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시탈 황후-4화 (4/8)

제 4장

하늘은 청명하고 공기도 이리 맑구나. 역시 사람은 이렇게 간간히 볕을 쬐어줘야....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을 보내고ㅡ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건만ㅡ하루를 침상에서 보냈다. 평소 같으면 이게 무슨 차려진 밥상이냐, 얼씨구나 하고 널브러져

게으름을 떨었겠지만 요즘 덥다는 이유로 계속 안에 틀어박혀 있어서인지 좀이 쑤셨더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호미를 챙겨 나온 것이 조금 전이다. 밭일을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장시언은 무럭무럭 자라난 고구마 줄기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놀라웠다.

이건 뭐, 농사꾼들도 아니고... 그동안 궁녀들의 손에 내맡긴 밭은 전문 농사꾼도 울고 갈 만큼 잘 일구어져 있었다. 가히

놀라운 재능이었다. 궁녀로 들어올 때 밭 가는 것을 시험 보고 들어왔나,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저만치에 하하호호ㅡ 웃으며

땀을 훔쳐내는 궁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진두지휘를 하는 윤상궁도 보인다. 호미질도 참 야무지게 하는구나.

"윤상궁."

"...?...마마!"

윤상궁은 잠시 멈칫하다가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일어나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후다닥 장시언에게 다가왔다.

얼굴에 왜 나오셨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 다보인다.

"계속 안에만 있는 것이 답답해서 나왔네."

보는 눈이 있어 제법 상전의 티를 내는 말투.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작게 소곤 거렸다.으흐흐...하고 음흉하게 웃으며 '아무렴 괜찮지.'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이것도 보는 눈이 있어 그러질

못한다.

"괜찮네. 음, 오늘은 수확을 한다고 들었는데."

"예, 좀 이르긴 하지만 조금만 수확을 해볼까 합니다."

"내 몸이 약해 큰 도움은 주지 못하겠지만 내가 벌인 일이니 나도 거들어야지."

윤상궁은 순간 멍해졌다. 몸이 약해 큰 도움은 주지 못하겠지만...몸이 약해... 몸이 약해.... 혼자라도 거뜬히 수확을 하고

창고에 다 나르기까지 할 텐데 말도 참 잘하신다. 하기야 몸이 삐쩍 말랐으니 남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도 남겠지. ㅡ저들처럼.

윤상궁은 소박하고 마음 고운 상전을 감동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궁녀들을 보았다. 쯧쯧, 마마께서 한 손으로 고구마 자루를

쥐고 빙빙 돌리는 걸 봐야 정신을 차리지. 윤상궁은 혀를 차며 '가시지요.' 하고 장시언의 곁에 섰다. 장시언은 살짝 치마를

들어 올리고 조신하게 걸어갔다. 하지만 마음은 한껏 열의에 불타올라 호미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요 고구마

짜식들! 내가 왔다!!

샥샥샥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서서히 고구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장시언은 열심히 흙을 긁어내 고구마를 캤다. 아직 알은

작았지만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다 먹어주마. 삶아 먹고, 구워 먹고, 말려 먹고, 아주 그냥

물리도록 먹어주마. 으흐흐흐...한편, 식탐으로 물든 장시언의 눈빛을 궁녀들은 이렇게 받아들였다. 한 나라의 국모께서

저리도 소박하실 수가! 흙에서 나온 생명을 경외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언제나 착각은

자유였다. 윤상궁은 한창 신나있는 상전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이제 그만 하십시오. 호미질로 근육이라도 만드실

요량이십니까? 눈빛을 귀신같이 알아챈 장시언은 하던 호미질을 뚝 멈추고 손등으로 천천히 땀을 닦아냈다.

"하아....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털썩. 말을 하다가 땅에 주저앉아 버린다. 온몸으로 너무 힘들다는 기운을 풍기며.

"괜찮으십니까?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마마. 너무 무리를 하셨습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많은 고구마를 캤으니...

"음... 그래야겠구나."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윤상궁은 장시언을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시언이 평소 나의 전 재산이라고 말하는 호미도 챙겼다.

"가시지요 마마."

"그래, 가ㅡ"

"에구머니!!"

'가세.'하고 말을 하려던 장시언은 갑작스러운 궁녀의 외침에 입을 다물었다.뭐지?윤상궁을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의아한 눈빛이었다.둘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윤상궁에게서 방금 전과 비슷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미!!"

장시언은 순간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가까으로 참았다. 아, 윤상궁. 얼마나 놀랐으면 사투리가...풉! 하지만 거기서 윤상궁의

사투리를 눈치채고 웃음을 참고 있는 이는 장시언이 유일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낯빛이 창백해져 아연실색했다.

"어찌 이런 흉물스러운 것이 황후궁에!"

그 소리만 벌써 열 번째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간악한 짓을 하다니..."

그건 여덟 번째. 장시언은 잔뜩 흥분하여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윤상궁을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저 정도까지

흥분을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폐하께 말씀을 드리셔야 합니다."

글쎄, 그다지.

"마마!"

장시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야 하는데?"

"예?"

"이까짓게 뭐라고 폐하께 말씀을 드리라는 거야."

"몰라 물으십니까? 간악한 무리들이 마마께, 그러니까 마마께..."

윤상궁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장시언이 대신 말해주었다.

"나한테 삿된 저주를 퍼부은 것이다?"

"예. 틀림없사옵니다! 저 대바늘을 좀 보십시오."

끔찍하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지푸라기 인형에 손가락질을 한다.

"게다가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안에 저주할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넣는다고 합니다."

"흠, 그래?"

장시언은 망설임도 없이 인형의 배에 손가락을 푹 찔러 넣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윤상궁의 얼굴이 전보다 더 창백해진다.

"마마! 만지지 마십시오."

머리카락이나 손톱은 보이지 않았다.

"없는데?"

"어딘가에 박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꺼림칙한 것이오니 손 떼세요. 어서!! 저주를 당하십니다!!."

뭐? 저주? 하!정시언은 바로 코웃음을 치며 손을 뗐다. 그리고 지푸라기 인형에 박힌 대바늘을 잡았다.고자로 만들고 싶었나

보지? 아주 딱 중앙에 박았네? 흐흥, 근데 미안해서 어쩌나. 고자가 될 기미조차 안 보이는데.

"마, 마마...? 뭐, 뭐하시려고요?"

걱정에 찬 윤상궁의 말에 씨익 미소로 답을 하며 대바늘을 쑥 뽑아냈다. '마마!'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도, 도로 꽂아 놓으십시오. 아니 아니지... 건드리지 마시고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마마."

불안해하는 윤상궁과는 달리 장시언은 큭큭거렸다. 우스워 견딜수가 없었다.저주를 퍼부으려면 제대로 하던가. 어설프게

고구마밭에다가 묻어두다니. 황후를 저주하기 위해 고구마와 함께 묻혀 있던 저주의 지푸라기 인형....

"크크큭ㅡ 크크크큭ㅡ 아우... 배 아파..."

장시언은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끅끅거리며 아주 자지러진다.그리고 웃음이 멎자마자 '흐음...'하고 손에 쥐고 있던 대바늘을

잠시 살펴보다가 그것을 그대로 인형에 내리 꽂았다.푹. 푹. 푹. 푹.

"마마!!!!"

윤상궁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간다.한참을 쑤셔대던 장시언은 다시금 대바늘을 쑥 빼내고 창밖으로 지푸라기 인형을 휙ㅡ

던져버렸다.

"우습긴 하다만, 지푸라기 주제에 감히 날 저주해? 건방진 지푸라기 같으니라고."

장시언의 마음은 이미 개운해질 대로 개운해졌다. 윤상궁은 넋이 빠졌다.

"응? 아, 이 바늘은 윤상궁이 쓸래? 이불이라도 꿰매."

"전.... 됐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가지지 뭐."

"....뭐에 쓰시려구요?"

"글 쓰고 말릴때, 벽에 꽂기에 딱이잖아, 이 대바늘. 으흐흐흐..."

윤상궁의 입이 떡 벌어졌다. 황당 그 자체.예전에 눈앞의 상전을 보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 늙지도 않고 오백년은

거뜬히 사실 거라고. 헌데, 이제 그 말을 바꾸어야겠다. 오백년이 아니라 천년은 늙지도 않고 사실 것 같다. 진심으로.

***********

"맛이 없습니까?"

"예? 아,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어마마마."

맛있는데 아직도 고구마 하나를 다 못 먹었냐? 아니, 너무 맛있어서 아껴먹는 건가?장시언의 앞에만 고구마 껍질이 수북이

쌓여 있다. 누가 보면 고구마를 못먹어 죽은 귀신이 붙었다고 하겠다. 조금 민망하다.

"고구마를 싫어하나요?"

싫으냐는 말에 아이가 도리질을 한다.

"아닙니다. 좋아합니다. 이렇게 쪄먹는 것은 처음이지만 맛있습니다."

김치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는데....아니 이게 아니지.

"무슨 일이 있지요?"

"예? 아, 아니요! 없습니다, 아무일도..."

속일 사람을 속여라.

"통 먹질 못하는 걸 보니 일이 있는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강희황자는 푹 고개를 숙이고 고구마를 우물거렸다. 아니에요, 이렇게 잘 먹잖아요, 하고 말하는 사람처럼.아무래도 조만간

또 오상궁을 들쑤셔봐야겠군.오상궁은 강희황자를 돌보는 전의 그 보모상궁이다.장시언은 '그래요?' 하고 말을 하며 천천히

먹으라고 아이에게 수정과를 가져다주었다.왜 한동안 안 온건지까지 싹 다 알아내야지.아무리 속이려 발버둥을 쳐도 조만간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단다, 밤송이야. 후후후.....

내막이 밝혀진 것은 예상대로 오상궁을 통해서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장시언이 생각한 것보다 일이 많이 복잡하고

오래되었다는 것이었다. 오상궁의 말을 듣는 동안 장시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황자가 황후궁에 들린 이후부터 이어져

온 상황의 나열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강희황자는 자신과 같은 일을ㅡ오히려 더 심한 일을ㅡ겪고 있었다.

".....찾아낸 것만도 꽤 됩니다."

".........."

곳곳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부적과 대바늘이 꽂힌 지푸라기 인형, 닭 피가 묻은 무명옷.

"황후궁으로 계속 걸음을 하면 어마마마께도 화가 미칠지 모른다며 참으셨습니다."

장시언은 주술이나 저주 따위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고 아끼는 이가 그런 추악한 짓을

당한다면 입장은 달라진다.

"누구의 소행이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몇몇 분을 추정할 뿐이지요...."

추정. 아마 누구라도 같은 추정을 할 것이다. 황자가 있는 네명의 비들, 그리고 회임을 한 원비.

"비들이 모두 술사들과 어울리나?"

"예. 항상 함께하는 무당들이 있습니다."

비들뿐만 아니라 빈들도 모두 술사들과 어울린다.

"황자의 얼굴에..... 아니, 아니다."

잦았던 상처에 대한 것도 물으려던 장시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물어보다 마나 뻔한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선

돌부리가 다른 황자들일 거라는 생각은 뻔한 것이었다. 비빈들만큼이나 그녀의 아이들도 강희 황자가 태자가 될까 불안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단순한 욕심과 시기일 수도 있고,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아이 나름의 두려움의

발현일 수도 있다.

"오상궁은 이만 돌아가 보게. 그리고 오늘 일은ㅡ"

"황자님께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황후마마."

눈치 빠르기가 윤상궁이랑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장시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상궁이 돌아가고 장시언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았다.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어.

"윤상궁."

"예, 마마."

"아까 밖에 던진 것 있잖아."

"밖에 던진 것이요?"

윤상궁은 그게 뭐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오늘 일인데 너무 끔찍해서 머릿속에서 말소를 시킨 모양이었다.

"건방진 지푸라기 말이야."

"예? 건방진 지푸....!!!!!!!!!!"

"그거 도로 가져다줘."

"예에? 아니, 그건 또 왜ㅡ"

"가져다줘, 쓸 데가 생겼어."

장시언은 싫은 기색이 역력한 장상궁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말을 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또 무슨 꿍꿍이신가.....

분명 웃는 얼굴인데 등골이 서늘하다. 윤상궁은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틀었다.

"그것은 어디에 쓰시게요?"

"조만간 다 쓸 데가 있지."

장시언은 비실비실 웃으며 벽에 꽂아두었던 대바늘을 다시 지푸라기에 박았다.

".............."

"윤상궁, 잘 들어. 앞으로 말하는 건 나와 윤상궁만의 비밀이야...."

해사하게 웃는 얼굴. 불안해진다. 정말 불안해진다.장시언은 윤상궁의 불안을 눈치챘지만 첫 번째 계획을 말해주었다. 듣는

윤상궁의 입이 점점 벌어진다. 그러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 떡 벌어졌다. 장시언이 덥석 손을 잡았지만 그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이번 일은 윤상궁의 임무가 아주 막중해. 잘부탁해, 윤상궁~"

윤상궁은 돌처럼 굳어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상전은 남이 뭐라고 하건 신경도 쓰지 않고 물 흐르듯 살아가는

평화주의자다. 하지만ㅡ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폐서인을 계획하던 그때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때와 다른점이 있다면,

지금은 뭐랄까...., 좀 무섭다는 것이었다. 장시언의 입에서 흘러나온 간계와 모략이 그런 마음을 들게했다. 작전은 그날 밤,

바로 시작되었다.황제가 오기 전,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멀쩡하던 이가 정신도 차리지 못한단 말이냐!"

사경을 헤매는 사람처럼 힘겹게 숨을 내뱉는 장시언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날선 눈으로 윤상궁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대체

상전을 어찌 모시기에 이러는 것이냐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 눈을 감고 끙끙거리고 있던 장시언은 짜고 치는 판이었지만

독박을 쓰고 있는 윤상궁에게 미안해졌다. 앞으로 며칠은 더 이렇게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윤상궁의 처지가 난처해지게

생겼다. 윤상궁, 조금만 참아. 계획대로만 해. 계획대로만!

"머리도 아프고 온몸이 쑤신다고 하시더니,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그 후로는 정신도 잘 못 차리시고..."

그렇지!

"이유도 없이 쓰러졌다는 게냐?"

"예.... 손쓸 틈도 없이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요즘 들어 머리도 아프고 몸이 안 좋다는 말씀을 하시긴 했지만..."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것이 뭔가 의아함을 담고 있다.잘하고 있어 윤상궁!!

"태의는 다녀갔나?"

"예. 다녀갔습니다. 옥체 미령하시긴 하나 별다른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갑자기 사람이 쓰러진다는 말이냐?"

"............"

할 말이 없다. 사실이 그러니까. 윤상궁이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있도록 적절한 시점에 '폐..하....' 하며 힘없이 손을

뻗었다. 병든 닭처럼, 눈을 감은 채 파들파들 떠는 장시언의 손을 황제가 무시할리 없었다.

"이만 나가보도록 해라."

"예?"

"소란스러우니 나가라는 소리다. 짐이 이곳에 있을 것이다."

"예...."

윤상궁은 자기 맡은 바 소임을 다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장시언의 몫이었다. 황제는 침상 곁에 앉아 장시언의

손을 잡아주었다. 눈빛이 느껴진다. 곧 걱정이 묻어나는 손길도 이어졌다. 식은땀처럼 보이려고 얼굴에 뿌린 물방울을

닦아낸다. 좋은 징조였다. 걱정을 끼치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간악한 무리를 뿌리채 뽑아내기 위해서는 이게 가장 좋은

수였다. ㅡ일단 황제가 장시언에 대해 걱정을 하게 만드는것. 자신이 가진 유리한 점은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좋으니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도 유분수지. 어린 아이한테 그딴 더러운 짓을해? 걸리기만 해봐라. 아주 그냥!

"시언아."

순간 자연스럽게 '응.'하고 대답을 할 뻔했다. 놀란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다.크, 큰일 날 뻔했네.

"이리 보니 참..."

응? 이리보니 참, 뭐?

"...마치 네가...장돌..."

장돌?

"후...., 그럴 리가 없지."

뭐가? 뭐가 그럴 리가 없어? 장돌, 뭔데? 앞, 뒷말을 다 잘라먹으니 도통 뭔소린지 못 알아듣겠다!

"그래, 그럴리가...."

황제는 그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조용히 장시언을 내려다볼 뿐.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진다. 장돌....뒤에 이어질

말이 뭐였을까? 그럴 리가 없는데 황제가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눈치채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

단순히 감이 좋을 뿐인지도.아픈 척 연기하랴, 황제의 속을 파악하랴, 이래저래 머리가 아픈 장시언이었다.

"어마마마...."

날이 밝자마자 강희황자가 황후궁으로 찾아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보아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다.계획대로 착착

덫이 완성되고 있었다.

"깨어나지는 않으시던가?"

"예..."

"태의는 다녀갔나?"

역시 부자다. 똑같이 물어본다.윤상궁은 이번에도 '예...' 하고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황자는 울먹울먹 눈물이 차오르고

어깨를 축 늘였다.

"제가 계속 이곳에 와서, 그래서 어마마마께서...."

절대 아니다. 황자가 황후궁에 들러 아픈것이 아니라 황자에게 해코지를 하려는 것들을 잡아내려고 아픈 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윤상궁은 뚝뚝 눈물을 흘리는 황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강희가 울어도 절대 위로해 주어선 안돼."

지난밤 신신당부한,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한다는 철칙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장시언도 우는 아이

때문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눈을 뜨지는 않았다.

"으아~ 엉덩이에 욕창 생기겠어! 한 자세로 가만히 누워 있으니 워."

장시언은 오른쪽, 왼쪽으로 휙휙 상체를 틀며 투덜거렸다. 몸에서 우드득ㅡ두둑ㅡ 소리가 난다.

"자세를 좀 바꾸십시오, 마마. 옆으로 돌아누워 있으신다거나...."

"옆으로 누워있으면 덜 아파 보이지 않아? 그냥 잠든 것 같잖아."

"...그렇긴 하겠네요."

윤상궁은 수긍했다. 듣고 보니 예리한 지적이다.

"휴... 어쩔수 없지 뭐. 얼굴에 물이나 좀 뿌려봐."

장시언은 목을 쭉 빼고 눈을 감았다.

윤상궁은 대야에 담긴 물에 살짝 손을 적시고는 장시언의 얼굴에 물을 튕겼다. 안 그래도 날이 더워 조금씩 땀이 맺히는데

물까지 뿌려놓으니 정말 식은땀이 따로 없다.

"언제까지 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닷새만 더."

"그리 오래요?"

"응. 그리고 그 후엔.... 알지?"

"예."

윤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성공하고 말리라. 윤상궁은 성공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다. 살기 위해 한번 배신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언제까지나 장시언의 편이었다.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진다. 계획의 성패가 모두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닷새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

자박자박...샤삭ㅡ 샤삭ㅡ ....자박자박... 샤삭ㅡ 샤삭ㅡ

스치는 치맛자락 소리가 밤길을 누빈다. 바쁜 걸음으로 걷다가 잠시 멈추고 또다시 걸음을 하고.... 계속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오밤중에 홀로 나서는 길임에도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다급한 듯, 그리고 약간은 불안한 듯, 홀로 어둠을 헤친다.

얼마나 걸었을까. 누군가가 그 발길을 붙잡았다.

"거기 누구시오!"

순찰을 하던 병사 하나가 어둑어둑한 그림자를 보고 소리쳤다. 너무나도 수상했다. 이 야밤에 황후궁 주변을 돌아다니는

그림자라니.병사가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림자는 후다닥~ 저 멀리 도망을 갔다. 치맛자락 소리가 더 빨라진다.

"게 섰거라!"

병사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벗어난 그림자를 따라 뛰어갔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병사들이 하나, 둘씩 모인다.

"수상한 자가 있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병사들은 사방으로 퍼졌다. 황후궁은 그들이 가장 지켜야할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제가 순행을

간 동안 계속 그곳을 지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황후궁에는 지금 궁의 주인인 황제와 황후가 함께 머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황후궁 주변을 돌아다닌다니 있을 수없는,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이쪽으로!"

길이 양쪽으로 꺾여 있었지만 빠져 나가려면 분명 이 방향으로 도망을 쳤을터. 대다수의 병사들이 그곳으로 뛰어갔다. 남은

병사들은 황후궁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얼마후, 한 병사가 땅에 떨어진 무언가를 보고 '헉, 여기!' 하며 소리 쳤다. 남아있던

병사들이 다 그곳으로 모였다.

"왜 그러냐?"

"무슨 일인가?"

의아한 듯 묻는 이들에게 병사는 땅에서 주운 것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이.... 이게 땅에 떨어져 있었네."

그리고 그것을 본 병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죄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황제는 장시언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소란이냐?]

[페, 페하 큰일 났사옵니다 ...! 나와 보시옵소서.! 밖에 바 밖에...]

궁녀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벌벌 떠는 궁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불편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며 궁녀늘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궁녀 따위가 지존의 밤을 방해한단 말인가

[웬 소란이냐고 물었다]

[아.. 폐, 폐하 그 그것이...]

황제는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대는 궁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허나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더 기달려야 하지?]

흠칫 궁녀는 불호령에 몸을 움츠리며 계속 '그것이....' 하고 말을 끌었다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로 해선 안 되겠군]

목소리가 어찌나 음산한지 흡사 작두날이 머리 위에 놓인 것 같았다 궁녀는 '아, 이 이것...!'하며 손에 든 무언가를 황제에게 내밀었다

[이 이것이 밖에.... 떨어져 있었다고 하옵니다.......]

부적 황제는 궁녀가 내민 부적을 받아들고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위로 치솟은 눈썹이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그의 심기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어 어떤 수상한 자가 ... 흘리고 갔다고...]

궁녀는 차마 황제를 바라보지 못하고 아뢰었다 더 할말이 남아 있었지만 황제는 이어질 궁녀의 얘기를 더 기다리지 않고 그년를 스쳐 지나갔다 섬뜩하고 두려웠다 칼을 들고 있는 것도 유혈이 낭자한 것도 아닌데 그 뒷모습이 흡사 살인귀 같았다

침상에 송장처럼 누워 있던 장시언은 밖의 소란에 반짝 눈을 떴다

윤상궁 성공했구나! 역시 유능한 나의 동지!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모든것이 그이 뜻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윤상궁 잘들어 이건 나와 윤상군만의 비밀이야.......'

둘만의 비밀 정말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된는 일이었다

윤상궁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린다

'난 한동한 아픈 척을 할 생각이다 그리고 나선 부적을 하나 만들 거야'

'부적이요......?'

'응 아주 엉터리 부적이지 선무당이 사람 잡는 다는 말이 있지만 이번엔 선무당 노릇 좀 해야 겠어'

엇 비슷하게 만 그리면 된다 부적을 따라 그리는 것을 잡기에 능한 장시언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 부적을 어디에 쓰시게요?'

'후후..... 덫을 치는 거지 윤상궁은 그 부적을 가지고 황후궁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순찰을 하는 병사한네 걸리면 슬쩍 흘리고 도망치면 돼'

윤 상궁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도.....도망이라니 그러다 잡히면요?'

당연한 도움이었다 제아무리 달리기에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눈을 피해 도망을 가는 것은 쉽지 않을 터

장시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돌아다닐때 후원이랑 가까운 곳에서만 서성이면 절대 안 잡혀 길이 양쪽으로 꺽어지니까 걸리자마자 잽싸게 후원을 통해서 안으로 와 병사들은 수상한 자나 도망갈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른 길로 가거나 고작해서 황후궁 주면을 수색하는 게 전부일 거야'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그야... 황후궁 안은 폐하의 윤허가 없으면 들어울 수 없으니까'

장시언의 말에 윤 상궁은 눈을 크게 떳다 그랬다 황제를 제외한 다른 사내는 황제의 윤허가 없으면 황후궁을 출입할 수 없었다

장시언은 그러니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윤 상궁의 손을 꼬옥 잡았다

'이번 일은 윤 상궁의 임무가 아주 막중해 잘 부탁해 윤 상궁~'

인시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횃불이 타오르며 주변을 비추었다

황후궁 바깥 일대를 수색하던 병사들과 황후궁의 궁녀들이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려오던 소리라고는 타닥-타닥- 불씨가 피어오르고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 뿐

왜 그렇게 모이게 된 것인지 모르는 이는 그득 가운데 없었다 수상한 자가 황후궁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떨어뜨리고 간 부적

무당이 아닌지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붉게 쓰여진 그 부적은 누군가를 저주할 떄 쓰는 것임이 분명했다 좋은 것이라면 이 야심한 시각에 그것을 가지고 -그것도 황후궁 주변을 -돌아다닐리가 없다 또한 정황으로 보아 그 부적은 다른 이가 아닌 황후를 저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리라

대체 누구의 소행이란 말인가 결국 잡기 못했다 그 수상한 자는

[이 부적을 발견한게 누구냐?]

드디어 황제가 입을 열었다 병사들은 일제히 한 병사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받은 병사가 한 발짝 앞으로 나온다

[.......제가 발견하였습니다 폐하]

[이것을 황후궁 주변에서 발견했다고 들었다 맞나?]

[예 맞사옵니다 ]

[어디냐?]

[예?]

[정확히 어디에서 발견했다는 말이다]

[후,후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후원, 후원이라.......]

황제는 잠시 말을 늘이며 천천히 궁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윤 상궁의 들옥리 오싹햊는 순간이다 저 갘 좋은 분이 혹여 눈치를 채지는 않았을까 불안해진다

황제는 다시 병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걸 떨어뜨린 자는 찾지 모했다고?]

[......예 이 일대를 다 수색했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야 그럴테지 그자는 황후궁 안으로 들어왔을 테니까]

쿵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마마 이제 어뻐합니까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한다 윤 상궁은 안에 누워 있는 장시언에게 달려가 다음 계획을 듣고 싶었다 이대로 있다간 황후궁 궁녀들 모두 고문을 당하게 생겼다

[삿된 무리와 어울려 황후를 음해하려는 자가 분명 이 안에 있다 궁녀들의 처소를 모두 뒤져라 수상한 물건이 나오면 즉시 보고하도록]

[예]

병사들이 우렁차게 외치며 황제의 명을 받든다

궁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모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돌아가는 상황 자체가 그녀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윤상궁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일이 생각보다 커질 것 같았고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 할 때였다 그 순간-

[윤상궁]

황제의 목소리에 윤 상궁은 감았던 눈을 떴다

[예 폐하]

[아는 것이 있나?]

그저 한번 속을 가늠해보려는 것인지 다 알고 묻는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윤 상궁은 결국 자신의 모시는 상전을 믿기고 했다 그때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번엔 다르다

[소인은.....]

[찾았습니다]

황제의 물음에 답을 하려던 윤 상궁의 말을 끊고 한 병사가 외쳤다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황제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궁녀들과 윤상궁도 마찬가지였다 찾았다니 대체 뭘 찾았다는 소리일까

윤상궁은 다가온 병사의 손에 쥐어진 것을 보자마자 이제 됐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워낙 미미하여 그 누구도 그 한숨을 듣지 못했다

고구마 밭에서 찾아낸 대바늘이 꽃힌 지푸라기 인형

장시언이 준 것이었다

'이건 윤 상궁 처소에 잠시 놔두도록 해 끔찍해도 조그만 참고'

정말 대단하다 이리 될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단 소리가 아닌가 윤 상궁은 새삼 장시언의 치밀함에 놀랐다 확실히 그녀의 상전은 영특한 구석이 있었다

그 머리로 공부를 하셨다면 정말 장원급제를 하였을 터인데...... 이 말을 들었다면 그건 이거랑 다르다고 하셨을 테지만

황제는 그건 이거랑 다르다고 하셨을 테지만

[어디거 찾은 것이냐?]

병사는 힐끗 윤 상궁의 눈치를 보았다

놀랍기도 할테지 황후를 바로 곁에서 모시는 그녀의 처소에서 저런 것이 나왔으니

[그, 그것이]

[저의 처소에서 찾은 것일 겁니다]

윤상궁은 병사가 아뢰기 전에 선수를 쳤다 곧바로 황제의 날선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보관하던 것입니다 폐하]

떳떳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장시언을 어린 시절부터 돌보아 왔다는 윤상궁이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지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봐]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이옵니다 폐하]

황제가 윤 상궁에게 다가간다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네가 네가 감히-]

[며칠 전에 제가 찾아낸 것이옵니다...!]

그때 마침 궁녀 하나가 급히 소리쳤다 앞으로 나와 몸을 납작 엎드린 궁녀는 다시 한번 '제가 찾아낸 겁입니다'하고 아뢰었다

황제는 걸음을 멈추고 그 궁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네가 찾아냈다?]

[예 폐하 다들 함께 있을 때 찾은 것이옵니다 황후 마마께서도 보셨사옵니다 뒷밭에서 일을 하던 중에 찾아냈사옵니다]

[저 말이 사실이냐?]

황제가 묻자 윤 상궁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사실이옵니다 폐하' 라고 대답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황후 마마 뜻떄문에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가지고 있었다는 말도 함께 했다

확신하건데 황제는 이제 황후를 음해하려는 간악한 무리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후궁들을 들쑤셔 놓을 것이다 강희 황자를 해라려는 이들도 같은 무리일테니 그리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터였다

[비빈들과 함께하는 술사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짐이 직접 추국을 열어 죄를 물을 것이다]

바로 이렇게

윤 상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손 놓고 뒤로 물러나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나자 장시언은 바로 연기를 시작했다 앓은 소리와 함께 알아듣지 못한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윤상궁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염소 흉내라도 내십니까? 그만 하시지요 저 윤상궁입니다]

아픈 척 끙끙거리던 장시언이 그 말에 '에이 뭐야...'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어찌 되었어?]

[마마께서 계획하신 대로 잘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궁 안에 그런 흉물스런 것들이 또 없는지 수색하게 하시고 비빈들의 술사들도 다 잡아들이라 명하셨습니다 추국을 여신답니다

[흠 그래? 수고했어 윤 상궁]

장시언은 윤 상궁의 공을 치하햇다 이번 일은 윤 상굴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윤 상궁은 괜히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반 장난으로 장시언을 원망했다

[말도 마십시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부적 흘리고 도망가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그 말에 장시언은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허 이거 왜 이래~윤 상궁이 얼마나 빠른지 내가 다 아는데 어릴 적 날 잡으러 달려오던 윤 상궁를 내가 잊은 줄 알아?]

어린 시절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언제나 자신 있었지만 유모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장시언은 태어나살면서 그렇게 무섭게 뜀박질을 하는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인정사정 없는 유모, 그러니까 윤 상궁은 모시는 상전이고 뭐고 간에 장시언을 잡기 위해 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냅다 달니는 장시언에게 신고 있던 짚신을 던져맞힌 적도 있었다-(이는 장시언의 도망가는 기술이 나날이 발전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흠흠 하여간에 발바닥이 아파 죽겠습니다 너무 뛴 모양이에요]

[정말 수고했어 윤 상궁 내가 발 좀 주물러 줄까?]

장시언은 윤 상궁의 곁에 딱 달라붙어서 손을 조물거렸다 윤 상궁은 웃으며 '됐습니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 같으면 장난으로라도 '예 좀 주물러 보세요'하고 발을 내밀었을 텐데 궁에서 그랬다가는 큰 사달이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조만간 시끄러워지겠네요]

[응 그럴테지.......... 못된 것들 감히 우리 밤송이를........하지만 뭐 이게 폐하가 다 알아서 해주기겠지 후후.....]

....완전 여우다 정작 자신은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본인이 당하셨을 적엔 그렇게 재미있어 하시더니........]

[응? 뭐?]

장시언이 무슨 소리 했냐며 댕글하게 눈을 떴다 윤 상궁은 그런 장시언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마를 저주한 물건을 보셨을 땐 재미있다고 아주 배가 찢어지게 웃으시더니 강희 황자님 일에는 그리 열을 내실 줄 몰랐습니다]

[아니 그야 뭐........]

장시언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평소엔 뻔뻔하면서 타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때는 항상 이런 식이다 윤 상궁은 괜히 딴청을 부리는 장시언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사라지고 붉은 햇살이 퍼질 즈음 비빈들과 함께는 술사들을 모두 잡아들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말은 즉 곧 추국이 열릴 것이라는 뜻이었다

날이 밝자 강희 황자가 황후궁으로 찾아왔다

지난밤의 일을 전해들은 것이겠지

[어마마마 ....몸은 좀 어떠시옵니까?]

어떻긴 계속 누워만 있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장시언은 속내를 숨기고 걱정스러운 듯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를 다독였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걱정 마세요]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아바바마께서 추국을 여셨다 합니다 어마마마께 못된 짓을 한 이들을 찾아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쾌차하세요!]

아아! 기특한 밤송이 ! 자기보다 내 걱정을 먼저 하고..........어흑!

격한 감동의 눈물이 흐를 것 같다 폐하를 욕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이런 순하고 착한 아이가 폐하의 아들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폐하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분이시니 정말 생명의 신비다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강희 황자가 조그맣게 말을 한다 무엇이 죄송한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었다

[황자 때문이 아닙니다]

장시언은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강희 황자는 그 말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기 떄문이라는 미안함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궁은 외롭고 무서운 곳이다'

황후로 낙점이 되어 입구이 결정되었을 때 아버지인 장인욱에게 그런 말을 들었었다

궁에서 산지 고작 1년 정도밖에 안 된 장시언은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하지만 -솔직히 전혀 모르지만- 궁에서 태어나 자란 여덟 살의 아이는 그 의미를 뼈져리게 알고 있는 듯햇다 외롭고 무섭지만 그래도 홀로 서야 하는 곳 그곳이 궁이라는 것을

안타까울 정도로 어른스러운 아이는 그래서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고 혹여 장시언에게 해가 될까봐 혼자가 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 성정의 아이였고 그것이 아이가 아끼는 이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보듬어 안아주기에 충분한 마음이었지만-장시언은 그렇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악함이 없는 아이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음과 동시에 티가 나지 않게 도와주고 싶었다 홀로 일어설 아이의 뒤에 서서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하기야 누구라도 이렇게 착하고 바른 아이를 보고 있으면 그리될 것이다

[황자 혼자가 되려고 하지 마세요 폐하와 내가 계속 황자의 곁에 있을 겁니다]

강희 황자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예,예.어마마마......'하며 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이 여실히 보여 장시언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기가 장시언을 끌어안으며 품으로 파고든다

장시언은 그런 아이를 토닥이며 눈을 감았다

이젠 폐하께서 능력을 보여주실 차례인데...... 뭐 잘하시겠지 ........혹시 실망시키면 두 번 다시 홍두깨는 구경도 안 할 테다 절대로!

추국장엔 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달궈진 인두가 살을 문대자 비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벌써 추국이 시작된 지 한참이건만 아무런 추궁도 없다 그저 잔혹한 고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치..치지직-치익

[악!아아아아악-!]

[으아악]

왜 잡혀온 건지 이유도 듣지 못한 술사들은 계속되는 고문 때문에 처참하게 일그러졌지만 황제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라고는 하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황제는 명분을 중시하는 이었다 명분이 없는 살생은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시작하라'그 한마디만으로 잔인한 고문을 명하다니

견디지 못하고 실신을 해버린 무당의 얼굴에 촤악- 차가운 물이 뿌려진다

축 늘어진 있던 무당은 미미하게 눈을 떴다

[사 살려...아아악!]

하지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말은 비명속에 묻혀버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가 이미 짓무른 대로 짓무른 허벅지를 또다시 지진다 의식이 간당간당해진다 눈이 감기고 시야가 좁아지고 있을 때쯤 누군가가 강제로 입을 벌리고 쓴 물을 들이부었다

[커억!-- 콜록!콜록!]

그 물을 들이켠 것은 비단 그 술사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것을 억지로 마시고 있었다 그 물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의식은 계속 깨어 있었다 몽롱해진 상태로 살아잇는 의식 잠시 잠깐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드디어 황제가 움직인다 처음부터 계속,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황제가 술사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다 사람일 리가 없다

황제에겐 감정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지시 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술사들이 곧 죽을 것 처럼 헐떡이고 있었지만 황제에게선 희열도 분노도 그 어느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모두를 더 두렵게 했다

[이걸 만든 자가 너냐?]

드디어 물어오는 황제의 말

[아,아...니 옵]

입술에 피딱지가 앉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기다리지 않고 다음 술사에게 물었다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질문을.

[이걸 만든 자가 너냐?]

[아 아니옵......]

황제는 이번에도 기다리지 않고 다음 술사에게 다가갔다 질문은 모든 술사들에게 다 이어졌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렇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만든 이가 없다는 소리군]

황제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손에 쥐고 있던 부적은 곁에 서있던 내관에게 전해준다 내관은 그것을 가지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다시 시작하라]

그리고 황제와 함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달궈진 인두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참을 이어진 고문 그리고 그 순간이 또 찾아왔다

[이걸 만든 자가 너냐?]

이번엔 지푸라기 인형이었다 사라졌던 내관이 황제에게 전해준 것이다

[......아 아니옵....니.......다]

아니다 첫 번째 부적도 이번 것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엇다 저런 것은 만든 적이 없다

저벅 저벅 버적

[이걸 만든 자가 너냐?]

[아니...옵니다....]

저벅 저벅

[이걸 만든 자가 너냐?]

[......]

술사는 숨이 곧 끊어질 사람처럼 호흡을 내뱉으며 지푸라기를 바라보았다 이제 편해지고 싶었다 정말 누가 만들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걸 만든 자가 너냐고 물었다]

[......예, 예..... 제가 .....제가 ......만들...었습니....다]

추국이 열리고 처음으로 황제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린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느냐?]

[.....원 .....원비 마마 ....이시 ...옵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현비를 모시는 술사의 눈이 커진다

말도 안 된다 저것은 자신이 만든 것인데

술사의 고개가 떨어지며 몸이 늘어졌다 약기운도 이제 다 되어버린 것이다

황제는 고갯짓을 하며 '데려가 치료토록 해라'라고 명을 했다 그리고 지푸라기 인형을 또 내관에게 건네주었다 내관은 다시 그것을 가지고 사라졌다

정신을 잃은 술사가 옮겨지고 남은 술사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햇다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 다시 시작하라]

[원비가?]

[예 술사가 인정을 했다고 합니다]

아 역시 원비의 짓인가 의심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솔직히 원비가 꾸민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가장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이는 원비였으니까

[확실하대?]

[음 글쎄요..... 아닐 수고 있지요]

윤 상궁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 수도 있다니?]

[심한 고문에 당장 편해지고 싶어서 거짓 자백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장시언은 '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저..... 헌데......]

[응?]

장시언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윤 상궁을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았다 윤 상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했다

[........폐하께서 아직도 추국을 계속 하신다고 합니다]

[뭐?]

추국을 계속해? 왜?

장시언의 눈빛을 읽은 윤 상궁이 말을 덧붙인다

[술사들을 계속 고문하고 계신다고.......]

장시언을 눈살을 찌푸렸다 간악한 자들을 뿌리 뽑기 위해선 고문이 어느 정도 필요하긴 했겠지만 자백을 한 자가 나왔는데 계속 하는 것은........

[....가봐야겠어]

[예?]

[가봐야겠다고 그만하시라고 말씀을 드려야해]

장시언은 자리에 털고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윤 상궁에게 팔을 잡혔다

[가지 마십시오 가시면 일이 더 복잡해질지도 모릅니다 폐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이거 놔 윤 상궁]

[못 놓습니다 게다가 정말 거짓 자백을 한 것일 지도 모르고....]

[거짓 자백이라도 일든은 멈추셔야 해!]

[하오나 마마께서 가시면-!]

[폐하께서 그런 일을 계속 하시는 게 싫단 말이야!]

장시언은 순간 울컥해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만큼 절실했다 황제는 치밀한 정치가이며 또한 백성들에게는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가 이번 일을 잘 해결 할 것이라 믿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일로 무자비한 폭군으로 낙인히 찍힐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게 싫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자심이 꾸민 일이고 간악한 무리를 색출하는 것은 좋지만 모든 일엔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오늘은 이만 멈추어야 하는 것이 옳다

[......가야 해 윤 상궁]

윤 상궁은 상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

추국장 가까이에 가자마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끼고 귀여워하는 밤송이를 위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졌다 책임이 느껴진다

장시언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열어라 폐하를 뵈어야 겠다]

장시언의 말에 추국장 문이 열리고 황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멈춰라!]

황제는 추국을 멈추고 장시언에게 다가왔다 평소 여유로운 걸음과는 다르게 아주 빨리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 몸도 안 좋은 이가]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손길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이가 눈앞에 있었다 장시언은 그런 황제의 손을 잡고 청을 했다

[폐하......추국은 그만 멈춰주시옵소서]

황제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럴 수 없다]

[오늘은 오늘은 이만 하셔야 하옵니다 저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매번 황제의 앞에서 연기를 하는 장시언이지만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그 역시 강희 황자를 저주한 간악한 무리를 뿌리채 뽑아내고 싶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황제에게 불명예를 안기지 않는 선에서였다 이리도 잔혹한 성정을 드러내는 것은 원치 않았다

[신첩을 위해 그리 해주십시오 폐하]

[간악한 것들이 네게도 해를 끼치려 했다는 것은 이번에 안 것이지만 그래서 짐을 더 화나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 일은 너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미 계획된 일이다]

장시언은 황제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 이미 계획된 일이라니 그게 무슨....?]

[나중에 나중에 말해주마 이만 돌아가 쉬어라]

황제는 다정하게 말하고 윤 상궁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후를 모셔라]

윤상궁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상전을 모시고 추국장 밖을 나섰다 장시언의 입장에서는 괜한 걸음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추국은 속행되었으니

[계획된 일이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저야 모르지요 나중에 말씀해 주신다고 하지시 않으셨습니까?]

폐서인 계획을 세울 때보다 머리가 더 복잡하다

[하아...... 그만 하셨으면 좋겠는데...]

[...... 폐하가 그리도 걱정이 되십니까? 그분의 명예가 실추되실까 봐서요?]

윤 상궁이 정확히 집어냈다 고문을 당하는 술사들도 가엽지만 -물론 죄가 없다는 가정하에 -사실 그들보다 폐하가 더 걱정이 된다

[.......그래]

장시언은 딴 곳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윤 상궁의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척했다

[마마께선 폐하를 너무 모르십니다]

[모르다니?]

윤상궁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선 마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하신 분입니다 무섭고 가차없지만 그만큼 철저하시죠]

마마에 대해서는 어딘가 엉성하고 무르신 것 같지만요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킨다

장시언은 뽀로통한 얼굴을 지으며'어찌 그리 잘알아?'하고 투덜거렸다 윤 상궁은 후후.. 하고 웃으며 '저야 듣고 다니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윤상궁이 자주 하는 말이었다 '듣고 다니는 것이 많다'

대체 윤 상궁은 어딜 얼마나 돌아다니기에-거의 매일 같이 있는데- 뭘 그렇게 많이 듣고 다니는 걸까

장시언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루만 윤 상궁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말 많고 탈 많았던 추국은 잡아들인 모든 술사들이 죄를 인정하고 나서야 마침내 끝이 났다 그들을 잡아들이고 고작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리 천하태평인 장시언이라도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모든 술사들이 죄를 인정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가 원한 것은 강희 황자를 은해하려 했던 무리를 찾아내 그 죄를 묻는 것이었다

허면 비빈들이 모두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인가

으.....머리야 아 폐하 얘는 왜 안 오는 거야 일을 마쳤으면 후딱 와서 보고를 해야지!

손가락이 툭, 툭, 툭 일정한 박자로 탁자를 두드린다 지존이 자신의 수족이라도 되는 줄 안다 마침 문이 열리낟 윤 상궁이었다

[폐하께서 오고 계신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시언은 후다닥 침상으로 뛰어갓다

[........]

참 한결같으시기도 하지.... 윤상궁은 딱한 눈으로 상전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억지 병수발을 들어준다 젖은 영견을 이마에 대주며

[황제 폐하 납시오]

아 드디어!

장시언은 살짝 실눈을 뜨고 문 쪽을 바라보다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눈을 감았다

문이 열리고 황제가 들어온다 이제야 장시언은 스르륵 눈을 뜨고 침상에서 몸을 추스리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황제가 말릴 것이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괜찮으니 누워 있어라 성치 않은 몸으로 추국장까지 걸음을 했으니 오죽하겠느냐]

역시나

장시언은 어쩔 쭐 몰라 하는 얼굴로 '하 하오나.....'하며 말을 끌었다 마음 속에는 그대로 누워 있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면서

황제는 윤 상궁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눈치를 주고 장시언의 곁에 앉았다

['하오나'는 무슨 너와 나 사이에 부부끼리 지나치게 예를 차리는 것도 좋지 않다]

얼굴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낯간지럽다 장시언은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황제의 시선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귀애하는 이를 걱정하는 절절한 눈빛

[왜? 뭐 필요한 것이라도 있느냐?]

[아 아닙니다 계속 누워 있으니 답답하여.......]

계속 누워 있다간 얼굴이 점점 달아오를 것 같다 지존께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데 그 시선을 피하고자 눈을 감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어나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까는 것이.......

[날 보거라]

쳇 그것도 허락을 안 해주네

장시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황제가 손을 뻗어 장시언을 안는다 그는 장시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생소한 느낌이었다 분명 안긴 것인데 왠지 모르게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커다란 짐승을, 그러니까 호랑이 같은 맹수인데 희한할 정도로 아주 온순한 짐승을 안고 있는 기분이랄까

[.....폐 폐하?]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자]

[.........]

장시언은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을 뺐다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솔직히 몸만 큰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린 아이와 여인 그리고 약자에겐 한없이 약한 장시언이다 황제가 이렇게 다가오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장시언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등을 쓰다듬었다 작은 몸도 아니거니와 아이의 몸처럼 부드러웠다 단단한 등근육이 그대로 느껴졌다 보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괜히 머쓱하고 쑥스러웠다 움직이던 손이 다시 제자리도 돌아간다

[계속 해라]

멈칫

......이게 대체 명령이나 어리광이냐.... 도통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손은 다시 황제의 등으로

[며칠 몸이 안 좋더니 그 사이 더 마른 것 같구나]

말라? ....그럴리가 먹고 계속 누워 있었는데 더 마를 리가 있나.......야 날이 더워서 좀 빠졌을 지도......

장시언은 장성한 사내치고는 지나치게 마른 편이었다 그 덕에 키가 작은 편도 아니건만 체구가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풀죽도 못 먹은 아이마냥 말라서 평민처럼 꾸미고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리와 이것 좀 먹고 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집안에선 그를 살찌우기 위해 좋다는 것은 뭐든지 먹였었다

하지만 아무리 먹여도 살이 붙지 않았고 나중엔 다들 그냥 포기를 했다 마르긴 해도 먹기도 잘 먹고 몸이 약한 것도 아니니 아무렴 어떤가 하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체질적으로 살이 붙지 않는 말라깽이 장시언이 더 마르는 시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한 여름 이었다 안 그래도 더위를 많이 타서 잘 돌아다니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여름에는 살이 더 빠지곤 했다

[......날이 더워서 그런 것 입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인데 황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구나]

[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안다]

뭐라는 거냐..그런 거 아니거든?

[그간 몸 고생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장시언은 놀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제아무리 뻔뻔한 장시언이라도 황제에게 반말을 할 수는 없었다 둘만 있는 상황이라도 말이다 속으로야 어미 야 너 얘 좀 보게? 하고 반말을 해댓지만 속말이야 뭔들 못하랴

[한번 해봐라]

뭘?

[반말 들어보고 싶으니 해보라는 소리다]

.......지금 뭐라는 거냐? 해보긴 뭘 해봐!

[아 아닙니다.......]

[괜찮으니 해보라는데도]

미쳤냐!

황제는 정말 듣고 싶은 사람처럼 장시언을 종용했다 장시언의 목덜미에 촉촉 입을 맞추며

마음 같아선 당장 '싫어 안 해 이 자식아!'라고 말을 뱉어내고 싶지만 역시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 하시옵소서]

태연하게 말하려고 했건만 또 말을 더듬었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입맞춤을 계속 했다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인다

[너뿐이다 날 이렇게 웃게 해주는 이는]

황제는 나직하게 말을 했다 그리고

[그래서 더 용서가 안 돼]

순식간에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황제가 장시언을 바라본다

장시언은 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 일은 비빈들이 술사들과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벼르고 있던 것이다 황실의 기강을 어지렵히다닌 죄를 물어 마땅하지 좀 더 지켜볼 참이었지만 확실한 증좌가 나온 이상 그럴 필요도 없고]

[........]

[아무리 그래도 폐서인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

귀신이다

[심한 처사가 아니다 그들이 넌 건드렸으니까]

장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으윽 부담스러워 하고 황제의 눈을 피했을 텐데 오늘은 그런 기분도 전혀 들지 않았다

[네가 잘못되면 다도 살 수 없다]

쿵!

네가 잘못되면 나도 살 수 없다 그 말은 곧 자신의 안위가 황제의 목숨과 질격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얼굴에 열이 퍼졌다 아른거리는 불빛에도 달아오른 얼굴이 다 드러났다

장시언은 부끄러움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마음을 의심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이런 기분은 살아생전 처음이었다

황제가 가까이 다가온다

[시언아.......]

황제는 장시언을 부르며 그가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장시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평소와는 다른 허락을 구하는 듯한 정중한 입맞춤이었다

장시언은 눈을 감으며 살짝 입술을 벌렸다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열린 창틈 사이로 아릿한 풀내음이 들어온다 맞닾은 살에거 끈적임이 느껴졌다 습기........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으읏-]

장시언은 눈을 감았다 입에선 가쁜 호흡소리가 터져나왔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얽힌 두 개의 나신 둘 사이엔 호흡소리만이 존재했다

미미하게 퍼져 나가던 열기가 몸 안 가득 차올랐다 정말 평소 와는 달랐다

황제의 움직임은 느렸고 더 절박했다 한계까지 몰아붙일 때와는 또 다르게 정신이 혼미해졌다 천천히 몸을 가르고 들어올 때마다 허리가 저릿해지고 중심이 움찔거렸다 땀 때문인지 아니면 눈물 때문인지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장시언은 황제의 목을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어디 도망을 가는 것도 아닌데 황제는 장시언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허리, 그리고 어깨를 감싼 팔은 단 한 순간도 풀어지지 않았다 그 몸짓이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애처로워 보여 거부하기 힘들었다

....... 빗소리가 들려온다 시원스레 내리는 장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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