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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그들이 만났을 때. (10/57)

#외전, 그들이 만났을 때.

저녁께의 바에는 퇴근 시간이 지나 슬슬 모여드는 사람들로 분위기가 풀어져 있었다. 적당히 어두운 공간에서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와 술잔 부딪치는 소리, 바쁘게 지나다니는 종업원들과 섞여가는 향기들은 지금 막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한 청년조차 순간적으로 풀어진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영진 씨! 손님 오셨잖아!”

“아, 예. 어서 오세요.”

아르바이트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정신없이 바쁜 영진이 서둘러 문 앞으로 나가자, 자리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던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혼자 오셨어요?”

“여기…… 일행이 먼저 와 있을 텐데 찾을 수가 없어서.”

“그럼 들어오셔서 돌아다니시면서 한번 찾아보세요.”

영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청년이 손에 쥐고 있던 가늘고 검은 지팡이를 먼저 앞으로 내밀어 짚으면서 발을 옮겼다.

“어?”

심하게 절지는 않았지만 매우 느린 그 발걸음에 그제야 손님이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영진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다가갔다.

“괜찮습니다. 별것도 아닌데.”

청년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어 도움을 거절했다.

“예? 그래도.”

영진의 말에 청년이 앞서가다 말고 고개를 돌려 슥 쳐다보자 영진은 그의 눈빛 속에서 단호한 거절을 읽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사실 영진의 시선이 머문 곳은 푸르스름한 조명을 받아 더 창백하게 비치는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병자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키가 크고 몸이 말랐음에도 단단한 체격이라는 게 확실히 눈에 띄었기 때문이리라.

진짜 머리카락의 색보다 더 자연스러운 색을 낼 수 있는 나노염색약을 슈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요즘 같은 때에 청년의 검은 머리칼은 또한 매우 독특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무슨 취향인지 검은 코트에 검은 바지라 전신이 검은색투성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청년에게 곧장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을 주는 건 심해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이었다. 어둡고 무기질적으로 느껴지지만 이상하게 곧은 그 눈에 빨려 들어 시선을 뗄 수 없었던 영진이 겨우 풀려난 것은 청년이 다시 느린 발걸음을 옮겨 손님들 사이로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허…… 무서운 사람이네.”

“영진 씨! 거기서 뭐 해! 저쪽 테이블 주문 안 받고!”

“예, 갑니다, 가요!”

주방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마주 소리치면서도 영진은 어쩐지 아까 본 손님이 쉽사리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아픈 사람 같으면서도, 반대로 덤볐다가는 맥도 못 추고 당할 것 같은 느낌의 기묘한 강함을 뿜어내는 남자였다.

저런 것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해야 하는 건가?

‘왠지 모르게 가슴께가 좀 근질근질한 느낌이었는데……. 괜히 이상한 기분 들게 하는 손님이구만. …혹시 나 그쪽에도 취미 있었나?’

영진은 한 번 더 청년이 사라진 곳을 돌아보았다가 곧 뒷머리를 긁적이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한편, 죄 없는 종업원의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어놓은 청년, 강무헌은 최대한 절뚝거리지 않게 온 신경을 기울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을 돌아다녔음에도 목적한 사람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가게도 넓었지만 사람도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기 친구가 이 가게 사장이니 여기서 만나자고 했던 키온의 모습을 떠올리며 무헌은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로 오랜만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에 나온 건 좋았지만, 돌아다니면서 받는 시선은 불쾌했다.

그렇게 조금 더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헤매고 있을 때, 무헌의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왔다. 반가움을 느끼며 그곳으로 다가가자 이상하게 그쪽 테이블만 묘하게 굳어 있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헌은 약간의 미안함과 의아함을 느끼며 걸음을 빨리했다.

원래 약속시간은 일곱 시 반이었다. 그러나 현재 시각은 일곱 시 45분. 택시는 제대로 타고 내렸으나 걷는 사이 벌써 15분이나 지나 있었던 탓에 느린 걸음이나마 서둘러 재촉해 온 것이었음에도 테이블에는 벌써 그를 제외한 세 명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게임이 아닌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 실감나게 느껴지고 있었다. 무헌은 답지 않은 긴장감마저 느끼며 테이블 앞에 다가가 섰다.

“늦어서 미안.”

입을 열자마자 침통하기까지 했던 분위기의 남자 셋이 무시무시하게 고개를 번쩍 쳐드는 모습에 무헌은 놀라 슬쩍 뒤로 물러섰다. 곧 고함이 터져 나왔다.

“카프!”

“카르냐! 진짜 카르?”

“…….”

그리고 한순간에 봄날에 눈 녹듯 화해졌던 테이블의 분위기는 무헌이 짚고 있는 지팡이에 세 사람의 눈이 닿자, 또다시 엄숙한 침묵 속으로 잠겨 들었다.

무헌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 지팡이를 소파 밑에 놓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는 아직까지도 얼어있었다. 어느 정도 놀랄 줄은 알았지만, 다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충격을 꽤나 받은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얼떨떨한 건가…….’

옆을 바라보자 화사한 금갈색 머리칼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를 향해 무헌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안녕, 크란.”

순간 무헌의 말로 얼음이 깨진 것처럼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깔끔한 분위기의 캐주얼 정장을 입고 있던 크란은 잠시 뒤에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하나 없이 매끈한 미남의 다정한 웃음에 주변의 시선이 슬금슬금 몰렸다.

“형하고…….”

이제는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눈에 웃음기를 살짝 머금은 무헌이 긴장한 표정의 키온과 자리를 다 차지할 듯 위압감 있게 앉아 있는 팔튼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팔튼 씨도요.”

“전에 약속했잖아. 형이라고 해야지.”

가장 느긋하게 풀어져 있던 팔튼이 이를 드러내는 미소와 함께 짐짓 불만스러운 투로 그렇게 말하자, 무헌이 싱긋 웃고 말을 정정했다.

“팔튼 형도요.”

“내 이름은 선정우다.”

곧바로 자기 이름을 들이대는 팔튼의 말이 긴장감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임을 느끼면서 무헌은 자신도 협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 이름은 강무헌입니다.”

무헌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크란이 질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나는 정민후야.”

그러자 아직까지도 입을 딱 다물고 있던 키온이 ‘젠장, 나도 모르겠다!’ 하고 노란 앞머리를 박박 문질러 흐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그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가죽점퍼와 민소매 티셔츠, 늘어진 목걸이라는 뒷골목 양아치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모두 제 몸의 일부라도 되는 양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반항적이고도 매섭게 빛나던 눈빛이 무헌에게 향한 순간 한결 누그러지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 나…… 전주열이다.”

무헌은 눈앞의 셋이 왜 자신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는지를 무척 잘 알고 있었다. 다리와 지팡이에 닿는 시선이 모든 말을 대신하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그것부터 설명하기로 했다.

“먼저…… 놀랐겠지만, 보는 것처럼 난 한쪽 다리가 좀… 불편해.”

모두의 얼굴이 다시 침잠해졌다.

“그래서 들어는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새턴에서 주문 제작할 수 있는 전용 캡슐로 게임을 하고 있었어.”

“……그 비싼 거 말이냐? 진짜 있었군.”

팔튼, 선정우가 앞에 놓인 맥주를 삼키며 흥미로운 눈을 했다. 그는 거대한 키와 단단한 몸, 거대한 문신 끄트머리가 어깨와 가슴 사이로 슬며시 들여다보이는 옷차림 때문인지 게임에서보다 더욱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시원하게 뻗은 이목구비와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이 야성적인 매력을 풍겼다. 무헌은 피식 웃었다.

“네, 진짜 있어요. 그리고 그냥 그게 끝이고…… 별거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연락처 알려 줬을 때도 놀라지 말라고 한 거냐?”

키온, 전주열이 뭐라 할 수 없이 안타까운 묘한 표정을 하고 무헌의 다리를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응. 소용없었던 모양이지만…….”

무헌이 조금 씁쓸하게 말하며 자신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자 크란, 정민후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

“뭐가. 괜찮아. 네가 그러면 나는 여기 괜히 나왔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응……. 그렇지. 그럼 안 미안하다.”

민후가 가볍게 농담을 하며 웃고는 무헌을 또렷하게 아래위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정말 미스트에서보다 더…….”

“더? 뭐?”

무헌이 맥주를 꿀꺽 넘기며 묻자, 민후가 장난기로 가득 찬 미소를 만면에 지어 보였다.

“더 섹시한데?”

“…….”

왠지 상대를 작정하고 꼬여낼 때나 쓸 법한 낮게 울리는 민후의 목소리에 무헌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거워졌던 분위기는 민후의 그 말 한 마디로 완전히 풀려 버렸다.

“푸하! 하하하! 사실…… 나도 아까부터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왠지 더 생생하지 않냐? 믿기질 않는구나. 카르와 내가 이렇게 진짜 마주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니……. 크, 이래서 실물이 좋은 거지.”

주열이 눈을 반짝이며 상황에 맞지 않는 비유를 하자, 무헌을 뺀 나머지가 모두 그에 동의했다.

“역시 실제가 최고지.”

“맞아.”

“형. 나, 갈까?”

무헌이 눈을 싸늘하게 치뜨며 짐짓 화난 척하고 낮게 말하자 세 남자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내 ‘분위기가 왜 이래? 나는 농담도 못하나?’ 하고 무헌이 어깨를 늘어뜨리자 히힛거리고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완전히 터뜨리고 말았다.

“푸하하하하!”

“크크크크크!”

“최고다, 최고야.”

그렇게 웃음소리의 도가니 속에서 무헌은 세 사람이 별말 없이도 자신을 완전히 이해해 주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왠지 믿을 수 없이 즐거운 기분이 들어서 더 크게 웃고 말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주변 테이블에서 관심 있게 훔쳐보는 줄도 모른 채, 무헌은 잔을 들어 세 사람과 건배를 나누었다.

즐거운 금요일 밤이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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