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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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그대. 내 말 들려? ]

슈페리어가 정신을 차린 것은 혼자 먼저 접속해 여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남는 시간을 이용해 슈페리어의 서재에라도 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머릿속에서 들려온 희미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허리춤의 슈페리어 막대기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불이 꺼져 있었던 막대기에서 드디어 빛이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일단 심호흡을 몇 번 한 다음 막대기를 향해 말을 걸었다.

“슈페리어.”

[ 어쩐지 죽다 살아난 기분이야. 난 이미 죽었는데 이제 와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

오랜만에 깨어나서도 슈페리어의 입담은 여전했다.

그래도 그 말을 들으니 슈페리어의 귀환 아닌 귀환이 실감 나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동안 슈페리어의 부재를 상당히 느끼기도 했고, 돌아왔을 때 패밀리어 매가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던 데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전혀 반응이 없어 뭔가 잘못된 게 아닌지 불안했던 참이었다.

설마 내가 이 막대기 슈페리어를 대상으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대체 그동안 뭘 했던 거야?”

일단 슈페리어가 깨어나면 반드시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부터 서둘러 먼저 질문했다. 슈페리어가 매에 정신을 싣고 사라진 후 2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대체 무엇을 했기에 그 슈페리어가 그런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것일까.

[ 많은 걸 했지. ]

슈페리어가 선문답 같은 소리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정말 많은 걸 말이야……. ]

“그러니까 뭘 말이야?”

[ 내가 없는 동안 마법이랑 검술 연습은 좀 많이 했어? ]

슈페리어가 딴소리를 하며 아픈 곳을 푹 찔렀다. 그가 사라진 동안 나는 퀘스트를 해결하는 데 바빠 마법 연습과 검술 연습을 거의 하지 못했다.

화제를 돌리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슈페리어가 은근한 기색으로 다시 말을 걸었다.

[ 설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지? ]

“……아냐.”

사실은 그게 맞았지만 일단 아니라고 주장해 보기로 했다. 어릴 때 검도를 하면서는 단 한 번도 사부님이 시켰던 연습을 게을리했던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왠지 양심이 아파왔다.

[ 그래? 그러면 지금 당장 정신세계에서 테스트해 봐도 되겠군그래? ]

“…….”

[ 지금 바로 들어와. ]

왠지 내가 판 함정에 내가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동안 장소가 마땅치 않아 연습하지 못했던 것도 있어서인지 제안이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워 슈페리어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주문을 오랜만에 외쳤다.

“블랙 켈베로스.”

훅 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지며 눈앞이 검게 점멸했다.

“…이렇게 보는 것도 오랜만이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짧은 머리칼에 코에서 뺨까지 걸친 긴 흉터가 있는 슈페리어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면서 피식 웃음소리를 흘렸다.

“뭘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 보듯이 봐?”

“아니…….”

처음 보는 건 물론 아니지만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서 괜스레 뭔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곳의 풍경은 평소와 똑같이 푸른 하늘에 나무들이 한가롭게 흔들리는 넓은 초원 그대로였다.

“그런데 정말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얼굴도 본 김에 다시 한 번 슈페리어에게 묻자 슈페리어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시선을 슬그머니 돌리는 것이 보였다.

“거참 끈질기기는…….”

“얘기를 끝까지 안 해 줄 셈이 아니면 그냥 빨리 말해.”

“그대는 너무 배려를 몰라. 죽다 살아난 사람 앞에서 그렇게 닦달을 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이런 어이없는 말을 해대는 걸 보면 이제 완전히 회복을 하기는 한 모양인데 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답답했다.

추궁하듯 슈페리어를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그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손안에서 빛의 기둥처럼 생긴 검을 뽑아내어 내 앞에 섰다.

“그러면 시험이나 해볼 겸 대련 먼저 한 판 하자고. 하고 나서 말해 줄게.”

기어이 이럴 셈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검을 뽑아 든 슈페리어의 표정이 왠지 평소와 다른 진지함을 띤 것 같아 뭔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좋아.”

결국 나는 모든 의문은 뒤로 미뤄둔 채 허리에 찬 막대기를 뽑아 마력을 주입했다.

- 우웅웅웅!

머릿속으로 몸속에 흐르는 힘을 막대기와 그 위로 흘려 넣는 이미지를 떠올리자마자 전신과 팔에서 무언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아찔한 기분이 느껴졌다. 손에 쥔 막대기 위로 투명한 마력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검만으로 싸우는 건 금지. 반드시 마 ‧ 라키안 2식을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싸워야 해. 나도 그럴 테니까.”

“음…….”

마 ‧ 라키안 검술 제2식을 처음 익힌 이후 많은 연습을 해 보지 못했었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그보다는 역시 흥분이 더 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나는 서로 실력을 겨룰 수 있는 대련이나 전투가 정말 좋았으니까.

“이번에도 역시 첫 공격 3수를 양보해 줄게. 와 봐!”

자신만만하게 검을 세우고 있는 슈페리어를 향해 나는 머릿속에서 마법을 쓸 때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렸다.

“소드 오브 파이어!”

- 화르르르르!

머릿속으로 파이어 볼 같은 불꽃을 검신에 덧씌우는 상상을 하며 검을 휘두르자 이미지에 충실하게 불꽃이 생겨나 검 전체에 옮겨붙었다.

“그렇다면 나는 소드 오브 프로즌으로.”

슈페리어가 기다렸다는 듯 반대 속성의 이름을 말하자 슈페리어가 든 빛의 검에서 새파란 빛이 번쩍 터져 나오면서 색이 푸른색으로 변했다. 직접적으로 불꽃이 검에 옮겨붙은 것처럼 보이는 나와는 다른 이미지화였다.

“하앗!”

힘껏 검을 내리치자 두 개의 검이 맞부딪치며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팔과 손에 찢어질 것 같은 반발력이 느껴졌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이어서 몸을 틀어 옆으로 비스듬히 칼날을 흘려 공격해 보려 했지만 슈페리어는 어렵지 않게 내 공격을 따라오면서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한 번 더 내리쳐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연습 전혀 안 했어?”

슈페리어가 표정을 구기며 질문했다.

“이전이랑 똑같잖아. 발전이 없다고!”

“소드 오브 라이트닝!”

슈페리어가 말하는 동안 나는 재빠르게 머릿속의 이미지와 속성을 뒤바꾸었다. 칼날을 감싸고 있던 불이 사그라지면서 그 자리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전류가 짜릿하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

검날을 서로 맞대고 있던 상태에서 빠르게 속성을 전환하자 슈페리어의 얼음 속성 검에 전류가 옮겨 흘렀는지 두 개의 검이 일제히 번쩍이면서 폭발하는 소리가 방금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났다.

“큭…….”

슈페리어가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며 입술을 비죽 올리는 것이 보였다.

“호, 이건 조금 짜릿했어.”

“방심하지 말라고.”

경고하듯 목소리를 낮춰 말해 주자 슈페리어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도 본격적으로 가지.”

슈페리어는 아무 스킬명도 외치지 않았지만 순간 그가 든 검의 색이 투명에 가까운 색으로 휙 바뀌었다. 소드 오브 윈드인가…?

나는 일단 라이트닝 속성을 유지한 채 그대로 맞붙기로 했다. 슈페리어가 뛰어올라 내리치는 것을 옆으로 물러서서 힘을 흘려내며 받아넘기자 두 개의 검날이 서로 스치면서 전기가 튀는 듯한 미약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파츠츠츠츠…….

이후에도 슈페리어는 말없이 검의 속성을 바꿔가며 나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갑자기 색만 바뀌는 검을 보며 상대하려니 당황스러웠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본능적으로 그것의 종류를 파악해 한결 쉽게 맞부딪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는 워낙 빠르게 속성 교환이 오고 간 나머지 한 번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나 전기 같은 것이 마구 튀어 주변의 나무들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였다.

“역시 그대는 반사신경이 좋은걸.”

슈페리어가 검을 휘두르면서 칭찬을 날렸다.

“속성을 사용하는 방법은 하품 나올 만큼 단순하지만, 그것을 뛰어난 검술과 반사신경으로 커버하고 있어. 그 점은 칭찬해 주지.”

뭐, 하품이 나올 만큼 단순하다고?

순간 울컥했지만 나는 아직도 속성을 바꿀 때마다 스킬명을 외쳐야 하는 데 비해 손쉽고 빠르게 속성을 바꿔가면서 잘 파악이 가지 않는 기교까지 부리는 슈페리어보다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 퍼펑!

그대로 몇 번의 검을 더 주고받고 있을 때, 슈페리어가 다른 속성을 쓰려는 듯하다 마지막 순간 갑자기 나와 같은 불 속성의 검을 사용해 부딪치면서 지금까지 중 가장 큰 반발이 일어났다.

“으윽……!”

예상보다 큰 반탄력 탓에 몸이 뒤로 휙 젖혀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슈페리어의 검이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내 검을 강하게 쳐내 버렸다.

- 펑!!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런 생각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슈페리어는 한 바퀴 검을 돌려 어느새 내 목 끝에 검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자, 그대가 졌어.”

“……그래.”

여태 검이든 마법이든 대련을 하면 슈페리어를 이긴 적이 한 번도 없기는 했지만, 이번은 오랜만에 했던 데다 중반까지는 나름대로 잘 상대하고 있다고 여겼었기에 아쉬움이 매우 컸다.

분한 점은 그래도 지금껏 내 손에 쥔 검을 놓쳤던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검을 놓치면서 대련의 승패가 결정되었다는 것이었다.

대체 마지막의 그건 뭐였을까.

나는 날아간 슈페리어 막대기를 주우러 가면서 마지막 부분을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역시 확실하게 물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왔어?”

“마지막 그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거드름 피우는 태도로 자리에 누워 막대기를 주워 온 나를 맞이하는 슈페리어에게서 날 놀리려는 의도가 매우 들여다보여 그냥 외면하고 싶어졌지만, 지금 아쉬운 쪽은 나였다.

“아직도 파악 못 한 거야? 흐흥. 난 말 그대로 속성 바꾸기밖엔 쓰지 않았어. 어려운 걸 한 것도 아닌데 이래서야 어떻게 마물 놈들을 물리칠 수 있겠어?”

“…….”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궁금하지? 궁금해 죽겠지?”

한참 동안이나 약을 올리던 슈페리어가 말이 없는 나를 보고는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 앉았다.

“반응을 좀 재미있게 해 달라고. 가르쳐 주는 재미가 없잖아.”

“그래서 어떻게 한 건데.”

슈페리어가 다시 한 번 손안에서 빛의 검을 만들어내어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눈앞에 대고 보여주었다.

“소드 오브 윈드와 소드 오브 그라비티의 차이를 이용한 거야.”

소드 오브 윈드와 그라비티……?

“그대는 그 두 개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뭐라고 생각하냐니…… 직접적으로 그렇게 질문을 들으니 갑자기 생각이 잘 나지 않았지만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내가 했던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대답하려 노력했다.

“소드 오브 윈드는 바람 속성이라 검을 움직일 때 좀 더 쉽고 빠르게 움직이도록 할 수 있고 소드 오브 그라비티는 중력의 영향을 받아 힘을 주지 않아도 충분히 무거운 검으로 만들어 내려칠 수 있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것도 맞지. 틀리지 않아.”

슈페리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의 속성을 바꾸어 투명한 색깔로 만들었다.

“그러면 이건 무슨 속성 같아?”

“소드 오브 윈드.”

아까 전에 슈페리어를 상대하면서 엄청나게 많이 보았던 색깔이었기 때문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슈페리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이건 소드 오브 그라비티야.”

그럴 리가……. 소드 오브 그라비티라고? 나는 순간 말문이 막힌 채 슈페리어를 바라보았다.

검도 투명한 색이었고, 저런 색이 될 때마다 분명 속도가 평소보다 빨라졌었기에 틀림없이 소드 오브 윈드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소드 오브 윈드라면 소드 오브 그라비티는 무슨 색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슈페리어의 말에 납득했다. 아까는 정신없이 오가는 격전을 하느라 무작정 투명한 색은 소드 오브 윈드라고만 파악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슈페리어의 소드 오브 그라비티는 그러면 무슨 색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 검의 경우 소드 오브 윈드는 눈에 띄게 검신에 바람이 휘감기면서 검 자체가 아지랑이처럼 떨려 보이고, 소드 오브 그라비티는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큰 차이가 있어 슈페리어 쪽도 막연히 비슷하리라 여겼던 게 패인이었다.

“내 경우 소드 오브 윈드와 그라비티는 둘 다 투명한 색이야. 육안으로 차이를 구별할 수 없어. 소드 오브 그라비티는 말 그대로 검이 받고 있는 무게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거야. 더 가볍게도 할 수 있고 더 무겁게도 할 수 있지. 그대는 무겁게만 쓰는 것 같지만 나는 반대로 계속해서 가볍게 만들어 사용했어. 그러면 일시적으로 소드 오브 윈드를 쓴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거지.”

그런 거였다니…….

슈페리어의 해설에 겨우 내가 어떻게 당한 것인지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계속 소드 오브 그라비티만 써서 윈드라고 생각하게 만든 다음 가장 반발력이 큰 같은 속성의 검을 써서 반발력을 주어 시간을 버는 거지. 그 사이에 그대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소드 오브 그라비티를 사용한 정도의 속도로만 검을 쓸 것이라 여기고 거기에 대비한 반격을 경험에 맞추어 준비했겠지만…… 쨘! 틀렸습니다!”

슈페리어가 양손을 벌리며 웃었다.

“마지막 일격이 바로 진짜 소드 오브 윈드! 가벼운 소드 오브 그라비티 상태보다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공격할 수 있다!…. 뭐 그런 거야.”

해설을 모두 듣고 나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슈페리어가 아까 싸우면서 했던 말대로 나는 확실히 슈페리어에 비해 속성을 사용하는 이해가 매우 떨어진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정말이지 멋지게도 당했군…….

이전에도 슈페리어와 한 번 가볍게 2식을 사용해 대련해 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슈페리어가 친절히 모든 속성을 말해 주면서 바꾸었던 데다 속도도 일정하게 느려서 어떤 것이 무슨 속성인지 판단하는 데에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었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그렇게 상냥한 사람은 없다. 슈페리어가 지금 나에게 알려준 건 바로 그런 경각심이었다.

가라앉은 내 표정을 보며 슈페리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무 풀 죽지 마. 나 같은 천재하고 대련해서 잠깐이라도 버티는 게 쉬운 줄 알아? 속성의 문제를 빼면 사실 나보다 그대가 더 기초 검술을 잘 쓰니 속성 쪽 응용력만 좀 더 기르면 무섭게 발전할 수 있을 거야. 말하자면 실전 부족의 문제지.”

실전 부족…… 나는 그 말을 되뇌며 그간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요즘 들어서는 던전을 돌아다닌 적도 거의 없었고 몬스터를 만나도 어중간하게 약한 필드 몬스터들만 만난 터라 힘들여 사냥을 해본 적이 없었다. 즉 위기 속에서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던 건데.

나는 뒤늦게 후회하며 다음부터는 어디를 가든 고렙들이 다니는 던전이 있는 곳이라고 하면 꼭 거쳐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마워.”

솔직하게 고맙다고 인사하자 슈페리어가 손을 내저으며 도로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됐어 됐어.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몸 좀 푼 거니까 닭살 돋게 그런 말 하지 마.”

“그래. 그러면 이제 대련도 했으니까 그동안 있었던 일이나 말해 줘.”

그 옆에 앉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 줄 것을 요구하자 슈페리어가 어휴 하고 지겹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짜, 질기기가 무슨 오우거 힘줄 같네!”

자기가 대련이 끝나면 말하겠다고 해 놓고 되레 성질을 내다니.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슈페리어도 양심에 조금 가책을 느꼈는지 시선을 피해 뒹굴 돌아누웠다.

“왜 그렇게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건데?”

“이야기하기 싫은 건 아냐. ……그냥, 말해도 못 믿을 것 같아서 그렇지.”

못 믿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당장 슈페리어가 사실은 여자였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슈페리어가 냉혈한이라느니 뭐라느니 하며 욕을 중얼거릴 것 같았기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침묵을 지키며 기다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여전히 돌아누운 슈페리어 쪽에서 나직하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간 곳은 북쪽이었어.”

나는 드디어 슈페리어가 입을 열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북쪽에 무엇이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려 보았다.

“북쪽이라면…… 키잘키르스텀?”

“그보다 더 위.”

“…산맥?”

슈페리어는 대답 없이 긍정을 표시했다.

“예상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어. 솔직히 말해서 아니길 바랐었는데…….”

흐린 말끝 뒤로 긴 한숨이 따라붙었다.

“어둠의 기운이 아주 강해. 모든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고 있는 수준이었어. 그래서 위로, 더 위로 올라갔지.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진원지를 찾아서 말이야. 그랬더니 내 눈앞에 무엇이 나타났을지 예측이나 할 수 있겠어?”

“…….”

“신전이야.”

슈페리어가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분명 없앴는데…… 없앴을 터인데, 마신의 신전이 예전 모습 그대로 그곳에 다시 세워져 있었어. 어둠의 기운은 그곳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던 거야.”

매의 정신에 동화한 슈페리어는 불길함을 느끼고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매를 달래 어떻게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 들어가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타난 녀석이 날 공격했어. 그 녀석이 두르고 있는 어둠의 기운이 너무 짙어서 보이는 것도 없고, 매의 몸으로는 뭔가 반격을 할 수도 없어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지. 다친 몸으로 간신히 내가 의지를 불어넣어 가면서 도망치고 있다가 마침 좋은 타이밍에 그대가 소환해 주는 바람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아마 하루만 더 늦었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르지.”

“공격이라니……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둠의 기운이 넘치는 인간이었어. 이종족이나 마물이 아니었으니 인간이 맞겠지.”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왠지 슈페리어를 공격한 인간이 시저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니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어둠의 기운이었어…… 어째서 지금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슈페리어가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풀을 쥐어뜯어 공중에 흩뿌렸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마신의 신전을 다시 세운 거야. 어떻게 사람들의 시선에서 몸을 숨겼는지는 몰라도 제물도 착실히 바쳤겠지.”

“…….”

“그 기운으로 봐서는 마신이 부활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농담 같지? 진짜야.”

“별로 농담 같지 않은데.”

다른 것은 몰라도 마신의 기사의 후예인 시저가 멀쩡히 살아서 잘 돌아다니고 있는 판에 마신이 부활한다는 말이 농담으로 들릴 리 없었다. 하지만 슈페리어는 그런 정보를 알 리 없을 테니 이 상황이 그저 충격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대체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슈페리어가 여전히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누운 채 중얼거렸다.

“계속 생각해 봤지만 역시 알 수가 없어. 대륙을 멸망시킬 뻔했던 마신을 목숨을 걸고 간신히 봉인시켰는데, 누가 대체 어떤 목적을 가졌기에 그걸 다시 부활시키고 싶어 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안 가더라고.”

담담한 말투였지만 화를 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절망과 분노, 슬픔 같은 것이 그 말 속에서 혼재되어 느껴졌다.

슈페리어라면 그럴 만도 했다. 말 그대로 인생과 목숨과 몸까지,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쳐 마신을 봉인한 입장에서 500년 동안 자신이 지켜낸 평화가 다시 깨질 위기라는 사실이 얼마나 절망스럽고 분노가 차오르겠는가.

“그대는 그 녀석들이 얼마나 잔악하고 무서운지 상상도 못 할 거야. 어둠을 하나 없애기 위해서는 그 두 배만큼의 빛이 필요하단 사실도.”

슈페리어가 그렇게 말하며 겨우 다시 몸을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활활 불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선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때가 오면 그대도 그 녀석들을 상대해야겠지. 하지만 그때도 지금과 같은 실력이어서는 조금도 희망을 가질 수 없어. 나는 이번에 그걸 느끼고 돌아왔어.”

슈페리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제야 슈페리어가 왜 자꾸 연습은 했는지 궁금해하며 대련을 하자고 말했는지 이해했다. 답은 불안 때문이었다.

슈페리어가 파악한 적들에 비해 내 실력이 너무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리 없었을 터였다. 마냥 말을 돌리려고 연습에 관해 묻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슈페리어에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내겐 연습이 더 필요하기는 했다.

서클 레벨이 올라갈수록 대상이 광범위해지는 마법들이 대부분이니 바깥쪽에서는 마음 놓고 연습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함부로 높은 서클의 마법을 썼다가 어떤 참사가 일어나는지는 이미 인페르노를 처음 썼던 때를 통해 깨달은 바가 많았다.

만약 슈페리어가 이런 장소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연습할 장소가 없어 던전이나 아무도 없는 필드를 떠돌아다니며 홀로 연습을 하고 돌아오는 삶을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는 지금 여기가 높은 서클의 마법과 마 ‧ 라키안 검술을 연습하기에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기는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장소 핑계를 대서는 이번처럼 슈페리어가 사라진다거나 하는 경우 연습하기 힘들 테니 뭔가 수를 내야겠지. 슈페리어가 제공해 준 연습장이 편안하기는 했지만 영원히 이곳을 쓸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것과 관련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슈페리어가 다시 한 번 더 대련을 하자고 하는 말에 응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대련을 열심히 해 준 적이 없었던 슈페리어였는데 하루에 두 번이나 먼저 요청한 걸 보면 그가 키자르 산맥에 가서 받은 충격의 정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슈페리어가 하자는 것은 최대한 토를 달지 않고 따르기로 마음먹으며 슈페리어 막대기에 마력을 불어넣어 검을 만들었다. 이번 대련이 끝나고 나면 왜 졌는지 다시 한 번 복기한 다음 7서클의 새로운 마법들을 오랜만에 써 보며 감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 같았다.

할 일이 많고 배울 것은 더 많다는 사실에 오히려 삶의 의욕이 늘어나는 건 왤까. 이 순간 나는 슈페리어가 무사히 돌아와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카르야. 무슨 가수면 상태에 그렇게 오래 빠져 있냐?”

“어제 잠을 못 자기라도 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정신세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보인 것은 키온 형과 루크레이신의 의아한 얼굴들이었다. 내가 실은 가수면 상태가 아니라 시간이 더 느린 곳에서 마법 연습을 하고 돌아왔다고 말하면 두 사람 다 어떤 표정이 될까 싶었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몸 상태부터 체크해 보기로 했다.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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