹고 제 자리를 노리려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거기에 이전과는 달리 아량을 베풀어 주는 아버지는 더욱 분노스러웠다.
‘애초에 그 녀석은 진 씨도 아니라고 말했던 건 아버지였잖아. 아들 취급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 녀석을 내치지 않고 내게 망신을 줄 수가 있는 거지. 아버지가 선택한 건 나인데! 아무리 나를 자극하기 위해서라도 이젠 정도를 벗어났어.’
진전성 회장이 그리 발가락의 때만도 못하게 여기던 둘째 아들이라도 능력만 있다면 곧바로 후계자로 삼을 만한 인간이라는 것은 진서환이 제일 잘 알았다. 그래서 더욱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 해도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태어난 이래 진서환은 내내 이 회사를 책임지는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무게감에 짓눌려 왔다. 공부에서든, 일에서든 언제나 1등을 해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결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아버지는 결코 진서환을 돌아보아 주지 않았다.
그런 냉혹한 남자가 선택한 후계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단 하나의 지지대로 삼아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절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야 해. 그래서 더 제대로 된 결과를 내기만 하면 아버지에게서 그 녀석을 내쫓을 수 있어.’
진서환은 잠시 이를 갈다 비서를 돌아보았다.
“이거, 사장님께는 아직 보고가 들어가지 않았겠지?”
“예…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비서가 떨며 대답했다. 진서환은 찢겨진 종이가 뿌려진 책상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너무 흥분했군.’
평소라면 이런 일에 일일이 바보처럼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은 여러모로 신경을 갉아먹는 일이 너무 많았다. 진제환 때문에 한동안 사장실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던 것을 떠올리자 진서환은 또다시 열이 치솟는 것을 느꼈지만 간신히 그것을 참아 눌렀다.
그래. 놈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국 최후에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잠시의 굴욕 정도는 참을 수 있어야 했다.
“사장님께는 절대 이 일이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라.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사장님께서 이 일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으면 곧바로 나에게 연락해. 사장실 비서들 동향도 잘 보고.”
“예.”
“나가 봐.”
진서환의 축객령을 받은 비서가 안심한 얼굴로 재빨리 사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진서환은 자리에 걸터앉아 신경질적으로 제 앞에 떠 있는 홀로그램 화면들을 이리저리 건드렸다.
‘G에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군. 나머지는 쓸 만한 정보가 없어.’
지금까지 그나마 쓸 만한 정보를 찾아 보내왔던 것이 G뿐이었지만, 그도 한동안 엉터리 보고서를 보내다 슬금슬금 연락이 없어진 지 한참 되었다.
나름대로 내로라하는 VT 해킹 전문가들을 찾아 고용했는데도 결국 이 정도였다. 더 많은 전문가들을 고용해야 할까. 아니면 방향을 전환해 보아야 할까. 필라디아를 ‘그 게임’에 지지 않게 개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 팀장님 계십니까.”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진서환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가겠습니다.”
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들어온 것은 필라디아 개발팀의 직원이었다. 그는 사무실 여기저기에 찢긴 채 흩어져 있는 서류를 보고 잠시 놀란 듯했으나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진서환의 책상 가까이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이전에 보내드렸던 파일들을 확인하셨는지 여쭤 보러 왔습니다. 팀장님께서 확인해 주셔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라서요…….”
파일?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진서환은 며칠 전 그가 올려 보냈던 여러 가지 서류들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읽기는 했지만 힘들여 컨펌할 의지를 느끼지 못해 방치해 두었던 것들이었다.
‘아. 그래. 그런 게 있었지.’
요즘 진서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필라디아 개발이 아닌 건방지게 제 자리를 넘보려 하는 동생과 그보다 더 구역질 나는 새턴이었다. 진서환은 그것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필라디아 개발팀 탓도 반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가 가져오는 정보가 아니라면 아무런 아이디어도 내지 못하는 멍청한 놈들과 일을 하라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확인했다. 하지만 그대로 진행하도록 승인해 줄 수는 없어.”
“예?”
직원이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나같이 안일한 기획만 잔뜩이더군. 그딴 멍청한 기획으로 1등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이 일은 하던 대로만 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걸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텐가? 내가 이전에 던져 준 정보는 대체 어디로 반영된 거지?”
“하, 하지만… 이전에는 분명 이쪽 방향으로 다시 해서 가져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자네들은 내가 말하는 것만 받아 적으면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걸 만드는 게 나 혼자뿐인가? 내가 제시한 방향 이상의 신선하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들을 내란 말이야. ‘그 게임’보다 더, 더 대단한 것을 만들지 못하면 자네들은 모두 해고야. 이 필라디아 리메이크에 우리 메이지 소프트의 명이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해!”
진서환에게 혼이 난 직원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다시 해서 올려 보내겠습니다….” 하고 말하고는 허둥지둥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그런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모습마저 진서환의 분노를 돋운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째서 세계 1위라는 우리 회사에 저딴 놈들밖에 없는지.’
인재가 그렇게 없었던가 싶을 정도로 필라디아의 개발은 지지부진했다. 예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게임 필라디아를 리메이크하는 것이니 1부터 다시 만들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는데도 그 장점을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머리를 쓰는 이가 하나도 안 보였다.
개발팀이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그저 진서환이 THE MIST를 샅샅이 조사해 알아낸 소수의 정보들을 반영해 소심하게 시스템을 고치는 것뿐이었다.
예전이라면 대충 만들어도 메이지 소프트의 게임 네임밸류를 믿는 충성스러운 소비자들로 인해 당연하게 1위를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장을 휘어잡고 있는 압도적인 덩치의 적에게서 1위를 탈환하고 메이지 소프트는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하던 것보다 두 배, 아니 열 배는 더 대단한 것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어중간한 것을 내보내면 눈이 높아져 있는 시장은 단숨에 실망할 테고, 그 이후에는 무슨 짓을 해도 이전과 같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한번 잃어버린 평가는 되찾기 어려운 법이다.
그 차이를 알지 못하는 멍청한 녀석들이 한심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이것조차도 내 능력 부족이라고 하시겠지.’
하지만 개인의 능력만으로 수십, 수백 명이 달라붙어 만드는 게임이라는 거대한 컨텐츠를 전부 책임지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진서환이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적의 정보를 털고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도 안일하게 과거의 편안한 개발 환경에만 머물러 있으려는 아랫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진서환은 제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갑갑함을 느꼈다.
이런 일들을 좀 더 속 편히 의논하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지만 회사의 후계자인 그와 동등한 위치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없다시피 했고, 윗사람인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진서환에게 손을 내밀어 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거친 사막을 아무것도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걸어나가야만 하는 느낌이었다. 언제나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욱 그랬다.
‘나는 선택받았어.’
진서환은 언제나 그를 지탱해 주었던 말을 또다시 되뇌었다. 오로지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아버지에게 결국 후계자로 선택받은 것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닌 자신뿐이다. 제가 선택받은 것이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을 방해자들을 거꾸러뜨린 뒤 온 세상 앞에 당당히 증명해 보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을 준비가 그에게는 되어 있었다.
“…….”
나는 휴대용 접속기를 벗으며 눈을 떴다. 게임 속에서 뜨거운 사막을 한참 헤매다 접속을 해제해서인지 아직도 입 안이 까끌까끌하고 몸이 더운 느낌이 들었다.
‘목이 말라.’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부엌으로 다가가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고 있으려니 옆에서 홀로그램 화면이 팟 하고 켜지며 하우스 컴퓨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진유완 님께서 20분 뒤 방문하실 예정이세요! ]
‘이 시간에?’
지금은 해가 지고 밤이 된 시각이었다. 나는 잠시 의아해졌다가 어제부터 시작했던 내 접속기 검사를 진제환이 아직 덜 끝냈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그것을 마무리 짓기 위해 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방금 전까지 함께 게임을 하고 있었으니 진제환도 식사를 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모처럼 함께 식사나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나가서 먹는 것은 귀찮고 이 집에 많이 있는 즉석요리나 간단하게 해야겠군.’
“컴퓨터. 볶음밥과 계란탕을 준비해 줘. 두 개씩.”
[ 2개씩 말씀이시죠? 진유완 님과 함께 드실 건가요? ]
“응.”
[ 알겠습니다. 오실 시간에 맞추어 내놓겠습니다. ]
컴퓨터는 매우 신이 나 보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잡지 더미 사이에 깔려 있던 청소용 로봇이 팔을 쳐들면서 뚫고 나온 뒤 웅웅거리며 부엌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언제 보아도 참 적응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자동 조리가 되는 동안 휴대폰을 살펴보았다. 휴대폰은 없었을 때에는 불편함을 별로 느끼지 않았는데, 생기고 나니 의외로 쓸모가 꽤 많았다. 밖에서 미스트 커뮤니티를 바로바로 살펴볼 수도 있고, 주변과 연락을 취할 때에도 이전보다 편한 것 같아서 사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내가 게임을 하는 동안 들어와 있는 부재중 연락은 없었기에 휴대폰을 접고 침대에 눕자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보글보글거리는 소리를 보아하니 계란탕이 잘 끓고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내 집이 아니라 좀 부담스러웠었는데… 이젠 완전히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고 있군.’
작업실을 내어주겠다던 진제환에게 거절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잘 적응한 내 모습이 새삼 조금 우스웠다. 내가 밖에 잘 나가지 않아서 더 불편함을 못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 너무 적응한 나머지 진짜 내 집에 돌아갔을 때 오히려 어색해지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건 그렇고, 계속 집중을 해서 그런지 조금 피곤한데.’
눈이 조금 피로한 것 같아 눈꺼풀 위쪽을 슬슬 문지르자 시원한 감각과 함께 왠지 모르게 졸음이 조금씩 밀려왔다.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버린 것이 패인이었던 것일까. 눈 마사지를 조금 더 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움직임이 멈추었다.
깜박깜박 흐려지기 시작한 의식 사이로 수마가 저항할 수 없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있으면 진제환이 올 텐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나는 체육관 한가운데 서 있었다.
저 멀리 호면을 쓰고 서 있는 나의 상대. 검을 잡은 모습만으로도 그것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정승조. 나의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승조가 어째서 여기에 있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머리 위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박수와 뒤섞여 울려 퍼졌다.
- 곧 결승전을 시작합니다.
무기질적인 안내방송이 들려오고, 심판이 다가왔다. 결승전이라니. 대체 무슨 결승전?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제야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로 3년 전의 전국 고교검도대회 결승전이었다.
내 인생 최고이자 최악의 날이었던 바로 그날.
저 멀리서 승조가 천천히 목검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지금 당장 호면을 벗고 도망치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 시합을 해서는 안 돼!’
이 시합이 끝나면, 그러면 나의, 우리의 모든 것도 끝나버린다. 승조는 사라지고 나는 두 번 다시 이 자리에 설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다리. 내 다리는……!
숨을 헐떡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멀쩡하게 바닥을 딛고 있는 두 다리가 보였다. 오른쪽 다리는 나무토막 같지도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시합을 해서는.’
해서는 안 돼.
하지만 눈앞에서 무정하게 심판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고, 한층 더 커진 환호성이 쏟아지는 거센 비처럼 머릿속을 웅웅 울리게 만들었다.
‘……아.’
여기서 검을 들어버리면 시합이 시작된다.
들어선 안 돼. 들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소리쳤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쿵쿵대며 울리는 심장소리, 혼을 빼앗을 것 같은 환호성.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 나를 찔러 죽일 것 같았다.
안 돼. 검을 들면 안 돼!
“…헌. 무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뜨자 흰 천장 사이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진제환이 보였다.
“……네가 왜 여기에… 아.”
멍하니 묻다 보니 여기는 내 집이 아니라는 것이 기억났다.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손안에 얼굴을 묻고 몇 번 심호흡을 하자 방금 전 내가 본 것은 꿈이라는 것이 겨우 실감이 났다.
‘꿈이었어.’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니 예전에도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이 났다. 최근에는 꾸지 않았었지만 사고를 당하고 재활을 하던 때에 자주 꾸었던 꿈이었다.
또다시 결승전이 시작되고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망치지 못한 채 시합이 시작되어 버리는 악몽.
안 꾼 지 꽤 오래된 꿈이었는데……. 갑자기 또 왜 그 꿈을 꾼 것일까.
“무헌. 괜찮은 건가?”
몸을 웅크린 채 손안에 얼굴을 묻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인지 진제환이 천천히 등에 손을 올리고 신중하게 물었다.
“몸이 좋지 않다면 바로 병원에….”
“아니. 아니……. 괜찮아. 그냥 별로 좋지 않은 꿈을 꿨을 뿐이니까.”
나는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고 자세를 바로 했다. 진제환은 잠시 내 말이 정말인지 판단하려는 듯 말없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덕에 진제환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더 시체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어 몹시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젠 괜찮아. 정말이야.”
그 말을 하며 깊이 숨을 내쉬자 차가웠던 손이 조금 녹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진제환이 내 말을 믿기로 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잔뜩 찌푸린 미간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찌푸려도 잘생긴 건 변함없다니 불공평하군….’
쓸데없이 잘생긴 진제환의 얼굴을 보면서 약간 침착함을 되찾은 나는 악몽을 머릿속에서 최대한 밀어냈다. 왜 또 그 꿈을 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내 다리와 승조 때문에 여러모로 복잡했었으니 스트레스가 쌓여 그렇게 발산된 것일 확률이 높다.
악몽은 내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되뇌고 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그러니까 이제 표정 좀 풀어.”
어색하게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진제환의 얼굴은 여전히 걱정을 지우지 못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요리가 전부 완성되었는지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이 느껴졌다.
“같이 먹으려고 저녁을 해 뒀는데, 혹시 이미 먹고 온 건 아니지?”
“…아니.”
진제환이 고개를 저었다. 게임을 종료하자마자 바로 온 것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좋아. 그럼 일단 먹자.”
나는 진제환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따뜻한 밥의 힘으로 머릿속을 떠돌던 찝찝한 여운을 거의 잊어가고 있었을 때쯤, 갑자기 진제환이 입을 열었다.
“그 별로 좋지 않은 꿈이라는 것. 뭔지 물어도 될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젓가락질을 삐끗하고 말았다. 진심인가 싶어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진제환의 표정은 진지했다. 어디를 보아도 농담으로 치부할 기색이 아니었다.
“그건 왜…. 정말로 별것 아니었어.”
“…….”
별것 아니라고 말했지만 진제환은 답을 하지 않았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는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아주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 보아도 나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피부를 통해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 자리를 피하지 않는 한 도망갈 수 없을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간략하게 이야기를 할 마음을 먹었다.
“그냥, 예전부터 꾸던 꿈이야.”
“예전부터?”
진제환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다시 한번 꿈에서 보았던 승조를 떠올렸다. 그때의 일이 바꿀 수 없는 과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꿈을 꾸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만큼 그 일이 내게 큰 상흔을 남겼기 때문이겠지.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은 아직도 그 일들을 아주 극복하지는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상당히 울적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가끔 옛날 일이 꿈에 나올 때가 있잖아. 너는 안 그래?”
무심코 질문을 하자 진제환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미안.”
“그러냐…….”
뭐 하긴, 나도 그 일이 있기 전에는 옛날 일을 꿈으로 꿀 수도 있다는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해를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쪽이 나아.”
“무헌…….”
진제환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내 기분을 알아차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울적해진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넣었다. 곧 하우스 컴퓨터가 알아서 설거지를 하기 위해 물을 트는 것이 보였다.
진제환은 식사를 마친 뒤 내 휴대용 미스트 접속기를 거실 한가운데 놓고 그 앞에 앉았다. 품속에서 꺼낸 VT수첩을 접속기 앞에 놓고 연결시키는 얼굴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진제환이 하는 것들을 보아도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그거, 다 끝낼 수 있겠어?”
침대 위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묻자 진제환이 안경을 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의 남자다운 잘생김 위로 덧씌워진 지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약간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글쎄……. 운이 좋다면.”
정말인가. 진제환이 내 접속 캡슐의 비밀을 알아낸다는 것은 곧 우리가 이전에 약속했던 대화를 이어 할 날이 온다는 것과 같았다. 아직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혹시나 했는데 상당히 희망 넘치는 발언이 아닌가.
“휴대용이라 그런지 진짜 접속 캡슐보다는 구조가 간단해. 100가지 길을 뒤지는 것보다는 10가지 길을 뒤지는 것이 승산이 높을 테니까, 그런 문제야.”
“음…….”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못 알아듣겠지만 그렇다니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진제환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캡슐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목표라고 했었지. 알아내기만 하면 제2, 제3의 미스트를 만드는 것도 꿈은 아니라고 했었다.
그런 목표가 아니라면 진제환을 저렇게까지 열중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예전에 저 녀석이 게임 내에서 하던 일과 관련이 있는 건가?’
나는 잠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예전의 기억에 눈을 가늘게 뜨고 진제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진제환은 새턴의 경쟁사에서 정보를 알아내는 일종의 스파이 같은 일을 했던 전적이 있었다.
유완이 전에 아주 오랫동안 곁을 떠나 있어야만 했던 그 이유와 지금 접속 캡슐을 저렇게 열심히 조사하는 이유가 만약 같은 연장선에 있다 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닐 것 같았다.
음……. 설마 그래도 이젠 그만뒀다고 했으니 그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진제환을 보았지만 한번 머릿속에 싹을 틔운 생각은 없어지지 않고 자꾸만 뿌리를 뻗어갔다.
“…….”
너 설마 그런 짓을 또 하고 있는 건 아니냐고 물었는데 정말 아니었다면 진제환에게 오히려 상처가 되겠지.
설마 정말 그런 이유라면 나중에 진제환이 조사를 모두 마친 이후, 진정한 목적을 듣고 나서 얘기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너무 신경 쓰지 말기로 하자.
거기까지 생각하고 난 뒤 나는 새삼 스스로가 낯설어졌다. 내가 타인을 이 정도까지 생각하고 걱정했던 일이 이전에 또 있었던가?
지금까지는 내 일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남을 걱정할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진제환이 이렇게 걱정되는 것은… 내게 이제는 남을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거나, 아니면…….
아니면….
너무 깊숙한 곳까지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거부감이 불현듯 밀려 들어온 순간, 진제환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나는 피할 수도 없이 진제환과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어디 아픈 건가?”
진제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로 안색이 안 좋아.”
내 안색은 항상 별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한 눈빛을 보니 어쩐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몸이 안 좋아지면 곧바로 말해.”
“안 아프다니까.”
“지금이 아니라도 상태가 안 좋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알려줘.”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이는 진제환을 보니 왠지 조금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에게 넘치도록 걱정 받는 기분이란 건 상당히 근질거리지만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정말 좋은 녀석이야.’
진제환은 정말 좋은 남자다. 얼굴도 충분히 잘생겼고, 능력도 좋고 순수하게 남을 위할 줄 안다. 무감정해 보이는 얼굴 너머에 숨겨진 뜨거운 집념은 3년간 차갑게 굳어 있었던 내 마음마저 두드릴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나만을 맹목적으로 바라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다친 이후로 지금까지 몸으로 시험하는 일도 한 번도 안 했지.’
나야 원래 성욕이 없는 편이었지만 진제환도 그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내가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고 있는 것이 대단했다.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배려심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둘 다 대단하다는 게 맞는 쪽일 것 같긴 하지만.
‘그 시험이란 것도, 솔직히 이젠……. 시험의 의미가 별로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진제환은 그동안 나에게 제 말의 의미를 충분히 표현해 보였다. 그것은 즉 이제는 내가 저 녀석에게 답을 돌려주어야 할 때가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그날 진제환은 결국 접속 캡슐의 비밀을 완전히 알아내지는 못했다.
“내일 또 올게.”
안경을 벗고 돌아갈 준비를 하는 진제환의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나는 미안함을 느꼈다.
“피곤하면 여기서 자고 가도 되는데.”
원래 자기 작업실이었으니 당연히 마음대로 써도 될 텐데, 진제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침대 쪽에 시선을 흘긋 돌렸던 진제환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집에서 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
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듯 덧붙이는 말 때문에 오히려 좀 더 미안해지는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그러고 보니 내일은 사부님과 사모님을 뵈러 갈 생각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 내일 언제쯤 여기로 다시 올 생각인지 물어도 될까.”
“글쎄……. 그건 아직 잘 모르겠는데. 왜.”
“내일 낮에는 검도장에 가볼 생각이라서.”
내 말을 들은 진제환이 눈을 조금 가늘게 내리떴다.
“혼자서?”
그러면 혼자서 가지 뭘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런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자 진제환이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다 갑자기 뺨 위로 손을 올렸다.
나는 흠칫 놀랐지만 그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뺨 위를 살짝 쓸던 따뜻한 손가락이 잠시 후 귀 옆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뒤 떨어져 나갔다.
“데려다줄게.”
“별로 그럴 필요까지는…. 괜찮은데.”
“데려다줄게.”
두 번째로 말하는 목소리에는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간절함이 상당히 녹아 있었다. 어차피 여태까지의 진제환의 성향을 보아서는 거절해도 아침부터 찾아와 집 앞에서 기다릴 놈이다. 그간 보낸 몇 달간의 일들로 나는 상당히 진제환의 행동 패턴을 파악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후우. 그래, 그럼.”
결국 고개를 끄덕이자 진제환이 오늘 본 것 중 가장 밝은 미소를 되돌려주었다.
“고맙다.”
“데려다주는 건 너인데 왜 네가 감사 인사를 하냐.”
어이가 없어 한마디 했지만 그래도 진제환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잘 자.”
“…그래, 너도.”
잘 자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나는 잠시 닫힌 문 앞에 서 있었다. 방 안을 채우고 있던 한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것뿐인데도 왠지 조금 기온이 내려간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혼자서 사는 생활이 더 익숙했을 터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느끼게 된 것일까. 얼마 전 감기로 아팠을 때 도움을 받은 이후부터였나? 아니면 그 이전? 대체 언제부터였지?
아마도 나를 이렇게 바꾼 것은 진제환이다.
그 사실이 나를 조금 두렵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렴 어떤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길들여지는 짐승이 된 기분이군.’
다음 날, 진제환은 약속대로 나를 데리러 왔다.
희한하게도 준비를 거의 마쳤을 때 연락이 왔기 때문에 나는 이 집 하우스 컴퓨터가 몰래 진제환에게 연락을 한 것이 아닌가 조금 의심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진제환의 거대한 검은 바이크에 도움을 받으면서 올라탄 뒤 건네받은 헬멧을 쓰자 안쪽에서 <꽉 잡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로가 조금 막히는 것 같으니 막히지 않는 샛길을 통해 갈 생각이다. 대신 조금 길이 험해질 거야.>
연결된 두 개의 헬멧은 헬멧을 쓰고도 서로의 목소리를 깨끗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나는 진제환이 전달한 길 루트가 헬멧을 쓴 내 시야 위로 홀로그램 영상과 함께 펼쳐지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출발한다.>
진제환이 손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바이크가 긴 울음을 토하며 크게 진동했다. 나는 순식간에 속도를 올리는 바이크 위에서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진제환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돌덩이인가 싶을 정도로 단단한 몸은 지금의 허약해진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라 약간 부러움이 샘솟았다.
‘뭐… 한창 운동하던 시절에도 이 정도로 근육이 생겨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근육이란 놈도 결국은 타고난 자질의 일종이라 수련만으로 키울 수 있는 데 한계가 있다. 즉 진제환의 근육은 타고난 좋은 토양에 듬뿍 물을 준 결과란 뜻이었다.
진제환이 움직이는 바이크는 막혀 있는 차들 사이를 가볍게 뚫고 좁은 길로 들어가 거침없이 방향을 꺾으면서 나아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혹 놀라거나 신기해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것도 보였다.
걸어서 다닐 때에는 내가 제일 느린 사람이었는데 여기 타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빠른 것처럼 느껴져 왠지 해방감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진제환이 나와 같은 기분으로 바이크를 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걸 왜 타는지는 이제 좀 알 것도 같았다.
20분쯤 달리자 익숙한 동네가 나타났다. 나는 가까워져 오는 검도장 대문을 보며 반가운 마음을 느꼈다.
“무헌, 먼저 들어가. 나는 이걸 세워 놓고 들어갈 테니까.”
진제환이 바이크를 끌고 검도장 옆으로 가는 것을 보며 나는 숨을 골랐다. 아직 오전이라서인지 검도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을 가로질러 뒷문으로 나간 뒤 예쁘게 가꾸어져 있는 뒤뜰을 지나자 변함없이 고즈넉한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곳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나, 무헌아.’
인터폰을 통해 내 얼굴을 보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모님의 기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반갑게 끌어안아 주시는 사모님의 등을 살짝 마주 안았다. 왠지 그사이에 더 마르신 것 같았다.
“온다고 말도 안 하고, 얘도 참. 미리 말했으면 음식도 해 놨을 텐데.”
“괜찮아요.”
“여보, 무헌이가 왔어요.”
사모님이 안쪽을 향해 소리치자 사부님이 놀란 얼굴로 나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 왔습니다.”
“아니 이 녀석아. 이야기라도 하고 와야지.”
과연 부부 아니랄까 봐 사모님과 같은 이야기를 한 사부님이 다가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마른 거냐. 밥은 잘 먹고 있는 게지? 오늘은 혼자 온 거냐?”
“하하……. 밥은 잘 먹고 있어요. 오늘은 진제환하고 같이 왔습니다.”
“어머, 그래? 오랜만이니 과일이라도 좀 가져와야겠구나.”
사모님이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얼굴 안색이 이게 뭐냐. 무헌이 이 녀석. 일단 이것 좀 마시거라.”
나는 사부님이 테이블 위에 있던 차를 따라주시는 것을 받아 마셨다. 어린 시절 자주 마셨던 달콤한 대추생강차였다.
“감사합니다.”
“몸은 좀 어때. 이제 괜찮은 게냐.”
보자마자 내 걱정뿐인 사부님 때문에 가슴이 아팠지만 나는 그것을 눌러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지 않았지만 사부님 앞에서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럼요.”
“휴우, 그래. 체육관 아이들도 너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모른다. 이따가 인사라도 하고 가는 게 어떠냐.”
사부님의 말을 들으니 검도장 일을 할 때 나를 가장 따랐던 인우와 세종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 녀석들이니 조금 있으면 도장에 올 것이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인사를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러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불편한 건 없고?”
불편한 것이라……. 내 집이 현재 없어진 상태라 진제환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든가 하는 말을 하면 사부님과 사모님은 틀림없이 엄청나게 걱정하시겠지. 그런 모습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무조건 고개를 저으며 얼굴에 쥐가 나도록 웃었다.
“없어요. 그냥 잠이나 열심히 자면서 회복했는데요, 뭐.”
“그래. 아플 때는 자면서 회복하는 게 최고지, 암. 잘했다.”
“이것 좀 먹으렴, 무헌아.”
사모님이 사과가 산더미처럼 쌓인 쟁반을 내 앞에 밀어놓았다. 솔직히 다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 양이었지만 나는 일단 하나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퇴원한 후에 부모님에게는 연락을 했었니?”
음…. 부모님이라. 입원했을 때에 짧게 연락했었고, 퇴원할 때에도 문자를 보내기는 했다.
“……네.”
“전화가 아니라 또 문자만 한 통 보낸 건 아니고?”
그 말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 행동을 보고 계셨던 양 맞는 말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안 돼. 적어도 잘 지내고 있다는 연락 정도는 꾸준히 해야지.”
사모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맞는 말씀이었지만 나와 부모님의 사이는 솔직히 말해 사모님과 사부님과의 사이보다도 거리가 먼 편이었으므로 곧바로 그러마고 대답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그런 내 입장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사부님은 사모님의 말을 거들지 않고 듣고만 계셔 주셔서 다행이었다.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때 벨이 울렸다. 방문자는 당연히도 진제환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서 와요.”
사모님이 진제환을 밝은 얼굴로 맞이했다. 진제환은 성큼성큼 걸어와 사부님께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슬쩍 사과 쟁반을 녀석의 앞으로 밀어두었다.
“너도 먹어.”
“…나는 괜찮은데.”
이런 눈치 없는 자식을 봤나. 나는 사부님과 사모님에게 들키지 않도록 진제환의 무릎을 테이블 밑에서 툭 쳤다.
“아니. 모처럼 주셨는데 같이 다 먹어야지.”
다 먹어야지 하는 부분에 힘을 주어 말하자 진제환이 겨우 내 말의 뜻을 눈치챈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군. 알았다.”
진제환이 말없이 사과를 해치우기 시작한 것을 흐뭇하게 바라본 뒤 나는 사부님과 사모님을 뵙기 위해 왔던 목적을 드디어 입에 올렸다.
“그동안 사부님 혼자서 힘들게 해 드려 죄송했습니다. 다음 주부터 도로 검도장에 나오려고 합니다.”
“다음 주부터?”
사모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빠른 것 아니니? 좀 더 쉬어도 괜찮아.”
“그래. 내 걱정이라면 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 말고도 날 도와줄 사람들은 많으니까 말이야.”
다음 주부터 복귀하겠다고 하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사부님과 사모님의 이런 반응은 예상외였다.
‘…내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아 보이나?’
나는 잠시 내 안색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한번 심각하게 해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쉬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집에만 있으니 이제 조금 심심하기도 하고요.”
사실 심심하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언제 다리 상태가 급변할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니 조금이라도 멀쩡할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알지 못할 사부님과 사모님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정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하는 말로 내 고집을 받아주셨다.
“그러면 무리하지 말고 일단 월수금 한 타임만 맡도록 해라. 그 이상은 안 돼. 좀 더 지켜보고 나서 허락해 줄 테니까.”
“네. 그거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감사 인사를 했지만 사부님은 한숨을 쉬었다. 두 분의 눈에 나는 아직도 걱정되는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근래 들어 더 자주 병원 신세를 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렇게나 나를 걱정해 주시는 두 분께 더 이상의 걱정을 끼치면 안 될 텐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알 수 없으니 큰일이군.
“너는 언제쯤 복귀할 거냐.”
복귀하기로 한 김에 슬쩍 찔러 보자 말없이 사과를 입 안에 넣고 있던 진제환이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네가 다음 주부터 오겠다면 나도 그렇게 할게.”
“뭐?”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라 어안이 벙벙한 사이 나보다 먼저 반색한 것은 사모님이었다.
“그래 주면 참 좋겠네. 제환 군이 같이 온다면 나도 좀 더 안심할 수 있겠어. 괜찮죠, 여보?”
“으흠. 뭐. 자리는 많으니까 언제든 편히 오게.”
사부님까지…….
순식간에 내 의견 없이 모든 것이 정해진 현장을 보며 아연해져 있는 동안 진제환의 품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전화 겸용 VT수첩을 꺼낸 진제환이 화면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전화를 좀 받고 오겠습니다.”
진제환이 내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화장실 쪽으로 사라진 뒤 테이블 위에는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때로는 타인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나는 사모님의 손길이 닿아 있을 사과를 하나 더 베어 물며 진제환이 없을 때 할 수 있을 말을 지금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부님, 사모님. 저…. 실은.”
조용히 입을 열자 두 분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언제나처럼 따뜻한 시선을 마주하자 마음속에서 용기가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전에 정승조를 다시 만났습니다.”
“…표정이 나쁘지 않은 걸 보니 뭔가 있었구나?”
처음에는 안색이 달라졌던 사모님이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대로였으므로 나는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아직 다 해결된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몇 번 더 만날 수 있다면 충분히 희망적인 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정승조와 나 사이의 일들을 다 알고 있는 사부님과 사모님은 내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엄청난 놀라움을 느낀 것 같았다.
“정말이니?”
“그 녀석이 순순히 나와 주더냐?”
“순순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니까 만족합니다.”
그것만으로 사부님과 사모님은 충분히 나와 함께 기뻐해 주셨다. 내 어깨를 끌어안은 사모님이 무어라 입을 열 수 없는 표정으로 살짝 토닥여 주셨을 때, 이유도 없이 왠지 가슴속에서부터 치미는 것이 올라오는 기분을 느꼈지만 나는 그것을 애써 꿀꺽 삼켜 감추었다.
“그래. 고생했다. 정말로 고생했어.”
“……고생은요.”
“너는 착한 애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알겠지?”
“네.”
더 이상은 이전처럼 병원에 입원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 담긴 말씀에 대답하며 살짝 가책을 느끼고 있었을 때, 진제환이 드디어 전화 통화를 끝내고 돌아왔다. 진제환은 사모님에게 끌어안겨 있는 나를 보고는 눈을 조금 크게 떴지만 이내 아무 말 없이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무헌이 이 녀석은 이제 다 컸는데도 아직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느껴지곤 해서 말이네…. 제 몸도 간수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병원을 들락날락하니 주변에서 잘 좀 봐 주었으면 좋겠어.”
갑자기 뭔가를 떠보듯 입을 연 사부님 때문에 놀라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나보다 빠르게 나선 진제환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마음이신지 이해합니다.”
“그래? 자네도 그런가?”
“예.”
사부님이야 나를 아주 어릴 때부터 봐 오셨으니 그렇다 치지만, 거기에 대고 동감하는 진제환은 무어란 말인가? 그러나 사부님이 진제환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열심히 배가 꽉 찰 때까지 사과를 먹은 뒤 적당히 시간이 흐른 것을 알아차리고 도장에 나갈 시간이 다 된 것 같다며 주변 분위기를 서둘러 환기한 것뿐이었다.
“헉! 사범님!”
“사범님이다!”
오랜만에 만난 인우와 세종이는 그사이 많이 큰 것 같았다. 어린아이들은 정말 빨리 성장한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빛나는 두 쌍의 눈동자가 내게 매달려 어리광을 피웠다.
“이제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오늘부터 다시 나오시는 거예요?”
“아니.”
고개를 젓자 곧바로 실망하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조금 웃었다. 이런 녀석들을 두고 그동안 본의 아니게 병원과 집에만 처박혀 있었다니. 흘려보낸 시간들이 너무나 아까웠다.
“다음 주부터 다시 보자.”
“정말요?”
“약속이에요!”
“약속!”
너도나도 달려들어 새끼손가락을 내민 아이들에게 손가락을 걸어주면서 나는 근질근질한 기분을 느꼈다. 한참 뒤에야 만족할 만큼 치댔는지 떨어져 나간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몇 발짝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진제환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제 돌아갈 건가?”
“그래야지.”
“데려다줄게.”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올 때도 이미 타고 왔으니 갈 때 또 탄다고 이상할 건 없겠지만… 나도 염치라는 건 안단 말이다.
“널 운전기사로 부려 먹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날 부려 먹어도 되는 건 너뿐이니까 상관없어.”
그런 뭔가 위험한 기미가 느껴지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생긴 놈이 그런 말을 하니까 왠지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아서 내가 다 민망했다.
“사부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 그래.”
“그리고 저, 새로 휴대폰도 샀으니 앞으로는 이쪽으로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꺼낸 휴대폰을 본 사부님은 아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말 네 거냐?”
“정말 제 겁니다.”
“그래. 알았다.”
사부님의 얼굴에 번진 기쁨의 빛을 보니 왜 이리 쑥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나는 멋쩍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린 뒤 진제환과 함께 도장 밖으로 나갔다. 모처럼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적당히 흘러가고 있는 좋은 날씨였다.
“무헌, 이쪽이다.”
진제환이 바이크를 세워 둔 곳까지 가 도로 헬멧을 받아 쓴 나는 돌아오는 내내 오늘 같은 날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다리도 더 이상 변하지 않고, 모든 것들이 일상처럼 흘러가는 오늘 같은 날만 있다면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뭐… 지금은 희망 사항일 뿐이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내게 찾아온다면, 그때도 이 녀석이 내 옆에서 평소와 같은 얼굴로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진제환에게는 말하지 못할 작은 소망을 품은 채로 바이크는 한가롭게 도로를 달려 나갔다.
“…잠깐 쉬었다 가자.”
나는 손을 들어 일행의 시선을 모았다. 아무래도 또다시 마력 보충을 해야 할 타이밍이 돌아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카프. 괜찮은 거지?”
크란이 걱정스럽게 묻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저장의 반지에서 꺼낸 마력 포션을 마시자 금세 몸에 활력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몰라 포션을 두 병 정도 더 마신 뒤 나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디텍트 매직!”
- 슈우우…….
주변의 시야가 어두워지며 초록빛 수식 세계가 은은히 세계를 뒤덮었다. 벌써 몇 번째 이 짓을 반복했기에 이미징을 하는 데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우리는 게임 시간으로 3일 정도 사막을 헤매며 감추어져 있다는 다크 엘프들의 터전, 검은 밤의 숲을 찾았다. 처음에는 이것이 노가다일 뿐 샅샅이 뒤지다 보면 바로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몇 번인가는 희끄무레한 것이 시야에 들어와 황급히 달려가 보았었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곳은 그저 신기루처럼 평범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일을 몇 번인가 반복했더니 지금은 시야가 약간 희끄무레한 정도로는 모래 먼지이겠거니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슬슬 찾는 방법을 바꾸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딱히 떠오르는 좋은 생각이 없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또 뭐가 있지? 사방이 트여 있는 사막에서 감추어져 있는 것을 찾으려면 디텍트 매직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는데.’
“마법사. 언제쯤 되어야 이 짓이 끝나는 거야? 너무 지루해 미칠 것 같아.”
죽은 지 오래인 꼬마 유령마저 이런 말을 하니 정말로 다른 방법을 시도하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지도상으로 우리가 탐색한 범위는 전체 사막의 70% 정도니까 나머지 30% 안에 목적지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크란도 나와 비슷한지 약간 자신감 없는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나는 여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완의 옆구리를 툭 쳤다. 유완은 해가 쨍쨍하게 떠 있는 사막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일단 갈 수 있는 곳까지는 전부 탐색해본 뒤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음…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 새로운 방안이 없다는 게 문제란 말이다.
결국 유완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또다시 정처 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는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내 뒤를 따르던 크란이 심심했는지 문득 입을 열었다.
“있잖아, 카프. 숲이라면 그래도 상당히 범위가 넓은 공간이겠지?”
“…그렇겠지.”
“그런 공간이 숨겨져 있으려면 특정 포인트에서 워프해 들어가는 걸까? 아니면 그냥 여기에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가 눈치챌 수 없도록 감춰져 있는 걸까?”
“…….”
그 말을 듣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던 중 갑자기 벼락같은 충격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란이 말한 것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가정이었다. 숲의 위치가 이곳에 있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데 입구만 이곳에 있느냐는 어느 쪽이 답인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여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막연히 ‘숨겨진 장소’를 찾기 위해 디텍트 매직을 쓰고 있었다. 저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쪽이든 마법적으로 숨겨진 것이라면 디텍트 매직으로 찾아낼 수 있겠지만, 마법의 범위가 내 시야 내로 한정되어 있는 이상 찾아내야 하는 것의 규모를 잘 가늠해 보고 찾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어딘가에 문만 숨겨져 있는 것이라면 지금처럼 찾는 쪽이 맞아. 하지만 만약 숲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거라면, 방법을 조금 달리하는 쪽이 맞겠지.’
“크란.”
“응?”
크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크란의 어깨를 잡고 힘차게 등을 두들겨 주었다.
“고맙다.”
“……어?”
크란의 얼굴이 조금 빨갛게 변했다.
“뭐, 뭐가?”
“네 덕분에 지금 시도해 볼 만한 새로운 방법이 떠올랐어.”
“새로운 방법?”
“플라이!”
나는 대답 없이 곧바로 플라이를 사용했다. 디텍트 매직을 사용한 상태였지만 플라이 정도는 무리 없이 함께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땅에서 채 1미터도 떨어지기 전에 갑자기 유완이 내 후드 망토 자락을 꽉 붙잡아 더 올라가지 못하도록 끌어당겼다.
“윽!”
갑자기 받은 충격 때문에 몸이 기울어져 이미징이 흐트러지자 마법도 모두 일시에 깨져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보기 좋게 도로 사막 위로 나동그라졌다.
“깜장검사, 미쳤어? 카프한테 무슨 짓이야?”
“1미터 이상 떨어지면 보호 스킬이 해제되어 버린다.”
깜짝 놀라 달려왔던 크란이 냉정한 유완의 말을 듣고는 ‘그러고 보니’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 또한 같은 감상을 느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걸 잊고 있었군.’
유완의 보호 스킬이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3일간 헤매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만약 보호 스킬이 해제되었다면 하루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유완의 스킬 특성상 플라이는 쓸 수 있었을지언정 내 체력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 죽고 말았을 것이다.
플라이가 1인용 스킬이라는 것이 이렇게 아쉬워질 줄이야. 예상치 못했던 문제였다.
“플라이를 써서 뭘 하려고 했었던 거야, 카프?”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나에게 크란이 물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사막에 숲이 숨겨져 있다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뭔가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서.”
이 사막은 길 이정표로 삼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모래더미뿐이라 지도가 없으면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조차 알기 힘든 곳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는 것보다는 멀리서 한눈에 내려다보는 쪽이 뭔가를 찾을 때에는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러한 내 뜻을 알아차렸는지 크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일리가 있네. 하지만 플라이를 못 쓰면 위로 올라갈 수가 없잖아.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다른 방법이라…….
일행들과 함께 사막이 전부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머릿속에서 내가 쓸 수 있는 마법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며 생각해 보는 동안 꼬마 유령이 답답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냥 저번처럼 몬스터 등에 타면 되잖아.”
그 몬스터들은 이미 놓아주었으니 다시 부를 수 없다는 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이번에는 유완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고도가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한다면 어디서든 상관없을지도 모르지. 사막이 아닌 다른 장소로 옮기는 방법도 있으니까.”
장소를 옮긴다…라. 확실히 이 사막의 효과가 지속되는 곳만 아니라면 굳이 일행들과 붙어 이동해야 할 이유는 없다. 디텍트 매직의 효과가 내 시야가 닿는 곳까지라는 것을 떠올려 볼 때, 여기서 플라이를 쓸 수 없다면 유완의 말대로 장소를 옮기는 것이 제일 나을 듯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러고 보면 가장 적당한 곳이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아주 높고 거대한 나무들이 벽처럼 빽빽하게 둘러서 있는 곳.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마음대로 마법을 쓸 수 있는 곳. 사막 한가운데 있지만 죽음의 사막의 효과를 받지 않는 곳.
그곳은 바로 이루미네의 숲이었다.
“그래……. 어쩌면 가까운 데 있었던 답을 계속 놓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나는 눈앞이 트이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3일 만의 노력 끝에 드디어 앞으로 나아갈 길이 좀 보이는 것 같았다.
“이루미네의 숲으로 돌아간다.”
“응? 왜 도로 그쪽으로……. 아!”
의아하게 반문하던 크란도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듯 탄성을 질렀다.
“그렇구나. 거기서는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지. 위치상으로도 그 이상 적격인 곳이 없겠구나.”
“응? 뭐야. 무슨 말인데?”
꼬마 유령이 우리끼리 통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끼어들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그곳에 도착하면 알게 될 테니까.
우리는 왔던 길을 걸어 도로 이루미네의 숲으로 돌아갔다. 사막 위에 신기루처럼 솟아 있는 높은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자 당연하게도 킬 라질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 오셨군요.”
“이번에는 이루미네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먼저 용건을 밝혔다.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서 마법을 조금 사용할 예정입니다.”
“혹시 이 숲에 피해가 가는 마법은 아니겠지요?”
그는 약간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자 이내 뒤로 물러나 주었다. 나는 두 사람과 엘프 하나, 그리고 유령 하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몸의 마력을 가늠하며 천천히 이미징을 시작했다.
이 숲 위로, 드높은 하늘 위까지 거침없이 날아오르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플라이!”
다시 한번 외친 주문과 함께 몸이 휙 날아올랐다. 나는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 꼭대기까지 날아오른 뒤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올라갈수록 따가운 햇빛이 전신을 향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마침내 엘프들이 사는 숲 전체가 보일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오자 저 멀리 점처럼 작게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발라 모냐크일 것이었다.
사막 전체가 내 발아래 펼쳐진 것을 내려다보며 시선을 옮겼지만 육안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곳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새하얀 모래 언덕만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이 상태에서…….’
“디텍트 매직.”
- 휘이이이…….
디텍트 매직을 사용하며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순식간에 어두워진 시야와 함께 초록색 수식 세계가 죽 펼쳐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물망을 펼치듯 넓어져 가는 수식 세계를 지켜보던 나는 문득 어느 부분에서부터 수식 세계의 선들이 하얗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 숨을 삼켰다.
‘저건….’
입체적으로 그어져 있는 수식 세계의 초록빛 선들이 무언가에 물들듯이 희게 변하고 있었다. 까마득한 위쪽에서 내려다보는데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거대한 흰색 선들이 마침내 확장을 멈추었을 때, 나는 그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일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희게 물들어 있는 선들은 거대하고 비죽비죽한 숲을 연상시키는 모양새로 솟아 있었다.
“찾았어.”
재빨리 플라이를 해제해 땅으로 내려와 말하자 모두의 얼굴에 환한 기색이 떠올랐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 곧바로 간다.”
나는 그렇게 말한 뒤 킬 라질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찾던 것을 찾았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킬 라질의 눈빛으로 보아 내가 무엇을 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한번 사막으로 빠져나갔다.
아직까지 디텍트 매직을 사용 중인 상태라 주변이 온통 초록빛 선이 그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저 멀리 그중에서도 희끄무레한 부분이 언뜻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그 범위가 너무나 거대해 내가 착각한 것이라 여겼었지만 아니었다. 어렴풋이 희게 보이는 범위 전부가 내 추측으로는 숨겨져 있는 숲일 가능성이 높았다.
“카프…….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정말 여기야?”
크란이 의아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가 숨겨져 있는 숲일 것임은 확실했지만, 문제는 이제 이것을 어떻게 드러내어 들어가느냐였다. 디텍트 매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고작 숲의 형체뿐인데, 어떻게 해야 숲을 드러낼 수 있을까…….
나는 잠시 희게 빛나는 범위 주변을 맴돌며 주변을 탐색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촉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시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는 슈페리어에게 좀 묻고 싶군.’
하지만 슈페리어는 아직도 검 속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은 지 오래다. 굳이 불러내어 도움을 요청하기도 이상했다.
‘숨겨진 것……. 숨겨진 것이라.’
나는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생각을 좀 더 정리하려 노력해 보았다. 내가 가진 마법 중 숨겨진 것을 탐색하는 마법은 디텍트 매직뿐이다. 이 마법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효과도 있지만 이 숲에는 그러한 해당 사항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렴풋이 모습을 볼 수만 있을 뿐, 드러낼 수 없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루미네는 분명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 마법이 도움이 될 거라고 했었는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대체 뭘 더 해야 하는 거지.’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 아이템창을 열어 부서진 다크 엘프의 표식을 꺼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쥐고 이리저리 휘둘러 보아도 변화는 없었다.
‘음……. 이것도 소용이 없다면 다음은….’
“파이어 볼.”
- 화르륵!
혹시나 싶어 파이어 볼을 불러내자 활활 타오르는 작은 불꽃이 내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움직여 주변을 맴돌게 해 보았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진 점은 없었다.
나는 파이어 볼을 거두고 이번에는 머리를 맑게 비웠다.
“인페르노.”
- 후르르…….
파이어 볼보다 훨씬 검붉은 불꽃이 허공에서 툭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마력 또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인페르노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사막 위를 돌아다녔지만 이번에도 눈에 띌 만한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패였다.
“땅이라도 같이 파 볼까?”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크란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면 뭐… 물이라도 끼얹어 보는 건 어때. 날씨에 따라 변화가 나타나거나 낮과 밤이 다를 수도 있어.”
전부 노가다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제의지만 좀 더 다른 의견도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유완을 향해 눈을 돌렸다. 유완은 사막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내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틀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넌 어때.”
다른 의견 없느냐는 뜻을 담아 묻자 유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능하다면 좀 더 정보를 수집하는 쪽이 좋을 것 같다.”
정보 수집이라……. 이루미네를 다시 만나보라는 뜻인가?
“혼자의 힘으로 전부 해결하는 쪽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한발 물러서는 쪽이 오히려 빠른 해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음……. 맞는 말이다. 힌트를 받을 수 있다면 전부 받는 쪽이 내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다시 돌아가야겠어.”
과연 킬 라질이 두 번째로 돌아온 우리들을 보면 무어라 말할까.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우리는 다시 빠르게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다시 찾아와 죄송합니다만, 이루미네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
또다시 높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은 킬 라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 카라나 님을 말입니까?”
“예.”
“엘 카라나 님의 제자인 당신이라면 당연히 자격이 됩니다만……. 공교롭게도 엘 카라나 님께서는 이틀 전부터 중요한 작업을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끊으셨습니다. 때문에 지금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루미네가 이틀 전부터 은둔 중이라고?
‘그러고 보니 이루미네가 슈페리어 퀘스트의 보상 아이템을 바로 줄 수 없다고 했었지. 그것 때문인가…….’
경험상 무언가를 위해 동굴에 틀어박힐 때의 이루미네는 스스로 다시 나타날 때까지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 좋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즉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곤란한데.’
나는 지금 당장 조언이 필요했다. 이루미네와 만날 수 없다면 어디서 조언을 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이상했는지 킬 라질이 고개를 기울이며 내 쪽을 보았다.
“실례지만 엘 카라나 님의 제자께서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대들의 모습을 보아서는 저 사막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보입니다만.”
매우 정확한 추측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도 될지 잠시 망설였다. 외부의 일과 연관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찾는 것은 과거에 다크 엘프들이 살고 있었던 검은 밤의 숲이다. 같은 엘프인 킬 라질이라면 그 숲에 대해 조금이나마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는… 저 사막에 숨겨져 있다는 검은 밤의 숲을 찾아야 합니다. 이루미네의 조언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역부족인 듯해 그 숲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었습니다.”
솔직하지만 공손하게. NPC를 대하는 이러한 태도를 나에게 확실히 가르쳐 준 키온 형과 루크레이신이 떠오르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은 밤의 숲…… 말입니까?”
킬 라질이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잠시 숲 너머로 어렴풋이 비쳐 보이는 뜨거운 사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지금까지 그저 조용하고 고지식해 보였던 엘프 청년의 눈빛이 어쩐지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고목처럼 느껴졌다.
“그렇군요. 검은 밤의 숲이라……. 어려워하시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혹시 그것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십니까?”
“알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원래 엘프 종족은 수가 적기에 부족이 달라도 교류는 긴밀했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는 종종 그곳에 들렀었으니까요.”
겉보기에는 고작 2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싶은 킬 라질의 입에서 ‘젊은 시절’이라는 말이 나오니 몹시 묘했다. 하지만 이루미네도 겉보기에는 아주 젊은데도 500년 전부터 살아왔던 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저 킬 라질의 나이도 겉과는 아주 다를 것임에 분명했다.
킬 라질이 검은 밤의 숲과 다크 엘프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혹시 저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검은 밤의 숲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부디 알려주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당신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엘 카라나 님의 사명을 받드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하겠습니다.”
됐다. 겨우 목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이 온몸을 휩싸고 돌았다.
킬 라질은 우리들에게 손짓을 해 숲의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몇 사람 정도가 앉아서 쉴 수 있을 만한 나무 그루터기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그중 한 곳에 앉은 뒤 등에 매고 있던 거대한 활과 활통을 옆에 놓았다.
“앉으십시오.”
우리가 모두 그의 주변에 적당히 자리를 잡자 킬 라질은 조용히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크 엘프 종족은 폐쇄적인 습성을 지녀 오래도록 다른 종족들과의 교류를 금지해 왔습니다.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평범한 엘프 종족이 아닌 어둠의 힘을 근본으로 한 타락한 종족이라는 오해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의 힘은 고대로부터 엘프 종족에게 전해진 마법의 일종이었습니다. 그 힘을 탐내어 다크 엘프 종족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는 인간들이 많아졌기에 다크 엘프 종족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갔고, 마침내는 이곳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킬 라질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놓치지 않도록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도망친 끝에 찾아온 이곳에서마저 그들은 배신당했습니다. 소중히 가꾸어 온 숲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고 갓 태어난 아이들마저 인간들에 의해 죽임당하였을 때, 아마도 그들은 이 고통의 고리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했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그들의 선택을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지 못했던 관점의 이야기였다. 지금껏 보아 온 기억이나 꼬마 유령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하였을 때, 다크 엘프 종족은 마신의 편에 서 있다가 아마도 멸족당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런 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같은 종족이기 때문일까?
“엘프는 숲의 종족입니다. 숲이 더럽혀지는 것만큼 우리를 모욕하는 것은 없습니다. 흔히 우리들을 자비로운 종족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숲이 더럽혀진 엘프는 결코 상대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마 죽어버린 숲의 원수를 갚고 싶었을 것입니다.”
“숲이 더럽혀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루미네는 검은 밤의 숲을 발견하면 모조리 태워 달라고 말했다. 꼬마 유령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고도 말했었다. 도대체 어떤 변화를 겪었기에 그렇게 된 것일까.
내 질문을 들은 킬 라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의 눈 속에서 깊은 슬픔과 분노를 보았다.
“숲이 더러워진다는 것은 숲에 서린 생명력을 오염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의 순리를 어긴 것의 피가 뿌려진 숲은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이 돌아가지 못하지요. 더러워진 숲은 점차 썩어 그 안에 사는 생명들을 물들게 하고 결국에는 아무도 살지 못하는 곳으로 변화합니다. 단 하나, 인간이란 종족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검은 밤의 숲에 아무튼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겠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킬 라질이 감정을 갈무리하려는 것처럼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크 엘프들이 검은 밤의 숲을 포기하고 봉인하였을 때, 그들은 아마도 엘프들만이 쓸 수 있는 숲의 마법을 이용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인간들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힘을 가진 마법이니 그것으로 감추어진 것을 찾고 싶으시다면 엘프의 방법을 따라 해 보는 것도 해볼 만한 방법일 겁니다.”
“엘프의 방법이란 건 뭡니까.”
아마도 여기에 대한 답이 내게는 가장 중요한 조언이 될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들었으므로 나는 킬 라질의 말을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숲의 종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숲과 공생할 수 있도록 조정하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자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 나는 잠시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것을 입에 담았다.
“물입니까?”
“맞습니다. 현명하시군요.”
킬 라질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저희에게 있어 물은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니 엘프 종족이 숨긴 것을 찾고 싶다면 물을 한번 이용해 보십시오. 제가 드릴 만한 말은 이 정도입니다.”
나는 킬 라질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긴 뒤 다시 숲을 나왔다. 디텍트 매직을 사용해 다시 한번 숲의 흔적이 보이는 곳으로 다가가 주변을 둘러보자 크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물을 이용하라는 건, 물 계열 마법을 쓰란 뜻일까?”
“아마도.”
내가 배운 마법 중 물을 직접적으로 불러내는 마법은 없다. 하지만 물을 만들어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양손을 들어 각각 다른 마법을 손 위에 올리는 상상을 했다.
오른손에는 불꽃의 공을, 그리고 왼손에는 작은 얼음 창을.
“파이어 볼, 아이스 스피어!”
주문을 외치자마자 내가 생각했던 대로 두 가지 마법이 동시에 발현되었다. 나는 냉기를 뿌리는 얼음 창을 쥐고 파이어 볼 위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곧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했던 얼음 창이 녹으면서 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모래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쏠렸다.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공기가 고요해졌다.
톡 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모래 밑으로 스며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앗!”
크란이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던 모래더미 위로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며 마른 입술을 축여 삼켰다.
빛은 정확히 물방울이 떨어진 곳에서부터 가느다랗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아이스 스피어가 전부 녹기 전에 마력을 좀 더 불어넣으며 이미지를 바꾸었다.
그러자마자 순식간에 크기가 세 배쯤 커진 아이스 스피어와 파이어 볼이 화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이전보다 더 많은 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 파아아앗!
순식간에 짙은 색으로 물든 젖은 모래가 푸른빛을 뿜어내며 환히 빛났다.
나는 내 키보다 좀 더 높은 곳까지 쏘아져 올라온 빛 사이로 문득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 같은 것을 보았다.
‘저건…….’
혹시나 싶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자 때마침 떨어진 물을 맞고 한층 더 짙어진 빛 사이로 이번에는 정말로 확실하게 검은 나무가 보였다. 잎사귀는 전혀 없이 말라비틀어진 나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쪽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나무가 보이는 곳에 막 손끝이 닿은 순간, 갑자기 훅하고 빨려 들어가는 묘한 기분과 함께 내 손끝이 빛 사이로 녹아들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헉. 카프! 어서 손 빼!”
깜짝 놀란 크란이 난리를 치는 소리를 들으며 손을 빼내자 다행히 다친 곳은 없이 멀쩡한 내 손이 보였다.
‘그렇다는 건… 저 빛 안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숲과 연결되는 고리란 건가?’
그때 아이스 스피어가 전부 녹아버리면서 떨어지던 물도 끊겨 버렸다. 그와 동시에 나무 그림자 또한 아지랑이처럼 사라진 것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뻗어 아까 전의 그 위치를 향해 휘저어 보았다. 이번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아무래도 사막에 물을 부으면 우리가 찾던 곳으로 넘어가는 문을 열 수 있는 것 같다.”
옆에서 냉정히 상황을 지켜보았던 유완이 나와 같은 생각을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들어가야겠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 거냐.”
“당연히 같이 가야지, 무슨 소리야?”
“난 당연히 들어가야 해. 거긴 애초에 내가 쉔에게 부탁받아서 찾기로 했던 곳이니까!”
크란과 꼬마 유령이 망설임 없이 한마디씩 보탰다. 유완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당연히 같이 가는 것이 아니었냐는 듯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올리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럭저럭 든든하군.’
“좋아. 그러면 바로 들어간다. 아이스 스피어, 파이어 볼!”
나는 다시 한번 두 가지 마법을 사용했다. 허공에서 나타난 아이스 스피어와 파이어 볼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큰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두 가지 마법이 곧바로 서로 부딪치자마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녹아 물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사막 위로 비처럼 떨어진 물 사이로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 파아아앗!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나무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자마자 몸이 어디론가로 빨려드는 느낌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한순간에 모두 바뀌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몇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다 천천히 눈을 떴다.
‘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이제 눈부신 햇살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모래사막이 아니었다. 퀴퀴하고 불길한 썩은 냄새와 축축한 습기가 가득한 어두컴컴한 숲. 살아 있는 식물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깡마르고 검게 변한 나무들만 가득한 풍경이 음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으랏차. 어라? 여긴… 하늘이 없네.”
제일 먼저 넘어온 크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이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있을 뿐 하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밤하늘이라기보다는 검은 장막이 씌워져 있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간 자체가 봉인된 곳이라 그런가….’
뒤이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꼬마 유령과 유완도 공간을 넘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반투명하게 빛나는 유령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여기가 바로… 쉔이 살았던 그곳인 거야?”
“그런 것 같다.”
“여기가…….”
주변을 둘러보는 꼬마 유령을 지나 나무 쪽으로 다가간 나는 조금 더 주변을 밝게 보기 위해 손 위에 작은 파이어 볼을 하나 올렸다.
“파이어 볼.”
- 화르르!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밝아진 숲속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죽어 있다는 것을 형상화한 공간 같았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검게 변해 있는 앙상한 나무들과 바닥에 진득하게 고여 있는 썩어 문드러진 무언가들뿐이었다.
‘…일단 좀 더 걸어 들어가 볼까.’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일행들이 따라오는 발소리가 났다. 비 온 뒤의 땅처럼 묘하게 질퍽한 땅을 신중하게 밟으며 나아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슬슬 내가 어디서부터 왔었던가 방향 감각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할 때쯤 멀리서 무언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루미네가 있는 엘프 마을에서 본 것과 비슷한 모양새를 한 집들이었다. 나무 위나 땅 위에 걸쳐 자유로운 모양으로 세워진 나무 집들을 보자 저것이 다크 엘프들이 살던 집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저기가 마을인가 보네, 카프.”
“음.”
“뭐… 우리가 전부 뒤져 볼 필요는 없겠지?”
아마 그렇겠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있어 이곳은 이루미네의 부탁에 따라 불태워야 하는 곳이고, 꼬마 유령의 목적지일 따름이었다. 나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꼬마 유령에게 다가갔다.
“뭔가 느껴지는 건 없어?”
“……없어. 하지만 이곳이 쉔이 살던 곳이라는 건 알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꼬마 유령은 집과 집 사이로 이어진 앙상한 나무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짚었다.
“모든 것이 쉔이 말해 주었던 그대로야. 집 모양도, 풍경도……. 처음 보는 곳이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보다 보니 흐릿했던 기억이 점점 선명해져.”
“…….”
“쉔은 정말로 여길 다시 한번 보고 싶어 했었어. 몇 번이나 말하고, 또 말했으니까.”
꼬마 유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곳을 인간들 때문에 잃었는데도 그 앤 나에게 항상 상냥했어…. 더러운 인간이라고 멸시해도 되었을 텐데.”
반투명한 손이 검게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쓰다듬었다.
“나는 쉔의 부탁을 꼭 이루어주고 싶었어. 쉔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친절한 존재였으니까. 죽었지만 그 약속만은 지키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와 보니까 기분이 좀 이상해.”
꼬마 유령이 나무에서 손을 떼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마법사. 혹시 이 나무들에게 아까처럼 물을 주면 조금 살아나지 않을까? 한 번만 더 해 주면 안 돼?”
처음으로 보는 꼬마 유령의 간절한 표정을 보니 아마 그렇게 해도 이 나무들이 되살아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잠자코 아이스 스피어와 파이어 볼을 불러내 나무 위에서 녹여 물을 떨어뜨려 주었다.
하지만 아이스 스피어 하나가 거의 다 녹을 때까지도 검은 나무는 여전히 그대로의 모습일 뿐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다.
“…역시 안 되는구나.”
꼬마 유령이 고개를 떨구었다.
“하긴 원래 여기 살던 엘프들도 그 정도 방법은 다 써 봤겠지……. 쉔도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 봤지만 결국 고향을 떠나야 했다고 말했어.”
“…….”
나는 이제 이곳을 전부 불태워야 한다. 이루미네와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으니 곧 해야 할 일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은 뒤에도 계속 유령으로 남아 있었던 저 소년에게는 대체 무어라 말해야 할까. 게임 속의 존재일 뿐임을 알아도 함부로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왜 그래, 카프. 갑자기 물은 또 왜 준 거야?”
“…그냥. 효과가 있을까 싶어서.”
의아해하는 얼굴로 다가온 크란에게 짧게 설명하자 크란이 약간 안타까워 보이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곳은 전부 죽은 지 오래라 이제 와 물을 준다 해서 살아나진 않을 거야. 희망이 있다면 정화 스킬 정도인데……. 내 것 정도로는 기별도 안 갈 테고… 만렙 사제 유저들이 한 다스로 온다 해도 여길 살리는 건 무리지 않을까.”
“네 것?”
“응. 성기사도 약간의 정화 스킬은 쓸 수 있어. 효과는 약한 독이나 마비 정도만 풀어줄 뿐이지만 뭐…….”
크란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꼬마 유령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저기, 나 여기서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 쉔이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말했던 나무가 이 근처에 있을 거야. 거기 가서 그 나무가 제대로 잘 있는지 확인해야 해.”
“뭐?”
“분명히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있다고 쉔이 그랬었어. 갈 거야.”
말을 끝낸 뒤 꼬마 유령은 곧바로 휙 하고 날아올라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쫓아갈 거야?”
크란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는 뒤늦게 꼬마 유령이 사라진 방향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음울한 검은 그림자 같은 앙상한 나무들을 헤치고 덤불을 걷어내며 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빠르게 날아가는 반투명한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꼬마 유령은 마치 이곳에 와 보았던 이처럼 거침없이 나무들을 통과해 나아갔다. 샛길을 지나 조금 더 나무들이 덜 우거진 곳으로 빠져나가 방향을 꺾어 한 바퀴 돌자 우리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나타났다.
‘저건…….’
나는 꼬마 유령이 그 앞에서 멈추는 것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숲 한가운데 제왕처럼 버티고 서 있는 거대한 나무는 그 끝이 어디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둘레는 성인 남자 여러 명이 달라붙어도 다 감쌀 수 없을 만큼 두터웠다.
세계수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저런 생김새가 아닐까 싶을 만큼 거대한 나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 꼬마 유령은 그 나무의 주변을 돌아다니다 갑자기 “찾았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두컴컴한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에 힘을 주고 집중해서 보니 거대한 나무 옆에 아주 작은 나무가 하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찾았어…. 바로 이거야.”
떨리는 목소리를 낸 꼬마 유령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천천히 그 옆으로 다가가 앞에 있는 작은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는 내 가슴께까지나 올락 말락 한 키에 어린아이 팔뚝만큼 가느다란 몸통을 가지고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전혀 특별해 보일 것이 없는 나무였지만 나는 문득 검은 뼈다귀 같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무언가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누군가가 일부러 묶어 놓은 것이 분명한 손수건이었다.
“이 나무는 쉔이 태어났을 때 쉔의 아버지가 심은 나무야. 쉔은 이 나무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했어.”
꼬마 유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은 맥없이 나무를 통과할 뿐이었지만 슬픈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날 때 마지막 작별 선물로 이 나무에 쉔의 손수건을 묶어 두었는데 그게 잘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었어. 그래…. 그 부탁을 위해서 나는…… 여기까지 온 거야.”
“…그래. 약속을 지켰으니 상대방도 고맙다고 생각할 거야.”
슬퍼 보이는 꼬마 유령을 위로하기 위해 한마디 하자 꼬마 유령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마법사?”
“나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해.”
내 대답을 들은 꼬마 유령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반투명하게 빛나는 손이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천 위를 맴도는 것을 보았다.
“……그랬으면 좋겠다.”
한참 뒤 흘러나온 목소리는 지금껏 보았던 꼬마 유령의 재수 없을 정도로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정말 그 나이 대의 아이처럼 어리고 힘없이 들리는 목소리 안에는 진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쉔에게 알려주고 싶어. 내가 쉔의 친구를 만났고, 잘 있는지 확인했다는 걸…….”
“…….”
아마도 그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을 전해 줄 당사자도, 받을 당사자도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되었으니까.
꼬마 유령은 잠시 후 나무를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고 똑바로 섰다. 그리고 공중으로 조금 더 떠올라 나와 시선을 같은 높이에서 마주했다.
‘……음?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많이 투명했었나?’
지금까지 주변이 너무 어두컴컴해서 잘 몰랐었는데, 내 눈앞에 떠오른 꼬마 유령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더 투명해 보이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이전에는 어두운 곳에서 봐도 표정이 전부 보일 정도로 밝았었는데 지금의 꼬마 유령은 표정을 파악하기가 힘들 정도로 투명했다.
내가 이변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는지 꼬마 유령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내 힘은 동굴을 떠났을 때부터 점점 사라지기 시작해서 이 나무를 찾아낸 순간 다해 버렸어. 아마도 내 목표를 다 이루었기 때문이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누군가와의 끝이란 왜 항상 이렇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꼬마 유령은 점점 더 투명해져 갔다. 제 손을 올려 투명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꼬마 유령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태어나고부터 줄곧 갇혀 지냈었던 입장에서 지난 며칠간은 참 재미있었는데 그것도 이제 끝이네. 처음으로 하늘을 날아 봤고, 몬스터도 보고,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것 이외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뭐. 솔직히 좋았어. 난 되바라진 꼬맹이라고 생전에 참 많이 혼났었는데, 그런 나를 대하면서도 당신들은 한 번도 화내지 않았잖아.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해. 쉔이 살던 숲을 보고 마지막 부탁도 이루었으니 나는 이제 미련도 없어.”
그 이외에 미련이 없을 리 없는데도 시원하다는 듯 말하는 꼬마 유령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느새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유완과 크란도 비슷한 마음인지 말이 없었다. 꼬마 유령은 검게 물들어 있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말야,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마법사?”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낮게 대꾸하자 꼬마 유령이 씩 웃었다.
“난 말야, 항상 억울했어. 나는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는지, 왜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없었는지, 쉔과 나는 왜 그런 곳에서 만나야만 했는지 너무너무 궁금하고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 저기. 마법사 당신은 또다시 어둠의 신을 부활시키려는 사람들을 막으려 한다고 말했었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꼬마 유령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유령 특유의 음산하게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그 소리는 한층 슬프게 들렸다.
“그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그 사람들은 어둠의 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자들인데 당신들은 몇 명 안 되잖아. 세 명이서 그 사람들을 다 막을 수 있어?”
“…그래. 그런 사람들을 막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니까.”
“푸핫. 뭐야. 당신이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꼬마 유령은 웃었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내가 영웅은 아니라지만, 정말로 세상을 구했던 영웅 슈페리어의 뒤를 잇는 퀘스트 중이었으니까.
“그래도… 멋있네. 나도 말이야, 나중에 크면 쉔을 구하는 영웅이 되고 싶었어. 당신 같은 힘이 있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몰라…….”
“…….”
“저기 말이야. 내 부탁은 여기서 나가면 어둠의 신을 섬기는 녀석들을 엿 먹여 달라는 거야. 두 번 다시 나 같은 재수 없는 녀석이 생기지 않게, 제대로 엿을 먹여서 저세상으로 보내줘.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까 괜찮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꼬마 유령의 몸은 더욱 투명해져서 이제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미한 빛무리와 목소리뿐이었다.
“……그리고 쉔의 손수건을 풀어서……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묻어줘……. 그것도 쉔의 부탁……. 나는 이제…. 부탁할게…….”
꼬마 유령이 간절하게 손을 뻗어 검은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손수건을 만지려 했지만 그보다는 몸이 완전히 투명하게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더 빨랐다.
“알겠어.”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대답하자 꼬마 유령이 부서지고 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제 나는 볼 수 없었다.
“…그래. 믿을게, 영웅님…….”
아주 작지만 선명하게 들린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꼬마 유령의 머리카락까지 전부 부서져 사라졌다. 조각난 빛가루들이 허공에 녹아들기 직전의 몇 초를 마지막으로 그가 있었던 곳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검게 변해버렸다.
“…….”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꼬마 유령이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 크란도, 유완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띠링!
그때, 갑자기 낯선 알림창이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