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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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물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사람처럼 가슴이 터지도록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머릿속이 너무 띵해 잠시 현실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려 고요한 방 안 구석에서 가습기가 쉬익거리며 흰 수증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겨우 이곳이 병원이고, 나는 이곳에 입원해 있는 중이었다는 자각이 떠올랐다.

‘그래…….’

방금 전까지, 미스트를 하고 있었지.

[ 접속이 종료되었습니다. 헤드를 벗으셔도 괜찮습니다. ]

때맞춰 귓가에 들려온 무기질적인 안내음에 따라 머리에 쓰고 있던 헬멧을 벗자 장시간 답답한 좁은 공간 속에 갇혀 있느라 땀이 배어 있던 이마가 일시에 시원해졌다.

아직까지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띵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천천히 흔들어 보았다. 게임 속에서 죽어본 것은 처음이라 몰랐는데, 죽을 때 받은 충격이 접속을 해제한 후에도 몇 분 정도는 계속해서 지속되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곁에 있었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키온 형, 루크레이신, 그리고… 유완과 시저.

적대 관계에 있는 시저에게 죽어 퀘스트가 취소되느니 편법이기는 해도 스스로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하에 등 뒤의 벽을 부순 것 자체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저의 기묘한 표정이 어쩐지 망막 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자꾸만 기억이 났다.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너는.

얼굴을 본 건 아니다. 그것은 장담할 수 있었다. 게임에서 내가 항상 뒤집어쓰고 있는 후드는 아이템 특성상 조금 펄럭일 수는 있어도 결코 코 위의 얼굴을 드러내 보일 정도로 뒤집어지는 일이 없었다. 일단 쓰기만 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착용자의 얼굴에 꼭 달라붙는 그 탁월한 기능성으로 인해 여태 얼마나 많은 위기상황을 넘겨 왔었던가.

하지만 얼굴을 본 것도 아닌데 그런 표정을 짓다니…….

복잡한 기분이 되어 시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홀로그램 안내창이 반짝이며 떠올랐다.

- 외부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02D-916H-QN12.

- 수신에 동의하시겠습니까?

병원에 있는 동안 전화가 걸려온 것은 처음이라 약간 놀랐지만 잘 보니 이전에 주열 형이 남겨놓고 갔던 번호였다는 것이 기억났다. 나는 약간 망설이다 전화를 받기로 했다.

“수락한다.”

[ 카르야! ]

“…형?”

말이 끝나자마자 죽 늘어나며 화상통화 모드로 바뀐 홀로그램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역시나 잔뜩 붉어진 얼굴의 주열 형이었다.

평소에는 현실과 게임 속 이름 구분을 잘 하던 형이 카르라고 부르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놀란 상태인지 짐작이 갔다.

[ 어떻게 된 거야. 서, 설마 시저 놈한테 죽은 거냐? ]

시간을 보면 아마도 내가 죽자마자 거의 곧바로 게임을 종료하고 전화를 건 것 같은데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형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많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당사자인 나조차 찔리기 직전까지 시저의 움직임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으니 뒤쪽에 있던 일행들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 했을 터였다.

“아니.”

[ 아냐? 그러면? ]

“그렇게 되기 전에 벽을 부쉈으니까.”

짧은 설명이었지만 형은 다행히 잘 이해한 듯했다.

미스트 내에서 죽는 사람이 생겼을 때에는 죽은 이가 가진 체력을 가장 많이 깎아낸 존재, 그리고 전체 체력의 절반 이상을 없앤 이가 살인자로 인정받는 ‘살인자 인정’ 시스템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이것을 이용해 이전에 크란이 시저에게 죽을 뻔했을 때 억지로 포션을 들이부어 체력을 절반 이상까지 회복시킨 뒤 내가 죽이는 것으로 ‘시스템적으로는’ 시저에게 죽임당한 것을 피해갔던 것처럼, 방금 전의 나는 내 스스로 사고를 일으켜 체력이 절반 이상 떨어지기 전에 자살함으로써 퀘스트가 깨질지도 모를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어쨌든 체력이 절반 이상 떨어지기 전에 돌에 맞아 죽었으니 시저에게 죽은 건 아니다. 그러므로 내 퀘스트도 깨지지 않은 것이다.

다만 그 이외의 모든 죽음 페널티는 감수하고 받아들여야겠지만…….

[ 아… 다행이다. 그런 것 같기는 했지만 너무 놀라서 말이야. ]

형이 겨우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 그 짧은 사이에 그런 임기응변을 쓰다니. 잘했어. 정말 잘했다. ]

“…응.”

잘 죽었다고 칭찬받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칭찬은 칭찬이었다. 나는 도로 얼굴빛이 원래대로 돌아온 형을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여기로 전화는 어떻게….”

[ 엉? 병원 이름하고 호수, 네 이름까지 다 아는데 전화야 쉽지. ]

그렇게 간단히 대꾸한 형이 피식 웃었다.

[ 흐흐. 죽은 다음에 상황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런 걸 먼저 묻는 걸 보니 너답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

“…아.”

맞다. 물론 그것도 궁금했다.

머쓱해하는 내 표정이 우스웠는지 잠시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 형이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 네가 그렇게 된 다음에 당연히 완전 난리가 났지. 내가 돌무더기 헤쳐보겠다고 스킬 쓰는 와중에 유완 그놈이 곧바로 시저에게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어서 말이야…. 음. 그런데 시저 놈이 네가 없어지고 나니 재미가 없어졌는지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는 거 아니냐. 순간이동처럼 뿅 하고. ]

“그래서?”

[ 뭐, 그러고 나서 사기꾼 놈이 아무래도 네가 죽어서 로그아웃된 것 같으니 우리도 로그아웃하고 연락을 해 보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길래 내가 제일 먼저 연락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재빨리 게임 끄자마자 전화한 거야. 혹시 나보다 먼저 연락한 놈, 없었지? ]

그 말을 듣고 나니 왜 형이 전화했을 때 처음에 그렇게 다급해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응.”

[ 역시 내가 1등! 와하하! 역시 이 형이 최고지? ]

상쾌하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인 주열 형이 문득 무언가 떠올린 듯 아, 하고 표정을 바꾸었다.

[ 맞아. 무헌아, 그래서 접속불가 기한은 며칠이냐? ]

“접속불가 기한?”

미스트에서 사망하게 되면 그 원인에 따라 어느 정도 접속불가 기한이 생길 때가 있었다. 몬스터들과 싸우다 죽거나 PK로 인해 죽었을 때에는 보통 몇 분에서 몇 시간 정도이고, 길어봐야 하루에 불과했지만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 특히 퀘스트를 수행하다 죽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수행하던 퀘스트의 난이도가 높고 사망 시 여건이 좋지 않았을수록 접속불가 기한이 더욱 길어진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미스트 상식 중 하나였다.

왜 이런 시스템을 취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불만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새턴은 그에 대해 게임 시스템 때문이라는 답변 외에 이렇다 할 개선 의지를 밝힌 적이 없었다.

그래도 평범하게 플레이하는 대부분의 유저들은 아무리 험하게 싸우고 다닌다고 해 봐야 사망 시 접속불가 기한 시스템에 대해 그다지 불편을 느낄 일이 없겠지만, 아마도 미스트에 존재하는 모든 퀘스트 중에서 가장 어려운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을 우리들에게는 그것만큼 중요한 문제도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어서, 그 문제에 대해 아쉬움을 느꼈던 적이 유완이 죽은 줄 알았을 때와 크란이 사망했을 때 정도였지만…….

그런데, 정확한 접속불가 기한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지?

꽤 긴 접속불가 기한이 걸렸으리라는 사실까지는 추측 가능했지만 정확한 기간은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몰랐다. 죽자마자 곧바로 로그아웃되어서 게임기에서 접속이 해제된 채로 일어났는데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며 주열 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형은 아주 궁금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 왜 대답이 없어? ]

“……형.”

[ 엉. 왜. ]

“접속불가 기한을 어디서 보는지 모르겠어.”

[ ……응? ]

나를 따라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었던 형이 순간 어리둥절하게 반문했다.

[ 내가 잘못 들었나? 뭘 모르겠다고? ]

“…….”

[ 진짜냐?! ]

거의 고함을 지른 형이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알 수 없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세 번이나 반복한 끝에 겨우 말을 이었다.

[ 그……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설마…. 무헌아. 미스트에서 여태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겠지? ]

그 설마가…….

“맞는데.”

[ ……. ]

형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얼굴에서 털끝만 한 거짓의 기색이라도 찾아보고 싶어 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는지 허 하는 숨이 홀로그램 너머에서 크게 새어 나왔다.

[ 그 말을 한 게 네가 아니었다면 난 절대 지금 들은 말을 못 믿었을 거다. 전투는 전혀 안 하고 사는 생산형 유저가 그런 말을 해도 믿을까 말까인데 여태 할 거 다 했으면서 1년 동안 한 번도 안 죽었다니. 그게 말이 돼? ]

여태까지 게임을 하면서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충격 받을 만한 사항이었나. 한참 동안이나 무어라 탄식해 대던 주열 형은 결국 더 말해 봐야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임을 알았는지 푸허 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분위기는 진지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 속에서 별 같은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 그래. 예전부터 확률 같은 건 네 앞에선 별로 의미가 없었지. ]

형이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 아마 모르긴 몰라도 시저 놈도 이 사실을 알면 어이없어할 거다. 분명해. ]

“…….”

칭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형이 눈을 부드럽게 휘어 웃어 보였다.

[ 접속불가 기한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냥 다시 한번 게임에 로그인을 시도해 보면 돼. 접속할 수 없다는 안내가 나오면서 정확한 기한을 알려주거든. 접속이 가능한 날이 될 때까지는 계속 그 상태로만 남아 있게 되지. ]

“아….”

왜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를 만큼 간단한 해결방법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자 형이 뭐가 그리 웃긴지 또다시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 푸흐…… 네가 딱히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하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여태 계속 안 죽다가 죽은 게 좀 아깝진 않아? ]

“괜찮아.”

어쩌다 보니 여태 플레이하면서 죽을 일이 없었던 것뿐이지, 딱히 죽지 않는 게 플레이 목표였던 건 아니다. 때문에 죽음 자체에는 원래 별생각이 없었다.

[ 나야 옆에 하루에도 몇 번씩 죽는 팔등이 놈이 있었으니 죽음에 금방 적응했다지만, 죽은 게 처음이었으면 약간 충격이었을 텐데 그것도 괜찮은 거지? ]

“응.”

막 깨어났을 때 머리가 뭔가에 얻어맞은 듯 띵했던 걸 빼면 멀쩡하기 그지없었으니 다행이었다. 나는 형의 다정한 얼굴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 한마디를 더 추가하기로 했다.

“괜찮아. ……고마워.”

[ 뭘. 나중에 형이 제일 먼저 연락해 줬다는 거, 절대 잊으면 안 된다. ]

형은 직접 만나서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는 말과 함께 쩝 하고 혀를 찬 후 정확한 접속불가 기한을 알게 되면 메시지를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 대충 일주일 정도 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 꼭 확인해 봐야 해. ]

고개를 끄덕이자 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 그래. 그러면 몸조리 잘 하고, 병원 밥이 맛없어도 거르지 말고 꼭꼭 다 먹어야 한다.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얼굴에 살이 빠진 것 같네그래. ]

그런가? 얼굴을 매만져 보았지만 약간 거칠한 것을 빼고는 평소와 똑같은 것 같아 별다른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형은 몇 번이고 밥을 거르지 말고 많이 먹으라는 걱정을 반복하다 내가 꼭 그러마고 대답하고 나서야 겨우 만족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순식간에 적막해진 병실 안을 둘러본 뒤 옆에 내려두었던 접속 헤드를 다시 들어 머리에 썼다.

그러자 정말로 형의 말대로 평소처럼 접속이 되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만이 눈앞에 펼쳐진 채 나직한 여성의 안내음이 들려왔다.

[ 카프로스 님은 현재 접속하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다음에 접속하시기 위해서는 앞으로 현실 시간 기준 5일 14시간이 필요합니다. ]

그러면 대충 6일이군. 전에 크란이 죽었을 때 접속불가 기한이 3일이었단 사실을 떠올리면 좀 길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난 데 감사해야 할 듯했다.

나는 방금 전 연락했던 주열 형의 번호를 입력하고 6일 정도 접속불가 기간이 되었다는 메시지를 써서 보냈다. 답변은 곧바로 오지 않았지만 그리 중요한 내용도 아니니 괜찮았다.

그러면 이제 남은 과제는 앞으로의 6일을 어떻게 보내느냐인가.

벽에 걸린 시계는 소리 없이 지금이 오후 9시 37분이라는 정보를 알려주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에도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이런 고요함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6일간 미스트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약간 답답한 마음이 드는 듯도 했다.

‘잠이나 잘까…….’

잠이 별로 올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이 밤중에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뿐이었다.

내일부터는 여가 시간을 보낼 책이라도 빌려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버튼을 눌러 침대 등받이를 평평하게 눕히고 있는데, 갑자기 병실 밖에서 약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말소리, 그리고 다급하게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

‘뭐지.’

의아해하는 동안 그 발소리는 내 병실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곧이어 문이 벌컥 열렸다.

“……무헌.”

차가운 겨울바람 냄새와 함께 문간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 아직도 입에서 흰 김을 내뿜을 것 같은 차가운 얼굴로 서 있는 그 사람을 본 순간 눈을 의심했다.

‘진제환……?’

네가 여기는 왜 왔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자 진제환이 성큼성큼 걸어 안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화가 난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전에 없이 싸늘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몸은.”

…몸? 몸이 뭘 어쨌다는 거지.

“괜찮…은데.”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떨떠름하게 대답했지만 진제환은 여전히 심각한 눈빛으로 내 전신을 훑어볼 뿐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설마 게임에서 죽었다고 바로 여기까지 달려온 건 아니겠지. 그런 뜻을 담아 바라보자 진제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네가 걱정되어서.”

“…….”

너도 참 난 놈은 난 놈이다. 설마 아닐 거라 믿었던 답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진제환의 진지한 얼굴을 보니 무어라 해 주려던 말이 입 안에서 그대로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보통 같이 게임하던 이가 게임 내에서 죽었다고 해서 곧바로 차를 몰고 달려오나? 이런 게 일반적인 상황……은 역시 아니겠지.

주열 형이 이 상황을 보았다면 무어라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방금 전 내가 미스트에서 처음 죽었다고 말했을 때 형에게 받았던 눈빛의 몇 배는 되는 반응이 돌아올 것임에는 분명했을 터였다.

“괜찮은 거라면 그걸로 됐어.”

내가 정말로 괜찮다는 것을 확신한 듯 전신을 살피던 시선을 거둔 진제환이 작게 숨을 내쉬며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쉬고 있는데 불편하게 만들 셈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돌아갈 테니까…….”

“잠깐. 잠깐만.”

이 자식은 대체 뭐가 이리 제멋대로인가.

갑자기 쳐들어왔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결론 내리고 돌아갈 태세로 몸을 돌리는 것을 보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음… 그러니까, 지금 돌아간다고?”

내 질문에 진제환이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진제환이 잠시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네가 괜찮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너 정말… 그것만 확인하러 온 거였냐.”

믿을 수가 없어 다시 한번 물어보았지만 진제환의 답은 변함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긍정뿐이었다.

“응.”

“…….”

뭐라고 말하면 좋단 말인가. 이 상황에서.

황당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진제환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어 순식간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고마운 듯도 하고, 놈이 한심한 것도 같은 이 기분을 무어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진제환이 이제 더는 내가 질문하지 않을 줄 알았는지 도로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기다려.”

황급히 다시 한번 입을 열자 진제환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한마디만 하고 그냥 가냐. 조금 이야기나 하다가 가.”

“…피곤해 보이는데.”

그야 물론 진제환이 오기 전에는 잠을 청하려고 했었던 참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 않은가.

“됐어. 졸리지도 않고, 어차피 지금 할 일도 없으니까.”

“…….”

그래도 진제환은 뭔가 망설여지는지 문고리를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결국 한마디를 더 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차피 내 얼굴은 항상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어. 세 번은 안 말할 거니까 와서 앉아.”

진제환의 입가에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제야 겨우 앞으로 다가와 앉는 놈을 보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집은.’

나도 고집이 강한 편이지만 진제환도 참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이런 사소한 점에서 진제환과 내가 본질적으로 비슷한 종류의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진제환을 가장 가깝게 느끼는 건 역시 그래서인가.

“역시 넌 황당한 놈이야.”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진제환을 상대로는 잘 튀어나왔다.

“응.”

그에 대한 진제환의 답은 내 생각을 확고히 해 주기에 충분했다.

“응은 뭐가 응이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진제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데 왜 내가 약간 민망해지려고 하는 걸까.

“접속불가 기한은… 6일 후에 풀린다고 하더라고.”

“그렇군.”

방금 전 알게 된 새로운 소식을 말해 주었지만 진제환의 표정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마치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넌 어떻게 할 셈이야?”

“기다려야겠지.”

“나를?”

“너 외에 내가 기다리는 게 있을 리가.”

물어본 사람이 더 민망해질 만큼 당당한 대답이었다.

음. 고맙긴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건가?

“괜찮겠어?”

6일이라는 시간은 현실은 물론이고 게임상에서는 더더욱이나 짧지 않은 시간이다. 내가 죽은 뒤 사라졌다는 시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기다리겠다고 선언해도 괜찮은 걸까.

그러고 보면 나는 유완이 퀘스트를 얼마나 끝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이 뒤이어 기억났다.

‘하긴 만나자마자 이야기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시저와 싸웠으니 알 수 있을 리가 없군…….’

어쩐지 현실에서 만나는 진제환에게는 게임 속의 일을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동안 일부러 그쪽에 대한 화제는 입에 담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진제환에게 모든 것을 들은 다음이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네 퀘스트는 어떻게 하고.”

“그거라면 문제없다. 다 끝냈으니까.”

“뭐?”

담담한 대답에 놀라 진제환의 얼굴을 살폈지만 침착한 눈빛 어디에서도 나를 속이려는 듯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짜란 말인가…….

“언제?”

“얼마 전에.”

이럴 수가…….

설마 유완이 키온 형 다음으로 퀘스트를 끝내는 자가 될 줄이야. 사람 일은 역시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조금 궁금해졌지만 우선 나부터가 약간의 패배감이 느껴지는 중이었다.

내 퀘스트도 현재 일곱 번째에 돌입했으니 끝내기까지 두 개밖에 안 남기는 했다지만 여태까지 개당 끝내는 데 걸린 시간을 보면 금방 끝난다고 장담하기는 무척 힘든 상태였다.

시저도, 키온 형도, 유완도 끝을 냈다. 다른 이들도 모두 마지막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을 테니 나라고 뒤처질 수는 없었다.

하필 이런 순간에 처음으로 사망하게 될 줄이야……. 죽음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후회도 없었지만 시간을 그저 흘려보낼 생각을 하니 약간 초조해졌다.

그건 그렇고, 키온 형의 말에 의하면 퀘스트가 끝나면 그때부터 또다시 연계되어서 다른 퀘스트가 생긴다고 하지 않았었던가?

“끝난 다음에 다른 퀘스트는 없었던 거냐?”

별로 웃긴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진제환의 입가에 갑자기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마치 그 질문을 하기를 기다렸던 듯한 표정이었다.

“있었어.”

“…뭔데.”

약간 찜찜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일단 물어는 보기로 했다.

“슈페리어의 후인을 지킬 것.”

이건 내가 예상했던 그 무엇과도 전혀 달랐다.

슈페리어의 후인을 지키는 것이라니. 하지만 그건…….

“혹시 내가 죽어서 네 퀘스트도 실패한 건 아니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묻자 진제환이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슈페리어의 후인이 가진 태양의 증표가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 그러니 퀘스트는 실패하지 않았어.”

“태양의 증표……? 아이아가스를 말하는 건가.”

이름은 생소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 중 유완이 지켜야 할 만큼 중요한 거라면 아무리 해도 아이아가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다크 나이트의 기억에서 본 바로는 붉은 보석이었다.”

맞나 보군.

퀘스트를 모두 끝낸 유완의 연계목표가 내 아이아가스가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라면 약간 당황스럽기는 해도 납득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사망하기 전 진행했던 슈페리어의 기억 퀘스트 속에서 본 광경이 얼핏 떠올랐다. 다크 나이트는 화이트 캐슬에서 누군가를 지켜줄 것을 왕으로부터 명령받았었다. 그러고 나서 죽을 때까지 슈페리어와 함께 있었던 것을 보면 그 누군가는 역시 슈페리어였을 터였다.

태양의 뒷면을 지키는 다크 나이트의 임무. 왕이 그렇게 말했었지… 아마.

앞으로 유완이 미스트에서 내 곁에 계속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든든해졌다. 어깨 위에 얹힌 짐이 약간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네 마지막 퀘스트는 뭐였어?”

나는 본격적으로 그동안 만나지 못한 게임 속 유완의 안부를 대놓고 묻기로 했다.

다크 나이트는 여태 퀘스트에 등장했던 영웅들 중 같은 남자가 보아도 가장 흠잡을 곳 없이 멋있는 이였다. 내 막대기 속에 들어 있는 슈페리어가 들으면 섭섭해할 소리이긴 하지만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크 나이트와 같은 타입의 과묵한 검사 캐릭터를 무척 좋아했다.

비록 다크 나이트의 인생이 그리 행복하지는 않아 보였으나, 슈페리어의 시선으로 언뜻언뜻 본 그는 슈페리어의 가장 친한 사람이라는 이유를 제외하고서라도 저절로 눈길이 가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멋진 기사였다.

유완의 퀘스트 영상도 여태 발표된 것들 중 시저와 비견될 정도로 임팩트가 강했음을 떠올려 보면 분명 퀘스트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보통이 아닌 일들을 겪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흥미진진한 과정을 바로 곁에서 구경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수 없으니 직접 감상이나 듣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건 왜…….”

이 질문은 예상치 못했는지 진제환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침대를 약간 기울여 더욱 편안한 자세를 잡고 이야기를 듣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궁금하니까.”

퀘스트를 마친 첫 번째 주자인 키온 형은 함께 다니던 도중 이미 알아서 마지막 퀘스트가 어떤 것이었는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여신을 소환해서 일정 시간 동안 버티는 거라고 했었지.’

아마 한 시간이었던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힘들었었다고 투덜댔던 것만은 확실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여신을 소환한다는 게 정확히 어느 정도로 힘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사로 치환하면 높은 서클의 마법을 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사용하면서 닳는 마력을 버텨내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별것 없었어.”

“그 별것 없는 게 궁금하다고.”

얘기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진제환이 여태껏 비밀로 해 왔던 것들이 한두 개던가. 전에 왔었을 때 제 입으로 앞으로는 물어보면 뭐든 알려주겠다고 했으니 싫어도 대답을 해야 할 터였다. 회피하려 드는 것을 가로막고 딱 잘라 말하자 진제환이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이야기하는 건 상관없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걱정한 놈이면 애초에 여기에 안 왔겠지.”

“…….”

과연 이 말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진제환이 입을 다물었다.

‘말 잘하던 놈에게 승리를 거두니 기분이 좋군.’

그동안 검도장에 오갈 때마다 내 출퇴근을 책임지겠다고 귀찮게 굴던 진제환의 은근한 말발에 얼마나 밀렸었던가. 사부님과 사모님마저 발 빠르게 제 편으로 만들어버린 놈에게 몇 번이나 좌절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널 걱정해서 한 말인데 그런 얼굴을 하는 건…….”

진제환이 복잡한 빛을 띤 눈으로 중얼거렸다.

“하는 건 뭐.”

“약간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비겁은 무슨. 웃기지 말고 빨리 이야기나 해.”

코웃음을 치며 등받이로 받친 베개에 더욱 몸을 힘주어 파묻고 손을 흔들자 진제환이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정말로 별것 없어.”

그러니까 그 별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들어보고 판단하겠단 말이다.

“선대 다크 나이트 아홉 명과 싸워서 이기는 것뿐이었으니까.”

“……선대 다크 나이트라고?”

진제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걸로 설명을 다 마쳤다고 생각한 듯했지만 나는 오히려 의문으로 머리가 가득해진 상태였다.

“너 말고 다른 다크 나이트가 또 있는 거냐?”

“음. 정확히는 유령.”

“그걸 먼저 말하라고.”

그러면 그렇지. 반쯤 김이 새 투덜거리자 진제환이 난감한 듯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유령이지만 살아 있을 때와 별 차이는 없었어.”

“차례차례? 아니면 한꺼번에?”

“차례차례.”

아홉 명을 한꺼번에 상대했다면 엄청난 난이도였겠지만 한 명씩 상대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후로도 진제환에게 자세히 캐물어 마지막 퀘스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더 들을 수 있었다.

북쪽 어딘가에 존재하는 옛 다크 나이트들의 숨겨진 무덤 던전으로 들어가 거기 있던 다크 나이트 단장 아홉 명의 유령과 차례로 싸웠다니. 짤막한 설명을 들었을 뿐인데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퀘스트 영상 속에 나오는 다크 나이트도 있었어?”

“글쎄. 마지막에 목 없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했지만 목이 없어서 대화는 못 했어.”

“……그러냐.”

호러 특급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진제환이 무언가 떠올린 듯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다크 나이트가 맞는 것 같기도 하군.”

“어떻게 알아.”

“갑옷이 비슷했으니까.”

당시에는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생각해 보니 비슷하다고 말하는 진제환의 엄청난 무신경함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 멋있다고 생각했던 퀘스트 속 다크 나이트가 갑자기 약간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퀘스트 얘기는 그쯤 해 두고 혹시 그동안 다른 퀘스트 수행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났는지나 질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눈앞에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라 그 결심은 실행할 수 없었다.

- 외부에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외부에서 메시지라고? 이 늦은 시간에 연락할 사람이 있었나? 화면을 바라보며 고민했지만 결국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환하게 빛나며 죽 늘어나 펼쳐진 화면 속에는 짤막한 문장 한 줄만이 쓰여 있었다.

- 퀘스트는 멀쩡해요? 접속불가일은 며칠?

고작 한 줄짜리 메시지에서 느껴지는 이 불유쾌한 느낌은……. 설마 싶어 아래를 보자 보낸 사람의 이름이 반짝이며 빛났다.

“…류진유가 누구지?”

나와 함께 메시지를 본 진제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루크레이신.”

이걸로 일행 모두에게 걱정의 연락을 받은 셈인가. 내가 죽은 게 정말 어지간히 놀라운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까 주열 형이 루크레이신이 제일 먼저 나에게 연락하자고 말하고 해산했다고 했었던가? 그런 것치고는 정작 당사자가 제일 늦게 연락했지만 나름대로는 걱정이 담긴 메시지인가 싶어 짧게라도 답장을 보내주어야 할 듯했다.

“답장한다. [ 그래. 6일. ]”

- ……전송되었습니다.

이거면 불만은 없겠지.

메시지를 보내고 진제환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왜 그래?”

“그 녀석과는 또 언제 알게 된 사이지?”

“현실에서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

한 달은 고사하고 며칠이나 되었을까. 바로 얼마 전 운오와 함께 마주쳤던 류진유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꾸하자 진제환의 찌푸림이 더욱 강해졌다. 그런 표정을 해도 여전히 현실감이 약간 없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라는 것이 불공평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병원에 있다는 사실까지 벌써 다 알고 있는 건가?”

“아니. 그건 내가 가르쳐준 건 아니고.”

여기에서 얼굴을 보게 된 것만 아니라면 당연히 끝까지 말하지 않았을 테지만 마주친 타이밍과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그냥 애초에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야.”

“…….”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진제환은 약간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찌푸린 미간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아주 조금뿐이었다.

“이 병원의 보안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야. 네가 입원했다는 걸 아는 사람을 가족 외에 너무 늘리지 마.”

걱정스러운 눈빛과 그것을 숨기려는 것처럼 담담하기 그지없는 낮은 목소리.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윤석호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진제환 씨가 이 일에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데도 강무헌 씨는 그분이 걱정되십니까?」

「예?」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신데요.」

그래. 윤석호의 입장에서는 내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주열 형과 민후가 정보를 교류하지 않는 진제환에게 꺼림칙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유리 조각을 보는 듯 맹목적으로 이쪽만을 향하는 저 눈빛을 보아버린 이상 나는 역시 저 녀석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지금도 믿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세상이 두려워 모든 것을 지레짐작해 마음의 문을 열려 들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 의지로 진제환을 믿고 싶었고,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에 충실하게 보답 받았다. 그건 정말로 엄청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진제환이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 보아온 그 녀석은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같은 남자와의 육체적 교류에 절대로 응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 그래서 나는…….’

그런 네가 걱정되는 것 같다.

윤석호의 말을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마음먹으며 진제환의 뺨에 무심코 손을 올려 보았다. 의아한 얼굴로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던 진제환이 스르르 눈꺼풀을 내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말 잘 듣는 맹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제환이 나를 지키겠다고 걱정하는 것은 무척 고맙다. 하지만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거나 다른 이들과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렇게 말해 봐야 그만둘 놈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수고를 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면 내 쪽에서도 이 녀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걸 찾고 싶었다.

‘정우 형이 나를 습격했던 놈의 처분을 내게 맡기겠다고 했었지, 분명.’

그 녀석들을 때려잡은 게 진제환이니 놈들을 경찰에 넘긴다면 진제환의 정체가 조사 도중 드러날 가능성이 컸다. 처음에는 그저 목격자일 뿐인 정도로 경찰들에게 입을 맞춰 진술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그런 사실이 드러난다면…… 큰일은 아니더라도 제법 귀찮아지는 건 맞겠지.

어차피 그냥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사라지게 해 달라고만 해도 놈들이 두 번 다시 나를 노리지는 않을 듯한 뉘앙스로 말했었으니 그러면 그렇게 처리해 달라고 말하도록 하자.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불법에 가까운 일을 저질러가며 깊이 연루되었다는 걸 밝히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이유 없이 뭔가 얹힌 듯 묵직했던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나는 생긴 것 답지 않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진제환의 뺨을 있는 힘껏 꼬집어 잡아당겨 버렸다.

“……무……ㅎ……?”

네가 아무리 잘나고 잘생긴 놈이라도, 날 위해서라는 이유로 도리어 너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건 싫다. 잘 알아두라고.

“너, 피부 관리 어떻게 하냐.”

“무, 슨…….”

눈을 둥그렇게 뜬 진제환이 잡아당겨지느라 새빨갛게 된 뺨에는 손도 대지 않고, 대체 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자 생각 외로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류진유한테 지지 말고 잘 관리해.”

나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류진유 놈처럼 잘생긴 얼굴이나 관리하며 잘 좀 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진제환의 얼굴에는 더 큰 의문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나는 그날 진제환이 피부 관리를 위해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며 매끈한 얼굴은 그저 타고난 것에 불과하다는 아주 불공평한 사실을 알아냈다. 똑같이 아무것도 안 한 내 피부는 당연히 거칠기 짝이 없고 창백한 낯빛에 다크서클도 심한데, 누군가는 애초에 세수만 해도 저런 얼굴이 유지된다는 게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크고 작은 부상들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럭저럭 몸 건강히 잘 살고 있는 것만 해도 고마우니 나 자신에게 이 이상은 바라지 않는 게 맞겠지.

진제환은 왔을 때처럼 소리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잡았다 놓았던 손의 서늘한 온기가 잠을 자기 위해 누운 이후에도 제법 오랫동안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건 조금 낯설고 이상한 느낌이었다.

다음 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주열 형에게 연락을 했다. 왕만호를 그냥 풀어주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형은 약간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그놈을 자수시켜 보았자 괜히 형들과 주변 사람들이 연루되어 귀찮아질 것 같아 걱정되었다는 추가설명을 듣고 나서는 솔직하게 감동한 목소리로 그러마고 말해 주었다.

[ 아 정말. 형은 걱정 안 해도 괜찮은데. 형 생각해서 그러는 거면 정말 괜찮다, 무헌아! ]

하지만 그 반응을 보고 나니 오히려 왕만호를 풀어주기로 마음먹은 게 훨씬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낮에는 점심을 먹고 나서 옥상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오전 검진을 온 의사가 정말 검사라도 해 보아야 할 것 같은 경이로운 회복력이라며 혀를 내두른 터라, 예상보다 더 빨리 퇴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무척 좋았다.

저번에 이런 식으로 산책하다가 운오를 만났었던가?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평소 앉던 자리로 곧바로 가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운오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뭐 나중에 병실 쪽으로 찾아가 보면 되겠지.’

더 찾는 건 포기하고 처음의 목표였던 그늘진 곳에 위치한 의자 쪽으로 절룩거리며 걸어가고 있을 때, 문득 곁을 스쳐 지나간 어떤 풍경에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

햇빛이 드는 분수대 앞에 앉아 있는 소년.

안색이 창백하고 입술 색이 유난히 새파란 걸 제외하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인상인데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었다. 고작해야 중학생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내가 저런 아이를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한참 더듬고 있었을 때, 소년이 힘겹게 품속에서 작은 약통을 하나 꺼내 떨리는 손으로 약을 입 안에 넣는 것이 보였다.

‘아.’

그걸 보고서야 드디어 그 소년을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랐다.

얼마 전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가 심장발작을 일으킨 소년을 도와 간호사들에게 맡긴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아이가 떨어트린 약통을 주웠지만 돌려줄 틈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었는데 설마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내 기억력도 아직 쓸 만하군.’

혹시나 싶어 환자복 위에 걸친 겉옷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그날 주웠던 약통은 병실에 두고 나왔는지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사이, 뭔가 기척을 느꼈는지 소년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

“저기요. 혹시 발작 일으켰을 때 도와주셨던 분… 맞으세요?”

나를 기억하느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소년은 곧바로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의 파리한 얼굴에 겨우 조금 핏기가 돌았다.

“아… 안녕하세요. 그땐 감사했어요.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못 했네요. 음, 부모님이 다음에 뵈면 꼭 감사 인사를 하라고 했었는데…… 헤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소년이 묘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뭐지.’

“제 이름은 선빈이에요. 이선빈.”

“강무헌.”

내 이름도 말해 주자 소년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강무헌 형이구나. 아. 형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괜찮아.”

허락이 떨어지자 소년은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활달한 말투로 재잘재잘 말을 잇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좀 심심했거든요. 여기선 할 일도 없는데 선생님들은 절대 나가지 말라고 하니까…. 형은 왜 여기 입원했어요? 음…… 혹시 교통사고?”

아직 팔 전체에 붙어 있는 고정밴드와 다리 때문에 그런 추측을 한 건가. 하긴 그 정도 사고가 아니라면 사지와 얼굴을 한 번에 갈릴 일은 거의 없기는 했다. 놀랍게도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일 뿐.

“아니.”

“아니에요?”

“강도를 만났어.”

여태 꾸준히 밀어온 변명을 또 입에 담으려니 좀 그런가 싶었지만 다행히 소년은 곧바로 납득해 주었다.

“그렇구나…… 괜한 걸 물어봤죠. 죄송해요.”

“괜찮아.”

어차피 병원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인사보다 더 자주 하는 대화가 ‘어떻게 입원하게 됐어요?’ 내지는 ‘상태는 좀 어때요?’ 하는 서로 간의 사연 캐기이니 별생각은 없었다.

예전에 장기 입원하고 있었을 때도 그 질문을 얼마나 많이 들었었던가. 선빈이라는 저 소년도 태도를 보면 제법 병원 문턱을 질리도록 많이 넘나든 티가 났다.

“전 뭐… 저번에 보셨겠지만 원래 이쪽에 좀 문제가 있어요. 한동안 괜찮았었는데 또 심해졌다고 입원하라고 하더라구요.”

심장 부근을 가리켜 보이며 한숨을 내쉬는 얼굴에 지루함이 가득했다.

“여기 있으면 게임도 못 하고, 친구들도 못 만나고…. 솔직히 제 상태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퇴원하고 싶어요.”

어쩐지 지금의 내 마음을 완벽하게 읽은 듯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미스트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의 연락도 무척 힘든 입원 생활. 솔직히 말해 사지를 움직이기 힘든 정도였으니 얌전히 입원하고 있었을 뿐, 웬만큼 살 만했다면 절대로 입원 치료는 받지 않았을 것이었다. 애초에 입원이 너무 싫어서 아예 집을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 마련해 버린 게 나다. 저 아이의 심경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무슨 게임을 하는데?”

나는 친밀도가 약간 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미스트요.”

설마 했는데 정말로 미스트였다니.

이런 비율이라면 요즘 게임을 한다는 사람들 중 미스트를 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인 건 아닐까. 유저 수가 엄청나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우연히 만난 아이조차 미스트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괜히 타 게임사에서 윤석호를 이 잡듯 조사하려 드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퀘스트를 하던 도중에 입원하게 되어서 큰일이에요.”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말이 내 생각을 그대로 정지시켰다.

“…퀘스트?”

“어. 혹시 형도 미스트 하세요?”

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우와. 직업은 뭐예요? 이름은? 저 레벨 엄청 높은 격투가예요. 길드도 있으니까 혹시 게임하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아니. 나는…….”

이걸 말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흥분에 차 벌떡 일어났던 아이가 갑자기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푹 쓰러졌다.

“아…….”

나는 황급히 다가가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나마 핏기가 돌았던 뺨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새파랗게 된 입술과 헐떡이는 호흡을 보니 두 번 볼 것도 없이 간호사를 호출해야 할 듯했다.

“헉…… 하아, 헉…….”

내 옷자락을 쥐고 떨고 있는 아이의 환자복 주머니를 뒤지자 익숙한 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책을 나가는 수준조차 위험할 정도의 환자들이 꼭 지참하도록 되어 있는 무선 호출기였다.

호출기의 버튼을 꾹 누르자마자 곧 붉은빛이 반짝이며 호출이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아마 곧 직원들이 침대를 가지고 들이닥칠 터였다.

“가, 흐, 감……사…….”

괴롭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아이는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 했다.

“말하지 마. 괜찮으니까.”

오랜 병원 생활이 이런 데서 도움이 다 되는군.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동안 드디어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를 데려갈 사람들이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선빈 씨!”

“여기입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들이 손을 흔드는 나를 보고 서둘러 뛰어와 아이를 받아 들었다. 뒤이어 따라온 이동식 침대에 눕혀진 아이는 인사 한번 나눌 틈도 없이 순식간에 긴급용 엘리베이터가 숨겨진 기둥 뒤로 사라져 버렸다.

“…….”

저번에도 그렇고, 정말 순식간에 만났다 사라지는 인연이군.

아이에게 별문제가 없기를 바라며 한숨을 내쉰 뒤 나는 산책을 그만두고 병실로 내려가기로 했다.

저 아이와 다음에 또 마주칠 수 있을까. 어쩐지 그 전에 내가 퇴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워졌다.

다시 돌아간 병실은 당연하게도 조용했다. 1인실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푹 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나아져서 적응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가장 고역스러운 문제였다.

윤석호가 휴대용 접속기기를 보내주기 전에는 내 몸 상태를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니…….

“휴우.”

게임을 하지 않는 하루가 이렇게 길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탁자 위에 올려놓은 휴대용 접속기기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핏 하는 소리와 함께 새 메시지가 왔다는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혹시나 싶어 발신인을 보니 역시나 류진유였다.

- 형. 일어나 있어요?

이 녀석, 진짜로 인기 모델이라는 게 사실일까.

내 눈으로 증거를 보았고, 충분히 납득 가는 외모를 가졌음에도 이렇게 일없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 그런데.

- 미스트에 난리 난 건 봤어요?

늘 그렇듯 나는 재미없고 류진유 혼자서만 즐거워하는 답이나 돌아올 줄 알았는데, 돌아온 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미스트……?”

난리 날 만한 게 뭐가 있지. 새로운 동영상이나 업데이트가 나온 정도의 일이면 이런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을 테고……. 그 외에는 상상력이 부족한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 미스트 관련 커뮤니티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한번 보세요. 그러면 저는 바빠서 이만.

“…….”

내 기억에 개인 연락처가 아닌 병원 쪽으로 직접 보내는 메시지는 환자의 가족이 아닌 한 용건이 아주 급할 때에만 써야 하고, 그게 아니면 아예 전달되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혹시 그사이 규칙이 바뀌기라도 했나.

어이가 없어 류진유가 보낸 메시지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지만 그 메시지 속에서 아주 다급하고 간절해 보이는 용건의 기미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간호사들에게 특정인의 연락을 차단하는 방법을 나중에 꼭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 나는 침대 옆에 붙은 버튼을 조작해 눈앞에 홀로그램 컴퓨터 화면을 띄웠다. 이전에도 몇 번 들어간 적이 있는 미스트베이 월드 커뮤니티 웹 페이지는 곧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들어간다.”

곧 내 명령에 따라 떠오른 익숙한 메인 화면 속에 입체적으로 누를 수 있게 튀어나온 메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지사항 옆, 오늘의 인기 게시물 제목들이 적혀 있는 코너를 향해 눈을 돌렸다.

정확히는 내가 보려 하지 않아도 워낙 그쪽에 적힌 글들이 크게 부풀어 있어 강제로 눈에 들어왔다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이 커뮤니티의 메인 페이지는 실시간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고 있는 메뉴와 글들을 이런 식으로 크게 확대해 입체적으로 보여주는데, 지금 저 부분이 가장 크게 보인다는 건 즉 실시간으로 엄청난 화제가 그쪽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손을 들어 해당 코너를 누르자 화면이 한 바퀴 돌며 게시판으로 바뀌었다.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는 오늘의 히트 게시판 제일 상단에 붙어 있는 글 제목은 내 기억 속에 익숙한 이름을 담고 있었다.

[ 페일 나이츠, 전쟁 선포? ]

페일 나이츠라면 시저의 길드인데… 전쟁을 선포했다고?

‘이게 무슨…….’

게시판의 다른 글들도 전쟁이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이야기로 뒤덮인 것으로 볼 때 류진유가 말한 난리가 아무래도 이걸 가리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서둘러 그 글을 눌러 띄워보았다.

[ 페일 나이츠, 전쟁 선포? ]

키잘키르스텀에서 활동하는 마법상점 젤리맛포도입니다.

중앙 광장에서 노점을 펴고 있는데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처음 보는 이상한 몬스터였어요.... 이름은 모르겠네요.ㅠㅠ

그리고 머리 위에 페일 나이츠 길드라고 뜬 사람들이 그 몬스터들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마구 PK해 대는데도 전혀 경고 표시가 뜨지 않아서 처음엔 이벤트인가 했습니다;;

왜 이러냐고 물었더니 어떤 유저가 전쟁 선포라고 말하고는 저를 죽였어요. 신기하게도 곧바로 그 자리에서 재접속이 되지 않고 근처 다른 도시에 있는 루그 신전에서 재접속되더라구요?

NPC에게 물어보니 어둠의 기운이 내려오고 있다는 소리만 하고ㅠㅠ

저처럼 죽은 사람들은 전부 거기에서 재접속된 것 같아요.

아무래도 보통 유저간 PK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게 정말 전쟁일까요?????

처음 보는 몬스터들은 대체 뭐였을까요........

아시는 분들께선 좀 더 많은 정보 부탁드립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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