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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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계속 날씨가 좋지 않았다.

미스트를 할 때를 빼놓고는 계속 눈이나 비가 오는 창밖을 보고 있자니 다리의 통증도 사라지지 않고 미약하게 지속되어 신경이 저절로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병원에서 타온 약을 먹었다. 한 번에 먹어야 하는 알약 개수는 일곱 개로, 그중에 세 개가 진통 관련이었고 나머지 네 개는 회복된 지 얼마 안 된 몸 상태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어디 아프신가요? 방 안 온도를 좀 더 올릴까요? 현재는 22도인데 눈이 와서 체감온도가 좀 더 추울 수도 있어요. ]

“…아니.”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하우스 컴퓨터는 허공에서 웬 불빛을 쏘아 내 몸 전체를 짧게 스캔한 뒤 다시 잔소리를 시작했다.

[ 체온이 내려가 있어요! 역시 추우셨군요! 부끄럽거나 귀찮다고 해서 몸을 챙기는 것을 잊으면 곤란해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 온도를 따뜻하게 맞추고 습도를 내릴게요. ]

말이 끝나자마자 발밑의 나무바닥이 한층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 커피는 어떠세요? 아니면 홍차? ]

“둘 다 됐어.”

[ 그럼 녹차로 할게요. ]

그럴 거면 애초에 보기에 녹차를 넣지 그랬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간의 경험을 돌이켜 볼 때 여기서 태클을 걸면 저 컴퓨터는 아주 기뻐했다. 그러면서 말이 세 배는 더 많아지므로 최선의 방법은 진제환처럼 아예 무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업할 때만 이곳에 오는 진제환과 달리 24시간을 여기서 보내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하우스 컴퓨터의 모든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하루에 몇 번씩이나 이런 일들을 겪는 중이었다.

[ 다 되었어요! ]

“…됐어.”

만들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멋대로 타서 가져온 녹차 잔을 든 로봇 청소기가 내 뒤를 따라다니며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안 마신다니까.”

[ 하지만 만들어 둔 걸 버릴 수는 없는걸요. 목이 안 마르시면 그냥 저기 계속 둘게요. 조금 식어도 괜찮으시다면 드세요. ]

두 번 거부하자 약간 풀이 죽은 것처럼 팔을 내린 로봇 청소기가 털털거리며 침대 옆 구석에 들어가 손을 드는 벌을 받고 있는 아이처럼 잔을 들고 대기하는 것이 보였다.

“…….”

로봇이니까 팔이 아플 리 없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할 리도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데도 미약하게 웅웅거리며 잔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로봇 청소기가 신경이 쓰여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휴…….”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로봇 청소기가 들고 있는 인스턴트 녹차 잔을 낚아챘다. 약간 뜨거웠지만 마시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대충 전부 마셔버린 뒤 도로 로봇 팔에 컵을 끼우자 기쁨에 찬 하우스 컴퓨터의 목소리가 공중에 크게 울려 퍼졌다.

[ 안 드신다더니 다 드셨네요! 역시 목이 마르셨던 거예요! ]

- 웅웅웅웅!

제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나의 희망을 깡그리 무시하고 웅웅거리며 내 주변을 한 바퀴 돈 로봇 청소기는 싱크대에 잔을 버리고 도로 잡지더미 사이로 처박혀 사라졌다.

도대체 진제환은 왜 이런 것들을 만들어 놓았을까. 처음부터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더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따뜻한 차를 마셔서 약 기운이 좀 더 빨리 도는지 천천히 미약한 두통과 다리 통증이 사라지고 눈앞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벽에 비춰주는 빛으로 된 시계에 의하면 현재 시각은 오후 여덟 시. 자기에는 조금 이르니 적당히 미스트 커뮤니티를 좀 더 돌아보고 쉬어야 할 것 같았다.

[ 미스트 공식 홈페이지에 새 동영상이 업로드되었어요! ]

그때, 하우스 컴퓨터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소식을 알렸다.

[ 지금 보시겠어요? ]

“새 동영상……?”

새턴에서도 현재 시저와 페일 나이츠가 전쟁을 준비 중인 것을 알고 있을 테니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개된 이번 동영상은 나름대로 그것과 관련된 의미를 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남은 사람이 나와 크란, 그리고 운오 세 명인데 내 것은 아닐 테니 아마 크란과 운오 둘 중 한 명의 동영상이 올라왔을 것이다. 굳이 지금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본다.”

[ 잘 생각하셨어요. 쇠뿔도 단김에! 지금 재생합니다! ]

눈앞에 휙 떠오른 공식 홈페이지에서 벌써 조회수가 만 단위를 향해 치솟는 중인 동영상 링크가 켜졌다. 그와 동시에 화면이 크게 늘어나며 벽면 한 개 정도의 사이즈로 변해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검은 화면 위로 조그만 빛줄기가 날았다.

그 빛줄기가 어느 한 곳에 꽂히자마자 기름에 불이 붙듯 순식간에 빛이 훅 번지며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활을 쏘는 자는 어둠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와 눈을 부릅뜨고 살펴본 순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직접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걸어 나왔다. 긴 후드 로브로 몸을 거의 가리기는 했지만 얼굴을 본 순간 누구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시라비 렌……!’

예전에 발라 모냐크에서 엘프의 숲으로 가기 위해 상당히 도움을 받았었던 바로 그 시라비 렌이 동영상에서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아는 NPC가 나온 것은 처음이라 정말 깜짝 놀랐다.

어깨를 넘는 진초록 빛 머리칼을 후드 사이로 드리우고 선 시라비 렌은 귀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엘프 특유의 외모가 그대로 들여다보여 신비한 인외감을 느끼게 했다.

‘절대로 눈에 띄어서는 안 됩니다. 그림자가 되고, 그늘이 되고, 적의 눈꺼풀 사이의 어둠이 되십시오.’

‘…….’

어디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시라비 렌이 있는 주변 말고는 아직 너무 어두워 환경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시라비 렌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바람의 흐름을 느낄 손, 발밑의 대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승기는 그 순간 이쪽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

다시 한번 한 텀을 쉬고 시라비 렌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눈빛이었지만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망설이지 않는 것입니다. 검은 눈이 멀어도 휘두를 수 있고, 마법은 언제든 의지를 따라 움직일 수 있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눈도 없고 의지도 없는 고작 손톱만 한 촉 하나뿐입니다. 그 차이를 언제나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

‘저의 주제넘은 조언은 이상입니다. 당신은 이미 저를 뛰어넘었고, 더 이상 제가 가르칠 것은 없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당신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적은 어디에도 없겠지요. 당신에게 저희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제게 최고의 스승이었습니다.’

드디어 시라비 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첫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가 냉정하고 단호하지만 사실은 성실하고 제법 다정하기도 한 녀석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운오가 화면 속에서 무릎을 꿇고 예의 바르게 시라비 렌에게 고개를 숙인 뒤 활과 활 통을 챙겨 일어섰다. 그들이 있었던 곳은 발라 모냐크에 있던 에데니아의 집이 아니라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나무 움집 같은 곳이었다. 갈대 같은 풀을 엮어 만든 바닥과 비바람을 간신히 피할 수 있을 정도의 나무 벽밖에 없는 그곳에서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당신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유일한 친구가 이 앞에 있습니다. 한때는 우리의 터전이었지만 지금 남겨진 것은 낙엽과 먼지, 그리고 죽음의 숲이라는 이름뿐. 하지만 그 친구만은 다릅니다. 그의 고결함은 그곳에 있기에는 너무나 고귀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저는 찾아낼 수 없었지만, 당신이라면 반드시 그 친구에게 평온한 안식을 선물할 수 있겠지요. 행운을 빕니다.’

‘……고작 인간인 저를 어째서 그렇게 높이 평가하십니까?’

운오의 질문에 시라비 렌이 소리 없이 눈을 휘어 미소 지었다. 나는 본 적이 없었던 아주 다정하고 자애로운 미소였다.

‘방랑하는 혼으로 지내며 셀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떠돌았습니다. 믿었던 자에게 실망하기도 했고, 실망한 자에게 빛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정답은 하나도 없었고 어제는 당신이었던 것이 내일은 아니기도 했습니다.’

‘…….’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마주하고 있는 소중한 무언가를 위해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신의를 다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당신의 화살에 실린 마지막 망설임 한 줌마저 당신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낮은 내레이션과 함께 시라비 렌의 모습은 스르르 사라지고 화면이 바뀌어 회색으로 말라붙은 숲속을 걷고 있는 운오로 바뀌었다. 짧은 단검 하나를 쥐고 솜씨 좋게 엉킨 나뭇가지와 덤불들을 쳐내며 나아가는 것이 프로 레인저가 따로 없었다.

음울한 음악을 등에 이고 한참을 나아가던 운오가 문득 고개를 들고 아 하는 낮은 탄성을 질렀다.

‘저곳은…….’

현재 엘프의 마을과 놀랄 만큼 비슷한 곳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과 그 사이사이에 얹혀 있는 동화 같은 집들, 그리고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솜씨 있게 만들어 둔 마을 공공 기물과 작은 광장까지 엘 프라마와 다른 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지금은 회색으로 굳어 초록색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엘프 마을에 가 본 나는 그 이전의 모습을 대충 상상할 수 있었지만, 이 동영상을 처음 본 이들은 그저 시멘트 덩어리로 가득한 숲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듯했다.

운오는 망설이지 않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 안에 살던 이들이 급하게 그곳을 버리고 사라졌던 것처럼 여러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그것들도 지금은 회색이 되어 붙어 있었기에 떼어내서 살펴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화석이 되어버린 듯한 을씨년스러움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 시라비 렌이 그곳을 죽음의 숲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운오는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작은 지도 같은 것을 꺼내 길을 비교해 보는 것을 보면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아주 확실한 모양이었다.

낮이 되고, 밤이 되고, 또 낮이 되고, 밤이 되는 동안 운오가 묵묵히 혼자서 죽음의 숲을 걷는 것을 보고 있자니 빠르게 감아서 보는 것뿐인데도 저 퀘스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대충 감이 와 안타까운 마음이 샘솟았다.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저 긴 시간을 버티며 아무것도 없는 곳을 헤맸다니. 시간 감각이 제대로 살아 있다가도 죽을 만한 공간인데 무슨 생각을 하며 버텼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운오는 어느 거대한 공터에 다다랐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곳이라기에는 주변에 짓밟힌 채 굳어 있는 나무들이 많은 것으로 볼 때 무언가 엄청나게 거대한 것이 그곳에 떨어진 적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회색으로 굳어 있는 이상한 덩어리가 하나 있었다. 질퍽질퍽한 시멘트 같은 것을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붓다 그대로 굳어버린 무언가 같은 느낌의 덩어리였다. 운오보다 조금 더 크고 넓은 일정한 형태를 가진 것을 보면 원래는 살아 있는 존재였던 것임에는 분명한데 대체 저 안에 든 것이 무엇일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운오는 그 주변을 몇 번 빙글빙글 돌며 살펴보았다. 주먹으로 두들겨 보거나 단검으로 쳐 보기도 했지만 그것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정말 단단하게 굳은 모양이었다.

운오는 조용히 그것이 보일 만한 근처의 숲으로 돌아갔다. 회색으로 죽어버린 나무를 타고 올라 커다란 가지에 기대어 앉는 것을 보면 거기에서 그 덩어리를 관찰할 생각인 듯했다.

‘…….’

그리고 다시 한번 장면이 바뀌었다.

깜박 잠이 든 듯했던 운오가 퍼뜩 눈을 뜨자 주변은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다.

운오의 시선을 따라 이동한 카메라가 이상한 덩어리가 있던 공터를 비추자 놀라운 것이 보였다.

‘크르르르, 으으, 으으…….’

‘크아아아악! 아아……!’

그 공터에는 이상하게도 정확하게 달빛이 비치고 있어 다른 곳과는 달리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저 폐허였을 뿐이었던 곳에서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무언가는 바로 낮에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기괴한 덩어리였다.

덩어리 안에서 무언가가 날뛸 때마다 완전히 덮이지 않은 빈틈 사이에서 신비한 푸른빛이 어지럽게 반짝이다 말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안에서 괴로운 비명도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안에 정말로 무언가가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처절하게 절규하고 몸부림치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덩어리를 보며 운오가 천천히 가지를 밟고 일어섰다.

설마 저 상태 그대로 뭔가 할 셈은 아니겠지 싶었지만 그 설마가 맞았다. 운오가 허리에 맨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활시위를 천천히 당기자 화면에서 흐르던 음악이 순식간에 크고 긴장되는 음악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우리들의 오랜 친구입니다.’

시라비 렌의 목소리도 동시에 겹쳐 들려오는 것을 들으며 나는 운오가 눈을 가늘게 내리까는 것을 보았다.

‘그 옛날 흑룡의 브레스가 우리들의 터전을 향해 쏟아지던 그 순간, 그 친구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서서 홀로 그것을 막았습니다.’

활시위를 거의 끝까지 당기자 손등과 팔뚝에 단단히 근육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음악은 일촉즉발의 상황 같은데도 운오의 눈만은 지극히 평온하고 냉철해 보여 전혀 급박한 상황 같지가 않았다.

‘덕분에 수많은 이들이 살아남아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 친구는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홀로 그 안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가느다란 시위 끝이 미약한 바람에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그동안 수도 없이 애를 써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역시 그곳에 발조차 제대로 들일 수 없었습니다.’

운오가 천천히 활을 쥔 손을 내려 덩어리가 있는 곳을 조준했다.

‘인간인 당신이라면 들어갈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곳은 말 그대로 죽음만이 가득 찬 곳이라 끝없는 고독과 환상 속에서 홀로 싸워야만 합니다. 그것을 버텨내고 친구를 발견하게 된다 해도 그가 아직 제 자아를 유지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화살 끝이 닿은 곳은 정확히 푸른빛이 번쩍이며 새어 나오고 있는 아주 작은 틈새였다.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감싼 죽음을 뚫고 완전하고 자연적인 안식을 주는 것뿐입니다. 그런 막중한 책임을 당신에게 부탁드리자니 마음이 무겁습니다만, 부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툭.

미세한 소리와 함께 음악이 꺼지고 운오가 시위를 놓았다.

어둠 속에서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는 화살은 가늘고 볼품없는 보통 화살이었지만, 운오의 손을 떠난 순간부터 따뜻한 흰빛에 감싸여 날아가는 것을 보니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보였다.

나뭇잎 몇 개를 뚫고 나뭇가지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날아간 화살은 끝내 검게 얼룩진 회색 덩어리 사이, 푸른빛이 흘러나온 부분을 향해 빨려 들어가듯 푹 틀어박혔다.

그와 동시에 화살에서 흘러나온 흰빛과 덩어리 사이에서 들썩거리던 푸른빛이 모두 사그라졌다.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던 모든 소리도 완전히 없어졌다.

바람도 불지 않고 빛도 보이지 않고 운오조차 움직이지 않는 완벽한 정적의 순간이 흐르고 운오가 눈을 한 번 깜박인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덩어리 안에서부터 터져 나오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 …….

화면 내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 폭발로 인해 일어난 엄청난 여파 때문에 바람이 없던 숲 전체에 갑자기 솨 하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운오의 머리카락이 뒤집어질 만큼 강렬하게 흩날린 것도 그 바람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빛이 사그라진 곳에는 갈라지고 깨진 회색 덩어리 조각들 사이에 당당히 서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푸르르르르…….’

구름처럼 흔들리는 아름다운 긴 갈기, 새파랗고 깊은 눈동자, 그리고 때 하나 보이지 않는 새하얀 털을 가진 그것은 날개와 뿔이 달린 말이었다.

몇 번 투레질을 하며 발을 구르던 그 신비한 말이 고개를 돌려 운오가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신마 엘 아마하. 우리들의 친구이자 고귀한 유니콘의 왕입니다. 고결한 희생 끝에 죽음의 브레스 속에 영혼이 갇히게 되었으니 우리는 그에게 감사의 의미로 안식이나마 주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들려온 시라비 렌의 목소리를 이고 크게 울음소리를 낸 말이 커다란 날개를 펴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푸른빛이 가루처럼 주변에 흩날리는 광경은 감수성이 메마른 나조차 잠시 감탄했을 만큼 아름다웠다. 운오 또한 그렇게 생각한 듯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몇 번의 날갯짓 끝에 그 말은 겨우 땅에서 발을 떼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공터를 한 바퀴 빙 돈 뒤 운오의 앞으로 다가와 몸을 돌렸다. 마치 등에 태워주겠다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운오가 잠시 망설이다 그 등 위에 타자 말은 망설임 없이 그 공터를 떠나 숲의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회색으로 물들어 다른 색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숲이었지만 하늘 위로 빠져나오고 나니 하늘은 여전히 맑은 남색이었고 보름달은 밝고 아름다웠다.

운오를 숲 바깥의 멀쩡한 산속에 내려준 말은 고개를 깊숙이 숙여 땅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인사를 한 뒤 다시 한번 위로 날아올랐다. 운오를 두고 날아가는 말의 푸른빛 가루가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까지 사라진 뒤에야 카메라는 겨우 발밑의 풀숲을 비추었다.

방금 전 말이 입을 맞추었던 그 땅에 달을 닮은 샛노란 꽃 한 송이가 피어나 있었다. 운오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꺾는 것으로 배경음으로 나오던 서정적인 바이올린 선율이 멈추고 화면이 어두워졌다.

[ 에피소드3. 기억의 재래 ~ 여섯 번째의 재래 ]

금빛으로 떠올랐다 사라진 글씨가 영상의 마지막이었다.

“…….”

평소보다 조금 더 길었던 영상이 끝이 났지만 나는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운오가 자신의 얼굴을 팔아 돈을 받았다느니 하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했었지만 실제로 완성된 영상 속 운오는 실물보다 훨씬 더 잘생겨 보였다.

‘머리가 흰색이라 그런가.’

예전의 운오는 퀘스트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 않았었는데, 지금의 영상 속에서 시라비 렌과 대화를 나누던 운오의 얼굴은 매우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평화롭고 침착해 보였다.

무려 ‘당신은 내 스승’이라고까지 말하지 않았었던가.

운오가 설마 시라비 렌에게 활을 배우고 있었다니….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등장 때문에 당황했었지만 일렉트릭 나이트가 반 엘프 혼혈이라던 기억을 본 적도 있고, 이전에 운오가 나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엘프 마을에서 활을 수련하는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 운오와의 조합 자체는 납득이 갔다.

아마도 일렉트릭 나이트 퀘스트의 핵심은 활을 잘 쓰는 종족인 엘프와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엘프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처음이군.’

시라비 렌은 어른스러운 성격의 엘프였고, 다른 엘프들도 대부분 자연 친화적이고 조용하며 느긋한 성격으로 보였었다. 그런 그들과 계속 함께 있었다면 여유라고는 조금도 없던 운오라도 1년 만에 정서적 변화를 상당히 얻을 만했다.

‘만약 드워프와 있었다면 성격이 반대로 더 불같아졌을지도 모르지.’

호탕한 이들밖에 없던 드워프 마을을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음 주에 병원에 가면 운오에게 꼭 영상 잘 봤다고 말해야겠군.’

운오에게 돌려줄 목도리는 이미 잘 빨아서 접어둔 지 오래였다.

‘그건 그렇고….’

좋든 싫든 1년이나 뭔가를 하고 있으면 사람은 역시 변하게 된다는 것을 운오를 보면서도 확실하게 느꼈다. 내가 보기에 운오의 변화는 정말 좋은 쪽이었지만 나의 변화는 남들이 보기에 어떤 쪽일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신정석 의사도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내가 과연 앞으로도 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아니. 부정적인 생각은 그만두자.’

지금 해야 할 일은 그저 따뜻한 물로 씻고 자는 것이다.

다리가 매일 아프니 어쩔 수 없이 내 다리 상태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승조가 떠오르는 것 또한 필연적인 일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욕실로 들어갔다. 내일은 지난번에 찾아갔다가 미처 만나지 못한 승조를 다시 찾아가 보아야 할 때가 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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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잘키르스텀을 향해 걷기 시작한 지 3일째.

그동안 더디게 조금씩 오르고 있던 하이킹 계열 패시브 스킬 하이로더가 윈드로더로 진화하는 축하할 만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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