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법이라고 했던가
그래 맞는 소리다 폭우가 쏟아지고 시일이 지나면 땅은 아주 단단해진다
하지만 문제는 굳어지기 전까지 걸리는 그 시일 그 동안은 더러운 오물이 질척거리는 진창과 다를 바가 없다
삼일 내리쏟아지던 장대비가 이제야 그쳤다
술사들에 대한 추국이 끝나자마자 황제는 술사들과 비빈들을 대면시켰다 직접 보지는 못햇지만 들려오는 말로는 그런 진창이 없었다 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용서를 구하는 술사들과 거짓으로 자신들을 모략하는 것이라고 우기는 비빈들- 쉬쉬하며 나누는 이야기는 말은 모두 달랐으나 속뜻은 똑같았다
제 목을 제 자리를 지키기에만 바쁜 추악한 인간군상
다만 좀 다른 이들이 있었다면 원비와 원비의 술사였는데 그들은 서로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술사는 추국 때 시인을 했던 것은 고문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제가 만든 것도 아닌데 거짓으로 아뢴 것이라고 하였고 원비 역시 황후 마마를 음해하려는 그런 일은 한 적이 없다고 뱃 속에 아이도 있는데 어찌 그런 짓을 하겠냐며 눈물오 호소했다
비는 그쳤지만 진창이 되어버린 땅은 한참 동안 굳어질 것 같지 않았다
장시언은 창밖을 바라보며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땅 꺼지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아 폐하께서 정말 비빈들을 다 폐서인 시키실까?]
[그러시지 않을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 상궁은 확신 할 수 있었다 폐하라면 분명 다 폐서인 을 시킬 것이라고 게다가 폐서인 정도면 많이 봐준 것이 아닌가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것인데
[아아... 당초 목적은 밤송이를 음해하려고 한 이들을 잡아내는 것이었는데 이건 뭐 죄다 용의자니.....]
윤 상궁은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그러게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것은 적잖이 놀랐었다 고작해야 지푸라기 인형을 묻은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빈들이 전부 황후를 저주하고 음해하려 했다니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마마께선 불로불사의 생명체가 되실지도 모르겠네요]
윤 상궁이 툭 내뱉듯이 얘기하자 장시언은 '응?'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마마께서는 안그래도 늙지도 않고 만 년은 사실 것 같은 성격인데 욕까지 옴팡지게 먹었으니 이제 불로불사의 생명체로......]
[푸합-!]
장시언은 순간 입을 틀어막앗다 한참 진지하던 중에 불시의 습격을 받았다 그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끅끅거렸다 욕을 많이 먹어 불로불사의 생명체가 되었다는 말이 좋은 말도 아닌데 왠지 웃겼다 더욱이 윤 상궁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담담한 표정을 보니 더 그랬다
성격상 진지함을 오래 유지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성격이 아니더라도 윤 상궁 때문에 그러기는 힘들 것이 분명하다
아이고 배야......
[전 이만 가서 보약을 달여 오겠습니다 이미 불로불사의 몸이시지만 아까우니 다 드셔야지요]
이제 잦아들고 있었는데 장시언은 결국 입을 막은 채 침상으로 뛰어갔다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다시금 웃음을 참는데 매진했다 불룩해진 이불은 한참 동안 그렇게 오들오들 떨렸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비빈 마마 모두를 폐서인 시키는 것은 너무 과한 처사이십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라의 국모를 음해하려는 자들을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맛소이다! 이는 엄중히 그 죄를 물어 마땅하오!]
황후를 음해하려 했던 일에 비빈들 모두가 연루되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궁은 발칵 뒤집혔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주청을 드리는 신하들과 쌓여가는 상소. 노력은 가상했으나 그 무엇도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엄중히 죄를 물어야 한다는 강경파와 모든 비빈을 폐서인 시키는 것은 과하다는 온건파, 두 파가 팽팽하게 언쟁을 계속했다. 강경파는 황제가 새로이 등용한 신진세력이었으며, 온거파는 비빈들을 따르는 구세력이었다. 황제가 왜 신진 세력을 드용하였는지 그 의도가 이제야 차츰차츰 드러나고 있었다.
신국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권을 확립한 현 황제에게 황실을 기만한 비빈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구세력의 목을 쳐내는 것은 아기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황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노련한 정치가였고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신진세력을 등욕한 것은 언젠간 찾아올 거라 생각했던 이 순간, 생각보다 빨리 오기는 했지만, 구세력을 모두 정치판에서 쓸어낼 때를 위해서였다. 비빈들이 술사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그저 구실에 불과했다. 굳이 비빈들의ㅣ 일이 아니더라도 고인 물이 더 썩기 전에 전체적인 물갈이가 필요한 때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저희들끼리 권력 다툼을 하던 비빈들이 황후인 장시언을 음해하려 새ㄸ는 것이 밝혀지자 황제가 세운 계획은 더 이상 지체되지 않았다.
조금 더 지켜보고자 했던 황제의 마음이 순식간에 움직인 것이다.
황제는 교묘히 당파 싸움을 이끌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그가 예상한 방향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계획된 것과 조금 다른 것이 있엇다면 그것은 후궁들에 대한 처사였다. 장시언을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궁에 유폐를 시키는 정도로 그쳤을 텐데, 화를 자초한 것은 그들이었다. 황제는 오히려-확실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음에도-좀 더 빨리 그들을 쳐내지 않은 자신을 자책을 정도였다. 곁에 있음에도 장시언이 혹여 사라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그에게 그는 아주 당연한 것이다.
[폐하, 폐서인의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비빈 마마 모두를 내치시면 아니 되 옵니다.]
[예,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더 많은 후사를 보시어 황실의 기반을 더 굳건히 하셔야 하옵니다.]
[황실의 기반이라....... 짐에겐 이미 많은 후사가 있다. 황실의 기반은 그 정도면 충분히 굳건하지 않나?]
황제의 말에 현빈의 아비인 우상현은 '하, 하오나.......' 하며 말을 늘였다. 자신의 손자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 그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비빈 마마 모두가 폐서인이 되시면 황자 전하와 황녀 마마의 설움은 어찌한다 말입니까. 그분들이 평생 원한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
[무엄한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죗값을 치르는 것인데 감히 우ㅏㄴ한이라니요! 대체 누구에게 원한을 품는다는 말입니까?!]
황제의 힘을 업은 신진세력이 반발을 하며 나섰다. 황제는 손을 뻗어 그들을 제지했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함인지 안다. 어미를 그리워할 아이의 슬픔을 짐이 어찌 모르겠느냐.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하마]
우상현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폐히, 하오시면-]
[곧 태자 책봉식이 있을 것이다.]
[.......예]
우상현은 황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주위가 웅성거린다. 평온한 신젠세력과는 달리 구세력은 모두들 혼란에 빠졌다.
비빈들을 폐서인 시키는 것과 태자 책봉식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가. 게다가 갑자기 태자 책봉식이라니.......
황제는 지금껏 태자를 책봉하는 것을 미루어 왔다. 그에 대한 어떠한 거론도 용납하지 않았다. 헌데, 이게 무슨!
[.....폐하, 소신 우상현, 폐하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황제는 그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한 외모였으나 모든 것은 지나치면 무서운 법. -소름이 끼친다.
[충신인 그대의 뜻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강희 황자를 태자로 책봉하여 황실의 기반을 더 굳건히 할 참이다.]
우상현은 기함했다.
지금 제게 무슨 소린가. 강희 황자를 태자로 책봉하다니!
[폐, 폐하, 당장 태자 책봉을 하시는 것은...]
[강희 황자가 태자로 책봉되며-.]
황제는 우상현의 말을 끊었다.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가늠한 우상현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나머지 황자와 황녀들은 궁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유상현 숨을 들이켰다. 모르지 않는다. 그것은 신국의 법도였다. 태자 책봉이 이루어지면 태자를 제외한 황제의 자식들은 궁 밖으로 나가 살게 된다. 궁내 태자의 위험이 될 많나 세력을 애초부터 없애기 위함이었다.
황제는 아무 말도 못하는 우상현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되며 어미를 그리워할 없을 터. -아니 그러하냐?]
황제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마치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처럼 얘기했다. 교묘한 언변이었다.
[어마마마, 강희이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에 장시언을 고개를 들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오늘은 좀 늦는구나, 싶던 차였다.
[들어오세요.]
하지만 기쁨도 들어선 아이는 장시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상처가 거의 나아가고 있었는데 다시금 입술이 터져서 찾아온 탓이다. 장시언은 속상한 얼굴로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또 돌부리에 걸린 겝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어마마마.]
상처투성이인 얼굴로 뭐가 그리 좋은지 아이가 활짝 미소를 짓는다. 장시언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밤송이 너 계속 그럴래? 아니긴 뭐가 아니야!
[웃지 마세요. 다친 것이 그리도 좋습니까?]
장시언이 짐짓 화를 내며 말을 하자 강희 황자가 '어?'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리 다치면 속상하다고 말했었지요?]
[......예, 분명 그리 말씀하셨ㅅ브니다. 하오나-]
[허면, 조심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다못해 돌부리를 걷어차기라도 했어야지요.]
장시언은 아이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다그쳤다. 입 안까지 터진 상처가 나 있었다.
이건 좀 심하잖아!
아무래도 돌팔이를 불러야겠다. 장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 상궁...!]
[소자, 괜찮사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찾아간 것입니다.]
[윤 상궁...!]
[소자, 괜찮사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찾아간 것입니다.]
[윤 상-, 뭐라고요?]
그건 또 뭔 소리래? 찾아가다니?
장시언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강희 황자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강희 황자가 다시 활짝 미소를 짓는다.
[제가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뻥 차주고 왔습니다, 어마마마.]
뿌듯한 목소리. 터진 상처가 아플 법도 한데 잘도 웃는다.
차주고 와? 차주고 왔다면-....
장시언은 그런 아이를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잘했군요.' 하고 말을 했다. 강희 황자는 그제야 헤헤, 하고 웃으며 장시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아파도 참으세요.]
[예, 어마마마.]
씩씩한 아이의 대답에 장시언은 픽 웃으며 태의에게 건네받은 약을 조심스럽게 발랐다. 따가운지 잡고 있는 팔이 움찔, 하고 놀란다.
쯧쯧,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딱한 밤송이.
장시언은 호호- 입김을 불어주며 천천히 천을 감쌌다.
역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얼굴만 그런 줄 알았더니 팔꿈치와 다리도 까진 상처가 있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분명 일 대 다수로 싸움을 한 것 일 테지 궁이란 곳은 참 희한하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바쁘다
풀어지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조이지도 않게 천을 묶고 장시언은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입에서 '이그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주 뒹글면서 싸운 모양이다
나름 치열했다 이거냐?
장시언은 상처에 하나하나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강희 황자는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누가 저를 챙겨주는 것이 마냥 좋은지 입이 귀에 걸렸다 어찌 아니 그러겠나 태어날 적부터 어머니의 온정은 받아보지 못했던 아이다 상궁들이 수발을 들어주었다고는 하나 그것이 어머니의 그것과는 달랐을 터
장시언은 약을 다 바르고 탁자에 놓인 부채를 가져와 부채질을 해주었다
[많이 따갑지요?]
상처 난 곳이 뜨겁기도 할 테고
하지만 장시언의 걱정과는 달리 강희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참을 만 합니다]
아.. 의젓한 밤송이인지고
비빈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붙잡고 '어때? 우리 밤송이 의젓하지? 부럽냐?' 하고 남을 당혹스럽게 할 자랑을 늘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장시언은 계속 부채질을 해주며 윤 상궁이 준비해 놓은 주전부리를 하나 집었다 장시언이 평소 즐겨 먹는 말린 살구였다
[아-]
[예?]
장시언이 살구를 내밀며 말을 하자 아이가 반문한다 장시언은 다시 한 번 '아-' 하고 말을 했다 강희 황자가 '아....' 하며 천천히 입을 벌린다 말린 살구를 입에 쏙 넣어주고 장시언은 자기도 하나 집어 오물거렸다
아 역시 나는 좋은 어른이야
이어지는 자화자찬 아이를 먼저 챙겨준 것이 제 딴에는 뿌듯한 것이다
[너무 맛있습니다 어마마마]
후후.. 네가 드디어 말린 과일의 세계를 알아버렸구나?
장시언은 웃으며 '그렇지요?' 하고 말을 했다 헌데 생각해보니 강희 황자는 맛있다고 하면서 더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안 먹지?........ 아항~~ 알겠다 요요요 요녀석~ 귀엽기는 진작 말을 하지!
장시언은 살구를 하나 더 집어 아이의 입에 대주었다 '아-'하고 말을 하자 강희 황자가 따라서 '아-'하며 입을 벌린다 오물오물 먹기도 잘 먹는다
그냥 먹는 것보다 이렇게 먹는게 더 맛있다는 거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새 같은 모습이 귀여워 장시언은 저도 모르게 밤송이의 머리를 살짝 헝클었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응? 눈이 잘못되었나?
장시언은 들어선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무도 바빳지만 가뜩이나 추가된 비빈들의 일 때문에 매일 늦게 걸음을 했던 터라 반응이 늦었다
[폐하... 어인일로?]
[어인 일이라니 굳이 일이 있어야 오는 곳인가 여기가?]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너무 이른 시간인지라.......]
[하긴 이르긴 하지]
황제는 피식 웃으며 장시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다 침상에 앉아 다리를 곧게 뻗고 있는 강희 황자를 보고 뚝 걸음을 멈추었다
강희 황자가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다 워낙 바쁘셔서 그간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이 황망했기 때문이다
[아바바마 그간 평안하셨사옵니까?]
[오냐- 헌데 넌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 게냐? 그꼴은 또 뭐고]
황제는 아들은 모습을 쭉 훑어보고는 물었다 그의 눈을 아주 팔자가 늘어졌구나? 하고 말을 하고 있었다 어찌나 노골적인지 장시언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답니다 생각보다 상처가 난 곳이 많아 약을 발라주고 있었습니다]
[약을 발라줘?....... 시언이 네가 직접 말이냐?]
그럼 나랑 밤송이 둘뿐이었는데 내가 발라주지 다친 밤송이가 혼자 발랐겠냐?
[예]
장시언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황제는 얼굴을 굳혔다
장시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왜 저래?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강희가 너 같은 어미를 두어 다행이구나]
훗 이정도야 뭐-
[태자가 되어서 바빠져도 외롭지는 않겠어]
그래 태자가 되어도- 응? 뭐라고?!
장시언은 놀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강희 황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가 들은 말이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를 못하는 눈치다
[폐하 방금 하신 말씀이 무슨.........]
[강희를 태자로 세울 셈이다 곧 태자 책봉식이 있을 테고]
[저 그것은 혹시.......]
신첩 때문입니까? 하고 물으려던 장시언은 곁에 강희 황자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황제는 장시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파악했다
[내가 정한 것이다]
단호한 목소리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 장시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는 그런 장시언의 어깨를 스치듯 만지고 강희 황자에게 다가갔다 강희 황자는 댕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네가 태자가 되는 거다 할 수 있겠느냐?]
태자가 되고 싶은지 묻는 것이 아니었다 황실의 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자리지만 황제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아이는 영민했고 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었다 황실의 아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이상적인 신국의 모습이 있는 게 당연하다 황제는 그것을 실현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강희 황자는 곧 결의에 차 눈을 빛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황제는 알았다는 말도 잘 해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잠시 서렸을 뿐이었다
강희 황자가 돌아가고 황제는 대뜸 장시언을 손을 잡아 침상으로 이끌었다
속으로 끄악-! 아직 밝잖아! 이 짐승 폐하!! 하고 외치면서도 내심 기대를 했는데 부끄럽게도 장시언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는 장시언의 다리를 베개 삼아 누워 눈을 감았다
장시언은 그런 황제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얘가 또 덩치값 못하고 어리광부리네...... 하지만 뭐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헉!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취소! 방금 건 취소! .......아, 이거 다리를 확 빼버려?
[강희가 태자가 되면 법도에 따라 다른 황자와 황녀들은 궁 밖에서 살게 될 거다]
흠칫
마치 불온한 생각을 읽어낸 것처럼 황제가 툭 말을 내뱉자 장시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고 깜짝이야..... 야생동물이냐?
[비빈들도 조만간 폐서인이 될 테고 그리되면 너, 나 그리고 강희만 오순도순 하게 궁에서 살게 되겠지]
........오 오순도순 하게
눈가에 경련이 인다 정말 능력자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물론 오순도순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하고 포근해지지만 왠지 황제의 입에서 나오니 닭살이 우수수 돋아 당장이라도 꼬끼오~ 하고 푸드득서릴 것 만 같다
장시언이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황제는 눈을 떠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왜 아무 말도 없지? 혹 싫은 것이냐?]
싫지 않지만..... 싫다고 해도 도저히 싫다고 말 못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마치 우위에 선 기분이었다 황제가 약자처럼 느껴져서 섣불리 그런 말을 했다간 상처를 줄 것만 같았다
[.....싫지 않습니다]
다만 부끄러운 뿐
[싫지 않다는 이의 표정이 아니질 않나]
부끄러움이 없는 너는 평생 가도 모를 것이다 아마
황제는 손을 뻗어 장시언의 얼굴을 매만졌다 거친 손이 볼을 스친다
[졸다고 해 봐라]
[예?]
[셋이 오순도순 사는 것이 좋다고 해 봐]
으악! 별 부끄러운 걸 다 시키네!
겉모습 과는 달리 마음만은 천상 사내인 장시언이다 그런 직접적인 말은 그에게 쥐약이었다
미치겠다......
[시언아]
[......, ....... 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잘 안들린다 다시]
집요하기는 에잇 옛다 기분이다!
장시언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은 황제의 손에 제 손을 포갰다 대체 뭘 그렇게 불안해하는 건지 원.....
[셋이 오순도순 사는 것이 좋습니다 폐하]
.....얼씨구? 이제 웃네?
황제는 장시언의 말에 놀란 눈치였지만 기분이 좋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장시언은 순간 미친 생각에 정신이 멍해졌다
장시언 아주 갈 데까지 갔구나! 이런 이기적인 말을 하고 죄책감을 가지지 않다니! 어흐흑-.....
[내 마음을 이리도 들었다 놨다 하는 이는 너 뿐이다]
어흐..응? 아~ 그야 그렇겠지 폐하 너는 이미 이 장시언의 노예니까!으흐흐흐흐......
장시언은 비실비실 새어나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그런 말씀 마오소서 심히 듣기 민망하옵니다]
민망은 개뿔
황제는 장시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뭔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심쩍은 웃음이었다
[폐하..?]
뭐가 웃기냐? 같이 좀 웃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아아 언제쯤이면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지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예?]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얘는 또 갈피조차 안 잡힌다 정말이지 도통 속을 알 수가 없다니까 기다려도 황제가 더는 말을 해주지 않자 장시언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것이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술사와 함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있는 원비
[저 ... 폐하.... 원비말입니다.....]
장시언은 조심스럽게 원비에 대해 물었다 장시언이 관심을 두는 것에 대해서 무서울 정도로 예민한 황제이기에 그런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원비?]
원비는 왜? 차가운 목소리가 묻는다
아. 망했다 마음에 안 드나보다
[원비가 어쨌다는 거냐?]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멈출 장시언이 아니었다
[.술사와 혐의를 부인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냐! 다 알아들었으면서 !! 응? 어이 뭐야! 그 바람난 부인을 추궁하는 듯한 눈빛은?
[그래서 원비는 폐서인을 시켜서는 안 된다?]
황제는 확실하게 물어보았다 장시언에게 다시 한 번 답을 요구하기 위함이 었다
헛다리도 참 제대로 짚는다
장시언은 고개를 저었다 죄가 있다면 죗값을 치르는 것이 맞다 다만-
[원비는 회임 중이니 좀 더 시일을 두고 알아보심이 어떠신지요? 죄가 있다면 그때 폐서인을 시켜도 될 일입니다]
입궁하여 처음으로 하는 정치적 발언이었다 황제에게 하물며 폐서인을 시키네 마네 하는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성격상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못내 걸렸던 것이다 장시언은 정말이지 여인과 어린아이 약자에게 약했다
황제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장시언 역시 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오랜 정적 결국 뜻을 접을 것은 황제였다
[.....원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이다 그 후엔 짐의 뜻대로 처리할 것이 다]
물론이다 그 후엔 엄중히 죄를 물어야 한다
장시언은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예? 그럼 원비는 궁에 남게 되는 것입니까?]
윤상궁은 경악하며 물었다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폐하께 그런 말씀을 왜 드린단 말인가!
미치겠어요? 하고 눈으로 말하고 있는 윤 상궁과는 달리 장시언은 아주 평온했다
[당분간은 그렇게 되겠지]
허! 윤 상궁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왜 그러신 겝니까?]
하필이면 다른 이도 아니고 원비를!
[왜 그랬냐니 그야 물론 아이를 가졌으니까지]
무슨 그런 당연할 걸 묻고 그래 흔치않은 윤 상궁의 흥분을 감상하며 장시언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윤상궁의 입장에선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어지 그리 무르십니까? 원비가 마마께 해코지를 하면 어쩌시려구요?]
헤코지..?
장시언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해코지라니 무슨 해코지를 한단 말인가 그래 봐야 또 부적쪼가리나 지푸라기 인형 따위겠지
[할 테면 하라지]
[마마!]
큰일 날 소리라며 윤 상궁이 소리쳤다 하지만 여전히 장시언에게는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되었다
[너무 걱정하지마 산달이 다 되어 몸조리하기도 바쁠텐데 무슨 짓을 하겠어 게다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궁에 유폐될텐데]
윤 상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상전은 비상한 머리를 지녔지만 종종 이렇게 맹한 구석이 엿보였다
[모르는 소리 마세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입니다]
[그건 그때가서 서리가 내린 다음 생각하면 되~지]
장시언은 능글맞게 히죽 웃었다
천하태평이다 윤 상궁은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폐하 소첩은 그런 간계는 꾸민 적이 없습니다! 모르는 일입니다! 저 술사가 다른 비빈들의 사주를 바은 것이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누명을 쓴 것입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다들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억울한 것은 접니다 폐하!]
정황상 모든 것이 명백하거늘 후궁들은 금군에게 결박을 당해 끌려가면서까지 죄를 부인했다 서로 누군가가 자신을 모함한 것이라고 외치며 추하게 다리를 끌었다 마지막까지 발악을 한 결과는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황제의 눈빛은 그 어떤 감ㅁ정도 없었다 완벽한 타인처럼 아니 처음부터 존재 하지 않았던 것처럼 비빈들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비빈들을 따르고 보호하던 온건파는 혀를 내둘렀다
연정 따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관계라고는 하나 그래도 그렇지 어찌저리 냉정하실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겐 이렇듯 황제의 무자비함을 속으로 탓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제 곧 그들도 낙향을 하게 될 터 황제는 그때도 저런 표정으로 그들을 보낼 것이 분명하다
황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온건파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사지에 내몰린 모습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끝났으니 물러들 가야 하지 않나?]
집에 돌아가 통보를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온건파는 다들 예를 취하고 물러갔다 하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걸이는 무겁기만 했다
그들이 물러가자마자 그들의 사유 재산을 몰수하고 지급 된 토즈를 다시 국가의 것으로 귀속시켜 양인들에게 지급하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물론 그들을 낙향시킨다는 명도 함께였다
이는 곧 죽을 때까지 정계로 진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황제는 후궁들 중 유일하게 남은 원비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비는 부른 배를 감싸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남이 보았다면 아이을 가진 여인의 처량맞은 모습에 서글퍼했을 법했지만 황제에게는 가증스럽게만 느껴졌다
현비의 술사가 현비와의 실랑이 도중 황후궁에서 발견된 지푸라기인형이 자신이 만든 것임을 자백하며 원비의 말이 사실이었음이 밝혀졌으나 황제는 원비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후궁들 가운데 가장 욕심이 많고 표독스러운 원비다 다른이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짐이 왜 너만 남겨두었는지 아느냐?]
[그야 소첩을 믿어주셔서......]
[믿는다라.....]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믿는다니 누가 누굴 믿는다는 말인가 그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는다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널 남겨둘 마음이 없다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도 있지 네가 내씨를 가졌다 해도]
원비의 눈에 믿기지 않는다는 빛으로 물들었다
그럼 왜....
[황후의 청이었다 아이를 가진 이니 죄를 묻는 것을 유보해 달라는]
[......]
굳어진 원비의 얼굴을 보며 황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잠시나마 궁에 남게 해준 황후에게 감사하도록 해라- 원비를 처소로 데려가라]
궁녀들이 다가와 원비를 부액하자 금군이 그들을 에워쌌다 짐은 너를 믿지 않는 다는 또 한 번의 표시였다 원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언제라도 목을 벨 수 있지만 황후의 말 한마디에 살려두겠다니 자신의 목숨이 한낱 파리 목숨에 비견된 것 처럼 치욕스러웠다
다문 입 사이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액을 하던 상궁들의 걱정 어린 눈빛 원비는 부른 배를 한 손으로 감싸며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금군은 떠나지 않고 궁을 둘러쌌다 문이 닫힌다 원비는 자신을 부액하던 상궁들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헉 숨을 들이켜며 상궁들이 나가떨어졌다
머리에 돌만 찬 병신같은 년들 그년들 때문에 모든 계획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 자신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궁에 유폐될 것이고 그 이후엔 그년들처럼 폐서인이 될 것이다
심장이 두근 거린다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대로 있다간 분명 목이 잘려나갈 터
원비는 불안한 듯 서성이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산처럼 부른 배가 날카로운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이제껏 무엇을 위해서 이따위 짓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성난 손길에 옷이 풀어진다 한 겹, 한 겹, 바닥으로 내쳐지며 나신이 드러난다 복부를 감싼 하얀 무명천 천이 풀어지자 바닥으로 툭 무언가가 떨어졌다
빛깔 좋은 비단에 감싸인-
원비의 고운 발이 그것을 짓이긴다 지난 몇 달간 자신의 아이인 양 애지중지 품었던 것 그러나 그것은 이제 단단한 솜뭉치에 지나지 않았다
[아아아악]
노기에 참 절규가 퍼진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고정하시옵소서 마마]
[예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셔야-]
와장창-!
광인처럼 날뛰는 원비의 모습에 상궁들이 아연실색하며 말려보았지만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상궁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이렇게 유폐될 바엔 폐서인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대로는 하루하루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넞 놓고 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광분은 한참 동아 이어지다 겨우 사그라졌다 상궁들은 원비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원비의 명이 떨어졌을 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새로운 고문방법인가
장시언은 황제의 숟가락에 찬을 올려주며 그렇게 생각했다
미소를 짓고 있기는 한데 까딱 방심하면 눈가에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이른바 억지 미소였다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뚫어져라 쳐다보는 강희 황자의 시선도 그 부끄러움을 부추겼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방금 전 황제가 또 아무런 연통도 없이 불쑥 황후궁을 찾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오전 공부를 마치고 찾아온 강희 황자가 점심 수라를 들을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안 장시언은 서둘러 수라상을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공부와는 담을 쌓은 그였지만 알고 있었던 탓이다
공부를 하면 유독 더 배가 고프다는 것을
잠시 후 잘 차려진 수라상이 들어왔고 장시언은 어서 먹으라며 고갯짓을 했다 이미 한 상 잘 차려 먹은 그는 여유롭게 진수성찬을 바라보았다 손수 굴비를 발라 강희 황자의 숟가락에 올려주기도 하면서
그런데 그때 마침 황제가 들어온 것이다 황제는 장시언과 강희 황자를 보자마자 오던 걸음을 뚝 멈추었다 멈칫한 황제를 보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떡갈비를 밥에 올려주고 있던 장시언도 그것을 받고 있는 강희 황자도 순간 돌처럼 굳어졌다
'폐하....?'
'수라를-'
'예?'
수라?뭔 수라?
'수라를 들어야겠다'
......뭐시기?
'아직 점심 수라를 들지 않으셨습니까?'
원래는 항상 장시언과 수라를 함께 했지만 이래저래 정무가 바쁜 요즘은 그러질 못했다 하지만 황제가 수라를 건너뛰거나 늦게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아무리 바빠도 말이다
황제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그래'하고 말을 했다
부자가 쌍으로 밥도 안 먹고 쳐들어왔구나 장시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황후궁 예산이야 황제가 차고 넘치게 주어- 있어봐야 쓰지도 않는데 -거덜날 일은 없지만 그래도 둘이 한꺼번에 들어닥치니 좀 당황스러웠다
'상을 들이라 하겠습니다'
'되었다 이미 차려두었으니 겸상을 하면 될 것을'
장시언은 헛것을 들었나 싶어 '예?' 하고 되물었다 황제는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다시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장시언은 정신이 멍해졌다
겸상........ 물론 그 역시 겸상을 하는 것을 줗아한다 하지만 황제가 누군가와 겸상을 한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림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잠시 흐른 정적을 가른 것은 강희 황자의 목소리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겸상소리에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바바마 소자와 겸상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아이는 좋은지 환하게 웃었다
'소자 저번에 어마마마와 겸상을 했을 적에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어마마마께서 친히 찬도 올려주시고요'
'호오 그래?'
분명 웃는 얼굴인데 눈은 그렇지가 않다 왜 그런지 황제는 아이의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강희 황자는 마냥 좋아 보였다
'예! 오늘은 어마마마께서 수라를 드셨는데도 소자에게 이리 찬을 올려주셨습니다 꼭꼭 씹어 먹으라는 말도 해주셨습니다'
아 밤송이 뭘 또 그런 걸 자랑하고 그러냐~ 사람 뿌듯하게시리
장시언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단 한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것을 해주었다고 생각하니 절로 그렇게 되었다 게다가 애늙은이 밤송이가 제나이답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함께 기분이 좋아졌다
반면 황제는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행복해하는 아들의 말에 고작 '...... 그러하냐?' 라고 한 마디만 할뿐이었다 장시언은 황제의 반응이 의아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황제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잠시 후였다 그가 강희 황자와 겸상을 하게 되고 바로
강희 황자의 숟가락에 찬을 올려주자마자 황제는 당당하게 숟가락을 내밀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이
장시언은 뭘 어쩌라고? 하는 눈으로 한참 동안 숟가락을 보고 있다가 설마 싶어 조심스럽게 그의 숟가락에도 찬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황제는 그제야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헛것을 봤나? 하고 눈을 비비고 싶었다 하지만 헛것이 아니었다
한 번으로 끝이 날 줄 알았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지금도 이러고 있질 않나 장시언은 여전히 억지 미소를 지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덩치만 컸지 애 완전 애야.. 아무리 내가 좋다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정말 낯 두꺼운 걸로도 황제구나 얼굴에 철판을 깔은 게 분명해 하늘이 내린 철판을 가진 게야 으으! 이제 정말 더 이상은 못해 먹겠-
[어마마마께서 주시니 더 맛나시지요 아바바마?]
헉 장시언은 숨을 들이켰다
밤송이! 그 딴거 물어보지 마!! 그럼 분명 이 철판 황제가-
[그래 그렇구나 아주 맛있다]
아악! 이럴 줄 알았어! 흑흑-... 장시언은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내팽개치려던 젓가락을 다시 쥐었다
밤송이는 은근 강적이었다 전혀 이 상황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 으로도 역시 넌 폐하의 아들이구나 대단하다 다음 대의 철판 황제가 될 자질을 갗추었어 하고 감탄을 하게 했다
황제가 바라는 오순도순한 세 가족이 이런 것일까.....
장시언은 곰곰이 생각하다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하다 난감해
그는 여전히 피어오르는 부끄러움 가까스로 잠재우며 작은 애와 덩치 큰애의 숟가락에 찬을 올려주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갈 무렵엔 그 역시 어느정도 부끄러움에 무감각해졌다 본인은 잘 몰랐지만 장시언은 놀라우리만치 적응력이 뛰어난 인간이었다
[연회요?]
[그래]
[저,.......... 무슨 연회를 여신다는 말씀이시온지.....]
뜬금없이 연회를 연다는 황제의 말에 장시언의 들던 찻잔을 다시 내려두었다
이시기에 연회? 후궁들이 쳬서인 된 것을 축하하자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곧 네 생일이니 그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를 열어야지]
아~ 그거구나 이제야 안도감이 든다 응? .......근데 뭐? 내 생일?
장시언은 지나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반짝 눈을 빛냈다
앗! 그러고 보니!
[어마마마 곧 생신이시옵니까?]
강희 황자의 목소리에 장시언은 '......예 그러고 보니 곧 생일이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워낙 많은 일이 있었던 터라 하지만 그래도- 내 탄신일을 잊고 있었다니!
잠시간의 놀라움 하지만 곧이어 궁금중이 생긴다
......근데 내 생일이 오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예조에서 말을 했나?
[잠행을 나갔을 때 네 사가에 들렀었다]
부원군이 말을 해주더군 황제는 장시언의 속내를 읽은 듯 답을 해주었다 이럴 때마다 혹시 관심법을 익혔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제 가가에요?]
[그래 부원군과 술잔을 기울이고 왔지]
부원군.......... 부원군이라 하면 영의정이며 장시언은 아버지인 장인욱이다
장시언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손끝은 차가워졌다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 장인욱이 어떤 분이시던가 술이 들어가면 묻지도 않은 얘기를 지절지절 늘어놓는 분이다 특히 별종 장시언에 대한 얘기를 술안주로 삼는다 그래서 장시언이 황후가 된 후엔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 -헌데 그런 아버지와 술을?
[..혹 영한이도 함께 있었습니까?]
말술인 아우가 함께 있어줘야 한다 이런 말을 하기 뭐하지만 그래야 아버지의 입방정을 막아주었을 터 아악! 제~ 발 아우야!
[영한이?]
황제는 장시언이 아우데 대해 묻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목소리는 냉기가 뚝뚝 떨어진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어쩐지 그 모습이 자신이 들은 것을 부정하려는 것처럼 보여 장시언은 의아하기만 했다
왜저러지?
'예 영한이도 함께 자리한 것인지요?'
'.....'
황제는 장시언을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이 무언가 추궁을 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하지만 장시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겐 그 자리에 아우가 있었는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왜 말이 없지?
[폐하.....?]
아 혹시 영한이를 모르나? 어? 아닐 텐데? 음.......
[저 폐하 ........ 혹 제 아우인 영.....]
[안다 장영한]
황제는 이어질 장시언의 말을 끊었다 장시언은 짐짓 놀라 입을 다물었다 더이상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떄문이다 더욱이 황제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야 이 자식아! 오늘 유독 더 종잡을 수 없이 구네?!
멱살을 잡고 싶은 욕구가 울컥울컥 솟는다 하지만 몸에 배어버린 비굴함이 욕망을 잠재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우도 만나셨습니까?]
[...... 그래 보긴 했지]
밀려오는 안도감 때문에 황제의 뜸들임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으아~ 이제 됐다 이제 됐어~ 한시름 놨다 정말!
[아주 잠깐]
.....엥 ? 뭐시?
[예?]
아버지의 입방정 위험에서 벗어날까 했더니만 이게 지금 무슨 소린가? 잠깐? 그것도 아주 잠깐?
[....잠깐이요?]
[부원군과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들어왔거든]
헉! 아버지와 말하는 도중 영환이가 갑자기 튀어들어왔다면 필시 입방정을 막기 위함이었을 텐데!
장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예?'하며 난감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어느새 웃는 얼굴이었다 아까의 냉랭한 모습은 거짓말 같았다
[부원군이-]
두근두근. 두근두근.
[시언이 너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하던데]
쿵!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좀먹는 기분. 숨이 턱 막혔다.
들은 거야? 알아버린 거야? 내 정체를?!
아악! 아부지~~~!!!
장시언은 조마조마하게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낭떠리지 끝에 매달린 기분이었다. 그의 한 마디에 아래로 떨어질지, 위로 올라올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태.
[어린 시절-]
딸꾹. 딸국.
황제는 갑작스러운 딸꾹질 소리에 말이 멈추었다. 소음의 주인공은 강희 황자였다. 뭐 훔쳐 먹다 걸린 아이처럼 강희 황자는 눈을 땡글하게 뜨고 딸꾹질을 해대고 있었다. 불안안 듯 눈동자가 흔들리고 딸꾹거릴 때마다 몸이 떨린다. 아이는 제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황제의 눈이 가느스름해진다.
......망. 했. 다.
장시언은 고개를 숙였다. 완벽하게 표정을 숨길 줄 아는 자신과는 달리 밤송이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거짓말을 할라치면 다 티가 난다. 바로 저맇게.
딸꾹. 딸꾹. 딸국.
어른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이렇게 딸꾹질을 해대는 이유는 바로 놀라서였다. 장시언은 본래 성격을 알고 있는 강희 황자는 제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다가 장시언과 같은 걱정을 품은 것이다. 아바마마가 어마마마의 성격을 아시는 것 같다는 그런 걱정.
[뭐 훔쳐 먹었느냐? 왜 그리 딸꾹질을 해대는 거야?]
강희 황자는 도리질을 했다.
[아, 아무것도... 딸꾹. 아닙니다. 딸꾹.]
크악! 그 말을 누가 믿겠냐. 밤송아! 지나가던 개도 코웃음 치겠다! 으으.......
[흠, 그래?]
황제는 다시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장시언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정적이 길어진다. 심장이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들은 거냐? 들은 거야? 들었다면 왜 모른 척을 했지? 아악!
앞으로의 일들이 뇌리를 스친다. 황제를 능멸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불구덩이에서 고문을 당하는 자신의 모습!
장시언은 탁자 아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제발 무슨 말이든 해라, 무슨 말이든!
[......어린 시절, 매미를 보고 기절했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응?
[......예?]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장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처형을 앞둔 죄수 마냥 벌벌 떨고 있었는데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매, 매미?
딸꾹. 딸꾹. 딸꾹.
적절한 방해꾼이다. 황제는 장시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분명 얼빠진 얼굴이 되었을 텐데 다행이었다.
[차라도 좀 마시지 그러느냐?]
[딸꾹. 딸꾹 ......예.]
강희 황자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앞네 놓인 찻잔을 양손으로 쥐고 꼴깍꼴깍 천천히 마셨다.
밤송이는 물도 참 바르게 잘 마시는구나.......
어느새 장시언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앗, 하며 다시 본래의 생각으로 돌아온다.
매미. 두근 반 세근 반 그렇게 조마조마했건만, 황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결국 매미.
물론 매미를 무서워한다는 것도 비밀 중 하나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방정맞은 원래의 정체에 비하면 우습다.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장시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양 볼은 부끄러운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실은 아버지의 입방정에 화가 나서 화가 나서 열이 난 것이었지만.)
황제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스운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당에 쓰러져 있어 놀랐는데 알고 보니 매미 때문이었다고.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황당하다고 하던군. -매미가 무서우냐?]
큭,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곁에서 '어마마마, 매미가 무서우세요?' 하고 순진하게 묻는 강희 황자의 목소리도 들린다.
무너져 내리는 남자의 자존심. 부끄러워하며 작게 '예.......' 하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순간 울컥한다.
니들이 매미의 두려움을 아냐?! 모르면 말을 하지 마!!
[그......, 무서워한다기...보다는, ......그냥 싫어하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무서하면서 곧 죽어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은 이 망할 사내의 본성.
밤송이에게는 제대로 먹혔지만 황자에게는 택도 없는 무리수였다. 미소가 짙어지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에잇, 망할!
[그, 그러니까 그게.......]
[뭐 그렇다고 치자.]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으으, 또 울컥한다. 말을 무 자르듯 끊은 것도 그렇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치자니. 완전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말이 아닌가!
장시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쑥스러운 듯 하하...., 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어마마마, 소자가 궁에 있는 매미들을 다 잡아들일까요?]
밤송아. 그건 지나친-엇나간-효도 방법이란다. 잡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것 아니냐! 이 몸이 매미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아니, 그 전에 매미가 무슨 황실을 위협하는 역적이냐? 다 잡아들이긴 뭘 다 잡아들여?
[......괜찮습니다.]
잡는다고 해도 그걸 다 어찌 잡으려고....... 더욱이.......
[이 한 철을 위해 사는데 그리하면 불쌍하지지요.]
[죽이지 않고 멀리 궁 밖에 풀어주면 됩니다.]
풀어주면 다시 궁으로 와서 맴맴거리고, 다시 잡아 풀어주면 또 찾아와서 맴맴거리고-.... 계속되는 매미와의 전쟁. ......왠지 그렇게 될 것 같다. 매미를 우습게보지 마라.
[......아닙니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황자]
장시언은 난감한 빛을 띠며 손사래를 쳤다. 황제도 거들었다.
[어마마마 말 들어라. 게다가, 네가 그걸 왜 잡느냐?]
헌데, 갑자기 삼천포로 빠졌다.
[예예?]
[잡아도 내가 잡아야지.]
끄악! 황제 얜 또 뭔 소리야?!
[소자가 잡을 것입니다.]
기절초풍!!
밤송이의 전혀 반갑지 않은 반격이다. 황제의 한쪽 눈썹이 불만스러운 듯 위로 치솟는다.
[공부하느라 바쁜 줄 알았더니, 시간이 남아도는 모양이구나.]
[아, 아바마마께서도 정무 때문에 바쁘신 줄로 아옵니다.]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둘 사이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다. 보고 있는 장시언은 황당했다.
뭐, 뭐냐? 이 부자는. 내가 언제 매미 씨를 말려 달라고 간청이라도 했냐? 난 분명 그러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내가 잡는다.]
[소자가 잡을 것입니다.]
[잡지 마.]
낮게 깔리는 음산한 목소리. 머리를 거치치 않고 바로 말이 튀어나왔다.
'뭐?' 하는 소리와 '예?' 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여온다. 장시언은 움찔 놀라 '예? 아하하하.......'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두 쌍의 눈동자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
[.......]
이럴 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하는 게 상책.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황제에게 한 번, 황자에게 한 번. 공평하게 말을 해준다. 인기인의 숙명이었다. 장시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부자를 다루는 기술이 늘어가고 있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뭐, 네 뜻이 그렇다면.]
[......예. 알겠사옵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부자의 반응은 그를 만족스럽게 했다. 장시언은 내려두었던 찻잔을 들었다.
그나저나 연회. 연회라....... 생일이라면 보름도 남지 않았다. 입궁을 하기전. 그의 생일 때는 항상 난리가 났었다. 기합할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서?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생일 때마다 주인공이 집에서 사라져서 찾느라 날리가 난 것이었다. 입궁을 한 뒤로 그러기 어려웠지만, 아쉽기는 했다. 음, 아니지. 윤상궁에게 일러부면 가능할지도.......
반짝, 눈이 빛난다. 장시언이 제가 생각한 일이 마냥 기특해서 자신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기분 좋은 생각에 어느새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황제와 강희 황자의 의아한 눈빛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도 미소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보름은 금세 지나갔고 드디어 장시언의 생일날이 밝았다.
장시언은 아침부터 진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왜 그러고 하니-,
죽갰네, 진짜, 겹겹이 갖추어 입는 황실의 옷들, 그 가운데 연회복은 정말이지 기함할 정도였다.
[팔 좀 들어보세요. 마마.]
윤 상궁의 말에 장시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입을 게 남았어?]
[아니요. 옷매무새를 잡아야 해세요.]
'아아!.' 하며 알았다는 듯 그는 팔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끝났구나, 생각하니 무거웠던 옷들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그 일은 잘 마무리 되었어?]
[예 그일이요?]
윤 상궁은 그 일이 뭐냐며 의문을 드러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장시언이었다 그걸 그새 잊었나 싶었다
[그 영선에 가져다주라고 말했던 것 있잖아]
[영선이요? 아~ 전 또 뭐라고... 예 잘가져다주었습니다]
장시언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가에 있었을 적에 매년 생일 때마다 그는 영선에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었다 영선은 거렁뱅이들과 남사당패가 모여 있는 곳으로 그가 어린 시절 자주 들락거렸던 놀이터였는데 현 황제가 즉위하고 나서는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부터 그곳에 모여 있는 신국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기에 항상 마음이 쓰였다 장시언은 연례행사와 같은 그것을 올해도 하기로 마음먹고 윤 상궁에게 명을 내렸었다 어차피 황후궁에는 쓰지도 않는 예산이 엄청나게 쌓여 있고 그런 예산을 그들을 위해 쓴다면 그게 더 뜻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은 탓이다
(물론 황제가 모르도록 이중장부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 되었습니다]
[응? 그래?]
장시언은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 살펴보고는 '흐음...... '하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윤 상궁의 얼굴이 대번에 굳는다
[그리 앉으시면 치마에 주름이 생깁니다]
[그럼 날 빨랫줄에 걸어 놓든가~]
순간 진짜 걸어놓고 싶었다 청개구리처럼 말도 어찌나 안듣는지 게다가 저 쩔벌린 다리
[마마 다리좀 오므려 앉으세요]
다리를 오르리라는 소리에 장시언은 움찔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 안돼]
[왜 안됩니까?]
윤 상궁은 의아해했다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몸에 배어서 다리를 잘 오므리고 앉았는데 혹여 벌리고 앉더라도 윤 상궁이 지적을 하면 다른 것과는 달리 이것은 쳇, 하면서도 오므리곤 했는데 오늘은 안 된다고 하니 이상하기만 했다
상전은 다시 한 번 작게 중얼거렸다
[.....라리니까]
헞데 이번엔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라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예?]
윤 상궁은 다시 말해달라며 반문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절레절레 도리질 뿐이었다
[그런게 있어 더 이상은 묻지 말아줘 어흐흑.......]
윤상궁은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는 척 까지 해가며 말을 돌리려고 하는 상전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간다 나이는 괜히 먹은 것은 아니었다
윤 상궁은 쯧쯧 혀를 차며 '알았으니 이거나 드세요' 하고 꿀떡을 내밀었다 그러지 '어흑...'하고 우는 척을 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야금야금 잘도 받아먹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장시언은 꿀떡을 먹으면서 괜히 목덜미를 긁었다 어쩐지 윤 상궁이 대충 눈치를 챈 것 같아 멋쩍었다 쓰라린 안쪽 허벅지의 감각이 아려왔다
불쌍한 내 허벅지야 지난밤 들락거리는 홍두깨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말았느냐 주인인 내가 순간 욕정의 노예가 되어 좋다고 아흥거렸으니 정말 미안할 따름이다
장시언은 떡을 삼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괜히 더 더워지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살이 까져 붉어진 허벅지를 보고 얼마나 뜨악했는지 모른다 밤새 황제에게 시달리는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던 탓이다
한 차례 폭풍 같은 정사 후에 황제가 다시 교접을 하려 했을 때 장시언은 기겁을 하며 몸을 사렸다 한다면 할 수도 있었지만 더워서 그만 씻고 싶었다
황제는 그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벌써 지친 거냐고 하며 이제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장시언을 돌려 다리를 오므리게 했다 예전에도 해본 적이 있었기에 그가 무엇을 할지 바로 감이 잡혔다 뜨겁고 단단한 살덩이가 허벅지를 가로지기 일보 직전이 되자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싸
그래 그 불같은 정력에 한 번으로는 만족이 힘들겠지
장시언은 그렇게 여기며 그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자비가 가져온 것은 결국 살갗이 벗겨진 허벅지였다
같이 즐겨놓고 그러는 건 좀 비겁하긴 하지만 황제의 목을 잡고 '이 자식이 이게 뭐냐!' 하며 짤짤 흔들고 싶었다 그 볼온한 마음을 읽은 건지 어쩐 건지 황제는 장시언의 허벅지를 보자마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전혀 고맙지 않은 호의를 베풀었다
황제가 붉어진 그곳에 얼굴을 가져다 댈 때에도 뭐야, 얘 왜이래? 하고 당황을 했는데 말캉한 혀가 까진 상처를 핥고 입술이 그곳을 배회하자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끄아악!'하며 괴성을 내질렀을 것이다
진짜 무슨 짐승도 아니고 ...... 상처가 난 곳을 핥고,핥고,또 핥고....
계속되는 침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지만 그보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더 컸다 날 밝은 아침이라 그게 더 크게 다가왔다
한참을 그러던 황제가 밤에 또 해주겠다고 말을 했을 땐 정말이지- '네 침이 무슨 만병통치약이라고 되는 줄 아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마마 그래도 곧 폐하께서 오실 테니 다리좀 오므리세요]
[쳇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예?]
[아니야 아무것도]
장시언은 들릴듯 말듯 투덜거리며 다리를 오므렸다
[그나저나 영환이 녀석은 아직도 소식이 없어?]
[예 찾아뵌다는 연통도 없었습니다 곧 연회가 시작되니 거기서 뵈면 되겠지요]
[그야 물론 연회때는 오겠지만........]
장시언은 아쉬움을 가득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장가간다고 한껏 들떠 있더니만 그 이후로는 감감수소식이다 못 본지 오래되어 요즘 입이 근질근질 한게 연회에 가기 전에 들렀으면 좋으련만
[폐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밤에서 들려오는 궁녀의 말에 장시언은 옷매무새를 다시 다듬기 위해 자리에 서 일어났다
연회는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성대했다 황제의 생신연에 버금갈 정도일지라 장시언은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물론 이 몸의 가치를 생각하면 이 정도야 당연한 거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더불어 아주 그냥 내가 좋아 죽겠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고 싶구나? 밤나무 너는 이미 나의 노예다!하며 뿌듯해하기까지 했다
자신에게 오만 가지 매력이 있다고 맹신하는 장시언만이 할 수 있는 생강이었다
[왜 더 안먹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나?]
입에 맞지 않긴 입에 아주 짝짝 붙는다 다만 보는 눈이 원체 많아 흡입의 욕구를 참고 있을 뿐
[....많이 먹었습니다 폐하]
[좀 더 먹어라 넌 입이 너무 짧아서 탈이다]
아,하,하,하 입이 짧아서 탈이란다
[흠 뭘 좋아했더라]
응?....... 헉!
뭔소린가 싶어 황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장시언은 움찔 굳어버렸다 황제의 손에 쥐어진 유과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설마 설마....... 아니지? 아닐 거야 그렇지? 이사람 많은 곳에서 제발 그러지 마!
하지만 그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자신의 앞에서 자주 다정남의 모습을 보여주는 황제였지만 그래도 이 많은 대소 신료들이 보는 가운데 이러는 것은 좀 아니다 싶었는데
눈가가 바들바들 떨린다 장시언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입을 벌려 황제가 주는 유과를 받아먹었다 헌데 문제는 떨어진 곳에서 보면 그 모습이 괜히 좋으면서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저,저,저게 무슨
대소 신료들은 눈앞에 펼쳐진 낯간지러운 황제 내외의 모습에 기함했다
아무리 부부 금실이 좋다고는 하나 보는 눈도 많은데 대놓고 저러는 것은 너무 하시질 않나! 체통을 지키셔야 하거늘
그들의 눈이 일제히 영의정에게로 향한다
대체 자식 교육을 어찌 시킨 것이요!
영의정 장인욱은 쏟아지는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지금 그에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좀 전, 생신을 경하드린다고 황후인 아들 장시언에게 선물을 진상하면서 식은땀을 흘린 생각만 하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버님 어찌 혼자이십니까? 영한이는 요? 혹 안 온 것입니까?'
장인욱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안 온 게 아니라 못 온 거니까 장시언의 옆에 있는 황제때문에
'........몸이 좋지 않아 오지 못했습니다 마마'
'몸.....이요? 그 녀..... 아우가 몸이 많이 안 좋습니까?'
그 녀석이라고 하려다가 황급히 말을 바꾼 장시언은 영한이 아프다는 말을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기야 누군들 믿겠는가 그 곰같은 힘을 가진 녀석이 아파서 자리보전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만 장인욱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예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 그래요?'
장인욱은 다시 한 번 '예........'라고 말을 했다 아들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딱 잡아뗏다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을 모면하게 해준 것은 일의 발단인 황제였다
'아들이 아프다니 그대의 걱정이 크겠군'
'.......예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조만간 나아지겠지요'
장인욱은 그렇게 말을 하며 슬쩍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일부러 황제가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황제는 눈으로 글쎄.....라고 말을 하면서도 '흠 그럴 테지' 하고 얘기했다 그리고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오늘은 황후의 생일이니 그대의 연회를 즐기도록 하라 황후의 아버지인 그대 역시 오늘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으니'
차암~ 고맙게도 자인 대접을 해주는 것이다 장인욱은 예를 취하고 자리로 돌아오며 땅이 꺼져라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멀리 보이는 장시언의 모습을 보니 두통은 점점 심해졌다 황제의 손길에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하니
하아....미안하구나 아들아 하지만 이 아비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는 체념어린 눈으로 잠시 아들을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알싸한 향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어때...?]
강희 황자는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오 상궁은 펼쳐진 그림을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진심을 얘기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그래? 이 정도면 어마마께서 기뻐하실까?]
[물론이지요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오 상궁의 확답에 강희 황자는 이제야 안심을 하고 활짝 미소를 짓는다 보름 동안 공을 들여 그린 보람이 있었다
[이제 챙기십시오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오 상궁은 상전을 재촉했다 황후 마마의 생신연이 시작되었다는 연통을 받은지 벌써 한참이다 더 늦어선 안 되었다
강희 황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단 위에 올려진 그림을 말아 끈으로 묶었다 효자인 강희 황자가 어머니의 생신연에 이렇게 늦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그림때문이었다
어마마마께 드릴 선물에 각별히 공을 들이느라 서둘라 가야하는 것은 알지만 아직 잠시만 더 하며 출발을 늦추었던 것이다
[준비 다 되셨습니까?]
[응 이제 가지]
강희 황자는 대답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린 비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서 가서 선물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 상궁은 상전을 모시며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많은 이들을 대동해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어린 상전은 가뜩이나 급히 걸음을 해야 하는 터라 그녀 이외에 딱 한 명의 궁녀만 데려오게 했다.
헌데, 일부러 발이 날랜 아이를 골랐건만 오늘따라 유독 걸음이 더뎌 두뒤처진다. 오 상궁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찌 이리 걸음이 더딘 게야?]
작은 목소리였건만 궁녀는 화들짝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마마님.]
[되었으니 빨리 오거라.]
[예, 예.......]
오 상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연회장 근처에 당도했을 때, 앞서 걷던 강희 황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라의 국모께서 탄생하신 날. 그 신성한 날에, 어디선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왔다. 사내와 여인의 목소리였는데 얼핏얼핏 들려 그 내용은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어마마마의 생신 축하연 가까이서 저런 무례를 범하다니. -오 상궁.]
딱딱하게 굳은 황자의 목소리에 오 상궁이 '예, 황자 전하.' 하며 허리를 숙였다.
[왜 저리 소란스러운지 알아봐. 그리고 더 하면 죄를 물을 것이라 해.]
[예, 알겠사옵니다. 하오시면, 먼저 안으로 들어가 계시옵소서. 저도 금방 따르겠습니다. -잘 뫼셔라.]
오 상궁은 상전의 명을 받들며 궁녀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궁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을 했다. 오 상궁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오 상궁이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궁녀는 포갠 손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가 떨린다.
[가, 가시지요, 전하......]
[그래.]
강희 황자는 축하연 입구 쪽으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헌데, 얼마 가지 못해 궁녀의 부름에 발을 잡혔다.
[그, 그쪽이 아닙니다. ......이번 축하연은 동문으로 입장을 하셔야 하옵니다.]
[동문?]
강희 황자는 뒤돌아 궁녀를 바라보았다. 멀쩡한 정문을 놔두고 동문으로 입장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순간 궁녀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궁녀는 무언가 불안한 사람처럼 사정없이 손을 떨고 있었다. 이에 '예.......' 하고 답을 하는 목소리도 함께 떨린다.
불긴한 예감.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강희 황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궁녀에게서 한 걸음씩 뒷걸음질을 쳤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그리고 도망을 가기 위해 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몸을 틀자마자 입을 틀어막는 누군가 때문에 시도는 무참히 깨져버렸다.
안 돼. 안 돼...! 어마마마!!
시야가 흐려지고 몸에 힘이 빠진다. 부여잡으려 했지만 의식이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들여보내 주시오!]
[어허! 안 된다고 했지 않소!]
[황후 마마마의 생신을 축하드리고자 원비 마마께서 보내신 것이라 말이요!]
[그러니 안 된다는 것이오! 원비 마마는 죄가 있어 궁에 유폐되신 분이니!]
[뭐, 뭐라?! ......네 이놈!!]
[대체 무슨 소린인가!!]
오 상궁은 점점 목소리가 격앙되는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소리쳤다. 갑작스런 등장에 다툼을 하던 이들이 꾹 입을 다문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보초를 서는 병사였다. 힐긋 상궁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한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해도 계속 고집을 피워서 말입니다.]
오 상궁은 병사의 시선이 닿는 곳을 쳐다보았다.
[자넨 한 상궁이 아닌가?]
[......, 오랜만일세, 오 상궁.]
[원빈 마마를 모시고 있어야 할 자네가 예까지 어인 일로.......]
[원비 마마께서 황후 마마께 보내드리라 한 것이 있어서 말이네.]
보내드리라 한 것?
오 상궁은 한 상궁의 손에 들린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붉은 금수 비단에 싸인 그것은 서찰 같이 보였다.
[......내게 주게. 황후 마마께는 내 직접 전해 드리겠네.]
[그래 줄 텐가?]
한 상궁은 지금까지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난리를 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곧바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오 상궁의 뜻을 받아들였다. 너무 급격한 변화라 병사는 황당해햇다. 의아한 것은 오 상궁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있네. 잘 부탁함세.]
오 상궁은 한 상궁이 내민 것을 받아 품에 넣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제 볼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한 상궁이 뚝 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아, 그리고 말일세.]
[......?]
한 상궁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황후 마마께서 받으시고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잘 봐두도록 하게. 직접 봐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 안타깝구먼.]
요사스러운 미소.
그렇게 말을 남기고 다시 갈 길을 가는 한 상궁의 뒷모습을 오 상궁은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괜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걸음을 하다가 너무나도 낯익은 물건을 발견했을 때, 전신을 휘감았다.
이, 이것은 황자 전하께서 준비하신 황후 마마의 생신선물!
장시언은 비어 있는 황자의 자리에 계속 시선을 주다가 멀찌감치 서있는 윤 상궁을 바라보았다. 먼 거리였지만 윤 상궁은 그가 무얼 묻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어찌 된 거야, 대체.......
요사이 두문불출하던 아이가 생신연까지 늦으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그동안 황후궁에 잘 오지 않았던 것은-오더라도 금방 돌아갔던 것은-장시언에게 줄 생일 선물에 온 정성을 쏟아 붙느라 그런 것이라는 걸 오 상궁에게 들어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궁에서 무슨 일이 생기겠냐마는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것이냐?]
작게 한숨을 쉬고 잇던 장시언은 황제의 목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감이 좋은 황제는 자신의 기분을 감지한 듯 보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걱정은요, 무슨.......]
밤송이가 너무 늦어서 그런다. 이 밤송이 아버지, 밤나무야! 장시언은 속으로 크악! 하고 외치며 대충 들어댔다. 덕분에 표정까지 완벽하게 숨기지 못했다. 아니다 다를까, 황제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걱정이 없는 표정이 아니질 않나. ......무슨 일이냐?]
[.......]
재차 묻는 황제의 물음에 장시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자가 안 오는 게 걱정이 되어서, 라고 말을 하면 왠지 유별난 정도로 극성스러운 부모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황제는 장시언은 대답을 들을 때까지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시언아.]
으윽. 얘가 또 필살기를 쓰네.
장시언은 움찔하며 살짝 눈을 피했다. 황제가 이름을 부르며 유독 약해지는 그다.
황제는 멈추지 않았다.
[시언아.]
으으.......
장시언은 결국 사실대로 얘기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저?]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문하단.
[그저... 황자가 너무 늦는 듯하여.......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말입니다.]
[아, 강희.]
황제는 장시언의 답을 듣자마자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의 눈은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얘가 왜 이래? 어이, 밤나무 황제씨. 왜 그리 실실 거리는 거요?
[폐, 폐하......?]
[강희는-,]
장시언은 '흡.' 하고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의 얼굴이 갑자기 다가온 탓이다. 둘은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그리고 이어진 황제의 목소리.
[강희는 걱정할 필요 없다.]
[......,예..?]
[강희는-]
[큰일 났사옵니다!!!]
낮게 속삭이던 황제의 목소리를 가르고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웅서이던 연회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연회장 안으로 뛰어 들어온 이는 오 상궁이었다. 장시언은 그녀를 보자마자 벌떡 자리에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두려움이 그에게도 전이되어 왔다.
그리고 직감했다. 강희 황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시연의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황자가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하다니. 그것도 대낮의 궁 안에서!
조정 대신들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자신들의 입장을 지절지절 늘어놓았다. 논쟁이 시작될 기미엿다. 소란을 잠재운 것은 다름 아닌 황후, 장시언이었다.
[조용-!!!]
마른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겨지지 않는 우렁찬 호통. 그 기세에 눌려 웅성거림이 사그라졌다.
조정 대신들의 눈이 커진다. 그들은 처음 보는 황후의 모습에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장시언은 그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못했다. 그는 지금 그런 판단을 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오 상궁에게 전해 받은 서찰이 그의 손아귀에서 콰지직 구겨진다.
......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 궁지에 몰린 여우는 호랑이를 죽인다.
황제는 황자와 관련된 일체의 말도 하지 않고 신하들을 모두 내보냈다. 생신연은 파하게 됐고 연회장엔 황제와 장시언, 그리고 믿을 수 있눈 측근들만 남아 있었다.
장시언은 날카로운 눈으로 황제를 직시했다.
[원비의 소행이지요?]
[에.아마도.]
황제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숨기는 것이 있었지만 장시언은 그 속내를 읽어내지 못했다. 아이가 혹여 잘못되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원비의 처소라 간다.]
황제의 금군을 향해 얘기했다. 걸음을 옮기려던 그를 장시언이 붙잡았다.
[저도 가겠습니다. 폐하.]
황제는 잠시 말없이 장시언을 바라보다가 그의 팔을 잡아 풀었다.
[너까지 갈 필요 없다.]
나름의 배려였다. 하지만, 장시언은 황제의 뜻을 거부했다. 더 강하게 황제의 팔을 붙잡는다.
[데려가 주십시오. ......제 탓입니다. 제가 원비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청하지 않았습니다.]
장시언은 이제껏 살면서 자신의 선택을 이토록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마 성격상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재로선 그저 후회가 될 뿐이다.
황제는 숙여진 장시언의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다.
[네 탓이 아니다.]
[.......]
[강희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어찌 그리 확신을 하십니까?]
영특하다고 해도 어린아이다.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원비라면 아이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제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있었다. 믿을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곧이어 미소와 함께 휘어지는 눈매를 보자 그런 마음은 더 심해졌다.
그리고, 황제의 이어진 말-.
장시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곧 안도감에 취해 저도 모르게 황제의 목을 끌어안았다.
휘황찬란한 보석을 갖다 바쳐도 가문에 영지를 하사해도 시큰둥했던 그가 이토록 좋아하는 것은 황제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