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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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처럼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는 동안 나는 루크레이신에게 조금 더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도 나처럼 첫 퀘스트에 성공한 뒤, 다음 장소를 가리키는 안내에 따라 톨랑으로 와서 이 장소를 처음으로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다. 문제는 이곳에 위치한 던전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복잡해 혼자서 탐사하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심심한 김에 같이 탐사할 사람 몇 명 모았던 게 어느새 길드가 된 거예요. 처음에는 쓸 만하다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자기들끼리 규칙이니, 뭐니 복잡한 것들만 잔뜩 정해서 재미없었어요.”

루크레이신은 일부 길드원들이 던전에서 나오는 이득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쫓아내려 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막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던전 구조를 다 꿴 참이라 이제 더는 길드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슬슬 귀찮던 차라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나왔죠. 그리고 제가 손대지 않아도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던전의 이득은 영원히 독차지할 수 없을 거예요.”

“그건 무슨 소리지?”

“지금 이곳 던전의 몬스터 숫자는 제가 처음 발견했던 때보다 절반가량 줄어든 상태예요.”

뭐라고? 의문스럽게 바라보자 루크레이신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사실 거기 있는 몬스터들은 퀘스트와 관련하여 생겨난 놈들이라 바깥에 있는 평범한 던전의 몬스터와는 다르거든요. 퀘스트를 끝내면 사라질 운명이란 거죠.”

퀘스트를 끝내면 사라질 운명이라고? 그런데 절반이 줄었다는 건……?

의구심에 찬 내 눈빛을 본 루크레이신이 미소와 함께 답을 알려 주었다.

“그래요. 전 사실 이미 이곳에서 해야 할 퀘스트를 끝냈어요. 그래서 몬스터들이 사라진 거죠. 왜 다 안 없어졌는지 저도 궁금했는데… 어쩌면 나머지 절반은 형의 퀘스트 때문에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미묘한 기분으로 그를 보았다. 이미 이곳에서 해야 할 퀘스트를 끝냈다면 여기에는 왜 아직 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형은 여기 혼자 왔어요?”

“아니. 나 말고도…….”

무심코 대답하던 말이 멈추었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유완과 크란을 잊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 녀석들이 내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을까?

“형?”

나는 뒤늦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저 대답했다.

“같이 온 일행이 있었는데, 나 혼자 이곳으로 떨어졌어.”

“그래요? 그럼 아마 다른 곳에 떨어졌을 수도 있어요. 이곳 입구는 하나가 아니거든요. 뭐, 일단 가기로 한 곳부터 가 보고 나서 찾죠.”

루크레이신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덩달아 속도를 높여야 했다. 뒤를 따르다 보니 시선이 자연히 루크레이신이 뒤춤에 매단 단검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그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아까 그 빛과 진동…….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고 했었지.”

조용히 중얼거리자 앞서 나가던 루크레이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아마 같은 장소에서 퀘스트를 수행해야 할 사람 둘이 만나면 그렇게 되는 것 같더군요.”

그러면 처음으로 만났던 다른 퀘스트 수행 유저는 누구였느냐고 물으려 했는데, 갑자기 루크레이신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잠깐. 누가 오네요.”

눈 깜짝할 사이에 팔이 붙잡혔다. 다음 순간 나는 루크레이신의 팔 안에 갇힌 듯한 모습으로 벽에 붙어 있었다.

“은신.”

루크레이신의 낮은 속삭임과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길드장이 사라진 건 좋지만 몬스터가 줄어버리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직도 원인을 못 찾았다며?”

“어쩌면 부길드장 쪽이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부린 술수일지도 모르지.”

점점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낄 텐데도 루크레이신은 그저 태연했다. 오히려 내가 더 긴장할 정도였다.

‘이거 괜찮은 건가…….’

“……응? 잠깐만.”

숨죽인 우리의 근처에서 누군가 멈추어 선 채 고개를 돌렸다.

“왜?”

“여기, 벽이 좀 이상해 보이지 않아?”

나는 몸을 굳힌 채 루크레이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봐…….”

“쉿.”

루크레이신이 내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뭐가 이상해? 그냥 벽인데.”

이상하다고 말한 남자의 동료들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들이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는 듯 보여도 초점이 흐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숨을 삼켰다.

“아냐. 그런 건 숨기 스킬만 써도 되는 거잖아? 알면서 왜 그래. ……잠깐만.”

유독 의심이 많은 한 명이 갑자기 단검을 꺼냈다. 나는 순간 매직 실드를 치기 위해 입을 달싹거렸으나, 루크레이신이 아예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 버려 주문을 외울 수 없었다.

‘……이 자식, 그대로 두면 다치는 건 너라고!’

나는 루크레이신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는 밀려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날카로운 단검 공격이 그의 등 뒤로 쇄도했다.

캉!

“…….”

“쯧, 잘 한다. 애먼 벽이나 치고.”

“이상하네……. 진짜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 일이 많아서 신경이 날카로운 건 이해하지만 적당히 해.”

단도는 놀랍게도 1밀리미터쯤의 간격을 두고 루크레이신의 등 바로 앞에서 벽에 부딪친 듯 튕겨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 물러선 루크레이신이 나의 놀란 얼굴을 보며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은신 스킬의 힘이에요.”

“은신은 숨는 거지, 방어한다는 뜻이 아닐 텐데, 어떻게 단도를 막아낼 수 있는 거지?”

“날카로우시네요. 뭐, 원래는 이 정도로 대단한 스킬은 아니긴 했어요. 퀘스트 덕에 얻은 스킬 효과로 다른 스킬들도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이렇게 된 거죠.”

“스킬?”

“제가 가진 모든 스킬들을 일정 시간 동안 한계를 넘어선 능력을 발휘하게 해 주는 스킬이에요.”

그의 말에 따르면 한계를 넘어선 효과를 적용받은 은신 스킬의 경우, 사용자가 완전히 벽의 일부가 되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그리 강하지 않은 공격의 경우 어렵지 않게 튕겨낼 수 있다고 했다. 일시적인 효과라지만 엄청난 힘이었다.

‘퀘스트를 통해 얻은 스킬의 힘이 그 정도라니…….’

나는 반사적으로 인벤토리 창에 있는 슈페리어의 검술 스킬 스크롤을 떠올렸다.

‘빨리 5서클 마스터를 해야 하는데….’

나는 다시 루크레이신을 따라 어두운 동굴 안을 헤쳐 나갔다. 그 후에는 루크레이신이 길을 잘 안내했는지, 다른 이들과 마주치는 일 없이 편하게 던전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기척을 잘 읽고 떼로 몰려다니는 몬스터가 많아요.”

루크레이신이 작은 비수와 뿌연 보석이 박힌 단검을 양손에 들며 말했다.

“수가 너무 많으면 아무래도 제가 전부 처리할 순 없을 텐데… 자신은 있으세요?”

나는 예전에 유완이 나에게 했던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날 뭘로 보고.”

“그래요. 슈페리어 퀘스트 수행자라면 그 정도 답은 해 줘야죠.”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루크레이신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여기선 기척을 숨겨도 소용이 없으니 사냥이 목적이 아니라면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야 해요. 뭐, 못 따라오실 것 같으면 제가 안고 갈 테니까…….”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전 바로 가슴에 손을 얹고 외쳤다.

“헤이스트!”

곧 푸른 기류가 몸을 한 바퀴 휘감으며 몸이 놀랄 만큼 가벼워졌다. 나는 발을 탁탁 굴러 마법이 잘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루크레이신이 휘파람을 불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그럼 가죠!”

루크레이신은 오랫동안 이곳을 돌아다녔던 이답게 망설임 없이 던전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의 여유 넘치는 손길이 스칠 때마다 나타난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도로 사라지기 바빴다. 나도 루크레이신이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틈을 타 옆에서 주문을 영창했다.

“순간의 천둥, 영원처럼 긴 번개. 끝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순간, 하나의 궤적이 되어 천공의 빛으로 올라가라, 체인 라이트닝!”

간격을 띄고 벌린 양손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몬스터 떼를 향해 날아가 폭발한 빛이 체인에 묶인 것처럼 줄줄이 연결되며 무리 전부에게 전격의 짜릿한 맛을 선사해 주었다.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비산하는 뼛조각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내렸다.

루크레이신이 그 광경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은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좋군요.”

“뭐…….”

나는 부정하지 않고 씩 웃었다. 그의 말대로 이 던전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떼거리로 몰려오는 게 귀찮을 뿐, 개별로 보면 약한 녀석들이라 마법 앞에서 특히 쉽게 무너졌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콤비 플레이와 루크레이신의 능숙한 안내 덕에 우리는 예상보다 빠르게 던전의 깊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더 조심해야 해요. 맹독을 지닌 주제에 크기도 아주 작은 놈들이 많거든요. 피하려면 기척을 최대한 죽이는 쪽이 좋아요.”

루크레이신은 그 말을 끝낸 뒤 발을 한 번 굴러 모습을 투명하게 바꾸었다. 나는 내가 배운 마법 중에도 그런 마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인비져빌리티!”

이 마법은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기척은 지울 수 없다지만 몸이 투명해지는 것만으로도 훨씬 낫겠지. 내가 보는 내 모습은 바뀌지 않았지만 루크레이신 쪽에서 감탄하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굉장한데요? 암살자라고 해도 믿겠어요.”

그에 대한 정보만 들었을 때 짐작했던 바와는 달리, 실제 루크레이신은 상당히 쾌활하고 웃음이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크레이신이 경고했던 대로 작은 곤충형 몬스터들이 새까맣게 날아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주문을 외쳤다.

“스크류 파이어 볼!”

곧 십여 개의 파이어 볼들이 내 이미지에 따라 아름다운 나선형으로 불타오르며 벌레 무리를 집어삼켰다. 검은 재가 불 아래로 후둑후둑 떨어졌다.

엄청난 장관 속에서 우리는 유유히 불길을 지나 나아갔다. 아직도 타오르는 벌레들 곁을 지나가던 중, 문득 어깨가 따끔했지만 나는 그것이 불티가 튄 탓이리라 짐작하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몇 개의 골목을 지난 뒤 루크레이신이 투명 스킬을 풀었다. 그는 보이지 않을 내 팔을 정확하게 잡아당겨 나를 놀라게 했다.

“…어떻게 알았지?”

인비져빌리티를 해제하면서 묻자, 루크레이신이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형이 마음에 들어서 말이에요.”

대답을 하라고 물었더니 동문서답을 하는군. 나는 조용히 팔을 빼냈다.

“스킬은 갑자기 왜 해제했는데.”

“여기가 던전의 끝이라서요.”

나는 의문스럽게 루크레이신의 등 뒤로 펼쳐진 길을 보았다. 던전의 끝이 아니라 도중 같은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저 앞으로 나아가면 중간 지점으로 다시 되돌아가죠. 그러니까 끝은 여기가 맞아요.”

그 말에 막 내딛던 발을 다시 거둬들이자 쿡쿡 웃던 루크레이신이 곧 손을 내밀어 동굴 벽의 어느 점을 자신의 단검 자루 끝으로 쾅 찍었다.

그르르릉!

그러자 거짓말처럼 두 사람 정도가 들어갈 만한 통로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하죠? 우연히 발견했어요. 이 지점에서 자꾸 위치가 돌아가니까 수상해서.”

루크레이신이 복면에 가리지 않은 눈을 휘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거절하진 마세요. 안 잡으면 함정을 못 피할 테니까요.”

나는 망설이다 결국 손을 붙잡았다. 루크레이신은 한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를 끌고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급한 데다 함정을 피하려면 특정 땅만 요령 있게 밟아야 했기에 나는 몇 번이나 루크레이신에게 의지해야 했다.

“미안.”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도움이 부담스러워 짧게 중얼거리자 루크레이신이 즐겁게 대답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제가 형이 마음에 들어서 기꺼이 돕는 건데요 뭐. 그렇지만 너무 힘들면…… 손 말고 허리를 잡는 건 어때요? 그럼 더 쉽게 갈 수 있는데.”

“놔. 그냥 알아서 갈 테니까.”

“농담이었어요.”

나는 루크레이신에게 더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벽을 짚지 않고는 걷기 어려울 만큼 험한 경사를 내려가고 나서야 겨우 루크레이신이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가면 곧 제가 퀘스트 기억을 보았던 장소가 나타날 거예요.”

아직도 끝이 아니었나?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가 싶어 이를 갈자 루크레이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전 형과 친해질 수 있어서 좋은데 별로신가 봐요.”

친해지다니. 누구와 누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박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 쪽에서 환한 빛과 진동이 또다시 팟 하고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토렐리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퀘스트와 관련된 장소가 지척에 있다는 예감이 왔다.

“그 빛……. 역시 확실하군요.”

루크레이신도 확신하듯 중얼거렸다. 잠시 후 우리는 어느 작은 동공에 들어섰다. 땅 밑의 공간임에도 천장에 뚫린 작은 구멍에서 빛이 은은히 비치는,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지닌 곳이었다.

“가세요.”

나는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왔음에도 여전히 속내를 알기 힘든 녀석이었지만 유들대며 손을 흔드는 모습에서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시선을 돌린 뒤 빛이 비치는 땅을 향해 다가갔다.

토렐리트의 미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브로치에서 나오는 빛은 나아갈수록 점점 더 커져 갔다. 웅웅대는 진동 소리도 귀를 울렸다. 나는 천장에서 흘러나온 빛이 비추고 있는 땅 앞에서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곳은 한 사람 정도가 겨우 설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좁았지만 묘한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이 어두운 동굴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 여기서 마주치게 될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가슴에서 브로치를 떼어 빛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순간, 손이 타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환한 빛이 터지며 시야를 순식간에 뒤덮어 버렸다.

이것도 두 번째군. 멍하니 생각하며 그 빛에 조용히 몸을 맡겼다.

이번에 시야가 밝아졌을 때, 나는 똑같은 장소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의아해졌다.

‘……뭐지?’

주변을 돌아보니 아까까지는 분명히 내 앞에 있었던 루크레이신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당혹한 사이, 뒤에서 별안간 엄청난 살기가 느껴지며 날카로운 암기가 날아들었다.

챙캉!

그리고 그것은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뭔가에 부딪친 듯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

돌아본 곳에는 루크레이신과 비슷하게 눈만 빼고 얼굴을 거의 가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당신이 공격한 건가?」

갑자기 내 입에서 내 것이 아닌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나갔다. 자신감에 차 있는 듣기 좋은 미성. 나는 그 목소리를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로드 슈페리어…….’

그제야 상황 판단이 좀 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금 나는 슈페리어의 1인칭 시선으로 기억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에는 모든 인물을 멀리서 지켜보는 형태로 기억을 봤기에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놀랍군…….’

속으로 이 실감 나는 기술에 신기해하는 사이, 루크레이신을 닮은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단검을 피하다니. 제법이군. 네가 바로 소문의 ‘로드 슈페리어’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둠의 수장, 섀도우 마스터의 이름을 받은 사람이겠군.」

섀도우 마스터와 이름. 눈앞의 사내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말했지 않은가. 그런 무의미한 전쟁에는 참여할 생각이 없다. 이것은 나만이 아닌 그림자의 종사자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그러니 물러가라.」

「판단이 아니라 회피겠지. 그게 언제까지 통할 것 같아? 그리고 사실 꺼져주고 싶어도…… 내가 여기 들어오면서 친구를 잃어버렸거든. 그 녀석 찾기 전까진 못 나가.」

「…….」

천진하게까지 느껴질 만큼 뻔뻔한 로드 슈페리어의 말을 들은 섀도우 마스터가 눈썹을 찌푸렸다. 은은히 빛나는 은발이 어둠 속에서 상당히 눈에 띄었다.

「친구라면…… 그 유명한 다크 나이트인가.」

「그래. 이제 곧 여기로 찾아올 거다. 표시를 남겼거든.」

나는 그 순간 로드 슈페리어의 얼굴이 그리는 웃음을 내가 짓는 표정처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절대로 짓지 못할, 믿음에 찬 밝은 미소에 몹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미소를 본 섀도우 마스터의 얼굴 위로 문득 희미하게 의문이 드러났다.

「어떻게 그렇게 타인을 믿을 수 있지?」

슈페리어는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친구인데 뭐.」

「……가족이나 연인보다도 친구가 중요하다는 건가?」

슈페리어는 잠시 침묵하다 반문했다.

「그런 건 왜 묻는데?」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는 관계는 없어. 너는 친구라는 이를 향한 네 믿음이 결코 깨지지 않으리라 자신하나?」

섀도우 마스터의 은빛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그래. 어떤 상황에서라도 내 믿음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깨지지 않을 거라 확신해.」

슈페리어가 확신을 가지고 대답하자 섀도우 마스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만약 네가 바라는 대로 내가 너희와 합류해 동료가 된다면, 너는 나와 같은 이도 그렇게 믿을 수 있나?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아, 그건 좀 다른 이야기지. 그게 궁금하면 우리 쪽에 참여해서 직접 봐.」

「…….」

섀도우 마스터는 무표정하게 슈페리어를 바라보았다.

「복잡하군.」

「이게 뭐가 복잡해? 처음 보는 사이에 그런 걸 어떻게 곧바로 알겠어? 설마 당신은 섀도우 마스터라는 이름만 가지고 판단당하고 싶은 거야?」

한 마디로 섀도우 마스터의 입을 다물게 만든 로드 슈페리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름이 사람의 전부는 아니야. 나는 이 전쟁을 끝내고, 로드 슈페리어가 아닌 또 다른 수많은 이름이 되어 살아 보고 싶은걸. 친구들과 더 많은 걸 경험하고 싶고, 즐기고 싶고, 공부하고 싶어. 이 세상에 불가능 따위는 없다는 것을 내 손으로 증명하고 싶어. ……뭐, 지금은 요원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꿈꾸는 건 자유니까.」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현실을 깨달은 듯 머쓱한 표정으로 급히 말을 마무리한 슈페리어를 섀도우 마스터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바라보았다. 그때, 섀도우 마스터의 뒤쪽에서 쿵 하고 누군가 착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누구인지 본 로드 슈페리어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소리쳤다.

「드디어 왔구나!」

내가 보았던 어린 소년 시절의 그보다는 더 성숙하고, 전쟁 때의 그보다는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다크 나이트가 몬스터 체액을 잔뜩 뒤집어쓴 채 서 있었다.

숨을 고르면서 로드 슈페리어를 바라본 다크 나이트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으나, 팔짱을 낀 채 새로이 나타난 불청객을 살피는 섀도우 마스터를 보고는 이내 곧바로 굳어졌다.

「…미안. 몬스터가 너무 많아서, 처리하느라 늦었어.」

「…….」

괜찮아……라고 말하려는 듯한 기색이었는데, 갑자기 눈앞의 모든 것이 이지러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섀도우 마스터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또다시 하얗게 변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한없이 부유하던 시선은 잠시 후 시끄러운 전쟁의 한복판으로 내던져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슈페리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하늘의 절반은 검었고 사악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붉고 성스러웠다. 그 하늘 밑에는 대지를 가득 메운 듯 느껴질 만큼 거대한 검은 용이 있었고, 시체와 폐허가 쌓인 산 위에서 영웅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슈페리어!」

「젠장……. 완전히 정신이 나갔어. 누가 좀 가서 여기로 데려와!」

무기가 부딪치는 위험한 소리가 주변에서 계속되는데도 슈페리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하니 주저앉아 있다가, 문득 힘없이 제 손을 들어 올렸다. 하얀 손은 본래의 색이 간 곳 없이 피로 얼룩덜룩했다. 그 손 너머, 시선이 향한 앞쪽에서 성스러운 흰 오러를 뿜어내는 남자가 검은 오러를 피워내는 기사의 검을 힘겹게 막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걸친 흰 갑옷 또한 군데군데 망가지고 피로 물들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슈페리어의 무릎 위에 누군가 누워 있는 것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시선이 그쪽으로는 제대로 향하지 않아 누구인지까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슈페리어는 어떤 이유에선지 절대 제 무릎 위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자꾸 다른 곳만을 멍하니 보다 눈을 감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들려오던 소리들이 점점 절박하게 변했다.

「샤인 나이트가 막는 것도 한계입니다!」

「안 돼……. 스가가 마신에게 밀리고 있어!」

함께 싸웠을 동료들의 비명 소리에도 슈페리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흰 갑옷의 기사를 속여 밀쳐내는 데 성공한 검은 갑옷의 기사가 순식간에 슈페리어의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다른 이들 뒤에 숨어 있는 것도 이제 끝이다!」

「슈페리어!」

검은 갑옷의 기사와 슈페리어의 시선이 마주쳤다. 슈페리어는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피하지 않고 멍하니 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은빛의 긴 머리칼을 지닌 그림자가 나타나 슈페리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잔혹한 소리와 함께 몸을 가로지른 핏물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슈페리어를 가로막았던 남자가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쿵. 둔중한 진동이 아주 느리고 크게 메아리침과 동시에 샤인 나이트가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다시 한 번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 돌진했다.

「……아.」

남겨진 슈페리어에게서 의미 없는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왜, 왜…….」

「…언젠가 말했었지.」

그때, 미약한 목소리가 쓰러진 자에게서 흘러나왔다. 슈페리어는 무릎 위에 누운 무언가를 끌어안은 채 그를 향해 기어가듯 몸을 움직였다.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다고…….」

도저히 죽음이 목전에 찾아온 사람 같지 않게 침착한 목소리였다. 슈페리어의 흐릿한 시야 너머로 눈물이 떨어졌다.

「안 돼, 말하지 마…….」

「하지만 너는 끝까지 친구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나의 신의를 보여 준 것뿐이야…… 그걸 해냈으니, 이젠… 됐어…….」

「말하, 지 말라고, 했…….」

「나를……. 그리고 네 품에 누운 사람을 똑바로 봐. 우리의 선택을, 외면하지 마라…….」

그 순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풍경이 또 일그러졌다.

바로 방금 전의 전장과 별 차이가 없는 똑같은 장소였지만 단 하나 다른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로드 슈페리어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다크 나이트의 존재였다. 그의 부서진 흉갑 사이로 유완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칼이 복부에 깊이 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크 나이트가 슈페리어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며 핏물로 얼룩진 입술을 무어라 달싹이는 순간, 내 시야도 그들의 곁으로 날듯이 미끄러져 다가갔다.

「……이건 모두 다, 내 선택이었어.」

통곡 같은 비명이 울려 퍼지며 동시에 시야는 다시 섀도우 나이트가 쓰러져 있는 아까의 상황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그도, 그랬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색 눈동자가 깜박이며 처음 보는 희미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

「즐겁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은빛 눈동자 속의 동공이 스르르 풀렸다. 슈페리어는 눈물로 흐려진 시야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마지막 미소를 보았다. 그리고 내가 이 기억을 보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자신의 무릎을 떨면서 내려다보았다.

「으아아아…….」

그가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죽은 다크 나이트의 얼굴이었다.

한참 동안 귓가에 울리던 비통한 울음이 사그라지고 하얗게 변했던 내 눈앞이 다시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루크레이신이 웃으며 손을 흔듦과 동시에 익숙한 띠링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 슈페리어의 기억 퀘스트 2 / 8 을 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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