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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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일주일에 한 번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야 하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 대신 옷을 주워 입고 있으려니 진제환에게서 잘 잤느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도 규칙적으로 일찍 일어나는 편이지만 진제환도 생체 사이클이 비슷한 모양이라 이럴 때는 편했다.

“‘일어났어. 병원 간다.’ 그렇게 답장 보내줘.”

[ 보내드렸어요! ]

답장은 ‘병원? 아픈 건가? 지금 갈까.’ 하는 부모님스러운 문장을 한껏 담아 도착했다. 나는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는 것뿐이니 괜찮다는 답을 보내고 나서 코트까지 걸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후우.”

이 집에 오기 전에 창고에서 챙겨온 개인 소지품들 중에는 지팡이가 없었다. 때문에 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느렸다. 버스 정류장까지 느릿느릿 들어간 뒤 거기에서 다시 느릿느릿 오는 버스를 기다려 겨우 타고 나자 추위에 시달린 무릎이 서서히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쿡쿡 쑤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오늘 밤엔 비나 눈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병원에 도착해 검사를 받고 신정석 의사와 마주 앉았다. 의사는 아주 미묘한 얼굴로 내 차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해. 또 변화가 늘어났군.”

“무슨 변화 말입니까.”

“이전에 설명했었지? 죽은 부분과 아닌 부분, 그리고 긴가민가한 부분.”

의사가 손을 휘젓자 홀로그램 차트 안에서 빠져나온 사람 다리 모양의 컬러 그래프가 다시 내 앞에 떠올랐다. 두 장의 그래프는 거의 비슷했지만 왼쪽보다 오른쪽에 좀 더 회색 부분이 미묘하게 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정석 의사는 바로 그 오른쪽을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생활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았고 무리한 운동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자꾸 범위가 변하고 있어. 그 점이 이상하다는 거란다.”

“오늘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비가 올 때는 늘 무릎이 미친 듯이 쑤셨는데 오늘 오는 내내 무릎이 그런 느낌으로 쑤셨던 것을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가능성 있는 추측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정석 의사는 그와는 다르다는 말로 내 의견을 일축했다.

“일단 유의미한 변화까지는 아니니 다음 주에 또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퇴원한 지 며칠 안 된데다 병원에 또 와 있기까지 하니 내가 마치 아직 입원 중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약국에서 약을 받아 나오는데, 막 약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운오.”

“아. 형이시군요.”

여기서 또 마주친 것도 인연이니 나는 운오와 근처 카페에서 잠깐 말을 나누고 헤어지기로 했다. 운오는 동생에게 먹일 약을 타러 왔다는데 나보다 세 배 정도는 더 큰 약봉지 크기로 미루어볼 때 약값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돈이 나갈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동생은?”

“잘 지냅니다. 요즘은 상태도 많이 좋아졌어요. 약도 몇 개 정도는 안 먹어도 되고요.”

“그게?”

놀랍게도 운오가 들고 있는 약봉지는 예전에 비해 그래도 상당히 줄어든 것이라고 했다. 비싸서 자주 받기 힘들었던 치료에 돈 걱정 없이 매진하게 되면서 훨씬 상태가 좋아졌기에 얻은 변화였다.

“별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돈 많은 후원자가 붙었으니까요. 돈이 좋긴 좋더군요.”

“후원자라면….”

“섀도우 유저요.”

운오의 복잡미묘한 심경이 그 호칭 안에 그대로 묻어나는 듯 느껴지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하지만 전에 비해 훨씬 독기가 사라지고 혈색이 나아진 운오를 보면 동생이 낫고 있는 것이 분명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다행은요. 그 인간이 돈을 핑계로 절 가지고 놀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그런 식으로 쓰일 돈이라면 차라리 저한테 왔었으면 알차게 써 주었을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니 운오가 모처럼 제 나이대로 느껴져 나름대로 귀여웠다.

“그런데 형은, 퇴원하신 겁니까?”

“응. 며칠 전에.”

“그렇게 상태가 심했었는데…… 빨리 나으셨네요.”

운오조차 신기해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내 예전 상태가 정말 심각하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음?”

운오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형도 그건 보셨겠죠. 마신의 기사 유저의 길드에서 전쟁을 선포한 거요.”

“응.”

봤다 뿐인가. 그것 때문에 병원에서 초조해 죽을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당장 집에 돌아가 게임을 켜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형도 아직 퀘스트가 덜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하실 겁니까?”

“……나?”

전쟁 이야기에 따라 나온 운오의 질문이 너무 예상외였기 때문에 나는 금방 대꾸하지 못하고 그만 반문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운오다. 퀘스트보다는 아이템과 돈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던 그 냉정한 운오가 무려 시저 때문에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는 평범한 질문을 했다는 것이 정말 의외롭고 놀라웠다.

“나야 뭐…….”

은근히 많이 바뀌고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1년 전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니 정말 많이 침착하고 어른스러워진 운오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러고 보면 곧 성인이지.’

운오와 같은 나이대였을 때의 나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뒤 본격적으로 더 이상 성취할 만한 목표가 없어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던 때였다. 공부를 계속하는 것에는 뜻이 없었고, 내가 대학에 가려던 건 단순히 검도를 그만둔다고 해서 인생까지 실패한 게 아니라는 주장을 위한 발악 같은 증명이었으니, 그걸 달성하고 나서는 별달리 목표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운오는 어린 나이에 풍파라면 질리도록 겪었기 때문인지 그때의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의젓하고 커 보였다.

“아직 시저 본인이 나타난 건 아니니까… 퀘스트부터 최대한 빨리 끝낼 생각이야.”

“다행이군요. 저도 똑같아요.”

운오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마저 정말 운오가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하게 해 주었으므로 나는 생경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금 마지막 퀘스트 중이거든요. 아마 곧 끝날 겁니다.”

“정말이냐. 축하한다.”

“축하는 다 끝내고 나서 해 주세요.”

그래도 이렇게 필요 이상 냉정한 부분은 운오가 맞긴 하군.

하지만 이전에 비하면 지금의 표정은 오히려 쑥스러워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이번에 퀘스트 영상이 제 걸로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 계약금이 들어왔는데…… 그걸로 운연이 수술을 한 번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그건 정말…… 다행이다.”

왠지 운오가 오늘 나를 만났을 때 진심으로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은 지금의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갖은 고생을 다 하며 독하게 동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이 소식보다 더 기쁜 건 없었다.

“감사합니다.”

운오가 정말 기쁜 얼굴로 미소 짓는 것을 보니 내 추측이 맞는 듯했다.

“얼굴을 팔아서 이 정도면 정말 많이 받는 거겠죠. 이 게임을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잠깐. 얼굴을 팔아?’

심상치 않은 단어에 깜짝 놀라 생각해 보니 미스트에서 여태 나온 퀘스트 영상 중 유저 본인의 얼굴이 드러난 것은 맨 첫 타자로 나왔던 키온 형뿐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형이 그때 말하길 실수로 얼굴을 드러내는 데 동의한 대가로 돈은 짭짤하게 받았지만 이후 일상생활이 정말 힘들었다고 했었는데….

내 놀람을 알아차린 것처럼 운오가 씩 웃었다.

“어차피 이제 졸업이고, 학교도 안 가요. 제 얼굴을 알아보아봤자 귀찮게 굴 사람도 없으니 괜찮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졸업식은 언제인데?”

운오를 위해서라면 과거 좋지 않게 자퇴했던 고등학교라도 한 번은 갈 수 있을 것 같아 물었지만 운오의 대답은 예상외로 단호했다.

“안 간다고 이미 말해 뒀어요.”

“왜?”

힘들게 졸업했는데 졸업장조차 직접 받지 못한다는 건 슬프지 않나 싶었지만 운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이제 학교 때문에 시간 빼앗길 일 없이 일할 수 있는데 뭐 하러 가겠어요. 그렇게 좋은 추억도 없고, 졸업장은 나중에 시간 날 때 찾으러 가면 됩니다.”

정말 지나치게 담담하기 그지없어 오히려 듣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는 대답이었다.

“그래…… 뭐 그것도 좋지. 졸업 선물은 해줄 수 있으니 생각나면 말해.”

내 말에 운오가 고개를 저으려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술 정도는 마셔보고 싶으니까 나중에 사 주세요.”

“술?”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의외의 미성년자다운 일면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다음에 오실 땐 운연이도 한 번 보고 가 주시고요. 그거면 됩니다.”

운연이가 형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가끔 친오빠로서 좀 질투가 날 정도로요, 하고 말하는 운오의 표정이 살짝 음산해 보여 등 뒤가 서늘해질 뻔했으나 대화는 매우 훈훈하게 끝이 났다.

“이제 가 봐야겠다. 잘 올라가라.”

“네.”

운오와 내가 마신 음료수 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운오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런 쪽에서는 적당히 해도 되는데 언제나 참 운동부다운 녀석이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셨습니다.”

“뭘. 다음에 보자.”

오늘은 모처럼 좋은 소식을 많이 들어서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쑤시던 무릎 통증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손을 흔들며 막 돌아서려던 순간, 운오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형.”

음? 도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운오가 왠지 묘한 얼굴로 자신의 목 언저리를 가리켜 보이는 것이 보였다.

“이쪽 부근에 벌레 물린 자국이 있어요.”

벌레? 혹시나 싶어 만져 보았지만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겨울에 무슨 벌레냐고 반문하려던 순간, 갑자기 어제의 기억이 훅 떠올랐다.

‘아…….’

진제환이 목 옆쪽에 제법 오래 매달려 따끔할 정도로 키스를 몇 번 했었는데….

‘설마 그건가.’

“…알려줘서 고맙다.”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운오가 자신의 목에 두르고 있던 회색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휙휙 둘러 감아주었다. 얼마나 힘이 좋은지 입까지 막혀 숨을 쉬기 힘들어졌을 정도였다.

“두르고 가세요.”

“너는?”

“바로 위가 병실인데요 뭐. 다음에 올 때 돌려주시면 되죠.”

이게 바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심경인가……. 운오가 남에게 자신이 쓰던 목도리를 빌려주었다는 사실에 감동을 느낀 마음이 반, 목에 난 상처를 눈치챘다는 것에 민망하고 떨떠름해진 마음이 반인 묘한 기분 사이에서 갈등하는 동안 정작 당사자인 운오는 쿨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들어가세요.”

“……하아.”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의욕 없이 마주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그날의 일정을 종료했다. 집에 들어가면 반드시 진제환에게 한마디 해 주리라 마음먹으면서.

“오늘로 새턴 한국 지부 감사일정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그동안 수고해 주신 본사 직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남무건은 똥 씹은 얼굴로 윤석호의 손을 잡고 악수하는 레온 프라이스를 보았다. 본사에서 날아온 대부분의 직원들은 그와 마찬가지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 게임부서를 먼지 하나 놓치지 않을 기세로 털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 덕분에 직원들이 겪었던 업무 방해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상황에 회식까지 따라와 귀찮게 구니 원래 감사란 것이 이런 것이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암암리에 만연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그들은 윤석호를 끌어내릴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고, 이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윤석호의 옆에서는 레온 프라이스만큼 기분이 나빠 보이는 부지부장 심경오가 부하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놓고 윤석호를 무시하려 드는 태도였지만 윤석호는 역시나 그답게 전혀 그런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저 사람을 이기려면 지옥에서 십 년은 더 수련하고 와야겠지.’

“프라이스 씨의 짐에는 선물로 특별히 좋아하시는 한국산 특산품들을 많이 넣어두었습니다. 차후에 한국에서의 즐거운 추억이 떠오르시면 언제든 개인적으로 방문 주시길 바랍니다. 가시는 길 즐거우시길.”

“…….”

웃으며 인사하는 윤석호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듯 목젖을 부르르 떨던 금발 외국인이 몸을 휙 돌려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남무건은 윤석호의 도발력에 새삼 감탄을 느꼈다. 과연 저 정도 간은 되어야 지부장도 해 먹는 모양이었다.

레온 프라이스의 뒤를 따라 걷는 십여 명의 외국인들 중에는 남무건의 눈에도 익은 흐린 금발의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미스트 초대 개발자 중 한 명인 유프 카윗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 직함보다는 오리고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더 기억에 남았지만…….’

그는 피곤한 얼굴로 어깨를 웅크리고 어기적거리며 걸어가다 남무건을 발견하고는 히죽 웃어 보였다. 손까지 흔드는 것을 보면 그도 남무건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오리고기!”

“…….”

지금 당장 여기서 사라지고 싶다.

부디 유프 카윗이 말을 건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모두가 몰라봐 주길 바라며 애써 무표정을 지킨 남무건이었으나 바로 옆에 있던 권천우가 마주 웃으며 말을 건 덕분에 모든 노력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와. 무려 그 유프 카윗과 친분을 쌓으시다니 역시 남 부장님은 굉장하시네요!”

“…….”

정말 지금 당장 여기서 사라져 우주로 가버리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수군대는 소리와 질시의 눈빛을 받으며 남무건은 권천우를 있는 힘껏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이 빌어먹을 놈. 대체 나와 무슨 원수를 져서……! 아. 그러고 보니 섭섭할 일을 하긴 했잖아?’

남무건은 권천우를 감시해 그가 스파이라는 것을 밝혀낸 뒤 윤석호에게 보고한 공이 있었지만 그 공은 권천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원망을 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 방금에서야 떠올랐다.

‘정말 미치겠군. 대체 왜 아직 안 잘린 거지?’

모든 증거가 완벽했다. 사실 남무건이 스스로 알아냈다기보다는 권천우가 알아서 흘린 것이지만 그는 분명 윤석호에게 자신의 존재를 좀 알려 달라며 양손을 흔들고 사이렌을 뿌리는 수준으로 수상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놈이었다.

권천우가 스파이가 아니라면 지금 중앙 로비에서 한가로이 헤엄치는 수족관 속 금붕어도 물고기가 아니다. 그런 확신을 가질 정도로 완벽한 스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윤석호에게 불려갔다 온 후의 권천우는 이전보다 훨씬 한가로운 태도로 일하면서 가끔 남무건을 볼 때마다 히죽거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는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 묻고 싶어도 이후 윤석호가 너무 바빠 회사에 붙어 있는 날이 없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나마 오늘 미국 감사단을 빙자한 감시단 놈들이 귀국해 조금 나아질 테니 틈을 타서 물으러 갈 셈이었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대체 자신이 얼마나 더 이 회사에서 일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물으러 가기 전에 사표를 던지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지…….’

“-이제 공항으로 간다. 어제 만나 이야기한 대로 지금까지처럼만 하면 고마울 것 같은데. 뭐. 딱히 바뀌는 게 없더라도 저쪽에서 바라는 그림이 무엇인지 알기에는 아주 좋으니까. 그러면 다음에 다시 연락할 때까지 건강하길 바라, 승조.”

감사단의 마지막 한 사람이 전화를 받으며 남무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감사단 내에서 드문 동양인이었다.

‘외국인 억양이 강한 것을 보면 한국인은 아닌 것 같지만 뭐…….’

그렇게 모든 이들이 건물을 나가 리무진에 오르는 것을 본 뒤 윤석호는 심경오와 대화를 조금 나누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심경오는 제대로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황급히 자신이 일하는 옆쪽 건물로 건너가 버렸다.

“하여간 의료부 놈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터줏대감이었다고 매번 시비 터는 게 재수 없어 죽겠다니까.”

“이번에 한 건 잘 걸리면 도로 본인이 지부장이 되실 줄 알았겠죠, 뭐.”

“아~ 이제 감시당하는 것도 끝이다! 자, 일하러 갑시다.”

우르르 무리를 지어 각자 일하는 곳으로 사라지는 직원들 사이에서 남무건은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엣취.”

어쩐지 몸이 으슬으슬한 것이 감기가 올 것 같으니 들어가기 전에 쌍화탕이라도 마시고 가야 할 것 같았다.

[ 어서 오세요, 무헌 님! 휴대폰이 왔어요! 아, 진유완 님도요! ]

지문 인식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서자 하우스 컴퓨터가 친절히 진제환이 여기 있음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휴대폰을 뭔가 복잡해 보이는 전선에 연결해 놓고 키보드를 한창 두드리는 진제환이 보였다.

‘또 시작이군.’

“진제환.”

“…병원은 잘 다녀온 건가?”

진제환이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작업을 할 때는 대부분 그래왔던 것처럼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이야기 좀 하자.”

“이야기?”

진제환이 눈을 들어 나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내 목에 두른 목도리를 발견했는지 시선이 목도리에 와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목도리는?”

“운오가 빌려줬다.”

“일렉트릭 유저?”

진제환이 운오 이름은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다행히 잘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그도 병원에 있나?”

“사정이 좀 있어. …그보다 이거.”

나는 운오의 목도리를 풀고 목을 드러냈다.

“뭐냐, 이게.”

집에 오면서 버스 정류장에 붙은 은색 기둥에 목을 슬쩍 비춰보니 정말 스스로는 발견하기 힘든 교묘한 곳에 붉은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목을 틀어야 보이는 곳이라 아침에 씻을 때에 발견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갔다. 치열도 아주 고른 것이 누가 보아도 사람 잇자국이라 짐승이라고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보여?”

“…….”

진제환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눈을 피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가설에 힘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몰랐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겠지만 한 번만 더 같은 일이 생길 때에는…….”

음산하게 말끝을 끌자 진제환이 안경 너머로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렸다.

“후회하겠지.”

“…뭘.”

“내 선택을.”

진제환이 양심이 있다면 어제 ‘날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다’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고는 못할 것이었다.

“미안.”

진제환은 그 즉시 용수철처럼 일어나 나를 꽉 끌어안았다.

“잘못했다.”

“남기는 것 자체는 상관없어.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기는 게 문제지.”

어차피 몸으로 시험해 보기로 한 이상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각오는 얼마든지 한 상태였고, 자국을 남긴 것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전에도 자국을 남겼다가 깡패들에게 발견당해 호모 새끼라고 욕을 먹으며 한 대 맞을 것을 다섯 대쯤 더 맞고, 민후에게도 들켜서 진제환과의 관계를 눈치채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으니까.

다만 이 이상 내가 모르는 사이 남들이 먼저 발견해 원치 않는 상황을 겪는 것은 사양이니 그 점에 관한 경고를 확실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남길 거면 말을 해. 모르고 남겼어도 말을 해. 그러면 나도 알아서 대처할 수 있으니까.”

진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만 끝내면 안 되지.

“약속은.”

“약속할게.”

일단 제 입으로 말한 건 항상 지켰던 놈이니 지켜보고 판단해 볼까.

어차피 이 일로 화가 난 것은 아니고 상호 괜찮은 범위를 확실히 박아두고 싶었던 것이라 이 정도 반응이면 그런대로 만족이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이자 진제환이 작게 숨을 내쉬며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조금 힘을 풀었다.

“…그러면 이제 도로 마무리 작업만 하고.”

대체 평범한 휴대폰에 손을 볼 것이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진제환은 그 이후로도 30분 정도 더 키보드를 만지작거리고 나서야 겨우 내게 기기를 넘겨주었다.

“바뀐 건 직접 확인하는 게 편하겠지.”

“아니. 봐도 잘 모르는데…….”

어차피 무슨 최첨단 기능을 깔아주어도 쓰지 못하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진제환이 매우 직접 확인하기를 바라는 듯 보였기에 일단 전원을 켜 보았다.

그러자 곧 화면 위로 작은 홀로그램 로고가 떠오르며 메뉴들이 여러 개 나타났다. 연락처와 전화 걸기, 메시지 확인 같은 건 원래 있었을 테니 별로 신기하지 않았지만….

“……집?”

손가락을 움직여 돌릴 수 있는 메뉴 사이에서 갑자기 집이라는 메뉴가 튀어나왔다. 뭔가 싶어 눌러 보았지만 나타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우스 컴퓨터와 연결할 수 있다. 지금은 공사 때문에 연결하지 못했지만.”

“아…….”

휴대폰으로 집 컴퓨터를 원격 조종할 수 있는 메뉴인 모양인데 지금 내 집이 공사 중이라 하우스 컴퓨터도 바뀔 예정이라서 제대로 된 연결은 하지 못했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 다음을 돌려 보자 이번에는 더 예상치 못한 메뉴가 나타났다.

“미스트.”

클릭해 보니 세부 메뉴가 더 나타났다. 이름은 각각 ‘커뮤니티’와 ‘대륙전도’였다. 커뮤니티를 클릭하자 손바닥만 한 미니 홀로그램 창이 훅 떠올라 순식간에 미스트베이 월드 커뮤니티 모바일 버전 페이지가 되었고, 대륙전도를 클릭하니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대륙전도가 정말 그럴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깜짝 놀라 대륙전도와 진제환을 번갈아 보자 진제환이 드디어 준비해 둔 선물을 선보인 것처럼 뿌듯해 보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 경로를 생각할 때 도움이 되니까.”

“굉장한데…….”

단순히 스크린샷을 가져다 붙인 게 아니었다. 미스트에서 지도창을 띄울 때는 위에서부터 종이가 도르르 풀어지는 느낌의 이펙트와 함께 창이 나타나고는 하는데 그것도 똑같았고, 도시마다 보이는 약간의 입체적 효과까지 완벽했다.

심지어는 밑에 로그인이라는 항목도 붙어 있어서 로그인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물으니, 휴대폰과 캡슐을 연결한 다음 한 번 접속하고 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들이 전부 휴대폰으로도 들어가는 기능이라는 엄청난 설명을 해 주었다.

그 외에도 어떻게 만든 것인지 추가설명을 해 주었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거라곤 어쨌든 앞으로는 휴대폰으로 미스트 내의 내 지도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고맙다. 이건 정말 쓸모 있을 것 같아.”

지금껏 진제환에게 받아본 것 중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도 가지고 있어.”

진제환이 흐뭇하게 자신이 쓰는 VT수첩을 꺼내 열어서 실제 지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주었다. 놀라운 건 지도에 항시 보이도록 등록해 놓은 유저 위치나 다음 퀘스트 목표점 같은 것도 다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거. 혹시 시저가 지금 접속 중이라서 보이는 거냐?”

키잘키르스텀 부근에서 깜박이는 시저라는 이름의 연초록색 점을 누르며 묻자 진제환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것 같군.”

한동안 접속하지 않던 시저가 지금 키잘키르스텀에 있다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되는 것과는 반대로 게임을 아주 안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이상한 안도를 느끼면서 나는 들리지 않게 긴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빨리 접속이나 해야겠군.’

“휴대폰 정말 고마워.”

“내 번호는 이미 등록시켜 놨어.”

유완의 말을 듣고 연락처를 눌러 보니 정말 맨 위에 ‘진제환’이라는 이름 하나가 등록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등록시킬 수고가 하나 먼저 줄어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응.”

“일렉트릭 유저와는 자주 만나는 건가?”

……기껏 일을 다 마치고 나서 신경 쓰는 게 그 부분이냐. 그런 눈빛을 담아 바라보자 진제환이 약간 억울한 눈빛으로 안경을 벗었다.

“조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여전히 너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나는 어이가 없어 그만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건 나도 하고 싶은 말인데.’

나야말로 진제환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전화번호 하나 제대로 몰라 답답해했었고, 병원에서 대체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행동했던 것인지 제대로 듣기 전까지는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후 진제환은 내가 궁금해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는 다 설명해 주었고, 스스로 했던 말들도 다 증명해 보여주었다. 반대로 나는 아직 이전에 진제환이 궁금해했었던 정승조와의 만남이나 내게 있었던 과거의 일들에 대해 말할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진제환이 억울한 것도 당연한가…….’

“운오는 고등학교 후배야.”

동시기에 학교를 다닌 후배는 아니지만, 하는 말은 생략했다. 어차피 나이차를 보면 답이 나올 테니까.

“그리고 우리 도장에 다녀.”

“……도장에?”

그러고 보면 진제환도 우리 도장에 다니고 있으니 운오와 진제환은 같은 도장 동기인 셈인가. 비록 운오는 가끔 새벽에 나와 몸이나 풀고 가는 수준이라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재미있었다.

“오래 다닌 건 아니고 올해 잠깐이지만.”

“언제.”

“글쎄…… 여름 전이었나.”

사부님과 사모님도 운오를 알고 있다고 말하자 진제환은 약간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중에 정승조에 대해 알게 되면 더 놀라겠군.

쓴웃음을 지으며 3년 만의 내 휴대폰을 손안에 꽉 쥐어보았다. 별것은 아니지만 뭔가 좀 더 새로운 곳으로 한 발짝 나아간 느낌이 들었다.

뭐라도 좋았다. 그냥 좀 더, 좀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내 다리 상태가 어떻게 되든 그 사실에 구애받거나 다시 절망해 주저앉지 않으려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 외에는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이브?”

유프는 옆에서 한참 자고 있었어야 할 데이브가 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에 깜짝 놀라 몸을 바로 세웠다. 교통수단에 타면 언제나 수면안대를 낀 뒤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한 끼도 먹지 않고 내리 폭면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 데이브가 비행 중에 깨어 있는 것을 보다니,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람. 설마 잠이 안 와?”

“……꿈을 꿨어.”

데이브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분이 나오는.”

시선은 여전히 어두운 창밖을 헤매고 있었다.

“투자자를 찾고 싶다고 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어. 그게 꿈이라는 걸 알지도 못하면서 왠지 절대로 우리 할아버지만은 말하면 안 된다고 반복해서 생각했어. 할아버지만은 안 돼. 새턴은 안 돼. 새턴만은, 안 돼…….”

“…….”

“그러다가 잠에서 깼어.”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였다. 6년 전에 이미 이루어졌던 현실이었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한국에 다녀와서 그런 꿈을 꾼 거야. 아무래도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유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하며 비행기 창문 커버를 닫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검은 어둠은 너무나 쉽게 벽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데이브.”

유프의 부름에 데이브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었다. 평소의 멍하고 엉뚱한 소리를 곧잘 하는 데이브가 아니었다. 기억력이 너무 좋은 죄로 지나간 과거를 매일, 매시간, 매초, 매 순간마다 생생히 떠올리며 후회하는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널 원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알고 있지.”

유프는 거짓말을 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이 거짓말인 줄 알더라도 데이브 한 사람만 속으면 되는 거짓말이었다.

“……고마워.”

데이브는 그렇게 말한 뒤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수면안대를 도로 머리에 썼다. 숨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으로 변했지만 유프는 그가 그저 자는 척하는 것뿐임을 느낄 수 있었다.

‘…넌 정말 잠들면 이를 간다고. 알고 있어?’

하지만 심란한 마음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 유프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쯤 다른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고 있을 장명진도 비슷한 기분일 것이라는 데에 내기라도 걸 수 있었다.

투명한 캡슐 속에 누워 있던 고요한 얼굴. 사지가 없어지는 정도의 상처를 입지는 않아 다행이었지만 얼굴 한쪽에 크게 남은 일그러진 흉터는 모두들 확실히 보았을 것이었다.

그 흉터 자국이 마치 악몽 같았던 ‘그날’을 떠올리게 해 숨이 막혔다.

우린 최고의 팀이야.

처음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걸 주장해 댔던 것은 장제천뿐이었지만, 함께 개발하기 시작한 지 3년이 지나갈 무렵부터는 모두 또 하나의 형제들이 생긴 기분으로 서로를 대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만드는 데에는 시간과 돈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장명진은 일찌감치 무역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장제천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컴퓨터 제작 회사에 취직했다. 윤석호는 놀랍게도 고급 바에 취직했는데 그의 언변과 얼굴 덕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매니저가 되었다.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데이브를 제외한다면 팀 내에서 학교를 졸업했는데도 놀고먹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유프뿐이었다.

하지만 매일 일하고 돌아와 지친 얼굴로 컴퓨터를 붙잡고 매달리는 팀원들을 보면 도저히 일을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으므로 유프는 집 앞 마트에 파트타임 캐셔로 취직했다. 나름대로 내로라하는 학교를 졸업한 네 명이 하는 일이 이따위라니, 어디 가서 차마 말하지 못할 촌극이었다. 하지만 유프는 변명으로 자신을 위안했다.

‘어쩔 수 없잖아. 돈만 필요한 게 아니라 시간도 필요하니까.’

유프가 일했던 마트에는 제법 다양한 손님들이 왔다. 술에 취한 대학생들, 전신에 문신을 한 폭주족, 느른한 눈으로 불쾌한 냄새가 나는 잎담배를 피우는 히피, 평범하게 아이 손을 잡고 오는 가족들까지 한자리에 앉아 만날 수 있었다. 그 이상 다양할 수 없을 정도로 각양각색의 인종과 나이대를 가진 이들을 하루에도 수십 명씩 상대하다 보니 늘어나는 것은 인간군상에 대한 관찰력밖에 없었다.

남는 시간에는 옆에 펼쳐둔 작은 수첩에 글을 썼다. 소설은 아니었다. 그가 쓰는 것은 다양한 인물상과 대사,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명사들과 짤막한 역사서의 일부 같은 것들이었다.

퇴근하고 작업실로 가면 밤에 출근하는 윤석호가 막 일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데이브는 그 옆에서 드라이버를 돌리며 아무도 알아먹지 못할 수학 공식 같은 것을 써댔다.

“나 왔다.”

“오셨습니까? 바통 터치군요.”

“가서 술 잘 팔고 와. 맛있는 건 가져오고.”

윤석호가 피식 웃고는 재킷을 팔에 걸치고 나갔다. 그가 묻히고 들어오는 향수 향이 매일 다른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 웃음에 놀아나고 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좋은 녀석이지만…… 이상한 녀석이란 말이지.’

사실 3년간 지내면서 제일 파악하기 힘든 사람이 바로 윤석호였다. 심지어 1년을 늦게 합류한 데이브도 행동 패턴은 단순한 편이라 구슬리기 좋았는데 윤석호는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항상 중요한 부분에서는 마음을 닫고 거리를 둔다는 인상이 있었다.

장제천의 말에 따르면 장명진과 장제천, 그리고 윤석호는 모두 한국 태생이었다. 형제 관계인 장명진과 장제천이 미국으로 함께 건너온 것은 이해가 갔지만 한국에서의 선후배 사이였다는 윤석호가 왜 지금도 함께 있는 것인지는 사실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추측만 어렴풋이 해 보았을 뿐이었다.

‘뭐, 귀찮아서 파고들 생각은 없지만.’

“데이브. 너와 친한 친구가 널 배신하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

수첩에 인물상을 적다 말고 심드렁하게 묻자 한창 뭔가를 조립해 만들고 있던 데이브가 또 무슨 이상한 질문을 하느냐는 눈빛으로 유프를 바라보았다. 저런 표정을 하면서도 결국 무슨 질문에든 답은 해주는 것이 데이브의 성격이었다.

“배신감을 느끼겠지 뭐…….”

“그런데 알고 보니 배신한 이유가 너 대신 위험을 짊어지기 위해서라면?”

“화나겠지…….”

“왜 화가 나지?”

“내가 그 위험을 짊어지지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한 거잖아. 이기적이라서 화나는데.”

“으음…… 그렇군. 그런 심경인가.”

“…대체 뭘 적는 거야?”

요즘 유프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메인 시나리오였다.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 유저들을 그 안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 세계 속에도 중심이 되는 인물과 스토리가, 그리고 사건과 결말이 있어야 했다. 그것을 모든 이들이 보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매력적인 건 언제나 영웅 이야기지.’

재미가 없다면 갈아엎을 각오로 이야기의 메인이 될 영웅들을 만들고 있었지만 한 인간의 스토리를 창조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 유프의 주변에는 널린 것이 천재라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 있었으므로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천재의 사고방식을 관찰하며 반영하기 적절했다. 데이브를 향한 질문도 그중 하나였다.

“데이브. 너보다 멍청한 녀석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집중 안 되니까 질문 그만해…….”

“이것만 말해 주면 사탕 줄게.”

유프는 마트에서 챙겨온 박하사탕을 주섬주섬 꺼냈다. 작업을 할 때는 늘 달콤한 간식을 입에 달고 사는 데이브의 눈이 안경 너머에서 모처럼 반짝 빛났다.

첫인상은 정말 의욕 없어 보이는 재수 없는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알고 보니 제일 귀엽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면 때문이었다. 아이큐가 200이 넘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단순명쾌함과 그 안에서 번득이는 천재성의 양립을 보고 있자면 픽션에 나오는 인물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유프는 데이브를 관찰하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다시 물을게. 너보다 멍청한 녀석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자자. 사탕이다.”

“음…… 귀찮게 굴지 않으면 상관없어. 다 똑같은 사람이고.”

데이브가 말을 하며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귀찮게 굴면? 막 뭘 가르쳐 달라고 하거나 말을 시키거나 잠을 깨우면 어때.”

“화가 나지…….”

“좋아. 역시 짜증 나겠지. 한 개 더 먹어라.”

약간 떡진 검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탕을 한 개 더 먹여주자 데이브가 불만스러운 강아지 같은 눈빛을 보내고는 도로 하던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 왔다.”

그때, 장제천이 돌아왔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오자마자 허름한 정장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며 컴퓨터 앞에 앉는 모습만은 몇 년 전과 변함없이 같았다.

“빈손이야?”

“핫도그 사 왔으니 먹어.”

“와- 감사합니다.”

“이럴 때만 감사하지?”

유프는 히죽거리며 장제천이 내려놓은 봉지 안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핫도그를 베어 물었다. 치즈와 토마토, 새우가 가득 들어 있는 대학가 푸드트럭의 스페셜 핫도그는 데이브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핫도그보다 두 배는 더 비싸 평소에는 먹지 않았다.

냄새에 이끌려 기듯이 다가온 데이브의 입에 포장지를 벗긴 핫도그를 새로 물려주고 나자 겨우 왜 스페셜 핫도그를 사 왔는지 물어볼 여유가 생겼다.

“오늘 무슨 날이야? 갑자기 웬 스페셜.”

“내일부터는 못 사올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크게 쐈어.”

“……엉?”

핫도그에서 배어 나온 기름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돌아보자 묘하게 씁쓸해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는 장제천이 있었다.

“회사 그만뒀거든.”

“뭐? 왜?”

“그냥.”

그렇게 말한 뒤 장제천은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시간은 영원하지 않은데 젊음을 더 낭비할 수는 없지 않겠어? 내 젊음뿐이라면 몰라도 여기엔 모두의 젊음이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좀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싶어.”

“4년 만에 드디어 내 젊음을 보상해 줄 생각이 들었다니, 무슨 바람이 분 건진 모르겠지만 다행이네. 나는 이자까지 꼭 받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둬.”

평소와 달리 씁쓸해 보이는 얼굴을 보아하니 단순히 저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캐물어 속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프가 농담으로 받아치자 장제천의 얼굴에 겨우 조금 평소 같은 웃음이 되돌아왔다.

“그거야 당연하지.”

다음 날부터 장제천은 다시 후줄근한 정장을 입고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가 무엇을 하러 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머지 팀원들은 묻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계속했다. 말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신뢰라는 게 과연 얼마나 가는 것인지 실험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도 제법 즐거웠다는 점이었다. 즐겁지 않았다면 유프는 제 성격에 그 가난한 나날들을 버틸 수 있었을 리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수 없어.”

“……됩니다.”

“…래도!”

마트 일을 마치고 작업실로 올라가는 유프의 귀에 아는 목소리 두 개가 언성을 높여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받지 못한다고 했잖아!”

“그러면 버리겠습니다.”

“대체 왜 이래.”

무슨 싸움이라도 난 것인가 싶어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가자 목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윤석호와 장제천이었다.

“내가 이러자고 너에게 같이 하자 한 줄 알아?”

“그러면 당신은 제가 짐이나 되자고 미국까지 왔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윤석호!”

막 문고리를 잡았을 때, 장제천의 처음 듣는 대로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절대로 안 받아. 줄 거면 다신 얼굴 안 볼 테니 그렇게 알아.”

“……그래요?”

윤석호의 침착한 목소리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웃음기를 알아채지 못했을 장제천이 아니었다.

“그러면 보지 않는 걸로 하죠.”

“윤석호!”

유프의 앞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유프는 하마터면 코끝을 부딪칠 뻔하고 뒤로 물러났다.

“…….”

윤석호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유프에게 시선을 보내다가는 고개를 돌렸다.

“자, 잠깐. 잠깐.”

유프는 계단을 내려가는 윤석호를 뒤따라갔다. 솔직히 말해서 장제천에게 남을까 갈등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윤석호는 지금 붙잡지 않으면 영원히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잠깐. 기다려!”

윤석호는 어딘가 바삐 갈 길이 있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걸었다. 4차선 차도마저 망설임 없이 넘어갈 때는 하마터면 놓칠 뻔했지만 결국 끝까지 그 뒷모습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따라오지 마세요.”

“어떻게 안 따라가? 힘들어 죽을 것 같으니까 차라리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나 해.”

“제가 그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합니까?”

“응. 왜냐면 사람은 이럴 때 다들 제 심경과 과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풀어놓고 싶은 법이거든. 그리고 나는 마침 그 상대로 아주 적당하잖아?”

유프의 말을 듣고 윤석호는 크게 웃었다. 비웃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큰 웃음소리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그렇군요.”

“그렇지…….”

“올라오세요.”

윤석호는 바로 옆에 있던 계단을 밟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괜히 멈춘 것이 아니고 그곳이 목적지였던 모양이었다. 유프는 어두컴컴한 벽에 불 꺼진 네온사인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윤석호가 일하는 곳이었다.

“영업 중이 아닌데 들어와도 되는 거야?”

“책임자는 그래도 됩니다.”

실내 불을 켜는 윤석호를 보며 유프는 일단 바 앞에 앉았다.

“술은 안 줘?”

“바라는 게 많군요. 제 술이 아니니 못 드립니다.”

“쩨쩨하네.”

윤석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지금의 얼굴만 보아서는 방금 장제천과 언성을 높였던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왜 싸웠어?”

아무래도 직접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을 듯해 먼저 직구로 묻자 윤석호의 입가에 약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시작부터 핵심이네요.”

“오래 들을 생각은 없거든.”

“팀이 더 존속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린 돈이 없죠. 시간을 쥐어짜내 보았자 나오는 돈은 고작 월급쟁이 수준이니 유지가 될 리가요. 그건 물론 당신도 알고 있었겠죠?”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무엇 때문에 다들 힘들게 취직했는데.

유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석호가 눈을 내리깔았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 선배님은 투자자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알고 있었습니까?”

“투자자? 아…… 아니.”

투자자라니. 자신과는 1천만 마일쯤 떨어진 바깥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장제천이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유프를 보며 윤석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선배는 꿈을 이룰 능력은 있어도 현실의 문제는 잘 몰라요. 당신은 아예 그런 곳에서 눈을 돌려버리니 그런 면에서는 많이 닮았죠. 아마 선배가 당신의 이야기를 마음에 들어 한 건 그래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작정 투자자를 찾기 위해 몸으로 뛰어보았자 이쪽만 손해를 볼 뿐이에요. 받는 것은 없이 불필요한 정보만 상대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농락당하는 거죠.”

하나하나 신랄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원래부터 그런 면이 있다고는 생각했었지만, 그들 사이에서 윤석호가 취하는 스탠스는 항상 한 발짝 뒤에서 웃으며 분위기를 중화시키거나 적재적소에 비어 있는 일들을 찾아내어 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렇게 냉정한 느낌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마… 이것이 원래 이 녀석의 모습이겠지.’

“그래서?”

“우리가 만들고 있는 건 정말 놀랍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될 때까지는 결코 세상에 공개해서는 안 돼요. …하지만 벌써 어디선가 우리 게임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더군요. 아직은 헛소리나 환상 같은 것으로 치부당하는 듯했지만 실물이 조금이라도 새어 나가면…… 예상이 되십니까? 그땐 저흰 모든 걸 빼앗기고 다른 걸 만들 수 없게 될 겁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이것을 그저 가상현실 게임으로만 생각했었기에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것의 다른 가치에 대해서는 많이 무뎌져 있었다. 하지만 윤석호의 말을 들은 순간 유프는 잠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 기술이라면…… 그렇게 현실 같은 가상이라면 굳이 게임이 아니라…….

“원래 그건 게임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게 아닙니다.”

윤석호의 확인 사살이 귀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선배가 강제로 바꾸고 있을 뿐이죠.”

“……그렇군.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어.”

사실은 전혀 생각지 못했었지만 유프는 일단 허세를 부려보았다.

“거짓말에 별로 소질이 없군요.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좀 더 연습하는 게 좋겠어요.”

“……핵심만 말해. 그래서 왜 싸운 거야? 투자를 받지 말자고 해서?”

“아뇨. 그 사실을 알자마자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드렸습니다. 천만 달러 정도뿐이지만요.”

“처, 천만 달러?”

이번에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더듬고 말았다. 유프가 생각했던 범위를 너무나 초과했기 때문이었다.

“너 그렇게 돈이 많았어? 그런데 지금까지 핫도그 한번 사 주지 않고…….”

“주식을 좀 열심히 했더니 벌리더군요. 그래 봤자 30% 정도고 나머지는 어떻게 불렸는지 말할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그 돈이면 개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어느 정도 갖출 수 있단 뜻입니다.”

“어느 정도……?”

“일단 제대로 된 컴퓨터와 서버. 그리고 더 많은 직원들도 필요합니다. 장소는 당연히 옮겨야겠죠. 더 안전하고 더 비밀스러운 곳으로요. 투자자도 필요하겠지만 그건 저희가 확실히 우위에 섰을 때여야 합니다.”

윤석호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이 청산유수로 말을 이어나갔다.

“유프는 모르고 있겠지만 저희에겐 사실 엄청난 무기가 있습니다. 선배의 아버지가 남겨두고 가신 고도로 진화한 AI 프로그램이에요. 하지만 돈이 없어 그걸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고작해야 검색용으로나 쓰고 있었죠. 선배가 투자를 받고자 했던 것도 일단 그걸 위해서였으니 천만 달러라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왜 지금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야? 제천보다 네가 더 팀장 같아.”

유프의 말에 윤석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그건 아니죠. 저는 여러분보다 좀 더 속물적인 일들을 잘 파악한 것뿐입니다. 제대로 된 순수한 창작력과 열정은 제게 없어요. 시키는 것은 할 수 있지만 그뿐입니다.”

“이거 바보 아냐? 이게 열정이 아니면 뭐, 사랑이야?”

유프는 손을 올려 윤석호의 반듯한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예상치 못한 한 방이었는지 윤석호가 순간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이제 보니 넌 엄청난 겁쟁이구나. 머리도 좋고 얼굴도 잘난 놈이 속으로는 그런 자기 비하를 하고 있었어? 장제천이 알면 실망할 거다. 그 녀석이 너 없을 때 너만큼 완벽하게 밸런스를 맞출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까지 했었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윤석호가 일하다 나간 자리를 퇴근하고 들어와 메꾸기 시작한 장제천이 탄성을 내지르며 벌러덩 드러누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깔끔하구만, 깔끔해!」

「뭐가 깔끔해? 완전 더러운데.」

쓰레기가 산처럼 쌓인 바닥을 둘러보며 묻자 장제천이 ‘그거 말고!’ 하고 외치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만드는 부분 말이야. 어젯밤 내가 하다가 너무 어지러워져서 나중에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체크만 해 뒀는데 지금 와 보니 완전히 싹 정리되어 있지 않겠어? 그것도 원래 내가 하려던 것보다 훨씬 완벽하게.」

「……그래?」

「석호가 이런 걸 참 잘해. 그 녀석이 만든 부분들은 하나같이 밸런스가 최고야.」

…….

“그, 렇게 말했었다고요? ……선배가?”

윤석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다니까. 너 없으면 그 멍청한 녀석은 절대 게임 못 완성해. 우린 네 말대로 세상 물정 잘 모르고, 돈 버는 재주도 바닥이야. 머리는 조금 좋을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그래. 그런데 정말로 돈만 주고 다신 얼굴을 안 볼 거야?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절대 아니지.”

“…….”

윤석호는 복잡한 얼굴로 붉게 변한 이마를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음으로 윤석호가 한껏 허세를 부리지만 서툴기 짝이 없는 20대 청년으로 보였다.

아, 이 녀석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게임을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너는 어쩌다가 이 먼 땅까지 온 거야? 전부터 궁금했어.”

“별것 없습니다.”

“별것 없으면 이야기해도 되겠군그래.”

유들유들하게 달라붙는 유프를 향해 가볍게 한숨을 내쉰 윤석호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이라도 좀.”

“아까는 네 술이 아니라서 못 마신다며?!”

아무리 어르고 구슬려도 윤석호는 끝끝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유프의 궁금증은 커졌지만, 윤석호가 요령 좋게 먹인 술에 취해 뇌가 반쯤 마비되는 바람에 모든 것이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억울해서 내가 한국어 교양과목을 듣지 않았으면 너흰 분명 내 욕을 한국어로 했을 거란 말이야! 그렇지!”

“고주망태가 되셨군요. 망상병이 도지셨으니 집까지는 데려다드리겠습니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유프를 들쳐 부축한 윤석호가 작업실로 향했다. 그곳까지 가는 20여 분 동안 얼마나 많은 헛소리를 했던지, 스스로도 자신의 뇌와 입에 각각 다른 인격이 든 것 같다는 생각마저 어렴풋이 했을 정도였다.

“……장제천! 너 돈 버는 재주도 없는 게 혼자 힘내지 마라! 전혀 안 고마우니까.”

“이 녀석 왜 이래? 네가 술 먹였어?”

유난히 못생겨진 얼굴로 작업실 문을 열고 나온 장제천에게 매달려 제2차 헛소리를 시작하자 장제천이 떨떠름하게 윤석호를 바라보았다.

“데려다드렸으니 가겠습니다.”

“가지 마.”

유프가 붙잡았을 때에는 망설이지도 않고 내려가던 윤석호가 그 순간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취한 상태에서도 그것은 매우 차별이라고 생각했다.

“……아까는 나도 말이 심했다. 하지만 역시 네 돈을 받을 수는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할 겁니까? 이대로 계속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아. 그게 말이야. ……어떻게든 될 것 같아.”

“…무슨 소리입니까?”

윤석호의 목소리가 낮아짐과 동시에 장제천의 뒤에서 데이브가 나타났다.

“이야기는 들었어. 돈이나 환경이 문제라면…… 내가 아는 곳이 있는데.”

내키지는 않지만 도움은 확실해. 살짝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리는 데이브를 향해 눈을 크게 뜬 윤석호의 표정을 보며 유프는 일순 소름이 찌릿 돋는 것을 느꼈다.

‘……뭐야, 이 느낌?’

어떤 것은 취한 상태이기에 더욱 잘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다.

반쯤 날아간 이성 대신 들어온 육감과 영감이 그 순간의 유프 카윗에게 이 공간을 감싸고 도는 묘한 분위기를 일깨워주었다.

이게 열정이 아니면 뭐, 사랑이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그 순간의 한마디가 정말로 심장을 찌른 것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날의 결정을 죽도록 후회하게 된다는 것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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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퀘스트지는 키잘키르스텀이야.”

현재 우리들이 있는 곳은 자그레브가 아닌 토렐리트였다. 퀘스트를 다 끝냈다는 연락을 받은 키온 형이 일단 토렐리트에서 만나자는 말을 메시지로 남겨주었기에 자그레브에서 워프 포인트를 타고 왔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내 옆에 유완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을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유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잘 끝냈다니 다행이다. 형도 옆에서 도와줬어야 했는데.”

“퀘스트가 소멸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지금 우리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곳은 토렐리트 외곽에 있는 카페였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소녀풍 인테리어 때문에 처음에는 들어가기 망설여졌지만, 루크레이신이 이런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수록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들어와야 했다.

유완은 어디든 앉을 수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얼굴이었지만 키온 형은 흰 털을 뒤집어씌워 핑크색 리본으로 장식한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던 듯 다리를 떨며 초점을 한곳에 맞추지 못하고 있어 보기에도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제집이나 되는 것처럼 편안하게 오색찬란한 보석 의자 위에 자리를 잡은 루크레이신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주문하신 4인용 초대형 활력효과 UP 딸기크림 파르페 나왔습니다!”

가슴에 분홍색으로 율링☆이라고 쓰인 명찰이 달린 귀여운 원피스를 입은 서버가 나타나 높이가 1미터는 될 것 같은 엄청난 비주얼의 파르페를 내려놓자 키온 형의 다리떨림은 거의 극에 달했다. 쟁반에 놓여 있는 토끼 모양 스푼을 들어 올리려던 형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떨어트리자 서버가 번개처럼 달려와 스푼을 주워주었다.

“어머 손님. 몸이 안 좋으신 모양이네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스푼은 새로 드릴게요. 여기.”

이번에 서버가 내민 것은 방금보다 더 앙증맞은 고양이 스푼이었다.

“…푸훗.”

루크레이신이 대놓고 웃는 소리를 내자 키온 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저기. 이거 말고 혹시….”

죽어도 귀여운 것이 보기 힘들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듯 형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조금, 심플하고 큰 스푼은 없겠습니까?”

“큰 것 말씀이세요? 하긴 남자분이시니 이건 너무 작았나 봐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 부엌 쪽으로 사라졌던 서버는 이번에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생긴 흰색의 큰 스푼을 가져왔다. 문제는 직접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스푼 대 뒷면에 귀여운 강아지 발자국이 쫑쫑 찍혀 있는 디자인이라는 것이었다.

“제가 원한 게 바로 이런 거예요. 고마워요.”

키온 형이 기뻐하며 스푼을 받아 들고 서버와 악수를 나누자 서버가 직업 정신 넘치는 얼굴로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요. 저희 가게 메뉴를 드셔 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나중에 미스트 커뮤니티에 후기 한 번 부탁드려요!”

“…….”

나는 루크레이신이 이제 소리도 못 내고 어깨를 떨고 있는 것을 보며 키온 형에게는 절대 스푼 뒤쪽을 보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페일 나이츠의 전쟁 선언 이후 이쪽도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었어. 라이트 유저들이 거의 없잖아.”

키온 형이 기세 좋게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카페의 큰 창을 통해 보이는 바깥쪽 거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토렐리트는 원래 대도시 중 가장 분위기가 느긋하고 경관이 아름다워 라이트 유저들의 성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상주하는 유저가 많은 곳이었다. 상주하는 유저가 많다는 것은 즉 그곳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 플레이하는 생활형 유저들도 많다는 뜻이었기에 자연히 유저들이 만든 레스토랑이나 공방 등의 가게도 타 도시에 비해 매우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어디를 가나 개인 유저가 소유하고 있는 집, 아니면 유저들이 직접 만든 특색 있는 가게들이 널려 있는 웅장하고 거대한 도시. 매 주말마다 토렐리트에서 열리는 벼룩시장과 제작스킬 대회는 전 유저들이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화이트 캐슬에서 퀘스트를 끝내고 나와서 다시 본 토렐리트는 이전에 비해 평상복을 입은 유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알록달록하고 예쁜 옷을 입은 사람들보다는 갑옷과 무기를 든 사람들이 훨씬 많아 전체적으로 경직되고 딱딱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라이트 유저들 입장에서는 게임할 맛이 안 나니까요. 공들여 꾸미고 모은 집과 재산을 파괴당한 키잘키르스텀 유저들의 원성 이후 알아서 정리하고 시골로 가는 분위기가 대세예요.”

루크레이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동안 파악한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대신 전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이 나서 몰려왔지만요.”

“자그레브만 해도 저번 길드대전에 페일 나이츠는 참가 안 했다고 하더라. 전체적으로도 참가한 길드가 거의 없었다곤 했지만.”

페일 나이츠는 미참가……. 당연한 소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듣자 시저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도.”

나는 지도창을 불러내 시저가 지금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다. 시저를 가리키는 점은 현재 계속해서 키잘키르스텀에 있었다.

“시저는 키잘키르스텀에 있는데…….”

“나도 봤어. 왜 모습을 안 드러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겠지. 4대1이라고 도망친 비겁한 놈.”

“……4 쪽이 비겁한 게 아니고?”

당연한 사실을 지적해 보았지만 키온 형이 씩 웃으며 내 어깨를 감아온 덕분에 그 이상 말할 수는 없었다.

“카르 요 녀석. 우린 비겁한 게 아니다. 1:1 네 번을 동시에 하려고 했을 뿐이지. 4라고 다 같은 4가 아니니 우리를 저 새끼들과 같은 4에 넣지 말자.”

“4면 어떻고 10이면 어때요? 목을 딸 수 있는 건 어차피 한 번인데 말이에요.”

루크레이신도 화사하게 웃으며 키온 형의 말에 동조했다. 정작 자신이 키온 형에게 유완과 더불어 숨 쉬듯 없는 사람 취급당하고 있다는 것쯤은 상쾌하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내가 겨우 퀘스트를 다 마치고 돌아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카프.”

그리고 두 사람이 무어라 말하든 한 귀로 흘리는 유완이 내 앞에 긴 초콜릿 과자를 놓아주었다.

“이거.”

“……고맙다.”

뭔가 싶어서 먹어 보니 안에서 초코 크림이 흘러나왔다. 이상하게도 그것을 먹고 나니 정신이 좀 더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활력 포션이 들었다고 하더군.”

체력 포션과 달리 활력 포션은 기분을 나아지게 하고 집중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어 주로 뭔가를 제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유저들에게 많이 이용되는 물건이었다.

마셔본 적이 없는데 대충 이런 느낌이군.

‘나쁘지 않은데. 나중에 좀 더 사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과자를 씹고 있자 옆에서 키온 형이 분노에 찬 눈빛을 유완에게 쏘아 보냈다.

“이 시저보다 비겁한 새끼. 빈틈을 타서 카르한테 뇌물을 줘?”

“형. 이것도 맛있으니까 먹어요.”

루크레이신이 재빠르게 우유에 적신 슈크림을 찍어 내 입에 밀어넣었다. 키온 형이 루크레이신을 향해 어이없어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도 씹어 삼켜 보니 촉촉하고 고소한 것이 정말로 제법 맛있었다.

“……음.”

“맛있죠?”

“이거. 이것도 먹어라, 카르야.”

형이 질 수 없다는 얼굴로 밑에 가라앉아 있던 젤리 덩어리를 퍼내 입에 더 넣어주었다.

“어때?”

“…맛있어.”

“흐응. 그렇게 나온다면 질 수 없죠.”

“…….”

루크레이신과 유완이 각각 과자를 하나씩 더 들고 있는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젠 정말 입 안이 터질 것 같았지만 세 사람은 결코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이걸 나 혼자 다 먹으면 배가 터질 것 같은데.’

나는 서둘러 입 안에 든 것을 모두 삼킨 뒤 파르페 중간쯤에 꽂혀 있는 과자들을 집히는 대로 손에 들고 세 사람에게 내밀었다.

“……나만 먹기는 좀.”

그러자 세 사람의 눈이 모두 내가 든 것에 쏠렸다. 내 뜻이 통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저리 비켜. 카르가 나한테 준 거니까.”

키온 형이 제일 먼저 나서서 내가 내민 것들을 가져갔지만 루크레이신이 그 사이에서 번개처럼 과자 하나를 빼가 입에 넣는 것이 더 빨랐다.

“고마워요, 형. 딸기맛 마카롱 좋아하는데.”

“앗, 이 사기꾼 새끼. 언제 가져간 거야?!”

“제 직업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형이 루크레이신과 싸우는 틈을 타 힘들이지 않고 스틱 쿠키를 빼낸 유완이 그것을 씹으며 나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고마워.”

“……뭘.”

“아니, 이 새끼들이?!”

결국 파르페를 다 먹을 때까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느라 우리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언제쯤 그 녀석들이 다시 움직일지는 알 수 없어.”

키온 형이 다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퀘스트들을 다 끝내놓고 보는 거지. 그리고 다 끝낸 사람들은 분위기 흐름이 저쪽으로 넘어가지 않게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

스가의 대사제로서 키온 형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 궁금해 물어보자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나와 뜻을 함께할 녀석들을 모을 방법을 찾고 있지.”

“그런 거라면 역시 길드가 최고 아닌가요?”

과거 한 길드의 길드장으로 제 팬클럽을 이끌고 다니며 각종 편의를 누린 적이 있는 루크레이신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한 얼굴로 반문했다.

“시저 암살 길드 같은 걸 만들면 되잖아요.”

“…….”

나는 키온 형이 그 부분에서 평소처럼 헛소리하지 말라고 말하며 루크레이신에게 주먹을 휘두를 줄 알았다. 하지만 형의 반응은 의외로 진지한 것이었다.

“길드라……. 그 의견도 없진 않았지. 팔등이 놈도 제안한 거고.”

그러고 보면 팔튼 형도 자그레브에 자신의 길드가 있는 몸이었군.

“문제는 내가 스가의 대사제라는 거야. 한 직업의 제일 위쪽에 있는 몸으로 전직해 버려서 그 외의 다른 직책을 겸업할 수 없어. 그냥 사제였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말이지.”

‘그런 문제가 있었군.’

한 직업을 통솔하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 그런 문제를 야기하는 줄은 몰랐다. 그러면 다크 나이트 단장 자리를 물려받은 셈인 유완은 어떻게 되는 거지?

“유완, 너도 그러냐.”

혹시나 싶어 물어보자 유완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완도 정확히는 다크 플레임 기사단의 기사단장 자리를 물려받은 설정일 테니 새 길드를 만들기 어려울 것 같다는 추측이 맞은 모양이었다.

아마 유완이 만들게 된다면 다크 플레임 기사단을 늘리는 식이 되지 않을까.

“난 아직 퀘스트 완료 전이고, 끝내더라도 절대 길드를 만들 생각은 없어요.”

루크레이신도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뜻을 단호하게 밝혔다. 이전에 이미 귀찮은 일은 질리도록 겪어 보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같은 계열 직업끼리 만든 길드도 아니고 시저에게 반대하는 사람이면 아무나 다 받는 길드라니, 얼마나 시끄러울지 벌써부터 뻔하네요. 절대로 윗자리는 안 맡을 거예요.”

“야, 이 사기꾼 놈아. 네가 길드를 만들자고 했잖아!”

키온 형이 기막혀하며 소리쳤지만 루크레이신은 싱글거리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하고 말할 뿐이었다.

“형은 어때요? 슈페리어 퀘스트 유저이기도 하니 다 끝내고 나서 길드장이 되어도 괜찮지 않아요?”

“나는…….”

질문의 화살이 한 바퀴 돌아 나에게 튀었다.

내가 길드장이 된다……. 한번 그런 셈치고 상상해 보았지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학교 다니던 시절 검도부 부장이라면 해 보았었지만 그건 선생님들 대신 부원들의 질서나 조금 잡는 정도라 한 집단을 이끌고 리더로서 행동한다는 느낌은 거의 받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얼굴을 드러내기도, 사람을 대하기도 아직 때때로 어려운 상황인데 그런 내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다수를 이끈다……?

‘절대 못할 것 같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세 사람은 내가 결코 길드장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래. 너도 퀘스트는 아직이니까.”

“잘 생각했어요. 그런 건 해서 좋을 것도 없고.”

“그래도 만들긴 해야 하잖아. 정말 이게 문제야. 시저 놈에게 대항할 구심점이 될 인재가 없어!”

키온 형이 답답한 듯 탁자를 주먹으로 가볍게 내리쳤다.

“지금 여기 있는 네 명을 제외하면 누가 남냐. 팔등이 놈은 이미 자기 길드가 있고, 일렉트릭 놈…… 그 새파란 돈벌레가 만든 길드에 들어갔다간 가입할 때나 탈퇴할 때도 돈 받으려고 들 거다.”

“아하하하!”

그 말에 그 모습을 상상한 듯 루크레이신이 뒤집어지게 웃어댔다.

“진짜 그럴싸한데요.”

“척 보면 딱이지.”

운오의 독기가 이제 전보다는 많이 가라앉았다고 알려주고 싶긴 한데…… 그럴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남는 건 누구냐.”

“그 사람이네요.”

루크레이신이 웃음을 참느라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샤인 나이트. 맞죠?”

“…….”

이전이었으면 크란이 나온 것을 듣고 기뻤을 텐데, 지금은 반대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평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크란? 그 녀석은…… 퀘스트 다 끝냈던가?”

“아뇨. 동영상도 아직일걸요.”

“뭐 하느라 그렇게 느려?”

미간을 찌푸린 키온 형이 뭔가 재 보는 것처럼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크란 놈이라……. 퀘스트에서 샤인 나이트가 루그의 성기사단장이 되진 않았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팔라딘 디그너티 호칭만 받으려나?”

“제 퀘스트엔 안 나온 호칭이네요.”

루크레이신이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팔라딘 디그너티가 뭐예요, 형?”

“……로드 슈페리어와 비슷한 느낌 같던데.”

나도 그 호칭이 정확히 어떤 의미로, 왜 받은 것인지는 모르므로 해줄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아. 로드 슈페리어도 이름이 아니었죠, 참.”

다행히도 루크레이신은 그 설명으로 대충 어떤 느낌인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도 무난해 보이고…… 리더십이 없어 보이진 않았으니 결격사유만 없다면 그 녀석이 그나마 괜찮겠어.”

키온 형이 수많은 계산 끝에 결론을 내렸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퀘스트가 다 끝나면 알아서 연락이 올 테니 그때 접촉해야겠군. 하지만 만약 그 녀석도 길드장이 하기 싫다거나 못 하겠다고 하면 그때는…… 음. 카르 너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형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시저를 상대하기 위해서 우리 쪽도 구심점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을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응.”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아직도 싫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나밖에 없다면 키온 형 말대로 무작정 물러설 수는 없는 법이었다.

조용히 주먹을 꽉 쥐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동안 후식으로 시켰던 음료수도 모두 동이 났다.

“자. 그러면 이제 한동안 이별이구만.”

키온 형이 몸을 풀며 자리에서 제일 먼저 일어났다. 흰색과 붉은색 문양이 심플하게 섞여 있는 사제복에 달린 후드를 나처럼 깊이 뒤집어쓴 형이 모두를 둘러본 다음 나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조만간 또 볼 테니 인사는 따로 안 하마. 나한테 연락하려면 현실 쪽이나 스가 신전으로 해.”

손등까지만 덮는 검은 장갑 사이로 빠져나온 손가락이 내 머리를 마지막으로 슥슥 쓰다듬고는 떨어져 나갔다.

“그럼 저도 이제 가볼까 해요.”

형이 나간 뒤 루크레이신이 찻잔을 놓고 일어섰다. 모자 사이로도 흥미롭게 반짝이는 눈빛은 완전히 숨길 수 없었다.

“마지막 퀘스트는 아마 톨랑에서 하게 될 것 같거든요.”

“톨랑?”

루크레이신의 마지막 퀘스트는 자신과 비슷한 실력을 가진 암살자를 암살하는 것이라고 했다. 루크레이신 정도의 실력자라면 상대는 유저가 아닌 NPC일 테고, 그런 NPC가 있는 조직은 십중팔구 Born 정도겠거니 생각했었는데….

‘Born의 본거지는 키잘키르스텀 쪽이 아니었나?’

“Born의 시작점은 북쪽이지만, 본거지는 톨랑에 있어요. 뭐, 놀라운 일은 아니죠. 거긴 상인과 도둑의 도시잖아요?”

‘왠지 그게 궁금해 보이는 얼굴이라서요. 혹시 맞혔어요?’ 하고 가볍게 윙크를 하며 웃음을 날린 루크레이신이 여유롭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바깥쪽에서 연락해도 되죠, 형?”

“……그래.”

왜 이 말을 안 하나 했다.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그러고 보니 이제 내게는 휴대폰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이전 번호 말고, 휴대폰으로.”

“휴대폰 장만한 거예요? 잘 됐네요. 빨리 알려줘요.”

내 휴대폰 번호가 아직 낯설기는 했지만 머리에는 외워둔 상태였다.

“01k-AF540-R6S7.”

“음- 좋아요. 외웠어요.”

루크레이신이 몇 번 입 안에서 번호를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당신 혼자 남는다고 너무 좋아하진 말았으면 하네요. 금방 해치우고 합류할 거니까요.”

“…….”

갑작스럽게 지적을 당한 유완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는 피식 웃었다.

“그러든가.”

내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 가장 남자답게 잘생긴 놈과 가장 빛나는 외모를 가진 놈이 미소 지으며 서로를 보고 있는 광경이라니…. 분위기는 차가웠지만 보기에는 분명 참 좋은 광경이었다. 혼자 보고 있는 것이 약간 아쉬울 정도였다.

“형. 그러면 저 갈게요. 시저 조심하고 다음에 봐요!”

방심한 사이 과장된 태도로 나를 한 번 끌어안았다 놓은 루크레이신이 곧 소리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마 그림자 사이에 녹아든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봐도 역시…… 마음에 안 들어.”

등 뒤에서 유완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루크레이신이 끌어안았던 것보다 더 강하게 끌어안아 오는 온기를 느끼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뢰를 좀 줘.”

“안 줘도 어차피 같은 편으로 지내야 하니 상관없을 것 같은데.”

“상관있어.”

그 사이에 끼어야 하는 내가 상관있단 말이다.

카페 밖의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나는 북쪽으로 향하기 전 보급을 위해 중앙 광장 옆 노점상 거리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포션 보충이나 하고 가자.”

“응.”

“안녕히 가세…….”

나가는 것을 보고 인사를 위해 나오던 서버가 내게 달라붙은 유완을 보고는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스트렝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힘이 강해지는 마법을 쓴 뒤 유완의 팔을 비틀어 뒤로 던지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이템 파는 노점상들로 넘쳐났던 거리는 마지막으로 왔을 때보다 훨씬 활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떠들썩하게 웃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일 뿐, 긴장되거나 굳은 얼굴로 무기를 착용한 채 걷고 있는 이들은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전체적으로 사람은 늘었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조용하다니……. 확실히 키온 형과 루크레이신의 말대로 일반 라이트 유저들의 이탈이 많았나 보군.

“포션 드릴까요? 말만 하세요.”

나는 적당한 곳에 위치한 포션 상점을 찾아내 체력 포션과 마력 포션, 그리고 활력 포션을 조금 샀다.

“키잘키르스텀까지 가려면 워프 포인트가 제일 빠르긴 한데…….”

이 노점상점 거리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큰 워프 포인트 주변에는 현재 유저들이 세워놓은 방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토렐리트에 막 왔을 때도 보고 무척 놀랐던 것이었다. 가죽과 철을 덧대 만든 원형 방벽은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틈만 나 있어 워프 포인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괴롭게 출입해야만 했는데, 자그레브에는 없었던 것이 왜 토렐리트에만 있나 싶어 의아했었다.

“말 좀 묻겠습니다. 워프 포인트에 저건 왜 쳐둔 겁니까?”

포션상점 주인에게 괜찮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 혹시나 하며 물어보자 그가 하루에도 몇 번씩은 그런 질문을 듣고 있다는 듯 지겨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워진 지 일주일쯤 되었네요. 키잘키르스텀이 지금 몬스터들에게 점령당한 건 알고 계시죠? 그것들이 만약 워프 포인트를 이용해서 여기로 오게 되면 무기도 없는 저 같은 유저들부터 죽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1차 보호벽을 세울 겸 해서 다 같이 만들었죠.”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아이디어의 반응이 괜찮은 편이라 자그레브나 톨랑, 발라 모냐크에도 현재 비슷한 것들이 곧 세워질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키잘키르스텀이 점령당했을 때 우선 평범하게 도시 내에서 거주하고 있던 무기 없는 라이트 유저들부터 죽이기 시작한 것이 다른 이들을 긴장시키기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지금 키잘키르스텀엔 아무도 없겠군요.”

시저와 페일 나이츠, 그리고 마물들 말고는.

그런 뜻을 담은 것이었지만 주인은 이번엔 반대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 살던 사람들 중엔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긴 있어요. 내 친구도 그렇고.”

이것은 생각지 못한 소식이었다.

“다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다들 안 가는 줄 알았는데요.”

“어허. 이분 정말 하나도 모르시네. 커뮤니티 좀 눈팅하고 사세요.”

최대한 평범한 구경꾼처럼 물어보려는 내 노력이 가상히 잘 통한 것 같았다. 주인은 포션을 담던 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며 워프 포인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유저들은 죽어도 계속 거기서 살아나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 본보기로 다 쓸어버린 다음에는 반항하는 사람들만 아니면 내버려 두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도시 안이 몬스터로 득시글거리니 분위기가 안 좋아서 다들 빠르게 정리하고 탈출하는 분위기긴 합디다. 내 친구도 물건들만 다 처분하면 최대한 남쪽으로 이사하겠다고 벼르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그리고 저 워프 포인트로 함부로 키잘키르스텀에 갔다간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몬스터 떼거리에게 바로 맞아 죽는다니 꿈도 꾸지 마세요. 워프 포인트 이용하는 사람들도 그쪽으로 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노점상 주인은 내 옆쪽에 새로 방문한 손님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어서 오세요. 무슨 포션을 드릴까요?”

나는 그 틈을 타 유완과 함께 뒤로 물러나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향했다.

“들었지. 아무래도 워프 포인트를 이용하는 건 좀 어려울 것 같다.”

“음.”

키자르 산맥으로 가려면 필연적으로 키잘키르스텀을 거쳐야 한다. 산맥 자체는 넓은 편이라 동북쪽으로 간 뒤 산을 가로질러 가도 문제는 없겠지만, 그러면 너무 돌아가는 것이 문제였다.

퀘스트 위치가 찍힌 점은 지도상에서 키잘키르스텀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 위에 있는 산맥에 위치해 있었다. 산맥의 정중앙보다 조금 더 서쪽에 위치한 곳을 가기 위해 빙빙 돌아가는 시간적 핸디캡을 감수하기에는 현재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이미 일곱 번째 퀘스트에서 허비한 시간이 며칠인가. 대부분의 시간은 중간에 사망 페널티 때문에 허비한 것이라지만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이번에 연계 퀘스트도 하나 받았으니 나중에 이루미네에게도 가야 하고.’

보상을 받는 일이 급한 것은 아니었으니 일단 여덟 번째 퀘스트까지 다 마친 후 갈 생각이었지만 만약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역시 여기서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키잘키르스텀으로 바로 가는 게 낫겠지.”

유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자.”

더 준비할 것이 없다면 한시라도 빨리 토렐리트를 빠져나갈 셈으로 막 골목을 돌아 다른 곳에 진입했을 때였다.

“어이쿠!”

반대쪽 골목에서 튀어나온 누군가와 어깨가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뒤로 물러나자 상대방이 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아아앙? 뭐야, 이 자식은!”

“…….”

이 정도면 이들과 나는 이제 전생의 인연 정도로 깊은 인연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꾸준히 마주칠 수는 없다. 나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기분으로 험악한 인상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도 않은 거냐, 이 자식?!”

“음…….”

“죄송하면 대가가 있어야지!”

띠링!

- 한스와 친구들의 갈취 이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지겨운 이벤트 알림이 생성됨과 동시에 한스의 양옆에서 동료들이 거들먹거리며 걸어 나왔다.

“이 자식이, 웃어?”

“사람 쳐놓고 지금 웃었냐?”

“치료비를 줘야 할 것 아냐, 치료비를!”

“우리 한스는 연약해서 한 대만 쳐도 뼈가 나간다구, 엉?”

언제나 이 대사까지만 듣고 어디선가 나타난 다른 사람들에게 순서를 빼앗겼었기에 지금껏 내가 직접 이벤트를 끝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완. 나서지 마.”

나는 내 옆에서 검을 뽑으며 나서려는 유완을 붙잡아 막았다.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내가 해결해 보자.”

이거 내 이벤트거든. 그렇게 말하자 유완이 겨우 검을 집어넣고 뒤로 물러나 주었다.

“지금 우리 말을 무시하는 거냐?”

“이런 건방진 놈들. 버릇을 고쳐 주마!”

나는 방금 자신들의 목숨이 황천으로 날아가 버릴 뻔한 것 따위는 알지 못할 한스와 친구들을 향해 다가간 뒤 손을 뻗었다.

“홀드 퍼슨.”

“응? 어, 어어?”

“내 발이!”

발밑의 땅이 스르르 솟아올라 신발까지 묻어버리자 한스와 친구들이 깜짝 놀라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땅에 붙은 발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 마법사였어?”

“이런 젠장!”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너흰 모르겠지.”

나는 한스와 친구들을 향해 조용히 미소 지었다. 후드 밑으로 입술만 보이는 인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울지는 알고 있었지만 저들에게 보여줄 배려는 없었다.

“파이어 볼!”

“잠깐! 말로 합시다! 잘못했, 으아악!”

“으아아악!”

한스와 친구들의 눈물겨운 비명이 오래오래 울려 퍼진 뒤 나는 드디어 홀드 퍼슨을 풀었다. 한스와 친구들은 알맞게 잘 태워져 홀랑 벗겨진 옷과 머리카락을 감싸쥐고 알몸을 드러낸 채 훌쩍훌쩍 울며 쓰러져 있었다.

“내 순결이~!”

“내 머리카락~!”

“엘리자~!”

- 한스와 친구들의 갈취 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은 토렐리트 시민들의 신뢰도 +20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궁금했었던 한스와 친구들 이벤트의 보상이 이거였다니…. 그다지 큰 보상은 아니었지만 나쁜 보상도 아니었다. 일단 보상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너무나 시원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파이어 볼을 저렇게 섬세하게 쓰는 건 또 처음 보는군.”

유완이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손을 털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뒤에서 울던 놈 중 한 명이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식. 우릴 이 꼴로 만들어 놓고도 무사히 갈 수 있을 줄 알아! 죽어라!”

하지만 그가 반쯤 탄 주머니칼을 내게 들이대기 전에, 앞으로 나선 유완이 검을 한 번 그어 오러를 날려 보낸 것만으로 그들은 또다시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콰콰쾅!

“커억!”

폭발음이 정리되고 나서 한스와 친구들이 있었던 곳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러가 박혀 박살 난 담벼락과 그 밑에 깔려 버린 이들의 팔다리뿐이었다. 그나마도 곧 스르르 사라지는 것을 보니 저절로 약간의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아.”

“그런 유형은 봐주면 끝이 없다.”

혹시나 살인자 딱지가 붙어 도시 자율경비대에게 인지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할 셈이었지만 유완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저번에 키온 형이 때렸을 때…는…….”

말을 이어나가던 중 문득 유완의 뒤쪽, 무너진 담벼락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갑자기 말을 멈춘 것이 이상했는지 나를 따라 몸을 돌린 유완이 뒤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고는 눈살을 강하게 찌푸렸다.

“……복구가 이렇게 빨리 되는 건 처음 보는군.”

고작 몇 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무너진 담벼락 조각들이 서서히 움직여 제자리를 찾아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복구가 그것뿐이라면 괜찮았겠지만, 문제는 몬스터를 잡았을 때처럼 스르르 사라진 줄 알았던 한스와 친구들이었다.

벽이 복구되면서 드러난 공간 위로 한스와 친구들의 시체가 도로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알몸 위로 방금 전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이 생겨나고 머리카락도 도로 스르르 자라나더니 최후에는 혈색까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있자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징그럽군.’

마침내 그들이 흘렸던 혈액 한 방울까지 모두 흡수되듯 사라지고 나자 잠시 후 한스와 친구들이 눈을 떴다.

“응?”

“여기는?”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한스와 친구들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나를 보고는 핫 하는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뭘 봐? 아앙? 뭐야, 이 자식은? 사람 처음 보냐?”

나는 그 반응이 나를 알아보았기에 놀라는 반응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나를 알아보기는커녕 방금 전과 비교해 한 치도 다르지 않은 태도로 곁에 다가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사람을 기분 나쁘게 쳐다봤으면 대가가 있어야지!”

띠링!

- 한스와 친구들의 갈취 이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뭐, 야. 이건…….’

“아무래도 곧바로 빠져나가는 게 낫겠군.”

내가 충격에 빠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유완이 팔을 잡아끌며 한스와 친구들을 향해 검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꾸에에엑!”

“사람 죽는다!”

“엘리자~!”

유완의 주먹 뒤로 날아가 쓰러지는 한스와 친구들에게서 마지막까지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나는 유완에게 이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카프?”

한참이 지나도 내가 얌전히 끌려오기만 할 뿐 말을 하지 않자 뭔가 이상했는지 유완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벼락처럼 발끝을 저리게 하는 충격 때문에 도저히 입을 열 수 없는 상태였다.

“카프.”

“……봤어?”

뭘 말인가? 하고 말하고 싶은 듯 유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복구되던 것 봤냐고.”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문제? 문제라면 당연히 문제였다.

“죽은 NPC가 부활하고, 우리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잖아.”

답답함을 담아 목소리를 조금 높이자 유완이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게 문제야. 그 반복되는 것 말이야.”

나는 노인 슈페리어의 마지막 한마디를 떠올렸다.

「진실을 하나 알려 주마. …이 세계는 사실 500년 전부터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그때는 멈춰 있다는 단어의 뜻을 단어 그대로만 생각했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한스와 친구들의 죽음과 재생을 본 순간 불현듯 그 말이 떠올랐다.

“다른 NPC들도 죽고 나면 그렇게 부활해? 본 적 있어?”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몇 번 있다.”

유완이 드디어 뭔가 느끼기 시작한 듯 심각한 얼굴로 멈춰 섰다.

“설마…… 슈페리어가 했던 말과 이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가 아니다. 나는 이것이 정답이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면 어째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발전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미스트뿐만이 아니라 게임 속의 NPC들은 대부분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고, 그러다가 또다시 죽기를 반복한다. 죽지 않는다 해도 영원히 같은 일상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것이 너무 당연해서, 미스트의 NPC들도 죽은 NPC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었지만, 새삼스레 떠올려 보면 이 세계에도 분명 역사가 존재했고 세대 차가 지나가며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죽었다 살아나서는 이전에 하던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이들로 가득 찬 세계라면 과거와 역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스트의 NPC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기계적으로 하던 일을 반복하는 유형과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유형 말이에요. 왜 그런 차이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전에 함께 퀘스트를 진행하던 도중 루크레이신이 지나가듯 말했던 것을 대입해 보아도 모든 것이 확실했다.

이 세계의 NPC들이 원래부터 죽었다 살아나는 존재들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슈페리어의 말이 들어맞는다. 그쪽이 이상한 것이고, 정말 사람 같은 NPC들이 원래 이 세계에 있어야 하는 제대로 된 인물들이었을 것이었다. 이런 세계에 미래를 위한 발전이 있을 리 없었다.

매일 똑같은 것만 생각하고, 죽었다 되살아나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들로 가득한 세계.

‘그게 바로 슈페리어가 말했던 멈춰 버린 세계였어…….’

선 대륙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보다 더 큰 전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정없이 몰려왔다. 단순히 게임 속 장치 중 하나일 것이라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고 전율스러운 일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그거야말로 완벽한 함정이군.”

내 추측을 들은 유완 또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 내뱉은 말이 이것이었다.

“그건 게임을 자주 해온 사람일수록 의심하지 않는 덫이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입술에서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하지만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더 일어나야 할 일들도 몇 가지 있었다.

나는 좀 더 증거를 찾아보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며 토렐리트의 정경을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하나도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대체 무엇을 바꾸는 것일까. 상상이 가지 않는 미래를 떠올릴수록 전율이 멈추지 않았다. 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키잘키르스텀으로 향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채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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