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기가 바로 끝이 없는 미로야.”
크란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폐허의 벽 더미로밖에 안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얼마나 큰지 도저히 전체 규모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세 명만 가도 괜찮을까? 20명이 가도 곧잘 몰살당한다던 곳인데…….”
크란이 걱정스럽게 말하는 것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보다 너도 우릴 따라와도 괜찮은 건가? 친구도 많아 보이던데.”
그 말대로 크란은 토렐리트에서 거의 유명 인사 수준이었다. 어찌나 정의감이 투철한지, 어딘가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꼭 끼어들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는데 그 와중에 잘생긴 얼굴과 진짜 기사 같은 말투에 반한 사람들이 따라다니다 못해 내 뒤의 유완에게도 시끄럽게 굴어서 귀찮을 정도였다.
그러나 크란은 내 말에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목 끄트머리까지 덮는 머리칼을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들을 따라다니는 게 좋아.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다니면서 얻을 경험도 굉장히 많고 재미있을 것 같거든. 그리고 무엇보다도…….”
“들어가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뭔가를 계속 말하려는 순간 유완이 싸늘하게 던진 말에 크란이 눈을 부릅떴다.
“이……!”
“아, 그래. 들어가자.”
나도 끄덕이며 동의하자, 크란은 어쩐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뒤를 따라왔다.
폐허의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순간, 정말로 어두운 돌벽으로 된 미로가 우리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 미로를 지나가는 방법은 이야기해 줬었지?”
크란이 들어오자마자 검을 스릉 꺼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이미 크란에게 몇 번씩 들어 더 들을 필요도 없이 기억해둔 것이었다.
이 미로에는 통로의 끝마다 문이 하나씩 존재했다. 그 문을 통해 나가면 마치 공간이 왜곡된 것처럼 엉뚱한 곳으로 떨어지고는 했는데, 운이 좋으면 입구로 되돌아가거나 미로의 다음 층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운이 나쁘면 아무 곳으로도 이동하지 못하는 막다른 길에 갇혔다.
게다가 시간차를 두고 빠져나가면 일행끼리도 다른 곳으로 떨어지기에 수십 명이 파티를 맺어 들어가더라도 운이 나쁘면 몰살당하기 십상이었다. 이 미로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유독 생명력이 질기니 확실히 죽였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는 말도 크란이 덧붙였다.
“하지만 신체를 접촉한 채로 문 안으로 들어가면 항상 같은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어.”
크란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즉, 사이좋게 손이라도 잡고 들어가면 괜찮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문을 지나갈 여유가 있을 때의 일이다. 무언가에 급히 쫓기는 와중 과연 한가롭게 손을 잡고 문을 통과할 짬이 날까? 하지만 나는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자들의 실력을 믿었다.
“그럼 갈까.”
우리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미로 안으로 진입했다.
“크허어엉!”
“유완, 왼쪽!”
크란이 앞에서 눈이 세 개 달린 괴물 개의 모습을 한 몬스터 하운드를 상대하고 있는 동안 왼쪽에서 또 한 마리의 하운드가 나타났다. 내가 소리치기가 무섭게 유완이 달려 나가 자신의 키만 한 하운드의 옆구리를 베었다.
“크앙!”
검붉은 피가 거세게 벽에 뿌려지면서 하운드의 위력적인 발톱이 머리 위를 스쳤다.
“헤이스트!”
나는 우리 모두에게 이동 속도와 순발력을 빠르게 해 주는 헤이스트를 걸고, 이제 5클래스에 들어서면서 더욱 시전이 쉬워진 3클래스의 라이트닝 볼트를 캐스팅했다.
“나의 빛과 불타오르는 번개로 한 줌 재와 같이 영혼까지도 화하라. 라이트닝 볼트!”
머릿속에 수많은 번개의 이미지를 떠올리자 양손에서 빛이 터져 나오면서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라이트닝 볼트가 손에 잡히도록 형상화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쥐고 하운드들을 향해 번갈아 내려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쾅! 쾅! 쾅!
짜릿한 손맛과 함께 하운드들이 깨갱대는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타 유완과 크란이 빠르게 적을 쓰러뜨려 나갔다. 오랜만에 마법을 마음껏 쓰고 있으려니 점점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하하하하!”
어쩐지 몬스터들을 처리해 나가다 보면 기분이 고양되면서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올 때가 있었다. 내가 쓴 마법이 정통으로 명중하는 순간을 볼 때 느끼는 시원한 쾌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내가 게임을 하면서 내 다리로 걷는 것을 제외하고 가장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전투 부분이라서기도 했다. 내 웃음소리를 들은 크란은 한창 공격하다 말고 벙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을 향해 내려치는 발톱을 놓쳐 버렸다.
“파이어 볼!”
콰쾅!
“캥!”
그때를 놓치지 않고 손목을 흔들어 덩크슛을 하듯 꽂아 넣는 시늉을 하자 공중에서 생성된 머리통만 한 회전 파이어 볼이 떠올린 이미지에 따라 하운드의 다리에 명중해 폭발했다.
“아!”
크란이 그제야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다시 공격에 집중했지만 중얼거리는 한마디는 빼놓지 않았다.
“이런 데서 정말 즐거워하다니……. 의외로 그런 성향이…….”
그런 성향이 뭐?
난 싹 무시해 버린 뒤 다시 한 무더기로 나타난 하운드들을 향해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유완과 크란은 갑자기 늘어난 적들을 보고 조금 당황한 듯했으나, 나는 다수에 강한 마법사다.
“잘 왔다. 그리고 잘 가라!”
어차피 내 주위에는 매직 실드를 다섯 겹씩 쳐놓았기 때문에 금방 부서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위력을 보고 싶었던 다수 살상용 마법도 마침 하나 있었다.
순식간에 양손으로 서클을 그리자 발밑에 푸른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나는 시선을 수식 세계 속의 적들에게 둔 채로 재빨리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순간의 천둥, 영원처럼 긴 번개. 끝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순간, 하나의 궤적이 되어 천공의 빛으로 올라가라!”
파지지직!
전에 로드 구울과 스켈레톤을 향해 썼던 체인 라이트닝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내 양손을 잇는 빛 속에서 광포하게 날뛰어 댔다. 나는 그것들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마지막 범위 설정을 마쳤다.
내가 원하는 것은, 최대 다수를 향한 최대 데미지의 폭발력!
“체인 라이트닝!”
내 손을 떠나 쏜살같이 날아간 번개의 빛줄기가 이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하운드 하나에게 명중했다.
콰콰쾅!
“카아!”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곧 엄청난 빛줄기가 줄기줄기 가지처럼 뻗어 나와 적과 적들을 연결하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미로 전체가 흔들릴 만큼 엄청난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끝내주는 광경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웃고, 유완과 크란의 낯선 이를 보는 듯한 얼굴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난 기분 좋으면 원래 이러니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유완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보기보다 제정신이 아니군.”
“얼굴은 안 그렇게 생겨서 진짜 사악해 보여.”
크란도 그 말에 동의했다.
“시끄러워. 안 다치고 해결하면 좋은 거지.”
기분이 좋으니 대꾸도 술술 나왔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를 향해 동조의 빛을 보내고 있는 두 사람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체인 라이트닝을 맞고도 아직 부들거리며 살아 있는 하운드들은 크란이 정리했다.
“사악한 적을 벌하도록! 홀리 크러쉬!”
말이 끝나자마자 십자를 그리는 검 끝에서 흰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엄청나게 날카로운 기세였으나 빛의 기운은 따스했다. 그가 스킬을 쓰는 모습은 처음 보았는데, 스킬명이 무언가 남달라 호기심이 솟았다. 지금까지 나는 그가 그냥 검사인 줄 알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것이다.
“스킬명이……?”
“아, 난 성기사야. 말 안 했었나?”
성기사는 처음 봤지만, 그것보다도 그 직업과 크란의 이미지가 상당히 잘 어울려서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럼 이제 거의 다 정리가 되었으니 저 앞쪽에 보이는 다음 통로로 가자.”
크란이 피를 떨어내며 말했다. 유완도 검붉은 피를 떨어낸 검을 집어넣으며 동의했다.
“아직까진 하운드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다음 문을 통과했을 땐 뭐가 나올지 몰라.”
하운드들을 너무 손쉽게 처리해서인지 별다른 경각심이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 미로를 우습게 본 생각이었는지를 나는 두 사람의 팔에 끌려 다음 문을 통과한 다음 여실히 깨닫고 말았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느낀 것은 뒷목이 절로 으슬으슬해지는 이상한 기운이었다.
“뭐지?”
살기는 아닌 듯한데……. 대체 뭘까. 유완과 크란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적의 유무를 파악했다. 이곳은 이전에 비해 왠지 깨진 벽이 많았다. 곳곳에 돌이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며 유완이 낮게 중얼거렸다.
“……돌이 많군.”
그러자 별안간 크란이 흠칫했다.
“그래, 돌!”
쾅!
그의 외침에 반응한 듯 갑자기 돌들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폭음과 함께 돌로 된 인간 형상이 되어버렸다.
“스토러들이야! 거의 골렘 수준이라고 알려진 녀석들! 절대 안 부서지니 그냥 뛰어!”
전에도 몇 번 여기 왔다 죽어 나갔다는 크란이 고함과 함께 뛰쳐나갔다. 나와 유완도 뒤를 이어 따라갔다. 나는 달려가면서 느릿느릿하게 쫓아오는 스토러들을 향해 시험 삼아 파이어 볼을 쏘아 보냈다.
“파이어 볼!”
펑!
그러나 파이어 볼은 너무나 허무하게 작은 불꽃만을 남기고 스토러의 몸에서 돌 부스러기 하나 떼어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무려 회전 파이어 볼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럴 수가…….”
신음을 삼키자, 크란이 흘끗 돌아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는 안 돼! 돌이라서 신성 마법도 안 먹히고, 웬만한 강도의 마법도 안 먹히니 도망치는 수밖에.”
유완과 크란이 속도를 더했지만 나는 마법사의 체력적 한계로 인해 점점 뒤쳐져 갔다. 현실이었다면 아예 따라가지도 못했을 테니 그보단 낫겠지만 그래도 뒤처지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뒤에서는 느리기는 해도 큰 덩치만큼 보폭도 큰 스토러들이 쫓아오는 중이었다. 이를 악물고 뛰고 있으려니, 유완이 순간적으로 속도를 늦추어 가까이 다가와서는 나를 덥석 들어 제 어깨에 들쳐 멨다.
“피할 때까지만.”
놀란 나에게 그가 짧게 말하고는, 이내 엄청난 스피드로 크란을 다시 따라잡았다.
갑자기 짐짝처럼 흔들리게 된 나는 짓눌리는 배의 아픔보다 나를 가볍게 들어 올린 유완에 대한 충격을 더 크게 느꼈다. 아무리 미스트 내라지만 사람을 하나 들고도 이런 속도를 내는 건 보통 능력이 아니었다.
힘 스탯 포인트를 엄청나게 올렸나?
“앗! 카프에게 뭐 하는 거야!”
크란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으나 유완은 날카롭게 그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곧 코끝으로 무시했다. 잠시 후 유완은 크란을 아예 추월해 버렸다.
“서라!”
뒤처진 크란이 화를 내면서 쫓아왔다.
……이러니까 유완이 나를 납치하는 것 같지 않은가. 쫓기는 상황이라는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어이가 없어져 어깨에 걸쳐진 채로 웃었더니, 그것이 느껴졌는지 유완이 내 다리를 툭툭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와중에 또 그것이 간지러웠다.
마침내 방향을 오른쪽으로 꺾었을 때, 갑작스럽게 문이 하나 나타났다. 유완은 재빨리 멈춰 섰다가 따라오는 크란의 어깨를 우악스레 잡고 문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후왁 하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우리는 붉은 피가 형체를 이룬 듯한 몬스터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스아악!”
뭉클거리는 몬스터들이 우리들을 인식하고 달려들었다. 유완이 나를 빠르게 내려놓음과 동시에 나는 방어할 마법을 외쳤다.
“매직 실드!”
쾅!
일단 크게 한 겹 쳐놓자마자 몬스터들이 벽에 부딪친 듯 문드러져 기분 나쁜 모습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잠시 후 그것들은 다시 합쳐져 원래의 형상을 되찾았다. 나는 매직 실드를 두 겹 더 쳐놓고, 유완과 크란을 바라보았다.
“저건 블러드 솔러야. 베어도 다시 제 형체를 갖추지만, 검기나 전격, 그리고 내가 쓸 수 있는 신성 스킬에는 약하다고 알려져 있어.”
크란이 기다렸다는 듯 몬스터의 정보를 말해 주었다.
“그러면 마력을 아끼는 차원에서 이번에는 체인 라이트닝 대신 라이트닝 볼트를 한번에 날리겠어. 나머지는 알아서 해치워.”
“알았다.”
“응.”
유완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흘러나오고, 크란이 무언가를 짧게 중얼거리자 그의 검에서도 흰빛이 넘실거렸다.
“대단한걸.”
크란이 유완의 검기에 놀란 눈을 하자, 유완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비슷하군.”
“……꼭 말을 해도!”
크란의 으르렁거림과 동시에 나는 주문을 외쳤다.
“나의 빛과 불타오르는 번개로 한 줌 재와 같이 영혼까지도 화하라!”
수십 개의 전격 다발을 허공에 생성시켰다. 이제는 마력이 웬만큼 한꺼번에 빠져나가도 미리 준비를 해둔 덕인지 꼴사납게 휘청거리지는 않았다. 머리 위가 태양이 뜬 것처럼 휘황찬란해지자 크란이 놀란 토끼눈이 되어 감탄을 표했다.
“와.”
블러드 솔러들이 흠칫하는 사이를 타, 나는 위로 올렸던 손을 밑으로 확 내렸다.
“라이트닝 볼트!”
콰콰콰콰콰쾅!
체인 라이트닝에 지지 않는 폭발 소리가 비처럼 쏟아지면서 블러드 솔러들의 몸을 이루는 액체가 매직 실드에 부딪쳐 철퍽철퍽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한참 뒤 사방이 조용해졌다. 바닥에 흥건한 붉은 액체의 양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줄어든 상태였다. 그것들이 다시 꾸물꾸물 힘겹게 모습을 갖추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매직 실드를 거두었다.
“지금!”
그것을 신호로 크란과 유완이 달려 나갔다. 검을 세워 치켜든 유완이 보스를 잡을 때 보았던 스킬을 시전했다.
“스톰 스러스트!”
유완이 한 발을 축으로 돌면서 난사한 푸른빛들이 막 일어서려던 블러드 솔러들을 향해 폭풍처럼 뻗어나갔다. 그러나 블러드 솔러들의 몸은 해체되기 쉬운 만큼 무서운 공격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슬금슬금 고여 있던 붉은 물들이 쑤욱 하고 늘어나더니, 끝을 뾰족하게 만든 채로 유완과 크란을 향해 쇄도했다.
“이런!”
다행히 둘 다 피하기는 했지만, 스치면서 베인 살갗에 곧 피가 배어 나왔다.
“아…….”
그 공격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파악한 블러드 솔러들은 또다시 스스로 몸을 해체한 채 같은 공격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뛰어난 검술을 가진 두 사람이 검기로 막을 만들며 공격을 막아냈지만, 점점 늘어나는 상처는 어쩔 수 없었다. 급기야 빈틈을 찾아 나에게까지 날아오는 공격을 보며 나는 그동안 쓰기 힘들어서 쓰지 않았던 마법을 시도했다.
“푸른 창공을 향해 깃털처럼 몸을 띄우라. 플라이!”
정신 집중이 깨어지면 바로 추락할 위험이 있는 탓에 배우기는 했어도 쓰지 않았던 플라이를 시전하자, 곧 몸이 위로 휙 떠올랐다.
“라이트닝 볼트!”
여유를 번 사이 다시 한 번 라이트닝 볼트를 외쳤다. 잠시 정신이 흐트러져 몸이 공중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긴 했지만, 제대로 생성된 라이트닝 볼트가 다시 한 번 액체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파지지직!
“샤아아아!”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비명과 함께 잠시 공격이 주춤했다. 나는 곧바로 힘든 비행을 멈추고 땅으로 내려와 둘의 팔을 잡았다.
“지금 뛰어!”
둘은 다시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블러드 솔러들을 쳐다보고는 곧 느린 나를 거의 들어 올리다시피 하며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해도 지금 우리의 실력으로는 막을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는 놈들이었다.
‘이거……. 너무 무리해서 들어온 것 아닌가?’
나조차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는 계속 문을 통과하고, 싸우고, 또 도망쳐 통과하고, 싸우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어느 순간부터 긴 주문은 생각도 안 나서 짧은 것으로만 상대했을 정도였다. 마침내 그곳을 빠져나왔을 때는 셋 다 비릿한 액체와 피로 범벅이 되어 거지꼴이 다 된 상태였다.
그래도 결국 끝은 나타났다. 슈와악 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으로 쫓기듯 문을 통과했을 때, 갑자기 이전보다 훨씬 넓은 장소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일제히 엎어져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여긴…… 나도 처음이야. 어디지?”
크란이 주변을 둘러보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이 홀 같은 장소의 중심부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좀 이상하게 생긴 제단 같은 것이 있었다. 곁에서 검을 뽑아 들고 언제 나타날지 모를 몬스터를 대비하는 유완, 크란과 함께 제단 근처에 도달한 순간, 나는 문득 후드 속 옷에 달아 두었던 브로치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브로치가 진동을?’
나는 황급히 브로치를 꺼냈다. 유완과 크란의 눈이 그 브로치로 모아졌지만 설명할 틈이 없었다.
“이건…….”
브로치의 붉은 보석이 기이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점차적으로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해지더니 마침내 내 손 안에서 하나의 붉은 빛 덩어리가 된 그것을 쥐고 제단 앞쪽의 계단에 다다르자, 빛의 크기는 거의 최고조에 달했다. 천천히 손을 내밀며 계단을 따라 올라가려 하는 나를 크란이 급히 제지했다.
“홀렸어? 왜 그래?”
“그 브로치 퀘스트군.”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지나가듯이 말했는데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맞아. 전에 마법사의 집에서 받았던 그 퀘스트. 여기 와서 갑자기 이 브로치가 빛나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크란은 더 이상 말리지 않고 흥미로운 눈으로 내 팔을 놓았다. 나는 천천히 계단 위로 올라갔다. 양손을 뒤덮을 만큼 커진 빛 때문에 내 손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뭔가 관련이 있다.’
나는 계단 위에 있는 탁자 같기도 하고 제단 같기도 한 돌을 바라보고, 그곳으로 다가가 브로치를 쥔 손을 천천히 그 위에 올렸다. 일단 그렇게 해 보고 싶어서였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어쩔 수 없고.’
파아아앗!
다행히 내 선택은 정답이었는지, 엄청난 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명멸했다.
“우왓!”
크란의 고함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그것도 곧 빛에 묻혔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실체가 없이 엄청난 상공을 날면서 광활한 대륙을 내려다보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 카메라의 시선처럼 날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어느 정도 날고 있는 상황에 익숙해지자 구름 사이를 헤치며 내려다보는 대륙의 모습이 아주 넓고 푸르러 감탄의 숨이 절로 나왔다.
숲이 있고, 강이 흐르고, 거대한 절벽이 있고, 도시가 보인다. 이상하게도 떨어질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플라이로 이 정도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면 굉장히 신날 것 같았다.
한참을 날던 시선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하강해 마침내 한 작은 마을의 입구에서 멈추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깃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된 나는 마침 그곳에 서 있는 두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름답지만 왠지 모르게 빛이 바랜 듯한 이 세계에서 그 둘만이 묘하게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선은 기다렸다는 듯 그 둘을 향해 가까워졌다.
「이제 진짜 떠날 거야.」
성별을 파악하기 힘들 만큼 예쁘게 생긴 붉은 머리칼의 소년이 입을 열자, 그보다 훨씬 키가 큰 검은 머리의 소년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너 혼자서 떠나는 건 너무 위험해.」
「안 돼. 이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난 꼭 동생을 찾아야 한단 말이야. 너도 알잖아.」
「알아. 네가 천재 마법사라는 것도 알고. 강하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벌써 10년이 지났어.」
「그래,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살아 있으니까 내가 찾으러 가겠다는 거잖아! 이 목걸이가 멀쩡하기만 하다면 나는 세상 끝까지라도 찾으러 갈 거야.」
「그것도 다 알아. 하지만…… 그래도 너 혼자는 안 돼.」
이를 악문 붉은 머리 소년을 검은 머리 소년이 꽉 껴안았다.
붉은 머리 소년의 얼굴이 품에 파묻힌 채 순간적으로 울 것처럼 변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검은 머리 소년을 확 밀쳐내었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너도 인정했듯이 나도 내 한 몸은 이제 지킬 수 있어. 너야말로 빨리 돌아가. 난 어차피 10년 전 마물들이 쳐들어왔을 때부터 고아지만…… 그동안 신경 써 주신 너희 어머니 우시는 건 싫어.」
「어머니는 나중에 돌아와서 뵐 수 있지만, 너는 지금 보내면 혼자 울고 있을 때 내가 같이 있어 줄 수가 없잖아. 그게 더 싫다. ……그러니까, 이미 짐도 챙겨왔으니 그냥 같이 가. 둘이 찾으면 훨씬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야.」
간절한 검은 머리 소년의 눈빛에, 결국 붉은 머리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너… 정말…….」
「거봐. 그렇게 울 거면서.」
결국, 두 소년이 함께 새벽녘의 마을을 나서는 장면에서 시선은 다시 먼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한참을 유영하던 시선이 큰 도시로 내려왔을 때, 나는 아까의 붉은 머리 소년과 검은 머리 소년을 다시 발견했다.
그사이에 시간이 지난 것인지 그들은 어느새 청년이 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진 붉은 머리 청년이 성벽에 기대 서 있던 검은 머리 청년을 향해 엄청난 기세로 달려가 부딪치다시피 하며 고함을 질렀다.
「알아냈어!」
「…응?」
「알아냈다니까! 동생이 어디로 끌려갔었는지, 알아냈다고…….」
마지막에는 결국 목소리가 떨린 붉은 머리 청년에게, 검은 머리 청년이 놀란 눈으로 일어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떻게?」
「예상은 했지만… 역시 15년 전 마물들의 대침공 때 납치되었던 것 같아. 하지만 아직까지 내 목걸이에 변화가 없는 걸 보면, 살아 있는 게 분명한데…….」
그러면서 들어 보이는 붉은 머리 청년의 목걸이에는 어쩐지 내가 손에 쥐었던 브로치의 붉은 보석과 닮은 듯한 작은 보석이 달려 있었다.
「…그러면 이젠 어떻게 할 거야?」
검은 머리 청년이 묻자, 붉은 머리 청년이 붉어진 눈가로 노려보며 벌떡 일어섰다.
「당연한 것 아냐? 구해 올 거야. 이왕이면 복수도 할 거고. 지금까지는 마법만 배웠지만, 이젠 검까지 배워야겠어. ……그러니까 검, 가르쳐 줄 거지?」
오만할 정도로 당당한 어투에 검은 머리 청년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너. 지금 마물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 건지 알아? 너도 직접 그 마물들을 보았었잖아. 놈들은 강해. 게다가 나는 누굴 가르칠 만큼 실력이 대단하지도 않고…….」
「거짓말하지 말고. 넌 다크 나이트 님이잖아. 나처럼 마법사 학회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은 바로 해야지. 나도 이 나라에 묶인 기사단원이야. 네가 이 나라 최고의 천재 마법사란 건 세상이 다 아는데 거기서 검까지 배우겠다고 하면 질투에 미친 마법사들이 널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해봤어?」
검은 머리 청년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그래도 배우면 안 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지, 붉은 머리 청년이 밝게 웃었다.
「그딴 걸 왜 신경 써? 어쨌든 난 천재잖아. 자질은 있다고 인정한 거지? 그럼 내일부터 당장…….」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나는 다시 먼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쯤 되니 슬슬 감이 좀 잡히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로드 슈페리어가 분명했다. 설마 그 영웅이 저렇게 생겼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기에 왠지 아연해지는 기분이었다.
로드 슈페리어 이야기를 만든 게 미스트의 시나리오 팀이라면, 그 외관을 설정했을 것은 슈퍼컴퓨터 THE MIST일 것인데, 무슨 생각으로 이리 설정했단 말인가. 영웅의 위엄이라고는 눈을 씻고 쳐다봐도 없었다. 그렇게 다시 한참 동안 대륙 위를 날고 있을 때, 갑자기 북쪽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폭발하며 대륙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그것이 마법사 베르먼이 이야기했던 마신의 강림인가 하고 생각했다. 정말 대단한 장면이었다. 엄청난 어둠이 대륙을 잠식할 때마다, 푸른 숲이 말라 죽고 물이 가물고 돌이 부스러졌다. 맑던 날씨가 점점 어두워졌다. 대륙 전체가 충격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시선은 다시 엄청난 속도로 급강하하며 어딘가의 전쟁터로 떨어져 내렸다.
와아아아—!
하늘은 온통 검고, 여기저기 불살라진 연기가 가득 차 매캐해 보였다. 인간 병사들은 마물들에 대항해 싸웠지만 제대로 쓰러뜨리지도 못한 채 짚더미처럼 쓰러져갔다. 그 전쟁터의 너머에, 엄청난 크기의 용이 나타났다.
「마룡이다! 마신의 기사가 나타났다!」
그나마 대항할 의지를 보이던 군사들도, 하늘까지 닿을 듯한 용의 기세에 질려 죽음을 부르짖으며 달아나기에 바빴다. 전열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사기는 땅에 추락했다. 꺾인 깃발 아래 죽음의 기운이 팽배했다.
이를 하나하나 보고 있는 동안 내 기분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보는 이가 절로 숙연해질 만큼 처절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폐허가 된 전장에 일곱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죽음 위를 걷듯 침울하게 다가온 일곱 명의 남자 중 가장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이제는 검을 왼쪽에 차고 있는 로드 슈페리어였다. 목을 덮고 등까지 꼬리가 휘날리듯 보이는 붉은 머리가 불티처럼 아름답게 흩날렸다. 나는 내가 들고 왔던 브로치가 그의 가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지만, 원래 주인에게 달려 있어서인지 매우 잘 어울렸다.
그들이 나타나자, 마물들의 행진이 멈추고 전쟁터에는 일시적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멀리 보이던 마룡이 서서히 몸을 낮추며 마물들이 바다 가르듯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투구를 쓴 한 남자가 천천히 절도 있게 걸어 나왔다.
「당신들이 인간 쪽 대표인가?」
그가 오만하게 말하자, 로드 슈페리어가 침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당신이 소문으로 듣던 마룡을 타고 다니는 마신의 기사인가 보군. 대표라고 해도 이미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멸망했으니, 용기 있는 자들이 나섰을 뿐이지만…… 어쨌든 대표가 맞다.」
「마신의 기사라…… 듣기 좋군. 우리의 신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겠지? 더 이상 우민들의 쓸데없는 저항은 멈추고 조용히 복속해라. 엎드려 긴다면 목숨만은 연명시켜 주겠다.」
그 광포한 눈동자에 뒤쪽에서 큰 고함이 터졌다.
「저따위 말을 받아들이라고!」
「참아. 지금은 로드 슈페리어가 대표니까!」
로드 슈페리어조차 분노를 완전히 참지는 못했는지,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아까 보았던 그의 어릴 적 성격이 꽤나 감정적이었으니, 지금 참고 있는 것도 기적일 터였다.
그때, 바로 뒤에 서 있던 다크 나이트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로드 슈페리어는 곧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 바로 섰다. 그리고 그 손을 마신의 기사가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우리는 너희들이 물러가기를 원한다. 그런 굴욕적인 말은 들을 수 없어.」
「……그래? 그렇다면 다른 방법도 있긴 해.」
「그게 뭐지?」
「바로 너. 엘프도 운다는 얼굴의 너 정도를 벗겨서 제단에 바친다면, 그것이 비록 적이라도 신께서 너그럽게 보아 넘겨 주실지도 모르지. 우리의 신은 누구든 공평하게 대하시거든. 꽤나 동하는 얼굴 아닌가?」
그 순간, 뒤쪽의 고함은 전체로 번졌다.
「차라리 죽을 때까지 항전하겠다!」
「어떻게 저런 말을…….」
분노로 하얗게 질린 로드 슈페리어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꽉 깨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뒤쪽에서 성스러운 흰 갑옷을 입은 남자가 뛰어나왔다.
「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군. 대화 같지 않은 대화는 관두고 당장 꺼져라!」
그러자 투구의 남자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 땅에 내려오신 신은 오직 우리의 신뿐이다. 다른 신 따위는 없어. 그럼 협상은 결렬된 것으로 한다. 하지만 너, 로드 슈페리어는 이 땅에서 인간이란 종족이 아예 사라지기 전에 두 번째 제안이라도 잘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중에 전장에서 만나도록 하지.」
그가 망토를 휘날리며 돌아서자, 마룡이 그에 응답하듯 긴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투구의 남자가 떠난 뒤 분위기는 다시 어둡고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다크 나이트가 조용히 속삭였지만, 로드 슈페리어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가 가슴에 있는 브로치를 손이 하얗게 되도록 꽉 쥐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 폐허의 전장에서 날아올라, 다시 한 번 창공에서 하얗게 명멸하는 세계를 맞이했다.
“……후우.”
나는 시작할 때와 똑같이 제단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주변이 전부 뿌옇게 흐려 제대로 보이는 게 내 몸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직접 보고 들은 것처럼 체험하고 나서인지 한숨이 절로 입에서 새어 나왔다.
띠링!
- 브로치의 추적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 연계 퀘스트, 슈페리어의 기억을 잇는 자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알림음이 들려오며 안내창이 떠올랐다.
또다시…… 연계?
이 퀘스트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미스트 대륙의 전체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는 듯했다. 갑자기 내가 받은 것이 그냥 한 천재 마법사에 대한 퀘스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