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은 눈꺼풀을 찔러오는 햇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제대로 휴식을 푹 취하고 일어났는지 온몸이 나른하고 편안했다.
아침에 이렇게 따뜻하고 기분 좋게 깨어난 것이 얼마 만이지?
멍하니 단 졸음에 빠져 편안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난밤 잠들기 전의 일이 전기 스파크가 튀듯이 머릿속에서 번쩍 떠올랐다.
‘아. 진제환.’
순식간에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아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내 침실의 풍경이 보였다.
‘어제 내가 잠든 곳은 분명 소파였는데….’
이맛살을 찡그리며 일어나 간지러운 배를 긁으며 거실로 나갔다.
“진제환. …진제환?”
다른 방에 있나 싶어 소리를 내어 불러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컴퓨터, 현재 시각.”
[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16분입니다. ]
응? 1시 16분? 그것도 오후?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맙소사. 믿어지지 않는 말에 창문을 비틀어 열자마자 세찬 칼바람이 순식간에 몸과 집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길을 따라 한가롭게 다니고 있는 사람들과 차를 보니 확실히 익숙한 대낮 오후 거리의 풍경 그대로였다.
‘진짜잖아…….’
믿을 수가 없군. 일이 있든 없든 언제나 오전 일곱 시에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던 내가 이런 늦잠이라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돌아서는데 식탁 위에 웬 노란 쪽지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다시 연락할게.’
답지 않게 정갈한 필체로 쓰여 있는 쪽지는 진제환이 써놓고 간 것임에 분명했다.
‘뭐야. 돌아간 건가….’
가면 간다고 이야기라도 하고 가지. 아무래도 내가 자고 있으니 깨우기 미안해서 쪽지만 남기고 갔나 본데, 일어난 주인이 손님이 가는 것도 모르고 잠만 잤었다는 걸 깨달으면 더 민망해질 거란 사실은 왜 모르는 거냐.
왠지 좀 섭섭한 마음이 들어 다음에 오면 뭐라고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쪽지를 떼어 찬장 위에 대충 올려놓고 시원한 물을 한 컵 받아 마셨다.
“하아.”
텁텁한 목 안을 씻어내고 나니 정신이 말끔해지면서 뜨기 힘들던 눈꺼풀에도 힘이 생겼다. 늦잠을 자긴 했지만 어차피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가는 날도 아니었고 모처럼 상쾌하게 기상했으니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묘하게 허리 부근이 제일 개운한데.’
왜일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 답이 금방 함께 떠올랐다.
‘아… 그랬지. 어제….’
“…….”
확실히 기분이 좋긴 좋았는데… 설마 다음 날 컨디션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이야.
어쩐지 좀 머쓱한 기분이 들어 돌아서서 욕실로 향했다. 씻기 위해서 거울을 노려보며 이마와 목의 거즈를 떼는데 상당히 쑤셨다. 여기저기 상처 난 부분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샤워기로 물을 끼얹고 부러지지 않은 쪽 손으로 샴푸를 비벼 머리를 감고 있는데, 갑자기 물소리에 섞여 어디선가 웅웅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의아해하며 재빨리 씻은 뒤 수건으로 닦으면서 바깥으로 나가자 그 소리가 화상전화가 걸려왔을 때 나는 컴퓨터의 호출 신호였음을 알 수 있었다.
띠링! 띠링!
[ 01A-1169-G89SCB 번호에서 화상 전화가 왔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
[ 01A-1169-G89SCB 번호에서 화상 전화가 왔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
저장은 해 두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인해 이 번호가 누구의 번호인지는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윤석호군. 무슨 일이지.’
늘 윤석호의 전화가 걸려오면 받기 싫어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받는다.”
대답과 함께 곧바로 희미한 빛을 뿌리며 윤석호의 상체 홀로그램이 눈앞에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강무헌 씨.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웬일로 전화를 빨리 받아주시는군요. ]
“무슨 일입니까?”
[ 아,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용건부터 물으시면 섭섭하죠. ]
…당신과 내 사이가 대체 무슨 사이냐고 무척 반문하고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 지금 씻고 나오신 겁니까? 머리카락이 젖어 있군요. 그런데 목과 손가락의 그건 뭡니까? ]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눈을 크게 뜨고 이리저리 이쪽을 살펴보던 윤석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 다치셨습니까? 어쩌다가…. ]
“그냥 좀… 일이 있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용건이나 말씀하십시오.”
씻느라 벗겨 놓았던 목의 거즈가 지금 매우 절실했다. 손가락의 깁스는 몰라도 목의 물어뜯긴 상처는 오히려 나아갈수록 색이 노랗게 거무죽죽해졌기 때문에 한눈에 보아도 상당히 눈에 띄었다. 대충 수건을 목에 걸쳐 그 부분을 가리면서 말하자 윤석호가 고개를 저었다.
[ 신경을 어떻게 안 씁니까. 그동안 잠은 제대로 주무신 겁니까? 화질 문제라기엔 강무헌 씨 얼굴이 못 본 사이 굉장히 핼쑥해진 것 같은데요. 설마 다이어트를 하신 건 아닐 테고. ]
“전 충분히 건강합니다만.”
오늘은 특히나 상쾌하게 일어났는데 윤석호와 말을 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한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신경 끄라는 뜻을 팍팍 담아 말했음에도 심각한 얼굴로 내 상처 쪽을 흘끔거리던 윤석호가 한참 만에야 겨우 용건을 말했다.
[ 음… 오늘 제가 전화를 드린 이유는 별건 아닙니다. 이전에 강무헌 씨께서 제게 전화해 알려주셨던 사건… 기억하고 계시지요? ]
사건…… 아. 그거군.
“기억합니다.”
제법 충격적이었던 사건이라 그런지 곧바로 생각났다. 검도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만났던 깡패들의 일. 그러고 보니 그 사건을 전했을 때 드물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전화를 끊었던 윤석호가 그때 이후 처음으로 연락을 취해 온 게 오늘이로군.
[ 배후와 안전 여부가 확실해질 때까지는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항이라 판단되어 그간 연락드리지 못했었습니다. 오늘에서야 시간이 좀 나서 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만…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별것 아닌 용건이라더니 이건 별것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계속 서서 들을 이야기는 아닌 듯해 소파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환자 취급이라면 거절하도록 하고, 시간이라면 충분하니 걱정 마십시오. 이야기해 주시죠.”
[ 알겠습니다. ]
윤석호가 미묘한 웃음을 짓더니 약간 뜸을 들였다. 그 얼굴을 보자 깡패들을 만났던 날의 일이 바로 몇 시간 전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깡패들이 내 눈앞에 들이대며 아는 사람이냐 물었던 사진 속의 주인공인 검도장 대문 밖에 서 있던 윤석호. 사부님과 사모님께서 말씀하셨던, 3년 전 내가 사고를 당해 없었던 때에 갑자기 찾아와 나에 대해 묻다가 사라졌다는 윤석호.
윤석호 본인이 말해 줄 그 사진 속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동안 왠지 모를 긴장감이 들어 저릿한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 우선 말씀드리자면, 그때 강무헌 씨가 협박자들에게서 본 사진 속의 인물은 제가 맞습니다. 직접 그 사진을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
그렇게 말문을 연 윤석호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눈빛을 보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 그 사진을 찍힌 때에,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
“여행 말입니까?”
[ 네. 여러 나라의 무술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여행하고 있던 중 한국에도 들렀던 겁니다. ]
왜 그런 여행을?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윤석호는 그것까지는 대답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 많은 스포츠 경기와 무술시합을 보았었죠. 그러다 들렀던 곳들 중 한 곳이 바로 그 검도장이었습니다. 하필 거기서 누군가 우연히 제 사진을 찍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강무헌 씨가 지금 그곳에서 일하고 계셨다는 우연에 저는 더 놀랐습니다. 어쨌든, 제가 사진을 찍힌 경위에 대한 설명은 이게 끝입니다. ]
그런 거였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천천히 말하는 윤석호를 보고 있으니 역시 그가 과거에 검도장에 왔던 것은 우연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과 사모님으로부터 윤석호가 3년 전에 검도장에 찾아와 나를 찾았다가 가 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상당히 긴장했었지만, 그때도 생각했듯이 윤석호가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면 처음 만났을 때 따로 언급을 하거나 티를 냈을 것이다.
현재 과도해 보일 만큼 느릿느릿하게 과거를 설명하고 있는 윤석호를 보아서는 그때 왜 그 검도장에 갔었는가 하는 것까지는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그 검도장에 왜 갔었는지는 기억하십니까?”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자 윤석호가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 그 검도장 말입니까? 아니요. 글쎄요… 찾아갔던 것까지는 기억나지만 결국 그냥 문 앞에서 돌아선지라 지금은 왜 그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혹시 제 이야기에서 무슨 궁금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
“아니요. …아닙니다.”
만약 윤석호가 3년 전 검도대회에서 나를 보고 검도장에 찾아왔던 것이 사실이더라도 그 기억을 다시 되살리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나는 왠지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듯이 느껴지는 윤석호의 시선을 피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런데 그러면 그 깡패들은 왜 윤석호 씨를 찾은 겁니까.”
[ 아…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말입니다…. ]
윤석호는 다행히 바로 그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나는 속으로 낮은 숨을 내쉬었다.
[ 저의 이 잘생긴 얼굴을 보셔서는 도저히 못 믿으시겠지만, 사실 저는 예전에 쌓아놓은 은원 관계가 좀 많거든요. 그래서인지 현재까지도 제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
“못 믿을 건 아닌 것 같군요.”
나는 조용히 태클을 걸었다. 윤석호라면 충분히 원수가 많을 만하니까. 윤석호는 너무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둥그렇게 떴다.
[ 아니, 제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항상 하는 고민이라곤 이놈의 인기를 어떻게 죽여야 하나 하는 것뿐인데 말입니다. ]
“…연결 끊어도 괜찮겠습니까?”
[ 물론 안 됩니다, 강무헌 씨. ]
재빨리 만류한 윤석호가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슬퍼하는 척했다.
[ 하아. 저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렇게 나오시다니… 현 상황이 너무나 개탄스럽군요. 사람을 너무 못 믿는 것도 병입니다, 강무헌 씨. 그래도 성격은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신 것 같군요. 이전엔 바로 연결을 끊어버리시던 분께서 이제는 친절하게 상호 동의 여부를 물어볼 줄도 아시고… 제가 강무헌 씨를 오래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이 기쁨의 정도만은……. ]
“컴퓨터. 연결을 끊는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진 윤석호는 역시나 잠시 후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못 들은 말은 어쨌거나 마저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게 수락 명령을 내렸다.
[ 취소합니다. 강무헌 씨는 여전하시다는 걸 잘 알았습니다. ]
도로 나타나자마자 그렇게 내뱉은 윤석호는 노려보는 내 눈초리를 보고도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이런 게 윤석호지.
[ 이전에 강무헌 씨께 말을 들은 이후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거기까지 제 과거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사람을 보낼 만한 이들이 누가 있나 해서 말이지요. ]
윤석호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 현재 어느 정도는 후보가 좁혀진 상황입니다. 확실한 결과가 나온다면 나중에 또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 말을 내뱉는 윤석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차가운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 다행인 것은 강무헌 씨가 저를 알고 있었지만 협박자들에게는 그 사실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덕분에 저는 제 뒤를 쫓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요. 저 때문에 느닷없이 피해를 보신 강무헌 씨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또 감사하기도 합니다. ]
“그러면….”
[ 전혀 상관없는 강무헌 씨까지 그런 일을 겪을 뻔했으니 범인을 잡는다면 반드시 사과하도록 해야겠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저와 관련되어 이런 일이 없으시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그때 입으신 물질적, 정신적 피해 또한 보상해 드릴 테니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앞으로도 강무헌 씨는 어디서든 저와 아는 사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
윤석호치고는 처음으로 진심 가득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하는 모습을 보자 무어라 쏘아 주려던 말도 그냥 안으로 쑥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놈의 개인적인 원한이 깡패들을 고용해 과거의 흔적까지 쫓아다니려 할 정도로 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더 자세히 묻고 싶은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어쨌든 이젠 들을 것도 다 들은 것 같고….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순서겠지.
“보상은 필요 없고, 알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좀 더 빨리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요즘 제가 여러 가지로 조금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힘들더군요. ]
윤석호가 싱긋이 웃으며 어깨를 폈다.
[ 이게 다 주체할 수 없는 저의 인기 때문이겠지요. ]
“바쁘신 모양인데 끊겠습니다.”
딱딱하게 대꾸하자 윤석호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 그러도록 하지요. …아, 그런데 말입니다. ]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윤석호가 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혹시 강무헌 씨와 같은 퀘스트를 하시는 분들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십니까? ]
같은 퀘스트…라면 슈페리어 퀘스트 말인가?
“그건 왜….”
[ 며칠 전에 플레이어명 키온 님에게 연락을 했더니 강무헌 씨나 다른 몇몇 분들과 상당히 친하신 것 같더군요. ]
“그런데요.”
[ 혹시 다크 나이트 퀘스트를 수행 중인 분과도 알고 계십니까? ]
다크 나이트…… 유완?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표정으로 티 내지 않으려 인상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네…. 좀 압니다만.”
알다 뿐인가. 어젯밤에는 차마 남에게 대놓고 말하지 못할 일까지 함께한 사이였지만 그런 걸 윤석호에게 말할 이유는 없었다.
내 대답에 윤석호의 눈 안에서 순간 기묘한 빛이 반짝였지만 잘못 본 것인가 싶을 정도로 찰나에 사라져 버렸다.
[ 아. 역시 강무헌 씨는 아실 줄 알았습니다. ]
“남의 친분에는 왜 관심을 보이시는지 모르겠군요.”
[ 하하. 남 취급 하시기는. 별건 아닙니다. 다른 퀘스트 수행자분들과는 대체로 연락이 잘 되는데, 그분과만 연락이 잘 되지 않거든요. 혹시 그분과 연락이 되시거든 제 연락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씀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
“연락이 된다면 전해 드리죠.”
[ 감사합니다. ]
눈을 찡긋하며 가볍게 숨을 내쉰 윤석호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 그러면 강무헌 씨, 상처 치료 잘 하시고 건강을 돌보도록 하십시오. 강무헌 씨는 잊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저흰 앞으로 함께해야 할 일이 많은 관계입니다. 아직 제가 기대 중인 강무헌 씨의 영상도 보지 못했는데 그 전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되지요. 그러면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윤석호의 모습은 순식간에 점멸하며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말을 하기 위해 열었던 입을 도로 닫아야 했다.
‘윤석호와 통화하기만 하면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한지 원….’
진제환이 윤석호와 연락이 잘 안 된다고 했었던가? 평소엔 다른 데서 오는 연락은 매우 잘 받는 것 같던데. 굳이 연락을 안 받는다면 아마 진제환도 윤석호가 싫어서 피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 이유임에 틀림없다.
‘흠. 나도 그래 볼까. 좀 끌리는데.’
그렇게 멋대로 결론을 내리면서 나는 상처를 가리기 위해 목에 둘렀던 수건을 뺐다. 어느새 머리가 다 말라 있었다.
한편, 윤석호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조금의 쉴 새도 없이 울리는 안내음 소리에 눈을 돌렸다.
[ 등록번호 005번 님께서 포트번호 2783으로 호출 중입니다. 등록번호 005번 님께서 포트번호 2783으로 호출 중입니다…. ]
“이런. 정말 오랜만에 하는 연락이 하필 이럴 때라니. 양반은 아니군.”
등록번호 005번이라는 글자가 떠 있는 부분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던 윤석호는 옆에 놓여 있던 고글을 뒤집어썼다.
“포트 접속. 포트번호 2783.”
[ 포트번호 2783은 비밀 포트입니다. 사용자가 지정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
“비밀번호, ‘Team Jecsprot.’”
[ 올바른 비밀번호입니다. 허용된 장소로 접속합니다. 3. 2. 1. ]
눈앞이 한 번 크게 이지러진 후 다시 나타난 곳은 어지럽게 꾸며진 가상 포트 내의 방 안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눈이 돌아갈 것처럼 어지러운 벽지와 가구들을 여상스럽게 죽 둘러본 윤석호는 그 가운데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백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이. 윤.”
“오랜만입니다. 유프….”
“오픈 전에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오늘이 되다니. 시간이란 게 정말 빠르긴 빨라. 그렇게 안 갈 것 같던 놈이 어느샌가 품을 홀랑 빠져나가다니 말이야. 변덕스럽기가 요즘 날씨 뺨칠 지경이야.”
뻔뻔하게 대꾸한 남자는 구겨진 연구원복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내 자신의 앞자리 의자를 가리켜 보였다.
“계속 서 있기만 하려고? 앉아.”
“그러죠. 그쪽 일은 어땠습니까?”
윤석호가 자리에 앉으면서 한 질문에 남자가 비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떻긴. 엿 같았지.”
“하하. 잘도 그동안 제게 연락하는 걸 참았군요.”
“뭐, 어쨌거나 난 여기 남아 있는 역할이니까. 쓸데없이 의심받지 않도록 엿 같은 일이나 하면서 얌전히 처박혀 있었지.”
다소 거친 말투였지만 남자의 눈빛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윤석호는 남자의 색소 옅은 머리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식은 들었습니다. Mr. 리뿐만 아니라 당신까지 감사시찰단에 포함된 것을 보면 그쪽의 의도는 뻔하지요.”
“감사시찰단의 통솔자가 레온 프라이스라는 것부터 구린내가 풀풀 나는데 뭐. 놈들은 아마 이번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윤석호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남자는 삐뚜름하게 마주 웃으며 깍지 낀 손을 머리 뒤로 올렸다.
“어쨌거나 난 상관없지. 놈들이 원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건 내가 아니니까. 휴가인 셈 치고 한국에 가면 제일 먼저 그거나 먹어야겠어. 그거. 그, 뭐였더라? 그 사람이 자주 말했던 거 말인데.”
그 사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잠시 멈칫했던 윤석호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닭갈비 말입니까.”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내가 한국에 가면 제일 먼저 그거나 사줘. 설마 지부장씩이나 되어서 그 정도도 못 사주는 건 아니겠지?”
의심 어린 눈초리를 마주하며 윤석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사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방심하진 마십시오.”
“알았어. 알았다고.”
“Mr. 리도 잘 봐 주시고 말입니다.”
“데이브야 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놈이지.”
투덜거리면서도 남자의 얼굴은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도대체 데이브에겐 언제쯤 다 말할 생각이야?”
윤석호는 약간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
“그에게는… 아무래도 말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솔직하게는 몰라도 좋다는 거겠지.”
남자가 날카롭게 일침을 가했다. 윤석호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해야겠지요.”
“그 말이 진심이길 바라겠어.”
“…….”
윤석호의 살짝 굳은 표정을 바라보던 남자는 일부러 눈길을 돌리며 다른 쪽으로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아. 그러면 이제 데이브에, 너에, 나, 그리고 명진은 미리 한국으로 출장 가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
“네. 아직 여기 계십니다.”
“그때 이후 다들 처음으로 모이게 되겠군. 그것도 한국에서 말이야.”
“예상보다 빠르게 말이죠. 제겐 고마운 일입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이의 담담하기 짝이 없는 말에 남자가 씩 미소를 흘렸다.
“…그래. 네가 원하던 대로 말이지.”
“하하. 원하기는 했지만 이리 잘 된 건 다 당신이 그쪽에서 잘해 준 덕이겠지요.”
“그래. 다 내 업보지. 감사시찰단이라니, 벌써부터 귀찮다고.”
“후회하십니까?”
그 질문에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랬다면 지금 너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겠어? …너야말로, 어때?”
윤석호는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후회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그래. 그랬겠지.”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남자가 화제를 바꾸었다.
“ReL 캡슐 프로젝트는 요즘 어때. 무사히 잘 되고 있는 거겠지?”
“아직까지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길 바라야지요.”
“전에 내가 말한 대로 고객 관리 서비스를 잘 한 모양이군.”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갑자기 다른 쪽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지정해 둔 알람이 울리는 걸 보니 시간이 다 된 모양이야. 너무 오래 여기 있다간 간신히 내게 관심 껐던 놈들이 눈치채고 쫓아올지도 모르니까 난 이제 가봐야겠어.”
“그러도록 하십시오.”
“밥은 먹고 일하라고.”
윤석호를 향해 손을 건성으로 흔든 남자는 포트라인 내의 방 밖을 나가는 것으로 접속을 끝냈다. 윤석호 또한 “접속 종료.” 하고 명령어를 내뱉으며 고글을 벗었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익숙한 그의 사무실이었다.
윤석호는 잠시 먼 곳을 지긋이 바라보다 자신의 앞쪽 허공에 작게 떠 있는 리스트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통화를 끝내고 나면 자동으로 떠오르게 설정해 둔 이전 통화 목록이었다.
아직 오후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전화를 하거나 또 받았다는 것을 그것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무심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죽 훑던 윤석호는 리스트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해 있던 등록번호 HR02(L-10)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음.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뭐가 말입니까?”
자신의 앞에서 들려온 퉁명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통화를 하는 동안 이쪽으로 올라오라고 미리 지시해 두었던 남무건이었다.
“아. 벌써 왔나?”
“벌써라뇨! 기껏 바쁘게 일하다 달려왔더니 가상 포트에나 들어가 계시고….”
억울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남무건을 보며 윤석호는 빙긋 웃었다.
“그렇게 나를 빨리 보고 싶었다니, 그 마음을 미처 몰라줘서 미안하네.”
그윽한 목소리를 들은 남무건은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당장 입을 다물었다.
“그, 그래서 무슨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그러시는 건데요….”
“아. 그거 말인가.”
다행히 윤석호의 관심은 남무건이 필사적으로 돌린 화제 쪽으로 넘어갔다.
“범인은 항상 자신의 목표 가까이에 있게 마련이라는 법칙을 확인한 것뿐이라네.”
“…예?”
뜬금없는 말에 남무건은 얼빠진 얼굴로 반문했다.
“요즘 무슨… 추리소설이라도 보셨습니까?”
“하하. 아니, 내가 탐정인 추리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지. 이게 아주 어렵거든.”
이건 또 무슨…… 자신은 매일 오라 가라 귀찮게 하며 온갖 일을 다 시키더니 본인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차마 대놓고 항의하지는 못한 채 분노로 이를 갈아대는 남무건의 생각이 윤석호에게는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모든 걸 곧이곧대로 듣는 바로 그 점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거긴 하지만 참 귀여울 만큼 단순하단 말이야. 윤석호는 웃으면서 남무건을 부른 본론 이야기로 들어갔다.
“저번에 자네가 스파이 후보로 지목했던 권천우 말인데. 이전 경력을 조사한 결과가 좀 흥미로워서 자네도 꼭 들어야 할 것 같더군. 그래서 불렀네.”
남무건의 표정이 순간 일변했다. 윤석호는 순식간에 차가워진 분위기에 흡족해하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루미네는 슈페리어가 내 입을 통해 튀어나온 것에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태연히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내가 올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
“그래.”
평이한 대답에 슈페리어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별로 웃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상당히 기분이 이상하군.
“그런 것까지 천기를 읽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건가? 대단하네, 역시.”
“아니. 하늘은 그런 것까지 내게 알려주지는 않아.”
“그러면 어떻게?”
슈페리어의 반문을 들은 이루미네가 묘한 미소를 띤 채 내 허리춤의 슈페리어 막대기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루미네의 시선은 슈페리어와 대화를 나누면서부터 내내 그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슈페리어임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처럼.
“종족의 한계를 초월했다 일컬어진 위대한 인간의 마법사여. 나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너를 기다려 왔어. 네가 나에게 그러기를 부탁한 순간부터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계속해서.”
슈페리어가 이루미네에게 여기서 기다리기를 부탁했다고?
“내가? 너에게?”
금시초문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슈페리어가 한 타이밍 늦게 반문했다.
“그래. 나에게 그것을 부탁한 이는 너였으나 이제는 없는 자. 지금 네가 갖고 있을 의문의 답을 가르쳐 주기 위해 나에게 많은 것을 부탁했지.”
“그게 대체 무슨…!”
“이제 곧 알 수 있게 될 거야. 아, 그런데 그 전에,”
슈페리어 막대기가 당혹과 놀람으로 사정없이 떨리며 붉은빛을 흩뿌렸다. 이루미네는 그 모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평온히 대답하다 갑자기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가.”
“……네.”
역시 이 호칭은 바로 응답하기엔 어쩔 수 없이 약간 거부감이 느껴진다.
“너는 누구의 부탁으로 이곳에 돌아왔지?”
내가 왜 이곳에 돌아왔는지도 대충 다 알면서 묻는 듯한 얼굴을 보며 나는 역시 이루미네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마냥 슈페리어의 목적만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루미네는 고작 그 정도도 모르겠냐는 듯 미소를 띠었다.
“다 아는 수가 있지. 물론 이것도 하늘이 알려준 것은 아니야. 자, 그러니 누가 너를 내게 보낸 것인지나 알려주렴.”
“염룡 코르입니다. 그의 부탁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나는 조용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거대한 용의 이름을 말했다.
“…그는 세계의 북쪽에서부터 어떤 이변이 느껴진다면서 어두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움직여야 하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 다른 종족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했고 그에 따라 가장 먼저 당신의 의견을 듣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이 긴 말을 전부 기억하느라 상당히 힘들었는데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과연. 그가 새로운 용족의 대리자였군.”
푸른 눈 속 깊이 이채를 띤 이루미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계의 이변이라….”
눈을 내리깐 이루미네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무릎 위에 가만히 올린 손끝만 내려다보던 이루미네가 기다리는 것이 슬슬 지루해질 즈음에서야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 혼자서는 쉬이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야. 지금 당장 답변을 줄 수는 없겠구나.”
“…….”
세계가 걸린 중대한 사안이라니 뭐…. 사실 이루미네가 바로 답변을 줄 거라고는 내 쪽도 경험상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이루미네와 내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참지 못한 듯한 슈페리어가 또다시 내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루미. 대답해 줘. 아까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이야? 너는 어떻게 나를 알고 있었지?”
이루미네가 슈페리어 막대기 쪽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 난 처음엔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왔었어. 내 후인과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먼저 코르를 만났었지. 코르가 말하길 500년 전에 또 다른 내가 자신을 찾아와 말을 나누고 갔다고 하더군. 거기까진 좋아, 나는 내가 길을 떠나기 전에 봉인해 넣고 간 분신체고 그 이후의 내 행적에 대해서는 모르니까. 하지만 코르가 말하는 기억 속의 나는 어쩐지…… 이상하게도 정말 ‘나’ 같지가 않았어.”
‘슈페리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니.’
빠르게 말을 내뱉는 슈페리어의 태도에서 전에 없는 조급함이 묻어났다. 나는 슈페리어가 코르와 만났을 때 그런 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상당히 놀랐다.
“다른 이들이 듣는다면 이쪽이 더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코르가 이 세계에 새로운 어둠의 기운이 일어서고 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그 생각은 그냥 생각에서 끝났을 거야. …루미, 너는 알고 있겠지. ‘그때’ 이후를 보았던 유일한 이니까. 그건 말도 안 돼. 하지만 코르의 말로는 그때 자신을 찾아온 ‘나’는 바로 전에 또 루미, 너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더군. …그때를 기억하고 있어?”
“…그래. 기억해.”
“그런데 어째서…. 아니, 아니. 이젠… 이제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졌어. 너는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슈페리어의 외침에도 이루미네는 화가 날 정도로 담담한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부디 네가 아는 것이 있다면 전부 말해 줘, 루미!”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알아.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답을 원해!”
슈페리어의 재촉을 들으며 하늘은 보이지 않지만 그 높이가 까마득하게 높은 동굴 천장을 향해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올렸던 이루미네가 이내 부드럽게 숨을 내쉬며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후. 그래. 이제 때가 된 모양이구나. 나를 따라오도록 해.”
지금 뭐라고?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놀라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따라오라니. 전에 크란과 함께 이곳에 와 있었던 며칠 동안 우리는 한 번도 이루미네가 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루미네는 항상 같은 자리에 똑같은 포즈로 앉아서 우리와 대화했고, 그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어째서 그녀가 일어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새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이루미네가, 말을 끝내자마자 스스로 천천히 땅을 딛고 일어서고 있었다. 흰 치맛자락이 들려 올라가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발에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신발까지 신고 있었다.
‘크란이 봤다면 기겁을 하고 놀랐을 텐데.’
이 놀라움을 함께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좀 심심한 기분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선 이루미네가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가자. 따라오렴.”
나는 말없이 사뿐사뿐 걸어가는 이루미네의 뒤를 따랐다. 거 참. 걸을 때 약간의 작은 소리조차 안 나는군. 저게 스킬이라면 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루미네는 망설임 없이 두 개의 갈림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나아갔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나 싶었는데 뜻밖에도 그녀가 돌아선 곳은 바로 그 갈림길 중 우리가 빠져나온 곳의 반대쪽 길이었다.
‘여긴….’
이루미네의 동굴에 예전에 크란과 함께 처음으로 왔었을 때, 바로 이 위치에 서서 어느 쪽으로 들어가야 할지 갈팡질팡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이루미네가 목소리를 드러내 왼쪽으로 오라고 했었고 이후 나는 오른쪽 갈림길 안쪽에는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 굳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답은 이곳에 있어.”
그러나 바로 지금, 이루미네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 안에 답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나는 그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전에 별생각 없이 몇 번이나 지나갔던 이곳에 슈페리어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니. 이것 역시 크란이 옆에 있었다면 기절할 듯이 놀랐을 것이다. 놈의 발랄한 오버액션이 그간 문득문득 몇 번씩 생각날 때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그리워진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슈페리어는 말이 없었지만 내 허리춤의 슈페리어 막대기는 뜨거울 만큼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눈이 아플 정도의 붉은빛이 시야를 가리며 요란하게 뿜어져 나오니 마치 사이렌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밟은 곳만 따라 밟으면서 와야 해.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하렴. 먼저 간다.”
나직하게 말한 이루미네가 갈림길 안으로 들어섰다. 내 앞에서 고작 두어 발자국을 디뎠을 뿐인데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몇 번 눈을 깜박인 뒤 이루미네를 쫓아 안으로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길 안쪽으로 한 발자국 들어선 순간 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차가운 막 같은 것을 부드럽게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신이 스캔 당하는 것처럼 싸늘한 느낌에 한 번 부르르 떨고 나니 어느새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처럼 검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이건….’
“아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오라고 했을 텐데.”
내가 제대로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이 맞는지조차 확신이 가지 않는 이 이상한 공간 때문에 멍하게 서 있는데 앞에서 이루미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쳐다본 곳에서는 이루미네가 온몸에서 은은하게 연초록색 빛을 뿌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잘 보고 따라와야 한다.”
이루미네가 밟은 부분만 밟으면서 똑같이 따라오라고 했었던가? 내가 발을 옮기기가 무섭게 이루미네가 몸을 돌려 고양이처럼 조용한 걸음으로 앞으로 향했다. 나는 이 어둠 속에서 이루미네가 어느 부분을 밟는지 보기 위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지만 이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슈아아아….
놀랍게도 이루미네가 걷는 곳마다 그녀의 발자국에 빛이 고여 일정 시간 동안 빛나다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발자국이 완전히 다 사라지기 전에 그것만 따라 밟으면 되었다.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흰 치마 끝자락과 빛나는 발자국만 쳐다보며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이루미네가 문득 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고 나는 부딪치기 직전에 간신히 멈춰 고개를 들었다.
“아….”
이루미네의 바로 앞 허공에 이상한 빛 덩어리가 둥둥 떠 있었다. 지구가 자전하는 것처럼 허공에 뜬 채 천천히 돌고 있는 그것은 이루미네의 몸에서 나는 것과 똑같은 연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눈에 힘을 주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 둘둘 말린 스크롤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루미네가 그 빛 덩어리 위에 손을 가볍게 얹자 초록빛이 한층 따스하게 강해지면서 빛 몇 방울이 바닥으로 녹아 뚝뚝 떨어졌다. 빛 같기도 하고 물 같기도 한 신기한 모습이었다.
“그건…?”
슈페리어가 내 입을 빌려 속삭이자 이루미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것은 네 존재의 일부. 네게도 느껴지고 있을 텐데.”
“그래…. 어쩐지 너의 힘으로 보호하고 있음에도 이상하게도 내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 아니, 아예 내 마력이군. 그렇지?”
이루미네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슈페리어 막대기가 전율하듯이 부르르 떨며 한층 더 강한 붉은빛을 뿜어냈다.
“답을 보기 전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어.”
“뭐지?”
“아예 보지 않으면 모를까 한번 이것을 보게 되면 진실에서 도망갈 수 없어. 돌아서려면 기회는 지금뿐이야. 솔직히 말해서 차라리 모르는 쪽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겠어?”
더없이 무거운 무게를 담고 있는 그 말에 슈페리어는 한참 동안 대꾸가 없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슈페리어 막대기가 눈이 아프도록 뿜어내던 빛도 서서히 가라앉아갔다.
[ …그대라면 어떻게 하겠어? ]
얼마나 기다렸을까.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 들려왔다.
“뭐?”
[ 나는…… 솔직히 말해서 두려워. 내가 해 왔던 가정들이 저걸 보는 순간 실체가 되어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
허.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슈페리어가 두렵다니. 나를 놀려먹던 그 자신만만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잔뜩 굳어 차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가정이라면, 네가 코르의 말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 굴었던 그걸 말하는 건가?”
슈페리어가 기억하지 못하는 슈페리어의 모습.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며 심하게 동요하던 그때의 모습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 …….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군.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나는 작게 숨을 내쉰 뒤 머리를 굴렸다.
“음…. 나라면 보겠어.”
[ 왜? ]
이런 경우 내가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정승조와의 일이었다. 예전의 나라면 왜 승조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답을 누군가 가르쳐 주겠다고 말해도 필요 없다고 했을 것이다. 그걸 알게 됨으로써 간신히 안정된 내가 또다시 변화하는 것이 싫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언제까지나 도망만 다닐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악연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지금은….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면 차라리 지금 보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해결을 위해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모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알고 후회하는 게 경험상 훨씬 나았어.”
[ 알고 후회하는 게 더 낫다라……. ]
“그래. 그렇게 답이 알고 싶다고 했으면 일단 부딪쳐. 보다가 아닌 것 같으면 그때 중단하고 다음에 다시 와도 되잖아.”
이루미네도 단 한 번만 저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일단 보게 되면 도망갈 수 없다고는 했지만.
[ 뭐야, 그대. 그건 엄청나게 무책임한 방법이잖아. ]
겁쟁이보다는 그쪽이 더 마음이 편하던데.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슈페리어는 내 대답의 뭐가 그리 우스웠는지 갑자기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 훗. 후후, 하. 하하하. ]
“…….”
나는 조금 민망해져 얼굴을 찌푸렸다. 평소 같지 않아 보여서 기껏 조언이라고 해 줬더니…. 이 자식. 다시는 내가 이딴 말을 해 주나 봐라.
[ 하하. 뭐, 그래. 그대 말이 맞는 것 같아. 두 번째 기회라… 그런 건 내겐 없는 것이었는데. ]
“뭐?”
[ 아니. 아무것도. 잠깐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 같네. ]
끝부분에 뭐라고 더 말한 것 같았는데 잘 들리지 않아 되묻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대답한 슈페리어가 드디어 내 입을 통해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던 이루미네에게 대답을 전했다.
“보겠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루미?”
이루미네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래… 이 구체는 나도 함부로 열 수 없을 만큼 강한 결계의 압축체이기 때문에 아주 강하게 집중해도 잠시 동안밖에 열 수 없어. 내가 결계를 풀면 이 초록빛이 잠깐 동안 사라질 거야. 그때 손을 그 안으로 집어넣으면 봉인이 해제되지. 그건 아가가 해야 할 거야. 할 수 있겠어?”
“예.”
“좋아. 시작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천히 양손을 연초록빛 구체 위에 올린 이루미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확 하고 세차게 가라앉았다.
“-라 나 밀레이아 에 리이온. 플란나 네 멜레니 데 레이온….”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 같은 주문이 이루미네의 입에서 나직하게 새어 나오자 초록빛이 점점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영창이 이어질수록 기이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주변의 기류가 흔들려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정신없이 휘날렸다. 이루미네의 목소리가 커지고 명확하게 울릴수록 이 이상한 바람도 점점 더 세어지고 있었다. 구체에서는 이젠 거의 눈이 멀 듯한 빛이 터져 나왔다.
이리저리 반사되어 온 공간에 울려 퍼지는 영창이 이제는 무슨 발음인지도 정확히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빛 때문에 찡그린 눈을 힘겹게 뜬 순간, 검었던 공간이 일시에 하얗게 변하며 초록빛이 사라지고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었다.
후와악…!
‘윽…!’
눈을 꽉 감았다 떴지만 눈앞의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희고 적막한 공간 안에 마치 나만 남은 것 같았다. 멍하게 몇 번 눈을 껌벅이며 주변을 둘러보다 앞쪽을 바라보자 하얀 공간 안에 아까 전의 그 스크롤이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그 주변을 감싸던 초록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빛뿐만 아니라 눈앞에 서 있던 이루미네도 사라져 있었다.
‘지금 잡으면 되는 건가?’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 스크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말 듯 가져다 대었던 손가락을 움츠려 스크롤을 꽉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다시 주변의 흰 공간이 검게 빨려 들어가며 이루미네의 모습이 지워졌다 도로 생겨난 것처럼 눈앞에 확 하고 나타났다.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었던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잘 했어. 이제 곧 스크롤의 힘이 발동될 거야.”
그녀답지 않게 긴장했다가 풀린 기색이 역력한 이루미네의 목소리가 신기하게도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했다. 나는 내 손안에 들어온 스크롤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바로 슈페리어였지만 지금은 없다는 존재의 일부라는 거군. 그런데 대체 그게 정확히 뭘까.
나는 손안에 쥔 스크롤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루미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존재의 일부란 건 뭡니까?”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는 동안의 기억을 통해 존재하지. 존재란 기억을 통해 실체화되는 거란다.”
웬일로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나에게 떫은 표정을 짓게 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은 대답이었다.
설마… 그러니까 결국 이것도 슈페리어의 기억이라 이거 아닌가?
‘제대로 낚였군.’
돌아오면 조금 더 알려줄 것이 있어.
손에 쥔 스크롤에서 터져 나오는 빛이 시야를 가리기 직전 이루미네가 내 허리춤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그렇게 말한 것 같았지만, 확실히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눈부신 빛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으윽……!’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손안에 말려 있던 스크롤의 매듭이 풀려 종이가 쏟아져 나가는 감각이었다…….
차르르륵.
귓가에 들려오는 종이 풀리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딱 봐도 마법사의 실험실이라고 광고하고 있는 듯한 어두운 방 안이었다.
온갖 수상한 물건들과 먼지로 뒤덮인 책들이 산처럼 많이 쌓여 있는 광경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누군가 초조한 걸음으로 이리저리 어지럽게 방 안을 헤매는 것이 보였다.
“하아… 하아…. 없어…… 아무것도 없어…….”
잔뜩 신경질적으로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듣자마자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 저건… 나군. ]
왜냐하면 지금껏 지겹도록 들어온 슈페리어의 목소리와 똑같았으니까.
어두컴컴하고 어지러운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슈페리어의 얼굴은 전쟁이 끝난 지 10년 후 때였는지 짧은 머리칼에 코와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선명했다. 어지럽게 헤매고 다니던 슈페리어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것처럼 책 더미 속에서 아무거나 끄집어내 책장이 찢어지도록 거칠게 펴가며 읽기 시작했지만 이내 원하는 것이 거기에도 없었는지 화를 내며 던져 버렸다.
“젠장!”
퍽!
돌벽에 부딪힌 책이 밑에 쌓여 있던 다른 것들과 부딪치며 도미노처럼 쓰러져 먼지를 풀풀 날렸다.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씩씩거리던 슈페리어의 어깨가 문득 부들부들 떨렸다.
“없어… 없어… 아무 데도……!”
지금껏 보아온 슈페리어의 기억 속 모습 중에 이토록 불안정한 상태를 또 본 적이 있었을까. 미친 듯이 소리치며 머리칼을 쥐어뜯던 슈페리어가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고대 울라키안의 서에도, 엔의 석판에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이야…?”
바닥에 엎드린 채 고통스럽게 중얼거리던 슈페리어가 다시금 미친 사람처럼 몸을 젖혀 바닥에 주먹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게… 그런 게!!”
주먹이 꽤 아플 듯한 소리가 났지만 절망으로 가득 찬 얼굴은 육체의 고통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는 듯 보였다.
“하아… 하….”
한참을 발광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바닥에 널브러진 더러운 책들과 다를 바 없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늘어져 있던 슈페리어가 한참 후 핏발 선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결국 인간이란 건가……?”
‘슈페리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뜻을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의 의미가 궁금했지만 그 이후의 모습은 더 볼 수 없었다. 어둡게 그림자가 진 채 미동도 없이 굳어 있는 슈페리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서서히 검게 변했다.
차르르르르. 계속해서 종이가 풀려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훅 하고 눈앞이 선명해졌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뜻밖에도 엄청난 장관이었다.
‘여긴….’
새파랗게 너른 하늘, 광활한 대지, 까마득한 아래의 풍경들.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경은 경탄을 절로 느끼게 했다. 여기저기 빈 땅이 많아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개미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생명력에 비하면 그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차게 굽이치며 흘러가는 강물처럼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건물들을 짓는 데 여념이 없는 조그마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인간 역사의 작은 일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작은 숨을 내쉰 순간, 옆에서 붉은 불티 같은 것이 흩날렸다. 흠칫 옆을 돌아보자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모를 슈페리어가 바로 지척에 앉아 나처럼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 아, 그대. 안심하라고. 저건 내가 아니야. 난 여전히 그대의 시야를 공유하면서 이 안에 있거든. ]
설마 막대기 안에 있을 슈페리어가 여기 나타난 건가 싶었는데 눈치 빠르게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내 옆의 저 사내도 과거의 슈페리어라는 소리군.
불티라고 잘못 보았던 것은 아무래도 바람에 흩날리는 짧은 붉은색 머리카락이었던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는 까마득하게 높은 가느다란 첨탑 위에 있었는데, 정확히는 동화에서나 볼 것처럼 아름다운 흰 성의 지붕에서 이어져 있는 곳이었다.
‘여긴 대체 어딜까.’
내가 지금까지 내려다보고 있던 도시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성은 고도가 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한참을 살펴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자 나는 성을 지켜보는 것을 포기하고 슈페리어가 바라보는 곳이나 다시 보기로 했다. 슈페리어는 마치 인간을 굽어살피는 신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무심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작은 도시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을 짓고 도시의 외관을 정비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슈페리어가 바라보는 도시를 나도 함께 바라보는 동안 시간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잠깐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도 그사이에 해가 급속도로 기울고 밤이 되었다가 다시 뜨고 낮이 되기를 수십, 수백 번씩 반복했다. 마치 녹화한 테이프를 몇 배로 빨리 돌린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커다란 건물들을 빈터에 하나둘씩 뚝딱뚝딱 만들어내었고, 폐허였던 흙바닥에 정갈한 돌을 깔아 마차가 지나다니는 대로를 만들었다. 무너져 있던 건물들이 복구되어 층수가 올라가고 거대한 신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그 도시는 내가 알고 있는 기억 속의 어느 곳과 매우 흡사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자그레브…?’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지만 놀라울 만큼 비슷했다. 아마 저곳이 과거의 자그레브가 아닐까 추측하며 계속해서 해가 지고 뜨는 것을 보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자그레브의 모습과 거의 비슷해진 뒤부터는 도시의 변화가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는 계속해서 뜨고 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이제 도시에는 변화가 없었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변화가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시선을 붙잡던 힘도 사라졌다. 눈을 돌려 다시 한 번 슈페리어 쪽을 쳐다본 나는 뜻밖의 광경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변화 없는 모습으로 자그레브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던 슈페리어의 표정은 아까와 똑같은 무표정 그대로였지만, 그 눈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눈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흉터 입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 바람에 쓸려 허공으로 허무하게 날리기를 반복했다.
나는 슈페리어가 흘리는 눈물의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슬픔이라기에는 너무 차가운 저 눈빛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흐르던 눈물을 성의 없이 훔쳐낸 슈페리어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자그레브보다 더 먼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슈페리어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까마득한 안개로 가려진 산맥의 끄트머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방향은 아마도… 북쪽인가?
“…….”
그 순간, 처음으로 슈페리어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표정을 뭐라고 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건 1년 전까지의 내가 거울을 볼 때마다 저절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던 패배자의 표정이었다. 일반적으로는 후회라고 부르는 감정이 짙게 깔린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거기서 다시 한 번 장면이 바뀌었다.
후욱….
눈앞을 가린 어둠이 걷히고 나서 들려온 것은 슈페리어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루미. 안부 인사는 이제 생략하자. 나는 네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
“내 도움?”
작은 집 안에 마주 앉아 있는 두 인영. 한쪽은 슈페리어였고 다른 한쪽은 예전에 기억 속에서 본 적이 있는 500년 전의 이루미네였다. 겨우 목덜미만 덮을 정도로 짧은 머리칼의 이루미네는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그러면 여긴 설마… 전에 보았던 슈페리어의 기억 직후쯤 되는 상황인가?’
“그래. 너 외에는 이 일을 도와주는 데 그만큼 적합한 이가 없어. 아니, 이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이도 너밖에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농담조로 말하면서도 슈페리어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숲을 키우는 것만 해도 벅찬 내가 널 도울 유일한 이라니… 그럴 리가.”
“아니. 내가 부탁하려는 일은 네 엘 카라나로서의 의무에 반하는 일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되도록 네가 친구인 나와의 신의를 지켜 도와주는 쪽으로 마음먹어 주었으면 해.”
“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까지 말하는 거야?”
“나는, 나를 둘로 나눌 생각이야.”
기다렸다는 듯이 슈페리어가 대답했다. 이루미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분신(分身)? 그거라면 충분히 마법으로도 가능할 텐데 어째서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지? 다른 인간들이라면 몰라도 너의 마법은 이미 종족의 한계조차도 뛰어넘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종족의 한계라는 부분에서 순간 슈페리어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하지만 이루미네가 눈치채기도 전에 슈페리어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게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그것을 제대로 본 나만이 상당히 놀랐을 뿐이었다.
‘뭐야, 저 표정은….’
“아니, 나는 본체가 따로 있고 정해진 명령을 수행하면 그만인 언젠가는 사라질 그런 마법 분신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면?”
“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둘로 나누는 걸 원해. 기억도, 자아도, 몸까지도. 그 모든 것을 말이야.”
이루미네의 눈에서 일순 큰 파문이 일었다. 슈페리어가 원한 것의 무게를 대번에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뭐?”
“내 모든 피와 살과 영혼을 바쳐 그것들을 둘로 나눌 거야. 그로써 아마 나는 두 번 다시 지금과 같이 완전하고 유일한 존재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니 할 거야. 문제는 나누는 것까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 원래 내가 의도했던 것이 뭐였는지 알고 있는 존재가 없어진다는 거지. 그건 즉 혹시 나중에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더라도 중간에 바로잡아줄 존재도 없다는 뜻이야. 때문에 몇백 년이 흐르더라도 그 자리에 나무처럼 남아 나를 도와줄 그런 조력자가 필요해.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는 지금 너밖에 없어, 루미.”
“말도 안 돼. 그건 금기에 가까운 일이야.”
이루미네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지금은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현재의 이루미네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이런 생소한 표정과 태도에서 역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이 제대로 느껴졌다.
“네 존재를 파괴하겠다는 그런 일을 지금 나보고 도와 달라고? 그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야!”
“아니, 파괴가 아니야. 둘로 나눌 뿐이지. 그러니 금기도 아니야.”
“말도 안 돼. 대체 왜 그런 일을 하겠다는 거야…?”
약간 떨리기까지 하는 이루미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대답이 없던 슈페리어가 웃음기 사라진 눈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이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 그러면 나를 도와줘. 네가 도와준다면 모든 일이 준비된 후 그 이유를 말해 줄게.”
“말도 안 되는 소릴!”
이루미네가 고운 눈썹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슈페리어가 어둡게 그림자 진 얼굴로 낮게 웃었다.
“하하. 이루미네. 나의 친우, 숲의 딸이여. 모든 일이 예비되기 전에 그 이유를 듣는다면 넌 아마 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아니, 그게 굳이 너뿐만은 아니지. 세상 모든 존재가 날 죽이기 위해 칼을 뽑아 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나도 나름대로 미리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
눈앞의 이 남자가 정말 여태까지 보아왔던 슈페리어란 말인가? 처음으로 이루미네의 이름을 네 글자 모두 제대로 힘주어 발음한 슈페리어의 얼굴에서 농담을 하는 기색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에게서 이 모든 상황이 장난이라는 말을 듣고 싶은 듯이 한참 동안이나 슈페리어를 바라보던 이루미네는 마침내 도로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10년간 네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는 대체….”
“날 도와줄 이는 너밖에 없지만, 사실 네가 꼭 날 도와줄 필요는 없어.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지. 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나는 이 계획을 실행할 거야. 하지만 그러면 모든 것이 어떻게 될지 더 장담하기 힘들어지거든. 그냥 그뿐이야.”
그냥 그것뿐. 마치 협박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이루미네는 오랜 고민 끝에 간신히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도울게. 네가 또다시 사라지는 것보다는 옆에서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말릴 수 있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으니까.”
이루미네의 말에 슈페리어가 눈을 감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감은 눈꺼풀은 상당히 떨리고 있었다. 놀라울 만큼 강압적이었던 태도에 비해 실은 어쩌면 긴장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내 눈을 뜬 슈페리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미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우린 이제부터 준비할 것이 아주 많아. 네가 도와줄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도 곧 말해 줄게.”
“…….”
입술을 꼭 다문 채 슈페리어의 손을 잡은 이루미네의 눈동자 안에는 그를 향한 불안감과 걱정이 가득했다.
“넌 대체 뭘….”
그러나 슈페리어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슈페리어가 방금 언급한 분신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했다.
[ 하하하. 혹시나 했지만. 하하하. ]
뭐야. 이쪽 슈페리어인가?
“…왜 그래?”
[ 더는 못 보겠어. 더는 안 돼. 이 이후에 설마 정말 내 예상대로의 답이 나온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
“잠깐만!”
[ 미안. 그대. ]
내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손이 멋대로 움직여 허공을 갈랐다. 순간, 찌이익 하고 종이 찢기는 소리가 나면서 눈앞의 모든 장면이 그대로 멈추고 세피아 색으로 빛이 바랬다. 그마저도 검게 가라앉고 소리마저 사라져 최후에는 정적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때,
콰장창!
세계가 유리창처럼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렸다.
“크윽!”
후폭풍에 대비해 눈을 감은 순간 지지대를 잃은 몸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끝도 없이 떨어져 내려갔다.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왜 벌써 돌아온 거야?”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기억을 보기 전 상태 그대로 멀쩡히 이루미네의 앞에 서 있었다.
“스크롤이 아직 남아 있잖아.”
숨을 몰아쉬며 내려다본 손안의 스크롤은 보기 전보다 두께가 훨씬 줄어들어 있었고 끝부분은 억지로 찢은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더는 못 볼 것 같아서 내가 빠져나왔어.”
내 입을 빌려 대답한 슈페리어의 말을 듣자 이루미네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한번 봉인이 풀린 이상 그 스크롤은 얼마 후면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있어. 보기 시작한 이상은 도망갈 수 없다고.”
“…….”
그게 그 뜻에서 말한 거였던가. 슈페리어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 틈을 타 질문하기로 했다.
“그 스크롤이 정확히 얼마쯤 후에 사라지는지는 알 수 없습니까?”
“글쎄. 아무리 힘을 불어넣어도 길어 봤자 열흘이야.”
그 정도면 괜찮다. 몇백 년을 넘게 산다는 엘프의 기준에서야 열흘은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예전에 채 일주일이 될까 말까 한 기간 안에 3서클 마스터가 된 전력이 있었다. 슈페리어가 진정하고 마음을 돌리기에도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라는 소리다.
“그러면 일주일 안에 제가 다시 오지 않으면 그 이상은 보지 않는 것으로 치고 내버려 두십시오.”
“내버려 두라고?”
“어차피 본인의 선택입니다.”
[ …위로해 줄 때는 언제고 냉정하기는. ]
그제야 겨우 슈페리어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 루미에게 일주일 안에 생각해 보고 다시 오겠다고 해 줘. 일단 선택한 이상 돌이킬 수 없단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지금까지 본 것만 해도 너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어버렸어. ]
“직접 말하지 그래.”
[ ……. ]
이 자식, 또 시작이군.
나는 막대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참으려고 노력하면서 이루미네에게 슈페리어의 뜻을 전했다. 이루미네는 슈페리어 막대기를 향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저 추측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것들이 거기에 있어. 다 보고 나면 네게 더 해 줄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지 않겠어. 완전히 결심한 다음 찾아오도록 해. 그때까지는 아가, 너도 따로 찾아오지는 말렴.”
“그렇게 하죠.”
“스크롤은 돌려줘.”
순순히 스크롤을 넘겨주자 이루미네가 끝이 찢겨 나간 스크롤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피곤하군. 몇 년 만에 일어난 건지 모르겠어. 그럼 이젠 도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겠군.”
원래의 자리라면… 본래부터 앉아 있었던 저 반대쪽의 동굴 안 말인가? 생각해 보면 이루미네는 왜 꼭 몸을 누일 침대 하나 없는 텅 빈 그곳의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기만 한 것일까. 아무리 NPC라지만 그건 확실히 특이한 점이 아닐 수 없었다.
“왜 꼭 거기로 돌아가야 하는 겁니까?”
새삼스레 치고 올라오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묻자 이루미네가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게 궁금하면 저 스크롤을 마저 다 보렴.”
“…….”
“전에 왔을 때 묵었던 집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겠지? 돌아가면 거기서 짐을 풀고 쉬도록 해. 나가는 길은 왔을 때처럼 내 뒤를 따라와.”
이루미네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앞서 스쳐 지나갔다. 또다시 그녀의 발자국마다 고인 빛을 점점이 따라가면서 나는 방금 전 본 기억 속에서 슈페리어가 추측해 냈다는 안 좋은 가정이란 게 대체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이나 하기로 했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게 뻔하긴 하지만 미리 추측해서 슈페리어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설득하면 좋을 것 같으니까.
이루미네는 갈림길까지 나를 데리고 나간 뒤 인사를 건네고 도로 왼쪽 동굴로 들어갔다. 나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돌아서서 바깥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키온 형이 바깥에서 이루미네가 가져오라고 시킨 꽃을 캐고 있을 텐데, 어디쯤 있으려나.
찾아본 결과, 형은 다행히 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형.”
“어, 어. 카르야. 이제 나온 거냐? 네 일은 어떻게 됐어?”
키와 몸매가 무색하게도 모래 장난을 치는 어린애들처럼 웅크리고 앉아 주섬주섬 맨손으로 땅을 파고 있던 키온 형이 나를 보고는 과도하게 반가워하며 일어섰다. 그 바람에 바지에서 풀 쪼가리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지만 형은 그런 것에는 역시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음, 그냥…. 다음에 또 가야 돼. 꽃은 다 캤어?”
“꽃…. 젠장, 말도 꺼내지 마라.”
어두운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은 형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루터기 위에 쌓여 있는 꽃 무더기를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찾기 힘들어서 아직 다 못 캤다. 그래도 이제 스무 개 정도밖에 안 남았으니 좀만 더 뺑이치면 될 것 같아. 진짜 조금만 더 하면 돼.”
그 정도면 아마 곧 끝나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옆에서 ‘그러니 날 버리고 먼저 가진 않겠지? 설마 그러진 않겠지? 그랬다간 열 발자국 안에 발병 날 거다’ 하는 뜻이 말없이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형의 시선이 얼굴을 뚫을 듯이 전해져 왔다.
‘음… 내가 그렇게 매정해 보이나.’
뒷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형은 숙소가 어딘지 모르니까 같이 끝내고 가자.”
“도와주게?”
기대로 반짝이는 형의 눈을 보며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형이 싫지만 않다면.”
“카르야!”
내 목에 팔을 감아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긴 형이 이리저리 정신없이 흔들어 대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형이 싫어할 리가 없잖아! 요 귀여운 놈. 이 의리 있는 자식! 그래, 이 엿 같은 꽃 새끼들 다 줴뜯어 버리러 가자!”
형, 꽃은 새끼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너무 흔들려서 입을 열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일을 돕기 위해 갈라지기 전, 형은 내게 자신이 꺾은 은청조롱꽃을 보여주며 생김새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생긴 걸 꺾어. 생각보다 색이 연해서 어둠 속에서는 좀 찾기 힘들거든? 주변 풀들을 잘 헤쳐 봐야 된다.”
은청조롱꽃은 형의 말처럼 생각보다 색이 연했다. 물색에 가까울 정도로 투명한 푸른색이 작은 종처럼 고개를 숙인 꽃잎을 감싼 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이 주먹을 허공으로 내지르며 힘차게 외쳤다.
“좋아! 둘이 열 개씩 해치워서 끝내 버리자! 으라차!”
둘이 같이 매달리자 작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척되었다. 내가 열 개를 다 꺾고 일어서자 멀지 않은 곳에서 형도 흙투성이가 된 손 가득 꽃송이를 쥐고 일어서고 있었다.
“다 캤어?”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묻자 형의 얼굴에 함박 미소가 걸렸다.
“나도 다 찾았어! 끝이다! 이건 이제 내일 가져다주러 가면 되겠지?”
형은 100송이의 꽃을 모은 다음 주변의 긴 덩굴을 뜯어 꼼꼼하게 묶어서 커다란 한 다발로 만들었다. 꽃이 너무 많아서 형의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라 어쩐지 좀 웃음이 났다. 평소 성격이 꽃과는 워낙 거리가 멀어서인지 꽃에 파묻힌 모습이 언밸런스하면서도 또 은근히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카르야, 왜 웃어?”
“…안 웃었는데.”
눈치 빠른 형의 질문에 나는 재빨리 표정을 원래대로 가라앉혔다. 형은 좀 의심하는 눈초리였지만 다행히 금세 관심을 거두었다. 숙소인 통나무집으로 가자 이미 와 본 적이 있는 나와 달리 처음 와 보는 형은 달빛 아래에 고즈넉하게 서 있는 집 풍경에 그야말로 큰 감명을 받은 듯 한참 동안이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을 맴돌았다.
“와, 여기 정말 마음에 든다. 우리 집이었으면 딱 좋겠다.”
날라리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키온 형은 참 알면 알수록 평화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후아. 낮이 되었을 때의 광경을 보고 싶네. 끝내줄 것 같은데. 난 바로 여기서 로그아웃해야겠다. 카르 너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수련을 요즘 많이 못 해서… 좀 하다가.”
“여전히 수련광이구나.”
왠지 그리운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본 형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적당히 하고 꺼. 형은 먼저 간다. 나중에 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손을 흔들어주자 형의 몸이 곧 빛과 함께 점멸해 사라졌다. 사막 위에 세워져서 그런지 짐승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한 숲속. 이제 이 집에 남은 건 나 혼자뿐이군.
‘좋아.’
나는 뻐근한 목과 어깨를 돌려 근육을 풀면서 허리춤의 슈페리어 막대기를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약간이라도 은은한 빛이 났을 막대기는 지금은 아주 조용하기만 했다. 아무 빛도 안 나는 나무 막대기 본연의 모습은 참 볼품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통나무집 안의 어둠을 헤치고 들어가 방으로 향했다.
사실 키온 형에게 수련을 할 것이라 말했던 것은 미안하지만 핑계였다. 나는 슈페리어의 일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보기 위해 남은 것이었다. 찾던 침대를 찾아 그 위에 편하게 드러누운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슈페리어가 이루미네를 만났을 때 했던 말들부터 시작해 내게는 그다지 힌트가 되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들, 그리고 이전에 염룡 코르를 만났을 때 보았던 슈페리어의 반응들까지 최대한 자세하게 떠올려 낱낱이 살펴보았다. 과연 그것들의 어디에서 슈페리어가 ‘두렵다’고 언급할 만한 가정이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일까.
염룡 코르의 말을 통해 알게 되었던 가장 인상적인 사실은 슈페리어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슈페리어,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아마 분신 슈페리어를 남기고 떠난 본체 슈페리어로 추정했던 이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날 불쑥 코르를 찾아와 레어를 옮겨 주고 원하면 언제든 놀러올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떠났다. 오늘 나와 함께하는 분신 슈페리어가 말하기를, 그때 코르가 말해 준 자신의 모습에서 상당히 위화감을 느끼고 무서운 가정이 들었다고 했다. 정확히는… 뭐라고 했었지?
「설마 지금 마신의 기운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내가 봉인했던 그것은…….」
조금… 예상이 갈 듯 말 듯하기도 하고…… 좀 더 생각해 볼까.
코르를 만난 본체 슈페리어가 코르를 찾아오기 전 보았다는 이가 바로 이루미네다. 전쟁이 끝난 후 슈페리어가 과연 이루미네를 몇 번이나 찾아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기억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그들의 만남은 이전에 이 통나무집에다 아이아가스를 써서 알아낼 수 있었던 것과 거기서 다시 이어지는 듯했던 오늘 본 것을 합쳐 한 번뿐이었다. 슈페리어가 그 만남에서 이루미네에게 했던 말은 무엇이었던가.
우선 이 통나무집을 통해 봤던 기억에서는… 다시 떠올려 봐도 그다지 중요한 건 없는 것 같았다. 기껏 해 봐야 과거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 정도를 언뜻 비출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본 기억에서 슈페리어가 했던 말은….
‘자신을 둘로 나누겠다…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루미네가 금기에 가깝다느니, 그건 자살행위라느니 했던 말로 미루어 보면 심상치 않은 것임에 분명했다. 중간에 기억이 끊기기 직전, 슈페리어의 제안을 이루미네가 받아들였으니 슈페리어의 그 계획은 결국 실행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 나와 함께 있는 슈페리어가 아마 바로 그 결과물일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분신 슈페리어.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자신에 대해 무어라 소개했었던가?
본체의 1/10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기억과 지식만은 제대로 가지고 있는, 훗날 찾아올 자신의 전인을 위해 남긴 분신체라고 하지 않았었던가. 심지어는 분신체가 만들어진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기까지 했고 분신에 불과한 자신의 위치에 대한 확실한 자각과 ‘본체’에 대한 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본체 슈페리어는 그저 미래의 후인들을 위한 시련의 장소들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일환으로 제일 먼저 자신을 분신체로 만들어 레쥴에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했었지.
그러나 오늘 본 기억 속의 본체 슈페리어는 그저 그런 발랄한 의도에서 자신의 분신체를 만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분신’과 ‘자신을 둘로 나누는 것’의 차이… 대체 그게 뭐지?
‘휴. 생각할수록 어렵군….’
이래서야 이쪽의 분신 슈페리어가 무슨 놈의 가정 때문에 저러고 있는지 알아내는 길은 요원해 보였다. 이놈이 바로 열쇠일 텐데, 입을 열지를 않으니…. 내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슈페리어 막대기가 왠지 낯설게 느껴져 어둠 속에서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대. 뭐 하고 있어? ]
“왜.”
[ 그대의 친인에게는 수련을 한다더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서. ]
“…….”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지 정말 모르냐고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았다.
[ 할 줄 모르면 내가 한 수 가르쳐 줄까? ]
언제 그렇게 심각했냐는 듯이 묻는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워 순간 대답이 늦어져 버렸다.
“…무슨 한 수?”
[ 후회하진 않게 해 줄게. 내가 직접 누군가를 가르치겠다고 한 건 처음이니까 어디 가서 자랑해도 괜찮아. ]
“뭘 가르치겠다는…… 아.”
설마 마법 말하는 건가? 뜻밖의 기분으로 막대기를 내려다보자 막대기에서 은은한 붉은빛이 깜박거렸다.
[ 할 거야, 안 할 거야? ]
그야 슈페리어는 지금의 나보다 강한 마법사이자 검사임을 여태까지 많이 확인해 왔었으니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 당연히 흥미롭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느냐는 거겠지.
‘설마…?’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을 입에 담았다.
“…피하려고 날 이용하려는 거냐?”
[ ……무슨 소리야? 변덕스러운 건 인정하지만 이 나의 순수한 호의를. 너무하는 거 아냐. ]
허를 찔린 듯한 침묵 뒤의 대답을 들으며 내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오늘 참 여러 가지로 답지 않은 모습을 많이도 보이는군.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캐물었다간 대답도 얻지 못하고 슈페리어에게 마법을 직접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를 기회 또한 날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슈페리어가 원하는 것은 잠시간의 도피와 머리를 식힐 여유인 것 같으니 그냥 이 이상은 모르는 척해 주는 게 낫겠군.
“좋아. 하지.”
[ 잘 생각했어. 우리 함께 이 밤을 뜨겁게 불태워 보자고. ]
그런데 말마따나 지금은 밤인데 어디서 가르치겠다는 건지….
“어디서?”
[ 그러고 보니 장소가 문제인가? ]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빛이 흐려졌던 막대기에서 이내 강렬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 아. 그러면 되려나. 그대. 눈을 감아 봐. ]
뭘 어쩌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순순히 눈을 감자, 나직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 이동할 때 조금 어지러울지도 몰라. 절대 눈을 떠선 안 되고 정신을 똑바로 집중해. ]
이동이라니. 여기서 지금 순간이동 마법이라도 쓰겠다는 건가 싶어 순간 경고에도 불구하고 눈을 뜰 뻔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 새도 없이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더니, 뒤이어 거대한 풍선을 매단 것처럼 두둥실 가볍게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어디론가 끌려 날아가는 것 같은 익숙지 않은 감각 때문에 당황해하는 사이, 먹먹했던 귀와 희미했던 전신의 감각이 순식간에 되돌아왔다.
후와아악!
“처음 해 봤는데 예상보다 잘된 것 같군. …이제 눈을 떠 봐.”
몇 초 안 된 것 같은 짧은 시간 동안 놈이 맘대로 뭔가 일을 친 것 같긴 한데…. 어쩐지 평소처럼 머릿속에서 울리지 않고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듯이 선명한 슈페리어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빛?’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보이는 눈앞의 풍경에 놀라 입을 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밤중이라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통나무집 침대 위에 있었던 내가 지금은 파란 하늘 아래 융단처럼 새파랗게 깔린 초원에 누워 있었다. 나무들이 한가롭게 흔들리고 있는 데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풀밭 때문에 마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이게 꿈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또다시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뭐 해? 안 일어나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앞을 보자 오늘 이루미네가 보여준 기억 속의 모습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짧은 머리칼에 뺨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를 가진 슈페리어가 빙글빙글 웃으며 서 있었다.
“도와줘?”
나는 이 이상은 뭘 봐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무심코 놈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못이 박여 단단한 손에서 놀랍게도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놀랐나 보네. 흠… 여긴 말이지, 내 무의식 세계야.”
“그게 뭔데.”
“말 그대로. 가르치려고 해도 원래 상태로는 우리가 서로 만날 수 없으니까 내가 그대를 이쪽으로 끌어당긴 거야. 그러니까 여긴 이를테면… 맞아. 그대가 전에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대를 시험했던 공간 기억나? 그런 곳이라고 할 수 있지.”
슈페리어와 처음 만났던 공간이라면…. 아. 기억났다.
레쥴에서 일렉트릭 나이트와 관련된 기억을 보고 있었을 때 갑자기 슈페리어가 나타나 시험을 하겠답시고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으로 이동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공간과 이 공간이 같은 거라고?
‘믿을 수가 없군.’
그곳은 위아래도 분간할 수 없는 그저 검은 공간이었지만, 지금 이곳은 화가가 그린 풍경화처럼 현실감이 안 느껴질 만큼 평화로운 한낮의 초원이었다.
“여긴 바깥 시간축에 영향을 받지 않아. 찰나가 영원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영원이 찰나가 될 수도 있지. 일단은 적당히 바깥보다 시간이 느리게 돌아가게 만들어 뒀으니 느긋하게 할 수 있을 거야. 어때. 굉장하지? 천재적이지 않아? 이런 게 가능한 데다 다른 이를 데리고 오는 것까지 가능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거기까지.”
이루미네와 만나고 있었을 때처럼 심각하지 않은 건 좋았지만 모처럼 성의 있게 설명해 준다 싶더니 또 자기 자랑으로 빠지는 것을 듣자 겨우 차가운 이성이 되돌아왔다. 내 음산한 목소리를 들은 슈페리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여긴 아예 다른 세계인 건가?”
“그렇진 않아. 현재 그대의 몸은 여전히 원래 있던 집의 침대 위에 있어. 여기 있는 건 정신체지. 여긴 정확히 말하자면 내 의식 속 한편에 만든 정신세계랄까… 그런 거거든. 그러니까 그대는 지금 나와 함께 꿈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즉 여긴 슈페리어의 의식 속 세계고, 수련을 하기 위해 내 의식을 불러왔다 이거로군.
‘…….’
어쩐지 이 양떼 한 무리라도 몰고 다녀야 할 것 같은 한가로운 초원이 슈페리어의 정신세계 풍경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장소야 아무려면 어떤가. 바깥보다 시간이 훨씬 느리게 가는 공간에서 수련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사실 매우 족했다. 그동안 계속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수련에 마음껏 몰입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 없었는데, 슈페리어의 말이 정말이라면 상당히 흥미로운 기회가 될 것 같았으니까.
설마 슈페리어는 평소 막대기 속에서 항상 이런 곳에 있었던 것인가 하는 의심은 한쪽으로 밀어둔 채 나는 잠시 이 무의식 공간이란 놈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이것저것을 시험해 보았다.
“지도창 오픈.”
허공에서 슉 하는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지도창이 펼쳐져 떠올랐다. 그러나 원래대로라면 대륙 전도가 있어야 할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을 메우고 있는 텅 빈 흰 공간은 이곳이 게임 시스템적으로 인식이 되지 않는 공간, 즉 대륙 내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지역임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좌표 확인.”
- 이용자의 좌표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미확인 공간입니다.
이것도 역시 미확인이군.
나머지 아이템창이나 스킬창 등은 문제없이 똑바로 다 나타났다. 적당히 확인을 마친 뒤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은 나는 슈페리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시작은 언제쯤이지?”
“호오. 의욕 넘치네. 내 가르침을 받는다는 게 그만큼 기쁠 일이긴 하지.”
“…….”
“재미없게 무반응은. 여기선 좀 발끈해 주고 그래야지. 하나도 안 귀여워.”
도대체 내가 왜 네놈에게 귀여워 보여야 하는 걸까.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가벼운 경장을 걸친 슈페리어가 싱긋 웃으며 몇 미터 떨어진 앞쪽으로 걸어가 나와 마주 보고 섰다.
“뭐… 먼저 말하자면, 난 누굴 가르쳐 본 적이 없어서 사실 좋은 선생이 될 거라고 장담 같은 건 못해. 그대가 내 말을 얼마나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해 봐야 알겠지.”
좋은 선생 슈페리어 같은 건 이쪽도 상상조차 안 했다, 이 자식.
“그간 그대를 보면서, 마법을 상당히 재미있게 쓰지만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의외로 제대로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고생하지 않아도 될 부분에서 쓸데없이 고생을 하더란 말이야.”
가장 기본적인 부분…? 대체 그게 뭐지?
의아해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슈페리어가 갑자기 딴소리로 넘어갔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대가 알아뒀으면 하는 게 한 가지 있어. 우리들이 사용하는 것은 같은 마법이지만 구현되는 형태는 각자 다르다는 건 그대도 이미 알고 있지? 전의 인페르노 같은 것처럼 말이야.”
뜬금없이 튀어나온 인페르노의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인페르노. 슈페리어가 애초에 만들었을 때는 어느 정도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적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시전자를 보호하고자 했던 마법이었다지만, 내가 쓰는 인페르노는 그 자율성을 억지로 억눌러 좀 더 섬세하게 컨트롤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슈페리어가 그 차이를 알아차린 뒤 웃다가 뒤집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이름을 여기서 다시 꺼내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알고 있어.”
“그래. 난 그대가 쓰는 마법의 개성이 상당히 마음에 들거든? 그 점을 내 방식처럼 고치라고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대도 나와 같은 마법을 쓰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 중 누구의 얼굴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것처럼 마법도 그런 거니까.”
“그건 당연한 거잖아.”
미스트의 마법은 원래부터 시전자가 어떻게 이미지 하느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니 슈페리어와 내 인페르노가 같은 이름 아래에서 이렇게 달라진 것도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 인페르노가 슈페리어의 말마따나 고생하지 않아도 될 부분에서 쓸데없이 고생을 더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했지만….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슈페리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혹시나 싶어서 배려 넘치는 이 몸이 한 번 더 말해줬을 뿐이야. 머리에 잘 새기고 있도록 해. 그러면 먼저… 그대의 실력을 좀 볼까?”
내 실력?….
“이미 알고 있잖아?”
“그건 안다고 할 수 없지. 내가 원하는 건 그대가 쓸 줄 아는 마법을 여기서 모두 보여 달라는 거야.”
농담인가 싶어 슈페리어의 얼굴을 뜯어보았지만 침착한 붉은 눈동자에는 장난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진심이군.
쓸 줄 아는 마법 전부라니…. 너무 광범위한데.
“1서클부터?”
“그래도 되고.”
방법은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지만 이렇게 나열하듯 마법을 쓰게 된 적이 없어 기분이 좀 이상했다. 나는 어깨를 돌려 근육을 풀어준 다음 머릿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1서클부터의 모든 마법들을 줄줄이 떠올리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쓸 것은 역시… 그거겠지.
“파이어 볼!”
주문의 발현과 동시에 초록색으로 빛나는 수식 세계가 내 눈앞에서부터 지평선 끝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쭉 펼쳐졌다. 몇 번을 보아도 항상 시원하고 전율스러운 광경이었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쓸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불꽃의 이미지 그대로 구현된 파이어 볼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크기대로 화르륵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흘긋 쳐다본 옆쪽에서는 슈페리어가 편안히 팔짱을 낀 채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나와 내 마법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다음은…!’
나는 손을 뻗으며 다음 마법의 이름을 외쳤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민후의 번호를 찾아냈다.
“컴퓨터, 등록명 크란으로 화상 전화 발신.”
[ 등록명 [크란] 님에게 화상 전화를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대기 중이라는 메시지가 뜨고 나서 뚜르르 하는 음성 신호음이 얼마나 갔을까. 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덜컥 화면이 밝아졌다.
[ 카…! 아니, 무헌아! ]
바로 어제 보았음에도 변함없이 과도하게 반가워하는 얼굴의 민후가 숨을 헐떡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땐 잘 들어갔어?”
조용히 말을 건네자 민후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피어났다.
[ 응. 너는… 괜찮아? 아, 저기 그러니까 내가 묻는 건 상처 말이야. 상처! ]
“응. 괜찮아.”
정확히 뭐가 괜찮으냐고 묻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은데도 애써 말을 돌리는 민후에게 고마움이 느껴졌다.
[ 그런데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
“아니. 그냥…. 할 말이 좀 있어서.”
[ 할 말? 뭔데? ]
나는 말을 꺼내기 전 잠시 숨을 골랐다. 어제 놈이 갔을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지만 직접 말하려니 역시 조금 긴장이 되었다.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되어서.”
[ 응? 뭐라고? ]
“그래서, 고맙다고.”
고작 이 말을 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민후는 속에 있는 말들을 잘도 편하게 말하던데 내가 하려니 영 쑥스러워서 온몸의 털이 거꾸로 일어설 것 같았다.
하지만 민후가 아니었다면 어제 그렇게 진제환과 원만하게 일을 해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민후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후의 표정은 내 말을 들은 순간부터 멍해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움직임이 없어 전화 연결에 오류가 났나 의심할 때쯤 민후가 눈을 몇 번이나 껌벅이더니 붉어진 얼굴로 되물었다.
[ 어…. 어? 무헌아, 뭐라고?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아? ]
“끊는다.”
[ 잠깐만! 끊지 마! ]
당황해서 만류하는 민후의 얼굴은 툭 치면 붉은 물이 나올 것처럼 목덜미까지 새빨갰다. 내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게 그렇게 얼굴이 붉어질 만한 일인가…? 오히려 부끄러워야 할 건 이쪽인데 민후가 더 동요하고 있으니 나는 반대로 좀 침착해졌다.
[ 아니, 고맙다니. 하, 흠. 뭘 또 새삼스럽게 고마워하고 그래. 우리 사이에. 후, 하하. 그렇지? 아,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덥지? 이상하네? ]
그렇다니 다행이긴 한데… 민후가 그렇게 말하며 얼굴에 손부채를 부치는 순간 주변에서 강풍이 부는지 머리와 옷이 정신없이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은 겨울이야.”
[ 아, 아아. 그렇지. 그렇긴 한데 나는 워, 원래 추위를 잘 안 타거든. 아, 정말 덥다, 더워!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머리칼이 뒤집어질 만큼 흉포하게 부는 겨울바람을 보며 나는 놈이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거긴 바깥인 것 같은데…?”
[ 응? 응. 바깥이야. 잠깐 학교에 일이 있어서 와 있었는데 별건 아니고…. ]
[ -민후! 정민후 이 자식, 과대 주제에 어딜 갔어? 짐 옮긴다던 놈이 땡땡이를 쳐? ]
때를 맞춘 것처럼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통화를 방해했다.
“너 찾는 거 아냐?”
잘은 안 보이지만 민후의 주변에 사람들이 꽤 많이 있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내가 바쁜 시기에 잘못 전화를 걸었나 싶었다. 끊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묻자 민후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 아냐 아냐. 잘못 들은 거야. ]
[ -민후 오빠! 여기 있었어요? 상진이 오빠가 지금…. ]
하지만 결국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확인사살을 해 주자 민후의 얼굴이 급속도로 싸하게 굳어졌다.
[ 오지 마.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
[ -세상에 오빠 지금 저 피한 거예요? 어머어머. 귀여워! 근데 지금 뭐 보길래 그렇게 가리고 통화하는 건데요? 설마 애인? ]
[ …좀 가라니까! ]
민후가 들고 있는 휴대전화를 목소리의 주인공에게서 가리느라 바쁜지 한참 동안 정신없이 흔들리던 화면이 간신히 안정되었다. 고개를 돌리고 손을 있는 대로 휘저은 민후가 찡그린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 하하… 과방 위치가 바뀌었는데 다들 짐을 좀 옮긴다고 난리라서…. ]
내가 알지 못하는 민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게는 미스트 내의 크란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놈이지만 현실에서는 엄연히 대학도 잘 다니며 무려 과 대표를 맡고 있다고 하고, 아마 인기도 좋을 것이 분명한 멀쩡한 녀석이라는 것에 왜 이리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머릿속으로는 누구에게나 현실의 생활이 있으니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왠지 내 앞에서 웃고 있는 민후는 방금 전보다 좀 더 낯설게 느껴졌다.
‘바보 같은 생각을.’
“아니. 내가 안 좋을 때 전화한 것 같다. 미안.”
[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으… 제길. 등록번호 확인하자마자 화장실로 바로 뛰었어야 했는데……. ]
“뭐?”
[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러면…그… 널 고민하게 했던 그놈…이 아니고 사람이랑은… 음, 잘 해결된 거야? ]
“응.”
솔직히 말하자면 그 주인공은 너도 아는 놈인데… 하는 말은 정민후 놈이 바쁜 것 같아 그냥 속에 넣어두었다. 어차피 다음 기회도 있을 테니까. 민후는 내 대답을 듣고 밝게 씨익 웃었다.
[ 다행이네.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됐다니 진짜 좋다. ]
놈에게 괜히 순간적으로 낯설어했던 내가 미안해질 정도로 밝은 웃음을 보며 나는 조금 망설이다 오늘 전화한 또 하나의 목적을 짧게 꺼냈다.
“그런데… 얼마 후에 혹시 시간 되면 밖에서 만날 수 있을까.”
[ 정말? 나야 좋고말고! 언제쯤 보게? ]
“그건 아직.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그때도 꼭 받아라, 하고 덧붙이자 정민후가 헤헤 웃으며 손가락으로 OK표시를 해 보였다.
[ 물론이지. 언제든 연락 줘. 기다릴게. ]
나는 녀석의 웃음이 전염된 것처럼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통화를 종료했다.
[ 통화가 종료되었습니다. 총 통화시간 06:59. ]
안내음 소리와 함께 점멸해 사라진 화면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낮에 윤석호의 전화를 받은 이후 정신이 없어 병원에서 지어준 소염제를 비롯한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내 기억에 그 약은 식후 30분 안에 먹어야 하는 약이었으니 현재 시간이 좀 어중간하더라도 빨리 부엌에 가서 먹을 요리를 만들도록 컴퓨터에게 시켜 놓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가장 빨리 준비되는 요리가 볶음밥이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막 다리를 질질 끌면서 식탁 주변을 돌았을 때였다.
삐리릿, 삐리릿! 삐리릿, 삐리릿!
전화번호부에 등록된 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올 때 먼저 울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음? 정민후 놈이 다시 전화를 건 건가?’
나는 뒤돌아서면서 짧게 전화 연결을 수락했다.
“컴퓨터, 연결 수락.”
[ 무헌이니? ]
그런데 이번에 전화를 건 사람은 민후가 아니라 사모님이셨다. 나는 순간 당황해 다리에 힘을 빼고 서 있던 자세에서 똑바른 자세로 몸을 세웠다.
“사모님.”
[ 아까부터 전화를 걸었는데 계속 통화 중이더구나. ]
“아… 네.”
민후와 통화 중일 때 사모님이 전화를 거신 듯했다. 나는 한 번에 한 전화만 받도록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미처 몰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 어제 퇴원하고 나서 푹 쉬었니? 아직 많이 아프지? 밥은 먹었고? ]
“예. 푹 쉬었고 다친 곳도 괜찮아요. 밥도 잘 먹었어요.”
많이 걱정하셨는지 한 번에 질문을 몇 개나 던지시는 사모님 덕분에 적당한 대답을 하느라 애를 썼다. 사실 밥은 아직 안 먹었지만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으면 걱정하실 게 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내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를 파악하시려는 듯 얼굴을 들여다보던 사모님이 푹 한숨을 쉬었다. 입원한 후 3일간 매일같이 들었던 바로 그 한숨이었다.
[ 얼굴이 그게 뭐니…. 내가 괜히 네게 그 번호를 가르쳐 줘서 네가 또 이렇게…. ]
[ -어허, 어험! ]
적당한 타이밍에 갑자기 들려온 기침 소리는 보이진 않지만 분명 사부님이 내신 거겠지. 두 분은 내가 입원한 다음부터 정승조의 주소와 번호를 가르쳐준 것에 대해 상당히 속상해하셨다. 주소를 내게 넘긴 이상 그 일에 이제 손댈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역시 좀 더 시간을 들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시는 건 어쩔 수 없으신 듯했다.
나는 두 분이 보시고 안심하실 수 있도록 어색하긴 하지만 최대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그냥 정기 검진을 받느라 입원 기간이 늘어난 것뿐이에요. 아무 문제도 없고요.”
내 어색한 표정이나마 안심이 되긴 했는지 사모님의 얼굴은 조금 밝아졌다.
[ 그래…. 그래도 나을 때까진 한동안은 일하러 안 와도 괜찮단다. ]
“그러지 마세요. 정말 멀쩡한데요.”
[ -그놈 참. 쉬라면 쉬어. 아픈 놈은 도움 하나도 안 된다. ]
뒤에서 사부님이 거드는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나는 완강한 두 분을 설득하기 위해 몇 분의 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전혀 아프지도 않고 일하러 가고 싶다는 뜻을 몇 번이나 강조한 끝에 겨우 사모님이 한풀 꺾이셨다.
[ 정말… 예전부터 고집 센 건 변함이 없구나. 마음대로 하렴. 대신 와서 아프다고 해도 조퇴는 안 시켜줄 줄 알아. ]
“감사합니다.”
[ …그런데…. ]
“네?”
[ 무헌아. 그쪽엔… 또 갈 거니? ]
사모님이 이제 끊을 타이밍이 되었음에도 왠지 주저한다 싶더니 뜻밖의 질문을 하셨다. ‘그쪽’이라면….
‘정승조… 말이군.’
“저는….”
반사적으로 그저께 우리 집 앞에서 지팡이를 든 채 기다리고 있던 승조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속이 조금 답답해졌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여기 주소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었던 거지.’
어제는 여러 가지로 지쳐 있어 미처 그 부분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는데….
‘설마?’
나는 번쩍 고개를 들어 빠르게 물었다.
“사모님. 혹시… 제가 입원했을 때 정승조에게 전화하셨었습니까?”
순간 사모님의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
[ 그 애가 왔다 간 거니? ]
맞군….
“그저께 잠깐… 만났습니다.”
[ 사실은… 네가 입원한 후 그 애에게 다시 한 번 전화했었단다. 너는 왜 다쳤는지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지만 널 몇 년을 보았는데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르겠니. 그런데 그 애가 네 입원 소식을 듣고는 연락처를 물어보더구나. ]
“네? 그 녀석이… 먼저 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저도 모르게 크게 반문했다. 사모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러고는 바로 끊어 버려서 오늘 네게 전화한 것이었는데… 별일이 없었던 것 같아 다행이지만, 무헌아. 나는 네가 힘들다면 굳이 그걸 참으면서까지 이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
정승조가 먼저 사부님과 사모님께 내 연락처를 물어보다니…. 어째서였을까. 단지 지팡이를 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더 이상 만나려 하지 말라는 그 말을 하기 위해서? 그것뿐이었을까?
혼란스러운 와중 심장이 점점 더 세게 뛰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뇨. 사모님. 전에 사부님과 함께 제 생각을 존중해 주시겠다고 하셨었지요. 그렇다면 부디 끝까지 믿어 주세요. 전… 아직은 절대 물러서고 싶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도망가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계속할 겁니다.”
아까 사모님이 하셨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이다. 한번 움직이기로 결심한 이상, 나는 그 누가 말리더라도 절대로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단호한 의지를 내게서 읽어냈는지 사모님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 무헌아…. ]
“걱정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입니다.”
[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널 더 말리겠니. ]
포기한 기색이 어린 대답에 나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내 뜻이 제대로 전해졌구나.
“그러면 모레 가서 뵙겠습니다.”
[ 그래. 밥이랑 약은 빼놓지 말고 잘 먹어야 한다. 운동도 여전히 하고 있지? 얼굴이 그게 뭐니. 완전히 까칠해져서는…. 휴우. 이제 끊을 테니 푹 쉬렴. ]
“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나는 부엌으로 향하려던 것도 잊은 채 방금 사모님과 나눈 대화 중 단 한 부분만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정승조가 먼저 내 연락처를 물었다라….’
정승조가 나에 대해 알고 있을 만큼 나도 정승조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정승조는…. 그 녀석은, 정말 상종하기 싫다면 우연으로조차 마주치려 할 놈이 아니었다. 정말 관심이 없었다면 버려도 상관없었을 지팡이 따위를 돌려주는 일에 터럭만큼도 신경 쓸 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지 지팡이를 돌려주기 위해서였을지 몰라도 어쩌면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나가려 애쓰면서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손톱에 의한 통증이 그저께 느꼈던 가슴의 통증처럼 날카롭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절대로.
‘네게 말했듯, 나는 포기 안 할 거다.’
다시 한 번 단단히 다져 넣은 마음이 쿵쿵 박동하며 제 존재를 알렸다.
“저… 남 부장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예? 아뇨. 권천우 씨가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모니터를 본 겁니다만….”
남무건은 자신을 돌아보며 의아하게 묻는 권천우를 향해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평소 잘 다니지 않던 휴게실을 나다니며 틈나는 대로 권천우와 마주치는 시간을 늘린 지 며칠째. 그동안 너무 빤히 쳐다보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나름대로 노력해 왔었는데 오늘은 조금 방심했던 모양이었다. 질문에 다행히 반사적으로 변명을 하긴 했지만 심장이 튀어 나갈 듯이 떨렸다.
“아, 그렇군요. 보시고 계셨는데 제가 가린 거라면 다른 쪽으로 가겠습니다.”
‘뭐? 안 되지. 이것도 겨우 이틀 만에 마주치는 건데.’
산뜻하게 자리를 뜨려는 듯 일어서는 권천우 때문에 남무건은 속이 바짝바짝 타는 것을 느꼈다.
“아닙니다. 저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까지야….”
“아하하. 아닙니다. 엄청 열심히 쳐다보시던데… 저 프로를 굉장히 좋아하시나 봐요. 요즘 저걸 보시느라 자주 나와 계셨던 것 맞죠?”
“예?”
남무건은 핑계를 대느라 지목했던 모니터에서 나오고 있는 TV 프로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 아이들에게 한창 인기 있다는 <반짝반짝 반짝이>가 방영되고 있는 중이었다.
“아… 아니 그런 건….”
“괜찮습니다. 아동용 프로그램이 뭐가 어때서 그러십니까.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 건전한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전 입이 무거우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러면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최대한 머리를 짜내 변명해 보려 했지만 권천우는 잘생긴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며 일어서서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무건은 그제야 휴게실 책상 위에 머리를 박으며 자신의 멍청함에 마음껏 괴로워할 수 있었다.
기껏 경계심을 늦추고 친해지기 위해 며칠간이나 없는 시간을 짜내 지켜본 건데, 개인적으로 대면한 첫 대화를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이야…….
‘자네는 참… 자진해서 시작한 일도 제대로 못 하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지. 상사는 자네를 위한 휴지가 아니라네. 알고 있나? 비록 내가 휴지로 치면 고급 크리넥스 같은 존재이기는 하겠지만, 일 처리 하나 제대로 못해 뒤처리하는 데 날 시킬 생각은 하지 말라 이 말이네.’
머릿속에서 현실보다 다소 왜곡된 듯하면서도 묘하게 그럴싸한 윤석호의 독설이 울려 퍼졌다.
‘미치겠군. 정말….’
권천우의 마지막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가자 분노가 솟구쳤다. 뭐가 어쩌고 어째? 아동용 프로그램 시청이 건전한 취미?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
‘정말 접근하기 싫은 놈이야.’
남무건은 얼마 전 윤석호에게서 들었던 권천우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권천우…. 상당히 흥미로운 과거를 가지고 있더군.」
「네? 어떤….」
「이력서에는 별다른 수상 경력 같은 것을 쓰지 않았었는데, 학교에 따로 문의해 보니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받은 컴퓨터 분야 관련 상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아. 쓰기만 한다면 바로 스카웃되고도 남을 만한 재능이 있어 보이던데 왜 여기 들어올 땐 그런 말이 일언반구도 없었을까? 아니, 뭐 그다지 놀랍진 않지만 말이네. 권천우처럼 과거가 화려하고도 수상한 놈들이 우리 회사를 털어보면 한 트럭은 나올 테니까.」
남무건의 잔뜩 긴장한 표정을 바라보며 화려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인 윤석호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권천우가 특별히 더 재미있는 건 대학에 들어간 이후엔 그런 기록이 싹 사라진다는 거야. 웃기지 않나? 고등학교에서 난다 긴다 하던 녀석이 정작 대학에 들어가선 그렇게 평범해지다니. 그럴 리가 없지.」
「그러면….」
「일부러 관련 대회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은 거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걸 찾아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이를테면… 고등학교 졸업 직전에 만들어 소소하게 여러 대의 PC를 뒤집어놨다던 바이러스 프로그램 같은 것 말이야. 일의 규모가 조금만 더 커졌어도 대학 입학이 취소될 뻔했는데 다행히 어떻게 잘 넘어갔더군.」
「그런 걸 만들었었다고요?」
「그래. 상당히 머리 좋은 악동이었던 모양이지. 과거 지인들에게는 괴짜라는 평이 많더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친구라고 말이야.」
「…….」
「현재 최대한 더 조사 중이니 쓸 만한 정보가 들어오면 다시 알려주겠네. 유념할 것은 어설프게 행동하진 말라는 거네. 권천우가 범인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범인 놈은 대단히 머리가 좋은 데다 간까지 부은 놈이야. 너무 요란하게 탐색하는 걸 바라진 않으니 어느 정도 친해져서 얻을 수 있는 개인적인 정보나 느낌 같은 것만 알려주어도 돼. 할 수 있겠지?」
「절 뭘로 보시고….」
남무건의 불퉁한 대꾸에 윤석호는 그저 웃음만 지어 보였다.
「글쎄…. 걱정이야, 자네는. 성질이 욱하다 보니 상대편에게 있는 대로 휘둘릴 수도 있거든. 아. 하지만 일을 맡긴 건 그걸 넘어설 만한 힘이 자네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니 별걱정은 말고.」
별걱정을 말긴 뭘 말란 겁니까. 시작부터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젠장!”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앓는 소리를 내던 남무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반짝반짝 반짝이 테마가 끝없이 흘러나오는 TV 모니터를 신경질적으로 꺼 버렸다.
“후….”
귀를 사정없이 때려대던 반짝반짝 송이 사라지니 머리가 좀 차가워졌다.
‘그래.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일단 쪽팔린 주제로나마 그쪽에서 먼저 대화를 터 줬으니 다음은 그걸 핑계로 다시 한 번 접근할 수 있을 테니까.’
긍정적으로 살자. 긍정적으로…. 남무건은 윤석호를 만난 이후부터 자신의 좌우명이 된 문장을 중얼거리며 권천우가 들어간 1팀의 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내 감은 네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그걸 끌어낼 수 있을까. 남무건은 고민을 거듭하며 자신의 캡슐로 향했다. 이제는 다시 지겨운 동부 담당 GM 무건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인페르노, 블리자드!”
후욱! 콰르릉!
마지막으로 남은 두 마법을 동시에 외치자 왼쪽과 오른쪽에서 새빨간 불꽃과 얼음 폭풍이 연약한 대지를 갈아엎으며 흉포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다른 마법들로 인해 여기저기 그슬리고 파헤쳐져 있던 주변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 싶었을 때쯤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지우자 인페르노와 블리자드는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미 많은 마법들을 쓴 상태에서 가장 많은 마력을 잡아먹는 6서클의 인페르노와 블리자드를 오래 지속하기란 힘든 일이었겠지만, 얼마 전 염룡 코르의 피를 흡수하면서 비약적으로 신체 능력이 올라가서인지 지금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마력 또한 무난히 절반 이상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당시엔 기분이 더러웠는데 이거 하나만큼은 감사해야겠군.’
주변은 조용해졌지만 수많은 마법이 쓸고 지나간 초원은 이제 더 이상 처음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나무들과 붉게 뒤집어진 흙들이 처참하게 널려 있는 광경은 여전히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더없이 암담하게 보였다.
“…이걸로 끝인데.”
나는 마법 시전이 모두 끝나도록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서 있던 슈페리어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슈페리어는 딱히 마법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온갖 바람과 부서진 나뭇가지 조각, 튀어 나가는 흙 등에도 영향 하나 없이 머리카락조차 헝클어지지 않은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이걸로 끝이라고? 아직 더 있잖아.”
정말로 다 보여줬는데 아직 더 있긴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반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멀뚱히 서 있자 슈페리어가 답답하다는 듯 설명했다.
“이런 평범한 것 말고, 전처럼 그대가 스스로 응용해서 만든 마법 같은 거. 난 그런 게 보고 싶어.”
‘아….’
응용해서 만든 마법이라면 당연히 있긴 했지만 그것들 중에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썼던 것들이 많아 내가 정형화된 이름을 붙인 것은 거의 없었고, 개중에는 지금 다시 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런 것도 보여줘야 하는 건가.’
나는 잠시 망설이다 일단 기억나는 데까지는 해 보기로 마음먹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응용 마법이라… 응용 마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스크류 볼이겠지.’
내가 최초로 시도했었던 응용 마법인 스크류 볼은 파이어 볼을 변형시켜 강력한 회전력을 더해 본래의 몇 배나 되는 위력을 얻은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후 서클이 올라가면서부터는 그다지 쓸 일이 없어 잘 쓰지 않았었다.
지금 떠올려야 할 것은 맹렬하게 회전하는 파이어 볼의 이미지!
“스크류 볼!”
화르르륵!
보통의 파이어 볼보다 한층 더 위협적으로 회전하며 불티를 날리는 파이어 볼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가라!”
콰쾅!!
블리자드에 휩쓸려 반쯤 부서진 채 얼어붙어 있던 주변의 나무둥치 하나가 스크류 볼에 맞자마자 대포에 맞은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간단하고도 위력적인 모습이었다.
“그거 파이어 볼을 기반으로 만든 거지?”
여태까지 마법 시전을 보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던 슈페리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흥미로운걸. 어떻게 만들게 된 건지 알려줄 수 있어?”
6서클의 마법을 보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던 놈의 눈이 처음으로 이채를 띠고 있었다.
‘저게 마음에 들었나.’
“그냥, 뭐. 공을 던질 때에도 평범하게 던지는 것보다는 손목에 스냅을 걸어 회전하는 공을 던질 때 더 위력이 크니까 파이어 볼도 그렇게 하면 어떨까 싶었던 것 같은데….”
“공이라…! 그러고 보니 파이어 볼도 공은 공이었지. 하하하. 대단한데. 어렸을 적에 공놀이 좀 해 봤나 봐?”
“뭐…….”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내가 해봐서 깨달은 것이라기보다는 과학 시간에 배운 상식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그렇게 설명해 봐야 NPC인 슈페리어가 못 알아들을 것이 뻔하니 이런 대답이 최선이었다.
슈페리어는 드디어 볼 맛이 난다는 표정으로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더 해봐, 더.”
“…….”
이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자 내가 지금 나를 가르쳐 주겠다는 놈을 보러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슈페리어에게 재롱을 피워주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뭐… 아까 전처럼 기운 없어 하는 것보단 낫군.’
나는 피식 웃으며 놈이 지금보다 더 놀라 뒤로 나자빠지게 만들 만한 마법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그전에 썼던 마법은 하나도 놀랍지 않았던 모양이니 좀 오기가 생기는 것도 같고.’
나는 다시 한 번 과거에 응용 마법을 썼던 기억들을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웬만큼 간단한 응용 마법으로는 그다지 슈페리어를 놀라게 하지 못할 것 같고, 역시 제일 써볼 만한 건… 예전에 딱 한 번 써 보았던 그것일까.
‘사실 그건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역시 그것밖에 없나.’
몇 달 전 유완과 크란이 아직 내 곁에 있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그레브에 가기 전, 파름 대평원을 지나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만났던 필드의 보스, 칼랍 타이탄은 몇 미터나 되는 거대한 몸집에 벌레형 몬스터 특유의 강력한 껍질, 그리고 상당한 수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어 당시의 우리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유완과 크란을 도망시킨 뒤 혼자서 그놈을 처치하기 위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썼던 마법.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쓰고자 하는 마법이었다.
‘그때 어떻게 했었더라.’
일단… 더스트 윈드를 깔고.
“더스트 윈드!”
손으로 빠르게 원을 그리며 눈앞의 필드 전방에 파도처럼 낮게 포복한 더스트 윈드를 까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순식간에 하얗게 달아오른 수식 세계가 맑게 공명하는 소리를 내며 부름에 응답했다.
핑-
콰아아아!
눈 깜짝할 사이에 소용돌이치는 바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수식 세계 속의 범위를 통해 내게는 다각도로 파악되는 더스트 윈드들을 노려보며 머릿속으로 이미지 변형을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그저 평범한 회오리일 뿐이지만…!’
바람을 내리눌러 줄어들게 만들고, 평평하게 두들겨 새로운 모습을 빚어낸다. 이리저리 머리칼과 로브를 찢을 듯 날뛰는 더스트 윈드와의 보이지 않는 씨름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말 안 듣는 건 여전하군. 줄, 어, 들어!!’
푸화화학!
이를 악물고 거칠게 손을 휘두르자 내 의지에 짓눌린 더스트 윈드들이 비명을 지르며 푹 줄어들었다. 아무리 용의 피를 흡수하면서 체력과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지만 역시 과도한 이미지 변형을 할 때 쑤시듯 아파오는 머리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듯했다.
나는 통증을 무시하려 노력하면서 눈앞의 바람을 노려보았다. 이놈들은 너무 눌러 버리면 짜부라져 사라지고, 그렇다고 숨 쉴 틈을 조금이라도 내줬다간 금방이라도 원래대로 돌아가려 하는 성질이 강해 섬세하게 이미지 변형을 해야만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몸부림치던 놈들을 향해 한 번 더 강하게 힘을 가하자 발광하던 바람들이 간신히 벽 모양으로 단단히 고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 훅.”
고작 이 정도에 벌써 숨이 찰 줄이야. 나는 이를 갈면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눈앞에 가로로 밀어세운 더스트 윈드의 벽을 유지하고 있으니 이젠 불꽃의 관을 씌워주면 되는 것이다.
“스크류 볼!”
화르르르르!
순식간에 생성된 스크류 볼들이 불티를 흩날리며 바람의 벽 위에 간격을 두고 줄줄이 늘어섰다. 그 모습이 마치 출발선에 선 경주마들 같았다. 벽처럼 고정된 범위 안에서 미친 듯이 발악하고 있는 바람과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스크류 볼이 만나자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표면이 튀기는 것이 보였다.
목표는 어디로 정할까.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대충 저 끝으로 하면 되겠지.
“가라.”
기다렸다는 듯 사나운 공기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며 무너진 바람의 벽과 스크류 볼이 서로 엉켜 물어뜯으면서 미친 듯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유성처럼 긴 꼬리를 끌고 바람의 위를 타고 달리는 불꽃들은 이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쿠와아아아악!!
그러던 중, 드디어 한참을 날아가던 스크류 볼 중 하나가 바람의 위로 훅 옮겨붙어 번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다른 하나도, 또 다른 하나까지. 그리고 마침내는 모든 불꽃들이 바람과 함께 녹아내렸다.
나는 몇 달 만에 기억 속에서 다시 되살아난 완전한 불의 파도를 잠잠히 지켜보았다. 격렬하게 굽이치며 점점 부채꼴처럼 넓게 퍼지던 불의 파도는 마침내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먼 곳까지 날아갔을 때 눈부신 불꽃을 뿌리며 폭발해 버렸다.
콰아아아아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요동치는 바람 때문에 뽑혀나갈 것처럼 뒤흔들리던 앞머리칼이 간신히 가라앉고 나자 남은 것은 뒤늦게 연기를 내뿜으며 검게 불타는 들판과 한껏 무거워진 공기였다.
온몸의 피부가 찌릿대는 것을 느끼며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뒤에 서 있던 슈페리어가 곁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옆을 바라보니 그는 내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검은 대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웃고 있었다.
“굉장한걸.”
슈페리어가 여전히 앞만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정말이지… 굉장해. 지금껏 이런 걸 잘도 숨겼다 이거지.”
하하, 하고 웃는 소리가 먼지로 자욱한 들판, 이젠 황야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을 곳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속을 알 수 없는 태도로 한참 동안 웃어대던 슈페리어는 겨우 다 웃었다 싶었는지 상쾌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싹 하고 표정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
“뭐?”
뜻밖의 말에 반문하자 슈페리어가 빛에 비추어져 금빛이 어린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굉장한 재능이야. 하지만 이걸로 확실히 알겠어. 그대의 약점.”
“약점이라고?”
“그래.”
검은 대지 위에 선 슈페리어의 그림자가 내 앞으로 길게 늘어져 거대한 존재감을 자아냈다.
“그대는 왜 방금 그 마법을 쓰면서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어? 그게 바로 그대의 약점이고 모자란 점이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설마 그 기색을 알아챘을 줄이야!
“별것 아니었어. 그냥 이 마법을 처음 썼었을 때 예상보다 낮았던 위력을 보고 이후엔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것뿐이야.”
본의 아니게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 입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사실 슈페리어의 말은 맞았다. 나는 불의 파도와도 같은 그 마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 그 마법을 썼던 칼랍 타이탄과의 싸움 때에는 내가 그런 어려운 마법 변형과 합성을 성공했다는 것에 상당히 감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법의 범위가 엄청났던 것과는 달리 칼랍 타이탄은 그것을 맞고도 살아서 나를 공격했고, 지나가던 키온 형과 팔튼 형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죽었을 것이다. 결국 실컷 태운 것은 땅뿐이었다. 그 마법을 만드는 데 들어간 집중력과 마력, 그리고 시간에 비해서 더없이 미미한 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 마법은 내게 있어 약한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엔 지나치게 리스크와 대가가 크고, 그렇다고 강한 소수의 적을 상대하기엔 위력이 얼마 못 미치는 그런 어중간한 위치가 되어버렸다.
칼랍 타이탄에게 죽다 살아난 이후 자그레브에서 틈틈이 그 마법에 대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두 번은 쓸 필요가 없는 실패작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후 나는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공격 마법의 이미지 변형과 합성을 시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내 껄끄러운 감정이 슈페리어가 바로 알아챌 만큼 강하게 드러났던가.
“이봐, 그대. 사실 약점이라고 해서 감출 필요는 전혀 없어.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게 바로 그 점이니까.”
내 생각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슈페리어가 입을 열었다.
“마법이 문제가 아니야. 그대가 문제지. 조금만 고치면 돼, 조금만. 이 불세출의 천재가 그대에게 특별히! 알려주도록 하지.”
“마법이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불세출의 천재 운운하는 부분은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며 반문했다.
“그래. 그대의 약점은 바로 기초가 없다는 거야.”
“…기초?”
기초라니… 위저드 타워에서 준 책을 통해 1서클부터 4서클까지 두문불출하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련한 나다. 책에서 알려준 것 중 빼먹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 내게 기초가 없다고?
슈페리어는 내 불신 어린 표정을 보고는 크게 웃었다.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군? 하긴 그러니 그렇게 자신감이 심하게 넘치지. 그래, 뭐 나쁘진 않아. 자신만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우유부단한 놈들보단 훨씬 나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세상엔 그렇게 단번에 판단하고 믿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 두 가지가 있거든? 그게 뭘 것 같아?”
“…….”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슈페리어도 굳이 내 대답을 바라지는 않은 듯 매끄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잘 알아둬. 그건 바로 마법과 사람이야.”
마법과… 사람?
“이건 사실 내가 알아냈다기보단 내 스승이 알려준 거지만 말이야, 마법은 단 하나의 결론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절대로 안 돼. 어느 방향에서 찔러도 또다시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이 마법이거든. 사람도 그것과 마찬가지야. 타인을 자신의 편협한 생각만으로 판단해 버려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어. 혼자만의 기준 안에 갇혀 있어서는 결국 얻을 수 있는 것이 적어지는 거야.”
간단하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말이었다. 내가 그 말을 곱씹는 사이 슈페리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대의 마법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대의 그 확고한 기준과 생각을 깰 필요가 있어. 난 그걸 위해 그대에게 내가 마법을 익히던 시절 배웠던 기초를 알려줄 생각이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슈페리어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파아앗!
순간 우리가 밟고 서 있던 대지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와 나는 재빨리 눈을 감아야 했다.
‘다짜고짜 무슨….’
찡그린 눈썹을 펴며 눈을 뜬 순간 검게 탔던 대지가 사라지고 처음 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아름다운 들판이 다시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내 투덜거림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어떻게….”
“후훗. 이 정도도 못 해서야 여기가 내 무의식 세계라고 할 순 없지. 여기선 내가 신이나 마찬가지거든. 이 정돈 문제없어.”
아… 그랬군. 얼떨떨해하는 사이 슈페리어가 허공에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걸 잘 봐.”
슈페리어는 우선 검지로 가볍게 작은 원을 그렸다. 그러자 회전하는 파이어 볼 하나와 제자리에서 휘몰아치는 더스트 윈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전하는 파이어 볼은 내가 먼저 만들어 보여주었던 스크류 볼의 완벽한 재현이었다.
‘본 것만으로 저렇게 쉽게 구현해내다니….’
애써서 만들어 낸 입장에서는 왠지 사기를 보는 듯해 입맛이 썼다. 그러나 슈페리어가 불러낸 마법들은 각각 하나뿐이었고 크기도 내가 썼던 것들보다 현저히 작았다.
“작지? 하지만 크기와 위력은 상관없어. 왜냐?”
슈페리어가 검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크류 볼의 위치를 돌리더니 별안간 더스트 윈드 쪽으로 휙 날려 보냈다. 날아간 스크류 볼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찢겨 사라져 버렸다.
이게 뭐가 어쨌다는 건지…. 나는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슈페리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더스트 윈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중요한 건 바로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 의지’니까!”
펑! 슈페리어의 외침과 동시에 더스트 윈드의 안쪽에서 불씨가 확 타오르기 시작했다. 회오리치는 바람의 밑동에서부터 어지럽게 나선을 그리며 옮겨붙은 불꽃은 순식간에 바람을 집어삼키고 불의 폭풍이 되어버렸다.
“크윽!!”
엄청난 압력이다…!
사람을 날려 보낼 것처럼 거세고 뜨거운 압력 때문에 슈페리어와 내 로브가 뒤로 찢어질 듯 정신없이 펄럭거렸다. 나는 비틀거리다 간신히 얼굴을 팔로 가린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맙소사.’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을 뚫고 거인처럼 자라난 회오리불기둥을 보며 나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불기둥에서는 아까 전에 내가 힘겹게 형태 변형을 몇 번씩이나 해 가며 만들었던 불의 파도와 별다를 바 없는 흡사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불의 파도와 슈페리어가 만든 저것의 성질이 거의 똑같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이걸 어느 쪽으로 보내 볼까.”
여유 있게 중얼거린 슈페리어가 위를 가리키고 있던 검지의 방향을 틀어 앞쪽으로 내렸다.
“가라.”
조용한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위를 향해 회오리치던 불기둥이 도끼에 찍혀 잘린 거목처럼 천천히 쓰러지다가는, 돌연 앞으로 화염 방사기처럼 뿜어져 나갔다.
쿠콰아아아아아아!!
마치 슈페리어의 손끝을 따라 거대한 불줄기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 어떤 것도 그의 손을 떠난 거대한 불기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태양이 두 개 뜬 것처럼 보일 만큼 끝도 없이 쏘아져 나가던 불기둥은 지평선마저 뚫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에야 저절로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
들판에 남은 것은 정적뿐이었다. 사실 다른 소리가 들렸더라도 귀가 먹먹해 제대로 듣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뒤늦게야 연기를 내며 타오르는 주변의 풀들을 보았다. 직경 1미터 정도의 불기둥이 지나간 것뿐인데도 피해가 막심했다. 그러나 내가 불러냈던 불의 파도와 슈페리어가 불러낸 불기둥은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내가 불러낸 불의 파도가 넓은 면적의 땅을 그저 검게 태우기만 했던 것에 비해 슈페리어가 만들었던 불기둥이 지나간 곳은 지진이 나 갈라진 땅이 생각날 만큼 지면이 깊숙이 파헤쳐져 있었다.
‘이건….’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 가진 위력 자체가 달랐다. 빠르고 강력한 힘을 한 점에 모아 쏜 한 방. 저것이라면 틀림없이 그때의 그 칼랍 타이탄도 한 방에 없애버릴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내가 그렇게나 고생해서 이뤄냈던 마법의 이미지 변형을 끝내 버린 슈페리어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두통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던 나와는 달리 분기가 느껴질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이것이 바로 9서클에 달한 자의 실력인가. 나는 객관적으로 보자면 고작 NPC에 불과한 슈페리어에게 진심으로 압도되었다. 슈페리어가 지금껏 수없이 말했던 천재, 천재 하는 자랑은 결코 헛말이 아니었다. 차마 쉬이 입을 열지 못한 채 슈페리어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볼을 긁적거리며 혀를 찼다.
“왜 그렇게 뜨겁게 쳐다봐? 민망해지는데…. 방금 그 마법이 그대의 마법과 뭐가 달랐는지는 알겠어?”
“통제하기 어렵게 마법을 크게 만들지 않고 위력을 집중시켜 속도를 높였지. 아닌가?”
“그건 그냥 결과지. 내가 아까 친절하게 말해 줬는데도 모르겠어?”
아까 말했었다고? …설마?
“그래.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 의지 말이야.”
설마 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슈페리어가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게 뭔데.”
슈페리어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얼굴에 흉하게 자리 잡은 흉터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웃으니 기억 속에서 보았던 젊은 시절의 얼굴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어. 이 대륙 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는 자격은 뭐지?”
질문을 들은 순간 예전에 들었던 그와 똑같은 질문이 데자뷰처럼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내가 처음 마법사로 전직했을 때 들었던, 이제는 너무나 당연해져 버린 그 말.
“상상하는 것.”
“바로 그거야.”
슈페리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보다 크게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이 같은 마법을 써도 더 크게 쓸 수 있는 거지. 그게 단순히 형태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냐. 마법이 필요로 하는 상상이란 건 의지와 연결되어 있어. 머리로 형태를 만들고, 마음으로 위력을 더하는 거지. 바로 여기로 말이야.”
슈페리어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천천히 툭툭 두들겨 보였다.
“누가 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꿈꾸는가. 그 차이에 따라 같은 파이어 볼을 쓸 때도 위력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 되는 거야. 이건 다른 마법사들과 수련해 보면 금방 알아챌 수 있는 기초 중의 기초거든.”
그 말을 듣자 예전에 넷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났다. 미스트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다. 마법의 발현을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는 결과를 도출해내 많은 이들의 경탄을 받았던 그 글. 설마 그 글의 내용을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그대는 다른 마법사들을 본 적이 거의 없지?”
갑자기 슈페리어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본 나 외의 마법사들이라고 해 봐야 자그레브에서 만났던 매직토피아 길드의 길드원들 정도였다.
“그렇게 확실한 의지와 독창적인 이미지를 가지고도 너무 당연한 것도 몰라서 빙빙 돌아가는 걸 보면 확실하지. 마법 수련에는 다른 이의 마법을 보면서 깨달아야 하는 항목도 분명히 존재하거든.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상대는 스승이지만….”
슈페리어가 말을 하다 말고 별안간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짓더니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대. 내가 아까 썼던 마법. 어떻게 한 건지 알고 싶지?”
“…갑자기 그 말은 왜….”
그야 당연히 알고 싶기는 하다. 애초에 나는 슈페리어가 밑도 끝도 없이 ‘한 수 가르쳐 주겠다’고 했던 말에 이끌려 온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역시 예감이 좋지 않아 살짝 경계하면서 대답하자 슈페리어가 내 어깨에 팔을 슬며시 둘러왔다.
“내가 어릴 때 배웠던 기초 수련법이 있는데, 이게 아주 효과가 탁월하거든? 그걸 할 줄 알게 되면 아까 같은 건 그냥 눈 감고도 할 수 있단 말이지. 그런데 이런 걸 그냥 가르쳐 주긴 좀 그렇지 않겠어?”
“…….”
“엄연히 가르쳐 주는 이와 배우는 이의 관계이니 스승과 제자, 어때? 그 재미없는 얼굴 가득 나에 대한 공경심을 담아서 스승님~ 하고 불러주면 내 비전의 마법도 가르쳐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진심이었다면 나도 고려해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슈페리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곤 이 기회에 나를 실컷 놀려먹어 보겠다는 장난기밖에 없었다.
“이거나 치워.”
슈페리어의 팔을 걷어내며 한숨을 쉬자 칫 하고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놈이 의외로 깔끔하게 물러섰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내 후인은 가끔 골렘이 아닌가 의심 갈 때가 있다니까.”
그 말은 내가 할 말이다. 어차피 지금 이 상황도 본인의 변덕에 의해 형성된 것인 데다 사실 진짜로 그럴 마음도 없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말은 잘하는군.
“뭐 좋아. 그대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 수련법이 제일 걸맞겠다는 건 사실이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그건 마법의 위력과 유형을 제대로 조절하는 방법을 몸에 습관화시키는 거야. 그걸 배우면 자신의 마력과 의지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볼 수 있게 되지. 난 이걸 다섯 살 때 모조리 익혔었어.”
순간 아무리 슈페리어가 NPC라지만 다섯 살은 사기적인 설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이 때 나는 겨우 검이나 질질 끌고 다니며 사부님의 도장에서 놀고 있었을 텐데.
“따라올 자신은 있겠지?”
당연하지, 하는 뜻을 담아 고개를 진중하게 끄덕이자, “좋아.” 하고 말한 슈페리어가 손가락을 다시 한 번 딱 하고 튕겨 불기둥 때문에 초토화된 들판의 풍경을 원래대로 되돌리면서 선언했다.
“바로 시작한다.”
슈페리어가 맨 처음 나에게 시킨 일은 주변의 나무를 상대로 파이어 볼을 각기 다른 위력으로 쏘아 보내는 일이었다.
“약한 위력, 보통 정도 되는 위력, 강한 위력. 일단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눠 보자고. 약한 위력부터 해 봐. 나무껍질에 살짝 탄 정도의 자국만 남도록.”
“파이어 볼!”
슈페리어의 말을 듣고 약한 위력을 가진 파이어 볼을 상상하며 주문을 외쳤다.
‘약하게…. 나무껍질을 살짝 태울 정도로만 약하게….’
쾅!
그러나 나무에 파이어 볼이 부딪친 순간 꽤 굵직하던 나무는 내 기원이 무색하게도 어이없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어?’
“보통 위력. 평범하게 나무를 뚫는 정도로.”
예상치 못한 위력에 내가 당황하는 순간 슈페리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나무를 가리키며 다음을 지시했다.
“…파이어 볼!”
이번에도 쏜살같이 날아간 파이어 볼은 순식간에 목표했던 나무 몸통을 뚫고 지나가면서 근처에 있던 다른 나무까지 쓰러뜨리고 말았다.
‘…왜 이러지?’
“다음은 저거. 강하게 날려서 없애 버려.”
“파이어 볼!”
콰콰쾅!
이번 파이어 볼은 슈페리어가 가리킨 나무를 순식간에 박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의 나무 세 그루 정도를 더 저승길 동무로 삼아 태워 버렸다.
“문제가 뭔지 알겠어?”
이 모든 참사를 침착하게 지켜본 슈페리어가 질문했다.
“위력이….”
“위력의 문제가 아니지. 조절이 안 되는 거라고. 센 건 괜찮은데, 약하게 하는 쪽 조절은 전혀 못 하고 있잖아.”
이게 조절의 문제라고?
“못 믿겠다면 똑바로 봐. 제대로 된 조절이 뭔지 보여주지.”
생각에 잠긴 내 앞에서 가볍게 손을 뻗은 슈페리어가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세 그루의 나무를 차례차례 가리켰다.
“하나. 둘. 셋.”
퍼퍼펑! 콰쾅! 쾅!
거의 동시에 뻗어 나간 세 개의 파이어 볼은 완벽하게 전혀 다른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나무는 말 그대로 겉껍질만 가볍게 그슬린 수준이었고, 두 번째 나무는 둥치가 절반쯤 뚫렸다. 그리고 세 번째 나무는 깔끔하고 완벽하게 박살이 나 있었다.
그야말로 슈페리어가 말했던 설명에 걸맞은 결과물들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향해 그가 심술궂게 웃어 보였다.
“잘 봤지? 스승님이라고 안 불러줬으니 숙제다. 이걸 조절하는 방법을 알게 될 때까지 열심히 연습해 봐. 줄 힌트는 다 줬으니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 믿겠어. 나무는 쓰러뜨리면 바로바로 다시 생기게 해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말한 슈페리어는 할 말을 잃은 나를 내버려 두고 ‘아~ 오랜만에 너무 몸을 풀었더니 피곤하군. 낮잠이나 자 보실까나.’ 하는 태평한 소리를 지껄이며 상당히 먼 곳에 위치한 큰 나무 밑으로 가 버렸다. 그늘이 잘 져 잠을 자기에 좋을 법한 곳이었다.
‘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저것이 내 오기를 불러일으키려 한 시도였다면 상당히 효과를 보았다.
‘그래. 내가 못 할 게 뭐냐.’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주변의 나무들을 노려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것이 연습을 해서 되는 거라면 내가 못 할 리가 없다.
그 순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