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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썹을 모으고 고개를 들어 까마득하게 높은 벽처럼 누워 있는 드래곤의 몸체를 살펴보았다. 잠시 멍했던 머릿속에 드래곤이라 불리는 판타지 생물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 산 같은 게 드래곤이라고?’
내가 매우 이상한 표정을 지었는지 남자가 웃음을 참는 기색으로 나를 손짓해 불렀다.
“그쪽만 보지 마시고 이쪽에서 대화하죠. 당신이 그의 후인이 맞다면 여기에 온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가긴 합니다만.”
여기 있는 이 거대한 붉은 것이 용. 즉 드래곤이라고 했다. 아마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 목소리를 낸 것이 그 드래곤이라고 친다면, 그 이후 나타난 이 남자는 자신을 용의 정신체라고 밝혔으니…….
“설마 당신이 저 코르라고 한 드래곤이 변신한 겁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제스처에도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어 질문했다.
남자는 화를 내지 않고 고개만 휘휘 저었다.
“나는 코르이지만, 코르는 내가 아닙니다. 코르가 나였다면 어째서 육체가 이곳에 따로 있겠습니까? 전 그저 여기서 눈을 감고 우리의 말을 듣고 있는 코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당신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빠져나온 위대한 정신의 한 가닥일 뿐이죠.”
무슨 말인지 엄청나게 헷갈렸다. 멱살을 잡아 올려 쉽게 좀 말하면 안 되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참고 세 번쯤 곱씹어 본 결과, 저 말뜻은 드래곤의 의지 중 하나가 나와 대화를 편하게 나누기 위해 빠져나와 인간형으로 구현된 것이 바로 눈앞의 남자라는 것 같았다.
‘허, 드래곤의 의지라니. 그런 게 말이 되나?’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어쨌든 남자가 저 드래곤을 대신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건 맞는 것 같으니 드래곤을 대한다 생각하고 말하면 되겠지.
“아, 그렇습니까.”
“예. 이해하셨나 보군요. 당신이 여기에 찾아온 이유는 그 마법사가 남긴 것을 얻기 위해서겠지요?”
“네. 저는 로드 슈페리어의 흔적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혹시 몰라 확실히 하기 위해 물어보았습니다. 저, 아니. 코르 역시도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감회가 새롭군요.”
남자가 감상적인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거대한 벽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용을 올려다보았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분위기가 좋은 것이, 어쩌면 쉽게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이렇게 쉽게 퀘스트가 해결된다면 그건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슈페리어 퀘스트의 분위기와는 180도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코르에게서도 여러 감정이 느껴지는군요. 저와 코르에게 이렇게 쉴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주고 이때를 위해 부탁을 남긴 사람이 바로 그이니까요.”
자기 혼자 감회에 젖어 감정은커녕 돌덩어리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을 듯한 붉은 비늘 꼬리를 어루만지는 남자를 보며 나는 방금 들었던 이상한 말에 초점을 맞췄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장소를 만든 사람이…… 누구라고요?”
“당신이 흔적을 쫓아왔다고 말한 그 마법사입니다.”
뭐라고……? 설마 이 동굴 전체가 지금 로드 슈페리어가 이 괴물 용을 위해 만든 집이라고 말하려는 거냐?
여긴 몬스터만 없다뿐이지 누가 봐도 훌륭한 던전이었다. 아까 거쳐 왔던 경고성 농후한 슈페리어 비밀 문자나 용암이 끓던 골짜기가 생각나 뜨악한 심정으로 바라보았으나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용의 정신체라는 남자는 신나게 말을 이었다.
“500년 전, 코르가 아직 육체의 구속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을 때 지금은 사라진 어느 나라에서 드래곤의 피와 살을 구하기 위한 공격을 해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코르를 도와주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새집을 구해 준 사람이 바로 그 마법사입니다.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산을 파내서 잠들 곳이 없어 방황하던 코르에게 이 집을 만들어 주었죠. 더불어 괜찮은 동거종족까지 옆에 이사 오게 해 준 덕택에 우린 지금까지 무척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그의 부탁 정도는 가벼운 편이죠.”
“…….”
이 말에 의하면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끝난 후까지 이 용은 매우 오랜 기간 로드 슈페리어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사막 마을에서 만났던 엘프 이루미네 이후 두 번째로 전쟁 후의 슈페리어에 대해 말하는 이를 만난 것이다.
그 정도의 사이라면 친할 것 같은데, 왜 막대기 속의 슈페리어는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일까? 생각에 빠진 나에게 남자가 안색을 살펴보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궁금한 것이 또 없으시다면 이제 제가 그와의 약속을 이행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일단 슈페리어가 이 용에게 무엇을 부탁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대답하자 남자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먼저 그가 제게 맡겨 둔 기억입니다.”
“예?”
화아악!
물건이라도 건네주는 줄 알고 쳐다본 순간 남자의 손바닥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퀘스트 기억 동영상이 시작된다는 신호와도 같은 익숙한 빛이었다.
‘이번엔 이런 식으로 동영상을 보여주다니, 항상 그랬었지만 이번 퀘스트는 특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게 하나도 없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벌써 몇 번째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슈페리어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 세상이 까맣게 점멸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동굴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듯 하강한 시선에 들어온 동굴 속 거대한 붉은 용의 주변은 피바다와 같았다. 그 옆에 서 있던 두 사람 중 붉은 머리칼을 꼬리처럼 길게 늘어뜨린 남자, 로드 슈페리어가 길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간신히 빼돌리는 데 성공은 했는데…… 피가 멈추질 않네.”
“이제 어쩔 거냐. 너 때문에 나는 방금 나라를 배신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었는데.”
“너만 그래? 나도 그렇지. 안 들키기만 하면 돼~ 안 들키기만.”
약간 원망스럽게 중얼거리는 검은 갑옷의 남자, 다크 나이트의 말은 장난스레 무시한 채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은 용의 얼굴까지 다가간 슈페리어가 비늘을 툭툭 두들겼다.
“이봐. 죽었어? 기껏 구해 왔는데 죽으면 보람 없단 말이야. 빨리 일어나 봐.”
[ ……너.희들.은. 누.구냐. ]
한참 만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힘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우렁우렁했다. 음파만으로도 머리칼과 옷이 폭풍에 휘말린 듯 펄럭거렸지만 슈페리어는 그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활짝 웃었다.
“우와, 아직 살았네. 역시 용이라 질길 줄 알았어.”
“우리는 당신을 공격한 자들에게서 육체를 바꿔치기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전부 다 이 녀석의 변덕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구해 줬다고 할 수 있겠군요.”
슈페리어 대신 진중한 목소리로 다크 나이트가 대답하자 용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 전신거울보다 더 큰 붉은 눈동자에 두 인간의 모습이 들어오자 간신히 초점이 또렷해졌다.
[ 그런.가. 운이.좋.게 살.아남.았군. ]
“세계에 딱 네 마리 있다는 용을 희생시키는 건 내키지 않았거든. 살았으면 얼른 나아서 구해 준 사람을 기쁘게 해 달라고. 이왕이면 드래곤이 가지고 있다는 보물도 좀 나눠주면 좋고.”
“너 자꾸 버릇없는 소릴.”
거침없는 말에 깜짝 놀란 다크 나이트가 슈페리어의 어깨를 잡아채자 슈페리어는 장난스레 콧잔등을 찡그리며 “아야~ 아프다.” 하고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다크 나이트는 방금 전보다 더 놀란 기색으로 바로 손을 떼었다.
“아팠어?”
“아니, 안 아팠는데 농담.”
“…….”
다크 나이트가 슈페리어에게 약한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책을 하고 있을 때 용이 한참 만에 다시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 구해.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여.긴다. 그러.나 드.래곤.이 가.졌다.는 보.물은 사실.이 아니므.로 줄.수가 없.다. 대.신 내.가 도울.수 있는.것에 한해.서라면 그대.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언제.든지 도.움을 주.지. 단, 조.건이 필요하.다. ]
“뭔데?”
움직이지 못하는 용의 붉은 눈동자에 분노의 불이 훅 타올랐다.
[ 나.를 공격.한 자.들에게 나는.언젠가 복수.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목숨.을 구명.하러 나.서지 말.라. ]
“…….”
다크 나이트의 표정이 거세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한 발짝 나서서 뭔가 말하려던 그를 손짓 하나로 막아 세운 것은 긴장감 없어 보이던 슈페리어였다.
“……좋아. 너의 복수는 너의 것이지. 구해 줬다고 그렇게 많이 거들먹거릴 생각도 없고, 살았으니 되었어. 그럼 우린 우릴 찾는 인간들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으니 몸조리 잘 하도록 해.”
[ ……내.진.명은 코르 라 메이솔 에이자르 카나베이. 기억.하도록. ]
용의 말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은 슈페리어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용의 진명을 듣다니. 과분한 일인걸. 내 이름은…… ‘ ’.”
뭐지? 나는 순간 깜짝 놀라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슈페리어의 내 이름은…… 다음부터 지워진 듯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무척 당황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다음의 말들은 또 제대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 우린 이만.”
“너……!”
“조용히 하고 따라와. 이 뇌까지 근육 덩어리야. 용의 복수는 파괴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뭐…….”
벙한 표정을 지은 다크 나이트의 팔을 붙잡은 슈페리어가 손가락을 한 번 빙글 휘젓고는 곧바로 빛과 함께 공간이동을 해 사라졌다. 용은 눈꺼풀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음에 나타난 장면은 어딘지 지쳐 보이는 기색의 슈페리어와 이제는 쌩쌩해진 붉은 용, 코르의 모습이었다. 슈페리어의 전신에 가득 내려앉은 그을음과 먼지들 때문에 머리 색이 붉은색이 아니라 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 흑.룡이 그.마물.들의 더러.운 행.진에 가담.했다고. 들었다. ]
“그래. 사실이야. 흑룡의 브레스로 사라진 북부 도시는 앞으로 몇백 년간은 계속 황무지로 남겠지.”
슈페리어의 얼굴에 깊은 회한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눈을 깜박이던 용이 천천히 물었다.
[ 너희.는 왜. 나.에게 부탁.하지 않.는가? ]
“뭘?”
[ 용.에게 맞.설 수 있는. 것.은 같.은 용뿐.이다. 나에.게 부탁.한.다면 막.을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 않는.가. ]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부탁은 할 수 없어.”
[ 어.째서.인가? ]
“넌 드래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다며. 그 흑룡은 오천 년도 넘게 살았다던데 네가 붙어서 이길 수 있겠어?”
[ 무슨.소리.인가. 나.는 업.화의 염.룡이.다. 암운.의 흑룡.과는 상.성이……. ]
“하핫. 농담인데 뭘 그리 발끈해. ‘드래곤끼리는 동족상잔이 금지되어 있다. 그것은 용의 숭고한 영혼에 새겨진 첫 번째 약속이자 마지막 약속이다.’ ……이 말, 사실 아냐?”
슈페리어의 조그만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용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 사.실이다. ]
“이 전쟁의 시작은 인간들 때문이지, 다른 종족들과는 관계없잖아. 인간이 다른 종족에게까지 희생을 강요할 권리는 없어. 드래곤들끼리 그 흑룡을 제재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벌써 뭔가 말이 있었겠지. 그런 움직임도 없잖아. 드래곤에겐 이 전쟁도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을 테니까.”
[ ……꼭. 그.런것.은 아.니다. 흑룡.은 하등.종족.에게 반.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질.서의 율법.을 어지럽.혔다. ]
“다른 종족을 해치지 말라는 질서의 율법 정도야 다른 종족들도 얼마든지 어기는 거고.”
[ ……. ]
“됐어. 네가 그런 말을 내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난 지금 꽤 보람을 느끼는 중이니까. 우리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아. 나만 해도 짬을 내서 널 만나러 오기도 하잖아?”
슈페리어가 지친 표정으로 웃었다. 코르도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고, 또다시 장면이 하얗게 일그러지며 변화했다.
“위대한 존재여. 당신의 피를 나에게 주십시오.”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코르의 밑에 칼로 바닥을 찍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다크 나이트가 보였다.
‘피라니?’
“한 방울만이라도 괜찮으니, 드래곤의 피가 필요합니다.”
다크 나이트의 목소리는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코르가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
[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가? 그것.조차.도 대.답할 수. 없.나? ]
숙인 고개 밑으로 떨리던 입술이 마음을 다잡은 듯 열렸다.
“후인을 위해서입니다. 나의 후인을 위해 필요합니다.”
코르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이질적인 눈동자가 놀란 듯 가늘어졌다.
[ 의.외로.군. 드.래곤.의 피.로 마.물 처단.자를 만.들 생각.인가? 그.대는 아.직 후계.자를 만.들.기엔 목숨.이 많.이 남았.는데. ]
“…….”
[ 보.통 그대.와 같은 자.들은 죽기 직.전에 후.계자.에게 피.를 스.스로 구하.라 하지 않.던가? ]
다크 나이트는 칼자루를 움켜쥐며 더욱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나 묘하게 다급해 보이는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미리 준비해 두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 그.건 상관.없.다. 과거.의 은.혜가 있.으니.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그대.만 온 것.인지 아까.부터 궁.금하더.군. ]
“그는…….”
다크 나이트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부자연스러움을 의식한 듯 곧 풀기는 했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사정이 있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적에게 수락할 수 없는 권유를 받았지만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틀어박힌 탓에……. 아마 다음에는…… 볼 수 있겠지요.”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말하는 목소리에 더해 꽉 이를 악문 입과 격앙되어 붉어진 얼굴은 무언가 사정이 있었음을 짐작케 했다. 나는 그 표정에서 이상하게도 슬픔을 느꼈다.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담은 슬픈 눈이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용은 그 모든 것을 투명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눈앞이 밝게 변하며 코르의 앞에 선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기 전까지도 그러했다…….
“잘 보셨습니까?”
긴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원래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용의 정신체라는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음… 뭐라고 잘 대답해 줘야 할 것 같은 표정인데. 뭐라고 하나.’
“예…… 뭐. 덕분에.”
이렇게 말하면 되려나. 다행히도 남자는 내 목소리에서 별달리 이상한 기색은 느끼지 못한 듯했다.
“사실 당신이 보았을 세 가지 기억 중 마지막 하나는 코르가 추가로 집어넣은 겁니다.”
‘추가로……?’
아, 그러고 보니 마지막 기억은 슈페리어가 없이 다크 나이트와 코르만 나왔었나. 왜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남자가 또 선수를 쳐서 물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 마법사의 흔적들을 쫓아 달려왔다고 말씀하셨죠? 어느 곳들을 거쳐 왔었는지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청해도 괜찮겠습니까?”
“그간의…… 이야기를 말입니까?”
“예. 무척 궁금했거든요. 꼭 듣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부드럽게만 말하던 남자가 처음으로 목소리에 압력을 실었다. 나는 한동안 고민하다 이것도 퀘스트를 해결하는 데에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서 이야기를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그렇고, 슈페리어는 아직까지도 침묵만 지키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이상한걸. 방금 전의 기억을 보면 코르라는 이 용과 슈페리어는 사이가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뭐…… 말하다 거슬리는 부분이 나오면 알아서 제지해 주거나 하겠지. 아무래도 자기와 관련된 이야기니까.’
나는 적당한 각색을 섞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NPC들에게는 이 상황이 현실 상황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감안해 퀘스트라든가, 아이템 같은 용어는 전부 바꾸었다. 맨 처음 토렐리트의 마법사 탑을 찾으려다 베르먼 마법사를 만나 슈페리어와 관련된 전설을 듣고 슈페리어 브로치를 받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거쳐 왔던 던전들과 가장 최근에 엘프 이루미네를 만난 뒤 그녀의 제자 칭호까지 받고 나서 레쥴의 꽃을 찾아 여행했던 사연으로 끝을 낼 때까지 남자는 내 말에 충실히 귀를 기울였다. 중간중간 묘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내 말을 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저는 이곳까지 오게 되었던 겁니다.”
“흥미롭군요. 고작 그 정도의 단서로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에 놀랍다고 해야 할지……. 게다가 엘프족의 마지막 엘 카라나, 이루미네라면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녀의 제자 칭호를 받다니 정말이지 놀랍다고밖에…….”
남자는 꽤 감탄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된 ‘이루미네의 제자’ 타이틀 때문에 무척 기분이 하강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잘 잊고 있었는데……. 다시 돌이켜 봐도 그건 퀘스트를 빙자한 굴욕이었다고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별것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의아했던 점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처음 들려주었던 전설에 관해서 말입니다만…….”
전설이라니…… 하고 반문할 뻔했던 나는 그게 곧 퀘스트를 받기 전에 베르먼 마법사에게 들었던 7영웅 전설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거기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나는 전에 들었던 전설의 구절을 떠올려보며 물었다.
“은유된 영웅들의 정체에 대해 당신이 말해 준 얘기가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있더군요.”
“변질된 이야기라고요?”
전설에 나온 빛의 영웅이니, 검은 영웅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베르먼 마법사가 추측했던 것이 지금까지 그리 틀리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되어 그대로 말해 주었었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말에 놀라 조심스럽게 묻자 남자가 고개를 확실하게 끄덕였다.
“인간들에게는 500년이라는 시간이 진실까지 퇴색될 정도로 긴 시간인지 모르겠으나, 코르와 같은 용들에게는 고작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는 시간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당신들에게는 전설이라는 일이 이쪽에게는 어제 겪었던 것처럼 생생한 일이라는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당신이 여기까지 오도록 가장 중요한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저는 더 놀랍습니다. 엘프 이루미네는 당신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습니까?”
‘뭐야……?’
그 말을 듣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루미네가 직접 500년 전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은 전쟁 당시보다는 전쟁 후의 이야기 약간 정도뿐이었다. 그래도 과거에 대해 내가 물어본 적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 같고…… 그래, 맞다. 다크 나이트에 대해서 물어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이루미네가 그때 달이 떴다고 내쫓는 바람에 한 마디도 제대로 못 듣고 쫓겨나왔었구나.’
“인간들의 전설이라는 것은 사실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되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보았던 것만을 토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전설의 당사자들이 실제 겪었던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시선으로만 기록하는 일이 생기고, 그 잘못된 이야기를 그대로 계속 구전하면서 변질시키다 보니 나중에는 아예 허구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 500년밖에 되지 않아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은 모양이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문제가 이런 경우에서 나온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금까지 전혀 고려해 보지 않았던 문제가 연달아 나오자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 전설 이야기는 퀘스트의 초석이 된 이야기였고, 나는 그것에 대해 신뢰를 하고 안 하고의 여부를 아예 느끼지 못했었다. 누가 퀘스트를 하면서 그런 것을 고려한단 말인가? 하지만 너무나 현실 같은 미스트에서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군요. 전설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실제 전설이라는 이야기 속의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는 후대의 인간들은 사실을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그 이야기에 대해 의심 없이 계속해서 변질시키며 기록해 왔겠죠. 이해합니다.”
“…….”
정말이지 사람 골 때리는 게임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했다. 누가 게임을 하면서 들은 전설의 원류가 된 사건의 진실 따윌 고려하면서 플레이한단 말인가? 이야기가 그렇다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플레이하는 거지.
놀라움과 허탈함 속에서 나는 남자의 말을 계속 들었다.
“하지만 인간보다 오래 사는 존재들은 절대 진실을 잊지 않죠. 코르는 거의 유일하게 자신이 알고 있던 인간들의 진실이 변질된 채 내려온 것에 대해 무척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코르는 500년 전에도 움직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코르가 만났던 두 명의 인간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진실만을 알고 있을 뿐, 그 이야기에 나온 다른 인간들에 관해서는 다른 변질된 것이 있더라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듣고 싶으냐는 눈빛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니 도대체 이렇게 거창하게 말한 500년 전의 변질된 사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설마 별것 아닌 건 아니겠지.
남자는 길게 숨을 내쉬고 나서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로드 슈페리어라 불렀던 그 붉은 머리 마법사의 곁에 있었던, 자아를 가진 검을 소유한 마물 처단자. 그러니까 그 이야기에 나왔던 검은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는 동족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뭐……?’
튀어나온 것은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문제가 되었던 문장이 바로 ‘검은 영웅이 배신했다’는 부분이었다니!
전설 전체에서 그 문장은 꽤 인상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군이었던 이가 배신했다는 문장 때문에도 그렇지만, 같은 영웅이 그를 죽였다는 비극적 상황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지금까지 그 상황과 관련된 슈페리어의 기억이나 상황에 대한 증언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 놀람과 동시에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퀘스트를 시작한 뒤 로드 슈페리어의 이야기를 쫓아오면서 느꼈던 모든 흥미를 단숨에 두 배로 증가시킬 듯한 반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흥미로 불타오르는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방금 당신이 보았던 세 가지 기억 중 코르가 임의로 보여 주었던 마지막 기억이 그것을 설명하는 데 가장 좋은 증거가 되겠군요. 그 남자는 코르의 피를 받으러 왔었습니다. 그 남자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즉 조만간에 닥칠 죽음을 각오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코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때 그가 말했던 ‘받아들일 수 없는 적의 요구’란 마신 측의 적이 마법사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말했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날은 요구의 기한이 촉박하게 다가왔던 때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전투뿐이었겠지요. 그리고 코르에게서 피를 받아간 그 남자는 곧바로 혼자서 마신 측으로 찾아갔습니다. 코르가 직접 길을 알려 주었었으니 이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보통 그런 이가 배신을 하러 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럴 수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이 새로운 정보들이 내가 해 왔던, 그리고 해 나갈 퀘스트에서 분명히 뭔가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듦과 동시에 나는 이것들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넣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허리춤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어 내려다보려던 순간 오른손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 녀석을 거기로 보냈던 것이 너였다니……! ]
지금까지 침묵만을 지켰던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휘청거리자 드래곤의 정신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러나 내밀어진 손을 거칠게 잡아챈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인 오른팔이었다. 남자가 놀란 눈으로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남자의 팔을 잡아챈 오른손의 검지가 일어서서 빙글 작은 원을 그렸다.
‘이것은……? 방금 기억에서 보았었던……!’
그 이상 생각하기도 전에 오른손에서 빛나기 시작한 마법이 시선을 빼앗았다.
푸화하학!
손바닥에서부터 종이 풀리듯이 뿜어져 나온 구불거리는 얼음이 순식간에 눈앞의 남자를 꽁꽁 얼음 속으로 가두고도 용의 거대한 본체의 일부분까지 덮어버렸다.
‘뭐, 뭐야? 이건 내가 알지도 못하는 마법인데,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나?’
[ 그대, 나에게 입의 허가도 내어 줘. ]
내 실력은 고작 6서클에 불과한데, 내가 본 적도 없는 마법이 손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배운 모든 마법들보다 더 고위에 있는 것임을 깨닫고 가벼운 충격에 빠졌다. 그때 얼음 동상이 된 남자에게서 손을 뗀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전하면 되잖아. 이게 무슨 짓이냐.”
[ 내가 직접 물어야 해! ]
엄청난 기세 때문에 또다시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젠장!’
슈페리어에겐 전혀 피해가 없는데 놈이 열을 낼 때마다 나에게만 피해가 온다는 것은 무척 열 받는 일이었다.
‘이 일만 끝나면 반드시 네놈의 막대기를 두 동강 내 버리겠어.’
“마음대로 해.”
후와아악!
퉁명스레 내뱉자마자 오른팔에서부터 머리로 어떤 기운이 확 확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오른팔의 허가를 처음 내줄 때처럼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고통이라고 해야 할지, 짜릿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감각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그때부터는 내 입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르. 직접 나와서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내 목소리임에도 내 것 같지 않은 말투가 멋대로 말을 하는 것을 듣는 기분은 참으로 생경했다.
‘이젠 정말, 게임하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군.’
부드럽지만 강한 압력을 담은 목소리가 나간 뒤 얼마나 지났을까. 아까 들었었던 용의 큰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게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 ……이.것이 무.슨 행.동인.가? 』
“나다. 너를 신성기사단의 공격에서 구하고, 마지막 그날의 전까지 왔다 갔던 그 내가 바로 여기 있다.”
다짜고짜 나라고 하면 그걸 저놈이 어떻게 알겠냐. 답답함을 느끼며 좀 더 상황 설명을 제대로 해 줘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껴 목소리를 내 보자, 뜻밖에도 슈페리어가 내 입을 빌려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말을 못하는 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아…… 죄송합니다만, 아까 지금까지의 여정을 이야기했을 때 빼먹은 것이 있었습니다. 실은 레쥴의 꽃을 구하러 갔던 곳에서 얻은 물건 중에는 이…… 막대기도 있었는데, 이 안에는 로드 슈페리어라 불렸던 마법사의 분신이 들어 있어, 자아를 가지고 이야기하거나 지금처럼……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본인의 요청 때문에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군요. 이해하고 넘어가십시오.”
말을 이렇게 많이 한 것도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새삼스레 내가 왜 상황 처리를 해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도 내 말이 로드 슈페리어와 코르라는 용 사이에 먹힌 것만은 확실했다.
『 분.신? 』
“그래. 나는 마신을 봉인하고 10년 뒤, 처음으로 길을 나서면서 남겨졌던 분신이다. 때문에 너를 이곳으로 옮겨온 것도, 이자가 이야기했던 내가 남겼다는 다른 모든 흔적들을 남긴 기억도 내게는 없어. 그렇기 때문에 지금 듣는 이야기도 내겐 처음이다. 코르, 네가 정말로…… 그 녀석을 그때 거기로 보냈다는 말이 사실이야?”
용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과 같은 몸뚱이는 여전히 움직임 없이 그대로였지만 나는 어쩐지 내 몸이 스캔되는 것처럼 주시당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찜찜한 느낌이 한참 동안 맴돌다 조금 괜찮아졌다 싶었을 때 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그렇.군. 두.명이. 있.는것.과 마찬가.지.라고 이.해해.도 괜.찮겠.는가? 』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 놀.랍군. 인간.의 몸.으로 분.신체.를 뽑.아내.는 경지.에 이.르.렀었.다니. 이.전에. 나.를 여.기로 데려.왔.던 너.는 분신.체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방금.전.에 했.던 이.야기.를 이.미 마쳤.지. 』
“……이미 했었다고?”
『 그.렇다. 그것.이 내.가 그때.의 너.에게 해.줄 말.이었.다고 여.기고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
슈페리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서서히 허리춤이 뜨거울 정도로 달아올랐던 슈페리어 막대기의 열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 열기는 슈페리어의 놀라움과 분노 같은 감정이 격해졌을 때 비례해서 반응을 일으키는 것인 듯했다.
한참 뒤 슈페리어가 진정한 기색으로 내 입을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나는…… 다시 듣고 싶어. 아니, 보여 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대부분의 과거를 알고 있지만,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벌어졌던 과거와 내가 떨어져 나온 이후의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이 말을 들으며 나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결국 나와 함께 있는 이 슈페리어가 어쩌면 나보다도 더 이 퀘스트에 대해 모르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로 인해 깨달은 두 번째는 이 자식이 앞으로도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약간 속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든 말든 슈페리어와 용은 자신들끼리의 대화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 그.것은 괜찮.다. 어차.피 한.번 했던 일. 두 번 못하.는 것.도 아.니니. 눈.을 감.아라. 』
“고마워.”
신경이 쏠리다 못해 내가 있다는 건 완전히 잊은 듯한 태도들이었다. 나는 어디까지 가나 보자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아까 용의 정신체가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을 떴을 때는 아까 마지막으로 본 기억의 끝에서 무릎을 꿇었던 다크 나이트의 모습 그대로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크 나이트는 어쩐지 복잡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같이 쳐다보자 용과 다크 나이트 사이의 허공에 떠 있는 붉은 구체 같은 것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액체인가?’
아름답게 일렁이는 붉은 액체 덩어리가 천천히 내려와 다크 나이트의 품에 안기듯이 가라앉았다. 다크 나이트는 눈을 내리깔고 눈썹을 살짝 떨며 그것을 미리 준비해 둔 듯한 자루에 넣었다. 놀랍게도 액체는 깨지거나 스며들지 않고 자루에 공처럼 쏙 들어가는 신기한 모습을 보였다.
“용의 피를 기꺼이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른.자.의 손.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 ]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에 박힌 검을 뽑아 칼집에 넣으면서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다크 나이트가 자루를 허리에 둘러매고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 듯 뒤돌아섰을 때, 갑자기 용이 한마디 질문을 던졌다.
[ 너.는 이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
“저에게 물으신 것입니까?”
약간 당혹한 표정을 짓고 뒤돌아본 다크 나이트가 대답을 망설이면서 고민하더니 이내 포기한 얼굴로 쓰게 웃었다.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마신의 기사라는 인간이 우리들에게 그의 육신을 제물로 바치도록 내놓으면, 얼마 남지 않은 인간들의 피난성을 파괴하지 않고 이 이상의 전투 없이 패배한 것으로 보아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하지만 그따위 것 때문에 고민하는 녀석이 있는 이상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 네.가 갈. 생각.이군. 무모.한 일.이다. 그.곳.에는 흑.룡과 흑룡.의 감.정을 받아.들인 인.간이 있다. ]
무감정한 말투였음에도 기이하게 걱정스러움을 담은 듯한 목소리였다. 다크 나이트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 파리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지금까지 기억들을 보아오면서 처음 보는 다크 나이트의 큰 미소였다.
“그 무모함이 저의 맹세를 긍지로 바꾸어 줄 것입니다.”
[ 이.해할. 수가. 없군. ]
“이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것은 저의 선택이고, 저의 삶이며, 그리고 오롯이 저만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을 남에게 알아 달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것이니까요.”
말을 마친 다크 나이트의 곧게 편 어깨와 등은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보며 내 과거의 상념에 사로잡히려던 순간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멍청한 자식……. ]
용은 다크 나이트의 말을 듣고도 못마땅한 듯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가 다크 나이트가 이제 되지 않았느냐는 듯 가려 했을 때 마지막 말을 던졌다.
[ 그.래도 너.는 아.직 나를 살.려 준 빚.이 있으.니, 이대.로 죽.으.러 가는 것.을 지켜.보.기에.는 내 심.정이 편하.지 않.다. 그. 피.로 네 목적.을 다.하면 이.곳.으로 다시 찾아.오.라. 딱.한.번 너.를 구명.할 용.의 피로 만.든 결.계를 걸어 주겠.다. 더불.어 그.들의 본거.지.가 차.가운 북.의 산맥.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터. 거기.까.지만 보.내 주지. ]
“그렇게 많은 대가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 용.의 목숨.은 그.렇게 싼 것.이 아니.다. 이 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으.니 나.가라. ]
다크 나이트는 잠시 거대한 용의 본체를 쳐다보았지만 결국 그 이상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휙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얼굴에 찬 무거운 결의의 무게가 보고 있는 이쪽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다시 한 번 눈앞이 밝아졌다가 돌아왔을 때는 아까 얼어붙어 있던 용의 정신체와 얼음 덩어리들이 싹 사라져 있었다.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용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슈페리어 사이에서 나 또한 침묵을 지켜야 마땅했겠지만 불행히도 그럴 수는 없었다.
“윽……!”
갑작스러운 현기증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내려앉자 당황한 슈페리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대, 왜 그래? ]
“나도… 잘 모르겠…….”
말할 힘도 없이 온몸의 기운이 뭔가에 다 쏟아부어 흘러나간 것 같았다.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면서 힘없는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노력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이 상황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언제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자주 겪었던 것 같은 느낌인데……?
‘……설마?’
“상태창 오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