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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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아지랑이 속에 파묻혀 버릴 듯한 뜨거운 사막의 햇볕.

그러나 그 밑을 걷고 있는 두 남자는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옷과 갑옷으로 몸을 가리고도 전혀 아랑곳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털썩!

“으악, 카프!”

아니, 전혀 상관없었던 것은 두 사람 중 한 명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다 말고 갑자기 푹 쓰러진 검은 케이프 로브의 남자를 받아낸 화사한 금발머리 청년이 다급하게 품속에 손을 밀어 넣어 푸른 포션을 꺼내 들었다.

“또 체력이 다할 때까지 참지 말고 그냥 마시라고 했잖아.”

“괜…찮……. 조금만 쉬면…….”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덮어쓴 모자 밑의 입이 달싹거리자, 금발 청년의 인상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괜찮아서 벌써 세 번씩이나 쓰러졌어? 으아, 속 터져! 마셔! 그냥 꾹 참고 마셔버려!”

“우우읍.”

금발 청년은 그 말과 함께 쓰러진 청년의 입으로 인정사정없이 포션 주둥이를 콱 밀어 넣었다. 쓰러진 이가 미약하게 꿈틀대며 반항하였으나 그것도 잠시, 힘없는 기색으로 꿀꺽꿀꺽 포션을 넘기는 모습을 보고 금발 청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화아 하고 청량감 넘치는 빛이 몸을 한 번 맴돈 뒤 케이프 로브의 남자는 자신을 받치고 있던 금발 청년의 팔에서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욱…….”

자리에서 일어선 케이프 로브의 남자는 괜찮아진 안색과는 달리 잠깐 헛구역질을 참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정말 이 맛은 못 참아 주겠군.”

이를 갈며 내뱉은 그 말에 금발 남자가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나도 알아……. 그거 생긴 거랑 다르게 화장실 맛인 거. 하지만 사막에서 지속적으로 체력이 떨어져 죽는 것보단 낫잖아? 안 그래도 마법사라 체력도 약하면서…….”

“마법사가 체력이 약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너의 신성 보호 스킬이 1인용 패시브라는 게 더 문제겠지.”

“그건 어쩔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이렇게 비싼 포션도 사온 거고…….”

그 말을 무시한 케이프 로브의 남자는 잠시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사막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어느 한 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지도창의 반짝이는 지점에 거의 도착했어.”

“어, 다행이네. 이제 그 포션도 하나밖에 안 남았었는데.”

그 말에 다시 어깨를 굳힌 케이프 로브의 남자가 금발 남자를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크란.”

그놈의 포션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라는 압력이 담긴 힘 있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러나 전 같았으면 움찔했을 금발 남자, 크란은 그 눈빛에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마주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는 건 죄가 아니다! 네가 픽픽 쓰러질 때마다 내가 얼마나 기절초풍하는지 알면서 그래? 가슴이 막 360도 보드 서핑을 한단 말이야.”

“뭐…….”

어이없어하는 케이프 로브 남자, 카프가 말을 잃든 말든 당당하게 말한 크란은 미소와 함께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음……. 그래도 카프, 한 번만 더 체력이 떨어지면 좋겠다.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업어서…….”

“블링크.”

크란이 꿈에 가득 찬 얼굴로 뭐라 중얼거리든 말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무표정하게 블링크를 사용한 카프는 이미 몇 백 미터쯤 앞으로 나가 있었다.

“……으잉?”

그에 버림받듯 뒤처진 크란은 멍하니 멈춰 서 있다가, 잠시 뒤 훌쩍거리며 사막을 홀로 뛰었다.

“잠깐만! 기다려, 카프! 혼자 가는 게 어디 있어? 기운만 차리면 남이다 이거지! 블링크 쓰지 마! 기다리라니까!”

크란이 뭐라고 외치거나 말거나 카프는 엄청난 속도로 깜박이며 멀어져갔다. 그의 뒤쪽으로 펄럭이는 케이프 로브 자락이 보였다. 그 뒤를 어쩔 줄 몰라 하며 쫓아가는 크란의 앞에, 초록색 음영이 사막 너머로 오랫동안 감추어 왔던 모습을 어른어른 드러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사막 위에 펼쳐져 있는 울창한 숲.

모래와 어울리지 않는 신록의 숲은 아무도 닿은 적이 없던 그곳에 최초로 찾아든 방문자들을 반기기라도 하듯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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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숲. 아무래도 내 목적지가 맞는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골을 내고 있는 크란에게 말을 걸었다. 크란은 내가 숲에 도착한 지 한참 후에야 겨우 쫓아오느라 삐친 상태였다.

“그렇겠지. 그렇게 서슴없이 날 사막에 버리고 갔는데 허상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말 속에 뭐가 있다.”

골이 나서 불량해진 눈초리쯤이야 신경을 끄면 되지만 툴툴대는 말투는 어쩐지 많이 거슬려 조용히 한 손을 들었다.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맹렬하게 회전하는 스크류 파이어 볼이 생성되었다.

“내… 착각이겠지?”

화르르륵!

“…….”

그동안 만났던 몬스터들을 통해 이 스크류 파이어 볼의 증진된 위력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았던 크란이 잠시 꿀꺽하고 침을 삼키다가는 이내 크흑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응…. 착각이고말고. 당연히 착각이지.”

“그래. 그럼 숲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바로 울창하게 우거진 사막 위의 숲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뒤에서 작게 ‘어휴, 진짜 너무한다, 너무해!’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나를 따라오는 크란이 나이에 안 맞게 귀여워 보여 무심코 웃음이 날 뻔했지만 참았다.

그러고 보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을 때도 내내 불평 한 마디 없이 도와주었던 녀석인데, 망설임 없이 버리고 간 건 조금 심했나?

‘진짜 섭섭해하는 것 같은데 어쩔까…….’

그렇게 생각하며 잠깐 돌아볼까 어쩔까 고민하던 나는 갑자기 어깨를 덥석 감아오는 팔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옅은 금발 사이로 드러난 얼굴이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지금 나 삐쳤을까 봐 고민했지, 응?”

이 자식이 독심술을 익혔나?

“훗. 척하면 딱이지. 드디어 카프가 사람 때문에 고민까지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 형님은 너무 기쁘…… 케엑!”

너 나보다 한 살 더 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잊었냐?

주저 없이 그 얼굴을 손바닥으로 눌러 밀쳐버린 나는 속도를 두 배로 빨리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야야. 진짜 가차 없어. 먼저 가지 마, 카프!”

그래. 역시 저러고 쫓아오는 게 크란다운 거다. 괜히 신경 써 본 게 더 이상했지. 이런 것보다도 나에겐 지금 목전에 닥친 세 번째 기억 퀘스트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

‘세 번째 슈페리어 퀘스트…….’

이번 퀘스트를 찾기 위해 나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아무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알려진 죽음의 사막을 건넜다. 퀘스트 장소를 나타내는 지도창의 붉은 점이 사막의 끄트머리에서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잠시만 노출되어도 체력을 엄청나게 떨어뜨리는 태양의 저주와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나라고 해도 꽤 큰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떤 포션도 사막에서 1분 이상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을 유지하게 하지 못했고, 게다가 내게는 그 포션 값을 다 댈 만한 돈도 없었다. 수많은 시도 끝에 크란의 신성 보호 스킬이 데미지를 반감시킨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 스킬은 1인용이라는 게 문제였다.

결국 신성력을 빌리면 태양 빛의 저주를 상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힌트만 얻은 채 우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 사막도시 발라 모냐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미스트의 중앙도시, 자그레브를 떠난 지 미스트 내의 시간으로 한 달여가 흘렀을 때의 일이었다.

한 달 동안 나와 함께 이곳저곳 구르느라 크란의 꼴은 꾀죄죄했다. 다행인 건 덕분에 녀석이 자그레브에서 얻은 골든 건틀렛을 어느 정도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크란이 밝은 표정으로 앞을 가리켜 보였다.

“저기가 바로 발라 모냐크야! 카프! 보여?”

아지랑이 같은 웅장한 그림자를 향해 다가가는 사이 도시는 곧 가까워졌다. 열 명이라도 손을 잡고 동시에 지날 수 있을 듯이 큰 성문을 통과하자 온통 모래 빛의 도시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오오. 멋있어!”

모래 색 집과 모래 색 성벽, 모래 색 땅도 모자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천으로 얼굴과 온몸을 싸매 가린 사람들도 많은 것을 보니 어릴 적 읽었던 아라비아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노점상들이 펼쳐 둔 알록달록한 천 위에 놓인 아이템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괴상한 아이템들이 수도 없이 많아 도저히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크란이 같은 곳을 쳐다보고는 “뭐야.” 하고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였다.

“역시 신기한 아이템들이 많네. 발라는 그런 게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대. 혹시 희귀 마법서 같은 것도 중간에 껴 있을지 모르니까 시간 내서 한 번 구경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같이 가볼래?”

“그건 상관없지만 넌 그런 걸 다 어디서 아는 거냐?”

나와 마찬가지로 발라에는 처음 와보았을 텐데 익숙하다는 듯이 설명하는 크란의 모습에 갑자기 그동안 편하게 이용해 왔던 그의 게임 내 지식들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응? 뭐, 그거야 사람들이 글이나 방송으로 올리는 기사나 리뷰, 정보만 해도 하루에 몇천 건이 넘는걸. 미스트 관련 커뮤니티 한두 개만 제대로 체크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알 수 있어.”

참고로 난 ‘미스트베이 월드 커뮤니티’를 추천할게! 되게 좋아! ……어쩌고 하며 신나게 떠드는 말은 반쯤 흘렸지만 그래도 제법 유용한 정보였다.

나는 여태까지 대부분 공식 홈페이지만 살폈기에 비공식 커뮤니티 쪽은 뒤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만으로는 얻을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한번 찾아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저 앞으로 달려간 크란이 적당한 여관을 찾았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크란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로그인할 때마다 접속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관에 투숙객으로 등록해야 했다. 본격적으로 사막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일단은 정보 길드부터 가자.”

크란이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그것이 부담스러워 밀어내면서 “정보 길드?” 하고 반문하자 크란이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NPC들끼리 비밀리에 운영하던 곳인데, 최근 어떤 이유에서인지 각 도시마다 하나씩 건물을 세우고 활동한다고 하더라.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땐 이곳만한 곳이 없다는 평이지. 한계가 있는 유저들의 정보와는 달리 이 세계의 깊은 부분까지 잘 알고 있는 NPC들의 정보가 기반이라 무척 쓸 만한 게 많다고 하거든.”

“흠…….”

크란의 말대로 지금 나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면 한번 가 보지.”

“좋은 선택이야. 길은 뭐……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되겠지? 저기요, 잠깐 길 좀 물어도 될까요!”

지나가던 여성 유저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자칭 매력적인 미소를 흘리는 크란을 보며 역효과가 나면 어쩌려고 저러나 싶었지만, 나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크란이 물어 올 정보가 곧 내 정보였으니까.

처음에는 경계하던 유저들을 화려한 화술로 녹여 놓으며 한참 수다를 떨던 크란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밝은 얼굴로 뛰어왔다.

“알아냈어. 생각보다 가깝더라고. 바로 저쪽으로 돌아가면 된대. 두루마리와 신발이 그려진 간판이라니까 알아보기 쉬울 것 같아.”

크란의 말대로 정보 길드를 찾는 것은 무척 쉬웠다. 얼마 가지 않아 나타난 커다란 두루마리와 신발 간판을 단 건물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데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대고 있었던 것이다.

정보 길드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빴다. 1층에 나란히 앉아 있는 NPC 접수원들 중 분홍색 머리에 고풍스러운 안경을 걸친 이의 앞에 서자, 곧 친절한 미소가 돌아왔다.

“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정보 판매? 아니면 탐색?”

“탐색 쪽입니다.”

“탐색이요……. 흠.”

무릎 밑에서 엄청나게 두꺼운 장부를 꺼내놓은 접수원이 종이에 코가 닿을 만큼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떤 사항에 대해 알고 싶어서 오신 거죠?”

“사막. 죽음의 사막을 건널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듣고 있던 접수원은 그 말이 끝나자 몹시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사막이요? 도시 옆의 저 사막?”

“그 사막 말고 죽음의 사막이 또 있습니까?”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접수원은 한동안 안경만 만지작거리며 장부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죽음의 사막과 관련된 정보는 접수 측에서 가볍게 취급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정보예요. 아무래도 손님들께서는 한 층 더 위로 가셔야 할 것 같네요. 안으로 들어가시다 보면 중앙 계단과 그걸 지키고 있는 경비 대원들이 있을 거예요.”

접수원이 명함 크기의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재빨리 휘갈겨 쓴 뒤 내게 건넸다.

“그분들께 이 종이를 드리세요. 그러면 통과시켜 줄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가자, 크란.”

“어, 응!”

들은 말대로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 대원들이 지키고 있는 계단이 하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간간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 위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우리가 그곳으로 다가가자 경비 대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들고 있던 창을 교차하며 앞길을 막았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위층에 볼일이 있습니다.”

방금 접수원이 준 종이를 그들의 눈앞에 들이대자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유심히 들여다보던 경비대원들이 곧 막고 있던 창을 거두었다.

“올라가십시오.”

위층으로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크란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 옆에 바싹 붙어서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다 같은 정보 길드일 텐데 굳이 여기만 이렇게 경비를 서야 하는 이유가 뭐야? 괜히 폼 잡고 겁주려고 저러는 건 아닐 테고.”

“일단 조용히.”

“아, 알았어.”

감각을 곤두세운 채 위로 올라가자 아까의 떠들썩하고 바쁜 분위기와 달리 조용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때, 갑자기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크란이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나 또한 조금 놀랐지만 무표정을 가장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접수용 책상을 놓고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어쩐지 음침한 인상의 접수원이었다.

“음…… 저희는, 그러니까…….”

“죽음의 사막을 건널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크란의 말을 자르며 대답하자 접수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죽음의 사막…… 말씀이십니까?”

“…….”

그의 눈이 가늘어질수록 고조되는 긴장감에 머릿속으로 여러 마법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는데, 순식간에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인 접수원이 양손을 내뻗어 나와 크란의 손을 각각 하나씩 쥐고 힘차게 악수를 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크란의 얼빠진 얼굴을 보며 접수원이 눈을 반짝였다.

“하하하, 물론 있고말고요. 저희 정보 길드 발라 모냐크 지부에 잘 오셨습니다. 아까 뭐라고 하셨죠? 건널 수 있는 방법이라고요?”

“예.”

“흠…… 흔하게 찾는 정보는 아니군요. 잠시 안쪽에 다녀와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밝은 표정으로 일어선 남자가 그늘이 진 안쪽 복도로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한참 뒤에 돌아온 남자는 손에 두꺼운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곰팡내가 날 듯 낡은 종이를 봉인하고 있던 끈을 풀자 푹 하는 먼지와 함께 종이가 밑으로 굴러 펼쳐졌다.

“쿨럭, 쿨럭.”

크란이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어디 보자……. 일단 ‘죽음의 사막을 건널 방법’에 대한 정보에 100퍼센트 일치하는 정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옛날에 사막을 건너 사라졌다 돌아왔다는 사람에 대한 정보는 있군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예. 옛날이라고 해도 몇십 년 전쯤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음. 죽었다는군요. 아, 이건 애석하네요. 하지만 그 집안은 대대로 신비한 약술을 취급해 온 집안이라고 하는 데다 후손이 아직도 이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그 후손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가 없지만 그래도 현재 살고 있는 곳 정도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도 좋습니다. 정보의 대가는?”

“이 정도로는 얼마 안 됩니다. 5골드 정도면 되겠군요.”

…5골드가 언제부터 얼마 안 되는 금액이 되었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크란이 내가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로만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일단 주라는 뜻이었다. 결국 얌전히 돈을 내고 사막을 건너갔다 돌아왔다는 사람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집주소를 구하고 나서, 우리는 싱글벙글 웃는 접수원의 정성 어린 배웅을 받으며 정보 길드를 나설 수 있었다.

“정보 길드에 신용을 쌓아 둬서 나쁠 건 없을 거야. 조금 비싼 것 같아도 어쩌겠어. 아쉬운 쪽에서 줘야지. 어떤 사람은 대가를 안 주려고 튀었다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자꾸 생겼대. 울면서 다섯 배의 대가를 바치고 나서야 벗어났다는 경험담을 올렸더라고.”

크란이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 흔들거리며 말했다.

“응.”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일단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도착한 곳은 평범한 주택가였다. 도시의 특성상 모든 집들의 색이 비슷비슷했기에 앞에 적혀 있는 숫자를 보기 전에는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생각보다 찾는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여기가 맞지?”

“맞는 것 같은데.”

“좋아.”

똑똑똑.

크란이 단단히 각오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잠시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문틈으로 누군가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응? 이게 웬 미남이람?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고개를 내민 이는 탐스러운 다갈색 긴 머리를 한쪽으로 모아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여자였다. 호의적인 눈빛의 상대를 보며 크란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안녕하세요, 친절하시고 아름다운 분. 저는…… 우웁! 켁!”

“실례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희는 이 집에 살고 계신 분께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듣기로는 약술과 관련이 깊은 분이 계시다고…….”

크란의 입을 막고 옆으로 밀며 말하자, 우리를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으로 훑어본 상대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절 찾아오신 거네요. 요즘은 미남 손님이 많네. 좋아요. 들어오세요.”

들어가려고 보니 생각보다 문이 상당히 작았다. 허리를 숙이고 조심스레 들어서는데 집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렌! 나오지 말아요.”

‘……렌?’

집 안에 또 누가 있나 싶어 바라본 곳에는 안을 볼 수 없도록 화려한 구슬발을 쳐둔 방이 존재했다.

“아, 두 분은 여기에 앉으세요.”

집 안은 문 밖과는 달리 크고 말끔했다. 돌로 만들어진 가구와 한쪽 벽면에 붙은 찬장에 늘어선 가지각색의 유리병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일단 마실 것 좀 내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부엌 쪽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크란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정말 여기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얻어야 해.”

이제야 겨우 실마리의 끄트머리 정도를 잡은 듯한 느낌인데, 놓칠 수야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인은 쟁반 위에 차갑고 걸쭉한 요구르트 같은 것이 든 컵 세 개를 담아 나왔다. 각자의 앞에 하나씩 놓아 준 뒤 자리에 앉은 그녀가 드디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에데니아 무하람. 사랑의 묘약 제조로 유명한 무하람 가의 후예죠. 저를 찾아와 물으실 것이라는 게 뭔가요, 손님들?”

‘사랑의 묘약?’

당황스러운 말에 놀라기도 전에 크란이 에데니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크게 외쳤다.

“제, 제게 사랑의 묘약을 하나만 팔아 주세요!”

뻑!

응징은 소리도 없이 곧바로 이루어졌다.

얻어맞은 정수리를 붙잡고 땅바닥으로 쓰러지는 크란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저는 카프로스. 이쪽은 크라토스입니다. 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침을 한 번 삼킨 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죽음의 사막을 건너갈 방법을 찾고 있던 도중, 무하람 가의 사람이 예전에 사막을 건넜다 돌아온 적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어서였습니다. 혹시 죽음의 사막을 건넜다는 분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에데니아는 음료를 마시던 것조차도 멈춘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놀랐다기보다는 무언가 평가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한참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크란까지 본 에데니아가 다시 음료를 삼키며 눈을 깜박였다.

“그건 왜요?”

“죽음의 사막을 건너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건너려 하죠? 그곳의 태양이 저주받았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거침없는 반문에 어금니를 한 번 깨문 뒤 나는 퀘스트를 하기 위해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적당히 각색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막이 아니라 그 사막의 저편에 제가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어디인지는 알지만 어떤 곳인지는 모르는 곳입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이유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혹시 조금이라도 관련하여 어떤 것을 알고 계시다면 이야기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대답 없이 음료를 마시는 속도만 점점 더 높여 꿀꺽꿀꺽 마지막까지 다 비워버린 에데니아가 컵을 탁자에 탁 소리를 내며 놓았다. 그 소리에 놀란 크란이 희미한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키자 에데니아가 부드럽게 눈을 휘면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상하군요. 하필 이런 때에,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이렇게 또 오다니. 무하람 비전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역사에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러면…….”

“좋아요. 제가 알고 있는 건 말씀해 드릴게요. 하지만 그 전에, 혹시 제가 쓸데없는 말까지 꺼낼지도 모르니 이야기를 바로잡아 줄 분이 필요하겠죠? 렌, 이제 나와도 돼요.”

에데니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려져 있던 방에서 잘그락거리며 발이 걷히는 소리가 났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아주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꺼운 천을 전신에 둘러 머리카락 약간과 눈, 코, 입 외에는 볼 수 있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성별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나오자마자 나와 크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눈을 보다 보니 그것이 방금 전의 에데니아처럼 물건을 감정하는 듯한 시선으로 느껴져 조금씩 불쾌해졌다.

“시라비 렌이라고 합니다.”

중성적인 목소리로 이름을 밝힌 이가 조용히 에데니아의 옆에 앉았다. 시라비 렌을 흘깃 바라본 에데니아가 얼굴에서 미소를 살짝 거두었다.

“여러분이 알고 오신 정보는 사실이에요. 저 죽음의 사막을 건넜다가 돌아온 사람이 저희 집안에 있었죠. 하지만 틀린 것도 있는데, 그건 사막을 다녀온 사람이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제 아버지도, 또 그 아버지도,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모두 사막을 향해 떠났다 돌아왔어요. 대략 10년에 한 번씩.”

나는 놀라는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그리고 저 또한 6년 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사막에 갔다 돌아온 적이 있었어요. 그러니 말하자면, 죽음의 사막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것도 무척 쉽게.”

“쉽게……?”

“예. 무척 쉽죠. 방법을 가르쳐드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에요. 다만 당신들에게 사막 너머로 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죠.”

“자격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자격은 단 하나.”

그때, 시라비 렌이라 이름을 밝힌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머리를 감싸고 있던 터번 같은 천을 풀어 내렸다. 어깨를 넘는 진초록 빛 머리칼이 흐트러지면서 얼굴 양옆으로 뾰족하게 긴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귀였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긴 귀를 숨김없이 드러낸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제게 당신들의 강함을 보여 주십시오. 제 입에서 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실력이라면 인정하고 원하는 것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엘……프?”

옆에서 뻣뻣하게 굳어 눈만 굴리는 크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에데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이 가고자 하시는 사막 너머에 어떤 것이 있는지, 누가 존재하는지 아시나요? 저분이 그 답이 되어 주실 거예요.”

에데니아와 시라비 렌이 당장 그 ‘강함’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말했기에 우리는 유예 시간을 얻고 집을 떠났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소와 달리 조용했다. 늘 시끄럽게 떠들던 크란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상념에 빠져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이동용 수레상점조차 못 본 채 계속 걸으려 하는 크란의 팔을 붙잡아 막았다.

“카프? 왜……. 아.”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수레를 본 크란이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입을 벌렸다.

“앞 좀 보고 다녀.”

“으응. 고마워.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엘프 때문에 그래?”

“어, 응. 지금껏 이종족이 나타난 적이 없었잖아. 유저들끼리 있을 거다 없을 거다 토론하던 것만 봤어서 정말 놀랐어. 난 개인적으로 이종족은 게임 내에 숨어 있을 뿐이고 언젠가는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지만 설마 퀘스트 도중에 만나게 될 줄이야…….”

이종족이라……. 그야 나도 좀 놀랍기는 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그게 놀랍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그렇게 오래 했다고?”

“음, 유저들 사이에선 미스트에 이종족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아직 구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그간 대다수였어. 그런데 사실은 구현이 안 된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유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을 뿐이라면… 지금까지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거잖아.”

크란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 주었다.

“이종족뿐만 아니라 이 게임 안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요소가 더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더라고. 괜히 새턴에서 처음부터 완벽한 게임이라고 공언한 게 아니다 싶더라. 우리가 하고 있는 퀘스트가 대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 건지도 궁금해졌고 말이야. 그런 추측을 하다 보니 정신이 없었나 봐. 하하하.”

가볍게 말하는 듯했지만, 그 내용만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이 녀석…… 이 정도로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던가?

“그러고 보니 그 엘프가 말했던 자격시험인가 하는 건 어떻게 할 거야, 카프?”

“강함을 보여 달라던 것?”

“응. 그거.”

크란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동안 나는 그에 대한 결론을 오래 고민하지 않고 얼추 내린 상태였다.

“말 그대로 해볼까 하고.”

“엥? 어떻게?”

“그 엘프도 말했잖아. 자기 입에서 졌다는 말이 나오게 하라고. 그러면 그냥 그렇게 해 주면 되는 것 아냐.”

“상대가 어떤 전력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기회가 얼마나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 카프.”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뜻을 담아 걱정스럽게 말하는 크란의 얼굴에 대고 나는 미소를 날렸다.

“상관없어. 그쪽에서 기회가 한 번이라고 한 적도 없고, 반드시 힘으로 겨뤄야 한다는 조건을 단 적도 없지. 시험 종목을 안 정하고 내 마음대로 정하라고 넘겨준 상태나 마찬가지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무거나 내가 이길 만한 게임을 하나 정해서 가져갈 거야. 혹 그쪽에서 나중에 뭐라고 하거든 네 주특기인 그 사람 정신없게 만드는 말솜씨로 대충 처리해.”

“…날 믿어 주는 것 같아서 좋긴 한데, 뭔가 좀 이상하다? 그거 칭찬 맞는 거지, 응? 카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서 나갔다. 등 뒤에서 크란이 무어라 시끄럽게 굴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졌습니다.”

우리는 다음 날, 예상보다 쉽게 시라비 렌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시라비 렌은 의표를 찔려서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에데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떨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크란의 아이디어가 좋았던 덕분이었다. 크란은 이거라면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오늘 접속하자마자 어떤 놀이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건 누구나 어릴 적 해봤을 법한 놀이였으나 동시에 더없이 살벌한 대결에 알맞은 것이기도 했다.

“당신의 강함을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무뚝뚝하게 말을 이은 시라비 렌이 고개를 숙이자 크란이 옆에서 환희와 안도가 뒤섞인 숨을 내쉬었다.

“카프, 괜찮아? 피는 안 나는 거지?”

“응.”

“아까는 정말 네 손이 꿰이는 줄 알고 심장이 다 펄떡거렸다니까. 그런데도 표정 하나 안 변한 게 정말 너다웠어.”

크란이 제안한 것은 손가락을 펼쳐 땅을 짚은 상태에서 상대방이 나뭇가지로 재빨리 그 손가락 사이사이를 찍으며 한 바퀴를 도는 게임이었다. 공격하는 쪽에서 상대의 손에 상처를 입히거나 혹은 손을 짚고 있던 자가 두려워해 손을 뒤로 빼거나 움직이면 지는 방식이었는데, 어릴 적 샤프나 연필을 이용해 자기 손을 대상으로 얼마나 빨리 찍을 수 있는가를 자랑하는, 아이들이 하던 게임의 변형판인 것 같았다.

우리가 이 게임을 제안하자 시라비 렌은 무척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피를 최소한으로 보아도 되는 건전한 승부라는 말에 응해 자리에 앉았다. 혹시라도 응하지 않는다면 그냥 죽일 각오로 달려들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불꽃 튀는 승부 끝에 졌다는 선언을 받아낸 것은 끝까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내리치는 나뭇가지 끝만 바라보았던 나였다.

“정말 대단하네요. 렌을 먼저 질리게 만들다니.”

에데니아가 한숨과 함께 마시던 음료수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사실 처음부터 당신들이 지닌 건틀렛이나 브로치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통해 저희가 기다리던 사람들 중 일부가 맞다는 걸 알고는 있었어요. 다만 말 그대로 자격을 보고 싶었을 뿐이죠. 그 놀라운 재치와 담력……. 이 정도라면 숲에서 기다리실 그분도 그리 못 미더워하진 않으시겠죠.”

시라비 렌 또한 한결 부드러워진 눈으로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제대로 소개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저 사막 너머, 엘프의 숲 엘 프라마에서 온 방랑하는 혼, 시라비 렌입니다. 손님들의 이름은 어떻게 되십니까?”

“카프로스.”

“크라토스입니다.”

“그렇군요. 카프로스 님, 크라토스 님. 여러분이 알고 싶어 하셨던 것은 사막을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이었지요.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에데니아가 만든 특수한 포션을 먹으면 인간이라도 사막의 태양의 저주에서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 가시면 되지요.”

“아…….”

‘드디어……!’

지난 한 달간의 고생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되는구나 싶어 내심 감격하고 있던 나는 때문에 시라비 렌이 이어서 말하던 것을 놓치고 말았다.

“……십시오.”

“예?”

“가시기 전에, 조금이나마 목적지에 대해서는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듣고 가시는 편이 좋으실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 부탁드렸습니다. 에데니아가 여러분께 드릴 약을 준비할 때까지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미소를 지어 보인 에데니아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약들이 놓인 찬장 쪽으로 우아하게 걸어갔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시라비 렌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500년 전의 마신 전쟁을 알고 계십니까?”

마신 전쟁이라면…… 퀘스트에 나왔던 그 전쟁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라비 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모를 리가 없겠지요. 그 전쟁의 원인도 인간이요, 혼란을 끝낸 것도 인간이니 말입니다.”

이 퀘스트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몰랐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 전쟁으로 인해 대륙의 자연이 송두리째 변하면서 우리 종족은 본래의 터전을 잃고 크나큰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인간에 비해 훨씬 오랜 시간을 사는 우리 종족의 수가 이후 절반이 넘게 줄었으니, 얼마나 큰 피해였을지는 상상하고도 남으리라 믿습니다. 아무튼 그때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적을 일으켜 준 분이 바로 엘 카라나, 이루미네 님이었습니다.”

“……엘 카라나란 무엇입니까?”

일단 모르는 정보는 없도록 하는 게 최선이란 생각하에 질문하자, 시라비 렌이 미소를 지었다.

“엘 카라나란 나의 방랑하는 혼과 같은 직책의 이름으로 인간어로 번역하자면 ‘신의 딸’. 우리들이 믿고 사랑하는 자연의 신인 엘 라마의 힘을 이어받은 존재를 말합니다.”

뭔지는 잘 모르겠어도, 그 엘 카라나가 대단한 존재이며 내 이번 퀘스트에서도 큰 위치를 차지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까지 근처 던전만 찾으면 되었던 퀘스트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루미네 님은 500년 전, 엘 라마의 계시를 받고 떠나 전쟁을 수습한 이들… 지금의 인간들은 영웅이라 추앙하는 자들과 함께했었던 분이기도 합니다.”

흠? 이건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로군.

지금까지 퀘스트를 수행해 가며 보고 들었던 것 중에 이루미네라는 엘프의 존재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 본 마지막 전쟁의 장면에서도 그랬고, 다른 퀘스트 수행자들에게 특별히 들은 말 또한 없었으니까. 흘깃 바라본 크란도 나처럼 처음 듣는 말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하던 일이 다 끝났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에데니아가 찰랑거리는 푸른 물이 든 작은 포션병을 양손 가득 든 채 나왔다.

“전부 준비되었어요. 혹시 모자라지 않도록 넉넉하게 준비해 드렸고요. 자, 받으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약간의 감격까지 느끼며 조심스럽게 포션들을 받아들었다.

“기왕이면 제가 여러분을 안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저는 사실 다른 일로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을에 들어가시게 되면 제 친구들이 여러분을 잘 안내해 드릴 겁니다. 부디 목적지까지 무사히 당도하시길 바랍니다.”

시라비 렌의 인사를 끝으로 기분 좋게 사막으로 향한 나는 미처 예상치 못한 포션의 중대한 결점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 포션은 지독하게 맛이 없었던 것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기분 나쁜 사막 속에서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맛의 포션을 마셔야 하는 기분이란 최악이었다. 이 외의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거부하고 싶을 정도였다. 참을성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내가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였으니 그 누가 마셨더라도 미각이 마비된 이가 아닌 이상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사막 너머에 숨겨져 있던 엘프의 숲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미스트의 많은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힘들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은 몬스터 한 마리 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힘들었던 곳으로 기억될 듯했다. 이게 다 그 포션 때문이다. 대체 무엇으로 만들면 그런 맛이 날 수 있단 말인가?

본격적인 퀘스트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러하니, 이번 세 번째 슈페리어 퀘스트는 이전보다 훨씬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햇볕을 가리고 있는 까마득하게 높은 나무들 쪽으로 시선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안으로 들어선 지도 벌써 한참이 흘렀다. 헤매고 있지만 평소와 달리 초조하지 않은 것은 꿈속의 낙원과 같은 풍경 덕분이었다. 갖가지 나무와 풀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모습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동안 지쳐 있던 정신이 느긋해지는 것 같아 풍광을 음미하며 걷고 있는데, 크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카프, 저기 보여? 저쪽…….”

그 말에 고개를 들자, 뭔가 멀리 어른거리는 하얀 땅 같은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숲이 아니라… 길 같아.”

‘길?’

크란의 말에 눈을 찡그리니 정말로 그것은 풀이 별로 없는 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길이…… 맞군.’

“길 맞아?”

크란이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고 묻는 것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했다.

“맞아. 제대로 온 것 같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길이 있다는 것은 그곳을 오랫동안 밟고 지나다닌 무언가가 있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당연히 거주지가 있겠지.

보았던 곳 가까이까지 걸어가자 정말로 사람이 하나쯤 다닐 만한 작은 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좋아! 이제 여길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건가? 아자, 드디어 끝이 좀 보이는구나!”

크란이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나도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리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뚫어질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있다.’

자연스레 몸을 긴장시키며 시선이 느껴지는 위쪽을 재빨리 올려다보자, 까마득한 나무들 위에 있던 그림자 하나가 순식간에 이쪽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크란!”

내 외침에 날뛰던 크란도 같은 방향을 쳐다보고는 삽시간에 표정을 굳히며 칼을 뽑아 들었다.

스르렁!

탁!

그와 동시에 떨어진 사람이 우리 바로 앞의 땅으로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엘 프라마를 찾아오신 손님들이십니까?”

무릎을 살짝 굽혀 착지의 충격을 줄였다가 다시 일어나며 물어온 것은 짧은 머리에 키가 껑충하게 큰 냉랭한 분위기의 엘프였다.

‘저 엘프는 시라비 렌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군.’

얼굴만 보아서는 성별도, 성격도 짐작이 가지 않던 시라비 렌만 보고 엘프는 다 그런 줄 알았던 생각이 수정되는 순간이었다.

“예.”

내가 대답하니,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하고는 등에 맨 엄청나게 큰 활을 치켜 매며 정식으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수호하는 화살, 킬 라질이라고 합니다. 이미 연락을 받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모두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죠.”

시라비 렌이 따라오지 않아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인간들이란 것을 알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알아본 것인지 무척 궁금했지만, 킬 라질이 풍기는 분위기는 그런 것을 물어볼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크란이 뽑았던 칼을 머쓱하게 도로 집어넣었다. 우리는 절도 있게 몸을 돌려 걸어가는 킬 라질을 따라가기 위해 발걸음을 훨씬 빨리해야만 했다.

마침내 도착한 엘프의 마을은 숲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화처럼 나타난 아름다운 마을을 보고 우리가 놀라자, 킬 라질이 처음으로 부드럽게 설명해 주었다.

“바로 이곳이 엘 프라마입니다. 인간이 여기까지 들어오는 건 이 마을이 생긴 이래 두 번째로군요. 그것도 얼마 되지 않아 연달아 이루어질 줄이야……. 예상치 못했습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지금까지 허락되었던 곳은 숲의 입구까지였으니 말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연달아 두 번째로 인간이 방문했다……? 우리 이전에 얼마 전 누군가 왔었단 말인가?

나는 마을 입구 안쪽으로 향하는 킬 라질을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희 이전에도 이미 누군가 이 마을에 온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엘 프라마의 심층부에 들어온 두 번째 인간입니다. 첫 번째는…….”

“손님들을 모셔왔습니까?”

‘제길!’

막 원하던 정보가 나오려던 참이었는데, 너무나 나쁜 타이밍으로 다른 엘프 하나가 나타났다.

“예.”

킬 라질은 대답하려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루미네 님의 말과 같군요. 두 명의 인간이 오늘쯤 찾아올 것이라더니.”

이번에 나타난 엘프가 나와 크란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리저리 훑어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바로 동굴로 모셔오라는 이루미네 님의 전언입니다.”

“알겠습니다.”

‘이루미네라는 엘프가 우리의 도착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별다른 동요도 없이 수긍한 킬 라질과는 달리 나는 내심 몹시 놀랐고, 동시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시라비 렌의 말에 의하면 이루미네라는 엘프는 500년 전의 영웅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만나보면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곧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불어 내 세 번째 퀘스트에 대한 것들도…….

킬 라질은 우리들을 이끌고 방향을 바꾸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엘프 마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엘프 마을의 집은 나무 위에 지어져 있기도 했고 땅 위에 지어져 있기도 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밝고 자유로운 느낌이 강했다. 마을 규모는 제법 큰 편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면 여기저기서 숨은그림찾기처럼 쏙쏙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엘프들이 우리에게 시선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호기심과 경계의 시선에 본의 아니게 낯선 땅에 발을 들인 이방인의 기분을 느끼며 킬 라질을 계속 따라갔다. 그는 주거지가 있는 곳을 지나 땅을 이루고 있는 것이 모래가 아닌 돌이 될 때까지 걸어 바로 밑이 절벽인 곳까지 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저곳이 여러분이 가실 곳입니다.”

킬 라질이 가리킨 곳은 나무 사이에 숨겨져 눈에 곧바로 띄지 않는 절벽 아래 동굴로, 유심히 들여다보니 아무래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곳은 아닌 듯했다.

“접근을 허락받은 분들은 두 분뿐이니 저는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동굴 안으로 그냥 들어가시면 되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어…….”

크란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칼 라질은 말이 끝나자마자 엄청난 도약력으로 나무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러고는 곧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

지금까지 우리를 이끌고 왔던 걸음도 꽤 빠르다고는 생각했지만 저렇게 이동하는 것이 엘프들의 일반적 이동이라면 그에게는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왔다는 말이 되겠지. 나름대로 배려를 해 준 건가?

“거참 빠르네…….”

좀 질린 듯한 표정의 크란이 킬 라질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는 곧 아쉽게 혀를 차며 나를 돌아보았다.

“저기라고 했지? 가자.”

동굴의 입구는 좁았지만 안은 의외로 크고 길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안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갈래의 갈림길과 마주쳤다.

“둘 중 어느 쪽인지 알겠어, 카프?”

“모르겠는데.”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거라더니 이런 거짓말쟁이 엘프를 다 봤나.”

크란이 어이없어하며 벽을 손으로 두드렸다.

“설마 여기까진 편하게 왔으니 이제부턴 미로 찾기 해서 알아서 오라는 건가? 그게 퀘스트 아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크란의 끔찍한 말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 ……그런 건 나도 싫군. ]

“흐억?”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미성이 울려 퍼졌다.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음에도 분명히 들리는 신비로운 음색에 벽을 짚고 있던 크란이 놀라 주르륵 미끄러지려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당신이 이루미네?”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허공에 대고 말을 걸어 보자 잠시 뒤 대답이 돌아왔다.

[ 맞아. 나지. 길은 왼쪽이다. 들어와. ]

목소리와는 달리 어투가 부드러움과는 참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며 망설임 없이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길의 폭은 점점 더 좁아졌다. 내가 앞장을 서고 크란이 뒤를 따라오면서 몇 분 정도 더 나아가는데, 별안간 공간이 훅 넓어지며 엄청나게 큰 동공이 나타났다.

“후왓…….”

뒤따라오던 크란이 비틀거렸다. 갑자기 너무 큰 공간 안으로 들어가자 몸이 내던져져 밀리는 것 같은 압박감과 함께 시야가 적응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큰 바가지 안에 갇힌 개미가 된 것처럼 내가 굉장히 작은 존재가 된 것 같았다.

한동안 아래, 위, 옆을 모두 둘러보며 공간감과 거리감을 회복한 나는 좀 더 앞으로 걸어 나와 보았다. 돌을 밟는 발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어느 정도 앞으로 나왔다 싶었을 때 다시 뒤를 돌아보자, 우리가 나왔던 길의 입구 따위는 개구멍 정도로 보일 만큼 큰 반구형 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크군.”

작게 중얼거리자 크란 또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적응은 이제 다 했나 보지. ]

자신을 이루미네라 밝힌 여자의 목소리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또다시 울려 퍼졌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한참 떨어진 곳에서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바로 경계심을 높이며 언제라도 곧바로 마법을 발현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이미지화를 하고 있는데,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의외로 겁이 많나 보구나, 아가. 공격 준비는 이럴 때 하는 게 아니지. ]

“…….”

모든 말이 충격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충격적인 한 단어가 귀에 들어와 박혔다.

‘아……가?’

나는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마찬가지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크란이 잠시 후 숨을 삼키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 아가래……. 들었어?”

크란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다.

“아가!”

그러고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푸핫!”

크란이 그대로 땅을 뒹굴며 말이 되지 않는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나는 아가라는 단어의 뜻을 다시금 제대로 떠올려 보기 위해 애썼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인조 젖꼭지를 물고 포대에 싸인 아기의 추상적인 이미지였다.

아가. ……그러니까, 아기, 말인가…….

‘……아기.’

지금 저 사람이, 나보고 아기라고 부른 것인가?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딱히 상대를 모멸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는 확실히 나를 열 받게 할 의도에서 웃고 있는 것 같으니 이야기가 다르지, 크란.

“스크류 파이어 볼.”

화르르륵!

“아핫핫핫하하……. 잠깐만 카프 이건…… 크흐흐흑…….”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어대는 크란은 스크류 볼을 보고도 도무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크란을 잠시 내려다보고 나서 망설임 없이 볼을 던졌다.

“으악!”

폭발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이루미네로 추정되는 이가 앉아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단정하게 앉은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 원을 그릴 정도로 길게 늘어진 빛나는 금발과 푸른 눈, 뾰족하게 나와 있는 엘프의 상징과도 같은 귀를 보니 역시 그녀가 이루미네가 맞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나치게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은 오히려 무감정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듯한 기분이었다.

바로 앞에 섰음에도 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 침묵을 지키는 그녀를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프로스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루미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후 여태까지처럼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아닌 보통의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내 이름은 방금 들었으니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자 이루미네가 계속해서 말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갑구나. 나는 정말로 오랫동안 너희들을 기다려 왔단다.”

“예?”

“피차 처음 보는 사이에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하고 있구나. 너희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500년 전의 유산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냐?”

대답은 안 했지만, 눈을 크게 뜬 내 얼굴에서 긍정을 읽어낸 듯 이루미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이 틀린가?”

“아뇨. 맞습니다. 저는 로드 슈페리어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로드 슈페리어라……. 정말로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구나. 너에게는 내가 맡고 있던 물건 하나를 주어야겠지만 그보다 먼저 보고 싶은 것이 있단다.”

줄 물건이 있다고? 관련 아이템인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을 이곳으로 이끌어 준 그것. 로드 피스.”

로드 피스? 이곳으로 이끌어 준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뭐지?

“로드 피스라는 건 또 뭡니까?”

의외의 단어에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로드 피스는 8인의 후예에게 각각 주어진 가장 큰 힘이지. 너도 갖고 있잖아?”

이루미네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 말에 나는 더 의아해졌다. 그럴 만한 아이템은…… 슈페리어 브로치인가? 하지만 슈페리어 브로치는 이루미네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힘을 가진 것이 아니었는데.

“아이템 정보 확인.”

오랜만에 케이프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브로치를 만지면서 중얼거리자 눈앞으로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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