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 부장님! 제가 드리는 술 한 잔 드셔야죠!”
“아니아니, 제가 먼저 따라드릴 거거든요?”
술에 그다지 강하지 않은 자신을 익히 알고 있는 팀원들의 심술궂은 표정을 보며 남무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마 전에 미국 시찰단이 왔을 때 자신들은 일을 하라고 들여보냈으면서 혼자서만 보고 왔다는 이유로 원성이 아주 자자한 상태였다. 이 틈을 타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마오주 병을 든 사원들의 눈에서 강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만은 절대 취해서는 안 되는데….’
한편 옆에서는 눈치 없는 2팀 부장이 껄껄 웃으며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오오, 인기 많아, 남 부장. 젊어서 그런가? 나도 젊을 적엔…….”
“부장님. 제 술 안 받아주시는 거예요? 네?”
“남 부장님, 제 술도….”
“그거 마시고 나면 제가 드리는 오리고기도 같이 드셔야죠.”
미치겠군. 사이에 낀 채 난감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무건은 갑자기 품속에서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구세주를 만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소영 씨인가? 역시 내 사랑! 구원의 천사!’
남무건은 약지에 낀 커플링에 키스라도 하고 싶은 기분으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 이름도 보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잠깐 전화가 왔네요. 받으러 나갔다 오겠습니다. 하하.”
“누구 전화인데 그렇게 바로 받으러 가세요! 애인?”
“돌아오시면 이거 다 드셔야 됩니다!”
우우 넘치는 원성을 뒤로한 채 가게 바깥으로 나와 화면을 누른 남무건의 귀에 들려온 것은 뜻밖의 목소리였다.
[ 아. 받았군. 오늘 회식한다며? ]
“……지부장님?”
최근 연락이 없었던 윤석호가 전화 너머에 떠오른 작은 얼굴로 싱긋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부탁할 게 있어서 걸었네. 요즘 일은 할 만한가? ]
회식 자리에서 구해 준 사람이 하필이면 저 남자라니. 남무건은 치솟는 좌절감에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그의 질문 안에 숨겨진 중의적인 의미를 파악하고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네. 그런대로 잘 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위험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이 일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들었다면 매우 하드한 직업이라도 가진 줄 알겠지만 남무건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권천우에 관해서였다. 윤석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뭐, 자네라면 잘 할 줄 알았어. 그나저나, 오늘 먹는다던 오리고기는 맛있나? ]
“…지금 그거 물어보시려고 전화하신 겁니까?”
무슨 조화인지 이번 회식 메뉴는 정말 북경오리로 정해지고 말았다. 남들은 맛있다며 먹어댔지만, 남무건은 썰려 있는 그 기름진 고기를 보는 순간 권천우의 말이 떠올라 왠지 소름이 끼쳐 하나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불퉁한 남무건의 표정을 본 윤석호는 [ 이런, 맛없어? ] 하면서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맛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 뭐 자네가 밥을 잘 먹고 못 먹고까지 내가 챙겨줄 건 아니니까 넘어가지. ]
이 인간. 오랜만에 봐도 싫다. 정말 싫다…! 남무건은 휴대폰이 부서지도록 힘을 주지 않기 위해 필사의 인내를 기울여야 했다.
[ 원래 거기 가도록 말해 뒀던 사람이 한 명 길을 잃어서 빠졌다고 연락이 와서 말이네. 아마 택시를 타고 곧 도착할 거야. 그쪽의 몇몇 사람들과는 이미 인사했겠지만 모두와 보는 건 처음일 테니 자네가 그를 안내하고 소개 좀 해 주게. ]
“예? 누구…… 설마?”
순간 머릿속에 미국 시찰단이 스쳐 지나간 남무건이 조심스럽게 묻자 윤석호가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시찰단 중 한 명이야. 폐가 되지 않게 다들 잘 대접하게. ]
“아니, 그런 중요한 말을 대체 왜 저한테….”
이 자리에는 자신보다 더 높은 책임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시찰단의 일원씩이나 되는 사람을 자신이 데리고 가서 소개시키면 꼴이 어떻게 되겠느냔 말인가.
[ 지금 회식장 밖 아닌가? ]
윤석호는 하라는 말은 안 하고 뜬금없는 질문이나 했다.
“…그런데요.”
[ 그러니까 거기서 담배나 피우면서 기다리다 택시가 오면 안내해 주면 되잖아. 우연히 먼저 마주쳤다고 하고. ]
“네?”
그런 허술한 말이 통할 리가 있나. 게다가 자신은 담배도 안 피우는데! 항의하려던 남무건의 말은 자기 할 말만 다 한 뒤 [ 아, 누가 또 왔군. 그럼 잘 부탁하네. 오리고기 내 대신 많이 먹고. ] 하고는 얄밉게도 통화를 종료해 버린 윤석호 때문에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아…….”
허탈함과 함께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전화를 잠깐 받으러 간다는 핑계 때문에 남무건은 현재 겉옷도 벗어두고 온 상태였는데, 오늘의 기온은 무려 영하 10도를 맴돌고 있었다. 옷을 가지러 다시 돌아갔다간 분명 팀원들에게 잡혀 나오지 못할 것이 뻔하니 그 말은 즉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택시를 기다리기 위해 여기서 이러고 멀뚱히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미치겠군.’
“남 부장님? 여기 계셨군요.”
추위를 자각하자마자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분노의 힘으로 덥히며 휴대폰을 도로 넣던 남무건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했다.
“아아… 권천우 씨였군요.”
“애인과 뭐 비밀 통화라도 하셨습니까? 얼굴이 빨간데요?”
네 말대로 이것이 소영 씨와의 사랑의 통화로 인해 얼굴이 붉어진 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지금 이 붉은 기는 한 인간 너구리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인해서란다. 남무건은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지금 들어가실 건가요?”
권천우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며 빙긋 웃었다.
볼 때마다 요플레나 요거트만 먹으려고 들기에 왠지 담배를 피울 것 같진 않았는데, 권천우와 담배라. 남무건은 익숙하게 불을 붙이는 권천우를 보며 왠지 낯선 기분을 느꼈다.
“아니… 바람을 쐬러 나온 거라 좀 더 있을 겁니다.”
“그러기엔 지금 날씨가 좀 추운데요.”
그건 나도 안다. 나도 안다고! 여기 이러고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할 수 없는 남무건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뭐. 지금 돌아가면 술을 엄청나게 먹어야 할 것 같으니까요.”
“흐음. 하긴 제가 나오기 전에도 3팀 분들이 남 부장님 돌아오시길 많이 벼르고 계시더군요.”
담배를 문 채 쿡쿡 웃은 권천우가 갑자기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남무건에게 내밀었다.
“추우실 테니 잠깐 걸치고 계세요. 전 추위에 강해서 이 정도도 별로 안 춥게 느껴지거든요.”
“…….”
하긴 머리카락도 피라도 부은 것처럼 새빨간 것이 전혀 춥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만, 이놈이 또 무슨 속셈일까. 남무건은 아직 받지 않은 옷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온기에 기뻐하는 몸과 반대로, 스산해지는 등골에 권천우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혹시 오해하시진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게이도 바이도 아니거든요. 게다가 애인 있는 분께 흑심을 가지지도 않고요.”
아무도 그런 의미로 오해 안 했다. 제발 그쯤에서 그만둬. 남무건은 권천우의 말 하나로 순식간에 멜랑콜리해진 분위기 때문에 팔뚝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저 때문에 뭘 그렇게까지.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입술도 벌써 살짝 파랗게 질렸고, 떨고 계시잖아요.”
거침없이 남무건의 현 상태를 지적한 권천우가 후 하고 허공으로 연기를 내뿜은 다음 다시 필터를 입에 물고 외투를 펼쳐 남무건의 어깨 위에 내려놓았다. 남무건은 순간적으로 어깨에 벽돌이라도 올려놓는 듯한 부담을 느끼며 끙 하는 신음을 흘렸다.
“그럼 잠깐만….”
그놈의 미국 시찰단을 태운 택시가 오기 전까지는 어차피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그럴 바에야 놈의 호의도 받아들이고, 자신의 몸도 보신하고, 겸사겸사 권천우를 떠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이성의 충고가 남무건을 설득했다.
권천우는 가게 앞에 꾸며놓은 정원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없이 담배만 피워댔다. 남무건은 잠시 망설이다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권천우 씨. 혹시 프로그래밍 할 줄 압니까?”
“프로그래밍요?”
흘긋 옆으로 돌린 권천우의 눈동자는 연기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순수한 의문만이 담겨 있었다.
“예전에 조금 배운 적은 있습니다.”
권천우의 대답에 남무건은 거칠게 뛰던 심장이 겨우 한고비를 넘겨 도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 말이 쉬워지지.
“그렇다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군요. 내 친구 중에 보안 프로그래밍을 직업으로 삼은 녀석이 있는데, 요즘 자기가 일하는 회사 시스템을 집요하게 해킹하려 드는 녀석들이 있어 골치 아프다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그놈들이 푸는 바이러스처럼 아주 독한 놈들이라고요.”
교묘하게 보안과 해킹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이야기를 듣는 권천우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권천우는 남무건의 이야기를 듣고는 왠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바이러스라…. 골치 아프시겠네요.”
“차라리 우리 쪽 일이 더 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린 서비스직에 더 가깝지만 말이죠. 요즘 친구가 너무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얼른 그놈들이 잡혔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남무건의 말이 다 끝날 때까지도 권천우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이 정도론 찔리지도 않는 건가. 하긴 이놈이 데이터를 가져가면서 인사까지 한 그놈이라면 간도 무시무시하게 크겠지.’
“보안이라면 여기 지부도 굉장하지 않나요.”
오늘은 날이 아닌가 싶어 포기하려던 남무건에게 별안간 권천우가 새로이 말을 걸었다. 남무건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놈을 바라보았다.
“얘기만 들어보았지만, 슈퍼컴퓨터 미스트의 보안은 그야말로 철통이라면서요. 접속 캡슐을 나사 하나까지 다 분해해 봤어도 미스트를 파헤칠 수는 없었다던 말이 넷에서 유명하더군요.”
“하하… 자세히 알고 계시는군요.”
“네. 뭐 제가 일하는 곳이 운영관리 부서니까 아무래도 관심이 가서요.”
권천우가 말없이 웃었다. 남무건은 이것이 놈이 던지는 미끼인지, 뭔지 파악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알아보니 정말 철통 보안이더군요. 내부인이라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여러 가지 함정을 설치해 놨다던가요. 허술한 듯하면서 빈틈이 없다는 평이었죠.”
예전에 조금 프로그래밍을 배워본 입장에선 그저 신기하기만 하지만요, 하고 권천우가 담배 연기 사이로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권천우 씨더러 보안 의견을 내 보라면 뭐라고 할 겁니까?”
남무건이 긴장으로 인해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권천우는 어딘지 알 수 없는 먼 하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 같은 병아리 임시직원에게 무슨 말씀을. 하하. 하지만 만약 저더러 방법을 내 보라고 한다면 전 데이터를 바꿔치기해 가짜를 심어 놓는 걸 추천할 것 같군요. 적은 그저 데이터를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에만 빠져 다급해져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간단하게 허점을 찌를 수 있거든요.”
맙소사.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말이 꿈이 아니라 생시인가. 남무건은 차마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한 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그건 정확히 운영자용 캡슐의 관리일지를 윤석호가 가짜로 넣어두었던 걸 스파이가 가져갔던 것과 똑같은 행위였다.
‘…정말로 스파이인가.’
남무건의 어두워진 시선을 알아챈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권천우는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추가로 또 던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마 그 가짜 정보를 가져간 적들은 나중에야 속았다는 걸 알고 분개하게 되겠죠. 생각만 해도 기분 좋지 않나요.”
“권천우 씨. …당신은…….”
끼이이익!
남무건이 막 힘겹게 입을 열려 했을 때, 그들이 서 있는 가게 대문 앞으로 택시 한 대가 거칠게 몸체를 비틀며 브레이크를 밟아 멈춰 섰다.
“땡큐, 땡큐. 한국의 유인택시는 정말 총알이라는 비유가 아깝지 않네요. 오다가 토하는 줄 알았어.”
거기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택시기사에게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인사를 하며 내린 한 외국인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남무건은 드디어 와야 할 것이 왔음을 느꼈다.
“누구죠, 저 사람?”
“글쎄요. 저도 잘….”
남무건은 돌아서는 외국인의 흐린 금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가게에서 다른 약속이 있어 온 사람이 아닐까요.”
문 앞에 서 있던 남무건과 권천우를 발견한 외국인이 슬렁슬렁 걸어 다가왔다. 그는 두꺼운 코트를 입긴 했지만 안쪽 옷은 목이 늘어나고 셔츠가 바깥으로 빠져나온 너저분한 스타일에, 사원증을 그대로 목에 걸고 있었다.
“오. 혹시 당신들 여기서 오늘 회식한다는 운영관리 부서 사람들?”
“그렇습니다만…….”
“드디어 제대로 왔군. 나도 거기 가야 하니 좀 안내해 주세요.”
“실례지만, 이름이…?”
남무건의 질문에 외국인 남자가 반쯤 감은 듯한 눈을 내리깔며 자신의 사원증을 가리켜 보였다.
“유프 카윗. 보면 알겠지만 미국 시찰단이죠.”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얼른 먹고 싶군요. 다 먹은 상태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남자의 모든 것이 다 귀찮아 보이는 얼굴을 보며 남무건은 그가 바로 미스트의 초기 개발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곧바로는 매치하지 못했다.
‘유프 카윗……. 그 유프 카윗?!’
유프 카윗. 미스트를 이루는 프로그램 등의 외적인 면을 천재 프로그래머 데이브 A. 리가 만들었다면 방대한 세계관과 메인 줄기에서 이어져 나가는 스토리, 셀 수도 없이 많은 직업과 NPC들을 설정하고 밸런스를 맞추는 등의 내적인 면을 지금과 같이 만들어 낸 데에는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괴짜 기획자가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 고.맙다. 이.번.에도 제대.로 드.워프.족의 의.견을 받아.다 주었군…. 』
우렁우렁 울리는 코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내게서 드워프 족의 의견을 들은 코르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다시 목소리를 냈다.
『 인.간 네가 가.져다 준 정보.를 통.해 나.는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할 것.이다. 이.것.으로 부탁.은 끝.이.다…. 』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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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래곤의 위엄’이 스킬목록에서 사라집니다!
- 슈페리어의 기억 퀘스트 5를 완료하였습니다!
코르의 부탁이라는 기나긴 서브퀘스트를 수행하고 나서야 보게 된 완료라서일까. 맨 마지막에 나타난 슈페리어의 기억 퀘스트 완료라는 글자가 이만큼 반갑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