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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헌 님. 음성 메시지가 1개 도착했습니다. ]
“재생해.”
[ 재생하겠습니다. ‘무헌아, 엄마 아빠란다. 요즘 지내는 건 괜찮니? 불편한 것 있으면 연락해 주렴…….’ ]
“종료해.”
[ ……재생 종료되었습니다. ]
‘새삼스레 이런 연락은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전했는데.’
혀를 차면서 욕실에서 절뚝거리며 나와 식탁에 앉았다. 식탁에는 이미 컴퓨터가 요리해 놓은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컴퓨터의 요리란 맛이 특별히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요리하는 것보다는 먹을 만하기에 나는 종종 컴퓨터의 요리 기능을 사용하고 있었다.
서기 2200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컴퓨터가 실생활과 제일 밀접한 관련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빼고는 지난 세기와 별로 달라진 것도 없다고들 하는 시대. 제5의 물결, ON-Line(온라인)에서 VT-Line(브이티라인, 가상현실)으로 바뀌게 된 것은 최첨단 과학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인간을 무병장수나 우주의 세계에 데려다주지는 못했다.
“오늘 일정은……. 없군.”
주말이라 일정은 텅텅 비어 있었다. 병원에 가는 날도 아니니 결국 오늘도 밖에 나갈 일은 없다는 소리다. 애당초 나가는 걸 좋아하지도 않지만. TV나 틀어 볼까.
“TV 켜.”
[ TV, on. 채널은 37번입니다. ]
썰렁한 가운데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심심하기에 평소에는 잘 보지 않는 TV를 틀었다. 곧 거실 앞쪽에서 매끄러운 홀로그램 TV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김지현 씨?’
‘네, VTJ, 김지현입니다. 시청자 여러분들, VT게임을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손꼽아 기다리고 계셨을 소문만 무성하던 화제의 게임이 드디어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언론에 드러냈습니다. 몇 년간 침묵을 지키던 개발사 (주)새턴의 최초 기자회견장! 저희 VT 리얼라이프가 빠질 수 없겠죠? 지금 함께 보시죠.’
“뭐야, 저건.”
VT가 일상생활이기는 하지만 게임 따위는 좋아하지도 않고, 즐길 수도 없었던 나에게 저런 쪽 이야기는 다른 세계만큼 먼 것이었다.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것은 VT가 첫 실용화가 된 이래 엄청나게 많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해 온 첨단 사업 가운데 하나였지만, 실제로 현실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 세계 속의 자신의 캐릭터를 고글을 쓴 채 원격으로 움직이는 방식이라 예전의 구식 온라인 게임에서 규모만 커졌을 뿐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도 많이 받고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어렸을 때 몇 번 하곤 했었지만 사고를 당하고 몸이 불편해지면서 다 그만두었고, 지금에 와서는 사람과 부딪치는 것을 매우 싫어하게 된 탓에 사람과의 관계를 필수적으로 쌓아야 하는 VT게임 쪽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VT게임이 흔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게임도 관심이 있는 자나 하는 것이다.
채널을 돌릴까 생각하는 찰나, 리포터의 손짓과 함께 화면이 곧 여러 사람들이 몰린 기자회견장으로 바뀌었다. 그야말로 구름같이 몰려 있는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같이 앞쪽의 빈 의자에 쏠려 있었다.
잠시 후, 폭발적인 웅성거림과 함께 뒤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막 채널을 돌리라고 말하려고 했던 나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그 남자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의아해졌다.
회사 홍보 모델인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아- 나오고 있군요. 저분이 바로 세계적 VT기업 (주)새턴의 한국 지부장인 윤석호 씨입니다.’
때맞춰 리포터가 화면의 남자에 대한 정보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카메라를 미친 듯이 번쩍대며 거의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주)새턴의 신작 게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소문에 의하면 기존과 달리 홀로그램 원격 조종 방식이 아니라던데, 어떤 방식으로 그 게임을 개발하셨죠?’
‘언제쯤 오픈하실 예정이십니까!’
‘클로즈 베타 예정이라도……!’
펑펑 터져대는 카메라 플래시와 방송국 마이크 사이에서도 그 남자는 전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저렇게 젊은 남자가 한국이란 나라 전체를 담당하는 지부장이란 사실에 조금 감탄하며 물을 마시고 있을 때, 그 남자가 손을 슥 들어 올리고 조금 조용해진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THE MIST’. (주)새턴이 20년의 세월을 기울여 만들어 낸, 앞으로 세계 최고가 될 VT게임의 이름입니다.’
윤석호란 남자의 불타는 듯한 눈동자가 똑바로 카메라를 향해 뜨여 있었다. 그 눈과 홀로그램을 사이에 두고 정통으로 마주친 순간, 나는 그리운 느낌을 받았다. 저런 투지에 불타는 눈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다. 주로 무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갖는 눈빛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열정이 있는 자가 가지는 눈.
나도 예전에는 저런 눈을 가진 사람들과 많은 것을 배웠었다.
‘더 미스트……!’
회장이 광란 상태로 술렁이는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재빨리 질문했다.
‘도대체 어떤 게임이기에 최고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그야 당연하지요. 앞으로 여러분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진짜 가상현실을 즐기게 될 테니까요.’
윤석호가 자신감에 찬 미소를 그리며 말하자 회장 내는 거의 난리가 났다. 나도 잠시 놀랐다. 저 남자……. 너무 허풍이 심한 것 아닌가?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조금만 더 자세히……!’
‘더 미스트에 베타 게임은 없습니다. 한국 기준으로 4월 10일이 되는 자정,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완벽한 미스트의 세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4월 10일……!’
‘베타가 없다니요!’
흥분하는 영상 속의 사람들에게 윤석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웃어 보였다.
‘이 이상의 정보는 ‘THE MIST’의 웹 페이지에서 확인해 주십시오. 아직은 여기까지밖에 말씀드리지 못하겠지만, 웹 페이지에서는 천천히 더 공지해 나갈 예정입니다.’
윤석호가 이어서 ‘이 게임에서는…….’ 하고 말하고 나서, 웅성거리던 화면은 다시 ‘VT 리얼라이프’로 되돌아왔다.
‘와, 대단하군요! 새턴의 저 자신감이라니, 도대체 어떤 게임이 나올지 짐작도 되질 않네요.’
한 진행자가 그렇게 말하자, 김지현이라 이름을 밝혔던 리포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기자회견 직후에 새턴 웹 페이지와 문제의 신작, 더 미스트의 웹 페이지에는 수백만 명의 방문자가 몰려 이번 신작 게임에 대한 큰 관심을 표출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로는 더 미스트가 가상현실의 큰 획을 그을 게임이 될 것이라는 것과 판타지 세계를 기반으로 하였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아, 그리고 저 윤석호 지부장이 지나가듯 남긴 마지막 한 마디도 큰 파장을 몰고 오고 있습니다.’
끊기기 전에 말하던 잘린 한 마디 말인가?
‘그게 무엇이죠?’
‘더 미스트 웹 페이지의 소개 공지에서도 짧게 언급된 말이지만, ‘더 미스트에서는 누구나 건강한 신체로 시작할 수 있다.’라는 거죠.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 아닌가요?’
“뭐…라고?”
난 순간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호오. 그건 마치 신체가 불편한 사람도 게임 내에서만큼은 건강한 몸으로 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바로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신체 본연의 특성이 가상현실 게임에서도 그대로 반영이 되는 터에, 누구나 원한다면 익명과 새로운 모습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인 VT에서도 이 문제는 두드러졌었죠.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됩니다.’
‘설마…….’
그 이상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내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움직일 수 있다고……? 건강한 신체로?’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몸속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헛된 희망을 품는 것은 안 되지만, 저주 받은 사슬에 감긴 나의 오른쪽 다리가 갑자기 가벼워지는 듯한 착각에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원하고 있다.
이 신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고 말할 수 없게 만든 다리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난 다시 눈을 떴다.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확인은 해 보면 되겠지. ……컴퓨터, 웹 페이지로 옮겨.”
계속 떠들던 화면이 꺼지고, 웹 페이지로 옮겨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갑자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 접속되었습니다. ]
“THE MIST로 검색해.”
몇 초 후, 순식간에 수만 건의 웹 페이지가 주룩 떠올랐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상위에 링크되어 있는 ‘THE MIST’의 공식 웹 페이지로 들어갔다.
그 순간, 스윽 하고 화면 전체가 어두워졌다.
[ THE MIST ~ 안개의 대륙 ~ ]
잠시 기다리자 화면에 갑자기 물에 떠오르듯 글자가 멍울멍울 나타났다. 놀라울 만큼 섬세한 화면이었다. 이내 웅장한 음악이 들려오며 천천히 홈페이지의 전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역시나 물에서 건져낸 것처럼 스며들듯 나타난 웹 페이지에는 공지게시판과 자유게시판 두 개밖에 없었고, 자유게시판은 지금도 글이 미친 듯이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일단 공지게시판으로 들어가, 한 개밖에 올라와 있지 않은 공지를 읽었다.
[ 공지 ] THE MIST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THE MIST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THE MIST는 새턴이 20여 년간의 투자를 통해
드디어 선보이게 된 최고의 VT게임이라 자부할 수 있는 게임입니다.
게임의 배경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판타지가 되겠지만,
미스트의 세계는 행운 있는 소수의 세상이 아닌, 노력하는 다수의 세상을 원합니다.
THE MIST에서는 누구든지 평등하게 건강한 신체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든 노력한다면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VT.
자유를 원하는 당신에게.
THE MIST의 세상에서 뵐 그 날까지.
THE MIST의 오픈일은 4월 10일이며, 3월부터 전용 캡슐의 판매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있었다! ‘누구든지 평등하게 건강한 신체로 시작할 수 있다’는 문장이……!
자유게시판으로 잠깐 들어가 보자, 수많은 추측성 게시물과 기대에 들뜬 사람들의 댓글이 1초에도 수십 건씩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중에 원하는 정보가 있을 가능성은 많지 않겠다는 판단이 든 나는 웹 페이지 밑에 작게 적혀 있는 (주)새턴의 VT포트번호를 불렀다.
“포트번호 23514. VT포트로 연결해.”
[ 포트번호 23514. 연결하겠습니다. ]
이제 밥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불편한 다리를 끌고 일어나 VT포트로 들어갈 때 사용해야 하는 전선에 연결된 고글을 꺼내 썼다.
잠시 뒤 연결되었다는 말과 함께 눈앞이 하얗게 명멸했고, 나는 곧 가상현실 속의 (주)새턴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엔 현실 같지만 포트 안에서는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로써 명령해야 했다. 새턴 안으로 들어가자 곧 눈앞에 접속한 안내원의 상체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주)새턴의 가상 포트라인입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THE MIST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곧장 내뱉은 말에 안내원이 잠시 허공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곧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저 허공에 두드리는 것은 직원에게만 보이는 사원전용 연결 시스템이다. 여기서 용건이 있는 사람을 맞아 그 홀로그램을 통해 용무를 받아 줄 사람에게 연결해서 보내 주는 것이다.
“THE MIST……. 어느 쪽 회사에서 오셨는지요?”
“개인입니다.”
그러자 안내원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개인이요? 개인 단위로까지 만날 여력이 지금은…….”
나는 순간 아차 했다. 웹 페이지에 수백만 명이 몰릴 정도라면 지금 VT포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을 것이 뻔한 것을 나답지 않게 흥분한 나머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어쩐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난 잠시 고민한 끝에, 동정심을 자극할 만한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네? 정말인가요? 아… 이럴 수가……. 사람들이 몰릴 것을 생각하지 못했군요. 하지만 저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어떻게 오늘 안에 안 될까요?”
안 짓던 표정을 지으려니 볼 근육이 다 떨렸지만 어떻게든 내 표정이 그쪽에 조금 통한 것 같았다. 안내원은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이내 다시 나에게는 허공에 삽질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홀로그램을 한참 두드린 뒤에야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중요한 용건이라고 하시니 제가 일단 연락은 해 봤는데, 오래 기다려도 괜찮으시다면 연결해 드릴게요.”
성공했나?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기다리는 것이야 별 상관 없습니다.”
여기가 VT포트 안이 아니고 실제로 서서 기다리는 것이었다면 애로 사항이 많았겠지만.
“네. 그럼 연결해 드릴게요. 3, 2, 1.”
응?….
‘잠깐만요, 어디로 연결하는지 정도는 좀 알려 주고…….’라고 말하려던 순간, 나는 이미 포트 내의 한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윽…….”
포트 내에서 이동할 때 3초를 세어 주는 이유는 이동한 직후에 머리가 꽤 어지럽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비틀거렸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타나 말을 걸었다.
“누구신데 갑자기 들어오셨죠?”
뒤돌아보자 낯선 남자가 보였다. 내가 이동한 방 안에는 그 남자 말고도 다른 사람이 또 있는 것 같았다.
포트 공간이란, 업무상 쓰는 일이 많은 만큼 보안도 잘 되어 있어서 포트 내 방의 주인은 방문한 손님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손님끼리는 주인이 연결해 주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새턴 입구에서 안내를 돕던 이가 쓰던 연결용 홀로그램과 같은 이치였다.
‘기다리라고 해놓고 냅다 방 안쪽으로 날 밀어 넣다니. 그 안내원 초보였나 보군.’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입구에서 대기 쪽으로 연결한다고 했는데 여기로 왔군요.”
“잠시만……. 아. 그렇군요.”
남자가 허공을 몇 번 찔러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원이 연락한다고 했던 것을 찾아 확인한 듯했다.
“(주)새턴 내 THE MIST 건으로 개인적 용무시라고요.”
“예.”
“무슨 용무…… 아. 잠깐만요. 저쪽과도 이야기가 있어서.”
친절하게 웃던 남자는 잠시 양해를 구한 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가 표정이 굳어지고, 다시 뭔가 말하더니 한참 후에야 내 쪽으로 왔다.
“제가 두 분과 따로 이야기를 하기 힘든 상황이라, 두 분도 같이 연결했으면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의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보통 먼저 온 사람과 이야기를 다 끝낸 후에 다음 사람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안내원도 ‘오래 기다리실 수 있다면’이라고 말했던 것이고.
지금 먼저 들어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괴짜인 모양이었다.
“네.”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THE MIST의 관리 3팀 실장, 안호입니다.”
“아, 저는 강무헌이라고 합니다.”
“좋아요. 그럼 연결하겠습니다. 2, 1.”
팟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섬광이 튀는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방 저쪽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미남형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방이 환해졌다.
나는 잠시 그 남자의 얼굴을 어디서 봤던가 생각하다가, 방금 방송에 나왔던 한국 지부장 윤석호라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방송에서 본 사람을 여기서 다시 봤다고 호들갑 떨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안녕하세요.”
나도 인사하자 윤석호는 눈썹을 약간 올린 채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THE MIST 건이라 하던데, 아직 오픈도 되지 않은 게임에 무슨 개인적 용건이신지 궁금해서 제가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글쎄요. 전 질문을 하러 왔습니다.”
“질문?”
머리를 살짝 흐트러진 올백으로 넘긴 윤석호는 자신이 방의 주인인 것처럼 내 말에 대답했다. 뭐 어쨌든 내 입장에서도 아랫사람보단 윗사람이 대답해 주는 게 더 신용도가 높아서 좋긴 하지만, 이렇게 되면 갑자기 묻혀 버린 저 안호라는 사람이 좀 불쌍하군.
“THE MIST가 몸이 불편한 사람도 건강한 신체로 플레이할 수 있는 가상현실을 구현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쓸데없이 시간 끌 생각은 없어 바로 질문하자, 윤석호는 실제로 보니 더 부담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조용히 그 눈에 맞섰다.
“……강무헌 씨. 당신 눈은 죽어 있군요.”
한참 동안 그렇게 눈싸움을 하더니, 갑자기 윤석호가 딴소리를 했다.
“희망이 전혀 없어요. 표정도 얼음장 같군요. ……평소에도 그렇습니까?”
“저, 지부장님…….”
다른 소리를 하는 윤석호에게 안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지만, 윤석호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나는 윤석호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좀 불쾌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처음 보는 남에게 그런 소리를 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군요. 대답은 안 해 주십니까?”
낮게 깐 목소리에 칼을 품은 것을 알아차렸는지, 윤석호는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면, ‘예. 사실입니다.’이니까요.”
사실이라니…….
나는 너무나 쉽게 나온 그 대답에 순간 맥이 빠졌지만, 동시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지부장님?!”
안호도 사내 비밀에 해당할지도 모르는 그 대답에 혼비백산해 소리를 질렀지만 윤석호의 반응은 여유로웠다.
“자자. 괜찮아요, 괜찮아. 그 정보는 이제 곧 제대로 공개할 계획이었거든요.”
안호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든, 나는 전의 말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말은 듣지도 않고 있었다.
“정말…… 그 정도로 발전한 VT를 개발한 겁니까?”
“예.”
한참 후에야 가슴 속에서 부는 폭풍 같은 것을 가라앉히고 말하자, 윤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랬었군……. 예. 됐습니다.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확인했으니 볼일은 다 봤다. 그렇게 미련 없이 돌아서려던 나를 갑자기 윤석호가 붙잡았다.
“잠깐만요. 듣기만 하고 그냥 가시는 겁니까?”
“……그러면?”
난 그냥 일반인일 뿐인데 뭘 어쩌란 말인가. 삥이라도 뜯을 셈인가 싶어 쳐다보자 윤석호가 불꽃을 담은 눈으로 말했다.
“강무헌 씨가 여기까지 찾아오신 것은 이 THE MIST에 흥미가 있어서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전혀 예상 밖의 답변이었는지 윤석호의 얼굴이 순간 이상하게 변했다. 나는 그 표정에 피식 웃었다.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할 듯했다.
“제가 원했던 것은 가상현실의 기술력이 오프라인 신체의 결함을 극복할 만큼 발전했느냐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THE MIST는…… 글쎄요. 전 게임에 흥미가 없어서. 뭐, 이제 확인했으니 앞으로 저 같은 사람도 더 살기 편한 세상이 되었다고 만세 삼창이라도 불러야겠군요.”
이들은 아까부터의 말로 내가 바로 그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됐다고 생각하여 빠져나가기 위해 다시 포트번호를 부르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안호가 또다시 손을 뻗어 만류했다.
“잠깐만요. 그러면 강무헌 씨는 그렇게 애타게 바라셨으면서 THE MIST로 먼저 그걸 체험해 볼 생각은 하지 않으셨단 겁니까?”
“네.”
“왜요?”
그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에게 게임이란 것은 시간 낭비, 돈 낭비에 불과합니다. VT에서나마 이런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하단 소리죠. 기다리면 나중에 일상 VT들도 그 정도 수준이 될 텐데, 굳이 꼭 비싼 게임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까?”
“아니, 여기서 그런 말을…….”
안호는 아까보다 더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 됐습니다.”
윤석호가 그런 안호를 말리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싱글거리고 있었다.
“강무헌 씨는 확실히 독특한 분이시군요.”
성격이 더럽다는 뜻인 것 같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되었으니 지금 당장 게임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정상일 텐데 말입니다. 확실히 그 말도 맞긴 하죠. 기술력이란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강무헌 씨?”
“말씀하시죠.”
“한 번이라도 THE MIST를 체험하게 되신다면, 당신도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THE MIST의 기술 수준을 다른 곳들이 따라오려면, 50년은 멀었다고 봅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VT거든요.”
윤석호가 THE MIST 열혈 세일즈맨 같은 말투로 말했지만, 나는 ‘50년은 멀었다.’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50년?”
“50년도 많이 봐준 거죠. THE MIST의 개발팀에는 세기의 천재가 참여했으니까요. 그리고 기술력이란 스파이라도 없는 이상 그렇게 빨리빨리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한 명의 천재가 100년을 책임진다는 말, 아십니까?”
나는 당황스러웠다. 50년은 멀었다는 말이 진짜라면, 앞으로의 내 삶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나는 정말로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리에 묶인 사슬을 풀고 싶은 열망은 그 무엇보다도 크다. 하지만…….
“강무헌 씨는 게임이 그저 돈 낭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그를 노려보며 반문했다.
“그렇게까지 부정하시니, 저도 게임 제작사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 조금 불타오르는군요.”
윤석호는 그렇게 말하고, 턱을 괴었다.
“좋습니다. 제가 무헌 씨께 아주 특별히 선물을 하나 하죠. 4월 9일까지, THE MIST에 대한 정보들을 잘 보십시오. 그때쯤 제가 보낸 선물이 갈 겁니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일갈하고 포트번호를 눌러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본 방 안에서는 윤석호가 웃고 있는 가운데 안호만이 어쩔 줄 모르는 중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점차 정체가 밝혀져 가는 THE MIST에 대해 과열된 언론의 분위기를 일체 무시한 채 두 달을 보냈다.
그러나,
[ 택배가 도착하였습니다. ]
“누구…….”
“안녕하십니까! 한국택배에서 나왔습니다. 자자, 비켜 주세요. 들어가게.”
4월 9일. 문을 연 순간, 갑자기 운반되어 들어오는 커다란 캡슐을 뒤통수를 맞은 기분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나는 그 즉시 (주)새턴의 VT포트로 접속해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주)새턴의 가상 포트라인입니다. 무슨 용건으로…….”
“윤석호 지부장에게 당장 연결해 주십시오.”
지난번과는 다른 안내원이 나타나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눈이 마주친 순간 겁을 잔뜩 먹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 지부장님이요?”
“네. 당장.”
안내원은 제대로 대답도 못한 채 홀로그램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저… 지부장님은 지금 다른 분과 먼저 만나고 계신 것 같은…….”
“상관없습니다. 연결해 주시죠.”
“그런데 무슨 용건이 있으신지…….”
“THE MIST 건으로 아주 개인적 용건입니다. 강무헌이라고 연락하면 알아서 잘 받을 테니 연결해 주세요.”
“여, 연결하겠습니다. 3, 2, 1.”
결국 안내원은 연결시켜 주었고, 나는 몰려오는 어지러움을 참으면서 똑바로 눈앞을 바라보았다.
지난번과는 다른 방이었다. 먼저 만나고 있었다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은 없었다. 두 달 만에 다시 보는 윤석호의 저 미끈한 얼굴이 이렇게 나를 짜증 나게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 강무헌 씨. 두 달 만이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는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쓸데없는 말은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라니요?”
“캡슐 당장 도로 가져가시죠.”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선물은 잘 갔나 보군요. 마음에 드십니까?”
“그런 걸 받는 취미 따윈 없으니 반품하겠습니다.”
“이런, 너무 화내면 미모에 해롭습니다. 취미가 없으면 이제부터 취미로 하셔도 될 텐데.”
나는 조용히 윤석호를 노려보았다. 두 달 동안 뭘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헛소리에 이어서 미친 기까지 충분한 것 같다.
“장난하지 말고 저는 지금 당장 반품할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흠……. 곤란합니다, 그건.”
윤석호는 처음으로 조금 아미를 찌푸렸다.
“그건 강무헌 씨 같은 분들을 위해 제작한 특별 캡슐입니다. 보통 캡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최첨단 VT기술의 집합체죠. 여기서 반품하신다면, 그것은 바로 폐기처분될 겁니다.”
“하라고 하시죠. 전 어차피 하지도 않을 테니까.”
내 대답에 윤석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그 기기 한 대의 가격이 정식으로는 1199만 원입니다. 평범한 일반용 캡슐은 199만 원임을 생각했을 때, 대략 여섯 배에 가깝죠.”
순간 귀를 의심했다.
보통 VT라인 게임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전용 고글이나 캡슐이 비싸 봐야 20만 원에서 30만 원이며, 한 달 이용료가 5만 원대임을 감안했을 때 저 가격은 미쳐도 안 살 것 같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 게임, 누가 하기나 하겠습니까?”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하자 윤석호는 씩 웃었다.
“THE MIST니까요. 물론 무이자 36개월 이상 할부 정도의 타협은 하고 있죠. 그리고 3월에 처음 판매하기 시작해서 오픈 하루 전인 오늘까지 팔려나간 기기의 수는 자그마치 한국에서만 약 10만 대입니다, 10만 대. 그리고 지금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죠.”
세상에는 참 미친 사람들도 많다.
더 이상 말해봤자 머리만 더 아플 것 같았다. 나는 관자놀이에 손을 올리고 뒤돌아섰다.
“전 그 미친 행진에 참여하고 싶지 않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대로 접속을 끊어 버렸다면, 나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아마 다시는 맞지 못했을 것이다.
“강무헌 씨. 제가 왜 그 캡슐을 특별히 공짜로 선물해 드렸는지 아십니까?”
문득 낮아진 윤석호의 목소리에 의아해져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친 윤석호의 눈 속에서는 THE MIST를 처음 소개하던 그때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빛에 일순 시선을 빼앗기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강무헌 씨의 눈이 너무 슬펐기 때문입니다. 처음 보는 제가 이런 말을 하기엔 뭐하지만, 무헌 씨는 지금 인생을 전혀 재미있게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수치심을 닮은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아무와도 만나지 않고 감춰 왔던 비밀이 한순간에 들킨 기분이었다.
분한데도, 반박할 수 없었다.
“저는 그런 눈을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는 성격이라서요.”
윤석호는 웃고, 다시 묘하게 힘에 찬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인생을 다시 살아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또 다른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지금 눈앞에 있는데, 도대체 뭘 피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이럴 때야말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에 도전해 보십시오. 저는 그런 게임을 만들기 위해 지금껏 노력해 왔습니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메마른 내 마음에 들어와 박혔다.
고요한 강물에 돌을 던진 것처럼 파문이 이는 마음을 보기라도 한 듯 윤석호는 계속해서 말했다.
“접속을 해제하시면, 속는 셈 치고라도 THE MIST에 접속해 보십시오.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메일이라도 보내 주시면 특별히 무헌 씨만큼은 제가 담당해 드리겠습니다. 제 VT포트 메일 주소는 택배 속에 첨부되어 있을 겁니다.”
「……또 다른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지금 눈앞에 있는데, 도대체 뭘 피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귓가에 울리는 그 목소리를 따라, 접속해제를 한 나는 저도 모르게 방 한쪽에 연결되어 놓여 있는 더 미스트의 캡슐 앞으로 다가갔다.
광택이 나는 불투명한 검은 캡슐의 반원 뚜껑 위에 손을 올리자, 지잉 하고 열려 깜짝 놀랐다. 안쪽은 성인 남자 한 사람쯤은 편하게 누울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일반 캡슐과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안쪽이 소파처럼 푹신하게 눌리는 것을 보아 환기만 잘 된다면 저 안쪽에서 잠을 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 미스트라…….”
메마른 중얼거림 속에서 문득 오랫동안 억눌렀던 어떤 감정이 떠올랐다.
“다시 한 번 마음껏 걸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캡슐을 다시 닫았다. 게임의 오픈일까지는 아직 하루가 남아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오른쪽 다리를 끌고서 THE MIST에 대한 새 정보들을 검색해 보았다. 게임을 하기 전 기본적인 정보 정도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왠지 말발에 휩쓸려 버린 기분도 들기는 하지만, 윤석호의 말대로 속는 셈 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강무헌이 나가고 난 포트라인 내에서, 윤석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무도 없던 방 안에, 또 다른 한 사람이 거짓말처럼 서 있었다.
“방금 나간 사람이 그 프로젝트 중의 한 명이야?”
연구원복을 입은 남자가 묻자, 윤석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제 재량으로 집어넣은 마지막 한 명이죠.”
“흠……. 네가 그런 충동적인 일을 하다니, 드문 일이네. 그래. 뭐, 알아서 잘 하도록 해. 고객 관리 서비스에 불만만 들어오지 않도록.”
남자가 히죽 웃으며 농을 걸자 윤석호도 가볍게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럴 겁니다.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분이시더군요.”
“또 나쁜 버릇이 나오는 건 아니지? 고객이야. 정신 차려.”
“저도 잘 압니다. 그런 일에 관심을 둘 시간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호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남자가 소리 죽여 웃었다.
“뭐 어쨌든, 내일부터 진짜 시작이군. 고생이 많겠어.”
“당신도 그렇지요.”
포트라인에서 빠져나가는 두 사람의 실루엣은 한순간에 점이 되고, 곧 사라졌다.
방 안에는 이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드디어 하루가 지나가고, 4월 10일이 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으로 캡슐에 들어가서 눕자 곧 여러 전선 같은 것이 몸에 연결되었다. 어찔해진다 싶더니 잠시 후 나는 캐릭터 생성 공간 안에 서 있었다.
[ 강무헌 님, THE MIST의 세계에 어서 오십시오. ]
안내음이라 생각하기 힘들 만큼 진짜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 강무헌 님의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 생성하시겠습니까? ]
“응.”
눈앞의 공간이 잠시 이지러지며 곧 내 앞에 나와 똑같이 생긴 알몸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거울을 보는 것보다 더 생생한 홀로그램이었다.
[ 고치고 싶으신 부분을 고쳐 주십시오. ]
THE MIST의 캐릭터는 한 사람당 하나씩밖에 생성할 수 없다.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주인의 생김새, 성별과 똑같고 성형수술 수준의 리터칭은 할 수 없으며 머리 색이나 눈 색, 작은 점이나 문신 정도를 조절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정도는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다른 VT업계에서도 많이 시행하고 있는 규칙이라 별다른 반발은 없을 듯했다.
나는 일단 나와 똑같은 홀로그램을 들여다보았다. 목을 살짝 덮는 검은 머리칼에 차가워 보이는 얼굴. 이왕 새 인생이라면 인상이 확 다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냥 그대로 생성한다.”
[ 생성되었습니다. ]
괜히 요란하게 머리 색이나 눈 색 따위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웬만한 게임에서는 그 다음에 종족 선택도 가능할 텐데 THE MIST에서 유저는 그저 인간만 가능할 뿐, 다른 종족들은 NPC로만 존재한다고 했다. 살아 숨쉬는 인간의 세계에 중점을 두었다는 시나리오 팀의 인터뷰를 본 기억이 났다.
[ 캐릭터의 이름을 생성해 주십시오. ]
캐릭터의 이름?
“이름이라…….”
잠시 고민하다 일단 그럴싸한 아무 이름이나 내뱉어 보았다.
“카프로스.”
[ 생성되었습니다. ]
대충 지었는데 되긴 되는군.
[ 캐릭터가 완전히 생성되었습니다. 이제 카프로스 님은 THE MIST의 세계로 떠나실 수 있습니다. 가시겠습니까? ]
이름 지었다고 바로 캐릭터 명으로 바꿔 부르는 도우미의 인공 지능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면 THE MIST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주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파아앗!
눈앞이 하얗게 변한 뒤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나는 번화한 마을 한복판에 서 있었다. 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제 갈 길을 가는 중이었다.
멍하니 멈춰선 채 국적 불명의 옷을 입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소매를 만져 보니 현실 같은 천의 질감이 느껴졌다. 머리카락 느낌도 그대로였고, 옆에 있는 집 벽을 만져 봐도 단단하고 차가운 벽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게…… VT라고?
농담 같다. 진짜로 그냥 다른 세계에 와서 만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놀라움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던 도중 문득 내가 이 게임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가장 큰 이유가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두 다리는 아직 처음 서 있었을 때 그대로였다.
‘진짜로 걸을 수 있을까?’
일단 왼쪽 발을 내디딘 뒤 아주 천천히 무거운 오른쪽 발에 힘을 주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들어 올리고,
움직여서,
다시 한 발짝 건너 땅에 닿았다.
너무나 쉽게. 처음부터 이 다리에는 문제 따위 없었던 것처럼.
“아…….”
그 순간 환희도 감격도 아닌 것이 척추를 타고 찌르르 올라왔다. 갑자기 목이 메어오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숙이고 벽에 기대었다. 체중이 실린 오른발은 멀쩡히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
메어오는 목을 참아내면서, 나는 다시 한 발짝 더 걸었다.
아프지 않았다. 무겁지도 않았다. 내 다리는 더 이상 나무토막처럼 쑤시던 퇴물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쉽게 걸을 수 있는 것을.
이렇게 쉽게 뛸 수 있는 것을.
다시 이렇게 걷고 뛰는 날이 오기를, 꿈에서도 바라곤 했었다.
그렇게 또 걷고, 계속 걷고, 천천히 빨라지다가, 마침내 나는 미친놈처럼 마을 전체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웃으면서 뛰어다니는 나를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뛰어다녔다. 너무나도 감격적이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윤석호가 장담했던 대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 게임에 빠져 버렸다.
그날 나는 세 시간 동안 주변만 빙빙 돌다가 체력이 바닥났다. 일단 내일 다시 플레이하기로 하고 접속을 끊었다. 하루를 불필요한 짓으로 때워 버렸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감격에 찬 하루였다. 더 미스트를 온몸으로 체험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로그아웃을 하고 캡슐에서 일어나자 현실 대비 게임시간이 1:3이라는 말답게 별로 지나지 않은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캡슐 설명서에 쓰여 있던 ‘뇌파를 조절해 가장 편안한 가수면 상태에서 게임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이 순 거짓은 아니었는지 잠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말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몸은 조금 피곤하고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이거…….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캡슐 택배 속에서 보낸 이의 VT메일 주소를 찾았다.
[ 보낸 이 : 윤석호 님. (VT MAIL : [email protected]) ]
정말 저 주소를 제대로 된 주소라고 생각하고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웃기지도 않았다.
“컴퓨터, 이 주소로 메일을 보낸다.”
잠시 컴퓨터가 구동되는 몇 초의 시간이 지난 뒤, 내 앞에는 커서가 깜박이는 흰 화면이 나타났다.
“THE MIST는 잘 플레이해 보았습니다. 그때 말씀했던 새로운 인생, 한번 받아들여 보겠습니다. 그런데 캡슐이 불량인지 한 번 쓰고 났더니 몸이 영 안 좋은데, 어디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빠른 답변 부탁합니다. ……좋아. 됐어. 이대로 보내.”
[ 전송되었습니다. ]
“후우…….”
앞으로 내가 그 게임에서 무엇을 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나는 아마, 맑은 하늘 아래에서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게임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듯 다시 무거워진 오른쪽 다리가 욱신욱신 쑤셔왔다.
다음 날, 다시 접속한 나는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주변의 정보를 탐색해 보았다.
내 시작점은 미스트 대륙 동부의 아스가라는 작은 도시였다. 전체적으로 활기에 찬 판타지 세계다운 분위기로, 오픈 첫날을 맞아 물밀듯이 밀려들어 온 유저들 또한 각자 미스트의 세계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오픈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제보다 훨씬 안정된 것이 눈에 보였다.
상점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고 거리에는 성문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개중에는 벌써 나름대로 레벨을 꽤 올린 듯이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이를 걸으며 나는 미스트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먼저 무기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자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예전에 게임을 할 때, 나는 항상 검을 잡고 있었다. 원격 조종 방식이었지만 현실에서 검도로 단련된 나의 컨트롤은 괜찮은 편이었고, 게임 내에서 상위 고수를 손에 꼽을 때는 심심찮게 거론되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고 이후, 나는 다시는 검을 잡지 못했다.
세상에 지독하게 실망해 버린 탓에 검이 두려웠다. 병원에서 부서진 육체의 고통과 찢어진 마음의 고통에 신음하던 1년여 동안, 나는 검도의 검 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켰다. 전국 고교검도 우승자의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동정을 표했지만, 그럴수록 비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재활 훈련을 하면서는 어떻게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다시 한 번 검을 잡아 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지만 알코올 중독자처럼 손이 와들와들 떨려서 검을 잡을 수가 없었다. 떨어뜨리고, 또 떨어뜨리고, 나중에는 다리가 아파 주울 수가 없어서 그만뒀다.
나는 한없이 약하고 모자란 녀석이었다. 예전, 시간의 한 점조차 예리하게 노리던 나는 이제 없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나를 가르쳐 주셨던 사부님조차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러나신 것을 마지막으로 내 검은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했다. 지금 나는 걸을 수 있게 되었고, 꿈결처럼 걷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검을 잡을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흘끗 무기상점을 바라본 나는, 안쪽에 진열되어 있는 검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저기, 말 좀 묻겠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중 그럭저럭 친절해 보이는 사람 한 명을 붙잡았다.
“예?”
“여기에서 마법사가 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아, 그거요.”
처음에는 자기도 초보라고 주장하는 듯한 눈빛으로 불안하게 쳐다보던 남자가 아는 질문이 나왔는지 이내 얼굴을 환하게 폈다.
“여기서는 좀 구석이라 잘 안 보이는데 중앙 광장의 북쪽으로 빠져나가시면 위저드 타워가 있어요. 눈에 확 띄니까 금방 찾으실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뭘요. 그럼 전 이만!”
그 사람을 뒤로 한 채 나는 5분여를 걸어 분수가 있는 큰 광장으로 빠져나간 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한쪽에 주변 건물보다 높게 솟아 있는 탑 하나가 보였다.
“저건가…….”
위저드 타워는 가까이서 보자 생각보다 크기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높이도 5층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넓이도 웬만한 대형 빌딩만큼 넓어 보였다. 건물 외벽에 그려진 기하학적이고 섬세한 무늬에 감탄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데다 불이 거의 없어 굉장히 어두웠다. 게임인데도 이곳에서는 책과 잉크 냄새가 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이 많아야 할 이곳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의아했지만 어쨌든 복도를 계속 걸어 큰 홀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반짝이는 불 몇 개만이 벽에 붙어 일렁거렸다.
“……여기가 아닌가?”
잘못 왔나 싶어 홀을 둘러보다 다시 되돌아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나, 젊은이?”
뒤를 돌아보자 아까까지는 아무도 없던 곳에 웬 노인이 서 있었다.
“마법사가 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요, 여기가 아닙니까?”
위저드 타워의 분위기에 알맞게 왠지 수상해 보이는 그 노인은, 그 말을 듣고는 별안간 품평하듯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마법사가 되고 싶다?”
“네.”
그러자 그 노인이, 돌연 “파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법사는 아무나 되는 줄 알아? 젊은이, 자네 마법사가 도대체 뭐 하는 인간들인지는 아나?”
나는 조금 당황했다.
보통의 게임이라면 여기서 ‘아, 그러냐.’ 하고 바로 도장 찍듯 직업을 갈아치워 나갔어야 정상이었다.
“누구신데 그런 걸 물어보십니까?”
일단 당연히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물어보았는데, 그대로 무시한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모르는 모양이군.”
“누구신데 묻느냐고 물었습니다.”
“쯧쯧. 도대체 뭐 하러 온 거야? 그런 것도 모르면서.”
“…마법사는 마법을 쓰는 사람이죠.”
어쩌자는 건가. 할 수 없이 불쾌한 기분에 노려보며 대답하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자네 지금 장난하나? 세 살짜리도 아는 걸 가지고.”
나는 속에서 울컥하는 것을 느끼며 쏘아붙였다.
“그럼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마법사를 보고 마법 쓰는 사람이라는데 뭐가 다릅니까?”
“푸허허허, 흐흐흐흐! 그럼 뭘 거 같나?”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건가. 보아하니 유저는 아닌 것 같으니 NPC가 분명한데.
“……당신이야말로 장난하십니까?”
“크흐흐흐, 하하하하핫!”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아이들 농담 따먹기같이 흘러가는 대화에 지금이라도 뒤돌아서 나갈까 고민하는데, 노인이 굴러다닐 듯 웃던 것을 뚝 멈추고는 가볍게 내 어깨를 짚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 됐네. 크흐흐, 재밌었어. 자네는 기본은 되었군.”
뭐가 기본이 되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멀거니 있는데, 노인이 오른팔로 크게 원을 한 번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를 뛰어넘는 시늉을 하자 갑자기 주위가 크게 일그러졌다. 나는 어느새 깨끗하고 밝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재미있군. 놀라지도 않다니.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어.”
놀라기는 했다. 하지만 어지럽지 않다는 것만 빼고는 VT포트공간을 이동할 때와 비슷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번에도 다른 소리를 하면 차라리 나가서 검을 잡으려고 애를 써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물어보자, 노인은 자세를 바로 하더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탑에 목적을 갖고 들어오는 사람을 시험하는 사람이라네.”
“무슨 시험 말입니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확인을 위해 반문했다.
“마법사란, 상상할 줄 아는 사람이지.”
순간 노인에게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상상하는 인간은 재미있는 법이라네! 미스트 대륙 마법사들이 지녀야 할 자격이지. 자, 젊은이. 이름이 뭔가?”
“……카프로스.”
이름을 물었을 때 확신이 들었다. 아무도 없었던 그 음침한 분위기와 이 노인이 나타나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은 것 모두가 실은 마법사 전직 희망자가 거쳐야 할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 전직 시나리오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썰렁한 괴짜가 아닐까.
노인은 다시 한 번 몸 앞쪽에 큰 원을 그리고, 내 심장 쪽 부위에 손을 얹었다. 그 손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와서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마법사가 되겠다고 했나?”
아까의 질문의 연속. 하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나는 이것이 본격적인 전직 의식임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력을 움직이는 자, 상상하는 자, 그리하여 위대한 자연을 지배하는 자. 꿈의 길을 걷는 자에게 환상에 불과한 축복을 내리며. ……카프로스, 마법사의 길을 걷겠는가?”
노인이 한 마디씩 더할 때마다 빛이 점점 더 내 몸을 감쌌다. 빛나는 붉은 도형과 무늬가 겹쳐진 마법진이 발밑에서 바닥으로 쭉 확장되어 나가면서 주변의 기류가 세차게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머리칼이 솟구쳐 오르며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효과 한번 시원해서 기분 좋군. 난 웃으면서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예.”
“이제 막 태어난 마력에 몸을 의지한 자, 그 몸과 정신을 오롯이 하여 정진해야 할 것이다!”
말이 끝나자 마법진이 그림자 속으로 흡수되듯 사라지면서 바람이 가라앉았다. 노인은 심장에서 빛이 사그라지자 손을 내리고 나에게 손짓했다.
“이 방 밖으로 나가면, 그때부터는 혼자 걸어야 할 길이 끝없이 펼쳐지게 될 걸세. 언젠가 자네가 마법사의 꿈인 9서클의 끝에 다다를 날이 있기를 바라네.”
9서클의 끝……. 새로운 인생에서의 목표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크큭……. 그럼 잘 가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눈앞에 생겨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큰 홀 가득 북적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났다.
“저기요, 님들! 여기 마법사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세 가지가 있는데요…….”
“아악! 또 실패했다! 짜증 나 죽겠네.”
귀를 찢을 것 같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눈앞에서 본 게 얼마나 오랜만인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자, 홀의 중간에 있는 카운터에 NPC로 보이는 로브 복장의 도우미가 서 있었다. 이곳을 꽉 채운 사람들은 전부 전직을 하러 온 유저인 듯했다.
그렇군. 이게 진짜 위저드 타워 내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저기요.”
터져 나오는 실소를 머금고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모르는 유저가 질문을 했다.
“혹시 전직하셨나요? 전 세 번 왔다 갔다 했는데 이상한 할아버지가 헛소리만 하고 전직은 시켜 주지도 않아요.”
울상을 짓고 있는 상대를 보며 나는 일단 한 발짝 거리를 벌렸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져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음……. 전직 시험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망설이다 슬쩍 물어보자,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쏘아대었다.
“아, 이미 다른 직업으로 전직을 하셨나 보죠? 이 위저드 타워로 들어올 때 전직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시험이 자동적으로 생성이 되는데요, 사람들 말로는 저처럼 웬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있고, 들어오는 복도가 무한정 길어져서 갈림길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도 있고, 또 하나가 있었는데…… 음, 여하튼 그렇대요. 아침부터 있었는데 전직 성공했다는 사람을 열 명 정도밖에 못 봤다니까요? 오픈 둘째 날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요? 전직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게임을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보아하니 누구라도 붙잡고 저 말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시험 방법은 오픈된 처음에만 어려울 뿐이지, 방법이 세 가지로 정해져 있는 이상 이미 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키워드를 알려 주기만 하면 누구나 깰 수 있는 형식적인 방법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해 주는 것도 귀찮았으므로 나는 대충 응대하고 위저드 타워 밖으로 나왔다.
“정보창 오픈.”
처음으로 정보창을 오픈하자, 곧 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