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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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임 내 시간으로 3일간 꼬박 산을 탔다. 그동안 마주친 마물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었다. 유완과 크란은 정말로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전부 그것들을 처리해 버렸으므로 이쪽에서 할 일은 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초조하고 지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걸어다니면서 수련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대로는 엄청나게 등산이나 해 댄 끝에 걷기 스킬만 계속 진화할 기세다. 멀리서 신나게 마물들을 썰어 대는 크란과 유완을 보며 심각해져 있는 와중, 마물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혼자 서 있으니 약한 놈이라고 생각해서 노리는 것 같지만 나는 단지 좀이 쑤실 뿐이었으므로 그 모습이 오히려 반가웠다.

“소드 오브 파…….”

“카프! 괜찮아?! 에잇, 파격의 신성!”

그러나 내가 검을 만들어내기도 전에 멀리서 그 모습을 발견한 크란이 기술명을 외치며 크게 횡으로 검을 그었다. 그러자 검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십자 모양의 흰 검기가 그대로 날아와 나에게 달려오던 마물을 4등분한 뒤 찬란하게 흩어져 버렸다.

“휴, 다행이다. 다치지 않았어?”

나에게 달려와 이리저리 몸을 살피는 크란을 보니 어쩐지 이런 기분도 오랜만에 느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대 패고 싶은 기분 말이지…….’

스산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크란이 움찔해 몸을 물렸다. 뭔지는 몰라도 제가 잘못했다는 것은 느낀 모양이었다.

“왜, 왜 그래……?”

“…….”

정말로 파이어 볼로 한 대 패고 싶다. 손이 근질거려 꿈틀거릴 정도였지만 나는 결국 그 충동을 참아내는 데 성공했다. 기껏 다시 재회한 친구고 쓸데없는 과보호긴 하지만 어쨌든 나를 위해서 한 일이니까……. 그래. 나는 참을 수 있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뭔진 모르겠지만 다시는 안 그럴게.”

손만 꿈틀거리며 서 있었더니 크란이 더욱 큰 공포를 느낀 듯 고개를 저으며 사과했다.

“뭘 참고 있는 건지 몰라도 차라리 그냥 해. 해도 괜찮아!”

“카프.”

스스로 매를 벌려 하고 있는 크란의 뒤에서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유완이 나를 불렀다.

“저쪽에 뭔가가 보인다.”

나는 크란을 내버려 두고 유완 쪽으로 다가갔다. 유완이 보고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리자 어두컴컴한 숲 너머로 뭔가가 어른어른 보이는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 보니 나무 너머로 비죽비죽 건물 지붕 같은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을인가?”

“아마도.”

키자르 산맥은 미스트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산맥 중 가장 범위가 넓고 깊다. 그러니 산속에 마을 몇 개쯤 있을 만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마물밖에 없는 상황에서 저것을 발견하고 나니 매우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저 안에 과연 살아 있는 NPC가 있을까.’

“일단… 가 보자.”

나는 유완과 크란을 앞세워 그곳으로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점점 크게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은 일단 겉보기에는 무언가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깨끗하고 고요해 보였다.

그러나 집의 모양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자 아니나 다를까 폐허에 가까운 상태로 방치된 텃밭이나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길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핏자국 같은 건 없어 보이는데…… 조금 더 들어가 볼까.’

일단 마을 내에서 마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유완과 크란을 바라보자 둘 모두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예전에 함께 다녔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럴 때는 말하지 않아도 잘 통해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울타리가 부서진 집 근처로 다가가 보았다. 열려 있는 문 안에서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옆집도, 근처에 있는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살던 NPC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죽었을까, 아니면 도망쳤을까.

‘둘 다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범위는 대충 둘러보았으니 이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도 한 번 둘러볼까 싶어 마법을 쓰기로 했다.

“디텍트 매직, 에어리얼 서번트!”

- 휘오오오!

부름에 응답해 발현된 두 개의 마법이 나의 이미징에 따라 착착 정리되어 시야 위로 덧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예전에도 두 마법을 함께 써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정하는 것이 한결 쉬웠다.

‘에어리얼 서번트는 나의 눈을 대신하고, 디텍트 매직이 그 위를 선글라스처럼 덮는 이미지로.’

두 눈을 감자 새로운 눈이 생긴 것처럼 머릿속에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가 공유되었다. 그 위로 디텍트 매직이 덧씌워지면서 눈앞이 원래의 컬러보다 한층 어둡게 보였지만 그 정도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조종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나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빠르게 이동시켜 마을 곳곳을 날아다니며 살피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내 주변을 한 번 휘감고 나서 꼼꼼히 살피기 힘들었던 빈집 구석구석까지 빠르게 살피기 시작한 에어리얼 서번트가 열 채도 되지 않는 집들을 모두 살핀 뒤 좀 더 먼 곳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쪽은…. 계곡인가?’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이 마을 뒤편에 있었다. 물이 있는 곳에 사람도 사는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지형이었다. 물이 흘러 내려오는 상류 쪽으로 에어리얼 서번트를 이동시키자 본체인 내 위치에서 너무 멀어지고 있어서인지 슬슬 두통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에어리얼 서번트를 이렇게 멀리까지 내보내 본 건 처음이었던가?’

실제 본체가 이곳에 있음을 자각하면서 에어리얼 서번트를 멀리까지 움직이는 것은 아주 강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조금만 더 나아가 보고 아무것도 없으면 도로 에어리얼 서번트를 거둬들이려 했지만, 그 순간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 새빨갛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마력 반응이군.’

방향을 돌려 보니 계곡 주변의 바위와 나무 사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작은 틈새가 보였다. 작다고는 해도 사람 한 명 정도는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의 크기였다. 디텍트 매직이 찾아낸 마력 반응은 바로 그쪽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좀 더 진행해 볼까, 말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할 수 있는 한 진행해 보기로 마음먹고 에어리얼 서번트를 움직여 그 틈새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바위틈을 뚫고 날아 들어간 에어리얼 서번트는 어두컴컴한 통로를 따라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정한 높이와 넓이의 길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길일 확률은 매우 낮아 보였다.

길은 점점 코너를 돌고 돌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고,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마법을 감지한 디텍트 매직이 뿌리는 빛 때문에 내 시야는 한층 밝고 새파랗게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긴 길을 돌아 그 끝에 있는 무언가를 마주쳤을 때, 나는 격렬한 두통을 느끼며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윽……!”

“카프!”

유완이 곧바로 내 팔을 붙잡아 당겼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신을 차리는 데 한참 걸렸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깨져 버린 집중력 때문에 마법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지만 나는 두통이 찾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짧은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뭔가… 제단 같은 게 있었어.’

디텍트 매직의 빛은 분명히 그것에 반응했다. 나는 그것이 아마도 내 퀘스트와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직접 가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가자.”

“어디로?”

크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저 너머에 있는 동굴 안에서 뭔가를 발견했어.”

“아, 그래? 역시 마법은 편리하네. 직접 움직이지 않고도 멀리까지 탐색이 가능하구나. 뭐 그것도 너나 되니까 하는 거겠지만…….”

걱정 반, 신기함 반의 눈빛으로 나를 보는 크란 덕분에 아직 두통이 사라지지 않은 와중에도 기분은 훨씬 가벼워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앞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로 본 것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풍경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그대로 마을 뒤쪽의 작은 길을 따라 계곡으로 나아갔다. 계곡물은 폭이 그다지 넓지 않아 한 번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바로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계곡을 넘어간 뒤에는 주변에 깔린 바위와 나무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동굴 입구를 찾았다. 내가 곧바로 그 입구를 찾아내자 크란이 방금 전보다 더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마법을 썼다지만 이렇게 깊숙한 곳에 있는 걸 어떻게 찾았어? 바깥에서 보기엔 그냥 바위일 뿐이잖아.”

“마법을 탐지하는 마법도 썼어. 이 안에서 마법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거든.”

“그래?”

크란은 동굴 주변에 서려 있을지도 모를 마법의 기운을 느껴 보려는 듯 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기색은 느끼지 못했는지 이내 어깨를 늘어트렸다. 유완은 주변 풍경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오로지 나만을 보고 있었다.

“난 역시 잘 모르겠는걸.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역시 마법사뿐이라 이건가…….”

모처럼 탐구심을 불태우는 건 좋지만 키도 큰 녀석이 계속 거기서 얼쩡거리다가는 지나가는 마물들에게 손쉽게 발견될 소지가 컸다. 나는 크란이 더 정신을 팔기 전에 먼저 동굴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파이어 볼.”

어두운 길 앞을 비추기 위해 손가락만큼 작은 파이어 볼을 눈앞에 띄우자 에어리얼 서번트를 통해 봤을 때처럼 성인 남자 한 명이 몸을 조금 움츠리고 지나가야 할 정도로 좁고 낮은 동굴 안쪽이 훤히 눈앞에 드러났다.

이곳은 결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닐 것이다. 아치형으로 깎인 천장이나 비교적 평탄하게 이어지는 바닥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카프를 먼저 들어가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혹시라도 뭐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

뒤쪽에서 크란이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유완, 크란 순으로 동굴에 들어왔기 때문에 크란은 몹시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그땐 네놈이 몸 바쳐 대신 죽어, 깜장검사.”

“…….”

“무시하는 거냐?”

크란이 뭐라고 말하거나 말거나 유완이 침착함을 지키는 모습은 나조차도 가끔 존경스러울 때가 있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상대방에게 더 큰 분노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잘 갈무리할 수 있다는 건 전투할 때 상당한 장점이었다.

뒤에서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벽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귓가에서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롭고 스산한 바람이 뒤에서부터 앞으로 부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뒤를 돌아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무표정한 얼굴의 유완뿐이었다.

“방금… 느꼈어?”

“뭘 말이지?”

“…바람이……. 아니. 됐다.”

바람이 느껴졌다고 말하려 했지만 유완은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을 그만두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와 반대쪽 귀를 간지럽혔을 때, 나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유완과 크란에게 정말 아무것도 못 느꼈는지 묻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돌아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나 혼자만 이곳에 들어왔던 것처럼 텅 빈 공간만이 그곳에 있었을 뿐이었다.

“…유완?, 크란?”

소리 내어 불러 보아도 답은 없었다.

‘화이트 캐슬에서 기억들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침착하게 다시 앞을 향해 몸을 돌렸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웠던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없었던 것이 하나 새로 생겨나 있었다.

“후후.”

전신이 진주처럼 하얗고 반투명하게 보이는 사람의 형상이 나를 보며 웃었다. 10대 초반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머리칼이 어중간하게 길어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아이는 분명히 나를 똑바로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안녕?”

“…….”

“말이 없네? 나와 대화하기 싫어?”

말까지 거는 것을 보니 기억 속 존재나 뭐 그런 건 아닌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나? 글쎄. 누굴까?”

아이가 몹시 재미있어 보이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맞혀 볼래?”

“……유령?”

아무리 봐도 생긴 것이 살아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기에 그렇게 말하자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똑똑하네. 나는 유령이야.”

웃으면서 자기가 유령이라고 말하는 유령이라니……. 상당히 싸구려 호러풍 코미디 영화 같은 상황이었지만 별로 웃기지 않았다. 내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아이가 재미없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반응 좀 해 줄래? 나는 아주 아~주 오랜만에 여기서 사람을 보는 거란 말이야.”

“내 뒤에 있던 일행들은 어떻게 된 거냐.”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아이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걷는 것처럼 움직이기는 해도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더욱 초자연적인 존재 같아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필요가 없어서 멀리 데려다 놓았어. 나에게 필요한 건 당신뿐이거든.”

내가 필요하다고?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아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별로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당신, 마법사지?”

“……어떻게 알았지?”

“아까 마법을 써서 여길 들여다보고 갔잖아. 나는 알 수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마법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믿기지 않았으나 아이는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난 아주 오랫동안 여기에서 당신 같은 마법사를 기다렸어. 이곳을 발견하고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사람.”

“…….”

“내가 당신만을 여기에 남겨둔 이유는 하나야. 날 여기서 꺼내줘. 난 여기에 갇혀 있는 데 이골이 났어. 밖에 나가고 싶다구.”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놀라서 눈을 깜박이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 익숙한 퀘스트창이 불쑥 나타났다.

-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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