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시탈 황후-7화 (7/8)

7장

세상 모든 일엔 시기적절한 '때'라는 것이 존재한다 중요한 일이라고 조급하며 혼자 전전긍긍 아둥바둥 해봐야 결국 그 '때'라는 것이 맞지 않으면 될 것 도 안 된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장시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생각했었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언젠가 될 지 모르는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물론, 그 '때'가 왔을 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황제가 순행을 간지 벌써 한 달

장시언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처음엔 평소 그의 지론대로 '조급해 해봐야 될 것 하나 없다'라고 생각을 했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말이다 사실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순행이 길어지는 것이.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해 그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정하는데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장시언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마린 문어를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황제가 순행을 간 곳은 도읍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다 아니 아주 가까웠다 길면 이틀. 열심히 가면 하루면 당도하는 , 그가 장시언에게- 엄밀히 따지자면 장시언의 가문에- 하사한 은천강 일대 지역이었다 그런데 흡사 전국방방곡고을 도는 것처럼 늦어도 너무 늦으미 기다리다 지치다 못해 화가 나는 것이다

장시언은 천하태평 느긋한 성격이었지만 뭔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것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후딱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흡사 무인도의 마른 장작 같다고야 할까 평소엔 볕을 쬐며 유유자적 보내다가 아주 작은 불씨게 활활 타오르는 바짝 마른 장작 말이다

장시언은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고 푹-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있었는데 이제야 그걸 알 것 같다.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기분, 바로 그것. 그의 머릿속엔 '모 아니면 도다 어서 밤나무에게 사실대로 얘기하고 마음 편히 살자' 그 생각뿐이었다 헌데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감감무소식에 오질 않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이 피폐해지는 것이다.

질겅질겅~

[아아...]

질겅질겅~ 질겅질겅~

[에효...~]

[문어를 드시든지 한숨을 쉬시든지 둘 중 하나만 하십시오, 마마]

보다 못한 윤 상궁이 한 마디 툭 내던졌다 아까부터 상전이 말은 안하고 한숨만 푹푹 쉬어대니 답답했던 것이다 사실 그 모습은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며칠 동안 계속 보아온 것인데 이유를 알지 못하니 마음이 편치 못했다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요 며칠 계속 근심이 있어 보이십니다]

[폐하께서 언제 오시는지 윤 상궁도 모르지?]

[예?]

윤 상궁은 폐하의 소식을 묻는 상전을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이냐 흐음, 흐래서 그러셨구만?하고 웃음을 흘렸다

[왜요? 보고 싶으십니까? 한 달 동안 연락조차 없으시니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조마조마 하시지요?]

[....지금 굉장히 재미있어 하고 있는게 느껴지는데]

[역시 눈치가 빠르시내요? 호호호~]

장시언이 그녀의 웃는 얼굴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받아친다 뻔뻔하기가 이젠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할 말이 있어서!]

[괜히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보고 싶으실만하지요, 무얼]

[아니라는데도! 사람을 머리끝까지 발끝까지 발라먹고 연통도 없는 인간을 내가 왜-웁!]

윤 상궁은 황급히 장시언의 입을 틀어막았다

[밖에서 듣습니다 발라먹는게 뭡니까 발라먹는게 에휴,,,요즘 들어 너무 조심성이 없으십니다]

장시언은 입이 막힌 채 우부부- 거리다가 윤 상궁의 손을 치워버렸다 보고 싶긴 개뿔!

[사실이 그렇잖아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내가 누군데? 내가 웬만한 사람이냐고?]

윤 상궁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눈빛으로 말을 했다

...누구긴요 좋은 머리를 도통 쓸 생각을 안 하는 영의정 장인욱 대감의 만사태평 골칫덩이 큰아들이시지요

[어떻게 감히 이래? 으으, 건방진 밤나무! 봐줬더니!!]

'감히'란다 '감히'.지존께 '감히'라는 말이 가당키나 핝가 그리고 봐주긴 뭘 봐주셨다고...

윤 상궁은 멍한 눈빛으로 장시언을 바라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둘러보실 곳이 많으셔서 그러시겠지요 곧 오실 것입니다]

진정하시라는 윤 상궁의 말에 장시언은 씩씩 거리던 숨을 고르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잦은 흥분은 몸에 좋지 않다 이러다가 또 돌팔이가-태의가-오겠다고 하면 곤란하다

[...은천강 일대라고 해봐야 둘러볼 곳은  뻔한데 많기는 무슨]

윤 상궁은 흠,하며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이다

황제가 이토록 오래 궁을 비우는 것은 장시언이 듣기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자리에 없는데도 황궁이 잘 돌아가는 것을 보면 분명 정무를 보고 있긴 하다는 것인데 그 말은 즉, 순행을 간 곳에서 처리해야 할 정무를 받아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상하지 않아?]

[예? 뭐가 말씀입니까?]

[안 돌아오시고 밖에서 모든 보고를 받고 정무를 보시는 것 말이야]

[........듣고보니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

[.......]

[윤 상궁]

[예, 마마]

[아버님은 좀 뵈어야 겠어 황후궁으로 오시라는 연통을 보내줘]

[영의정 대감을요?]

윤 상궁은 반문을 하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설마 잊으신 것은 아닐 텐데...

[저 ... 마마, 하지만...]

[폐하의 윤허가 없으면 만나지 못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난 좀 뵈어야 겠어]

장시언은 단호히 대답했다 그라고 모르지 않는다 잊을 라야 잊을 수도 없었다 황제가 어느 날 갑자기, 황후에데 독대를 청하려면 그전에 자신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고 명을 내렸을 때 당황스러워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을 정도니까.

[.....알겠습니다]

윤 상궁은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명을 받들어 서둘러 나가볼 뿐이었다 안에 홀로 남은 장시언은 미간이 찌푸려진 채 '에잇'하며 다시 말린 문어를 집어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글쎄요 그곳에서 정무를 보시는 것은 맞지만 왜 그러시는 것인지는 저도 잘....]

연통을 받고 부랴부랴 입궁한 장인욱은 폐하께서 왜 순행에서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묻는 말에 확실한 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 역시 그 부분은 의아했지만 정말 아는 바가 없었던 탓이다

[짐작 가시는 바도 없으십니까?]

아버지라면 뭐라도 좀 아실 줄 알았는데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자 장시언은 잘 생각해 보시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그래도 장인욱에게선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예 전혀]

[......그렇군요]

아 진짜 밤나무 자식 신경 쓰이게 하네

장인욱은 생각에 잠긴 자신의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혹시...

[혹시 ? 혹시 뭡니까?]

[생각하실 것이 있어 그러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

장시언은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생각할 것?

[무슨 말 이십니까 그게?]

[제 짐작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폐하께선 태자가 되신 뒤부터 마음이 복잡하시거나 생각하실 것이 있으면 광현성에 머물면서 은천강을 보시곤 했습니다]

광현성은 은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곽이다 황제가 은천강 일대를 둘러본다면 머물 곳은 그곳뿐이었지만 그 밖에도 과거 큰일을 결정할때 황제는 광현성에 머물곤 했었다

[허나 ,이번에도 그런 것인지는...]

아니 틀림없이 그거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환궁을 안 하는 것이다 생각할 것이 있어서

[...하긴 강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니까]

장시언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다가 장인욱이 '예?'하고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근데 요즘 폐하께서 신경 쓰실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장인욱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제가 알기론 없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원비가 척결되고 난 뒤에 모든 일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태자 책봉식뿐인데 그 역시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이 되고 있다

장시언은 대체 그럼 뭘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들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장인욱은 당황을 했다 아들은 고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니 설령 있다 하더라도 절대 남에게 티를 내지 않는 아이이지 않았던가.

[..폐하께서 생각하실 것이 있어 가신 것이라면 곧 오실 것입니다 마마, 항상 그곳에서 스스로 답을 찾으셨던 분입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뭔지 모르지만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혼자 그곳에 가서 틀어박혀 있는 것이요

장시언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예, 곧 오시겠지요' 하고 대답을 했다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였다 입신양명을 거부한 것만으로도 온갖 불효를 다 저지른 그였기에 괜한 걱적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요즘 영한이는 어찌 지내고 있습니까? 얼굴 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도통 걸음을 안 하니 입도 근질거리고요]

장시언이 영한의 안부를 묻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던 장인욱이 돌처럼 굳어진다

[......, ........잘 지냅니다]

응? 미묘한 말 사이 공백에 장시언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영한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입니까?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가요?]

우애 좋은 형제로 이름을 드높이고도 남은 장씨 형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장시언은 아우를 놀리는 것만큼이나 아주 아꼈다 그의 아우는 덩치는 곰 같지만 마음은 순하디순해 모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여인들에게 자주 퇴짜를 맞는 것도 생긴 것과는 다른 이 성격 때문이었다

장시언의 얼굴이 점점 더 걱정스러운 빛으로 물들었다 어린 시절 자신과는 달리 잔병치레를 많이 하던 아우다 다 크고 나서는 그런 적이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걱정이 된다

장인욱은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지 못하다가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걱정하는 장시언을 보고 있자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아무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마마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등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땀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상함을 감지한 장시언은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정말이요?]

[예 정말입니다]

[......]

[......]

[허면 내일 좀 입궁을 하라고 해주십시오]

장시언이 잠시 뜸을 들이다 그렇게 말을 하자 장인욱의 얼굴엔 한층 더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그, 그건 좀...]

거짓말

장시언은 확신했다 지금 아버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헌데 대체 왜?

[아무 일도 없는데 왜 못온다는 것인지요?]

[... 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그 녀석이 요즘 연애를 하느라 아주 바빠서...]

하! 장시언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영한이가 연애를 하느라 저를 보러 올 시간이 없다 하던가요?]

원망하는 투가 아니었다 신빙성이 전혀 없지 않느냐는 속뜻을 지닌 말이었다

장인욱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핑계로 댄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허무맹랑 했다 그의 아들들은 사이가 아주 좋았고 특히 둘재 아들 장연한은 알아주는 형님바보였다

[...건강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나중에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장인인 자신이 거짓말을 고했다는 것을 일부 시인했다 그는 장시언의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 괜히 속여봐야 역효과라는 것도

'나중에 함께'

더는 묻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시군 장시언은 돌려 말한 장인욱의 말을 귀신 같이 알아듣고 더 이상 추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조만간 꼭 함께 입궁을 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장인욱은 흔쾌히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 대답에도 장시언은 머리가 지끈거려옴을 느꼈다 왜 이렇게 주변에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밤나무에서부터 아버지까지, 자신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늦어지면 제가 직접 사가에 가볼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윤허하시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아시겠지요?]

[무,무슨 그런 큰일 날 말씀을! 절대 안됩니다! 절대!!]

장인욱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황후가 폐하의 윤허도 없이 궁 밖을 나오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더욱이 집에는, 집에는...

장시언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격한 장인욱의 반응에 흠칫 놀랐다 아버지도 참, 왜 이렇게 흥분을 하신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정말 그러겠어?

[...그러니까 조만간 꼭 오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꼭 그리 할테니 폐하의 윤허 없이 궁을 나온다는 그런 생각은 저얼~ 대 하지 마십시오 아시겠지요?]

어찌나 간곡히 청을 하는지 싫어도 싫다는 말이 나오질 않겠다 장시언은 속으로 걱정 마시라고, 그런 일 절대 없다고 대답하며 '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의 연속

이때까지 장시언은 전혀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 순식간에 들이 닥쳐 사람을 충격으로 도가니로 몰고 가면,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며칠 뒤에 그것을 직접 경험으로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마마마 소자 강희이옵니다!]

들어가도 되냐는 우렁찬 아이의 목소리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장시언은 '들어오세요'라는 말을 하며 서둘러 부채를 챙겼다 요즘 매일 이맘때쯤이면 오는 밤송이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오는 것이 다반사였다 연무장에서 바로 오느라 그런 것이데, 처음 황후궁에 그러고 왔을 때 옷차림을 보고 무술을 익히다 온것을 짐작한 장시언이 고생했다면 땀을 닦아주고 부채질을 해준 뒤부터는 너무나 당연스럽게 연무장에서 곧장 황후궁으로 달려왔다

부채질을 해줄 때에는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감는데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 가 없었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의 한 줄기 빛과 같다고 할까

문이 열리고 강희 황자가 안으로 들어온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흰본이 빨갛다 귀여운 밤송이 녀석.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훗. 이놈의 인기~ 내가 그렇게 좋냐?

그의 밤송이는 들어오자마자 답삭 장시언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장시언은 뿌듯함을 느꼈다 어른스러운 성정 탓에 도통 어리광을 부릴 줄 모르던 아이가 이젠 아이답게 제법 어리광을 부리니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의 어리광은 황제가 순행을 간 뒤부터 부쩍 늘었다

황제가 있었다면 오래 있지 못하고 금방 돌아갔을 텐데 가라고 하는 이가 없으니 밤이 늦어도 장시언과 두러두런 얘기를 나누고 황후궁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어리광이 늘은 것이다.

[더운데 또 달려온 겁니까?]

[...어마마마를 빨리 뵙고 싶어서요]

어윽, 귀여워!

본래 성격 자체가 능글맞은 장시언은 히죽거리며 밤송이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장시언을 끌어안고 그의 배에 얼굴을 묻고 있던 강희 황자는 한참을 쥐죽은 듯 가만히 있다가 들릴 듯 말 듯 자게 소곤거렸다

[..예]

장시언은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코피가 줄줄 흘러나올것만 같다 무슨 이런 귀여운 생명차게 있단 말인가. 밤송이가 너무 귀여워서, 한 달 넘게 연통 하나 없는 밤나무도 약간 용서가 된다 좀 이상한 비유지만, 시어머니가 미우면 서방도 미워진다더니...

장시언은 영건으로 손을 뻗었다 어렵지 않게 아이를 안아들고 의자에 앉혔다 이마에 땀을 닦아주가 아이가 환한 미소를 짓는다

[수라를 들어야지요 뭐 먹고 싶은 것 있습니까?]

[뭐든 다 좋습니다]

그래요? 장시언은 웃으며 윤 상궁을 불렀다 윤 상궁엣 수라를 들이라고 하며 황자와 겸상을 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윤 상궁은 '예'하고 허리를 숙이며 종종걸음을 물어갔다 보는 눈이 있다 보니 깍듯이 예를 취하는 것이었다(평소엔 장시언을 업어 키우느라 안 그래도 허리가 휘어 아파죽겠다고 잘 건너뛰었다)

[오늘은 무엇을 배웠습니까?]

[어.. 그냥... 장작 패기요...]

[...오늘도요?]

[예...]

강희 황자는 풀이 죽은 것처럼 어깨를 늘였다 벌써 일주일 째 장시언은 왜 허구헌 날 장작을 패냐고 묻고 싶었지만 밤송이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오늘도 더는 물어보지 못했다

류운인가 뭔가 하는 그 뭐시깽이는 왜 애한테 장작만 패게 하는 거야? 이러다 궁에 필요한 장작은 죄다 밤송이가 대주게 생겼다... 혹시 무술의 고수가 되기 위해선 우선 죽어라 걸레질만 해야 한다거나 나무에 윗옷 걸기 같은 걸 미친 듯이 해야 한다거나 뭐 그래야 하는 것일까? 무의미해 보이는 그 짓을 계속 하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 이미 고수가 되기 위한 체력이 키워져 있는, 뭐 그런 것?

장시언은 장작 패기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든 갖다 붙이려는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장작 패기의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장시언이 알지 못하는 속사정이 있었다

[스승님께서 조만간 가르쳐 주시겠지요]

[네? 모라고요?]

[아니요 아닙니다, 어마마마]

강희 황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시언은 강희 황자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괜히 머쓱해진 아이는 배가 고프다며 말을 돌렸다 자신의 연애만 빼면 눈치가 백 단인 장시언은 뭔가 수상하다고 느끼며 실눈으로 밤송이를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밤송이가 '어어...'하며 눈을 피한다

뭔가 있다 분명 뭔가가 있어 뭐냐, 뭐야? 밤송이 너 숨기는 거 있지?

갸르스름한 눈매는 한층 더 살쾡이의 눈으로 변했다

영민했지만 남을 속이는 재주는 가지지 못한 강희 황자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이를 구한 것은 수라상을 들인다는 윤 상궁의 목소리였다

장시언은 잠시 말없이 강희 황자를 바라보다가 눈을 풀었다 말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을 한 것이다

[안으로 들이게]

게다가 사실은 배가 고프다고 한 말도 괜히 한 말이라지만 신경이 쓰였다

윤 상궁의 생각대로 그는 이미 팔불출이 다 되어 있었다

[아바바마께선 언제 오실까요?]

글쎄... 나도 궁금하다 밤나무가 언제 돌아올지 오면 아주 그냥 독수공방의 쓴맛을 보여주려고 벼르는 중인데.

[..곧 오실 겁니다]

아마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장시언은 천장을 노려보았다 반듯하게 누운 자세로 한참 동안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원망의 대상이 눈에 비치는 것만 같았다

[빨리 순행을 마치고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밤나무야 너의 아들 밤송이도 널 기다린다 언제 돌아올 셈이냐? 내가 대바늘로 허벅지라도 찔러야 돌아올 생각이냐? 날 이렇게 외,외,오-... 아쿠든 그렇게 만들어 놓고 용서를 받을 성 싶냐?!

[어마마마께서도 아바마마가 보고 싶으시지요?]

[...예 뭐 조금...]

[조금이요?]

[...금 보다는 많이요]

코웃음을 치며 '웃기시네! 하나도 안 보고 싶다!'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어둠속에서도 느껴지는 순진한 아이의 눈빛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그래, 보고 싶다 아주 많이. 혼자라는 것이 어렇게 외로운 것일줄은 몰랐다 혼자 놀기의 달인이라 불리던 이 몸인데

[아바마마께서 오시면요...]

응? 아이의 느린 목소리에 장시언은 고개를 돌렸다 밤송이는 잠기운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오시면 ... 제기차는 것을 ...보여드릴 겁니다 ...이제 아주 잘 차게 되어서요...]

그래 아직 이 헐랭이의 제왕을 따라오려면 멀었지만 실력이 일취월장하긴 했더라

[아바마마께서도 ...같이 차면 ... 좋을 텐데...]

뭐? 밤나무가 제기를?

...,...,...

장시언은 제기를 차는 황제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어울린다 진짜 안 어울린다 실제로 보면 박장대소를 할지도.

하지만...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밤송이가 제기를 차는 것을 황제와 둘이 지켜보는 것도 어울리지 않겠지만 밤나무가 제를 차는 것을 웃으며 황자가와 지켜보는 것도.-정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오히려...

[.....]

후우... 광현성으로 직접 찾아갈까...

장시언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강희 황자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 있었다 이불을 잘 덮어주며 그는 달빛이 들어오는 창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 이 정도면 오래 참은 거지 궁에서 기다리는 것은 이제 충분해 직접 가서 왜 입궁을 안 하냐고 묻고... 아니 묻지고 따지지도 말고 그냥 냅다 끌고 와야겠다 좋아 내일 바로 출발을 하면...

장시언은 눈을 감았다 근 한 달간 꿈자리가 뒤숭숭했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미시가 다 되어갈 무렵 출궁을 하기 위한 모든 채비를 거의 마쳤지만 황후궁은 여전히 분주했다 궁녀들은 모두 무언가를 들고 쉴 새 없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광현성에 가야겠다는 황후의 말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궁녀들은 모두 무언가를 들고 쉴 새없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광현성에 가야겠다는 황후의 말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뜬금없이 웬 광현성? 하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그간 황후 마마께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까 하는 궁녀들의 걱정 어린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마음 고생을 했다는 그녀들의 생각이 틀리진 않았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본모습에 대한 것을 고백하기 위해 황제를 기다리고 오지 않자 전전긍긍해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심약한 황후 마마께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까 하는 궁녀들의 걱정 어린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마음 고생을 했다는 그녀들의 생각이 틀리진 않았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본모습에 대한 것을 고백하기 위해 황제를 기다리고 오지 않자 전전긍긍해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심약한 황후 마마께서 폐하께 혹여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하느라 전전긍긍해 하시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황후궁의 궁녀들은 언제 보아도 하나같이 순하고 맹한 구석이 있었다

참 해맑기도 하지

윤 상궁은 그런 궁녀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넌시지 장시언에게 물었다

[정말 가실 겁니까?]

[이제 곧 떠날 텐데 아직도 그 소리야?]

장시언은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소곤거렸다 윤 상궁은 벌써 다섯 번째 똑같은 물음을 하고 있었다

[가서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계획대로 솔직히 얘기해야지 그동안 본 모습을 숨겼다고]

더는 답답해서 못 참겠어 장시언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이미 윤 상궁에게 본모습을 숨긴 것을 폐하께 솔직히 얘기할 거라고 말을 해놨기에 숨길 것도 없었다 더욱이 윤 상궁은 그 말을 들었을 때 희한할 정도로-전에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적극 찬성을 했었다

[그래도 억울하니까 정강이 정도는 차줘야겠어. 한창때인 나늘 독수공방하게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돼 날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한-]

[흠흠!]

윤 상궁은 궁녀 한 명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헛기침을 했다 장시언은 딱 입을 다물었다

[정강이를 걷어차시려거든 제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세요 폐하의 몸에 상처 내는 것을 다른 이들이 보면 폐서인 확정입니다]

윤 상궁은 장시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얘기했다 말하는 것도 어찌나 빠른지 궁녀가 그들의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말이 끝나 있었다

궁녀는 깊이 예를 취했다

[저...., 황후 마마]

[무슨 일이냐?]

[이것을 어떤 상인이 올리고 갔사옵니다]

응?

장시언은 궁녀가 내민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흰 봉투에 넣어진 서찰이었다

[서찰이 아니냐? 어느 상단인지는 물어보았느냐?]

[수라간에 인삼을 대주는 상단이라 하더이다]

수라간에 인삼을 대주는 상단이라면....

전혀 모르겠다 몸에 좋은 인삼을 먹을 줄만 알았지 어디서 납품하는지는 모른다 음. 경상이려나? 장시언은 윤 상궁에서 눈빛을 보냈다 그게 어디야?

[원상에서?]

윤 상궁은 장시언의 눈빛을 읽고 궁녀에게 물었다 궁녀는 '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원상?

장시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원상이라면 그 역시 아주 잘 아는 상단이었다

원상의 행수인 임상운은 그의 아버지 장인구과 막역한 사이로 정권에 휘둘리지 않는 덕을 갖춘 깨끗한 장사만을 고집하는 이였다 이번 원비의 일에 연루되지 않은 유일한 상단의 행수이기도 했다

헌데, 원상이 언제부터 황실에 인삼을 대주기 시작한 거지?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 보거라]

장시언은 궁금한 것은 잠시 넣어두고 궁녀를 물렸다 궁녀는 다시 한 번 예를 취하고는 물러났다 궁녀가 사라지자 장시언은 윤 상궁에게 궁금했던 것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원상이 언제부터 황실 수라간에 인삼을 대주었어?]

[최근 들어서입니다 저도 알게 된 것은 얼마 안 되었는데 아무래도 폐하께서 따로 명을 내리신 모양입니다]

[흠, 그래?]

하긴 원상 같은 상단과 가까이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어차피 밤나무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솔직히 경상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장시언은 봉투아세 서찰을 꺼냈다 반듯하게 접힌 서찰은 어렵지 않게 펼쳐졌다 하지만 장시언은 그 서찰을 읽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형님, 저 형님의 아우 영한 입니다 형님이 이 서찰을 읽고 계신다는 것은 이것이 무사히 형님의 손에 도착하였다는 뜻이겠지요? 아아,정말이지 다행입니다 이 서찰이 혹여 금군의 손에 넘어가면 어쩌나 많이 걱정했습니다

형님 이 서찰에 많은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을 보시면 수성궁의 비원으로 와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꼭 나오셔야 합니다 꼭이요

그리고 형님께서 이것이 저의 서찰인지 못 믿으실 까봐 덧붙입니다 참나무에 매미. 제가 형님을 업어서 옮겼습니다}

[영한아...! 영한아....!!]

비원에 도착한 장시언은 사방을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아우를 불렀다 윤 상궁도 '어디에 계십니까?'하며 동참했다

그의 아우는 저만치 떨어진 나무 뒤에서 곰처럼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윤 상궁과 장시언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형님!!!]

영한이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달려온다 몸만 보자면 족히 장시언의 두 배가 되고고 남을 그는 형님을 끌어안고 꺼이꺼이 눈물을 흘렸다

[제가 보낸 거라고 믿어주셨군요! 전 형님이 그 서찰을 보고 콧방귀나 뀌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장시언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우를 보며 언제 뒷걸음질을 쳤나는 듯 아우를 위로했다

[콧방귀라니, 당치않다 참나무에 매미면 말 다 끝난 것이지]

[어흐윽, 형님!!!]

[아우야!!!]

둘은 감격에 젖어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름다운 형제야라고 둘은 생각했지만, 형제의 눈물겨운 상봉을 바라보는 윤 상궁의 얼굴엔 황당한 빛이 역력했다

[그래서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장시언은 이제 좀 진정이 된 아우를 살피며 물었다 아우는 못 본사이 산도적이 되어있었다 순한 인상이 덥수룩한 수염으로 다 가려지니 정말 산도적이 따로없었다

영한은 그간의 서러움을 다 토해냈다

[말도 마십시오 형님 제가 그동안 처소에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뒷간을 갈 때도 감시를 당하면서 그리 살았습니다 찐만두만 먹소 살았다니까요!]

[뭐? 찐만두만?]

장시언은 흥분했다 다른 것도 용서가 안 되지만 찐만두만 먹인 것은 정말 용서가 안 된다

[대체 누가? 아니 , 대체 왜?]

'누구긴요 폐하시지요! 폐하의 명으로 금군들이 저를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지켰습니다!'

그래서 색시도 계속 못 만나고....  영한은 중얼거리다 다시 설움이 복받치는지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아직 장가도 안 간 녀석이 색시 타령을 하는 걸보니 어지간히 만나는 여인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장시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폐하께서?아니 폐하께서 대체 왜...?]

뭐 때문에 영한이를 감금한단 말인가? 거기다 찐만두만 먹이면서.

궁금증은 곧 풀렸다 영한이 비원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빽 소리를 지른탓이다

[그야 제가 형님께 폐하께서 형님의 정체를 알았다는 것을 말할까봐서요!!!!]

.....뭐?

장시언은 사색이 되었다 지금 이녀석이 뭐라고 한 거지? 누가 뭘 알아?

[...그게 무슨 소리냐?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장시언은 어서 말을 해보라고 대답을 독촉했다 영한은 장시언의 호통에 깜짝 놀라 눈을 깜박이다가 아는 바를 다 털어놓았다

[그, 그러니까 폐하께서 저번 순행 때, 아버님을 뵈러 친히 걸음을 하셨는데, 그때 함께 술을 드시면서-...]

영한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달 밝은 밤, 색시와 달을 보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하인들의 폐하께서 오셨다며 극성을 피웠다 인사를 드리기 위해 안채로 향했는데 기척을 내기도 전에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이리 술을 잘 마시는 줄은 몰랐군'

'하하 소신 안 마셨을 뿐 못 마시지는 않습니다, 폐하]

'그런가?'

'예 실은 저희 집안이 대대로 술고래입니다'

'흠, 그런 것치고는 황후는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던데'

'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집안에서 제일 잘 마시는 이가 시언이-아차차, 황후 마마이신데요 아주 들이붓습니다. 술독을 끌어안고 잠이 든 적도 있습니다 그 녀석-아차차, 황후 마마께서'

'......그래?'

'예! 어릴 적부터 어디서 귀신같이 구해 오는지 술을 홀짝홀짝 마시더니, 나중에 술로는 따를 이가 없었습니다'

'구해와? 황후가 술을 밖에서 구해왔단 말이냐?'

'술만 구해왔겠습니까? 밖에서 별거, 별거 다 구해 왔습니다 장난이 심한데 다 알아주는 괴짜라서 말썽을 어찌나 피우는지 아주 그냥 제 속이 다 시커멓게 타들어가고요... 딸꾹!'

'....많이 취한 것 같군 그래'

'예 취했습니다 워낙 오랜만이라... 시언이가-아차차, 황후 마마께서 그 자리에 오르시고 나서 술을 잘 안 마셨으니 말입니다....'

'흠, 어째서?'

'아버님!!!!!'

영한은 안에 고하는 거고 뭐고 간에 확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왔다

큰일이었다 형님의 일생일대 대위기였다

'아이고! 영한이가 아니냐? 늦었구나?'

'예 좀 늦었습니다 -폐,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장영한이라 하옵니다'

'....., 알고 있다 아주 잘'

낮아진 목소리가 스산했다 미리 고하지 않고 들이닥친 방금의 실례 외엔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뭘 잘못했나 싶어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영한은 황제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했다

'아, 아버님께서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술을 잘 안 드시는데, 취하시면 원체 이상한 소리를 하시곤...'

'이 녀석! 이상한 소리라니! 이 아비가 폐하께 거짓을 고하겠느냐? 시언이가 -아차차, 황후 마마께서 장난이 심하고 괴짜인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저~기 하늘도 다 아는 사실이거늘!'

'아버님!!!'

영한은 그만하셔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그의 아버지는 전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 술 더 떴다

'하하- 폐하, 시언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취해서 아차차거리며 하던 존칭도 빼먹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그게 아니었던 탓이었다

'글쎄 뭐지?'

'매미입니다 매미! 어릴 때 참나무 아래 있다가 머리에 매미 시체가 떨어졌는데, 그때 끽소리도 못하고 기절을 해서~ 으하하하! 같이 있던 영한이가 업어왔었슴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영한은 할 말을 다하고 풀썩 쓰러져 잠든 아버지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엔 온통 형님 걱정뿐이었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원군께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전해주게'

'아,저,저,폐하'

'그리고 오늘 있던 일은 황후에게 함구하도록'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황제는 입을 다물라 명을 내렸다

함구? 왜? 형님을 어쩌시려고?

'그,그럴수는 없사옵니다'

영한은 저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질렀다 황제가 가던 걸음을 뚝 멈추고 영한을 돌아보았다

'....그럴 수 없다?'

'혀,형님...아니 황후 마마께 말씀을 드려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가정사에 참견을 하는 건 괜찬 오지랖이지'

'예?'

'시언이가 나와 혼인을 한 이상 너와는 이제 남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혀,형님과 저는 가족입니다'

'... 기어이 내 명을 따르지 않겠다 이 말이군'

'....'

'한 번 해 보던지'

황제의 입매가 비틀린다 매우 우습다는 듯 오만하게

'...할 수 있다면'

'예?'

황제는 그 말만을 남기도 돌아갔다

영한은 그 뒤 금군들의 감시 때문에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 그리된 것입니다 금군들의 처소를 둘러싸고 있는 통에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제가 거기서 어찌 나왔는지 아십니까? 매일 찐만두를 가져오던 여종 대신 돌쇠가 상을 들고 왔기에 옷을 바꿔 입고 머리를 산발을 해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궁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다가 원상에서 인삼을 대주러 입궁을 한다기에 행수께 청을 드려 오게 되었구요]

[.....]

장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리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영한이 한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가 안 된다기보다는 믿어지지 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다 안다 알고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

장시언의 얼굴이 굳어짐과 동시에 시끌벅적했던 비원은 이제 정적만이 감돌았다 장시언과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사색이 윤상궁은 상전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마침내 장시언이 입을 연다

[윤 상궁]

[...예, 마마]

[떠날 채비는?]

떠날 채비?

[이미 다 끝났을 것입니다]

[그래? 그럼 바로 갈 수 있겠군 황후궁으로 돌아가지]

윤 상궁은 눈을 크게 떴다

[광현성으로 가시려고요?]

대체 어쩌시려고.... 난리라도 피우실 생각이신가?

[광현성?]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장시언은 코웃음을 쳤다

[-그곳엔 가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굳힌 상전을 보며 윤 상궁이 그럼요? 하고 눈으로 물었지만 장시언은 그 답을 해주는 대신 고개를 돌려 아우를 바라보았다

[나도 사가로 갈 거다 함께 가자]

생각지도 못한 형님의 말에 영한은 '예?' 하며 굳어졌고 윤 상궁 역시 얼굴이 창백해진 상태로 굳어버렸다

사가? 지금 사가라고 하신 게 맞나? 그들은 그 상태로 입도 벙긋 못하고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시언은 애타는 그들의 눈빛을 무시하고 휘적휘적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저만치 멀리서 걸어가고 있었다

장인욱은 이제껏 신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황제 폐하께 충성을 하여 신하 로서의 도리를 다했다고 자부해왔다 충신으로 살아왔기에 자신의 인생을 더할나위 없이 순찬하다 생각했고 여생도 그러하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물론 그에겐 과거니, 입신 양명이니,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골칫덩이- 집안에선 괴짜로 이름이 드높은-장남이 있었지만 그 장남이 황후가 되겠다고 황실로 시집을 간 뒤로는 고민거리도 완전히 사라졌다

장남이 어쩌다 폐하의 눈에 든 것인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지만 고통스러워하던 장남과는 달리 그는 사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장인욱은 자신의 아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아들 장시언은 유유자적 편히 살고 싶어서 황후가 된 것이지만 싫증을 느끼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충동의 대가였다

기분이 틀어지면 폐서인이 되겠다고 날뛱도 남을 아이였다 그랬기에 황제 폐하의 총애을 한 몸에 받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폐하의 총애가 깊다면 궁에서 벗어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테니까 그는 그냥 아들이 궁에서 예쁨을 받으며 평생 살기를 바랐다 집에서 빈둥거리며 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아들을 또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참 부질없게도 그의 바람은 흩날리는 짙눈깨비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시집갔던 장남이 집으로 돌아옴과 동시에.

[억!]

[아버님!!!]

영한은 재빨리 달려가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 아버지를 부축했다 장인욱은 아들의 손길을 홱 뿌리치고 헛것을 보았나 싶어 미친 듯이 눈을 비볐다 방금까지 뒷목을 잡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힘이 좋아 보였다 그는 그렇게 계속해서 눈을 비벼댔다 하지만 아무리 비벼도 앞에 있는 그의 아들 장시언은 사라지질 않았다 눈만 벌게질 뿐이었다

[마,마께서 여긴 어쩐 일로...]

장인욱의 말에 장시언의 가는 눈매가 활처럼 휜다

[어쩐 일이라니요, 아버님 아들이 집에도 못 옵니까? 하하하하~]

집? 지입???

[여기가 왜 마마의 집입니까? 이곳은 제 집입니다 제 집!!]

장인욱은 가슴을 퍽퍽 치며 이곳이 제 집임을 맹렬히 주장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장시언의 미소를 더욱 짙어졌다

[에이~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저도 이곳에서 이십 년을 넘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제 집이기도 하지요 무얼]

장시언은 능글맞게 대꾸하고는 기지대를 켰다 어깨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급히 왔더니 피곤한데 나중에 얘기하지요 아버님 전 이만 제 처소로 들어가...]

[돌아가십시오]

제가 머물던 처소로 옮기려던 장시언은 낮은 음성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멈칫하긴 했지만 그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 왜요?]

장인욱은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는 듯 소리쳤다

[왜라니요! 일개 후궁도 폐하의 윤허 없이는 사가에 다녀오지 못합니다! 하물며 마마께선 황후이시질 않습니까! 이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모르십니까? 예?!]

[일개 후궁이랑 저랑 같습니까? 아버님 말씀대로 황후입니다 황후가 사가에 좀 왔기로서니 그게 무에 큰 잘못이라고 이러십니까? 저는 그저 제 발로 들어갔을 때처럼 제 발로 나온 것일 뿐인데요]

[시집을 갔으면 시댁에서 뼈를 붇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마께선 황실로 시집을 가셨으니 그곳에서 뼈를 묻으셔야지요!!]

남의 속을 긁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는 그의 아들은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하는 얼굴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버님 그런 무서운 말씀 마십시오 제가 거기 볼모로 잡혀 들어간 것도 아닌데 뼈를 왜 묻습니까? 하하, 농담도 참~]

[마마!!!]

[아아, 저는 일단 좀 쉬어야겠습니다 나중에 얘기하시지요]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요리조리 잘도 피한다 장인욱은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쉬어? 웃기지 마!! 힘도 남아도는 녀석이!!!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장인욱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뻐근해지는 뒷목을 잡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으으...]

[아버님!!]

영한은 다시금 아버지를 부축하며 물 좀 가져오라고 하인들을 불렀다 장인욱은 끙끙거리면서도 영한을 타박했다

[이놈아! 어쩌자고 말씀을 드린게냐? 잔잔한 호수에 바우시돌을 던져도 유분수지!]

[저, 저는 그냥 형님이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네가 탈출을 했다고 들었을 때 짐작을 했어야 했는데...]

[아, 아버님...]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아아아...!]

[고,고정하시...]

[영한아! 거기 있지 말고 형님 짐 좀 가지고 오거라!!]

아버지를 진정시키던 영한은 장시언의 부름에 곧장 '예!!!'하고 대답하며 집을 들고 후다닥 뛰어갔다 덩치도 산만한 녀석이 형님의 부름 한 번에 졸랑졸랑 달려가다니, 달리 형님 바보가 아니었다

[아이고...]

장인욱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하인들의 부축을 받아 안채로 걸어갔다 좀 쉬어야겠다 머리가 너무 아파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정작 쉬어야 할 사람은 대책 없는 그의 아들이 아니라 바로 그였다

처소 앞까지 당도한 장시언은 자신의 처소 바로 옆, 영한의 처소를 둘러싸고 있는 금군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영한은 짐을 들고 따라오다가 금군을 보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숨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숨은 곳은 그의 덩치를 절반도 못 가려줄 장시언의 뒤였다 장시언은 자신의 뒤에 숨은 아우을 힐끗 쳐다보았다

호오, 그래 네놈들이 내 아우한테 찐만두만 먹인 것들이라 이거지?

장시언은 저벅저벅 금군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다가갈 수록 금군들의 눈은 믿을 수가 없다는 빛으로 물들었다

황후 마마가 아니신가? 왜 여기에 계시지? 어떻게?

[여기서 뭐하는 거지?]

장시언은 금준 중 제일 높아 보이는 이에게 물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가늠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저,저, 저희들은 그게...]

장시언의 지목을 받은 장정이 꾸물거리며 작게 중얼거린다 그것이 장시언의 심기를 건드리는 줄도 모르고.

[여기서 뭐하는 건지 물었다!!!]

가녀리고 온화한 성정의  황후가 사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호통을 치자 금군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당혹을 금치 못했다

[폐,폐하의 명으로 이곳을 지키고-]

[지켜? 사람을 감금하는 것이 너희들이 말하는 지키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뻑!

장시언은 장정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신음소리를 내며 장정이 허리를 숙인다 긴 변병을 듣고 있을 마음은 없었다

[당장 물러가라 알겠느냐?]

[하,하오나 폐하의 명이...]

[허면, 폐하께 직접 가서 말씀을 드리면 될 것이 아니냐. 내가 쫓아냈다고]

장시언은 홱 뒤돌아 처소로 들어갔다 영한은 형님 덕에 금세 의기양양해져 꼴좋다는 눈으로 금군들을 쭉 훑어보고는 짐을 가지고 형님을 따라 안으로 쏙 들어갔다

금군들은 망연자실하게 그들이 들어간 처소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엔 아직 지금 뭘 본 건가 하는 빛이 가득했다

[으아~ 조오다~]

장시언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침상에 벌러덩 누웠다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 코끝을 스치는 풀내음 마음이 편안해진다

[뭐니뭐니 해도 역시 내 집이 최고구나~]

태평도 하시지 윤 상궁은 황당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상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가 없다 정작 일을 저지른 본인은 저리도 태평한데, 곁에서 모시는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리다 못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한숨이 푹푹 나온다

상반된 그들 사이에서 영한은 묵묵히 들고 온 짐을 풀었다 쉬고 있는 형님을 대신해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보자기 안에서는 서책 몇 권과 종이가 쌓여있었다 장시언이 청승맞은 황후를 흉내낼 적에 썼던 연시과 그 연시를 쓰기 위해 참고한 서책들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영한은 이게 뭐지? 하는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형님 이것들을 어찌할까요?]

장시언은 힐끗 시선을 던졌다 차마 버리지 못해 들고 온 것들. 무심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다시 보자기에 싸서 옷장에 넣어 놔라]

[종이가 다 울었는데요?]

안 울 어있으면 이상한 거지 눈물 흘린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물을 떨어뜨렸으니까

[그냥 넣어 둬]

[네]

영한은 별 생각 없이 보자기를 묶고 그것들을 옷장에 넣어 놓았다 그리고는 함께 들고 온 작은 보자기도 뭔가 싶어 풀어보았다

어.....

[안에 호미가 들었는데요?]

[챙겨왔으니까 당연히 들었겠지]

[왜요? 호미라면 집에도 많은데]

[궁에 있는 내 유일한 재산이다 그게]

[예?... 호미가요?]

[그래]

[.... .... 정말 호미가요?]

[....? 그렇다는 데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영한의 얼굴이 일순 뜨악하게 변한다

왜 저래?

[폐하께서 형님께 고작 이 호미만 주셨단 말입니까?]

영한이 손에 쥔 호미를 사정없이 흔든다 그 모습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뭐?]

[많이 아끼신다고 들었는데.. 호, 호미라니..호미라니요! 이걸 뭐에 쓰라고 줬답니까? 밭이나 갈라고요?]

그야 물론 호미는 밭을 갈 때 쓰는 것이지 그렇긴 한데....

[정말 너무하십니다 절 가둬두고 찐만두만 먹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껏 형님께 호미만 주시다니요!]

널 가둬두고 찐만두만 먹인 게 그렇다 쳐도 넘어갈 만한 일이냐? 내 아우지만 넌 정말 멍청할 정도로 착한 녀석이구나

[영한아...]

[에잇, 이딴 호미]

영한은 장시언의 말을 들어볼 생각도 않고 호미를 홱 던져버렸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리는 지 고래고래 목청을 높인다

[이딴거 줘도 안 갖습니다! 우리 집에 있는 것이 훨씬 더 크고 날이 선 것이 라구요! 이딴 건 그냥 지나가던 개나 주라고 하세요!]

개가 무슨 용뺀 재주로 호미를 쓰겠냐. 쓴다고 하더라도 호미를 어디에 쓰겠어 호미로 집이라도 지으라고 하리?

장시언은 호미를 불쌍한 눈으로 힐끗 쳐다보고 아우에게 눈을 돌렸다 영한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꼭 술 취한 곰 같았다 역시 나의 아우. 작은 불씨에 활활 타오르는 마른 장작 같은 성미도 딱 나를 닮았구나 재미있는데 좀 더 구경할까

아니지 장시언은 고개를 저었다 밤나무를 위해서기보단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오해를 풀어야겠다

[폐하께서 주신 것은 궁에 다 두고 왔다 사실 너무 많아서 챙겨올 수도 없었지 궁에 있는 유일한 내 재산이라고 한 것은 내가 윤 상궁을 시켜 장만한 것은 이게 다라서다]

[... 정말이십니까?]

[그래]

영한은 그제야 안심한 듯 '그랬군요' 하고 고래를 끄덕였다 정말 마른 장작이 맞았다 한 줌의 모래에 불이 확 꺼지는 것을 보면 장시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영한이 네가 아직 잘 모르나 본데 사실 밤나... 흠흠, 폐하께선 내 오만 가지 매력에 홀딱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오만가지... 영한은 작게 중얼거리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정말이요?'하고 다시 물었다

장시언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으며 넓지도 않은 가슴을 쭉 폈다

[물론이지! 아마 호미를 주었다면 금으로 된 걸 주셨을걸? 싫다는 데도 억지로 쥐여주고 싶어서 난리를 쳤을거다 형님이 그 정도야 알겠냐? 아하하하~!]

사실 영한뿐만아니라 어찌나 떵떵거리며 호언장담을 하는지 가만히 듣고 있던 윤 상궁까지 벙찐 얼굴이 되었다 저리도 자랑을 하고 싶을까. 아주 그냥 콧대가 천장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야겠다

물론 그녀는 바로 곁에서 보필했기에 노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얼마나 장시언을 아끼는지 장시언에게 물심양면으로 퍼다 주는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들인지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물 만난 새댁처럼 구실 줄이야....

모습이 딱 서방 자랑이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는데 옳다구나 이때다, 하고 자랑을 늘어놓는 새댁 같았다

[그렇게 좋으면 나오질 마시지....]

윤 상궁은 들릴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장시언이 홱 고개를 돌린다

[뭐라고?]

흐미, 귀도 밝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소 같으면 '뭐가 아무것도 아닌데?' 하고 추궁을 했을 텐데 장시언은 더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괜히 말을 꺼냈다가 윤 상궁의 잔소리가 시작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그이지만 윤 상궁만큼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잔소리가 정말 길었던 탓이다

윤 상궁은 어지간해선 짧게 말하고 끝을 냈지만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듣는 사람이 질릴 때까지 끝내질 않았다

[그나저나 마마]

윽, 잔소리 시작?

[왜?...]

아, 당해이다 잔소리가 아니네

[환궁시켜]

[...환궁이요?]

[응, 아 참, 그리고 서찰을 보낼 것이 있는데...]

[마마]

으윽, 이번이 진짜?

[으응...?]

장시언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윤 상궁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대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마마께서 여기 오신다고 말씀하셨을 때도, 저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참을 수가 없네요 궁녀들을 환궁시키라니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예? 마마께선 영영 안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저기 그러니까....]

[제가 정말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마마의 뒷바라지를 하고 살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폐하께 배신감을 느끼시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요 황후가 궁을 나와 사가로 돌아오다니요! 소박맞은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뭡니까!? 남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겠어요!]

[저기 윤 상궁...]

[폐하께서 모른 척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폐하께서 얼마나 마마을 아끼시는 지 마마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 생각한 것이 있어서 그러셨을 텐데, 제게도 모른 척하라고 신신당부를- 헙!]

윤 상궁은 서둘러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귀 밝은 그녀의 상전이 모든 얘기를 듣고 난 후였다

[...뭐?]

[.....]

[다시 말해봐 뭐라고?]

[......]

[윤상궁 알고 있었어? 폐하가 나에 대해 아는 걸?!]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장시언은 헛웃음을 지었다

[윤 상궁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이번엔 장시언이 속사포 공격을 할 차례였다

[저, 마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 상궁이 어떻게! ... 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

[모른척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날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 폐하랑 작당을 하고 나를 농락한 거잖아!]

윤 상궁은 식겁해 손을 양손을 내저었다

[농락은요, 무신!!]

얼마나 당황했는지 또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평소의 장시언이었다면 깔깔거리기에 충분한 일이었지만 그는 지금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영한이한테 아까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 순식간에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 그동안 조롱당한 기분이었다고! 물론 속인 나도 잘못이지만 다 알면서 모르는 척 구경을 하고 있었다니 사람 제대로 바보 취급한 거잖아!]

[긍께 폐하께서는-]

[안 돌아가! 완전 후회하게 해줄 거야!! 무릎 꿇고 싹싹 빌 때까진 절대 안 돌아갈 거라구!!!]

[야아~ ? 무릎요?!]

윤 상궁은 기함했다

[무릎이요?!!!]

빠르게 오고 가는 그들의 대화를 멍하니 듣고만 있던 영한도 덩달아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지존께서 무릎을 꿇는 것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인데- 상상만 해도 목이 나아갈 일인데-싹싹 빌기까지?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대 안 됩니다!!!]

[암만요!!!]

영한과 윤 상궁은 결사반대를 외쳤다 목청 좋은 둘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니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린다 그러나 선견지명의 일인자인 장시언은 이미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시끄럽고 다들 그만 나가 난 머리가 아파서 좀 쉬어야겠어]

[마,마마 다시 한 번 생각을...]

[예,형님,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심이.....]

둘은 포기하지 않고 재청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오리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잘 들어 폐하께서 찾아와도 두 번째 까진 여기서 꼼짝도 안 할 거야 만나주지도 않을 거라고! 세 번째 찾아오면, 그때 만나줄까 말까 생각해 볼거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 알겠어?!]

헉!

[안 됩니다!!!!!!]

둘의 처절한 절규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장시언은 귀를 막은 채 하품을 해댔다 속이 뒤집어진다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은 한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네가 제갈량이냐?!!!!!!

터덜,터덜,터덜,터덜

세상에 이보다 더 힘없는 발걸음이 또 있을까 영한과 윤 상궁은 어깨를 축늘이고 정처 없이 발을 움직였다 나오는 거라고는 땅이 꺼져라 푹푹 내쉬는 한 숨뿐이다

[...어쩌지요?]

이 난감한 상황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영한은 윤 상궁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윤 상궁도 이 난감한 상황에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쩝니까.....]

[......]

[......]

[에휴....]

[에휴....]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이러려고 찐만두만 먹은 설움을 견딘 게 아닌데... 이러려고 탈출을 한 것이 아닌데요...]

괜히 말씀을 드렸다 괜히 말씀드렸어 영한은 본인의 선택을 후회했다

윤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입이 방정이지요]

그 말은 영한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녀 본인에게 하는 소리였다 흥분해서 입방정을 떠는 바람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 화의 불씨를 품은 상전에게 '마마 부족하시지요? 더 활활 타올라 보세요'하고 부채질을 해준 꼴이다

영한은 저한테 한 소리도 아니건만 자책하며 그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네요]

순간 정적이 이어진다 둘의 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크악!]

영한은 못 견디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진짜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폐하께서 무릎을 꿇고 사과할 때까진 안 돌아가겠다니까요! 아마 이 얘길 아버님께서 들으시면 뒷목 잡고 쓰러지실 겁니다! 틀림없어요]

그래, 그러고도 남지 윤 상궁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지만, 당장 닥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은 그보다....]

윤 상궁은 말을 하다 멈추고 쿵광거리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앞일이 막막하다

[그보다.... 폐하께서 찾아와도 두 번째까진 안 만나주겠다고 하신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친히 걸음하신 지존을 대체 무슨 수로 되돌려 보낸단 말입니까....]

[헉!]

영한이 헛숨을 들이켰다 듣고 보니 드렇다

[폐하와 삼고초려 놀이라도 하시려는 건지.... 제가 진짜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고 심장이 뛰어서...]

아아, 윤 상궁은 관자놀이를 세게 눌렀다 정말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놀이를 하려거든 둘이 하지 왜 죄없는 자신까지 동참을 시키는지 더욱이 세번째에도 만나줄까 말까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린다니, 아무래도 그녀의 상전은 제갈량을 이겨낼 요량인 듯싶다 숨이 턱 막힌다

그런 윤 상궁을 보며 영한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거기까진 생각을 못한 모양이었다

[어,어어어어찌하면 좋습니까? 예?]

영한이 혼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폐하께서 무릎을 꿇으시는 거야- 하실지 안 하실지 모르지만- 안 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친히 걸음하신 그 하늘 같은 분께 '형님께서 안 만나신답니다 돌아가십시오.' 라고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말은 곧 '난 형장의 이슬이 되고 싶소' 날 형장의 이슬로 만들어주시오!'라고 당당히 외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영한은 조마조마하게 윤 상궁의 답을 기다렸다 형님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윤 상궁을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가 아는 윤 상궁은 뒷수습의 달인이었다

형님이 엉뚱한 짓을 하고 일을 벌여놓을 때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뒷수습을 잘했던 기억이 난다

무슨 수가 있으시지요? 그렇지요? 영한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윤 상궁은 제법 오랫동안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영한의 기대는 절망으로 변했다

[저한테 묻지 마십시오 저도 모릅니다]

형장의 이슬이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너희들은 이만 황궁을 하거라 황후 마마는 나 혼자 보필을 할 테니]

[예?]

궁녀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반문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황후 마마를 두고 자신들끼리 환궁을 하라니

[마마님 황후 마마께 무슨 일이 있으신 것입니까?]

궁녀들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비친다 윤 상궁은 표정을 숨긴 채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들에게 있어 황후 장시언은 애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 거렸다 그녀들에게 있어 황후 장시언은 애잔하고 측은한 마마님 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일은 무슨.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오시면 함께 환궁을 하실 거다]

아마도.

[정말이십니까?]

안 좋은 생각을 많이 했는지 궁녀들은 윤 상궁의 말을 완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혹여 폐하와의 사이에 무슨 불화라도 있으신가, 하는 그녀들의 생각이 윤 상궁에게 고스란히 보였다

[그래.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말고 이곳에서 좀 쉬었다가 환궁하거라]

윤 상궁의 단호한 대답에 궁녀들은 그제야 '예, 마마님'하며 한시름 덜은 듯 미소를 지었다 윤 상궁은 궁녀들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저리 웃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바지런한 궁녀들이 풀어놓았던 짐을 다시 싸기 시작한다 많은 이들을 대동하지 않았고 짐이 얼마 되지 않는 터라 정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제 그만 가봐야... 아, 그렇지!

윤 상궁은 자리를 뜨려고 하다가 깜박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이곳에 오기 전 장시언이 그녀를 다시 부르더니 서찰을 하나 건네주었다 강희 황자에게 보내는 것이니 궁녀들에게 시켜 전하라는 말과 함께 윤 상궁은 그 서찰을 받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영 안 돌아가실 생각은 아니신 모양이었다

서찰의 내용은 보나 마나 뻔했다 별일 아니니 걱정 말라는 내용일 것이다 폐하를 모시러 광현성에 간다고 하고 뜬금없이 사가로 왔으니 강희 황자가 알게 되면 많이 놀라고 불안해할 것은 자명한 일이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팔불출인 그녀의 상전은 아들의 그러한 불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서찰을 보내는 것이 분명하다

[얘, 옥아]

윤 상궁은 궁녀 한 명을 부르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짐을 다 싸놓고 오도카니 서있던 옥이가 가까이 다가온다

[예 마마님 뭐 시키실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윤 상궁은 서찰을 내밀었다

[이 서찰을 황자 전하께 전해 드리거라]

[황자 전하께요?]

옥이는 '어느 황자 전하요?'하고 묻지 않았다 황후궁의 궁녀들에게 있어 황자 전하는 강희 황자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윤 상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옥이의 손 위에 서찰을 올려주었다

[오 상궁에게 주면 될 게다 황후 마마께서 친히 보내시는 것이니 궁에 가는 동안 각별히 보관에 신경 쓰도록 하고]

[예, 염려 마십시오 마마님]

윤 상궁의 말에 여부가 있겠냐는 듯 야무지게 대답하며 옥이는 품 안에 서찰을 넣었다

제 할 일을 마친 윤 상궁은 그럼 쉬었다 가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궁녀들의 앞에선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나오자마자 그녀의 얼굴엔 근심걱정이 한가득 담긴다 다시 고민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어떤 말로 무슨 수로 지존을 돌려보낸단 말인가 답이 나오지 않는 이 문제 때문에 윤 상궁의 미간엔 주름이 사라질 틈이 없었다

타악! 쩌억-

타악! 쩌억-

도끼를 내려칠 때마다 나무가 쩍쩍 소리르 내며 갈라진다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강희 황자는 팔을 멈추질 않았다 작은 도끼지만 요령이 생겨 이제는 아주 수월하게 해낸다 여상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류운은 참을 수 없는 지루함에 하품을 했다 벌써 두 시진이 지났지만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 며칠은 정말 입이 닫은 것만 같다

하루에 한 번씩 하던 '스승님, 검술은 언제 알려주시나요?'하는 소리도 하지 않는다 물론 그래서 편하긴 하지만

류운은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갑작스럽게 태자의 스승이 된 이후 그는 매일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의미하게

[스승님]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 류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예 태자 전하]

[스승님께선 어머니가 계신가요?]

[없습니다]

[아... 돌아.. 가셨습니까...?]

[아니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처음부터요?]

[예]

[.... ...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허면 스승님께선 어찌 태어나신 겁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강희 황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두워진 낯빛엔 안타까움이 서려있다 아까보다 더 참담한 얼굴이다 류운은 그 모습을 담담히 내려다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태어난 이상 낳아주신- 소위 말하는 -부모님이라는 존재는 있겠지만 살수에겐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혼자였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다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철저히 혼자가 된는 삶 그렇게 키워졌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알 수없어 모른다고 했을 뿐인데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정적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정적이 깨진 것은 다시금 도끼질을 시작하면서였다

스승이 되어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에 거절에 거절을 거듭하다가 그럼 도끼질이라도 하라고 시켰더니 저리도 열심이다 요령을 피울 법도 한데 그런 적이 없다 사실 요령을 피워도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는데 류운은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눈을 떠야 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다 천천히 눈을 뜨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으로 손을 움직인다 그러다 이내 손을 멈추었다 상대에게 살기는 없었다

[누가 오고 있습니다]

[예?]

강희 황자는 '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때 류운이 '조금 떨어진 곳입니다 여인이군요'하고 말을 했다 강희 황자는 '그렇습니까?'하고 말하며 도끼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연무장에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오 상궁이었다

[와...진짜네...]

강희 황자는 감탄 섞인 눈으로 류운을 올려다보았다 류운은 오 상궁에게 시선을 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 상궁이 숨을 헐떡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무슨 일인가?]

[화,황후 마마께서 서찰을 보내셨습니다]

[뭐? 어마마마께서?]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더 커진다 좀 전까지 얼굴에 앉아 있던 불안감과 서러움이 순식간에 반가움으로 탈바꿈한다 강희 황자는 어서 주라고 손을 뻗었다 오 상궁은 품에서 서찰을 꺼내 건네주었다

촤악-촤악-

급한 손길에 종이가 순식간에 펼쳐진다 강희 황자는 빠르게 글을 읽어 내려 갔다 불안했던 마음이 그와 동시에 사라져갔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강희 황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황후 마마께서는 뭐라고 하시나요? 예?]

황후가 궁을 나가 사가에 간 것은 몇 사람밖에 모르는 일. 오상궁은 그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얼굴에 근심이 찬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희 황자는 서찰을 조심스럽게 접어 품에 넣었다

[별일 아니라고 아바마마와 함께 곧 돌아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 쓰여있어]

[정말이십니까?]

[응]

오 상궁은 그제야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을 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어찌나 걱정을 하였던지...]

[오 상궁]

[예?]

[궁인들 단속은 잘했지?]

[물론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오 상궁은 확답으로 상전을 안심시켰다 이제 고작 여덟 살, 하지만 궁에서 태어나 궁에서 자란 그녀의 상전은 궁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험하게 도는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일이 커지지 않도록 궁인들을 잘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명을 받들어 이행하고 있었다

[계속 신경써줘]

강희 황자의 말에 오 상궁이 '예'하며 허리르 숙인다

[오 상궁은 먼저 돌아가 난 할 것이 남았어]

[알겠습니다]

오 상궁은 예를 취한 뒤 물러갔다 둘만 남자 다시 조용해진다 강희 황자는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도끼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류운이 그를 만류했다

[그만 하셔도 됩니다 시간도 거의 다 되었고 장작 패는 것은 충분히 많이 하신 것 같은데]

강희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 상궁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쉰 것이나 다름없으니 더 하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강희 황자는 미소를 지으며 류운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해야 스승님께서 무술을 가르쳐 주실 것 아닙니까]

류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오늘은 그 말을 안 하나 했다 사실 그는 이 의미없는 짓을 그만했으면  싶었다 스승이 되어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누누이 말을 했지만 그는 사람을 죽이는 법만 알고 있을 뿐 교본을 가지고 누구를 가르치는 것은 하지 못했다 교본 따위는 상관없으니 가르침을 다라는 말도 들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순간적인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자신은 그랬다 정형화된 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그 감각을 무슨 수로 가르치란 말인가 그렇다고 살수 교육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태자 전하]

[스승님]

류운이 그만 하자고 마을 하려던 찰나 강희 황자가 그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눈이었다

[저는 반드시 스승님께 무술을 배울 것 입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그리 결정했고 앞으로도 제 결심은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허니, 안 된다고만 하지 마시고 스승님께서 제가 져 주십시오 교본 그대로 가르쳐 주시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무술을 가르쳐 주세요

류운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스친다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저보다 더 나은 스승을 구하십시오 사람을 죽이는 재주만 가진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르침을 줄 수있는 그런 사람말입니다 그게 전하께도 더 좋을-]

[두려우십니까?]

류운은 멈칫했다

[절 가르치시는 것이 두려우세요?]

강희 황자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류운은 코웃음 쳤다

[그것은 제가 모르는 감정이군요]

맑은 눈이 그를 직시한다 희뿌연 안개가 들어찬 것처럼 탁한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모르시면 이제라도 알아두세요 스승님께선 제가 스승님처럼 될까 봐 두려우신 겁니다 무술에 대해 잘 은 모르지만 아무리 스승님게서 살수로 키워지고 살수로 살아오렸다고 하더라도 검의 기본조차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

[살수로 살아온 것이 후회되십니까?]

[모르는 감정입니다]

강희 황자는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깨무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고통스러워보였다

[...제가 처음에 스승님이 되어 달라 청을 드렸을 때 스승님께서 제게 물으셨지요? 왜 자신이냐고?]

[그랬습니다]

[제가 그때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하세요?]

류운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강희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그리 대답을 했었습니다 헌데...]

강희 황자는 예의 그 눈으로 다시 류운을 바라보았다

[이젠 알겠습니다 안타까워서 그랬습니다 처음 봤을 대부터 스승님이 너무 안타까워서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살수 집단에서 빼내오고 싶었어요 그게 이유입니다]

류운은 말을 잃었다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가 선연하게 빛난다

[오늘은 스승님 말씀대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도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강희 황자는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류운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확실히 그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콱 죽는 게 낮지.

영한은 진지하게 그리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아냐 죽으면 색시 얼굴을 못보잖아 망부석정도가 좋겠어'하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망부석도 따지고 보면 돌덩어리라 색시 얼굴을 못 보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영한은 '그래 그 정도가 딱 좋아'하며 속으로 되뇌였다

지존께서 친히 걸음을 하신지 오늘로 딱 3일째

모은 두 손은 벌벌 떨리고 등에선 식은 땀이 흘렀다 든든한 뒷배인 형님은 처소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찐만두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황제와 금군들이 눈앞에 서있으니 오금이 저려왔다

으아, 형님  제발 좀 나오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오늘도냐?]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황제의 목소리에 영한은 바닥으로 납작 엎드렸다

[그,그,그것이 혀-아니 마마께서 모,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그, 그러니까 저, 정신을 못 차리시고 차리셨다가도 그, 금방 혼절을 하시고 ....]

[내가 들어가 보겠다]

[아!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저, 전염이 되는 병이라고... 의원이 저어얼~~대 아무도 들어가선 안 된다고 시,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진짭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 소,손에 장을 지질수....는 없지만 .....,미, 밑어주십시오!]

[짐이 언제 거짓이라고 하였느냐?]

[예옛?]

물론 그런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영한은 놀란 닭처럼 푸드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날 선 눈빛에 다시 땅에 이마를 박았다

[아,아니, 그러신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게, 그러니까....]

[비키거라]

[아,아니 되옵니다! 가시면 전염이..!!]

[마지막 경고다 비켜라]

[저,전염이...]

스스릉-

으악!

영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을 옹송그렸다 산만한 덩치가 그래서 가려지겠냐마는 검을 뽑아드는 섬뜩한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져 어쩔 수가 없었다

형님 제발 오세요! 저 장가가야 한다구요!

[마지막이라는 말을 모르는 모양이군]

헉!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저벅,저벅. 걸음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 소리에 영한은 음칫 몸을 굳혔다 스치기만 해도 목이 날아갈 것만 같은 검을 들고 황제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형님! 형님!! 형님!!!

영한은 두 손을 질끈 감았다

영한에게 최전선을 맡기고 온 윤 상궁은 그녀 나름대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태평하게 목욕을 하고 있는 상전을 구슬리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아이 달래듯 살살. 달콤한 목소리로 문밖에서 말을 건네며.

하지만 아까부터 돌아오는 것은 대답 대신 찰박거리는 물소리 뿐이었다

윤 상궁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좋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했다

[마,마마.. 이제 그만하시고 나오십시오 폐하께서 계~속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것은 찰박.찰박. 촤아-하는 물소리뿐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비단 주먹만이 아니었다 눈가도 파르르 경련이 인다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참아,참아. 참아야 하느니라

[저... 마마... 오늘도 폐하를 안 만나실 것은 아니시지요? 벌써 3일째 입니다 ]

윤 상궁은 마음을 진정시키기위해 심호흡을 하고 겨우 화를 참았다 그래, 잘 참았다 여기서 화를 내면 될 것도 안 된다 하지만-

[흐으응~ 흐응~~]

안에서 들려오는 콧노래소리에 윤 상궁은 결국 참지 못하고 폭팔했다 안에서 잠긴 문을 미친 듯이 흔든다

쾅쾅쾅! 덜컹 덜컹- 쾅쾅!

나무문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이놈의 문짝이 왜 안열리고 지랄이여. 지랄이?! 도끼! 도끼 어디 있어? 아주 기냥 이 문짝 뽀사불랑게! -나오십쇼! 나오랑께요!]

걸쭉한 욕설이 섞인 윤 상궁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린다

[윤 상궁 ! 징정하게!]

장인욱은 화들짝 놀라 팔을 내저었다 폐하께서 듣고 이곳으로 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첫날도, 둘째 날도, 아파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라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고 극성을 부려 가까스러 막았는데, 태평스럽게 목욕을 하는 것을 들켰다간 사단이 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잘 말해 볼 터이니 자네는 영한이에게 가보게나 그 녀석 지금 아주 실신 직전일 텐데]

윤 상궁은 계속 문을 두드리며 씩씩 거리다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알았습니다 '고상하게 말하고 몸을 틀었다 발을 떼기전에 홱 고개를 돌려 '마마, 꼭 나오셔야 합니다 꼭이요!'하고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알았다 '한 마디만 해주면 될 터인데 그말을 듣기가 뭐가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윤 상궁은 걸음을 옮겼다 아노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윤 상궁에게 장시언을 구슬리는 소임을 물려받은 장인욱은 '큼큼'하고 헛기침을 하여 문짝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마마... 벌써 3일째 입니다 이만하면 되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속이신 것은 마마가 훨씬 오래전부터.... 흠흠,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폐하께서 많이 걱정을 하십니다 미안해하시는 것 같더이다 그러니 마마께서도 그만 하시고....]

찰박,찰박, 촤아-

[으흐흥~~ 흐응~~~]

부들부들. 안면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장인욱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윤 상궁이 지나온 길을 고대로 걷고 있었다

참자 . 참아야 한다

[마마... 정말 폐서인이 되실 요령이십니까? 그건 아니시지요? 전 압니다 마마께서 얼마나 폐하를 은애하시는지 그러니까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제게 말씀이라도 해주시면....]

[대감마님, 저 돌쇤디요, 큰 도련님... 아니, 황후 마마께선 여기 안계십니다요]

............응? 뭐라?

안에서 아들의 목소리 대신 하인의 목소리가 들여오자 장인욱은 순간 말을 잃었다 멍해진 정신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냐 그게! 없다니?]

[아까 콧노래를 부르시면서 뒷문으로 나가셨습니다요 처소로 향하신 것 같은 데....]

[으아아악!]

황인욱은 결국 흥분을 참지 못하고 윤 상궁의 전철을 정말 똑같이 밟았다

덜컹덜컹!

[문 열어라! 문 열어!]

돌쇠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장인욱은 뒷문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예순이 다 되어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뜀박질 이었다 멀어져 가는 대감마님의 모습을 보며 돌쇠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왜 저러신 디야?

드르륵-탁!

장인욱은 가뿐 숨을 고르기도 전에 장지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골칫덩이 장남 장시언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영견으로 말리고 있었다

장인욱도 결국 폭팔했다 어찌 보면 예고된 일

[이놈아!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 낼 셈이냐?!]

존대도 집어치웠다 울화통이 터져 살 수가 없었다

[맘대로 궁을 나온 것도 어마어마한 일인데, 지존을 두 번이아 헛걸음하시게 하다니! 대체 무른 생각을 하는 게냐? 잘못했다 싹싹 빌거라! 온 식구들 목 날아가게 생겼단 말이다!!]

장시언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사람이면 이쪽에서 먼저 사양이다

처음엔 물론, 본 성격을 알면서 모른 척하다니 감히 나를 조롱해? 라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나서 일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유유자적 사색을 즐기는 장시언 그런 것쯤은 '그래, 내가 먼저 속였으니까 퉁 쳐주지'라는 대인배적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 용서해부었다

이 말을 하면 근데 왜 황제를 안 만나냐고 다들 난리를 피울 테지만 -생각해보니 다른 부분에서 화가 나더라 이 말이다 뭐가 화가 났느냐 하면....

[귀머거리가 된 게냐? 어찌 아무 말이 없어!!]

버럭버럭 내지르는 호통에 장시언음 미간을 그었다

[아버님 그리 소리를 지르시면 체통 없다 남들이 욕을 합니다 그리고 목이 날아간다니 그런 끔찍한 소리 입에 담지도 마십시오 그럴 일 절대 없습니다]

장인욱은 순간 멈칫했다

그런 일 절대 없다니....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만 같았다 먼 길 떠나던 존대도 나 불러수?하고 다시 돌아온다

[그 말씀은..... 오늘 폐하를 뵈실 거란 말씀이지요? 그렇지요 마마?]

장시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영견으로 머리를 말리며 소개는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짓기만 했다

장인욱은 전전긍긍한 마음에 '제발 무슨 생각인지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하고 말을 했다

장시언은 묵묵히 머리를 말리다가 힐끗 눈을 굴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 불안해하는 장인욱의 모습이 담긴다 그리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제 계획을 말하지 않는 것은 고작 그것 때문에 일을 여기까지 몰고 왔냐는 말을 듣기 싫어서였다 스스로를 많이 아끼는-사랑하는 -장시언에겐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겐 그게 그리 중요한 거냐고 여겨질 법하니까

하지만-

...흠, 말씀을 드릴까

장시언은 영견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마마... '하며 장인욱이 그의 말을 기다린다

[아버님]

[예,예!]

장인욱은 뭐든 말씀하시라고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장시언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사실 폐하께서 저를 속이신 것은 이제 다 용서 했습니다 윤 상궁까지 절 속였다는 것에 배신감을 들긴 했지만 그것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아버님 말씀처럼 제가 먼저 폐하를 속인 것이니까요 그것을 가지고 화를 내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지요 게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 폐하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허,허면 왜....]

[헌데 말입니다 아버님 생각해보니 다른 것이 화가 나서요]

[화...요?]

[예]

장인욱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친다

[무엇이 화가 난단 말씀이온지...?]

[그야-...]

장시언은 제 생각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미소 짓고 있는 장시언과는 달리 장인욱은 이어진 아들의 말에 점차 얼굴이 굳어졌다 듣고 보니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지존을 두 번이나 헛걸음하게 하다니 제 아들이지만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자기애가 강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아버님 이제 다 말씀드렸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다 잘 될 겁니다]

장시언은 제 할 말을 마치고 속 시원한 얼굴로 다시 영견을 집어 들었다 싱긋 웃는 모습에서 여우의 얼굴이 보인다 장인욱은 그런 아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며 고개를 젖는 그의 얼굴에 황당한 빛이 그득 서려 있었다

영한이와 윤 상궁이 버티고 있을 최전선에 동참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장인욱은 별안간 모습을 드러낸 황제 때문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왜 폐하께서 여기에... 뒤에 포박을 당한 채 눈물,콧물 흘리며 질질 짜고있는 것은 영한이가 아닌가 그 뒤에 서있는 윤상궁의 얼굴에는 죽을 사가 떠잇....

[전염병에 걸려 아무도 못 만난다고 하더니 황후를 보고 오는 모양이군 그래?-비켜라]

으헉!

장인욱은 서둘러 예를 취했다 헛것이 아니었구나!

[폐,폐하 예까지 어인 일로.. 아,아니 저 그것이 아니오라... 마마께서는 병색이 완연하여...]

[더 이상 짐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아무리 그대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저, 저...]

황제는 당황해 말을 더듬는 장인욱을 더는 기다리지 않고 지나쳤다 장인욱은 홱 몸을 틀었다

안 돼!!!

[폐하!!!!!]

우뚝

황제가 걸음을 멈춘다 천천히 돌아보는 그의 얼굴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빛이 떠오른다

장인욱은 꾹 눈을 감고 '이곳은 보는 눈이 많습니다 일단 하인들을 모두 물리도록 하오심이.... 금군들도 물리시면 더 좋고...'하며 말을 했다 뒤에 금군 얘기는 그의 개인적인 바람이었으나 차마 드리기 힘든 말이라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황제는 쭉 주변을 훑어보고는 금군들에게 몰려 있는 하인들을 모두 물리라고 명을 내렸다 그가 보기에도 그동안 이상한 말이 나오지 않게 철저히 잘 숨긴 것 같은데 장시언과 그가 한바탕 난리를 치면 그것도 끝일 것 같았다

그 역시 이 일이 커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이것은 황제 내외의 개인적인 일이었고 그는 무조건 장시언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이었기에

[금군들은 이곳에 있는다]

황제는 장인욱에게 그리 말을 하고 장시언이 있는 처소로 다시 발을 움직였다 그 순간

[폐,폐하!!!]

장인욱이 다시 걸음을 붙잡는다

[저,저기 저쪽에 있는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기다리시면 제가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린채 장인욱이 가르킨 복숭아나무를 바라보았다 꽃잎이 만개하여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나무였다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이 하나 둘씩 흩날리고 있었다

뜬금없는 복숭아 나무 타령에 황제가 어이없어하는 동안 장인욱은 후다다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도 '금군을 물리는 것이 좋으실 텐데...'하고 중얼거린다

황제는 저 인간이 미쳤나? 하는 눈으로 장인욱이 들어간-장시언이 기거한다는-처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왠지 자신이 쩔쩔매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쯧하고 혀를 차며 결국 장인욱이 말한 복숭아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적절한 그늘 내리쬐는 햇빛을 가려주면서도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빛이 들어와 어둡지 않았다 은은한 꽃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첫날엔 잘못을 빌려 했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속여서 미안하다고 사실 네 본모습도 좋아한다고 네가 직접 말해주길 기다렸다고 그리 말을 하려고 앴다 하지만 말은 커녕 이틀 동안 코뺴기도 보지 못했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고자 걸음을 했는데 두 번이나 허탕을 친 것은

그러다 보니 생각할 수록 화가 나는 거다 따지고 보면 먼저 속인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장시언인데 어찌 이리도 방약무인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저는 하나도 잘 못한 것이 없고 속아서 억울하다는 태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가겠지만 황제는 미안하다는 말을 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참에 버릇을 고쳐놓아야 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인들을 물리기 위해 갔던 금군들이 돌아왔다 사방이 조용했다 포박을 당한 채 딸꾹질을 하는 영한의 소리만이 들렸다

윤 상궁이 제발 좀 멈추시라고 영한의 옆구리를 쑤셨지만 영한은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지라 계속 딸꾹질을 해댔다 기다림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장시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의 옷을 입고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올리며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황제는 숨이 멈추었다 그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치렁치렁한 여인의 옷을 입고 애수에 잠긴 듯 의미한 미소를 지을 때와는 다른 처음으로 장시언이라는 사내와 마주한 기분 허리까지 내려온 아직 젖어 있는 머리가 색정적이었지만 그뿐이었다 갸냘픈 황후의 모습이 아니라 영락없는 사내의 모습이다

가까이 다가오던 장시언이 걸음을 멈ㅊ고 포박을 당한 영한에게 시선을 준다 아주 못마땅한 듯이 그것을 한참 노려보다가 황제를 바라본다

[제 아우를 풀어주십시오 이것은 폐하와 저의 문제입니다 제 아우에게 이러시는 것은 과한 처사입니다]

영한은 감동적인 눈으로 장시언을 바라보며 '형님...'하고 울먹거렸다 아우의 울먹이는 소리에 장시언은 다시 고개를 돌려 형제애를 과시햇다 '걱정 마라 아우야 이 형님이 구해주마'하는 눈빛을 보내며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황제는 기분이 바닥을 쳤다

[네 아우는 내 명을 어기고 거짓으로 짐을 우롱했다 당장 목을 베었어도 부족함이 없을 중죄인데 고작 포박을 한 것 정도를 과한 처사라 이르는 것이냐?]

[폐하께서 제 아우를 감금하셨다 들었습니다]

[감금? 나가지 말라 명을 내렸을 뿐이다]

[그것이 감금입니다 집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고 찐만두만 먹이고 금군들이 가는 곳곳마다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것이 감금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감금이든 뭐든, 중요한 것은 네 아우가 내 명을 어겼다는 거다]

죄를 받아 마땅하다는 항제의 말에 장시언은 입을 다물었다 굽히고 들어올 마음이 없다는것 이었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풀어라]

그는 황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명을 내렸다 금군들은 그 명이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알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포박을 풀라는 소리가 안 들리냐]

화들짝!

금군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보다가 포박을 당한 영한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운 나쁜 금군은 난처한 얼굴로 항제와 황후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오랏줄 매듭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네놈 손목이 잘려나가고 싶으면 풀어라]

차가운 황제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금군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으아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손목이 댕강 날아간 뻔...

[네 대신 내가 손목을 자를 터이니 풀어라]

으아아~~! 나보고 어쩌라고!

금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겉으로도 눈물을 흘릴 지 모를 일이었다

분위가 급속도록 싸해졌다 둘 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아, 8월인데 왜 이리도 춥단 말인가

모여 있는 이들은 소름 돋는 자신의 팔을 쓱쓱 문질렀다

정적을 뚫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봐주는 것도 한도가 있다]

다시금 이어진 정적 금군들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영한과 윤상궁까지 홱 고개를 돌려 정시언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실까? 잘못했다고 싹싹 비시려나?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장시언은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장인욱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간 즐거우셨습니까?]

비난한느 듯한 말투에 황제의 얼굴이 굳어진다

[이미 들켰다는 것도 모르고 사내 주제에 요조숙녀인 양 내숭을 떨어대는 모습을 보니 재미있으시던가요?]

그의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장시언은 지금 황제를 향해 비난을 하고있었다 사람을 얼간이 취급하며 재미있었냐고

그렇지 않아도 굳어져 있던 황제의 표정이 삽시간에 차가운 표정을 띤다 그동안 그가 했던 마음고생을 장시언이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시언은 말을 멈추지 않았고 한층 더 신랄하게 그를 몰아 붙였다 무언가를 목적하고 있는 사람처럼 일부러 황제를 도발시켰다

[하긴 재미있으셨겠지요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얼마나 우습고 꼴사나웠겠습니까]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을 테지 코웃음을 치며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무슨 소리인지 도통 이해를 못하는 금군들과 다 알아듣고 기함을 하는 영한과 윤 상궁 그뿐이었다

장인욱은 그런 그들 사이에서 장시언의 가증스러운 연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제 아들이지만 참 대단하다 싶었다

[언제까지 저를 우롱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윤 상궁과 아버님의 입을 막고 영한이를 감금하고! 대체 언제까지요?예?!]

적방하장도 유분수 네가 그런 말을 할 입장이냐? 장인욱은 어이없는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을 한느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사자인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했으면 더 했지

[그러는 너는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었지? 내가 몰랐다면 계속 속일 생각 아니었나?]

그렇지 않지만 장시언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장시언의 침묵을 당혹스러움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얼굴엔 역시나 하는 원망의 빛이 떠오른다

[우롱? 하...!]

헛웃음과 함께 허탈함이 묻어났다 황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장시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옭아매기라도 할 것처럼 직시했다 그의 얼굴이 괴로운 빛에 물들어 이그러진다

[난,네가 스스로 말해주길 계속 기다렸다 언제나, 언제나... 무슨 이유가 있겠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생기는 욕심을 잠재우려 네 곁을 떠나있으면 서까지!... 우롱이라고 했느냐? 내가 너를 우롱했다고? 이것이 우롱이냐? 내게 네 진심을 보여주길 계속 기다린 것이?]

비난의 화살은 방향을 틀어 장시언을 향했다 그리고 장시언은 얼굴에 열이 오르도록 소리를 질렀다

[그런 진작 말을 했어야지!]

예기치 못한 호통소리에 모인 이들의 눈은 휘둥그레 졌고 장인욱은 '헙'숨을 들이켰다 핑글, 현기증이 난다

아,아들아 ... ,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막 나가는 것 아니냐? 말이 지나치게 짧아졌는데...

[왜 아무 말도 안하고 혼자 마음고생이야! 욕심을 잠재우려고 내 곁을 떠나있었다고? 무슨 욕심? 대체 무슨 욕심이 생겼기에 날 궁에 두고 한 달이 넘게 연통하나 없었던 건데, 어? 내가 한 달간 어떤 마음이었는지 생각이나 해봤어? 해봤나요!!]

으윽 위통이...

장인욱은 질끈 눈을 감았다 장시언은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이건 도박이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어느 누가 지존에게 저런 방자한 말투로 말을 한단 말인가 ~나이다, ~옵니다, 까지는 아니라더라 ~입니다,~지요,는 되어야 하는 것인데 아니 왜! 대체 , 왜! 잘 나가다가 갑자기 반말을 하는냐 이말이다

슬쩍 눈을 떠 힐끗힐끗 주변을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턱이 빠지기 일보직전인 금군들이 눈에 들어온다 윤 상궁은 아에 혼이 빠져나간 듯 보였고 영한은 헛것을 본 사람처럼 연신 눈을 비비고 있었다 곧 있으면 헛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귀까지 팔 기세였다 장인욱은 천천히 황제 내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그의 목숨을, 아니 가문의 성쇠를 좌지우지 할 것이다

모든 이들이 침묵했고 정적이 이어진다 숨소리조차 들리질 않았다 그 고요함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황제였다

[...미안하다]

응? 잘못 들었나?

황제의 사과에 모든 이들이 당황하여 눈을 깜박였다 지존이 누군가에게 미안하다 사과를 하고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어진 말을 듣고서야 황제가 정말 황후에게 사과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생각이 짧았다]

장인욱은 놀람과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장시언의 방자함에 대한 죄는 묻지 않으실 모양이었다 아니, 신경조차 쓰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장시언의 반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인 양 받아들이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왜 절 떠나있으셨던 겁니까?]

작게 울리는 목소리가 무슨 욕심이 생겼기에 그런 것이냐고 물어온다 황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진심을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으니까]

[.....]

[네가 나를 불안하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장시언은 황제의 말에 움칫했지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찰나의 머뭇거림이 곧 긍정의 뜻이라는 것은 황제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알 수 있었다

[항상 불안했지 널 가졌을 때부터 계속. 우리 관계가 나로 인해 갑작스럽게 이어진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랬기에 몸은 내 곁에 있지만 아직 마음은 더 딜수 있다고 생각했었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잘되지 않았다 넌 언제랃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그게 날 불안하게 했다 이정도면 되었다고 더는 네 마음을 욕심내어선 안 된다고 수도 없이 되뇌어 봐도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계속 전부를 원하게 되고... 네 곁을 떠나 있었던 건 그래서다 욕심을 버리려고]

[....]

'네 진심을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으니까'

'욕심을 버리려고'

그 말이 계속 귓가를 울린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장시언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닫아버렸다 이 감정의 동요를 뭐라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제는 장시언의 말을 기다리다가그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허탈한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또 입을 닫아버리는 거냐?후... 그래 넌 언제나 그렇지. ... 네 말 사이의 침묵이 내게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다]

황제가 그렇게까지 말했지만 장시언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처럼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마슴속에 있던 불안이, 그 안에 스며들어 있던 애절함이 그에게 스며들어 동화되게 만들었다 미안함, 그저 미안함.....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다 그것은 장시언 본인에게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주변에 누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죄다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장시언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을 적시며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헉 눈물까지?!

이것이 장시언의 연기라고 생각한 장인욱은 흠칫 놀라며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장시언이 말한 계획에 없었던 탓이다

떨리는 어깨. 얼굴을 가린 손 틈새로 흘러나온는 흐느낌 황제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당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원래부터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그는 팔을 뻗어 장시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며 고개를 숙인다

장시언이 고개를 돌리며 피했지만 괜찮다고 작게 속삭이며 달랬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촉촉촉 젖은 눈가에 입을 맞추는 것은 예사다

시언아... 시언아... 쉬, 울지마라 정인을 달래는 다정한 목소리에 모여 있는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궁에 있을 적에도 황제는 황후에 대한애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살아생전 저런 낯간지러운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하물며 황제 내외가 서있는 곳은 복숭아나무 아래. 흩날리는 꽃잎과 다정한 부부의 모습은 정말이지 한 편의 그림이 따로 없었지만 그래서 한층 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우수수 닭살이 돋아 당장이라도 닭이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황제 내외의 입맞춤이 깊어졌다 이젠 피하던 황후 장시언마저 황제를 열렬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러다 아름다운 그림이 삼시간에 춘화로 변해버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까지 되었다 금군들은 입에 벌레가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얼이 빠졌고, 영한은 꿈인가 싶어 제 볼을 꼬집고 너무 비벼 새빨갛게 변한 눈을 미친 듯이 깜박였다

장시언에게 모종의 계획을 듣게 된 덕에 그들 가운데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던 장인욱도 이번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오히려 이제 윤 상궁이 가장 평온해 보였다 해탈의 경지에 올랐는지 얼굴에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드러나지 않는다 흡사 돌부처였다

입맞춤이 계속 되엇다 입술을 깨물고 혀를 얽힐 때마다 춥,춥,추읍 .타액섞인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금군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관리를 했지만 민망하멩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 꼴이 우스웠다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지만 벌게질 대로 벌게진 얼굴

윤 상궁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품에서 복주머니를 꺼낸다 묵직한 그 주머니에는 엽전이 가득 들어 있었다 윤 상궁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치미를 뚝 떼고 온 침을 다해 홱- 복주머니를 던졌다 마음 같아선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황제 내외의 입술에 던지고 싶지만 그랬다간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것이고 그전에 두 분 다 다칠 것이고 정확히 입술에 조준하여 맞출 자신도 없어서 그냥 땅바닥에 던졌다

퍼억-!

남다른 팔뚝 힘을 자랑한 덕에 엄청난 소리와 함께 땅에 움푹 패였다 입맞춤에 온정신을 집중하던 황제 내외도 흠칫하며 떨어졌다 윤 상궁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에구머니, 죄, 죄송합니다'하며 복주머니를 주웠다 어색한 공기가 사방을 매웠다 하지만 황제 내외의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피막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었느냐?]

황제의 물음에 장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이 되긴 뭐가 돼?

다른 일들은 '예'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아직 진정이 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그들의 의견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울려서]

그 말에 장시언의 어깨가 굳는다 일렁이는 눈동자가 황제를 바라본다 장시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그것은 제가 해야 할 말입니다 ...속여서 불안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 무슨 말씀을 하려고 저러시나? 아무 말씀이나 제발 후딱 좀 하시지!

황제 내외 둘은 애틋하기 그지없겠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고문이었다 졸지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버린 그들은 말을 하다말고 황제의 얼굴을 매만지는 장시언을 재촉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민망하니까 빨리 좀 하십시오 제발!

그들의 바람대로 장시언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듣자마자 그들은 더 고통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그리고... 은애합니다]

으헉! 그거냐!!!

고백은 둘이 있을 때 하라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은애합니다]

무언의 절규가 이어진다 피부 위로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정말이지 오글거림의 극치였다 게다가 그걸도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시언아...]

[폐하...]

황제 내외는 격정적인 포옹을 했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중간중간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별의별 낯간지러운 말들이 다 오고갔다 다 다른말이었지만 담고 있는 뜻흔 모두 한 가지였다-좋,아,한,다.

그 모습을 보는 이들의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영한은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구경을 하다가 황제 내외가 포옹을 하자 화들짝 놀라 다시금 딸꾹질을 시작했다 딸꾹 딸꾹 쉬지도 않는다

장인욱은 경악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민폐였다 민폐도 이런 밑폐이냐? 살다살다 이렇게 낯간지러운 마당극은 처음 본다 길긴 또 뭐가 이렇게 긴지! 제발 좀 그만하고 궁으로 돌아가라!!

가장 현명한 것은 윤 상궁이었다 그녀는 체념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안 보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그리고 금군들.... 금군들은 여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진지한 얼굴로 황제 내외를 바라보았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뚤어져라 그들의 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단 한가지는 확실 했다

우리가 병풍으로 보이는가

황제 내외의 마당극은 그렇게 한참동안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애정을 확인하고 난 뒤에 황제의 청혼과 함께 영원을 약속하고 나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졌다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은 하마터면 대단하다고 박수를 칠 뻔했다

황제 내외와 윤 상궁 그리고 금군들이 돌아가자 집에는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한차례 거센 태풍을 견뎌낸 장인욱의 얼굴은 급격히 늙어 있었다 황제 내외가 타고 나가는 연을 배웅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그는 자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난리통을 전혀 알지 못하는 하인들은 의아한 눈으로 장인욱을 바라보았다 돌쇠가 머리를 긁적이며 묻는다

[대감마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요?]

[...소금]

[소금 좀 가져오너라]

소금? 소금은 왜....

돌쇠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예'하고 소금을 가지러 갔다

[저... 아버님 이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영한의 우려 섞인 말에 장인욱은 괜찮다고 대답하며 연이 지나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미 사라지고 업는데도

살다 보니 정말 별일이 다 있다 눈앞에서 그런 구경을 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제 아들이지만 장시언은 정말 대단하다 물론 말했던 계획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목적했던 바를 모두 이루었다

'아버님 사실 폐하께서 저를 속이신 것은 이제 다 용서했습니다 윤 상궁까지 절 속였다는 것에 배신감이 들긴 했지만 그것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아버님 말씀처럼 제가 먼저 폐하를 속인 것이니까요 그것을 가지고 화를 내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지요  게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 폐하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허,허면 왜....'

'헌데 말입니다 아버님 생각해 보니 다른 것이 화가 나서요'

'화...요?'

'예'

'무엇이 화가 난단 말씀이온지...?'

'그야- ... 제 평생을 주기로 했는데 생각해 보니 청혼도 제대로 못 받앗지 뭡니까 청혼이 다 뭔가요 사내를 황후로 들이는 것이 끔찍하다며 황실의 전통 때문에 억지로 부부의 연을 맺은 거지요 아무튼 뭐 그땐 저도 그편이 반가웠으니가 다른 말은 안 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 않습니까? 절 얻으려면 당연히 청혼을 해야지요 그리고 제가 웬만한 사람입니까? 제 평생을 얻으려면 몇날 며칠을 매달리는 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소중하니까요'

장인욱은 헛숨을 들이켰다

허! 내 아들이긴 하지만 대체 뭐 저런 놈이... 이제 보니 목욕을 한 것도 청혼을 제대로 받기 위해 몸단장을 한 것인 모양이다

'아 그리고...제가 먼저 속였고 속인 것은 미안하지만 그래도 폐하가 다시는 저를 속이지 못하도록 버릇을 고쳐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래서 일단은 뻔뻔하게 몰아붙여서 사과를 받아낼 생각입니다 한바탕 난리를 치면 두번 다시 저를 속일 생각은 못하겠지요?'

'......'

'폐하께서 사과를 하면 저도 이제까지 속였던 것을 사과하고 제 마음을 고백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청혼을 받아내야지요 아, 그리고 생각해 보았는데 청혼의 장소는 이 앞에 있는 복숭아 나무 아래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서 폐하를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게 만들어 주세요'

'.....'

'아버님 이제 말씀드렸으니 너무 걱정 마십싱 다 잘될 겁니다'

[대감마님 소금 가지고 왔습니다요]

장인욱은 이리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바가지 안에 가득 담긴 소금을 보며 그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아버님 소금으로 무엇을 하시려고....]

영한이 말을 다 마칙도 전에 장인욱은 소금을 한 움큼 쥐어 대문 앞에 촤악 뿌렸다 한 번이 두 번, 두 번이 세 번이 될 즈음, 영한은 경악해 눈을 뜨게 떴다

[아버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대문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영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더 당혹스러운 것이다

장인욱은 홱 고개를 돌려 영한을 바라보았다

[황실과 우리 가문의 평화를 위해서다 가만히 있지 말고 너도 어서 뿌리거라]

[예?]

[어서 뿌리라는데도!]

아버지의 다그침에 영한은 화들짝 놀라 소금을 한 움큼 쥐었다 고작 한 움큼인데도 손도 곰 손인지라 쥔 양이 어마어마하다

촤악-!

사방에 소금이 퍼진다

장인욱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역시 소금 뿌리기에 매진했다

촤악! 촤악! 촤악! 촤악-!

돌쇠는 입을 헤-벌린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해불가의 해괴한 모습이었다

대감마님이랑 작은 도련님이 대체 왜 저러신디야...

하지만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자는 계속 소금을 뿌렸다

두 번 다시 이곳에 걸음하지 마시고 황궁에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십시오

제발~~~!!

[어마마마...!!]

장시언과 황제가 함께 환궁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황후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희 황자는 장시언이 연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달려와 품에 안겼다

허리를 끌어안고 '어마마마, 어마마마...'하며 연신 장시언을 부른다

황제의 눈에 '네 눈엔 아비는 보이지도 않냐?' 하는 빛이 떠오른다

장시언은 '으샤'하며 아이을 안아 올렸다 서찰을 보내 안심을 시켰지만 그래도 걱정을 했던 모양이었다 토닥토닥 아이를 다독인다

[누가 보면 내가 죽다 살아난 줄 알았겠습니다]

[....계속 기다렸습니다 언제 오시나 하고요 너무 늦게 오셔서 안 오시는줄 알았습니다....]

[안 오기는 요 궁이 제 집인데 왜 안옵니까]

그 말에 장시언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강희 황자가 고개를 들어 장시언을 바주본다

[...그럼 이제 아무 데도 안 가시는 것입니까?]

장시언은 미소를 지었다

[안 갑니다 계속 이곳에 있을 겁니다 폐하랑 황자랑 오순도순 여기서 살 겁니다]

[정말이요?]

장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의 얼굴에 환환 미소가 번진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장시언은 '귀여운 우리 밤송이'하며 쪽쪽 볼에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움 밤송이 타령과 입맞춤에 강희 황자가 '어ㅡ어...'하며 당황 하는 동안 황제는 그다지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행동으로 나타났다 황제가 장시언의 품에서 강희 황자를 빼내 바닥에 내려준다 아이가 아쉬울 듯 큰 눈을 깜박였지만 그는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나머지는 내일, 아니 모레 해라]

[모레...요....?]

내일은 안되나요? 눈으로 묻는 그 물음에 황제는 단호하게 답을 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내일까지 아주 바쁠 예정이다 그러니 황후궁 근처에는 얼씬도 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장시언은 노골적인 황제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지라 밤송이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밤송아, 모레 보자꾸자

문이 닫히자마자 둘은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탐욕스럽게 혀를 얽는다 황제가 장시언은 벽으로 몰아 붙이고 그러다 이내 장시언이 몸을 틀어 황제를 벽으로 몬다 그들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힘자랑이라도 하듯 엎치락뒤치락 이리저리 벽에 부딪혔다 격한 움직임에 걸려 있던 그림과 놓인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와장창거릴 때마다 지나온 자리가 흩어진 물건들로 어지럽혀졌다

하아,하아,허억,허억.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직 숨소리만이 그들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한 손으론 장시언을 벽으로 밀었다 완벽한 밀착. 한 손으론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론 장시언의 팔을 잡아 붙이고 장시언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넣는다 숨을 나누어 마시는 것처럼 입술과 혀는 여전히 장시언의 입술을, 입안을 넘나든다 얼마나 지났을 까 황제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힘에 이끌려 털썩 자리에 눕게 된 장시언은 떨어질 줄 모르는 황제의 입술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자신이 누운 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어느새 여기까지 온 것인지 모르겠다 이 익숙한 포근함 오랜 만에 누워보는 그들의 침상이었다

장시언은 제자리도 돌아온 자신이 괜히 우습고 재미나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입을 맞추고 있던 황제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황제는 입술을 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웃지?]

장시언은 진지한 황제의 물음에 다시 피식 웃으며 '그냥 좀 제 자신이 우스워서요'라고 대답했다 자신이 우습다고 하지만 자기비하를 한다던가 스스로를 어리석게 여기는 웃음이 아니었다 '아,정말 다시 돌아왔구나'하는 안도감과 제 자신이 했던 일련의 행동들을 떠올리자 자연히 나오는 그런 웃음. 하지만 애석하게 황제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라온 것을 후회하나?]

그의 물음에 장시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를 골려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만인을 꿰뚫어 볼 만큼 깊은 통찰력을 지닌 황제가 유일하게 꿰뚫어보지 못하는 한 사람 그것은 장시언이었다 어느 정도 파악을 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장시언의 속내를 가늠하지는 못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넌 내사람이고 나와 궁에서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 난 널 놓아줄 마음이 없으니까]

협박같이 들리는 이상한 말 마치 장시언이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말을 한다 장시언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혼자 망상의 나래를 펼치는 구나 이봐, 밤나무 그만 돌아오시지?

[전...]

[이번이 마지막이다 두 번은 없어]

말을 하려던 장시언은 순간 '뭐가?'라고 ㅁ눈으로 물었다 장시언의 의아한 눈빛을 읽은 황제는 '날 떠나는 일.그래서 내가 용서를 하는 일'하고 답을 해주었다

허! 이자식좀 보게? 뭐 ? 용서? 잘못했다고 빈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와 용서타령이냐?! 용서는 내가 해준 거거든?

장시언은 코웃음을 쳤다 더욱이 황제는 이번이 마지막 용서라고 말을 했지만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장시언이 다시 그를 떠날까봐

마음속에서 심술이 솟아난다 용서를 빈 주제에 용서를 해주었다고 말하는 이 상황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좀 불쌍하니 '그야 물론이지요'하고 답을 해주어도 좋으련만,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장시언은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글쎄요, 폐하께서 잘하시면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장시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언제 또 저를 속이실지 알 수 없으니 확답은 드리기 힘듭니다]

[.....]

[또 속이시면 다시 사라질지도 모르지요]

[너는 속여도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말이냐?]

이거이거 아직도 앙금이 쌓여 있구만?

앞으로 그에게 무언가를 속일 생각은 없다 정체가 거의 발각되었는데 숨겨서 무엇 하리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정반대로 나가는 말

[제가 속이면 폐하께서도 사라지시면 되지 않습니까,후후후....]

아, 나오늘 왜 이렇게 얄밉냐, 근데.... 참을 수가 없어! 너무 재밌어!! 크크크큭.....

장시언은 황제를 놀리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지존을 우롱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낼 법도 한데 그러지 않고 족족 수에 걸리는 황제를 보니 즐거움이 더컸다 겉만 보면 절대 그렇지 않은데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와락 황제를 끌어안았다 황제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농입니다 가긴 어딜 갑니까 이곳이 제 집인데 아까 밤송... 흠흠. 황자에게도 말했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이제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갑니다]

황제의 귀에 속삭이며 말을 하자 어이없어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와 함께

[몸이 약하고 마음이 여리다더니 이건 뭐.... ...그것이 날 속였군]

응? 뭐라고?

[예?]

장시언은 황제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풀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제가 장시언을 떼어내며 마주본다 날카롭게 눈이 빛난다

왜 이래 또?

[솔직히 말해 봐라 심신이 여리고 병야한 것도 사실이 아니지?]

엥? 장시언은 눈을 깜박였다

.... 그걸 이제야 알았냐?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남이 뭐라 하든 간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대인배 중의 대인배요 걸어 다니는 건강의 결정체다

황제는 장시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헛다리를 짚은 게 아니었다

[허면 왜 속인 것이냐?]

[.....]

[본래 성격을 숨긴 이유가 뭔지 물었다]

네 관심 밖에서 편안히 살려고

장시언은 내적 갈등을 겪었다 솔직히 말했다간 들들 볶일 것이 뻔한데.....

아, 이제 속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일신의 안녕과 관계된 것이라면 속여야겠다 이건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해야겠다

장시언은 오히려 황제에게 되물었다

[글쎄요 어떨까요.... 제가 속인 거라고 보십니까?]

황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황제의 물음에 대한 온전한 답이 아니었다 교묘한 회피였다

장시언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둘 다 제 모습일 수도 있지요....]

눈이 곱게 휘어지고 보일 듯 말 듯한 보조개가 살짝 들어간다 반면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장시언은 모르고 있겠지만 그는 이 미소에 가장 약했다 사내인데 분명 자신과 같은 사내인데 저 미소가 만들어내는 요염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서늘하고 가련한 인상인데 미소를 지을 때면 사내를 흘리려고 작정한 요부가 따로 없다

[어느쪽이 더 좋으십니까? 맞춰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쪽? 아니면...]

장시언은 황제에게 잡힌 팔을 빼내 다시 그의 목에 둘렀다 그리고는 상체를 일으키며 몸을 틀었다 순간적인 힘이 엄청났다 순식간에 위치가 뒤바뀐다 이젠 장시언이 황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면 이쪽이 더 취향이신가?]

장시언은 황제의 위에 올라앉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는 눈매 사이로 빝나는 눈동자 당돌한 미소였다 그는 마른 것만큼이나 가벼웠다 하지만 가슴을 더듬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가늘고 긴, 여려보이는 새하얀 손이지만 사내의 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황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그는 장시언의 행동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간파했다 그냥 넘어가 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고 있는 그대로 그 자체를 받아들여 달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오만불손한 눈빛이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거야?'라고 묻고 있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는 누군가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끝맺지 못한 문제를 애매한 상태로 남겨두는 허술한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역모를 꾸몄던 그의 형님을 없앤 후부턴 그 누구도 그를 휘두르지 못했다

성정 자체도 지존으로 태어났다고 선황제가 입이 닳도록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쯧, 황제는 혀를 찼다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은 언제나 장시언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 있는 사내가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취향?

그는 피식 웃으며 손으로 장시언의 목을 감싸 자신의 품으로 내리눌렀다

[어느 쪽이든]

황제의 품에 안긴 장시언은 곧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답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너라면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아]

이게 다 뭐람....

윤 상궁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펼쳐진 참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초토화 그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벽에 걸려 있던 것들 하며 멀쩡히 잘 놓여 있던 장식품들이 죄다 바닥에 떨어져 있어 발 디딜 곳이 없었다

.....하려면 좀 곱게 할 것이지 이거야 원 멧돼지 떼가 지나갔다고 해도 믿겠다

황후의 황궁 탈출 사건으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난 후 궁 안은 아주 평화롭고 조용했다 궁으로 돌아온 황제와 황후가 전각 안에 틀어박혀 몇날 며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에서 뭘 하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수라를 올리러 간 나인들이 죄다 얼굴이 벌게져서 돌아오는 것만 보아도

몸은 좀 괜찮으시려나.....

쓸데없는 걱정일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다시 입궁을 하고 처음으로 장시언을 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다지만 워낙 오래 시달려 몸이 상하시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황제 내외가 둘 다 코빼기도 안 비치니 확인을 할 방도가 없었다 언제쯤 나오시려나 작작 좀 하시지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오늘 황제가 정무를 보기 위해 편전에 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게 오래 시달렸으면 녹초가 되어 있으실 테지....

윤 상궁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널린 것들을 발로 툭툭 차 치우고 조심스럽게 장시언이 누워 있을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 가자 베개를 벤 채 고개를 돌리고 엎드려 누워있는 상전의 모습이 보인다

쯧,쯧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좋아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윤 상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걱정스러움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흐으응~ 으흐흥~~]

툭 움직이던 손이 멈춘다 윤 상궁은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이게 지금 무슨...

헌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들려온 콧노래 소리에 황당해하고 있던 도중 오독,오독,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무언가를 씹어 먹고 있는 소리

......, ......, 설마......

윤 상궁은 재빠르게 휙 반대편으로 가보았다 그리고....

[으흥~ 끄악~]

허!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윤 상궁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상전은 팔자 좋게 엎드려 누워 유과를 손에 쥐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비록 갑자기 튀어나온 윤 상궁때문에 듣기흉한 괴성을 질렀지만

[아 진짜 깜짝 놀랐네 언제 왔어?]

윤 상궁은 잠기운이 전혀 없는 장시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이요]

[왔으면 왔다고 그러지]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물으나 마나 괜찮아 보이긴 합니다만,

[아니 안 괜찮아]

의외의 대답에 윤 상궁은 어디가? 하는 눈으로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하반신이 안 움직여]

[...하반신이요?]

[응 하반신]

하반신...

[그러실만하지요]

반나절 동안 절구질을 해도 허리가 나가는데 오늘이 벌써 며칠째인가 멀쩡하면 그게 비정상이다 그래도 자기 몸 챙기는데 극진한 장시언이니까 이 정도 인 것이다

[근데 하반신도 안 움직이는데 뭐가 그리 좋으셔서 콧노래까지 부르고 계셨어요?]

[어? ...아니 , 뭐 그냥...]

장시언은 대충 얼버무리며 괜히 유과를 뒤적거렸다 하반신이 안 움직이는 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것이었다

윤 상궁은 피식 웃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셔야지 그 주전부리들은 다 뭡니까?]

[이거? 입맛이 없다고 하니까 이거라도 좀 먹으라고 진이 주고 가던데?]

[진이요?]

[아 폐하말이야]

폐하? ..... 헉

윤 상궁은 숨을 들이켰다 이젠 이름으로 불러?

[저.. 마마 ...저기 혹시 폐하를 존함으로 부르십니까?]

조심스럽게 물어보앗는데 노력이 무색하게 장시언은 '응'하고 싶게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뭐 그러기로 했어 어색해서  싫다고 했는데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계속 불러달라고 해서]

이,이것은 비록 아내가 아닌 남편이 속삭인 것이지만 틀림없는 베겟머리송사!

베겟머리송사 그 폐하께서 베겟모리송사라니......상상이 되질 않는다

[.........]

풉...!윤 상궁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름을 불러달라고 하는 황제와 싫다고 하다가 결국 불러주는 장시언 더욱이 이젠 아주 자연스럽게 폐하를 이름으로 부른다 좋다고 아주 얼굴에 씌여 있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물어볼 때가 온 것같다

[좋으십니까?]

툭 내뱉은 물음에 장시언이 '뭐?'하며 의아하게 반문한다 윤 상궁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다시 한 번 말을 했다 전과 똑같은 물음으로

[이제 폐하를 좋아하시는 거지요 마마?]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예전엔.

'....조, 조금 호감이 생겼다 싶은 거지 아직 좋아하는 건 아니야'

이렇게 대답을 했었다 딴청을 부리면서

허면, 지금은?

윤 상궁은 눈을 빛냈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장시언은 입을 벙긋거리다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이제 폐하가...?]

[으아 졸려 가 갑자기 졸리네?..... .....,  난 이만 자야겠어]

장시언은 이불을 끌어당겨 확 얼굴까지 뒤덮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다 대답을 듣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 상궁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장시언의 얼굴과 행동에 자신이 바란 대답이 모두 들어 있었던 탓이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장시언은 그녀에게 있어 자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찍 돌아가신 마님을 대신해 그의 어머니 노릇을 해왔다

윤 상궁은 미소를 지으며 황후궁을 나왔다 자식이 행복다나는데 싫은 부모 는 어디에도 없었다

황후가 황제의 윤허도 받지 않고 황궁을 탈출해 사가로 가버린 이 사상 초유의 사건은 아는 사람들만  그 실상을 알고 세간에는 이렇게 알려졌다

몸이 너무나도 허약한 황후께서 죽음을 앞두고 더 이상 황제폐하께 폐를 끼치는 것을 저어하여 사가로 돌아왔고 황제 폐하는 그런 황후 마마를 너무도 사랑하여 그의 사가로 찾아와 영원을 약속하였다

결국 두분의 애틋한 사랑에 하늘도 탄복하여 황후 마마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더라라, 라고

장시언이 들으면 '탄복은 개뿔! 나 완전 건강하거든?!'하고 난리를 치고도 남을 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