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그 후. 1
유완이 떨어진 낭떠러지 앞에서 움직일 줄 모르다 한참 후에야 겨우겨우 크란에게 이끌려가며 뒤쪽으로 열린 통로를 통해 바깥으로 나온 뒤 우리는 동굴을 빙 돌아 다시 자그레브로 돌아갔다.
길드전은 이미 옛적에 끝난 상태였다. 자이언트 길드에서 초조하게 우리들을 기다리던 키온 형과 팔튼은 크란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말을 잃었다. 그 후 나는 바로 로그아웃했고, 그 다음에 쓰러지다시피 침대에 누운 채 몸살에 시달렸다. 그 때문에 갑자기 아르바이트 불가 연락을 받은 사부님과 사모님이 크게 걱정하셨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접속할 수 있었던 건 그날 이후 일주일이나 지난 때였다.
오랜만에 들어간 곳에서는 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프…….”
자기도 얼굴빛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크란이 조용히 나에게 다가왔다.
“카르. 인마. 얼굴이 그게 뭐냐…….”
키온 형도 내 어깨를 팍팍 치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려 노력했지만, 오히려 형에게 한 대 더 맞기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다들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 느껴져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 대강의 생각 정리는 다 끝내놓은 터라 외려 지금은 마음이 후련한 상태인데도 무슨 사람 눈치를 저렇게들 보는지……. 그러면 내가 더 눈치가 없는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해지는데.
“형. 이제 곧 떠날 거지?”
내가 키온 형과 팔튼을 향해 묻자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야지.”
“형이 찾는 다음 퀘스트 장소는 이전에 말했던 그곳이 확실할 것 같아. 그간 다시 생각해 봤는데 내가 퀘스트를 옆 던전에서 깼을 때 나타났던 비석에도 비슷한 말이 있었어. 그때는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신경도 안 썼었는데……. 형에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지.”
아마 슈페리어의 말이 새겨져 있던 비석에 쓰여 있었던 말로 기억한다.
[나 로드 슈페리어는, 전투에 앞장서는 용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신의 뜻을 실천하던 친구와의 마지막 기억이 남아 있는 곳 옆에 이 미로를 세운다. 이 주변의 모든 마물들을 이 안에 봉인해 두었으니, 친구의 신이 침범당할 일은 이제 다시 없을 것이다. ……더불어,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후예를 위해 나의 힘을 일부 남긴다.]
전투에 앞장서며 신의 뜻을 실천하는 친구.
이제 와 생각해 보자면 그건 홀리 나이트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문구였다. 친구와의 마지막 기억이 남아 있던 곳. 친구의 신이 침범당할 일. 그곳이 폐허가 된 신전 던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음을 떠올려 본다면 그거야말로 더없이 들어맞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설명해 주자, 형의 얼굴이 약간 펴졌다.
“고맙다. ……난 이번에 도움도 못 되었는데.”
“아니. 형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도시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말은 하지 마.”
칼랍 타이탄을 생각하며 내가 싱긋 웃자, 형이 피식 웃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이봐. ……카프로스.”
매일 제멋대로 이쁜이라느니 하며 부르던 팔튼이 처음으로 제대로 이름을 불렀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가 묘하게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예.”
“앞으로 친하게 지내 보자. 지금까지 안 친했던 건 아니긴 한데… 알잖냐.”
무슨 뜬금없는 말인지……. 어쨌든 고개를 끄덕이자 팔튼이 히죽거리며 내 등을 퍽 하고 때렸다.
“윽…….”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너희들 다 형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다. 나와 자이언트 길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게 뭐든지 똥줄 빠지게 도와주지.”
그러면서 짓는 큰 미소에 나 또한 같이 미소를 지어 줄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하하핫! 그리고 너도, 나중에 나랑 한번 뜨자.”
팔튼이 장난스럽게 주먹을 내밀며 말하자마자 크란은 보기 좋은 웃음과 함께 마주 주먹을 내뻗어 부딪쳤다.
“형이 질걸요.”
“무슨 소리야. 나 싸우는 걸 못 봤냐?”
그 벌써부터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가볍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키온 형이 ‘야!’하고 크게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잠깐만. 그런데 우리가 이대로 헤어지면 연락은 또 언제 하냐? 또 다음에 우연히 만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딴 거 이젠 용납 못 한다!”
그 말에 좌중은 싸하게 얼어붙었다.
“나는 하고 싶어도 못 했던 말을…….”
크란이 내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날 잡아라.”
팔튼이 곧바로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전부 전화번호 불고, 날 잡아서 바깥에서 본다. 난 너희들이 여기서만 알고 지낼 놈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설마 안 그런 놈은 없겠지?”
은근한 협박기가 실린 주먹이 없더라도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을 바라보며 나는 허탈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지. 여기가 아니라도… 현실이…… 있었는데.
연락처를 교환한 뒤에 키온 형과 팔튼은 먼저 길을 떠났다. 헤어지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키온 형에게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퀘스트 도중에 죽으면, 페널티 접속불가 기간은 얼마나 돼?”
형은 잠시 멈칫했다가, 한숨과 함께 물 빠진 금빛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건 다크 놈 얘기지?”
“…….”
“글쎄……. 우리가 진행 중인 퀘스트는 워낙 특이한 거니까 말이다.”
미스트에서 일반적인 죽음을 맞는다면 접속불가 기간은 현실로 3일에서 7일 정도였다. 그러나 퀘스트 도중 그 때문에 죽음을 맞는다면, 페널티로 인해 접속불가 기간이 늘어난다고 알고 있었다. 쉬운 퀘스트라면 별 차이가 없고, 죽었다 살아나도 다시 할 수 있는 것도 있다고는 하지만 유완의 경우는 특수 퀘스트에, 절대 죽어서는 안 될 상대인 마신의 기사, 시저에게 죽은 것이니 아마 더할 터였다.
내 무덤덤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키온 형이 다시 한숨을 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보에 의하면, S급 퀘스트 도중 사망한 고렙 유저의 경우가 최대 2주일이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아마 최소 그 정도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2주…….”
그리고 몇 주가 흘렀다. 2주를 넘기고도 계속 기다렸지만 유완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크란과 둘이서만 다음 목적지인 서쪽을 향해 떠나야 했다.
“2주라더니…….”
문득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앞서가던 크란이 고개를 돌렸다.
“응?”
“아무것도.”
고개를 젓자, 크란이 조금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 표정에 미안함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뭐라 말할 생각이 들지 않아 말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아, 저기 포핸드오거다.”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듯한 크란의 손짓에 앞을 바라보니 이름 그대로 위압적인 팔을 네 개나 달고 있는 오거 몇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필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포핸드오거는 원래의 오거에서 더 징글맞게 진화한 듯한 생김새와 안 그래도 상대하기 버거운 무식한 힘이 두 배가 된 끔찍함으로 유저들에게 원성이 높은 몹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곧 우리들을 발견한 듯 괴성을 지르며 뛰어오는 포핸드오거들을 향해 크란이 침착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처리하고 올게. 기다려!”
검이 흰 오러로 감싸이자마자 크란이 잔상만 남기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럼 난 구경이나 해야겠군. 느긋하게 멈춰 구경하고 있노라니, 크란은 엄청난 스피드로 포핸드오거의 자랑인 팔들부터 해체작업을 해나갔다. 자못 박력 넘치는 장면이었지만, 그동안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하품이 날 지경이었다.
“홀리 크러쉬! 크러쉬! 크러쉬!”
“크오오옷! 우오오! 크아아!”
보기에는 위험한 듯해도 절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테니, 걱정도 안 된다.
크란은 동굴에서 갖고 나온 스킬북의 정체가 샤인 나이트의 스킬 비전인 신의 파검식이라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여러 가지 스킬을 쓰는 모습을 제법 많이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스킬북과 같이 나온 골든 건틀렛은 성기사 전용의 아티팩트로 온갖 스탯을 골고루 올려 주어 역시 퀘스트 보상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나는 퀘스트에서 착용 가능한 장비 아이템이 나오는 것을 크란 때 처음 보았는데, 그것을 본 키온 형이나 팔튼은 자신들이 얻은 것도 함께 보여줘서 내가 갈 길이 더 멀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키온 형의 것은 얼마 전 재회해서 다친 나를 치료하기 전에 꼈던 장갑이었는데, 그걸 꼈을 때는 마력이 엄청나게 늘어 치료신의 사제 행세도 가능하다고 했다. 팔튼은 무려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이 퀘스트 중 받은 것이었는데, 그 또한 엄청난 내구력에 능력치로 듣는 사람을 질리게 만들 지경이었다.
“이 정도라면 아이템만 노리고 퀘스트를 한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지.”
팔튼의 말에 다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마신의 기사 놈은 또 얼마나 엄청난 걸 받았겠냐? 오히려 이정도 아이템이 필요할 만한 상황이 앞으로 많이 생길 거라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지. 게다가 우리가 받은 아이템들은 전부 양도불가야. 팔 수도 없다고.”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마신의 기사 시저. 놈을 다시 만난 후, 나는 놈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정승조를 다시 만났다는 충격이 놈이 유완을 죽인 충격과 맞물려 상쇄되었다는 것이었다. 충격이 더 큰 충격으로 받아쳐지자 제로가 되기라도 한 것일까. 어쨌든 놈을 만났을 때의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던 충격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예전 일을 다시 신경 쓰는 것 자체가 내게는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유완을 떠올려 보자면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은 대체 내가 시저에 대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내가 이대로 놈을 모른 척하고 넘길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무너진 다리 위에서 마주쳤던 마지막 그 뒷모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마음속에서 서늘한 불꽃이 일어났다.
“다 끝냈어. 이제 가야지. ……뭘 그렇게 생각해?”
어느새 다 해치운 것인지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걸어온 크란이 궁금한 눈으로 물어보았다. 이번에도 나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자.”
“응.”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맑은 하늘과 넓은 들판은 마음이 좀 편안해지게 만들어주었다. 그것이 좋아 말없이 한참을 걷고 있을 때, 문득 크란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
“그놈……. 가기 전에 연락처라도 미리 물어볼 걸 그랬어. ……그런 생각이 자꾸 드네.”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건 팔튼이 우리들의 연락처를 물어보았을 때부터 못내 내 가슴속을 찌르던 것들 중 하나였다. 왜, 나는 어째서 유완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을까.
“…유완도 안 물어봤다.”
한참의 침묵 끝에 내가 작게 대답하자, 크란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응. 하지만 그건 내가 먼저 묻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또다시 턱 하고 목이 메었다. 내가 먼저 묻지 않아서……. 그것은 반박할 수 없는 당연한 말이었다.
그저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로 피할 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유완은 나에게 그 정도로 가벼운 타인이 아니었는데, 결국 내가 먼저 묻지 않아서 우리들은 서로에 대한 어떤 것도 알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내가 먼저…….
“……물어볼 걸 그랬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조용히 말하는 크란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
한참 후에 간신히 나온 말은, 내가 듣기에도 멍청하게 들렸지만 크란은 그저 한 번 싱긋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카프.”
“…….”
“떨어질 때 떨어져도 나라면 전화번호는 외치고 떨어질 거야.”
“……그래.”
크란의 밝은 말투에, 마음 한 편이 조금 따스해지는 것도 같았다. 상상해 보니 웃겨서 피식 웃었더니 크란이 내 목에 덥석 매달렸다.
“크하하핫. 이제 이렇게 해도 날 막을 놈은 아무도 없어! 사실 난 너무 행복해!”
“…….”
“아임 베리 해피!”
“라이트닝 볼트.”
파지지직!
“꾸에에엑!”
어쩐지……. 1퍼센트 진지하면 99퍼센트는 농담으로 이루어진 놈 같으니라고. 요즘 이상하게 진지하다 했다. 고개를 저으며 목에 매달린 손에 전기를 씌워주자, 감전되어 꿈틀거리면서 물러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또다시 웃음이 났다.
“하하핫…….”
그래. 다음번에 만나면, 유완. 네놈 연락처를 먼저 접수하겠다. 키온 형도 다시 만났는데, 유완이라고 다시 못 만날까. 유완은 놈의 목적지가 나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여대며 무조건 쫓아오겠다고까지 했던 놈이다. 그걸 생각해 보면, 정말로 유완이 어떻게든 나를 다시 찾아올 거라는 생각이 확신에 가깝게 드니 이렇게 처져 있을 일만은 아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난 간다.”
“우왓, 기다려, 카프~!”
편해진 마음 때문인지 걸어가는 발걸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엄살을 부리며 쫓아오는 크란의 표정도 더 밝아져 있는 듯했다.
곧 따라갈 테니 어서 가라고 했었지.
네가 먼저 따라오겠다고 말했으니 나는 네 말을 믿는다. 유완. 그러니까 어서 따라오든가 말든가 해라. 사정을 봐서 좀 천천히 가 주도록 노력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