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사람이란 자고로 어느 환경이든 오래 견디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
서운 것이다.장시언, 방년 23세. 몸소 그것을 깨닫고 있다.
"오늘은 날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좋긴. 쪄 죽을 것 같다.
"그러게요, 현비. 참으로 좋습니다."
얼씨구?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맞장구치기는.장시언은 담담한 눈으로 비빈들을 바라보았다.계절은 여름, 그것도 한여름.
체면 차리기에 바쁜 황실의 여인들은 이 푹푹찌는 날씨에도 몇 겹씩이나 되는 옷을 걸치고 있다. 그것은 황후인 장시언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바로 픽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여름이 정말 싫다. 체질상 땀을 많이 흘리지는 않았지만 유독
더위에 약한 그는 여름 때마다 게으름이 더 늘곤 했었다. 근처 냇가에 나가 바위 그늘 아래서 하루종일 쉬었다 오거나 집에
있더라도 지친다고 말도 잘 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 많은 힘 아껴두었다가 대체 어디에 쓸 거냐는 유모의ㅡ지금의 윤상궁의ㅡ
핀잔을 듣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매앰ㅡ 매앰ㅡ 맴맴맴맴ㅡ그리고 장시언이 여름을 싫어하는 또 다른 이유. 그것은 바로 이 매미다. 함께 모여 있을 때 더
큰힘을 내는 여름의 방문객들. 하지만 장시언에겐 단순한 방문객이 아니라 치가 떨리는 불청객이었다. 세상 그 무엇도
무서워하지 않는 그가, 귀신을 만나면 친우가 되어보고 싶다과 말하는 그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것은 우습게도 바로
이매미였다. 이 말을 들으면 누구나 왜 매미를 무서워하냐고 묻겠지만, 이유 따윈없다. 그냥 싫다. 그 생김새가, 그 날갯짓이,
그 맴맴거리는 소리가. 즉, 다 싫다는 소리다.
처음엔 그저 싫을 뿐이지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라고 딱 잡아뗐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매미 시체들을
보고 기절한 이후로 무서운게 아니라는 말도 더는 하질 못했다. 빼도 박도 못할 완벽한 상황이었다. 맴맴맴맴ㅡ
장시언은 미지근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몸소 깨달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매미들이 머리위에서 울어대는데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고하게 앉아 있는 꼴이라니, 정말
스스로가 독하고 무서운 인간이라고 느끼고 있다. 만약 매미가 머리위로 툭 떨어지거나 한다면 당장에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현재로서는 그렇다.장시언은 살짝살짝 부채질을 하고 있는 비빈들을 흝어보았다.
이제 그만 정리할 때가 된 듯한데.....형식적인 이 자리는 언제나 더 길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냥 잠깐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헌데, 오늘은 유독 자리가 길어지고 있었다. 딱히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면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장시언은 더는 못 참겠다 싶어 마무리를 지으려 입을 열었다. 헌데 그가 말을 하기 전에, 현비가 '저...황후마마....'하며
말문을 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대체 또 뭔가 싶었다.
"왜 그러십니까, 현비?"
"...마마께서 강희 황자를 태자로 염두에 두셨다는 것이 사실이옵니까?"
장시언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왜 안묻나 하면서도 내심 안 물어봐서 다행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ㅡ그러면 그렇지.
안 물어볼리가 없지.장시언은 잠시 대답할 말을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생각해본 적 없다.'라고 해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당장 내일부터 또 황후궁으로 비들이 들락거릴 것이 분명했다. 그가 강희 황자와 가깝게 지내면서 비들의 방문이
뚝 끊어진 것이 얼마나 반가웠는데. 다시 그런 피곤한 일이 반복되는것은 원치 않았다.
"......생각이 깊고 영민한 아이라고는 생각합니다."
방시언은 스리슬쩍 말을 돌려서 했다. 현비의 물음에 그렇다, 라고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아니다, 라고 확답을 준 것도
아니었다. 아마 그녀들은 장시언의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을 것이다. 오묘한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의 생각이 맞는
듯했다. 장시언은 '그럼 오늘은 이만 담소를 마쳐야겠군요.'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비빈들은 몸을 낮춰 예를 취했지만
그가 떠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으아~ 더워!!"
비빈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가면은 깨졌다. 상전의 고충을 충분히 알고 있는 윤상궁은 그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 더위에."
그것도 매미들 아래에서. 윤상궁은 그렇게 덧붙이며 혀를 찼다.장시언은 손으로 파닥파닥 부채질을 하고 공기 좀 통하라며
옷을 펄럭거렸다.
"누가 보면 어쩌시려구요, 마마."
평소 같으면 그러게, 하고 멈추겠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참을 수가 없었다.
"아후...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덥담."
"이 정도 더위는 매년 여름 겪는 일입니다."
항상 편히 쉬어서 모르셨지요? 장시언은 윤상궁이 숨긴 말을 단박에 읽었지만 모르는 척 딴소리를 했다.
"시원한 물로 등목이나 좀 하고 싶다."
"가자마자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목욕은 무슨. 시원한 우물물에 등목을 하고 싶다니까?
"황후가 웃통을 벗고 엎드려 등목을 하면 참 보기 좋겠습니다."
"신선한 충격이겠지."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절대 안됩니다."
윤상궁의 단호한 목소리가 못을 박았다. 등목이라니 큰일 날 소리지.장시언은 '너무해, 흑흑....'하고 우는 척을 하다가 언제
그랬나는 듯 '아, 진짜 덥다.' 하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대뜸 '머리를 좀 자를까?'얘기를 하며 눈을 빛낸다. 윤상궁은
이번에도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하는 눈빛으로 장시언을 바라봤으나 장시언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여지없이
내뱉었다.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사실 이렇게 기를 필요는 없잖아. 황후지만 어차피 남자고. 역대황후들은 다들 머리를 길렀을라나?"
"글쎄요."
"짧게 자르고 누구를 만날 때만 그냥 가체를 올리거나 하면 될텐데. 그럼 편하고 좋잖아. 안그래? 윤상궁은 어떻게 생각해?"
"......."
그야 물론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장시언은 자기가 말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역시 나야, 이렇게 좋은 생각을
하다니, 하고 자화자찬을 하는 것처럼. 윤상궁은 그런 장시언을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마."
"응?"
"가던 길이나 계속 가시지요."
"쳇."
장시언은 혼자만의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바로 다시 기대감을 거두어들였다. 윤상궁은 매사에 에누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원비가 안 보이던데."
"곧 산달이지 않습니까. 몸조리하는 중이겠지요."
"흠,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러고 보니 입궁을 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탱자탱자 놀고먹겠다는 일념하에 입궁을 한 날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 참 빠르네."
"그렇지요."
"..........생각해 보면 윤상궁이 있어주어 참 다행이야."
"예?"
"아마 나 혼자 입궁했더라면 궁에서의 생활이 쉽지 않았을텐데...."
"........."
"그런 의미로, 윤상궁..."
"........."
"나 등목...."
"안 됩니다."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기각되었다. 장시언은 아쉬워하며 '진짜 덥다, 오늘.' 하고 중얼거렸다.
우물물은 역시나 희망 사항이었다. 결국은 언제나처럼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은은한 국화향이 코끝을 스치며 심신을
안정시킨다. 하지만 장시언은 이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우물물이 최고인데, 하며 여전히 우물물 타령을 해댔다. 그럴때마다
윤상궁이 찬물을 한바가지씩 넣어주었고 덕분에 물은 점점 더 미지근해져갔다.
"폐하께서 순행을 가신지 얼마나 되었지?"
"오늘로 닷새째입니다."
"그것밖에 안됐어? 더 오래된줄 알았는데..."
"그러게 함께 가시지 그러셨습니까."
"더워 죽겠는데 가긴 어딜가."
나가면 고생이야, 고생. 장시언은 아무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으신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폐하가 날 보고 싶어 하시겠지. 나는 아니야."
장시언은 새침하게 말했다. 보는 윤상궁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런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마마...."
"....?"
"백여시가 따로 없네요."
윤상궁은 한숨을 내뱉듯이 얘기했지만 내공이 보통이 아닌 장시언에겐 아무런 타격도 가지 않았다.
"나도 알아. 내 매력 중 하나지. 나에겐 오만 가지 매력이 있으니까. 오호호홋~"
대책이 없다. 윤상궁은 고개를 저으며 찬물을 한 바가지 더 부었다.
"머리도 덜 마르셨는데 그리 창을 열어두시면 고뿔이 드십니다."
"이 여름에 고뿔은 무슨."
장시언은 피식 웃으며 대꾸하고 눈을 감았다.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윤상궁은 저러다 분명 고뿔이 드시지, 하고 생각하며
상전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아, 밤바람 시원하다. 동동주 마시고 싶네. ......윤상궁, 우리 한잔할까?"
윤상궁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바로 '그럴까요?' 하고 물었다. 눈을 반짝이며 입맛을 다시는 것을 보니
듣던중 반가운 소리인 모양이었다. 장시언은 그런 윤상궁을 보고 으흐흐흐...., 음흉하게 웃으며 '가져올때 들키지 않게
조심해.'라고 당부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윤상궁은 걱정을 붙들어 매시라는 듯이 말을 하고는 꽃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이때까지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간만에 마시는 술은 꿀맛이었다. 꿀꺽하고 넘기니 바로 '캬아~'하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흠, 확실히 궁의 것은 더 맛이 있네요."
윤상궁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꽃병에 담아온 동동주를 찻잔에 따라 마시며 둘은 마냥 좋아했다.
어지간해선 취하지도 않는 장시언은 어느새 잔을 비우고 윤상궁에게 한잔 더 달라며 팔을 뻗었다. 연화문이 음각된 찻잔에
허연 동동주가 따라진다.
"아아, 폐하께선 순행을 나가셔서 고생을 하실 텐데..... 나는 여기서 이러고 술을 마시고 있으니... 너무 행복해!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으하하하~~~!!"
장시언은 한껏 들떠 동동주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윤상궁은 좋아 죽는 장시언을 보며 궁녀들을 물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안의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다고는 하나 만일의 일이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법.
"그래도 폐하가 보고 싶으시지요? 전 다 압니다, 마마."
"글쎄 뭐...., 그런것 같기도 하고."
장시언은 애매모호하게 대답하며 다시 찻잔을 내밀었다.
"따라, 따라. 가득 채워! 오늘 한 번 거나하게 취해보자! 으하하하!"
윤상궁은 후후, 웃으며 꽃병을 기울였다. 헌데,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응? 누구지? 둘은 서로를 보고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것도 없이 튀어나올 듯 눈이 커졌다. 문을 연 이는 강희 황자였다. 아니, 왜 여기에....
윤상궁은 대경실색해 꽃병을 놓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병이 옆으로 쓰러지며 콸콸콸ㅡ 동동주를 쏟아냈다. 탁자는
순식간에 동동주로 뒤덮였다. 장시언은 여전히 찻잔을 내민 자세로 굳어 있었다.망.했.다.ㅡ 딱 이 한 마디만이 뇌리를 스쳤다.
꽃병에 들어 있는 것은 동동주. 그걸 마시겠다고 찻잔을 내밀고 있는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황후, 장시언....진짜 망했다.
완전 망했다!!!! 강희 황자는 큼지막해진 눈으로 '어......'하고 놀라다가 탁자로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탁자에 있는
꽃병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꽃병에서 흐른 동동주로.
"......어마마마, .......저것이 무슨.....?"
이런 상황에서 쓰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무어라 말하리. 몰래 한잔 걸치고 있었다고?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윤상궁이었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꽃병을 세우고 쏟아진 동동주를 닦고 찻잔까지 싹 다 챙겨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하고 자리를 떠난다. 장시언은 눈을 부라렸다.윤상궁, 이 비겁자! 혼자만 살겠다고 동지를 버려?!
그래 봐야 얼굴은 술기운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는데!!
".........."
"............"
으으, 어쩌지. 어쩐다지!
"어마마마."
".......예, 황자."
"제게 숨기는 것이 있으시지요?"
너에게 뿐이냐, 윤상궁을 제외한 모두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
"어마마마."
진실을 추궁하는 목소리. 장시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와 아니라고 딱 잡아떼 봐야 모두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전에 한 번, 나는 황자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예."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한 것도 기억합니까?"
".......예......"
"황자, 사실 나는ㅡ"
"사실은 심약하고 여성스러운 분이 아니시지요?"
강희 황자는 장시언이 할 말을 미리 물어보았다. 잠시 멈칫한 장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계속 속이신 것입니까?"
"예."
"어째서요?"
"편하게 살려고요."
이판사판이다. 장시언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있는 그래로의 사실을 얘기했다. 어린 아이를 속이는 것이 안 그래도 양심에
걸렸는데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예?"
강희 황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그래, 도통 이해가 안 되겠지. 장시언은 다시 담담하게 말을 했다.
"편하게 살려고 입궁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폐하의 관심에서 멀어져야 했고, 폐하께서 청승맞고 가련한 여인을 싫어한다기에
그리 행동을 한 것이에요."
".....소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바마마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강희 황자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니요, 그런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성격상의 문제에요. 평화롭고 편한 삶을 살려고 하다가 제 발등을 찍은 거지요."
강희 황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아, 너무 솔직하게 얘기했나.장시언은 잠시 걱정을 하다가 이내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마음을 놔러렸다. 그리고 허리를 숙였다.
"어쨌든 속여서 미안합니다, 황자."
장시언의 생활수직 하나. 상대방이 누구든지 잘못이 있다면, 그리고 그 잘못을 상대방도 알아차렸다면 사과는 바로바로.
하지만 덕분에 강희 황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가 섞이지 않았고 같은 성별을 지녔지만 어머니는 어머니다. 세상 어떤
어머니가 자식에게 이리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한단 말인가! 모자관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어른이
아이에게 이런 식의 사과를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마마마, 그러지 마세요."
어쩔 줄 몰라하는 황자의 태도에 장시언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사과를 받아주면 그만하겠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황자?"
강희 황자는 얼떨결에 '예, 예. 알겠습니다. 그만하십시오, 어마마마.' 하고 말을 했다. 그제야 장시언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평소 같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미미한 미소가 아니었다.
"아, 다행이다. 솔직히 경멸당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예? 경멸이요? 소자가 어마마마를 말입니까?"
"예."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경멸이라니요."
강희 황자는 큰일 날 소리를 들은 아이처럼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장시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지만 여전히 이해는 안 되지요?' 하고 물었다. 강희 황자는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글동글한
머리통이 꼭 방송이 같다. 아, 얘 귀엽네.장시언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세요. 굳이 이해할 필요 없습니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장시언의 말에 강희황자는 '어... 하지만...'하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장시언은 아이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영원히 이해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려는 것이겠지.
"나와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만 이해하면 되지요."
"...."
"근데........ 이건 그냥 내 생각입니다. 그러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세요."
장시언은 씨익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강희 황자는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제 동지로군요, 황자와 나는."
"동...지요...?"
"내 정체를 알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동지지요. 장시언은 그렇게 말을 하며 강희 황자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저..... 어마마마.' 하고
말을 꺼냈다. '아바마마께 계속 숨기실 생각이십니까? 장시언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예'하고 대답했다. 아이의 눈이 놀라
커진다.
"어째서요?"
"예? 아, 이제와 폐하의 관심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ㅡ 딱히 숨긴다기보다는 솔직히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군요. 뜬금없이 사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이대로 있는 것이지요. 시기적절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헌데, 본모습을 보여주기에 언제가 적절한지
알지 못하니 이대로 쭉 가는 것이에요."
사실이 그렇다. 이제 황제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폐서인을 미친듯이 갈망하지는 않는다.지금까지 폐하와 배를
맞춘것이 얼마며, 마음을.... 마음을.... 그, 뭐 아무튼, .....한 것이 얼마인데.
".....이것도 이해는 안 되지요?"
"예, 하지만..."
강희 황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살짝 미소 지으며 '사람은 다 다른 것이니까요. 다른 것이 틀린것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어라? 장시언은 황자의 말에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정말이지 영민하고
순수했다.아, 얘 진짜 귀엽잖아?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밤송이 같은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갑작스러운 손길에 '어...어...'
하고 당황하던 강희 황자는 웃는 장시언을 보고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황자께서는 처소로 돌아가신 것입니까?"
윤상궁은 괜히 아쉬운 척을 하며 새로 가져온 차와 찻잔을 내려두었다. 장시언은 그런 윤상궁을 뾰로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윤사웅, 이 배신자! 어떻게 동지를 버리고 갈 수가 있어?"
"동지라니요. 전 그저 상전을 모시는 상궁 나부랭이일 뿐입니다. 드시라고 차를 새로 내오는 것이 제가 할 일이지요."
역시 만만치 않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고, 장시언 뒷바라지 삼 년이면 천하제일 능구렁이가 된다더니, 장시언을
모신지가 벌써 이십 년이 넘은 윤상궁은 능구렁이일 뿐만 아니라 영악한 여우요, 너구리였다.
"쳇, 차를 준비한다더니 녹차밭에 가서 잎이라도 따왔나 보지?"
이리 한참만에 돌아온 것을 보면. 장시언은 입술을 툭 내밀고 투덜거렸다. 윤상궁은 호호호~ 하고 웃으며 차를 따랐다.
"어찌 아셨습니까? 너무 따서 지문이 다 없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무서워, 윤상궁. 점점 날 닮아가는 것 같아."
"매일 보니 닮아가는 것이 당연하지요. 차 드십시오."
장시언은 하긴 그럴지도, 하고 생각하며 호로록ㅡ 차를 마셨다. 놀랐던 마음은 이미 다 진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차를 마시니
더 마음이 평온해진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응? 뭐?"
윤상궁의 말을 놓쳤다.
"뭐라고 했어?"
"강희황자께 뭐라고 하셨냐구요."
"아~ 난 또 뭐라고. 그냥 다 말했어. 이판사판이다 하고 싹 다 말을 했지."
"....그랬더니요?"
"그랬더니? 음, 뭐 그냥 알았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폐하께 말씀을 드리겠다고 하지는 않고요?"
"응. 그런 말 전혀 없던데. 궁내 새로운 동지가 생긴거지 뭐."
"새로운 동지...요..?"
"후후... 강희 황자는 날 너무 좋아하거든. 아, 정말 이놈에 인기..."
아이고, 그러셔요?윤상궁은 웃으며 어쩔 수 없네, 하고 살랑살랑 고개를 젓는 상전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기애가
넘치는 상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혹여 강희 황자께서 태자가 되고 싶다 하시면 어쩌실 겁니까? 폐하께 청을ㅡ"
"안드려. 아니, 그 전에ㅡ"
장시언은 윤상궁이 하려던 말을 끊고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강희 황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거야."
"어찌 그렇게 단언하십니까?"
"그럴 아이가 아니니까. 그 아이는 어머니를 원했지 자신을 태자로 만들어줄 사람을 원한것이 아니야. 혹여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게 잘 보여 태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를 잃게 된다는 것도 잘 알지. 아주 영민한 아이거든, 강희황자는."
장시언은 자기도 모르게 팔불출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강희 황자의 자랑을 해버렸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라 딱히 실수했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호오~ 요것 봐라? 윤상궁은 매의 눈으로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응."
"그렇군요. 뭐, 마마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윤상궁은 속으로 웃으며 점차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을 기분좋게 받아들였다. 조금씩 황후로서의 삶에
적응을 하고 있는 상전을 보니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진작 이러셨으면 얼마나 좋아. 그녀는 자신도
차를 따라 호로록ㅡ 마시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장시언은 그런 윤상궁을 왜 저러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
강희 황자는 매일 황후궁을 들락거렸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헌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얼굴엔 상처가 있었다. 입술이 터진
상처였는데 심하진 않았지만 제법 아파 보이긴 했다.
"어쩌다가 다친 것입니까?"
장시언은 곱던 아이의 얼굴에 생긴 상처를 마뜩잖은 눈으로 살펴보며 물었다. 요리조리 구석구석 살피는 장시언의 관심이
좋은지 강희 황자는 환하게 웃으며 별것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저 어제 처소로 돌아가는 길에 넘어진 것뿐이라고. 장시언은
순간 멈칫했지만 '그렇습니까? 다음부턴 조심하세요.' 라고 자연스럽게 말을 했다.성정이 게으리긴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노는 것은 누구 못지않게 좋아했던 장시언이다. 뛰어가다가 뒹굴고 상처가 생기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강희 황자의 상처는
넘어져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희 황자 스스로가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을 굳이 파헤쳐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이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점심은 먹었습니까?"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음, 그럼 함께 먹을까요?"
"예?"
"함께 먹자고요. 혹 싫으십니까?"
"아니요! 아, 저 헌데..."
강희 황자는 함께 먹고 싶다고 강한 의지를 드러내더니 이내 우물쭈물 말을 늘였다.
"......같이 먹되 상은 따로 받자는 말씀이시지요?"
강시언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거면 각자 먹지 뭐하러 같이 먹자고 말을 하겠나.
"아닙니다. 겸상을 하자는 의미였습니다."
강희 황자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지금 들은 말이 진심인지 가늠하는 것이 보인다.그야 그럴테지.신국의 황실은 절대
겸상을 하지 않았다. 황족이 모였을 때도 겸상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딱 제 앞에 차려진 것만 먹었다. 아이는 지금까지 그
누구와도 겸상을 해본 일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싫습니까, 황자?"
"아니요. 싫은 것이 아니오라....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강희 황자는 잘못된 짓을 하려는 아이처럼 약간은 불안해 보이고, 약간은 기대에 차있는 듯 보였다.아이고. 장시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이는 융동성이 조금 없었다.
"안 될 것도 없지요. 다들 각자 상을 받고는 있지만 반드시 그리해야 한다고 예법 책에 적혀있는 것은 아니질 않습니까."
"아...."
예, 맞습니다. 강희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시언은 바로 인정을 하는 아이를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고는 윤상궁을
불렀다. 윤상궁은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찾아계시옵니까."
"황자와 수라를 들고자 한다. 겸상을 할 것이니 그리 알고 차리라 하게."
".....예"
윤상궁은 종종 걸음으로 물러나 몸을 틀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아이 앞이라고 근엄한 척 말하는 상전이 약간
우스웠다.
"예에~? 이것도 해본 적이 없다고요?"
"예.... 한번도 없습니다."
오마나, 얘 어쩌면 좋냐.... 장시언은 자기도 모르게 쯧쯧, 혀를 차고 안쓰러운 눈빛으로 강희 황자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안쓰러웠나 하면 먹던 당과도 내려놓을 정도였다. 항상 무얼 하며 보내느냐 물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단다. 놀땐 무얼
하느냐 물었다. 안 논단다. 제기차기는 해 보았냐고 물었다. 안 해봤단다. 연 날리기는 해 보았냐고 물었다. 그것도 못
해봤단다. 비석치기는 해보았냐고 물었다. 그게 뭐냐고 되묻는다........ 경악스러웠다. 황자들은 다 이런 것인가.
"하루 종일 공부만 하십니까, 황자?"
"예? 예... 아, 금동이랑 놀기도 합니다..."
강희 황자는 말을 하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빛낸다.
"아! 소자, 그림도 그립니다!"
".....그림이요?"
"예! 매일매일 난을 칩니다!"
컥! 노인네냐?! 하지만 그 말이 장시언을 더 놀라게 하였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난을 칠 수는 있겠지만 여덟살짜리가 날마다
방구석에서 난을 치다니, 그것을 놀이라고 하다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저 표정.... 이제 됐다, 하는 저 뿌듯해하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마마마?"
장시언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황자."
"예, 어마마마."
"내가 제기를 좀 찹니다."
"예?"
"왕년에 좀 찼습니다, 제기를."
좀 찬 정도가 아니다. 별명이 헐랭이의 제왕이었다. 동네 아이들의 영웅으로 군림했던 헐랭이의 제왕. 강희 황자는 뜬금없는
제기 얘기에 그냥 '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시언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할말을 이어서 했다.
"나중에 알려주겠습니다."
"....제기차기를요?"
"예. 제기차기를요."
장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영광인 줄 알아라.넌 헐랭이 제왕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제자다.강희 황자는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정말이십니까?"
"예, 조만간 알려주겠습니다. 밖에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 안에서요."
"네! 네, 어마마마."
강희 황자는 제기차기를 알려준다는 약속에 뛸듯이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니 장시언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바람이 세지면 연 날리기도 해보지요."
"연 날리기요?"
"내 자랑 같아서 말하기 뭐하지만..."
그러면서 다 말한다.
"사실 내가 연을 좀 만듭니다. 날리는 것도 수준급이지요. 우후후후...."
그 누구보다 잡다한 것에 능한 장시언이다. 연 만드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강희 황자는 존경심에 눈을 빛냈다.
그럴수록 장시언의 어깨는 으쓱으쓱, 콧대는 높아져만 갔다. 뭐 이정도 쯤이야. 아이가 아이답게 크는 것도 공부라고. 그
나름의 확고한 신념이었다.생각해보면, 아이가 어릴 때 해봐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하고, 나중에 커서 그걸 하겠다고 설치면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없을 것이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장시언은 제 생각에 취해 오늘 밤은 제기 좀 만들어 놔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다.
*********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에게 입을 맞추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질척이는 두 개의 혀가 얽혔다. 숨이 가빠왔다. 상대는
집요하게 장시언의 입술을 따라왔다. 하지만, 장시언이 위, 상대는 아래.장시언은 상대를 힘으로 누르고 입을 맞추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상대는 그에게 몸을 맡긴 채 누워 있었다. 정욕에 찬 숨을 그대로 뱉어내며 손으로 장시언의 머리카락을
헤집는다. 장시언은 별생각 없이 그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잠시 후, 전세가 역전되었다. 분명 처음에는 장시언이 우위에
있었는데 어느새 그 상대의 손길이 장시언을 조종하고 있었다.
장시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뭔가 이상했다. 그 순간, 상대가 장시언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위치가
바뀌었다. 장시언이 아래 깔려버렸다. 그제야 장시언은 상대와 자신의 압도적인 체격 차이를 인지했다.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상대는 장시언에게 입을 맞추며 다리를 잡아 벌렸다. 악, 소리도 내기 전에 상대가 장시언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오히려ㅡ, 아주 좋았다. 아! 더, 더. 거기! 장시언은 상대에게 매달리며 애원했다. 좋냐고 물어보는 상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응, 좋아. 좋아.부끄러움 따윈 이미 없었다. 오직 쾌감만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뜨거움이 안에서 확 퍼져나가고
희미했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상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악! 뭐야, 이건 대체!!!
"헉!"
꿈에서 깨어난 장시언은 누운 상태로 눈을 깜박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걷어낸 그는 완전히 서있는 자신의 중심을
보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돼..."
이제 나는 정말 욕정의 노예가 된 것인가. 조금만 늦었으면 몽정을 할 뻔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몽정이라니, 이 나이에
몽정이라니! 성적으로 건강하다고 자부하긴 하지만 그런 요상스러운 꿈을 꾸고 몽정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ㅡ
"아악! 왜! 왜 꿈에서까지 내가 아래인 거야! 대체 왜!!"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꿈에서 마지막으로 황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떠오른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깔림의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 꿈에서까지 황제의 아래에서 아흥거렸다는 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장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중얼 아무 노래를 부르며 왔다갔다 했다. 여전히 흥분 상태인 중심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아우인 영한이 알려준
방법인데 잘 들을지 의문이다. 의문은 곧 풀렸다. 다행히 흥분은 점차 잦아들었다. 곰 같은 아우가 제법 쓸만한 지식을 전수해
줬구나.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몰려오는 씁쓸함에 어깨를 축 늘였다. 내가 어쩌다가...장시언은 습관적으로 어흐흑ㅡ 우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쳇'하며 혀를 찼다.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윤상궁이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안에서 이 정도로 소란을 피우면 멀리 있는 다른 궁녀들은 몰라도 바로 알아차리고 들어올텐데.
"윤상궁...윤상궁!"
부름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이때쯤이면 깨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장시언은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겼다.인시쯤 된것 같은데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윤상궁은 커녕 궁녀들도 없었다. 아직
꿈에서 덜 깬 건가 싶어 볼을 꼬집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볼만 아팠다. 희한하다 싶어 몇 걸음을 더 움직였다. 그때 마침,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윤상궁의 모습이 보였다. 잔뜩 굳은 얼굴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사람이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른다. 저벅저벅 가까이 다가가도 알아채질 못할 정도였다.
"윤상궁"
"예..... 예?"
윤상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장시언을 보고 돌처럼 띵 굳어버렸다. 뭐지 이 반응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앞에서 손을 휘휘 움직였다.
"윤상궁? 윤상궁?"
"....이 이른 시간에 왜 나와 계십니까?"
뭐라 말할까. 용솟음치는 욕망 때문에 깨어났다고?
"....그냥 깼어."
의심을 살 만한 잠깐의 침묵이 있었지만 다행이 윤상궁은 그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듯 보였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야?"
"...그냥 산보를 좀 다녀왔습니다."
뭔가있다. 윤상궁은 놓쳤지만 장시언은 놓치지 않았다. 바로 제가 방금 전에 했던 그 뜸들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살펴보았다. 그의 눈빛에 윤상궁은 움찔하다가 곧 왜 그러냐는 듯 그눈을 마주했다....아닌가? 잘못짚었나, 하고 '아니야,
아무것도.'라고 하며 다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얼마 안가 다시 휙ㅡ 뒤돌아보며 윤상궁을 한번더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변화가 없었다...정말 아무것도 아닌가?
"궁녀들은 다 어딜 간거야?"
평소에도 궁녀들이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안 보인 적은 없었다. 몽땅 다 자러 갔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낸
윤상궁은 '계속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뭐?"
"폐하께서 순행을 가신 날부터는 마마께서 주무실때 궁녀들이 지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무사들이 궁밖에 서있지요."
"..왜?"
"글쎄요.."
폐하의 명이었다. 무슨 마음으로 그런 명을 내리신 건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장시언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그저
모른척으로 일관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게야..."
도통 속을 가늠할수 없다며 투덜거렸다. 무슨 생각은요. 자리 비운 사이에 혹여 궁녀랑 눈이라도 맞을까 그런것이지요.
무사들은 비빈들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염려되어 보초를 서게 한 것이고요. 윤상궁은 그 답을 알려주었다. 물론 속으로
말한거라 들리지 않았지만. 장시언을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윤상궁의 입장에서 보면, 게으른 것에 버금갈 만큼 연애에
무지하고 둔한 그가 궁녀와 놀아나다니,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었지만 황제에게는 제법 심각한 문제였던 모양이다.
순행에 데려가고 싶긴 하지만 그가 원체 몸이 약하고 걸핏하면 쓰러지니ㅡ물론 연기였지만ㅡ어쩔수 없이 궁에 남겨두고
가기로 했지만 불안함이 가시질 않아 그런것이 분명했다.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날이 오늘이던가?"
"..글쎄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글쎄요는 또 뭔가.
"뭐야, 그 애매한 답은?"
"..아닙니다, 오늘이 맞습니다."
"오늘 늦게 오시겠지?"
"..예, 아마도요."
장시언은 오늘 정말 윤상궁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뭔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보인 탓이다.
"윤상궁."
"예, 마마."
"뭔가 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상해. 아무래도 이상해. 분명 뭔가가 있어."
"있긴 뭐가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윤상궁은 얼굴에 철갑을 쓰고 그렇게 말했지만 틀림없이 숨기는게 있다고 장시언은 확신을 했다.
"윤상궁"
"이것들은 계속 이렇게 두실 건가요?"
윤상궁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제 위치에서 벗어난 탁자와 의자 침상등을 가리켰다. 지난밤, 강희 황자가 돌아가고 난 후,
제기를 만들기 시작한 장시언이 수십개의 제기를 만들어 놓고는 한번 차봐야겠다며 가구들을 모두다 벽으로 밀어놓았다.
간만에 하니까 재미있다며 한참을 신나게 차다가 그냥 잠을 자버렸다. 덕분에 벽에는 가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가운데는
휑해서 심히 보기 이상했다. 장시언은 좀 더 캐물으려 하다가 안을 휙 살펴보고는 '원상태로 돌려놔야지' 하고말했다.
"폐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어서 돌려놔야겠습니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탁자를 끌고 원위치로 가져온다. 잠시 그것을 보고 있다가 어쩔수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다가갔다.
"내가 할테니 나와!"
윤상궁은 '그래 주시겠습니까?' 하고 웃으며 옆으로 비켰다.장시언은 한 손으로 어렵지 않게 탁자를 끌어와 원래 자리에
놔두었다. 순식간이었다.
황제는 그날 늦은 시간이 되어서 황후궁에 찾아왔다. 길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엄연히 순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인데 지나치게
말끔해 보였다. 피곤한 기색도 전혀 없었다. 흠, 그래도 간만이니 내가 선심 한 번 베풀어주마.
"폐하~."
장시언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황제에게 달려갔다. 너른 품에 안겨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짓이었지만
떨어졌다 다시 만나는 것이니 이정도는 해줄법도 하지, 라는 관대한 생각을 한 것이다. 황제가 허리에 팔을 감아 힘을 주었다.
몸이 더 가깝게 밀착되고 마른 몸이 위로 올라온다. 장시언은 숨을 들이키며 다가오는 황제의 입술을 맞이했다. 그래, 오늘은
회포나 좀 풀어보자!
남에게 말하기 부끄럽지만 욕구불만인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을 기다려 온게 사실이다. 아직
한창때인데 당연하지 않겠나. 혀가 얽히고 달뜬 호흡소리와 질척이는 소리가 침실을 매웠다. 황제는 거침없이 장시언의
입안을 유린했다. 능수능란한 혀놀림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황제의 손은 어느새 장시언의 등을 쓸며 올라오고 있었다.
손이 어찌나 빠른지 옷은 이미 반쯤 풀어헤쳐져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아, 좋아. 그래, 조금만 더.서서히 몸에 열이
오른다. 황제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오늘은 피곤하구나."
황제가 몸을 떼어내고 귓가에 속삭였다. 장시언은 응? 하고 눈을 깜박였다. 순간 환청을 들은줄 알았다. 뭐라? 피곤? 황제 얘
지금 피곤하다고 한 거야?
"...예?"
"순행을 마치고 와서 그런지 피곤하다.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주고는 장시언의 옷매무새도 다듬어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타오르려 기다리던 불씨에 한줌
모래를 확 집어던진 황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것이냐?
"..아니요, 아닙니다."
정녕 네 죄를 모른단 말이냐! 이 뒷간 갔다 안 닦고 그냥 나온 듯한 찜찜한 기분을 모른단 말이냐?!
"그럼 이만 자자."
아니야, 아닐거야. 이래놓고 안 하다니, 거짓말이지? 농담한 거지? 하지만, 그러한 현실 부정도 오래가지 못했다. 황제는
정말 잠만 잤다. 정시언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고 속 편하게 숙면을 취했다. 기가 막혔다. 미칠것만 같았다. 펄떡거리는,
타지 못한 잔재처럼 남아있는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바로 옆에서 자고 있어서 노래를 불러 잠재울수도 없고.
그야말로 처음 느껴보는 생지옥이었다.
"마마 무슨일이 있으셨습니까?
"뭐?"
"얼굴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어제 폐하께...많이 시달리셨습니까?"
시달려? 하! 시달리긴 개뿔! 제발좀 시달리고 싶다!! 그는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황제가 일어나는 기척에 황급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황제는 입을 맞추고는 일어나 기지개를 펴며 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 몸이 개운할만도
하겠지! 그렇게 오지게 쳐잤는데 당연히 그럴테지!! 다시 또 화가 울컥울컥.
"마마?"
"절대 잊지 않을거야"
"예?"
"해달라고 애원할때까지 절대 안할거라고!"
뭘요? 윤상궁은 앞, 뒷말을 다 잘라먹고 대뜸 화를 내는 그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건지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저럴땐 그냥 두는게 최고다, 라고 생각했다.
************
"오~제법 하는데요?"
"이제 좀 알것 같습니다."
강희황자는 발로 차올린 제기를 손으로 잡으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아이는 배움의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그나저나...
"오늘도 넘어진 모양이군요?"
늘어난 상처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의 물음에 황자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더 심하게 넘어진것 같습니다."
"..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겁니까?"
"예, 뭐.."
어허! 눈 똑바로 보고 말 못할까! 라고 말하고싶다. 어쩜 이렇게 거짓말도 못하는지.
"이리 가까이 와보세요."
황자는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이고 걸어왔다.
"앉으세요."
많이도 두들겨 맞았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은 울컥울컥 화가 치민다.이 짜식들이! 왜 우리 착한 밤송이를 때리고 난리야!!
"돌부리가 있는곳은 조심해야지요. 아니면 돌부리를 뽑아버리던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목소리. 은연중에 진심이 나와 버렸다. 황자는 눈을 댕글하게 뜨고 장시언을 바라보다가 이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소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어마마마."
아이는 그가 눈치 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자신이 맞았다거나 때린 이가 누구라거나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은근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앞으로는 넘어지지 마세요. 상처가 있는것이 보기 싫습니다."
"소자가 걱정되십니까?"
"당연히 걱정이 되지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황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얼레? 뭐가 좋다고 그리 웃냐? 장시언은 그 모습이 우스워 픽
웃음을 흘리며 아이의 볼을 툭 건드렸다. 황자는 그래도 마냥 좋은지 계속 웃기만 했다.
밤. 드디어 밤이 왔다. 설욕의 시간이다. 장시언은 윤상궁의 앞에서 팽그르르 돌다가 딱 멈추었다.
"어때?"
뭐가 말입니까? 윤상궁은 속이 비칠듯 말듯한 하늘하늘한 침의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대체 뭐라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 침의는 대제 뭡니까?"
저런 야한 침의를 어디서, 누구를 통해 구했나 싶다.
"으흐흐흐~ 전에 영한이 녀석이 왔을때 주고 갔지. 입을 일 절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특별하니까..."
"특별이요?"
"우후후후..."
오늘의 설욕의 밤이니까! 황제의 혼을 쏙 빼놓고 슬쩍 빠져 줄테다. 혼자 피 끊는 밤을 견뎌보라지!장시언은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윤상궁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상전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보세요, 마마'라고 말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에휴~ 무사 평안하시길. 가능성이 없는 바람인 것 같다만.
황제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장시언은 눈을 뜨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누워 숨만 쉬었다. 한 마디로 자는 척을 하는
중이었다. 살짝 위로 올라간 치맛자락 때문에 종아리와 발목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장시언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나는 다알고 있다. 지금 심장이 펄떡거리지? 피가 끊어 죽을 것같지? 어서 손을 대. 손을 대라고!
황제는 장시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드러난 다리를 쓸었다.오오! 걸려들었어!!승리를 확신했다. 이제 눈을 뜨고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밀칠 일만 남아있었다.
하나, 둘, 세ㅡ 하지만 그 순간, 올라갔던 치맛자락이 발목을 스쳤고 이불이 덮어졌다. 셋 하면 반짝 눈을 뜨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응? 이건 뭐냐?황제는 그대로 장시언의 곁에 와 누우며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뭐냐? 이 황당한 경우는? 폐하! 너 고자가 된거냐? 발기한 그의 중심이 그대로 다 느껴지는데, 고자가 됐을리 없는데 이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설욕은 커녕 역으로 당한 것만 같은 이기분은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갑자기 일어나 '네가
그러고도 사내냐? 차려진 밥상을 왜 모른척해! 사내라면 짐승처럼 달려들라고!'하며 소리칠수도 없지 않나! 장시언은 점점
초조해졌다. 황제는 인내심도 황제급이었다.
타인인 자신이 느끼기에도 중심이 곧 터질 것처럼 팽팽해졌는데 결정적으로 손을 뻗지 않는다.존경심마저 들 정도다.장시언은
괜히 '으음...'하며 몸을 뒤척여 황제를 자극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다.이래도냐? 이래도?밀착, 더밀착. 설욕작전은 이미
저만치 팽개쳐졌다. 황제를 거부하는 것은 둘째 치고 오기가 생긴다. 그를 동하게 만들고야 말겠다는.그리고 마침내 반응이
왔다. 황제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장시언의 귓바퀴를 핥았다. 뭔가 그전에 큭, 하고 웃는 듯한 소리가 들린것도 같은데 그건
신경 쓸새가 없었다.황제가 귀를 물자 저릿저릿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장시언은 스르륵 눈을 떠 황제를 돌아보았다. 마치
난 지금 자다가 깼다라고 호소하는 듯한 멍한 눈빛으로.황제는 장시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옷을 벗고 달려들었다. 손에
칼날을 달았는지 옷을 푹푹 잘 찢는다.그래! 이거다, 이거! 회포좀 풀어보자!강시언은 어느새 황제의 움직임에 열렬히
호응하며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긴밤이 될 조짐이 보였다.
*****
"으흐응~ 흐으응~~"
엎드려 누워 팔랑팔랑 서책을 넘기며 간드러지게 콧노래를 부르는 상전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기분이 좋아보였다. 간밤에
예쁨 꽤나 받았는지 얼굴이 아주 반질반질하다.
"윤상궁"
"예?"
"나 주전부리 좀 가져다줘. 입이 심심해."
"..예"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오히려 잘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윤상궁은 직접 수라간으로 걸음을 하며
혈색 좋은 상전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아니지. 알면 또 한바탕 난리를 치실게 분명한데.
비겁자, 배신자 타령을 해가며...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뚝 걸음을 멈추었다. 펼쳐질 일들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역시 무덤까지 안고 가야겠다. 그때의 일은 아예 잊어버리기로하지 않았나.그래, 맞아. 윤상궁은 굳은 결심을 안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
보초 서는 이 하나 없는 한적한 곳.나무가 우거진 이곳은 사람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 아니었다. 야심한 시각이라 사방이
어두웠다.궁녀는 주변을 힐끗거리며 둘러보고는 여인에게 흰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여인은 그 종이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머리카락이었다.
"틀림없으렸다?"
"예,마마. 틀림없사옵니다."
여인은 그제야 제 품에 봉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소맷자락에서 금붙이를 꺼내 궁녀에게 건네주었다.
"수고했다. 계속 이리만 하면 내 더 값진 것을 네게 쥐여주마."
언제 그랬냐는 듯 나긋나긋한 목소리.궁녀는 금붙이를 꼭 쥐며 '예, 예'하고 연신 몸을 숙였다.
"맡겨만주십시오. 뭐든 다 하겠습니다."
어리것은것. 여인은 그런 궁녀에게 비소를 흘리며 몸을 틀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강희황자가 걸음을 끊은 지 딱 일주일이 되었다. 황후궁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던 아이가 내일 또
찾아뵙겠다고 말을 한 뒤 감감무소식이다. 첫날은 무슨 일이 있나 싶었고, 둘째 날은 어디가 아픈건가 싶었다. 셋째 날이
되던날, 결국 윤 상궁에게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라 하였고, 알아본바로는 아이는 딱히 아픈곳이 없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황자의 처소에 찾아가려 하였으나 그것 또한 쉬운일이 아니었다. 황후가 직접 걸음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던 탓이다. 강시언은 시일이 지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늘도 소식이 없어?"
"예, 마마."
매일 같은 물음, 같은 대답. 묻는 장시언도 대답을 하는 윤상궁도 씁쓸한것은 마찬가지였다.
"마마, 너무 상심하지 마시..."
"상궁을 데려와 줘."
"예?"
"황자를 보살핀다는 상궁 말이야. 아무래도 좀 만나봐야겠어."
"아무도 모르게 데리고 와야해."
"물론이지요, 마마."
장시언의 당부에 윤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윤상궁이 황자의 보모상궁을 데리고 온것은 노을이 지는 오후 느지막이
되어서였다.
"그대가 강희 황자를 갓난아일때부터 봉양했다지?"
"그러하옵니다, 황후마마."
"고생이 많았겠군. 아이를 키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황공하신 말씀이옵니다. 고생이라니요."
상궁은 몸 둘바를 몰라 하며 대답했다.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황손을 키운 것은 고생이라 할 수 있으랴. 장시언은
흐뭇하게 '그런가?' 하고 대답을 하고는 제 앞에 놓인 찾잖을 들어올렸다.
"차 좀들게."
상궁은 여전히 황송해했다. 그도 그럴것이 상궁이 내명부의 수장인 황후와 마주보고 차를 마시다니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혹 국화차를 싫어하나?"
"예? 아, 아니옵니다."
"허면, 왜 안마시지?"
"마시겠사옵니다."
상궁은 손을 덜덜 떨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석양의 붉은빛이 창을 통해 들어온다. 조용하고 평온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주기 위한 시간이 지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자는 요즘 무얼 하며 지내나?"
"..평소처럼 지내십니다."
"평소처럼 이라면?"
"책을 보시고, 그림을 그리시며, 그리 지내십니다."
"제기도 차던가?"
"....예..."
"그렇군."
"............."
상궁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황후는 그녀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그런 인상이 아니었다. 아니, 분명 생김새는 언제나처럼
여리고 서늘한 듯 보였지만 뭔가가 달랐다.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위엄이 느껴졌다.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강희황자에게 전해줄 것이 있어서네."
"전해줄 것이라 하오시면...?"
장시언은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찰을 내밀었다.
"잘 전해주게.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꼐."
"무슨 좋은 일이 있나?"
황제의 물음에 장시언은 말없이 술을 따라주며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황제는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따라주는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안주까지 입가에 대주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기분 좋은 일이 있긴 한 모양이군. 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장시언은 힐끗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올 때가 되었는데...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하고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왔구나!
"어마마마!"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린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윽, 양심에 가책이...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황제였다.
"이 시간에 예까진 어인 일이냐? 게다가 그 꼴은 뭐고."
그야 내가 다 죽어간다고 생각할 테니까. 장시언은 속으로 생각하며 황자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훌쩍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옥체 미령하시다고... 마지막이시라고..."
섧게도 운다. 아, 가슴이 지끈지끈. 장시언은 위로해 주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프다니? 누가?
라고 말하는 눈빛. 그러고 보니, 아이가 찾아올것만 생각하느라 황제를 미쳐 신경쓰지 못했다. 함께 있으면 아팠다는 거짓말로
아이를 구슬릴 수가 없는데! 장시언은 '음..그것이..'하고 말을 끌었다.악! 뭐라 한다지? 뭐라고 해야할지 난감했다.
"황자, 그러니까 그것은..."
"어마마마는 네 걱정으로 몸져누워 있다 오늘에야 겨우 일어났다."
응?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장시언은 눈을 깜박거렸다. 뜻밖의 구세주였다.오! 이 적절한 추임새라니! 근데 왜 도와주지?
"내 분명 얘기했거늘, 계속 찾아뵙지 않았다지?"
"소, 소자가 잘못하였습니다."
"대체 이유가 뭐냐?"
"......"
"어찌 대답을 못해!!"
깜짝이야! 황제의 호통에 아이가 움찔하며 놀랐다. 아이 뿐만 아니라 장시언도 움찔했다. 밤송이 또 울겠다! 이 목청 좋은
폐하야!! 장시언은 자신이 나설 차례임을 알았다.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황자가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무슨 소리. 어머니를 아프게 한 불효자는 따끔하게 혼을 낼 필요가 있다."
"아... 저는 이제 몸도 괜찮고..."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간다. 몸이 항상 괜찮았던 것은 황제도 아는 사실이다. 장시언은 황제의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일을 벌인 것은 그였지만 판을 크게 만든 것은 황제다. 이 상황을 좀 수습해 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괜찮긴. 지난밤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안을 때마다 뼈가 부딪혀서 걱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ㅡ크헉! 애 앞에서 할 소리냐, 그게? 장시언은 눈이 휘둥그레져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이 상황을 굉장히 재미있어하는
듯 보였다. 재미있냐? 이게 재밌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하면서 황자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황자는 당황하는 기색이 별로 없었다.
"정말이십니까? 소자 때문에 옥체가 상하신 것입니까?"
"예?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흐윽, 어마마마..."
악! 또 운다!! 쌍으로 왜 이러냐 대체!!!
"저기..울지 마세요."
"흑, 흑흑..."
달래는 것이 어설퍼서 그런지 황자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하게 울었다. 그리도 어른스럽던 아이가 이렇게
울다니 정말 많이 걱정을 한 모양이다. 장시언은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라 하다가 눈빛으로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러든지 말든지 팔자 좋게 술만 마셨다. 울화통이 터졌다. 그러고도 네가 아버지냐!!
"화, 황자... 울지 마세요. 난 괜찮습니다."
"소, 소자때문에..... 소자가 어마마마를 걱정시켜서...."
밤송이! 너는 나의 본성을 알고 있지 않더냐!! 너 부르려고 수 쓴거다!! 다 거짓부렁이라고!!!!에잇ㅡ
"그게 아닙니다!!"
참다 못한 장시언은 결국 폭발했다.항상 조근조근 말을 하는 장시언이 언성을 높이자 아이는 물론이고 황제까지 순간
멈칫했다.윤상궁이 들어와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었어도 이보다 더 싸하지는 않으리라.
"............"
"............"
"............"
"아...저기 그러니까, 황자 때문이 아니니 울지 마세요."
"하오나...."
"후... 그리 울면 이 어미가 마음이 더 무겁지 않습니까..."
아..... 일쳤다. 일을 쳐도 제대로 크게 쳤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하다니...장시언은 순간 당황했다. 어마마마라고 부르라고
허락하긴 했지만 이건 그야말로 '내가 네 어미다.' 라고 말한거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황자는 슥슥ㅡ
눈물을 닦아내고 예? 하며 눈을 빛냈다.이게 바로 울던 아이도 뚝 그치게 한다는 전설의 권법, '내가 네 에미다.'....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장시언은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황제는 쌍방 합의하에 진정한 모자관계로 거듭난 장시언과 황자를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정신적 공황상태.
"........."
"어마마마,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소자, 잘 듣지 못하였습니다."
뭣이! 거짓말하지마!! 밤송이!! 장시언은 속으로 뜨악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곧 평정을 되찾았다.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자답게 그냥 인정하자. 머리가 복잡할 땐,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것이 진리.
"울지마세요. 울면 이 어미가 많이 슬픕니다."
"예,예! 어마마마!"
황자는 언제 울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장시언 목에 팔을 감아 답삭 안겨왔다.얼씨구? 웃지마라. 폐하가 있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다만, 울다가 바로 웃으면 거기에 털 난다는 말도 모르냐. 그러면서도 아이가 귀여워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아무리
아들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황제라고 하나 그것을 오래보고 있을리 만무했다.
"시간이 늦었다. 이만 돌아가거라."
황자는 못 들은척,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는 더 기다리지 않고 장시언에게서 아들을 떼어내 번쩍 들어올렸다. 아이가 싫다고
바동거려도 개의치 않았다. 문을 열어 그대로 바닥에 내려준다.
"아바마마...."
"네 어머니와 나는 이제부터 할 일이 아주 많다. 특히 몸으로."
"....?"
"이만 가거라."
장시언은 뒤에서 끄악~! 하고 무언의 절규를 했다. 네 얼굴은 철면피냐? 애한테 무슨 소리야!!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다.
다행이 아이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하는 듯했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몸으로요?'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제
아버지가 답을 해주지 않자 체념하고 '...예.' 하며 돌아갔다.그리고..... 문이 닫혔다.
찌걱찌걱하는 교접의 소리가 몸과 마음을 어지럽혔다. 색사에 능한 황제는 장시언을 이리 들쑤시고 저리 들쑤시며 금세
쾌락에 젖게 만들었다. 오늘도 숫총각 장시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헐떡거리고 아흥거리는 것뿐이었다.
"하아...흐읏..., 아! 아...!"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더운 날씨에 몸까지 뜨거워지니 당연했다. '조금...천천히...' 하고 말하며 머리 옆에 황제의
팔을 잡으려다가 손이 미끄러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필경 숨이 넘어가 죽고 말지.황제는 정확하게 장시언이 느끼는
지점만 자극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내벽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찰싹. 찰싹.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는 이미 퍽. 퍽. 거리는 정복욕에 찬 소리로 변했다. 황제는 장시언의 한쪽 다리를 들어다가
어깨에 걸친채 허리를 놀렸고, 그러다가 육식수처럼 그의 발목을 물어뜯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이성이 남아 있었으면
잡아먹힐 것 같다고 불안해했겠지만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은 그 아픔을 쾌감으로 탈바꿈시켰다. 더 이상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장시언은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의 중심은 이미 한계치에 도달했다. 황제가 움켜쥐고 사정을 하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다면 벌써 폭발했을 것이다.
"폐하...! 하, 할 것 같습...."
"..뭘?"
"아! 그, 그만...!"
"헉. 헉. 뭘 할 것 같지? 응?"
퍽ㅡ! 황제는 한계까지 벌어진 밀문으로 세게 고간을 박았다. 장시언이 무얼 요구하는지 뻔히 알면서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장시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아... 아흣....!'하며 눈물을 흘렸다. 지나친 자극이었다. 황제는 매번 거칠게 그를 안았지만 이
정도까지 밀어붙인 적은 없었다. 그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 조금만 더..."
"아... 아앗!"
움직임이 더 빨라진다. 장시언은 더 이상 그 움직임에 맞출수가 없었다. 그저 황제가 움직이는 대로 몸이 쓸려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할뿐.
"아! 아! 아아앗ㅡ!"
긴 신음과 함께 눈아핑 새하얗게 변했다.
"헉. 헉. 크윽ㅡ"
황제는 장시언의 몸 속 깊이 자신을 묻으며 강한 조임에 참지 못하고 그대로 파정했다. 황제의 손에서 자유로워진 장시언
역시 참지 못하고 파들파들 허리를 떨었다. 그러다 몸을 축 늘이고 잠이 들었다. 실신을 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역시 내....이 ...았어... .......가 네게....가 ....주리라 생각....,하지만 아직....'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불투명한 의식. 얼핏얼핏 들리는 목소리가 점점 사라져간다. 아무리 귀를 기울이려 해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뭐? 잘 안 들려... 뭐라고 하는거야?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안는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꽉 옥죈다. 이상하다.
답답할 법도 한데 그 느낌이 좋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이러지...? 하지만 끝내 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잡히지
않는 물음을 따라가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