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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파이어 볼을 쏘는 수련을 시작한 지 대여섯 시간쯤은 우습게 지났을 때였다. 이 공간에서는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아서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현실이었다면 아침에서 저녁놀이 지기 시작했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동안 계속 파이어 볼만 쏜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쓰는 파이어 볼의 위력에는 여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아, 하아….”
조그만 파이어 볼이 휘청대며 날아가다 말고 그대로 사라져 버려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나무를 노려보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많던 마력이 어느새 절반 이하로 줄어들 만큼 파이어 볼을 쏘았는데도 나는 아직까지 적절한 강도의 파이어 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나마 수없는 연습으로 얻어낸 것이라고는 파이어 볼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마구 딴생각을 해 이미지를 흔들리게 만듦으로써 방금 전처럼 아예 중간에 꺼져 버리게 하는, 약해도 너무 약한 파이어 볼 하나뿐이었다.
크기도 줄여 보고, 심지어는 주문을 외치는 목소리를 작게 해 보는 우스운 짓까지 벌였지만 어떻게 해도 내 파이어 볼은 나무를 부수거나, 아니면 중간에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 버렸다. 그것은 내게 있어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눈 감고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다고 자신했던 기초 중의 기초 마법인 파이어 볼이 이제는 전혀 내가 알던 그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인페르노를 길들일 때보다도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일어서서 한참을 더 씨름해 보았지만, 결국 마력이 거의 떨어지기 직전이 되고서야 무작정 쏴대기만 해서는 이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쯤 되니 애초에 마법을 쓰는 데 약한 위력이 왜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약한 위력이라니… 그런 건 대체 어디다 쓴다고.”
“의문 따윈 가질 필요 없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까까지 늘어지게 자고 있던 슈페리어가 상쾌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게 왜 필요했는지는 성공해 보면 알게 될 테니까. 그런데, 벌써 포기하게?”
“포기는 안 해. 마력이 좀 더 차면 다시 시작할 거야.”
“하핫. 근성 하나는 인정해 주지. 지금까지 그대가 부순 나무가 2500그루쯤 되는 거 알아?”
정말로 쉴 새 없이 부숴대긴 했지만 어느새 그 정도로 많이 부쉈던가.
‘이게 현실이었으면 환경 보호 단체에서 나를 가만두지 않겠군.’
“그런 식으로 해서는 2500그루가 아니라 십만 그루를 부숴도 못 해낼걸. 방법을 좀 바꿔 봐.”
슈페리어는 가볍게 악담을 날린 뒤 다시 뒤로 가 버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내가 부쉈던 나무가 천천히 재생되는 것이 보였다.
‘마력이 차는 동안 일단 문제의 원인에 대해 생각이나 해 봐야겠군.’
대체 왜 나는 약한 파이어 볼을 쓸 수 없는 것일까. 보통보다 강한 파이어 볼을 쓰는 방법은 매우 쉽다. 마력을 좀 더 많이 불어넣는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기합과 함께 밀어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마법을 쓸 때 처음부터 들어가는 마력을 거기서 더 늘릴 수는 있어도 줄일 수는 없는 법이다.
예를 들어 파이어 볼을 사용할 때 처음에 50 정도의 마력이 든다면 49밖에 안 되는 마력으로는 절대로 파이어 볼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마력은 있으나 마나 한 유명무실한 것이었겠지. 그러나 50의 마력이 필요한 파이어 볼에 100, 200씩 마력을 더 불어넣어 강하게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제한도 들지 않았다. 물론 낼 수 있는 데미지에 어느 정도 한계치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스트의 마법들은 그러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대체 마법을 약하게 쓸 수 있게 하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속도라도 느리게 해 보면 괜찮을까 싶어 아까 시도해 보았었지만, 결과는 똑같이 부서진 나무 잔해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후우. 머리 아프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보다 약한 공격이란 건 대체 왜 필요한 것이고, 왜 해야 할까. 슈페리어가 방금 그런 의문은 갖지 말라고 했지만 그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적을 상대로 약한 공격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것은 무조건 강해지기 위한 수련이었고, 거기에 약한 마법을 쓰는 법 따위는 들어가 있지도 않았다.
‘차라리 검도였다면 팔에 힘만 빼면 되니 편했을 텐데.’
예전에 검도를 했을 때의 내 움직임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라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나는 그것들을 숨 쉬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시합이 아니라 대련을 할 때는 검을 단순히 상대에게 이기겠다는 공격적인 일념만으로 휘둘러서는 안 된다. 상대와 내가 서로 맞부딪칠 힘을 가늠해 강도를 예상하면서 휘둘러야 둘 다 다치지 않고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공격이 상대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검이 서로 부딪치는 그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기 위한 모범대련에서는 바로 그런 노력이 필요했다.
사실 말이 쉽지, 실제로 해내기는 힘든 부분이라 대련을 할 때 보통 가장 익숙한 상대와 함께 하는 이유도 그러한 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럴 때 내 상대는… 항상 승조였었지.’
입맛이 갑자기 쓰게 느껴져 혀를 차고 있는데 문득 섬광과 같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슈페리어가 말했었다. 마법의 기본은 상상하는 것이라고.
그 말대로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정하는 것이 먼저인데, 이미지란 놈은 내가 마법을 ‘구현’하고, ‘사용’하고, ‘목표물에 영향을 끼치는 것’까지의 3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마법의 위력 부분은 마지막 세 번째 단계인 목표물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속한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마법 종류에 따라 3단계 중 더 중요시해야 할 부분이 각각 달랐다.
세 번째 부분이 중요한 마법으로는 주로 공격 마법이 아닌 다른 종류의 마법들, 예를 들면 디텍트 매직이나 플라이, 스트렝스, 홀드 퍼슨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런 마법들은 마법이 시작되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마법의 대상들에게 어떻게 그 마법이 영향을 끼칠지를 이미지하고 있어야만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좀 더 그 마법들의 힘을 강하게 하고 싶을 때는 대상에게 영향이 더 강하게 끼치는 것을 상상해야 했고, 반대로 영향을 약하게 하고 싶다면 대상에게 영향이 약하게 끼치는 것을 계속 상상해야 위력 조절이 가능했다.
이는 그간 제법 써 봤던 스트렝스를 통해 내가 스스로 깨닫게 된 지식이었다.
‘그렇구나. 바로 이거였던 건지도 몰라.’
공격 마법은 아니라지만 그 마법들도 똑같은 ‘마법’이다. 어쨌거나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파이어 볼에도 적용 못 할 이유가 무에 있단 말인가.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게 과연 맞는 것일지 아직까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써 보면 어차피 결과가 답을 알려줄 것이었다.
나는 거침없이 가장 가까운 나무를 향해 주문을 외쳤다.
“파이어 볼!”
여태까지는 그저 밑도 끝도 없이 약해져야만 한다고 중얼거렸을 뿐, 파이어 볼이 나무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면 하는지까지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내가 쏘아 보낸 파이어 볼이 나무 겉 부분에 부딪친 순간 그대로 흩어져 사라지는 이미지를 강렬하게 떠올렸다.
쾅!
파이어 볼이 나무에 부딪치면서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나무는 부서지지 않은 채 반 정도만 움푹 파여 있었다. 처음 목표로 했던 겉껍질만 살짝 그슬린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나는 어째서 공격 마법에도 ‘대상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이미지’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을까.
지금까지는 마법을 생성시킨 뒤 필요한 만큼의 마력을 담아 날려 보내는 것만으로 내 이미징은 끝이었다. 하지만 실은 그것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했던 것이다!
나는 드디어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에 고무되어 다시 힘을 내 수련을 계속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퍼퍼펑!
‘됐다…!’
약간의 탄 자국만을 남기고 멀쩡하게 서 있는 나무를 보자 피로와 성취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젠장.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드러눕자 팔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워졌다. 체력이고 마력이고 바닥을 드러냈다는 신호였다.
“포션.”
손에 낀 저장의 반지를 흔들자 곧바로 손안에 체력 회복 포션이 우르르 쏟아졌다. 턱을 타고 흐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연거푸 마개를 뽑아 들이켜니 겨우 좀 살 것 같았다.
“크으, 하. 크크크. 하하핫.”
빈 병을 내던지고 서서히 차오르는 힘을 느끼면서 끓어오르는 희열을 참지 못하고 웃고 있으려니 어느새 다시 왔는지 모를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드디어 성공했군. 자그마치 2613그루만의 쾌거야. 축하해.”
“그래.”
“다음으로 바로 넘어가겠어? 아니면….”
“아니. 아직 멀었어.”
“응?”
무슨 소리냐는 듯 깜박거리는 슈페리어의 얼굴을 보며 나는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을 느꼈다.
“이것만으론 안 돼. 내가 익힌 모든 마법들의 3단 조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다시 수련할 거야.”
“뭐라고?”
그러니까 다음을 배운다면 그 이후일 것이다. 황당해하던 슈페리어가 이내 한 방 맞았다는 듯 찡그린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근성도 그 정도면 자기 학대가 될 거란 생각 안 들어?”
“시간이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왜.”
“그래, 마음대로 해라. 해. 나무 만 그루를 부수든 십만 그루를 부수든….”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는 기색이 가득한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했다.
“그런데 수련하다가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으음. 그러고 보니 그걸 생각 안 했군.”
잠시 턱을 문지르며 고민하던 슈페리어가 이내 아 하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까 처음으로 올 땐 내가 데리고 왔지만 이제부터는 그대 마음대로 들어왔다 나갈 수 있도록 약속 주문을 만들도록 하자. 일단 들어올 때든 나갈 때든 집중한 자세에서 눈을 감고… 흠…. 뭐 추천할 만한 주문 이름 있어?”
내게 물어봤자 별로 생각나는 게 없는데….
“글쎄…….”
“뭐 좋아하는 거 없어? 좋아하는 색이라든가.”
좋아하는 색이라… 그것도 딱히 없다. 나는 침묵을 지키며 머리를 굴리다 문득 내 옷에 시선을 주었다. 선명한 검은색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면 신발도 검은색이고 안에 받쳐 입은 옷도 검은색. 내가 걸친 대부분의 것들은 모두 검은색이었다.
그간 별로 의식한 적이 없었는데… 혹시 나는 검은색을 좋아했던 건가?
“……검은색?”
약간 망설이며 대답했으나 슈페리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주문의 이름은 블랙 켈베로스로 하자.”
“켈베로스?”
“몬스터긴 하지만 난 그걸 좋아하거든. 두 개 합쳐서 블랙 켈베로스야. 앞으로 그 주문을 외우면 밖으로 나가거나 도로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어. 난 여기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니 하고 싶은 만큼 하고 나서 부르도록 해.”
“그래.”
“그리고 너무 오래 여기 있지는 마. 이곳의 시간이 바깥보다 훨씬 느리게 흘러가긴 하지만 어쩌면 몸에 부담이 될 수도 있어. 이곳에 타인의 정신이 들어오는 것 자체도 처음 해 본 거라 나도 완전히 장담은 못 하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한 슈페리어의 얼굴에 소리 없이 미소가 떠올랐다.
“기왕 그대가 스스로 원한 것, 결과를 기대해 보도록 하지.”
그리고 슈페리어는 손을 흔들며 나를 지나쳐가더니 어느 순간 공기 중에 녹아들듯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 도로 눈앞의 한들거리는 들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 느꼈던 성공의 기쁨이 다시금 되살아나며 힘이 불끈 솟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슈페리어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 목표는 모든 마법의 3단 조절만이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자유자재로 위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시험하는 것만큼 내게 있어서 즐거운 일은 또 없었다. 나는 몸속에 남은 마력의 양을 가늠해 보면서 머릿속에서 모든 잡념을 지웠다.
이제부터 진정한 시작이었다.
정신세계에서 빠져나오며 눈을 떴을 때는 어느덧 한낮이 되어 있었다.
‘키온 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카르야. 아, 역시 여기 있었구나.”
그때, 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키온 형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밝게 웃었다.
“내내 여기서 수련하고 있었던 거냐?”
“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서 한 건 아니니… 말끝을 흐렸지만 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간 네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제대로 못 들었었네. 진전은 많이 있었어?”
진전이라. 그전에 들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 말에 대해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응.”
슬며시 웃으며 대답하자 형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호오. 대답 보니 상당히 늘었나 본데. 같이 나가서 서로 스킬 시연이나 해 볼까? 어때?”
“상관은 없지만… 꽃은?”
오늘 가져다주기로 했을 은청조롱꽃에 대해 묻자 형이 아차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맞다. 그거 때문에 같이 가자고 말하려고 들어온 거였는데. 가져다주고 오면서 하면 되겠다. 괜찮지?”
“나는 못 가.”
“어엉? 왜?”
“내가 따로 일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이루미네에게 가지 않기로 해서.”
그 일이란 게 슈페리어가 다시 기억을 보느냐 마느냐의 기로이니 정확히는 내가 할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설명했다.
“뭐야? 그 엘프가 너에게까지 노가다를 시킨 거냐? 뭔데. 형이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별거 아냐. 일주일 정도만 기다리면 되니까 괜찮아.”
나보다 더 황당해하는 형은 아무래도 이루미네에게 안 좋은 인상을 매우 깊게 받은 듯했다. 하긴 그 성의 없고 느닷없는 퀘스트라니. 상당히 충격이 컸겠지.
“끄응… 너도 없이 혼자 그 엘프와 독대하게 되다니… 좀 부담스러운데. 설마 또 노가다 퀘스트를 시키는 건 아니겠지?”
형의 농담 섞인 찡그린 표정을 보고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설마. 그리고 또 시켜도 같이 하면 되잖아.”
그 말에 형이 생각보다 큰 놀라움과 감동을 받았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는, 과도하게 울렁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자식…. 그래 알았다. 형 후딱 다녀올 테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형은 발걸음도 힘차게 아이템창에서 꺼낸 꽃다발을 들고 이루미네의 동굴 방향을 향해 질주해 갔다. 뒤에 남은 나는 생전 처음 보는 키온 형의 표정을 떠올리며 묘한 기분과 함께 뒷머리를 긁적거려야 했다.
‘예전의 내가 그렇게까지 인정머리가 없었나….’
형이 나간 자리를 따라 열린 문밖으로 나가자 신선한 공기와 아름답게 우거진 나무들이 밤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사막 위에 세워졌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푸른 숲의 정경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함부로 숨 쉬지 마. 독기 때문에 숲이 녹아버릴지도 모르니까. ]
“독기? 무슨 독기.”
[ 뭐긴. 독종의 숨결에서 나오는 독기지. ]
아… 뭔가 했더니 날 놀리려는 심산이었군. 신경도 쓰지 않고 스트레칭을 시작하자 슈페리어의 종알거림이 더 심해졌다.
[ 설마 진짜로 그걸 다 해내버릴 줄이야. 그 안에서 사흘 정도는 내리 잠도 안 잔 것 알아? 하하. 맙소사. 정말이지 그대는 말 그대로 독종이야. 독이라고. 피에도 독이 흐를걸. ]
“정신 집중 안 되니까 조용히 좀 해 줘.”
[ 좋아, 그 패기. 그 정도는 되어야 내 후인이지. ]
“…….”
협박의 의미로 말없이 슈페리어 막대기를 그러쥐자 종알대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 윽… 날 이렇게 무시하고도 다음에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 거란 생각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조금 투덜거리긴 했지만 무시하고 다리를 뻗어 누르며 스트레칭을 하자 잠시 후엔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과연 놈은 일주일 후의 생각을 하긴 하는 건가….’
물론 하고는 있겠지만 이쯤 되니 너무 도피가 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들 지경이었다. 놈이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내 쪽이 아니라 자신의 일일 텐데. 나는 스트레칭을 하면서 흘긋 막대기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까지처럼 대충 장단을 맞춰가며 지켜보는 것밖에 없는 듯했다.
“카르야, 형 왔다.”
키온 형은 예상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곳으로 돌아왔다. 왠지 떨떠름한 표정을 보니 이루미네가 또 뭔가 어이없는 퀘스트라도 시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루미네가 또 퀘스트라도…?”
“아니아니. 그건 아닌데… 그 엘프, 아무래도 아무 생각 없이 노가다를 시켰던 건 아닌가 봐.”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쳐다보자 형이 코끝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글쎄 내가 그걸 가져갔더니 그 꽃이 스가 신의 성화라나 뭐라나 하는 소릴 하지 뭐냐? 내가 대사제 직함까지 달았는데도 그 꽃이 성화라는 건 또 처음 알았다.”
“성화?”
그러고 보니 예전에 크란과 같이 다녔을 때도 루이기나인가 하는 루그 신의 성화와 관련된 퀘스트가 있었지.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어렵지 않게 납득했다.
“응. 그걸 가지고 뭘 어떻게 저떻게 할 거라고 그러긴 하던데… 내 목적에 대한 답은 네 일 먼저 처리하면 알려준다니 그때까진 다시 안 가도 될 것 같아.”
그렇군…. 이루미네와의 대화를 요약해서 알려준 형은 이내 표정을 밝게 바꾸어 내 등을 퍽퍽 두드렸다.
“그럼 아까 말했던 대로 서로 그간 발전한 모습이나 자랑해 볼까? 내가 이거 기대되어서 아까 대화하는 내내 집중하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사실 이런 건 몬스터 상대로 해야 제대론데….”
실은 나도 형이 그동안 얼마만큼이나 강해졌을지 쉽사리 예측되지 않았기에 상당히 궁금하기는 했다.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근육을 푼 형이 씩 웃으며 돌아보았다.
“누가 먼저 할까? 형 먼저 해도 되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을 휘휘 둘러본 형이 집 근처 비탈에 붙어 있던 사람보다 큰 바윗덩어리를 보고는 눈을 빛냈다.
“음. 저걸 목표로 가지고 하면 되겠다. 너무 소란을 피워서 주변을 전부 부숴 버리면 안 될 테니 적당히 해야지 않겠어?”
흐흣 하고 웃으며 동의를 구한 키온 형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가볍게 땅을 박차고 뛰었다.
“따악 세 개만 하자!”
순식간에 목표가 된 바위의 앞까지 다가가 중력의 힘을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공중으로 뛰어오른 형이 다리를 축으로 몸을 틀면서 힘차게 기합을 질렀다.
“신성한 응징!!”
형의 발끝에서부터 뻗어 나온 금빛 기운이 다리 전체를 회오리처럼 감싼 것과 동시에 뒤꿈치가 사정없이 바위 위로 내리꽂혔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지만 형의 발이 꽂힌 바위가 순간 땅 밑으로 움푹 박히는 것은 확실히 보였다.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가볍고도 확실한 위력이었다.
‘매우 느린 속도로 찍었는데도 저 정도라니….’
“분노의 심판!”
땅을 딛고 선 형은 곧바로 쫙 편 오른손을 내질렀다. 천만 촘촘히 감았을 뿐, 어떤 보호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에 부딪힌 바위의 주변에서부터 순간 날카로운 빛 덩어리들이 여섯 개가 생성되더니 부메랑처럼 돌면서 엑스자 모양으로 바위를 가르고 지나갔다.
잠시 등골을 섬뜩하게 하는 진동파가 훑고 지나간 뒤, 형이 뒤로 훌쩍 물러나자마자 바위 한가운데에서부터 형의 옷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신의 문장이 금빛으로 터져 나오며 폭발해 버렸다.
콰쾅!!!!
빛이 사라진 뒤에도 바위는 여러 조각으로 금이 간 채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형은 만족했다는 듯 크게 훗 하는 소리를 내고는 천천히 양손을 허리춤 뒤로 모았다가 앞으로 달려 나가며 크게 뻗었다.
“마지막으로, 스가의 숨결!”
파아앗!
형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새어 나오며 사방에 마법진과 흡사한 신의 문장이 생성되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온몸이 금색으로 한 꺼풀 싸인 것처럼 변한 키온 형은 그 채로 가볍게 발을 구른 것만으로도 아까의 몇 배는 될 법한 엄청난 도약력을 발휘해 높이 뛰어올랐다.
“하앗!”
공중에서 쏘아져 날아가 바위 한가운데를 내려찍은 형의 사제복 자락이 그대로 뒤집어질 듯 펄럭거리면서 이내 이쪽까지 전해질 만큼 엄청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쾅!!!!!
‘이건 좀 피해야겠군.’
“매직 실드! 매직 실드!”
나는 실드 두 겹을 앞에 쳐 놓고 자욱한 먼지구름을 피해 얼굴을 소매로 가렸다. 매직 실드에서 뭔가 텅텅거리며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진정되었다 싶어 고개를 들자 주변은 온통 잘게 부서져 나뒹구는 바위 잔해로 뒤덮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생채기 하나 없이 은은한 빛을 뿌리며 서 있던 키온 형이 자신이 이루어낸 결과를 침착한 얼굴로 모두 돌아보고는 들어 올리고 있었던 오른쪽 다리를 완전히 내려 땅을 딛고 섰다.
반쯤 뒤돌아서고 있는 등과 어깨에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투기가 일렁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형이 숨을 흡 하고 들이마시자마자 몸 안으로 슥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몸을 완전히 통제하에 놓은 채 행동하고 있는 그 여유 넘치는 동작에서 나는 형이 정말로 엄청나게 강해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흐트러진 사제복 자락을 탁탁 잡아당겨 정리한 형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무심하고 냉혹하게까지 보였던 눈을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떠냐? 반도 안 되는 위력이지만 구경하기엔 충분하지?”
날카로운 눈꼬리가 순식간에 활짝 풀어지면서 미소 짓는 얼굴은 방금 전 압도적인 무위를 뽐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호쾌했다.
“…대단했어. 정말로.”
진심으로 감탄한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 드물게 뒷말까지 추가해 가며 대답하자 형의 얼굴에 약간의 쑥스러움과 만족감이 떠올랐다. 반도 안 되는 위력이 저만큼 큰 바위를 가볍게 갖고 놀다 부술 정도라면 지금의 형이 전력을 다하면 도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일까. 정말로 궁금해졌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니 기분 좋구만. 그러면 이제 카르 네 마법이나 좀 보자.”
휘적휘적 걸어온 형이 내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형에게서 떨어져 앞으로 나간 나는 무슨 마법을 써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일단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은 제외하고, 6서클의 두 마법을 아까 전까지 죽어라 수련했던 방법으로 세 번 나누어 보여주도록 해 볼까.
‘지겹도록 수련해서 성공한 보람을 꽤 빨리 느낄 수 있게 되는군.’
나는 머릿속에서 모든 잡념을 지우면서 눈을 감았다.
‘처음은 약한 위력으로!’
“인페르노, 블리자드.”
훅, 쿠와아악!
주문이 발현되자마자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는 인페르노가 공중에서 툭 떨어져 내렸고, 내 키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블리자드는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며 얼음가루를 흩뿌렸다.
“뭐냐, 그 불꽃은? 파이어 볼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좀 더 빨가네.”
화르르!
“…어쭈? 이 쪼끄만 게 지금 성질내는 거냐?”
형의 질문에 화난 것처럼 순간 확 하고 커졌다가 다시 줄어든 인페르노를 보며 나는 슈페리어가 아무래도 이 마법들에 자율의식 정도는 가볍게 넘는 인격체를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새삼스럽게 했다.
십여 초간 내 의지에 따라 부드럽게 유영하며 엉키던 인페르노와 블리자드는 이내 사라져 버렸고, 나는 다시 한 번 똑같은 캐스팅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보통 위력으로.’
“인페르노, 블리자드!”
순간 얼굴이 후끈할 정도의 열기와 함께 본래대로 사람 머리 크기쯤 되는 인페르노와 몇 미터를 훌쩍 넘기는 블리자드가 광포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려 하는 성질이 강한 놈들을 억지로 억누르면서 형이 아까 부숴 놓은 바위가 있는 곳으로 목표를 정해 마법들을 날려 보냈다.
‘저기로!’
콰아아아!
사정없이 땅을 파헤치며 날아가는 인페르노에 스친 것들은 모두 용서 없이 검게 타 버렸고, 블리자드의 사정권에 들어간 나무들은 때아닌 눈꽃을 가지마다 두껍게 덮은 채 차게 얼어붙었다.
콰쾅!
그다지 강하지 않게 부딪쳤다고 생각하는데도 굴러다니던 바위의 잔해와 마법들은 강한 충격파를 내뿜으며 폭발한 뒤 한참 후에야 간신히 사그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엔….
‘봐줄 것 없이 센 위력이지.’
“인페르노, 블리자드!”
세 번째로 불러낸 두 마법은 앞서와 달리 한 박자 늦게 내 명령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후와아아아악--!!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폭음과 함께 붉다 못해 새하얗기까지 한 화염과 통나무집의 크기를 가볍게 두세 배는 넘긴 듯한 얼음 폭풍이 나타났다. 키온 형이 놀랐는지 블리자드 저편에서 벌떡 일어서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광포한 불꽃과 거대한 폭풍이 압도적인 마력을 내뿜는 나에게 복종해 양쪽에서 가드처럼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슈페리어의 정신세계 속에서 마지막으로 성공시키기 위해 애썼던 마법이었다. 코르의 동굴에서 보았던 슈페리어의 기억 속 인페르노, 블리자드와 똑같은 모습을 재현해 보고 싶었다.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라는 기치에 따라 충실히 만들었다던 슈페리어의 말과 한 치의 다를 바 없는 마법들을 지켜보며 시간을 재던 나는, 두 마법의 영향권에 들어간 주변의 거대한 나무들이 버티기 힘들어하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지를 때쯤에야 정신을 집중해 마법을 거두었다.
“후…….”
마법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정신 집중으로 인한 약간의 피로가 몰려왔다. 하지만 마음은 더없이 홀가분했다. 정신세계에서 이루었던 부분이 여기서도 충분히 통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형?”
나는 이제 사방이 고요해졌는데도 여전히 눈만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멍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형을 깨닫고 미심쩍게 불러 보았다.
‘왜 저러지? 혹시 잘못 휩쓸려서 에러라도 난 건가?’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니었던 듯, 형이 후아 하는 큰 숨을 터뜨리더니 이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손짓 발짓을 해 가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와, 방금 그거 뭐야. 그거 뭐냐고!”
“뭐냐니….”
“마지막 그거! 짱이잖아!! 졸라 멋있어! 시발!”
당황해 말을 흐렸지만 잔뜩 흥분한 형의 눈에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본 마법 중에서 제일 컸다고! 카르 이 자식. 그동안 안 놀고 열심히 했구나! 그럴 줄 알았지만!”
그러고 보니 같은 마법사가 아니라면 방금 정도로 거대한 마법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겠지. 안 그래도 마법사가 드문 미스트라는 걸 잊고 있었다. 나보다 더 신기해하며 등을 두드리던 형은 간신히 진정하고 나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형도 의욕이 마구 타오르는데? 오늘부터 무한 특훈할 거다!”
형의 밝은 모습을 보니 나 또한 의욕이 솟는 것을 느꼈다. 이쪽은 사실 이미 특훈 중이었지만 형도 훈련을 할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발전을 이뤄야겠다는 다짐을 또다시 하게 되어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가 편안히 여기는 자리를 잡고 평화로운 엘프의 숲속에서 치열한 훈련을 시작했다.
진제환에게 연락이 온 것은 지난번 만남으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 가도 괜찮아? ]라고 짧게 도착한 문자를 보고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진제환일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 오늘이라면 괜찮아. ] 하고 답문을 보낸 뒤 답변이 없어 사람을 고민하게 만들던 놈은 해가 서서히 져가기 시작하는 저녁쯤 불쑥 인터폰 벨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왔냐.”
내가 아무리 눈치가 별로라도 지금 놈의 무표정 뒤에서 느껴지는 오라가 기쁨의 기색을 띠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열어준 문을 통해 들어온 진제환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답했다.
“응.”
평소 매우 냉정해 보이는 인상이어서인지 진제환이 웃는 얼굴은 남들의 배로 낯선 느낌이 들곤 했다.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티 내지 않고 돌아서면서 입을 열었다.
“물이라도 줄까.”
“괜찮아.”
몇 번이나 왔다고 벌써 익숙해졌는지 집 내부를 죽 돌아보던 진제환이 내 질문에 고개를 젓고는 또다시 그 보는 사람 묘해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뚫어지게 시선을 맞췄다.
“…보고 싶었다.”
“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약간 떨떠름하게 말을 흐리자, 놈이 소리 없이 웃음 조각만 흘리고는 본래의 익숙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전에, 다음 날 몸은 괜찮았어?”
전에 다음 날이라니…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려던 순간 그것이 진제환이 마지막으로 들렀던 그날을 지칭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짙은 살색의 기억도.
“…괜찮았는데.”
“그래.”
그렇게만 말한 진제환은 분위기가 묘해지기 전에 자연스럽게 소파로 가 자리에 앉았다. 뭘 하려는 건가 싶어 바라보고 있으니 재킷 안에 넣어 들고 온 검은 가방을 꺼낸 놈이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컴퓨터 조금 써도 괜찮을까.”
“뭐 하려고?”
“연결해서 손을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설마 했더니…. 오자마자 내 집 컴퓨터를 건드리는 걸로 모자라 이젠 자기 컴퓨터까지 가져와 연결해서 손을 보겠다는 당당한 말에 나는 두 번째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전에 보안인지 뭔지는 다 했다면서.”
“여기 설치된 시스템들을 저번에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너무 사양이 낮아서 조금 업그레이드를 시키려고 해.”
“난 전혀 불편한 게 없는데….”
“이 집에 이사 온 후 한 번이라도 점검을 받은 적 있어?”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러면 이 기회에 한다고 생각해. 나쁜 건 하지 않을 테니까.”
컴퓨터에 별것도 없으니 그런 걱정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다만… 어느새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두 개의 컴퓨터를 부팅해 놓고 손을 놀리기 시작한 진제환의 표정은 말을 붙이기 어려울 만큼 진지해 보였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여태 집에 설치된 컴퓨터를 보며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자칭 ‘컴퓨터 좀 잘 다루는 사람’인 진제환이 보기에는 정말 영 아닐 정도로 심각한 건가. 놈과 나 사이에 잠시 흘렀던 묘한 긴장감이 깨지는 것을 느끼며 옆에 가서 앉아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지켜보기로 했다.
‘잘못되면 저놈 보고 물어내라고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진제환의 열중해 있는 옆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미스트에서 보았던 유완의 모습이 그 위로 겹치면서 불현듯 얼마 전 통화했던 민후가 떠올랐다. 검을 쓸 때만큼이나 진지한 얼굴로 프로그램을 다루고 있는 지금의 진제환처럼 또 다른 현실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았던 민후.
‘학교라고 했었나.’
주변의 떠들썩하던 모습과 언뜻 비치던 낯설고 커다란 강의실 풍경.
사실 나도 신분이 일단 대학생이기는 하지만 모든 수업을 VT포트와 영상 강의로 처리해 온 데다 그마저도 지금은 휴학 상태라 한 번도 내가 다니는 대학에 직접 가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대학 한복판에서, 그것도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 다닐 내 모습 따위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대표라던 민후와 주변에서 친하게 말을 걸던 사람들. 내가 알고 있는 크란이자 정민후라는 친구와 그들이 알고 있는 정민후 사이에는 아마도 나는 모를 간격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진제환을 지켜보고 있는 지금에서야 뒤늦게 떠올랐다.
‘별건 아니지만… 조금 기분이 이상하긴 하군.’
나는 작업에 열중한 진제환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진제환도 뭐 하는 놈인지 여태 전혀 몰랐었군.
“너는 뭐 해?”
대답은 없었지만 내 말을 확실히 들었다는 뜻으로 검은 눈동자가 의문을 표시하며 이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현실에서 말이야. 학교? 일?”
“…너는?”
“나? 학교 다니다 휴학 중인데.”
“학교를 다니는 중이었다고?”
진제환은 자기 차례의 대답은 하지 않고 이상한 부분에서 관심을 보였다.
“어.”
학교 건물을 본 적은 없지만, 하는 말은 묻어둔 채 답하자 진제환이 그제야 자신이 먼저 받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나는 그냥… 일.”
일이면 일이지 그냥 일은 또 뭐냐. 직장인가? 직장을 다닌다는 놈이 그간 시도 때도 없이 대낮에도 찾아오곤 했던 건가? 설마 그건 아니겠지, 하는 의심이 드러났을 내 표정을 바라본 진제환이 부연 설명을 해야겠다 싶었는지 이쪽을 보고 있는 와중에도 자동으로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외부에서 부탁을 받으면 조금 도와주는 거다. 오해하지 마.”
“뭘로?”
“컴퓨터.”
아… 컴퓨터로 일을 하는 프리랜서 비슷한 건가 보군.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래서 컴퓨터 잘한다고 자랑했던 건가. 새삼스럽지만 나와 동갑인 진제환이 벌써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놀랍게 다가왔다.
“일하면 안 바쁘냐. 시간 없을 것 같은데….”
“안 바빠.”
단호하게 바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왠지 다시 의심이 생겼다.
‘정말 컴퓨터 실력이 있는 게 맞는 건가?’
죄 없는 내 컴퓨터가 진제환의 손에 인질로 잡혀 있는 듯한 환상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진제환의 손놀림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진제환이 반대로 내게 말을 걸었다.
“불편하면 말해.”
“뭐가?”
“…이러고 있는 것.”
그 말의 뜻을 알기 위해 눈을 몇 번 껌벅였다. 이러고 있다고 해 봐야 같은 소파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것뿐인데 뭐가….
‘아.’
어느샌가 진제환의 팔다리가 내 몸에서 가까운 위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설마 이걸 말하는 건가? 좀 가까이 왔다고?
“닿지도 않았는데 뭐가 불편해.”
“그냥. 조금 걱정이 되어서.”
‘걱정…?’
무슨 걱정? 하고 되묻기 전에 진제환은 변함없이 모니터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에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오늘은 혹시 아닐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더 싫어졌을 수도 있고.”
누가? 그 말에 내포된 대상이 누구인지는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후회 안 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더 싫어진 게 아니라면 더 좋아진 쪽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애초에 하루 만에 사람의 감정이 그렇게 극적으로 변할 거였으면 그런 일은 시도하지도 않았을 거란 점을 생각해야지. 진제환은 내 대답에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보아하니 본인도 그다지 심각한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알아. 앞으로 좋아지게 만드는 게 내 목표지.”
“…….”
“그래도 좋다. 네가 오늘은 내게 먼저 질문해 줬으니까.”
고작 별것도 아닌 질문 하나 했을 뿐인데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미 각오하고 시작한 일임에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진제환은 단 한순간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또렷하게 말했다.
“그래서… 좋아.”
진제환은 그 이후 말없이 작업을 모두 끝마친 다음 사실 오늘은 다른 일도 있어서 바쁜 와중에 잠깐 들른 것이라 오래 남아 있을 수는 없다는 말을 했다.
“그래?”
“응.”
뭐 다음에 오면 되니까. 하긴 오늘따라 놈이 저번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혀 스킨십을 하지 않았던 것이 좀 이상하기는 했다.
“그럼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맞느냐는 뜻을 담아 슬쩍 질문하자 진제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아직 아프니까 안 해. 저번엔 내가 확실히 잘못했어.”
내 상태를 먼저 봤어야 했다는 죄책감을 담은 눈이 몸 여기저기에 있는 아직 낫지 않은 상처들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깁스도 여태 못 풀긴 했지만 이것보다 더 심했을 때도 전혀 개의치 않았던 놈이 할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생긴 건 영화 같은 곳에서 금방이라도 총을 쏴 갈길 냉혈한처럼 생긴 놈이 미안함과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이상하게도 좀 귀여워 보였다.
“이제 와서 그러면 뭐 해. 난 상관없는데.”
놀리듯 말하자 진제환이 눈을 찡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가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전보다 좀 더 얼굴색이 안 좋아졌어. 그러니까 오늘은 정말로 안 할 거야.”
내가 전보다 얼굴색이 안 좋아졌다고? 이젠 퇴원도 했고 오늘 아침에 씻을 때만 해도 아무것도 달라진 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나는 눈을 껌벅거리며 내 얼굴을 매만져 보던 손을 도로 내렸다.
‘자식이 변명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오늘은 정말 그냥 갈 모양이었다. 뭐 나야 아무래도 괜찮으니….
“그래. 뭐… 오늘은 바쁘다니 다음에 와라. 그런데 연락은 오늘처럼 미리 꼭 하고 와. 아르바이트 때문에 집에 없을 때도 있으니까.”
내 말에 잠시 표정이 밝아졌던 놈이 아르바이트라는 말에 도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르바이트? 언제부터? 어디서?”
“원래 했어. 검도장으로 가는데 그때는 연락을 못 받거든. 참고해서 오라고.”
보통은 핸드폰을 통해 바깥에서도 연락을 하겠지만 나는 고등학교 시절 이후 그나마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핸드폰을 폐기 처분한 뒤 다시는 쓰지 않았다. 내게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만나면서 익히 깨달았을 진제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마침 내일이 아르바이트 가는 날이기도 하고.’
퇴원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출근하기로 한 날이 내일이라 오늘은 미리 운동을 해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제환 놈이 오는 바람에 하지 못했다.
“검도장이라니….”
진제환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그러고 보니 놈에게는 다리가 불편한 내가 검도장 일을 한다는 말이 상당히 뜬금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접적인 지도를 해 주는 건 아니고 그냥 자세를 봐주거나 조언을 주는 정도야. 일하는 곳 분들이 내게는 부모님 같은 분들이기도 하고.”
물론 진짜 부모님도 멀쩡히 계시지만 말이다. 내 설명을 들은 진제환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문을 했다.
“거긴 먼 건가?”
“…여기서?”
떨떠름하게 묻자 진제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글쎄. 버스 타면 20분쯤 걸리나.”
“버스를 탄다고?”
날카로운 반문에 고개를 들자 표정이 갑자기 상당히 험악해진 놈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또 왜 저러는 거지?’
“아니… 가끔 택시도 타는데.”
“힘들잖아?”
“별로.”
버스에 올라탈 때 계단이 있었으면 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탈 때 알아서 발판이 내려왔다 올라가는데 힘들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진제환은 뭔가가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래도….”
삐릿. 삐릿. 삐릿.
놈이 뭔가 말하려던 찰나 울려 퍼진 벨소리가 대화의 맥을 끊어버렸다. 진제환은 순식간에 딱딱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이전에 본 적이 있는 검은 VT 전자수첩을 꺼내 펼쳐보고는 곧바로 도로 집어넣었다.
“미안. 지금 바로 가야 될 것 같다.”
“그래….”
바쁘긴 정말 바쁜 모양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자 진제환도 따라서 일어섰다. 나는 잘 가라고 인사하려다 문득 놈에게 전해 줘야 할 말이 있었던 것이 뒤늦게 기억났다.
“아 맞아. 너 요즘 게임은 잘 하고 있는 거냐?”
“…왜?”
진제환이 조금 늦게 대답을 했다.
“윤석호… 지부장이 자기 연락 무시하지 말라고 너한테 전해 달라던데.”
평소 혼자 생각하던 때의 버릇 때문에 그냥 윤석호라고 할 뻔했다가 뒤늦게 지부장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행히 진제환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다지 전해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윤석호의 연락을 무시할 정도라면 요즘 놈이 게임을 잘 안 하고 있는 것인가 싶어 물어본 건데 진제환은 다른 부분에서 신경을 썼다.
“네게 그런 말을 했다고? 언제?”
“며칠 전쯤에 연락하면서.”
“…그와 자주 연락하는 건가?”
“뭐? 자주 연락은 무슨. 나한테 다시 그런 말 전해 달라는 소리나 안 들어오게 해 달란 얘기라고.”
질문을 하려면 좀 덜 끔찍한 것으로나 해 주든가. 별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가정을 묻는 놈에게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하자 진제환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 …미스트라면 잘 하고 있어. 너는… 어때.”
아까 물은 걸 참 빨리도 대답하는군.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진제환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잘 하고 있어.”
“그래.”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은 놈이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보고 싶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나는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진제환의 눈을 마주 본 순간 나 또한 문득 지금은 이 검은 눈동자가 아니라 미스트에서의 푸른 눈동자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유완….’
그렇게 잠시 침묵 속에서 마주 보고 있기를 얼마나 했을까. 진제환이 고개를 돌리며 다른 질문을 했다.
“내일, 또 와도 괜찮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차가운 얼굴과 살짝 찌푸린 미간.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게 진제환이 긴장했을 때의 표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되는데. 검도장에 가는 날이 내일이라.”
“…몇 시에?”
“두 시.”
“알았다.”
알다니, 뭘? 하고 반문하기도 전에 진제환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다시 연락할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처 제대로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나는 한숨을 내쉰 뒤 뒤돌아서서 부엌으로 향했다. 왠지 목이 타서 물이 마시고 싶었다.
‘시간이 조금 남는데.’
이럴 때 조금이라도 운동을 해야겠다 싶어 러닝머신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운동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퇴원 후 이전보다 더 악착같이 운동을 시작한 또 하나의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어서 나아야 다시 정승조를 찾아갈 수 있을 테니까.’
방구석에 항상 세워져 있는 예전에 쓰던 죽도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다음 날,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선 나는 빌라 앞에 서 있는 거대한 바이크와 그 주인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너…?”
“데려다줄게.”
진제환은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선수를 쳐서 제안했다. 내가 오늘 출근한단 소리를 듣고 굳이 시간까지 물어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던가. 계획적인 행동인 모양이니 아무래도 그냥 돌아가라고 해서 가진 않겠군.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놈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헬멧 두 개를 바라보았다.
“너… 일 있는 것 아니었냐.”
“몇 시간 정도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있는 대로 속도를 내서 달려온 게 뻔하게 보이는 땀방울 맺힌 이마를 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거냐. 나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며 허, 하는 웃음을 흘린 다음 진제환을 바라보았다.
“집이 대체 어딘데 여기까지 그렇게 오고 그래.”
“별로 안 멀어. 이러는 사이 시간 다 가니까 어서 타.”
대답하면서 다가온 진제환이 내 머리에 억지로 헬멧을 씌우고는 자신도 뒤집어썼다. 아무래도 거부할까 봐 그러는 모양이었지만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사양하는 건 오히려 내 성격이 아니었다.
“뭐 어쨌든 고맙게 잘 타마. 네가 멋대로 온 거니 나중에 탑승비 내놓으라고 하진 말고.”
헬멧을 살짝 벗어 입만 드러내고 대답하자 진제환이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이내 기분 좋게 웃었다.
<…안 그래.>
<어? 이거 헬멧 안에서 말해도 들리는 거냐?>
놈이 분명 헬멧을 쓰고 말했는데도 헤드폰을 쓰고 통화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리는 음성에 놀라 똑같이 헬멧을 쓴 채 말하자 놀랍게도 내 목소리도 확실히 들려왔다.
<응. 신형.>
<흠….>
감탄하면서 진제환의 바이크에 올라타기 위해 의자를 짚자 놈이 다가와 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조금 쪽팔리긴 했지만 이 바이크는 도저히 다리 하나로 지탱하면서 탈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게 컸기에 어쩔 수 없었다.
진제환은 내가 손가락의 깁스 부분이 닿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등을 잘 붙잡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한 후 그대로 급하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덕분에 몸이 갑자기 뒤로 꺾일 뻔했다.
‘윽….’
완전 신난 모양이군. 이 거대한 바이크를 타고도 전혀 어렵지 않게 동네 골목골목을 유연하게 빠져나가는 진제환의 기술에 감탄하며 붙잡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줘.>
<음… 저 앞에서 왼쪽으로. 그 다음은 큰 도로니까 그대로 쭉 가면 돼.>
내 지시에 따라 진제환이 매끄럽게 방향을 돌려 달려갔다. 헬멧을 써서 얼굴로는 느낄 수 없었지만 팔다리는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기에 꽤 즐거웠다.
놈이 묘기처럼 차와 차 사이를 잘도 빠져나가며 달린 덕분에 검도장에 도착했을 때는 평소의 출근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각이었다.
“여긴가?”
“응.”
헬멧을 벗어 건네주면서 대답하자 진제환이 눈앞에 서 있는 한옥식 나무 대문을 흥미로운 듯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실 도장 정문은 반대편에 따로 크게 있었지만 나는 사부님의 집 바로 앞에 있는 이쪽 입구로 드나들곤 했기에 이쪽으로 온 것이었다.
“데려다줘서 고맙다. 덕분에 빨리 왔어.”
“인사는 필요 없어.”
남이 말했다면 상당히 기분 나빴을 법한 말을 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운 진제환이 약간 미적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저거… 아쉬워하는 표정이 맞는 건가?’
아무래도 이제 다 데려다줘서 돌아가야 하니 그런 거겠지. 덕분에 덩달아 나까지 묘한 기분이 되어 서 있는데, 진제환이 인터폰 쪽을 턱짓으로 가리켜 보이며 애써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어가.”
“응.”
조금 망설이다 버튼을 누르자 벨이 몇 번 울리지도 않고 곧바로 사모님의 얼굴이 작은 입체 화면으로 떠올랐다.
[ 무헌이니? ]
“네.”
[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천천히 오지 않고. ]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내며 작게 드러난 사모님의 얼굴이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러다가는 뒤에 멀뚱히 서 있던 진제환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 뒤쪽은 누구니? 아는 사이? ]
“아. 제… 친구인데요. 오늘 데려다줘서요.”
진제환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친구라고 대답했지만 놈은 딱히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놈이 이전에 자신은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단 말을 했던 것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신경이 쓰였었는데 다행이군.
[ 친구? ]
사모님은 내 말을 듣고 매우 놀라셨는지 진제환을 위아래로 몇 차례나 훑어보다 이내 함박 미소와 함께 덜컹 문을 열어주셨다.
[ 세상에. 무헌이 친구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둘 다 들어오렴. ]
“어…….”
안을 향해 열린 문을 바라보다 진제환 쪽을 돌아보자 놈 또한 뜻밖의 상황에 놀랐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뭐… 오늘은 출근해도 사부님과 사모님이 제대로 일을 시켜주실 것 같지 않았으니 한 사람 더 견학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진제환을 향해 손짓을 했다.
“들어가자. 그거 끌고 와.”
“괜찮은 건가?”
“사모님이 들어오라고 하셨으니 괜찮겠지.”
“…아니. 네가 싫은 거라면 나는 돌아가도 괜찮아.”
뭔 말을 하려는 건가 했더니……. 나는 피식 웃으며 답지 않게 어제부터 자꾸 심각한 얼굴로 겁 많은 놈 흉내를 내는 진제환을 바라보았다.
“나는 상관없어. 네 시간이 부족한 것만 아니라면.”
그제야 놈은 곧바로 언제 물러섰냐는 듯 뻔뻔한 무표정으로 되돌아와 바이크를 끌고 나보다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저래야 진제환답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사부님의 집을 가로질러 겨울이라 앙상한 나무들이 빽빽한 정원을 지나자 커다란 검도장 건물이 나타났다. 뒷문으로 들어가니 직원용 휴게실에 나와 계시던 사부님과 사모님이 우리를 맞이했다.
“무헌아. 왔니?”
“예.”
“그래, 뒤의 그 친구가 네 친구라고?”
묘하게 심각한 표정을 한 사부님이 진제환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진제환이 웬만한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작 부끄러워서 눈을 돌렸겠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시선이었다. 하지만 진제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두 분의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낮은 목소리가 직원용 휴게실 안에 울려 퍼지고 나서 몇 초 동안이나 대답 없이 놈을 바라보기만 하던 사부님이, 별안간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거 정말 들은 대로 잘생긴 친구로군. 껄껄껄! 나는 무헌이 사부 되는 사람이네.”
“그렇죠? 순간적으로 무헌이 뒤에 TV가 생긴 줄 알았다니까요. 나는 이 사람 부인이란다. 무헌이 친구는 이름이…?”
두 분의 확 달라진 반응에 순간 진제환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는 금세 원상 복귀하며 사부님이 내민 손을 붙잡아 악수를 나눴다.
“진제환이라고 합니다.”
“그래. 오늘은 무헌이도 다시 적응이나 잘 하면 다행이니 같이 견학이나 하다 가겠나? 아, 물론 바쁘지 않다면 말이야.”
“…바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제환이 빠르게 대답했다. 이렇게 오늘 놈의 견학은 확정이군.
“손에 굳은살이 좀 있는데… 혹시 검도 배운 적 있나?”
뜻밖의 질문을 하시는 사부님을 쳐다보자 진제환이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얼마나?”
“7년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흐음.”
“사부님.”
진제환과 악수를 위해 붙잡은 손을 놓아줄 생각을 안 하고 계속 이리저리 주물러 보는 사부님을 부르자 그제야 손을 놓으며 허허 웃으셨다.
“아, 이런.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그만……. 그러면 나는 안에 먼저 들어가 보지. 무헌이 친구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편히 있다 가게.”
사부님이 들어가시고 나자 이번에는 사모님이 호기심과 감탄 어린 눈빛으로 나섰다.
“정말 잘생겼네. 혹시 TV 나오는 일 같은 거 하거나 그러지는….”
“아닙니다.”
확실한 부정에도 사모님은 영 믿기 힘든 표정이셨다. 하긴 나도 처음에는 진제환이 영화배우쯤 할 것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했었지. 주변에서 흔히 보기 힘든 완전히 서구적이지도, 그렇다고 동양적이지도 않은 조화를 가진 얼굴이라 더욱 일반인 같지가 않았다.
“검도를 했다면 도복을 빌려줄 수 있는데. 무헌이 친구는 어느 쪽으로?”
“빌려주신다면 감사히 입겠습니다.”
“호호. 그래. 직원용 탈의실은 저 옆방이니 먼저 들어가서 갈아입으렴.”
잠시 내 쪽을 쳐다본 진제환이 눈짓을 받고는 얌전히 먼저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진제환이 문을 닫고 들어가자마자 사모님이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감추고 있던 걱정스러운 표정을 만면에 드러냈다.
“얼굴이 이게 뭐니. 퇴원하기 전보다 더 해쓱해져서는…. 휴우.”
“저는 괜찮아요.”
“이게 어딜 봐서 괜찮은 얼굴이야. 아직 손가락의 깁스도 못 푼 애가… 목이랑 머리는 이제 괜찮은 거고?”
사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딱지가 앉은 부분도 앞머리칼로 잘 가렸고, 목은 살색과 비슷한 밴드를 붙였다. 손을 잘못 구부리면 아직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예.”
“저 친구는 언제 사귄 친구니? 대학?”
한숨을 쉰 사모님이 진제환이 들어간 탈의실 쪽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뇨…. 그. 취미가 같아서 어쩌다 보니…….”
“취미?”
눈을 동그랗게 뜬 사모님이 이내 검도를 했다던 진제환의 말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랬구나. 네가 이곳에 친구를 데려온 것이 얼마 만인지….”
“…….”
사모님과 나 둘 다 그 순간 똑같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나와 함께 왔던 친구는 정승조였으니까.
“…진제환은 괜찮은 녀석입니다.”
“그래. 잘 됐다, 잘 됐어. 아무렴 네가 데려왔는데 괜찮겠지. 나도 참. 나이가 드니 주책이구나. 무헌아, 그러면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렴. 오늘은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그래도 명색이 아르바이트인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합니까.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사모님이 정말로 집으로 곧바로 돌려보내실 것 같아 말을 삼켰다. 아직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모님을 뒤로하고 탈의실로 들어가자 행거에 사이즈별로 걸려 있던 도복 중 대충 맞는 것을 찾아 입은 듯한 진제환이 막 허리띠를 묶으며 돌아보았다.
“너… 검도 했었어?”
나는 아까 들었을 때 티는 안 냈지만 상당히 놀랐던 사실에 대해 질문했다. 진제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었군…….’
순간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들어 나는 잠시 말없이 진제환을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 그것은… 동질감? 반가움? 아니면…….
“갈아입어.”
“응.”
진제환이 앞에서 비켜서는 것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내고 전용 사물함을 열었다. 그 안에서 깔끔하게 접힌 검도복을 꺼내 갈아입었는데 왠지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묘한 얼굴을 한 진제환이 멍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너…?”
“왜?”
“혹시, 예전에… 본 적이…….”
“…….”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미안.”
뭐 중요한 걸 물어볼 것처럼 굴더니, 싱거운 놈 같으니라고.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도복을 입은 상태에서는 다리를 저는 것이 평소의 배는 더 싫었기에 느리긴 해도 절뚝거리지는 않았다.
진제환은 내 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내내 따라오다 드넓은 수련관 안에 들어서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일러서 현재 도장 안은 온통 초등부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시끄럽기로 유명한 인우와 세종이가 나를 발견하고 바닥이 꺼져라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사범님이다!”
“왜 그동안 안 왔어요!”
녀석들이 너무 세게 달려오고 있어 이러다 부딪히면 어쩌나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진제환이 타이밍 좋게 앞에 나서서 팔을 뻗어 가로막았다. 덕분에 걸음을 멈춘 인우와 세종이가 잔뜩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진제환을 올려다보았다.
“이 아저씬 누구예요?”
“사범님 친구. 그런데 너희들, 시킨 건 다 하고 온 거냐.”
“엑! 친구!”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한 대 얻어맞은 듯 충격 받은 표정을 지은 녀석들이 진제환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친구래….”
“사범님, 친구 있었어요?”
이 녀석들의 머릿속에서 난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친구가 있다는 말 한마디에 이토록 놀라는 걸까.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들의 머리에 양손을 얹어주었다. 원래는 움켜쥐어야 하지만 깁스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시끄럽게 굴면 혼난다. 가서 내려치기 100번이나 하고 와.”
“으…… 네.”
이미 내게 쓴맛을 많이 보았던 녀석들이 무어라 더 소란을 피우려던 것을 거두고 곧바로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다. 역시 사내 녀석들은 힘의 논리지.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진제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몸은 어때.”
“괜찮은데. 왜?”
“얼굴색이 별로 좋지 않아.”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내 얼굴을 매만져 보았지만 역시 나는 아무 차이도 느낄 수 없었다.
“멀쩡한데….”
“…응.”
그렇다면 다행이고, 하는 말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한 진제환이 도장을 죽 둘러보며 구경하던 것을 대충 다 마쳤는지 도로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기서 네가 일한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아.”
기껏 봐 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죽도 쪽을 가리켰다.
“상상이 안 가면 직접 봐 주지. 아무거나 하나 집어 봐.”
“그래도 되는 건가?”
안 될 것은 또 뭔가. 이곳을 걸음마를 할 때부터 돌아다녔던 것이 바로 나인데. 고개를 끄덕이자 진제환이 왠지 발걸음에 힘을 주어 죽도를 모아둔 쪽으로 다가가 몇 개를 집어 보다 한 개를 골라서 가져왔다.
“봐 줄 테니 마음대로 휘둘러 봐. 어차피 내가 하는 일도 그거니까.”
18세까지 밥 먹고 한 것이 검도뿐이라 타인의 품세에서 어디가 이상하고 잘못되어 있는지는 한눈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내 말에 입꼬리를 살짝 올린 진제환이 “좋아.” 하고는 죽도를 위로 들어 올렸다 앞으로 내리치면서 기본자세 몇 가지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폼이 더 깨끗하잖아.’
눈을 가늘게 뜨고 품세를 판단해 보았다. 경력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교과서적인 움직임이었다. 휘두를 때마다 나는 소리를 보면 힘이 굉장하고, 속도나 체력도 괜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정도라면 만약 내가 놈을 마주하고 선 채 대련을 한다고 해도 선제공격을 위해 먼저 파고들어 가기가 상당히 힘들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것까지 가늠해 보고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생각을 했군. 진제환의 품세를 보다 가상의 대련 생각으로까지 넘어가다니. 깨닫자마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에도 누를 수 없는 묘한 씁쓸함과 부러운 감정이 가슴속을 치고 올라와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아직 멀쩡한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서 대련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태껏 잊고 지냈던 호승심이 꿈틀거리는데도 무력하게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사이 뚫려 있던 허한 구멍의 크기를 자각하자마자 숨을 쉬는 것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이게 바로 아까 느꼈던 그 감정이었어.’
검도복을 걸친 진제환을 보았을 때 느꼈던 영문 모를 감정. 그것이 바로 이 씁쓸함이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멍하게 진제환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놈이 다 끝냈는지 천천히 죽도를 내리면서 나를 돌아보다 표정이 굳었다.
“무헌…?”
“사범님! 다 끝냈어요!”
그때, 때마침 인우와 세종이가 또다시 달려와 나는 다행히 진제환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요, 저 친구 아저씨요. 검도 하는 분이에요?”
아이들이 진제환의 눈치를 보면서 나름대로 안 들리게 한다고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런데?”
그건 또 왜 물어보는 것일까. 다짜고짜 던져진 질문에 되묻자 녀석들이 답답하다는 듯 조그만 가슴을 탕탕 쳐댔다.
“어휴, 인우 똥개가 사범님 대신에 이제 저 아저씨가 우리 가르치러 온 거라고 자꾸 그러잖아요.”
“아니야, 니가 먼저 그랬잖아! 니가 사범님 이제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그랬으면서!”
“힝, 진짜 그래요? 진짜 저 아저씨가 사범님 대신하려고 온 거예요?”
이 녀석들… 나는 그제야 녀석들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겨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요즘 내가 도장에 자주 못 나갔더니 쓸데없는 걱정이 든 모양이었다. 멀쩡한 왼손으로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하나씩 놓아 주자 엄살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야!”
“앗! 내려치기도 다 했는데 왜 때려요.”
“대신하긴 누가 대신해. 저 녀석은 진짜 그냥 내 친구라서 온 거야. 이상한 질문으로 쉬는 시간 늘릴 생각 말고 저기 가서 연습이나 더 해.”
“씨잉! 사범님은 우리보다 저 아저씨가 좋은 거죠!”
세종이가 입술을 비죽거리다 달려가자 인우도 뒤따라 가 버렸다.
참 폭풍 같은 녀석들.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저 녀석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다시 이곳에서 사범으로서 적응할 수 있었을까. 나는 겨우 평소와 같은 마음으로 진제환을 볼 수 있었다.
“엄지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잖아. 그쪽은 힘을 빼고 이쪽 끝에 넣어야지. 알고 있을 텐데.”
진제환의 손을 붙잡아 엄지에서 힘을 빼게 시키고 왼손 약지와 새끼를 꾹 눌러주었다. 진제환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이후에도 나는 천천히 도장 안을 돌아다니며 자세가 나쁜 아이들을 교정시키고 연습을 게을리하는 녀석들을 중간중간 관리했다. 평소였다면 내심 반항기 가득한 눈빛으로 수긍했을 녀석들도 오늘만은 내 뒤에서 인왕처럼 싸늘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진제환을 보자마자 모조리 겁에 질려 얌전해져서 일하기가 상당히 편했다.
“무헌아. 적당히 하고 오렴.”
“사모님.”
몇 번 돌아다니던 사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사모님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너 퇴원하면 주려고 만들어 뒀던 식혜가 있으니 와서 먹으렴. 휴게실에 가져다 놨으니까.”
오랜만에 들어보는 식혜라는 말에 드물게 식욕이 당겼다. 사모님을 따라 휴게실로 향하자 사부님이 먼저 와 계셨다.
“앉아.”
진제환에게 옆자리를 권한 뒤 나도 자리에 앉으니 사부님이 마시던 식혜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무헌이 친구…. 진제환이라고 했던가?”
“예.”
진제환에게 또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가 싶어 내가 제지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타이밍 좋게 내게 식혜를 따른 잔을 건네주시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그래, 견학해 보니 우리 도장은 어떻던가.”
그냥 대충 예의에 어긋나는 대답만 안 하면 되니까 적당히 대답하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진제환은 이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좋습니다. 수련생들의 분위기가 어지럽지 않고 자유롭게 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짤막하지만 솔직하게 나온 그 말에 사부님의 표정이 상당히 밝아졌다.
“그렇지. 재미있게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수련 방법이라는 게 우리 도장의 방침이거든.”
덩달아 사모님의 표정까지 약간 풀어져 있는 것을 보니 두 분은 어지간히 진제환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었다. 나는 차갑고 달콤한 식혜를 마시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진제환이 게임과 관련된 쓸데없는 말만 안 해 주면 좋겠는데.
두 분은 그로부터 한참 동안이나 진제환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히 내겐 아직 감추고 싶은 부분으로 남아 있는 과거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진제환도 미스트와 관련된 말은 하지 않았기에 나는 조용히 듣기만 하는 입장으로 있을 수 있었다.
“제환 군, 혹시 형제자매들은 없어? 다들 예쁘고 잘생겼을 것 같은데.”
어느새 호칭까지 바뀐 사모님의 말에 진제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형이 하나 있습니다.”
진제환에게 형이 있었다니. 평소의 성격이나 태도 때문에 형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나는 내심 놀랐다.
“정말? 형제가 다 잘생겼을 테니 부모님이 행복하시겠어.”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대답이었지만 분위기는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세상에. 미안. 슬펐을 텐데 괜한 이야길 해서.”
사모님의 사과에 진제환이 고개를 저었다.
“오래전 일이라 괜찮습니다.”
이것 또한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나는 정말로 내가 생각보다 진제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잘생겼는데 성격도 좋네. 우리 무헌이는 아직도 속을 썩이는데. 무헌이랑 같이 다니면 왕자와 시종 같을까 봐 걱정되네. 어떡한담?”
사모님… 차마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소태처럼 쓰게만 느껴지는 식혜를 씹어 삼켰다. 진제환이 나보다 비교도 안 되게 잘생긴 것은 사실이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를 깬 것은 바로 칭찬을 받은 진제환 쪽이었다.
“저보다는 무헌 쪽이 더 잘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으응?”
“뭐라고?”
“저처럼 너무 눈이 사나워 다른 사람의 불쾌감을 사는 얼굴보다는 저렇게 눈이 깊고 의지가 강해 보이는 쪽이 좋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며 나 또한 입을 멍하니 벌렸다. 이 자식, 대체 뭘 할 셈이지.
“진제환 너….”
낯부끄러운 짓은 당장 그만두라고 하려던 찰나, 별안간 사부님의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뭘 좀 아는 친구군. 마음에 들어.”
이건 또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당황해하고 있는데 사모님께서 웃음을 멈추고 진제환의 손을 흔쾌히 붙잡았다.
“무헌이의 친구라면 우리에게도 아들이나 다름없어. 그래, 혹시 우리 도장에 다닐 생각은 없어? 제환 군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사모님!”
결국 내가 말을 자르며 나서자 진제환의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하긴 뭘 생각한단 말이냐.
하지만 그 미소 한 번에 사모님과 사부님은 진제환에게 더욱 믿음을 갖게 되신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나고 우리가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자 사모님은 나보다도 진제환이 돌아간다는 사실에 오히려 더 아쉬워하시기까지 하셨다.
“무헌아, 도착해서 또 연락 주고 잘 들어가렴. 제환 군, 다음에 꼭 다시 와.”
인사를 나눈 뒤 바이크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올 때보다 다소 시간이 걸렸다.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과 겹쳐서 도로가 꽤 막혔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고마웠다. 잘 가.”
도로에 내려주면 된다고 해도 한사코 집 앞까지 와서 내려준 진제환에게 감사 인사를 하자 진제환이 헬멧을 쓴 그대로 팔을 살짝 들어 올려 이쪽으로 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왜?”
“…….”
아 맞다. 저놈이 지금 헬멧을 쓰고 있으니 말을 해도 내가 들을 수가 없군. 진제환의 곁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얼굴을 검게 가리고 있던 강화유리 부분이 사라지면서 뒷목이 빠르게 앞으로 끌어당겨졌다.
“…….”
“후.”
그대로 맞닿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얽힌 후 떨어졌을 때, 진제환이 작게 숨을 내쉬며 속삭이는 목소리를 흘렸다.
“…수고비는 이걸로 할게.”
“안 받는다며.”
혀가 세게 빨리는 느낌 때문에 영 등골이 찌릿한 것이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어이가 없어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제환이 타액으로 젖은 내 입술을 문질러 닦아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탑승비. 이건 수고비.”
“…….”
이걸 농담이라고 한 거면 진심으로 안 웃겼다. 내가 슬쩍 찌푸리며 놈을 바라보자 진제환이 작게 웃었다.
“이상해.”
“뭐가?”
“널 알면 알수록 더 좋아져서.”
그러냐. 나도 너에 대해 몰랐던 걸 오늘 상당히 알게 되긴 했다만….
‘한두 번 들은 건 아니지만 역시 이런 말을 듣는 건 좀… 낯부끄럽긴 하군.’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내가 지금 이 상황에도 역시나 전혀 화가 나거나 거부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친구랑은 이런 걸 했을 때 괜찮지 않은 게 당연한 건데…. 이건 대체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시선을 슬쩍 돌리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진제환이 입술 밑을 문지르던 손가락을 뺨 쪽으로 슬며시 올려 쓸었다. 순간 왠지 닭살이 돋아 손을 쳐내자 놈이 조용히 웃었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넌 사실 굉장히 민감한 것 같아.”
민감하다니? 하고 되묻기 전에 따갑게 느껴지는 입술의 부은 감각이 놈이 무엇에 대해 말한 것인지를 제대로 상기시켜 주었다.
“…너, 다음엔 검도장 오지 마라.”
“왜?”
그걸 지금 몰라서 되묻는 거냐? 어이없는 마음을 가득 담아 바라봤지만 진제환은 태연하게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다음에 또 오라고 하셨으니까 갈 건데.”
“됐다니까. 오지 마.”
설마 사부님과 사모님께 유난히 사근사근하게 대했던 이유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던 건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단호하게 잘라 거부했지만 놈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이제 나보고 오지 말라고 할 수 있는 건 거기 계신 분들뿐이야.”
진제환의 환한 웃음을 보며 나는 유완이 떠난 이후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놈의 상당한 재수 없음을 현실에서 제대로 느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렇게 고집이 센 놈이었지. 잊고 있었는데.’
사부님과 사모님이 놈의 이 모습을 보셨어야 했는데 그럴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좋냐?”
“그분들이 네게 부모님 같은 분들이라고 해서 궁금했었는데, 이젠 그 답을 알게 되어서 좋아.”
정말 순수하게 기뻐 보이는 놈의 얼굴을 보다 결국 숨만 길게 내쉬고 무어라 더 말할 의지를 접었다.
진제환은 헬멧을 조정해 까만 강화유리가 도로 생겨나게 만든 다음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럼 이만 갈게. 들어가.”
진제환은 그 말만 남긴 뒤 순식간에 바이크의 시동을 걸고 앞바퀴가 순간적으로 조금 들릴 만큼 빠르게 떠나 버렸다.
부아아앙!!!!
나는 얼마간 놈이 떠난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사부님과 사모님을 만나게 되어 좋다고 말하면서 웃던 진제환의 얼굴이 뇌리에서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 피핏… 긴급 통화를 요청하는 사용자가 연락을 시도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피핏… 긴급 통화를 요청하는 사용자가 연락을 시도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피핏…. ]
“닥쳐.”
정승조는 두통에 절어 멍한 눈으로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간신히 눈을 붙였다 싶었더니 또 전화가 오는 바람에 신경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전원 오프.”
[ …사용자의 명령에 응답하여 모든 시스템을 종료합니다. 감사합니다. ]
시스템을 조정하던 컴퓨터가 꺼져 버리자 집 안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정승조는 다시 눈을 감아 보았지만 이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져 버린 실낱같던 잠은 몇 번을 뒤척여도 다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손으로 대충 훑어 구겨진 담뱃갑을 찾아 한 개비를 짓씹듯 입에 물었다. 굴러다니던 라이터를 집어 들어 불을 붙이자 매캐한 연기와 함께 끝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후….”
가는 필터를 깊숙이 빨아들이면 폐 속이나마 잠시간은 따뜻해진다. 타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얻은 얼마 안 되는 위안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담배도 그다지 큰 진통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조금 잦아들긴 했지만 여전히 깨질 것처럼 울리는 두통 때문에 잔뜩 미간을 찌푸린 정승조는 방 밖으로 나섰다.
불이 꺼진 거실에는 며칠 전부터 하나도 치우지 않은 깨진 술병 잔해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갈색으로 굳어 있는 핏자국이 몇 개.
“…….”
정승조는 한동안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런 더러운 자국 같은 것은 지워 버리면 그만인데, 자신은 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왜 저것을 볼 때마다 숨을 쉬기 힘들어 미칠 것 같은데도 몇 시간이나 이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답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멍하니 떠올리는 자신이 병신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정승조는 나른하게 의자에 걸터앉았다.
수동으로 집 안 시스템을 모두 꺼 버려도 사용자 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켜져 버린다. 한 시간쯤이 지나자 또 지겨운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는 것을 들으며 정승조는 그 자리에서 몇 개비나 피우던 담배를 그대로 병에 밀어 넣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받아.”
[ -승! ]
명령과 동시에 홀로그램으로 튀어나온 남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 왜 연락을 안……. 뭐야, 다쳤어? ]
정승조는 상의를 입지 않은 채 가슴과 어깨를 두르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 어딜 다친 거야? 앞면? 뒷면? 병원은 갔어? ]
“벤. 닥치고 연락하지 마. 전화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으니까.”
[ …그 말 하려고 전화 받은 거냐? 오, 그 모양이 돼서도 이따위로 말하는 좀비를 내가 잠시라지만 걱정씩이나 하다니…. 난 정말 착한 것 같아. 그래서, 다친 이유는 뭔데? 술에 취해서 또 어디서 패싸움이라도 했어? ]
“…….”
정승조는 영어로 신나게 빈정대는 상대방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무시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홀로그램으로 상체만 허공에 뜬 남자, 벤은 계속해서 화를 내려다 정승조의 시체처럼 검게 가라앉은 눈가에 어린 짜증과 살기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평소와는 뭔가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이쯤 되면 욕이라도 한 트럭 퍼붓고 연결을 끊는 것이 정상인 놈인데……. 설마?
[ 혹시 저번 전화 이후에… 엔젤 보이랑 무슨 일 있었어? ]
“…….”
여전히 대답은 없었지만 정승조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본 벤은 그것이 정답임을 알아차렸다.
[ 맙소사. 드디어 만난 거야? ]
“…….”
[ 그런 거냐고! ]
“그 녀석이… 왔어.”
정승조가 벤이 아닌 다른 벽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뭐?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다시 한 번만 얘기해 줄래? ]
정승조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벤은 허 하는 한숨과 함께 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 너 같은 겁쟁이에게 먼저 찾아와 주기까지 하다니… 거 그 친구 진짜 엔젤은 엔젤이었나 보네. 근데 그 꼴을 보니… 잘 안 된 거야? ]
“…….”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잠시 가라앉았던 절망과 광기가 범벅된 눈동자를 본 벤의 표정도 당혹스럽게 일그러졌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말없이 어둠 속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남자의 뒷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처럼 보였다. 벤은 미동도 없는 정승조를 향해 몇 마디를 더 던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반응이 없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욕설을 내뱉었다.
[ 정말 미치겠군. 너희 부모님도 널 포기했다지만 그렇다고 걱정까지 안 하는 건 아니야, 승. 난 대체 네 속을 알 수가 없다. 하긴 지금까지 네가 뭘 제대로 말할 때라곤 술이나 약에 잔뜩 취했을 때 말고는 없었지. 휴. 차라리 네가 한국에 가지 못하도록, 아니, 그보다 먼저 첸진이 네게 관심을 보였을 때 막았어야 했는데. ]
“…….”
[ …조만간 나, 한국 갈 거야. ]
그 말을 듣자 정승조의 고개가 다시 움직였다. 자신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듯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한 벤은 순간 소름이 끼쳤던 속마음을 그런대로 잘 감춘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허송세월만 벌써 몇 달째잖아. 거기서 계속 일을 마무리 짓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거면 나라도 널 다시 미국으로 끌고 와야지. 첸진이 너와 연락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
“관심 끄고 꺼져. 내 눈에 띄면 죽여 버릴 테니까.”
[ 또 말 그따위로 한다. 나라고 바쁜 시기에 가고 싶어서 가는 줄 알아, 이 겁쟁아? ]
벤은 분노에 가득 찬 정승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 이미 비행기는 2주일 후로 예약해 뒀어. 가서 보자, 승. ]
퍽!
그 말과 동시에 재떨이로 쓰던 병이 홀로그램을 뚫고 날아가며 퍽 하고 깨져 버렸다. 전화는 곧바로 강제 종료되었다. 조각나 떨어진 유리와 벽을 흉하게 물들인 담뱃재의 즐비한 잔해를 노려보던 정승조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 자리에 있었던 핏자국들이 담뱃재 얼룩에 가려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더럽게 물들여진 바닥을 한참 동안이나 입술을 꽉 다문 채 내려다보던 정승조는 별안간 눈가를 가리며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결국에는 모두 다 사라진다. 저렇게 더럽혀져서, 아무리 치우고 닦아내도 원래 찾고자 했던 것은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하하….”
정승조는 웃으며 바닥을 굴러다니던 병 하나를 차 날렸다. 쌓여 있던 잔해들과 병이 부딪쳐 유리 긁히는 소리를 내며 또다시 깨지는 것을 보면서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난… 포기 안 한다.」
서늘한 햇볕 아래서 만났던 그날로부터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어 들려오는 목소리. 침착하지만 잔뜩 가라앉아 있었던, 여전히 동공을 보기 힘들 만큼 새까맣게 빛나던 그 눈. 야위고 창백했던 얼굴. 짓씹어 메마른 입술.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감겨 있었던 붕대. 자신이 모르는 사이 어딘가는 자라고 어딘가는 변해 버린 몸.
…그리고 절뚝거리던 다리. 그 다리.
다리가…….
“…….”
머리가 아파서 미칠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집을 뛰쳐나가 목이 멜 만큼 그리워한 대상을 향해 달려가고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 대상을 죽여 버리고 싶기도 했다.
꽉 끌어안아 품에 넣은 채 울고 싶을 만큼 격정이 치솟다가도 지금 당장이라도 그 몸을 손가락 끝부터 씹어 삼키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광기 어린 생각이 동시에 들끓었다.
아니. 이것이 정말 그저 격정이고 광기라고만 할 수 있는 것일까? 정승조는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세상에 그 어떤 단어가 있어 이러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정승조는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사정없이 할퀴어 내리면서 짐승 같은 신음을 씹어 삼켰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멀지 않은 곳에 쓰레기처럼 방치되어 있는 게임 캡슐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이런 상황일 때 늘 그랬듯이 그곳으로 향했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곳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모든 괴로움이 완전히 잊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낯선 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도 참, 희한한 놈이다.」
「친구가 없으니 이렇게 싱겁게 혼자 노는 거 아냐.」
그 말을 했던 것은 누구였을까.
‘누구였지.’
얼굴을 한 치도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가리고 있던 마법사. 기묘하게 거슬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던, 지금까지는 거의 잊고 있었던 남자.
하지만…….
「너도…… 알고 보니 그렇게 이상한 놈은 아니었어.」
게임 속에서는 일부러 텅 비웠던 머릿속에서 유일하게 신경을 건드렸던 그 목소리가 다시금 떠오르자 그제야 꽉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승조는 한참 동안 눈을 가린 채 헐떡거리다 숨이 좀 잦아들고 나서야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향한 곳은 결국 THE MIST의 캡슐 쪽이었다.
나는 그간 여유가 없어 얻었을 때 한 번 확인해 본 이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7서클 스킬창을 불러냈다.
“스킬창 오픈.”
마법 쪽 목록에서 맨 밑에 적혀 있는 새로운 이름들의 모습이 쭉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