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시탈 황후-6화 (6/8)

6장

습기를 머금은 공기. 짙은 풀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간간이 흙냄새도 섞여 있다.

빗소리....... 아..., 비가 오고 있구나....

아직은 흐릿한 정신을 부여잡고 강희 황자는 생각했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수고했다. 그 궁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걱정 마십시오, 마마.]

궁녀. 어렵지 않게 떠올리 수 있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손을 부들부들 떨던 그 궁녀를 말하는 것이겠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의자에 앉아 동아줄에 몸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손목 역시 뒤로 묶여져 있다. 뿌연 시야가 점점 또렷해진다. 궁녀 복장의 여인들과 상인들....... 아니, 허리춤에 찬 장검으로 보아 예사 상인들이 아니다. -그래, 저들이 날 데려온 이들이다.

차곡차곡 조각이 맞추어져 간다. 갑작스러운 납치로 당황했던 것이 무색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강희 황자는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 정식 돆바로 차리자고 스스로를 되뇌벼 버티는 것이었다. 강희 황자는 묶인 손목을 티가 나지 않게 틀었다. 억세게 묶여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새 상인 복장을 한 장정들이 나가고 안에는 여인들만 남았다.

[사실 넌 신경도 쓰지 않았느데.]

나직한 목소리. 혼잣말인 듯했지만 그 말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강희 황자는 알 수 있었다. 등지고 서있던 여인이 몸을 튼다.

[가문이 변변치 않아 뒷배도 없던 귀비가 너를 낳다가 죽고, 그 후 끈 떨어진 망석중 신세가 된 너를 누가 신경이나 썼겠느냐.]

비소를 머금은 동정 어린 시선이 닿는다. 돇한 말이었다. 세치 혀로 놀린 단어는 예리한 칼날이 되어 가슴을 난도질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일 분, 현재의 강희 황자에겐 아무런 자상도 남기지 못햇다. 강희 황자는 가만히 원비를 쳐다보았다. 눈이 저저로 아래로, 배로 행했다가 다시 돌아간다. 회임을 했다던 원비의 배는 그냥 편편했다. 어린 나이인 그에게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회임을 하신 것이 아닙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원비가 날카롭게 눈을 치켜뜬다. 묻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눈엣가시인 강희 황자가 물어보니 오즉하랴.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원비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하지 않았지. 처음부터.]

[그것은...]

[네가-!]

강희 황자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원비가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뱀의 그것처럼 표독스러운 눈빛. 원비는 천천히 강희 황자에게 다가갔다. 희고 고은 손이 가가온다. 강희 황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손이 자신을 틀어쥘 때까지도.

[네가 살라졌다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었을 텐데.]

목을 움켜진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강희 황자는 이를 악물었다.

[질기디질긴 명줄을 지녔구나. 황후와 가까이 지낼 때부터 그리도 널 죽이려 했건만.]

[으윽!]

[황후는, 그 사내놈은 어떤 얼굴을 할까. 네가 내 손에 죽는다면. 후후... 후후후.......]

추악했다. 원비는 벼랑 끝에 몰린 쥐새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녀에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거짓 회임이 밝혀지는 순간, 황제는 그녀의 목을 거둘 것이고 어차피 그리될 거라면, 혼자만 고이 저승길로 가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의 원흉인 황후. 황후에게 살더라도 저승길을 걷는 기분을 맛보게 해주리라.

[사내를 황후로 삼다니....... 신국의 전통은, 그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은, 모두 정신이  나간 것들이다. 아이도 못 갖는 사내가 황후? 하!]

원비는 코웃음을 쳤다. 사내를 황후로 삼는다는 전통은 오래전부터 그녀에겐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그녀는 오랜 전통을 전통 '따위'라고 여겼다. 하지만 참으로 어리석게도, 그녀는 자신이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잇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내는 황후는 물론 아이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인임에도 그녀 역시 아이를 갖지 못햇다. 그래서 거짓 회임을 꾸미지 않았던가.

[게다가.......]

원비는 말을 이었다. 아직 속에 남아있는 앙금을 다 풀어내지 못했다.

[황후로 정한 자가 그따위라니. 여인보다 더 심약한, 무능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딴 한심한 종자가 황후라니...!]

강희 황자는 붉어진 눈을 부라렸다. 이가 갈린다. 저를 욕하고 난도질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신국의 전통과 어마마마인 장시언을 욕보이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강희 황자는 막힌 숨 사이로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어마마마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사내를 황후로 삼느다는... 전통이, ......없었다 하더라도...... 크윽, 그분은 국모가 되실 자격..이, ......충분하신 분입니다...!]

황후라는 높다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백성의 눈을 지닌 분이다. 그만큼 욕심이 없고, 생각지 못한 깨달음을 주는 분. 강희 황자는 장시언을 이상적인 국모이며, 자야로운 어머니라고 여겨왔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원비의 입매가 흉흉하게 비틀린다. 강희 황자의 말은 마치, 신국의 전통이 없다 해도 당신은 황후가 되지 못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얀 손에 심줄이 도드라진다.

[이 건방진-!!]

[크헉-!]

강희 황자는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재빨리 원비의 팔목을 잡았다. 허나, 여인이라고 해도 성인. 어린 아이의 힘으로 그 힘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힘이 점점 빠져나간다. 칼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 그 단어가 뇌리에 박히자 주마등처럼 과거의 일이 스쳐 지나간다. 강희 황자는 두 눈을 감았다.

어마마마-! 아바마마-!

그 순간-.

[그만 검을 거두어 주실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낮은 사내의 목소리.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무표정한 사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청년이라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원비의 목에 칼을 겨누며 다른 한 손으로 강희 황자를 찌르려는 독기에 찬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얘기치 못한 상황에 강희 황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척이 있기 마련인데, 이 사내는 원비의 바로 뒤로 다가올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누구냐.]

먼저 물은 것은 움직임을 봉쇄당한 원비였다.

처음부터 강희 황자만을 향하고 있던 사내의 눈이 천천히 원비 쪽으로 움직인다.

[대답해야 할 의무, 없는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원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가에 경련이 인다.

[가, 감히-!]

[아-, 시끄럽네.]

시정잡배 같은 말투. 방금 전까지의 딱딱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뀐다. 나무로 만든 인형이 아닐까, 싶을 만큼 무표정했었는데.

강희 황자는 멍하니 사내를 바라보았다. 눈빛을 느꼈는지 그가 황자를 힐끗 바라본다. 일어나십시오.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희 황자가 묶여진 동아줄을 풀고 일어나기도 전에 희번덕 눈을 뜨고 있었던 원비가 다시 황자에게 달려들려고 발악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는 사내에 의해 한 번에 진압이 되었다.

'퍽-!' 소리와 함께 원비의 몸이 힘없이 늘어진다.

[가지가지 하네, 정말.]

[.......]

또 그 말투다. 시정잡배 같은.......

사내는 귀찮다는 듯이 원비를 확 밀쳤다. 아무렇지 않게 여인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눈이 마주친다.

[.......]

[.......]

저벅저벅. 사내가 다가온다. 사내는 강희 황자의 앞에 와 무릎을 굽혔다.

[주군을 뵙습니다.]

주군? 강희 황자가 의아해하는 동안 사내는 몸에 둘러진 동아줄을 풀어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살폈다. 무리하게 빼내느라 피부가 다 벗겨져 있었다. 그는 팔에 두르고 있던 끈을 풀어 세심하게 강희 황자의 손을 감쌌다.

[......그대는 누구지?]

손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끝을 묶은 그가 살짝 고개를 든다.

[주군의 그림자 호위를 맡고 있는 류운이라 합니다.]

[......, 주군이라니, 난 그대를 수하로 임명한 적이 없다.]

[폐하께서 태자 전하의 그림자 호위로 절 임명하셨습니다. 그때부터 태자 전하께선 저의 주군이십니다. -손은 어떠십니까? 좀 더 느슨하게 묶을까요?]

앞의 말은 분명 예의를 차린 말투였지만, 뒤의 물음은 주군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아이 취급을 하는 듯하다. 강희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진작 나서려 했자만, 주군의 목숨이 위험해지기 직전까지 정체를 숨기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위험해지기 직전까지.......

강희 황자는 씁쓸한 미소를 내비치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선 나를 나약하게 키울 생각이 없으시니까.]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류운은 '그렇다기보다는-' 하면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태자 전하의 정신력을 높이 산 것이 맞습니다 절 임영하셨을 적에도 무슨 일이든 잘 헤쳐 나갈 테지만 혹시나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심어두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최후의 보호막으로요. 그러니 그리 생각을 하시면 안됩..., .......]

강희 황자가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자 한참 말을 멈추었다.

[......?]

[......아무튼, 뭐 그렇다는 것입니다.]

강희 황자는 말을 멈춘 류운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류운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귀한 황족이라고는 하나 역시 아이는 아이구나. 그 나이대의 아이다운 모습이 그를 미소 짓게 했다.

[궁까지 모시겠습니다.]

[응.]

강희 황자는 힐끗 원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무얼 궁금해하는지 알아차린 류운은 그 답을 해주었다.

[죄인들은 일단 관아로 압송될 겁니다. 정신을 차리면 궁일 테지만 말입니다.]

죄인이라 함은 원비와 그녀를 모시는 한 상궁을 뜻하는 것이었다.

헌데, 정신을 차리면 이라니.......

[........ 죽은 줄 알았는데.......]

한순간에 몸이 늘어져 정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희 황자의 말에 류운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피식 웃었다.

[죽이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주군께 해를 끼치는 이는, 특히 주동자는, 꼭 살려서 추포하라고 하셨으니까요.]

[.......]

강희 황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류운의 눈이 차갑게 굳는다.

[죽일까요?]

[뭐?]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죽인다고?

[주군께서 원하시면 죽이겠습니다. 이제 제 주군은 태자 전하시니까요.]

류운은 눈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강희 황자의 말 한마디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의 목을 벨 수 있다는 단호한 결의.

[그러지 마.]

[....... 알겠습니다.]

류운은 눈빛을 풀었다. 강희 황자는 뭔가 그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죄인의, 원비의 목숨을 귀히 여기거나 동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서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듯한 말은 하지 말라는 소리다.]

강희 황자는 아까부터 마으에 걸렸던 가시를 말로 뽑아냈다. 짙은 흑빛 눈동자가 강희 황자를 바라본다.

류운은 다시 한 번 '알겠습니다.'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태어나 이제껏 살수로 살아온 그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평생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헌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류운을 향해 강희 황자가 다시 말을 덧붙인다.

[왜 나를 태자라고 부르지? 나는 아직 태자가 아니다. 책봉식을 하지 않았어.]

[책봉식은 상관없습니다. 저는 태자 전하의 그림자 호위로 임명이 되었고, 그 말은 곧 제가 모시는 분이 태자 전하라는 뜻이니까요.]

류운은 당연한 것처럼 얘기했다.

[......류운이라고 했던가?]

[예. 주군.]

[본명이야? 성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냥 류운입니다.]

황실의 그림자 호위로, 살수로 키워지는 이들에게 성은 없었다. 부모, 형제, 가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희 황자는 잠시 류운을 내려다보다가 감정이 서리지 않은 그의 눈을 보고 '그래, 그럼 류운.' 하며 말문을 열었다.

류운은 기다렸다는 듯 '예 주군 '하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궁으로 가자 그대가 날 데려다 줘]

[모시겠습니다]

류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서 걸어갔다 뒤따라 걸으며 강희 황자는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상한 사내였다 가벼운 듯 피식거리며 자신을 위로해 주던 모습과 사람의 목숨을 운운하면서도 죄책감조차  없던 차가운 눈빛 어느 것이 진정한 본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어마마께서 의도적으로 본성을 숨기는 것과는 달리 그는 두 가지 모두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럴 리 없겠지만....

본성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상태로 느껴졌다 채우기만 하면 이렇게도 될 수 있는

[........]

닫혀있던 문을 열자 사방에 즐비한 시체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정확히 목만 베어져 있었다 목을 제외한 어느 곳 하나 상처난 곳 없이 아주 깔끔하게

강희 황자는 눈을 돌려 묵묵히 걸어갔다 그 치밀한 잔인함에 토기가 올라왔다

강희 황자의 환궁 소식에 장시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희에게 그림자 홍귀를 붙여두었다 실력이 최고인 자이니 아무도 그 아이를 해치지 못할 거다'

분명 황제에게 그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서 보는 눈이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그를 얼싸 안았지만 -걱정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는데...

털썩

걸어가야 하는데 순간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는다 단언컨대 그의 인생에서 이토록 마음을 졸여본 적은 처음이었다

[마마....]

놀란 윤 상궁의 목소리가 들린다

[괜찮으시옵니까?]

윤 상궁이 장시언을 부축하려 하자 그는 손을 들어 그것을 저지했다

[괜찮아 혼자 일어날 수 있어]

장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짝-!소리가 나게 얼얼해지도록 자신의 뺨을 때렸다 그다운 과격한 정신 차리기 방법이었다

[가봐야겠어]

장시언은 윤 상궁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걸음을 옮겼다 그가 나서자 밖에 있던 궁녀들도 따라왔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그가 한 걸음 갈때 윤 상궁을 비롯한 궁녀들은 세 걸음씩 급히 따라갔다

원비의 처소에 들렀을 때 예상하긴 했지만 원비는 그곳에 없었다 몇몇 궁녀들만이 처소를 지키고 있었다 원비가 없다는 사실에 궁을 포위하고 있던 금군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철석같이 원비가 회임을 했다고 믿고 있었고 원비가 궁녀 차림으로 꾸며 처소를 빠져나갔을 것이라고는 생각자도 못했다

황제는 원비에게 속한 궁녀들을 모두 포박해 가두라고 명하였고 원비의 몸을 살피는 태의 역시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원비의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궁들은 모두 폐서인 시켰을 때보다 더 큰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장시언은 그 자리에서 황제의 명에 대하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자신이 원비를 벌하고 싶었다 원비는 사람으로서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다 거짓 회임을 꾸민 것은 장시언엑 일도 아니었다 그런 것은 오히려 같잖은 투기로 벌인 벌인 일일테니 어리석다 여기고 황제가 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어린 아이를 납치하고 시해하려 들다니 그것은 황제가 처리하기만 곱게 두고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희 황자의 처소가 눈에 들어온다

상전을 닮아 체력이 좋은 윤 상궁은 얼굴이 붉어진 정도지만 다른 궁녀들은 숨이 헉헉 거렸다 언제나 유유자적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궁을 노닐던 장시언이 이리 급히- 사실상 뛰어온 것이나 다름없게- 걸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키고 서있던 금군들과 궁녀들이 장시언을 보고 급히 예를  취한다

오상궁이 다가왔다

[황자는?]

[손을 많이 다치시어 치료중 이십니다]

치료 중이라는 오 상궁의 말에 장시언은 지체할 것 없이 처소로 들어갔다

그제야 궁녀들에게도 휴식이 주어졌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황제였다 황제는 그보다 먼저 소식을 듣고 온 듯했다

그러고 보니  밖에 금군들이 있었지

장시언은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갓다 목숨이 무사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심장이 쿵쾅 거렸다 베개를 등받이 삼아 앉고 있는 강희 황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손을 내민 채 어의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

'손을 많이 다치시어 치료 중이십니다'

대체 얼마나 다쳤기에.....

장시언의 눈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강희 황자는 이미 그에게 가족이나 다를 바 없는 귀하디귀한 존재였다 여인이 아닌 그에게 모성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고 여겼지만 그는 아이를 사랑했다 누군들 이 착하고 바른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강희 황자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어, 어마마마...어마마마!!]

강희 황자는 치료 중이라는 것도 잊고 일어나 그를 끌어안앗다 침상 위에 서있는 지라 장시언과 키가 비슷해져 아무런 어려움 없이 목에 팔을 두른다 따스한 온기 장시언은 강희 황자를 마주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평소 가증스러울만치 눈물을 잘 흘리는 그였지만 그것은 다 가련한 여인을 흉내내기 위함이었고 실제 그는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밤송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알아? 무사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꼭 껴안은 팔에서 애틋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그동안 잘 참았던 강희 황자도 뚝뚝 눈물을 흘렀다 모자는 그렇게 상봉의 기쁨에 눈물을 흘리며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쯧 황제는 혀를 차며 모자를 바라보았다 눈물의 상봉식이 끝났지만 모자가 둘 다 탱탱 부은 눈을 하고 훌쩍거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역시 아들을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의 아들은 강하고 영특한 아이였고 그림자 호위로 붙여둔 류운의 실력을 알기에 크게 심려치 않았는데 장시언에게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기에 보자마자 저리 눈물을 흘릴까 싶었다

호위를 붙여두었다는 말에 안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속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던 것이겠지 하긴.... 원체 마음이 여리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잘 받는 이니까

여전히 장시언을 반만 파악하고 있는 황제는 그리 생각하며 영견으로 손을 뻗었다

[그만들 울어라]

제 사람에겐 한없이 다정한 그는 젖은 아들의 볼을 닦아주었다 장시언에게 딱 달라붙어 갖은 어리광을 부리고 그것을 신나하며 말할 때는- 물론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도-심기다 뒤틀렸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아들을 아꼈다

[흥 해라]

손수 코까지 풀어줄 정도로

강희 황자는 훌쩍거리면서도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다 장시언은 눈물을 흘리고 있던 이 순간 까지도 황제의 의외의 모습에 눈을 땡글하게 떴다

밤나무가 안 하던 짓을!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그는 곧 경악에 차 몸을 뒤로 빼야했다 황제가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강희 황제에게 했던 그대로 '자 그대도 흥' 하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어린애 같은 짓을 골라서 다 하고 있는 황제가 자신을 애취급하니 정말 당혹스러웠다 얼마나 당황했냐하면-

[되,되, 되었습니다]

코맹맹이 소리로 말까지 더듬을 정도였다

장시언이 황제의 손을 거부하며 몸을 뺐지만 황제는 포기하지 않고 다가왔다 둘의 희한한 신경전을 제법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온몸으로  '싫어 저리가 !'하고 외치던 장시언은 결국 끝까지 거부하지 못하고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흥!'하고 코를 풀어야 했다

밀려오는 자괴감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막혔던 코가 뚫려 시원하긴 했지만 이 나이에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황제는 뭐가 그리 좋은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지 마라 정 든다 ........아니 이미 들었지 ......아이고 내 팔자야.......

.....아 괜히 한 대 때리고 싶네 때릴까?

여러 생각들이 요동치며 움직인다 하지만 뭐하나 그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미 든 정을 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황제에게 꿀밤을 먹일 수도 없는 노릇 장시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이 감긴 강희 황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흰 천이 약초에서 나온 즙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손은 괜찮습니까? 많이 다치셨다도 들었는데....]

강희 황자는 '어...' 하며 장시언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강희 황자의 고민을 덜어준 것은 황제였다

[손목뼈가 빠지고 인대가 늘어났다 뼈는 다시 맞추었지만 한동안 오른손을 쓸 수 없을 거라는 군]

황제는 말을 마치고 어의에게 눈짓을 했다 황후에게 더 설명을 하라는 뜻이었다

[아.. 예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 맞사옵니다 손목에 큰 무리가 가 그리되셨습니다 게다가 살갗이 벗겨지셔서 다 나으시려면 시일이 오래 걸릴 듯합니다]

[살갗이....]

장시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다 이리 된 겁니까?]

손을 보며 황자에게 물은 것이지만 강희 황자는 이번에도 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간의 일들을 통해 밤송이가 은근히 고집이 세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장시언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헌데 그런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옷깃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무슨 자국이었다

장시언은 누가 말리기도 전에 확-아이의 옷깃을 젖혔다 그러자 자국이 완전히 드러났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의 선명한 손자국

옷깃을 젖힌 장시언도 황자의 몸을 살피던 어의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황제도 모두 말을 잃었다

이, 이 죽일 년!!

평소 욕을 입에 담지 않는 장시언이었지만 더욱이 여인에게 그런 적이 없던 그이지만 이 순간엔 쌍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뻔했다 장시언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강희 황자의 옷깃을 다시 여며주었다 좀처럼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

[살펴라]

황제의 명의 떨어지자 어의는 다시 조심스럽게 황자의 옷깃을 젖혔다 장시언은 차마 그것을 다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은 강희 황자가 치료를 마치고 잠이 들때가지 계속 되었다

관아로 압송되었던 원비와 한 상궁은 그날 바로 궁의 전옥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들이 정신차리자마자 공개 추국이 열렸다

원비의 죄콕이 하나하나 읊어질수록 사람들은 그 극악무도함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원비는 그 자리에서도 뻔뻔할 정도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었다

공개 추국은 연일 계속 되었다

원비의 몸 상태를 살폈던 태의는 고문 끝에 결국 원비의 사주를 받아 거짓 회임을 꾸몄다고 자백했다 그는 궁 밖에 아이를 가진 처녀까지 물색해 놨다고 밝혀 모구들 기함케 했다 모든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원비에게 손가락질을 했지만 원비는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그저 오만불손한 눈으로 황제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을 때마다 그녀의 측근들은 포를 뜨고 살을 지지는 고문에 비명을 내질렀다 벌써 몇 명이나 견디지 못하고 원비와 자신들의 죄를 시인했지만 원비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황제가 더 미쳐 날뛰길 바라고 있었다 마음 속엔 이미 돋기밖에 남지 않았고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역사가 황제를 폭군으로 기억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조차도 그녀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황제는 인정사정없을 만큼 잔인했지만 차가운 머리를 가진 치밀한 정치가였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명분 없는 살육은 하지 않았다 명분은 곧 권력을 유지하는 힘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모든 죄목을 따져 묻고 모든 증거들로 그녀를 압박했다 칼날이 조금씩,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거짓 회임으로 황실을 기만하고 태자로 책봉될 강희 황자를 납치해 시해라려고 한 것이 맞나?]

황제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같은 질문을 던졌다 공개 추국이 시작된 후 원비는 단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 원비가 죄를 시인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공개 추국을 통해 원비의 죄를 세상에 알리고 피의 대가를 치르는 것에 대한 명분은 얻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녀가 죄를 시인하지 않아도 어차리 모든 정황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고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는 시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죽어나가는 측근들도 늘어갔기때문에 황제에게는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해시가 다 되어 찾아온 황제는 오자마자 장시언을 당겨 품에 안았다

흐음..... 목 안에서 울리는 만족스러운 소리 닿을 듯 말 듯한 입술 숨결로 가슴이 간질간질 해진다

하지만 극락 구경하자는 황제의 신호에도 장시언은 호응해주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오늘은 기필코. 확실하게 말을 해야 한다!

그는 몇 번이고 뱉어내고 싶었던 그 말을 속으로 되뇌였다

'폐하 저도 추국장에 데려가 주시옵소서 어찌 신첩만 못들어가게 하시옵니까?'

반짝 눈이 빛난다 오늘은 반드시 허락을 받고 말리라!

황제는 공개 추국임에도 황후인 장시언의 출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는데 황후가 너무 심약하여 고문하는 것을 보면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장시언은 황제가 내세운 이유에 코웃음을 쳤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심약이라니 대체 누가 심약하다는 건지!

장시언이 황제에게 허락해달란 뜻을 내비쳤지만 황제는 절대 뜻을 거두지 않았다

복장 터지는 일이었지만 장시언은 이 일에 대해 무작정 억울해하고 화낼 수 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원흉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호통에 서글픈 눈물을 글썽글썽 연약한 척,가련한 척, 잔바람에도 '아아.....'하며 픽칙 쓰러지기가 부지기수- 이렇게 생활했으니, 심약의 결정체라고 각인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제와 '야, 밤나무! 그런거 아니거든? '하고 반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으으...., 내 무덤 내가 팠는데 누굴 탓하리오....

장시언은 결국 스스로를 탓하며 반쯤 체념했다 처절하게 무너지는 원비를 지켜보고 싶었지만 가슴에서 시퍼런 빛내고 있는 복수의 칼날을 빼들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상심이 컸다

하지만 바로 어제, 황제가 강희 황자를 추국장에 부른다고 말을 했을 때 장시언은 다시 한번 전의를 불태웠다

갈 테다! 나도 무조건 갈 테다!!

처음부터 강희 황자는 공개 추국을 지켜보는 것에 대해 제한 받지 않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고 납치를 당했던 때의 충격과 공포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다들 생각했다 헌데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던 -아직 나이도 어린- 강희 황자도 추국을 지켜보게 하는데 다 큰 어른이 장시언을 못 가게 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는 강희 황자가 추국을 지켜보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했다 그가 무조건 간다고 결심을 한 것은 사내로서의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로 이 강희 황자를 추국장에 데려가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후자의 이유가 더 컸다

아이를 추국장에 데려가 굳이 그날의 상처를 들쑤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황제의 손이 머리카락을 헤치며 파고든다 귓바퀴를 축축이 적시며 움직이는 그의 입술에 허리가 저릿해졌다 장시언은 '아.....' 하며 살짝 황제를 밀어냈다

[폐하 오늘은 좀.......]

장시언의 거부에 황제는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순식간에 냉기가 내려앉는듯하다

[.........몸이 안 좋은 건가?]

헛다리 짚기는 몸은 항상 날아다닌다!

[아닙니다 단지.......]

장시언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걱정이 되어서.....]

[걱정? 걱정이라니?]

[...... 강희 황자를 추국장에 데려간다고 하지 않으셨습까 신첩 그것이 너무 걱정이 되옵니다 아직 그때의 상처도 다 아물지 않았고....... 어린 아이인 데...]

[......]

[.....하아.....]

장시언은 땅이 꺼져라 깊이 한숨을 쉬며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하고 싶지 않다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완벽한 속임이었다 그런 마음이 안들기는 커녕 이미 홍두깨질에 익숙해질 몸은 들이대는 순간 바로 준비 완료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야 그런까 어서 나도 데려간다고 말해 그렇게 걱정이 되면 너도 데려가주마 이렇게 말하라고

[강희를 데려가는 것은]

황제는 대뜸 말을 꺼냈다

오호라~ 내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는 심산이구만? 야! 그러지 말고 나도 데려간다고 말을 해! 아니면 밤송이를 안 데려간다고 하던가!

하지만 장시언의 기대와는 달리 황제는 강희 황자를 데려가려는 본래의 목적을 얘기했다

[두려움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응? 뭐라?

[......예]

장시언이 그게 무슨 뜻이라는 듯 반문하자 황제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짙은 눈동자가 장시언을 바라본다 부드러운 손길이 장시언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걸로 할 수는 없지]

웃음기가 전혀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 장시언은 움찔 목을 움츠렸지만 황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하지 못했다 그의 눈이 움직이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강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납치 당해 죽을 뻔했던 것을 잊지 못할 거다]

제 목이 졸리던 그 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해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얄궂게도 두려움과 공포를 더 깊이 각인시키거든

[........]

[공포는 예고도 없이 엄습해 강희를 괴롭힐 테고]

[........]

[뿌리치려 할수록 더 강하게 옭아매겠지]

가만히 듣고 있던 장시언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며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주제의 얘기가 아니었다

턱선을 따라 움직이던 황제의 긴 손가락이 장시언의 턱에 닿는다

[두려움을 넘어서려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장시언의 고개가 들린다 장시언은 순식간에 황제의 눈과 마주했다 좀 전까지 그를 괴롭혔던 그 불편함이 다시 밀려온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럴수가 없었다

피하지 말고 들어

칠흙 같은 눈동자가 오만한 손가락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넘어서려면 두려움의 대상을 직시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래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지]

거기까지 말을 마치고 황제는 장시언을 직시하던 날카로운 눈매를 풀었다

미소가 짙은 눈동자를 살며시 가린다

장시언보다 한 뼘은 더 큰 황제가 고개를 숙여 콩, 하고 이마를 박았다

[네가 강희를 많이 아낀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진정 강희를 아낀다면 걱정이 돼도 참아라]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와 행동에 장시언은 살짝 보로통해졌지만 황제가 하는 말에 틀린 것이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목적은 달성해야겠다

밤송이를 추국장으로 보내야 한다면-

[허면 저도 추국을 지켜보게 해주십시오]

장시언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했다 그러자 장시언의 몸을 제 몸처럼 쓰다듬던 황제의 손이 멈칫한다

[황자의 곁에 있어주고 싶습니다]

네가 나의 이 절절한 눈빛을 거부할 수 있냐? 할 수 있겠냐고? 밤나무 너는 못 해! 절대 못해~ 절대 못한다~]

[........]

장시언의 엉터리 최면이 먹혔는지 황제가 이번엔 뜻을 내치지 않는다

윤허를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를 거다]

다르다니 뭐가?

[원비의 목을 쳐낼 날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장시언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만큼 잔인할 거라는 경고였다

[괜찮습니다]

괜찮다 사실이 그랬지만 황제는 장시언이 고집을 피운다고 생각했다

[보고나면 며칠 자리보전을 할지도 모른다]

뭐? 자리보전? 푸핫~!

[상관없습니다]

그럴 일 절대 없을테고

[난 상관없다]

황제는 허락 할 수없다는 뜻을 다시 한 번 내비쳤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장시언은 퍽퍽 제 가슴을 치고 싶었다

으으...... 흥분하지 말자

[어린 황자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런것은 제가 못 볼리가 없지요 장시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강희는 어리지만 너만큼 여리지는 않다]

웃기지마!

장시언의 얼굴은 내뱉지 못한 화로 인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정곡을 찔려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황제는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장시언으 얼굴을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리도 가고 싶으냐?]

당연하지!

[예]

[가서 무엇 하려고?]

장시언은 황제가 갑자기 돌아설 기미를 보이자 눈을 빛냈다

그야 물론 밤송이 곁에 있어주고 원비를...

[말씀드렸듯이 황자의 곁에 있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만 말하고 나머지 하나는 숨긴다

황제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결국 장시언의 고집에 져주기로 한 것이다

[알았다 윤허하도록 하지]

장시언은 제가 들은 말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계속 안 된다고만 하던 황제가 너무 쉽게 허락을 하자 자기도 모르게 반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그것도 역시 인식하지 못했다

황제의 미소가 짙어진다

[그래 정말로]

장시언은 황제를 따라 미소 지었다 긴 눈매가 휘어진다

[대신-]

황제는 장시언의 손에 깍지를 끼며 들어올렸다 목적을 달성해 좋아하고 있던 장시언은 응?하며 손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소가 지워지고 대신 의아함이 자리 잡는다

뭐냐 이건? 다 큰 사내 둘이서 웬 깍지?

장시언이 뚫어져라 손을 쳐다보자 황제는 깍지를 낀 손에 더 꽉 힘을 주었다

[추국장에서는 이리 있어야 한다]

엥?

[......예?]

귓구멍이 미쳤나? 이제 헛소리가 다 들리네

[이리 있어야 한다고 했다 추국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

뭐라고 한거지 지금? 추국장에서 뭘 하고 있어??

눈은 여전히 깍지를 낀 손에 고정이 되어 있다 그러다...헉! 장시언은 숨을 들이켰다 황제가 뭘 하자고 한 건지 비로소 머리게 콱 박혔다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왜? 왜?? 왜에?!

입 밖으로 나온 말도 아니건만 감 좋은 황제는 장시언이 궁금해하는 것을 바로 답해주었다

[걱정되니까]

장시언은 돌덩이처럼 굳었다

남자 둘이 깍지 추국장에서 남자 둘이 깍지.깍지...깍지........

틀어지는 주리에 고통스러워하는 원비와 사이좋은 어린 아이처럼 깍지를 낀 채 그런 원비를 지켜보는 장시언과 황제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이상한 그림이었다

확실히 원비의 속을 뒤집을 수는 있겠지만 이건 뭔가 아니다 싶었다

[저...... 폐하.....그것은 좀........]

절대 싫어! 나 통뼈 장시언이야! 강골이란 말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 매미말고 날 기절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지, 지나친 홍두깨질을 제외하면!!!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아악! 그게 아니야!!

장시언은 속으로 절규했다 황제가 말을 잇는다

[부부끼리 손을 잡는 게 무에 그리 대수라고]

엄청난 대수다! 게다가 그냥 손잡는게 아니고 깍지 끼는 거잖아!! 남자끼리 깍지 끼는 게 보통 일이냐?! 어흐흑! 내 팔자야....

장시언은 푹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내뿜는 거부의 뜻을 황제는 바로 알아차렸다

[싫다면 허락은 철회다]

이 비겁자!!

[....시, 싫다기보다는....]

비겁자!! 비겁자!!!

[그, 까, 까지 말고 다른 것을 하면 아니 될까요?]

[......]

[안 될..까요?]

나 그거 싫어! 진짜 싫어! 벌써부터 닭살이 우수수 돋는단 말이다!!

막상 하게 되면 얼마 안가 금방 적응할 장시언이지만 당장 싫은건 싫은거 였다 남자끼리 깍지를 끼다니! 그런 것은 어릴때도 안 하던 짓이다

[다른거라.......]

황제가 가만히 장시언을 바라본다 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움찔

바, 밤나무 너 왜그래?........ 너 지금 나쁜 생각하고 있지? 그렇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장시언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폐,폐하?]

[다른거라면 뭐가 좋을까?]

[.......]

[그리 부끄러우면 증명이라도 해 볼 테냐?]

대신 뭘 하자고 할까,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는데 황제에게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증명이요?]

[그래 증명 네가 내손을 잡지 않아도 될 만큼 강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다면 추국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마 물론 손도 잡지 않고]

깍지 껴진 손이 스스륵 풀린다 황제는 웃고 있었다 정말 즐겁다는 듯 아주 환하게. 이상하게도 그 미소에 마음이 더 불안해졌다

꿍꿍이가 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네가 여리지 않다는 걸, 배짱이 두둑하다는 걸 보여주기만 하면 돼]

흥! 웃기시네! 내가 풋내기인 줄 아냐? 아름다운 미소에 현혹되어 옳다구나 덥석 물줄 알고?

장시언은 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시언이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이미 혼자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는 장시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얼레? 하는 사이에 장시언은 황제에게 이끌려 그의 옷고름을 풀었다

으악!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황제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장시언은 제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사천리로 황제의 옷을 벗기고 단단한 가슴을 더듬었다 반쯤 선 황제의 물건을 쥐었을 땐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끼야아악! 뭐야! 황제 얘 미쳤나 봐!!!

[폐, 폐하 지금 뭐 하시는-!]

장시언은 손 안의 물건이 점점 커지는 것을 생생히 느끼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경악스러움에 뒤로 나자빠지기 일보 직전이 그와는 달리 황제는 여전히 미소를 매단 채 아주 평온해 보였다

[내 마음을 동하게 하면 데려가 주지]

[예?]

[시작은 내가 도와줬으니 이젠 너 혼자서]

황제는 그렇게만 말하고 손을 뗐다 구구절절 길게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될 상황이건만 제 할말만 하고 딱 끝낸다

장시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이 자식?

그러다 별생각 없이 한결 편해진 손에 시선을 준다 눈에 보이는 건 이제 혼자서 황제의 중심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

[으악!!!]

장시언은 정말 채신머리 없이 경망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퍼뜩 손을 뗐다 거둔 손을 뒤로 감추며 뒷걸음질을 쳤다

무섭다 무서워!! 이제까지 중에 제일 무서워!!

하지만 얼마 못가 황제에게 팔을 잡혔다

히익-!

[추국을 보지 않을 셈이냐?]

[그.그, 그건 아니지만...]

협박이냐? 야 밤나무! 나도 할 말 있거든?!

[이, 이건 그런게 아니지 않습니까!]

장시언은 빽 소리를 질렀다 황제는 담담한 목소리로 '뭐가?'하고 물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몰라서 묻냐?

[이게 강단 있는 것과 무슨 상관 있다고 이러십니까 대체]

살다 살다 이렇게 어이없는 경우는 처음이다 아랫도리를 세워주는 게 강단 있는 거냐? 배짱이 두둑한 거야? 아니 이 무슨 황당한 사고체계인지!!

황제는 오히려 장시언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상관이 없지?]

[예? 그야-]

[이제껏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으니 직접 네가 주도해 보라는 것이다 날 동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사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한다고 보는데]

갑자기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것도 못해? 그러고도 사냐라 할 수 있나?

황제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황후 장시언이라면 이 상황에서 '송구하옵니다......'하고 부끄러워하며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옳다 평소의 장시언이라면 '응, 난 못하겠는데?'하며 오히려 상대의 속을 긁어놓는 것이 옳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언제부터 인지는 잘 모르지만 황제와의 관계에 있어 사내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 싫었다 타인들은 그들의 위치를 달리 보겠지만 둘 사이에선 같은 사내로 동등한 위치로 있고 싶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전....]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황제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장시언의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옷고름이 풀리기 직전- 턱 장시언은 황제의 손을 잡고 얘기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옷고름을 풀어 걷어내자 옷은 힘없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시언은 천천히 황제에게 다가갔다

이봐 밤나무 나 우습게 보지마 내가 게으름으로 천하제일인이긴 하다만 한다면 하는 남자라고!

황제의 바로 앞까지 가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자 황제의 눈썹이 꿈틀한다 장시언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붉은 핏줄이 드러난 기세 좋은 양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눈앞에서 그 위용을 자랑한다 매일 밤 보아온 홍두깨인데 보기만 해도 기가 질렸다

장시언은 기둥을 잡고 살짝 입을 벌려 귀두를 할짝거렸다 받아보기만 했지만 해본 적이 없으니 혀놀림은 서툴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렇게 엉망인데도 황제가 흥분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양물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손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금 자신이 생겼다

그래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든데 하물며 난 사람이고 그동안 수도없이 밤일을 했왔잖아 이 정도도 못하겠어?

장시언은 질끈 눈을 감았다

으으. 내 턱아 내일 살아서 만나자꾸나

그리고 그대로 황제의 물건을 입에 담았다 사람의 입안은 항상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데 침입한 성기는 그보다 더 뜨거워 입 안의 열기를 잠재웠다

위에서 정욕에 찬 호흡소리가 들린다

장시언은 천천히 움직였다 워낙 커서 반 정도 밖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귀두가 목구멍을 찔러와 토기가 올라왔다 숨쉬기도 힘들었다 볼에 부드러운 손길이 스친다 그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장시언은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흥분에 찬 눈동자.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장시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쿵,쿵,쿵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래 바로 이거다 분명 그의 아래에 있지만 그를 쥐고 있는 듯한 이 느낌

그는 위에서 자신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다 그 동등함이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장시언은 기억을 더듬에 황제가 해주었던 감각을 떠올렸다 어떻게 혀를 움직였는지 어떻게 입 안을 조였는지 장시언이 움직일수록 양물은 입 안에서 힘을 더해갔다 턱을 타고 타액이 흘러내린다

아주 그냥 끝도 없이 커지네. .......근데 아직도냐? 아직도야? 이래도? 이래도?!

장시언은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그 순간-

황제가 턱을 쥐며 성기를 빼내고 장시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장시언은 황제의 손에 이끌려 침상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보게 밤나무 동하였나?

[아니 거길 왜 가신다는 겁니까?]

황후궁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안에서 들리는 호통 소리에 궁녀들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윤 상궁 마마님 목소리가 아닌가?

무슨 일이시기에 저러시나?

아무리 그래도 황후 마마께 저리 언성을 높이시다니.....

궁녀들은 어리둥절 저마다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밖에서 궁녀들이 그러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윤 상궁은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는 듯 '왜 가시냐니까요'하고 다시 한번 언성을 높였다 어지간해선 이렇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데 상전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녀를 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윤 상궁을 흥분하게 만든 장본인인 장시언은 윤상궁이 그러거나 말거나 호로 호로고-유유자적하게 차를 마셨다 사람 속을 뒤집는데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

호오-호로록~

[마마!!]

[아 귀 떨어지겠네 왜 그러는 게야?]

[몰라 물으십니까? 추국장에 가신다면서요 거길 왜 가시냐니까요?]

허! 윤상궁은 헛숨을 들이마셨다

[무슨 좋은 구경을 하시겠다고 거길 가십니까? 폐하께서 절대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 것 잊으셨어요?]

[내가 무슨 까마귀 고기를 구워먹은 줄 알아? 기억해 생생하게]

[그런데요? 그래도 가신다고요?]

윤 상궁이 그렇게 묻자 장시언은 '응, 물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 상궁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든다

씨익 장시언은 의뭉스럽게 웃었다

[아무 걱저하지마 윤 상궁 폐하의 윤허도 이미 받았으니까]

[예? 폐하께서 윤허를 하셨단 말입니까?]

어찌 그런....... 윤 상궁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얘기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황제는 심신이 여린- 여리다고 알고 있는- 장시언에게 험한 꼴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 상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익히 아는 장시언은 가증스럽게 여인 흉내를 내며 오호호홋~ 경박하게 웃어재꼈다

[당연한거 아니야? 누구의 부탁인데! 내가 청을 하면 하늘의 별도 따다 주려고 하실 껄? 추국장에 가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 이 말씀!]

장시언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넓지도 않은 가슴을 쭉 폈다 콧대가 하늘을 찌른다

기고만장한 장시언과는 달리 윤 상궁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하며 계속 의아해했다

[.마마께서 뭔가 하셨지요? 폐하께서 그리 쉬이 윤허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움찔 점점 높아지는 콧대를 자랑하며 온갖 허세를 다 부리고 있던 장시언은 예리한 윤 상궁의 지적에 순간 멈칫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모습을 윤 상궁이 놓칠 리 없었다

[제 말이 맞지요? 뭡니까? 대체 어찌 윤허를 받으셨어요?]

....이제껏 갈고 닦은 실력으로 색공술 좀 펼쳤다 덕분에 후끈 달아오르는 긴긴밤을 보냈지

좀 전의 도도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꿀 먹은 벙어리만 남아 있다 윤 상궁은 가느스름하게 눈을 떴다

[뭘 하셨습니까?]

[....무, 무무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하긴 뭘 해 그, 그냥 청을 드렸을 뿐이야]

절대 말 못한다 지난밤에 이런 일, 저런 일, 요런 일까지 했다고 어찌 말하리

[흐음~ 그래서요?]

[그, 그렇다는데도!]

밤 사정을 제발 깊이 파고 들지 말아줘!

장시언이 속으로 사정사정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윤 상궁은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피식 거릴 뿐

[정말 가실 겁니까?]

[무조건 갈거야]

뭐 때문에 턱이 얼얼해질 때까지 했는데

장시언은 바로 대답했다 윤 상궁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 마마께서 왜 그렇게 가고 싶어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비 머리채를 잡아 뜯기라고 하시게요?]

'응'이라고 대답한다면 이제껏 쌓은 공든 탑 다 무너집니다 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장시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면 따귀라도 때리시려는 겁니까?]

[그것도 아니야]

[그럼 정말 황자님 때문에만 가시려는 거라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윤상궁은 확신에 차 상전의 속내늘 가늠하기 위해 눈을 가르스름하게 떴다 아니나 다를까 장시언이 그것을 부정한다

[물론 아니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럼!

윤 상궁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허면 왜 가시려는 겁니까 왜?]

가지 말라는 기색을 흉흉히 드러내는 윤 상궁의 물음에 장시언은 눈을 빛내며 씨익 웃었다 긴 소매가 곰살맞게 휘어진다 꿍꿍이가 있는 영악한 미소였다

상전은 저런 미소를 보일 때마다 그녀를 당혹의 늪으로 빠뜨리곤 했었다

[그야 물론-]

그야 물론..?

윤 상궁은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대담 대신 미소가 더 짙어지고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날카롭게 눈이 빛난다

장시언은 마치 비밀을 얘기해주려는 아이처럼 윤 상궁의 귓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윤 상군은 기다렸는 듯이 쫑긋 귀를 세웠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도발하려고]

.....응?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윤 상궁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껌벅였다

지금 뭐라고 .....도발을 한다고 한 게 맞나?

그러거나 말거나 장시언은 제 할 말을 다 해서 개운하단 얼굴로다시 호로록-차를 마셨다

윤상궁은 만면에 평화로움을 띠우고 있는 상전은 가만히 보고 있다가 '....... 예?' 하고 되물었다 다시 한 번 제대로 듣고 싶었다

[뭘 하신다고요?]

홀짝홀짝 마시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찻잔을 내려두고 장시언은 여상하게 말을 했다

[도발]

[누구를요?]

[원비를]

[저... 마마... 제가 잘 이해가 안되어 그러는데 원비를 왜 도발하십니까?죄를 시인하게 하시려고요?]

장시언은 피식 웃으며 쪼로록-다시 차를 따랐다

[원비가 내명부 사람인 건 맞지만 지은 죄가 워낙 크니 그건 폐하께서 하실 몫이지 내가 아니라]

[허면 왜...]

[당한 만큼 되돌려 줄 생각이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당한 만큼만]

[당한 만큼만요?]

[응 죽여도 시원찮지만 딱 그만큼만 되돌려 주려고 나머진 폐하께 맡겨야지]

장시언은 그렇게 말을 하고 차를 마셨다 윤 상궁은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신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당한 만큼만 되돌려 주시는 것은 좋은데 혹 당한 정도가 아주 큰 것 아닙니까?]

넌지시 떠보는 윤 상궁의 예리한 물음에 장시언은 피식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흠, 밤송이 처소가 이렇게 생겼구나?

장시언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기저기를 살폈다. 추국장에 갈 준비를 마친 그가 걸음을 한 곳은 강희 황자의 처소였다. 함께 가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곧 갈 테니 기다리라고 연통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런 것쯤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사실 연통을 하는 것도 우스운 것이 황후가 황자를 마중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은 드문 일, 아니 효를 중시하는 신국에서는- 특히 황실에서는-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시언은 밤송이의 처소를 쭉 훑으며 나쁘지 않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 상궁은 그런 상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후 마맊[서 오셨다는 것을 안에 알려야 하는데 아들이 사는 곳을 여기저기 살피는 장시언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들으면 분명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소리칠 것이 뻔하지만, 정말 극성맞은 어머니 같았다.

[흠흠!]

윤 상궁은 헛기침 소리에 장시언이 고개를 돌린다. 왜? 하고 묻는 눈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윤 상궁은 별다른 말없이 제발 방정맞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하고 찌릿 눈빛을 보내며 안에 기별했다. 황후 마마께서 납시었으니 어서나와 예를 취하라고.

아차. 장시언은 그제야 쉴 틈 없이 돌아가던 고개를 고정시켰다. 엉성하게 굽했던 허리도 곧게 폈다. 궁녀들이야 항시 고개를 숙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바깥에서 몸가짐을 바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밤나무가 천리안을 가졌다는 것은 익히 아는 바가 아닌던가. 그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장시언의 하루 일과를 미리 알고 넌지시 물어보곤 했다. 물론, 그가 알고 있는 일과는 장시언의 하루 일과를 미리 알고 넌지시 물어보고 했다. 물론, 그가 알고 있는 일과는 장시언이 누군가를 만나거나, 밖에 나갈 때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황후궁 안에서 팔자 좋게 대자로 퍼질러 누워있는 것은 모른다. 알 턱이 없다.)

황후가 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안은 부산스러워졌다. 바깥에서도 그 소란이 고스란히 들릴 정도였다.

잠시 후 급히 문이 열리고 놀란 모습의 강희 황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시언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강희 황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더 눈이 커졌다.

응? ......뭐냐, 그 표정은?

장시언은 밤송이의 반응에 의아해하며 왜 저러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마마마...!]

신발도 챙겨 신지 않고 후다닥 뛰어오는 밤송이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밤송이가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헉! 장시언은 숨을 들이켰다.

지, 진정하자. 이것은 인기인의 숙명.

[......아하하, 무에 그리 바쁜 일이 있다고 신발도 안 신고 나온 겁니까. 아랫 사람들이 흉을 봅니다.]

[예?]

강희 황자는 고개를 들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하다가 이내 '아.......' 하고 제 발을 쳐다보았다. 버선이 흙투성이였다. 아이는 곧 머쓱해져서 불이 붉게 물들었다.

[......놀라서요. 이곳에 오실 줄 몰랐기 때문에.......]

그래, 놀란 것 같아 보이긴 한다. 그것도 엄청. 게다가 뭔가 찜찜한 표정.

[소자가 먼저 모시러 가야 하는데, 불효자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아~ 알겠다. 찜찜한 표정의 원인은 이것이었다. 밤송이는 그가 찾아온 것을 좋아하면서도 먼저 찾아뵙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이었다.

장시언은 피식 웃었다.

아이가 생각이 너무 깊어도 탈이구나.

[불효자라니요. 당치않습니다. 내가 오고 싶어 온 것입니다. 황자가 사는 곳이 보고 싶었거든요. 진작 와봤어야 하는데 늦었군요.]

[......정말이요?]

정말 오려고 하셨나요?

장시언은 강희 황자가 묻는 말에 미소를 답을 대신했다.

[자주 와야겠습니다. 황후궁과는 다른 멋이 있어요.]

자주 온다는 말에 아이의 눈이 접히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좋아하고 있는 것이 다 티가 났다. 대놓고 좋아하기에는 황후궁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라 걸음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질 못하는 것이다.

으윽. 이 귀여운 밤송이 자식!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 흰 볼을 짤짤 흔들어주고 싶다. 세상에 무슨 이런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다 있단 말인가!

장시언은 스스로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이는 너무 시끄럽고 한시도쉬지 않고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평온한 삶을 방해하니까.

헌데, 다른 아이는 몰라도 밤송이는 마냥 귀여웠다. 항상 바른 생각만 하고 모난 곳이 없는 아이는 미운 구석이 하나 없었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계속 안 크고 이렇게만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커도 이 상태로 자랐으면 좋겠다.......

윤 상궁은 가만히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평생 장시언은 모신 그녀는 얼굴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상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점점 팔불출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아들이 장가를 갈 때, 상데가 누구든지 간에 '난 이 혼인 반댈세!'를 외칠 것이 자명했다. 훤히 그려지는 미래의 그림에 윤 상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정신 차리라고 남들 모르게 장시언을 쿡 찔렀다.

움찔, 장시언은 불시의 습격을 받은 옆구리 때문에 잠시 놀라다가 괜히 흠흠, 헛기침을 했다.

[......추국장에 가지요. 준비는 다 마친 것 같은데...... 아.]

말을 하던 그는 잠시 멈추어 흙투성이가 된 버선에 시선을 주었다.

[그전에 버선을 갈아 신어야겠군요.]

장시언은 서슴없이 황자를 안아 올렸다. 윤 상궁을 비롯한 궁녀들의 입이 떠억 하고 벌어졌다.

강희 황자는 이제 여덟 살. 그 나이 또래에 비해 몸집이 큰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작은 편도 아니었다. 다른 이가 안아 들었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황후 장신언이 안아 든 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저 가는 팔목. 사실 팔목뿐이랴. 키는 큰 편이지만 몸이 원체 말라서 여인과 다를 바가 없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고, 찻잔을 들다 손목이 꺾일 것만 같다. 더욱이 평소 얼마나 골골거렸던가. 그런 분이 저리도 쉽게, 민들레씨를 든 것처럼 가볍게 안아 들다니!!

윤 상궁을 제외한 궁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황후가 황자를 안고 걸어가는 것을 비켜보았다.

제발 힘자랑하지 마세요!!!

윤 상궁은 속으로 절규했다. 자신은 본모습을 숨기는 것에 철두철미하던 상전은 요즘 들어 점점 어딘가 풀어진 사람처럼 허술하게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윤 상궁은 무언의 절규는 장시언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밤소이를 안에 내려주고 생글생글 웃으며 기다릴 테니 갈아 신고 오라고 엉덩이를 토닥였다.

윤 상궁은 망했다는 듯 푹 고개를 숙였고 궁녀들은 비볐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강희 황자가 야무지게 '예.'하고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장시언은 고양된 행복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별생각 없이 뒤로 돌앗다. 그가 몸을 틀자마자 돌이 된 것처럼 띵 굳은 것도 없었다.

......망. 했. 다.

엄습해오는 낭패감에 장시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안면극육이 미세하게 떨려온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그가 아니었다. 그에겐 이제껏 갈고 닦은 필살기가 있었다.

[아... 팔이.......]

예전에 한 번 써먹었던 것이지만, 그때는 밤송이를 괴롭히는 황자들 앞에서 했던 것이고 이번에 궁녀들에게 하는 거니까 상관없겠지.

장시언은 팔이 버드나무처럼 축 늘어지자 찰떡같이 알아들은 윤 상궁은 '마마!'하며 극정맞제 뛰어왔다. 눈으로 '제발 조심 좀 하세요!!'라고 타이르며.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괘, 괜찮네. 어미 노릇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더니....... 그리 오래 안은 것도 아닌데 팔이 아프다니 한심하군그래.......]

온갖 불쌍한 척 하며 장시언은 신세 한탄을 해댔다. 의혹의 불씨를 품고 있던 궁녀들은 어느새 '마마.......' 하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장시언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걸려~들었어!

황후궁의 궁녀들은 은근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장시언이 출중한 연기력으로 궁녀들의 마음을 쥐락펴락 하는 사이 갈 준비를 모두 마친 강희 황자가 밖으로 나왔다. 황자는 이상한 분위기를 바로 감지했다.

[저... 어마마마..?]

응?

장시언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밤송이가 눈으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하고 묻고 있었자만 모르는 척했다.

[이제 갈까요?]

[예? 예.......]

얼떨떨했지만 강희 황자는 장시언이 내민 손을 잡았다. 모자를 따라 줄줄이 내관과 궁녀들이 뒤따랐다.

추국장으로 가는 동안 장시언과 강희 황자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예기의 절반 이상은 괜찮겠냐는 장시언의 걱정 어린 말이었다. 아이의 목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 추악한 손자국이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빛을 읽은 강희 황자가 천친히 목을 매만지다.

[이제 괜찮습니다. 아프지도 않은 걸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의젓하다. 어찌 이리도 의젓하단 말인가. 사실 그뿐만이 아니다. 착하고, 귀엽고....... 바르기로 따지면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 저... 헌데, 어마마마.]

강희 황자는 조심스럽게 장시언을 불렀다. 장시언은 왜 그러냐는 듯 '예.'하고 대답했다.

[추국이 끝나면요.]

응? 추국이 끝나면?

[추국이 끝나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자못 진자한 말투라서 장시언은 가만히 밤송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게 말입니까?]

[예. 아바마마께도 함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밤나무도 함께?

[음, 중요한 말인가 보지요?]

강희 황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검게 빛나는 눈에서 뭔가 결의 같은 것이 보여서 장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게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강희 황자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럴수록 궁금증이 더 커져갔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지?

장시언은 밤송이가 무슨 말을 할지 정말 궁금했지만 뭐 곧 알게 되겠지 하며 추국장으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짓밟힌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더니... 제아무리 고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계속된 문초에는 어쩔 수 없는 법인가 보다

추국장에 모습을 드러낸 원비를 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몰골을 보고 누가 황제의 후궁이었던 이라고 생각을 하겠나

물기 하나 없이 마르고 쩍쩍 갈라진 입술 곳곳엔 피가 말라 딱지가 앉아 있고 희고 고왔던 볼은 거무튀튀하고 한눈에 보아도 거칠어 보았다 툭 뒤어나온 광대뼈는 죽어 땅에 묻힌 해골을 연상케 했다 게다가 눈 실핏줄이 터진 눈은 지독히도 붉었다. 산 자의 눈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장시언에게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장시언은 그녀를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이런 짓을 벌이다니 참으로 딱한 이구나, 그리 눈빛을 보냈다.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악독한 짓을 저지른 원비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벌인 일을, 그 어리석음을 순수한 마음으로 동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도발을 하시려구요?]

윤 상궁은 그렇게 물었다. 무슨 수로 원비를 도발할 거냐고.

수? 그거야 아주 간단하지.

장시언은 추국장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평소 연기하던 심신이 여린 황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끊임없이 동정의 빛을 띠며.

알랑한 자좀심과 독기만 남아 제가 벌인 일을 후회하기는커녕 치ㅐㅁ묵으로 황실을 조롱하는 그녀를 도발하기 위해선 이 방법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심하고 아둔한 계집으로 낙인찍힌 것. 그서도 다름 아닌 장시언에게.

예상은 적중했다. 원비는 묶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장시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하겠지. 경멸해 마지않는 사내 황후가 자신을 어리석다 탓하고 있으니. 속이 뒤집힐만한다. 충분히.

[안색이 좋지 않다. 괜찮으냐?]

응?

황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장시언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미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괜찮습니다, 폐하.]

헌데 습관이란 게 무성운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심려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괜찮은데. 사실 괜찮다 뿐이랴. 10년 묵은 체증에서 한 1년 치는 가라앉은 것만 같다. 물론 장시언을 아끼다 못해 싸고도는 밤나무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럴 줄 알았기에 못 오게 한 것이거늘.]

황제는 못마땅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은 귀 밝은 장시언에게 토씨 하나 빠짐없이 다 들어왔다.

미쳤냐? 저 깨소금 맛 나는 꼴을 안 보게?

[폐하, 신첩 정말 괜찮사옵니다.]

[괜찮기는. 안색이 이리 창백한데.]

황제는 이번에도 장시언의 말을 빈말로 치부했다. 장시언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창백한 건 분을 떡칠해서 그렇다. 안 그래도 얼굴이 희멀건 헌데 윤 상궁은 대외용 화장을 할 때면 사람을 백자리고 만들어 놓곤 하니까. (그래놓고는 절대 화장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정색을 한다.)

황제는 손등으로 장시언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장시언을 만져댄다.

어이, 밤나무. 내 볼 닳아 없어진다. 손등에 분칠하고 싶냐?

장시언은 슬쩍 몸을 뒤로 뺐다.

[보는 눈도 맣고, 황자도 있느데 이러시면.......]

낯간지럼움에 괜히 밤송이 핑계를 대자 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밤송이가 저요? 하는 것처럼 눈을 댕글하게 뜨고 고개를 돌린다.

윽. 미안하다, 밤송아. 치미는 부끄러움에 잠시 널 팔아먹었다.

장시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강희 황자는 고갸를 갸웃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우물쭈물하다가 제 손을 내밀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뭐냐, 이건? 손? 손은 왜?

[저... 어마마마......, 손 좀 잡아주시면 안 되나요?]

장시언은 잠시 눈을 깜박이며 망설이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덥석 손을 잡아주었다. 괜찮다고 꼭 쥐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역시 아이는 아이. 차가운 손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장시언이 놓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황제였다. 장시언은 강희 황자의 손을 잡아주자 순간 황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밤송이에게 눈길을 주느라 장시언은 미처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가 장시언과 관련된 일이며 속이 바늘 구멍한 해진다는 것을 앞선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으니 대처를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 아마 알았더라도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대처 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테지만.

황제는 남은 장시언의 손을 홱 낚아채 그토록 원하덕 깍지를 꼈다. 깍지, 깍지 노래를 부르더니 소원풀이를 한 것이다.

장시언은 갑작스러운 감촉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장시언이 돌아보자 황제는 여보란듯이 그의 눈앞에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뻔뻔하지만 이상한 데서 유독 부끄러워하는 장시언은 얼굴은 물론이요, 목까지 새빨갛게 물이 들었다.

끄악!

[저, 저기... 폐하......, 손은 좀....... 이건 좀.......]

놔라! 놔! 추국장에서 다 큰 사내놈 둘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 대체!!

이건 장시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공개 축구이니만큼 모인 사람들도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그들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별 희하한 꼴을 다 보겠다고. 정말 눈꼴이 시려 못 보겠다고.

하지만, 황제는 그 모든 시선을 깨끗하게 무시했다.

[강희뿐만 아니라 네게도 필요하다. 아니, 내가 필요하지. 네가 곧 쓰러질까 봐 걱정이 되니까.]

안 쓰러져!!! 장시언은 복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

[하,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

[가족의 화목을 보여주면 좀 어때서.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여! 신경 쓰여!! 신경 쓰인다고!!!

[하지만-]

[황실의 화목은 곧 신국의 화목. 이 모습을 이상타 여기는 이는 나라가 화목하지 않길 바라는 이겠지. 그런 신하는 필요 없다. 안 그런가?]

그런 궤변이!!

장시언은 황제의 교묘한 언변을 궤변이라 치부했지만, 궤변이라 할지라도 조정 대신들에겐 바로 먹혔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양 행동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이 감투 집단!! 충언을 하십시오!! 딴 데 보지 말고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충언을 하세요!!

장시언은 아버지인 장인욱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인욱은 눈을 마주치지 않기 휘해 필사적으로 딴청을 부렸다

황제는 장시언이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추국을 속행하라고 명했다 장시언은 절망했다 진심으로 창피하고 부끄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런 과시는 조용히 살길 바라는 그의 성격에 반하는 것이었다

어흐흑! 아이고 내 팔자야........

장시언은 반쯤 포기상태로 속으로 눈물을 힐리며 다시 정면을 원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남아있던 9년치의 체증이 7년 정도로 좋은 줄은 기분을 맛보았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어라? 저건......

오만 가지 감정이 뒤섞인 얼굴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치욕과 경멸 뒤에 감추어진 부러움이었다

부러움 부러움이라........

낯간지럼을 참은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이거 쓸만한데?

적응이 빠른 장시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끄러워 죽는다고 절규를 해놓고 원비가 지금까지 중 가장 크게 반응을 보이자 부끄러움을 싹 잊었다 그래서 그냥 손을 잡고 있기로 했다 오히려 자신이 열렬히 더 꽈악

오,오오! 반응한다 반응해!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이 정도면.......

장시언은 눈을 빛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였다 이제 그것은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황제는 곁에 서 있던 내관에게 턱짓을 했다 내관은 재빨리 준비시켜 둔 이들을 데려오라는 황제의 명을 전했다

응? 누굴 데려오라는 거지?

장시언은 의아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포박을 당한 두 남녀가 추국장에 나타났다 사내는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여인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강희 황자를 다른 길로 유도한 궁녀일테지

[이제부터 묻는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답을 해야 한다 만약 거짓을 고한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목을 쳐낼 것이다 알겠느냐?]

황제의 평온한 목소리에 그들은 오들오들 떨며 '........ 예 명심하겠나이다, 폐하'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의 눈이 이채로운 빛을 띤다 아름답다 못해 섬뜻한 눈빛

[가지고 오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장정 두 명이 제법 큼지막한 궤를 들고 왔다 안에 뭐가 많이 들어있는지 바닥에 내려놓으니 '쿵!'소리가 났다

뭐야?

장시언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궤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얼굴이 사색이 된 궁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궤가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게 뭔지 알고 있나?]

[......]

궁녀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차갑게 내려앉는 목소리를 들으며 궁녀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예'하고 말을 했다 황제는 '흠'하며 미소를 지었다

[네 것이냐?]

[...그 그러하옵니다.....]

[열어라]

궤 옆에 서있는 장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물쇠에 손을 댔다 잉어 모양의 자물쇠가 철걱철걱 소리를 내며 풀린다

궤가 열리고 안의 내용물을 본 장시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게 저 궁녀의 것이라고?

그 의심은 이미 황제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녕 네 것이냐?]

[.......예 제, 제 것이 맞사옵니다......]

[맞다......?]

긴 손가락이 팔받침을 두드린다 탁.탁.탁 일정하게 울리는 소리가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마치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최후처럼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

[-원비가 주던가?]

흠칫. 궁녀는 놀라 석상처럼 굳어졌다 황제와 손을 잡고 있던 장시언도 순간 팔에 소름이 돋았다 뱀 앞에 놓인 쥐가 된 기분이랄까

[저것들을 주면서 뭐라고 했지? 앞으로도 잘만하면 이런 것들은 준다고 뭐 그렇게 말하던가?]

[그, 그, 그것은......]

[저것들은 모두 원비와 내통하여 곧 태자가 될 강희 황자를 음해하고 얻은 것이 아니더냐 짐의 말이 틀린가?]

[폐,폐하....... 저것들은, ........그러니까 저것들은.......]

안된다 저것들은 안돼! 어찌 모은 것인데!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까지도 궁녀는 원비의 바람대로 추악한 욕심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녀가 무슨 변명을 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네가 사들인 거라고 할 셈이냐? 한낱 궁녀의 녹봉으로 저 많은 것들을?]

[...그, 그건]

콰앙-!

[거짓을 고할 시엔 네년의 목을 끊겠다고 미리 경고했다]

주먹으로 내리쳐 만들어진 소리는 그의 노기를 그대로 담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궁녀는 입을 다물었다 입 밖으로 한 마디라도 꺼냈다간 당장에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궁녀가 하려던 말을 멈추자 황제는 아무 말도 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 물건들을 기억하느냐?]

사내는 머리를 땅에 파묻을 것처럼 박고 있었지만 황제가 자신에게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 기억하옵니다]

[흠 너희 상단에서 취급하던 것이 맞나?]

[예..., 제가 윤필주 대감의 댁에 가져다 드린 것이 확실.....]

[네 이놈!! 누구의 사주를 받아 나와 우리 가문을 모함하는 게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추국장 안에 울렸다 추국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원비가 입을 연 것이다

윤필주. 그는 좌부승지를 역임했던 원비의 아비였다

[천한 장사치의 말로 저를 압박하려 하시는 겁니까? 허나, 저것을 증언이라 할 수 있을까요? 무릇 장사치란 돈 냄새만 맡으면 자유자재로 혀를 놀리는 것들! 저떤 장사치의 말이 아니라 확실한 증좌를 보여주시지요? 증좌가 있다면 말입니다!!]

우와....엄청나다 독하다 독하다 했지만 이건 정말..... 입에서 독이 나올 것 같다

장시언은 새삼 놀라운 눈으로 원비를 바라보았다 아마 이 자리에서 그걸 가지고 감탄하는 이는 장시언이 유일 할 것이다

황제는 악을 쓰는 원비를 여상하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비소, 명백한 조롱이었다

[확실한 증좌라...]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깍지 껴진 손이 스르륵 풀린다 응? 장시언은 자유로워진 손을 바라보다가 황제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아니 이따가 다시 잡아주겠다는 듯 장시언의 어깨를 톡톡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아래로 내려간다 그가 지나가는 걸음마다 신하들이 몸을 숙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장시언은 그의 뒷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밤나무 쟤..... 그러고 가면 남들이 내가 손을 풀은 걸 엄청 아쉬워하는 줄 알 것아냐

장시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는 황제는 이미 다 내려 가 궤 앞에 서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장정이 안에 든 비녀를 하나 건넨다

금으로 된 푸른 옥이 박힌 비녀였다

원비를 향해 고개를 돌린 황제는 정교하게 세공된 그것을 손으로 쓸며 다시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게 납치를 당한 황자가 눈앞에 있음에도 확실한 증좌를 보여 달라니.... 사람이 하는 증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말이군]

잘그랑!

원비에게서 눈을 뗴지 않은 채 황제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사내의 머리맡에 비녀를 떨어뜨렸다

[너는 이것이 네 상단에서 윤필주에게 보낸 물건이라 하였다]

[....예 그랬사옵니다]

[다시 묻지 네 말에 틀림이 없느냐?]

[저, 저 같은 미천한 것이 어찌 지존께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틀림없사옵니다]

하늘 같은 나라님 앞이라 긴장을 하여 말을 더듬긴 했지만 사내의 목소리엔 추호도 거짓됨이 없었다 황제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근거는?]

사내는 잠시 꾹 입을 다물었다

그걸 몰라 물으신단 말인가?

사내가 말이 없자 황제는 대답을 독촉했다

[다시 묻겠다 근거는?]

[.....소인은 지난 갑술년 때부터 상단의 귀한 물품을 윤필주 대감께 상납하였고 그것들을 모두 장부에 기록하였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이셨지요. 사내는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는 타고난 장사꾼답게 셈이 빨랐고, 그것과 자웅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눈치도 빨랐다. 황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에게 답을 유도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했다.

[장부는 사람이 충분히 조작 가능하지.]

황제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였고 원비가 물고 늘어질 부분에 대해 미리 선수를 쳤다. 추국장은 장부의 존재로 인해 술렁였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과연 그게 증거가 될까, 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황제의 말이 뜻하는 바를 금세 파악하고 그가 문제시하는 의혹에 대한 답을 슬슬 내뱉었다.

[장부에는 그동안 상낪한 모든 물품들의 그림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저 궤어 들어 있는 것들도 대조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저것이 저희 상단에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희가 무슨 수로, 어찌 알고 장부에 그려놓았습니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황제는 원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빠져나갈 구멍이 모두 막힌 원비는 제 입술을 깨물며 핏대를 세웠다. 어찌나 억세게 물었는지 피가 흘러내렸다. 궁지에 몰린 쥐. 하지만 그녀에겐 고양이를 물 손톱만큼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는 고양이도 아니었거니와 고양이라 하더라도 코털 하나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고양이였던 탓이다.

황제는 이것이 원비의 마지막임을 알았지만 미련 없이 몸을 틀었다. 눈과 마음에 조금이라도 담고 싶지 않다는 듯, 움직임은 냉정하고 단호했다. 그는 신국 최대의 상단, 경상을 수색해 모든 장부를 회수하도록 명을 내렸다. 구색을 갖추는 것이었다.

황제는 갑술년 때부터 나라의 거상들을 교묘하게 이용해왔다. 그들이 대귀족들에게 잘 봐다라 끊임없이 뒷돈을 대주는 것은 묵과하는 대신 장부에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하라고 명을 내렸다. 황제에게만 이득이 되는 그런 일을 셈 빠른 장사치들이 할까 싶었지만, 황제는 그것이 그들에게도 득이 되는 것이라고 각인시켰다. 그 장부가 대귀족을 틀어잡을 수 있는 약점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거래에 있어 우위에 서는 것을 싫어하는 장사꾼은 없다. 황제는 그 점을 파고들었고 작전은 성공했다. 거상들은 대귀족들의 약점이 될 장부를 열심히 작성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거래의 정점에 황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위에서 모든 상황을 조율하고 있었고, 결국 장부도 그의 목적대로 쓰여 졌다. 바로 오늘처럼.

황제는 자신의 본래의 자라로, 장시언의 곁으로 돌아갔다. 추국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장부가 발견되어 원비의 죄가 확실시되고, 그녀갸ㅏ 결국 죄를 시인한 것은 그후로 이틀이 지닌 뒤였다.

궁의 전옥서.

황궁의 전옥서라 해서 바깥의 전옥서와 다를 것은 하나도 없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높으신 분들이 계실 곳인데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하고 어림짐작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었다. 전옥서는 신분의 고하와는 상관없이 죄인을 가두는 곳일 뿐이다. 궁의 전옥서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똑같이 어둡고, 똑같이 음습하다. 더욱이, 권위란 옷 위에 입는 것.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이라고 해도 옷을 벗고 자리에서 내려오면 결국 권위도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알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전옥서에 들어온 이상 더는 높으신 '분'이 아니라는 소리다.

철벅. 철벅. 철벅.

습한 공이가 가득 채워진 곳은 천자엥서 뚝뚝 떨어진 물기로 인해 바닥이 질퍽거렸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발을 잡아끄는 느낌이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물론 장시언에겐 그렇지 않았지만.

이것은 그라 바란 그대로의 상황이었다. 피식 웃음이 흐른다.

그래, 날 택할 줄 알았지. 원비라면 그럴 줄 알았다.

-신국은 황족이 사형에 처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푼다. 죽기 전, 원비는 단 한 사람과의 독대를 허락하는 것이다.

정황상 원비가 사형을 당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렇게 됨녀 그녀도 독대를 원하는 이를 지목하게 될 것이다. 장시언은 그렇게 확신했고, 원비가 자신과 독대를 하고 싶다 말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 일부러 원비의 속을 뒤집어놓고 날 짓발고 싶으면 독대를 청하라고 보이지 않는 도발을 했다. 사실 아무도 지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추국장에서 원비의 모습을 본 장시언은 그녀가 독대의 상대로 자신을 지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원비라면, 분명 그럴 것이라고.

철벅. 철벅. 철벅. -.

[여기서부터 나 혼자 갈게. 윤 상궁은 기다리고 있어.]

장시언이 가던 길을 멈추고 얘기하자 윤 상궁이 눈을 깜박이디가 '혼자.......'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장시언이 '뭐어?' 라고 말을 하듯 홱 고개를 돌렸다.

[그거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설마 나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나 장시언 이거든?]

장시언은 별 희한한 소리를 다 한다는 듯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다다- 내뱉고는 '그럼 이따가 봐.' 하고 홀로 안으로 걸어갔다.

윤 상궁은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상전의 뒷모습을 보며 '예, 매미 빼고는 무서울 것 없는 장시언이시지요.......'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은 죄가 워낙에 커 능지처참을 피할 수 없는 원비가 죽기 전 독대를 할 상대로 장시언을 택한 것에 대한 윤 상궁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의 상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지만 말이다.

그때 얼굴이 흡사, '그래, 이 날만 기다렸다. 너 오늘 잘 걸렸다!'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윤 상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장시언이 걸어간 곳을 쳐다보았다. 황후궁 안에서 놀고먹으며 축지법이라도 익혔는지 상전은 이니 시야에서 벗어나고 없었다.

궁에 있는 거라 그런지 크긴 크구나. 전옥서에 와본 것은 처음이지만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법 걸은 것 같은데 제일 깊숙이 있다는 원비는 보이질 않았다.

아, 뭐 이렇게 쓸데없이 크게 만들어 놓았담.

장시언은 들리지 않게 투덜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는 들려오는 인기척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윈비의 최측근 상궁이었다. 목에는 칼, 발에는 쇠사슬. 그녀는 가쇄를 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장시언은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곤 다시 발을 움직였다.

조금 더 걷자 정면에 주변보다 조금 더 환한 곳이 눈에 띄었다. 윈비가 유폐된 곳. 그곳이 저리가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벅. 저벅 . 저벅

[존귀한 분이 오셨군요]

뚝 장시언은 걸음을 멈추었다 조용하고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에 담긴 조롱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래 내가 좀 존귀하긴 하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몇 걸음 더 다가가자 원비가 보인다 그녀는 꼿꼿하게 서서 장시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궁과는 달리 칼은 하지 않고 발목에 쇠사슬만 차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긴 황후와 독대를 하는데 칼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 대역죄인 다운 모습이지만 상전을 앉아서 맞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

장시언은 창살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독대를 청하면서도 솔직히 올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안 오긴 내가 왜 안오냐?

[-왔군그래]

얼씨구? 왔군그래? 놀구 있네 정말

말이 짧아진 원비를 속으로 비웃으며 장시언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어냈다 당황한듯 목소리를 떠는 것도 잊지 않는다

[워.원비........]

네가 드디어 돌았구나?

[용케도 그분의 허락을 받아냈군]

호오 그분으라 함은 폐하를 칭하는 것이렸다? 그래 알긴 아는구나 안 그래도 지난밤 밤나무를 설득하느라 죽는 줄알았다 처음엔 말로 하다가 도통 마음을 움직일 생각을 안하기에 결국 몸까지 썼지 -아 이러다가 색공술계의 절대강자로 떠오르는 건 아닌가 몰라

[......원비가 내게 독대를 청할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생각 못하긴 개뿔 손바닥 뒤집듯 훤히 들여다봤다!

[허나 황족이었던 사형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도 황실의 법도 날 보자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차분히 말을 하는 장시언을 보며 원비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오만하기 그지없구나 하기야 지금은 폐하의 관심이 네게 있으니 그럴만두 하겠지 하지만 과연 그게 영원할까]

장시언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원비를 바라보기만 했다

[영원따윈 없다 그래 봐야 너도 두 번째일 뿐이야!]

[.......]

마른 장작이냐? 갑자기 왜 활활 타올라서 흥분을 하고 난리야?

[착각하지 마라 그분의 첫 번째가 되었다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아 뭐라는 거야 귀찮아 죽겠네

[할말은 그게-]

[더러운 년]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다가도 모를 원비의 말에 대꾸하는 것도 귀찮아 할 말은 그게 다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년'소리에 장시언의 눈썹이 꿈틀한다 원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독기가 바짝 오른 세치 혀를 놀렸다

[같은 사내에게 가랑이를 벌리고 사니 좋더냐?]

[.......]

경멸섞인 원비의 말에 장시언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있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발악을 하네 아주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개소리는 흘려들으면 그만

[나쁠것 없지]

장시언은 아랫사람에게 하던 최소한의 존대를 집어치웠다 이번엔 원비의 눈썹이 꿈틀한다 장시언의 그런 모습은 그녀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리석도 아둔한 계집

[오히려 아주 좋아 알다시피 워낙 잘하거든-아 오래전이라 기억 못하려나?]

장시언은 그렇게 덧붙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가 짙어질 수록 원비는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본 모습이다 이제껏 보아온 황후의 모습이 거짓이다 그녀는 그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너 따위 사내계집이 어디가 좋다고-!]

아이고 귀 아파 목청도 좋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지만 ...... 왜 부러운가?]

[애도 못 낳는 사내계집 주제에! 신국은 미쳤다 완전히 미쳤어! 너 따위를 황후로 들이다니!]

장시언은 흠 하며 숨을 내쉬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그녀는 남자를 황후로 들이는 신국의 전통 자체를 경멸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황후의 자리가 탐나는 모양이지?]

장시언의 말에 원비의 표정이 굳어졌다 넌지시 던져본 말인데 정확히 본 모양이었다

원비가 황후?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온다 나 역시 황후에 어울리는 이는 아니지만.....

[안됐지만 신국에 남자를 황후로 들인다는 전통이 없다 해도 넌 황후가 될 수 없었을 거다 절.대.로]

그의 말을 듣자마자 원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마마마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사내를 황후로 삼는다는 전통이 ....없었다 하더라도 ....크윽 그분은 국모가 되실 자격이, 충준하신 분입니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목이 졸려 곧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면서도 강희황자가 내뱉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눈앞에 있는 이는 되지만 자신은 안 된다던 그 말 원비는 핏대가 오른 눈으로 장시언을 노려보았다

분해서 너무나도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장시언은 평온하기 그지 없는 얼굴로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 깜빡한 사이 정말 그가 눈을 한 번 깜박한 사이에 원비가 달려들었다

장시언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비녀. 창살 사이로 뻗은 그녀의 손엔 어디서 꺼냈는지 비녀가 쥐어져 있었다 끝이 뽀족하게 갈린 옥으로 된 비녀는 찔리면 살을 뚫고도 남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장시언은 숨기고 있던 손의 악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자 곧바로 '아아 아악-!'원비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비녀를 떨어뜨렸다 피가 통하지 않는 가녀린 손이 시체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원비가 뭐? 하는 눈으로 장시언은 바라본다 그 순간 장시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쥐자마자 '컥!'하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힘을 풀지 않았다 숨통을 조여 오는 억센 힘은 무자비할 정도로 가차 없었다

원비는 그에게 들여올려진 채 허공에서 발버둥을 쳤다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숨이 막힌다 목을 틀어쥐고 있는 손을 떼어내려 해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크.크윽]

[지금처럼 처음부터 날 노렸어야지 황자가 아니라]

장시언은 담담히 말을 하며 조용하게 덧붙였다

[그랬다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 주었을 텐데]

[커억!]

[죽기전에 꼭 이리 해주고 싶었다 그 손자국이 눈에서 떠나질 않았어]

원비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팔을 허우적 거렸다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장시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간 원비의 눈에는 그의 팔이 놓쳐선 안 될 생명줄로 보였다

긴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하지만 장시언은 그 아픔을 무시했다 오히려 더 세게 그녀의 목을 꺽을 것처럼 힘을 주었다

[크억! 컥.......]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은가?]

장시언은 그녀를 한껏 조롱하며 나직이 내뱉었다

[이게 네가 한 짓이다 고작 여덟 살인 아이에게 네년이 한 짓이야]

다시 한번 목을 꽉 움켜쥐자 '컥-!'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원비의 눈동자가 힘을 잃는다 장시언은 힘을 풀며 창살 사이로 손을 빼냈다 원비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로 미친 듯이 기침을 해댔다 한참 뒤 초점을 잃은 눈빛이 장시언을 바라본다

장시언은 그녀의 목에 남겨진 붉은 손자국을 냉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저 정도면 밤송이를 대신하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당한 만큼만 되돌려 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주 따위 듣지도 않겠지만 죽어서 날 저주하고 싶다면 똑똑히 봐두는 것이 좋을 게다 죽기 전 볼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일테니까]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몸을 틀었다 그의 뒷모습을 익히 보아온 여리고 유약한 황후의 모습이 아니었다 원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저벅,저벅, 저벅-

장시언은 원비를 모시는 상궁이 유폐된 곳을 지나치다 뚝 걸음을 멈추었다

경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제법 먼 곳이었음에도 목소리가 울려 들린 모양이었다

힐끗, 그녀에게 시선을 주자 상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피했다 벌벌 떠는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건방진 상궁, 이제 나의 두려움을 좀 알겠냐?!

[.......]

[......오상궁에게 서찰을 주며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잘 보라고 했었다지? 직접 보지 못해 안타깝다며]

[-! 그, 그것은....]

[죽기 전까지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겠군 그리 안타까우면 지름 모슴이라도 잘 기억해두게나 자네도 내가 마지막일텐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장시언은 피식 웃으며 그렇게만 말을 하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어차피 잠시 후면 알게 될 텐데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잠시 후 그들은 장시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얼굴을 반쯤 가린 사내들이 들어와 손을 뒤로 하여 쇠고랑을 채우고 검은 복면은 머리에 씌워 꽁꽁 여몄을 때야 비로소.

[마마]

독대가 예상보다 오래 걸려 안전부절 못하고 있던 윤상궁는 장시언이 걸어오자 잔걸음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어디 상한 곳은 없나 꼼꼼히 살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다 장시언은 아껴서 그런 것이지만 정작 본인은 유별난 환대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뭐, 뭐야?]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구요?]

[당연하지 다치긴 왜 다쳐]

[휴......너무 안나오셔서 걱정했습니다]

[안으로 장정들이 몇 명 들어가던데 그거 윤 상궁이 빨리 들어가 보라고 한거지?]

[......예]

[어쩐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리 들어와서 깜짝 놀랐네]

[무슨 독대를 그리 오래하셨습니까? 할 말이 무에 그리 많으셔서....]

[뭐 발악을 하기에 적당히 상대해 줬지 글쎄 그 여자가 비녀로 내 배에 구멍을 숭숭내려고 했다니까?]

장시언은 뽀족하게 갈린 비녀를 생각하며 끔찍하다는 듯 '으으!'하고 몸을 떨었다 장난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장시언과는 달리 윤 상궁은 구멍 숭숭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길길이 날뀌었다

[뭐,뭐시여~?!! 저 쓱을 년이!!]

'썩을'도 아니고 '쓱을' 욕도 참 맛갈스럽게 사투리까지 써가면서

방언이 터진 윤상궁을 보며 장시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이 떡 벌어진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윤 상궁은 원래부터 흥분하거나 많이 놀라면 사투리가 튀어나오곤 했는데 입궁하고 나선 이렇게까지 심하게 사투리를 쓴 적은 없었다

[유,윤 상궁....]

흥분하여 장시언이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는 걸 미쳐 보지 못한 윤 상궁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내 저 쓱을 년을 기냥!!!]

앗! 안돼!!!

[윤 상궁!!!]

장시언이 빽 소리를 지르가 윤 상궁이 '야?'하며 홱 고개를 돌린다 이마엔 여전히 심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사투리! 사투리 나왔어!!]

[야아?]

[사투리 나왔다고!!!]

진정해! 언제나 고상함을 추구해 왔잖아! 이러지 말아 줘 제~ 발!!!

[.......]

[.......]

잠시 후 장시언의 마음속 외핌이 들린 것인지 윤 상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 표정을 바꾸었다

[제가 ...사투리를 썼던가요?]

허! 이제 정신이 좀 돌아왔다 이거지?

[쓱을 년이라고 욕까지 했거든?]

[호호~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호호호~]

[나 진짜 간만에 식겁했어]

평소 같으면 웃기다고 깔깔댔을 텐데 너무 놀라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장시언이 계속 투덜거렸지만 윤 상궁은 그냥웃지요 권법을 고수했다

[호호호~ 무슨 말씀이세요 마마]

호호호~~ 호호호호~ 전옥서 안이 울린다 하는 말이라고는 '제가요?' '그럴리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마마' 밖에 없었다

장시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가에 있을 적에 종종 보던 모습이니 그러려니 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아 다행히 배에 구멍도 안 났고]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정말 독하기도 하네요 죽기 전까지 그 난리를 치다니]

[내가 어지간히 싫은가봐 윤 상궁 말대로 불로불사의 생명체로 거듭나는 한과정이지 뭐]

[그건 욕먹을 때만 해당이 되지요 배에 구멍 나면 불로불사고 뭐고 끝입니다]

[음, 듣고 보니 그러네]

장시언은 걸음을 옮기며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지금쯤이면 복면 씌워졌겠는데?]

[아마 그렇겠지요]

[생각할 수록 무서운 형별인 것 같아 그거 폐하도 참 대단하시지 어떻게 그런 벌을 내리실 생각을 하셨을까?]

[제가 누누이 무서운 분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맞아 그랬었지 장시언은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의 죄를 시인하자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능지처참형을 선고했다 죽기 전까지 복면을 씌워 어둠 속에서 죽게 하라는 명과 함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극형인데 황제는 원비와 그녀의 가문에 대한 모든 기록을 지우라는 명도 내렸다 그 말은 곧 원비에 대한 것은 역사에 단 한 줄도 남겨놓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장시언이 입을 다물자 윤 상궁은 넌지시 물었다

[마음이 쓰이십니까?]

[뭐?]

[너무 극형이라 불편하신 것 아닌가요?]

불편?

장시언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피싯 웃었다

[불편은 무슨 잠시 생각을 했을 뿐이야 그 벌은 원비가 지은 죄에 대한 마땅한 대가라고 생각해 우리 밤송이를 고작 여덟 살 밖에 안 된 아이를 납치해서 죽이려고 했으니까]

[맞습니다 동정의 여지가 없어요]

[저....근데, 마마....]

[응?]

장시언은 왜 그러냐고 반문했다

[그 당한 만큼만 되돌려 주시겠다고 한 것은 잘하셨습니까?]

눈이 빛난다 윤 상궁은 그게 뭔지 궁금해하며 묻고 있었다 말해줄까 말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장시언은 별다른 말없이 웃음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무술?]

[무술이요?]

원비의 처형이 있고 처음으로 가족이 함께하는 자리 , 황제 부부는 동시에 아들을 향해 물었다 아이는 방금 그들에게 무술을 배우겠다고 말을 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무술이라니, 좀 뜬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지금 무술이라고 한 게 맞습니까?]

장시언은 혹시 몰라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그러자 아이가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 맞습니다 어마마마]

[그래요..... 배워서 나쁠 것은 없지요]

[저.....그리고]

[....?]

[배움은 제 그림자 호위에게 구하고 싶습니다]

그림자 호위? 그게 누군데?

답은 황제가 알려주었다

[류운 말이냐?]

그는 자신이 물어놓고도 설마,하는 의혹의 빛을 띠고 있었다 강희 황자가 '예'하고 수긍을 했을 땐 그 빛이 더욱 짙어졌다 장시언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류운이 대체 누구기에.....

[그가 어떤 이인지 알고 하는 소리냐?]

[절 구해준 제 그림자 호위가 아닌지요]

어? 밤송이를 구해준 그림자 호위라면.......

장시언은 그를 기억해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황제에게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실력이 출중한 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근데 뭐지 저 표정은?

[그는 너를 지켜줄 수는 있지만 가르치지는 못한다]

어찌나 단호하게 말을 하는지 강희 황자뿐만 아니라 장시언도 궁금증이 일었다

어째서?

[어째서 입니까?]

황제는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림자 호위이기 전에 살수니까]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장시언은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진다 살수, 살수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알고 사는 이들이 아닌가

......안돼!! 밤송이의 스승으로 살수를 둘 수는 없어!!

[스승은 내가 알아봐주마 류운에겐 사람을 죽이는 것은 배울 수 있겠지만 네 가 원하는 무술은 배우지 못할 거다]

옳지! 잘한다 밤나무

[......,.......그래도 전 류운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그에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무술을 배울 것입니다]

기쁨도 잠시, 그의 밤송이는 은근 고집이 세고 외골수 기질이 있었다

안 된다고 해! 안된다고 해, 밤나무

장시언은 황제에게 반대하라는 기운을 전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알아서 해라 네 스승이니 네가 정하는 것이 맞겠지 단 네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만큼 후회를 해선 안된다]

아악-!!

[예 아바마마]

강희 황자는 작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장시언은 걱정이 한 보따리 였다 이제와 걱정을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내가 미쳐.... 으으,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나... 워낙 영리한 아이니 잘 알아서 하겠지 휴.....

장시언은 체념하며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다

[근데 왜 갑자기 무슬을 배울 생각을 한 겁니까?]

강희 황자는 '그것이...' 하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제 몸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시서에만 관심을 두고 무술을 익히는 것엔 너무 등한시한 것도 사실이구요 그래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헌데...배우기엔 너무 늦은 것일까요?]

엥? 뭐시라고 늦어?.......아가 너 몇 살?

밤송이는 종종 이렇게 자신을 당황시킨다 여덟 살이 무술을 익히기에 '너무' 늦은 거면 대체 몇 살 때부터 시작을 해야 한단 말인가 태어나자마자 창이랑 칼을 들고 휘둘러야 하나?

[여덟 살이면 늦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른 편이지]

어? 장시언이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 황제가 강희 황제에게 답을 해주었다

그 역시 장시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시언은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늦은 게 아니지, 여덟 살이면 뭐든 배울 나이다 못할 것 이 없지 아무렴

[아바마마께선 언제부터 익히셨습니까?]

[글쎄 한 다섯 살 때부터인가]

그래 밤나무는 다섯 살......뭐냐 넌?!

헉! 장시언은 서둘러 강희 황자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밤송이가 푹 고개를 숙이고 시무룩해져 있었다

아아.....괜찮다고 말을 해줘야 하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라고는 '쟨 사람이 아니라 밤나무니까 신경 쓰지 마 앗! 그러고 보니 넌 밤송이지?' 하는 어디로 보나 위로라고 할 수 없는 이따위 말뿐이다

밤나무 저건, 뭘 그렇게 빨리 배웠어? 밤송이 기죽게. 생각해보니까 나도 기죽네. 난 다섯 살때.... 그러니까 다섯 살때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흥! 잘나서 좋겠다 이 밤나무야

장시언은 찌릿 황제를 흘겨보았다 티를 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의 눈빛을 읽었는지 황제가 고래를 돌린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에 힘을 풀었다 뿐만 아니라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뭘 했나? 하고 묻는 순진한 눈으로 황제를 마주보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황제는 잠시 장시언을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아니다'하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아주 사랑스럽다는 그 눈빛이었다 헌데, 이상하게 속으론 내가 그렇게 좋으냐? 하고 의기양양하면서도 얼굴로는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든다 분명 언제나 보아온 눈빛인데

장시언은 황급히 황제의 눈을 피했다

나 왜 이래 이거? 물론 종종 아니 요즘음 좀 자주 밤나무가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건 뭐 날이갈수록 심해지니.....

[어디 아픈것이냐? 얼굴이 붉은데]

황제는 장시언이 그의 눈을 피하자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걱정스러운 손길로 달아로른 볼을 매만졌다

헉! 장시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빼며 손길을 피했다 그리고 바로 낭패감을 느꼈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 망했다 오늘은 진짜 턱이 빠질지도 모른다........아악!

곧 침상에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다 장시언은 속으로 절규했다

꼬치꼬치 캐물을 거야, 이런 일. 저런 일 요런 일을 또 시킬 거야~!!

[어마마마 어디 아프십니까?]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가 걱정스럽게 물어온다 장시언은 하던 생각을 멈추고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계속 강희 황자와 얘기를 나누었다 무술을 열심히 배우라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것이 계속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그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소자 그럼 이만 무러가 보겠사옵니다 편히 쉬시옵소서 아바바마, 어마마마]

강희 황자가 그렇게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예를 취하자 장시언은 저도 모르게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설픈 만류의 말이 저절로 나온다

[버, 벌써 가려고요?]

좀 더 있다 가지?아니 그냥 가지 말지?

[예 제가 너무 오래 있었지요?]

아이는 죄송한 마음을 가득 담아 황제와 장시언을 올려다보았다

[아닙니다 오래는요, 무슨..... 더 있다 가도 됩니다]

절대 오래 아니거든? 그냥 도로 엉덩이 붙여. 여기서 그냥 잠이 드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장시언은 격하게 바랐다 황제와 배 맞추는 걸 싫어하지 않는-사실은 좋아하는 -그였지만 오늘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잔부끄럼이 일어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는 의아한 듯 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지만.... '하고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오 상궁도 강 내관도 늦은 시간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두 분께 미움을 받을 거라고 그랬는 걸요]

이 오지랖이 바다 같은 것들!!

[하하하 미워하다니요 그럴 리가-]

[미움을 받는다기보다는 네게도 좋을 것이 하나 없으니 그리 말을 한 것이겠지]

장시언은 멈칫했다 싫어하다기 그럴리가 있겠냐고 말을 하려 했는데 갑자기 끼어든 황제 때문에 말이 쏙 들어갔다 더욱이 황제가 말하는 바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밤송이에게 좋을 것이 하나 없다니 뭐가?

장시언이 가지는 궁금증은 강희 황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곧바로 '예?'하고 반문을 했다

장시언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깨닫고 저지하기도 전에 황제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네 동생을 보려고 밤마다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

[.......]

대~앵!

그럴 리가 없겠지만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만 같다 얼핏 종소리도 들렸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장시언은 사고가 멈추어 혼이 빠져나간 사람마냥 멀뚱히 서있었다 그가 그러고 있는 사이 부자는 당사자도 모르는 둘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동생이요? 제.......동생이요.....?]

[그래]

[언제요? 언제 태어나는데요 아바바마]

강희 황자의 채근에 흠, 하며 여유롭게 말을 했다

[글쎄 노력중이니 언젠간 생각 테고 생기면 10달 후에 태어나겠지]

[와아......]

강희 황자는 기대에 찬 눈을 빛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하는 지도 모르면서 아니 그전에 아무리 노력해도 행길 리가 없는데 이미 아이의 머릿속엔 내가 어서 가야지 동생이 생겨, 라는 생각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강희 황자는 다시 한 번 꾸벅 예를 취했다

[소자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당차게 그 말만을 남기고 후다닥 밖으로 뛰어간다 뒷모습만 보아도 얼마나 신나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밤송이 아주 좋아죽는구나........헉

계속 얼이 빠져 있던 장시언은 나가는 아이를 보고 흠칫 놀라 팔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아이는 나가버린 뒤였다 결국 그런 것이 아니라고 자신은 애를 탛지 못한다고 고로 동생은 보여주지 못한다고 말을 해주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망연자실하게 밤송이가 나간 곳을 바라보며 망부석 마냥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이 다였다

밤송아 돌아와....... 그거 아니거든? 아니야! 아니라고! 어흐흑.......

분명 모르지 않을 텐데 저 똘똘한 아이가 사내는 애를 가질 수 없다는 걸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아마 생각건데 동생 얘기에 너무 신이 나서 다른 생각들 그러니까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한참 동안 돌덩이처럼 굳어 있던 장시언은 그래, 그런 것일 거야. 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더니, 눈앞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는 황제가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냐?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응? 할 말? ........아아

[농이 심하셨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폐하]

황제는 대번에 잘생긴 눈썹을 치켜떴다 못마땅하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도록 당황스러웠다

뭐야, 밤나무 얘....... 설마 진짜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무리 네가 정력이 좋아도 그건 안 되거든?

[폐....하...?]

왜 말이 없어?

[그 말 말고 다른 할 말은?]

어? 다른 할 말?

장시언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문득 스치는 잔상에 아차 싶어 눈을 깜박였다

맞다 내가 손 피해서 얘 삐쳐있었지 으으, 어쩐 다지.......

내심 한숨이 나온다 뭘 어떻게 구슬려서 화를 풀어줄까 고민하게 있는데 황제는 그새를 못 참고 장시언에게 다가왔다 흠칫.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잇던 장시언은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처음에도, 이번에도 싫어서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닌데, 일그러지는 황제의 얼굴을 보자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아....저.......]

[내가 네게 뭔가 잘못을 했던가?]

짐짓 진지한 황제의 목소리에 장시언은 '예?'하고 반문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놀라서.....]

나도 날 모르겠다 제발 그냥 넘어가주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제는 집요한 남자였다

[놀라? 내가 뭘 했기에 놀란단 말이냐? 내가 널 만지거나 다가가는 것이 놀랄만한 일인가?]

[.......]

난 지금 미친 듯이 꿀을 찍어서 떡을 백 개 집어먹었다 고로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꿀떡 먹은 벙어리니까!

장시언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자신을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정당화 시키며 떼로록 눈을 굴렸다 쿵덕쿵덕 심장이 울린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원래도 좀 그랬지만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는데 며칠 전부터 황제의 눈빛이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원비와 독대를 하고 온 그날부터

장시언은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원비와 독대를 마치고 윤 상궁과 함께 전옥서 밖으로 나오자 앞에서 황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안고 사는 얼굴을 하고

처리해야 할 정무가 많다고 들었는데......

장시언은 의아해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 예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바로 앞으로 다가가자 그제야 황제는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며 장시언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윤 상궁이 이미 한 번 했던 터라 장시언은 그런가보다 하고 가만히 있었다 헌데, 묘하게 가슴이 간질간질 해졌다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예....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가 장시언을 품에 안았다 그가 안심하고 있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행이구나'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불을 지핀 것처럼 화악

윤 상궁은 이미 가족이나 다름이 없기에 서로 걱정을 해주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황제는 그렇지만 않았다 그가 걱정을 해주는 것은 심장을 뛰게 했다 물론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걱정스러움 눈빛과 손길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걱정 하셨습니까'

황제의 몸을 살짝 떼어내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무척이나 아무리 청을 해도 보내지 말 걸, 하고 후회하고 있었다'

'..... 하지만 ......황실의 법도가 아닙니까?'

원비와의 독대를 탐탁지 않아 하기에 가야 한다고 보내달라고, 갖은 방법을 다 썼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보내지 않겠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황실의 법도가 떡하니 정해져 있는데

하지만 황제는 그것을 쉽게 부정했다

'황실의 법도라는 네가 잘못된다면 지킬 필요 없다 없애면 그만이야'

그의 확답에 좀 전보다 더 얼굴로 열이 올랐다 장시언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원래부터 뻔뻔한 본래 성격과는 달리 연애에 있어선 유독 부끄러움이 많은 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빛이 부담스럽다는 등, 날 너무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둥, 해가며 허세를 부렸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쿵.쿵.쿵 가슴만 뛰었다

'무사한 걸 보았으니 이만 가봐야겠다'

'.....예?'

어딜?

장시언이 눈으로 묻자 황제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정무를 보러 가봐야 한다 걱정이 되어 소홀히 했거든'

'아.......'

문득 드는 아쉬운 감정. 장시언은 그 생소한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예 그러시면 어서 가셔야줘. 폐하'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 다더니 숨긴다고 숨겼는데 티가 난 모양이었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귓가를 간질이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에 보자 아마 많이 늦겠지만'

장시언의 얼굴이 더 붉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황제는 정무를 보고자 걸음을 옮겼고 장시언은 황제에게 예를 취한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하지만 곧 뜨악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윤상궁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더, 더워서 그래'

날이 더운 편이긴 했지만 얼굴이 이렇게 익을 정도는 아니었다 장시언도 윤상궁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장시언은 차마 치미는 민망함에 황후궁으로 서둘러 발을 놀렸고, 윤 상궁은 그런 장시언을 따르면서도 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좋으십니까? 아주 좋아죽으시겠어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네'

'잘 아실 텐데요'

'모르거든?'

'아시는 거 다 압니다'

'모른대도?'

'호호호호~~'

장시언의 걸음걸이가 더 빨라졌다 하지만 윤 상궁은 절대 처지지 않고 딱붙어 따라오며 '좋으십니까?좋으세요?'하고 줄기차게 물어왔다 황후궁 안으로 들어가지 직전까지 말이다

-그래 확실히 그때부터 이상해졌어

장시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욱이 그날 밤, 정무를 마치고 돌아온 황제는 장시언의 손목에 난 상처를 보고 이게 괜찮은 것이냐며, 왜 이리 사람이 미련하냐고 한바탕 난리를 치고 손수 치료를 해주었다 그땐 정말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 아닌가 싶었다

맞아 그날부터야 틀림없어

[정말 그런 것이냐?]

[응? 그런 것이냐?]

[응? 아,아니.... 예?]

이놈에 입이 또! 장시언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반말에 당황했다 뿐만 아니라 며칠 전 일을 회상하느라 황제의 말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 황제는 다시 한 번 말해주었다

[내가 널 만지거나 다가가는 것이 놀랄만한 일이냐고 물었다 정말 그러하냐?]

[....]

그야 물론 갑자기 그러면 놀란다 장시언은 어릴 적부터 민감한데다가 반사신경도 아주 좋은 편이라서 옆에서 누가 만지거나 살짝만 움직여도 흠칫하고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이번 일도 그런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묻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거부 그 자체였다

그는 장시언이 자신을 거부한 것에 대해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옛날 같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넘어갔을 텐데 이젠 그게 되질 않았다 그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 장시언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폐하, 그저 정말 순간적으로 놀라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황제는 가만히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가늠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네 정말

장시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끝을 살짝 잡았다

[....저, 정말입니다]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 황제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장시언의 목을 감싸며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장시언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리며 입맞춤에 응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황제와의 관계에 점차 젖어들어 가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혀가 안으로 들어오며 얽힌다 타액에 젖은 숨소리. 순간 다리사이로 단단한 허벅지가 느껴졌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도 전에 중심을 문대는 은밀한 행위가 이어진다 장시언은 흠칫 몸을 굳혔다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은밀한 속뜻을 지녔지만 표현은 얼굴이 붉어질 만큼 노골적이었다

스윽,스윽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귓가에 파고든다 그냥 넘길 만큼 아주 작은 소리인데 오늘따라 유독 크게 들려왔다 여며진 옷깃이 사이로 황제의 손이 파고든다 옷을 이미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려가 있는 상태 여인의 옷은 입는 방법하며 벗는 방법 하며 모든 것이 남자으 옷보다 복잡한데 황제는 언제나 능수능란하게 옷을 벗겨 내곤 했다 상대가 의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정욕이 서린 입맞춤에 정신이 팔린 와중에도 장시언은 간지러움에 몸을 움찔거렸다 허리선을 타고 올라오던 손은 가슴 부근을 멈추어 배회하고 있었다 이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유두를 만지로 희롱하는 것

그건 뭐랄까 여인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황제는 집요할 정도로 그것에 집착했다 살짝살짝 건드리다 누르는 것은 물론이고 유룬을 배회하다 꼬집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장시언은 흠칫 놀라면서도 유두가 도드라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으읏, 장시언은 살짝 몸을 틀며 황제의 손길을 피했다 하지만 저항이 워낙 미약한지라 그의 손길을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농익은 과실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희롱하던 황제가 거칠게 유듀를 틀어쥔다

[하앗!]

수반되는 아픔에 목이 뒤로 젖혀지며 신음이 높아졌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에이씨.....아프잖아! 쥐어뜯을 셈이냐?

장시언은 속으로 투덜투덜 밤나무 욕을 해댔다 좀 피했기로서니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 황제는 곧게 뻗은 장시언의 목에 촉촉 입을 맞춰왔다 혀로 핥고 튀어나온 목젖을 간지럽게 잘근거리며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애무한다 성난 사람처럼 난폭했던 손도 다시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흡사 아까 것은 경고였다는 듯

농밀한 행위가 계속 된다 너무 부드러워 녹아버릴 것만 같은 이성을 무너뜨리는 그런 행위

[하아..하아.......으읏.....]

장시언은 자신의ㅏ 허리와 목을 감싸고 있는 황제의 팔에 의지해 숨을 할딱거렸다 그의 허벅지가 여전히 중심을 비벼대고 있었다 나이로도 한창때인데 제몸 챙기는 데까지 극진한 장시언이다보니 반응은 아주 빨랐다 중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사내라면 당연한 것인데 민망하고 부끄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귓볼로 움직인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흥분을 부채질한다

[으...으읏... 아....하아....]

장시언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열에 들뜬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이 뜨끈뜨끈거리는 것을 보니 얼굴이 많이 익은 것이 틀림없었다

젠장. 피부가 의어 약간만 붉어져도 다 티가 나는데 이건 뭐 터지기 일보 직전이겠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어떨지 훤히 그려지는 자신의 얼굴에 장시언은 뜨거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곧 황제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손을 치워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내가 그걸 싫어한다는 것을 알 텐데?]

[........]

장시언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안다 황제다 얼굴을 가리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몸 안으로 들어온 그가 자신을 흔들 때마다 몰려드는 쾌감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리면 항상 다시 자신을 보게 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신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무는 것도 아주 싫어했다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계속 입을 맞추는 바람에 숨이 넘어갈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걸 어쩌라고

[그래도 가리지 마라]

황제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장시언은 몸을 굳혔다 남의 속을 잘 읽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겪는 거라 더 놀랐다

[가리지마]

[.......]

[알았지?]

어쩐지 뭘 해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 그것도 아주 서툰 어린아이- 같아서 장시언은 멍하니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장시언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좋냐? 넌 바보같이 웃어도 잘생겼구나 , 밤나무야

[후....불안하군]

응? 불안?

[예?]

방금 얘 불안하다고 한 거 맞지?

장시언은 확인 차 되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좋다고 웃더니 불안하긴 뭐가 불안해?

엇! 그러고 보니 얼굴이 아까보단 어두워진 것 같기도.....

[아무것도 아니다]

장시언의 의하한 시선을 느꼈는지 황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불안하다고 한 걸 들었는데 아무것도 아니란다

[저......폐하]

[쉿]

읍! 장시언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또다 밤나무의 필살기 손가락으로 입 막기! 입을 검지손가락 하나로 제압당하더니 예전에도 한 번 겪어봤지만 다시 당해도 황당한 것은 마찬가지다

장시언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황제는 더 말하지 않았고 다시 입을 맞추어왔다 입을 막았던 손가락은 어느새 턱으로 내려와 입을 벌리게 하고 있다 말 못하게 입을 막아버리겠다는 건지 아니면 아까 하던 거나 계속하자는 건지 의미가 모호했는데 잠시 후 입 안으로 익숙하게 혀가 들어오자 후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시언은 눈을 감았다 조심스럽게 황제의 목에 팔을 두르자 입맞춤이 싶어졌다 호흡이 가빠진다 그 순간 두둥실 몸이 떠오르더니 어딘가에 안착했다 놀라 눈을 떴지만 그곳이 창틀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계속되는 황제의 입맞춤 때문에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아무리 말랐다지만 다 큰 사내를 가볍게 홀랑 들어 어딘가에 앉히니 그곳이 어디인지 인지라기 이전에 당황스러움이 먼저 밀려왔다

장시언을 창틀에 앉힌 황제는 그의 볼과 귀에 입을 맞추며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어렵지 않게 옷고른이 풀어지고 벌어진 옷깃을 쓸어내리자 부드러운 비단이 팔을 타고 내려왔다 흰 달빛이 드러난 나신을 비추었다 장시언은 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고작 상체였지만 달빛 때문에 가려줄 어둠이 없어져서 인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처럼 부끄러웠다

황제의 손이 다가온다 유려하고 아름다움 얼굴과는 달리 단단하고 거친 손. 그 손이 장시언을 어루만졌다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내게 이런 감정이 남아았나는 것은 처음 알았다]

[.......]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가?]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알고 있었다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의 얼굴이 행동이 대신 말을 해주었으니까

[좋아한다]

심장이 멎은 것처럼 숨이 멈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은애한다 너를]

말이 되어 전해진 진심이 전신을 휘감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멈춘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하지만 장시언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해, 말하라고 왜 말을 못해 속으로 아무리 되뇌어 봐도 소용없는 있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황제처럼 자신의 감정 진심을 아무런 숨김없이 타인에게 전부 내보이는 것이

[.... ....저 전......저는]

끝맺지 못한 말은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이어졌다 황제는 괜찮다고 속삭이며 목덜미, 눈 그리고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분명 부드럽지만 어딘가 모르게 애잔한 입맞춤이었다

가슴에 돌이 들은 것처럼 묵직해진다

괜찮다니......뭐가? 뭐가 괜찮은데?

왜그런지 모르지만 황후가 된 뒤로 그에게 이렇게 미안한 적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 정확히 그게 뭔지 왜 이런 마음을 들게 하는지 생각을 정리하고 혼란스러움을 다잡으려 노력했지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감정의 근원을 찾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비부를 파고드는 황제의 손길로 인해 계속되지 못했다

[으읏]

장시언은 두 눈을 감고 황제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열락을 일깨우는 감각이 온몸에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하나에서 두개.....두 개에서 세 개.. 천천히 안을 벌리고 손가락이 들어온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이물감에 눈살을 찌푸려보지만 흥분을 돋우는 스침에 호흡이 가빠지고 몸이 달아오른다 제 주인을 닮아 적응이 빠른 몸은 지속된 관계로 인해 스스로 안을 적시고 있었다 황제는 유두를 핥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움질일 때마다 내부에서 잘박거리는 물기가 느껴졌다

손가락이 깊숙이 안을 파고든다

[아! 아... 아...흐읏........]

지릿하던 허리가 움찔 경련하며 신음 섞인 호흡이 전각 안을 매웠다 장시언은 간신히 창틀에 의지한 채 황제에게 매달려 달뜬 숨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많은 관계를 가졌지만 이렇게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감각을 느낀 적은 없었다 모든 게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황제는 순간순간 조바심을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안으로 들어올 것 처럼 장시언은 몰아붙였다 -바로 지금처럼

[아윽!]

느껴지는 통증에 장시언은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는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유두를 잘근거리며 긴 손가락으로 정확히 장시언이 느끼는 자극점을 건드렸다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을 주며 장시언을 끌어당긴다 완벽한 밀착 반쯤 서있던 중심이 황제의 단단한 복부에 쓸린다

[아...아.... 아흣]

장시언은 곧 터질 것 같은 쾌감에 그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몸을 떨었다 사나니의 자존심이고 뭐고 더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순간-

[아앗-]

안을 유린하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허전함을 느끼기도 전에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이물감이 내부를 매웠다 그와 동시에 허연 탁액이 황제의 복부를 적셨다 장시언은 자신이 사정을 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몰려오는 아픔에 숨을 쉬기가 힘들고 배가 터질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아.....흐......흐흑...]

장시언은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뚝뚝 눈물을 흘렸다 배가 터져 죽는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그를 어린아이로 만들었다 쾌감으로 이성이 무너진 순간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 자리를 대신한 탓이다 당황은 황제의 몫이였다

[으흑...흑......]

[쉬,쉬, 울지마라 왜 울지?]

[흐윽.. 주,죽을 것 같아.....]

[......뭐?]

[배가 터져 죽을지도 몰라]

갑작스러운 정인의 눈물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황제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리는 눈물섞인 목소리에 순간 허탈함을 느꼈다 배가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니 평소보다 커졌기로서니 배가 터져 죽을 리가 있나

하지만 장시언은 지금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안 죽는다]

황제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장시언의 허리를 받친 채 다른 손으로 판파놘 배를 쓰다듬었다 그것이 소용이 없자 긴 눈꼬리를 따라 흐르는 눈물을 핥으며 절대 안 죽는다고 달래고 달랬다 나중엔 찰지게 감겨오는 내벽에 고통스러운 법도 한데 괜찮아질 때까지 안 움직인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의 정성이 빛을 발한 건지, 아니면 아픔이 좀 가라앉은 건지, 장시언은 잠시 후 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후유증이 아주 컸다

어,어라? 어라라? .........끄아악!

도망갔던 이성의 끈을 부여잡은 그는 폭풍처럼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곧 터질 듯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지금 뭔 짓을 한 거야? 울은 거야? 반말 한 거야? 배 터져 눅는다고?!

.......아악 이를 어째!!

[저....... 폐,폐하..]

[이제 괜찮으냐?]

[예...?]

장시언은 고개를 들어 어...하고 땀으로 뒤범벅이 된 황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찌나 거칠게 숨을 내쉬는지 보기 딱할 정도였다 솔직히 처음의 엄청난 아픔이 가겼을 뿐이지 여전히 괜찮지는 않은데 안 괜찮다고 그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같은 사내로서 그의 인내와 고통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장시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황제는 귀두 끝까지 허리를 뺐다가 힘차게 쳐올렸다

내벽을 가르는 생생한 느낌 '퍼억'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신음이 울려 퍼졌다

황제의 허리짓에 맞춰 찌걱찌걱 음탕한 교접의소리가 사방을 메운다 끝자락만 달랑달랑 쥐고 있던 이성은 다시금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장시언은 황제에게 매달려 그의 허리에 한쪽 다리를 휘감았다 창틀에만 의지해서는 밀고 들어오는 그 힘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장시언의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제대로 감게 하고 한 팔로 허리를 다시 감싸 안았다 자유로운 나머지 손은 장시언의 중심으로 향한다

황제는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젠 장시언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아!아! 아앗-!]

장시언은 저도 모르게 황제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빠르게 중심을 훑는 손놀림 두터운 성기의 끝이 끊임없이 자극점을 쑤시고 들어오자 발가락이 쭉 펴졌다가 둥글게 말렸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줄 흘러내린다

추삽질은 집요하리만치 계속 되었다

아 이제 그만 이제 못해 한계야.

장시언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몸을 뒤로 젖혔다 절정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 새하얀 달빛 같은 섬광이 눈앞에서 팡팡 터지는 듯하다

[아! 아아!]

[크윽 시언아!]

[아악! 아아앗-!]

[-크흣]

장시언은 두 눈을 감은 채 욕망을 분출 시켰다 사출한 정액이 튀고 황제의 손을 끈적하게 적신다 장시언이 절정에 이으러 내벽을 조이자 황제 역시 그 아찔한 감각에 취해 곧이어 사정을 했다 사정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오랫동안 이어졌다

미리미리 보약을 먹어두길 잘했지 역시 탁월한 선견지명이었어.

장시언은 눈을 감은 채 황제의 어깨에 기대어 사정 후 몰려오는 탈력감을 즐겼다. 보약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다 그렇게 오래, 그렇게 격렬하게 했는데, 조금 나른한 것을 제외하면 견딜만했다 체력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보약이 없었다면 지금쯤 힘이 풀려 쓰러졌을 것이 분명했다.

아..., 허리 아프다....., 근데 밤나무 얘는 왜 홍두깨 뺄 생각을 안 하지?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뭔가 생각하던 게 있었는데......... 어? 뭐였더라?

으응? 근데 아까부터 왠지 배가 빵빵해지는 것 같은 .....으헉!

장시언은 흠칫 놀라 몸을 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설마.설마....설마!!

[폐,폐하...?]

[이번엔, 그리 힘들지 않을 거다]

[예?]

...너,너! 밤남누 너 설마!!

[침상에서 할 테니까]

아악-!! 진짜냐?!!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장시언은 속으로 절규했다 그러다 아차 싶어 서둘러 정신을 챙겼다 하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었다 몸이 이어져 있던 터라 황제는 어렵지 않게 장시언을 안아 침상으로 옮겼고 장시언은 가만히 눕혀졌다

어흑! 밤몽둥이가 아주 그냥 사람 잡네........

[여기요?]

[아니, 그 옆. 응 , 거기 야야야야야!]

윤 상궁은 허리를 주무르던 손을 서둘러 거두었다 배긴다는 곳을 정확히 찾아 눌렀는데 갖은 엄살을 다 부린다

[하지 말까요?]

[으으. 아냐, 그냥 해]

장시언은 괜찮으니 하라고 손짓을 했다

윤 상궁은 한숨을 내쉬며 '예. 그럼...'하고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악!]

한 번 해도 아픈 건 다시 해도 아픈 법 장시언은 결국 '그만! 그만!!'하고 소리를 질렀다 허리가 너무 배겨서 좀 풀어줄까 했는데 이렇게 아프다면 그냥 놔두는게 낫겠다

윤 상궁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어쩜 그렇게 엄살이 심하십니까?]

[엄살이라니, 엄살이라니! 윤 상궁은 몰라. 이 엄청난 고통을. 윤 상궁은 모른다고... 어흐흑....]

장시언은 베개에 푹 얼굴을 묻고 꺼이꺼이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윤 상궁은 코웃음을 쳤다

[간만에 하셔도 우는 척 은 안 통합니다]

[어흑...쳇!]

베개에 파묻혀 있던 고개가 발딱 올라온다 장시언은 '안 통하네'하고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아무튼 아파서 안 되겠어 그냥 놔둘래]

[근육통은 제때제때 풀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마마]

[아 몰라 나중에, 나중에 풀래]

[미룰 게 따로 있지 그걸 미루십니까?]

윤 상궁은 어이없다는 투로 얘기했다 그게 뭐 좋은 거라고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하시는지 원.....

[마마 그냥...]

[강희는 언제 온대?]

장시언은 잔소리가 듣기 싫어 화제를 돌렸다 아까 윤 상궁을 통해 연통을 했으니 오늘 밤송이가 올 것이었다

윤 상궁은 장시언이 딴소리를 하자 쌜쭉한 얼굴로 '글쎄요......'하고 말하고 슬금슬금 손을 뻗었다 상전이지만 제 자식 같다보니 말을 듣지 않으면 얄미움도 컸다

[.....?]

허리에 다다른 손이 주물주물 야무지게 움직인다

[악!]

[황자 전하께선 마마께서 말씀하신대로 공부를 다 마치면 오시겠지요]

[아악! 악! 윤 상궁]

[호호호!! 왜 부르십니까? 더 세게 해드릴까요?]

[아니! 악!!]

[예? 더세게요?]

[아니, 아니요!]

아파!아프다고! 장시언은 그만 해달라고 계속 애원했지만 윤 상궁은 호호호~ 하고 웃으며 뭉친 근육이 다 풀릴 때까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강희 황자는 유시가 다되어서 황후궁으로 왔다 장시언은 윤 상궁 덕분에 자리에 앉아 아이를 맞이할 수 있었다

[공부는 다 마쳤습니까?]

[예, 어마마마 너무 늦어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송구하기는요. 공부를 마치고 오라고 한 것은 나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나저나, 계속 그리 서 있을 겁니까? 이리와 앉으세요]

장시언은 웃으며 자신의 옆 의자를 톡톡 쳤다 . 강희 황자는 미소를 지으며 장시언의 옆에 바르게 앉았다

아아. 귀엽고 순수한 밤송이를 보니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구나

흐뭇한 기분이 절로 들어 장시언은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희 황자는 어? 하고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손길을 느끼며 오늘 하루 있던 일을 지절지절 늘어놓았다 절반 이상은 오늘 배운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장시언은 강희 황자가 말을 할 때마다 그랬냐고 맞장구를 쳐주며 언제 얘기를 꺼낼지 시기를 가늠했다 오라고 하지 않아고 어머니께 드리는 문안 인사를 거르지 않는 강희 황자를 굳이 오라고 한 것은 꼭 할 말이 있어서 였다 그러니까, 동생에 대한 진실 말이다

[내일부턴 무술을 배울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순행을 가시기 전에 류운에게 명을 내렸다 하셨습니다]

[아...., 내일부터 배우는군요  폐하께서 순행을 가시기 전에...]

응? 장시언은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순행? 순행이라니? 무슨 순행?

[.....어마마마?]

헛.

[아,아하하하, 잠시 딴 생각을 했네요 어디까지 말을 했지요? 아, 폐하께서 순행을 가시기 전에 명을 내리셨다니 빨리 배우고 싶어 했던 황자의 마음을 헤아려주신 모양입니다 정말 열심히 해야겠는 걸요?]

머릿속 가득 순행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지만 장시언은 잘 숨기고 말을 이었다

아이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설사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다 티가 날만큼 정직했다 그런 아이가 황제가 순행을 갔다고 하면, 간 것이 틀림없다 즉, 장시언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강희 황자는 큰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열심히 할 것 입니다]

[그래요 열심히 하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장시언은 다시금 강희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다치지 않게 항상 조심하세요]

[예, 걱정 마시옵소서]

강희 황자는 활짝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답삭 장시언의 품에 안겼다

장시언은 그런 아이가 귀여워 피식 웃으며 등을 토닥였다

하지마, 우쭈쭈쭈 마냥 귀여워 하는 것도 머릿 속에 콱 박힌 황제의 순행 떄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생각할 수록 화가 났다

밤나무 이 자식이 날 홀랑 발라먹고 아무 말도 없이 순행을 가버려? 으으, 오기만 해봐라! 아주 그냥 독수공방의 설움을 맛보게 해주마!!!

장시언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는 결국 마음속 불을 활활 태우느라 강희 황자에게 동생의 진실에 대한 얘기를 또 해주지 못했다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뿌연 시야.... 아무리 잡아도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 땅속으로 점점 빠지는 듯한, 누군가가 잡아끄는 그런 묵직한 느낌...... 아 그래 이건 꿈이다  현실이 아닌 꿈

누군가가 말을 한다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로.

'내게 이런 감정이 남아있다는 것을 처음 알앗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가?'

익숙한 잔상

'좋아한다. 은애한다, 너를'

그리고 이어진 그의 고백.

'......... ........저,전..... 저는....'

'..괜찮다 천천히 천천히 가면 돼'

이건 분명히 꿈인데, 왜 나는 꿈에서도 아무 말을 못하는 걸까?

{그야 처음부터 그를 속여 왔으니까}

스스로를 탓하던 와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깇이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다.

뭐?

{그가 은애하는 이가 과연 너일까?}

무슨 소리야 그게.....?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네 본모습을 모르잖아. 네가........숨겨서}

[-헉!]

잠에서 깨어난 장시언은 이불을 걷어내고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아...]

땀에 젖은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 불안한 사람처럼 왔다갔다 거렸다. 너무 나도 생생한 꿈...

어째서, 어째서 잊고 있었으까?

이거였다 그에게 마음을. 진심을. 보여주지 못한 채 미안하고 죄스러워했던 이유는 , 그 감정의 밑바닥에 있던 것은 그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숨긴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후우... 장시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바보...

[....]

참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온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참 동안 그 빛을 바라보고 있던 장시언은 창 가까이로 다가갔다 닫힌 창을 열자 새벽공기가 뺨을 스친다 정신이 맑아질 정도로 찬 기운을 머금고 있다

'은애한다 너를'

'괜찮다 천천히 천천히 가면 돼'

[.....]

장시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요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가 오면, 그가 돌아오면........ 그때는 말을 하자. 그래, 이번엔 꼭 말을 .....

감긴 눈을 다시 떠진다 길지 않은 시간의 흐름, 하지만 그 사이에 새벽빛은 조금 더 밝아진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 빛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조금 전과는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좀 전과는 다른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한 것처럼 결의에 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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