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제환은 거칠게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바이크의 방향을 옆으로 급하게 틀었다. 바퀴가 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90도 이상 틀어진 몸체가 아슬아슬하게 건물에 돌진하지 않고 멈추어 섰다.
스턴트에 가까운 바이크 다루는 능력에 지나가던 이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눈길조차 돌리지 않은 남자가 바이크 키를 빼내어 품 안에 찔러 넣고는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운터 앞에 서 있던 안내 담당 직원은 진제환의 얼굴을 보고는 바로 눈치 빠르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의 제한을 해제해 주었고, 진제환이 타고 위로 올라가기가 무섭게 인터폰을 눌러 사장실에 기별을 넣었다.
“사장님의 둘째 자제분이 방금 올라가셨습니다.”
[ 네. 알려드리겠습니다. ]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연락이 끊겼다. 직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제환이 타고 올라간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점점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항상 무표정하긴 했지만 기분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었는데, 별일이네……. 잘생긴 얼굴 가끔이라도 보는 맛에 일하는 건데 말야.”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진제환은 주머니 안에서 꺼낸 자그마한 VT 전자수첩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 [호출] 일에 관련해 중요한 정보가 새로 들어왔으니 당장 본사로 와라. - 서환 ]
일이라는 것은 당연히 새턴의 THE MIST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일 것이다. 자신이 얻어낸 정보는 거의 알려 주지 않고 있었으나 용의주도한 진서환과 아버지가 자신 외에도 다른 정보원들을 여기저기 심어 놓았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 끄나풀 중 하나가 이번에 뭔가 중요한 정보를 캐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현재 진제환의 얼굴이 굳어 있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 아니었다. 눈은 수첩의 화면에 향해 있었지만 머릿속은 호출 내용을 핑계로 뛰쳐나오기 전에 만나고 있었던 남자의 일로만 가득했다.
- 띵.
어지러운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수첩만 쥐었다 펴는 사이 도착했다는 신호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진제환은 바로 눈앞에 위치한 사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장실 안에는 아버지와 형인 진서환이 이미 마주 앉아 있었다. 진제환이 노크 없이 들이닥쳤으나 그들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앉아라.”
사장실 안에 놓여 있는 소파 중 빈자리를 잡아 걸터앉자 서환이 안경테 너머로 동생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내리깔았다.
“새로 들어왔다는 정보는 뭡니까.”
진제환은 바로 본론부터 끄집어내었다. 들어보았자 지금은 정보가 머리에 잘 들어올 것 같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 정보는 나중을 위해 꼭 알아 두어야만 했다.
“그동안 우리가 새턴에 우리 쪽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두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었겠지. 이번에 그중에서 GM부에 있는 자가 꽤 쓸 만한 정보를 보내왔다. 바로 이거지.”
서환이 대답과 함께 자신의 무릎 위에 펼쳐놓았던 서류 뭉치를 들어 보였다. 그 위에 쓰여 있는 글씨를 읽은 진제환의 눈이 살짝 커졌다.
[ GM부서에 설치된 운영자용 접속캡슐에 대한 점검일지의 정보를 곧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3일쯤 시도할 예정으로……. ]
“가장 핵심적이자 미지에 싸여 있는 문제가 바로 접속캡슐 기술에 대한 문제였지. 직접 해체해 보아도 알 수가 없더군. 만약 이자가 성공만 한다면 그 자료 안에서 그것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거다. 꽤 큰 수확이지? 이것과 함께 다른 곳에서도 정보가 들어오긴 했지만 그건 뭐 게임 내부에 대한 사소한 것들뿐이라 이번에 건진 건 이게 다다.”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인 진제환의 표정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서환이 차가운 눈빛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데 너는 요즘 새로 보고를 한 것이 아무것도 없더군. 뭘 하고 있는 거냐?”
“어느 정도 확실한 진척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따로 더 보고하지 않을 거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목소리는 미리 준비한 것처럼 매끄러웠다.
“그래. 그야 그랬지. 하지만 내가 얼마 전 우연히 얻게 된 정보를 본 순간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진제환은 느긋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연신 탐색하듯 훑어보는 형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뜨거운 톱날 두 개가 공중에서 맞부딪친 것처럼 소리 없는 불꽃이 튀었다.
“……그 정보가 궁금하군요.”
“못 알려줄 것 없지. 새턴의 그 남자, 윤석호가 누구와 접촉을 했는지에 대한 정보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매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새턴에서 비밀리에 수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고, 그건 아마 아무도 실체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특수 캡슐과 관련이 있을 거란 의견이 지배적인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
“나는 이 프로젝트를 직접 움직이는 자가 바로 윤석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윤석호는 대외적으로 또 하나의 다른 거대 프로젝트를 공개적으로 맡고 있지. 그게 바로 최근 발표된 THE MIST의 메인 퀘스트다. 그래서 난 메인 퀘스트를 눈가림용으로 내놓고 뒤쪽에서는 그 알 수 없는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 생각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던 사이에 몇 달 전 그가 매우 뜻밖의 번호로 연락을 취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뭐냐.”
순간 진제환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진서환은 다 잡은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넣은 사냥꾼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제환, 어째서 두 달 전에 새턴의 그 교활한 남자가 외조모님의 동생의 손자 명의로 개설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에 전화를 걸었을까? ……그것도 타이밍 좋게도 네가 널 따라다니는 서킷 아이를 떼어 달라고 말한 이후에 말이다.”
진제환의 표정은 변함없이 무표정했다. 그러나 냉랭해 보이는 외면 안의 머릿속은 맹렬히 회전하며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른 예상 결과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 연락을 받은 것이 저라고 여기는 이유는 뭡니까.”
“너일 수밖에 없어. 번호의 명의자부터가 너를 길러준 외조모와 관련되어 있는 데다, 그 정도로 전산망을 뒤흔들어놓을 실력을 가진 것도 너뿐이니까. 뭐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
“동생이 뭘 잘하는지, 또 그 동생이 잘하는 전산혼란 VT해킹 부분에서 쓰는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 뭔지 알아두는 건 형으로서 당연한 일이지. 그러니 이젠 네가 갖고 있던 귀엽지도 않던 속내가 뭔지도 드러내 주었으면 하는데.”
침묵을 패배 선언으로 받아들인 진서환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 추궁했다. 그러나 그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다음 순간, 뜻밖의 대답으로 인해 깨져버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속내라니.”
“여기까지 밝혀지고도 발뺌할 생각이냐. 너는 우리가 맡긴 일을 하기 위해 새턴사의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었으면서, 동시에 그 새턴의 대표자와 내통했다. 내 말이 틀린가?”
평범한 이였다면 자기 잘못이 아니라도 자기 잘못이라고 해버리고 말 것 같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어조였다. 그러나 진제환의 표정에는 한 치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연락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연락이 아니지. 그건 내통이야.”
“어째서 내통입니까.”
“뭐라고? 내통이 아니라면 네 일에 누가 관심을 보이든 신경 쓰지 않던 네가 갑자기 서킷 아이를 해제시켜 달라 말하고 나서 그 이후에 윤석호의 연락을 받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테냐. 또 고의적으로 보고 시기를 늦추거나 뻔한 사실을 아예 보고하지 않았던 것들은 어떻게 변명할 생각이지? 잔꾀 부리지 마라.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빨리 말하는 것이 너도 편해지고, 우리도 편해지는 길이야.”
서환은 마음대로 될 듯하다 갑자기 비틀어진 상황에서 진제환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발뺌할 수 없는 증거가 나왔음에도 진제환의 눈빛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순간 언뜻 불길함이 치솟았으나, 분명한 증거를 앞에 두고 흔들릴 수는 없었다.
목소리를 높여 한 번 더 추궁하려던 서환은 진제환의 시선이 그의 너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아버지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전성, 메이지 소프트라는 굴지의 기업을 이어받아 오랫동안 게임 산업계에서 군림해 왔던 나이 든 제왕은 아들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서도 결코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등을 기대고 앉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진제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아버지의 눈과 마주친 서환은 순간적으로 멈칫 굳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도로 앞을 보았다.
진제환은 이제 서환이 아니라 아버지 진전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어느 정도 일이 진전될 때까지는 보고하지 않겠다고 말했었습니다. 방금 말이 나온 일은 그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확실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쓸데없는 중간보고 따위는 필요 없으리라 여겼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의심한다 말하니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애초에 제 일 방식을 존중한다 해 주고 의뢰를 맡긴 쪽은 그쪽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으니 원하신 대로 최근 제가 해 왔던 일의 진척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변명을 하려는…….”
“그래, 해 봐라.”
재빨리 진제환의 말을 막기 위해 입을 연 진서환의 말허리를 딱 잘라 끊으며 느릿한 저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진서환은 방금 전 아버지의 눈빛에 굳었던 것도 잊고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가 느른한 사자와 같은 표정을 보고는 주먹만 꽉 쥐며 입을 다물었다.
등 뒤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은 나이는 먹었을지언정 빛나는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의 위력만큼은 아직까지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상대였다.
진전성의 허락을 얻어낸 진제환은 아버지를 복사한 것처럼 똑 닮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몇 달 전, 저는 새턴의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게임의 메인 퀘스트 중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얼마 전부터 진전성의 허락하에 윤석호와 접촉했던 유저들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기 시작했던 진서환은 순간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때 진전성은 윤석호가 메인 퀘스트를 해결하는 일개 유저들에게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퀘스트가 생각보다 중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었고 진서환 또한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후에 조사하는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실은 메인 퀘스트는 단지 대외용일 뿐, 그것은 윤석호가 진행하고 있는 진짜 프로젝트의 진행을 감추기 위한 용도가 아닌가 하는 새로운 추측을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초반에만 이름이 나왔을 뿐 여태까지 이렇다 할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특수 캡슐 기술 프로젝트’ 같은 것 말이다.
이 추측은 무척 획기적이었고, 게다가 타당성도 있었다. 지부장이 직접 유저들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흔치 않은 상황을 다른 이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만들기에 메인 퀘스트는 정말 좋은 연막이었으니까.
실제로 THE MIST의 메인 퀘스트가 발표된 뒤부터 윤석호가 메인 퀘스트를 직접 관리한다는 정보에만 촉각을 곤두세워 달려든 이들이 어디 자신들뿐이던가.
때문에 그 추측을 한 뒤로부터 메인 퀘스트와 관련된 조사는 뒷전으로 미루었었는데, 그 퀘스트를 얻은 유저 중 한 명이 진제환이라니.
자기 스스로 진제환이 무엇을 하는지 감시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했으면서 이 순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엄청난 실수임과 동시에 진제환이 서환을 엿 먹이려 작정했었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었다.
진서환이 진제환을 감시할 목적으로 붙였던 서킷 아이가 활동하기 시작한 지도 두어 달이 넘었다. 그동안 진제환이 정체 모를 타인과 만나는지 안 만나는지만 확인하며 내통의 가능성만 판단했을 뿐, 정작 어디에서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까지는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던 자신의 허술함이 뼈저리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진제환……!’
표정이 굳어버린 진서환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진제환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메인 퀘스트인 줄 몰랐었지만, ‘일’을 하기에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해결하다 보니 새턴에서 그 퀘스트를 수행하는 이들에 대해 꽤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금 ‘형님’이 말씀하셨던 새턴 코리아 지부장, 윤석호가 직접 메인 퀘스트 유저들에게 연락해 일반 유저를 기용한 THE MIST 메인 퀘스트 동영상 출연에 대한 보수 이야기와 기타 다른 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물론 이 행운은 듣던 대로 그 남자가 중요한 일을 대부분 직접 처리하려 드는 성정이라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네게 그 남자의 연락이 올 때를 대비해 가상의 명의를 만든 게냐.”
진제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윤석호의 의심은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평범한 유저로 가장하여 윤석호와 대화했고, 그 남자는 메인 퀘스트 유저에 대한 최대한의 편의를 앞으로도 보아줄 것을 약속한 뒤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자신과의 직통 연락 경로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계속해서 THE MIST의 메인 퀘스트를 해결한 끝에 그것이 생각보다 저희의 ‘일’과도 관련이 깊은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현재는 여기까지입니다.”
진제환의 말이 끝난 뒤 진전성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환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아버지의 무표정 속에서 어떤 냉혹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을지를 보지 않고도 추리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맡겼던 일과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던 일 모두를 일시에 뒤집힌 자신과 예상치 못했던 부분에서 성과를 낸 진제환.
괴물은 강한 새끼만을 거두어 기를 뿐이다. 지금까지는 진서환이 계속해서 아버지에게 선택받아 왔었다. 나약한 어머니가 이혼장을 내던졌을 때도 아버지의 곁에 남은 것은 그였고, 10대의 나이에 회사 내의 일을 파악할 정당한 권리를 얻었던 것도 그였다.
그가 메이지 소프트 내의 실세로 자라 천재 소리를 들어가며 일을 배울 때까지도 동생은 운동이나 하고, 컴퓨터나 좀 두드렸을 뿐이었다. 녀석은 그저 그렇게 살다가 외가의 사업이나 이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디를 보나 진서환이 먼저 혈연으로서의 아량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상대였다. 그저 그 정도일 뿐이라고만 여겼었는데.
서환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막 입을 열려 했을 때, 진전성이 반백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아버…….”
“진 팀장. 진제환이 말한 일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나?”
순간 진서환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떨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아들로 대하며 아버지의 호칭을 묵인했던 진전성이 그를 ‘진 팀장’으로 불렀다는 것은 이제 여기서는 더 이상 부자간이 아니라 사장과 팀장의 관계로 이야기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팀장으로 불린 이상에는 어떤 변명도 통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그가 해낸 결과의 냉혹한 판정뿐.
“……죄송스럽게도, 저는 미처 몰랐던 사실입니다, 사장님.”
“윤석호에 대해서는 이것 외에 더 알아낸 사실이 있나?”
“없습니다.”
“내가 조사하라고 했던 메인 퀘스트에 대해서는?”
진서환은 목소리에서 꼴사나운 변화가 느껴지지 않도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축였다.
“그것은 도중에 더 얻을 것이 없을 것이라 판단되어 새턴의 비밀 프로젝트 조사 쪽으로 옮겼기 때문에 많은 것을 조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 말도 무시하고 진행한 그 비밀 프로젝트 조사에서는 어떤 성과가 있었지?”
진서환은 뻣뻣이 굳은 주먹을 풀었다 다시 쥐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아직…… 윤석호가 연락하는 이들을 파악해 조사해 볼 의심군 정도밖에 추려내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한 게 없다, 저것도 다 하지 못했다, 다른 건 또 자기 멋대로 굴다 대상을 놓쳤다.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진 팀장에게 일을 시키는지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군.”
아니, 알고 있다. 끊임없는 시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가늠하고자 하고, 그로써 자신의 왕국을 물려 줄 태자를 원하는 것이다.
사실상의 직함은 게임 개발부의 팀장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회사의 존속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한 조사를 맡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대로 잘해 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매우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변명은 필요 없네. 중요한 것은 자네가 이번에 제대로 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뿐이니까.”
“…….”
“지난번 한국 VG 컨퍼런스. 기억하고 있겠지.”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말을 듣자마자 진서환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뜩 들었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었던 굴욕적인 그날. 한국의 이름 있는 VT 게임 기업들이 일 년에 한 번 모여 개최하는 그 화려한 명예의 전당에서 무슨 일을 당했던가.
지금까지 그 컨퍼런스의 중심에 서 있던 것은 언제나 메이지 소프트였다. 진전성은 살아 있는 전설이고, 진서환은 그 후계자로 알음알음 얼굴이 익혀져 있는 상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어떠했던가?
익숙한 얼굴들만 가득했던 컨퍼런스에 새턴이라는 이방인이 새로 등장했다.
새턴 게임부에서 윤석호를 대신하여 나온 이들은 그날 새로운 황제가 누구인지를 만방에 알렸다. 심지어 본인이 참석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 진서환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당연한 듯이 주어졌던 경외심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도저히 참기 힘든 굴욕이었다.
진서환보다도 그 굴욕을 더 크게 느꼈을 아버지는 그날 이후 그 모임에 대해서는 아주 잊어버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민감한 이야기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내다니.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심 이를 갈며 내뱉은 진서환의 얼굴을 진전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래. 그날을 잊지 말도록. 그러면 이번 일에 대한 처분을 내려야겠군.”
올 것이 왔다. 진서환은 은빛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의 아버지는 실수를 쉬이 용서해 주는 이가 아니었다. 실수에는 응당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당연했고, 서환 또한 그를 납득하며 자라왔다. 이번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필라디아’가 완성될 때까지 개발 외에 맡고 있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
그러나 각오하자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청천벽력 같은 말에 진서환은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예?”
“그간 맡겨 놓았던 일들은 이제 내가 직접 보도록 하지.”
무심한 듯이 대꾸하는 말투에는 파고들어 갈 한 치의 틈도 발견할 수 없었다. 대꾸는 감히 할 수 없었지만 용납하기 힘든 처벌에 수긍할 수 없어 대답하지 못하는 서환의 표정을 본 진전성은 싸늘하게 일갈했다.
“필라디아가 그깟 새턴보다도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 전에도 말했듯 현재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것뿐이야. 새턴의 그 게임보다도 우수한 것을 낼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야 해. 이것마저 잊고 멋대로 행동한다면 그땐 두 번은 없다는 걸 명심하도록. 그럼 그만 나가보는 게 좋겠군.”
필라디아는 현재 진서환이 개발 중인 메이지의 신작 게임의 명칭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든 서환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여 보이고 뒤돌아섰다. 아버지의 말대로였다. 필라디아의 개발보다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은, 자신이 아직은 아버지에게 있어 중요한 이라는 뜻일 것이다. 초조해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진서환은 여전히 말 한 마디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는 동생의 곁을 지나가며 흘끗 곁눈질을 했다. 오늘의 패인은 바로 저 진제환 때문이었다.
어설프게 조사한 것으로 올가미를 씌우려다 되레 역공을 당한 것이다. 도대체 녀석은 언제부터 저런 발톱을 숨길 줄 알게 되었을까. 그가 알고 있는 진제환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녀석이었다.
어렸을 때 겪었던 자폐증의 그림자가 다 사라지지 않은 성격은 무심하고 냉정하기 짝이 없었고, 심지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그리 슬퍼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녀석이 감정의 변화를 겪을 때가 있기는 한 것인지도 의심이 갔다.
그런 진제환이 집착하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이었다. 녀석은 프로그램의 핵심을 볼 줄 아는 집중력을 이용해 진서환이 만든 게임의 허점을 몇 번이고 깨뜨린 전적이 있었다. 그 재주를 믿고 이번에 일을 시켰던 것인데…….
도대체 저 녀석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움직인 것일까.
진서환은 어릴 때와 변함없는,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알기 힘든 눈을 한 동생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그 얼굴 어디에서도 방금 전 자신을 보기 좋게 엿 먹인 이의 승리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널 갑자기 움직이게 만든 건 대체 뭐냐.’
그런 의문을 품고 문을 나서기 직전에, 진서환은 이 문을 나서서 자신이 이 일에 대한 완전한 외부자가 되기 전에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보고할 사항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보고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방금 전 기억났지만 알아 두셔서 앞으로의 일에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환의 말을 듣고 진전성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뭐냐.”
“제가 윤석호가 연락하는 이들에 대한 정보를 어렵게 얻어 분석하면서, 유난히 자주 나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윤석호가 최근 1년여간 개인적인 연락을 취한 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횟수를 차지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 연락자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조사하다, 바로 어제 대충 연락자가 있는 지역을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가 어디지?”
“여기 서울에서 꽤 가깝더군요. 수도권 근교의 국내에서 제일 큰 재활 센터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Y대 부속병원이 위치해 있는 B시, 그즈음입니다. 1년 전쯤 윤석호가 회사 명의의 물건을 그 근처로 보낸 기록도 있었습니다. 그곳 부근에서 플레이하는 모든 유저들을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럼 전 정말로 이제 나가보겠습니다.”
서환은 그저 잊었던 보고를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끝내고 나서 정말로 등을 완전히 돌려 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문을 닫기 전, 아버지에게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 앉아 있던 진제환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제환……?’
잘못 본 것인가 생각해 다시 보려 했지만, 그 순간 문이 차갑게 닫혔고 결국 진서환은 재확인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돌아서고 말았다. 진제환이 놀라거나 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 그 표정은 이제부터 시작될 아버지와의 교섭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그렇게 여겼다.
서환이 나간 뒤, 진전성은 턱을 매만지며 의자 뒤로 등을 더욱 기대앉았다. 이제 남은 것은 진제환 하나뿐이었다. 승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 뜻밖에도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린 둘째 아들에게 그는 승자의 예우를 해 줄 생각이었다.
“제법이구나. 너도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어 이리했겠지. 원하는 것이 무어냐.”
평소에는 이름조차 힘들여 기억하지 않았던 둘째 아들에게 느긋하게 말을 건네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약간 의아해져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가 앉아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갑자기 진제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건은 다음에 좀 더 의논하러 찾아오겠습니다.”
아버지를 닮은 냉정한 목소리는 덕분에 그가 지금 다른 곳에 신경이 쏠려 있다는 사실을 잘 감추어줄 수 있었다. 진전성은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채 제법 교섭할 줄 아는 녀석이라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고, 진제환은 인사를 하는 듯 마는 듯 남기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재미있군…….”
맹목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지만 수완이나 머리는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인 큰아들과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지만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완벽하게 처리하는 작은아들.
지금까지 그에게 작은아들은 그저 이혼한 뒤 죽은 처의 처가에 대신 내어준 명목상의 말에 불과했었지만 이제부터는 어쩐지 그 모든 것이 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저 녀석의 외조부도 만만치는 않은 편이었지. 어떨지 모르겠군.’
우드블라인드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햇빛이 반백의 머리칼을 음울하게 비추다 사그라졌다.
사장실을 나선 진제환은 처음에는 성큼성큼 걸었지만 그다음에는 보폭을 좀 더 넓혀서, 또 그다음에는 속도를 점점 더 높이다가 마지막에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는 아예 뛰고 있었다. 1층 프런트에 서 있던 안내원이 인사를 하려다 놀라는 얼굴도 무시하고 뛰쳐나간 진제환은 바깥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몸체를 가진 익숙한 검은 바이크로 다가가 가볍게 뛰어올라 앉으면서 키를 꽂았다.
곧 폭발에 가까운 엔진 소리가 길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어서 바아아앙 하는 비명과 함께 튀어나온 바이크 탄 남자는 힘껏 속도를 올려 도로로 달려 나갔다. 슬슬 어두워져 가는 하늘이 마지막 노을빛의 여운에 잠겨 있었다.
한참 동안 말 그대로 거칠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운전으로 수도권의 한 도시까지 빠져나간 진제환은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재활전문병원을 지나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반대편 길의 주택지로 향했다.
이제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앞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주홍빛 가로등과 바이크의 라이트 불빛만이 전부였다. 그즈음에 간신히 속도를 줄인 진제환은 한 빌라 옆에 바이크를 멈추어 세우고 위를 쳐다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1층의 어느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는 얼굴은 여전히 냉혹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그 집의 창문에서는 아무리 내려다보아도 보일 리 없는 사각지대의 그림자 밑에 선 진제환은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그 흰 빛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몇 번 움직여 볼 생각으로 발걸음을 떼려 해 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멈춰 서고 말았다.
진제환은 그 집에 누가 사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를 저는 병자처럼 창백한 안색의 남자가 사는 집. 그러나 그 남자만큼 진제환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바보인가? 진제환은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이 집을 뛰쳐나올 때만 해도 그의 가슴은 태어나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불꽃으로 잔뜩 지져져 화상에 신음하고 있던 상태였다. 아마 적어도 한 달쯤은 그 상처만 붙잡고 고통스러워하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지금 여기에 서 있을까. 심지어 고통이 아닌, 가득한 초조함과 걱정만을 담은 채로.
진서환이 마지막에 말했던 정보는 더 들어보나 마나 이 집에 살고 있는 그 남자, 강무헌에 대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윤석호가 강무헌에게 1년 전 무엇을 보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외의 정보는 모두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적어도 재활병원 근처의 이 도시에서 살면서 THE MIST를 플레이하며 윤석호와 연락한 적이 있을 남자는 그가 유일했다. 왜냐하면 강무헌은 미스트의 메인 퀘스트 유저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맡은 사람이었고, 특수 접속캡슐을 실제로 이용하고 있는, 진제환이 아는 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캡슐, THE MIST의 장애인용 특수 캡슐은 THE MIST라는 게임이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크게 대두되었던 것이었으나 정작 서비스가 시작한 뒤에는 요령 좋게 잊혀버렸다. 사실 잊혔다기보다는 새턴 측에서 언론이 취재하지 못하도록 수를 쓴 것이겠지만 언론에 나오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는 대중들은 그저 ‘그런 것이 있었지’ 정도로만 생각해 버리고 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알려 하지 않았다.
실제로 특수 캡슐로 플레이한다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었고, 알아낼 수조차 없었던 상황 속에서 강무헌이 그것을 쓰고 있는 유저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진제환의 충격은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진제환은 자신이 지금까지 몇 번이고 조사했던 새턴이라는 기업에 대한 정보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새턴은 처음에는 작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시작했다. 회사가 점점 커지면서부터는 게임이나 의료용, 가정용 등의 다양한 VT소프트웨어와 관련기기를 개발해 시류를 잘 타면서 크게 성장했으나 클 만큼 커진 이후에는 오히려 곁다리를 다 쳐내고 한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힘을 썼다. 그리고 그 집중적 투자전략이 성공해 현재는 세계의 대표적인 유명 기업이 된 곳이었다.
새턴의 회장 일가는 한국계로 유명했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사진들에 의해 늙은 회장의 입지가 꽤 위험하다는 전망이 대세였다. 그러나 얼마 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던 회장이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새턴 GS라는 유령 게임 부서를 다시 살려내어 발표한 게임 THE MIST가 엄청난 히트를 치면서 입김이 다시 세어진 회장파와 이사진파가 사내 권력구도를 사이에 두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뜨거운 감자인 THE MIST의 핵심 개발 책임자는 지금까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람이 네 명. 그러나 그중 한 명은 행방불명, 두 명은 미국에 있으며 나머지 한 명이 바로 새턴 한국 지부의 신으로 부임한 윤석호였다.
너무나 획기적인 게임은 그 시스템 특성상 여러 업계에서 정신없이 침을 흘리며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의료 VT업계에서는 왜 그런 신기술을 게임 따위에 쓰느냐고 말이 많았고, VT네트워크 사업 업계들은 좀 더 리얼하게 체험할 수 있는 VT가 개발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군침을 흘렸다.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THE MIST의 신기술을 노리고 있는 쪽이 바로 지금 당장 밥그릇이 사라져 굶어 죽게 생긴 VT게임 회사들이었다.
누구나 THE MIST의 신기술 정보를 캐내 오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 뛰어든 스파이들만 게임 내에 과장 조금 더해 한 도시 인구 정도는 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전부 이 신기술을 얻기 위해 투입되었으니 새턴 측에서도 방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지만, 그쪽의 내분이 최근 들어 더욱 격렬해졌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의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최전선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는 것은 최고 개발자 중 1인이자 가장 크게 승진해 전체를 통괄하는 위치로 올라선 윤석호뿐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THE MIST는 겉으로만은 전혀 문제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로.
진제환은 처음에는 그리 열심히 THE MIST와 관련된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일 의뢰를 받아들인 것은 그저 외할아버지가 일을 주지 않는 공백기에 할 일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었고, 우연히 초반에 얻게 된 이상한 퀘스트가 실은 메인 퀘스트의 일부였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귀찮다는 생각에 퀘스트를 포기해 버리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와 다시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단호한 NO뿐.
그 남자를 만난 순간부터 진제환의 일상생활 속 모든 의미가 달라져버린 지금은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는 것 따위는 절대로 할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한낱 게임을 플레이했고, 그 안에 숨겨진 정보를 찾아내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자신이 타인과 만나 내통하는지 아닌지를 감시하는 서킷 아이를 피하기 위해 지키고 싶은 주체인 강무헌까지 속여 가며 몸을 굴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정보로 진서환을 속이면서 동시에 새턴 측을 속였다.
윤석호가 THE MIST의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는 유저의 정체가 실은 경쟁 회사 사장의 아들임을 알고도 그것을 묵인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때문에 진제환은 새로운 명의를 만들어 윤석호와 퀘스트 동영상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진서환이 일부러 조금만 알아차리도록 신경 써서 흘려보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적도 아군도 없는 아슬아슬한 곳에서 줄을 타며 두 곳 모두를 상대할 정보를 한 손에 쥐려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할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그 이유는…….
그 남자, 강무헌이 너무나 위험한 곳에 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특수 캡슐의 사용자이며 THE MIST의 메인 퀘스트 유저, 그리고 심지어는 THE MIST의 가장 신비한 기술로 추앙받고 있는 ‘이미징’ 기술의 진수로 만들어진 마법 스킬의 최단 성장 기록자이기까지 하다. 비단 메이지 소프트가 아니라도 지금 당장 웬만한 VT 업체에 그 정보가 노출만 된다면 그 즉시 납치당해 팔려가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강무헌의 몸이 좋지 않아 평소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런 평화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위험은 언제나 예고 없이 닥칠 것이고, 그때를 위해 진제환이 준비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이 정도뿐이었다.
이것이 고생인가 하고 생각해 보면 사실 힘든 것은 조금도 없었다. 진제환이 원하는 것은 그저 그가 부담스러워할 만한 이런 위험을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되도록 매일같이 조심스럽게 그의 집 주변을 탐색하고, 새턴이나 메이지 소프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신경을 기울였다. 덕분에 그가 다친 채 집에 돌아왔던 날에는 병원에 데리고 갈 수도 있었다. 자기 자신도 무심하다 여겼던 성격에 그런 일면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자신도 몰랐던 감정들이 조금씩 깨어날수록, 진제환은 점점 더 그 남자를 원하게 되었다. 그에겐 의미가 큰 남자는 아직 진제환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여기서 더 자신이 하는 일을 알게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부담을 느껴 자신을 멀리하려 할 테니까.
갈수록 인내심이 줄어드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오늘 낮까지는.
“…….”
막 긴 생각을 멈추고 숨을 고르던 진제환의 눈이 갑자기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다. 멀리서 가로등 불빛에 비쳐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며 뛰어오는 한 남자의 얼굴은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이 휘날리도록 뛰어온 남자는 주변을 돌아볼 것도 없이 익숙하게 진제환이 바라보던 빌라의 계단을 뛰어올라 사라져 버렸다.
그 얼굴. 밝은 금발이 아니라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긴 했지만 여자 여럿 울렸을 것처럼 미끈하게 생긴 얼굴만은 너무나 익숙했다. 현실이 아니라 게임에서 보았던 인물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분명히 이름이…….
‘크라토스.’
진제환의 눈빛이 순간 불빛으로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가라앉았다. 걱정과 초조함은 어느새 사라졌다. 사냥감을 덮치기 직전의 검은 재규어처럼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본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를 지나다가 겁을 먹고 놀라 야옹야옹 울며 달아나 버렸다. 어른어른한 빛 사이에서 진제환의 그림자가 천천히 길게 늘어졌다.
한참 동안 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그 집만을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기를 얼마나 했을까. 밤이 점점 깊어져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도 차츰 가라앉았을 때 갑자기 빌라 현관의 안쪽에서 두런두런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먼저 뛰어나와 추위를 이기려는 듯 제자리 뛰기를 하는 남자는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나온 남자는 어딘가 병색이 짙은 인상이었으나 그런대로 밝아 보였다.
둘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천천히 걸어 도로로 향했다. 진제환은 그 뒷모습들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기이하게 들끓어 오르는 감정이 허하게 말라버린 가슴속을 이상한 광기로 채우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돌아온 것은 낯빛이 창백하고 병색이 짙던 남자뿐이었다. 한쪽 다리를 무겁게 질질 끄는 모습은 멀리서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약간 긴 듯한 검은 머리칼에 마르고 큰 키, 침착한 표정과 꾹 다물린 입술. 그 모든 것이 낮에 보았던 때의 모습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남자는 간혹 조금씩 걸음을 멈춰 지체하기도 하면서 꾸준히 걸어 빌라의 입구 근처까지 도달했다. 뜨거운 숨을 내뱉을 때마다 얼어붙은 공기 중으로 흰 입김이 뿌옇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막 계단을 오르려는 듯 발을 들었던 남자는, 그 순간 어깨를 굳히며 흠칫하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는 그 표정까지도 맥이 빠질 정도로 침착하고, 기묘한 색기가 있었다.
“……거기, 누구……?”
정확히 진제환이 서 있는 어두운 구석을 바라보며 이맛살을 살짝 찌푸린 그 얼굴을 본 순간, 진제환은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뛰쳐나간 그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크게 뜨인 눈동자를 바라보며 음울한 고통에 찬 기분으로 허리를 낚아챘다. 놀라울 정도의 분노와 질투가 가슴을 아플 정도로 두드려대 머리가 만취한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 이상은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아…….’
후회를 닮은 낮은 신음이 머릿속을 둔중하게 울렸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민후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춥고 고적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일단 더 이상은 오늘의 일에 대해 머리를 쓰지 말고 내일을 위해 덮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발을 끌고 있으려니 어느덧 집 앞에 다 다다라 있었다.
불이 꺼진 집의 창문을 바라보며 막 빌라로 들어가는 현관 계단에 발을 올리려던 순간, 문득 기묘하게 등골을 훑는 듯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왠지 이야기 속에서 귀신을 만났을 때 주로 묘사되는 감각이 아닌가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앞 빌라와 빌라 사이의 교차된 그림자가 너무 어두워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거기, 누구…….”
그럼에도 오싹오싹한 느낌만은 제대로 전해지는 그곳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떠 찡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 근처를 자주 돌아다니는 고양이나 들개도 아닌 것 같고, 귀신도 아니면 대체 뭔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어둠 속에 있던 무언가가 움직였다. 나는 순간 그 안에 있었던 것이 누구인지 본능에 가까운 예감으로 알아차렸다.
‘진……제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진제환이었다!
어째서 다시…… 여기에?
당혹스러운 느낌으로 짧은 몇 초의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놈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 내 쪽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뭐야? 하고 의문을 던지기도 전에 그대로 내 허리를 낚아채 위로 올라갔다. 순간적으로 거칠게 끌려가면서 꽉 잡힌 몸통에 통증이 달렸다.
“윽……! 잠깐, 만! 갑자기, 여긴…… 왜……!”
- 삑!
대답은 없었다. 문답무용으로 붙잡힌 오른손 엄지가 집 문의 지문인식기에 닿자마자 놈이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나를 집 안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쿵!
“윽!”
다리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져 등이 무척 아팠다. 잠시 고통에 머리가 비어 있는 동안 자석처럼 나를 따라 쓰러지듯 몸을 웅크린 진제환이 내 턱을 붙잡아 돌렸다. 그대로 입술이 거세게 부딪쳤다.
“으읍!”
이와 이 사이에서 딱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파고들어 온 차가운 혀가 내 혀를 휘감아 끄집어내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게.’
당혹스러움에 가득 차 자유로운 양팔을 들어 진제환을 밀어내려 했지만, 위에서 누르는 자와 아래에 깔린 자의 위치 차이는 그리 쉽게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손이 거슬린 듯 잡아버린 진제환은 그대로 다시 양 손목을 바닥에 짓누른 채 입술을 탐했다.
몸부림을 쳐 봐도 소용이 없었다. 숨을 쉬지 못해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지만 진제환의 입술이 계속해서 따라와 타액을 제 것처럼 빨아들였다. 근지러운 액체가 문질러지는 입술 사이에서 줄줄 흘러내려 귓가 밑 머리카락을 적셨다.
“으으윽!”
너무 숨이 막히니 나중에는 눈앞이 검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산소를 갈구하다 못해 입 안을 휘젓는 살덩이를 삼키듯 빨아들이자 잠깐 흠칫했던 혀가 살짝 입술 사이의 틈을 벌려 주었다.
“하… 하……앗!”
간신히 숨을 들이켜기가 무섭게 소리칠 틈도 없이 또다시 혀가 얽히고 한층 더 거세게 빨렸다. 혀가 전부 빨려 들어갈 것처럼 얽힌 순간, 갑자기 찌릿하는 감각이 허리를 두들겨 등이 휙 꺾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허리 밑으로 들어온 팔이 파카 안에 입고 있던 셔츠를 찢을 듯 파고들었다.
“흐으, 흐, 읏, 으, 으윽!”
벗어지다 만 두꺼운 파카가 양어깨에 걸려 움직임이 봉쇄된 상태에서, 맨 등허리를 뼈가 으스러져라 감싸는 팔 때문에 안 그래도 호흡 곤란이었던 것이 두 배로 더 힘들어졌다. 붙잡힌 손을 빼내느라 힘을 주어 봤자 깁스한 손가락만 아플 뿐이었다. 간신히 아물었다 싶었던 머리의 상처가 터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눈앞이 가물거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왼쪽 다리의 힘을 모아 옆구리를 갈겼다.
퍽!
아무리 몸을 단련해도 옆구리가 상대적으로 약한 것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다. 진제환이라고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었는지 무릎에 와 닿는 느낌이 제법 단단하기는 했지만 아픔은 제대로 느낀 듯 몸을 멈칫 굳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팔을 비틀어 빼내는 데 성공하자마자 사정 볼 것 없이 얼굴을 주먹으로 날려버렸다. 진제환의 얼굴이 맞은 쪽으로 홱 돌아갔다. 주먹에 닿은 타격의 느낌 때문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것이 먼저였다.
“하아… 하아…….”
바닥에서 상체만을 조금 일으킨 채로 2미터쯤 물러나고 나서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몇 시간 전에 뛰쳐나갔던 녀석이 난데없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나를 끌고 들어와서 냅다 입술부터 부딪치다니, 지금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갔다.
숨을 고르며 입술 옆으로 흥건하게 흘러내린 타액 줄기를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러 닦아낼 때 진제환이 맞은 그대로 멈춰 있던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주친 검은 무저갱 같은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 때문에 몸이 굳었다.
“너…… 대체…….”
말한 순간 목소리가 꽉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 입을 다물었다. 아니, 사실은 목이 잠겨 있지 않았어도 조금 깨어난 지금의 머리 상태로는 그 이상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제환의 얼굴을 마주친 순간 낮의 일이 생각나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 내가 저 녀석을 화난 채로 돌아가게 했었지.
‘그럼 이건 설마 복수하려고?’
말이 안 되는 것 같긴 했지만 저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차가운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그것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갑자기 가슴속의 답답함이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이 숨이 막혀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진제환이 정말로 낮에 화가 났던 것 때문에 온 거라면 이쪽에서는 할 말이 없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내가 무신경한 말로 상처를 준 건 분명하니…… 방금은 놀라서 내가 냅다 때려버리긴 했지만 사실은 내 쪽이 몇 대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남은 타액 자국까지 훑어내는데, 문득 차가운 시선이 내 손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얼굴을 문지르는 내 팔을 진제환이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왠지 시선이 닿은 팔이 싸늘해지는 기분 때문에 멈칫하고 내려버리자 시선은 거기까지도 망설임 없이 따라왔다.
“때린 건 미안하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을 때 놈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지우지 마.”
드디어 정적이 깨졌다는 안도도 잠시, 뜻밖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자 이글대는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 눈동자 안에서 끓고 있는 것은 너무 차가워서 오히려 살이 데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초저온의 불같았다.
살의와 닮은 흉흉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일렁이며 채우고 있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흔적까지 지우지 마.”
알아듣지 못해 굳어 있는 표정을 보며 진제환이 한 번 더 말했다.
“다른 놈을 집에 들이면서, 나만 밀어내려고 하지 마.”
“다른 놈……?”
그 기묘한 뉘앙스에 인상을 찌푸리려던 순간 머릿속에 우리 집에 다녀갔던 민후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설마?
“정민후… 아니. 크란을 봤어……?”
진제환은 한 번도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을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내 재빨리 호칭을 게임에서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설마 하며 물었던 내 생각이 맞았는지, 진제환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하……!
“뭐야. 크란은 너도 알고 있는 놈이잖…….”
“몰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보다 먼저 해야 할 ‘낮에는 미안했다’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잡지 못해 머뭇머뭇 대답했는데, 말허리를 자르며 서늘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반복해서 말했다.
“몰라. 그런데 네가 날 밀어내고 들여놓은 놈이라는 건 알겠어.”
순간 공기를 무겁게 채우고 있는 위험한 분위기를 잊을 정도로 욱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어차피 내게는 먼저 나가버릴 자유도 없는 거겠지. 내가 없어지면 넌 바로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놈들을 부를 테니까.”
어조 없는 딱딱한 목소리가 어둠이 가라앉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뭐라고?”
“지금도 그렇지.”
“너 대체…….”
뭐 하러 온 거냐고 물으려던 목소리는 장신의 몸으로 내 바로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는 놈을 본 순간 사그라졌다.
아차. 먼저 일어났어야 했는데……!
머릿속에서 다시 되살아난 경계심 때문에 막 몸을 완전히 일으키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야수처럼 번득이던 눈의 주인이 내 턱을 붙잡아 힘주어 봉쇄하면서 또다시 입을 맞추었다.
“으!”
왜 또 이거냔 말이다……!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제정신이 돌아온 상태라 이번엔 때려서 밀어낼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이 다시 한 번 혀가 거침없이 얽혔다.
이젠 남은 힘도 없어 반쯤은 분노로, 반쯤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온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아버린 채 버티기로 했다. 어차피 입술 따위에 그리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뭘 하든 난 아무 상관 없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마음이 먹먹하고 답답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가슴이 쓰려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자 감은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혀가 헤집어질 때마다 욱신대는 머리 상처의 고통이 강하게 느껴져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을 느꼈을까. 꽉 힘을 주어 잡고 있던 손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처음에는 거침없이 빨아들이던 입술에서 점차 천천히 힘이 빠지기 시작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가만히 입을 맞추기만 한 상태에서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었다.
내 팔을 붙잡은 손과 맞닿는 몸만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였지만 그 외에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한 모양새였다.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소름 끼치는 적막이 찾아왔다.
그때쯤 되어 이제 할 만큼 한 모양이지 싶어 막 눈을 뜨려는 순간, 갑자기 눈가에 뜨거운 물이 뚝 떨어져 움찔 놀랐다. 퍼뜩 두 눈을 뜨자 떨어진 물방울이 주르륵 내 뺨을 타고 흐르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개안된 시야에 크게 들어온 것은 아직까지도 입술을 맞대고 있던 진제환의 얼굴과 그리고…….
“…….”
뚝, 뚝 이어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물방울까지 얼굴에 떨어지는 동안에도 아무 변화 없이 나만 바라보고 있던 무표정한 눈동자에서 잘게 빛나는 고인 물이었다.
순간적으로 숨이 탁 막히는 기분으로 그 고인 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이 또다시 내 볼로 툭 떨어져 주룩 흘러내렸다.
어둠 속에서 물체를 식별할 수 있게 하는 빛이라고는 창가에서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불빛뿐이었는데도 거기에 비쳐 뭉뚱그려진 다른 실루엣과 달리 놈의 얼굴만은 이상할 정도로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었을까.
푸른빛이 도는 머리카락 사이의 그린 듯이 잘생긴 눈썹을 찡그리지도 않고 감정 같은 것은 일절 보이지 않은 채 내 입술에 자기 것을 겹쳐 놓고 있는 녀석이 눈에서는 물을 뚝뚝 흘리는 광경이 너무나 현실 같지 않게 느껴졌다.
‘울어……?’
간신히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는 이미 내 눈가고 볼이고 할 것 없이 물로 흥건하게 젖어버린 다음이었다. 누가 보았다면 마치 내가 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맞붙어 있던 입술을 몇 센티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간격만 뗀 채 입을 열었다.
“갑자기, 뭐야.”
잔뜩 잠긴 목소리가 간신히 속삭이듯이 흘러나갔다. 말하는 입김까지 느껴졌을 텐데도 상대의 대답은 없었다. 대신 검은 눈동자에서 일렁이던 것이 다시 한 번 뚝 떨어져 얼굴을 두드렸을 뿐이었다. 정말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오늘 낮에 네가 처음으로 소리쳤던 것처럼, 이것도 다 나 때문이냐……?
“……미안.”
마찬가지로 낮게 쉰 목소리가 갑자기 귀를 두드렸다. 입술이 말을 하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내 입술까지 근지러운 감촉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미안. 싫어하는 것은 아는데.”
“…….”
“멈출 수가 없었어.”
그 어조는 내가 알고 있던 진제환, 그립게까지 여겨지는 유완과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피하려던 눈을 다시 맞추고 똑바로 진제환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담긴 물이 마치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해처럼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진제환도 어쩌면 내 눈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떨어질 듯 말 듯한 그 심해의 건너편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널 보면 말하려던 게 있었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보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낮의 일은 미안했어. 그건 내가 잘못한 거란 걸 뒤늦게 알았다. 네게 말하지 않았던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머리가 꽉 차서 차분히 설명해 줄 만한 여유가 없어서 몰랐어. 멋대로 무신경하게 굴었던 거, 그거 말고도 다 미안하다.”
뜻밖의 말에 놀랐는지 진제환이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봤는데, 지금까지 너한테 들었던 말들 중에 날 친구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나 그 비슷한 건 있었는데 그게 정확히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제대로 말해 준 적은 너도 한 번도 없더라. 그래서 갑자기 확신할 수가 없게 되었어. 전에 했던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고 했던 나는 대체 너의 뭐에 대해 생각해 줘야 하나.”
“나, 는…….”
눈을 크게 뜬 진제환이 느리게 말을 잇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몇 번 더 말을 하려다 마는 듯하더니 내 얼굴 옆 어깨로 고개를 푹 숙여 묻었다.
안 그래도 무거웠던 것이 조금 더 무거워졌지만, 드디어 하고 싶었던 사과와 민후의 말을 들은 뒤부터 생각했던 것에 대한 말을 하고 나자 마음속은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보이지 않는 얼굴 대신 어둠 속 천장을 바라보며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정민후, 아까 네가 봤던 크란 그놈이 나보고 그랬는데, 네가 낮에 소리치고 그랬던 건 네가 나를 많이 좋아하기 때문일 거라더라.”
양팔을 누르고 있던 진제환의 손에 힘이 다시 꽉 들어갔다.
“난 잘 모르겠는데, 좋아한다는 건 가족이나 친구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기는 거고, 그런 사람이 생기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과도해 보일 정도의 행동도 한다더라고. 감기 한 번만 걸려도 난리를 친다든가 할 정도로 말이야.”
“…….”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가르쳐 준 게 뭔지 알겠어?”
목과 어깨 사이에 닿는 숨결이 진제환이 호흡할 때마다 뜨겁다가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민후의 마지막 충고를 떠올렸다.
“확실히 알고 난 다음엔 모른 척은 하지 말라더군.”
내 몸을 깔아뭉개다시피 하고 있는 장신의 육체가 뻣뻣이 굳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럴 생각이야.”
말이 끝나고 나서도 진제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고개를 들어 마주친 눈에서 이제 물은 말라 있었다.
결의를 한 듯한 무표정한 얼굴이 콧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거리에서 지그시 입술을 열었다.
“감기 따위로 수선 떠는 것 같은 감정은 몰라.”
“응.”
그건 나도 모르니까.
“나는 지금 여기서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어. 네가 싫어할 걸 알아도 그래. 다른 것에서도 아마 마찬가지겠지.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뭐냐, 그건? 마음을 말해 보라고는 했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떨떠름하게 쳐다보는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놈이 얼굴을 살짝 숙인다 싶더니 내 이마에 키스했다.
“그런데 태어난 이후 내가 내 의지대로 육체를 다룰 수 없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다음에는 자신의 눈물로 아직까지 물이 흥건한 눈가 밑쪽에 키스했다.
“특히 내 눈에서 떨어진 물은 처음 봤지. 아까는 무척 괴로웠다.”
마지막은 소리도 없이 입술에 닿았다.
“내 감정은… 그래. 네 말을 다 들을 자신도 없고…… 너에 관한 건 자제가 잘 되지 않아. 미안. 그렇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널 사랑하고 싶다.”
말이 끝난 뒤 약간 끝이 떨리는 한숨이 입술에 닿은 후 진제환이 천천히 내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풀고 몸을 일으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감은 눈을 뜨지 않고 말없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치는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끝없는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것들을 대충 다 정리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참 뒤 눈을 뜨자 옆에 앉아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진제환이 보였다. 거리가 떨어져서인지 이제 자세한 얼굴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다.
너무 오래 꽉 잡혀 있었기 때문에 아직 욱신거리는 손을 들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아까, 갑자기 습격해 강제로 깔고 앉아 입술 문댄 건 왜 한 거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어둠 속에서 진제환이 입을 벌리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내가 좋아한다는 건 입술뿐만 아니라 너를 전부 만지고 싶은 감정이니까…….”
“은근히 대답 회피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라.”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났다.”
“왜.”
“나는…… 가고 나서도 계속 네 생각을 했는데, 다시 왔을 때 너는 다른 놈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어.”
“다른 놈 누구? 민후? 아니. 크란인가?”
“…….”
이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느껴지는 분위기가 다시 심상치 않게 변했다. 어쩐지 아이 같은 말투로 툭툭 끊어 말하는 목소리가 나는 이제 약간 귀엽게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하필 민후한테야? 민후하고 내가 뭐 그런 사이로 보였어?”
“…그게 아니야.”
진제환의 표정은 기묘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그때 너한테는 정말로 내가 없어도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낮의 답답함이 도로 재발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아직 좀 더 물을 것이 남아 있었기에 일단 꾹 눌러 참았다.
“그럼 아까 운 이유는 또 뭐야.”
진제환은 또다시 대답을 주저했다. 나는 끈질기게 바라보며 기다렸다.
“…내가,”
“응.”
“이기적이라서.”
“…….”
이건 대체 무슨 뜻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겠군.
그럼 이제 대충 결론은 나온 건가.
나는 부러진 손가락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진제환이 딱딱하게 굳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제대로 생각하기로 결심했으니 그 결심대로 행동할 때였다. 과연 녀석은 내 결론을 듣고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솔직히…… 들어도 아직 네가 날 사랑한다든가 하는 건 잘 모르겠어.”
진제환은 의외로 침착하게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이건가?
“그럴 거라… 생각했…….”
음, 역시.
“그런데 말이야. 나는 네가 싫지는 않은 것 같다.”
이어진 말에 진제환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다른 놈들이 똑같이 입술을 문대거나 했다고 상황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아마 이렇게까지 유하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 같거든. 상상하면 짜증이 나니 단순히 처음이라 이런 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아무래도 이건 그냥 넘길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인데.”
점점 늘어나는 예상치도 못한 말들에 말하다 만 그대로 입을 벌린 채 스톱해 있는 진제환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담담하게 마지막 말을 꺼냈다.
“아까 뭐라고 했었더라? 몸을 전부 만지고 싶다고 했었지. 괜찮으면 그렇게 해 봐도 좋아. 내가 어디까지 널 용인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어.”
한동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둠 속 희미한 빛에 의지해 바라본 얼굴은 무어라 말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끈기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한쪽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이마까지 천천히 문지르던 진제환이 잠시 뒤에야 간신히 당혹스러움을 억누른 듯 가려지지 않은 나머지 한쪽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아왔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고 있어?”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을 나 역시 머뭇대지 않고 똑같이 바라봐 주었다.
“알아.”
“내 감정은 모르겠지만 몸은 괜찮다고?”
이 자식 보게. 그렇게 처음과 끝만 붙여서 말해 놓고 보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것 같잖냐.
“중간이 빠졌잖아. 나도 쉽게 생각해서 말한 건 아니니 네가 거절한다면 더는 물을 생각 없어.”
“무슨 생각을 해서 이런 결론이 나온 건지 모르겠는데.”
“말했잖아.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준 건…… 음. 일단 고마웠다. 그런데 나는 그런 감정이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르겠어. 민후의 설명도 들었고 네 말도 들어 봤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어. 민후가 설명한 좋아한다는 감정과 네가 말했던 좋아한다는 감정이 너무 달라서 뭘 어떻게 느끼는 게 정말 좋아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중간에 한 박자 쉬면서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축였다.
“생각해 봤는데,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향이 다른 것처럼 각자 좋아한다고 느끼는 감정도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러면 내가 아직 느끼지는 못했지만 내게도 내 나름대로의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내 기준에서 사람을 좋아하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니 최근 그 정도를 비교해 볼 만한 사건이 있었더군.”
진제환은 그 사건이 뭔지 궁금해하는 듯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예시로 떠올렸던 사건은 몇 년 전에 비해 최근 자주 겪었던 타인과의 스킨십에 대한 나의 반응 정도였다.
눈앞에 있는 진제환은 미스트에서 내게 입을 맞춘 적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저번에 내가 갑자기 토했을 때 키스했던 전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들을 떠올려 보면 정말 이상할 정도로 크게 기분 나빴던 느낌이 없어 다음에 진제환을 만났을 때도 평소와 차이 없이 대할 수 있었다. 비록 오늘 갑작스럽게 집에 가려는 사람을 끌고 들어와 깔아뭉개 입술을 문지르기는 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리 화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럼 이게 과연 나의 타인 접촉에 대한 평균적인 반응인가 싶어 비슷한 상황을 두고 다른 사람들로 바꿔 상상해 보았는데, 그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 며칠 전 나를 병원으로 실려 가게 만들었던 정승조와의 첫 조우 사건이었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내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정승조가 나를 붙잡아 넘어뜨리고 올라탔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뭐였던가?
‘웃기지만 손가락에 찔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최초로 깔아뭉개졌을 때 느꼈던 건 격렬한 분노와 빠져나가야 한다는 다급함뿐이었다. 목을 졸리기까지 했으니 더 그랬던 것 같은데…… 이건 지금 생각해도 좀 열 받는다. 다음에 또 싸울 일이 있으면 그땐 내가 먼저 선공하는 한이 있어도 이번처럼 꼴사납게 마냥 당하지는 말아야지.
‘잠깐. 왜 이 생각으로 넘어간 거지? 여하튼…….’
정승조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만약 그때 정승조가 내게 진제환처럼 입을 맞췄다고 상상해 보면 형제와 근친상간을 한 것처럼 토할 듯한 기분밖에 안 들 것 같았다. 그래서 민후로 교체해 보려고 했지만 민후는 아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 전혀 모르는 다른 어떤 남자면 어떨까 싶었는데 모르는 놈은 심지어 때릴 때 거리낄 필요도 없으니 남은 건 일격필살뿐. 하여 상대를 너무 남자에만 국한시켰던 것은 아닐까 싶어 여자가 내게 키스하는 상상을 해 봤지만 잔뜩 긴장한 시합 전날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그만뒀다.
그때쯤 되었을 때 나는 진지하게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설마 진제환만 괜찮은 건가?’
어쩌면 이게 바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좋아함에 따른 기준 변화였던 것일까? 스킨십에 대한 용인만 가지고 확신해도 되는 건가?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내가 아직 느끼지 못한 것일 뿐, 생각보다 좋아하고 있던 사람을 거절한 후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또 싫은데.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나는 진제환에게 질문들을 던졌고, 대답을 들으면서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기보다는 확실하게 한 번 느껴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굳혔다.
그래. 뭐든지 백문이 불여일견. 전부터 검도를 수련하거나 공부를 할 때 쓸데없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오히려 죽도 밥도 안 됐었지만 하나를 선택한 뒤 밀고 나가면 나중에 내 결정이 틀렸다고 판단이 나더라도 후회는 훨씬 적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한 번 결정을 내린 일에는 더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가 승낙하고 나자 거칠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다. 이후의 선택은 네가 해.”
마음속 고민은 길었지만 말로 하고 나니 짧았던 것을 마치고 나자 진제환은 더더욱 말수가 줄어들었다. 한참 동안 또다시 얼굴만 문지르던 놈이 드디어 손을 내렸을 때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어느 정도 결심의 기색이 서 있었다.
“나는…… 네가 내 마음을 무시하고 무책임하게 생각한 결과로 이 말을 했다면 내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내 몸 귀한 줄은 안다.”
다소 농담조로 한 퉁명스러운 대답에 진제환이 설핏 입술을 올린 것처럼 보였다.
“……응. 어차피 이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게도 이 이상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겠지. 그렇다면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동안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되도록 노력하겠어.”
내 입장에서는 좀 낯부끄러운 자신감이군.
“좋아. 결정 났군. 지금 할 거냐?”
바닥에 헝클어진 머리로 파카조차 벗지 않고 앉아서 할 만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바닥의 벽에 기대고 앉아 있던 진제환이 내 꼴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는데.”
“응. 사실 조금이 아니고 많이 피곤해. 덕분에 살았다. 그럼 이제 불 켜고 씻어도 되겠지?”
홀가분하게 땅을 짚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일어선 다음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거실에 불이 훅 들어오자 순간적으로 눈이 부셔 몇 번 눈을 깜박여야만 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도 한참 깊어 있는 시간대였다. 나는 파카를 벗어 소파 쪽으로 던진 다음 셔츠 위쪽 단추를 풀어 답답했던 목덜미를 편하게 하고 진제환을 다시 돌아보았다.
키는 장대처럼 커다란 놈이 왠지 맥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꼴을 보니 아까 나를 무섭게 끌고 들어왔던 녀석이 상상 가지 않아 조금 웃겼다.
“너도 집에 가긴 글렀지? 자고 가라.”
진제환이 퍼뜩 놀라 등을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떼었다.
“아니. 난…….”
“새벽 세 시에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으니까 그냥 자. 씻는 건 내가 먼저 할 테니까 원하면 그다음에 해도 괜찮고.”
약간 힘을 주어 내뱉자 말이 없던 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에 물을 틀고 받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자 그제야 길었던 오늘 하루가 끝난 거라는 자각이 들어 급속도로 피곤해졌다.
“후우…….”
생각해 보면 정말로 긴 하루였다. 먼저 병원에서 퇴원을 했고, 그 후에 진제환을 만나 바이크를 타고 집까지 왔다가 복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승조를 만났다. 그러다 정승조를 쫓아가려는 진제환과 싸우고 나서 놈이 상처받고 가버린 탓에 민후와 만났고, 이후 민후 녀석을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다가 별안간 또다시 진제환에게 붙잡혀 집까지 끌려들어 와 이렇고 저런 사건 끝에 여기까지.
돌이켜 보니 정말 파란만장했다.
헛웃음만 나오는 것을 삼키며 물이 다 받아지는 것을 기다려 소매를 걷고 깁스하지 않은 한쪽 손으로 세수를 했다. 대충 수건에 문질러 닦고 젖은 앞머리를 흔들며 나가자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던 진제환이 의외의 장소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서 뭐 해?”
“……이거.”
놈이 서 있는 곳은 침대가 있는 방문 근처 벽 모서리에 기대어 놓았던 목검 앞이었다.
“목검인데.”
“그건 아는데…… 네 것인지 궁금해서.”
그러면 우리 집에 있는 목검이 내 것이지 설마 남의 것이겠는가? 나는 의아해하다가 진제환을 비롯해 미스트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들에게는 내가 검도를 했었다는 말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었다는 게 떠올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 그거 내 거야.”
“지금도 쓰는 것 같은데……?”
약간 주저하며 묻는 의도는 지금도 쓰는 흔적이 남아 있는 목검을 설마 다리가 불편한 내가 쓰느냐는 것이겠지.
물론 지금도 휘둘러 보기는 하지만 다리를 못 쓰는 내가 목검을 갖고 있는 건 역시 이상해 보였던 것 같다. 이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려면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설명을 어느 정도로 자세히 해야 할지 모르겠군.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제대로는 당연히 못 하지만 전에 즐기던 거라 지금도 팔로만 가끔 휘둘러 보는 정도야.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아…….”
다행히도 진제환은 대답을 듣고 납득한 듯 그 이상의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해소되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네가 미스트에서 검을 잘 썼던 거였군. 처음에는 조금 걱정되었었는데.”
현실에서의 경험이 미스트에서도 도움이 된 거야 사실이지만, 처음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아!’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기억이 있었다. 미스트에서 처음으로 슈페리어의 검술 스킬이 담긴 스크롤을 해제해 막 다시 수련하던 시절, 그때까지 남아 있던 검 잡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희석시키기 위해 유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도움이라고 해 봐야 둘 다 검을 뽑아 들고 대치 상태에서 바라보는 것뿐이었지만 아직 마음가짐이 덜 잡혀 있던 그때에는 큰 도움이 되었었다. 당시 힘들어하던 내 모습을 보고 유완이 검 공포증이냐고 물었던 기억도 났다.
“음…… 뭐. 그런데 넌 안 씻을 거냐?”
그런 걸 아직 기억하고 있었나 싶어 머쓱해진 탓에 화제를 돌려버린 뒤 진제환을 떠밀어 욕실로 보냈다.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진제환이 나올 때를 대비해 적당한 옷을 한 벌 더 골라 욕실 문 앞에 가져다 두니 정말로 할 일을 다 끝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졸음이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저쪽 방에도 침대가 있긴 하지만 성인 남자 두 명이 붙어서 잘 만한 곳은 아니니 거기는 진제환에게 내주고 내가 소파에서 잔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앉아 있었던 것도 잠시, 꾸벅꾸벅 졸다 나도 모르게 소파에 얼굴을 박은 채 의식이 깜박 끊겨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내가 내놓았던 옷으로 갈아입고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진제환과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미안. 잠깐 졸았다.”
“아니…….”
바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자 진제환이 약간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난 여기서 잘 테니까 네가 저쪽 방 침대에서 자라. 손님을 소파에서 재울 순 없으니까.”
“무슨 소리야. 넌 아직 아프잖아.”
“상관없어. 어차피 둘 다 푹신한 덴데 뭐.”
“둘 다 푹신하면 내가 여기 있을 테니 들어가.”
윽. 내가 했던 말을 역공으로 받아치다니, 제법인데.
“집주인이 되어서 혼자 침대에서 잔다고 마음이 편하겠어?”
하여 집주인의 자격까지 내세워 봤으나 진제환은 도리어 눈을 빛냈을 뿐이었다.
“손님도 그래.”
“…….”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자 진제환이 침대 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긴 둘은 안 되나?”
“미안하지만 1인용이다.”
“괜찮을 것 같은데.”
괜찮다니. 내 집이고 내 침대인데 네 것처럼 말해도 되는 거냐?
하지만 그쯤 되자 이제는 말씨름할 기운마저 사라져 나는 직접 저 침대에 두 사람이 못 눕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쪽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불을 끄고 걸어가서 눕자 잠시 뒤 뒤쪽 침대가 움푹 파이며 한 사람이 더 올라오는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덕분에 윽 하는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으나 예상보다는 적은 압박감으로 무사히 두 명 다 침대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이건 또 예상치 못했던 내 침대의 신비군.
어서 자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한 상태에서 말없이 눈을 감고 몇 분이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갑자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해.”
“……뭐가.”
“너.”
그 말 때문에 잠이 좀 달아났다. 이놈이, 한 방 날리지도 않고 잘 봐줘서 잠까지 재워주니 이제 와서 뭐라고?
“내가 뭐?”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곧 다시 너로 돌아와. 그 전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
“…원래 그랬는데 새삼. 그리고 나라고 꼭 항상 그런 건 아냐.”
“알아.”
그래. 항상 그런 건 아니다. 나는 이상한 부분에서 뒤끝이 없어 어떤 웬만한 사건이 생겨도 해결만 되면 곧 묻어버리는 편이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잊어버리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점을 강조하고 싶어 말해 주자 진제환이 짧게 수긍했다.
“……여기에 올 때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 그건 나도 그렇다. 이렇게 별안간 중요한 결정을 하나 하게 될 줄 어제의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놈과 육체 스킨십 제안이라니.
새삼스레 현실 같지가 않아 웃었지만 피곤 때문인지 온몸의 힘이 빠져 바람 새는 것 같은 소리만 조금 났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넌 여기 뭐 하러 다시 온 거야?”
여기에 올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떠오른 것을 묻자 진제환이 나직한 목소리를 등 뒤에서 냈다.
“그건… 회사에서…….”
“회사?”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려던 놈이 내가 반문한 순간 퍼뜩 몸을 굳혔다. 침대를 통해 느껴지는 그 진동을 보아하니 잊었던 것이 갑자기 떠오른 것 같은 모습이라 나는 힘겹게 뻣뻣한 고개를 등 뒤로 돌려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얼굴을 보았다.
“이야기를 왜 하다 마냐.”
의아함에 되물었음에도 진제환의 반응이 없어 나는 더 묻지 못하고 도로 누운 채 계속 쏟아질 듯 말 듯한 잠을 이기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뭔가 떠오른 모양이니 말할 생각이면 말하겠지.
그리고 예상대로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때, 진제환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너…….”
“왜.”
“요즘 주변에서 수상한 사람이나 기척을 느꼈던 적은… 없었지?”
무척 뜬금없는 말이었다. 나는 희미하게 내리깔고 있던 눈을 도로 뜨며 반문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답지 않게 신중한 목소리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반문하자 진제환이 또다시 잠시간의 침묵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약간 몸을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요즘… 이곳 근처에 연쇄살인범이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
그런 사건이 있었나? 나는 왜 못 들어본 것 같지? 아무리 뉴스를 안 보더라도 그런 흉흉한 사건이 있었다면 물건을 사러 나가거나 할 때 동네 분위기로 눈치를 챘을 텐데.
의아했지만 아무래도 장난으로 꺼낸 것 같지는 않은 태도라 왜 말을 하다 중간에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본 적…… 없어?”
느릿하게 귓가에 달라붙는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있을 리가. 보면 신고나 해야지. 살인범이 그렇게 궁금하면 내일부터 잠복이라도 해 보든가. 그럼 난 잔다.”
그런 시답잖은 질문을 진지하게 하는 것이 어이가 없어 대충 내뱉고 벽 쪽으로 더 움직이자 말이 없던 놈이 등 뒤에서 휴 하는 한숨 소리를 냈다.
남과 같이 자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라 원래대로라면 긴장해야 마땅했겠지만 피곤 때문에 저도 모르게 졸기까지 했던 상태에서는 그런 섬세함은 발휘하고 싶어도 발휘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가물대는 정신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을 때, 조심스럽게 뻗어온 팔이 내 허리 위로 얹혔다. 답답한 느낌이 들어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벌릴 기운조차 없었고 반응이 없는 것을 알자 이제는 슬슬 감겨 복부를 감싸기까지 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한 채 잠들고 말았다.
“……하긴 위치도 이제 알았는데 진작 찾았을 리는… 그래도…….”
잠결에 희미하게 누군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무언가 짓누르는 답답한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뜨자 꿈이 아닌 현실에서 나를 깔아뭉개고 있는 팔다리가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니 눈을 감은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진제환…….’
꽤 자주 봤던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새삼스럽게 놈이 잘생기긴 했다는 것이 오랜만에 실감이 났다. 남의 몸을 덩굴처럼 칭칭 감싸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행태는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가까워져 있는 얼굴을 먼저 양심의 가책 없이 손바닥으로 밀어낸 뒤 잠결에 말려 올라간 티 안의 배를 감아 끌어안고 있는 팔을 잡아 힘겹게 옆으로 던졌다. 내 다리 한쪽을 깔아뭉갠 발도 차버리고 나서 침대 밖으로 내려서자 온몸이 다 근육통으로 저릿저릿했다.
“으윽…….”
잠시 괴로워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자고 있을 놈에게 이불이라도 다시 덮어줄까 싶어 뒤돌아섰는데, 놀랍게도 내가 던져둔 자세 그대로 눈만 소리 없이 번쩍 뜨고 있는 놈과 마주쳐 순간적으로 기겁했다.
“일어났냐.”
아 이런, 목소리가 제대로 잠겼군.
“……응.”
더 자려면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진제환은 대답하자마자 바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밝아진 빛에 비추자 확연하게 푸른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좀 헝클어져 있었다.
우스꽝스러워 보일 법한 끼는 옷을 입고 있음에도 약간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어딜 보나 훌륭한 표범 내지 재규어 같은 짐승이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희미하게 웃음이 났다.
그때 내 눈과 마주친 진제환의 표정이 약간 이상하게 변한다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성큼 다가온 손에 뒷목이 부드럽게 붙잡혀 입술이 눌린 뒤였다.
“…….”
그러니까 너는 내가 준비할 틈도 없이 너무 갑자기 움직이는 게 문제인 거라고.
한참 동안 얽히던 혀가 떨어진 뒤 무언가 바라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진제환을 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제 말을 하는 걸 잊었는데, 이후에 한 번만 더 멋대로 강제적 행동을 가하면 어제 했던 제안은 없던 걸로 한다.”
진제환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했지만 말없이 인상을 구기며 노려보자 내 시선을 피해 돌아섰다.
이 자식은 가만 보면 은근히 제멋대로인데, 또 사람 말을 잘 듣는 척해서 방심시키는 기술도 탁월한 것 같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두 번 있어선 안 될 테니 미리 확실히 말해 두는 게 좋겠지.
“확실하게 대답해.”
“……응.”
나는 대답을 듣고서야 돌아서서 부엌 쪽으로 향했다. 요리 레시피를 입력해 둔 컴퓨터에서 메뉴를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대충 간편한 아무 메뉴나 선택하고 한숨 돌리는 사이 방 안에서 원래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난 진제환이 뒤에서 스윽 팔을 둘러왔다.
“밥은 먹고 갈 거지? 이미 시켰으니까 배가 안 고파도 먹어라.”
“그런데 이건 괜찮나 보지.”
“음?”
특별히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반 농담식으로 말을 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뭐가 괜찮냐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돌아보자 어쩐지 좀 가라앉은 표정의 진제환이 있었다.
“뭐 말이야?”
“이거.”
말함과 동시에 힘을 주어 존재감을 느끼게 한 것은 방금 내 어깨 쪽으로 크게 둘러 목까지 감싼 팔이었다.
이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나는 의아하게 그 팔을 쳐다보다 진제환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녀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렇구나. 이것도 내가 제안했던 스킨십의 일종이었어. 깨닫기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깨닫고 나자 갑자기 목에 감겨 있는 팔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러네. 느끼지도 못했을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진제환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작게 숨을 쉬면서 두르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나는 그제야 그 굳은 줄 알았던 표정이 실은 긴장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런 건 친구들끼리도 많이 하는데 뭘 긴장까지 해?”
“멋대로 강제적 행동을 하면…….”
제안은 없는 걸로 한다고 했잖아. 끝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뒷말이 선명하게 들려오는 착각이 들었다. 여전히 표정 변화는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나는 이 표정만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자식, 지금 뾰로통해져 있는 거구나. 스물두 살이나 먹어서는…….
“네가 애냐? 밥 될 때까지 씻고 나올 테니 뭐 구경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딱히 볼 건 없겠지만…… 컴퓨터는 음성인식으로 켜지니까 참고하고.”
웃기긴 했지만 장단 맞춰 주고 싶지는 않아 냉정하게 대답하는 척하자 진제환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다른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저건 쪽팔려서 그런 게 확실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왔을 때, 진제환은 거실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어디에 있나 찾아보니 내 미스트 접속캡슐이 놓여 있는 방 안에 있었다. 뭐 하냐고 말을 걸려 했지만 내 캡슐 앞에 앉아 이것저것 살펴보는 모습이 의외로 진지해 보여 잠시 문간에 서서 지켜보았다.
보통은 캡슐의 겉면만 살펴보고 말 텐데 내부의 뚜껑을 열어서까지 보고 있는 건 역시 내 것이 특수 캡슐이라서인가? 누가 보면 도둑이 금고라도 뒤지는 줄 알겠다 싶을 정도로 열중해 있는 모습을 보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안쪽의 쿠션 사이사이에 뚫려 있는 전선 나오는 구멍을 더듬어 보다가 갑자기 안에 누워 볼 듯이 몸의 방향을 이리저리 틀어보기도 하는 진제환의 모습은 얼핏 보기엔 웃겼지만, 그것들을 매만지는 손길과 외부에서 전력을 끌어오는 단자에 꽂힌 팔뚝만큼 굵은 전선에 쓰인 코드명을 읽어 보려는 듯 살짝 찌푸린 채 집중하는 눈빛은 모두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캡슐 외의 다른 미스트 접속캡슐을 직접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평범한 접속캡슐을 쓰고 있을 진제환의 입장에서 저렇게 열심히 살펴보는 것을 보면 저게 다른 캡슐들과 비교해서 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 부엌 쪽으로 무심코 눈을 돌렸던 나는 컴퓨터가 준비하고 있던 밥이 다 되었다는 신호 메시지를 보고 문간에 기대어 있던 등을 떼면서 바로 섰다.
“그쯤 하고, 밥 다 되었다니까 나와.”
예상치도 못한 등 뒤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순간 등을 뻣뻣하게 굳혔던 진제환이 근육을 천천히 이완시키며 뒤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나왔으면 말을 해 줘.”
자식, 놀라기는. 나는 목 위에 걸쳤던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피식 웃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열심히 캡슐을 살펴보기에. 어쨌든 빨리 나와라.”
진제환은 그제야 평소의 얼굴로 되돌아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이 차려져 있는 식탁 앞에 앉기 직전, 진제환이 따라 앉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저걸 살펴본 건…….”
아무래도 집주인 몰래 너무 자세히 물건을 만진 것에 대해 사과 같은 걸 하려는 듯한 모습이라 나는 재빨리 손을 내밀어 말을 막았다.
“아니, 뭐. 내가 아무거나 보라고 했었잖아. 뭘 신경 쓰고 그래. 내 건 특수 캡슐이니 일반용과 달라서 궁금했겠지. 이해한다. 나도 일반용 캡슐은 본 적이 없어서 좀 궁금했거든. 많이 달라?”
눈을 몇 번 깜박이던 진제환이 웃을 듯 말 듯 숨을 푹 내쉬고는 대답해 주었다.
“겉모습은…… 꽤.”
겉모습이라…… 그러고 보면 전에 일반용은 겉면에 광고가 많이 붙어 있어 알록달록하단 말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거 말고는?”
“나도 잘 아는 건 아니라서……. 하지만 보통 캡슐보다 내부의 연결 전선 구멍은 확실히 더 많아 보였어.”
내부의 연결 전선은 접속을 위해 들어가 누웠을 때 저절로 빠져나와 몸에 달라붙는 전선들이다. 새턴의 말에 의하면 그것들이 게임 속에서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했는데, 특수 캡슐이라면 게임 속에서 보통 사람처럼 활동하게 하기 위해 그런 전선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기에 말을 했던 진제환의 눈에 스쳐 지나갔던 어두운 빛은 파악하지 못했다.
이후 말없이 몇 번 밥술을 뜨던 진제환이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캡슐은 가격이 어느 정도였어?”
“가격?”
예전에 윤석호가 말해 주었던 가격을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처음에는 게임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거절했던 내게 억지로 캡슐을 보냈던 윤석호가 내 항의 연락에 했던 대답 중에 그와 관련된 말이 있었다. 아마 정확한 액수가…….
“일반 캡슐의… 다섯 배 정도라고 했었나.”
“……그렇게밖에?”
어쩐지 무척 놀란 것처럼 보이는 진제환의 표정을 보며 나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그렇게밖에라니. 어쩌다 보니 받은 것만 아니었다면 난 아마 저걸 안 썼을 거야.”
“받았다고?”
아. 이 말을 해도 되나? 멀쩡히 돈 주고 산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는 정말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윤석호에게 캡슐을 받게 된 것이라 가격만 따지면 공짜로 게임을 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유저들이 안다면 항의를 백번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일이라 신경이 쓰여서 검도장 알바비를 모으고 있는 통장의 액수가 600만 이상이 넘게 되면 윤석호 측으로 보내려고 했었는데 자꾸 일이 생겨 아직 보내지 못했다. 이번에 생각지도 못한 병원비가 나가긴 했지만 어떻게 액수는 될 테니 꼭 보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한숨을 작게 쉬었다.
“응. 어쩌다 보니…… 새턴 한국 지부장 윤석호에게 받았는데, 당시에 반품하려고 하니 맞춤 제작이다 뭐다 해서 반품하면 버려야 한다고 거절하더라고.”
순간 진제환의 표정이 확 굳는 것을 보며 나는 조금 우울해졌다.
“처음에는 게임을 할 생각이 없어서 강매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조만간 캡슐 비용이 모이면 낼 생각이야.”
“그러니까 그건 윤석호에게 받은 거군. 그가 왜?”
그러나 내 말허리를 자르며 빠르게 내뱉는 진제환의 약간 상기된 표정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공짜로 캡슐을 얻은 것 때문에 실망했던 게 아닌가?
“주니까 받긴 했는데, 그때 말했던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놀리려고 그랬던 것 같아서 진심은 나도 몰라.”
“놀리려고?”
“저 캡슐을 받게 된 일을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긴데…… 너도 미스트 내의 메인 퀘스트를 하고 있으니 윤석호를 한 번은 봤을 것 아냐. 네 동영상도 이미 나왔고. 그럼 윤석호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겠지?”
그 능구렁이 같은 성격.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 즐거워하는 환한 미소. 처음 본 순간부터 짜증을 불러일으키던 그 표정을 생각하며 나는 저절로 쥐어지는 주먹을 느꼈다. 다시 돌이켜 생각만 해 봐도 짜증이 난다.
다행히도 진제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수긍했다.
“……응.”
“그러면 그 남자가 얼마나 멋대로인지도 알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거기에 걸려들어서 받게 된 것뿐이야.”
단 한 번이라도 윤석호를 직접 본 적이 있다면 이 말에 수긍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진제환 또한 내 말을 듣고 나서 단번에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후 밥을 먹으면서 어떤 생각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재수 없게 다시 떠오른 윤석호의 얼굴을 지우기 위해 밥만 밀어 넣고 있었는데, 한참이 지났을 때 기계적으로 밥을 씹던 진제환이 갑자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런 것을 과연 처음 본 사람에게 갑자기 줄까.”
“어? 뭐라고?”
“음?”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혹 내게 한 말인가 싶어 반문했는데 진제환은 오히려 자신이 소리 내어 말을 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얼굴을 살펴보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잘못 말한 거면 됐어.”
“응…… 잘 먹었다. 잠시 컴퓨터를 좀 써도 될까.”
“마음대로 해.”
일어선 진제환이 거실 소파 쪽으로 다가가 컴퓨터를 부팅시키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재빨리 남은 밥을 모두 긁어모아 삼켰다. 밥은 이렇게 잘 먹고 있는데 왜 요즘 자꾸 온몸의 살이 빠지는 걸까. 입원해 있을 때는 간호사들도 진지하게 영양실조를 의심할 지경이었다고 귀띔해 주었을 정도였으니…….
고개를 저으며 식기를 모아 식기세척기에 넣고 거실로 가자, 보통의 평범한 그림으로 된 바탕화면이 아니라 검은 화면 가득 흰 글자들만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 큰 화면을 앞에 띄워놓고 빠르게 홀로그램 키보드를 조작하고 있는 진제환이 있었다.
- 피피핏. 피피피핏. 피핏……!
“그건 뭐야?”
흘긋 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시 빠른 스피드로 올라가고 있는 글자의 화면으로 돌아간 진제환이 짧게 대답했다.
“보안 점검.”
“보안?”
“잠시만…….”
내게 대답하기 전에 몇 가지 문장을 빠르게 친 진제환이 다시 또 화면 가득 글자들이 올라가며 움직이는 사이를 틈타 나를 바라보았다.
“이 집은 컴퓨터의 자동 시스템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 문을 여는 지문인식기까지 이 컴퓨터 한 대로 처리하고 있는데 만약 이 컴퓨터 시스템이 타인에 의해 뚫리게 된다면 문제가 많을 거야.”
“뭐… 그렇긴 한데…….”
“잠시면 돼.”
말을 끝낸 뒤 진제환은 곧바로 다시 홀로그램 화면 쪽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사실 집 안 전체의 시스템을 관장하는 컴퓨터는 보통 사람이 저렇게 쉽게 말하며 다룰 만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용 컴퓨터라면 잘 다루는 녀석들이 널렸지만 진제환의 말처럼 지문인식기 역할부터 시작해 방범 기능, 실내 편의기능, 그리고 내 몸 때문에 특별히 설치한 자가진단 시스템과 그 결과를 병원까지 자동으로 바로 보내주는 홈닥터 네트워크까지.
집에서 살면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활을 담당하는 이런 컴퓨터 시스템을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알고 있었다. 애초에 집을 지을 때부터 벽을 뜯어 그 안 전체에 시공하는 대형 컴퓨터는 평범한 컴퓨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 전문가라도 일부 시스템 쪽만 담당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들었다.
그런 것을 컴퓨터보다는 운동계에 훨씬 더 가까워 보이는 이 녀석에게 맡겨도 되는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타이밍 좋게 진제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진제환이 보고 있는 앞쪽의 화면을 보자 역시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 숫자와 영어의 향연만 가득할 뿐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도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글자들이 화면 안에서 춤을 추었다. 결국 몇 분간 더 지켜본 뒤 나는 포기하고 소파 팔걸이를 뒤집으면 나오는 공간 안에 넣어둔 책이나 꺼내 읽기로 했다.
미스트를 시작한 후에는 많이 읽지 못했지만 이전의 내 무료한 생활을 달래준 것은 이런 읽을거리들뿐이었다. 이 책도 상당히 오래전에 읽다가 넣어둔 것이라 그런지 내가 어디까지 읽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고생했다.
간신히 이전에 읽었던 것이 기억나는 내용을 찾아 이후부터 읽기 시작한 뒤 나는 빠르게 책의 내용에 빨려 들어가 진제환이 부를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헌.”
“어, 응.”
흠칫하고 서둘러 책장을 덮으며 고개를 들자 검은 눈동자로 빤히 내가 덮은 책을 보고 있는 진제환의 너머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림으로 된 바탕화면이 떠 있었다.
“끝난 거냐?”
“응. 방호 시스템을 조금 손봤어. 크게 달라진 건 못 느낄 거야.”
시스템을 손봤다고? 아까는 무슨 보안 점검만 한다더니……?
“보안 점검은?”
“그것도 했어.”
“그러면 방호 시스템은 뭔데? 이런 컴퓨터는 일반인이 못 다루는 거라고 들었는데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설마 뭐 망가진 건 아니겠지?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나 싶어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진제환이 그런 나를 묘하게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못 믿는군.”
“아니, 그런 건…….”
그런 건 아니라고 대답하기엔 사실 내 컴퓨터가 매우 걱정되었던지라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진제환은 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더니 삐딱하게 꺾은 얼굴에 미묘한 웃음을 띠었다.
“믿어 봐. 그렇게 달라진 건 없지만, 나 컴퓨터 잘 다뤄.”
내리깐 눈동자에 비친 자신감은 진짜였지만, 그래서 더 안 어울려 보였다. 진제환과 컴퓨터라니…… 저 녀석은 얼음 같은 표정으로 바이크를 타는 건 더없이 잘 어울렸지만 지적인 작업을 하는 모습과 결부시켜 보면 그만큼 언밸런스한 것이 없었다.
사실 안 어울린다기보다는 단순히 처음 보는 모습이라 생소한 기분이 드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
“정말이야.”
내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는지, 진제환이 한 번 더 힘주어 못 박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못내 미심쩍었지만 본인이 컴퓨터를 잘 다룬다고 주장하니 그냥 넘기기로 했다. 혹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저 녀석에게 청구하면 되겠지.
진제환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을 수긍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 개운해진 얼굴로 씻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배웅할 필요는 없다며 현관에 선 놈을 보니 어젯밤 여기서 있었던 일들이 모두 정말 있었던 일들이었는지 현실감이 생기지 않았다. 어제 내가 누워 있던 자리를 밟고 서 있으니 더욱 그랬다.
“그래, 그럼 잘 가라.”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려던 진제환이 아, 하고 뒤돌아섰다.
“이따가…… 다시 올게.”
“왜?”
“왜냐니.”
내 질문이 오히려 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진제환이 검은 눈을 감았다 떴다.
“네가 먼저 말했잖아.”
“그…… 제안 때문에?”
좀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물은 말에 진제환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수긍했다.
“만나지 않으면 시험할 수 없잖아.”
“그렇긴 하다만…….”
뒷말을 애매하게 흐리자 뭐가 마음에 안 든 것인지 입매를 차갑게 굳힌 진제환이 별안간 손을 뻗어 내 뺨에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느낌에 흠칫 몸을 굳히고 시선을 드니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일렁이는 시선이 곧장 나를 꿰뚫을 듯이 쏘아져왔다.
“다른 할 일이 있어도, 오늘부터는 나만 생각해.”
그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동시에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네가 기회를 줬잖아. 나는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러니 너도 그만큼의 각오를 해. 내가 너를 볼 때는, 적어도 너도 나를 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래. 내가 먼저 시작했던 것인데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가 뭐 있었나.
나는 마음을 새로이 다잡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어지러웠던 마음속을 고요히 가라앉히자 머릿속이 명확해졌다. 나는 조용히 눈을 뜨며 깔끔하게 사과했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네 마음을 우습게 보려던 건 아냐. 네가 노력하는 만큼 나도 노력할 테니 걱정하지 마. ……걱정되면 가기 전에 파이팅이나 한번 해 볼까?”
“…넌…….”
내 말을 듣고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던 진제환은 이내 피식 웃고 마주친 눈동자에 작게 기쁜 빛을 띠었다. 부엌 창문을 통과해 들어온 햇빛에 비친 머리카락이 밝은 푸른빛으로 반짝거리는 것이 보기 좋았다.
“좋아.”
파이팅 방식은 그 언젠가, 놈과 처음으로 마음이 통했던 그 순간처럼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진제환이 반대쪽 손을 내밀어 팔씨름을 하듯이 단단히 맞잡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탁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각오가 앞으로 웬만한 마음으로는 다가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도전은 항상 좋아하는 분야였지만 이번은 그 대상이 사람이니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가 없군. 나는 말없이 웃으며 손을 놓았다.
“이따가 오는 건 좋지만, 내가 언제까지 게임을 하고 있을지는 몰라. 언제쯤 올 건지 확실히 말하고 가.”
미스트를 하는 중에는 집 밖에 누가 와 있어도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집에 손님이 온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다를 테니까. 내 말을 듣고 진제환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면 여섯 시에.”
“여섯 시…… 알았다.”
그리고 진제환은 왔을 때와는 달리 조용히 집을 떠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집 안은 원래 그런 것이 당연할 텐데도 이상하게 적응이 안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느 때보다도 넓어 보이는 방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은 뒤 미스트에 접속하기 위해 캡슐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윤석호는 사무실 안에 앉아 뜻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들고 있는 서류의 마지막 장을 읽고 있었다. 이윽고 좌우로 움직이던 눈동자가 마지막 마침표에서 멈추자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던 손가락도 따라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무건도 움찔 어깨를 굳혔다.
“저…… 나갔다 이따 다시 들어와서 보고하면 안 됩니까?”
사실 남무건은 가벼운 보고를 하러 왔다가 보고는 하지도 못한 채 서류를 읽고 있던 윤석호의 ‘다 읽고 나서 보고하라’는 명령에 붙잡힌 터라 매우 이 방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상태였다. 어차피 남무건이 할 말이라고 해 봐야 세 줄짜리도 안 될 보고이기에 언제 하든 큰 상관은 없는 것이었는데 괜히 이 시간에 들어와서 생고문을 겪는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왜 나가? 이제 다 읽었으니 해 봐.”
그러나 매정한 윤석호는 여전히 평소답지 않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이제야 보고를 하라 말할 뿐이었다. 그 기세에 눌려 평소처럼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은 남무건은 버벅거리며 앞으로 다가와 섰다.
“별, 별건 없었습니다. 제 팀원들이야 항상 하는 일만 하고 있고…… 저번에 살펴보라고 하셨던 GM부서 내의 스파이에 대해 서서히 캐물으며 관찰하고 있으니 조만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이게 끝입니다.”
“아직까지도 발견을 못 했다니, 정말로 23일이 되어봐야 꼬리가 밟힐 모양이군. 그래, 좋아. 나가보게.”
윤석호는 짧은 대답만 한 후 도로 시선을 서류 쪽으로 내려버렸다. 남무건은 원하는 대로 얼른 압박감에서 벗어나 최대한 빨리 문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윤석호의 평소 같지 않은 태도가 영 신경이 쓰였다.
문을 몇 발자국 남겨두지 않고 슬쩍 뒤를 돌아보자 아직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석호가 보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돌이켜 보건대 저 표정은 분명 얽히면 좋은 일이 없을 얼굴이었다.
하다못해 손가락에 끼고 있던 사랑스러운 소영 씨와의 커플링조차도 ‘그래요. 어서 여기서 벗어나요! 얽혀서 좋을 것 하나 없어요, 알잖아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남무건은 곧 문을 향해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망설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평소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콸콸 흘러내리던 인간이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일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온갖 잡일을 다 처리해 온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의 알 권리는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결국 문고리를 잡을 듯 말 듯한 상태에서 계속 갈등하던 무건은 커플링이 지르는 우려의 비명을 무시한 채 휙 뒤돌아섰다.
“저…… 말입니다.”
“뭐야. 아직도 있었어?”
저, 저, 저 밉살스러운 말투!
어렵게 목소리를 내자마자 찡그린 표정으로 반문하는 것을 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뒤돌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미 뽑은 칼, 무라도 썰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건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마음속으로 하느님 부처님 소영 씨를 번갈아 불렀다.
“표정이 그렇게 안 좋은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제, 제가 그래도 나름대로 지부장님의 동문 아닙니까. 하하, 하하하.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어디 아프시기라도…….”
평소답지 않게 억지로 웃으며 걱정의 말을 건네려니 혀가 다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건의 말을 들은 윤석호는 오히려 자신이 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자네 어디 아파?”
“…….”
이 인간을 내가 다시는 걱정해 주나 봐라!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해 속으로 울부짖는 남무건의 얼굴을 지켜보던 윤석호가 별안간 푸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거 사람 참. 두 번 놀렸다간 죽이겠네. 농담이야.”
“뭐, 뭐라고요?”
그 익숙하게 살살 짓는 매력적인 눈웃음을 본 순간 남무건은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끼며 억울한 비명을 질렀다. 윤석호는 넥타이를 살짝 비틀어 헐겁게 만들면서 계속 웃고 있었다.
“그거참. 좀 심각해져 있었다고 답지 않게 걱정도 다 해 주고, 사실 자네도 안 그런 척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나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는 겁니까?!”
“미안, 미안. 자네는 내 취향이 아냐.”
“제겐 소영 씨가 있어요!”
관자놀이에 손을 얹고 뒤로 넘어가기 직전인 부하를 이후에도 몇 번 더 놀려먹은 윤석호는 완전히 기운이 빠져 대꾸할 의지도 잃은 남무건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었어. 이제 곧 본사에서 우리 지부로 감사 시찰을 할 사람을 보낸다고 일방적 공문이 내려왔더군.”
“예?”
“이사진들은 어지간히 내가 싫은 모양이야.”
한숨을 푹 쉬는 미남자의 얼굴은 이제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아까의 심각함 따위는 이미 먼 곳으로 날려버린 윤석호를 보며 남무건은 갑작스럽게 듣고 만 회사의 기밀에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 그게 그렇게 쉽게 말할 만한 문제입니까?”
“그럼 뭐 어떡해? 이미 결정 났고, 이쪽엔 거절할 권리가 없다는데.”
무건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지금껏 윤석호의 곁에 붙어 주워들었던 것들이 있어 현재 새턴 한국 지부의 상황이 본사와 대치되어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내려보낼 감사시찰원이라니. 꼬투리를 잡으려고 보내는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까의 윤석호처럼 심각하게 변한 남무건의 얼굴을 보며 윤석호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봐, 남 부장. 그런 건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 누가 내려오든 그 사람을 상대하는 건 나지, 자네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 주는 건지, 마는 건지 사람 속을 벅벅 긁는 말이 기껏 걱정했던 마음을 비웃듯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던 남무건은 결국 폭발하여 뛰쳐나오고 말았다.
“됐습니다, 됐어요! 걱정한 제가 바봅니다! 감사시찰단 내려오면 윤 지부장님이 제일 먼저 잘리라고 빌 겁니다. 악덕상사 퇴출 결사추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갈 듯이 흔들리던 문이 진정하고 나서 한참이 지났을 때, 윤석호가 지그시 팔을 괴며 책상 위로 머리를 숙여 누웠다. 각 잡힌 정장 차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늘어진 자세였으나 이상하게도 윤석호에게는 별로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로 늘어뜨린 팔 사이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비비며 앞에 놓여 있던 서류를 의미 없이 뒤적거리던 윤석호는 마침내 웃고 있는 눈 위로 씁쓸한 표정을 드러냈다.
“아, 병원비 대고 밥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데 말이 씨가 되어 진짜 잘리면 어쩌려고…… 그러면 남 부장이 소영 씨와 결혼을 하든 말든 그 집에 평생 얹혀살아 버릴 테다. 자기가 원인을 제공한 셈이니 책임은 져 주겠지.”
이미 뛰쳐나간 남무건은 그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등골의 오싹함을 느끼며 벌벌 떨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렇게 책상 위에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 윤석호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철두철미하게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능구렁이 같은 윤 지부장뿐이었다.
나는 은발을 흐트러뜨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는 시저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저의 앞을 스쳐 지나가며 떠들어 댔지만 그중 누구도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시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군중 속에서 서 있는 그 모습을 보니 가슴속이 먹먹하게 답답해져 왔다. 3년 전 그날 이후 정승조를 이렇게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많이 마르고 날카로워진 턱 선과 어두운 눈빛은 현실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때는 항상 격렬하게 말하고 움직이는 것만 보았기 때문인지 그리 많이 변한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었는데,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시저는 건드리면 그대로 풍화되어 날아갈 것처럼 무겁고 어두워 보였다.
‘정승조…….’
그날 그때, 내가 싫었다고 말하기에 날 떠나 외국으로 간 다음에는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게 밉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어두운 안색으로 세상 모두와 유리된 것처럼 서 있기를 바란 적은 없었는데.
정승조는 옛날에도 혼자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는 녀석이었고 그것이 외로워 보이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나는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정승조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어금니를 지그시 악물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시저가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누군가를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닌 듯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시선 끝에 걸린 것은 골목 입구에 멍하니 서 있던 나였다.
“…….”
시선이 마주친 순간 숨을 죽이고 후드 너머로 보이는 시저의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뒤로 피할 준비를 했지만 시저는 한참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1분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 서로를 관찰하듯 얽혔던 시선은 긴장이 고조되려던 찰나 스윽 눈을 돌려버린 시저의 움직임에 의해 깨져버렸다.
‘피했……어?’
정말로 피한 게 맞는 건가? 저 녀석, 내가 누군지 알고 쳐다본 게 아니었나?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버린 시저를 쳐다보았지만 놈은 아까의 그 표정 그대로 돌아간 채 이쪽으로는 다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었는데…….
어쩌면 이것은 뜻밖의 행운일지도 몰랐다. 시저가 평소처럼 마주치자마자 달려들었다면 나 혼자서는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못 본 듯이 넘겼으니, 지금 당장 뒤돌아 도망가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러면 끝일 뿐인데…….
한참 동안 혼란과 고민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지만 나는 결국 뒤돌아서기보다는 앞으로 걸어 나가는 쪽을 택했다. 제각기 떠들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고 강 너머에 서 있는 듯한 시저에게로 한 발 한 발 가까워질 때마다 기이할 정도로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시저는 내가 완전히 앞으로 접근할 때까지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시저.”
마침내 시저의 바로 앞까지 당도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이름을 불러 보았다. 다른 방향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시저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눈을 피할 곳도 없이 코앞에서 마주친 눈동자는 무기질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귀찮으니 봐줄 때 꺼져.”
말 그대로 전부 다 포기한 듯한 목소리였다. 일부러 먼저 공격해 가며 달려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기가 막혔지만 그보다는 의아함이 더 컸다.
“너는 내가 이 도시로 올 걸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왜 이번엔 공격하지 않는 거지?”
일부러 목소리를 더 낮게 내도록 주의하며 묻자 시저의 표정에 일순 짜증이 어렸다.
“날아다니는 파리를 꼭 잡아야 하나? 내 일 때문에 여기 있는 것뿐이니 자의식 과잉은 관두고 수틀려서 죽이고 싶어지기 전에 꺼져.”
이 자식이? 나를 파리에 비유하는 말을 듣자 심각함도 잊고 분기가 치솟을 뻔했지만 간신히 눌러 참았다. 여기까지 대화해 본 결과 시저는 지금 나를 공격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반응은 거칠지만 그야말로 처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복잡미묘했다.
내가 대답하지도 않고 시저의 말대로 꺼지지도 않자 놈은 아예 내게서 신경을 끄기로 작정한 듯 도로 고개를 돌려 먼 곳만 바라보았다. 검은빛이 도는 눈가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 이런 상태의 사람을 건드리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시저의 이유 모를 이 모습을 보고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시저의 앞에 계속 선 채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회색에 가까운 은빛 머리칼은 여전히 좀 생소했지만 그 아래의 날카롭고 어두운 눈이나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등은 내가 얼마 전에 만났던 정승조 그대로였다. 현실에서 정승조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하며 어쩌다 보니 싸워서 서로 피를 보았던 그날. 그때의 상처의 흔적을 게임 속의 우리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나는 퇴원하던 날 승조가 내게 지팡이를 돌려주러 와서 경고만 남기고 사라졌을 때 맡았던 피 냄새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했다.
지금 시저가 내게 행하고 있는 무시는 과거 승조가 나 외의 타인들에게 행하던 무시와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증오를 통째로 대면하고 목을 깨물렸던 그날의 태도보다는 차라리 생판 남을 대하는 이 태도가 낫지 않은가 생각하니 기분이 좀 울적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드디어 내 끈질긴 눈빛을 참기 어려워진 듯 아까보다 조금 더 흉흉해진 표정으로 돌아본 시저가 별안간 내 멱살을 잡아채 끌어당겼다.
“윽!”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넘어질 뻔했지만 그 와중에 사수한 후드는 다행히 벗겨지지 않았다.
“내가 우스워? 꺼지라고 했을 텐데.”
보통 남자들의 선이 굵은 손보다 마르고 긴 손가락이 상상도 못할 정도의 힘으로 멱살을 잡아 비틀자 기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날 한번 죽여 볼까 하고 여기 있는 거라면 그렇게 말해. 지금 기분이라면 그래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쿨럭. 콜록. 잠, 깐만.”
이 자식 정말. 전에도 좀 그랬던 것 같긴 했지만 참 극단적이고 남의 말은 듣지도 않는군.
나는 놓아주지 않는 시저의 손등을 붙잡고 머릿속으로 약한 라이트닝 볼트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입 속으로 주문을 말했다.
“라이트닝 볼트.”
파직! 파파팟!
내 의지대로 약간 따끔할 정도로만 새어 나온 자그마한 파란 전류가 시저의 손에 닿자 녀석이 움찔하고 손을 놓았다. 간신히 풀려난 나는 잔뜩 구겨진 옷을 제대로 펴면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성격 참 급하시군. 너는 멋대로 우리 일행을 쫓아와 공격해도 되는데 왜 나는 안 되는데?”
후드 밑으로 이죽대는 것이 확실히 보이도록 입술을 크게 움직여 말하자 시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물론 너를 여기서 죽일 수 있다면 좋은 기회겠지. 그런데 나는 포기한 놈이 선심 쓰듯 주는 기회 따윈 안 받는다. 죽고 싶으면 딴 데 가서 알아봐.”
그 말에 완전히 분노 상태로 들어서는가 싶을 정도로 일순 위험하게 일렁거렸던 시저의 눈이 정전된 전등처럼 탁 꺼졌다. 어이없는 기색으로 내 아래위를 훑어본 녀석이 기가 찬 듯 하. 하고 웃었다.
“제법이군. 고작 내 장난감일 뿐인 녀석들 중 하나가.”
장난감……. 지금까지 우리의 말 같은 것은 하나도 들으려 하지 않고 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우리를 공격해 댔던 시저의 변덕스러움이 한순간에 이해되는 말이었다. 내 표정도 동시에 잔뜩 굳었지만 후드 밑으로 드러난 것은 코와 입 일부뿐이라 시저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단 말이지……. 어쩐지 예전에 키온 형네가 저 자식을 처음 만나서 퀘스트와 상관없이 좋게 대화로 풀어나가자고 했을 때도 멋대로 공격했다더니 순전히 제 마음대로였을 뿐이었군.’
일곱 명의 영웅 퀘스트 수행자를 혼자서 대항하는 마신의 기사의 포지션에 서 있으면서도 시저가 그렇게 멋대로 우리들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놈이 가진 힘이 센 탓이기도 했겠지만 저런 태도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되는대로 휘두르는 녀석을 어떻게 예측해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그 ‘되는대로’ 때문에 내가 녀석과 이야기하는 기회를 얻긴 했지만 지금까지 싸워왔던 적의 생각이 고작 이런 것이었다니 자존심이 다 상할 지경이었다. 힘만 더럽게 센 아이와 싸우면 이런 기분이 들까.
나는 이 말은 나 혼자만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발설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장난감이라니 누가 말이냐. 네 태도를 보니 아직 장난감 가지고 놀 나이가 되기엔 매우 이른 것 같은데.”
일부러 계속 시저의 신경을 건드리도록 말하고 있기는 했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사람을 대놓고 장난감 취급하는 네놈은 그것을 가지고 놀기엔 아무래도 한참 어린 듯싶구나.
돌려 말한 말뜻을 이해했는지 시저가 비죽 웃었다.
“용감하군. 무슨 목적으로 계속 나를 도발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장단 맞출 생각 없어. 이게 마지막이다. 꺼져.”
그러나 마지막 경고로 내뱉은 그 말을 듣고 나는 예전 정승조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지금 일일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거의 매번 승조가 먼저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다가가 건드리면 녀석은 항상 가시를 잔뜩 세운 밤송이처럼 저렇게 삐죽삐죽하게 굴기 일쑤였다.
친구라서인지 대놓고 꺼지라든가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건드리는 것을 참다못해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나가.’ 따위의 분노에 찬 말이 터져 나오면 그때가 바로 감정을 풀어줄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다가온 것이라는 것을 나는 오랜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그에 생각이 미치자마자, 바로 그때 매번 했던 말이 무의식중에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쉽게 마지막이라고 하는 놈이 시작은 참 잘하는군.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텐데 말이야. 네가 퀘스트를 포기해서 안 볼 거라면 상관없지만.”
「그렇게 쉽게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놈이 시작은 참 잘한다! 너 어차피 내일도 나랑 봐야 되거든? 안 볼 거냐? 그럼 나도 상관없고.」
이 말을 하면 승조는 항상 멈칫 굳었다가 한참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서 몇 번 열 듯 말 듯했던 입술을 마침내 열어 가까이 다가오고는 했다.
“…….”
그래. 바로 지금…처……럼……?
‘아차!’
무의식중에 흘러나간 습관적인 말을 뒤늦게 깨닫고 놀라 굳어버렸다. 이럴 수가. 마지막으로 그 말을 했던 것도 어느덧 몇 년 전의 일이 되어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습관이란 것이 이리도 무서운 것이었던가. 분명히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것에 이리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
새파랗게 굳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던 시저가 이어서 말하려던 것을 잇지 못하고 몇 번 입을 다물기를 반복했다. 놀란 빛과 긴장한 기색,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시저의 이상하게 일그러진 표정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다. 후드에 가려져 있긴 해도 나 또한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지만.
“방금…… 뭐라고?”
폭풍전야의 고요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미 엎질러진 물,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했다.
“네놈이 먼저 우리 측을 쫓아와 싸우더니 이제는 멋대로 꺼지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적이라지만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냐. 네놈이 말한다고 내가 그대로 움직여 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그거 말고. 방금 뭐라고 한 거냐고.”
최대한 신경을 분산시키려고 한 말에 돌아온 것은 정말로 진심이 된 차가운 시선이었다.
이쯤 되니 나도 진심으로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말이지? 어차피 같은 퀘스트 수행 중이라 나중에도 볼 거라고…….”
“그 전에.”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복잡한 마음이 오갔다. 혹시 너도 아직 그 말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수많은 생각이 휘몰아쳤지만 그 끝에 나온 것은 평소의 나답지 않게 죽 끌어올린 입술에서 나온 한마디였다.
‘그래. 들려주마.’
솔직히 말하자면 듣고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
“그렇게 쉽게 마지막이라고 말할 테면, 시작은 왜 했냐고 말한 것 말이냐?”
시저가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나는 그 표정 없는 얼굴에서 나와 같은 어떤 고통스러운 기색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의 이름은…….
“……그럴 리 없지.”
시저가 천천히 내뱉었다.
“역시 그럴 리 없었어. ……하.”
기가 찬 듯한 소리를 낸 놈이 천천히 그 자리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린 놈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나 또한 로브 안에 감춘 주먹이 떨리고 있기는 마찬가지라 말을 걸 수 없었다.
내가 과거의 습관이나 마찬가지였던 그 말을 꺼낸 순간 느꼈던 감정. 시저에게서도 보았다고 생각한 그 감정의 이름은 바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눈앞의 시저가 정승조라는 사실은 나만 알고 있다. 외국으로 사라진 뒤 내 상상 속의 녀석은 항상 거기서 잘 지내는 모습뿐이라 더 밉게 여겨졌었는데, 눈앞의 남자는 전혀 그렇게 잘 지냈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만지면 깨질 것처럼 섬세하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눈 밑은 어둡고 얼굴은 거칠었다.
일부러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눈에 똑똑히 들어와 박힌 것은 이런 것들뿐이었다.
정승조의 집에 찾아갔을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어둡고 청소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집, 그 안에 굴러다니던 병들. 엎치락뒤치락 얽혀 싸우다 바닥을 더듬던 내 손에 걸려들어 왔던 그 병을 치켜들었던 순간 희미한 빛에 비추어져 반짝였던 라벨의 글씨가 기억났다.
라벨의 겉면에 쓰여 있었던 것은 도수 높은 알코올의 이름이었다.
“…….”
어떻게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끈끈하게 흘러내리는 감정들이 목구멍 속을 먹먹하게 막았다. 그리고 그 고통을 가라앉히고 먹먹함을 토해내려 숨을 내쉰 순간, 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충동적인 말을 꺼내고 말았다.
“너도 참, 희한한 놈이다.”
“…….”
“친구가 없으니 이렇게 싱겁게 혼자 노는 거 아냐.”
그 말에 시저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시저였다면 녀석 또한 분노한 빛을 보인다든가 비웃기라도 해서 빠져나갔을 텐데 지금의 녀석은 그저 무언가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억지 기색의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목구멍을 따끔거리게 하며 흘러내리는 끈적한 감정들을 모아 삼키고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어 내밀었다. 시저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어렵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입만은 머리와 상관없는 기관처럼 알아서 천천히 움직였다.
“이런 것도 기회인 것 같은데. 나랑, 놀아 볼 테냐.”
한참 동안 내 손만 내려다보던 시저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폐가 터지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뜨겁게 맥박 치는 머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놈이 내 손을 잡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하면서도 안도하는 심장은 어쩔 수 없었다.
“싫으면 말아라. 대신, 뒤늦게 공격하지는 말자고.”
내민 손끝을 천천히 오므려 거두려 했을 때, 갑자기 뻗어 나온 손이 내 손을 잡아챘다.
고개를 들자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저가 보였다. 녀석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결국 우리 사이에 오간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 뒤, 나는 뜨겁게 날뛰던 숨을 길게 내쉬고 조용히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내 팔을 잡은 시저가 무겁게 이끌려서 터벅터벅 걷는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그 무게. 사람 하나를 매달고 있는 만큼의 감각이 잡은 팔 끝에서 올라와 온몸을 무겁게 했다. 나도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이젠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한참을 아무런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기묘한 침묵이 시저와 나 사이를 맴돌았다.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긴장감이 손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먼저 손을 뿌리칠 의지가 들지 않았다. 시저 또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어디를 향해 걷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뒤만 따라올 뿐이었다.
두 남자가 서로 손을 붙잡고 붙잡힌 채 터덜터덜 번화가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모습은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제법 사로잡은 것 같았다. 그러나 평소 같았다면 분명히 느꼈었을 시선에 대한 꺼림칙함과 불쾌함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내 마음은 현재 이상하게 붕 떠 있었다. 정확히는 몸은 걷고 있으되 의식은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시저에게는 ‘놀자’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었지만 사실은 갈 곳도, 어딘가에 가야겠다는 목적의식도 없었다.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르면서도 시저는 계속해서 조용히 따라오기만 했다. 그것이 갑자기 불안해져 흘끔 뒤를 돌아보자,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자신이 붙잡고 있는 내 팔을 바라보고 있는 시저가 보였다.
그것은 여태까지 보여 주었던 살기 어린 눈도 아니었고 자포자기한 듯했던 아까 전의 날 선 검 같은 눈도 아니었다. 단지 표정도 없이 내 팔을 바라보고 있는 것뿐인데도 여태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그 팔 쪽이 저릿저릿해져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한 것이 시저에게도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태연한 모습을 고수하려 노력하며 걸어갔다. 시저가 내 뒤통수를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쓰고 있는 후드를 뚫고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녀석이 뭐라 입을 열까 봐 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시저는 몇 분간만 내 뒤통수를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거두어 주었다. 또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우리는 어디까지 이렇게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팔을 잡은 걸까. 내가 시저의 눈 속에서 보았던 그 감정, 그리움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을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생각들만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녔을 때였다. 문득 고개를 들자 어떤 커플이 웬 노점 앞에서 뭘 던지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열대에서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 선 남자가 무언가를 던질 때마다 옆에 선 여자가 환호성을 지르다 실망하기를 반복할 뿐이었지만 내게는 그 장면이 무척 인상 깊게 다가왔다.
“힘내요! 이제 마지막이니까 한 번만이라도 좀 맞혀 보라구요!”
“아, 알았어. 나만 믿으라니까. 으얍! 날아가라!”
남자가 마지막으로 손에 든 것을 날려 보냈지만 공중에서 갑자기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한 그것이 또 결국 바닥에 나뒹구는 것으로 끝나자 여자가 울상을 지었다.
“정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죠. 그냥 내가 한다니까 꼭 자기가 해 보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아, 아냐. 내가 아니라 저 다트가 이상한 거야!”
“웃기지 마요. 하나도 못 맞히면 아이스크림 사기로 했으니까 가요!”
“잠깐만! 하, 한 번만 더!”
남자의 필사적인 반항에도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고 엄청난 힘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러자 주변에서 그 장면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몇 명의 사람들 중 하나가 또 자신 있게 노점 주인에게 가서 속닥거렸고, 그는 열 번의 기회 중 세 번을 진열대 위의 아이템을 맞히는 데 성공했다. 그가 좋아하면서 아이템을 안고 사라지자 주변에서 참가하겠다는 사람들이 점점 줄을 서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저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다가 노점 상인의 옆에 세워져 있는 작은 이벤트 안내문 팻말을 보았다.
[ 특별 이벤트 합니다! - 행운의 다트게임 - ]
[ 사랑하는 이를 위한 선물을 마련하고 싶으시다구요? 좋은 아이템을 갖고 싶은데 돈이 없으십니까? 답답한 마음을 시원한 다트 날리기로 자유롭게 풀어내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여기 그런 분들을 위해 마련한 흔하지 않은 초초초 특급 이벤트! 이 옆에 세워놓은 진열 상품들을 다트로 맞히신 분께 그 상품을 드립니다. 이벤트 비용은 7골드. 하지만 상품은 최고 70골드까지! 기회는 열 번뿐! 참가하실 분들은 주인 ‘요니’를 찾아주세요. ]
“……해 볼까.”
이벤트 안내문을 다 읽은 뒤 문득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놀랐다. 이벤트 참가비가 비싼 편이기는 했지만 아까 따간 사람도 있고 하니 가볍게 한 번 해 볼만은 한 것 같았다.
시저는 내 팔을 잡고 따라온 뒤 처음으로 자의로 고개를 들어 그 안내문을 바라보았다. 나는 시저도 저것을 하려고 할까 고민했지만 그냥 나라도 먼저 시도를 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줄을 서서 다트 던지기를 하는 사람들을 뒤에서 구경하다, 문득 이상한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서 있는 노점 상인이 참가자들이 다트를 던지려고 자세를 잡을 때마다 눈을 똑바로 뜬 채 다트를 바라보며 입 안으로 뭔가를 짧게 중얼거리거나, 바지 주머니 안에 넣은 손을 꿈지럭거렸다. 그러고 나면 이상하게도 약속이나 한 듯이 날아간 다트가 땅으로 떨어지거나, 옆으로 날려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가끔가다 상인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면 다트는 제대로 잘 날아가 상품에 꽂히곤 했다. 내 앞에서 연속으로 다섯 사람 정도가 다트를 던지는 것을 보는 사이 나는 노점 상인과 다트 던지기의 성공률 사이에 뭔가 미심쩍은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마법사로서의 내 경험들이 저것은 분명한 스킬 사용 모션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마법이거나, 마법이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하게 쓰는 스킬일 것이다. 기껏 즐겨 보려고 했던 이벤트가 사기성 농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기분이 확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참가자들은 결국 비싼 참가비만 사기당하고 만 것이 아닌가. 나는 곧장 뒤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가려다 뒤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피해자 유저들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자꾸 떨어지는 거지? 내가 찍은 힘 스텟이 얼마인데…. 이거 사기 아니에요?”
“사기요? 허허, 이분들 아무래도 미스트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신 모양이네. 저 발라 모냐크 5대 길드 안에 드는 지존피코 길드 간부거든요? 지금 님들이 하신 말은 저에 대한 명예훼손이 아니라 지존피코 길드 전체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이에요. 증거는 있어서 말씀하신 거죠?”
정색하고 강경하게 밀고 나가는 노점 주인의 말을 듣자 피해자 유저들의 표정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험상궂은 표정을 한 같은 길드 사람들이 상인의 뒤에서 몰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요니야, 뭐가 문제냐?”
“아, 지천 형. 저분들이 나보고 사기라네. 하하. 이런 이벤트 장사는 나한테 남는 것도 하나도 없고, 그냥 신뢰로 먹고살면서 감사 이벤트나 한번 해 보겠다고 시작한 건데 못해 먹겠다, 정말.”
“뭐? 허-참. 진짜 요즘 진상 새끼들 가지가지 하네.”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을 살짝 뺐다가 도로 집어넣었다가 하며 위협하듯 움직이는 길드원의 칼날에 얼핏 파랗게 맺힌 오러가 보였다. 적어도 검사로서 중급 이상은 되었음을 은연중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고 더 얼굴색이 파리해진 피해자 유저 중 한 명이 결국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저기요, 솔직히 이상하지 않냐구요. 어떻게 던지는 족족 다 실패하는 다트가 있을 수 있죠? 제가 아까 봤는데 제 앞에도 거의 다 실패했어요. 아무리 다트마다 무게가 다르다지만 이건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이거 한마디 했을 뿐인데 길드원까지 동원하는 건 어디의 매너입니까? 진짜 찔려서 그러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해 보자 이거냐?”
그 말에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길드원들이 흥분해 무기를 들고 나섰다.
“진짜 같으니까 성내는 것 봐요! 됐습니다. 님들이 뭐라든 우린 갈 거니까요. 게임을 종료한다!”
“게임을 종료한다!”
“저 새끼들이! 거기 안 서?”
길드원들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피해자 유저들은 이미 게임 종료를 해 초록색 잔상만 남기고 사라진 뒤였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저들끼리 날뛰고 나서야 진정하고 장사를 계속해야 한다는 노점 주인의 설득에 따라 도로 가버렸다. 그들이 가고 나서야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뿔뿔이 흩어졌는데 나는 그중 어떤 이가 지나가면서 혀를 차는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
“쯧쯧쯧. 지존피코 길드가 얼마나 악질인데 거기서 하는 이벤트를 참가해? 하여튼 초보들만 등쳐먹고 사는구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 그냥 이 이벤트에는 신경을 끄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갈 길을 가려 몸을 돌렸다. 그런데 험상궂은 얼굴로 돌아가던 노점 주인과 같은 길드원 중 한 명이 급하게 움직이다 나와 어깨를 심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윽…….”
“아야! 이 시커먼 바퀴벌레 같은 새끼가, 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 시발, 하여튼 앞도 안 보이는 망토나 뒤집어쓰고 다니는 초보 새끼들은…….”
“뭐야?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앞을 가로막는 새끼들이 아직도 있었네. 어쨌든 오늘은 요니 도와주는 날이니까 그냥 네가 참아줘라.”
“아오, 내가 바빠서 봐준다. 엉?”
커다란 덩치와 달리 심하게 아파하며 어깨를 감싸 쥔 놈과 그 동료가 허름한 내 차림을 보고는 욕설을 내뱉으며 가버렸다. 사과를 하려고 했던 나는 어이가 없어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노점상 쪽으로 돌아섰다. 나를 향해 내민 주먹엔 그 두 배의 주먹을 돌려준다는 철칙을 요즘 오랫동안 쓸 일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번이 그것을 쓸 기회인 것 같았다.
나는 노점상 주변에 서서 때를 기다렸다. 기존의 구경꾼들이 가버리고 새로운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 때쯤 다시 인상을 싹 바꾸고 사람 좋은 표정으로 싱글싱글 웃으며 나타난 노점 상인이 호객 행위를 시작했다.
“자~ 7골드로 70골드어치의 대박 상품 가져가세요! 다트 날리기 이벤트를 하고 있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오세요! 그 구하기 힘든 속성 방어 스킬서와 여성분들이 좋아하시는 아마다이트 모래 색 액세서리 세트가 더 이상 꿈이 아닙니다! 다트로 맞히기만 하면 전부 그분 거죠! 기회는 열 번! 싸다 싸!”
“우와, 저 세트 정말 예쁘다. 나도 한번 해 볼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끌려 걸음을 멈추는 것에 때를 맞추어 나는 천천히 노점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어이쿠! 어서 오십시오.”
“이벤트를 하려고 하는데…….”
“예, 예. 두 분 다 하시려고요?”
그 말에 나는 시저를 흘긋 바라보았다. 시저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흥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뿐입니다.”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노점 주인이 만면 가득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품 안에서 열 개의 다트 뭉치를 꺼내 내게 내밀어 보였다.
“이게 바로 이벤트에 쓰이는 다트입니다. 다트에 따라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섞여 있어서 웬만한 기술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라면 던지는 데만 해도 꽤 힘이 들죠. 기본적인 룰은 다트로 상품을 맞혀 쓰러뜨리는 겁니다. 액세서리 상품을 원하신다면 종이에 붙여 세워놓은 액세서리를 꿰뚫어 넘어뜨리시면 되고요.”
룰을 간단히 설명해 준 주인이 앞에서 3미터쯤 떨어진 곳에 희미하게 그려져 있던 하얀 선까지 나를 이끌고 왔다. 시저는 옆쪽에 서서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서시고요, 선을 넘으시면 무효가 됩니다. 그러면 선금 먼저 주시고 제가 저기서 손을 올리면 그때부터 원하시는 대로 던져 주세요.”
나는 천천히 다트 하나를 뽑아 들어 만지작거렸다. 일단 처음은 실패해 주는 게 좋으려나.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다트를 조준해 앞으로 던졌다. 그러자 처음에는 잘 날아가던 다트가 중간쯤에서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진열대에는 닿지도 못하고 툭 떨어지고 말았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아~ 이런. 안타깝네요.”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노점 상인을 바라보며 나는 입가에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한 번 예의상 던져 줬으니 다음부터는 제대로 저놈을 당하게 해 줄 차례였다.
“스트렝스. 에어리얼 서번트.”
누군가 내 중얼거림을 들었다면 뒤로 넘어갈 만큼 기겁했을 것이다.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자 머릿속이 한 번 지끈거리더니 곧 몸에 활력이 일어나면서 시야가 두 개로 나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두 번째 다트를 뽑아 들어 시야가 두 개로 나뉜 상태를 가늠해 본 뒤 천천히 진열된 상품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마법서를 향해 다트를 던졌다.
“에어리얼 서번트. 가라!”
날려 보내면서 입속말로 에어리얼 서번트를 향해 명령하자 내 의지를 충실히 따른 에어리얼 서번트가 스트렝스 덕분에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다트를 감싸고 날아갔다. 멀리서 노점 주인이 또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내가 에어리얼 서번트에 힘을 보태자 보이지 않는 6서클의 바람에 실린 다트는 무리 없이 날아가 마법서의 중앙에 퍽 하고 박혔다. 첫 성공이었다.
“우와아!”
주변에서 경탄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당혹한 표정이 역력한 노점 주인을 보며 나는 히죽 웃었다. 그래, 놀랍겠지. 왜 스킬을 썼는데도 다트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쓴 방법은 간단했다. 스트렝스로 힘을 세게 해 다트를 빨리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힘이 셌기 때문에 다트를 잘 던질 수 있었다고 착각할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물리력을 가지고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불러내 다트를 감싸고 날아가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했다. 즉 다트를 목표에 제대로 박히게 한 것은 내 다트 솜씨가 출중했다기보다는 에어리얼 서번트를 잘 조종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점 주인이 아무리 높은 수련치를 쌓은 스킬을 쓴다고 해 보았자 6서클 마법의 수준에는 미치지 않을 테니 가능했던 일이었다.
“사, 상품으로 보조마법 사일런스의 서를 얻으셨습니다.”
나는 당황한 노점 주인의 말을 들으며 다음 다트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꽤 비싸 보이는 보석이 박힌 지팡이가 내 목표였다.
“에어리얼 서번트, 가라!”
두 번째 명령과 함께 던진 다트도 무리 없이 원하던 지팡이에 박혀 들었다. 사람들이 또다시 놀람에 찬 환성을 질러댔다. 세 번째 다트는 액세서리 세트에 꽂았고 네 번째 다트는 고급 가죽 검집 안에 든 상아 단검에 박혔다. 다섯 번째도, 여섯 번째도, 또 그 이후도 마찬가지로 비싸고 좋은 것들에만 다트가 알아서 들어가 박혔다.
마침내 열 번째 다트까지 보석 반지함에 가 박히자 이제 내 주변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러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내가 여유 만만하게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을 때 얼굴이 파랗게 질린 노점 주인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이건 말도 안 돼! 사기야! 이 사기꾼! 정체를 밝혀!”
“뭐가 사기라는 겁니까? 전 단지 평소 다트가 취미라 던져 봤을 뿐인데. 좀 잘 맞긴 했지만 뭐 다 그리 좋아 보이는 아이템도 아닌데요.”
나는 짐짓 놀란 척하며 반문했다. 그러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노점 주인이 이제 숫제 악을 쓰며 소리쳤다.
“아홉 번이나 성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무슨 사기 스킬을 썼는지 어서 밝혀!”
그 말을 듣고 나는 허리를 숙여 주변에 널려 있던 작은 돌 서너 개를 집어 들었다.
“저는 원래 던지는 거라면 뭐든 다 잘합니다. 지금 시켜 보셔도 다 맞힐 수 있을걸요. 저 위에 있는 건물 지붕 첨탑을 맞혀 볼까요.”
‘에어리얼 서번트!’
말과 동시에 에어리얼 서번트를 빠르게 중얼거리며 돌을 던지자 바람을 탄 돌이 여유롭게 원하던 앞쪽 건물 지붕의 첨탑에 맞고 떨어졌다.
“저 건물의 대문 앞에 세워 놓은 꽃.”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또 날아간 돌이 내가 말했던 꽃에 정확히 들어가 맞았다. 사람들은 이것이 마법 때문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던 듯 순식간에 입만 딱 벌리고 내가 벌이는 묘기를 구경하는 데 바빴다. 남은 것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핏발 선 눈을 형형하게 뜬 노점 주인뿐이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사기꾼아, 그 다트는 그런 식으로 맞을 수가 없는 놈이야! 네놈, 뭔가 켕기니까 얼굴도 그렇게 푹 가리고 있는 것 아냐? 너 같은 사기꾼에겐 절대 상품 못 줘!”
그 말에 순식간에 주변의 비난이 노점 주인에게로 쏟아졌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이벤트는 상품을 나누고 그 과정을 즐기려고 하는 건데, 참가비만 비싸게 받아먹고 이벤트 상품을 줄 생각은 없었다고?”
“저 정도로 실력이 좋으면 다트로 상품 맞히는 정도는 쉽겠구먼. 그냥 상대를 잘못 만났다 치고 상품을 주면 될 것이지 거 욕심도 참 많네.”
나는 그 모든 반응을 즐기며 씩 웃었다.
“사기꾼이라니, 그건 당신이겠지요. 왜 다트가 그런 식으로는 맞을 수 없다고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그건 혹시 당신이 오히려 이상한 사기 방법을 쓰고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까? 예를 들자면, 몇 번 중얼거리고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다트의 움직임을 무겁게 만들고 옆으로 날려버린다든가……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다, 닥쳐!”
말을 하면서 슬쩍 입꼬리를 올리자마자 심하게 당황해 욕설을 내뱉은 노점 주인이 의지할 곳을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혀, 형들!”
그러자 방금 전에 사라졌었던 같은 길드 소속이란 놈들이 또다시 줄줄이 달려와 노점 주인의 앞을 막아섰다.
“이 사기꾼 새끼가 듣자 듣자 하니 뭐라고?”
“뜨거운 맛을 좀 봐야 정신을 차리지.”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춘 놈들 중 아까 나와 부딪쳤던 놈들이 보였다. 내가 그들을 보고 히죽 웃자 놈들도 아까의 기억을 떠올린 듯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어…… 네놈은 아까 그!”
나는 여유롭게 머릿속으로 쓸 만한 마법들을 떠올려 보았다. 사람이 많으니 높은 서클은 안 되겠지만 검과 조합해서 쓴다면 낮은 서클의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으로 쓸 수 있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점점 높아져 가던 긴장감이 터질 것처럼 팽창되었을 때, 검을 뽑아 든 한 놈이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건방진 사기꾼 자식! 그 시커먼 모자부터 갈라주마!”
누군가 달려들 것까지는 예상했던 바였지만 그놈의 목표 중심이 내 후드가 된다면 혹시나 후드가 벗겨지거나 하는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놈이 이곳까지 도달하기 전에 후드 끝을 뒤집어지지 않게 붙잡은 뒤 슈페리어 막대기를 잡아 뽑으려 막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내 앞쪽으로 끼어들며 달려들던 놈을 한 발로 걷어차 날려버렸다. 부드럽고 가벼운 움직임이었지만 후폭풍은 엄청났다. 달려든 길드원은 차마 비명도 못 지르고 배 쪽 갑옷이 움푹 팬 채 달려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허공을 날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크억! 쿨럭!”
‘이런 일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놈은…….’
검은 갑옷에 은빛 머리칼. 지금까지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던 시저가 귀찮음이 역력한 찌푸린 표정으로 막 차올렸던 다리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있었다. 두 손은 아예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발만 움직이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공포심이 모든 적들의 사기를 꺾음과 동시에 실로 굉장한 도발 효과를 발휘했다.
“넌 또 뭐야, 이 개뼈다귀야!”
흥분한 길드원의 고함에 시저가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곧 시니컬하게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보다 보니 귀찮아서 정리하러 온 개뼈다귀다.”
그리고 시저는 앞으로 걸어 나가 공격하려던 놈들을 너무나 쉽게 걷어차 날려버리는 것으로 같잖지도 않던 위협 사태를 종결시켰다. 마치 어른과 아이의 싸움처럼 보일 정도로 쉽게 주변에 수 명의 사상자를 만든 시저가 특유의 얼음처럼 싸늘한 잔혹성을 그대로 띤 눈으로 신음을 내지르며 밑에서 굴러다니던 놈들 중 하나의 머리를 꽉 밟았다.
“으…으으으! 자, 잘못했…….”
“시끄러워.”
퍽. 가차 없이 머리를 차 피가 튀게 만든 시저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재미있게 사태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피가!”
“비공식 PK다!”
“치안대 NPC들 어디 있어요?”
순식간에 시끄러워진 주변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든 시저만 나타나면 그곳이 파괴와 죽음의 아수라장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단 말인가?
장소만 다를 뿐 이곳의 풍경은 마치 전에 시저를 처음 만났던 자그레브 무한 길드전 때를 연상케 했다. 시저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나 할 것 없이 죽어라고 도망치지만 결국 잡혀서 죽어 나가던 그 사람들과 지금 이 사람들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시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쓰러진 놈들의 머리나 손을 밟고 걷어찼다. 그때마다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이쪽까지 다 들려왔다. 노점 주인은 진작에 엎드려 빌다가 제대로 걷어차여 간헐적인 경련만 일으키며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고, 나머지 길드원들 중에는 아무리 봐도 죽은 것처럼 보일 만큼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검은 워커를 신은 발만으로 해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참상이었다.
‘옛날의 정승조가 저렇게까지 가학적인 성격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니, 그때도 끼가 있긴 했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폭력범! 그대로 가만히 서 있으시오! 발라 모냐크 치안대에서 체포한다!”
돌아보니 치안대복을 입은 치안대 NPC들이 시저를 잡으러 오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뒤 분명 저 외침을 들었을 텐데도 아직까지도 쓰러진 놈들을 패고 있는 시저에게로 다가가 한쪽 팔을 잡았다. 시저가 흉흉한 눈으로 나를 휙 돌아보았지만 개의치 않고 팔을 잡은 채 앞으로 뛰쳐나갔다.
“뛰어.”
헤이스트! 작게 주문을 중얼거리자마자 휙 몸을 감싼 바람이 시저와 내 몸을 더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시저는 처음에는 무겁게 이끌려 따라오다가 내가 한 번 더 강하게 “뛰라고.” 하고 말하자 약간 묘한 표정을 지으며 뛰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뛰기 시작하니 뒤처지는 것은 나였기에 어느 정도 이후부터는 플라이를 써서 발을 살짝 띄운 채 날아서 따라가야만 겨우 속도를 맞출 수 있었다.
“거기 서라!”
한참을 뛰어 따라오는 치안대를 따돌리고 다른 쪽의 번화가로 빠져나왔다. 그제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후우… 후…….”
숨을 몰아쉬다 시저를 보니 놈은 체력 하나 떨어지지 않은 것 같은 담담한 표정 그대로였다. 오히려 숨을 헐떡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표정이라 나는 내심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왜 아까 그렇게 팬 거냐?”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며 묻자 시저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귀찮으니까.”
“내가 정리할 수 있었어.”
시저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비웃었다.
“웃기는군. 사람을 불러 놓고 혼자 놀던 네놈이? 마지막을 내게 넘기지 않았으면 네놈부터 처리할 생각이었어.”
그래, 그러냐……. 좀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 그냥 시저가 조금 평소다워졌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사람 십수 명을 반죽음 상태로 만들고 나서 평소대로 돌아온 게 과연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네놈 때문에 결국 아까 상품도 다 못 받았는데.”
“…….”
문득 아홉 개나 따 놓은 비싼 상품들을 하나도 가져오지 못한 것이 생각나 말했지만 시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놈에게서 정상적인 반응을 듣는 것은 포기하기로 하고 길을 걷다가 왠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 소모가 심해지기 시작하면 배가 고픈 느낌이 드는데, 아무래도 그래서인 것 같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마침 마법 렌지를 단 노점상 중 고기 꼬치구이를 팔고 있는 곳이 한 곳 있었다.
“미안하면 저거나 사 주든가…….”
놈이 내게 미안할 리 없겠지만 농담을 반쯤 섞어 그렇게 말하자 나를 흘끔 바라보았던 시저가 갑자기 뚜벅뚜벅 걸어서 그 노점상으로 향했다. 내가 말하기는 했지만 깜짝 놀라 잠시 멈춰 서 있다가 뒤를 따라가니 시저가 꼬치 두 개를 가리키며 주문이라기보다는 강탈할 기세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두 개.”
“예? 두…… 두 개가 뭐요?”
“…….”
“주… 주문이신 거 맞으시죠?”
“…….”
“알겠습니다…….”
겁에 질린 표정의 노점상 유저가 황급히 꼬치 두 개를 꺼내 불에 굽는 것을 보며 나는 시저의 변함없이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훑어보았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꼬치를 사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비록 변덕이더라도 나에게는 이 뜻밖의 행동이 무척 뜻깊게 다가왔기에 기묘한 기분으로 시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시저가 갑자기 내 쪽을 휙 돌아보았다. 나는 순간 쳐다보던 것이 기분이 나빴나 싶어 흠칫했지만 시저는 단지 완성된 고기 꼬치를 내게 내밀었을 뿐이었다.
“……고맙다.”
느릿하게 인사를 하고 꼬치를 받아 드는데, 잠시 손끝이 스쳤다. 그 순간 현실에서 승조가 지팡이를 건네주었을 때 스쳤던 손의 감각이 생각나 나도 깜짝 놀랐지만 시저는 어쩐지 더 놀란 것 같았다. 둘 다 손을 움츠려버려 떨어진 고기 꼬치가 바닥의 먼지 사이로 뒹굴었다.
“…….”
떨어진 꼬치를 바라보던 시저가 인상을 확 찡그렸다. 회색 눈동자가 급격히 어두워진다 싶더니 이를 갈며 노점상 쪽으로 다시 돌아서서는 또다시 주문을 했다.
“하나 더.”
“예? 아. 떠, 떨어뜨리신 거면 그냥 드릴게요.”
무시무시한 박력에 질린 노점상이 서둘러 꼬치를 하나 더 만들어 내밀었다. 다행히 다시 나온 꼬치는 둘 다 그리 놀라지 않고 주고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걷다가 나타난 길거리의 한적한 의자에 앉았다. 번화가 길거리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바로 앞에서 와글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기에는 최고의 자리인 것 같았다.
할 말이 없어 꼬치만 씹어 먹고 있는데 갑자기 시저가 먼저 내게 질문을 했다.
“……그 후드. 왜 벗지 않는 거지?”
나는 질문의 내용보다, 시저가 처음으로 내게 먼저 정상적인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놀라 사레가 들릴 뻔했다. 서둘러 씹고 있던 고기 조각을 삼키고 뭐라 대답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 사람들은 후드를 눈 밑 정도까지 쓰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나는 현재 약간의 방심만으로도 시저에게 얼굴을 들킬지 모르는 상황이라 후드자락을 거의 입술 바로 위까지 내려둔 상태였다. 누가 봐도 수상하다고 여길 만한 모양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이것 때문에 적이 달려들고, 시저가 그때 나와서 발로 걷어찼던 것이 생각났다.
“…….”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시저가 뭔가 알아차린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
“얼굴에 문제가 있나 보군. 그런 거라면 상관없어.”
기껏 긴장했었는데 저런 결론이라니. 내게는 다행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과연 이대로 계속 있어도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지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시저의 말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놈은 그것으로 되었다 싶었는지 다시 자신의 고기 꼬치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꼬치를 꽂아 놓은 나무 막대기까지 씹어 먹을 것 같은 기세가 영 신경이 쓰였다. 정승조는 예전에도 음식을 급하게 먹을 때는 이가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칠게 먹는 버릇이 있어 같이 먹는 사람이 자제시켜줘야 했는데 아직까지도 그 버릇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으려고 노력하다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넌 막대기까지 먹을 생각이냐?”
시저가 고기를 씹으면서 고개를 들더니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이 정도로 나와 관련된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 건 아니겠지.’
약간 긴장하며 숨죽이고 있을 때 몇 번 눈을 깜박이다 도로 시선을 돌린 시저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짜증 나게…….”
“뭐?”
“…….”
너무 작은 목소리라 제대로 듣지 못해 반문했지만 시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고기 꼬치까지 한 번에 다 밀어 넣었다. 나는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서 들쑤셔 봐야 내게 좋을 것이 없을 것임을 파악하고 나도 마저 남은 고기를 다 먹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때였다.
“이런 곳에 있으셨군요!”
갑자기 누군가가 시저의 뒤에서 어깨를 턱 하고 잡으며 등장했다. 치안대인가 싶어 순간 마법 주문을 외칠 뻔했지만 시저는 의외로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인상적인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처음 보는 남자가 유들유들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시저의 뒤에 서 있었다. 나는 그가 바로 지척까지 오도록 내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 가벼운 충격을 느꼈다.
“길드마스터, 갑자기 사라지셔서 찾느라 조금 힘들었습니다.”
‘길드마스터라고?’
시저를 길드마스터라고 부른다는 것은 눈앞의 남자가 자그레브의 페일 나이츠 길드원이라는 뜻인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시저의 길드원을 본 것은 처음이라 나는 신중하게 지켜보며 경계 상태로 들어갔다.
“꺼지라고 했을 텐데.”
시저가 인상을 찌푸리자 남자가 사람 좋게 하하하 웃었다.
“꺼지기는 어디로 꺼집니까? 그간 쌓인 일들은 이 부길마가 힘들게 처리했으니, 이번엔 길드마스터가 제 부탁을 들어줄 차례 아닙니까.”
남자는 웃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웃음이 아니라 날카로운 꿍꿍이가 보였다. 마치 제2의 윤석호를 눈앞에 두고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저런 놈이 설마 진심으로 시저를 따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 느낌이 들어 저절로 긴장된 주먹을 그러쥐었다.
남자의 말에도 시저는 무표정한 얼굴을 지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런대로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던 표정이 도로 처음 봤을 때처럼 바뀐 것을 보자 가슴속이 조이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딴 건 상관없어. 내 한계를 적당히 지키는 게 좋을 거다.”
“무섭기는. 어차피 별다른 걸 할 예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아는 사이십니까?”
시저의 낮은 경고에 능구렁이처럼 실실 웃으며 넘어간 남자가 나를 처음 발견한 것처럼 과장되게 놀라며 물었다. 나는 일단 입만 꾹 다물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 후드를 투시하기라도 할 것처럼 이리저리 들여다보던 남자가 턱에 손가락을 가져가 문지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설마 우리 길드마스터께선 남자 취향이기라도 했던 건가요? 얼굴은 잘 안 보이는데. 흠…… 수줍음이 많으신가? 안녕하세요. 전 이분 길드의 부길드마스터를 맡고 있는 요거트라고 합니다. 하하하. 제가 요거트를 좀 많이 좋아해서 이름을 요거트라고 지었지만, 다들 거트라고 부른답니다. 실례지만 님은 저희 길드마스터를 어떻게 만나셨…….”
“닥쳐.”
살기 띤 목소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나무 꼬챙이를 한 손으로 꺾어서 버린 시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도 따라서 조용히 일어서는데 시저가 뜻을 알기 어려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지금까지처럼 살기 띤 기색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부드러워진 것도 아닌 복잡한 눈빛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나 또한 짧았던 방금까지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무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입을 열 수 없었다.
시저는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다 결국 그것도 필요 없다고 여긴 듯 말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가는 건가?’
우리 사이가 인사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지만 이렇게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려 하는 것을 보니 그냥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또다시 고민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채웠지만 시저가 완전히 내 앞에서 멀어지기 전에 내린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차피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시저에게 말을 걸기로 결정했던 순간부터 나는 강무헌이 아니라 카프로스로서 시저를 대하기로 했었다. 강무헌은 정승조와 대화를 하기 위해 방문하는 것조차 쉽게 할 수 없었지만 카프로스는 아니다. 이런 기회가 주어진 바에야 좀 더 나답지 않게, 좀 더 밝게 놈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었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밝은 목소리로 시저 쪽을 향해 외쳤다.
“오늘은 즐거웠다. 다음에…… 또 볼 땐, 전처럼 너무 그러진 말자고. 너도…… 알고 보니 그렇게 이상한 놈은 아니었어.”
내 말을 들은 듯 시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미소 짓고 있기는 하지만 계속 나와 시저를 기이한 시선으로 번갈아 보며 시저의 뒤를 따라가던 요거트도 내 쪽을 흥미롭게 돌아보았다.
“……잘 가라.”
마지막 말까지 마치고 나서 길게 숨을 내쉰 뒤 시선을 들었을 때, 돌아보지 않고 멈춰 서 있기만 하던 시저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지친 채 독기만 서려 있었던 회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약간 흔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시저는 대꾸 없이 다시 군중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시저의 모습을 완전히 확인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러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들이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나 갑작스레 사라진 시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녀석은 어쨌든 내게 있어서는 결국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운명과도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순간 절감했다.
‘정승조…….’
한숨을 한 번 길게 쉬고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으로 뒤돌아섰을 때였다.
“카르야!”
“……형?”
뜻밖의 목소리의 주인은 아까 신전에서 헤어졌었던 키온 형이었다. 형은 이상할 정도로 굳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시저가 사라진 쪽 방향을 어이가 없다는 듯 연신 번갈아 쳐다보면서 거칠게 숨을 고르는 형을 보고, 나는 형이 시저와 내가 같이 있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봤어?”
“그래! 봤다! 너 대체 나가서 뭘 한 거냐? 방금 그놈이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놈 맞아? 응? 아닌 거지?”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으로 혼란스러워하는 형에게 나는 어쩐지 미안함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저 맞는데.”
“맞다고!”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절규를 토한 키온 형이 초조하게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대체 그놈이 여긴 왜 온 거야?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싸우지도 않고 그냥 가버려? 말 좀 해 봐.”
대답 좀 해 보라는 눈빛을 보내는 형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니 그냥 있었던 그대로만 짧게 말하기로 했다.
“길을 가는데 시저가 있었어. 그래서 말을 걸었더니 따라오기에 같이 다니다가 여기까지 왔을 뿐이야. 그런데 같은 길드 사람이 와서 시저는 갔고, 나는 이제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었어.”
“…….”
내 대답에 갑자기 어이없는 표정이 된 형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손을 툭 툭 힘없이 내렸다.
“이렇게 대단한 사건이 왜 네가 이야기하니까 벌레새끼 왔다 갔단 말보다 더 임팩트가 없냐. 발광하던 내가 바보 같잖냐.”
그런 식으로 느껴질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던 건 아니었는데 형의 반응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
“아니 뭘 또 사과를 해? 네 성격이 원래 그런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짜식, 형은 그냥 네가 무슨 협박이라도 당했나 싶어서 놀랐던 거야. 허허. 아니라면 뭐…… 근데 그놈도 진짜 이상하네. 말 걸었더니 죽이려 들진 않고 오히려 널 따라왔다고? 그 새끼도 사람 대할 때 취향이 있나?”
사실 처음엔 나도 시저가 날 죽이려 들 줄 알았었지만 그러지 않아 놀랐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형은 몇 마디 더 중얼거리며 고민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내 양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카르야, 그놈이 아무리 얌전하더라도 그놈은 미친놈이야. 너도 알고 있잖냐. 그러니까 다음엔 말도 걸지 말고, 보면 백 미터 밖으로 피해 다녀라. 엉?”
“…….”
걱정해서 하는 말이란 건 알겠는데, 흉흉한 표정만 보면 형 쪽이 더 피해 다녀야 할 사람 같았다.
“알았지, 카르야? 어, 어디 가?”
나는 그냥 대답하지 않고 먼저 앞서가는 쪽을 택했다. 형이 재빨리 뒤따라오면서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좀 들으라니까. 그놈이 한 번 변덕으로 널 봐줬다고 너무 안심해선 안 된다 그 말이야. 알고 있어? 시저 그 새낀 전에 팔등이 놈과 날 처음 봤을 때부터 이유도 없이 칼부터 휘두른 놈이라고. 그때 난 그놈이 사이코란 걸 느꼈었지.”
“형, ……신전에서 듣고 온다던 건 어떻게 된 거야?”
말허리를 자르며 묻자 마구 떠들어 대던 형의 관심이 순간 내 질문에 답하는 쪽으로 쏠렸다.
“신전? 아! 그러고 보니 너한테 이걸 이야기해 주려고 듣자마자 바로 뛰어왔는데 잊어버렸었어. 신전에서 나보고 이번에 가라고 한 곳이 어딘 줄 알아? 글쎄 네가 간다고 했던 저 죽음의 사막 너머라고 하더라고!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싶었다니까.”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두어 번 빠르게 감았다 떴다가 물었다.
“죽음의 사막…… 너머로 가라고 했다고?”
“응. 정확히는 거기에 무슨 숲이 있는데 거기 가서 이종족의 지도자를 만나라나. 허허, 참. 넌 그게 뭔 소린지 알겠냐?”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형이 정확히 이야기한 것이 아님에도 바로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냥 알기만 할까. 내 정보창에 새로운 타이틀을 한 줄 추가시켜 준 것이 바로 그 사람인데.
“……응. 알아.”
“헉, 그럼 설마 네가 갈 곳도 정확히 거기인 건 아니겠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기야.”
“하하, 잘됐다! 계속 같이 가겠네!”
이 놀라운 화제 때문에 형의 모든 관심은 그쪽으로 쏠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이야기하던 시저에 대한 주제는 벌써 저 너머로 묻어버린 모습을 보며 나는 형의 그런 단순한 쾌활함에 감사했다.
“그럼 바로 거기로 가는 거냐? 넌 아까 무슨 할 일 있다고 나가지 않았었어? 그건 다 했고?”
“나는…….”
무심코 말하려던 나는 그때에서야 내가 처음 키온 형과 헤어져 스가의 신전 밖으로 나왔을 때 가지고 있었던 목표를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맞다. 나는 원래 에데니아의 집에 가서 물약을 산 다음 형과 합류하려 했던 것이었는데 시저를 만난 이후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난 이 근처에 있는 곳에 가서 뭘 먼저 사야 해.”
“어? 뭘 사야 되는데?”
“형도 사야 할지도 몰라. 죽음의 사막을 건널 때 체력을 떨어지게 만드는 태양 빛을 막는 물약인데…….”
“에에엥? 그런 것도 필요하단 말이야? 돈 주고 사야 하는 건가? 나 돈 없는데.”
기겁하는 형을 보며 나는 전에 크란이 쓸 줄 알아서 유유히 사막을 편하게 지나가는 데 쓰였던 1인용 신성 보호 스킬을 떠올렸다.
“형, 신성 보호 스킬…… 알아?”
내 질문에 잠시 의아한 얼굴을 했던 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성 보호 스킬? 어…… 그거야 쓸모는 없지만 기초 기술이라 일단 배웠는데. 왜?”
“…….”
처음으로 마법사란 직업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