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시탈 황후-8화 (8/8)

제 8장

궁에 돌아온지 보름

보름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날마다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을 보내느라 몸이 피곤하긴 했지만 이것은 신혼의 참맛이구나 싶은 나날이었다

장시언은 죽부인을 끌어안고 뒹굴거리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역시 미리 보약을 먹어둔 건 참 잘한 일이었어

정말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즐거움과는 별개로, 매일 이러면 몸이 못견뎠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진은 원래도 정력가 였지만 장시언이 다시 궁으로 돌아온 뒤론 그 정도가 더 심해진것 같았다 장시언은 밤다가 자신이 사람이랑 사는 건지 짐승이랑 사는 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되뇌였다 보름 동안 해가 뜨고 잠이 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약 거의 다 먹었을 텐데, 몇 첩 더 지어야...아!

장시언은 문득 스친 생각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보약. 오늘치 보약을 먹지 않았다 윤 상궁이 온종일 보이지 않아 먹는 것도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라도 빼먹으면 약효 떨어지는데

제 몸 챙기는데 극진한 장시언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볼을 긁적거렸다

윤 상궁은 대체 어딜 간거야 다른 나인들에게 시킬...

[너희들은 잠시 물러가 있거라]

[예]

응?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장시언은 고개를 들었다  윤상궁의 목소리였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들어와]

윤 상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장시언은 이미 알고 있으니 고할 필요 없다고 선수를 쳤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윤 상궁이 들어왔다 무게란 무게는 다 잡고 근엄한 상궁의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문을 닫자마자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뭔가 잔뜩 할 말이 있는 얼굴 태어나서 지금까지 윤 상궁을 보아온 장시언은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하루 종일 어딜 갔다 이제야 오는 게야?]

[긴히 알아볼 것이 좀 있어서요]

[알아볼 것?]

[예]

장시언은 '그게 뭔데?' 하고 묻고 싶었지만 일단 그게 아니었던 터라 화제를 돌렸다

[나 오늘 보약 안먹었어]

[예?]

[보약 말이야 보약 생각해 보니까 오늘 하나도 안 먹었지 뭐야]

[......]

[내가 요즘 그 힘으로 버티고 있는데 ... 그러니까 빨리 좀 가져다 줘 늦었지만 이제라도 먹어야 몸이 흡수를 하지]

[......]

[아 그리고 이제 보약 거의 다 먹지 않았어? 몇 첩 더 준비해야 할것...]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마마]

엥? 갑자기 끼어든 윤 상궁의 말에 장시언을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크지도 않은 눈이 의아한 듯 깜박거린다

[.... , 그럼 뭐가 문젠데?]

[제가 뭘 알아온지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제가 말이지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사실 아까 부터 윤 상궁의 표정이-뭔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표정이-신경쓰였던 터라 장시언은 '뭘 알아왔는데?'하고 윤 상궁을 재촉했다

윤 상궁은 아무도 없는데 홱홱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는 작게 소곤거렸다

[듣고 놀라지 마십시오?]

잔뜩 기대를 하게 하는 말툰데 안 놀라기만 해봐라

장시언은 내심 기대를 하면서도 별것도 아닌 일로 설레발을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 놀랄테니까 말해봐]

[마마 폐하의 첫사랑이 누군지 아십니까? 얘기 들어오신 적 있으세요?]

......뭐?

순간 머리속이 백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감시

폐하의 첫사랑? 그걸 들어서 뭐해?

[그거 나잖아]

장시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했다 논할 가치도 없었다 자신할 수 없었다 진의 첫사랑은 당연히 자신이라고. 남들이 들으면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가... 라고 할지 모르지만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황제의 모습을 항시 봐왔으니까 말이다

윤 상궁은 예상대로의 답변에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미간에 절로 주름이 생긴다

[......,무슨 뜻이야?]

거슬린다 신경을 묘하게 건드리는 말투다 뭘 알아 왔기에 저러지?

[제가 듣기론 아니던데요]

장시언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폐하의 첫라랑 말입니다 제ㅏ 듣기론 마마가 아니시던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게.... 내가 아니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한순간도 의심할수가 엇었다 사실 너무 당연한 것이 라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자신에게 진이 첫사랑이듯 진 역시 장시언이 첫사랑일 것이라 생각했다 물어본 적도 없고 알아보지도 않은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그냥 자연히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입궁하기 전부터 황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콩해 들은 장시언은 그가 누군가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황후가 되기로 결심을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버지, 장인욱은 폐하께는 아름답고 젊은 구많은 후궁들이 있지만 그들중 어느 누구도 폐하의 마음 한 자락을 얻지 못했다며 장시언이 그런 폐하의 마음에 들어갈 리 만무하니 원하는 대로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장시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맞아 그래서 내가 그때 얼마나 좋아했는데 관심 밖에서 편히 살 수 없을 거라고

윤 상궁도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너무 좋아서 환호까지 내질렀으니까

[그거 새로운 농담이야? 농담치고는 별로 재미없는데]

과거의 일들을 생각한 끝에 윤 상궁의 말이 농이라고 결론 내린 장시언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 그의 생각대로면 이제 윤 상궁은 '안 속으시네요?'하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윤 상궁은 무슨 말씀이신지? 라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농담 아닙니다]

[뭐?]

[농담 아니라고요]

[...., 아니라고?]

[예 아닙니다]

윤 상궁은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장시언은 의심을 했다

[누구랑 내기 한 거 아니야? 날 속일수 있는지 없는지?]

[제가 끼면 다 제 쪽으로 판돈이 몰려 내기가 안 된다고 이제 끼워주지도 않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황궁의 나인들과 내시들은 황제 내외의 일로 자주 내기를 하곤 했는데 윤 상궁은 백전백승의 무패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 사이에서는 윤 상궁을 따라 판돈을 걸면 돈을 잃을 일이 엇ㅂ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제가 요 며칠 동안 뭘 했는지 아십니까?]

윤 상궁의 물음에 장시언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린다

[뭐, 뭘 했는데?]

[폐하의 첫사랑에 대해 알아보려도 상선 어르신을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상선....., 상선?

순간 가느스름한 눈매가 땡글해진다 상선이라니, 상선이라니? 그럼 상선이 그 말도 안되는 정보를 준 정보통이란 말이야?!

상선, 그가누구인가 선 황제 때부터 황제를 모셔온 진이 태어난 순간부터 곁에서 보아온 이다 즉 진의 대해서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라는 말이다

[.. 말도 안 돼 거짓말...]

[뭐 하러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가]

얼이 빠진 장시언의 혼잣말에 윤 상궁이 친절하게도 답변을 해준다 전혀 고맙지 않은 호의에 장시언은 한층 더 얼이 빠진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참 어쩔 수 없는 것이 그런 와중에도 궁금한 것은 궁근한 것이었다 들으면 분명 신경이 쓰일 것을 알면서도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진의 첫사랑, 진의 첫사랑, 진의 첫사랑 , 으으....

장시언은 말을 할까 말까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말을 꺼내고 말았다

[.... 그 , 자세히 좀 말해봐]

듣고 넘기면 되는 거야 어차피 과거의 일이니까 깔끔하게 잊을 수 있어 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시워시원한 남자니까 그래, 그럴 수...

[만난 것은 10년 전, 그러니까 폐하께서 15살 때였답니다]

[뭐야?!]

마음 속 다짐이 무색하게 윤 상궁의 말을 듣자마자 흥분을 한 장시언은 '괜찮으십니까?'하고 묻는 윤상궁을 보고 아차차 하며 괜찮으니 더 말을 해보라고 손짓을 했다

미소는 짓고 있으나 눈가와 입매가 부들부들 경련이 이는 것이 이른바 억지 미소였다

[불편하신 것 같은데 말하지 말까요?]

[무,무슨 소리야 나 괜찮아]

[......]

[괜찮다는데도?]

안 괜찮아 보입니다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억지로 삼키며 윤 상궁은 짧게 한 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의 일이다

금실이 좋은 황제 내외가 그날도 어김없이 함께 밤을 보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윤 상궁은 상선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밖으로 나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며 오늘은 또 얼마나 틀어박혀 있으시려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상선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폐하께서 정무에 소홀해 지시진 않았다는 것이지'

윤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황제는 색사에 빠져 정무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황제는 색사에 빠져 정무를 소홀히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국정을 운영했다

윤 상궁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넌지시 내뱉었다

'두 분 다 젊으시고 서로에게 첫정이다 보니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헌데 이상하게도, '그렇군'하고 바로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상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 상궁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자네가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말일세'

'폐하의 첫정은 황후 마마가 아니시네'

'...예에?'

윤 상궁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상선은 오히려 그녀의 반응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궁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을 모르다니...아, 자네는 황후 마마와 함께 입궁을 했었지?'

그래서 모르는구만. 그래, 그러면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그 생각은 미처 못했다는 듯 상선이 덧붙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던 윤 상궁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장시언을 따라 입궁을 하여 늦은 나이에 궁 생활을 시작했지만 처세술이 좋은 그녀는 누구보다 궁의 사정이나 소식에 빠삭하다고 자부했다

헌데, 그런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니 더욱이 상선의 말로 짐작컨데, 그것은 모든 궁인들은 다 알고 있고 그녀만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즉, 폐하의 첫정에 대해서 말이다

'그럼 누굽니까? 예?'

'......'

'누굽니까? 말씀해주십시오, 상선 어르신'

'내가 괜찬 말을 했군 그래'

상선은 호기심에 빛나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윤 상궁은 몇날 며칠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말을 해달라고 상선을 귀찮게 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집요함에 상선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폐하의 태자 시절에 궁 밖으로 잠시 몸을 피하신 적이 있다 합니다]

[몸을 피해?]

[예, 가뭄으로 기근이 아주 심했을 적이었는데 선황폐하께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신당에 들어가시고 폐하께선 궁 밖으로 몸을 피하셨대요]

[아......]

알 것 같다 어렸을 적이라 그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아버지께 들은 적이 있었다 경운 황자의 역모로 인해 진이 몸을 피했었던 적을.

[...., 그래서?]

[그래서 그때 궁 밖에 나갔다가 처음 만난 것이랍니다 폐하께서 그 아이를 보고 첫눈에 반하셔서...]

[어마마마 강희 이옵니다 뵙기를 청하옵니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대화가 뚝 끊겼다 장시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드,들어오세요'하고 말을 했다 얼굴이 경직된 상태라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강희 황자가 들어오자 윤 상궁은 자리를 피해주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눈빛을 읽은 장시언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희 황자는 둘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햇는지 의아한 눈으로 장시언과 윤 상궁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자시언은 그런 아이에게 손짓을 했다

[거기 그렇게 서있지 말고 이리 오세요 황자]

[...예]

강희 황자는 장시언의 눈치를 보며 곁으로 다가갔다 장시언이 왜 그러냐고 묻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 안색이 안 좋으셔서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누가 밤나무 아들 아니랄까봐 눈치가 겁나게 빠르다 안 좋은 일..... 안 좋을 일이라기보다는 신경 쓰이는 일이 있긴 하지

[그런가요? 글쎄요 그런 것 없는데]

장시언은 미소를 지었다 괜한 일로 아이가 걱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아ㅣ끼는 밤송이가 속이 깊은 만큼 걱정이 많다는 것을

화제를 돌리는 게 좋겠는데....

저녁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온 아이는 씻고 온 것인지 머리가 젖어 있는 상태였다

[머리]

[예?]

[안 말리고 온 겁니까?]

[아...., 예]

[아직 여름이지만 밤에 그리 돌아다니면 고뿔이 듭니다 여름 감기는...]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리는 거라고 말해주려다가 장시언은 '.... 아닙니다' 하며 서둘러 마무리를 지었다 밤송이 앞에서 개 타령을 하는 것은 아무리 매사에 거침없는 그라도 못 할 짓이었다 장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영견을 챙겨왔다 짧은 머리를 말려주며 개 타령 대신 몸이 건강한 것이 최고라고 마을 해주었다

강희 황자는 장시언이 해주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 머리를 말려주는 것이 좋은지 미소가 입에 걸려 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아,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책봉식이네요]

태자 책봉식 예상치 못한 일들- 그 일들 중엔 장시언의 황궁 탈출 사건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때문에 미루어지긴 했지만 이젠 차질없이 진행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진이 넌지시 그렇게 말을 했었다

[긴장이 되거나 하진 않습니까?]

'긴장....' 작게 중얼거린 아이가 '조금 됩니다'하고 대답하며 쑥스러워한다

솔직하기도 하지 정말 더도 말도 덜도 말고 이대로만 자라다오 그의 밤송이는 아니답지 않게 의젓하지만 제 감정을 숨기는 일이 없었다 나이가 어리니 아닌척 으스댈 법도 한데 제가 약한 부분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장시언은 영견으로 천천히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피식 미소를 피었다

[나는 사실 좀 기대가 됩니다]

[기대요...?]

강희 황자가 고개를 갸웃한다 어떤 기대요? 하고 눈으로 묻는다

[아주 잘 치를 수 있을 것 같고, 또.....]

장시언은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고 미소를 지은 채 강희 황자를 마주보았다

[적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아이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감사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적색. 정확히 얘기하면 자색이 섞여 있는 적색이다 신국의 태자는 관례를 치르기 전까지 이 색으로 된 자적롱포를 입게 되는데 개인적으로 밤송이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장시언은 머릿속에 자적롱포를 입은 아이를 그려보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자절롱포 뿐이랴. 관례를 치르려면 아직 멀었지만 흑룡포를 입은 모습도 아주 예쁠 것이다 그래, 그럴 거야 장시언은 상사의 나래를 펼쳤다

윤 상궁이 곁에 있었다면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이 없다고 한마디 했을 모양새였지만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잠시 후, '어마마마...?'하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장시언은 괜히 머쓱해져 '이제 다 되었네요'하고 작은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한참을 영견으로 비벼댄 덕분에 아이의 머리카락은 정말 밤송이처럼 서 있었다 풉, 순간 웃음이 터졌다 영락없는 밤송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장시언은 한참을 큭큭 거렸다 아이는 이번에도 영문을 몰라 하며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아오, 귀여워

[빗질을 좀 해야겠습니다 기다리세요]

장시언은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황제 폐하 납시오!]

멈칫. 장시언은 걸음을 멈췄다 서려 있던 미소가 싹 가신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표정이 차가워져 있었다

'제가 듣기론 아니던데요. 폐하의 첫사랑 말입니다 제가 듣기론 마마가 아니시던데됴?]

귓가를 스치는 윤 상궁의 목소리에 장시언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털어내기 위함이었다 아니, 이거 내가 왜 이래? 이미 지난 일인데. 훌훌 털어버리기 로 했잖아

장시언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함을 열었다 다행히도 장시언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강희 황자는 좀 전의 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빗을 꺼내 돌아오는 그의 얼굴은 미소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방금 전처럼 굳어 있지도 않았다

장시언, 구질구질하게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이러지...

드르륵-

하지만, 속으로 되뇌던 결심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문이 열리고 진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장시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진다

그래, 안다 , 과거의 일이라는 것은.

하지만, 알아도 화가 나는 걸 어쩌라고

[오셨습니까 폐하]

장시언은 예를 취하며 말했다 평소와 똑간은 말이었지만 확연히 다른 딱딱한 말투 .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비단 진뿐만 아니었다 강희 황자도 '어?'하고 놀라 장시언을 바라본다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단다 밤송아. 이건 네 아버지 밤나무와 내 문제니까.

[정무를 보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어서 쉬십시오 전 황자를 머리르 빗겨주려던 참이었습니다]

요 며칠- 물론 기분이 좋을 때만-진이 오면 먼저 살갑게 다가가곤 했는데 오늘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진의 얼굴에 못마땅한 빛이 스치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장시언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할일을 했다

자리게 앉아 아이의 머리를 단정하게 빗겨주며 진이 서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진이 아이에게도 질투를 할 만큼- 물론 장시언에 한해지만- 속이 좁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이미 감정이 이성을 지배한 상태라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진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오늘 이곳에서 자고 갈래요?]

장시언이 생글생글 웃으며 묻자 강희 황자는 환한 얼굴로 '정말요?'하고 묻다가 슬쩍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매일 조금만 늦게까지 있어도 눈칫밥을 먹었던 처라 눈빛으로 '자고 가도 되나요?'하고 아버지에게 묻는 것이다

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눈으로 호소해도 그는 허락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한창때인 젊은 부부 사이에 자식이 껴서 자다니,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오늘은-]

[자고 가세요 머리가 다 마르긴 했지만 그래도 밤공기가 찬데, 가는 길에 고뿔이 들면 큰일입니다]

장시언은 황제가 거부의사를 드러내기 전에 선수를 쳤다 아이를 이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오늘은 정말 진과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둘만 있으면 정말 표정관리가 안 될 것이 분명하다 아직은 좀 더 시간을 갖고 마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과거의 일이라도 감정이 받아들일 시간이

그게 당장 되면 참 좋을 텐데 아직 윤 상궁에게 진의 첫사랑에 대한 것을 다 듣지 못한 상태라 쉬이 되지 않는다 신경 쓰이고 화가 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스스로 참 못났다고 생각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질투가 난다 꼴사납게

[자고 가세요 황자]

장시언은 다시 한번 얘기했다 그의 밤송이는 우물쭈물 '어.. 저는....'하고 말을 늘였다

자고 간다고 해~ 자고 간다고 해~ 졸린다고 하라고~ 침상으로 달려가 누워버려?

하지만, 아이는 역시 효자였다

[...아바마마께서 허락하시면요]

쳇 허락이라니 ... 장시언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밤공기가 찹니다 폐하 이곳에서 자고 가게 하시지요]

[......]

진은 한참 동안 장시언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그러라고 고래를 끄덕였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장시언이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고 뭐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해봐도 도통 짚이는 것이 없던 터라, 뭐 하루만이라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장시언은 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 순간 진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는다 장시언은 뻔히 그것을 알면서 모른 척했다

[침의를 준비시켜야겠습니다 예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예, 어마마마]

강희 황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장시언은 궁녀들에게 명을 내리기 위해 뒤돌아 마뜩잖은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황후궁 안에 어색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 미묘한 분위기는 그들이 침상에 누울 때 계속 되었다

실핏줄이 선 퀭한 눈,어두운 눈 밑 그늘

윤 상궁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 흉흉한 몰골에 기함했다 안 그래도 핏기가 없는 흰 피부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파리하다 밤새 잠을 설쳤다는 걸 묻지 않아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대참사의 날 이후 황제에게 매일같이 시달리던 그때의 모습이었다 부엉이의 귀환......

[괜... 찮으십니까...?]

[괜찮지 그럼. 앉아]

장시언은 전혀 괜찮이 않은 꼴로 앉을 자리를 가리켰다 윤 상궁은 다가와 앉으면서 계속 장시언의 얼굴을 살폈다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그래?]

흠흠, 장시언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쓸었다 하긴 몰골이 말이 아닐 테지

살다가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천하의 만사태평 장시언이 골머리가 아파 잠을 설치다니

윤 상궁은 가만히 장시언을 바라보다가 못내 안타까운 듯 쯧쯧 혀를 찼다

[처음 알았네요]

[.....? 뭘?]

[마마께서 질투가 심하신 것이요]

[뭐엇?]

장시언은 경기가 든 아이처럼 파드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나 당황을 했는지 입만 벙긋벙긋 할 뿐 말은 나오질 않는다

누가 뭘 해? 무가 뭘 해?! 무가 뭘 해?!!!

윤 상궁은 담담한 얼굴로 조로록- 차를 따랐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마마께서 연심에 타올라 얼굴도 모르는 이를 질투하시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호호호~]

[무,무무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질투라니, 질투라니! 내가 웬만한 사람이야?! 나 장시언이라고]

[부끄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원래 다 그런 것이지요, 무얼]

호록,호로록~

윤 상궁은 비실비실 웃으며 차를 마셨다

장시언은 차 마시는 호로록 소리가 이라도 사람 속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얄밉다 나날이 얄미워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윤 상궁이 이리된 것은 다 제탁인데 장시언은 그 생각은 하지 못하고 황당해했다

[질투 아니라는데오! 질투가 아니라 그냥 좀 화가 날 뿐이야....!]

[그게 질툽니다]

모르셨군요? 윤 상궁은 딴데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창백했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울긋불긋해진다 목에 핏대가 선다

[그,그래! 질투했다! 질투했어!!]

장시언은 결국 인정을 하고 말았다 그것도 흥분이 가득 서린 목소리로

[생각할 수록 화나잖아 나느 처음인데, 진은-아니 폐하는 처음이 아니라니 뭐가 지는 기분이라고!!]

자기애가 유독 강한 장시언은 진과의 관계에 있어 항상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몸을 섞을 때 아래 깔리는 것은 그였지만 그런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항상 더 마음을 쓰고 전정긍긍해 하는 쪽은 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닌 것이 진은 항상 장시언에 대한 것이라면 엄청난 집착과 함께 불안함을 드러내곤 했었다 그럴 리 없는데도 두 번 다시 자신의 곁을 떠나선 안 된다고 종종 말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사실 진이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장시언은 측은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의 마음속에 오직 자신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뻤기 때문이었다

헌데, 자신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그곳에 누군가가 머문 적이 있다니

그저 과거일 뿐이라고 아닌 척하려 해도 불안해 지는 것이다 자신이 유일한 게 아니라는 것이

[하아.. 어제 했던 얘기나 계속 해봐]

흥분을 토해낸 장시언은 한숨섞인 목소리고 애기했다

[상선이 다른 말은 안했어?]

물론 하셨지요

윤 상궁은 잠시 고민을 했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긴 했지만 말을 꺼내면 잦아든 흥분이 다시 용솟음칠 것만 같았다

말을 할까 말까

[말해]

장시언은 단박에 그녀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윤 상궁의 뒷얘기가  무엇인지 생각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진이 궁 밖에서 처음 만났고 첫눈에 반해서 어떻게 됐다는 건지 들어야겠다 오늘은 좀 자고 싶었다 다 듣고 이번에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어넘기며 두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청하리라 장시언은 다짐했다 그게 과연 가능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폐하가 첫눈에 반해서 뭘 어떻게 했는데?]

장시언의 물음에 윤 상궁은 '뭐 정히 궁금하시다면야...'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그 아이를 만난 곳이 영선이랍니다]

[영선?]

장시언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영선이라니 정말 그 영선?

윤 상궁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마께서 잘 아시는 바로 그 영선이요 사실 거기서 만난 것은 아닌데, 아무튼 그 애와 영선에서 반나절을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반나절...]

장시언은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겨렸다 그 순간 윤 상궁이 그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왔다 엄청난 비밀을 얘기해줄것처럼

[그리고 이건 상선 어르신이 자기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말해주신 건데요]

장시언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무래도 폐하꼐서 영선에 가신 게 그 아이를 보고 첫눈에 반하셔서 따라가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리 말씀하시 않으셨지만 상선 어르신이 듣기엔 딱 그리 들렸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

역시 다짐은 다짐일 뿐이었다 장시언의 눈가에 경련이 인다

첫눈에 반해서 따라가? 절세가인이었던 모양이지? 쳇!

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던 윤 상궁은 장시언의 그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상선에게 알아온 얘기를 모두 쏟아낼 요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헌데, 신기한 것이 ... 그 아이가 요상한 탈을 쓰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눈만 보고 얼굴은 제대로 못 봤는데... 폐하께서 고작 아이의 눈만 보고 빠져드신 거지요. 그래서 궁인들 사이에서는 폐하의 첫사랑이 눈이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소문이 떠돈답니다]

뭐? 탈을 쓰고 있어? 눈만 보고 빠져들어? 하! 왜에? 아주 그냥 눈동자에 빠져 죽지! -엇! 잠깐만

영선? 그리고, 탈?

[아 더 놀라운 것은 뭔지 아십니까?]

장시언은 숨을 죽였다 얼핏얼핏 떠오르는 과거의 잔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10년 전 영선

[글쎄 폐하의 첫사랑이 사내아이랍니다!]

뭐? 지금 뭐라고....

[...사내아이?]

[예! 몸도 호리호리하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어서 당연히 여자아이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내아이였답니다]

쿠궁!

10년 전 영선. 탈.- 치마저고리를 입은 사내아이!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다 장시언은 헛숨을 들이켰다 다 끼워 맞춰진 기억의 조각들

그,그건 나잖아!!!

윤 상궁은 장시언에게서 얼굴을 떼고 기함한 그의 표정에 그러실만 하지 하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동정의 빛이 떠오른다

[놀라셨죠? 사내아이라니... 아무튼 폐하께서 환궁하신 후에 역모를 일으킨 죄인들이 다 처형되고 그 아이를 찾으려고 명을 내리셨느데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전국방방곡곡을 다 뒤졌는데 찾지 못하셨다 하더군요 그 애 이름이... 마마, 괜찮으십니까?]

윤 상궁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장시언의 안색을 살폈다 떡 벌어진 입을 도통 다물질 못하니 왜 저러나 싶었다 폐하의 첫사랑이 사내아이라는 것이 그리도 충격적일까

장시언은 가까스로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완벽하게 헛다리르 짚은 윤 상궁을 바라보며 '그 애 이름이 뭔데?'하고 되물었다

[예? 아, 그 이름이요...]

그리고 윤 상궁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들었을 때 다문 잆은 다시 떡억 벌어졌다

후후.. 역시 그랬던 거였어 어제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진의 첫사랑은 역시 나였어!

장시언은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배게에 얼굴을 묻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 가느다란 팔다리가 침상을 두들긴다 가늘긴 하지만 어찌나 힘이 센지 쿵쿵쿵 소리가 울렸다

'예에!? 그게 마미시라고요??... 마마 그러지 마십시오 안쓰럽습니다 그냥 지난 일인데 뭘 그러세요?'

윤 상궁은 물론 처음엔 믿지 않았다 오히려 장시언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쉬시라고 침상까지 부축을 해주었다 장시언이 10년 전 의 그날을 낱낱이 말했을 때 그제야 그녀도 기억이 났는지 '아!'하며 눈을 빛냈다 치마저고리를 입혀준 것이 그녀인데 그녀 앞에서 탈을 쓰고 집 밖으로 나왔는데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장시언은 절로 기분이 좋아죠 다시금 팔다리를 통통 거렸다 소리는 물론 귀여운 통통이 아니라 아까와 마찬가지로 쿵쿵이었다

아... 내 눈이 그렇게 매혹적인가? 눈만 보고 빠져들었다니 푸흐흐흐흐....

한참을 푼수짓을 하다가 장시언은 휙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바라보앗다 습관적으로 손을 더듬어 죽부인을 찾는다 죽부인은 장시언이 다시 궁으로 돌아와 사들인 그의 두 번째 사유재산이었다 (첫째는 알다시피 호미다)

밤낮 가리지 않고 진과 있을 땐 그와 딱 달라붙어서 생활을 하다 보니, 몸이 그것에 익숙해졌는지 혼자 남으면 뭔가 허전했다 특히 오수를 청할 땐 더더욱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죽부인이었다

윤 상궁에게 사내 몸으로 시집을 와서 평생 부인 생길 일이 없으니 죽부인이라도 사오라고 시켰다 윤 상궁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품에 안기 딱 좋은 것으로 사다주었고 장시언은 죽부인을 안고 있을 때마다 역시 잘 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장시언과는 달리 진은 이 죽부인은 매우 싫어했다 매일 마뜩 잖은 눈으로 바라보고 갖다 버릴 궁리만 하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죽부인을- 정확히 말하면 장시언의 죽부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는데 -

'또 그러고 있는 거냐?'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장시언은 '어?' 하며 눈을 떴다 목소리로 짐작은 했지만 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왔지? 기척도 없이 들어왔네? 장시언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진은 역시나 아주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진이 이 죽부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장시언의 실없는 농담때문이었다

장시언은 긴 눈매가 휘어지도록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부인을 끌어안은 채로 그러자 진이 장시언의손을 치워 죽부인을 빼내곤 저 멀리 던져버린다 장시언은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작게 중얼거린다

[조강지처가 첩을 던졌어...]

[뭐?]

작은 소리였지만 바로 앞에 서있는 진의 귀에 안 들어갈 리가 만무하다 사실 그걸 노리기도 했고, 진은 흉흉한 기색을 드러내며 차마 장시언을 노려보지 못하고 죽부인을 노려보았다 사나운 눈빛이 저걸 태워버리던가 해야지, 하고 말을 한다

장시언은 결국 '푸핫~'웃음을 터트렸다 매번 느끼지만 이 장난은 정말 재미있다 진이 정색을 할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진이 장시언의 죽부인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외롭냐고? 내가 왜? 진이 없을 때마다 나는 죽부인과 함께해. 진이 조강지처라면, 죽부인은 내 첩이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런 농담

사실 장시언의 입장에선 '어?' 생각해 보니 그렇네? 하고 던진 농담이었는데 진은 그 농담에 유별나게 반응했다 조정 대신들에게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죽부인에 대한 반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오늘 처럼 말이다 장시언은 계속 큭큭 거렸다 다 큰 어른을 놀리는 것은 어린아이를 놀리는 것과 다른 재미가 있었다

'또 내가 그 말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 텐데 계속 장난 칠래?'

진이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하지만 그 안에 서린 다정함을 못 읽을 만큼 장시언은 눈치 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진이 계속 걸려드니까 그렇지 .크큭]

장시언은 진의 허리에 팔을 감고 몸을 기대었다 잘 하지 않는-정확히 말하면 기분이 최고조일 때나 하는 -애교였다

교태 어린 장시언의 행동에 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제는 찬바람이 쌩쌩 불더니, 오늘은 따뜻하다 못해 후끈거렸다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알다가 모르겠군]

장시언은 진이 중얼거리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 어제의 일에 대해선 함구했다 진의 팔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하곤 더 품으로 파고든다 진의 첫사랑에 대한 것은 자신만 알고 덮어두기로 마음 먹었다 진에게 알려줘 봐야 신상에 좋을 것 없다고 깨달은 탓이다

'폐하께 정말 그려셨습니까?정말 그... 그리 말씀하셨어요?'

윤 상궁은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을 에둘러 말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시언은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장시언이 인정을 하자마나 윤 상궁은 '왜 그러셨어요 대체!'하며 목청을 높였다 이어진 말은 더 흥분에 차 있었다

'상선 어르신 말로는 폐하께서 그 말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지셨답니다 하기야 안 그러셨겠습니까 귀하신 분이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말씀을 들었는니.....'

할말이 없었다 당시엔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크고 보니 잘못을 한 것도 같았다 어린 시절의 일이니 마음의 상처가 컸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름도 거짓으로 알려주시고.... 전국을 다 뒤져도 찾을 수가 없기에 폐하께서는 그제야 이름이 거짓인 걸 알고, 자신이 조롱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십니다 그 뒤론 사내라면 질색을 하셨대요.

진의 남색 혐오증이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니,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 었다 진의 첫사랑이 자신이었다는 것에 버금가는

'휴우... 모르는 척하세요, 마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시구요'

'긁어 부스럼이라니?'

장시언은 그게 뭐냐고 물었다 윤 상궁은 답답하다는 듯 설명해 주었다

'마마께서 폐하의 첫사랑인 것 말입니다 마마 때문에 그 생고생을 하셨는데 무슨 귀한 대접을 받자고 그걸 밝히십니까? 그냥 모르는 척 하세요 그게 신상에 편합니다 게다가 마마께선 영선이 어딘지 알지도 못한다고 딱 잡아 떼셨잖습니까 말하시면 폐하를 속인 것이 또 드러납니다'

그랬다 영선을 아냐는 진의 물음에 모른다고 대답을 했었다 윤 상궁의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장시언은 그녀의 의견에 금새 동조했다

그래,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자고 그걸 말하나 지금도 충분히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어차피 진의 첫사랑이 나고, 그걸 나만 알았으면 되지 뭐하려고 그걸 알려? 모르고 사는 게 나와 진 모두를 위해 좋아 아무렴

장시언은 자기 편할 대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이한마디만을 가슴에 새기고

장시언이 살짝 고개를 들어 진을 올려다본다

[.... 안해?]

부끄러운 듯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엔 하고 싶으면 하자고 먼저 달려든긴 했지만 그래도 항상 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재미없는 법이다 물론 내숭이라는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진도 알지만, 그래도 자신이 오만 가지 매력중 한 가지만 발산하고 사는 것은 손해이지 않은가

진이 무언가를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다 장시언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다가 '싫으면 됐어'하고 몸을 뗐다 그것은 당연히 진이 다시 잡을 것을 알고 한 행동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진은 다시 장시언을 잡았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어왔다 부드럽고 정중했던 입맞춤은 그들이 침상에 다다르자 거칠게 급변했다 지난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장시언은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진의 입맞춤에 호응하며 집요한 그의 입술을 따랐다

당신이 첫눈에 반한, 애타게 찾았던 첫사랑이 바로 나야

속으로 그말을 수도 없이 되뇌며, 그리고 이어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다짐하며

몸이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안으로 파고드는 거대한 이물감과 거친 호흡소리가 정신을 옭아맸다 장시언은 흐느껴 울었다 진의 유일한 한 사람이라는 정신적 만족이 가져오는 쾌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기다릴까?]

욕망에 찬 거친 숨을 내쉬며 진은 젖은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장시언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아니 해줘]

말이 떨어지자 마자 등골이 휘고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발끝까지 저릿저릿해지는 감각

장시언은 그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긴 밤이 될 터였다

종장

[저,저, 저와 제 내자를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시나니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영한은 잔뜩 굳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옆에서 부인이 '어머, 서방님 긴장좀 푸세요'라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처소에 금군둘아 둘러싸여 있던 때를 생각하면 절로 그렇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황명을 어기고 처소에서 탈출해 비밀을 발설하지 않았던가 사실 이 자리는 자신의 혼례를 축하해주기 위해 마려한 자리가 아니라 벌을 내리려고 마련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들여다보이는 영한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시언의 아우는 평생 나쁜 짓을 못하고 살 팔자였다 저렇게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시언이 그를 아끼고 좋아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랬기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언이 그를 아끼고 마음을 쓴다는 것이

[별 말을 다 하는군 그대는 황후의 아우가 아닌가 이 정도는 당연하지 그대와 그대의 내자를 위한 자리이니 마음껏 즐기도록 하게]

진은 마뜩잖은 속마음을 숨긴채 얘기했다 영한은 등꼴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납작 엎드려 예를 취했다

[화, 화, 황공하옵니다]

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딴 곳을 바라보며 술을 털어 넣었다 바로 옆에서 계속 내 아우 괴롭힐래? 하는 정인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지만 끝까지 모른 척을 했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연회자리엔 사내들만 남게 되었다 영한의 내자는 궁에 머무는 동안 쉬라고 마련된 처소로 돌아갔다

[네가 정말 장가를 가다니... 퇴짜만 맞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만 해도.. 장시언은 새삼 옛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신기햇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자신이 장가를(시집을)간 것에 비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그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영한은 대놓고 놀리는 형님의 태도에도 마냥 좋은지  헤죽거렸다

[제가 이래 봬도 알게 모르게 인기가 좋았습니다 으흐흐흐흐.....]

알게 모르게가 아니라 그냥 모른다 너만 빼고 아무도 모를 거다 아마

장시언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한껏 행복에 겨워하는 아우에게 굳이 그걸 말하지는 않았다

[행복하게 살아라 재수씨가 싹싹하고 성격도 좋아 보이더라]

[으흐흐흐.... 성격뿐입니까 제 색시는 얼굴도 엄~청 이쁩니다]

생각만 해도 좋은지 영한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헤벌쭉하게 풀렸다 장시언이 팔불출이 다 된 아우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형님바보로 유명했던 아우는 이제 색시바보라는 훈장도 더 거머쥘 듯 보였다

[그렇게 좋으냐?]

[예!!!!]

곰의 포효 같은 우렁한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장시언은 잔에 담긴 술을 털어넣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술 맛이 꿀맛이었다

[형님께선- 아차차, 마마께선 어떠십니까?]

[응? 뭐가?]

영한은 재빠르게 휙휙 주변을 살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와 황제가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것이 보인다 그는 장시언의 귀 가까이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 십니까?]

[뭐?]

제대로 들리지 않는 아우의 귓속말에 장시언은 다시 한 번 말해보라며 귀를 더 가까이 댔다 영한은 '폐하께서 잘 해주시나고요!'하고 말을 하고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떨어졌다 둔하기로는 천하제일이지만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는 황제가 장시언과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를 고깝게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잘 해주냐고?

영한의 걱정어린 물음에 장시언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별 희한한 질문을 다 받아보데, 하고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침묵을 영한을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여,역시 괴롭히시는 겁니까?]

[뭐?]

종전과는 다른  급격히 어두워진 영한의 낮빛을 보며 장시언은 의아하게 불었다 괴롭히다기 누가 누구를 말인가

[폐하께선 무서우신 분이 아니십니까 화해를 하셨다고는 해도 환궁을 하신 뒤에 형님께 막 화를 내셨을 것 같습니다 고래고래 호통을 치시면서]

화? 호통?

[혼도 많이 나셨을 것 같고....]

호~온?

[그래서 계속 옥안을 뵙기도 힘들었던 것 아닙니까?]

[......]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어디서부터 바로잡아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진은 장시언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를 데리러 사가에 왔을 때에도 화를 낸 것이라기보다는 제 진심을 알아달라 호소를 한 것에 가까웠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둘은 싸우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싸운다 하더라고 둘 중 화를 내는 쪽은 오히려 장시언이엇다

진은 장시언이 일부러 상처를 받은 척하거나 토라진 척이라도 하면 전전긍긍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미안하다고 숙이고 들어왔다 그런 그였기에 호통을 치고 혼을 낸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입궁을 하고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틈만 나면 진과 정을 나구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눈만 마주치면 마치 약속이라고 한 것 처럼 서로 몸을 겹쳤다 시도 때도 없이 그러다 보니 이젠 그것을 밤일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 였다

[......]

그나저나 이걸 뭐라고 설명한다지.....

오해의 늪에 빠져 끙끙거리는 아우를 보니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해줘야 할 것 같다 장시언은 잠시 고민한 끝에 영한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

[아우야]

[예?]

[이 형님은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다른 건 말해도 믿지 않을 것 같으니 넘어간다만, 이거 하나는 기억해라. ... 형님은 허리가 나가기 일보 직전이다]

허리 통증은 좋은 부부금술의 상징 신혼인 영한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한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이 든다

찰떡같이 알아듣는구만?

장시언은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알아들었으면 괜한 걱정 말아라]

[....예]

영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잔 비었다]

장시언이 잔을 내밀자 재빨리 가득 술을 채운다 장시언은 그것을 홀짝홀짝 마셨다

정말이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아주 행복했다 걱정도, 근심도 없이 그가 그토록 바라왔던 평화롭고 안락한 삶 딱 그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좋았다 과연 이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아 술도 들어가고 기분이 날아간다아~

[예? 영선이요?]

응?

고취되는 행복한 감정을 한껏 즐기오 있던 장시언은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지명에 고개를 돌렸다 제법 많이 마셨는지 그의 아버지가 얼굴이 벌게진 채 밤나무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그곳이라면 저도 아주 잘 알지요 시언이-아차차, 황후 마마꼐서 어릴 적에 그곳에서 아주 살다시피 하셨으니 말입니다 잡으로 몇 번이나 갔었는데 제가 가면 어찌 알았는지 귀신같이 알고 도망을 쳐서 번번이 허탕을 쳤습니다 으하하하하~!]

......, ......., ......., .....!!!!!

안 돼!!!!!!!!!

아버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장시언은 잠시 후 정확히 그 말이 이해되자 마자 처절하게 절규했다

으악! 아버지!!!!

그는 영선을 아냐는 진의 물음에 그런 곳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었다 그걸 묻는 진의 속내늘 알 수 없었기에 더욱이 당시엔 진의 관심에서 벗어날 궁리만 하던 터라 잘 안다고 하면 더 관심이 깊어질까봐 그냥 딱 잡아뗸 것이다

어쩐다지? 어쩐다지?

장시언은 떼로록 눈을 굴렸다 힐끔, 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함이었는제 안타깝게도 당사자와 딱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진이 미소를 짓는다

진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계속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닭살이 우수수 돋는다

큰일 났다 , 망했다 불쌍한 대 턱. 불쌍한 내 허리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곡을 스쳐 지나갔다

저,저기 그게 아니라....

그래, 그랬단 말이지?

눈빛 교환 평소와는 정반대로 이번엔 장시언이 전전긍긍 진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아니, 난 그게...

진의 미소가 더 짙어진다 삽시간에 장시언의 낯빛이 창백해진다 그는 진의 미소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읽어냈다

나 좀 보자 지금 당장

진은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시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보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채 눈만 깜박거렸다

[일어나라]

바로 앞까지 다가온 진이 손을 뻗는다 잡으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장시언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 손을 쳐다보기만 했다 인내심의 한계가 왔는지 진이 장시언의 팔을 잡아 일으킨다 곁에 있던 영한은 놀라 크게 눈을 떴다 연회를 즐기고 있는 다른 이들도 갑작스러운 황제 내외의 모습에 놀라긴 마찬가지엿다

장시언은 영한에게 네가 상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랬다

아우야! 그게 아니다! 이건 그냥.....악!

하지만 하고픈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억센 진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에서 나와야만 했다

아파, 아프다고!

[저,저기 진... 나 팔 아픈데...]

장시언의 말에 앞서가던 진이 뚝 걸음을 멈춘다 하지만 팔을 쥔 억센 힘은 여전히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은 몸을 돌려 장시언을 마주보았다

[영선을 몰라?]

[너지?]

장시언은 '뭐가?'하고 묻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시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진이 눈을 빛낸다 날카로운 눈빛이 이채롭다

[아무래도 우리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은데]

그, 글쎄... 그 할 말이라는 건 혹 몸의 대화부터 시작하는 거냐?

아하하하하, 장시언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더니 정말 그 말이 딱이구나.....

진은 다시 황후궁으로 성큼성큼 걸어갓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이끌려가는 장시언은 숨이 헐떡거렸다 긴장을 하고 있던 처라 더 그랬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좀 진정시켰을 떈 이미 황후궁 안이었다 진의 눈빛은 유난히 너 음욕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장시언은 한마디도 못하고 그대로 침상으로 내던져졌다

진은 이미 상의 탈의를 마친 상태였다

헉, 빠르다 손이 뭐가 이렇게 빨라?!

그가 몸을 겹쳐온다 장시언은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흑흑, 내 몸뚱아리야 오늘이 지나면 더 얼룩덜룩해지겠구나

[아읏!]

그리고 이어진 것은 장시언이 예상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장시언은 교성을 내질렀다 걱정대로 그의 머리를 감싼 채 목덜미에 입을 맞추던 진이 마치 육식수 처럼 그를 물어뜯은 것이다 아픔으로 인해 눈꼬리엔 이미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아픈데 좋았다 온몸이 짜르르 울리는 감각이 자극적이엇다 좀전까지 '그냥 말로 하지, 몸으로 하는 대화는 좀....'하며 거북해했던 것은 싹 잊혀졌다 장시언은 어쩔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아이고, 허리야

스르르 눈이 떠진다 사방이 밝았다 창밖을 바라보자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으음...]

어? 장시언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하긴 피곤할 만도 하지 그는 밤일을 마치고 하고 싶은 거나하며 빈둥거리는 장시언과는 달리 정무를 보느라 쉴 틈이 없었다

장시언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리고는 대 놓고 얼굴 구경을 했다 짙은 눈썹과 곧게 뻗은 콧날, 꽉 다문 입매 쓸데없이 잘생겨서 좀 짜증이 난다

[그래도 잠든 거 보니까 조금... 보다는 좀 많이 귀엽긴 하네]

장시언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워 있어도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어어?]

진이 그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며 확 끌어당겼다 단단한 가슴에 딱 달라붙어 눈을 깜박였다

뭐,뭐야? 깨어 있었어?

[잠시만 이렇게 있자]

깨어 있었네 목소리가 좀 잠겨 있긴 하지만 깨어 있던 게 분명하다

음흉한 밤나무.... 일부러 자는 척을 하며 내 손길을 느끼다니.... 근데 정말 미친 모양이다 그것도 귀엽게 느껴진다. 중증이다 중증

아... 그나저나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잠시만 더]

장시언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진은 다시 얘기햇다 감이 좋은 그는 장시언에게서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 나올 것을 짐작한 것이다

잠시만 더....

하지만, 해가 이미 중천... 뭐 상관없나

장시언은 결국 그의 뜻에 동참하기로 했다 거부하기엔 유혹이 너무나도 컸다 포근한 온기가 전신을 휘감으며 마치 기분 좋은 포만감처럼 행복이 가득 찼다 잠이 오지 않아도 그 느낌을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었다

이제껏 시간의 흐음에 몸을 맡긴채 심신 모두 평온하고 안락한 그런 삶을 추구해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유유자적 살아가는 것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예측 불허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다

황제가 냄색을 혐호한다기에 얼씨구나 황후가 되었다가 아닌 밤붕에 홍두깨라는 대참사를 당하였고 욕정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 발버둥쳤지만 헛수고였다

그뿐이던가 폐서인이 되려고 했다가 오히려 황제를 더 불타오르게 만들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아들이 생겼고 당혹스러워하던 처음과는 달리 아들을 아끼다 못해 팔불출이 되었다

점차 황제에 대한 정이 깊어졌으며 은애하는 감정을 알게 되고 그 때문에 평생 할리 없을 거라 여겼던 마음고생도 해보았다 한고비 넘겼다 싶으면 또 한고비가 오고 이제 다 끝났다 싶으면 또 뭔가 일이 빵터지고 당초 목적했던 삶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느 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아마 앞으로 그럴 테지

중요한 것은 틀어진 삶의 방향이 아니라 그 안에서 행복을 쥐었는가 하는 것

너른 품에 기대어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빛 보다 더 환한 그런 미소였다

장시언은 지금 이 순간 행복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다

그럼 된 거다

그래, 그럼 된 거였다

각시탈 황후 외전

윤상궁의 일기

{오늘 일은 죽을 때까지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 이 글도 쓰자마자 불에 태어버릴 생각이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죽기 직전 저승사자가 '네가 살면서 가장 놀란 적이 언제냐?' 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이라고....}

윤 상궁은 쓰던 글을 잠시 멈추고 붓을 내려두었다 가슴에 손을 얹자 두근거리는 심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 정말 이리 대답을 할 것 같다 맹세컨데 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

윤 상궁은 다시 붓을 쥐었다

{........처음엔 헛것을 본 거라 생각했다 궁에 있을 수 없는 분이 눈앞에 계시니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임을 자각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의 시작은 모두 제기 때문이었다 황자 전하께서 나가신 뒤, 황후 마마가 제기를 만드실 때부터.....}

[제기좀 만들어야겠어]

[제기요?]

갑작스러운 제기 타령에 윤 상궁은 반문했다

뜬금없이 뭔 제기?

[강희 황자가 글쎄 제기 차기를 한 번도 안해봤다지 뭐야 궁에 살면 원래 그런가?]

[글쎄요......]

궁에서 살아서기보다는 어울릴 이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궁녀들의 말로는 황자들 중 강희 황자가 인성이나 지성 면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어린아이란 무릇 잘난 아이에게 시기와 질투를 잘하는 법이니 일부러 어울려 주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시언은 애매한 윤 상궁의 대답을 나름대로 해석해 냈는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윤 상궁 엽전 좀 있어?]

[엽전이요?..... 엽전 좀 있어?]

[나 몇 푼만 줘]

장시언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세상에..... 엽전을 몇 푼 달라고 구걸하는 황후라니....

윤 상궁은 황당해 하며 툭 내뱉었다

[에이~ 윤 상궁 처럼 큰 벼룩이 어디있다고 이랴 그리고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제가 만드는 건데 나중에 돌려줄게

그래도 그냥은 못 주지

[이자까지 쳐서 주십시오]

[우와.... 독한 윤 상궁 ....그리 모아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필요 없으십니까?]

[알았어 이자까지 쳐서 갚을게]

장시언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윤 상궁은 그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래놓고 나중이 되면 자기가 불리할 때마다 '어, 이거 왜 이래 ? 계속 이러면 이자 안준다?'하고 귀여운 협박을 할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사실 받을 마음도 없었다 가벼운 농이었고 그것을 장시언도 알고 있을 터였다

[여기 있습니다]

윤 상궁은 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장시언은 으흐흐... 하고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묵직한 것이 제법 많이 들어있는 듯했다

[그럼 만들어 볼까나~]

장시언은 엽전 서너 개를 한지로 감싸며 제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한 제기를 보며 자화자찬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다 되었으니 엽전을 돌려줄줄 알았는데 이미 제기 만들기에 흠뻑 빠진 상전은 주머니에 엽전이 다 떨어질때까지 제기를 만들어댔다

만드는 동안 온갖 방정을 다 떨면서 말이다

[이 많은 제기를 어디에 쓰시게요?]

[어디에 쓰긴 다 차면 되지]

[평생 제기만 차실 생각이신가 보군요]

윤 상궁의 말에 장시언이 '뭐?'하다 '푸핫'웃음을 터뜨렸다 남다른 웃음보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다

[평생 제기만 찬대~ 그게 뭐야! 으하하하하~!]

아주 넘어간다 넘어가

[말도 안하고 평생 제기만 차.... 악! 크크크큭-]

이젠 더 나아가 상상의 나래까지 펼치며 웃어댄다

윤 상궁은 바들바들 떨며 한 손으로는 배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탕탕탕- 책상을 두드리고 있는 상전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은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이 봤다 이럴 때는 그냥 놔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에휴... 차나 마시자

윤 상궁은 차를 따라 호로록-한 모금을 마셨다 웃음을 가라앉는데 평소보다 더 오래 걸렸다 웃음을 멈춘 상전은 과할 정도로 웃었는지 얼굴이 많이 지쳐보였다 제 볼을 쭉쭉 당긴다

[아...., 볼 아파]

[배는 안 아프십니까? 책상 쳐댄 손도 아프실 것 같은데요?]

[많이 아프십니까? 책상 펴댄 손도 아프실 것 같은데요]

[배? 배는 조금 당기는데 손은...... 어, 아파]

그럴 줄알았다 그렇게 세게 쳐대더니

[많이 아프십니까? 태의를 부를까요?]

[됐어 태의는 무슨]

상전에게 태의는 곧 돌팔이었다 장시언의 말을 빌리자면 대참사의 그날 이루부터

[흠, 잘 만들어졌나 시험이나 한번 해볼까~~]

장시언은 의자에서 일어나 가구들을 밀어 다 벽에 붙여놓았다 그리고는 길게 늘어진 치맛단을 들어 올려 옆으로 묶었다 흰 다리가 훤희 들어난다 심히 망측한 모습이었다

[마마 꼭 그걸 그렇게 묶고 하셔야 합니까?]

그 말에 장시언이 훗, 하고 웃으며 먼 곳을 바라본다

[명궁은 바람을 탓하지 않는 법이지 하지만 헐랭이의 제왕은 달라]

....뭔 소린지 도통 모르겠다

윤 상궁은 어이 없다는 눈으로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장시언은 그런 윤 상궁의 눈빛을 담담히 받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윤 상궁은 몰라 냉혹한 제기차기의 세계를]

알고 싶지도 않다

장시언은 그렇게만 말하고 공중으로 휙 제기를 띄웠다 제기가 정확하게 발안쪽으로 내려오자 어렵지 않게 차올린다 그러기를 몇 번

[오~ 왕년 실력 좀 나오는데!]

[......]

[윤 상궁, 어때? 보고 있어?]

[.....예, 아주 잘 보고 있습니다]

[내 발이 보여? 보이냐고! 캬하하하하~]

엄청 신났다

[빨라서 안 보이네요 -주전부리 좀 챙겨오겠습니다, 마마]

[어? 그럴래?]

장시언은 제기에 집중하느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윤 상궁은 아이고, 하고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아마 저 성격은 평생이 가도...... 응? 문을 열었는데 웬 벽이......,

[--------!!!]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윤 상궁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냉기가 흐르며 머리털이 쭈뼛 서고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

여, 여기 어떻게......

심장이 내려앉고 말이 나오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이는 순행을 나간 황제였다 내일 돌아오시기로 되어 있는 바로 그 황제

황제는 '쉿'하고 말하는 것처럼 손으로 침묵을 종용했다

[오오~ 감 잡았어!----- 윤 상궁! 이것 좀 보고 가! 헐랭이, 헐랭이~! 우하하하~~!]

뒤에서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황제는 웃었다 뭔가 즐거운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보인다 윤 상궁은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문이 닫혔다

[윤 상궁! 와서 헐랭이 좀 보라니까? 이건 제왕의 귀환이야!!]

헛것을 보았나?

[.......]

윤 상궁은 다시 확-문을 열었다 ....... 없다 아무도 없다

[윤 상궁! 갔어? 간 거야?]

[...... 아, 아닙니다 여기 있습니다 ]

헛것을 본 건지도 모른다 헛것을......

'쉿'

들리지 않은 그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뒤에서 상전이 부르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지만 윤 상궁은 한동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윤 상궁은 안의 등불을 모두 끄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자신도 처소로 돌아가 봐야 한다

아까 본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역시 헛것이었나?

여전히 현실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한숨이 나온다

[윤 상궁]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윤 상궁은 고개를 들었다

[사, 상선 어르신, 예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따라오게]

상선은 말을 아끼며 앞장을 섰다 그를 따르며 윤 상궁은 알게 되었다 아까 본 것이 헛것이 아니었음을.

[어린 시절부터 시언이를 돌봤다고?]

시언이...... 굉장히 친밀한 호칭이다. 윤 상궁은 머리를 더 아래로 조아렸다.

[예, 폐하]

[짐이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

윤 상궁은 눈을 질끈 감았다 큰일 났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짐은 참을성이 많지 않다 기다려주는 것을 싫어하지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말하라]

그럴 리가 없는데 목소리가 칼날이 되어 목에 대 진 것 같다

[그, 그것이 황후 마마께서오서는...]

[본디 저런 성격이냐?]

'저런 성격'

눈으로 본 대로, 라는 말이 생략이 되어 있다 그리고 아주 많은 것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활동적이며 쾌할한 성격, 나쁘게 말하면.... 시쓰럽고 방정맞은 성격.

[......예]

[흠, 그래...?]

[......]

[왜 숨긴 거지?]

댁의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 청승맞고 가련한 여인을 싫어한다기에 그리 한 것일 뿐.

[......, ..... 조용히 살아야 후궁들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셔서 그러신 줄로 압니다 밝으신 분이 어릴 적부터 워낙 몸이 약하고 마음이 여리시어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황제에 눈에 쓰인 콩깍지에 모든 것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 마마, 하지만 이게 저와 마마 둘 다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그래, 그렇긴 하지]

아주 좋았다. 솔직히 속으로. 그걸 믿다니!! 하고 경악할 정도였다

감이 좋으신 것은 분명한다, 정인에 대해서는 약간 엉성하신 것 같다 근데 생각해보면 자신의 상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머리도 잘 돌아가고 눈치도 빠른 분이 유독 폐하에 대해서는 둔하기 그지 없었다 은근 천생연분인지도.....

[.......한다]

[예?]

윤 상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미처 황제의 말을 듣지 못했다 불경도 이런 불경이 없었다 하지만 , 다행히 황제는 다시 한 번 마을 했다

[오늘 일을 시언이가 몰라야 한다고 했다]

윤 상궁은 순간 당황했다

모르게 하라니...... 장시언과 자신은 서로 비밀이 없는 사이였다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는 그런 사이

[폐하...., 그, 그것은......]

[이만 가보도록 해라]

황제는 못 한다는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가 끝을 맺은 이상, 윤 상궁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예를 취하고 나오는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몸이 건강한 것은 물론이요, 남의 말이나 시선을 신경도 쓰지 않는 천하태평이라는 것은 비밀로 지켜냈지만 성격은 대충 알아버리셨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마마께선 그것도 모르고 온갖 내숭을 다 떠실 텐데...... 폐하께선 왜 비밀로 ㅎ라고 하시는지.....

[윤 상궁]

[예....예?!]

이 목소리는!

윤 상궁은 놀라 굳어버렸다 진정해라 진정해라......

[윤 상궁? 윤 상궁?....]

[... 이 이른 시간에 왜 나와 계십니까?]

[.....,..... 그냥 깼어]

[그러셨군요]

[윤 상궁은 어딜 다녀오는 길이야?]

'오늘 일은 시언이가 몰라야 한다'

[......, .....그냥 산보를 좀 다녀왔습니다]

그 말에 상전이 뭔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윤 상궁은 잠시 놀라 움찔 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표정을 숨겼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그녀의 상전은 그런가 보다 하고 걷다가 다시 한 번 홱- 돌아보며 그녀을 살폈다 하지만 역시 나이는 헛먹는 것이 아니라고, 숨기려고 작정한 그녀를 간파하지는 못했다

그 후로도 몇 번 위기가 찾아고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넘어갔다

{........... 일이 그리된 것이다 덕분에 이제 앞으로도 묵묵히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야 한다 폐하의 명이기도 했지만, 괜히 입을 놀렸다간 황후 마마께 배신자 취급을 당하며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묻어두자.

잊어버리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윤 상궁은 붓을 내려두었다 글로라도 쓰니 불안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이나마 가라앉은 듯했다

그래, 이 사실은 자신의 상전이 안다면 배신자라고 난리를 치며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일을 꾸밀 것이 분명하다 성격상 그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

윤 상궁은 종이를 들어 한 번 훑어보고 촛불 가까이로 가져갔다 끝부터 타들어간 종이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녀는 재를 한데 모아 창가로 다가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재가 바람을 타고 암흑 속으로 사라져간다

[......]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모르는 일이다......

윤 상궁은 한참을 그렇게 되새기고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한 손. 재는 이미 그녀의 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 나는 모르는 일이야

........ 무슨 일이 있었나?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잊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창을 닫고 호롱불을 껐다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해야 했다

각시탈 황후 외전

- 율목연가(栗木戀歌)

"통촉하여 주십시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연일 계속되는 주청으로 편전便殿은 조용해질 틈이 없었다. 영의정인 장인욱을 필두로 하여 조정 대신들은 질리지도 않고 머리를 조아렸다. 통촉. 통촉. 통촉. 진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 그를 이렇게까지 만들다니, 역시 장인욱은 보통내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뛰어난, 영의정으로서 어디 하나 부족한 구석이 없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알아주는 충신. -그랬기에 이제까지 참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폐하, 국모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수는 없습니다. 신국의 오랜 전통을 지키시옵소서."

"……."

신국의 오랜 전통. 사내를 황후로 들여야 한다는 바로 그 빌어먹을 전통.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안다. 악습이 아니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는 이 전통만큼은 지키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이 신국을 위해 필요한 전통임을 알지만 사내라면 정말이지 치가 떨렸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선先황제 때에도 황후의 자리는 전통대로 사내의 것이었다. 자신을 낳다 돌아가신 친모를 대신하여 그는 사내인 황후를 어머니로 모셨ㄷ. 그분이 진이 10살 때 돌아가신 은수 황후셨다. 선황제와 애틋한 관계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은수 황후는 자애롭고 인자한 분이셨고 모후로 모시기에 손색이 없는 분이셨다. 그랬기에 진은 사내를 황후로 들이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15살에 처음 궁을 떠나던 그 때까진.

"국'모'의 자리를 사내에게 허락한다는 것은 어딘가 어폐가 있지 않나?"

장인욱은 숨간 멈칫했으나 담담하게 아뢰었다.

"사내라도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폐하께서도 잘 아시리라 사료되옵니다."

진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장인욱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은수 황후를 어머니라 여기지 않느냐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이다.

"폐하, 소신은……."

"그대가 권력을 탐하여 일을 벌이는 인사가 아니라는 것은 짐 역시 잘 알고 있다."

진이 장인욱의 말을 끊으며 넌지시 말하자 장인욱은 뚝 입을 다물었다. 진은 '더욱이-' 하며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것이 다른 것도 아닌 황후의 자리. 권력을 얻기엔 터무니없는 자리지. 사내를 황후로 들이는 것을 짐이 꺼린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터. 그랬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아들을 황후로 들여 달라고 청하지 않았다. 제 아들이 황후가 되면, 그와 자신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 모르지 않을 테니 말도 꺼내지 않은 것일 테지. 하지만-."

진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장인욱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 눈매가 날카롭다. 장인욱은 계속 입을 다문 채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대는 유일하게 자신의 아들을 황후로 들여 달여 달라 청을 했다. 그것도 아주 갑작스럽게.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런 것 없사옵니다. 소신은 다만 국모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는 것은 신국을 위해 좋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을 뿐……."

"아무리 신국을 위한 일이라고 하나 아들을 그 자리에 보내려고 하다니, 그대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없는 모양이군."

진의 단정적인 말에 장인욱은 그런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성려를 거두어 주옵소서.' 하고 대답을 했다. 진지한 목소리가 진실을 담고 있었다. 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다라……?

"허면, 그대의 아들이 짐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거라 자신하는 것인가?"

"………."

이번엔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런 물음을 받을 거라곤 생각을 못한 건지, 아니면 정곡을 찔려 말을 못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만약 후자라면, 이건 실소 정도가 아니라 박장대소를 해도 모자를 일이다.

"정말 그런 것이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허면?"

"저는 단지 그 아이가 폐하께서 원하시는 황후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시, 심약하고 조용한 아이입니다. 아마 황후가 된다면, 황후궁에서 조용히 살아갈 것입니다. 폐하의 눈에 띄지 않고 심기도 거스르지 않으며 말입니다."

"………."

"사내를 황후로 들이는 것은 후궁들의 투기를 잠재우고, 후사를 통해 외척세력이 커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신국의 오랜 전통입니다. 소신, 아들을 아끼고 사랑하긴 하나 신국의 신하로서 이 전통을 깨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장인욱의 말에 조정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자신의 아들이 그 자리에 앉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진은 그런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장인욱의 말에 반문했다.

"심약하고 조용하다? 짐이 그대의 아들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잊었나?"

"……….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진은 그때 보았던 아이의 인상을 되짚었다. 오래전이라고 하나, 그 아이가 심약하고 조용해 보이지 않았던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그때 그 아이가 장남이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마, 맞사옵니다, 폐하."

"황후로 들이겠다고 한 것도 그대의 장남이고."

"예……."

"지금 짐을 우롱하는 것이냐? 그게 어딜 봐서-!"

"세,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예전과는 전혀 다릅니다. 정말입니다, 폐하."

장인욱이 제발 믿어달라는 듯 얘기했다. 하지만 진은 그 말을 쉬이 쉬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난다. 그의 장남은 장인욱과 판박이였다.

얼굴을 순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직한 곰을 연상시키는 외모. 그 어린 나이에도 그게 얼굴에 보였다.

"되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거라."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직접 봐주십시오. 그러면 소신이 거짓을 아뢴 것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폐하께서 정녕 신국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을 생각이시면 제 아들을 한 번 보시고 결정을 해주십시오.:

장인욱의 간청에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하나 그 인상이 어딜 가겠나. 게다가 기억 속 아이의 모습은 심약이나 조용과는 거리가 말었다.

튼실함 그 자체. 울어도 아주 우렁차게 울 듯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또다시 시작되는 주청.

그 역시 언제까지 황후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 알았다. 그대의 아들을 한 번 보도록 하지. 말한 것처럼 황후의 자리를 언제까지 비워둘 수는 없는 법이니까."

"폐하, 성은이 망극-"

"허나, 아직 황후로 들이겠다고 한 것은 아니니, 헛된 기대는 갖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나이다."

장인욱이 머리를 조아리며 뜻을 받든다. 진은 이 지겨운 상황을 이만 끝내고 싶었다. 완전히 끝을 내려면 하루빨리 황후를 들여야 하지만 일단 편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만 다들 물러가라. 영의정 장인욱은 보름 뒤에 아들과 함께 입궁을 하도록."

"소신 장인욱, 명 받듭니다."

진은 그대로 일어나 편전을 나섰다. 나서자마자 보름 뒤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장인욱의 말대로 그는 심약하고 조용한, 그의 신경을 거스리지 않는 그런 이를 황후로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 속에 있는 장인욱의 아들은 그런 것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다.

입매가 비틀린다. 뒤따라오는 상선은 그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보자마자 퇴짜를 놓아주마 진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는 말이다.

* * *

하얀 천으로 반쯤 가린 얼굴. 유독 눈꼬리가 긴 눈매.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한다.

쿵.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설렘이라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그 생소한 감정이 가슴 속에 싹을 피운다.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움. 말랑함. 그리고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얇은 천의 감촉이 느껴진다. 좋은 향기가 코끝을 감도는 것만 같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헤매 돌던 손이 조심스럽게 아이의 어깨로 다가간다. 그 순간-.

퍽-!

'무슨 짓이야! 이 변태!!'

둔탁한 소리가 광 안을 메운다. 생각지도 못한 폭언에 얻어맞은 아픔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쳤어?!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아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삿대질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북북 입술을 문댔다.

'읏, 기분 나빠. 더러워! ……나, 나쁜놈! 변태! 변태놈!!'

순간 울컥하는 불쾌감. 풋내 나는 그 감정을 거부당했다는 수치스러움. 그리고-

'나, 나도 사내란 말이야!!! 너, 남자 좋아해?!!'

형언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

'으악-! 저리 가, 이 변태놈아!!!!!'

곧이어 날아오는 주먹.

"――헉."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사나운 꿈자리에 눈을 끈 진은 눈을 뜨자마자 들어오는 원비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원비가 왜 여기에? 그는 지난밤 그의 침전寢殿에서 홀로 잠을 청했다.

"여긴 어인 일이지?"

"소첩. 폐하께오서 이곳에 홀로 머문다고 하시어 이부자리를 데워드리려……."

원비가 교태 어린 눈빛을 보내며 그의 가슴을 매만진다. 순식간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발을 들이는 것이냐?"

"예?"

"누구의 허락을 받고 짐의 침전에 들었냐는 말이다."

"폐하…, 소첩은 그, 그것이……."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현비의 처소로 들어야 하는 날이다. 네가 그것을 모른다 하지 않겠지?"

"………."

원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는 황제가 현비에게 걸음을 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왔다. 비들 가운데 아이를 갖지 못한 이는 자신이 유일했으니까.

"소첩은 그저……."

"듣기 싫다. 물러가라."

진은 냉정하게 그녀를 쳐냈다. 그녀가 왜 이곳에 찾아온 건지 그 역시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더 거부감이 들었다. 원비는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밑 빠진 독처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런 류의 인간. 궁내에선 원비가 진의 이상형에 가장 가깝다는 소리가 적지 않게 들려왔지만, 사실 진은 후궁들 가운데-후궁들 중 그의 마음을 차지한 이는 단 형도 없었지만-원비를 가장 싫어했다.

원비는 노골적인 목적으로 그녀의 아비인 윤필주에 의해 입궁을 하게 되었다. 처음 보았던 때를 기억한다. 진은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채 그녀를 만났고, 그녀는 진을 보자마자 한 겹씩 옷을 벗으며 다가왔다. 풍만한 몸매에 꽤나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그는 대차고 도도한 여인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너무나도 뻔히 들여다보이는 수에 비소誹笑를 흘렸다.

진은 그녀를 안았다. 윤필주는 제 딸이 갈고 닦은 색공술로 드디어 황제를 틀어쥐었다고, 진이 그녀의 유혹에 완벽하게 넘어갔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진은 일부러 그 천박한 수에 걸려준 것이었다. 그녀를 윤필주의 목줄을 틀어쥐기 위한 볼모로 삼기 위해서. 그녀는 추하리만치 욕심이 많았지만 그 욕심을 다 채울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은 여인은 아니었다. 바로 앞만 생각하고 후의 일은 생각지 못하는 단순한 여인. 진은 그녀가 윤필주의 목을 잘라낼 미끼가 되어줄 거라 확신했다.

윤필주는 진을 죽이려 했던 경운 황자를 모셨던 이였다. 경운 황자가 역모를 일으켰을 당시 유배를 가있었기 때문에 그는 실제 역모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운이 좋았던 거라 하 수 있다. 그 덕에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 후에 그는 뒤에서 당파의 갈등만을 조정하는, 신국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 되어 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명분 없는 살육을 하지 않는 진에게 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저 썩은 나뭇가지를 무슨 수로 잘라낼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그는 다시 정계로 돌아오고 싶다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그가 낼 수 있는 최악의 수를 내놓았다. 어리석은 여식을 진에게 보낸 것이다.

진은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물러가려 하지 않는 원비를 지겹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쉬이 포기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러가라. 짐의 말이 들리자 않나?"

"……소첩, 폐하의 심기를 불편케 해드린 점 사죄드립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원비는 예를 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은 당황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리 박대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진은 그녀가 나가자마자 상선을 불렀다. 상선이 허리를 숙이고 침전으로 들어왔다.

"다음부턴 내 허락 없인 그 누구도 침전으로 들이지 마라, 알겠느냐?"

성선이 그녀를 말렸으리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더 확실히 하라는 명이었다. 갖은 패악을 떨더라도 절대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상선은 그 말뜻을 알아듣고 허리를 더 깊이 숙였다.

"명심하겠나이다."

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른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것을 꿈으로 꾸니 기분이 더러웠다. 더욱이 잠에서 깨자마자 원비를 보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폐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니다."

"잠이 안 오시면, 차를 들이라 할까요?"

걱정스러운 기색이 묻어나는 상선의 목소리에 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게 좋겠군."

"바로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상선은 예를 취하고 종종걸음으로 물러갔다. 혼자 남은 공간에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

'미쳤어?!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읏, 기분 나빠. 더러워! ……나, 나쁜놈! 변태! 변태놈!!!'

'나, 나도 사내란 말이야!!! 너 남자 좋아해?!!'

'저리 가, 이 변태놈아!!!!!'

그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꾸는 꿈.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날의 일.

자신을 사내라고 밝힌 아이는 입고 있던 치마를 들어 올리고 속곳을 벗어 달랑거리는 고추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그것을 보자마자 돌처럼 굳어졌다. 여자아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아이가 사내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경악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이 변태!' '변태!' 하고 게속 귓가에 울리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처음 가져본 순수한 연정을 변태라는 한 마디로 매도당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를 가장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이가 사내라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변태 취급을 당했음에도, 그럼에도! ――――미련을 못 버리고 도망가려던 아이의 손을 잡아 이름을 물어본 것이다.

장돌쇠. 아이는 그렇게 제 이름을 밝히고 홱 팔을 뿌리치더니 후다닥 어디론가 뛰어갔다. 순식간에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역모를 일으킨 자들을 모두 숙청하고 모든 일이 일단락된 후에, 참고 참다가 결국 장돌쇠라는 아이를 찾으라 명을 내렸다. 그러나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 장돌쇠란 장돌쇠는 죄다 찾으라고 명을 내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하다못해 '장'을 잘못 들었나 싶어 정, 강, 차 등등등… 돌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모조리 찾았는데, 그럼에도 아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가 다른 이름을 알려주었다는 것을. 자신이 아이에게 조롱당했다는 것을.

그렇게 결론이 나자,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웠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사내아이를 마음에 담고 진정을 주었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안고 살아야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상당히 여파가 컸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내를 질색하고, 남색을 혐오하게 된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린 시절 겪은 그 일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듯했다.

진은 다시금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젠 흐려질 대로 흐려진 그 일을 꿈으로 꾸다니, 이게 다 제 아들을 황후로 맞이해 달라는 장인욱의 주청 때문이다.

사내 황후. 보름 뒤면 그의 아들을 대면한다. 황후로 낙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진의 손에 달렸다.

"………."

진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냥 허락할까.

신국의 전통을 언제까지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이젠 황후 책봉으로 골머리를 썩는 것도 귀찮았다. 장인욱의 말대로 그의 아들이 심약하고 조용하다면, 진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신하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장인욱의 아들이라면 황후로 삼기 나쁘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곰같이 생긴 것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어차피 품에 안고 살 것도 아닌데 생긴 게 무에 그리 큰 대수란 말인가.

편전을 나서며 당장 퇴짜를 놓을 거라 다짐했던 그의 결심은 어차피 들여야 한다면 가장 믿을 수 있는 이의―최측근의―아들을 들이자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그는 날이 밝으면 조정 대신들을 모아 영의정 장인욱의 장남을 황후로 들인다는 것을 공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일말의 관심도, 기대도 없었기에 쉬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장인욱의 아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사내를 황후로 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15살 이후로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이 없었던 그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슴이 뛰는 그런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본능적인 성욕을 잠재우기 위해 숱한 여인과 몸을 섞었지만, 그것은 단지 찰나의 육체적 쾌락을 좇은 것일 뿐. 외면하려 해도 언제나 허무함이 찾아왔다.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신은 지존으로서 모든 것을 다 얻었지만, 누군가를 바라는 애틋한 연심을 잃어버렸다. 처음 가져보았던 연심이 씁쓸하게 마무리 지어진 후부터.

죽기 전에 과연 그때의 그 마음을 다시 가질 수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거도 바라지 않은 채 그저 함께 하고 싶은, 심장 뛰도록 좋았던 그 순수한 마음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게 되는군."

진은 작게 혼잣말을 하며 헛웃음을 내쉬었다. 회의적이고 자조적인 웃음. 밤이 야심하여 헛된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며 그는 생각을 접었다.

* * *

보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장인욱의 아들을 황후로 낙점하고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기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장인욱이 데려온 그의 아들은 편전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고개를 숙인 채 마주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진은 그 모습을 마뜩잖은 눈으로 바로보았다. 사실 처음엔 그를 보자마자 짐짓 놀랐다. 그가 마치 잡아먹히기 직전의 토끼처럼 바들거려서가 아니라 몸이 너무나도 호리호리했기 때문이었다. 사내에게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가녀리다. 그 표현이 딱 이었다. 과거의 잔상으로 남아있는 그 튼실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얼굴 생김새가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릴 때에는 장인욱을 정말 빼다 박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과연 부자父子관계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정녕 그대의 아들이 맞나?' 하는 눈으로 장인욱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렇다는 눈빛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떨고 있던 사내가 더 깊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희고 가느다란 목이 눈에 들어온다.

"소인 장시언,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들릴 듯 말 듯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고개를 들라."

"………."

장시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심약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들라."

그는 주춤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차마 진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뜬 채로.

그가 고개를 든 순간 진은 목이 타는 갈증을 느꼈다. 처연한 듯, 어찌 보면 요염한 듯 보이는 긴 눈매. 흰 피부에 약간의 혈색이 감도는 입술.

"짐을 보라."

"………."

"짐을 보라 했다."

초조함이 느껴진다. 아래를 향해 있던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온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가슴에서 쿵, 하는 울림이 들린 것만 같았다.

생경하면서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감각. 진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 * *

성대하게 국혼國婚을 치르고, 황후궁으로 가야할 황제가 도통 걸음 할 생각을 하지 않자 상선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폐하, 이제 황후궁으로 납시셔야 하옵니다."

오늘은 초야. 후궁도 아니고, 황후와의 초야다. 아무리 사내를 황후로 들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이리 황후를 박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정무를 모두 마치셨으니 황후궁으로…."

"그만."

진은 상선의 말을 제지했다. 그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복잡하게 꼬여 있는 감정의 잔대, 그 혼란스러움을 잠재울 시간이.

"상선."

"예, 폐하."

"예전에 짐이 찾으라 했던 장돌쇠라는 아이를 기억하나?"

예상치 못한 물음에 상선은 잠시 장돌쇠……, 하고 생각을 하다가 '기억합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아이를 찾기 위해 갖은 수소문을 한 것이 그이니 아는 것이 당연할 터다. 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상선은 진이 무슨 말을 할지 계속 기다렸지만, 기다림의 끝은 침묵뿐이었다. 진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머릿속엔 오직 그 아이, 장시언, 그리고 지금 이 감정의 정체에 대한 물음들만이 존재했다.

계속되는 정적.

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허리를 굽히고 있던 상선이 고개를 든다.

"――황후궁으로 간다."

상선은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 나왔음에도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마치 정적 사이를 가르는 바람처럼 귀를 스쳐 지나갔다.

진은 미동도 없는 상선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상선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뒤따랐다.

동뢰연同牢宴을 치르는 동안 장시언은 단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여염집 규수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더욱이 사내가 아닌가. 후궁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런 반응을 보인 이는 없었다. 합환주를 미사면서도 한 모금을 마시고 쓴지 얼굴을 찡그리는데 정말 가지가지 한다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은 계속해서 그를 눈으로 쫓았다. 보자마자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기가 부지기수였지만 눈은 또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를 향했다. 은연중에 계속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세차게 뛰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평소보다 빠른 박동이었다. 누굴 보고 가슴이 뛰다니, 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처럼 가슴을 간질이는 순수한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슴은 뛰었지만, 진은 그것을 거북하다 느끼고 있었다. 불쾌하기도 했다. 그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그건 사내를 보고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한 번 데였던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오늘은 초야니까. 그러니까 걸음을 하는 거다. 오늘 딱 하루만 머물 것이다. 오늘 딱 하루만!

진은 황후궁으로 걸음을 하며 계속 속으로 되뇌었다. 흐르는 마음을 차단하며 그렇게 자신을 정당화시켰다.

멀리 보이는 황후궁엔 역시나 불이 켜져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빛을 응시하다가 발을 떼었다. 그 순간,

"형님~! 혀~엉님임~~!!"

뜬금없는 형님 소리에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저건 또 뭐란 말인가.

곰 같은 놈이 황후궁 앞에서 휘청거리고 있었다.

"………."

그래, 기억난다, 저놈이 누구인지……. 장시언의 아우였다. 이름이 장영한이라고 하였던가.

장영한은 술을 어지간이 많이 마셨는지 다리가 풀려 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장시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시언을 본 진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진다. 미친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내라고 하나 황후다. 황제인 자신의 내자다. 헌데, 저런 나풀거리는 차림으로 밖을 나오다니!

장영한은 장시언을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 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머리로 확 열이 올랐다.

"형님~ 형니임~~"

형을 못 봐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진은 대체 언제까지 저 짓거리를 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뒤에서 그의 불편한 심기를 감지한 상선과 궁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해했다.

장연한에게 안긴 채로 장시언이 난감해하는 것이 보였다. 진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알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그때, 마침 장영한이 스르륵- 바닥으로 쓰러졌다. 장시언은 아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놓쳐버렸다. 만면 가득 걱정스러운 기색이 서린다. 그 얼굴을 보자 진의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장시언은 그가 와 있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혹여 아우가 잘못되었을까 걱정을 했다.

"윤 상궁, 영한이가 술을 많이 마신 듯한데, 데리고 가 좀 살피게."

"알겠사옵니다, 마마."

윤 상궁과 궁녀 몇 명이 장영한을 데리고 가고 장시언은 자리에서 그것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황후궁 안으로 들어갔다. 장시언이 흘리고 간 한숨은 마치 장영한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진은 더 꽉 주먹을 움켜쥐며 발을 움직였다.

황후궁 안으로 들어가자 은은한 불빛을 받고 있는 장시언이 눈에 들어왔다. 장시언은 그를 보자마자 깊게 예를 취했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든다. 하지만 여전히 진을 마주보지는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을 보며 진은 눈을 치켜떴다.

술주정뱅이 아우는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감히 내 눈을 피해?

그는 순간 울컥해 대뜸 말을 내뱉었다.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초야라고 하여 설마 나보고 널 품어 달라 하지는 않겠지?"

장시언은 흠칫하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얼굴이 그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애처로운 얼굴은 더 상처주고 싶다는 가학성을 부추겼다. 순각적으로 머릿속에 장영한과 장시언이 붙어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미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말이 나갔다.

"나는 네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다. 남자 황후라니. 내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널 품어야 한단 말이냐? 하다못해 네가 미동이었다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은 장시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러다 딱 장시언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숨이 막힌 듯 말이 나오질 않았다. 진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멀대 같이 큰 키 하며, 삐쩍 마른 볼품없는 몸뚱이를 보니 그럴 생각조차 싹 가신다. 비루해도 어찌 이리 비루할 수 있단 말이냐? 게다가 얼굴까지 박색이라니."

장시언은 울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뚝뚝 눈물을 흘렸다. 직접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빌어먹을.

진은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자신의 마음을 가늠하지 못하고 혀를 찼다. 왜 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인가. 그는 장시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뒤돌아 나와 버렸다. 제 마음에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된다. 또 사내를 가슴에 담다니. 그런 것일 리가 없다. 게다가 장시언은 평소 그가 싫어하는 모든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지 않나. 청승맞고 답답한 그런 인간. 하물며 여인 아닌 사내가!

황후와의 초야를 위해 들어갔던 황제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나오자 궁인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질 못했다.

진은 그대로 그의 개인 침전으로 향했다.

* * *

장시언을 철저히 무시하며 지낸 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다. 가끔 심장이 무언가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진은 그것을 착각으로 치부하며 무시했다.

장인욱의 말대로, 장시언은 정말이지 심약하고 조용한 사내였다. 그는 진의 노골적인 냉대를 눈물로 감내함은 물론이고, 합궁일임에도 황후궁에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던 날이 부지기수였지만 티끌의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날,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는 소식이 드문드문 들려올 뿐이었다. 연회 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레 황후라면 당연히 황제의 곁에 앉아야 하는 것이 옳은데, 그는 후궁들보다 더 멀리 떨어져 앉았다. 진이 명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자연히 그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불평 한마디 말하지 않았다. 한 번쯤 심한 처사라거나 마음이 아프다거나 앓는 소리를 할 법도 한데 미련할 정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끝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다였다. 보면 차를 마시거나 무언가를 조금씩 오목오목 먹고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불편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폐하."

상선이 생각에 잠겨 있는 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진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왜 그러나?"

"그 얘기 들으셨사옵니까?"

"얘기?"

상선이 말하는 '그 얘기' 가 무언지 감조차 잡히질 않는다.

상선은 '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듣기론, 황후 마마께서 폐하께 매일 밤 연서를 쓰신다 합니다."

"………뭐라?"

진은 방금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상선은 바로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연서 말입니다. 황후 마마께서 매일 밤 폐하께 드리는 마음을 글로 쓰신다고 합니다. 황후궁의 궁녀들은 그것을 알고 매일 밤 눈물을 흘린다 하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진이 '뭐?' 하며 어이없어했다.

"그것들이 왜 눈물을 흘린단 말이냐?"

"황후 마마께서 드리지도 못할 연서를 매일 밤 쓰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런 것이랍니다. 황후궁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들었습니다."

"………."

연서를 썼으면 줄 것이지 왜 못 준단 말인가. 쓰고 저 혼자 보관할 거면 쓰질 말던가…….

문득 스친 생각에 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연서를 썼든 안 썼든, 혼자 가지고 있든 주었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빌어먹을.

"쓸데없는 소릴 하는 걸 보니 오늘이 황후와의 합궁일인가 보군."

"………, 그렇습니다, 폐하."

그러고 보니 한참을 안 가긴 했었다. 갈 때마다 매번 얼굴만 보고 발을 돌렸고……….

"날이 저물면 갈 것이니 그리 알아 두게."

상선은 안심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궁에 미리 연통을 넣어두겠습니다."

진은 상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여상한 목소리로 '편전에 들러야 하지 않나?' 하고 물었다. 상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정 대신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편전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한 길은 편전까지 곧장 이어져 있고, 나머지 한 길은 정원을 꾸며 여유롭게 거닐기 좋았다. 진은 항상 곧장 이어진 길로 다녔다. 그는 경치를 즐기는 취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빠른 길을 두고 돌아가는 것은 그의 입장에선 어리석은 짓이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진이 걸음을 멈추자 뒤따르던 수많은 궁인들이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왜 그러시나? 하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진은 발을 떼었다. 평소 그가 다니던 길이 아닌 정원 쪽이었다. 궁인들은 순간 당황하여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저곳으로 가면 마주치실 것 아닌가.

그러게나 말일세.

그들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황제의 뒤를 따랐다.

진은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오늘은 그냥 이 길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한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정도 걸었을 때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장시언이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입가에 미미하게 미소를 단다.

쿵.

또다. 또 가슴이 뛴다. ………하, 미친 것이 아닌가. 벌써 반년이다. 그런데도 이렇다니. 무슨 말만 하면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는 심약하고 비루한 사내다. 그런 사내를 보고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 높은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깔깔거리기 바쁜 그녀들은 후궁들이었다. 진의 정략혼인 상대들로 언젠가 그 자리에서 다 내려오게 될 여인들.

후궁들은 뻔히 눈앞에 황후가 있음에도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빳빳이 고개를 세우고 스쳐 지나갔다. 누구 한 명 예를 취하는 이가 없었다. 후궁들을 보는 진의 눈빛이 매서워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황후를 홀대한다 하여 저것들도 그리 대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장시언은 그녀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애처롭게 흐르는 한 줄기 눈물. 그 눈물을 누가 볼 새라 급히 닦아낸다. 진의 미간에 금이 간다. 입맛이 썼다. 가슴이 지끈거렸다.

"폐하, 편전으로 드셔야 하옵니다."

상선의 목소리와 함께 그가 진을 바라보았다. 놀란 듯 눈이 커진다. 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체할 것 없이 편전으로 걸어갔다. 서글픈 시선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진은 황후궁에 가지 않았다. 상선이 몇 번이나 그의 의중을 물어왔지만 그를 물리고 혼자 있었다. 자신이 제 마음 편하고자 그를 멀리하고, 홀대한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았는지 눈앞에서 똑똑히 보자 죄책감이 옥죄어왔다.

생각이 길어지고 진은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은 줄도 몰랐다.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내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마음이 복잡해지다니. 열다섯 그날 이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폐하, 기침하셨사옵니까?"

상선의 목소리에 진은 하던 생각을 멈추었다.

"들라."

문이 열리고 상선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진이 어제의 차림 그대로 정제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눈으로 물었다.

"한숨도 주므시지 않은 것이옵니까?"

진은 침묵으로 그의 말을 긍정했다.

"초조반상을 들이라 하겠습니다."

"아니, 되었다. 나중에 부를 테니 나가 있도록 하거라."

상선은 심히 걱정스런 눈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최우선적으로 할 일은 황제의 옥체를 상하지 않게 모시는 것.

"폐하…, 감히 여쭈옵니다. 혹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

"폐하……."

"상선."

"예."

"사라진 마음이 어찌하면 돌아오는지 아나?"

"예…?"

"결심했던 것이 무너져 내리면 어찌해야 하지?"

"………."

상선이 쉬이 입을 열지 못하자 진은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무슨 대답을 원한 것인가.

그 순간,

"마음이란 무릇 흘러갈 뿐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지요.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십시오, 폐하."

진은 멈칫했다.

"흘러가는 대로 두라……?"

"예."

"………."

흘러가는 대로 둔다…….

"곧 있으면 편전에 드실 시간입니다. 조금이라도 쉬십시오."

상선은 그 말을 남기고 물러갔다. 홀로 남자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마음이 가는 대로 둔다……. 진은 그렇게 한참 동안 되뇌었다. 그 생각의 끝에는 장시언이 있었다.

* * *

"폐하…! 황후 마마께서 쓰러지셨다 하옵니다!"

상선이 황제에게 그 말을 전하자 편전에 있던 조정 대신들은 희한하다는 눈으로 상선을 바라보았다. 그 말을 굳이 전할 필요가 있나? 황제가 황후를 멀리 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아뢰어 봐야 심기만 불편해하실 것을…….

편전에는 장시언의 아비이자 영의정인 장인욱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제 아들이 쓰러졌다는 소리에 속으로 코웃음을 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황제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불편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뭐라?!"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진은 상선이 말을 듣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옥좌가 뒤로 넘어갈 기세다.

예상외. 예상외도 이런 예상외가 없다. 저런 반응을 보이실 줄이야……. 대체 왜 저러신단 말인가.

조정 대신들은 침묵을 고수하며 황제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진은 그런 그들을 기다림은 무시하고, 아니, 알아차리지 못하고 곧장 편전에서 벗어났다. 성큼성큼 걷는 그의 걸음은 마치 바람이라도 가를 듯 거침 없었다.

황제가 떠난 자리를 멀뚱히 지키고 있던 조정 대신들은 어찌해야 하나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해댔다.

'황후 마마께서 쓰러지셨다 하옵니다.'

그 말을 듣자 순간 머리가 백지가 되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황후궁을 향하는 진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진 채였다.

쓰러지다니, 대체 뭘 했기에! ……하기야 그 가는 몸으로, 언제 쓰러진다 한들 이상할 것이 없지. 더욱이…….

황후궁에 도착하자 진을 본 궁녀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이다.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말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왜 폐하께서? 아니, 황후궁엔 어인 일로?

진은 장시언의 최측근인 윤 상궁을 바라보았다.

"황후가 쓰러졌다 들었다."

"……예, 오늘 잠시 텃밭을 돌보시다가 그만……."

"뭐라? 텃밭을 돌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텃밭을 돌보다니 그 일을 왜 황후인 장시언이 한단 말인가!

진은 윤 상궁과 궁녀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대체 상전을 어찌 모시는 것이냐고 추궁하는 눈빛이다.

윤 상궁을 비롯하여 황후궁의 궁녀들은 갑자기 걸음 하여 괜한 트집을 다 잡는다고 속으로 황제를 욕했다.

"태의는 불렀나?"

이런. 윤 상궁은 우물쭈물하다가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또 하나 건수를 제공해 주는구나, 여기면서.

"……부,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벼운 현기증이라고… 마마께서 폐하의 귀에 들어가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으니 태의는 부르지 말라 극구 말리시어……."

그녀의 예상대로 진은 있는 대로 궁녀들을 몰아붙였다.

"제정신이냐? 쓰러진 이를 그냥 두다니, 망극한 일이라도 나면 어쩔 셈이냐! 당장 태의를 불러오라!!"

진의 호통에 궁녀 둘이 치맛자락을 잡고 재빨리 뛰어갔다. 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답답한 것! 미련한 것! 내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고? 어찌 이리도 사람을 화나게 한단 말이냐. 대체, 왜!!!

진은 흥분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갔다.

장시언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다가 문을 열고 그가 들어가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은 혀를 찼다. 자신을 보고 놀라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다.

"쓰러졌었다지?"

곧 폭발할 것 같은 화를 잠재우고 최대한 좋게 목소리를 냈다.

장시언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잠시 현기증이 나…."

장시언이 또 미련하게 아니라고 말을 하자 진은 화가 나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몸뚱이만 비루한 줄 알았더니 체력까지 비루하구나."

장시언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아프다고 말해라. 아프다고 말해! 곁에 있어달라고 말하란 말이다!!

"왜 아무 말이 없지? ――돌을 앞에 두고 얘기해도 너보다는 나을 것이다."

곱게 포기져 바들바들 떨리는 손. 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멈추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자신만 보면 떨어대는 장시언을 보니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한심하긴. 네가 그러고도 사내란 말이냐? 무슨 말만 하면 떨어대는 네가?"

"………마, 망극…"

"집어치워라! 듣기 같잖다!!"

"………."

이럴 거면…, 이리 내 마음을 흔들어 놓기만 할 거면……,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아라. 내 눈에 뜨이지 말라는 소리다. 알겠느냐?"

눈물을 참는 것인지 장시언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흘러나온 대답은 그를 더 이상 그 자리에 못 있게 만들었다.

"……예, 폐하."

젠장!

진은 그대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후궁의 처소로 갔다. 누구라도, 뭐라도 좋다. 이 심장과 머릿속의 열기를 식힐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아! 아앗! 폐하…!"

후궁은 진의 아래에서 쾌락에 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달아오른 그녀와는 달리 진은 후궁과 몸을 섞으며 오직 장시언만을 생각했다.

비칠 듯한 흰 피부…, 눈물을 머금은 긴 눈매…, 에처롭게 떨리는 목소리……. 얼마나 부드러울까, 정욕에 찬 눈빛은 어떻게 변할까, 어떤 목소리로 울까……. 그가 지신의 아래에서 몸을 떤다면, 팔을 감아오며 교성을 내뱉는다면, 절정을 못 이겨 허리에 다리를 감아온다면…….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장시언을 안았다. 하지만, 그것은 계속되지 못했다. 아래서 쉬지 않고 교성을 내뱉는 후궁의 모습에 급격히 머리가 차가워진 탓이다.

차가워진 머리가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게 한다. 심장의 열기는 여전히 장시언을 향한 채였다. 그러자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해졌다. 상선이 했던 말이 이제야 가슴에 와닿았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십시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황후에게 간다."

흐느끼는 후궁을 뒤로하고 나와 그렇게 말을 했다. 상선은 확인하듯 넌지시 물어왔다.

"황후궁으로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폐하?"

"나이가 들어 가는귀가 먹었느냐? ――그래, 황후궁으로 간다 했다."

상선은 그의 말에 짐짓 평온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모시겠사옵니다."

진은 그길로 황후궁을 향했다.

사내를 또다시 마음에 담았다. 장시언을, 그를 향한 은애를, 마음에 담았다. 이제는 더 이상 속일 수 없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흐르지 못하게 막아두었던 감정의 통로가 한순간에 뚫렸다. 무언가에 옥죄인 듯 무거웠던 걸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아아, 인정하면 이리도 편해질 것을…….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장시언을 보면, 그를 보면, 으스러지도록 안아주리라. 진심으로 그를 마주하리라. 마음을 고백하리라.

진은 그렇게 결심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오늘 밤 너를 안을 것이다.'

잠에서 깬 장시언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을 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에게 처음 마음을 고백하는 풋내기처럼 진부하고 구차한 말들만 늘어놓았다.

'너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더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약조하마.'

'소중히 할 것이다.'

물론 모두 진심이었으나 하고자 했던 말의 절반도 하지 못했다.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다 전하지 못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긴장으로 그의 손이 땀으로 흥건히 젖는 날이 올 것이라고.

장시언의 눈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 눈을 피한다. 그 순간 진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안고 싶다. 그를 휘저어놓고 싶다. 그래서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들고 싶다. 그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를 쓰러뜨리고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장시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진을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진은 그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왜 이러느냐 묻는 눈을 보며 말을 했다.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 짐을 받아들여라."

진은 목덜임에 입술을 가져갔다. 천천히 촉촉 입을 맞추었다.

'제발….' 속삭이며 그의 허락을 기다렸다. 장시언은 쉬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방심을 한 사람처럼 몸에 힘을 풀었을 뿐.

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옷고름을 풀어 열어젖히고 곳곳에 열꽃을 남겼다. 살갗 아래 흐르는 혈관을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곳곳을 입에 담았다. 닿자마자 알았다. 장시언이 매우 민감하고 야한 몸을 지녔다는 것을. 그는 진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흠칫흠칫 허리를 떨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여전히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지만 서글프고 처연했던 얼굴은 어느새 정욕에 물들어 있다. 진은 습한 숨을 내쉬며 그의 유두를 핥았다. 손으론 나머지 한쪽을 천천히 쓸었다. 한 번, 두 번, ………, 혀가 희롱을 할수록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인들 중에서도 유두만으로 이리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쩝. 쩝. 타액에 뒤섞인 야한 소리가 들린다. 깊게 빨아들이며 잘근거리자 '아윽!' 하고 장시언이 신음을 내질렀다. 바로 입을 막아 계속되진 않았지만.

진은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큰 손이 작은 얼굴의 반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 눈매가 파르라니 떨린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잔상에 진이 잠시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 솟구치는 정복욕 때문에 곧 사그라졌다. 진은 장시언의 손목을 잡아 떼어내고 더는 얼굴을 가리지 못하게 침상에 붙여놓았다. 장신언은 양손을 포박당해 침상에 눌린 채로 진의 아래 깔려 하아, 하아… 숨을 내쉰다.

진은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유두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포만감과도 같은 감각.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진은 손으로만 지분거렸던 유두를 천천히 핥았다.

"아…!"

입을 가린 엄폐물이 사라지자 장시언은 곧바로 쾌감을 내뱉었다. 입술을 깨물어보아도 새어나오는 소리를 숨길 수는 없었다. 진이 집요하게 유두를 괴롭히자 장시언이 세우고 있던 무릎을 떨었다. 안쪽 허벅지가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아랫도리가 팽팽하게 터질 것만 같았다. 벌써부터 이 정도라니. 진은 지체할 것 없이 옷을 모두 벗어 던졌다. 손을 풀었음에도 장시언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 이성이 채 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처럼.

불뚝 선 기둥을 반쯤 서있는 장시언의 성기에 갖다 대고 한 손으로 움켜쥐자 장시언이 놀라 크게 눈을 떴다. 그가 말릴 틈도 없이 진은 손을 움직였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위아래로 거칠게 쓸었다. 마음 같아선 바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크게 다칠 것이 분명했다.

빨라지는 손놀림에 둘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읏. 하아… 본능적인 감각에만 이끌려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흘러나온 흥분의 잔재로 인해 찌걱. 찌걱. 찌걱. 하는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장시언이 진의 어깨를 잡아온다. 진은 사정의 순간이 다가옴을 바로 눈치챘다. 그것은 사실 그도 다르지 않아서 그는 손놀림에 박차를 가했다.

"헉! 허억, 허억… 으읏!"

"후우… 헉, 헉…."

쩍. 쩍. 쩍. 소리와 함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거의 동시에 파정을 했다. 팟―! 터지는 탁액이 둘의 배로 튀어 오르고 손을 흠뻑 적셨다. 사정은 길었다. 그의 중심은 방금 전의 일을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여전히 불뚝 서있었다.

진은 숨을 고르고 있는 장시언을 바라보다가 그의 중심에 시선을 주었다. 의외로 장시언 역시 아직 부족하다는 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오랫동안 하지 않은 모양이지?"

"………, 예…?"

장시언은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한 사람처럼 느리게 반응했다. 그리고는 곧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색사에 익숙지 않은 지 사내치고는 순진한 반응이었다.

진은 아직 정액으로 축축한 손을 그의 엉덩이 사이로 집어넣었다. 엉덩이골을 천천히 쓸며 살짝살짝 주름을 건드렸다. 장신언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진의 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닫힌 주름으로 곧바로 손가락이 하나 파고든 것이다.

"아!"

장시언의 허리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다. 진은 부드럽게 허리를 매만지며 쑥쑥 거침없이 손가락을 넣었다. 뜨겁고 부드러운 그곳은 갑작스러운 침입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정없이 안을 조이며 진입을 방해했다. 진안 은을 넓히고자 사방을 꾹꾹 누르며 내벽을 비벼댔다. 그리고 잠시 풀어진 긴장을 틈타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흣! 폐, 폐하! 그만…!"

고작 손가락 두 개로 물러날 것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은 안을 들쑤시며 손을 들락날락 거렸다.

"아…! 아! 아앗"

장시언은 처음 경험하는 생경한 감각에 정신을 못  차렸다. 손가락이 세 개째 들어가자 그는 벅찬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진은 혀를 차며 손가락을 빼내고 그의 몸을 돌렸다. 뒤돌아 허리를 들어 올리고 있는 그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그 사이 붉은 구멍에 입술을 가져갔다. 망설임 없이 혀가 주름을 핥아 올린다.

"하악! 거, 거긴! 더럽…! 아앗!"

주름이 축축이 젖어갈수록 신음이 높아졌다. 장시언은 이불을 쥐어뜯으며 몸을 붉혔다. 역시나 쾌감에 약하다. 그의 주름은 안 된다는 주인의 의지를 배신하고 움찔거렸다. 혀가  안으로 파고들자 '흐앗!' 하고 장시언이 놀람과 흥분이 뒤섞인 신음을 내지른다. 진은 한참 동안 혀로 그의 안을 드나들다가 녹진하게 풀어진 입구에 뭉툭한 귀두를 갖다 대었다. 도드라진 날개뼈에 입을 맞추며 몸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다. 번들거리는 주름은 당장이라도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힘 빼라."

그 말과 함께 진은 한 번에 안을 꿰뚫었다.

"아앗―!"

고통 섞인 신음에 진은 날뛰는 욕망을 잠재우고 호흡을 골랐다.

"크윽. 시언아, 힘 빼라. 이러면 네가 다친다."

"으읏, 하아… 하아……."

진의 말에도 장시언은 좀처럼 몸에서 긴장을 풀지 못했다. 가슴에 닿는 그의 등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은 곧게 뻗은 목덜미에 촉촉 입을 맞추며 손을 뻗어 장시언의 중심을 감쌌다. 흠칫, 장시언이 순간 허리를 튕긴다. 쉬, 괜찮아. 진은 그렇게 속삭이며 천천히 손을 훑었다. 격렬하지 않은, 딱 기분 좋을 정도로만 몸을 노곤하게 하는 그런 손놀림이었다.

장시언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터져 나온다. 동시에 내벽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진은 미간을 그었다. 지나치게 빡빡하지 않은 흥분을 가중시키는 조임. 한계다. 이젠 정말 한계였다.

진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뺐다. 그러자 '으….' 하며 장시언이 이불을 쥐어뜯는다. 진은 그 손을 감싸며 깍지를 꼈다. 어느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장시언의 몸을 가르며 들어갔다. 완전히 밀착한 두 육체가 같은 속도로 움직임을 시작한다. 빠르지 않았다. 그들의 움직임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느릿느릿했다. 움직임에 맞추어 비단이불이 일렁이며 물결을 만든다.

숨이 거칠어지고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장시언도 다르지 않아서 그의 입에서 연신 더운 숨이 뱉어졌다. 간간히 흐느낌도 흘러나온다.

시언아, 시언아…. 그를 부르자 숙여진 고개가 천천히 돌아본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렁이는 눈동자에 진은 다정히 입을 맞추었다. 물기 섞인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다. 그것이 장시언이 흘린 눈물의 맛이라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달아오르는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흐르는 생리적인 눈물. 욕정을 모르는 순진한 육체가 그 한 줄기 눈물로 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진은 그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눈가를 스치던 입맞춤이 자연히 입술을 찾아 내려간다. 벌어진 틈새로 습하고 더운 숨이 느껴지고 진은 그것을 모두 삼키기라도 할 듯 입 안을 탐했다.

"우, 으음…."

얼마 지나지 않아 교접의 부위에서 즈윽. 즈윽. 하는 소리와 함께 탁액을 조금씩 내보냈다. 장시언의 중신을 훑던 진의 손도 어느새 흠뻑 젖어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뚝뚝 애액이 떨어졌다. 진은 완전히 젖은 내부를 가르고 들어가 깊이 몸을 묻었다. 그러자,

"아…! 아… 아……."

장시언은 드문드문 신음하며 그의 손 안에서 파정했다. 동시에 내벽이 수축하며 진의 성기를 조였다. 진은 머릿속까지 달아오르는 쾌감을 느끼며 그대로 그의 안에 사정했다. 남은 한 방울까지 모조리 다 쏟아내고 성기를 잡아 뺐다. 벌어진 입구에서 희뿌연 탁액이 줄줄 새어나왔다.

그 순간, 장시언이 앞으로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장시언은 그가 쾌감을 느끼고 실신을 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진과 정을 나눈 것도 잘 기억하질 못했다. 그저 젖어 있는 내부에 당황한 듯 '폐, 폐하…?' 하고 물을 뿐이었다.

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처음인 장시언에게 놀라지 않고 쾌락을 온전히 느끼게 하고자 자신의 욕망을 잠재우고 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그리 느낀 주제에 잊어버리다니 대체 이게 뭔 경우인가 싶었다. 기가 막히고 얄미워서 진은 다시금 그를 취했다. 배려는 잠시 저 멀리에 치워두고 일부러 더 그를 몰아붙였다. 장시언이 더는 못 견디고 기절하듯 잠들 때까지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했다.

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잠든 장시언을 내려다보았다. 심하게 했음에도 쌕쌕거리며 잘 자는 것을 보니 별다른 탈이 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서려 있었다.

* * *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 정말 그랬다. 한 번 인정하니 그다음부터는 아주 쉬워졌다. 장시언을 가지고 나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언제나 마음이 들떠 있고 행복했다. 매일 밤 그를 안았고 그에게 아름답고 좋은 것은 죄다 안겼다. 뭐든 다 해주고 싶어서. 그의 가문에 토지를 하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뿐이랴. 장시언이 마냥 예뻐 보여 누가 있든 간에 팔불출짓도 서슴지 않았다. 어여쁘다 대놓고 만졌으니, 손이며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마음의 병도 가지게 되었다. 장시언을 향한 집착이 커져만 갔다. 누구든 장시언과 가까워지는 것이 싫었다. 특히 후궁들, 황자를 낳은 비빈들이 그의 곁에 다가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욕이 없는 그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것이 다 보여서 원래의 계획을 무시하고 당장 쳐내고 싶었다.

후궁들과는 다른 의미로 거슬리는 이는 다름 아닌 시언의 아우, 장영한이었다. 장영한은 황후궁 문턱이 닳도록―진이 느끼기에―빈번하게 드나들었고 한번 오면 오래도록 있다 가곤 했다. 생각해 보면 초야 때에도 황후궁에 찾아와 장시언을 끌어안지 않았던가. 건방진 놈. 제아무리 피를 나눈 형제라 하나 감히 황제의 내자를 멋대로 끌어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진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미리 연통도 없이 황후를 찾아오면 만날 수 없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는 장시언에 한해선 속이 좁은 남자였다. 언제부턴가 그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그가 장시언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한바탕 격한 정사가 지나가고 후희의 시간이 찾아왔다. 진은 장시언의 마른 등에 입을 맞추며 나른한 감각을 즐겼다.

"남자를 안은 것은 네가 처음인데, 이제와 말하지만 사실 조금 놀랍다."

그는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사실이었다. 열다섯 그날 이후 사내와 이렇게 정을 나누고 함께 누워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장시언은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별로 숨길 생각이 없었던터라 진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남자와 비역질을 한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 네게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널 보자마자 마음이 동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계속 부정을 한 듯싶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진은 순간 멈칫했다. 기억 속에 남은 그 아이의 모습이, 그 눈매가 지금의 장시언의 모습과 겹쳐졌다. 설마, 그럴 리가…….

그는 몸을 일으켜 장시언을 내려다보았다. 장시언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폐, 폐하…?"

"영선이라는 곳을 알고 있나?"

직접적인 물음. 하지만 장시언은 '예?" 하고 반물할 뿐이었다.

"남사당패와 거렁뱅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알고 있나?"

"……모릅니다. 처음 들어보는 곳입니다."

진은 한참 동안 장시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피식 미소를 흘렸다. 무슨 생각을 한 건가. 좀 닮았다고는 하나 명문가의 장손이다. 더욱이 장시언의 성격은 그 아이와 정반대이질 않나.

"……그래. 그렇겠지. 네가 그런 곳을 알 턱이 없지."

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단지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한번 각인된 것은 쉬이 그를 놔주질 않았다. 장시언이 그 아이와 닮았다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의 불안이 시작되었다.

* * *

비빈들이 석고대죄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상선에게서 전해 들었을 때, 진은 코웃음을 쳤다. 언젠간 하겠구나 싶었던 것을 이제야 하는구나 싶었을 뿐, 전혀 색다르지 않은 그네들의 행동이 우습기만 했다.

그녀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석고대죄를 드리는 것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황자들까지 합세했음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아이들까지 이용하다니 눈살만 찌푸려졌다. 게다가 그에겐 그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편전으로 걸음을 하며 비빈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자 상선은 민망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폐하, 감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제 그만 비빈 마마들을 뵈오심이 어떠하시옵니까."

진은 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뭐라 했느냐? 다시 말해 보거라."

딱딱한 그의 말투에 상선은 머리를 조아리고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황후 마마를 아끼시는 것은 소인도 익히 아옵니다. 하오나 비빈 마마들을 언제까지 저리 두실 수는 없는 노릇이옵니다. 황후 마마께선 하해와 같은 마음을 지니신 분이니 폐하께서 후궁의 처소에 들리신다 해도 이해를 하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내가 싫다."

"……예?"

그 역시 알고 있다. 장시언이라면…….

"황후라면 당연히 이해를 하겠지."

그의 말에 상선의 얼굴이 희망으로 빛났다.

"하오시면…"

"허나, 그것이 싫은 것이다, 나는."

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막았다.

그래, 정말 싫다. 장시언이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상선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경솔했음을 직감적으로 안 것이다.

진은 그런 그를 잠시 내려 보다가 다시 몸을 틀어 가던 걸음을 떼었다.

장시언은 욕심이 없다. 아니, 욕심이 없다기보다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아 과연 원하는 것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시언에겐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를 보면 계속 갈증이 나는 사람처럼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고 건드리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무언가를 해주고 싶고 그를 통해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장시언은 언제나 제 마음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진은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장시언의 진실된 마음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장시언이 단 한 번도 무언가를 먼저 바란 적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어린 시절의 그 아이와 닮았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그 아이처럼 사라질까봐, 사라지고 다시는 찾지 못할까봐, 너무나도 불안해졌다.

진은 한숨을 내쉬며 편전에 들었다.

장시언은 황후가 되고 게속 그를 기다렸다. 그의 마음을 한 자락이라도 얻고자 숱한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들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전전긍긍하는 쪽은 진 자신이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다는 것이 불안함과 쓸쓸함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걸 진은 처음 알았다.

처음부터 후궁들에게 갈 마음은 없었다. 왜 후궁들의 처소로 갈 거라는 소문이 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은 후궁들의 석고대죄도, 황자들의 청도 계속 모르쇠로 일관할 작정이었다.

사실 황후궁에 간 것도 그것은 오해라고 말을 해주기 위함이었다. 후궁들에겐 가지 않을 거라고, 짐은 너만 보고 살 것이라고, 그리 말을 하고자 했었다

그래서…….

장시언이 투기를 부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껏 어찌 숨겼나 싶을 정도로 장시언은 심하게 투기를 부렸다. 굉장히 의외였고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생각해 보면 그리 기뻤던 적도 없어던 것 같았다. 그는 견디지 못하고 장시언을 안았고 그의 안에서 극상의 쾌락을 맛보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불안함을 느꼈다.

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장시언을 사랑하고, 그를 향한 마음이 점점 커져갔지만 마음속 어느 한구석에서 장시언을 믿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원한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떠날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가까운 불안. 그것이 진을 괴롭혔다.

그런 나날의 연속이었다.

* * *

"폐하, 강희 황자께서 알현을 청하셨사옵니다."

진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강희가?"

"예, 폐하."

강희가 아침, 저녁 문안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 홀로 그를 찾아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태자 책봉을 위해 자신의 눈에 들고자 하는 다른 황자들과는 달리 강희는 언제나 제 할 일을 묵묵히 할 뿐 유별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황자들 중 가장 뛰어났음에도 그걸 티 내지 않는 아이. 하긴, 뒷배가 전혀 없는 그 아이가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이 도와줄 수도 있는 문제지만 궁은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제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하는 곳이다. 아이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들라 해라."

상선은 예를 취한 후 물러갔고 곧이어 강희 황자가 들어왔다. 급히 왔는지 아이의 얼굴에는 붉은 혈색이 감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러나 싶었다.

"정무를 보시는데 이리 찾아와 송구합니다. 소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사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예, 그것이……. 저… 아바마마, 괜찮으시면 지금 소자와 황후궁에 함께 가주시면 아니 될까요?"

"………. 네가 황후궁엔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소자 방금 전에 황후 마마를 뵈었는데……."

강희 황자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이의 입에서 장시언을 봤다는 말이 나오자 진은 순간 멈칫했다.

"헌데?"

절로 목소리가 긴장되어 나왔다. 장시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어서.

강희 황자는 뜸을 들이다 어렵게 말을 꺼내었다.

"……황후 마마께서 저를 도우시다가 옥체를 상하셨사옵니다. 꾸중을 달게 받겠사오나 소자 황후 마마께서 혹여 많이 다치셨을까 심히 걱정이 되어 찾아뵈려하옵니다."

"………."

"홀로 찾아뵙는 것은 황후 마마께 폐를 끼치는 일일 수도 있어 아바마마께서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빈들이 태자 책봉을 위해 황자들과 황후궁에 들락거린다는 것은 어린 강희 황자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까지 그곳에 갔다간 어떤 이유로 갔든 간에 좋지 않은 얘기가 나올 수 있는 일이었다.

진은 황자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속이 깊은 아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강희를 태자로 낙점했다.

"아비가 찾아가 볼 터이니 넌 걱정 말고 처소로 돌아가 있거라. 황후궁에는 내일 들리도록 하고."

"……예."

아이는 아쉬워하며 대답했다. 진은 아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헌데', 하며 넌지시 얘기했다.

"황후 마마가 무어냐? 어마마마라고 부르거라."

"예…?"

"항상 어머니가 계셨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

"왜. 사내라서 싫으냐?"

"아, 아닙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허면, 어마마마라고 부르거라. 황후라면 네게 좋은 어머니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그의 족쇄가 되어 줄 거라 믿는다. 진은 마지막 말을 삼켰다. 굳이 아이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아이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비겁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그는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장시언이라면 강희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어 줄 것 같았다. 또한 그의 가문이 강희에게 조력자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족쇄. 강희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올곧은 아이는 제가 진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장시언이 강희를 만난다면 그 역시 틀림없이 이 아이를 좋아하게 되리라. 진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자신의 불안함이 가시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원비의 회임소식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웠다. 진은 원비가 다른 사내와 정을 통했을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안았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장시언을 처음 가진 날이었다. 전해 들은 시기와 맞지 않는다. 더욱이 사정감이 밀려오기도 전에 그녀의 몸에서 나왔는데 회임을 하다니, 실로 대단한 재주였다.

원비가 회임을 했다면, 뱃속의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다. 허나 진은 원비의 아이를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는 이 일을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심은 아이를 츤은히 여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그저 원비의 죄를 처벌하는 것보다 실추될 황실의 위상이 더 값지다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굳이 지금 원비를 쳐내지 않아도 어차피 원비는 조만간 다른 비빈들과 함께 내쳐질 운명이니까.

정무를 모두 마치고 늦은 시간 원비의 처소로 찾아갔을 때, 원비는 감격에 젖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제 배를 쓰다듬었다.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여 찾아갔더니 역시나 실망을 시키지 않았다. 가증스러운 모습에 토기가 올라왔다. 진이 그러냐고 알았다고 하고 걸음을 돌리자 원비는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폐하, 오늘은 소첩과 함께 있어주시옵소서.'

원비의 말에 바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당연했다. 잠시라도 그곳엔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서 장시언이 머무는 황후궁으로 가고 싶었다. 분 냄새 가득한 이곳과는 달리 은은한 난향과 묵향이 가득한 곳. 마음은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소첩 폐하의 아이를 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만이라도 소첩과 함께 해주시옵소서. 황후 마마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

원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진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녀의 입에서 장시언에 대한 말이 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용은 더 불쾌했다. 장시언이 자신이 원비를 만나고 그녀와 함께 보내는 것을 감내할 것이라는 것이.

'짐의 아이라 했나?'

'……….'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그의 차가운 목소리와 날 선 눈빛에 원비는 뒷걸음을 쳤고 그는 그대로 원비의 처소를 나왔다.

황후궁으로 가는 동안 원비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장시언이라면 회임을 한 원비와 함께 보낸다고 해도 이해해 줄 것이라는.

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장시언이라면 그리할 것이다. 자신이 후궁들의 처소에 간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가지 말아 달라며 청을 했던 그이지만 그건 지금 생각해 보아도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원비의 처소로 갔다는 소식이 황후궁에도 전해졌나?'

당연히 전해졌을 테지만 혹시나 싶어 진은 상선에게 물었다.

상선은 '예. 전해졌을 것이옵니다.' 하고 말씀을 아뢰었다.

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에 금을 그었다.

소식이 전해졌다…….

장시언은 지금쯤 어떤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후궁들에겐 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맹세를 생각하며 배신당했다 여기고 있을까.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기다리지 않고 있을지도. 벌써 잠을 청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각이니까.

"………."

순간 스치는 생각에 헛음음이 지어졌다. 그는 어리석게도 장시언이 마음고생을 하며 자신을 기다려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장시언을 마음에 담았다고, 그의 마음도 자신과 같길 바란다고 했던 주제에 그가 상처받아 아파하는 것을 원하다니……. 참으로 이기적이고 못난 인사가 아닌가. 스스로가 이렇게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그럼에도 이 못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은 자괴감에 물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연심이라는 것이 사람을 이리도 하찮게 만든다.

병이다. 그에게 상처를 준다 할지라도 그의 마음을 끊임없이 확인받고자 하는 자신의 이 마음은 병이었다. 스스로를 점점 옥죄어오는 중병.

원비의 처소에 갔다던 진이 걸음을 하자 황후궁의 궁녀들은 화들짝 놀라며 예를 취했다. 윤 상궁은 안에 아뢰겠다고 말을 했고 진은 되었다고 그녀를 저지했다.

안은 아른거리는 호롱볼 하나만을 남겨두고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드는 실망과 서운함.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분명 애타게 그리워하고 바랐던 것은 장시언이 먼저인데, 그의 무정함은 진에게 있어 비극이었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진은 한참 동안 잠이 든 장시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가느다란 발목. 손이 절로 그것을 향해 간다.

그를 향해 뻗은 손이 부드러운 살결에 닿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그가 걸친 옷 한 겹, 한 겹이 마치 마음을 가린 휘장인 것만 같아서 다 뜯어내고 싶었다.

"시언아……."

몸을 숙여 그에게 입을 맞추며 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무정한 정인에게 속삭였다. 어서 깨어나라고 몇 번을 그렇게 애타게 불렀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참지 못하고 그를 거칠게 안았다.

* * *

순행을 마치고 부원군을 찾아간 것은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어서 장시언이 있는 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에 앞서 장시언이 태어나 자란 사가를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걸음을 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장인욱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장시언은 그가 익히 알아온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알아주는 술고래에, 장난이 심한 괴짜라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평소 눈엣가시였던 장영한이 난데없이 들어와 그런 게 아니라고 어색한 변명을 하지만 않았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을 것이다.

장영한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남을 속일 줄 모르는 이였다. 눈엣가시인 장영한은.

본래 예정보다 일찍 환궁을 하여 황후궁에 들렀을 때, 그의 명을 받아 바깥에만 금군들이 있을 뿐 궁녀들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술고래에 괴짜……. 그는 참을 수 없는 유쾌한 기분에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안에서 캬하하하- 하는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발이 보여? 보이냐고! 캬하하하~'

아무리 들어봐도 분명 장시언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만 들어보아도 그가 얼마나 신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빨라서 안 보이네요. ――주전부리 좀 챙겨오겠습니다, 마마.'

'어? 그럴래?'

진이 부동의 자세로 굳어 있던 와중 문이 열리며 윤 상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치에서부터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는 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곧 턱이 빠질 사람처럼 입을 떡 벌렸다. 진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하라고 쉿, 손짓을 했다. 그때 마침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또다시 귓전을 때렸다.

'오오~ 감 잡았어! ――윤 상궁! 이것 좀 보고 가! 헐랭이다, 헐랭이! 우하하하~'

'……….'

'……….'

진은 아무렇지 않게 문을 닫았다. 돌아서는 걸음 뒤로 장시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 상궁! 와서 헐랭이 좀 보라니까? 이건 제왕의 귀환이야!'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벽을 짚은 채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살아생전 이렇게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은 것은 처음이었다.

윤 상궁이 다녀간 후에도 그는 발작처럼 터지는 웃음 때문에 난감했다.

몸이 약한 것과는 다르게 성격은 그다지 활달―이라고 표현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방정맞지만―한데 궁에서 그것에 철저히 숨기고 살았다니,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우스웠다.

'헐랭이다, 헐랭이!'

'제왕의 귀환이야!'

"큭, 큭큭…."

진은 결국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처음 보는 황제의 모습에 상선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인식하지 못한 진은 '귀여워.'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상선은 뜬금없이 뭐가 그리 귀여워서 저러시나, 하고 황당해할 뿐이었다.

진은 장시언이 하루빨리 본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며 한참을 큭큭거리다가 상선과 눈이 마주치고 싹 표정을 지웠다.

"정무를 마치는 대로 황후궁으로 갈 것이다."

"예, 폐하. 황후궁에 연통하겠사옵니다."

당연한 것을 뭘 새삼스럽게 말씀하시는지. 상선은 진짜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하는 눈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이미 즐거워하는 표정을 지운 진은 왜? 하는 눈으로 그 눈빛을 마주했다. 상선은 별다른 말없이 예를 취하고는 물러갔다.

상선이 물러가자마자 그의 얼굴엔 다시 즐거워하는 기색이 서렸다. 그를 이다지도 즐겁게 하는 이는 장시언이 유일할 것이다. 물론 그를 힘들게 하는 이도 장시언이 유일하지만.

아, 오늘은 좀 골려줘 볼까.

짖궂은 생각을 하는 그의 얼굴엔 장난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가 순행을 간 동안 장시언이 몸 달아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장시언이 아는지 모르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진과의 정사에 익숙해져버렸다. 처음 안았을 때부터 알았지만 장시언은 쾌감에 약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첫 관계를 했을 적에 너무 느껴 실신을 하지 않았던가. 기억도 하지 못했고.

진은 자신의 품에 안긴 장시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동하는 음심淫心, 골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결심이 흔들린다. 이리도 자신을 쥐락펴락하다니 장시언은 대단한 능력자다.

결국 그는 매정하게 장시언을 떼놓지 못하고 입술을 탐했다. 손으로 장시언의 몸을 더듬으며.

그러나 잠시 뒤 장시언이 그에게 완전히 몸을 맡겼을 때 진은 피곤하다며 그 몸짓을 거부했다. 본래의 목적을 위해 마음을 돌린 것이다.

장시언은 진의 거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예?' 하고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정을 나눈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던 탓이다.

얼이 빠져 있는 장시언의 얼굴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 아니요, 아닙니다."

진은 웃으며 장시언의 팔을 잡았다.

"그럼 이만 자자."

자리에 누워 눈을 감자 장시언의 따가운 눈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쳐다봐도 소용없다. 감쪽같이 속인 벌이다.

진은 눈을 딱 감고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유쾌함이 번진다.

하지만, 그 벌은 다음날 하늘거리는 장시언의 침의를 보자마자 펄떡펄떡 피가 끓어올라 바로 막을 내렸다.

* * *

비빈들이 장시언을 쳐낼 방도만 궁리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누구 하나 진의 마음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질시하고 투기를 부렸다. 삿된 것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인 진의 관심이 완전히 황후에게로 쏟아지자 그들의 질시와 투기를 받을 대상은 한 사람으로 좁혀졌다. ――장시언.

진은 장시언을 보호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써왔다.

그에겐 힘이 필요했다. 비빈들을 쳐내기 전까지 내명부를 통솔할 힘. 진의 맹목적인 보살핌을 받는 것보단 그편이 장시언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진이 내명부 수장으로서의 합당한 힘을 준다고 말했을 때 그는 경악을 했다. 흡사 그것은 그의 가문에 은청강 주변의 땅을 하사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곁에서 보아온 장시언은 정말이지 욕심이 없는 이였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진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권력이 양분화될 위험성이 없으니까. 하지만 진은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순적인 마음이었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장시언이 권련을 탐하게 되면, 그리해서 황권을 위협하게 된다면, 자신은 장시언과 그 가문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헌데, 우습게도 장시언이 권력이라는 것에 지나치게 무심한 것도 싫었다. 그 어느 것에도 집착을 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이름뿐이었던 내명부를 되살리고 장시언에게 내명부 수장으로서의 실질적 지위를 준 것은 그래서였다. 비빈들에게서 스스로를 지킬 힘을 주고, 조금이나마 제가 가진 지위에 집착하게 하기 위해서. 아니, 그 직찹이 장시언을 진의 곁에 계속 머물게 할 것 같아서.

하지만, 역시나 장시언은 끝까지 장시언이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비빈들에게 내명부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내세우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을 담담하게 감내했다.

짜증이 나고 속이 뒤틀렸다. 인내심의 한계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장시언을 저주하고 시해하려는 비빈들의 음모가 생각보다 더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진은 결국 갈았던 칼날을 뽑아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계획했던 대로 비빈들이 모두 폐서인 되고 탁해지기 시작했던 조정朝廷도 어느 정도 물갈이가 되었다. 신국 최대의 상단이었던 경상京商도 그 드높던 위세가 날개를 달기 전에 밟아주었다.

눈엣가시였던 원비와 그 가문도 사라졌다.

참으로 어리석은 계집이었다, 원비는. 거짓 회임도 모자라 태자로 책봉될 황자를 납치하다니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그 아둔함이 우습기까지 했다.

원비를 숙청하고 진은 만족스러움을 한껏 만끽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 만족은 외부적인 환경에 한한 것이었다.

* * *

분명 어느 정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마을을 잘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장시언 역시 자신을 애틋하게 여길 거라고 언젠가부터 막연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은 잠든 장시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몇 번이고 그를 가졌지만 공허한 마음은 채워지질 않는다.

장시언이 손길을 피하고 뒷걸음질 쳤을 때, 묶여 있던 관계의 끈이 풀어지고 처음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습하는 두려움과 절망감.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스러웠다. 장시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큰 상처를 입는다. 장시언의 앞에서는 지존이 아니라 연정을 바라는 한 사내에 불과하다.

하얀 나신이 달빛을 받아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진은 마른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은애한다는 말에 대한 답은 끝끝내 받지 못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그를 괜찮다는 말로 위로한 것은 진이 부릴 수 있는 마지막 허세였다. 자신의 가슴을 긁어내리는 어리석은 허세.

다정도 병이었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놔두었건만 그를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미쳐가고 있다. 자라나는 욕심이 마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자신을 좀먹는다.

무슨 짓을 할 것만 같았다.

장시언만 보면 머리와 가슴이 뜨거워지는 자신. 반면, 잡았다 생각하면서 저 멀리 가있는 무심한 장시언. 이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임에도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를 헤집고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

진은 달뜬 숨을 내쉬는 장시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장시언과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그러려면 그를, 그의 마음을 기다려야 한다.

이 조바심을 다스려야 한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든 장시언은 남겨두고 황후궁을 나왔다.

그리고 순행이라는 허울을 두르고 급히 광현성으로 떠났다. 어슴푸레한 새벽, 차고 축축한 공기가 머릿속까지 스며들길 바라며.

* * *

"폐하, 벌써 한 달이 지났사옵니다."

상선의 말에 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것은 그보다 진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루하루 날짜를 세어왔으니까.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진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떨어져 있으면 좀 나아지리라 생각했건만 오히려 더 병이 깊어진 듯했다. 참으로 허무한 결과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상선."

"예, 폐하."

"환궁할 것이다."

상선은 기쁨으로 눈이 커졌다.

"정말이시옵니까?"

"똑같이 병이 든다면 원 없이 얼굴이라도 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상선은 뭐라 말을 아뢰지 못했다. 진은 피식 웃으며 그를 물러가게 했다.

"오늘 바로 갈 것이다. 준비 시키도록 해라."

"……알겠사옵니다."

상선은 예를 취했다. 하지만 그가 물러가기 전, 문밖에서 금군으로부터 급히 전갈이 왔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금군이 장시언의 집을 호휘하던―엄밀히 말하면 장시언의 아우인 장영한을 감시하던―금군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던 진은 별생각 없이 그를 들이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경악할 만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진은 표정을 숨긴 채 금군을 물렸다. 하지만 그가 나가자마자 진의 얼굴은 급격히 일그러졌다. 기가 막혔다. 황후가 궁을 탈출하다니. 몰래 빠져나왔다거나 월담을 한 것은 아니라 당당히 연輦을 타고 나왔다지만 장시언은 분명 탈출을 한 것이었다. 제 아우와 함께.

손목에 힘줄이 튀어나온다. 장영한, 그 곰 같은 놈을 생각하니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상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침묵을 고수한 채 진의 하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원군의 집으로 갔다."

장시언이 아우를 만났다는 것은 이미 진이 그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는 뜻.

상선은 몸을 숙여 명을 받들었다.

"체비하겠나이다."

"연은 준비할 필요 없다. 내 직접 말을 타고 갈 것이다."

"……바로 준비 하겠사옵니다, 폐하."

그가 물러가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어지는 긴 한숨이 진의 심경을 잘 말해주었다.

일이 꼬여도 어찌 이리 꼬인단 말인가. 일단은 그를 설득하여 데려와야 한다. 무작정 궁을 나온 것을 탓하는 건 그다음이다.

순간 진은 헛움이 나왔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지금, 답지 않게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본모습을 숨긴 것은 장시언인데 왜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장시언과 관계된 일이라면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만 같다.

하! 한심하기 짝이 없군.

잠시 후,

"폐하, 모든 채비를 마쳤사옵니다."

상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은 생각을 지우고 서둘러 걸음을 했다. 성큼성큼 걷는 그 걸음은 어느 때보다 빨랐다.

최측근 호위무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은 날렵하게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호위무사들이 일어나 말에 올랐다.

광현성의 성문이 열리고 진은 고삐를 당기며 등자를 찼다.

히이이잉~!

말의 울음과 함께 모래먼지가 일었다. 가히 엄청난 속도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진은 자신이 제갈공명을 찾아가는 유비의 신세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부원군의 집을 방문한 지 3일째.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오늘도냐?"

"그, 그, 그, 그것이 혀― 아니, 마마께서 모,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그, 그러니까 저, 정신을 못 차리시고, 차리셨다가도 그, 금방 혼절을 하시고……."

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나 싶다.

첫날은 믿어주었다. 궁에 있을 적에도 몸이 약해 항상 약을 달여 먹던 장시언이었기에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할 것이 많아 몸에 탈이 났나보다 하고.

하지만, 둘째 날.

몸이 상한 것이 걱정이 되어 잠시 보기만 하겠다고 하자 장영한은 뜨악한 얼굴로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장시언의 병이 전염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뜬금없는 전염병 타령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장영한의 얼굴이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안면 근육을 파들파들 떨며 말하는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거짓말이라고 했을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굴뿐만이 아니라 장영한은 차마 진의 눈은 바라보지도 못했고 어버버- 거리며 목소리까지 떨었다. 그리고…….

장영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윤 상궁이 고개를 들었을 때, 진은 비로소 확신을 했다. 이들이 거짓을 아뢰고 있다는 것을. 장시언은 아픈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다는 것을.

윤 상궁은 완전 망했다는 얼굴로 장영한을 바라보았다.

진은 그들의 의중을 모두 파악했지만 무턱대로 장시언을 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자신을 헛걸음하게 하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찼지만, 장시언에게도 자신에게도 각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 여기고 그냥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 배려였다.

오늘도 이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내가 들어가 보겠다."

"어!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저, 전염이 되는 병이라고…, 의원이 저어얼~~대 아무도 들어가선 안 된다고, 시,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진짭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소, 손에 장을 지질 수……는 없지만…… 미, 믿어주십시오!:

"짐이 언제 거짓이라 하였느냐?"

"예엣?!"

화들짝 놀라 다시 바닥에 이마를 박는 장영한. 진은 그렇게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장영한을 진노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 잘 풀렸을 일이 이놈 때문에 틀어졌다. 정말이지 장시언의 아우라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비키거라."

"아, 아니 되옵니다! 가시면 전염이…!!"

"마지막 경고다. 비켜라."

"저, 전염이……."

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았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모르는 모양이군."

그가 다가가자 장영한은 언제 입을 놀렸냐는 듯 돌덩이처럼 굳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진은 검을 들었다. 정확히 목을 향해서.

그 순간――,

"폐, 폐하!!!"

윤 상궁이 헐레벌떡 달려와 납작 엎드렸다.

"폐하, 제발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황후 마마의 아우 되시는 분이옵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냥 아우도 아니고 아주 아끼는 아누라는 것도.

진은 여전히 검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고 되물었다.

"황후는 어디 있지."

윤 상궁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러다간 다 죽게 생겼다고, 정말 큰 사달이 날 거라고 생각이 든 것이다.

"………, 소인이 모시겠사옵니다."

진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금군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자를 포박하라."

이 자라 함은 장영한을 뜻하는 것이었다. 금군들은 오랏줄로 꽁꽁 장영한을 묶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만으로도 장영한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어디냐."

진의 목소리에 윤 상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하며 진은 다시금 초조해지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제야 장시언을 만나는 것이다.

* * *

한차례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흡사 무언가에 홀렸던 것만 같다.

황궁으로 향하는 연輦 안은 어색한 공기만이 가득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진은 힐끗 장시언에게 눈길을 주었다. 장시언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붉은 기가 감도는 목덜미. 민망해하고 있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부둥켜안고 서로의 마음을 고백했다. 고백만 한 것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하자는 맹약도 나누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보는 이들을 경악케 할 만한 애정행각이었다. 그러니 장시언이 저러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신기한 이였다, 장시언은.

사람을 감쪽같이 속일 정도로 맹랑한 본성을 가졌으면서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은 것도 그렇고, 죽도록 부끄러워했던 주제에 금방 떨쳐내고 과감해지는 것도 그렇다.

지금처럼 말이다.

"왜 그리 바라보십니까?"

진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을 보며 미소 지었다.

"많이 보고 싶었으니까."

"……그럼 진작 보러 오셨어야지요. 솔직히 한 달 동안 안 보러 오신 것은…읍!"

진은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넣어 점막을 흝었다. 혀가 얽히고 서로의 타액이 뒤섞이는 음란한 소리가 메워졌다.

진은 한참만에 장시언을 떼어내 마주보았다. 깊은 눈동자가 '왜…?' 하고 묻는다.

"가자마자 널 안을 것이다."

장시언은 순간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진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손을 쓸었다. 새하얀 피부는 이는 부끄러움을 아닌 척 가장을 하고 있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온기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한 달 치 모두 채울 생각이다."

"………."

"그러니 지금은 쉬어두는 것이 좋아. 궁에 도착하면 한순간도 쉬지 못할 테니까."

손으로 그의 볼을 매만지자 달아오르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창백하리만치 하얗기만 한 피부에도 붉은 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장시언은 긴 눈매를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 바라는 바입니다."

아쉬워하는 강희를 보내고 둘은 짐승처럼 뒤엉켰다.

어느새 자신의 위로 올라온 장시언을 보며 진은 피식 웃었다. 장시언은 진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던 순종적인 모습과 지금 중 어느 쪽이 더 취향이냐고 물었다. 진은 둘 중 어느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에겐 어떤 모습이든간에 장시언이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진은 장시언을 품에 안으며 사실 그대로를 답해주었다.

"너라면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아."

그리고 그 말이 시작이었다.

짙은 입맞춤이 이어진다. 한참 동안 계속된 입맞춤은 턱에서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입술이 닿았던 자리마다 습한 열꽃이 피어올랐다. 손이 다급하게 옷깃을 파고들고 고름을 풀었다. 비단옷이 어깨를 따라 흐르고 순식간에 흰 나신이 드러났다. 약간의 근육만 있을 뿐 어디 하나 살집이 없는 몸은 움푹 쇄골이 패여 있다. 사내를 끌어들이는 덫만 같다. 진은 그곳을 잘근거리며 천천히 핥았다.

"으, 하아…."

장시언은 그의 위에서 신음을 삼키며 얼굴을 숨겼다. 진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뾰족이 솟은 살점을 씹었다. 순간 '아!' 하고 장시언이 신음을 내지른다. 숨겼던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진은 자극에 바짝 선 유두를 핥으며 빨아들였다. 외로이 남아있던 다른 쪽 유두도 손으로 지분거렸다.

"흐읏…!"

장시언은 팔로 몸을 지탱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 미세한 떨림이 입 안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이 입술을 떼자 유두를 따라 타액이 실처럼 이어졌다. 부어올라 번들거리는 작은 살점은 그의 흥분을 돋우었다. 진은 손으로만 매만지던 유두 역시 쓸쓸함을 달래주겠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하며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다행히 그 생각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장시언의 긴 손가락이 진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장시언은 '으읏, 으… 하아…,' 습한 숨을 내쉬며 그를 더 가까이 이끌었다.

진은 도드라진 유실을 애무하며 매끈한 등을 쓸어내렸다. 허리에 걸려 있던 옷자락도 그의 손끝에 걸려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거친 손이 엉덩이 골 사이로 가르고 들어가자 장시언이 움칫 몸을 굳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진은 '쉬, 괜찮아.' 하고 장시언을 달래며 중지로 주름을 매만졌다.

하지만, 역시나 오랜만이라 그런지 바짝 긴장한 분문은 손가락 하나도 침입하기 어려워 보였다. 진이 조금만 짙은 애무를 해도 바로 물기를 머금고 젖어 들어가도록 길을 들여놨던 곳인데, 야속하게도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그것을 까맣게 잊은 듯햇다.

진은 아쉬운 듯 혀를 차며 금방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려놓겠다 다짐했다. 먼저 그러려면 일단 풀어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손이든 뭐든 간에 이대로 집어넣었다간 상처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진은 장시언을 품에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장시언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왜…?' 하고 작게 물었다. 대답하지 않고 침상 옆에 놓인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한동안 쓰일 일이 없던 향유병이 놓여 있었다.

진의 손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던 장시언이 그것을 보고 '어….' 하며 멍하니 생각을 하다가 진이 그것을 움켜쥐자 이내 이어질 일을 직감하고 얼굴을 붉혔다.

진은 알고 있었다. 장시언이 이 순간을 가장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장시언은 삽입을 하고 격력하게 추삽질을 할 때보다―물론 그땐 이성을 잃어 부끄러워할 틈도 없다지만―손이 분문으로 파고들어 안을 넓히기 위해 들쑤실 때 더 부끄러워했다. 손가락으로 찔러 올릴 때마다 고개를 숙인 채 다문이 사이로 신음을 흘렸다. 고작 몇 번의 손놀림만에 중심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만들어낸 물기가 안에서 잘박잘박 소리를 낼 때면 견디지 못하고 '그만….' 하며 진의 손을 잡아오곤 했었다.

진은 주름을 쓰다듬던 손에 그대로 향유를 쏟아 부었다. 질척이는 점성의 액이 손에서 넘쳐 뚝뚝 침상으로 떨어졌다. 진은 그것을 닫힌 주름과 회음부에 치덕치덕 바르고 향유병을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반쯤 선 성기를 움켜쥐었다. 미끌미끌 끈적거리는 액이 선단에 골고루 발라졌다.

"아! 아…!"

손이 상하운동을 할 때마다 쩍쩍 야한 소리를 내며 중심이 힘을 더했다. 뒤 역시 진의 손에 지배당한 상태였다. 장시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순간 진이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입구가 완전히 미끌거리는 데다가 손 역시 향유로 범벅이 되어 있어 침입은 어렵지 않았다. 진은 고개를 젖히고 헐떡이는 장시언의 턱에 입을 맞추며 손을 쉬지 않았다. 앞으로는 성기를 쓸고 뒤로는 안을 더듬었다. 삽입 시에 아픔이 덜하도록 벌리는 데에 집중했다. 손가락이 하나 더 안으로 들어간다. 계속되는 자극에 장시언은 진의 손 안에서 액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향유와 뒤섞여 음탕한 향이 퍼졌다.

안으로 들어간 손은 내벽을 누르며 사정없이 안을 벌렸다. 손가락이 세 개째 들어갔을 땐 움찔거리던 내벽이 반기기라도 하듯 조이며 감싸왔다. 그 느낌만으로도 아래가 터질 것만 같았다. 진은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장시언에게 입을 맞추었다. 안을 제 집 드나들 듯 들쑤시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성기를 쓸던 손이 사라졌다. 진은 옷을 벗어 던졌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장시언은 진의 어깨를 끌어안고 무릎으로 서서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었다. 허전함. 절정을 눈앞에 두고 순식간에 손이 빠져나가니 달아오른 몸을 주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와중 진이 장시언의 허리를 안아 끌며 몸을 맞추었다. 순간 장시언은 제 아래에 닿은 감각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진은 그 눈빛을 정확히 읽어냈다. 불뚝 선 검붉은 성기가 기가 질려 '저건 무리야.' 하고 말을 하는 것이다.

새삼스럽긴.

진은 피식 웃으며 장시언의 엉덩이를 잡아 벌려 천천히 몸을 내렸다. 장시언이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굳히며 허리에 힘을 주었지만 이미 풀어질 대로 풀어진 입구는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듯 어렵지 않게 귀두를 집어삼켰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주름이 벌어졌다.

"아, 아아… 으읏!"

즈윽――. 소리와 함께 진은 완전히 장시언의 안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하게 조여 오는 점막에 진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크윽. 시언아…."

"아… 아아……!"

번지는 쾌감을 견디기 힘든 것처럼 긴 손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장시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그를 처음 안았던 그날처럼 말이다.

진은 여전히 장시언의 엉덩이를 잡아 벌린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장시언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나누는 정사였지만 그는 정확히 장시언의 쾌락점을 찾아 꿰뚫었다. 물이라도 만난 듯 안에서 날뛰었다. 깊게 유두를 빨며 혀로 핥자 장시언이 등을 휘며 자지러졌다.

"아! 아앗! 아아앗―!"

"헉. 헉. 크윽."

탁. 탁. 탁. 단단한 허벅지에 여린 살이 부딪히며 찌걱찌걱 음란한 소리가 났다. 완전히 선 장시언의 성기는 진의 복부에 비벼지며 또다시 액을 내뱉고 있었다. 진이 빠져나올 때마다 한계까지 벌어진 분문에서도 질금질금 점액을 내보냈다.

진은 무릎과 정강이로 지탱하느라 무너져 내리는 장시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자리에 눕혔다. 허리 아래에 베개를 받쳤다.

장시언의 성기를 쥐고 고간을 밀어 넣으며 진은 짐승 같은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시언아…! 시언아…!"

"흐읏! 앗! 아앗…!"

진이 장시언의 무릎 아래에 팔을 넣어 다리를 벌리자 교접은 한층 더 박차를 더했다. 후두둑 후두둑 땀이 울긋불긋한 가슴으로 떨어져다. 장시언은 흐느끼며 팔을 올렸다. 진은 장시언이 매달릴 수 있도록 상체를 낮추었다. 긴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이 목덜미에 느껴졌다.

격한 움직임에 침상이 끼익끼익하며 흔들렸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절정의 순간.

"크윽, 시언아. 시언아―!"

"흐으… 아! 아! 아아앗―!"

맞닿았던 배에 팟―, 하고 희뿌연 탁액이 번졌다. 장시언은 '아… 하아…….' 하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장시언이 쾌락의 잔재를 다 쏟아내자마자 진 역시 장시언을 힘껏 끌어안으며 길게 사정했다. 끊임없이 장시언의 귓가에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며.

장시언은 눈도 뜨지 못한 채로 마치 무의식처럼 '나도…, 나도 사랑해…….'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엉긴 두 나신은 격한 숨을 고르며 그렇게 한참 동안 쾌락의 여운을 즐겼다.

장시언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을 때도 둘은 여전히 몸을 연결한 채였다.

진은 난감해하는 장시언을 보고 피식 웃으며 손을 잡아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격렬한 정사였지만 장시언은 지친 기색은 별로 없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비리비리한 몸만 보면 정사 후에 바로 나가떨어질 것만 같은데 의외로 체력이 좋았다.

진이 계속해서 손가락과 손등에 촉촉 입을 맞추고 손가락을 핥으며 애무하자 장시언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폐하…, 조금만 쉬었다가…….' 하고 그를 제지했다. 하지만 진은 물러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한순간도 쉬지 못할 거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벌써 잊은 것이냐?"

장시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은 곧은 다리를 천천히 쓸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히 오래 쉬었다고 보는데."

"……조금만 더요. 지금 하는 건 힘에 부칩니다, 폐하."

순간 진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럼 그러도록 하지."

뜻밖의 말에 장시언은 놀라면서도 좋아했다. 하지만,

"대신."

"……?"

"이제부턴 날 폐하가 아니라 진이라 부르거라."

"예?"

진의 말에 장시언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진은 그런 장시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손에 입을 맞추었다.

"윤진贇辰. 이제 아무도 부르지 않는 내 이름이다."

부르지 않는 게 아니라 못 부르는 것 아닌가.

뻔뻔한 장시언에게도 황제를 이름으로 부르라는 것은 엄청난 통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존의 고귀한 존함을 부를 수 있는 이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었다. 이것은 장시언이 절정의 순간이나 흥분하면 내뱉는 반말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진은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나를 황제가 아닌 한 사내로, 네 정인으로 대해다오. 나 역시 너를 그리 대할 것이다."

이어지는 가벼운 입맞춤. 장시언은 눈을 감고 그 입맞춤을 느꼈지만 입맞춤이 끝난 이후에도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저… 폐하……, 그, 그것은 좀……."

진은 난색을 표하는 장시언을 무시하고 한술 더 떴다.

"그리고 둘이 있을 땐 반말을 해도 좋다. 아니, 반말을 하거라. 난 네가 높여 말할 때마다 벽이 느껴져서 싫다. 네 본성격을 알았으니 이제 날 편히 대해주길 바란다."

"………, 그러다 제가 오만방자해지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너라면 그것도 귀엽다 여길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진이 이렇게까지 말할 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장시언은 벙찐 얼굴로 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무리 저라도 항상 반말을 하는 건 힘듭니다. 이미 존댓말이 습관이 되어서……."

"그럼 이제부터 고치면 되겠군."

"폐하……."

"진."

진이 바로 정정을 하자 장시언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윤진….' 하고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걸 그냥 넘어갈 진이 아니었다.

"잘 안 들린다. 뭐라고?"

"……윤진."

"다시."

"………."

"시언아, 다시."

"진…."

진은 그제야 만족한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답지 않게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런 얼굴을 배반하기라도 하듯 아래는 흉흉할 정도로 불뚝 힘이 들어갔다.

장시언은 제 안에서 딱딱하게 굳어가는 성기를 느끼곤 흠칫 놀라 진을 바라보았다.

"조, 조금 더 쉬라고 하신 거 잊지 않으셨지요? 아직은 아닙니다."

"유감이지만,"

진은 음욕적인 미소를 지으며 장시언의 다리를 어깨에 올렸다. 장시언이 설마…,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은 장시언이 설마 싶었던 것을 바로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휴식은 끝이다."

* * *

짹- 짹- 짹짹-…

"많이 안 좋으면 태의를 부르라 할까."

"아니…. 좀 잘래……."

장시언은 엎드려 누워 웅얼거렸다.

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저라도 습관이 되어 항상 반말을 하는 것은 힘들다고 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을 한다. 물론 몇날 며칠을 몸을 섞으며 닦달하고 괴롭혀 얻어낸 결과물이었지만.

"그럼 뭐라도 좀 먹고 자라."

"별로 입맛이 없는데……."

진이 그래도 먹어야 한다고 나인들을 부르려 했지만 장시언이 진짜 입맛 없다고 극구 말리는 바람에 뜻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고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평소 탁자 위에 있는 작은 자기에 주전부리들이 들어 있던 것이 생각나서다.

뚜껑을 여니 다행히 안에 유작과가 있었다. 오래된 건가 싶어 먹어보니 채운지 얼마 안 된 것인지 먹을 만했다. (엄밀히 따지면 맛있는 것이었지만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진에겐 그저 먹을 만한 정도였다.)

"입맛이 없으면 이거라도 먹어라. 속을 너무 비워두는 것은 좋지 않다."

진은 장시언의 머리맡에 유작과가 담긴 자기그릇을 놓아주고 하나를 집어 손에 쥐여주었다. 장시언은 가만히 유작과를 바라보다가 큭,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진을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약간 오묘한 포옹이었다. 흡사 아이를 대하는 듯한.

"저만 이리 쉬어 송구합니다. 에구… 힘드셔서 어쩝니까. 밀린 정무 잘 마치고 오십시오."

진은 순간 얼이 빠져 멍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말투만 존대지, 장시언은 진짜 진을 아이 취급하고 있었다.

허 참, 기가 막혀서.

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오냐.' 하고 답하고 장시언에게 입을 맞추었다.

중병이었다, 중병. 장시언이 하는 짓이면 죄다 귀엽게만 보이니 정말 큰일이었다.

황후궁을 나오자 상선과 나인들이 줄줄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의 오랜 번뇌를 아는 상선은 별다른 말없이 그에게 예를 취했다. 진은 방금 전까지의 얼굴을 싹 지우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편전으로 간다."

상선으로 '예, 모시겠사옵니다.' 하며 명을 받들었다.

편전으로 가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걸음이 가벼운 것은 마음이 가벼워서 인지도 모른다. 하늘이 어찌나 청명한지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애달아하고 번뇌하던 나날은 스쳐 지나간 바람처럼 흘러갔다. 조급하고 불안했던 마음은 그렇게 행복하게 희석되어 사라져가고 있었다.

장시언을 온전히 얻음으로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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