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캉! 캉!
호선을 그리며 부딪치는 칼날이 섬광처럼 빛났다.
“그렇게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받아라!”
분노에 찬 외침소리도 세트로 들려왔다.
퍼퍼퍼퍼퍼펑!
이어서 마법들이 쏟아지며 폭발했지만, 맞아야 할 상대는 이미 한참 전에 몸을 빼낸 뒤였다.
“일란!”
동료를 부르는 소리가 꽤 애절했다.
지금 눈앞의 이 어지러운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아무리 나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이곳은 난전 상태였다. 플라이를 써서 건물 위로 올라가 구경 중이었기 때문에 안전하기는 했지만, 고민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어이없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공격 받고 있는 것은 단 한 명.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놈인 유완이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이라면 유완을 알아본 순간 도와줘야 했겠지만, 지금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좀 더 지켜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현재 공격하는 놈들은 전부 한 패거리고, 유완은 하나였다. 당연히 유완 쪽이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처지라고 봐야 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리고 있는 쪽은 유완이 아니었다. 대체 왜 이런 곳에서 싸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보는 유완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위력적이었다.
찔러오는 칼을 가볍게 내리쳐 방향을 틀어버리고, 이어서 가슴을 노리고 날아오는 파이어 볼을 피했다. 위에서 쏟아지는 라이트닝 볼트도 몇 번의 스텝으로 여유롭게 피한 뒤 그 뒤에 있던 사람에게 다가가 메어쳐 날려버리는 것까지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부드럽고 강력했다.
퍼억, 쾅!
“크아악!”
음. 나이스 업어치기.
뒤이어 두 개의 마법이 한꺼번에 날아왔지만 이번에도 유완은 하나는 검으로 가르고, 하나는 피해 버렸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듯한 깔끔한 발차기가 적 두 명의 복부로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크악!”
가벼워 보이지만 상대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져 비명조차 못 지른 것을 보니 제대로 먹힌 발차기였다. 물론 그 두 명은 볼 것 없이 KO당했다.
멋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유완의 저 몸놀림이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었다. 무기는 검뿐만이 아니라 전신 그 자체나 마찬가지라는 듯한 자유롭고 거침없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때보다 더욱 발전한 지금은 누구도 감히 범접하기 힘든 강자의 분위기마저 느껴져 한층 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언제 저렇게 실력이 오른 거지?’
유완의 검에는 아직 푸른 오러의 파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러 따위 쓰지 않고도 상대할 만하다는 건가? 그러나 유완을 상대하는 이들도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다수는 다수만의 비기가 있는 법이었다.
“침착히! 침착하게! 한꺼번에 파이어 볼을 날리면 도망칠 틈새 따윈 없어!”
그 비기란 다른 것 없이 무조건 한꺼번에 공격하는 것. 물론 효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증명된 바 있었다. 매 위에 장사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저기서 사람들을 독려하며 소리치고 있는 여자가 대장 격인가 보지?’
작아서 잘 안 보이는 여자를 잠시 쳐다본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특이하게도 저 집단에는 마법사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완이 가볍게 엎어뜨리고, 메치고, 걷어차는 것만으로도 당한 이들이 쉽게 픽픽 쓰러지는 듯 보이는 이유도 다 저들이 체력 약한 마법사이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여자의 말에 따라 남은 인원들이 유완을 포위하고 서클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제 구경은 그만두고 여기서 뛰어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완은 여전히 포위망에서 몸을 빼내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지만 악착같이 붙잡고 있는 두 명의 끈질김이 보통이 아니었다.
결국 눈썹을 찌푸린 그가 짧게 기합 소리를 낸 뒤 검을 휘두르자 지잉 하고 푸른 오러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뛰어내리려 했던 것조차 잊은 채 유완의 검을 응시했다.
그 오러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칼날에 맺히는 듯한 희미한 푸른빛이 아니었다. 검신을 두껍게 감싸고도 더 길게 위로 뻗어 나가는 빛줄기가 먼 곳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헉……. 완전한 오러!”
“빌어먹을, 역시 말로만 상급이 아니었군.”
그런데 그것을 발견한 상대들은 놀라면서도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떠드는 말에서 나는 정보가 될 만한 단어 하나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상급? 소드 마스터리 상급 말인가?’
처음 만났을 때 유완의 소드 마스터리 스킬은 본인 말에 의하면 중급이라고 했었는데. 나는 사람들이 흔들리는 틈에 이제는 더 볼 것 없이 지붕 위에서 밑으로 뛰어내렸다.
“매직 실드!”
뛰어내리면서 실드를 서너 겹 두르고 유완의 뒤로 착지하자,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누구냐!”
그 말에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지.
뒤돌아선 유완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고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카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푸른 눈이 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상하지. 유완이 내 이름을 부르면, 다른 이들이 부르는 것보다 더 어색한 기분이…… 흠…….
“여긴 어떻게…….”
“원래는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위에서 보니까 한심해서 구해 주려고. 너는 왜 싸우고 있는데?”
그간 쌓인 감정을 담아 표정 없이 뚱하니 내뱉은 대답에 유완이 어깨를 잘게 떨며 웃었다.
‘저렇게도 웃는군.’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고, 곧 검을 고쳐 쥔 유완이 맹수 같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몰라. 하지만…… 네가 보기에 한심했다면, 이제부터는 노력해 볼게.”
그 말과 동시에, 검신 끝보다 10센티미터 정도 더 길었던 오러가 30센티미터가 넘게 껑충 솟아올랐다. 난 웃으면서 양손을 펼쳤다.
“체인 라이트닝.”
파지지지지직!
“체… 체인 라이트닝……?!”
“맙소사!”
던지지도 않고 그냥 양손에 들고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눈이 튀어나올 듯 기겁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난입하면서 어지러워졌던 분위기는 덕분에 완전히 깨져버렸고, 당황한 상대들은 허둥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정신 집중이 흐트러졌는지 모처럼 한꺼번에 준비하던 파이어 볼도 줄줄이 이미지가 흐트러지며 형상이 사라져 갔다.
“잠깐! 진정해! 잠깐!”
그때, 내가 눈여겨보고 있던 보스가 허둥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 나왔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앞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늘어뜨린 긴 머리 사이로 드러난 자존심 세 보이는 눈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느끼게 했다. 몸에 걸친 로브를 보아하니 그녀 또한 마법사인 듯했다.
“진짜 체인 라이트닝이잖아…….”
내 앞까지 도달한 그녀가 내 양손에서 파직거리는 체인 라이트닝을 보고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신음을 삼켰다.
“당신은 누구죠? 저 페일 나이츠 길드마스터와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당신도 페일 나이츠인가요?”
그녀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페일 나이츠? 길드마스터?”
페일 나이츠 길드의 길드마스터. 키온 형이 말했던 바에 의하면 그 이름의 정체는 마신의 기사 퀘스트 수행 유저가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유완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유완이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몰라.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습격당한 것뿐이니.”
그 단호한 말에 나는 안심했지만, 반대로 여자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거짓말하지 마! 검보다 긴 오러를 쓰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갑옷을 입은 사람이 이 자그레브 안에 페일 나이츠의 시저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잖아!”
시저? 그놈의 이름이 시저인가 보군.
“시저라……. 그러면 정말 확실히 아닌데. 이 녀석 이름은 유완이니까.”
내가 유완과 시선을 마주치며 대답하자 유완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여자는 완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럴… 그럴 리가…….”
“상급 검사가 세상에 한 명만 있지는 않을 테고, 갑옷은 누구나 자기 취향대로 고를 수 있어. 게다가 우린 여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고작 두 가지 사항이 우연히 겹쳤다고 해서 확실히 확인하지도 않고 사람 하나를 다수가 공격하는 건 너무 비겁하다고 생각하는데.”
게임을 시작한 이후로 내가 초면인 사람에게 이만큼 길게 말한 건 처음인 듯했다. 조금 놀란 듯한 유완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여자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들여다보자, 잠시 후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몇 달째 시저를 찾고 있던 중 자그레브에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당연히 시저라고밖에는 생각이…….”
계속 변명만 할 셈인가 생각하며 지켜보는데, 잠깐 사이에 여자의 두 눈에 분노를 담고 가득 차오른 눈물을 보자 순간 당혹스러운 기분이 몰려들었다.
“……그렇군요. 또 속았어.”
이런 건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초면인 상대의 눈물을 보는 건 더욱더 익숙하지 않았다. 뭘 또 속았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멍하니 있었더니, 여자의 뒤로 다른 사람들이 슬슬 몰려들어 위로하기 시작했다.
“카나 님, 울지 마요.”
“길마님…….”
“좀 더 알아보았어야 했는데……. 저희들 잘못이죠.”
여자에게 쏟아지는 위로 행렬들을 바라보며 유완과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어야만 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누가 설명 좀 해 주었으면 좋겠다.
여자는 한참 위로를 받다가, 입술을 꾹 깨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 잘못이에요. 시저는 은발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저 남자는 검은 머리……. 복수에 눈이 멀어 판단을 잘못한 거죠. 생각해 보면 그 잔인한 놈이 상대를 하나도 베지 않고 싸웠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였어요. 게다가 저기 후드 쓰신 분이 동료라니 혼자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고 나서 여자는 단호하게 우리들 앞으로 나섰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경계를 바짝 세운 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허리를 90도로 깊숙이 숙였다.
“……길마님!”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보고 공격했으니 저희 잘못이에요.”
나는 머릿속으로 천천히 상황정리를 시작했다.
저들은 아마 한 길드 정도의 집단으로 보인다. 우리 앞의 여자는 그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것 같다. 그들은 페일 나이츠 길드의 마신의 기사 퀘스트 수행 유저인 시저에게 원한 진 일이 있어 쫓아다니다가, 우연히 그와 비슷한 유완을 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전체 공격을 날렸다……. 이건가?
“……뭐 해?”
내가 여자의 사과에도 꿈쩍 않고 있는 유완을 돌아보자, 유완이 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과하잖아.”
“……아.”
그제야 ‘그래?’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유완이 곧 가볍게 마주 고개를 숙이며 오러가 사라진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내 체인 라이트닝 또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 싶었지만 유완의 말 없는 인사를 받고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편 여자가 이번에는 도전적인 눈길로 나를 홱 돌아보면서 상황은 또다시 바뀌었다.
“당신은 이분의 동료이신가요?”
긍정의 뜻으로 가만있으니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여자가 불을 쏘아 보낼 듯 타오르는 눈으로 내 손을 잡았다.
“게다가 체인 라이트닝을 캐스팅 없이 시동어만으로 구현하는 마법사구요?”
이번에는 수긍도 하지 않았는데 잡힌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무서울 정도의 눈빛에 흠칫하자 유완이 망설임 없이 손을 칼자루에 가져다 댔고, 여자 뒤에 몰려 있던 사람들도 허둥지둥 재차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그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도 오직 나만을 보고 있던 여자가 마침내 입을 열어 크게 소리쳤다.
“아, 사실은…… 아까부터 가슴이 떨려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내 눈앞에서 실제로 이 정도 실력의 마법사를 보게 되다니!”
아까까지의 싸움과 슬픈 분위기는 다 어디로 가고 뭔가 물어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보이는 그 반짝이는 눈빛에, 나와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순간 허탈함에 힘이 빠졌다.
“저는 4서클 마법사 아르카나예요. 마법사를 중심으로 한 길드인 ‘매직토피아’의 길드마스터죠.”
절대 나를 놓지 않으려고 하다 결국 자신의 길드원들과 유완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밀려 내 손을 놓은 여자, 아르카나는 그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 지나치게 반짝이는 미소를 보며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저는 카프로스. 이쪽은 유완입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와 처절하게 싸우던 길드원들은 상대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자 다들 머리 숙여 사과를 했고, 유완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 일은 그것으로 전부 마무리되는 줄 알았지만, 아르카나는 이것도 인연인데 길드 아지트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거절을 할 생각이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유완과 나는 어느새 그들의 길드 아지트 내에 밀려 들어온 상태였다. 실로 오랜만에 겨우 다시 만난 유완에게 할 말이 많았었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 때문에 본래의 목적이 점점 흐려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금 초조한 기분이 들었으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여기가 정말 길드 아지트라고?’
여태 지냈던 팔튼의 길드 아지트는 제법 큰 2층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몇 사람이 들어와 앉으면 꽉 찰 만큼 작고 허름해 나를 놀라게 했다. 이런 곳을 아지트로 쓰느니 차라리 야외에 울타리를 박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고개를 들어 본 지붕 한쪽에 구멍까지 뚫려 있어 궁상맞음이 한층 더했다.
그에 대해 아르카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아, 저건 마법 수련하다가 그런 거예요. 고치긴 고쳐야겠지만 아직까지 미스트엔 비가 내린 적도 없고 해서 그냥 뒀네요.”
아르카나는 시간을 끌지 않고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명백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제가 무리해서 두 분을 모셔온 건…… 카프로스 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였어요.”
가르침? 생소한 단어에 슬쩍 눈썹을 찌푸리자 아르카나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카프로스 님. 카프로스 님은 5서클 마스터급이 맞으시죠?”
“그건 왜 자꾸 물으십니까.”
아무리 오해를 서로 풀었다 해도 남의 정보에 다짜고짜 너무 직접적으로 파고드니 불쾌했다. 무슨 의도인가 싶어 의심스레 쳐다보자 아르카나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는 한결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자그레브에서 열리는 길드전을 아세요?”
그야 물론 안다. 내일 키온 형이 같이 나가자고 말한 곳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열성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이 길드를 만든 이유는 마법사들이 뭉쳤을 때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지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남들은 힘든 걸 좋아하는 변태들이나 하는 직종이라느니, 망한 직업이라느니 말하지만 저는 제가 마법사인 게 정말 좋거든요. 새로 마법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4서클 마스터가 된 사람으로서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여태 마법 배우는 게 그렇게까지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그 정도로 이미지가 나빠진 상태였던가?
“하지만 겨우 만들어서 뭉쳤던 길드가 얼마 전 고작 한 명에 의해 박살이 났어요. 그게 바로 페일 나이츠의 길마, 시저였죠.”
아르카나가 주홍색 눈 속에 분노의 불길을 활활 불태우며 말했다.
“우린 정식 길드전을 통해 당한 게 아니에요.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다 마주쳤단 이유만으로 당했다구요. 그것도 단 한 명에게…….”
아르카나가 열심히 키운 길드는 그 일 이후 급격히 쇠락했다. 마법사라는 직업에 흥미를 잃어버린 유저들이 직업을 포기하거나 길드를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원래 사용하던 길드 아지트도 유지를 못 하게 되어서 여기로 옮겼어요. 20명도 안 되는 현재 길드 수준으로는 내일 길드전에 참여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죠.”
그녀는 진정하려는 듯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잖아요.”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통해 심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등이 한숨과 함께 떨렸다.
문득 마음이 흔들렸다. 마법사도 강한 직업임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저는 현재 4서클 마스터 후 5서클에서 하나도 진도를 나가지 못한 상태예요. 저보다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 유저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카프로스 님을 만났으니… 가능하다면 작은 조언이라도 얻고 싶어요. 물론 이 요청이 내키진 않으시겠지만요…….”
머뭇거리면서도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말에 뒤에 서 있던 길드원들의 낯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차게 길드원들을 지휘하던 아르카나의 축 처진 모습이 나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글쎄요…….”
한참 듣고 있던 내가 입을 열자, 아르카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가르침이라니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쪽도 할 일이 있어서…….”
잠시 희망을 내보이던 아르카나와 길드원들의 어깨가 다시 축 처졌다.
“……가르침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어렵겠지만, 5서클의 이미지를 보여 주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순간 고개를 번쩍 든 아르카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5서클 시전 모습을… 보여 주시겠다구요?”
“카프.”
나도 내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단 건 알고 있었다. 유완조차 염려 섞인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 정도였으니까.
미스트의 마법은 초반에 자기가 구현하고 싶은 마법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끝이다. 때문에 그 마법을 이미 익힌 선구자의 시전 모습을 보면 배우기가 한결 쉽겠지만, 마법사 유저 수가 현저히 적고 고위급 NPC 마법사들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현 상황에서는 그러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컨트롤이나 서클과 주문 등은 다음 문제였다.
그래서 고위 마법의 시전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건 하위 마법사들에게 엄청난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아르카나가 말한 목표가 마음에 든 건 사실이니까.’
일단 보여 주고 나면 배우는 건 아르카나의 몫일 테니 내게도 쓸데없이 말을 첨언해 어울리지도 않는 조언 따위를 주는 것보다야 그 편이 더 나을 듯했다.
“한 번만입니다.”
그다음은 알아서 하라는 나의 눈빛에 아르카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런데 그 후드, 왜 실내에서도 쓰고 계신 거예요?”
흥분에 차 도로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아르카나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또 무슨 의도인가 싶어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계속 얼굴도 모르고 대화를 하니 그냥 궁금해져서요. 이유가 있으셨다면 죄송해요.”
뭐, 궁금할 수도 있겠군. 어차피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쓰던 것이기에 나는 말없이 후드를 젖혔다.
“…….”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르카나와 길드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놀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 돌아본 유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무슨 문제라도?”
찌푸리며 묻자, 움찔한 아르카나가 곧 표정을 원래대로 바꾸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 아무것도요! 네, 아무것도!”
약간 의심스러웠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저기, 그러면 앞으로 카프로스 님을 저희 길드의 길드마스터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 높은 분으로 대접해도 될까요?”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만…….”
“어떻게 이런 도움을 받고 그냥 입을 닦아요. 그렇게는 못 하죠. 더 좋은 감사 표시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희 길드가 가진 게 없어서……. 그래도 나중에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이 이상 내버려 두었다가는 아르카나의 말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나는 알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대답한 순간 아르카나의 흥분에 찬 목소리가 뚝 멈추었지만, 그건 그저 한 마디를 더 추가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정말이시죠? 그러면 이제부터는 말도 편하게 해 주세요! 저희 길드의 은인이자 선생님이 되어주실 분께 존대를 들을 순 없으니까요!”
그것까지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다른 길드원들까지 합세하여 무어라 해 대는 통에 정신이 없어 결국 수락하는 듯한 형태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이번 일이 끝나면 이 부담스러운 곳에 두 번은 안 오리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이 앞에서 바로 보여…줄 테니 나가지.”
모두가 밖으로 나온 뒤 나는 일단 가장 작은 크기로 천천히 이미지하면서 5서클 마법들을 몇 가지 시전했다.
더스트 윈드, 스톤 엣지, 매직 블레이드, 홀드 퍼슨.
나를 향해 마법을 사용하는 상대가 있어야 적용 가능한 탓에 사용이 번거로운 디스펠과 슈페리어에게 얻은 마법인 블링크는 안 보여 주는 게 더 나을 것이라 판단해 제외했다. 더스트 윈드 말고는 전부 오랜만에 해 보는 거라 느낌이 새로웠다.
“우… 우와.”
“허헉……! 저것 봐. 완벽하게 구현된 5서클이라니…….”
내 주변을 둘러싼 길드원들의 눈빛이 경악과 황홀함에 뒤덮였다. 시전된 마법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느라 정신없는 사람들을 보자 상당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유저들 역시 신기해하기는 했겠지만 이들의 반응은 같은 마법사라서 그런지 정도가 더 심한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탄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건 역시 4서클 마스터의 아르카나였다.
마침내 길드원 하나를 상대로 한 홀드 퍼슨까지 끝내 버린 후 숨을 고르며 뒤돌아서자, 뒤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세상에, 진짜 5서클 마스터셨군요!”
“카프로스 님, 감사합니다!”
“지, 진짜 멋있어요! 짱!”
아르카나는 아예 달려와서 인사를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
이런 넘칠 정도로 존경에 찬 시선은 처음…은 아니군. 예전에 검도할 때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젓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기뻐하는 그들에게 나는 한숨을 쉬며 한 가지 사항만을 당부했다.
다 좋으니 웹이나 다른 곳에는 오늘 일을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말에 길드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구경하느라 넋이 나가서 영상 하나 찍을 정신도 없었는걸요.”
“자, 자, 그러면!”
아르카나가 박수를 쳐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우리가 내일 길드전에 나가서 또 죄다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죽도록 연습해 보자고!”
“좋아!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난 오늘 밤새서 수련한다!”
“너만 하냐? 내가 먼저 할 거야! 비켜!”
그 의욕에 찬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어서 매직 소드 마스터리나 슈페리어의 나머지 마법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아르카나는 살짝 눈물기가 어린 모습으로 나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사람들을 내몰았다.
“고맙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저었다.
“그 말은 이제 그만.”
“그래도요.”
“우리는 이제 가 볼 테니…….”
뒷말을 하기 전에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연습 잘 해.”
이런 말을, 예전에 후배들에게 한 이후 얼마나 오랜만에 하는 건지 기억도 안 났다. 누군가를 향한 격려라니. 어색하고 낯 뜨겁기 짝이 없었지만 아르카나는 밝은 미소와 함께 환하게 대답했다.
“예! 나중에 꼭 다시 뵈어요!”
나는 그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그대로 유완의 팔을 잡아 골목 쪽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돌아 매직토피아 길드의 아지트가 한눈에 보일 만한 건물의 위까지 올라왔을 때에서야 겨우 숨이 조금 평소처럼 되돌아왔다. 고개를 돌리니 말없이 나를 보는 유완이 보였다.
“…….”
순간 유완을 끌고 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지만, 곧 마음이 진정됐다. 나는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지붕 위는 확실히 시야가 탁 트여 좋았다.
“카프.”
유완이 나를 불렀다. 불러 놓고는 말없이 내 눈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갑자기 어색해지는 느낌이 들어, 나는 겨우 먼저 입을 열었다.
“요 며칠간, 뭐 하느라 안 보였던 거냐?”
“수련.”
유완이 짧게 대답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매직토피아 길드 건물 위로 불꽃이나 전기가 이따금 폭발하여 튀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는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사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지만 일단 들어 줬으면 좋겠다.”
대답은 없었지만 나는 유완이 내 말을 듣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그동안 머릿속에서 떠돌던 것들을 하나하나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너는 너무 수상한 점이 많은 놈이야. 맨 처음 만났던 던전에서도 그렇지. 아마 그때 있었던 보스 몬스터 사건이 너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야. 그것뿐만이 아니라 계속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던 걸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어. 그 일들에 대해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싸늘한 시선 앞에서도 유완은 생각 외로 덤덤해 보였지만, 입을 연 건 시간이 흘러 완전히 어둠이 깔렸을 때였다.
“못한다.”
“뭐?”
어이없게도 고작 그 짧은 말을 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리게 한 건가 싶어 울컥한 나에게 유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너에게 설명해 줄 수 없다. 이해해 줘.”
이해? 지금 네가 이해라고 했냐?
“웃기지 마라. 노코멘트는 안 받아. 똑바로 설명해. 설명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너를 잘못 믿었다고 생각하고 떠나겠어.”
내가 정말로 유완을 잘못 본 건가?
지금까지 나와 함께 다녔던 유완이라면 필히 내가 납득하도록 설명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다시 그를 믿을 수 있게 되리라고, 완전한 ‘친구’가 될 거라 믿었었는데.
아니란 말인가?
슬슬 치솟는 분노와 약간의 배신감 비슷한 감정으로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관련도 없고. 그저 내 일일 뿐이야.”
유완이 잘생긴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대답했다.
뭘 모르는군. 여기서 중요한 건 유완의 수상한 일들에 내가 관련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그게 내게 피해를 끼치는지 안 끼치는지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친구’가 나를 속이고, 내 눈앞에서 설명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데 분노하고 있었다.
키온 형이 뭐라고 말했던가. 내가 친구로 생각하더라도, 과연 상대도 그렇게 생각할지 안 할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건 이미 몸으로 겪어서 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정승조란 놈을 친구로 생각했지만, 놈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졌던 사고 이후 그런 경험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보처럼 또다시 사람을 믿게 되었고, 친구라 인정하게 되었고, 함께 즐겁게 웃고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그 모든 것이 나만의 착각이라는 소리인가. 결과는 결국 또 그때와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관련이 없다고? 신경 쓸 일이 아니니 그저 그렇게 이해하라고?
나는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이 지끈거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무시한 채 유완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설명할 수 없어?”
유완도 나를 친구라 생각한다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라도 말할 줄 알았다.
변명이라도, 아니. 그냥 다른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미안.”
“……크.”
미치겠군.
난 속에서 치솟는 허탈한 웃음을 있는 힘껏 내리누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나만 묻자.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키온 형이 나에게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는 유완도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내 표정을 바라보며 질문의 진의를 읽으려는 듯하다가 여의치 않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친구.”
느리게 흘러나간 대답이 공허하게 울렸다. 유완도 나를 따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까지는 내려다볼 수 있었던 눈이 완전히 다리를 펴고 나서는 나보다 위에 있었다.
빌어먹을. 본의 아니게 내가 얕잡히는 구도다.
유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아니다.”
순간, 머릿속이 꽉 찼다가 한꺼번에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매직토피아 길드 건물에서 파이어 볼 몇 개가 하늘 위로 치솟았다. 파이어 볼은 마치 불꽃놀이같이 펑펑 터지며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것을 흘깃 바라본 순간 문득 모든 게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붕에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차가운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그것도 유완, 너를 상대로.
“무엇이 목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도 아닌 자와 함께 다니느라 그동안 수고했다고 말해야 하는 거냐?”
마음과 달리 매우 덤덤하게 나간 질문에 유완이 순간 눈빛을 굳혔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뭔데?”
참으려고 해 보았지만, 결국 뱃속에서 차가운 불이 활활 올라왔다.
“카프.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주먹이라도 한 방 올려붙여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유완이 난감한 눈빛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해라고? 친구라 생각지 않는다고 제 입으로 말해 놓고 뭐가 오해란 말인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 설명이 짧았던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유완이 조금 전과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뜨거우면서도 굳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며 손을 뻗었다. 갑작스레 얼굴로 다가오는 손을 거부하지 않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서늘한 큰 손이 완전히 뺨에 닿았다.
순간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친구로서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게 바로 완전한 대답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다음 순간 눈앞에 너무나 가까이 다가온 유완의 얼굴이 나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감각조차 알 수 없는 입술이 그와 똑같은 내 입술에 살짝 꾹 맞닿았다가는 재빨리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키스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수준의 접촉이었지만, 나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워진 탓에 유완이 내게서 손을 떼고 물러선 다음에도 몇 분간 그렇게 멈추어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뒤로 두세 발짝 더 물러난 상태였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시야 안에 씁쓸한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유완이 들어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가 묘하게 시원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럴 것 같아서… 피하고 싶었는데.”
“…….”
“너무 놀라지는 말아 줬으면 한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또다시 씁쓸한 표정이 유완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어떻게든 억지로 다시 돌리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방금 일어난 접촉의 의미는 느끼지 않으려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명명백백했다.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동성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역시 한 번도 없었고. 그랬는데…….
“하아…….”
겨우 한숨을 내뱉자, 유완의 깊어진 눈이 전보다 더 선명해진 의미를 띠고 나를 바라봤다. 가볍게 흔들리는 그 눈동자로 인해 나는 지금까지 내가 유완에게 따지고 화를 내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둘 다 차마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현재 유완이 나에게 대답을 바라고 있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 정리를 한 후, 느릿하게 대답했다.
“……네가 오해라고 했던 말뜻은, 일단 알겠어. 하지만 설명하지 않은 부분까지 납득한 건 아니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내 대답을 들은 유완이 갑자기 어깨를 가볍게 떨며 웃기 시작했다. 혹시 미친 건가?
“역시 너는 냉정할 정도로 침착해. 네 그런 면이, 전부터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
방금 남자에게 뽀뽀 받고 난데없이 나의 매력에 대해 들어야 하는 내 심정은 생각해 보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지금 꽤 혼란스러운데, 별로 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완은 가볍게 웃고 나서 내 머리칼을 손으로 슬쩍 훑어 내렸다.
“다음을 기약해 줬으니 그때는 나도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니 너도 내 말에 대해 생각해 줘.”
그는 그대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시 평소의 과묵한 유완으로 되돌아왔다. 나도 이 이상 여기서 어떤 대화를 더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키온 형과 팔튼의 자이언트 길드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유완이 이제 내 뒤를 쫓아오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다음 날,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카프! 내가 해냈어!”
크란이 감격으로 떨면서 소리쳤다.
“응?”
“해냈다니까, 그 고난의 10연속 퀘스트 전부 다!”
나는 감동에 북받쳐 평소의 몇 배는 반짝대는 크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축하한다.”
“흐흐흑. 악마 같은 신전 노인네들이 마지막 열 번째로 자그레브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대 조각 꼭대기에서 쪽팔리는 문장을 큰 소리로 100번 읽으라고 했을 땐 정말로 포기하고 싶었는데…….”
크란이 바닥에 털썩 쓰러지면서 눈물을 삼켰다.
“시편 10장 1절, 참으로 자비로우신 신의 미소 끝 간 데 없으시네! ……모든 사람들이 날 보고 웃었다고. 배경으로 스크린샷에 동영상도 찍혔어. 흐흐흐흑……. 조금만 더 했으면 게임TV에서 취재 나왔을지도 몰라. 이게 무슨 자비야! 무자비지! 무자비한 놈들.”
내가 아는 크란은 그런 일을 했다고 특별히 쪽팔려할 만한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문득 나도 보러 갈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꽤 웃겼을 것 같은데.
크란의 넋두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도 결국 해내서 장소에 대한 실마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어?”
그때 크란이 말하다 말고 우리들 쪽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유완 쪽이었다.
“그런데 깜장검사, 너도 와 있었네? 하도 안 보여서 게임 접은 줄 알았는데.”
“안 접었다.”
유완이 태연히 대답하자, 크란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넌 아직도 퀘스트 첫 번째 실마리도 못 잡았지? 난 이제 찾으러만 가면 끝이다! 으하하하!”
지금까지의 고생이 전부 싹 씻겨 나간다는 얼굴로 시원하게 웃는 크란을 유완은 무표정 그대로 쳐다보았다. 한참을 웃어도 반응이 없는 그 표정에 크란이 미묘한 불안감을 느낀 듯 슬그머니 멈추자, 유완의 입가에 차갑고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뭐, 뭐냐? 그 재수없는 표정.”
“끝이라는 말을 잘못된 의미로 사용하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텐데.”
순간 크란의 표정이 하얗게 굳었다.
“이, 이 자식. 그동안 좀 안 보인다 했더니 싸가지가 업그레이드를 했구나!”
크란이 분노로 펄펄 뛰었지만, 유완은 왜 저러느냐는 듯한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더 열을 받게 만들었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유완과 크란의 재롱 잔치 같은 말싸움에 피식 웃었다.
‘저놈들 덕분에 오랜만에 웃는 것 같군.’
내가 웃는 모습을 본 유완은 크란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곧바로 표정을 부드럽게 풀더니 이내 눈가를 접으며 마주 미소했다.
“아니, 이젠 대놓고 비웃어?”
물론 크란은 그 미소에 무척 분노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모르긴 뭘 몰라!”
“그럴수록 우습다는 건 알겠군.”
“뭐…… 뭐라고…….”
네가 왜 그러는지 난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유완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즐거운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해도 유완 역시 크란과 이런 의미 없는 재롱을 피우는 걸 꽤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너한테 말을 건 내가 미친놈이지…….”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는 외침과 함께 뒤돌아선 크란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씩 하고 흰 이를 드러내며 나이에 안 맞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나는 그제야 이놈도 일부러 오버해서 유완에게 져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전에도 계속.
그런 둘의 미소는 어딘지 닮아 있었다.
그 의미를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결국 배를 잡고 웃고 말았다.
“하하하…….”
겨우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다시 완성된 느낌이었다.
“카프. 그런데 오늘이 길드전이라며? 거기 갈 거지?”
한참 후에 내가 진정되자 크란이 갑자기 낯빛을 걱정스럽게 바꾸며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지금 팔튼과 키온 형은 길드전이 열리는 장소에 미리 나간 상태였다. 그곳은 바로 자그레브 서쪽의 거대한 분지였다.
“응.”
“그러면 지금 바로 떠날 수는 없겠네.”
“떠나다니, 어딜?”
의아해하며 묻자 크란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어, 그거야 당연히 내 퀘스트가 잠들어 있는 곳이지 어디겠어.”
아, 맞다. 방금 퀘스트 장소를 알아냈다고 했었던가.
“장소를 알아내기 위한 퀘스트 열 개는 다 수행했지만, 시간제한이 또 걸렸어. 미스트 시간으로 밤이 되기 전까지 그 장소에 도착해야만 하거든.”
“어딘데?”
게임 시간으로 오늘 밤이라면 꽤 촉박했다. 크란이 퀘스트 장소를 알아낸 건 다행이지만, 모처럼 길드전을 한번 체험해 보려던 계획은 아무래도 계획으로만 끝나게 될 듯했다.
“탈란트 동굴. 중앙에 있는 자그레브에서 서쪽으로 갈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는 던전이라고 하더라고. 길드전을 하는 서쪽 대분지 바로 옆이라니까 멀진 않아.”
자신 덕분에 내가 길드전을 즐기지 못할까 걱정된 듯 눈치를 살피며 말하는 표정이 꽤 불쌍했다. 하지만 퀘스트를 끝낸 날짜가 오늘인 게 크란의 잘못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불만 없이 내 길에 동행해 준 크란을 위해서라면 나는 길드전이 아니라 다른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더라도 당연히 함께 가는 쪽을 우선했을 것이다. 사실 그까짓 길드전이야 가나 안 가나 그게 그거니까.
나는 바로 떠나자고 말하려다, 순간 떠오른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아…….”
“왜?”
“키온 형이 이미 거기 가 있으니 사정 설명만 하고 그다음에 던전으로 가도 괜찮을까.”
“어…….”
길드전이 열리는 장소에서 내가 올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키온 형에게 말도 없이 불참하면 엄청나게 섭섭해 할 것이 뻔했다. 가는 길에 분지가 있다니 가능하면 잠시 설명을 하고 가도 괜찮을 듯했다.
‘그리고 형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도 있고.’
형의 퀘스트가 그동안 지체되어 있었던 원인. 그것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어쩌면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걸 하나 깨달았었다. 그것만큼은 최대한 빨리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당연히 괜찮지!”
크란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퀘스트만 해결하고 다시 여기로 돌아올 거니까 상관없어. 사실 나도 그런 대규모 길드전은 처음이라 구경해 보고 싶기도 했거든.”
대답과 함께 씩 웃는 크란이 갑자기 평소의 푼수가 아닌 더없이 든든한 친구로 느껴졌다.
“그럼 지체하지 않는 것이 좋겠군. 가자.”
유완이 검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앞서 나가고 크란과 나도 재빨리 뒤를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자그레브 거리는 온통 뜨거운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서쪽 성문 밖으로 나가 분지로 향했다. 길드전이 열리는 장소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저기다!”
눈에 들어온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와…….”
분지를 가득 메운 인파는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 많은 이들이 모두 제각기 길드에 속해 있고, 오늘의 길드전에 참가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람들은 비어 있는 중앙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모여 있었다. 그 중앙에는 뭔가 어른거리고 있었지만 이 거리에서는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선명한 붉은색으로 떠오른 이름과 함께 길드 문장이 박혀 있어 한눈에도 어디 길드 소속인지 파악이 가능했다. 한 길드당 출전한 사람 수가 일정한 것으로 보아 출전할 수 있는 인원수는 정해져 있는 듯했다.
“대단하다. 참가한 길드만 수십 개는 되겠어.”
크란이 흥미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직은 준비 중인 것 같으니 잘됐다. 얼른 가자.”
“음…….”
시끌벅적하지만 곧 터질 듯한 긴장감 속에서도 크란과 유완은 개의치 않고 나보다 앞서 나갔다. 그에 뒤질세라 나는 구경하던 시선을 거두고 조금 더 걸음을 빨리해야만 했다.
“카르! 여기야, 여기!”
“형.”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불러대는 키온 형이 보였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이리저리 대열을 맞추고 있던 자이언트 길드의 길드원들이 우리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다들 얼굴은 이곳에 있는 동안 어느 정도 익었지만, 개인적으로 말을 나눠 본 적은 없었다. 팔튼은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열기를 지켜보다가 형을 돌아봤다. 형의 얼굴이 흥분과 긴장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형님.”
“…….”
넉살 좋게 인사하는 것은 크란이고, 말없이 목례만 한 것은 유완이었다.
“뭐야. 너희들도 왔냐?”
키온 형은 역시나 형다운 말투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유완이 좀 수상하기는 해도 나쁜 의도를 품은 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어제 전했었는데, 형은 그럼에도 완전히 의혹을 떨치지는 않은 듯했다. 그래도 시원시원하게 둘의 등짝을 두들기는 형을 보니 서로 친해지지는 못했을지라도 나쁜 분위기는 아니라 좀 안심이 되었다.
“아, 맞다. 팔등이 놈은 지금 앞에 신청하러 나가 있어. 보여?”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키온 형이 먼저 앞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위에서 볼 때는 흐릿했던 물체가 그제야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땅에 깊숙이 꽂혀 있는 지팡이처럼 보였다. 윗부분에 달린 큰 수정구에 몇몇 사람들이 다가가 손을 올리고 뭔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에는 거대한 키 탓에 멀리서도 몹시 눈에 잘 띄는 팔튼도 있었다.
“저게 뭐야?”
“아, 저거? 저게 바로 이 길드전의 핵심이야. ‘반복되는 희망의 잔재’란 아이템인데 길드전 시작 전에는 각 길드장들이 저기 손을 대야 길드전 참가 신청이 되는 거고, 길드전 중에는 마지막으로 저걸 차지하는 길드가 이기게 되는 거지.”
형의 말에 나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대수롭지 않은 지팡이 하나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니.
“하지만 저건 그냥 상징적인 아이템이고, 길드전 끝나면 바로 사라진다. 아직 정식 공성전 등의 업데이트가 안 되어서 그런 것 같아. 싸움방식도 전략이 거의 필요 없이 힘으로만 우열이 가려지는 무한전 형식이거든.”
‘그리고 힘! 하면 우리 아니겠냐?’ 하며 키온 형이 푸하하하 웃어젖혔다. 자랑 삼매경에 빠진 키온 형에게 신경을 끄고 나는 주변을 좀 더 둘러봤다. 그러나 조금 먼 곳에서 갑자기 일어난 소란으로 인해 그것도 곧 끝이 났다.
“……님!”
“카프로스 님!”
“우와, 카프로스 님! 여기 좀 봐 주세요!”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전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형과 유완, 크란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 쏠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냐, 저 떨거지들은?”
형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 떨거지들은 바로 이전에 독특한 인연으로 만났던 매직토피아 길드의 길드원들이었다. 나를 알아보고 난리를 피우는 그들 사이에 아르카나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녀 또한 지팡이 쪽에 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참가했군.’
참가할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는 했지만, 설마 진짜 할 줄은 몰랐다.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그들에게 향한 내 시선을 마주하고는 거의 연예인이 돌아보기라도 한 양 더 환호하는 모습에 키온 형과 크란은 어리둥절해했다. 두 사람은 나와 매직토피아 길드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했지만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사연이었다.
유일하게 그 사연을 아는 유완이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자 갑자기 그날 있었던 또 다른 일이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실제로도 거의 그랬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내가 미묘하게 신경 쓰고 있음에는 틀림없는 그것.
‘당했지.’
그것도 매우 갑작스럽게.
“……어제 우연히 만났던 길드 사람들이야.”
나는 짧은 대답과 함께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그 기억에서도 신경을 끄기 위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유완이 끊임없이 쳐다보았지만 무시했다.
“신청 끝냈다.”
다행히 때맞추어 길드전 참가 의사 표시를 마치고 돌아온 팔튼이 아니었다면 나는 조금 더 곤란한 처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팔튼의 능글거리는 미소에 약간의 감사를 느끼며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렇게 다 모인 얼굴들을 보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은데. 처음 만났던 이후엔 한 번도 없었지, 아마?”
팔튼이 그렇게 말하며 등 뒤의 대검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무 의미 없이 그냥 확인해보기 위한 행동인 듯했지만, 덩치가 워낙 크기 때문인지 그 간단한 동작마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그쪽의 다크. 가출했다 돌아왔다며? 크하하하.”
유완과 나는 동시에 팔튼에게서 매몰차게 시선을 돌렸다.
“뭐야, 이쁜이들. 너무 차가운데. 며칠이나 내 길드에서 묵었으면서 말이야.”
팔튼은 굴하지 않고 업그레이드된 듯한 능글거리는 멘트를 날려 키온 형의 주먹을 샀다.
“컥!”
“넌 꼭 이런 날만 되면 지랄을 평소의 두 배로 하더라? 카르는 내가 불러서 구경을 하러 온 거지, 길드를 도우려고 온 건 아니라는 걸 명심해.”
맞는 말이었다. 내가 참여까지 하길 원했다면 길드의 참가 멤버에 이름을 올렸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크란의 퀘스트 때문에 곧 자리를 비워야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은 그것이 참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크크크. 아쉬워서 그러지. 이쁜이들이 우리 쪽에 섰다면 지팡이는 곧바로 우리 건데.”
“……지금 네가 지팡이 소리가 나오냐? 엉? 시작하자마자 매번 대량 학살에 미쳐 혼자 사라지는 놈이, 뭐? 지팡이? 까고 있네!”
그쯤 되어 나는 이제 슬슬 여기 온 목적을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크란을 쳐다보자 약간 긴장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나를 따라서 와 주기는 했지만, 시간제한이 걸려 있는 만큼 퀘스트의 성공 여부에 민감해져 있었으리라는 것쯤은 예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형.”
“잠깐만, 한 방만 더. ……엉?”
늘 있었던 당연한 절차처럼 팔튼을 두들겨 패던 키온 형이 내 부름에 뒤돌아섰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 길드전 구경을 못 하게 될 것 같아.”
“어? 왜?”
형은 팔튼을 비틀어 밟고 있던 발까지도 완전히 멈췄다.
“무슨 일 있는 거냐?”
걱정스러운 빛을 띤 형을 보자 웃음이 났다.
“그런 건 아냐. 크란이 퀘스트를 다 깨고 드디어 진짜 퀘스트의 장소를 알아냈다고 해서, 거기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아하! 어딘데? 여기서 가까워?”
“응. 이 옆의 탈란트 동굴.”
“……뭐? 탈란트?”
그 순간, 형뿐만이 아니라 바닥에 쓰러져 있던 팔튼까지 퍼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빌어먹을. 왜 또 하필 탈란트야? 거기 꼭 지금 가야 하는 거냐?”
키온 형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나는 슬쩍 크란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제한이 얼마 안 남았어.”
“빌어먹을! 무슨 놈의 시간제한!”
고함을 지른 형이 내 어깨를 콱 붙잡았다.
“거기가 어떤 데인지 모르지?”
“서쪽으로 향하는 통로라고 들었는데.”
크란에게 들었던 말을 해 주자 형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그래, 통로지. 하지만 아무도 안 들어가는 통로다. 너라면 왜 그런지 예상하겠지?”
그제야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는 명백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우리가 겪어왔던 이유였다.
“……안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세?”
직접적으로 물었다.
“힘들다. 거긴 보통 언데드가 있는 게 아냐. 리자드 맨이나 뱀파이어 같은 상급 몬스터가 널렸어. 웬만한 게 전부 준보스급이라면 믿겠어? 거기다 수도 많아서 들어가자마자 개떼처럼 몰려드는 게 장난이 아니야.”
그 말에 유완과 크란의 눈빛이 날이 선 듯 가라앉았다. 나는 형의 정보를 토대로 냉정히 승률을 판단해 보았다.
확실히, 힘들 것 같다. 하지만…….
“괜찮아. 알려 준 것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지금은 나뿐만 아니라 확실히 실력이 오른 유완도 있었다. 유완을 돌아보자 그가 조금 굳은 눈빛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내 말투가 지나치게 태연하게 들렸던 것인지, 키온 형은 한층 더 걱정하다 못해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아, 정말……. 미리 말했어야지! 그럼 길드전도 뺐을 텐데. 씨발. 야, 팔등아. 나 지금이라도 빠져도 되냐?”
“…….”
평소라면 당연히 안 된다고 했을 것 같은 팔튼이 침묵했다. 그만큼 그 탈란트 동굴이라는 곳이 위험한 곳인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 둘이 얼마나 이 길드전을 기다려왔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형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도 있어서 왔던 거고.
“형. 잠깐만.”
“응.”
“전에 형이 말했던 막혀 있다던 그 실마리 말인데.”
[ 홀리 나이트와 그 친구의 마지막 기억이 있는 여신의 마지막 신전으로 향하라. 우정의 이름으로 보호되고 있었으나, 현재는 어둠에 침범되어 옛 모습을 잃고 더러워져 버린 헛된 유적에 불과하다. ]
형이 그것을 떠올렸는지 순식간에 안색이 확 변했다.
“엉. 왜?”
“내가 던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던 다음에 그것과 관련해서 좀 더 생각을 해 보았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내 여행의 과정을 다시 되짚어 보다가 떠오른 것이지만 말이다.
“형. 그 실마리와 관계있는 던전을 내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형과 팔튼은 동시에 눈을 한껏 크게 떴다.
“뭐, 뭐? 그게 정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난 한 번 듣기만 했으니, 크란이 좀 더 잘 알고 있겠지만.”
갑작스럽게 크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크란이 눈을 깜박거리며 ‘어, 나?’ 하고 물었다.
“혹시, 토렐리트에서 우리가 갔던 미로 던전 옆에 있다던 ‘잊혀져 버린 신전 던전’. 기억해?”
내 질문에 잠시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던 크란이 곧 고개를 슬며시 끄덕거렸다. 동시에 던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변한 키온 형이 크란의 어깨를 확 잡아챘다.
“진짜냐?! 잊혀져 버린 신전?! 그, 그런 게 있었다고?”
“아…… 네.”
“이런, 맙소사! 이름만 들어도 딱 거기구만! 어디냐, 토렐리트라고?”
물론 아닐지도 모른다고 사족을 달려던 내 말을 거의 묻어 버리듯이 키온 형은 무시무시한 고함을 내질렀다. 팔튼이 키온 형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야, 일단 진정해라. 내가 들어도 거기 이름이 딱인 것 같기는 한데…… 토렐리트라면, 그 워프게이트로 갈 수 있는 동쪽의 대도시였나?”
“네.”
“크아아아!”
말이 끝나자마자 비명을 지른 형이 나를 왁살스럽게 껴안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거기야, 거기! 더 볼 것도 없어! 이름부터가 내 퀘스트랑 짝짜꿍이잖냐! 잊혀져 버린 여신의 영광 퀘스트에 잊혀져 버린 신전. 그냥 딱이네, 딱! 고맙다, 카르!”
우리가 탈란트에 가야 한다는 건 그새 까맣게 잊어먹은 듯, 무작정 기쁨에 넘치는 형을 향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토록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말해 주러 바로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뭐지?’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아까까지와 180도 다른 이질감 속에서, 우리들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벅, 저벅, 저벅.
분명히 작아서 들리지 말아야 할 발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흥분과 긴장이 아니라 얼음물을 끼얹은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길드들의 한가운데를 지나 당당히 걸어가고 있는 일련의 무리가 보였다. 그 맨 앞쪽에 선 검은 투구와 검은 갑옷의 남자의 정체를,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가 바로 마신의 기사 퀘스트를 수행하는 유저였다.
이름이…… 시저였던가.
그 무리들은 침묵 속을 걸어 자신들의 위치에 멈춰 섰다. 동시에 검은 투구를 쓴 남자는 혼자 다시 뒤돌아서서 지팡이가 있는 텅 빈 공터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가는 길에 들어찬 것은 오직 침묵뿐이었다. 단 한 사람의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수백 명의 숨소리조차 잠재운 것 같았다. 모두가 그 걸음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투명한 수정구가 달린 지팡이 앞에 선 남자가,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동작으로 한 손을 올리고는 문득 고개를 돌려 이쪽을 응시했다.
“시저. 저놈이 어떻게 여길…….”
키온 형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설마…….”
크란이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 팍팍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전에 말했던 페일 나이츠 길드마스터. 마신의 기사 퀘스트 유저다. 이름은 시저.”
크란의 기대를 깨뜨린 것은 팔튼이었다. 잠시 이쪽에 시선을 주었던 검은 갑옷의 남자는 빛이 새어 나오는 수정구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최면에서 풀려나듯 하나둘씩 입을 열었고, 마침내는 경악과 놀라움에 찬 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페일 나이츠가 나타나다니…….”
“갑자기 왜…….”
“저 사람이 바로 길드마스터인 시저…….”
웬만한 사람들은 전부 그들을 알고 있는 듯, 의아해하는 말보다는 공포에 질린 속삭임이 더 많았다. 그것을 휘휘 둘러보던 키온 형이 별안간 우리들을 끌고 뒤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형?”
“빌어먹을, 저놈이 왜 여기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눈에 띄는 자리부터 피하고 보자.”
형의 눈에서는 거의 불꽃이 튀고 있었다.
“저놈이 나타난 이상 곱게 가는 건 글렀어. 이 상황에 여기서 벗어나면 오히려 눈에 띌 테니, 길드전이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최대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가! 정신이 없어서 누가 누군지도 모를 테고, 일직선으로 뚫기만 하면 그쪽이 목적지까지 훨씬 빨리 갈 수 있어.”
다급한 그 말에 나는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황망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 형은?”
“나랑 팔튼은 여기서 저놈 시선 끌어야지. 지금 저놈이 너희들을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얄짤 없어.”
“그러면 형은…….”
“우린 괜찮아. 길드전 참가 신청을 했으니까 여기서 죽어도 전혀 불이익 없이 하루만 지나면 재접속 가능해. 하지만 너희는 아니잖아!”
그 말과 함께 형은 내가 이제는 습관적으로 항상 쓰고 있는 후드를 아예 앞으로 끌어 내리듯이 확 잡아당겼다. 덕분에 시야가 차단되면서 얼굴의 반 정도가 그대로 가려졌다.
“윽…….”
“미안. 하지만 저놈 앞에서 얼굴은 되도록 가리는 게 나중에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나을 거다. 그럼 이제 빨리 가.”
대답을 하려던 순간, 뿌우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띠링, 띠링, 띠링!
- 길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01:30~06:30.
간단한 안내창이 떠올랐다 곧 사라짐과 동시에 웅성대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함과 함께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매직토피아 길드원들,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페일 나이츠, 그리고 중앙에 꽂힌 지팡이 옆에 서 있던 시저라는 놈까지 인파의 물결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뒤섞이며 일시적인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무릎까지 깔리는 먼지구름과 함께 땅이 진동하는 느낌에 순간 비틀거린 나를 뒤에 있던 크란이 잡아주었다. 키온 형이 눈을 번뜩이며 팔튼을 홱 돌아보았다.
“팔튼!”
“알았어.”
팔튼이 엄청난 빠르기로 대검을 등 뒤에서 뽑아 들었다. 큰 원이 그려지며 양손에 들린 검의 날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팔튼은 그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씩 미소 짓더니 곧 우리들을 바라보며 한 손을 들었다.
“먼저 간다! 하하하하!”
그 무거운 무기를 들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빠르기로 거대한 장신이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갔다.
콰앙!
“크아아악!”
그가 달려간 쪽에서 폭발음과 함께 큰 비명 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그쪽을 흘깃거린 키온 형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이제 나도 가야겠다. 되도록 휘말리지 말고 빠르게 지나가도록 해라. 탈란트 동굴은 저쪽 방향으로 쭉 달려가면 금방이야.”
“끝나면 길드하우스로 돌아갈게.”
단호하게 말하자 형이 큭큭 웃으며 내 손을 확 놓았다.
“그래. 거기서 보자. 조심해! 죽지 말고!”
말을 마친 형은 곧바로 팔튼이 달려간 쪽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형이 달려간 쪽에서도 곧 고함과 비명이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그 뒤를 따르기 전, 나는 유완과 크란을 잠시 살폈다. 유완은 이 분위기 속에서도 냉철한 무표정 그대로였다. 크란이 흥분과 긴장으로 눈가가 붉어진 채 검을 뽑아 들었다.
“카프. 우리도 가자!”
“응.”
유완 또한 스르렁 하고 심장에 박힐 듯한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우리들은 그대로 전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뭐야, 이 자식들은!”
갑자기 옆을 뚫고 지나가는 우리들에게 한 사람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는 곧 앞서 나가던 크란의 흰빛 나는 검에 의해 깔끔하게 팔이 잘렸다. 동시에 유완은 내 옆에서 적인 줄 알고 달려드는 놈을 발로 차면서 검을 찌르고 있었다. 그 움직임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어떤 몬스터 사냥 때보다도 빠르고 신속했다.
“크악!”
피가 치솟는 시각적 효과에 놀라 뒤로 넘어진 그들을 제치고 망설임 없이 달려가면서도 나는 계속 주변을 돌아보기에 바빴다.
혹시라도 그 ‘만나지 말아야 할’ 시저가 근처에 있나 싶어서이기도 했고 팔튼과 키온 형의 모습도 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워낙 난전 중이고, 시야에 사람만 가득 차 있어 누가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카프, 빨리!”
잠깐 정신을 판 사이 좀 뒤처지자 크란이 내 팔을 잡았다. 이렇게 여기저기 사람들이 엉켜 있는 곳에서는 마음 놓고 블링크를 쓸 수가 없었다. 블링크는 앞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쓸 수 있는 단거리 순간 이동 기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헤이스트에 매직 실드까지 치고도 현재 달리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계속 떨어지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적으로 오인하고 달려드는 사람들까지 처리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크란과 유완이 빠르게 처리해 줘서 다행이었다.
크란이 내 팔을 끌고 오는 것을 기다려 유완이 앞을 막고 있던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길을 만들었다. 그의 검신에는 희미하게 오러가 맺혀 있었다. 매직토피아와 싸울 때 봤던 검보다 훨씬 더 긴 오러는 오래 쓰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기술인 모양이었다.
뚫린 길을 따라 크란의 팔에 끌려가던 중,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마법이 시전되는 것을 목격했다. 순간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지지직, 쾅! 지지직, 쾅! 지지지직, 콰콰쾅!
“으아악!”
“저건……!”
크란도 달려가다 멈칫하더니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전격 다발들이 사람들을 연결하며 연속으로 폭발하는 장면은 옆에서 본 이들마저 절로 피하게 만들기 충분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 마법을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체인 라이트닝……!”
4서클의 체인 라이트닝.
나 말고 다른 이가 시전한 체인 라이트닝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나는 달리던 것도 잊고 멈춰 섰다. 유저들이 죽어 사라진 너머로 슬쩍 드러난 마법의 시전자를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자 숨을 격하게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마법사 로브의 유저가 보였다. 긴 생머리에 당찬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가 누구인지 나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르카나. 매직토피아 길드의 길드마스터. 그러고 보니 그녀는 4서클 마스터라고 했었던가?
지쳐 보이는 아르카나는 시선을 돌리다 그 틈새에서 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카프로스 님! 맞죠?”
지친 얼굴 위로 반가운 표정이 확 살아난 그녀가 나를 향해 뛰어왔다. 크란이 검을 꽉 비틀어 잡았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아 제지했다. 멀리서 앞서 나가던 유완이 우리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그제야 알았는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후드를 엄청 깊이 쓰셔서 설마 했는데 여기서 뵐 줄이야……. 길드전에 참가하신 거예요?”
“아니, 우린 여길 빠져나가야 돼.”
“어머, 어쩌다가요?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그 와중에도 그녀의 뒤쪽에서 검을 치켜든 검사가 달려들었다.
“라이트닝 볼트!”
쾅!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시동어를 외쳤다. 머리 위로 떨어진 강력한 전격을 맞은 검사는 곧 로그아웃되어 스르르 사라졌다.
“어, 감사해요!”
아르카나는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듯 눈을 껌벅거리다 곧 상황을 파악하고 꾸벅 인사했다. 나는 고개만 대충 끄덕이고 바로 뒤돌아섰다.
“그럼 이만.”
“네, 네!”
나는 조급해 보이는 크란을 따라 뛰어가며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길드마스터나 되는 그녀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면 난전 중에 여기저기 흩어진 것 같았다.
조금 더 달려가자 유완이 다시 우리들에게로 합류했다. 그 와중에 또 얼마나 싸운 것인지 얼굴에 피가 약간 묻어 있었다. 이런 점은 또 소름 끼치게 사실적이라 정말 내가 난전 중의 전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다.
“……빨리.”
유완이 뺨을 훔치며 눈짓했고, 크란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우리들은 되도록 사람이 없는 쪽으로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아… 하……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아!”
크란이 희망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간신히 이 지옥 같은 달리기를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감동을 느끼며 마지막 힘을 내어 뛰어갔다.
“조금만 더……!”
스칵!
그때, 갑자기 우리들의 앞쪽으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길을 막듯 우르르 쓰러졌다.
“우아아악!”
“페일 나이츠 길마다!”
‘……뭐라고?’
동시에 귀신이라도 본 양 뒤돌아 우리들의 뒤쪽으로 황급히 도망가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대처가 늦어 줄줄이 로그아웃되어 사라지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 나오는 검은 갑옷의 남자와 나는 정통으로 마주하고야 말았다.
피가 떨어지는 검을 손에 든 채 투구를 쓰고 서 있는 남자는 이 아수라장 속에서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
“…….”
포식을 앞둔 맹수처럼 유유하게, 전혀 서두르지 않는 모습으로 투구 사이의 눈이 우리들을 훑어보았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몸이 붙잡힌 것처럼 그를 뚫고 지나갈 수 없었다. 일단 부딪쳤다가는 절대 그냥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 머릿속을 두들겨 댔다.
‘저놈이 시저군. 이렇게 갑자기 마주칠 줄은…….’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생각은 이성적으로 되고 있는데 눈은 잘 보이지도 않는 그 투구 안에서 도저히 뗄 수가 없었다. 그 또한 후드를 눌러쓴 나를 지나치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 보고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체 뭐지,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이상한 위화감이 시저와 내 사이에 감돌았다고 느낀 것은 착각인가? ……엄청나게 긴 것처럼 느껴졌지만 또한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제일 빨리 정신을 차린 것은 크란이었다.
“제…… 젠장. 깜장검사! 뛰어!”
크란이 내 팔을 붙잡고 방향을 틀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뛰기 시작했다. 유완도 크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반대쪽 팔을 붙잡고 뛰었다. 급발진하는 오토바이처럼 홱 끌려가면서 나는 간신히 그 위험한 투구 속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헤이스트!”
나에게만 걸어놓았던 마법을 유완과 크란에게까지 감싸 걸고 뛰는데, 문득 뒤쪽이나 앞쪽이나 지나치게 서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유완과 크란에게 끌려 뛰면서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솜털이 곤두설 정도의 오싹함을 느꼈다.
“……쫓아오고 있어!”
“뭐?”
내 말에 황급히 뒤돌아본 크란이 우왁 하고 고함을 질렀다.
“왜, 왜 쫓아와, 저놈?”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오러 검을 움켜쥔 검은 투구의 시저가 우리들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뒤쪽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몸을 낮춘 대지가 하늘을 향해 역행할 때, 바위는 배반자가 되어 올라가는 영원의 비수처럼 꽂히리라. 스톤 엣지!”
달리던 도중에 급하게 시전 하느라 집중이 흔들릴 뻔했지만, 다행히 서클, 시전, 주문까지 제대로 완성할 수 있었다.
쿠르르릉, 투쾅! 쾅!
곧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법 시전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방어를 위해 특별히 엄청난 크기로 이미징한 데다 5서클이기까지 하니 쉽게 빠져나올 순 없겠지. 그러나 한숨 돌렸던 것도 잠시, 유완이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굳어진 표정과 함께 내 팔을 더 꽉 붙잡았다. 유완의 악력에 놀란 나도 뒤돌아봤다.
‘……이럴 수가.’
흙더미로 인해 더러워지고 거리가 약간 더 멀어졌을 뿐, 시저는 여전히 수월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마법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이를 악물었다. 유완이 더는 안 되겠다는 듯 크란에게 소리쳤다.
“팔, 놔라.”
“왜, 인마!”
“놔!”
크란이 불안해하면서도 슬며시 힘을 빼자, 팔을 잡아당긴 유완이 그 언제인가 미로 던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를 번쩍 들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어깨에 걸쳐 멘 게 아니라 다소곳하게 앞으로 안아 올렸다는 것이다. 나는 순식간에 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을 느끼며 그를 밀치려 했지만, 유완이 가속도를 내어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오히려 공기의 압력에 밀려 찌그러졌다.
“너!”
“이쪽이 더 빠르니까.”
“깜장검사! 이 파렴치한 놈아! 이 와중에 혼자서만 좋은 짓 하지, 이 자식아!”
크란이 분노로 눈을 불태우며 아까보다 두 배는 빨라진 스피드로 뛰기 시작했다. 유완은 무표정으로 계속 달릴 뿐이었다. 앞에는 이 광경에 기겁하는 사람들, 뒤에는 쫓아오는 검은 투구. 처음으로 마법사를 선택한 것이 후회될 뻔한 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앞쪽으로 갈색 평지가 끝나고 푸른 초원이 다시 시작되는 곳을 발견한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빨리 뛰어라.”
유완이 나를 내려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래. ……하지만 사실은 느리게 뛰고 싶다.”
저 말의 진의에 대해서는 이따가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
여전히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에 조마조마함을 느끼며, 싸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갈색 평지를 지나 초원을 한참 더 달려간 끝에 우리들은 큰 굴 입구가 걸쳐 있는 높은 구릉의 앞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시간의 키스와 함께 적의 발을 묶어라. 홀드 퍼슨!”
유완이 잠시 속도를 줄인 사이, 나는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또 다른 5서클 마법을 뒤로 날려 보냈다. 그것이 먹혔는지 안 먹혔는지 확인해 볼 새도 없이 구릉 위로 올라간 우리는 그대로 굴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동굴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유완의 팔에서 빠르게 내려왔다. 시끄러운 곳에서 갑자기 벗어나 조용한 공간에 뚝 떨어졌기 때문인지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여기가 바로…….”
크란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은 입구라서 그런 것인지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기분 나쁘게 구불거리며 안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동굴은 한 치 앞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침침했다. 나는 동굴 안쪽을 한 번 훑어본 뒤 인상을 찡그리며 뒤돌아섰다.
“안 갈 거냐? 내가 홀드 퍼슨을 날리긴 했지만 놈이 언제 쫓아올지 모르는데.”
“어, 그래.”
그 말에 나처럼 동굴 안쪽을 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던 크란이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완의 대답은 없기에 쳐다보았더니 놈은 아직까지도 아까 들어온 순간의 자세 그대로 허공에 시선을 둔 채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얼굴은 나나 크란처럼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동굴에 대한 경계와는 좀 달랐다. 마치 무언가 읽고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움직이는 눈……?
‘뭐야……?’
나는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 유완의 어깨를 손으로 두들겼다.
“왜 그래?”
“아.”
그러자 손이 닿은 어깨에서부터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던 유완이 잠시 후 천천히 나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말과는 달리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 반응이었다. 유완이 보고 있던 곳을 나도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별것 없는데…….’
그 사이에 유완은 어느새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나를 보며 오히려 왜 그러느냐는 듯한 기색을 풍겼다. 허공과 유완의 얼굴을 아무리 번갈아 보아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기에 나는 기분 탓이었던 모양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카프! 빨리 가자며!”
미적대던 사이 앞서 뛰어나간 크란이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갈게.”
늦을세라 재빨리 뛰어가는 동안, 조금 전 느꼈던 의문은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크아아아!”
“내 생전 이런 물량 공세는 정말 처음이다! 전에 만났던 칼랍 놈들은 이거에 비하면 소수정예였어, 소수정예!”
앞쪽에서 또 튀어나온 몬스터들을 정신없이 상대하던 크란이 고함을 질렀다. 흰빛으로 번뜩이며 위험한 기운을 내뿜는 검이 폭발하는 크란의 분노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직 동굴의 시작부일 뿐인데 벌써 그래서야 쓰나. 하지만 저리 고함을 지르는 걸 보면 아직 기운이 떨어진 건 아닌 듯해 다행이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큰 덩치에 흉측한 생김새를 지닌 뱀파이어 하급들의 긴 손톱 러쉬에 밀려나는 중인 크란을 지원할 만한 주문을 생각해 보았다.
아직까지는 만만한 수준의 적들이 많아 그동안 안 썼던 마법들을 골고루 쓸 수 있어서 나에게는 재미가 쏠쏠한 편이었다. 몬스터들이 내 쪽으로 지나치게 몰려든다 싶으면 유완과 크란이 유인해서 끌어가 주었기에 부릴 수 있었던 여유이기도 했다.
‘그래, 이번에는 4서클을 써 볼까?’
어쩌다 보니 체인 라이트닝만 주로 사용해 오기는 했지만, 4서클 마법 중에는 실전에 활용해 볼 만한 것들이 꽤 많았다. 그중 하나를 떠올리며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공중에서 뭉쳐진 대여섯 개쯤 되는 작은 불공들이 나의 의지에 따라 크란을 교묘하게 피해 가면서 적들에게 명중해 폭발을 일으켰다.
펑! 퍼퍼퍼퍼펑!
“크르륵, 컥!”
“크오오!”
“우워어어! 카프. 하려면 말 좀 해주고 써줘! 나 죽으면 어쩌려고!”
날아가던 불공들이 스르르 모습을 감추었다가 내가 목표한 곳에서 불시에 폭발하며 나타나니 적들은 대비할 새도 없이 죽어 나자빠졌다. 놀란 크란이 내 쪽을 바라보며 엄살을 부렸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보다는 플레임 스트라이크의 위력이 조금 불만족스러웠던 게 훨씬 더 신경이 쓰였다.
플레임 스트라이크의 구현된 불공 수가 내 예상보다 적었다. 약간 정신없는 상태에서 쓰기는 했지만, 고작 대여섯 개라니……. 위력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내가 원하는 수만큼 바로바로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불러내려면 연습이 많이 필요할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유완이 역시나 개떼처럼 몰려온 하급 뱀파이어들에 둘러싸여 약간 머뭇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다.’
유완의 실력이라면 저기서 오러 검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몬스터들의 씨가 바로 말라 버리겠지만, 그 전에 저것들은 지금 나에게 최고의 실험 대상이었다.
“유완, 거기 가만히 있어!”
유완이 크란처럼 놀라지 않도록 친절히 말해 준 나는 그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확인조차 않은 채 곧바로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열세 개가량의 플레임 스트라이크가 후왁 하면서 나타났다. 애초 목표했던 열다섯 개보다는 적었지만 일단 만족하면서 나는 그것들을 재빨리 던졌다.
쾅! 쾅! 콰콰콰콰콰쾅!
“……괜찮군.”
“괜찮긴 뭐가! 우아아, 지금 마법 연구할 때가 아니야! 우리 빨리 앞으로 가야 돼!”
유완이 주변에서 일어난 엄청난 폭발의 여파에 순식간에 휩쓸리며 심상찮은 눈길을 보내든 말든, 또다시 몰려드는 몬스터들에 크란이 재롱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든 말든 내 머릿속에는 마법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거, 아무래도 응용할 만한 맛이 나겠는데. 다음에는 뭘 쓸까…….’
“저 표정 좀 봐……! 즐거워하고 있어! 또다시 맛이 간 거야!”
크란이 몸서리를 치며 재차 비명을 지르기는 했으나,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좋은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온다고 내버려 두겠느냔 말이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우리들은 예상보다 꽤 빠르게 이 동굴의 안쪽으로 진입해 나갔다. 때때로 갈림길이 나타나면 무조건 크란을 믿고 뒤를 따랐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덕인지 몬스터 상대도 예상만큼 어렵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인왕처럼 버티고 서 있는 검은 투구의 귀신 같은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분명히 꽤 즐거운 기분이었다.
‘시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저 녀석이 여기 있지?”
크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저가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챈 크란이 검을 뽑아 든 채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와 섰다. 속으로 들키지 않게 긴장된 숨을 내쉬며 지금 두르고 있는 매직 실드의 개수를 확인해보자, 대강 대여섯 겹쯤 되었다. 기습을 받더라도 금방 뚫리지는 않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길을 잘못 든 것 같군. 갈림길을 돌고 돌아서 다시 동굴의 초입 근처로 나온 것 같다.”
주변을 꼼꼼히 둘러보던 유완이 나지막이 말했다.
“……하…하하.”
그 말은 즉, 우리를 지금껏 끌고 다니며 길잡이 역할을 했던 크란의 전적인 잘못이란 소리인가. 어쩐지 만나는 몬스터들이 점점 강해지다가, 다시 약한 놈들로 변하기에 그렇잖아도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굽어짐도 없이 안쪽으로 곧게 계속 들어가는 느낌이었는데 실은 도로 바깥으로 나오는 중이었다니……. 아무래도 갈림길을 잘못 들면 길이 바뀌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하필 나와도 이런 길로 나와서…….’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자 앞에 서 있던 크란의 등짝이 움찔 떨렸다. 슬며시 돌아본 크란이 제가 잘못한 것은 아는지 울상이 된 얼굴로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뜻밖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 동굴의 갈림길은 잘못 선택하면 입구로 다시 튕겨 나가게 되지.”
약간 풀려있던 분위기가 순간 다시 차갑게 굳었다. 투구 안에서 들려온 딱딱한 목소리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시저의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투가 생각보다 침착하다는 사실에 의외로움을 느꼈다. 그간 들었던 소문이 워낙 흉흉했고, 처음 만나자마자 귀신처럼 달려드는 것만 봐서 그런지 먼저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탓이었다. 하긴 저놈도 사람인데 말을 안 할 리가 없지.
묘하게 놈에게 느끼고 있던 긴장감이 깨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순간 놈의 시선이 아까 전장에서처럼 내 후드를 뚫고 들어올 듯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지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미소를 다시 감추었지만 놈의 시선은 계속해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미묘한 분위기를 유완과 크란도 느낀 듯했다.
“……왜 쫓아온 거지?”
말하면서 유완이 슬쩍 몸을 움직여 크란에 이어서 내 앞을 가리듯 서자 불쾌한 시선도 함께 가려졌다. 그건 좋지만, 어쩐지 보호받는 입장이 된 기분이었다. 고백은 받았지만 지켜주기로 한 적은 분명히 없는데 말이다.
미묘한 불쾌함을 느끼고 있을 때 잠시 유완의 몸을 뚫고 나를 투시라도 할 듯하던 시저의 투구가 천천히 유완 쪽으로 돌아갔다. 보기만 해도 오싹했지만 평소처럼 무표정한 유완에게서는 긴장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내가 누군지 아나?”
시저가 조금 울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되물었다.
“시저라고 했던가.”
시저와 유완의 사이에 탐색전 같은 날카로운 기류가 형성된 사이, 크란이 내 쪽으로 슬며시 더 다가왔다.
“카프, 저놈 만난 적 있어?”
시저가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속삭이는 크란의 눈에는 걱정스러움이 약간 배어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대체 왜 너만 노려보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크란이 잘 뻗은 눈썹을 슬며시 찌푸리고 있을 때, 다시 시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나는 마신의 기사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텐데?”
그 순간, 나는 유완과 크란이라는 두 개의 벽을 통과해 또다시 놈과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쪽의 세 명이 다 퀘스트 수행자란 것을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크란이 숨을 멈추며 눈을 크게 떴다. 유완도 그 말에는 조금 놀란 듯, 잠시 말을 잃었다.
“어떻게…….”
크란이 중얼거렸지만 시저는 그 말에는 응답할 생각이 없는 듯, 천천히 칼자루에서 검을 길게 뽑아 들었다. 그가 쥔 검에서는 전에 딱 한 번 매직토피아와 싸우는 유완을 구경할 때 보았던 검신보다 껑충 더 긴, 푸른 오러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특히 거기의 얼굴을 가린 쪽…….”
유완과 크란이 재빨리 움켜쥔 검에서도 오러가 환하게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시저의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상하게 계속 거슬려. 얼굴을 확인해 봐야겠어.”
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이상하게도 신경 한구석이 긁히는 것처럼 껄끄러웠다. 나는 가기 전에 이 후드를 꽉 눌러 씌우고 간 키온 형에게 이유 없는 감사를 느꼈다. 형이 시저의 시선을 끌러 갔던 건 결국 쓸모없는 일이 되었지만, 이런 데서 고마움을 얻는군.
“웃기지 마라. 이쪽은 셋이다. 네놈이 카프를 건드리기도 전에 우리가 네 기분 나쁜 투구를 벗기게 될 거다.”
크란이 평소의 순하고 예의 바른 태도는 어디론가 팔아먹은 듯 살기로 일그러진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 말에 시저는 그저 나지막이 웃었다.
“아…… 그래. 하지만 나는 이걸 쓰고 있으나 벗고 있으나 별다른 차이는 없으니 차라리 지금 벗도록 하지.”
말한 이를 허탈하게 하는 소리와 함께 시저가 망설임 없이 자신의 투구 위쪽을 움켜쥐고 그대로 죽 잡아당겼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동안 시저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저의 얼굴을 몰라 엉뚱한 유완에게 복수를 하려 했던 매직토피아 길드원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아마 피눈물을 흘릴 터였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서 굳이 그렇게 쓰고 있었던 이유는 또 뭐란 말이냐.’
웃기는 놈이…….
생각은 거기서 뚝 멈추었다.
텅.
시저가 벗은 투구를 뒤로 내던지자 그것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꽁꽁 숨길 만큼 못생긴 얼굴인가 했더니.”
크란의 작게 투덜대는 솔직한 목소리가 멀었다. 너무나 멀었다.
“그럼 이 다음은…….”
어디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
“그래. 너희 셋이 덤벼 나를 재미있게 해 준다면 그것도 좋겠군.”
이상하다. 무슨, 어떤 생각이라도, 들어야 하는데.
“네 상대는 나다.”
유완의 목소리는 거의 가물거렸다. 그 뒤에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불시에 심장을 찔린 것 같은 기분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나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문득 머릿속에서 갑자기 언젠가의 대화가 떠올랐다.
떠났던 녀석이 돌아왔다는 사부님의 말에, 무심히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았던 나.
그때의 나는 그 사실을 아주 멀게 느끼고 있었다. 그 녀석이 돌아왔다고 해서 내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장담했을 만큼.
그래.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마주치지 않았으니, 만났다고 해서 변할 것도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여겼다.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웃었다.
그래서 이젠 겁내지 않느냐는 사부님의 물음에도 검을 다시 잡았으니 괜찮다고, 신경 쓸 가치도 없다고 그리 말했던 것이다…….
다시는 녀석과 이 현실에서 마주칠 일 따위는 없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으므로.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쿠욱. 오른쪽 다리가 쑤셔오기 시작했다.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나는 익숙하면서도 언제까지나 징그러울 그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
이상하다. 나는 지금 미스트에 있는데. 이렇게 아플 리가 없는데.
제기랄……!
“카프!”
“왜 그래?”
그래. 정신.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먼 데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들의 고함을 간신히 잡아낸 나는 마지막 구조신호를 붙잡은 조난자처럼 안간힘을 썼다.
“헉…….”
검게 변한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일단 숨을 쉬어야 한다는 본능으로 턱에 걸린 숨을 내뱉는데 겨우 성공하자, 잠시 뒤 시야가 회복되었다. 나를 받치고 있는 크란과 일그러진 유완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둘은 무척 놀란 듯 크게 이것저것 물었지만, 나는 대답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상태를 점검해 보기 위해 몸의 곳곳을 더듬었다. 다리의 통증은 환상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얼굴 주위를 더듬거렸다. 아직 제대로 쓰여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 후드의 감촉도 느껴졌다.
‘다행이군…….’
안심하고 나자 그제야 뒤통수를 한 방 세게 갈겨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꼴이냐.
“난 괜찮아.”
치솟는 분노로 이를 악물면서 일어난 뒤 부축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똑바로 섰다.
“괜찮은 게 아니잖아. 너 상태가 이상했어! 몸이 깜박거리면서…….”
크란이 허옇게 질린 표정으로 나를 만류하려는 듯 붙잡았지만 돌아보는 시선과 마주치자 흠칫하고 몸을 굳혔다.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유완과 크란에게서 눈을 돌린 나는 앞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놈의 얼굴을,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나의 옛 친구 정승조를 처음으로 똑똑히 보았다.
잘게 반짝이는 은발과 시원하게 뻗은 이목구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재수 없을 정도로 곧은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얼굴과 어깨는 욕이 나올 만큼이나 익숙했다. 전에도 모델 제의를 받을 정도로 컸던 키는 더 커져 있었다. 그 몸에 두른 판타지 풍의 갑옷과 끈, 망토 등은 내가 알고 있던 푸른색 교복이나 검은 검도복과는 달라서 생소했지만, 위화감 없이 원래 제 옷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허리에 찬 검은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었다.
‘후우.’
간신히 한숨을 쉬었다.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자세히 뜯어보니 기억 속의 약간 앳된 얼굴과는 조금 다른 점이 보였다. 그땐 아직 성장기인 고등학생 때였으니까 당연하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성인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겨우 이성이 돌아왔다.
‘그래… 일단…….’
눈앞에 되살아난 악몽 같은 과거에 대한 모든 감정은 이 위기상황보다 우선할 수 없다. 나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그것들을 꽉 눌러 밟았다. 최우선 목표는 이곳에서 빠져나가 크란이 퀘스트를 받아야 할 장소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나는 강하다.’
오랫동안 힘들게 검을 휘두를 때도, 불가능하다 여겼던 재활 훈련을 할 때에도 내가 항상 중얼거렸던 말을 다시 한 번 굳게 새겨 넣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발버둥 치던 감정들이 서서히 안으로 밀려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만이라도 좋으니, 지금 흔들려서는 안 된다.
‘나는 너에게 지지 않는다.’
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그 사실 하나만을 머릿속에 가득 채웠다. 마침내 그 모든 쓸모없는 감정들이 사라지고, 눈앞에 선 악몽을 평범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되기까지.
‘……됐다.’
정승조, 아니, 시저는 내가 자신을 한참 동안 보고 있음에도 움직임 없이 그대로 관망하고 있다가 잠시 뒤 휙 돌아서자 의아한 듯 한쪽 눈을 미미하게 치켜올렸다. 그것은 그가 상대에게 약간 불쾌함을 느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이제 한층 맑아진 머릿속에서 승조의 버릇을 비교적 침착하게 떠올리는 자신에게 나는 만족했다. 지금 내 몸은 평소와 달리 완벽하게 모두 내 통제 안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까지 극도로 정신을 집중한 것이 얼마 만이던가? 찬물로 깨끗이 씻긴 듯 말끔해진 머릿속이 재빨리 다음 할 일을 찾아냈다.
“크란. 남은 시간은?”
“어, 어?”
서늘한 미소와 함께 묻자 어벙하게 서 있던 크란이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네 퀘스트. 남은 시간은 얼마야?”
그제야 앗 하고 숨을 들이켠 크란이 퀘스트창을 여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헉.”
곧바로 터져 나오는 아연한 신음 소리에 나는 예상대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 와서 길을 헤매고 돌아다닌 시간도 장난이 아니었는데, 시저를 만나 허둥대며 소비한 시간은 그보다 더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 시간 반밖에 남지 않았어…….”
떨리는 목소리가 남은 시간을 통보했다. 한 시간 반이라……. 90분.
“그 정도면 충분해.”
짧게 말한 나는 유완을 보았다. 마치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듯 유완의 시선도 나에게 닿았다. 곧디곧은 그 눈을 보는 순간, 나는 약간의 자신감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후드 때문에 내 미소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유완이 답하듯 아주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것으로 확실해졌다. 유완은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따라올 것이다. 나 또한 유완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이해할 것이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시저라고 했었지.”
처음 불러 보는 생소한 이름.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그저 시저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너에게 나도 카프로스라는 마법사 유저일 뿐, 그 외의 아무것도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얼굴은 절대 사수해야겠군. 흠. 그건 나만 손해인데.
나는 그대로 웃으면서 놈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상대해 주지. 와라.”
그러나 일단 상대해 주겠다고 말했음에도 아직 슈페리어의 검술 스킬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나는 시저와 정면 승부를 볼 수는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표는 오직 크란의 퀘스트 달성이지 시저를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적당히. 다치지 않고 빠져나갈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쪽의 장점인 쪽수를 이용해,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저놈에게 쓴맛을 좀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다.
“……유완.”
나는 시저 쪽으로 향해 있는 그대로 유완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유완이 미동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정면에서 막는 것. 가능할까.”
소드 마스터리가 상급 이상이라고 들은 시저를 바로 앞에서 막을 만한 사람은 유완밖에 없었다. 질문을 들은 유완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의아한 기분에 쳐다보니, 즐겁고도 살벌한 미소를 띤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말 그대로, 살벌했다. 지금까지의 지은 듯 만 듯 희미한 미소나 맹수가 순하게 구는 것 같은 웃음과는 전혀 달랐다.
‘이런, 너무 우습게 취급했다고 화가 났나?’
좀 난감한 기분으로 사과할까 하고 입을 열려던 찰나, 갑자기 쥐고 있던 칼자루를 내리고 내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 유완이 후드 안쪽에 가려진 내 뺨에 슥 손을 올렸다. 이 돌발행동에 크란과 시저가 둘 다 기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유완은 그 시선들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네가 말한다면 죽이기라도 하지. 그 정도 힘은 있어.”
“……야, 인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크란이 버럭 소리쳤지만, 유완은 태연히 내 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목적은 그게 아니야.”
“그렇다면 뭐.”
내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들었는지, 유완은 조용히 그에 수긍했다.
“……신호하면 물러나.”
자세한 것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 유완은 기분 좋은 기색으로 푸른 오러를 내뿜는 검을 치켜들었다. 망설임 없이 달려든 유완이 내리치는 검을 시저가 받아내며 오러 소드가 서로 부딪치는 폭발음이 났다. 검신 사이에서 빛 조각이 마구 비산하며 어두침침한 동굴이 일순 환하게 밝아졌다가는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저 건방진 놈이 아닌 너부터 상대해 달란 뜻인가 보지?”
시저가 묻자 유완이 검으로 그의 검을 확 밀어젖혔다. 순식간에 주고받는 검격으로 인해 날카로운 금속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시저는 유완의 강한 공격을 조금의 밀림도 없이 다 받아쳤다. 번쩍번쩍한 오러의 빛 속에서 시저가 슬그머니 웃는 모습이 보였다.
저 얼굴은…… 그래도 오랫동안 친구였던 내 기억으로 보자면, 오랜만에 괜찮은 상대를 만나 즐기고 있는 표정이었다. 유완은 조금 전의 미소는 간 곳 없이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이었다.
시저가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을 오래 보고 있게 되면 아무래도 다시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시선을 뗀 나는 그 틈에 크란을 붙잡고 재빠르게 속삭였다.
“유완이 정면에서 막고, 내가 옆에서 시간을 끌 거다. 너는 지금까지 왔던 길을 떠올려서, 중간에 몬스터들이 다시 약해지기 시작했던 지점을 찾아봐. 혹시 모를 뒤에서 나타날 몬스터 정리도 부탁하고.”
“뭐? 하지만…….”
“퀘스트를 해결해야 하는 건 너다. 네가 여기서 싸우다 죽기라도 하면 여기까지 온 보람이 모두 사라져. 오래 끌지 않을 테니 길이나 잘 생각해 줘.”
원래는 거기까지 말하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흰빛이 새어 나오는 검을 부서져라 꽉 쥔 크란이 혹 저 때문에 우리가 위험해졌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할까 싶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지금까지 나를 도와주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것 아니야.”
어쨌든 나는 크란의 그 곧은 성격이 꽤 마음에 드니까.
그제야 크란이 검을 쥔 손에서 간신히 힘을 빼고 미소 짓는 것을 보며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숨 쉴 틈도 없이 부딪치는 푸른빛의 궤적들을 지켜보며 이미지를 떠올리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전부 다 보여 줄 필요는 없겠지만, 한 방 먹여 주는 것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이겠지.
“파이어 볼.”
화르르르!
몇십 개의 파이어 볼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순식간에 주변이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다음 마법을 또 썼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후왁!
파이어 볼들 사이로 순식간에 20여 개의 붉은 구체들이 끼어들었다. 플레임 스트라이크가 파이어 볼보다 더 작고 진짜 공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결국 불 계열 마법이라서인지 서로 섞여 있으면 구별이 힘들 정도였다.
그것들을 적당히 섞어둔 뒤 서서히 조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차가워진 머리와 날카로운 시야가 컴퓨터처럼 눈앞의 거리와 범위를 파악하며 돌아갔다. 잠시 후 나는 파이어 볼과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시저 쪽으로 날려 보냈다. 서로 싸우고 있던 유완과 시저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
“이건…….”
“어딜 보는 거냐.”
시저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마법의 정체를 파악하려 눈을 가늘게 뜬 순간 내 쪽을 짧게 흘끔 바라본 유완이 다시 맹공격을 펼쳐 방해 공작에 들어갔다. 여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좋은 공세였다.
마음에 든다, 유완. 나는 마음속으로 들리지 않는 칭찬을 보내고, 서서히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파이어 볼과 플레임 스트라이크들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그리고 마침내는 불의 띠라도 두른 양 빠르게 움직이자 시야가 어지러워졌는지 두 사람의 속도가 전보다 느려졌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빙빙 돌던 마법 속에서 내가 지정한 파이어 볼 몇 개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시저를 향해 빠르게 부딪쳤다.
퍼퍼펑!
그러나 그것들은 시저를 잠시 멈칫하게는 했어도 데미지를 크게 입히지는 못했다. 대충 저 정도 마법 방어력이라면 3서클 이하는 아예 안 통한다고 보는 게 좋을 듯했다.
시저가 귀찮은 듯 눈을 찡그리고 내 쪽을 바라보며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다시 몰아붙이는 유완 때문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유완의 검푸른 머리와 시저의 은발이 계속 얽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바둑돌 같았다.
‘재미있군.’
그런 생각을 하며 잠깐 뒤를 돌아보니 크란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뭔가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어쨌든 길이나 잘 기억해 줬으면 좋겠는데.
난 다시 내가 조종하는 마법들로 의식을 집중했다. 이번에는 하나하나가 아닌 30여 개의 퍼뜨려진 구체들을 네다섯 개 정도의 묶음으로 대강 나눈 뒤, 그 그룹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그것들은 쉽게 날려 보낼 수 없었다.
유완에게까지 피해가 가서는 안 되는데, 둘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가깝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엿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걸 던지려면 잠깐만이라도 둘 사이에 틈이 있어야 했다.
콰쾅!
주변에서 그룹들을 움직이고 한두 개를 페이크로 날려 보내기도 하며 초조하게 바라보던 중, 유완과 시저가 끌어올린 오러가 갑자기 전보다 더 강렬한 충격으로 퍼펑 하며 뒤로 세게 튕겨 나갔다. 그 때문에 둘 사이에는 좁은 빈 공간이 생겼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기로 결심했다.
양손을 내뻗으며 임의로 명명한 제1그룹을 시저 쪽으로 세차게 날려 보냈다. 그것들은 유완과 시저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며 폭발했고, 그 사이에 끼어 있던 두어 개의 플레임 스트라이크들도 모습을 슥 감추었다가 뒤늦게 큰 폭발을 일으켰다. 파이어 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에 유완과 시저의 간격이 더 벌어지면서 내가 때리기에 충분한 틈새가 드러났다.
이어서 멈춤 없이 그대로 플레임 스트라이크가 섞인 2그룹과 파이어 볼만 있는 3그룹을 날렸다. 2그룹은 시저의 옆쪽으로 곧장 날아갔지만 휘두른 검에 막혀 미수에 그쳤고, 그와 타이밍을 맞춘 듯 휙 돌아 뒤쪽으로 날아간 3그룹은 뒤통수에 맞았지만 역시나 약한 파이어 볼들이라 힘없이 사그라졌다.
잠깐 정신없는 공격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큰 상처를 입지 않은 시저는 고개를 흔들고 내 쪽을 노려보았다.
“그렇지. 네가 바로 슈페리어 유저…….”
낮은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에 지난 3년간 억눌렀던 분노와 11년간 쌓아 올렸던 형제 같은 친근감을 동시에 느끼고 혐오감이 치밀었다. 인상착의를 기억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뚫어질 듯 쳐다보는 눈동자에 재빨리 몸을 틀었다. 한편으로는 지금 이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그때 그렇게 헤어진 뒤 처음으로 만나는 곳이 이곳이라니. 어쩌면 이렇게도 악연일 수가 있는가.
‘정승조…….’
너는 모르겠지.
내가 미스트를 선택한 이유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였다는 걸.
너는 어떻지?
혹시 너도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을까?
그렇다면 나쁜 시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 버렸다는 게 웃길 뿐이었다. 오랜 라이벌이었던 우리가 이곳에서 다시 적이 되어 만나다니. 세상에 이런 우연이 둘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여기서 다행인 건 상대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흐…….”
간신히 눌러 넣은 것들이 다시 뚫고 나올 듯한 기분을 느낀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 이상 생각하지 말자. 생각은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내가 퍼부은 공격이 모두 막히자, 유완이 다시 시저에게 달라붙었다. 그 때문에 놈은 나를 오래 보지 못하고 도로 유완을 상대하게 되는 처지에 놓였다. 그 사이를 타서 나는 둘이 빈틈이 생길 때마다 방금 전과 비슷한 시야 교란용 공격들을 계속해서 퍼부었지만, 중간중간 끼워 넣는 플레임 스트라이크의 수를 점점 늘려서, 폭발력을 점차 세지도록 만들었다.
적이 교묘한 변화를 느낄 틈을 주지 않는 유완의 나의 공격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미리 손발을 맞춘 것처럼 이어지는 공격은 상대가 패턴을 눈치챘음에도 벗어나기 힘들 만큼 완벽했다. 마침내 시저는 우리를 가볍게 여기는 듯했던 표정을 싹 거두었다.
그래. 아마 파리처럼 귀찮아 죽겠지. 힘껏 공격하는 듯하나 먹히지 않는 나의 공격도, 끈질기게 따라붙지만 치명상이 되지 않는 유완의 공격도. 약하지는 않아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공격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만 해대며 연속해서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며 방심한 틈을 노리는 장난을 계속 하겠다면, 이쯤에서 그냥 끝내지.”
결국 크게 뛰어 뒤로 물러선 시저가 검을 얼굴 앞으로 치켜세웠다. 그와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세에 달려들려던 유완이 멈칫했다. 내가 원했던 상황이 드디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한숨을 쉬었다.
“후…….”
남에게 놀림당하는 걸 죽도록 싫어하던 네놈 성격이라면 이 어중간한 공격에 반드시 반응할 줄 알았다.
“뭘 하려는 거냐!”
나는 짐짓 당황한 기색으로 남아 있던 파이어 볼과 플레임 스트라이크들을 한 번에 모두 섞어, 필사적인 느낌을 연기하면서 한꺼번에 놈에게 쏟아부었다.
먼저 보낸 건 파이어 볼 쪽이었다.
펑! 콰콰콰콰쾅!
“이까짓 눈속임!”
시저가 일갈하며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진 기세로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막아내었다. 뭔지는 몰라도 몸 주변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지는 것처럼 어두워 보였다. 폭발로 인한 번쩍거리는 빛과 풍압에 주변이 어지러워졌다.
그 틈에 나는 마지막으로 플레임 스트라이크들을 쏘아 보냈다.
‘가라……!’
휘청이는 공기의 기류와 폭발음들 사이에서도 내 조종에 따라 착실히 날아간 플레임 스트라이크는 시저의 주변에 다가가자 그의 공격에 힘없이 사라지는 파이어 볼들처럼 스윽 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미끄러지듯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쾅! 쾅! 콰콰콰콰쾅!
그 기세등등하던 시저는 온몸을 두들기는 강력한 폭발로 인해 소리도 못 낸 채 순간 휘청하고 무릎이 꺾였다. 그리고 연속으로 다시 또 폭발, 폭발, 폭발, 폭발, 폭발.
“크윽!”
“꼴좋군. 이쪽이 둘이나 되는데도 방심한 건 바로 너다.”
나는 마음껏 비웃으면서 유완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유완이 시저를 한 번 돌아보고는 재빨리 내 쪽으로 뛰어왔다. 플레임 스트라이크들을 파이어 볼들에 숨겨 놓았다가, 도발당한 시저가 가장 큰 틈을 드러냈을 때 플레임 스트라이크의 공격 직전 사라지는 특성을 이용하여 막판 마무리를 크게 한 번 날려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공들여 시간을 끈 이유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저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는 유완을 붙잡고 크란에게로 달려갔다. 크란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우리들이 돌아오자 낮게 소리쳤다.
“대충 기억났어. 좌, 좌, 우, 좌, 우, 우 다음의 갈림길에서부터…….”
“알았으니까 먼저 뛰어.”
내 말에 크란이 바로 몸을 돌려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유완과 함께 그를 따라 뛰었다.
크게 한 방 먹었지만 죽지는 않았을 테다. 아마도 곧 쫓아오겠지. 그러니 그때까지 어서 거리를 벌려두어야 했다.
크란의 뒤를 따라 정신없이 길을 헤쳐 나가기를 얼마나 했을까. 간간이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사정 봐주지 않고 날려 보내면서 전진한 끝에 멈추어선 곳은 어디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갈림길 앞이었다.
“내 기억에는…… 대충 여기를 지나가고부터 바뀌었던 것 같아.”
크란이 검에 묻은 더러운 것들을 떨어내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지만, 이 동굴의 구조가 워낙 거기가 거기 같다 보니 알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예전에 여기와 비슷한 곳에서 루크레이신이 ‘장소’를 찾아냈던 방법을 문득 떠올렸다.
위치가 계속 돌아가는 지점의 벽을 단검으로 찍자 통로가 열렸었던가. 자극에 의해 숨겨진 통로가 드러나는 구조가 여기에도 적용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시험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 듯했다.
“물러서.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확인해 봐야겠어.”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주변을 돌아보던 유완과 크란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뭐, 뭘 말야? 뭐 하려고?”
크란이 몹시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무시하고 두 개의 갈림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흠……. 범위는 내 앞쪽에서부터 두 개의 갈림길 안쪽 몇 미터 정도까지 잡으면 될 것 같다. 찬찬히 두들기기가 어렵겠지만, 마음먹고 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다. 유완과 크란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나는 지체 없이 탁 트인 시야를 노려보며 손을 뻗었다.
“라이트닝.”
파지지직!
순식간에 내 주변을 빙 둘러싸듯이 허공에 엄청난 숫자의 푸르스름한 전격들이 생성되었다. 주변 공기가 다 짜릿해지는 기분과 함께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거의 100여 개는 되지 않을까 싶은 그 엄청난 숫자에 뒤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다, 정말…….”
솔직히 이 정도면 좀 무리하게 불러낸 편이긴 했다. 마력이 껑충 줄어들며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제 이것들이 해 주어야 할 일을 생각하며 버티고 선 몸에 힘을 주었다.
“볼트!”
쿠콰콰콰쾅!
천장, 벽, 바닥까지 전부 덮듯이 무차별 폭발 난사된 라이트닝 볼트에 의해 순간 눈앞이 명멸하듯 하얗게 터졌다. 지금까지의 어떤 마법이 작렬했을 때보다도 무식하게 큰 굉음과 함께 지진 같은 진동이 일어나니 동굴 전체가 다 들썩거렸다.
‘안에서 폭탄을 터뜨린 것 같은 위력이군.’
몸이 아래위로 지진 나듯 흔들려 중심을 잡기 힘든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을 하며 먼지와 폭발하는 빛으로 정신이 없는 앞쪽을 노려보고 있을 때,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들렸다.
쿠……르르르릉…….
무식한 방법이 통했다. 어딘지는 몰라도 열리긴 열린 모양이었다.
역시 뭐든지 부딪쳐 보는 게 제일이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것 같다. 가자.”
먼지가 걷힌 후 나타난 통로는 어이없게도 양 갈림길의 정중앙에 땅 밑으로 계단이 뚫려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른쪽이고 왼쪽이고 어떤 갈림길로 갔어도 헛수고할 뻔했다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이 동굴은 서쪽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했던가.
“퀘스트를 만든 사람이 방금 그걸 봤으면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그냥 한 방에 쾅! 하니 너무 쉽게 길이 나오고.”
이것저것 생각해보며 내려가던 나는 크란이 맥 빠진 말투로 중얼거리며 따라오는 것에 신경이 쓰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뭐?”
불만은 앞에서, 뒷일은 알아서. 그런 뜻을 담아 조용히 말하자 크란이 조용해졌다가 고개를 붕붕붕 필사적으로 저었다.
“응! 정말 고마워, 카프! 넌 역시 미스트 최고의 마법사님이야! 네가 아니라면 누가 한 방에 길을 뚫었겠어!”
화려하니 잘생긴 놈이 저렇게 귀엽게 구니 화도 안 났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자 크란이 곧 헤헤 웃으며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유완이 내 앞에서 먼저 가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 유완도 크란이 어떻게 해도 쉽게 미워할 수가 없는 놈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긴…….”
한참 동안 말없이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어 계단을 내려오다가 내 앞에 유완이 멈춰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해 부딪칠 뻔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보았다.
“왜?”
“…아니.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날 것 같다.”
빛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완의 말대로 얼마 내려가지 않아 좁고 어두운 계단 통로는 끝이 났다.
“하아… 하아…….”
드디어 끝인가…….
희미하게 시계가 밝아지는 탁 트인 곳으로 나오자마자 숨을 크게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음 순간 눈앞의 광경에 멍하니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유완 또한 굳은 듯 서 있었다.
“뭐야, 왜 그…… 헉…….”
뒤따라 나오던 크란 또한 눈을 비비다 입을 떡 벌렸다.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도저히 지하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광대한 세계였다. 어쩐지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든다 싶었다. 까마득한 천장은 분명 동굴처럼 막혀 있어서 어두컴컴한데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높고 넓었다.
특이한 것은 모든 땅이 석회처럼, 아니, 석회보다도 더 희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인지 빛이 별로 없음에도 밝게 느껴졌지만, 온통 흰 세계라는 게 좀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깊디깊은 낭떠러지를 사이에 두고 V자 모양으로 나뉜 바위 협곡뿐이었다. 사이가 얼마나 먼지, 건너편은 가물가물하게 보일 정도였다. 몬스터도, 무엇도 보이지 않는 흰빛의 어두침침한 대지가 보면 볼수록 싸늘한 감각을 자극했다.
한참 동안 지하 세계를 둘러보던 우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내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말했던 그 순간, 뒤쪽에서 밝은 금빛이 확 하고 터져 나왔다.
“엇…….”
“뭐야?”
나는 놀라 크란을 돌아보았다. 크란은 목 안쪽의 옷을 뚫고 터져 나오는 밝은 빛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가, 곧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무언가를 끄집어내었다. 그것은 전에 신전에서 크란이 받았던 그의 증표, 노란 보석이 달린 펜던트였다.
“빛나고 있어.”
크란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에 쥐여 빛을 내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는 완전히 안심하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뭐야. 제대로 왔잖아.”
나도 전에 슈페리어의 붉은 보석 브로치가 저런 식으로 진동했던 적이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크란 또한 그때 같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낸 듯했다.
“진짜…….”
감격에 찬 목소리로 크란이 중얼거리다 뒤로 손을 돌려 목걸이를 풀어내었다. 목걸이는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크란이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아이처럼 웃었다.
“그럼 이제 관련된 장소를 찾아봐야겠는데.”
겨우 안도하며 중얼거리자,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던 유완이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다리가 보인다.”
“다리?”
다리라니. 어울리지 않게 무슨 다리인가 하고 유완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순간, 나는 다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있었다. 터무니없이 좁고 가늘어 보이는 바위 다리가.
처음에는 너무 가늘어서 이 광대한 주변 환경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금방이라도 밑으로 엿가락처럼 흘러내릴 것 같은 흰색 길이 여기서부터 저 건너편까지 주욱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아래는 정말 헛디디면 바로 즉사할 것 같은 끝도 안 보이는 낭떠러지인데…….
설마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맙소사.”
웅웅웅웅웅…….
다가갈수록 크란의 목걸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선명히 드러내며 진동까지 시작함으로써 우리들을 절망시켰다. 동시에 크란의 얼굴은 이곳의 하얀 바위만큼이나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걸……. 저기까지 건너가야 하는 거야?”
“……아마도.”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다리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폭이었다. 난간은 당연히 없으며, 길이는 여기서부터 저쪽까지 과장 조금 보태서 빌딩을 옆으로 몇 개쯤 눕혀 놓은 것 같았다. 이건 단위조차 미터로 따질 것이 아니라 킬로미터 단위로 세어야 할 듯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발아래는 도저히 그 끝을 찾을 수 없는 낭떠러지였다. 까마득한 어둠 속을 내려다보자 고소공포증이 없는 나조차 어찔해질 정도였다. 나는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먼 건너편을 쳐다봤다가 다시 다리로 눈을 돌렸다.
셋이서 나란히 다리를 보고 있는 모습이 얼핏 우습기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저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너무 멀어서 보이지도 않았으니.
“……어쨌든 건너가긴 해야겠군.”
조용히 내뱉은 내 말에 유완도 어둡게 찌푸려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내 퀘스트는 왜 이런 건데! 다 생 노가다잖아!”
“그래도 이게 정말 마지막인 것 같으니 힘내라.”
울분을 터뜨린 크란에게 조용히 위로를 건네자 크란이 눈물을 그렁거리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거 하나만 믿고 있어. 설마 또 하라는 거 있으면 나 차라리 여기서 떨어져 죽을 거다. 말리지 마.”
“…….”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우리들은 조심스럽게 지옥으로 발을 내딛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다리 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갔다.
그 뒤로는 그저 말없이 뛰기만 하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유완과 크란은 위험천만한 다리를 거침없이 밟아가며 평지처럼 뛰었고, 나도 뒤처질 수 없어 중간부터는 플라이를 사용했지만 그래도 목적지는 아직 멀디멀었다. 마력을 아낄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라면 곧 바닥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혹시 모를 뒷일에서 나는 쓸모없는 짐이 되는데…….’
크란이 퀘스트를 완료해도 그 후에 또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마력이 떨어진 마법사란 초보 유저보다 더 짐 덩어리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누구보다도 곤란해지는 것은 나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그보다는 이제 정말 시간제한이 다 되어가고 있을 크란의 퀘스트가 더 급했다. 크란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을 보니 놈도 많이 초조한 모양이었다.
현재까지 달려온 구간은 절반 정도. 이대로만 뛴다면 그래도 곧 무리 없이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 터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내 말에 크란이 슬쩍 돌아보고는 밝게 싱긋 웃었다.
“응. 빨리 뛸게. 카프도 지금 힘들 텐데 고마워.”
그러고 나서 나는 방향을 돌리느라 무의식적으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 문득 시야에 점이나 얼룩처럼 조그만 검은 물체가 들어왔다. 아주 짧은 순간 보았던 것이라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렸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뒤늦게 깨달았을 때 머릿속에서 쿵 하는 둔중한 충격이 울렸다. 나는 곧바로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설마……!’
하지만 설마가 아니었다. 점점 커지고 있는 그 조그만 점을 말을 잃고 바라보던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플라이를 풀어 다리 위에 내려서면서 앞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유완! 유완!”
크란은 불러서도 안 되고,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급하게 부른 내 목소리가 다행히 들렸는지, 어느새 저 앞쪽까지 달려가고 있던 유완이 뒤돌아서서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곧 함께 뒤돌아본 크란에게 무어라 말하고는 달려왔다. 크란은 잠시 내 쪽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고 뒤돌아 계속 달렸다. 유완이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먼저 달려가게 해놓았으니 다행이었다. 크란의 성격이라면 쓸데없는 오지랖을 발휘해 이쪽으로 올지도 몰랐으니까.
‘제발 빨리 가라.’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유완의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약간 힘이 빠진 듯했지만 여전히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눈이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놈이 왔다.”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키자 유완이 눈을 부릅뜨고 그쪽을 주시했다. 내가 아까 발견했던 작은 점은 이제 막 다리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이제는 확실히 보이는 놈의 정체에 유완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빨리도 왔군.”
어깨에 두른 검은 망토가 엄청난 스피드로 휘날리며 착실히 커져 가는 시저의 존재감을 표현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엄청난 검은 오오라가 아까까지 우리가 상대했던 장난 같은 방법으로는 이제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숨기고 있던 힘을 완전히 개방한 듯한 그 위압감에서 나는 놈을 피해 도망쳤다는 키온 형과 팔튼의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렸다.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그렇게 그 모습과 얼굴이 눈에 보일 듯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가슴 속에서 이상한 소용돌이가 불안스레 빙빙 돌기 시작했다.
“열도 제법 받은 모양인데.”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도 다시금 내뱉은 유완의 감상은 그저 그게 끝이었다. 그 덤덤한 말투에 눈을 찡그리자, 유완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마치 별것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것을 보자 초조해하고 있던 내 안에서 갑자기 생생한 이성이 번쩍 눈을 뜨는 것이 느껴졌다.
뭐냐, 카프로스. 왜 초조해하고 있지?
……무섭기라도 한 거냐?
‘그럴 리가 없잖아!’
평정을 잃었던 자신에 대한 창피함과 분노로 얼굴에 피가 훅 몰렸다.
“잠깐 평정을 잃었어. 미안하다.”
얼굴을 한 손으로 덮으며 대답하자 유완이 잠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 등을 가볍게 툭 치는 손이 느껴졌다.
“……괜찮아.”
길드전의 전날 밤과 같은 눈빛으로 진지한 푸른 눈을 슬며시 접어 웃고 있는 유완의 얼굴이 보였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 떠오른 입술에 닿았던 유완의…….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서 떠오를 것은 뭐람.
본의 아니게 그날의 상황을 다시 되새기는 동안 나를 지켜보던 유완이 갑자기 미소를 지우면서 앞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곧 놈이 올 것 같군. 이제 가라.”
“음?”
반문하자 유완이 내 어깨를 붙잡고 뒤로 밀었다.
“엇…….”
순간 중심을 못 잡아 떨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십년감수한 기분으로 섰다. 유완이 크란이 뛰어간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시저는 내가 저지할 테니 너는 도우러 가.”
뭐라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머릿속에서 해독을 마친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 잘못 들었나 싶었으나 유완은 평소처럼 진지하고 곧은 눈빛 그대로였다. 그 눈을 한참 바라보고 나서야 정말 유완이 시저를 혼자 저지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차갑게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같이 해야지.”
“말이 돼.”
“무슨……!”
화를 내려던 순간 갑자기 뻗어온 손이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뒤이어 턱 하고 부딪친 것이 유완의 가슴팍이며 내가 지금 그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
또……. 또다. 나는 또다시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 당했다는 충격으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거 한 번이면, 얼마든지 네가 돌아올 때까지 시저를 붙잡고 있을 수 있다. 그 바보 놈이 퀘스트를 세 번쯤 다시 하고 있어도 괜찮아.”
드물게 기분 좋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인 유완은 뻣뻣하게 굳은 나를 도로 떼어냈다. 그 자신감 넘치는 눈빛은 더 이상 고집 피우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나서야 나는 정신이 조금 들었다. 알고 있었나, 저 녀석도.
“마력 얼마 안 남았다는 것 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다녀오는 게 도와주는 거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게다가 지친 것은 나뿐만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려던 입이 유완의 고요한 눈빛에 저절로 조용해졌다. 그가 천천히 뽑아 든 검 위로 두 번째로 보는 검 끝보다 껑충하게 더 긴 푸른 오러가 맺혔다.
“괜찮아.”
유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은 안 한다. 그리고 여기는 그 바보 녀석만의 장소는 아닌 것 같으니…….”
그때 이젠 완전히 눈에 띌 만큼 가까워진 곳에서 폭풍을 몰고 오듯 달려오는 시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유완은 그를 등지고 있는 채였다.
“그리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진 않다. 그 바보 놈…… 아니, 크란이라면 너를 지킬 수는 있겠지. 곧 따라갈 테니 어서 가.”
유완이 처음으로 크란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말투도 처음 보았을 때만큼 무뚝뚝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이제 유완은 정말로 자연스럽게 나에게 많은 말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목적지는 항상 너다. 그걸…… 의심하지 마.”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같은 기본적인 의문이 지워질 정도로 지극히 낮고 느린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어서 유완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섬광 같은 속도로 뒤돌아 몸을 날렸다. 어느덧 시저가 지척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쿠콰콰쾅!
곧 검과 검이 부딪친다고는 믿을 수 없는 강렬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다리가 흔들거렸다. 그 위태로움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어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유를 알 수 없이 먹먹한 가슴에 한 손을 댄 채 주문을 외쳤다.
“플라이!”
일단 부딪친 이상 유완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다. 내 마력은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아 유완과 같이 간다고 해도 변변한 공격마법 하나 날릴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크란을 도와 퀘스트를 완수시킨 뒤 유완을 도우러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유완. 설마 나를 두 번이나 물 먹여 놓고 어이없이 지지는 않겠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라.’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후드자락을 붙잡은 채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몸이 공기압으로 눌리도록 날아 발을 디딘 곳은 드디어 그렇게나 바라 마지않던 골짜기의 건너편 대지. 크란의 목적지였다.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크란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크란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흰 바위벽들 사이를 헤매던 중, 갑자기 숨겨져 있던 공터가 틈 사이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공터 앞쪽에는 계단과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크란은 그곳에 서서 매우 곤란한 표정으로 발을 구르는 중이었다.
“크란!”
크게 소리치자 크란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고는 한걸음에 밑으로 내려와 나를 붙잡았다.
“카프, 어떡하지? 제물이 모자라!”
“뭐?”
갑자기 제물이라니. 어리둥절해하며 크란이 이끄는 대로 그 바위 탁자 앞에 섰다. 그러자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탁자 위에는 큰 원 안에 꼭짓점이 맞닿은 형태의 검은 별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중심부와 각 꼭짓점에는 작은 금빛 원이 하나씩 더 존재했다. 크란은 지금 그 각 꼭짓점의 금색 원 안쪽마다 이상한 물건을 하나씩 올려두고, 딱 하나를 비운 채 발을 구르고 있었던 듯했다.
이상한 종이 쪼가리 하나, 낡아빠진 손수건, 풀로 엮은 반지, 그리고 아무리 봐도 쓰레기 같은 빈 병까지. 이건 제물 같은 거창한 이름보다는 마치…….
“잡템을 올려놓으라는 거냐?”
멍하니 내뱉은 말에 크란이 ‘엥?’ 하더니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런 거 아냐. 이건 다 내가 전부터 받아서 가지고 있던 추억의 아이템들이라고.”
“어디가?”
의아해하는 내 앞에 갑자기 별의 중앙에서 위잉 하고 금빛 원기둥이 살짝 올라왔다. 그러자 크란이 눈에 띄게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뭐야?’
빨리 이쪽을 해결하고 유완에게로 가야 한다는 초조함에 나 또한 침착한 정신은 아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순간적으로 열이 올랐다. 한 방 먹이려는 순간 원 안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렸다.
- 시간이 초과하였습니다.
“으윽!”
크란이 신음을 흘리자, 작은 원들에 놓여 있던 아이템들이 바깥으로 팍하고 튕겨 나갔다. 울상을 짓고 그것들을 다시 줍고 있는 크란이 뭘 하든 말든 목소리는 침착하게 자신의 할 말만을 내뱉고 있었다.
- 성스러운 별의 꼭짓점에, 모르는 이가 도움에 대한 신의로서 건네준 물건 다섯 개를 올려놓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고난에 빠진 이를 돕는 신의 기사가 해야 할 첫 번째 증명입니다.
“……고난에 빠진, 뭐라고?”
어이없어하는 나에게 네 개의 아이템을 다 줍고 일어선 크란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울상을 지었다.
“그러니까…… 위험에 빠진 NPC들을 도와주었을 때, 그에 대한 사례로 물건들을 주기도 해. 어쩔 땐 그런 게 아무 쓸모없는 물건으로 보이겠지만…… 나는 개인적인 추억에서 가지고 있는 게 네 개가 있었거든. 이를테면 이 종이 쪼가리는 토렐리트에서 술집 주인 NPC를 술 취한 사람들의 기물 파손에서 구해 주고 받은 ‘토렐리트 잉벨라 주점 영구 할인증’, 이 풀 반지는 엄마 심부름으로 산딸기 채집을 하러 가다 몬스터한테 죽을 뻔한 NPC를 도와주고 받은 토끼풀 반지, 그런 식이야. ……그런데 보면 알겠지만, 원에 놓아야 하는 건 다섯 개인데 한 개가 모자라.”
“…….”
“으아아아! 나 그냥 뛰어내릴래!”
비명을 지르는 크란을 보는 내 기분도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키온 형을 어떻게 해서든 데려오는 거였다, 키온 형을. 크란과 비슷한 성격의 키온 형이라면 그런 아이템쯤이야 어쩌면 한 바구니로 가지고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하…….”
하지만 키온 형은 지금 여기에 없었고, 없는 아이템을 여기서 어떻게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포기해야만 하는가.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이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잠시 멈춰 서 있던 나는 한참 후에야 좀 진정되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크란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지금 당장 유완이라도…….”
“카프! 혹시 모르니까 네 아이템창도 한 번 뒤져 봐줘. 나도 한 번만 더 뒤져 볼게!”
유완이라도 도우러 가려고 했던 내 말을 자르고 ‘아이템창!’을 외치며 두 눈에 불을 켠 크란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초조한 한숨을 내쉬었다. 유완은 이 순간에도 혼자서 시저를 막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없는 것을 찾는다고 될 리가…….
순간, 어떤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이거, 드릴게요.」
어?
「그 꽃이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예쁜 것이거든요. 정말 감사합니다.」
……누구, 누구였지?
머리를 쥐어짠 끝에 나는 비로소 그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 냈다. 그건 다름 아닌 키온 형을 처음 만났을 때, 형과 함께 처음으로 다른 유저들과 싸운 원인이 된 꽃 파는 소녀 NPC였다.
그 소녀 NPC는 자신을 괴롭힌 유저들을 응징해 준 우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내게 어떤 아이템을 하나 주었었다. 지금까지는 보관만 해 놓고 그대로 잊고 있었지만, 찾아보면 아마 아직 남아 있을 터였다!
“있어!”
갑자기 터져 나온 내 고함에 크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뭐?”
“버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있어. 있을 거야.”
희열에 찬 눈빛으로 아이템창을 여는 나를 크란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다가, 내 희열의 이유를 눈치챈 듯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진짜? 진짜야?”
“찾아볼게.”
실행시키자마자 나타난 반투명한 창 안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그 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나는 마침내 원하던 것을 발견하고 쾌재를 올렸다.
“있다……!”
손가락으로 그것을 두드리자, 어느새 손 안에는 받았을 때와 전혀 상태가 달라지지 않은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크란은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으로 ‘됐다!’를 외쳤다. 마침내 우리는 다섯 개의 별 꼭짓점 전부에 아이템들을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카프 성격에 이런 아이템을 갖고 있을 줄이야……. 전혀 예상 못 했어.”
크란이 위잉 하고 또다시 터져 나오는 금색 빛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키온 형 때문에 받은 거야.”
“뭐? 아무나 막 팰 것 같은 그 형이? 진짜야?”
하긴 형의 진면목을 보기 전까지는 좀 의외이기는 할 터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금색 빛은 점점 더 진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긴장된 얼굴로 지켜보던 크란이 나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카프……. 그런데 저거 내가 받은 거 아니라고 또 튕겨내면 어떡하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크란의 퀘스트니까.
하지만 여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왔는데!
“또 튕겨낸다고?”
갑자기 터져 나온 살기 어린 미소에 크란이 힉 하는 신음을 흘렸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짙어지는 빛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기까지 와서 이 상황에……. 한 번만 더 튕겨 보라고 해. 어떻게 될지는 그때 보여 주지.”
일단 정말 그렇게 된다면 무조건 본사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위잉!
-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치 거짓말처럼 대답이라도 하듯 나온 말에 크란은 말을 잃고 빛기둥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뭐냐! 협박하니까 먹히는 거야, 이거?! 그런 거야?!”
“시끄러. 다음으로 넘어간다.”
괴로워하던 크란은 곧 다시 빛이 사그라진 별을 쳐다보았다. 제단 위에 올려놓았던 물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별 꼭짓점의 작은 금색 원들도 사라졌고, 남은 건…….
“중앙의 원뿐이군.”
“아…….”
그곳에 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크란도 나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크란은 내 눈을 한 번 바라보고는 신중한 표정으로 다른 쪽 주먹에 소중히 쥐고 있던 것을 별의 중앙에 내려놓았다.
스륵하고 놓인 가는 마름모형의 투명한 금빛 보석이 박힌 펜던트. 그것이 놓인 순간, 사람을 긴장케 하던 적막이 깨지며 곧바로 눈이 부신 빛이 환하게 터져 나왔다.
파아앗!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크란의 몸 전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둘러싼 빛의 기둥을 지켜보았다. 내가 ‘기억’을 보았을 때도 저렇게 보였을까? 제법 신기했다.
보고만 있어도 휘황찬란한 빛에 빨려 들 것 같은 기분이었다. 초조하게 지켜보는 동안 다행히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천천히 빛이 사그라지며 크란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아…….”
크란은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가 곧 나를 발견하고는 씩 웃으며 승리의 브이자를 그렸다.
“완수!”
“축하한다. 그럼 이제…….”
유완에게로 한시바삐 도우러 가야 한다.
“잠깐만.”
그러나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크란은 검을 뽑아 들어 바위 위로 들어 올리고 호흡을 골랐다.
“잠깐만 기다려 줘. 여기서 받을 건 받고 가야지.”
“아…….”
그렇지. 기억을 본 곳에는 항상 남아 있던 스킬인가?
“하앗!”
쿠르르릉!
번개처럼 내리친 흰 검이 번쩍 빛남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바위가 반으로 쑥 갈라졌다. 크란은 절도 있게 다시 검을 집어넣고, 입을 쩍 벌린 바위 앞으로 다가가 안쪽에 손을 밀어 넣었다. 더듬대던 손에 잡혀 올라온 건 두 개의 아이템이었다.
“하하하하! 드디어 나도 고생 끝에…… 어? 두 개다!”
고생과 보상은 비례하는 것이었던가. 크란이 끄집어낸 것은 금빛이 도는 금속으로 감싸인 건틀렛 하나와 스킬북이었다.
“어흐흐흑. 감격적이야. 이제 죽어도 좋아…….”
“그럴 시간 없어. 바로…….”
쿵, 쿠르릉, 우르르르릉…….
스킬북은 집어넣고 건틀렛을 바로 손에 끼우며 감격에 눈물을 흘리려 하는 크란을 이제야말로 가차 없이 끌고 가려고 생각했던 나는, 갑자기 뒤쪽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뒤를 돌아보았다.
“올라가는 계단…… 통로야!”
“진짜로…….”
크란이 그동안 그 힘든 길을 헤쳐 나온 것에 대한 포상인지 뭔지, 눈을 비벼 보아도 틀림없는 통로가 바위 뒤에 열려 있었다. 마치 우리가 내려왔을 때 보았던 통로와도 같은 생김새에 나는 환희했다.
이거라면 시저와 마주치지 않아도 나갈 수 있다!
“가자. 유완을 빨리 데려와야 해!”
두말없이 성큼성큼 지나가는 나의 뒤를 크란 또한 고개를 굳게 끄덕인 채 따랐다.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제발 아직까지 무사히 버티고 있어라, 유완.
최대한 빨리 끝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유완은 그동안 지친 몸으로 혼자서 시저를 상대하고 있었다. 말만은 멀쩡히 하고 갔지만, 유완이 저번에 딱 한 번 썼던 긴 오러를 꺼내고 갔다는 것부터가 단단히 각오하고 갔다는 뜻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남은 마력을 짜내서라도 블링크를 쓰도록 만들었다.
“카프, 기다려! 좀 천천히…….”
크란이 뒤에서 뛰어오며 소리쳤지만, 나는 계속해서 블링크를 썼다. 마침내 다리가 시작되는 곳 근처까지 다다르자 아까부터 중간중간 들려오던 굉음도 훨씬 커졌다.
‘이제 조금만 더……!’
쾅!
막 마지막 바위를 돌려던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격렬히 진동했다. 딛고 서 있던 땅이 폭발하는 듯한 충격에 나는 그만 버티지 못하고 넘어질 뻔했다.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파에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읏……!”
“으아! 카프. 그러게 천천히 가라니까…….”
기겁하며 팔을 잡아 준 크란의 말끝이 갑자기 길게 늘어졌다.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앞쪽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크란이 보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보았다.
갑자기 세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사그라졌다.
멀리서부터 이쪽으로 오는 근처까지 완전히 부서진 다리.
아직도 떨어지는 바위들.
막 뒤로 떨어지고 있는 한 남자.
검푸른 머리칼과 익숙한 검은 갑옷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위 공중에 흩날리는 것은 피다. 어깨에 박힌 검을 놓고 있는 손의 주인은 확연한 은색 머리칼이었다.
“…….”
거기까지는 굉장히 느리게 보였다. 그러나 숨이 막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세계가 순식간에 크게 확대되며 다시 소리가 들려오고 해석이 되지 않는 고함들이 들려왔을 때.
남자는 이미 쏜살같이 밑으로 떨어진 직후였다.
누가…… 누가 떨어진 거지?
“깜장검사! 빌어, 먹을! 유완!”
크란이 나를 제치고 정신없이 뛰어갔다. 나는 멍하니 서서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이다, 건너편 다리 위에 서 있는 시저를 보았다. 시저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휙 하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에 휘날리는 검은 망토는 아까와 달리 너절하게 찢긴 상태였다. 그 끝자락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무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멈춰 있던 나는 그 망토자락이 내 시야 밖까지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돌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본 무너진 다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유……완.”
내 입에서 간신히 새어 나온 이름이 갑자기 지독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대답 없는 침묵만 싸늘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다음 순간,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정신없이 앞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유완, 유완, 유완, 유완! 유완!”
“카프!”
왜 대답이 없어, 왜 나타나지 않아!
간신히 구르듯 무릎을 꿇고 매달리듯 쳐다본 낭떠러지는 너무나 어둡고 깊은 무저갱과도 같았다. 그 안으로 떨어진 것이 무엇이든 다시는 뱉어내지 않을 것처럼.
처음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완이 내게 했던 마지막 말들이 머리 안을 미친 듯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괜찮아.」
「그리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진 않다. 그 바보 놈…… 아니. 크란이라면 너를 지킬 수는 있겠지. 곧 따라갈 테니 어서 가라.」
「내 목적지는 항상 너다. 그걸…… 의심하지 마.」
“유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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