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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나가야겠군요.”
“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유프는 전화를 끊자마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서 옷걸이에 걸어둔 코트를 걸치기 시작한 윤석호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며 반문했다.
“누구 전화인데 그래, 윤?”
“L-10유저입니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윤석호는 순식간에 함부로 말을 거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인상으로 변했다.
그의 그런 얼굴을 보는 건 유프로서도 오랜만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네가 회사 밖으로 나가는 즉시 레온이나 류첸진이 널 따라가기 시작할 거라고! 좀 진정해. 무슨 일이야?”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그 유저분이 크게 다친 모양입니다. 아마도 저 때문인 것 같으니 지금 바로 확인하러 가야 합니다.”
“너 때문에 다쳤다고? 그 유저가?”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는 유프도 그 말에는 잠시 말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뭐… 그런 거라면 가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녀석들이 알아채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뒤는 부탁하겠습니다.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이면 충분하겠죠.”
“뭐? 나한텐 아무 힘도 없다고! 안 그래도 찍혀서 핍박당하는 중인 불쌍한 기획자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기야?”
어깨를 들썩이며 항의하면서도 결국 유프는 옷을 모두 입고 밖으로 나서는 윤석호를 끝까지 말리지 않았다. 그도 사안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윤석호는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 전 유프를 돌아보며 눈인사만 건네고는 그대로 바쁘게 복도로 빠져나갔다.
“지부장님? 무슨 일로….”
바깥에서 대기하며 일하고 있던 비서가 의아한 얼굴로 일어서서 묻는 것을 보며 윤석호는 최대한 평소와 다름없이 보이도록 가볍게 미소 지어 보였다.
“방금 장난으로 내기를 했는데, 벌칙에 걸려서 말입니다. 어쩔 수 없으니 잠깐 뭘 좀 사올 겁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안쪽에 있는 유프 카윗 씨에게 연락을 돌려요.”
“네? 내기……요? 아, 알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비서가 윤석호의 표정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자리에 도로 앉았다.
전설적인 미스트 기획자 유프 카윗의 성격이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상천외하다는 것쯤은 요 며칠간 오가며 보았을 테고, 그가 얼마나 윤석호를 마구 대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납득한 모양이었다.
귀찮게 매달리지 않아 다행이군. 윤석호는 속으로 유프와 비서 둘 다에게 실례가 될 만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곧 돌아올 테니까요.”
그리고 그 웃음은 돌아서는 동안 곧바로 깨끗하게 사그라졌다.
안쪽에서는 바깥쪽이 투명하게 보이지만 바깥쪽에서는 안쪽이 불투명하게 비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윤석호는 수많은 새턴 사의 직원들이 바쁘게 건물 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새턴의 한국 지부 건물은 쌍둥이 건물 중간층에 복도가 이어진 H자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윤석호가 탄 엘리베이터는 그중 게임 부서만을 통괄하는 오른쪽 건물의 안쪽 외벽을 따라 내려가는 위치였기에, 반대쪽인 왼쪽 건물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보였다.
게임 부서 쪽 건물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흰 가운을 걸친 직원들이 느릿하게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며 윤석호는 코트의 깃을 단단하게 세웠다.
큰 회전문 대신 청소부들이 이용하는 작은 철문 밖으로 빠져나온 윤석호는 되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깃 사이로 얼굴을 감추고 천천히 걸어서 도로 앞에 정차해 있던 무인 택시에 올라탔다.
무인 택시는 공공기관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빌딩 등의 정해진 목적지만을 향해 운전할 수 있는 데다, 사람이 운전하는 택시에 비해 훨씬 느리고 요금은 몇 배로 비쌌지만 언제든 상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때문에 원래는 회사에서 거의 숙식을 하다시피 할 만큼 바쁘게 일하는 직원들의 퇴근을 위해 윤석호가 몇 대 배치해 두도록 했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매우 고마운 운송 수단이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 안녕하세요. 목적지를 설정해 주십시오.
“B시 U동, Y대학 부속병원으로.”
- 목적지를 검색합니다. …경로를 확인하였습니다. 3초 뒤 출발합니다.
정확히 3초 뒤, 택시가 슬슬 움직여 나아가기 시작했다. 윤석호는 팔짱을 끼고 앉아 눈을 내리깔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졸고 있거나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싶을 포즈였지만 그는 결코 졸고 있지 않았다.
예리한 눈동자 안에서 수많은 상념들이 떠올랐다 지워지고, 다시 떠오르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윤석호는 어느새 그가 시의 경계를 넘어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홀로그램 내비게이션 지도가 가리키는 목적지까지 이제 1킬로미터도 채 남지 않았다는 알림이 깜박였다.
- 1분 뒤,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요금을 정산해 주십시오.
윤석호는 택시가 부드럽게 주차장에 멈춰 설 때를 기다려 코트 주머니 안에서 꺼낸 지갑을 요금 정산기에 누르고 내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날씨가 참 좋았던 것 같은데 병원 앞에 서서 올려다본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우중충했다.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바람이 깨끗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을 어지럽게 흐트러트렸다.
병원 정문에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굳은 얼굴을 보며 윤석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안내데스크에서 지체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 12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에서 세 번째 병실 앞에 선 윤석호는 1203호라는 명패 밑에서 빛나고 있는 홀로그램 글자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맞게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자 아무런 저항 없이 부드럽게 밀려난 틈 너머로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흰 침대와 그 위에 누워 방문자를 바라보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남자.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 정확히 40여 분만의 일이었다.
“…그만두겠다고?”
진서환은 편두통으로 지끈거리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짓누르며 안경 너머로 시선을 올렸다.
앉은 자세에서는 올려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키가 큰 그의 생물학적 동생, 진제환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서환은 어쩐지 그 얼굴이 이전과는 달리 조금 더 굳어 있는 듯 보인다고 생각했다.
“네.”
“어째서?”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이 이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일이 그런 식으로 무 자르듯 마음대로 끝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사실 안 될 것도 없기는 했다. 진서환이 애초에 진제환에게 부탁했던 일은 미스트 내에서 게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달라는 요청이었고 진제환은 그에 비교적 완벽히 응답해 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정보들을 이용해 메이지 소프트의 활로를 찾아줄 새로운 게임을 제작하고 있으니 진제환이 맡은 일은 1차적으로 이제 거의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진제환이 새턴의 게임 내에서 뭔가 중요한 퀘스트를 맡아 윤석호와 연락을 한 적이 있었다고는 했지만, 그 퀘스트는 결국 게임 내의 스토리 요소에 속해 있었기에 진서환이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적인 요소와는 달랐다.
새턴이 눈치채고 역공해 올 가능성이 높으니 이쯤에서 적당히 접고 한동안 쉬게 하거나 물러서는 것이 맞다. 이성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껏 진제환이 보여온 괘씸한 태도와 뒤통수를 후려갈겼던 이전의 일 등을 떠올려 보면 그리 순순히 놈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타이밍에 그런 말은… 역시 아버지가 시키신 건가? 그렇게 하라고?”
비뚤어진 감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진제환의 얼굴에는 조금의 파문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시시한 일은 이제 그만두고 뭔가 다른 일을 하라고 한 게 아니냔 말이야. 아니면 네가 직접 그렇게 말씀드렸나? 어제 둘이서 비밀스럽게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테면 지금 내가 책임지고 만들고 있는 신작 ‘필라디아’의 개발이라든가.
진서환은 그 말만은 꿀꺽 삼키고 진제환의 반응을 기다렸다.
“제가 원하는 것은 방금 말한 것 그대로입니다.”
진제환이 차갑게 대꾸했다.
“허락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오늘부터는 그만둘 테니까.”
“…하. 지금 네가, 내 말이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거냐?”
진서환은 그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아마 바깥쪽까지 들렸으리라는 생각에 곧 후회하기는 했지만 분노가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서환의 인식 속 진제환은 언제나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은 자라서 조금 사람 같은 행동을 한다지만, 어릴 때의 그는 버려진 로봇처럼 멍청하게 앉아 뜻도 알아들을 수 없는 행동이나 해대며 삶을 낭비했다.
그러던 놈이, 컴퓨터가 취미라기에 불쌍해서 일거리를 주었더니 이제는 은혜도 모르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려 들다니.
이전까지 조용했던 놈이 이리 강경하게 나오는 것을 보건대 분명 어제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무언가 말이 오간 것이리라 추측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필라디아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주도해 키워가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제야 겨우 손발이 돋아나기 시작한 그것을 이제 와서 남에게 건네주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지.
진서환이 분노에 찬 눈으로 진제환을 노려보자 진제환이 처음으로 눈에 띌 만큼 크게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얼음처럼 차가웠던 눈동자에 번득이는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살기 같은. 그렇게 생각했다가 진서환은 흠칫 놀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하하. 드디어 네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진서환은 대신 온 힘을 다해 진제환을 마주 노려보았다.
절대로, 절대로 필라디아만은 다른 이의 손이 닿게 할 수 없었다. 절대로!
“네 뜻대로는 절대 안 될 거다.”
“내 뜻이 뭔지 안다면,”
진제환이 아주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뭐라는 거야. 지금 자신의 뜻이 내 생각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진서환의 혼란스러움을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진제환이 지긋이 그를 바라보다가는 짧은 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면 그만두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제 그 일을 그만두겠다는 진제환의 뜻은 꺾을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해 보였다. 진서환이 대꾸하지 않자 진제환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넘기며 뒤돌아섰다.
그때, 진서환은 진제환의 손등에 길게 나 있는 상처를 발견했다. 이전에 보았을 때는 없었던 것이, 그것도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왜 저런 상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제 아버지와 진제환이 만났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추가로 들었던 말이 문득 기억났다. 그때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잊었던 것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너, 어제 로비에서 경비원이 소지한 스턴건을 아무 말도 없이 가져갔었다지.”
진제환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차피 그걸 가져가서 진제환이 무엇을 했을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진제환은 어릴 때부터 늘 이상한 녀석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기계를 부수려 들거나 남의 휴대용 게임기를 분해해 버린 적도 있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그런 기질이 어디로 사라진 것은 아닐 테니 이런 사고를 치는 것이 오히려 익숙하기까지 했다.
“멀쩡한 것으로 도로 내놓는 게 좋을 거다. 어릴 때와는 달리 이젠 널 감싸줄 사람 따윈 없으니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저 건방진 녀석에게 원래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려준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본래 자신과 저 녀석의 차이였으니까.
아무 말도 없이 땅만 내려다보던 진제환은 말이 끝나자 고개를 들어 진서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할 말이 있습니다.”
말만 경어일 뿐 공손한 태도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위험한 기색이 풍기는 목소리였다.
“윤석호 새턴 지부장의 사생활을 캐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다는 태도가 이쪽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까.”
진서환은 순간 벼락을 맞은 듯 놀랐다.
실은 진제환이 갑자기 들이닥쳐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기 전까지 그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던 것이 바로 그와 관련된 일이었다.
얼마 전, 윤석호와 자주 연락하는 사람을 찾아냈다는 보고를 받고 드디어 쓸 만한 정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본래대로라면 어제까지 새로운 정보를 넘겨주기로 했던 쪽에서 여태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이런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실마리를 잡은 것이라 여겨 평소보다 더욱 기대가 컸었기에 그만큼 더 골치가 아팠다.
‘알아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말했던 의미를 분명 제대로 알아들은 줄 알았는데, 몇 푼 되지 않는 선금에 눈이 먼 멍청이들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서환은 그 모든 일들을 혼자서 처리했을 뿐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 회사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저 진제환이 알 수 있을 리 없는데. 대체 어떻게.
설마, 아닐 것이다. 저번에 아버지 앞에서 했던 말을 기억해 적당히 찔러 보려는 거겠지. 진서환은 지나치게 당혹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진제환을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이번 일로 새턴 쪽에서도 움직일 겁니다.”
진서환은 이번에야말로 대답할 말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 놀라고 분노했다.
“뭐, 라고.”
“지부장은 바보가 아닙니다.”
정확한 사실을 읊조리는 듯한 낮은 한마디. 눈이 마주친 순간은 아주 짧았지만 진서환은 진제환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싸늘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절대로 녹지 않는 얼음 같은 그 눈이 마지막으로 전신을 날카롭게 훑은 뒤 떨어져 나가고, 진제환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서 나간 뒤에도 진서환은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진제환의 발언이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감히, 감히 어떻게…….”
쾅 소리가 나도록 책상을 거세게 두들기며 자리에서 일어선 진서환은 분노에 찬 걸음으로 유리창 쪽으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걷었다. 그러나 그 앞에 세워져 있었던 진제환의 바이크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그것은 선전 포고다. 진서환은 알 수 있었다. 새턴이니, 윤석호니 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할 터이고 진제환이 진짜 말하고 싶어 한 것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진서환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허를 찌르는 공격일 터였다.
사자는 절벽에서 새끼를 민 다음 올라온 녀석만 기른다고 했다. 3대를 이어 내려온 굴지의 게임기업 메이지 소프트가 지금과 같은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 또한 바로 그런 후계자 양성 방식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진서환은 진제환이 이 회사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리라 굳게 믿어왔다. 그랬기에 그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그동안 편히 연락을 취하고 출시 전의 게임들에 대해서도 일을 맡겨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간 제가 던져준 먹이를 먹고 집채만큼 자라난 흑사자 앞에 선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이빨과 발톱을 숨겨 왔던 만큼 아주 영리하고, 그만큼 사나운.
“……오냐. 도전이라면 받아주마.”
진서환은 이를 갈며 블라인드를 걷고 있던 손을 내렸다. 방 안에 다시 미약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 회사를 이어받는 것은 진서환이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살아왔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무헌 씨.”
나는 문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여기에서는 처음으로 뵙겠습니다.”
“…윤석호 씨.”
그의 말대로 현실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VT포트 안에서 본 적도 있고 영상통화를 워낙 많이 해서인지 그다지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윤석호는 늘 보아왔던 화면 속에서와 같이 정장에 머리칼을 올려 넘긴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위에 걸친 두껍고 긴 정장용 코트와 전화 통화 영상 속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던 하반신도 멀쩡히 잘 보인다는 정도뿐이었다.
“병문안을 오면서 빈손이라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매번 성질을 돋우곤 하던 유들유들한 미소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사태의 심각성을 어쨌든 제대로 받아들였음을 느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문을 닫고 내 곁으로 다가온 윤석호가 몇 시간 전까지는 주열 형이 앉아 있었던 의자를 가리키며 질문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하면서 보았던 것보다…… 더 심각하군요.”
“혼자 오신 겁니까?”
혼자 들어오기는 했지만 병실 밖에 데리고 온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계하며 묻자 윤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제야 조금 경계를 풀고 한숨을 내쉬자 윤석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염치없는 말이지만, 강무헌 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먼저 묻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염치는 무슨. 그거야말로 내가 윤석호를 부른 이유였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어제 아침부터의 끔찍한 기억들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제 집에 침입자가 들어온 건 어제 오전이었습니다. …….”
용의주도하게 사람을 속이고 안으로 들어와 냅다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키고, 깨어난 이후에는 내 집 안에서 묶인 채 맞아가며 윤석호와의 연락에 관한 정보를 추궁당했다.
그들이 어디서 누구의 지시를 받고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된 이상 뻔하지 않은가.
그런 요지의 말을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하려니 목이 따끔거리고, 금이 간 갈비뼈 때문에 숨 쉴 때마다 통증이 잇따랐다.
윤석호는 내가 하는 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듣고 있었다. 때때로 내가 말하는 것이 모두 진실인지를 파악하겠다는 듯 지그시 눈을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반응의 대부분은 눈썹을 꿈틀거리거나 입매를 굳히는 정도의 충격 표시에서 그쳤다.
그가 이야기를 듣는 동안 물었던 것은 딱 하나, 나를 구출하러 왔던 사람들의 이름이 정말이냐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모두 나와 같이 퀘스트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윤석호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
한참 뒤 내가 구출된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윤석호와 나 사이에는 다시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매끈한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윤석호는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180인 내 키를 아마도 훌쩍 넘을 장신의 남자가 90도 가까이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고개도 마찬가지로 숙이고 있는 상태라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저와 관련된 일로 강무헌 씨가 다치셨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로 보입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이전에 강무헌 씨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와 관련된 일로 강무헌 씨에게 더 이상의 피해를 끼치지 않고, 이후 그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겠다는 말을 드린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씀 외에는 드릴 말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한 후 윤석호가 천천히 허리를 도로 폈다. 숙이고 있느라 흐트러진 앞머리칼이 눈동자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해 넘겼던 헤어스타일이 어지러워져 우스울 만도 한데도, 헝클어지고 밑으로 내려온 머리를 한 윤석호는 왠지 본모습을 되찾은 위험한 맹수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나는 저절로 몸에 긴장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침을 한 번 삼켰다.
“강무헌 씨께서 피해 입으신 것들은 모두 제가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에 바라는 것이 있으시다면 모두 들어드리겠습니다. ……다만, 염치없는 상황이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가 피해를 입으셨지만…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배상 같은 걸 바란 것은 아니었기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여기까지 와서도 하는 그놈의 ‘부탁’이란 게 무엇일지는 조금 듣고 싶었다.
“들어나 보죠.”
“감사합니다. 저를 경찰에 신고하셔도 괜찮고, 그럴 경우 저는 강무헌 씨를 위해 최대한 협조할 것이지만 딱 일주일 정도만 시간을 더 주셨으면 합니다. 그 안에 이 일을 해결하고 다시 이곳으로 와 그간의 모든 상황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 후에는 저를 신고해 주셔도 좋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도대체 윤석호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금 물어보았자 대답하지 않겠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잠시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윤석호에게 동정을 베풀겠다거나 그런 온정의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윤석호 씨를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윤석호가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신고하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때릴 겁니다.”
물론 몸이 다 나으면 말이다. 그런 부가적인 말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윤석호는 제대로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가는 이내 오늘 여기에 온 후 처음으로 눈을 살짝 휘어 웃었다.
“진심이십니까?”
내 말이 우습나. 아무래도 윤석호는 내가 검도 유단자라는 걸 모르고 있을 테니 우스울 만도 했다. 전신에 붕대와 깁스를 칭칭 감고 누워 이런 말을 해 봐야 역시 가소롭겠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배상 따위도 필요 없습니다. 아까는 말하지 않았었지만 저를 공격한 놈들은 지금 경찰이 아니라 저를 구해 준 형이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윤석호 씨가 여기에서 나가 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경찰서로 향해도 소득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윤석호의 얼굴에서 다시 웃음기가 싹 지워졌다.
“그건… 범법……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뭐, 나쁘지 않겠군요.”
범법이라는 말을 하려던 윤석호가 내 험악한 표정을 보고는 말끝을 흐리며 말을 바꾸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왔는지 제 쪽에서도 알아낼 겁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습니까. 그때가 되면 저도 지금처럼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는 아닐 테니 두고 봅시다.”
“이런… 저는 이제 완전히 강무헌 씨에게 미움 받았군요.”
끼친 피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요. 윤석호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넘겼다.
“강무헌 씨라면 얼마든지 절 때리셔도 좋습니다. 일주일의 유예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사과드립니다.”
“정말로 미안하다면, 지금 이것 때문에 미뤄지게 생긴 제 퀘스트에 대해서나 말해 주십시오.”
배상 따위보다 더 필요한 건 그거니까 말이다.
“…퀘스트 말입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눈을 두어 번 깜박인 윤석호가 아… 하고 작게 목소리를 흘렸다.
“HZ 퀘스트의 진행 사항이 걱정되셔서 그런 거군요.”
“HZ……?”
“이런. 실수했군요. 회사에서 부르는 이름대로 불러 버렸네요. 영웅 퀘스트 말입니다. 그것의 개발 당시 이름은 Heroes Zero 퀘스트거든요. 줄여서 HZ라고 합니다.”
히어로즈 제로…? 어쩐지 낯선 느낌이었다.
“입원해 계신 동안에는 게임하시기가 어렵겠죠. HZ 퀘스트의 경우 특수 퀘스트라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상황이 변해 가면서 진행되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 접속하지 않으면 거의 모든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그건 퀘스트 진행자에게 있어 아주 불리한 점이죠.”
일주일이라니…! 내 얼굴에 새삼 윤석호를 향한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보았는지 윤석호가 “하지만.” 하고 말의 방향을 돌렸다.
“이번 일의 책임이 저에게도 분명히 있으니 최대한 강무헌 씨가 있는 현재에서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도록 손써 두겠습니다.”
다행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뀌어 가는 모든 걸 그가 완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겠지. 이 퀘스트는 나만의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나아야겠군. 두꺼운 링겔 바늘이 파고들어 거치적거리는 손등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윤석호가 내 안색을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들어보시고 결정해 주세요. 입원이 2주 이상 길어지실 것은 확실해 보이니, 혹시 강무헌 씨만 괜찮으시다면 현재 개발이 끝난 시제품을 한번 사용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어떤 시제품 말입니까.”
“휴대용 접속기기입니다.”
나는 곧바로 눈을 번쩍 뜨고 윤석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게 있었다고?
“실사용 테스트는 모두 끝냈고, 출시를 앞둔 상황입니다. 기능은 원래의 캡슐보다 조금 떨어지고 단순하지만 게임을 하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습니다. 마무리를 끝내는 대로 언론에 곧 발표할 예정이었죠.”
단, 한 가지 문제라면…… 하고 윤석호가 입술 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강무헌 씨가 원래 특수 캡슐을 쓰고 있었다는 점일 텐데, 특수 캡슐에 들어간 기능을 함께 넣은 제품은 초기 테스트용 하나뿐입니다. 강무헌 씨의 캡슐에 맞춰 이쪽에서 조금 조정만 거치면 아마 쓰실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새 제품이 아니라……. 캡슐보다 더 불편한 것도 고려하셔야 할 테고요.”
“쓰겠습니다.”
나는 윤석호의 말을 자르고 바로 대답했다.
“언제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지금 그 몸 상태로는 무리입니다. 의사에게 하루에 적어도 두세 시간 정도는 침대 밖으로 나가 돌아다녀도 괜찮다는 진단을 받게 되면 제게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테스트를 거친 제품이라고는 해도 시제품이라 완벽하지 않을 겁니다. 혹시 나중에 받아서 이용하다 무언가 문제가 생기신다면 그 즉시 사용을 중지하세요. 그때에도 바로 저에게 연락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뭐라고 하든 나에게는 뜻하지 않았던 구세주가 내려온 기분이었다. 휴대용 접속기기라니. 그런 게 개발 중인 줄도 몰랐는데.
“대체 그런 건 언제 만드신 겁니까.”
“현재의 캡슐로는 미스트 전용 캡슐게임방들의 수요를 다 채울 수 없었습니다. 캡슐은 안정적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대신 크기가 너무 크고 보관 방법도 까다롭죠. 전 세계에서 밀려드는 그런 수요들을 맞추기 위해 좀 더 부피가 작은 휴대용 기기를 개발한 겁니다. 충전식이라 사용시간이 짧은 편이지만 하루에 몇 시간 플레이하지 않는 라이트 유저들에게는 안성맞춤이겠죠.”
자동 컴퓨터처럼 안색 한번 바꾸지 않고 줄줄이 설명하는 윤석호의 얼굴을 약간 질린 기분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피곤한 표정이시군요.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눈치 빠르게 윤석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할 말은 거의 끝냈으니 도로 돌아갈 모양이었다.
“배상은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저는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 강무헌 씨가 병원에 계신 동안의 병원비와 손상된 집의 복구까지는 확실하게 해 드려야 제 마음도 조금 편해질 것 같으니 그냥 받아주세요.”
“그러니까 전 필요 없다고….”
“하는 김에 강무헌 씨의 캡슐 메인터넌스도 같이 해 드리려고 그러는 겁니다. 물에 젖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필요 없다고 하려던 말이 순간 뭔가에 걸린 것처럼 멈췄다. 윤석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방수가 된다고는 해도 특수 캡슐을 사용하시는 만큼 점검을 반드시 해 봐야 할 겁니다. 저희 쪽에서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결국 불만스럽게 대꾸하자 윤석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를 하려는 듯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가는 상태를 보고 아차 하며 도로 내렸다.
“이런. 저도 정신이 없으려니…. 그러면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로 돌아가는 겁니까?”
내 질문에 윤석호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쁜 시기이니까요. 설마 절 걱정해 주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하하.”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웃음소리를 흘린 윤석호가 내 몸의 상처들과 얼굴을 찬찬히 마지막으로 훑어보았다.
“어서 쾌유하시길 빌겠습니다. 다음에 올 때에는 제대로 선물을 들고 오도록 하죠.”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아뇨. 그리고… 역시 현실에서 보니 확실히 알겠군요. 강무헌 씨의 상태는 이 상처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저희 게임이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밥은 제대로 드시고, 몸 관리를 바로 하셔야 합니다.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젠 정말 지겨울 정도의 소리였다. 나는 밥도 잘 먹고 있고, 운동도 꾸준히 한다. 그런데도 원인도 알 수 없이 살이 빠지는 걸 여기서 어떻게 더 조정하란 말인가.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걸 물어서 죄송하지만 강무헌 씨에게 도움을 주신 네 분 중 한 분이 분명 진제환 씨라고 하셨죠.”
진제환의 이름은 갑자기 왜……?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윤석호가 눈을 가늘게 내리깔며 잘생긴 이마를 찌푸렸다.
“지금은 확실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지만, 저로서는 강무헌 씨가 이런 일들을 당한 이유에 그분의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무슨…….”
“조심하시라는 겁니다.”
이것만은 농담이 아니니 정말로 조심하세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윤석호는 그 말만을 남기고 이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문이 열렸다 다시 닫히고, 내 병실 안에는 윤석호에게서 나던 미약한 향수 냄새와 뒤섞인 비 냄새만이 남았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윤석호의 말뜻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나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에는 주열 형이 낮에 말하고 갔던 것처럼 경찰들이 찾아왔다. 혹시나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다는 이유로 의사가 한 방에서 대기한 채 나는 그들이 묻는 몇 가지 질문에 답해 주었다.
“그러니까, 원한에 의한 범죄는 아니었던 것 같단 말이죠?”
“네.”
“확실히… 집에서 하루 묵었던 친구가 나가고 난 바로 직후를 노려 지능적으로 다시 벨을 누르고, 누구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을 단답으로만 대답해 문을 열게 만든 뒤 곧바로 공격하는 방식은 전문적 강도의 소행에 더 가깝긴 하죠.”
내게 질문한 안경을 쓴 젊은 형사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형사가 그들이 파악한 사건 경위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옛날부터 성행했던 허를 찌르는 강도 방법입니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에요.”
인터폰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을 때 이상하다고 여겼어야 했는데, 내가 남자인 데다 설마 하는 방심까지 합쳐져 침입할 여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분하지만 별로 반박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날 아침에 진제환이 떠나기 전, 뭐라고 했었던가.
「혹시 요즘… 주변에서 수상한 놈을 본 적이 있어?」
「없는데.」
「이 주변에 아무래도 정말로 강력 범죄자나 살인범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것 같다. 조심해.」
그래. 분명히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했었지.
나는 그때 진제환의 걱정이 매우 웃기고 쓸데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즉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결과적으로 진제환의 걱정은 맞아떨어졌던 것이었다.
아니. …잠깐만.
거기까지 생각했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때는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는데, 진제환은 왜 하필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 그것도 답지 않게 아주 망설이기까지 하면서.
나는 즉시 형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네. 물론이죠.”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요즘 살인과 강도 같은 강력 범죄가 심각해졌다는 뉴스나 공고가 났었습니까?”
내가 사는 시를 담당하는 경찰들이니 이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형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범죄야 늘 있지만 최근 뉴스에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이 일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다른 곳에 비해 범죄율이 딱히 높은 편도 아니고요.”
“주민들에게 따로 관련하여 외출 자제를 요청한 적도 없는 겁니까?”
“없었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시는지…….”
관청이나 공기관에서 주민들에게 뭔가 공고할 일이 생기면 대개는 컴퓨터로 안내를 보내서 받아볼 수 있었다. 휴대폰을 사용하면 문자로도 긴급 공고를 받을 수 있다지만 나는 휴대폰이 없으니 상관없고…….
그러면 진제환은 어디서 그런 정보를 알아서 그날 아침 나에게 말했던 걸까.
문득 윤석호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던 조심하라는 말이 별안간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안 되지. 함부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싹튼 의문이 자라나는 것을 힘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별말을 하지 않자 경찰들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고, 나는 한 시간 정도의 조사 시간 내내 완전히 집중하지 못해 결국 의사에게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니냐는 질문까지 받고 말았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도망간 범인들의 인상착의는 보지 못했다고 하셨지요.”
“네.”
“정보가 너무 적군요…. 그래도 다른 분들의 증언으로 키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좀 더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시면 연락 주세요. 강력2반 형사인 오진태입니다.”
“마일보입니다. 그러면 쾌유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이 나간 뒤 의사가 다가와 몸 상태를 체크했다. 나는 얌전히 그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진제환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언제가 되었든 놈이 다시 한 번 이곳에 나를 보러 오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지만 아마 곧 오겠지.
어차피 내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한 상황에서 아무리 생각해 보았자 정답을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냥 그때 솔직하게 대놓고 물어보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대개의 경우 진제환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거나,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은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결정을 하고 나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의사가 나가기 전 언제쯤 되어야 침대 밖으로 나가 돌아다닐 수 있겠느냐고 묻자 다리 부상이 그리 심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상처들이 심하니 적어도 3일은 지나고 나서 다시 질문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3일이나 여기 누워 있어야 하다니……. 병원이 죽기보다 싫은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병원은 늘 안 좋은 기억만 떠올리게 하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고 침대 등을 도로 눕혔다. 슬슬 이 길었던 하루도 다 가는지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졸음이 밀려왔다.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민후였다.
“아침부터 미안해. 내가 잠을 깨운 건 아니지?”
“아니. 와서 앉아.”
안 그래도 잠이 새벽같이 달아나 오전 내내 밥을 먹은 것 빼고는 정말 할 일이 없어 심심했다. 그나마도 밥은 내 손으로 잘 먹지 못해 반쯤 흘려서 식판 위가 난장판이 된 탓에 치워 준 직원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뜻밖에도 민후가 오늘 들고 온 것은 커다란 케이크였다. 생크림이 듬뿍 올라간 케이크를 내밀며 병문안 선물이라고 하는 민후의 얼굴 표정은 기억 속의 마지막 얼굴만큼이나 별로 좋지 못했다.
“꼭 혼자서 다 먹어야 해.”
“음…… 고맙다.”
평소 단 것을 그리 선호하는 편도 아니고 지금은 양팔을 모두 움직이기 번거로운 상황이라 조금 난감했지만 모처럼 민후가 날 생각해 가져온 것이니 그냥 군말 없이 받기로 했다.
“학교는?”
“원래 방학 중이었어. 전에 네가 전화했을 땐 과실을 옮기느라고 잠깐 갔던 거고.”
“그래…….”
평소 같았으면 내가 말하기도 전에 화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즐겁게 이야기했을 민후가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있으니 낯선 침묵만이 병실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나쁜 걸까.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내가 하체에 덮은 이불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민후의 표정을 읽어내기란 힘들었다.
“상처는 좀 어때?”
눈동자를 굴리며 번민하던 민후가 한참 후에 내뱉은 첫 마디는 겨우 그것뿐이었다.
“괜찮아.”
“아프진 않아?”
“응.”
“그래. 다행이다…….”
민후가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을까. 나는 문득 민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기에 나 말고 또 누가 왔었어?”
“어제 주열 형이.”
“그 형님밖에 안 왔어?”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민후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신중하게 말을 살짝 덧붙였다.
“…경찰도.”
“아니. 그런 사람들 말고…….”
민후가 답답한 표정이 되어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선정우 형도, 진제환도 안 왔어.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냐고?”
민후가 반문하더니 문득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는 열심히 뭔가 말하고 싶어 하더니 내 말이 끝난 뒤에는 왠지 그럴 생각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아냐. …아무것도.”
나는 조금 답답해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차라리 대놓고 말해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잖아. 해 봐.”
“평소엔 아니면서, 이럴 땐 정말 눈치가 귀신같다.”
민후가 허를 찔린 얼굴로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래. 실은…… 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랬어. 하지만 다쳐서 누워 있는 네게 물어도 좋을지 모르겠어서….”
“해 봐.”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해 줄 테니까, 하는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민후는 다행히 빠른 눈치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사실 민후와 나 사이에서 보통 질문을 하는 건 나였지, 민후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체 무엇을 물을지 매우 궁금하기도 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뭐든 다 잘 알고 있던 민후가 내게 할 질문이라… 그게 대체 뭘까.
민후가 목울대를 울리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질문해도 괜찮다고 했는데도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진…제환 말이야.”
여전히 진제환의 이름이 어색한 것이 틀림없는 말투로 민후가 말을 꺼냈다.
“그저께부터 계속 생각해 봤어. 대체 어떻게 네가 위험에 처한 걸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 나에게 전화를 했는지, 왜 그 녀석은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보다 빠르게 오지 못했는지, 허가받은 경호 전문가들이나 쓴다는 최신형 전기총을 왜 그 녀석이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건지…… 뭐 그런 것들을 말이야.”
“…….”
“물론 그 녀석이 대답을 하기는 했지. 전화를 해 보니 받지 않아서 알게 됐다. 사정이 있어서 빨리 가지 못할 것 같다. ……전기총은 정우 형님이 데려간 놈들에 대해 비밀로 해야 하니 우리 모두 그 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로 했어. 그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을 맞춘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된 건지 아직도 몰라.”
그건 나도 지금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진제환이 민후에게 그렇게 대답했던 건가…….
“몇 번을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모르겠어. 난 그 녀석이… 좀 이상해. 게임에서부터 그 녀석은 너무 비밀이 많았잖아? 그런데 이런 일까지 일어나고 보니까…… 난 도저히 그 녀석만은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무헌아.”
민후가 격앙된 태도로 목소리를 좀 더 높였다.
“단순히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냐. 그 녀석도 너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건 알 수 있어. 그래서 나도 그 녀석을 인정했던 거야. 하지만 그거랑 이건 달라.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알 수 없는 상대를 우리가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뭐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제 윤석호가 했던 조심하라던 말과 지금 민후가 말한 ‘어디까지 믿어야 하느냐’는 말은 두 사람은 모르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비슷한 의미로 다가왔다. 진제환이 오면 직접 물어보자고 결론을 내린 뒤엔 그와 관련된 것은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한 뒤 민후에게는 명확한 답이 아니라도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어느 정도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민후의 표정이 너무 절박했고 걱정으로 눈빛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말한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생각해 봤어.”
“정말이야?”
민후가 큰 소리로 되물은 다음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누군가 듣고 들어오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았을 리 없잖아. 너처럼 나도 그 녀석과 같이 게임했고 그저께 그 일도 겪었어. 솔직히 말해서 화가 났던 적도 많았고.”
“그럼, 그러면….”
“진제환은 나하고 약속을 했어.”
내 말에 민후가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
“지금은 아니지만 말할 수 있는 때가 오면 다 말해 준다고 했어. 그리고 내 생각에는…….”
나는 잠시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가 별로 멀지는 않은 것 같다.”
“그걸 어떻게 믿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
“거짓말은 안 해. 그 녀석에게 뭘 물어봤을 때 대답할 수 있는 건 대답해 주지만 할 수 없는 건 못 한다고 확실하게 말하거든. 일부분만 말할 때는 있어도 그것도 일단 거짓말은 안 했었어.”
이렇게 길게 말한 적이 오랜만이라 그런지 목이 매우 아팠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민후가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옆에 놓여 있던 협탁에서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고맙다.”
“난…… 잘 모르겠어, 무헌아. 널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 녀석이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내가 신경 쓰이는 건 그 녀석의 목적이 뭔지를 알 수가 없어서야.”
그렇게 말한 민후는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괴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혹시…… 나보다 그 녀석을 더 믿는 거야?”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물을 마시던 것조차 잊고 민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소처럼 다정하고 웃음기 넘치는 얼굴도 아니고, 진지하고 신념에 찬 얼굴을 하는 것도 아닌 그렇게 슬프고 겁을 내는 듯한 얼굴을 한 것은 민후를 게임에서 만난 이후 처음이었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 유치하기도 하고 가뜩이나 아픈 네가 신경 쓸 것 같아서…. 하지만 무헌아, 나도 때때로 참기 힘들 때가 있어.”
민후가 이로 아랫입술을 꽉 짓씹었다가는 간신히 놓았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 게임에서…… 콜로세움에서 시저와 만났던 그때.”
내가 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 있겠는가. 게임 속에서 민후가, 그러니까 크란이 나에게 대신 희생하는 주문인 성사 스킬을 걸어준 다음 그로 인해 죽었던 때인데. 아직도 크란을 직접 얼려서 사망하게 만들었던 때만 생각하면 손끝이 다 차가워질 정도였고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 중에서도 최고였다.
내 표정을 보고 대답을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민후가 이어서 계속 말했다.
“그 이후에 네가 다시는 성사 스킬을 쓰지 말라고 했을 때 난 싫다고 했어. 왜 그런지에 대해서도 말했는데, 그것도 기억나?”
민후의 말에 기억이 곧장 날아가 크란과 운오와 키잘키르스텀의 워프 포탈 앞에서 헤어지던 때를 떠올려 냈다. 그래… 그때 내가 그런 말을 했었지. 나는 성사 스킬을 쓰지 말라고 했고 크란은 그건 약속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때 크란이 뭐라고 했었지.
「왜겠어?」
여름을 식히는 바람처럼 부드럽게 대답하던 목소리.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카프. 방금 그건 내가 너한테 내는 수수께끼야. 네가 그걸 풀 때까지 난 계속 네 말 안 들을 거고, 그게 싫으면 빨리 답을 생각하면 돼. 알겠지? 너만 믿을 테니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친구 사이에 우정 말고는 무언가 더 생길 것이 없다고 당연하게도 믿고 있었던 때였다. 그 말도 조금 이해하기 힘들긴 하지만 크란 나름의 우정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그 이후 정신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면서 금세 기억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왠지 그 말의 진의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금과 정확히 동일한 기분을 느꼈던 때를 알았다.
그건 바로 진제환이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던 때였고, 시험해 보자던 내 말 한마디에 웃었던 때였으며, 소파 위에서 알몸으로 누워 한 치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바짝 내 몸을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온기를 나눠주었던 바로 그때였다.
그런 경험들을 거쳐 나는 진제환이 나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우정만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설마… 민후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좋아해?”
나를.
주어를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받은 충격과 생각이 고스란히 민후에게 보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민후가 드디어 처음으로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던 것이다.
“수수께끼. 드디어 풀었네.”
다른 것들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충격을 받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민후가 내 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맞아서 상처 입은 뺨 쪽이 아닌 다른 쪽을 택하는 상냥함과 따뜻한 온기는 여전히 내가 알고 있는 민후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순간, 너무나도 민후가 낯설게 느껴졌다.
“병원에 있었을 때, 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때 자리에 나밖에 없어서 널 치료하던 의사에게 어떤 질문을 들었어. 주열 형님은 화장실에 갔고 진제환 그 녀석은 싸우다 입은 생채기를 치료한다고 다른 의사가 데려갔을 때였거든.”
“…….”
“네 몸에 맞아서 생긴 상처가 아니고 사람한테 물려서 생긴 멍 자국도 아주 많은데… 그게… 말하자면 성적인 의미에서 생긴 것 같다고, 혹시 오기 전에 강도들에게 성적으로 나쁜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냐는 질문이었어.”
그게 무슨 경로로 생긴 것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하필 반라로 문을 열어준 탓에 나에게 정보를 캐러 왔던 놈들이 호모라고 욕을 하며 두 배는 더 때린 원인이 되기도 했으니까.
누가 알든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해 당당했었지만, 지금 막 민후가 나를 그런 의미로 생각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 이런 말을 듣고도 침착하기는 조금 힘들었다.
“그때는 모른다고 했고 사실 지금도 모르지만…… 정말 그 자식들한테 혹시 나쁜 일이라도 당했던 거야?”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아니라고 대답하면 누가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을까. 진제환과 내가 나쁜 일을 한 건 아니지만 민후에게 그에 대해 어디까지 말해도 괜찮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너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건 아냐. 하지만…… 널 좋아하니까 이건… 이것만은 꼭 묻고 싶었어. 만약 그 녀석들이 너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다면 난…….”
“…그런 일은 없었어.”
태도가 격해지기 전에 일단 고개를 저어 부정하자 민후가 1차적으로 한숨 놓았다는 얼굴로 뺨에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대답해 줘서 고마워.”
“…….”
“그러면…….”
2차 질문이 나오기 전에, 나는 민후의 말허리를 자르며 입을 열었다.
“그 다음은 말하고 싶지 않다.”
민후가 뭔가 더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시지 않는 충격 속에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최대한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그렇게… 음. 그런 의미로… 생각하는 줄 몰랐어. ……미안. 그렇지만…….”
나는 아무래도 너를 친한 친구 외에 다른 뜻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진제환을 경험해 본 바에 따르면 이런 건 바로 말해 두는 게 나았으니까.
민후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도저히 어떻게 말해야 내 뜻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더 좋은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아이러니하지만 내가 민후였다면 지금 이 순간에 훨씬 더 좋은 말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핵심 문구를 말하기도 전에 민후가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 부담을 주려던 게 아니었어.”
“…….”
“무헌아. 네가 날 친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어쩌면 네게 이미 한발 앞서 다가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난 도저히… 친구로만 남을 수가 없어. 한 번도 네게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그렇게 남는 건 싫어.”
나를 내려다보는 민후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제 바로 오지 않은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어. 하루 종일 생각해서 결국 결론을 내리고 여기까지 온 거야. 너는 날 친구로만 생각해도 좋아. 부담 갖게도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민후가 주먹을 소리 없이 말아쥐며 숨을 몰아쉬었다.
“곁에 항상 내가 있다는 건…… 그것만은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
“욕해도 괜찮아. 미안.”
왜. 어째서일까.
나는 진제환 이후 두 번째로 똑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민후라면 누구에게도 모자람 없이 좋은 남자친구가 될 테고 성격도 좋으니 친구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어째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자학은 아니지만 나는 객관적으로 그다지 잘나지도, 내세울 것도 없는 놈인데.
“왜… 언제부터…….”
“왜 너냐고 묻고 싶은 거야? 언제부터냐고?”
민후가 별로 웃기지 않다는 듯한 눈으로 메마르게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런 거 나도 몰라. 널 처음 봤을 때부터인 게 당연하잖아…….”
그리고 민후는 내가 더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문틈 사이로 사라지는 금갈색 머리칼을 멍하니 바라보며 문득 전에 몇 번 그랬던 것처럼 한 번 손으로 만져 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민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민후가 왔다 갔다는 흔적인 케이크 상자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내가 매우 비겁한 놈이라는 생각을 했다.
입원 후 4일. 이쯤 되었으면 진제환이 올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열 형이 두 번이나 오고 사부님과 사모님이 기어이 병원에 찾아와 나를 붙들고 눈물바람을 일으키고 돌아가는 동안 진제환은 한 번도 내 병실에 찾아오지 않았다.
진제환이 검도장에는 찾아왔었느냐는 내 질문에 사모님은 눈물을 닦아내며 그러고 보니 그 애에게서 [한 달 정도는 개인 사정상 검도장에 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었다고 말해 주었다.
민후는 그날 이후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주열 형이 민후를 만났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미약한 끄덕거림 외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충격적인 일을 너무 연속으로 겪은 탓에 회복이 느릴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상태는 그럭저럭 호전되어 4일째인 오늘은 조금 정도라면 목발을 짚고 바깥에 나가 잠깐 바람을 쐬어도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즉시 윤석호에게 메일을 넣어 이제 휴대용 게임기를 보내 주어도 괜찮다는 뜻을 알렸다.
답메일은 없었지만 윤석호의 반응은 신속했다. 그날 오후 곧바로 내 병실에 제법 커다란 상자를 품에 안은 퀵 배달 서비스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강무헌 씨 본인 맞으십니까?”
“네.”
“여기, 사인 부탁드립니다. 네…… 확인되셨습니다.”
직원이 내민 VT수첩에 손가락으로 대충 사인을 하자 허공에서 승인되었다는 파란색 패턴이 떠올랐다. 혼자서 상자를 뜯지 못하는 나를 위해 친절히 직원이 열어주고 간 상자 안에는 완충제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두껍게 감싸인 기계가 들어 있었다. 그 완충제들을 인내심을 갖고 한참 동안 풀어내자 겨우 미스트 휴대용 접속기기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휴대용 기기라기에 대체 어떤 형태인가 했더니 머리에 쓰는 오토바이 헬멧 같이 생긴 장비 하나와 뭔지 모를 벽돌처럼 생긴 사각형 기계 하나, 그리고 어디에 연결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케이블 코드 하나가 전부였다.
전용 패키지 상자가 아닌 일반 택배 상자에 담겨 왔다는 점에서 이것이 정식으로 나온 제품이 아니라 시제품이라는 것이 실감났지만 단지 그것뿐, 도대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으려니 상자 밑바닥에서 편지 봉투 하나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윤석호도 머리가 있다면 사용 설명서도 함께 첨부해 줬겠지.
나는 겨우 안심하고 그것을 힘겹게 끄집어내 편지를 펼쳤다.
[강무헌 씨에게. 약속한 대로 물건을 보내드립니다. 본체를 아무 데나 1미터 이내의 탁상 같은 곳에 안전하게 놓아둔 뒤 전면에 있는 버튼을 누르고 파란 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면 헬멧을 쓰세요. 충전은 무선 유선 모두 지원되지만 유선이 더 빠르기에 유선 케이블을 함께 첨부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도록 해 주시고 이 쪽지는 보시는 즉시 구겨서 물에 적셔 버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