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체무킨이라 이름을 밝힌 드워프의 마스터, 철의 장인을 향해 후드를 벗고 인사를 했다.
“마법사 카프로스라고 합니다. 염룡 코르의 부탁을 받아 철의 장인을 찾아왔습니다.”
“그래. 염룡이 나에게는 무슨 볼일이라고 하던가?”
“그것은….”
말을 하려다 말고 아직까지 나가지 않고 남아 있던 체무킨의 딸, 미다한이라는 드워프를 흘긋 바라보자 체무킨이 눈치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미다한. 나가 있어라.”
“하지만 아빠.”
“어서.”
결국 미다한은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이제 되었나?”
“네. 감사합니다.”
나는 체무킨에게 코르의 부탁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염룡은 지금 세계 북쪽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이변에 대해 자신이 움직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타 종족들에게 의견을 묻고자 합니다.”
“우리 말고도 먼저 갔던 곳이 있었겠지? 아니면 우리 다음 차례인가?”
체무킨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엘프 쪽은 이미 갔었습니다.”
“엘프의 수장은 아직도 그 건방진 금발 여자인가?”
그 건방진 금발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루미네가 금발인 것은 맞으니 대충 그렇다고 하면 되겠지.
“예.”
“북쪽에서 느껴지는 이변이라……. 그게 뭔지는 듣지 못했나?”
듣지 않았어도 나나 뒤쪽의 키온 형, 루크레이신은 이미 퀘스트 동영상들을 통해 그 ‘불길한 이변의 기운’ 운운하는 것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모른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종족은 엘프들처럼 가만히 앉아서도 통찰력을 보일 수 있거나 하는 그런 힘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괜히 이날 이때껏 살아온 것은 아니라 짐작 가는 바는 있지.”
체무킨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 닦아냈다.
“나 혼자서 답변할 사항은 아닌 것 같네. 금의 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지. 모든 동족들의 의견을 모아 답변할 테니 그때까지 당신들은 이곳에 손님 자격으로 머무르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 인사는 할 것 없고, 좀 빨리 나가 주게. 그쪽에서 내가 싫어하는 용의 기운이 풀풀 날아들어 와 속이 별로란 말이지.”
“…….”
“나가면서 미다한에게 금의 회의를 소집한다고 말해 주게. 그럼 그 아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문밖으로 나가자 뭔가 골이 나도 단단히 난 듯 아까보다 눈꼬리가 더 뾰족해진 미다한이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빠가 뭐라고 하시던가요?”
“금의 회의를 소집한다고 전해 달라고 합니다.”
그 말에 미다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금의 회의를….”
“우린 그때까지 여기 손님 자격으로 묵어야 한다니까 어디로 갈지 좀 알려 줘요.”
한참이 지나도 충격이 큰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에게 키온 형이 말을 걸었다. 미다한이 그제야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따라오세요.”
그녀가 안내해 준 곳은 건물 밖에 있는 집 중 한 곳이었다.
“이전 집주인들이 새집을 지으면서 비워버린 곳이에요. 적당히 치우고 쓰도록 하세요.”
“뭐야? 인간이 저기 묵는대?”
“그런가 봐.”
역시나 우리가 마스터의 작업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구름처럼 몰려든 드워프들이 뒤에서 쑥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 어지간히도 호기심이 많은 종족인 듯했다.
“그럼 저는 회의 소집을 알려야 하니 이만.”
쌀쌀맞은 태도로 인사한 미다한은 왠지 묘한 눈빛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가 버렸다.
‘저거… 아까도 날 그렇게 보지 않았었나?’
“음…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단 들어가자.”
키온 형이 우리가 들어가기엔 좀 작은 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호기심 어린 드워프들의 눈빛 공세를 피해 안으로 들어가자 빈집이 된 지 꽤 된 듯 먼지가 쌓여 있는 집 안이 눈에 들어왔다.
“끙. 이거 좀 치워야겠는데.”
“더스트 윈드!”
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외친 내 주문에 응답해 생성된 작은 바람이 순식간에 집 안을 빠르게 싹 휩쓸어 문 바깥으로 모든 먼지를 끌고 나가버렸다.
“푸억! 이게 웬 먼지폭탄이야!”
“콜록콜록!!”
‘…이런. 밖에 드워프들이 아직도 있었나.’
나 때문에 때아닌 먼지바람을 맞은 드워프들이 바깥에서 괴로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데 고개를 돌리니 키온 형이 상당히 적응 안 되는 선망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카르야.”
“…….”
“그거… 진짜 편해 보인다. 왜 현실에선 그런 걸 못 쓸까? 그거 하나면 청소도 10초면 끝낼 수 있을 텐데…….”
보기엔 그게 간단해 보여도, 놓여 있는 그릇 등의 깨질 만한 물건들은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적당히 먼지만 쓸고 나간 것이라 상당한 이미지 조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형은 아마 모르겠지. 진심으로 나를 부러워하는 형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본 루크레이신이 “왜 그런 걸 부러워하고 그러죠?” 하고 말했다.
“집에 청소 로봇 없어요? 최신형은 알아서 물청소, 락스청소, 곰팡이 제거까지 다 해 주는데 뭐가 문제예요?”
“그건 비싸잖아. 우리 집에 있는 건 옛날에 고장 나서 사람이 직접 쓸고 닦고 있다고.”
형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넋두리를 했다.
“내 월급은 월급이 아니야. 월급통장은 돈이 잠깐 머물렀다 가버리는 정류장일 뿐이지….”
씁쓸한 눈으로 먼지가 사라진 집 안을 둘러본 형이 사이즈가 작은 침대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건 그렇고 여긴 구경을 좀 하려고 해도 저 드워프들이 계속 따라다닐 것 같은데 어쩐다?”
“인생에 누군가 그렇게 따라다닐 때는 얼마 없을 테니 지금 즐겨 두세요.”
“…내가 네놈을 여기서 한 대 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너보다 밥을 먹어도 2천 그릇 이상은 더 먹었기 때문일 거라는 걸 알아둬라.”
형이 루크레이신을 노려보며 살기 어린 중얼거림을 흘렸다.
“재수 없어서 나는 좀 자면서 바깥에서 밥 먹고 와야겠다. 그 금의 회의인지 은의 회의인지는 언제 하는지 나중에 물어봐 줘라, 카르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형은 수면 모드로 바꾸어 눈을 감았다. 수면 모드는 몸은 게임에 남겨둔 채 몇 시간 동안 잠시 오프라인에서 일을 보고 올 수 있게 만든 모드로, 그동안 체력을 많이 회복시킬 수 있어 모험을 즐기는 유저들이 자주 사용하는 시스템이었다.
“흠. 갔네요.”
눈을 감고 있는 형을 내려다보던 루크레이신이 무슨 꿍꿍이속인지 갑자기 형의 볼을 꾹꾹 찌르기 시작했다.
“…뭐 하냐.”
“음…. 수면 모드에선 옷을 벗길 수 있다던데, 그게 사실일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
아무리 봐도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가지고 놀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루크레이신이 키온 형의 손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뭐, 이분의 벗은 몸은 보고 싶지도 않고, 그랬다간 진짜 화내겠죠? 그건 싫으니까 관둬야겠네요.”
밑도 끝도 없이 계속해서 도발만 해대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루크레이신도 정도라는 걸 생각은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까지 그다지 큰 소음 없이 올 수 있었던 것도 의외로 두 사람 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참아주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정말 싫었으면 진작 뭔가 일을 냈겠지….’
“형, 나랑 같이 드워프 마을이나 좀 돌아보겠어요?”
루크레이신이 생선을 눈앞에 둔 고양이처럼 달콤하게 웃으며 제안해 왔다. 나는 왜 루크레이신이 무슨 제안만 하면 이렇게 내키지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가요.”
루크레이신이 비켜준 자리를 통해 고개를 숙이고 작은 문밖으로 나가자 아직까지도 근성 있게 몰려 있던 드워프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머. 진짜 털이 없어. 저 손 좀 봐.”
“저 인간은 머리칼 색도 특이해. 자수정 빛을 비춘 은 같네.”
‘…여길 어떻게 뚫고 지나간다.’
몰려 있는 드워프들의 얼굴을 보다 보니 다들 거기서 거기라 아까는 몰랐지만 상당히 어려 보였다. 나이 든 드워프들은 우리를 보아도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는 정도였다.
“형. 뭐 해요? 가야죠.”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던 루크레이신이 이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표정으로 보아 놈은 진심으로 지금의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응? 뭐가요?”
‘…정말 신경 안 쓰는군.’
내 눈빛을 보고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아차린 듯한 루크레이신이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날 보면서도 멀쩡한 형이 고작 저 정도에 신경 쓰는 거예요? 이거 실망인데요. 사람이 아무리 많아봤자 무밭이나 배추밭 한가운데 서 있는 거랑 다를 바 없어요. 정 신경 쓰이면 여긴 차가 많은 도로 한복판이라 빵빵대는 차가 많구나, 하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아무렇지도 않아질걸요.”
“…….”
실로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마인드를 가지면 저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건가 하는 의심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보지.”
놈의 조언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내겐 꼭 필요해질 것 같았다.
우리는 뒤에서 계속해서 따라오는 드워프들을 무시한 채 그대로 나가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광석을 일정하게 잘라 모자이크 타일처럼 채워 넣은 바닥에서는 빛이 났고, 장난감 집처럼 작은 건물들이 저마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통일감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돌아다녀 본 결과, 우리는 드워프의 도시가 중앙에 위치한 철의 장인의 작업실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신전 같은 건물을 중심으로 대략 4구역 정도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은 주거공간이었지만 어느 곳에는 길게 늘어선 시장도 있었고, 상점가도 있었다.
특이한 점은 곳곳에 여러 가지 기묘한 그림이 그려진 간판을 내건 작업소라는 건물이 많았다는 것인데, 그 어떤 곳을 지나다니든 우리는 시선과 수군거림의 중심에 있었다.
“흠… 역시 이종족의 도시라고 해도 많이 다른 건 없네요.”
어느 정도 큰 거리를 다 돌았다 싶었을 때 루크레이신이 모자 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조금 더운 것 빼고는요.”
그 말대로 이곳은 바깥에 비해 상당히 후텁지근한 느낌이 들었다. 땅속에 있는 곳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어느 정도 지나니 별로 신경 쓰이지 않죠?”
신경 쓰이지 않다니, 뭐가… 하고 반문하려고 했던 나는 그것이 우리를 쳐다보는 드워프들의 시선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조금 놀랐다. 어느새 정말로 드워프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상당히 무뎌져 있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꽤 많은 숫자의 드워프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데도 루크레이신이 말하기 전까지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확실히….”
“하하. 형이 저보다 더 이런 걸 잘할 줄 알았다니까요. 어차피 다 똑같은 거예요. 차든 사람이든.”
졸지에 차 취급을 당한 드워프들이 저 말을 들으면 화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실제로 신기하게 효과를 보기는 했으니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거기, 인간들!”
그때, 갑자기 우리를 부르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집 앞에 서 있는 늙은 드워프가 보였다.
“저희 부르신 겁니까?”
“그럼 여기 인간이 너희들 말고 누가 있어?”
혹시나 싶어 한 번 더 물어본 것인데 한심하다는 듯이 면박을 준 드워프 노인이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마침 키가 큰 놈들이 왔으니 잘 됐군. 날 좀 도와주게.”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도와 달라니…. 내 의문을 알아차린 것처럼 노인이 자기 집 지붕 위를 가리켜 보였다.
“어제 사다리를 빌려 이 위에 올라가서 작업을 하다가 그만 공구 하나를 놓고 왔지 뭐야. 오늘은 사다리를 빌릴 수 없어서 고민 중이었는데 너희들은 키가 크니 금방 가져올 수 있겠지? 부탁하네.”
띠링!
- 드워프 노인의 부탁 퀘스트를 받으셨습니다!
“…형도 퀘스트가 떴나요?”
루크레이신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놈이 입술을 비틀며 불만에 찬 듯 투덜거렸다.
“받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퀘스트를 줘서야….”
“에잉, 해 줄 거야, 안 해 줄 거야? 안 해 줄 거면 가고!”
노인이 가리킨 지붕의 높이는 2층 정도로 보통 드워프들의 집보다 상당히 높았다.
“에어리얼 서번트.”
슈욱!
눈을 감으면서 주문을 외치자 곧바로 바람이 일어나며 감은 눈 안으로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가 나타났다. 나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움직여 지붕 위까지 올라가도록 시켰다. 과연 지붕 위에는 노인의 말대로 좀 이상하게 생긴 공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저 정도면 들 수 있으려나….’
나는 공구의 주변을 빙빙 돌며 살펴보다 에어리얼 서번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밀어 봐.”
순간 지붕 위에서부터 세차게 불기 시작한 바람 때문에 주변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쿨럭, 쿨럭쿨럭! 뭐야?!”
“눈에 먼지 들어갔잖아!”
그러나 공구는 의외로 상당히 무거웠는지 이 정도의 바람에도 거의 밀리지 않았다.
‘음….’
그렇다면 플라이를 써서 가져와야겠군,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루크레이신이 위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있나요?”
“응.”
“좋아요, 그러면.”
그러고는 루크레이신이 제자리에서 그대로 푹 꺼지듯 사라졌다가 순식간에 주변에 있는 나무와 집 벽을 훌쩍훌쩍 밟고 뛰어올라 지붕 위로 사라졌다.
잠시 뒤 다시 내 곁으로 착지한 루크레이신의 손안에는 공구가 들려 있었다.
“와… 방금 저 인간 봤어? 어떻게 한 거야?”
“눈 깜박했더니 그냥 쉭 하고 갔다 오는구만!”
뒤에 몰려와 있는 드워프들이 뭐라 감탄하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루크레이신이 노인에게 공구를 건넸다.
“오, 오오. 역시 키가 큰 놈들이니 금방 가져오는군!”
“…….”
아니, 방금 그건 키와는 전혀 상관없는데….
“이놈이 있어야 오늘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단 말이지! 고맙네, 고마워. 능력 있는 인간들이구만!”
띠링!
- 드워프 노인의 부탁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 보상으로 드워프 종족의 당신에 대한 호감이 +20% 올라갑니다.
“…음?”
호감이 올라갔다라… 그러면 설마?
주변을 둘러보니 드워프들의 눈이 왠지 한층 더 반짝거리고 있었다. 약간 불안한 느낌을 받으며 침묵하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고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기, 우리 작업소에 와서 일 좀 도와주지 않겠나?”
“저 능력이라면 우리 작업소에서도…!”
“방금 그 바람, 인간 당신들이 한 거야? 응?”
‘이런…….’
호감도가 올라간다는 게 이런 의미였다니. 난감해하며 서 있는데 루크레이신이 여유 있게 앞으로 나섰다.
“저흰 지금 돌아가야 하니 부탁이 있으면 당신들끼리 순서를 정해서 저희가 묵고 있는 곳으로 찾아오세요. 들어 보고 할 수 있는 거면 해 드릴 테니까요.”
“오오오. 화통한 인간일세.”
“인간은 욕심 많고 악독한 것들이라고 배웠는데,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르겠는걸.”
루크레이신의 제안이 다행히 마음에 들었는지, 드워프들은 이내 자기들끼리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는 무조건 나야!”
“무슨 소리야? 나이가 더 많은 나지! 내가 너보다 20년 먼저 태어난 걸 잊었나?”
“그 엉킨 털이나 빗어놓고 말해, 더러운 놈들아. 당연히 제일 잘나가는 우리 작업소가 먼저지.”
“뭐야? 고작 코딱지처럼 무른 돌밖에 못 다루는 놈들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
“형, 가요.”
저것이 의논하는 장면인지, 피 터지게 싸우는 장면인지 의심 갈 만큼 서로 격렬하게 싸워대는 드워프들을 보며 왜 아무도 안 말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루크레이신이 달콤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아마 지금쯤 집에 있던 분도 깼을 것 같으니 돌아가야죠.”
“그 손은 뭔데.”
“전 가끔씩 옆 사람의 손을 잡지 않으면 안정되지 않는 심각한 병이 있어서요.”
눈도 깜짝 않고 헛소리를 해대는 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라.”
계속 헛소리를 해댈 셈이면 손에 인페르노라도 쥐여 줄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단발성 농담이었는지 루크레이신이 아쉬운 표정을 빙자한 빙글빙글 웃는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흐음. 역시 전과 다름없이 쿨하네요.”
애초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난질로 사람이 쿨한지 안 쿨한지를 판단하려 든다는 점에서 역시 루크레이신은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다시 키온 형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향했다. 형은 마침 깨어나 보니 우리가 없어져 밖에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딜 다녀온 거냐, 카르야?”
“잠깐 도시 구조를 좀 보고 왔어.”
“형, 섭섭하네요. 그런 딱딱한 말로 저희의 데이트를 깎아내리려 들다니….”
옆에서 루크레이신이 또다시 헛소리를 했지만 이번에는 키온 형조차 걸려들지 않았다.
“데이트? 데에~이트 같은 소리 하네. 내가 네놈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안 믿는 놈이야. 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형, 조금 이따가 드워프들이 퀘스트를 좀 많이 들고 올지도 몰라.”
일단 형에게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아 말하자 키온 형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엉? 퀘스트? 퀘스트라니. 왜?”
“아까 지나가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간략히 이야기를 들은 키온 형이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빠졌다.
“드워프들의 퀘스트라…. 뭐 여기 있는 동안 할 일도 없으니 괜찮겠는데.”
“…다들 여기 계셨군요, 인간들이여.”
그때, 노크조차 없이 미다한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을에서 소란을 피우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려고 왔습니다.”
여전히 샐쭉하기 그지없는 그녀에게서 상당한 압력이 느껴졌다.
‘……소란?’
“당신들 때문에 온 두란베르크에서 갑자기 난리가 나버렸잖아요. 곧 금의 회의를 하러 모여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할 거죠?”
“그건 저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나를 대신해 루크레이신이 대답했다.
“드워프 분들이 저희에게 부탁할 게 많다고 해서 순서를 정해 달라고 한 것뿐인데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우리 때문에 소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들었지만, 정확히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던 듯 미다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몰랐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우리 종족들은 호기심이 강하고 뭐든 경쟁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이들이 많으니 앞으로는 되도록이면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해 주세요.”
“그건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미다한이 루크레이신을 보던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리다가 역시나 전에도 느꼈던 그 기묘한 표정을 또 지어 보였다.
‘세 번이나 나에게만 저러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왜 저러는 거지?’
“…네. 말씀하시죠.”
“그 금의 회의라는 것은 언제 소집해서 언제 끝납니까?”
“회의는 모든 작업소의 대표가 모여서 진행하는데, 각자 현재 하고 있는 작업이 끝난 후에나 오려고 할 테니 일주일 뒤쯤 시작해서 그로부터 3일 후에 끝날 거예요.”
‘…작업이라고?’
유난히 드워프들에게서 많이 나오는 그 ‘작업’이란 게 대체 무슨 일을 뜻하는 것인지 상당히 궁금했지만 나는 일단 알았다고 대답했다. 미다한은 여전히 그 묘한 이채를 띤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흥 하는 표정으로 뒤돌아서서 나갔다.
“아이들이 당신들 때문에 괜히 들떠서 헛바람이 들면 곤란해지니 되도록 여기에만 있어 주세요. 그럼 이만.”
“저 드워프 도대체 왜 저리 틱틱대는 거야?”
키온 형이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인간을 싫어하는지도 모르죠.”
루크레이신의 대답은 정석적이었고, 그럴싸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왠지 나를 보는 그녀의 표정이 단지 인간을 싫어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묘한 감이 들었다.
‘좀 시일이 지나면 알 수 있게 되려나.’
그날 이후 드워프들은 자기들끼리의 피 터지는 의논 끝에 겨우 순서를 정해 우리들에게 부탁을 하러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할 의도 정도로만 가져온 듯한, 어디 있는 물건을 가져와 달라든가 불을 붙여 달라든가 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우리가 손쉽게 해내는 것을 보고는 점점 일의 난이도도 올라갔다.
“이 철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그려 놓은 금대로 벨 수 있겠나?”
몇 미터는 족히 될 법하게 긴 돌기둥을 앞에 둔 채 파이프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 드워프의 부탁이 끝나자마자 띠링 하고 퀘스트 안내창이 떠올랐다.
- 멘톨 작업소의 작업소장, 멘톨의 부탁 퀘스트를 받으셨습니다!
“으음. 난 이런 세심한 건 못 하는데.”
키온 형이 기둥에 그어진 금들을 노려보다 손을 들고 뒤로 빠졌다. 그러면 남은 건 루크레이신과 나인데….
“뭐, 같이 하죠.”
루크레이신의 깔끔한 제안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에서 슈페리어 막대기를 뽑으면서 마력을 주입했다.
지이잉-
“…호오. 그거 칼인가?”
부탁을 해 놓고도 내내 무표정이던 드워프 멘톨이 처음으로 내 검에 관심을 보이며 물고 있던 파이프를 빼냈다.
“예.”
“금속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베어지는 건가?”
그야 마력으로 이루어진 날이라도 검은 검이니까 당연히 베어진다. 고개를 끄덕이자 멘톨이 날을 한 번 만져보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상관은 없지만 닿기만 해도 다칠 수 있습니다.”
“으음….”
조용히 경고하자 손이 다치는 것은 싫었는지 멘톨이 아쉬운 기색으로 물러섰다.
“궁금은 한데… 뭐, 그럼 잘라 주게.”
“형은 여기서 자르세요. 전 저쪽 끝부터 자를 테니까요.”
루크레이신은 손에 섀도우 나이트의 단검을 들고 있었다. 기둥보다 작아 보이는 검을 보며 저걸로도 과연 자를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본인이 할 수 있으니 지원했겠지 싶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앗!”
나는 검을 치켜들고 목표물을 노려보며 집중한 뒤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몸에 익은 동작 그대로 내려치기를 시도했다. 마력을 있는 대로 밀어 넣은 투명한 검날이 돌을 가르고 지나간 순간, 약간 빠듯하게 갈리는 손맛이 느껴진다 싶더니 잠시 후 쩌적 소리와 함께 기둥이 그어져 있던 금대로 완벽하게 갈라져 떨어져 나갔다.
“카르 이 자식! 설마 했는데 검은 또 언제 그렇게 잘 쓰게 된 거야?”
뒤에서 다가온 키온 형이 내 목을 끌어안고 머리를 비비는 것을 힘겹게 뿌리치면서 나와 거의 동시에 기둥을 잘랐을 루크레이신 쪽을 바라보자, 놈은 이미 자르고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단검에서 약간 길게 새파란 검기가 맺혀 있는 것을 보니….
“소드 마스터리 스킬을 어느 정도 같이 수련한 결과죠.”
내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눈치 빠르게 깨달은 듯한 루크레이신이 단검을 흔들며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형의 그건 전에 처음 봤을 때부터 위험한 물건이다 싶더니, 검으로도 쓸 수 있는 거였군요. 신기한데요. 그것도 소드 마스터리 스킬하고 연계되는 건가요? 아니면 특수 무기?”
“마법 검술이야.”
“흐음…. 마법하고 연관이 있는 거였군요.”
루크레이신이 탐난다는 듯 내 슈페리어 막대기를 바라보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쉽네요. 배울 수 있는 거라면 배워보고 싶었는데.”
우리가 몇 번 더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돌기둥은 토막토막 모두 나뉘어 쪼개질 수 있었다. 드워프 멘톨은 도움을 받은 데다 귀한 구경까지 했다며 크게 만족했고, 보상으로 또다시 드워프들의 호감을 소소하게 쌓을 수 있었다.
“여어. 또 도와주러 가는 겐가?”
멘톨의 작업소를 나와 가고 있는데 어제 도와주었던 드워프가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아뇨. 이젠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럼 선술집에 같이 가지 않겠나? 많은 녀석들이 너흴 보길 고대하고 있던데.”
“그러죠.”
산뜻하게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라 루크레이신이었다. 별 상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던 형이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흠칫하고 어깨를 굳혔다.
“아니, 그러고 보니…. 잠깐만 있어 봐! 카르는 술이!”
“와하하하. 역시나 호탕한 인간들이군. 기대하라고, 우리 종족의 술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화끈한 녀석이니까 말이야!”
키온 형이 깜짝 놀라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드워프의 커다란 웃음소리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
“형?”
“……됐다, 됐어. 내가 가서 말리면 되니까.”
뭐라고 말했나 싶어 돌아보았지만 형은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 결론을 내린 듯 중얼거리느라 내 부름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선술집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루크레이신의 미소 지은 얼굴에는 ‘재미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하는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음… 뭐….”
“바로 저기라고, 인간들! 어서 들어가!”
드워프에게 떠밀려 약간 작은 스윙도어를 밀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그런대로 조용했던 바깥이 거짓말인 것처럼 엄청난 노랫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듯 들려왔다.
“우리들! 거인의 발자국에서 태어난 불굴의 전사들! 오리하르콘도, 키미르다한도 내 손 안에서는 한낱 새끼고양이에 불과하다네. 이 용암 같은 심장이 터질 때까지, 내 강철 같은 망치질은 멈추지 않지. 많고 많은 광석들 하도 많지만, 바로 내가 오늘의, 오늘의 장인!”
“자, 쭉쭉~ 마시게나!”
“크아! 화끈하구만! 이게 3백 년 전에 담갔던 루비의 심장인가?”
“나 왔네 친구들!”
우리를 데리고 온 드워프가 자리 하나를 꿰차고 앉으며 인사하자 먼저 와 있던 드워프들이 이쪽을 쳐다보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인간들을 데리고 왔나?”
“오늘 일은 다 끝났다기에 데리고 왔지! 자자, 저 친구들에게도 한 잔 주게나! 속옷을 구겨 입에 넣고 뛰쳐나갈 만큼 독한 녀석으로!”
속옷을… 뭐?
“들었어요? 표현이 굉장히 특이하네요.”
루크레이신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며 쿡쿡 웃었다.
“자, 여기 앉게. 인간들.”
이미 얼마나 마셨는지 알딸딸하게 붉은 얼굴을 한 드워프들이 우리를 위해 비워준 자리에 앉자 키온 형이 기를 쓰고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카르야. 넌 오늘 곧 죽어도 마실 생각 마라.”
“왜….”
“그냥, 마시지 마. 그….”
형이 뭐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우리 앞에 머리통만큼 커다란 잔이 하나씩 쿵쿵 소리를 내며 놓였다. 드워프들은 키는 작아도 억센 팔다리 때문인지 힘이 아주 셌다. 그들이 사용하는 웬만한 공구들은 한 손으로 잡기도 힘들 만큼 무거워서 어떻게 이런 걸 그리 쉽게 다루나 싶을 정도였다.
“내 특별히 인간들을 위해 50년 전부터 아껴둔 이놈을 가져왔지! 메탈 맥스 400년짜리!”
“오오오! 내가 매일 침을 흘리며 쳐다봐도 절대 안 주던 그놈을?”
“하하. 인간들은 우리에 비해 연약하다고 들어서, 과연 이걸 한 모금이나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한 드워프가 묵색으로 빛나는 술병을 가져와 자랑하면서 잔에 따라주자 투명한 술이 콸콸 흘러나와 가득 찼다. 우리를 바라보는 술 취한 드워프들의 얼굴에 쓰여 있는 의도는 아무래도 순수하게 술자리를 즐기는 것보다는, 인간들이 과연 자신들의 술을 얼마나 마실 수 있는지에 대해 시험해 보려는 생각인 듯했다.
‘거 참….’
참 순수하게 친해지기 어려운 종족이라고 생각하며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한 자리 건너 옆에 있던 루크레이신이 먼저 잔을 높이 드는 것이 보였다.
“오오오, 마셔라! 마셔라!”
루크레이신이 술을 편히 마시기 위해서인지 모자를 벗자 불빛 아래서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덮으며 흘러내렸다. 늘 가려져 있던 자줏빛 눈동자까지 드러나자, 단지 그뿐인데도 묘한 존재감이 뿜어져 나와 순간적으로 거칠게 입냄새를 뿜어내며 마셔라를 외쳐대던 드워프들이 잠시 조용해졌다.
“…하여간 재수 터지는 얼굴이야.”
키온 형이 내 옆에서 작게 투덜거리며 루크레이신을 노려보았다.
“워… 원샷!”
간신히 어설프게 한 드워프가 외치자 루크레이신이 술잔을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대고는 한 모금 꿀꺽 마셨다.
“…….”
그리고 또 한 모금, 또 한 모금. 계속해서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거침없이 들이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제대로 마신 후에야 잔을 내려놓으며 씩 미소 지어 보였다.
“속옷을 구겨 입에 넣을 정도라기에 기대했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되나요? 실망인데요.”
“와… 와아아! 인간이 메탈 맥스를 다 마셨어!”
“엄청난 인간의 등장이야!”
먹고 나서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도 루크레이신은 얼굴의 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멀쩡하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의외로 별로 도수가 세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인간 친구!”
술에 취한 드워프들이 루크레이신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광기에 찬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제정신인 상태에서 보기엔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쪽도 어서 마셔 봐!”
“그래, 쭉쭉쭉!”
이번에는 화살이 나와 키온 형 쪽으로 날아왔다. 키온 형은 나보고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형이 잔을 들고 벌떡 일어나 꿀꺽꿀꺽 들이켜기 시작했다.
“…….”
처음 한 모금이 들어간 다음에는 등줄기가 딱딱하게 굳으며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지만 형은 루크레이신처럼 끝까지 술을 다 마시는 데 성공했다.
“크…으, 하! 시발!”
탕!
형이 술잔이 부서져라 탁자에 내리꽂자 그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취한 드워프들의 환성이 이어졌다.
“이제 자네 차례야!”
“아니! 내 차례다! 내 차례라고!”
내가 잔에 손을 대려던 것을 가로채며 가져간 형이 고함을 크게 한 번 지른 뒤 다시 한 번 이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맙소사! 한 잔에 천국, 두 잔에 지옥, 세 잔에 무덤이라는 메탈 맥스를 두 잔이나 마시다니!”
“미친 화끈함이다! 와하하하!”
그때 마지막까지 쭉 들이켠 키온 형이 잔을 자기 머리 위에 들어 털면서 천천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 하! 씨발!! 인간이 두 잔을 먹는데, 너넨 드워프가 되어서 내게 질 셈이냐?! 더 마셔! 더 마시라고!”
형의 눈 안에서 새빨간 광기가 번들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도전이냐! 받아주마!! 여기 더 가져와!!”
도발에 걸려든 드워프들이 내게 보이던 관심을 모두 거둔 것을 확인하고서야 키온 형이 고개를 몇 번 흔든 다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
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훅 하고 새빨갛게 변했다.
“괜찮아? 왜 그랬…….”
걱정이 되어 묻자마자 형이 그대로 옆으로 풀썩 쓰러지면서 내 목을 꽉 끌어안았다.
“으으, 씨발… 나도 술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데, 이건 무슨 개 같은 게….”
“형…. 괜찮아?”
“카르야. 우리 이쁜 카르. 욱.”
형이 널 위해 그런 거라는 둥, 뭐라는 둥 횡설수설하던 형이 내 머리 위에 턱을 얹은 채 헛구역질까지 했다. 심하게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일어서려고 하는데 형이 너무 무겁게 내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형이 초점이 흐릿해진 눈으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히죽 웃었다.
“괜찮냐고? 형아는 괜찮다! 그럼! 괜찮고말고.”
“인간들을 만만히 본 우리의 패다! 전사들이여! 마시고 죽자!”
“그래! 마시고 죽자!”
키온 형의 도발 이후 드워프들이 다 같이 술에 취한 개가 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멀쩡한 얼굴을 한 루크레이신이 내 반대쪽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왔다.
“흐음… 완전히 갔는데요.”
내 어깨에 이마를 박은 채 그대로 말이 없어진 형을 툭 밀어 반대쪽으로 쓰러지게 만든 루크레이신이 상태를 살펴보더니 한마디 했다.
“갑자기 왜 저런 거래요?”
“…모르겠는데.”
“여기 술은 그래도 꽤 맛있는 편이에요. 쓰고 비린 맛이 없거든요. 뭘로 만든 건지 궁금해지네요.”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루크레이신의 끝도 없는 호기심에 오히려 내가 질릴 지경이었다. 의자에 길게 뻗어 누운 키온 형을 부축해 자세를 제대로 해 주는데 형이 희미하게 눈을 뜨고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으으, 카르야….”
“…….”
“마시지 마라…. 알았냐…. 마시면 안…….”
“유언은 그만하고 잠이나 자시죠.”
루크레이신이 내 손을 빼내자 형은 도로 눈을 감은 채 각종 창의적인 욕설을 중얼거리며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한 잔 할래요?”
루크레이신이 드워프들이 먹다 남겨둔 술병을 들고 빈 잔을 채우며 권했다. 이번 술은 포도주처럼 붉은색이었다.
“너무 세면 좀….”
“그래요?”
한 모금 작게 머금어 마신 루크레이신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안 센데요. 아까 그거에 비하면 이건 음료수예요. 과일을 넣었는지 단맛도 난다고요.”
아, 그러냐…. 나는 결국 잔을 받아 든 다음 키온 형을 내려다보았다. 형이 내 것까지 마셔가며 마시지 말라고 한 것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거절하기도 그렇고 아까 그것보다 이게 훨씬 약하다니 한 모금 정도 마시고 내려놓으면 괜찮겠지.
결국 나는 나 자신을 과신한 채 한 모금을 마시고, 의외로 정말 맛이 괜찮은 것에 놀라며 또 한 모금을 마셨다.
“…….”
괜찮은 것 같은데. 딱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속에서 갑자기 불길이 훅 하고 배 속에서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르는 듯한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너무…….’
“맛있죠?”
웃고 있는 루크레이신의 얼굴이 서서히 흔들리며 두 개, 세 개로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내가 뭐라고 대답한 것 같기는 한데, 소리는 시끄러운 주변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이후엔 내가 더 마셨는지, 어쨌는지도 기억나지 않은 채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말았다.
“욱… 씨발, 우웩….”
“더러우니까 저쪽 가서 좀 해 주실래요. 전 섬세한 위장을 가졌거든요.”
“좆까, 이 새끼야. 섬세한 위장을 가진 놈이 그 술을 그렇게 먹냐? 욱!”
희미하게 의식이 살아나는 가운데 누군가가 토하는 것 같은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제기랄. 게임에서 토를 하다니. 기분 더러워서 원….”
“저도 미스트를 하면서 토하는 유저를 보는 건 처음이지만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은데요.”
“너 보라고 하는 거 아니거든, 새끼야. 카르한테 술 먹인 새끼가 입만 살아서는…… 내가 대체 뭣 때문에 그걸 다 먹었는데… 시발! …우우욱.”
사기꾼을 두고 먼저 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회한에 찬 투덜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내 몸도 서서히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머리뿐만이 아니라 잠시 후엔 배 속과 온몸도 누군가 두드려 패는 것처럼 찢어지게 아파왔다.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 간신히 눈을 뜨자 상쾌한 얼굴을 하고 있는 루크레이신이 나를 보며 반색했다.
“와아. 형, 눈 떴어요?”
“…….”
“뭐야, 카르 일어났냐?”
눈만 굴려 옆을 보니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걸어오는 키온 형이 보였다. 형의 얼굴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때와 달리 반쪽이 되어 해쓱해져 있었다.
‘형, 얼굴이 왜 저러지…….’
쾅쾅 울리는 머릿속으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내가 언제 잠든 것인지 기억도 안 난단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려다, 위장에서 느껴지는 낯설고도 엄청난 압박감에 식은땀을 흘리며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윽…….”
“속이 안 좋아요?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권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권하긴 뭘…… 아!’
멍청이가 된 것처럼 떠듬떠듬 생각을 이어나가던 머리가 드디어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기억해냈다.
‘그랬지. 술을 마시고… 그다음은….’
“욱…….”
속이 좋지 않아 배를 움켜쥔 채 천천히 웅크리자 루크레이신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형이 이렇게 귀엽게 있는 걸 볼 줄이야. 진짜 술에 약했던 거군요.”
놈이 말할 때마다 머리가 울리니 제발 닥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었다. 겨우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니 이곳은 우리가 원래 묵고 있었던 그 집 안이었다.
“제가 형이랑 저분을 둘 다 들쳐 업고 왔어요. 두 사람 다 게임시간으로 하루나 누워 있었다고요. 덕분에 오늘치 퀘스트는 다 제가 했죠.”
루크레이신은 참으로 멀쩡한 얼굴로 감사의 인사는 받지 않겠다며 수고비는 나의 이 꼴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매우 살의가 일어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카르야, 이거라도 먹어라.”
키온 형이 건네준 뚜껑 열린 하얀 포션을 간신히 삼키자 순식간에 몸에서 빛이 일며 어느 정도 살 만해졌다.
“초강력 컨디션 회복제야. 술에 취해서 생긴 상태이상은 내 치유의 힘으로는 별 효과가 없더라.”
내가 가진 치유의 힘은 외상에 관련된 것뿐이라…, 하고 키온 형이 억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형.”
루크레이신의 부름에 돌아보자 놈이 내가 들고 있던 빈 포션병을 가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볍게 던져 쓰레기통에 명중시켜 넣으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자기 술버릇이 뭔지 알아요?”
“아니… 모르는데.”
“야, 너 이 새끼!”
키온 형이 뒤에서 소리치든 말든 흐음… 하면서 왠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 루크레이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되게 재밌는 술버릇인데. 뭐 나쁘진 않아요. 술 마시고 달리는 종자들이나 다짜고짜 울어대는 종자들보다는 훨씬 낫기도 하고요.”
“…….”
그 말을 들으니 도리어 매우 기분이 찜찜해졌다. 내 술버릇이 대체 어떻기에 저놈에게 저런 말을 듣는 거지?
‘앞으로는 정말로 술을 함부로 마시지 말아야지….’
키온 형이 준 회복제를 먹고도 몇 시간 동안 고통에 시달리며 뼈저리게 다짐한 후 어느 정도 몸 상태를 추스르고 바깥으로 나가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어, 인간들 나왔군. 하하… 안녕들 한가….”
길거리에 나와 있는 드워프들 중 상당수의 얼굴이 키온 형처럼 해쓱하게 변해 있었다. 역시 그들에게도 그 미친 술판은 큰 후유증을 남긴 모양이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었던 숙취의 고통을 읽은 후 나는 드워프들과 우리들 사이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의 결속력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런 일로 이런 걸 느끼게 될 줄이야….’
그날 이후부터 드워프들은 더 이상 우리를 시험하려 들지 않았다. 기본적인 화통함은 여전했지만 인간인 우리들에게 보이던 묘한 경계심이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완전한 호의뿐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드워프들의 소소한 퀘스트를 수행하며 드워프들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드워프들의 사회에서 직업은 주로 두 가지로 갈라졌다. 하나는 작업소에서 일을 하며 광석들을 캐내고 제련해 이런저런 것들을 만드는 일을 하는 장인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사들이었다.
드워프들이 켈라스티어스라고 불렀던 오르겐 산맥 내의 광산은 사실 이들의 조상들이 대대로 파왔던 곳이라고 했는데, 인간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교묘하게 드워프들이 길을 막거나 우회시켜 들어올 수 없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엄청나게 크지만 말이야. 뭐, 이제 거기서 캐낼 수 있는 광석들은 한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버린 거나 다름없거든. 진짜는 안쪽에 있는 법이지. 오르겐 산맥 내의 사악한 몬스터 놈들과 싸워가면서 길을 뚫느라 우리의 전사들이 늘 고생하지만 말이야. 여기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있고말고.”
부탁한 퀘스트를 끝낸 뒤 우리들에게 음료 한 잔씩을 준 채 떠들기 시작한 젊은 드워프 장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주로 만드는 것은 여자 드워프들을 위한 금속 장신구로, 어떻게 만든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섬세한 장신구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저거 하나만 가져다 시장에 내다 팔면 현금으로 세 자릿수 돈도 우습지 않게 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루크레이신은 그 장신구들을 보고 그런 놀라운 평가까지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인간 자네들… 여기 왔을 때 그 미다한에게 집을 안내받았다면서?”
“예? 아.”
순간 미다한이 누군가 했던 나는 겨우 기억을 되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 못 본 지 꽤 되어 잊고 있었다.
그러자 드워프 장인의 얼굴에 흠모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부럽군, 부러워. 미다한이라면 두란베르크 최고의 미인이라 일컬어지는 여인이 아닌가. 그 근육 가득한 팔뚝에 아름다운 털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그 강철 같은 면모가 말이야.”
“…….”
“들었냐? 도시 최고의 미인이랜다. 그 틱틱이가.”
키온 형이 장인에게는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마스터이다 보니 나 같은 건 감히 내 제작품을 내밀 수조차 없어서……. 나도 한 번만이라도 그녀에게 내가 만든 머리끈을 주어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어. 그게 내 꿈이라네.”
참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잘 마셨습니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아 그래, 고맙네. 인간 친구들!”
띠링 하고 퀘스트가 완료되는 소리를 들으며 바깥에 나오자 이제는 졸졸 쫓아다니지 않게 된 드워프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평범하게 인사 정도만 건넨 뒤 도로 제 갈 길을 가는 것이 보였다.
“그 황금 회의인가 했던 거 이제 내일 하는 거지?”
키온 형이 뻐근한 목을 돌리며 뚜둑뚜둑 소리를 내면서 물었다.
“응.”
금의 회의가 어느새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내일이면 이 도시의 장인 드워프들이 모두 모여 코르의 질문에 답하기 위한 회의를 시작하고, 또 그 3일 후엔 답변을 줄 것이었다.
“여기도 상당히 재미있었는데, 갈 생각을 하니 좀 아쉬운데요.”
루크레이신이 자기도 모르는 새 정이 들었었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넌 여기 있어도 돼. 나랑 카르는 갈 테니까.”
키온 형이 대번에 반색하며 성질 나빠 보이는 미소를 흘렸다.
“아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요.”
루크레이신도 지고만 있지는 않을 놈이라 되받아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제는 이 낯선 조합의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것에 나도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죠? 시간을 버리며 기다렸잖아요.”
집 앞에 도착하자 뜻밖의 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화를 내며 다가왔다. 방금 전 장신구를 만드는 드워프 장인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미다한이 오늘은 하나로 땋은 머리를 틀어 올린 채 내 앞까지 똑바로 와서 섰다.
“인간 당신!”
“…….”
“당신과 내일 있을 금의 회의 일로 볼일이 있으니 따라오도록 해요. 거기 인간 둘, 당신들은 말고요.”
다짜고짜 내게만 그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서서 먼저 가는 미다한을 보다 형과 루크레이신을 돌아보며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안 따라오고 뭐 하는 거죠?”
약간 미적거렸다고 굉장히 급하게 구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가 도착한 곳은 인적이 없는 빈 공터였다.
“…….”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할 줄 알았던 미다한은 의외로 이곳에 오자 입을 꽉 다문 채 초조한 표정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했다.
‘대체 나를 왜 여기로 불러낸 거지.’
슬슬 그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이상해지기 시작했기에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저, 용건이 뭐….”
“당신! 마법사라고 했죠!”
……뭐라고?
상당히 절박한 목소리로 외친 말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라, 그만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인간 당신, 마법사라고 했었잖아요.”
“그런데요.”
“……그렇다면, 혹시. ……혹시.”
미다한이 하늘 같은 자존심을 간신히 꺾는 표정으로 매우 힘들게 말을 이었다.
“혹시……, ……알아요?”
“……예?”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아 반문하자 미다한의 얼굴이 술이라도 취한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필 붉어지는 걸 보고 떠올린 게 술이라니. 정말 후유증이 컸던 모양이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지 못할 미다한이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은, 인간 마법사라면. 알 거 아니에요. 그, 당신은 인간 세계도 많이 돌아다녔을 거고요. 그러니까, 그….”
“…….”
“500년 전에, 당신처럼 인간에 마법사였던 사람인데. 마법을 정말 잘 써서, 로드 슈페리어인가 하는 호칭을 젊은 나이에 받았던 사람이거든요. 혹시 누군지 알아요?”
로드… 뭐? 오늘따라 자꾸 내가 들은 말도 의심해 보게 될 만큼 믿기지 않는 걸 듣게 되는 것 같았다.
‘로드 슈페리어라니….’
당연히 알고 있다. 알다 뿐인가. 원래대로였으면 내 막대기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을 놈이 그놈인데.
“알아요, 몰라요? 그것만 빨리 말해요.”
겨우 하려던 말을 끝냈다는 충족감 때문인지 미다한이 원래대로 눈을 샐쭉하게 뜨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압니다만.”
“알, 알아요?”
미다한의 표정이 한순간에 다시 확 하고 풀어졌다.
“인간은 100년도 길다고 해서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정말 아는 건가요?”
“네. 압니다.”
“하아…….”
그녀의 표정에 스쳐 지나가는 안도와 기쁨과 그리고 수많은 그리움.
그 모습이 방금 전까지와 같은 드워프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어린 소녀처럼 느껴졌다.
‘키가 작아서 그런가…. 그런데 슈페리어는 왜 찾는 거지.’
“그는, 당연히 죽었죠? 500년이나 지났으니….”
음…. 죽었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애매한 문제라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것을 죽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미다한이 회한에 찬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에요. 예전에, 조금… 알았거든요.”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미다한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500년 만에 처음으로 소식이라도 알려 준 인간이 당신이니 특별히 말해 주죠. 그 마법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요?”
얼마나 아느냐 하면… 또 할 말이 없어지는데. 내가 알고 있는 슈페리어는 전설 속의 기억에서 보았던 비장하고 영웅다운 면모로 가득 차 있던 남자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유들거리고 자신감에 찬 채 농담 따먹기를 일삼는 가벼운 놈이기도 했으니까.
다행히 이번에도 내 침묵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 미다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당신들 인간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마법사는 진정한 영웅이었어요. 500년 전 내가 정말 조그맣고 어린 드워프였을 적에, 전쟁 때문에 갈 곳을 잃고 죽어가던 엄마와 저를 구해 준 이가 바로 그였거든요.”
그녀의 표정에 짙은 그리움이 떠올랐다.
“그날부터 저는 다시 종족들과 합류할 때까지, 세 달간 그와 함께 전장을 다녔어요. 그는 정말, 정말 좋은 인간이었죠. 붉은색이 그렇게 예쁘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는데… 옆에 있던 건방진 검은 놈과 그 친구 인간놈들 때문에 마지막까지 제대로 함께하고 싶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어요.”
말을 이어나가는 미다한의 표정이 ‘건방진 검은 놈과 그 친구 인간놈들’ 부분에서 살기등등하게 변했다가 가라앉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우리들이 이곳, 두란베르크에 스스로 몸을 숨기게 되어 단편적인 소문밖에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
“듣자 하니, 그의 동료들은 모두 죽고 그가 혼자서 마신을 봉인했다죠. 인간이 혼자서 할 만한 일이 아니니 당연히 곧 죽었겠지만…… 가능하다면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미다한은 결국 한숨을 푹 쉬며 원래대로 샐쭉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뭐, 이젠 됐어요. 왠지 모르게 당신이 마법을 쓰는 것을 보니 그와 굉장히 닮아 보여서 혹시나 싶었을 뿐이니까요.”
내가… 닮았다고? 슈페리어와?
‘다른 건 몰라도 마법 쓰는 게 닮았다는 건 좀 느낌이 이상하군.’
“아, 착각하진 마세요. 그는 당신 같은 애송이 마법사와는 차원이 다른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냥, 그냥 아주 조금 느낌이 비슷해서. 그것뿐이에요. 그럼 이제 됐으니까 도로 돌아가세요.”
“금의 회의와 관련된 용건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거짓말이에요. 이 정도 얘기했으면 당연히 눈치채야죠.”
“…….”
미다한의 용건은 정말 그것뿐이었는지 미련 없이 돌아서서 가 버렸다. 나는 키온 형과 루크레이신이 있을 집으로 향하며, 지금쯤 어디를 헤매고 있을지 모를 슈페리어를 떠올렸다.
‘20일 후에 돌아온다고 했었지. 아직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나중에 이 이야기를 해 주면 과연 슈페리어는 기억을 할까, 못 할까. 상당히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수많은 드워프들이 금의 회의 참가를 위해 철의 장인이 있는 작업실로 몰려갔다. 덕분에 우리는 퀘스트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해 여유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3일이 쏜살같이 지나고 이제 곧 체무킨이 우리를 부르겠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양반은 못 되는 타이밍으로 미다한이 찾아왔다.
“방금 드디어 회의가 끝났어요. 아빠가 당신들을 오라고 하시니 어서 가죠.”
대부분의 드워프들이 우리에게 친절해진 이후에도 그녀만은 끝까지 우리들을 탐탁지 않게 대할 모양이었다.
작업실로 가자, 회의가 막 끝나서인지 제대로 된 옷을 차려입고 있던 체무킨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게. 집은 불편하지 않던가?”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군.”
수염이 별로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우리들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한번 바라본 체무킨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흐음…. 솔직히 말해서 당신들에겐 좀 놀랐어.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동족들이 당신들을 마음에 들어 하게 되었는지, 회의 내내 당신들 이야기가 주를 이루더군.”
“…….”
“우리 종족은 경계심이 강하지. 그래서 그 경계심을 뚫고 들어온 이는 크게 신뢰하지만, 반대로 믿었던 이에게 한번 받은 수모는 죽어도 잊지 않아.”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것일까. 의아해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체무킨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500년 전의 종족전쟁으로 인해 우리 드워프들은 크나큰 손실을 입었지. 원래 전쟁 이전 우리들의 주된 터전은 저 북쪽, 키잘키르스텀 산맥에 있었네. 그러나 그곳은 마신으로 인해 제일 먼저 괴멸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지.”
무거운 목소리 속에 차가운 감정이 섞였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이라고 믿었던 인간 왕국들에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스스로 나선 몇 명의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아마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 딸도, 아내도 맥없이 잃어버렸겠지.”
그 스스로 나선 몇 명의 인간이란 건 아마 슈페리어와 나머지 영웅들이겠지.
“그런데 그 종족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당신, 인간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니요. 처음 듣는 말입니다.”
이전에 비슷한 말을 슈페리어의 기억에서 들은 것 같기는 했지만 모른다고 해야 좀 더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아니라고 답했다. 도대체 슈페리어가 살던 시절의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기에 전쟁의 원인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것일까. 설마하니 마신을 도발이라도 한 건가?
내 궁금한 표정을 본 체무킨이 약간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뭐, 대부분의 인간들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겠지. 사악함으로 똘똘 뭉친 악독한 자들이 마신 소환을 위한 제물을 자신들의 동족 안에서 뽑았다는 건 듣기만 해도 잔혹한 일이 아닌가. 우리 같은 종족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야.”
제물이라…….
“자신들의 욕심으로 마신을 소환하려 든 것도 인간, 그리고 소환된 마신을 막아낸 것도 결국 인간. 인간이란 참 알 수 없는 종족이네. 어느 쪽으로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내가 이 말을 왜 해 주었는지 알겠나?”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체무킨의 눈빛은 왠지 복잡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의지를 띠고 있었다.
“아뇨.”
“인간 당신들이 단순히 용의 대리자 자격으로만 온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당신들은 예전에 로드 슈페리어라 불렸던 인간 마법사와 그 동료들과 관계있는 자들이 아닌가?”
“어떻게 그걸?”
지금껏 전혀 내색하지 않다 갑자기 정곡을 찌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체무킨이 여전히 별로 없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인간 마법사, 당신이 하고 있는 그 브로치와 당신, 여신의 종이 끼고 있는 장갑, 그리고 그쪽의 모자 쓴 당신이 숨기고 있는 단검은 모두 우리들이 제작한 거라네. 난 그 모든 제작자와 주인을 기억하고 있어. 특히 그 브로치는 내가 직접 목걸이에서 브로치로 만들었던 물건이기도 하고.”
뜻밖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퀘스트 아이템들의 원제작자가 드워프들이었다니……. 심지어 아이아가스가 체무킨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게 원래 목걸이였다고? 그러고 보니 슈페리어의 기억을 보던 초반에 비슷한 물건을 본 것 같기도 한데…….’
키온 형과 루크레이신도 놀란 기색을 보이는 걸 보니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었다.
“원래는 끝까지 모른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우리 동족들은 당신들이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야. 만약 다시 한 번 마신이 내려와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우린 여기서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어쩌면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결론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또다시 그때 유일하게 우리를 도와주었던 이들 같은 인간들이 나타난다면 말이야.”
정확히 주체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체무킨의 말은 의미심장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지만 이 정도로 그치도록 하겠네. 마지막으로 3일간의 토론 끝에 결정된 금의 회의의 결과를 알려주지.”
체무킨의 표정이 한없이 진중해지며 한 종족의 대표자다운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들, 철의 종족 드워프는 염룡에게 처음부터 움직이라고 말하고 싶네. 500년 전, 흑룡은 쓸데없이 어중간하게 관조하려다 더 큰 화를 스스로 불러일으킨 끝에 미쳐 버렸지. 염룡이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 믿네. 인간 마법사 당신에게서 느껴진 공정한 염룡의 기운을 통해 우리는 한 번 더 용족을 믿도록 하겠다. 그렇게 전해 주게.”
띠링!
- 염룡 코르의 부탁 2.를 완료하셨습니다!
체무킨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퀘스트 완료 표시가 떠올랐다.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