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권-#(1) (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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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끝자락의 바닷속에 잠겨 있는 거대한 괴물의 정체에 대해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으십니까?

티지엔 할머니에게 그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려던 내 계획은 키온 형의 만류로 일단 중지되었다.

“아무리 호감도가 100에 가깝다고는 해도 신중해야 해.”

나는 충분히 신중하게 물어보려고 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형의 표정이 워낙 진지하고 험악해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혹시 그게 괴물이 아니라 이 마을에서는 중요한…… 뭐… 신이라든가…… 그런 걸로 모시는 거면 어떻게 하려고? 괴물이라고 하는 순간 바로 호감도가 0이 되어버릴 거야.”

“…….”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

루크레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 맡겨.”

날이 밝자마자 티지엔 할머니의 집으로 기세 좋게 찾아간 형은 한참 동안 날씨 이야기나 손자 사치 이야기 등을 하며 분위기를 돋운 뒤 거의 돌아가기 직전에서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 맞다. 그런데, 어젯밤 한 번 더 배를 보러 갔다가 신기한 걸 봤지 뭡니까.”

“신기한 것 말이오?”

“네. 달빛에 비친 바닷속에서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거대한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이 대륙 곳곳을 여행했지만 그런 것은 처음이었죠. 혹시 티지엔 할머니도 그것에 대해 알고 계신가 해서요.”

나는 형의 화술에 새삼 감탄했다. 방금 저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이야기의 방향을 좋은 쪽으로 이끌려는 의지가 명확히 전해져 왔다. 마치 크란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다음 나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제법인데요.”

루크레이신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원래대로라면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방금 전 한 생각 때문에 제대로 반응할 수가 없었다.

크란. 정확히는 민후의 마지막으로 보았던 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던 복잡한 얼굴은 그간 머릿속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것을 보았소? 눈이 아주 좋은 분이구려.”

나는 겨우 상념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티지엔 할머니가 순수하게 놀라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물의 수호신이오. 아주 옛날부터 마을 앞바다 속에 있었지.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보통 안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강하고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수호신을 잘 볼 수 있다고 들었소. 나는 본 적이 없지만 말이오…….”

그녀는 그것이 단지 수호신일 뿐 뭔가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거나 영향을 미치는 일을 일으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자신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그 수호신을 보고 싶다는 말을 끝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고했다.

“형의 말대로 괴물이라고 했다가는 아주 큰일 날 뻔했네요.”

도로 바다로 향하면서 루크레이신이 친절히 나의 실수를 다시 헤집는 발언을 했다.

“수호신이라니. 누가 봐도 그건 용이었는데 말이에요.”

뭐… 전투나 마법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고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아왔을 NPC의 발언이니 용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럴싸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마 그 용이 카르의 퀘스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겠지.”

키온 형의 명쾌한 해답에 나 또한 동의했다. 지도상의 퀘스트지가 가리키는 위치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데다 무려 용씩이나 되니 아마 그 용의 전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그러나 그런 내 의견을 들은 형과 루크레이신의 표정은 뜻밖에도 약간 심각해졌다.

“맞는 말이긴 한데 말야……. 그 용을 보려면 저 바닷속으로 잠수해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 카르야?”

“물속으로 들어가 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는데, 안에서 숨은 어떻게 쉬죠?”

“…….”

루크레이신의 현실적이면서도 타당한 질문을 듣자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지금까지 바닷속에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상이라면 이곳저곳 많은 곳을 다녀 경험치가 나름대로 쌓여 있었지만 장소가 물속으로 바뀐다면……?

혹시나 바닷속에 몬스터가 있다면 어떻게 싸워야 할까. 루크레이신의 말대로 숨은 어떻게 쉬면서 버텨야 하지? 다른 유저들 중에는 여태 이런 사례가 없었을까.

그제야 나는 이번 퀘스트가 얼마나 녹록지 않은지 찬물을 맞은 듯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아마 이번 퀘스트의 난관은 물속으로 어떻게 들어가느냐가 될 것 같아.”

나의 인정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난감해하고 있는 건 둘 다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물속은 나도 가본 적이 없어. 음… 잠깐 잠수만 하는 게 아니라 혹시 저 안에 던전 같은 게 있다면, 재수 없으면 몇 시간 넘게 물속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이거 정말 큰일인데.”

“주먹이나 검은 그렇다 치지만 마법이 물속에서 얼마나 통할지 모르는 것도 문제죠. 예를 들면 불 마법 같은 거요.”

주력으로 쓰는 마법이 불 계열인 나는 루크레이신의 말이 타당하다 생각했다. 키온 형 또한 드물게 루크레이신의 말에 화를 전혀 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 가서 낮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정도만 먼저 살펴보자.”

우리는 반이 둥둥 떠 있는 빈 배를 지나 어제 용의 일부를 보았던 곳까지 계속해서 걸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여기에 거의 안 오다 보니 돌아다니기는 참 편했다.

“저쪽이었지, 분명.”

앞장선 키온 형의 뒤를 따라 바위무더기가 쌓여 있는 육지의 끝으로 향하자 밤이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맑고 깨끗한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색으로 너울대는 바다는 날씨가 좋아서인지 바닥마저 보일 것 같을 정도로 투명했다.

이 정도로 맑다면 용의 신체가 정확히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며 다가간 우리들은, 잠시 후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당황하고 말았다.

“…없잖아?”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이게 어떻게 된 거람?”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아도 어젯밤에는 분명 있었던 용 비늘과 거대한 신체 일부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았다.

“우리가 단체로 꿈을 꿨나? 그건 아닐 것 아냐.”

키온 형이 돌을 던진다, 어쩐다 하는 난리 끝에 바닷가에 주저앉아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뭔가 그걸 보려면 조건이 걸려 있는 게 아닐까 싶긴 한데 대체 뭐지?”

과연 가장 먼저 퀘스트를 끝내며 수많은 일들을 헤쳐나와서인지 형의 재빠른 판단은 매우 그럴싸했다.

“밤에만 보인다거나 하는 건 아닐까 싶네요. 뭐 실험해 봐야 알겠지만요.”

루크레이신이 어깨를 으쓱하며 마찬가지로 그럴싸한 가설을 내놓았다.

“밤에만 보이는 건 아닐 것 같아. 그런 거였으면 티지엔 할머니가 좀 더 힌트를 주지 않았을까 싶지만….”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키온 형이 고민에 빠진 것을 보며 나도 생각에 잠겼다.

형의 말도 옳아 보였고 루크레이신의 말도 옳게 느껴졌다. 내게 가장 좋은 상황이 되려면 형의 말대로 조건이 걸려 있긴 하되 밤에만 보이는 것은 아닐 쪽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정확히 뭐가 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밤에만 보여도 문제는 문제다. 제아무리 마법으로 앞을 밝힌다 해도 어제 같은 짙은 밤에는 효과가 적은 법이었다.

만약 밤에만 용을 볼 수 있어서 우리도 밤중에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어떻게 앞을 계속 볼 수 있게 한단 말인가. 아직 물 안에서 앞을 볼 마법을 제대로 찾지 못한 지금 상황에서는 상당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일단 지금은 이 이상 확인할 수 없는 게 확실한 것 같으니 돌아가자.”

나는 생각에 잠겨 있는 두 사람을 불러 일으켜 세웠다.

“아니면 여기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도 되고.”

“여기서 잠깐 그대로 접속을 종료하거나 가수면 상태로 만들었다가 이따 다시 만나러 와도 되죠.”

루크레이신은 그렇게 말했지만 안전한 객실이 아닌 야외에서 가수면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내 기준에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그럴 거면 여관으로 돌아가자고 강하게 말했다.

결국 루크레이신이 내 말에 한발 물러서서 동의했고, 우리는 밖으로 나온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도로 여관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우리는 각자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용의 신체와 물 안에서 버티는 방법들에 대한 지식을 알아내기로 했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의 낮과 밤이 몇 번이 바뀌어도 뭔가 그럴싸한 새 정보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NPC들은 티지엔 할머니 이상으로 그 ‘물의 수호신’이라는 것에 대해 무지했고 밖에서 미스트 커뮤니티를 돌며 찾아본 정보에도 이렇다 할 것이 별로 없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온갖 삽질을 거쳐 알아낸 건 다음과 같았다.

“첫째. 그 용은 밤에만 보인다. 하지만 불빛이 미약해서 얼마나 큰 건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어.”

키온 형이 정리를 하기 위해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거렸다.

“두 번째. 바닷속에서 버티는 방법에 대해. 다른 유저들은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는 아이템을 쓰거나, 잠수 스킬을 단련한다고 했죠. 하지만 잠수 스킬을 아무리 열심히 단련해 봐야 물속에서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해요. 쓸모가 없죠.”

루크레이신이 그 뒤를 이어 말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세 번째. 물속에서 마법을 쓸 수는 있다. 하지만 불 계열은 확실히 무리였어.”

그간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다. 아주 약한 위력으로 해서 계열별로 마법을 써 보았는데, 불 계열 마법은 수면에 닿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사그라졌다. 반면 전기 계열 마법은 물을 타고 너무 힘이 잘 번져 혹시나 용의 신체에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크게 써 보지도 못했다.

밤에 용의 신체를 볼 때에도 파이어 볼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물 안에 오랫동안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해도 과연 앞을 볼 수나 있을지 문제였다.

“총체적 난국일세. 앞을 못 보면 밤바다에 들어가도 소용이 없고, 그렇다고 시야가 확보된 낮에는 들어갈 수가 없고. 뭘 어쩌라는 거야?”

키온 형이 이를 갈며 침대 위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 쉬는 방법이나 아이템에 대해서 NPC들에게 물어본 적은 없었죠, 저희?”

루크레이신이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아마 내 기억에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았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루크레이신이 흐음 하고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물어볼까요.”

“누구에게?”

“사치인가 그 사람이요. 안 해 보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확실히 뭔가 진전이 없으니 루크레이신의 말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물어보고 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키온 형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저 사기꾼 자식이….’를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뭉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치에게 묻는 것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버리지 말아야 할 때였다.

“사치.”

“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사치는 다행히 제2마을 어귀에서 금방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우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활짝 미소 지었다.

“잠시 궁금한 게 있어서 왔는데, 지금 물어보아도 됩니까? 별건 아니고요.”

키온 형의 질문에 사치가 눈을 끔벅거리더니 친구들을 한 번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네. 물론이죠. 여기서 바로 물어보시게요?”

“네. 옆의 분들이 들어도 괜찮은 질문입니다. 오히려 듣고 도움을 주신다면 더 감사하죠.”

“그렇군요. 음. 무슨 일이신지…….”

“하이류 마을에서 나고 자라신 여러분은 어릴 때부터 바다에서 자주 놀지 않았습니까? 혹시 바다에 오랫동안 잠수할 수 있는 방법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을까 해서요.”

형의 말에 사치와 친구들은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들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을 때, 사치가 대표로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바다 말이죠.”

“네.”

“말씀대로 저희 마을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놀 만한 곳이 바닷가밖에 없긴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처럼 저희는 바다에 들어가 놀았던 적은 없습니다.”

“바다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반문하자 사치의 옆에 있던 마을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해 주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바닷일을 하지 않아요. 아시겠지만 디란델나이트를 캐는 게 주요 일이거든요. 그래서 바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도 있고, 마을 앞바다는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절대 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에도 바닷가에서 공놀이를 하고 논 적은 있지만 물놀이를 한 적은 없어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우리의 표정이 매우 이상해졌던 모양이었다. 사치가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선량한 미소와 함께 설명을 이어나갔다.

“믿지 못하시겠다는 표정이시네요. 저주받은 바다란 말은 정말입니다. 저 바다에는 배를 띄워도 배가 움직이지 않고, 무엇이든 들어가면 바로 가라앉아 버려 다시는 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은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인데도 여태 본 배라고는 500년 전에 난파한 배라는 그 텅 빈 배 한 척밖에 없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고기를 잡기 위해 나가는 사람도, 그물을 가진 사람도 전혀 없었던 것 또한.

머릿속에서 무언가 정리되어가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기로 했다.

“그러면 혹시 바다의 수호신이란 것에 대해서는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수호신이요?”

사치는 잠시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것도 옛날이야기인가요? 그러면 저희 할머니에게 물어보시는 게…….”

처음 듣는다는 얼굴을 한 것은 사치의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질문에 답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바닷가로 빠져나갔다.

“바닷가 마을인데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이게 말이나 돼?”

키온 형이 허 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정말 배를 본 적이 없었네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루크레이신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이 깨달은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 마을은 역시 뭔가 이상해. 아마 네 퀘스트가 영향을 끼친 것일지도 모르지. 빨리 바다 밑으로 들어가 보는 방법을 알아내야 할 텐데 큰일이야.”

우리는 용의 비늘을 본 곳에서 한참 동안이나 서 있었다. 각자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이 다시 해가 지기 시작해 붉은 저녁놀이 드리워졌다. 멀리서부터 어렴풋이 올라오는 어둠을 보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슬슬 불을 다시 올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주문을 외쳤다.

“파이어 볼.”

우리의 원래 추측대로 용이 밤에만 보이는 존재라면 저녁놀이 선명한 지금은 아무것도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파이어 볼 몇 개가 허공으로 떠오른 순간, 나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보고 앞으로 뛰쳐나갈 뻔했다.

“방금 그거……!”

옆을 보니 나만 그것을 본 것이 아닌지 키온 형이 뛰쳐나와 바다에 빠지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깊숙이 허리를 숙여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분명 보이지 말아야 할 거대한 용 비늘이 저녁놀과 파이어 볼의 가느다란 불빛 아래에서 반짝거리며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몇 번을 눈을 감았다 떠 보아도 분명 그건 우리가 밤에 보았던 그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파이어 볼의 이미지를 지우면서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한 발짝을 내디뎠다.

“어……?”

그러나 그 순간, 눈앞에 아른아른 보이던 모든 광경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거대한 비늘과 그 크기를 감히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큰 신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느새 남은 것이라고는 맑은 바닷물과 찰랑이는 물결 위에서 빛나고 있는 붉은 햇빛밖에 없었다.

당황해 이게 어떻게 된 일일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사이, 형이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마법이야!!!”

“뭐라고?”

“마법이라고! 카르야, 다시 파이어 볼을 만들어 봐!”

형의 확신 어린 말을 듣고 나는 곧바로 다시 머릿속으로 거대한 불꽃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공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이어 볼!”

화르르르르!

평소보다 더욱 밝고 거대하게 빛나는 파이어 볼들이 생성되어 머리 위에 떠올랐다. 그러자 사라졌던 용의 모습이 다시 물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이쯤 되니 어떻게 된 것인지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나는 손을 휘저어 더 많은 파이어 볼들을 만들어 바다 위로 일정 간격을 두고 등불처럼 배치해 놓았다.

그러자 희미하지만 더욱 확실하게 용의 비늘이 멀리까지 뻗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티지엔 할머니가 아까 이건 힘이 있는 자에게만 보인다고 했잖아. 햇빛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마법으로 만들어 낸 빛으로는 보인다니. 나 참……!”

키온 형이 혀를 내두르며 허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야말로 마법사를 위한 퀘스트가 맞는 것 같네요.”

루크레이신도 용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제 물 밑으로 내려가는 방법만 찾으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짝이는 용의 비늘을 내려다보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뭔가 좋은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로 이럴 때 슈페리어가 있었으면…….

슈페리어가 이럴 때는 확실히 의지할 만한 선배 마법사 같은 느낌이었다는 게 이 순간 매우 실감 났다. 하지만 내려다본 슈페리어 막대기는 오늘도 역시나 잠잠하기만 했다.

조용하기 짝이 없는 막대기를 내려다보다 꾹 쥐자 손안에 잡히는 감촉과 무게 때문인지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그래.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보는 거야.

처음부터 말이지.

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도, 힌트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도구와 무기는 마법뿐이다. 그러니 마법으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해 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마법이란 것이 정형화된 이미지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뭔가 쓸 만한 마법을 찾아 이미지 변형을 해 본다면 괜찮을 듯도 한데…….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얼음이었다. 이 근방을 모두 얼려버린 다음 얼음의 일부를 깨고 들어가는 방법은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용의 신체를 온전히 보존하면서 다가가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어질 것 같고, 거대한 바다를 내 힘으로 과연 얼마나 얼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없었기에 이쪽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불…은 아예 쓸 수 없는 것 같고, 땅 계열은 바다 밑바닥을 융기시켜 용의 몸을 들어 올리는 정도로나 쓸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거대한 몸 전체를 들어 올리는 건 용의 몸이 물속뿐만 아니라 육지의 아래쪽까지 이어져 있다 추측되는 상황에선 불가능할 듯했다.

그러면 남은 건 뭘까…….

“아… 차라리 이게 현실이라서 산소통 메고 다이빙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시뮬레이션하다 문득 키온 형의 중얼거림을 들은 순간, 갑자기 제법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잠깐만 비켜 줘.”

“엉?”

“방법이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뒤쪽으로 물러선 키온 형과 루크레이신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밑져야 본전이다. 일단 시도나 해 볼까…….

“매직 실드!”

보통 매직 실드는 내 바로 앞에 반구형으로 이미지해 만들었지만, 나는 이번에 그 이미지를 조금 바꿔 보기로 했다.

“매직 실드!”

한 번 더 외치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변의 공기가 순간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된 건가…….

지금 내가 시도한 것은 반구형의 매직 실드 두 개를 앞뒤로 붙여 나를 공 안에 넣는 듯한 형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매직 실드가 막아내는 것은 모든 마법 및 물리적인 공격이다. 쏟아지는 흙더미도 막아낼 수 있고 물세례도, 검도 막아낼 수 있는 이것이라면 어쩌면 물속에서 캡슐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카르야!”

뒤에서 키온 형이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뭐 하려고 그래?”

“형이 다 생각이 있겠죠. 위험한 것 같으면 알아서 빠져나오고도 남을 실력이에요.”

루크레이신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이게 실패하면 매우 낯이 뜨겁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뽑아버린 칼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래라고는 전혀 없는 거친 돌무더기 사이에서 물이 있는 곳을 향해 발을 내딛자 순식간에 정강이까지 쑥 빠졌다. 균형을 잡기가 힘들어 잠시 비틀거렸지만 다행히 양다리 다 제대로 내려와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발밑을 내려다본 순간, 나는 이 시도가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이거라면…… 물속으로 내려가도 괜찮을 것 같지.”

기쁨에 차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뒤돌아서자 키온 형이 입을 크게 벌리고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루크레이신은 그 옆에서 언제나와 같은 묘한 미소와 함께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그게. 어떻게 된 거야, 대체?”

“굉장하네요. 저한테도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는 거죠?”

지금 내 주변에는 물이 뭔가에 가로막힌 듯 들어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전혀 젖지 않은 발과 로브자락을 보며 드디어 저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마법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었다.

“아마 할 수 있을 거야. ……매직 실드!”

나는 형과 루크레이신에게도 나를 감싼 것과 같은 매직 실드를 써준 다음 마지막으로 공중에 떠 있는 파이어 볼을 모두 거두고 딱 하나만 남겨둔 채 그것에도 매직 실드를 쳤다. 마법으로 불러온 불은 실드로 감싼다고 해서 꺼지지는 않았다.

동시에 여러 명에게 이미지 변형 마법을 쓰려니 약간 힘들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그래도 7서클 마법이나 마 ‧ 라키안 검술 2단계 스킬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으랏차!”

실드가 쳐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물 안으로 키온 형이 뛰어들었다. 형은 아무리 뛰거나 돌아다녀도 바닷물이 자신을 피해 다니는 것처럼 젖지 않는 모습을 보고 감동 받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진짜 굉장하다. 어떻게 이런 걸 다 생각해 낸 거야, 요 귀여운 자식!”

형이 내 곁으로 다가와 머리를 마구 비벼대는 통에 순간 집중이 약간 흐트러질 뻔했지만 다행히 마법이 해제되지는 않았다.

“이거라면 문제없겠네요. 가 볼까요?”

루크레이신도 몇 번 제자리 뛰기 등을 하며 상태를 점검해 보고는 이내 흔쾌히 앞으로 나서서 물속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누가 본다면 자살행위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가슴 깊이가 넘는 곳까지 걸어가도 루크레이신은 보이지 않는 캡슐에 감싸여 있어 전혀 젖지 않았다. 그 뒤를 따라 키온 형도 걸어갔고, 나 또한 한 손에 파이어 볼을 든 채 그 뒤를 따랐다.

몇 발짝 걷지 않아 곧 얼굴 높이까지 물이 밀려왔다. 나는 약간 긴장하며 한 발짝 더 내디뎠다. 그러자 밑이 푹 꺼지면서 순식간에 몸이 모두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

사방이 물인데도 전혀 안 젖는다는 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행히 이 바다는 물이 아주 맑았기 때문에 내가 들고 있는 실드로 감싼 파이어 볼 하나 정도로도 앞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처럼 원구형 실드 캡슐 안에 있는 키온 형과 루크레이신이 숨이 막히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며 약간 웃음이 났다.

“아…아. 아. 목소리는 잘 나오네.”

키온 형이 캡슐을 서로 맞닿게 한 뒤 안에서 목소리를 냈다. 평소와는 달리 뭔가에 부딪혀 울리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으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어쨌든 숨도 쉴 수 있고 들리기도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모두 만족했다.

“좋아, 카르야. 불을 비춰 보면서 가 보자!”

형의 말에 따라 나는 천천히 파이어 볼을 움직이게 해 물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용의 신체가 뻗어 있는 길을 향해 따라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보니 이 비늘, 파란색인 것 같네요.”

루크레이신이 자신의 키만 한 비늘을 살짝 두드려 보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의 말대로 물 밖에서는 그저 어두컴컴한 색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용의 비늘은 물 안쪽에서 신비한 검푸른색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아마 꼬리가 아닐까 싶은 신체 부위의 거대함도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커지기만 해 도대체 전체 크기는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저 내가 지금까지 본 유일한 용이었던 코르보다도 훨씬 크지 않을까 싶은 정도만 추측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바닷속은 생각보다 고요했고 바닥도 편평했으며 해류의 움직임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온 세상이 물로 가득 찬 것만 빼고는 거의 육지와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특이한 점이라면…….

“보통 바닷속엔 물고기가 있지 않냐?”

키온 형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의문과 똑같은 말을 던졌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어. 그렇다고 해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방향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거, 저기 뭔가 보이는 것 같은데요.”

그때, 잠자코 따라오던 루크레이신이 갑자기 입을 열어 한마디 했다. 그가 손을 뻗어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용의 신체 근처에 희뿌연 뭔가가 보였다. 황급히 발걸음을 빨리한 끝에 발견한 그것의 정체는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이거…… 울타리지?”

키온 형이 일정 간격으로 앞에 박혀 있는 말뚝 같은 것들을 바라보며 물었지만 루크레이신이나 나나 확정적인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그 앞쪽으로는 편평하던 길이 아니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어 더 나아가기란 무리일 듯했다. 얼핏 바라본 밑쪽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 시커먼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이게 뭘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것들을 따라가던 나는 한쪽 바위벽 끝부분에 새겨져 있는 뜻 모를 글자들을 보았다. 그 글자는 난파선에 새겨져 있던 글자들과 비슷한 느낌의 글자였다.

그리고 그 밑부분에는 마찬가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문자가 또 쓰여 있었다. 바닷속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파이어 볼을 좀 더 가까이 그곳에 가져다 대며 몸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 파아아앗!

어디선가 본 듯한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숙이던 중 가슴 부분이 그곳에 닿자마자 갑자기 옷 안쪽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이건……!

황급히 로브자락을 헤치자 아이아가스가 환한 빛을 뿌리며 한껏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퀘스트 기억과 관련이 있는 건가……!

나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서둘러 아이아가스를 떼어내어 바위에 새겨진 글자들을 향해 가져다 댔다.

“아이아가스!”

그 순간 눈앞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눈앞이 점멸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 감각에 눈을 감고 순응하며 나는 천천히 의식이 어지럽게 어디론가 실려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눈앞이 도로 선명해졌을 때 나는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그곳이 더 이상 바닷속이 아니라 육지라는 사실이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리자 아주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울타리인지 말뚝인지 모를 것들이 박혀 있던 곳마다 밧줄이 단단히 묶인 상태였고, 크기도 다양한 배들이 그 줄에 연결된 채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 많은 배들로부터 내려진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들 또한 셀 수 없이 많았다. 주변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딱딱하기는 했지만 소란스럽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선 대륙으로 돌아갈 이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때, 뒤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지친 얼굴을 한 흰 갑옷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그가 샤인 나이트라는 것을 과거에 몇 번 보았던 슈페리어의 기억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오늘 떠날 배들을 끝으로 아마 다시 배가 뜰 일은 없겠죠.”

“어쩔 수 없죠. 돌아간다는 이들을 막을 권리 따윈 이쪽에 없으니까요.”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옛날 젊었던 시절의 슈페리어의 목소리였다.

그렇군… 이번 기억은 슈페리어의 시점에서 보는 건가.

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슈페리어는 다시 한 번 배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급히 줄을 서서 배에 올라타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엘프처럼 귀가 뾰족한 사람도, 또 지나치게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뭔가 특이하게 생긴 인상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선 대륙인들은 유난히 어둠의 기운을 견디지 못하니 마신군이 지척에 달한 지금의 상태만으로도 상당히 괴롭겠죠. 우리 중 누구도 그들에게 남아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능력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역시…… 조금 아쉽습니다.”

샤인 나이트가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곁에 다크 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매우 피곤해 보였지만 동시에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큰일 났어.”

“무슨 일이야?”

“놈들이 온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어디선가 불길한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하늘에서 검은 무언가가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꺄아아악!”

그것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 그림자는 허공 몇 미터쯤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무언가 보이지 않는 막에 막힌 것처럼 퍽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부딪치며 튕겨 나갔다. 검고 끈끈한 체액이 피처럼 튀면서 막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풀 프로텍트!! 젠장, 여기까지 벌써 따라오다니……!”

슈페리어가 주변을 향해 마법을 쓰면서 거칠게 욕설을 했다. 옆쪽에서 배에 타려던 사람들이 마구 비명을 지르며 서로 밀치고 먼저 올라타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저들을 어서 태워 출항시키도록 도와주세요. 넌 다른 사람들을 모아서 입구 쪽에서 놈들을 상대해 줘.”

“너는?”

샤인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에게 각각 지시를 내린 슈페리어가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크 나이트가 다급하게 반문했다. 슈페리어는 한숨을 내쉬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땅은 대륙의 최남단이야. 그리고 이곳의 바다에는 몇천 년을 산 수룡이 살고 있지. 아주 조용한 녀석이지만 자기의 쉼터를 마물들에게 그냥 오염당하게 두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설득하러 가볼 거야.”

“……알았어.”

다크 나이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슈페리어의 마른 어깨를 끌어당겨 꽉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걱정스러워 보였던 표정은 그것으로 이제 완전히 지우듯 사라지고 없었다.

“설득에 응하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 두고 와. 용보다는 네가 더 필요해.”

“이런 상황에 무슨 소리야. 여기마저 빼앗기면 이제 대륙은 끝장이야.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한다고.”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슈페리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크 나이트의 팔뚝을 툭툭 치고는 바로 돌아서서 별다른 주문도 쓰지 않고 하늘을 휙 날아 바닷속으로 풍덩 몸을 날렸다.

“…….”

나는 바닷속에 잠기기 전 슈페리어의 눈을 통해 서로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다크 나이트와 샤인 나이트를 보았다.

그리고 하늘을 새까맣게 메워가고 있는 마물 떼들 또한.

다음에 다시 눈앞이 밝아졌을 때에는 물속에서 엄청나게 큰 샛노란 눈과 마주하고 있었다.

푸른 비늘에 뒤덮인 그 눈은 세로로 길게 찢어진 붉은 동공을 가지고 있어 매우 위협적으로 보였고, 고작 용의 눈 크기만도 못한 인간의 크기로 미루어볼 때 그 용이 얼마나 큰지 대충 짐작이 갈 듯도 했다.

눈이 아니라 무슨 전신 거울 같군.

그 투명한 눈에 비친 모습을 통해 나는 슈페리어가 전신을 붉은빛으로 물들인 채 물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자이 에이리아스라쥴라이페이.”

슈페리어가 물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어 목소리를 발했다.

“지금 당신의 몸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 대해 느끼고 있습니까?”

그러자 커다란 눈이 천천히 감겼다 뜨였다. 이번에 드러난 동공은 붉은색이 아니라 흰색이었다.

[ 그렇다. ]

목소리라기보다는 마치 바람 소리나 꾸르륵거리는 물거품 소리 같은 소리가 머릿속에 직접 전달되듯 울려 퍼졌다.

“흑룡은 마신의 편에 섰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의 육체 위에 세워진 작은 마을 몇 개를 빼고는 모든 육지를 점령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참입니까?”

이번에 용이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동공의 색은 초록색이 되었다.

[ 그렇다. ]

“어째서입니까. 흑룡은 분명 당신을 죽이러 이곳에 올 텐데.”

그러자 이번에는 동공의 색이 검은색으로 가라앉았다.

[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다. ]

“어째서…….”

[ 나의 육체는 오래전부터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이 의지와 눈 외에는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다. ]

“…….”

[ 용이 동족을 죽이게 되면 그 용은 영원히 저주받는다. 동족을 죽인 인간의 영혼이 더러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영원히 그 능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잊고 미쳐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

슈페리어의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던 슈페리어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마지막으로 남은 동족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해야 할 짐이 지워져 있습니다. 수룡이여, 바라건대 나에게 작은 힘을 빌려주지 않겠습니까.”

[ ……. ]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오랫동안 당신을 믿고 따르며 수호신으로 모셔 왔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구원을 바라고 있는 그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만,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 말에도 수룡은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슈페리어의 저 애원조차 결국 소용없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용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면서 푸른색으로 변한 동공을 드러냈다.

[ 인간이여. 너는 살고 싶은가. ]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슈페리어가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 나는 어린 염룡이 너에게 도움을 받은 것을 알고 있다. 그 염룡은 내 몸속에서 나온 존재이며, 무엇보다 간절히 생을 갈구했다. ]

“…….”

[ 나에게 있어 삶과 죽음은 이제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한 가지 도움을 주겠다. ]

“그것이 무엇입니까.”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처럼 들린 건 착각일까. 용의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감았다 뜨이면서 선명한 선홍색으로 변했다.

[ 내 육신 안에 몸을 숨겨라. 그러면 죽음의 신도 너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불길한 존재들이 내가 쉬고 있는 이 거대한 쉼터를 침범한다면 그들은 결코 살아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

슈페리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가 듣기에는 영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지만 슈페리어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내가 영원한 안식의 땅으로 떠난다 해도 이 말만은 남아 변함없이 약속을 지키리라.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용의 눈이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으로 바뀌더니 잠시 후 천천히 도로 눈꺼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슈페리어는 커다란 비늘 사이로 사라진 용의 눈을 향해 그렇게 말하며 인사하고는 곧바로 수면 위로 몸을 날렸다.

그다음으로 장면이 바뀌었을 때에는 슈페리어의 시선에서 벗어나 아비규환이 된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영웅들을 볼 수 있었다.

불타는 집들, 인간과 마물이 뒤섞여 산처럼 쌓여 있는 시체, 모든 희망을 잃고 죽음을 기다리듯 쓰러져 있는 사람들과 저 멀리서부터 날아오기 시작한 끝도 보이지 않는 마물들은 상황이 절망적임을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이걸로 이제 끝인 걸까.”

부러진 화살을 든 일렉트릭 나이트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홀리 나이트가 피에 젖은 주먹을 풀고 그의 작은 등을 다정하게 두드려 주었다.

“아직 끝이 아냐.”

“사제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로드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그 말에 일렉트릭 나이트가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슈페리어를 바라보았다. 피 냄새가 풍기는 바람 속에서 꼬리 같은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는 슈페리어의 눈동자는 한 치도 흔들림 없이 어딘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 포기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이 뭔가 방법이 있는 거야. 저분은 포기하지 않았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슈페리어가 몸을 돌려 모두를 마주 보는 자세를 취했다. 슈페리어의 움직임을 따라 내 시야도 한 바퀴 돌자 잔뜩 상처입고 지친 영웅들과 그들의 뒤에서 거의 의욕을 잃고 있는 패잔병 같은 인간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그저 살아 있기만 할 뿐, 전혀 전력이 될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까.”

슈페리어가 제일 처음 한 말은 그것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싸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졌습니다. 이제는 사실상 이 대륙의 최남단에서 인간 문명의 마지막을 걸고 저들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지상에서 충분히 싸웠기 때문에, 적들은 이제 우리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물량을 동원할 것입니다. 공중에서, 그리고 물에서 말이죠.”

슈페리어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과 그들이 등지고 있는 셈인 바다를 향해 돌아갔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이때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반격할 수 있는 최초의 날이 될 것입니다.”

힘 있게 울려 퍼지는 슈페리어의 목소리를 들으며 멀지 않은 곳에서 눈 한쪽에 붕대를 감은 피투성이 남자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걸… 그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믿을 수 없다면 남은 것은 이제 죽음뿐이겠죠.”

슈페리어가 차갑게 대답했다.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은 자는 땅 밑의 은신처로 들어가 노약자와 함께 보호받으시오. 그곳에는 어떤 마물도 침범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나의 의견에 따라 마지막 희망을 걸고 싸우고 싶은 자가 있다면,”

슈페리어가 길게 숨을 한 번 내쉬었다가 들이마시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지상을 통해 공격해 올 마물들을 저 절벽 앞의 바다까지 유인해 주십시오.”

완전히 몸을 띄우기 직전, 슈페리어의 시선과 다크 나이트의 시선이 마주쳤다. 대화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기다렸다는 것처럼 하늘 위에서 마물 떼들이 새까맣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 신이시여…….”

벌벌 떨기 시작한 인간들의 기도와 아수라장 사이에서 슈페리어는 거침없이 하늘을 날아 공중에 떠서 양손을 뻗어 크게 외쳤다.

“일루젼!”

그러자 슈페리어가 순식간에 열 명 정도로 늘어났다. 열 명의 슈페리어는 각각 자유롭게 날아다니면서 곳곳에서 마법을 썼고 하늘은 이내 마물들이 내뿜는 공격과 그것을 막아내는 푸른 보호마법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슈페리어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눈조차 잘 보이지 않는 투구를 눌러쓴 남자가 마물들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그는 인간이었지만 마물들은 전혀 그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복종하며 명에 따르고 있었다.

“마신의 기사….”

슈페리어가 중얼거리며 그를 노려보다가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전격의 그물을 만들어 하늘 위에 펼쳤다. 그러자 멋모르고 달려들던 수백 마리의 마물들이 일제히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새까맣게 타 지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마물들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결국 밀리고 밀려 바다를 거의 등진 곳까지 다다른 순간, 그런 슈페리어를 지켜보던 마신의 기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들이여. 이것으로 끝이다.”

- 키이이이이이이익!

기세등등한 마물들의 공격과 함께 바닷속에서 갑자기 거대한 물줄기가 치솟아 올랐다. 누가 지르는 것인지 모를 고함과 비명이 온 천지에 울려 퍼졌다.

물줄기가 도로 가라앉으며 모습을 드러낸 그것의 정체는, 베어낸 수룡의 머리를 입에 물고 있는 검은 용이었다.

검은 용이 과시하듯 물고 있던 수룡의 머리를 바닷속으로 도로 떨어트리며 포효를 내지른 순간, 대부분의 인간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제자리에 쓰러졌다. 넓은 바다가 용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공포와 절망을 빼고는 세상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단 한 사람, 슈페리어만을 제외하고.

마신의 기사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슈페리어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분신들과 함께 마물들을 포위하듯 넓게 퍼져 동시에 양손을 치켜들고 일제히 주문을 외쳤다.

“스톰 서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 그 주문이 끝난 순간 갑자기 불어오던 모든 바람이 멈추고 파도마저 멈추었다.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짓누르듯이 메마른 나무가 부서지고 사람들이 신음하며 무릎을 꿇기 시작했을 때, 무언가가 압축되었다가 뻥 터지듯이 공중에서 큰 소리가 나며 거대한 폭풍이 허공에 생성되었다.

하늘에 닿을 듯한 크기로 미친 듯이 돌기 시작한 바람은 슈페리어의 손길을 따라 순식간에 지상에 있던 마물들을 휩쓸고 그와 동시에 하늘을 새까맣게 메우고 있던 마물들도 모조리 집어삼켜 버렸다.

마신의 기사가 그 거대한 폭풍에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수백 수천의 마물을 집어삼키고 더욱 커진 폭풍은 이제 그만을 남겨둔 듯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바다에 떠 있던 흑룡이 날개를 활짝 펴고 쏜살같이 날아와 마신의 기사를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용의 가죽에 상처를 냈지만 결국 용마저 휩쓸리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휩쓴 바람은 그대로 바다가 있는 절벽 끝으로 향해 낙하하듯이 몸을 던지며 사그라졌다.

- 크아아아아아아아아!

용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던 바다에 떨어진 마물들은 그대로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녹아 타들어 가며 사라져 버렸다.

마물들이 녹아내리며 지르는 끔찍한 비명 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에는 그렇게나 많았던 마물들이 더 이상 그곳에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절벽 위에서 슈페리어는 방금 전까지 흑룡과 마신의 기사가 있던 곳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용의 거대한 핏방울만이 남아 있었을 뿐 그들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 있던 인간들이 슈페리어의 발밑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피로 얼룩져 더러워진 영웅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절벽으로 몰려간 인간들은 마물들이 사라진 바다를 내려다보며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슈페리어는 지친 얼굴로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온 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그대로 쓰러졌다.

“안 돼!”

그러나 슈페리어가 완전히 쓰러지기 전 순간이동을 방불케 하는 스피드로 달려온 다크 나이트가 슈페리어의 몸을 받쳐 그대로 꽉 끌어안았다.

“로드 슈페리어. 괜찮습니까?”

“힐링 피스트!”

뒤이어 몰려온 영웅들이 슈페리어의 주변에 앉아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회복 스킬들을 걸기 위해 애를 썼다. 나는 그 사이에서 멍하니 슈페리어를 내려다보는 섀도우 나이트와 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애쓰는 샤인 나이트 등의 얼굴이 왠지 매우 넋이 나가 보인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방금 전 그런 스케일의 마법을 보고도 넋이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할 법했다.

슈페리어는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붉은 눈동자에 제일 먼저 비친 것은 마물들이 사라지고 나서 나타난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하늘의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어.”

슈페리어의 중얼거림을 들은 영웅들이 일제히 하늘을 바라보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눈부신 표정을 지었다.

“와…… 와아아아아아!”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멀지 않은 곳에서는 드디어 마물들이 모두 사라졌음을 인지한 인간들이 기쁨에 날뛰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신을 잃듯이 잠든 슈페리어를 홀리 나이트에게 맡긴 다크 나이트가 일어서서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거야말로 둘도 없는 기회겠지. 우리는 이대로 태세를 정비해 계속해서 위로 치고 올라갈 것입니다. 이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고 함께하고 싶은 자들은 우리에게로 오십시오!”

“와아아아아!!”

사람들의 눈에서 희망의 불꽃이 되살아났다.

그 격렬한 환호성이 점점 메아리처럼 사라지며, 용의 피로 물든 바다가 눈에 띈 것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검게 변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아이아가스를 쥔 내 손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키온 형과 루크레이신이 약간 긴장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기억은 다 본 거냐, 카르야?”

“응.”

그 말을 하면서 도로 고개를 돌리자 아이아가스를 쓰기 전에는 알아볼 수 없는 그림 문자로 적혀 있던 벽의 글씨가 이제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바뀌어 있는 것이 보였다.

[ 위대한 물의 용, 이곳에 영원히 잠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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