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시탈 황후-2화 (2/8)
  • 제 2장

    궁은 평화로웠다. 별다른 일 없이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기에만. 장시언. 개인의 나날은 언제나

    폭풍우였다. 밤에는 황제와 거사를 치르고 낮에는 폐서인을 꿈꾸는 이중생활이 계속되었던 탓이다. 폐서인이 되는 지름길이

    투기라는 것을 안 장시언은 언제 투기를 부려 황제의 진노하는 얼굴을 볼까, 그 틈만 엿보고 있었다. 사실 투기 말고 장시언의

    마음에 들어오는 이도 폐서인으로 한발 앞서 갈수 있었지만 본인이 본인의 마음에 들어갈수는 없는지라 이것은 생각도 하질

    않았다. 방법은 오직 투기뿐이었다.

    아주 제대로 패악을 떨어 오만 정이 뚝 떨어지게 해주마. 장시언은 솔직히 약간은 갈등하던 마음을 다잡았다. 황제의 집착을

    알게 된 후론 멀리, 저 멀리 도망을 가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마음을 준 것도 아니고 신경을 써준 것도 아니었는데 황제의

    반응은 기함할 정도였다. 아무리 혼자 착각을 한 것이라지만 그래도 이건 좀 무섭다,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황제는

    다정한 연인이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또 밤기술에 능해 매번 극락 구경을 시켜주는 고마운 이였지만, 무서운건

    무서운 거였다.

    "윤상궁."

    "예, 마마."

    "오늘은 누가 온다 하였지?"

    "덕비이옵니다."

    현비, 숙비, 무비에 이어 오늘은 덕비. 아이고, 지겨워.....다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오다 보니 색다른 맛도 없었다.

    "덕비만 보면 이제 나머지 한 명이 남은 건가?"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자가 다섯 명이니 내일 또 한 명이 올 것 아니야."

    "....글쎄요, 나머지 한 명은 안 오지 않을까 싶은데..."

    "응? 안 오다니, 왜? 태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인가? 아니, 아니지. 이경우엔 이리 물어야지. 무슨 비인지, 빈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의 어미가 되고 싶은 욕심이 없는 이인가보지?"

    "그런 것이 아니오라....마마, 정말 관심을 끊고 사셨군요."

    "뭐?"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 황실 사정을 이리도 모르십니까?"

    "관심 가질 필요 없었잖아. 어차피 있으나 마나한 취급을 받고 있었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윤상궁은 푹 한숨을 쉬다가 '잘 들으십시오.' 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폐하께는 여섯 명의 비와 11명의 빈이 있습니다. 그중 원비를 제외한 다섯명의 비에게는 모두 아들이 있습니다. 현비, 숙비,

    무비, 덕비, 그리고 귀비지요. 헌데, 귀비는 황자를 낳으시고 별세하셨습니다."

    "저런.........허면 아이는?"

    "귀비를 모시던 상궁들의 손에 자랐습니다. 상궁들의 말에 의하면 무척 영민하다 하더군요."

    "나랑 같이 입궁했는데 어찌 그리 잘 알아?"

    "저야 듣고 다니는 것이 많질 않습니까."

    하긴. 듣고 보니 그렇다. 그나저나 영민하다고? 장시언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낳은 정만 정이 아니다. 기른정도 정이다.

    친부모는 아니라지만 상궁들은 분명 황자를 친자식처럼 키웠을 것이다. 그녀들에게서 나온 '영민하다' 라는 말은 고로

    신빙성이 없다. 지금까지 다녀간 비들의 말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훤히 보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다지 과장이 아닌 듯 합니다."

    "그래?"

    "예."

    ".......하지만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그래, 내가 지금 왜 관심을 두고 있는 거야? 나랑은 상관도 없는 일인데.장시언은 그래,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호로록ㅡ 차를 마시고 여유롭게 팔랑팔랑 서책을 넘기며 쓸데없는 관심을 거두었다.

    "이 아이를 좀 봐 주십시오, 마마. 어찌나 영특한지 벌써부터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난 아이 감별사가 아니다. 아이들은 모두 귀여웠지만 그 아이가 얼마나 뛰어난 아이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장시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덕비의 말을 듣기만 했다. 어차피 폐서인이 될 텐데ㅡ물론 그녀들은 이 원대한 계획을 모르지만ㅡ태자

    책봉에 입김을 넣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은 크나큰 실수를 하는것이다. 장시언은 무념무상의 상태에 빠져 흡사 눈을 뜨고

    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덕비의 눈에는 시름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화, 황후마마,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덕비는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태자에 어울리는지, 하고픈 말이 산더미같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괜히

    더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몸을 사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장시언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그래,

    얼른 가버려라. 오늘부로 끝이다. 자식 자랑의 향연을 듣는 것은.

    ".....그러시겠습니까? 나도 몸이 좋질 않아 이만 쉬려 합니다."

    "제가 눈치 없이 너무 오래 있었던 모양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알긴 아는구나. 눈치가 개밥이라는 것을.

    "아닙니다. 즐거웠습니다."

    "저...하오시면...꼭 좀 잘 생각해 주십시오, 마마."

    장시언은 덕비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미소로 일관하며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덕비는 장시언에게서 듣고자 하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리고 예를 취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장시언에게 남은 자유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곧 황제가 올 것이다. 장시언은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침상으로 가 벌러덩 누워버렸다. 어차피 황제가 오면 쓰는 것은 몸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시과 체력 보충이다.

    "윤상궁."

    장시언의 부름에 윤상궁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예, 마마."

    "보약은 달여 놓았나?"

    "예, 지금 가져올까요?"

    "응, 입가심할 것도 같이 가져다줘."

    윤상궁은 '알겠습니다.'하고 말하며 보약을 가지러 나갔다. 자기 몸 챙기는 것에 극진한 장시언은 처음 황제가 다녀간 바로

    다음 날, 윤상궁에게 보약을 지어오라고 말을 했다. 당장 황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힘에 부쳐서라기보다는 언제 몸이 축날지도

    모르니 미리미리 마셔두자, 하는 투철한 준비성 때문이다. 처음 보약을 좀 지어오라고 말을 했을 때, 윤상궁은 당황스러워

    하며 비빈들중 그렇게 본인이 나서서 보약을 챙겨 먹는 이는 단 한명도 없을 것이라 얘기했었다. 그때 장시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비빈들은 비빈들이고, 나는 나지. 난 소중하니까!'

    솔직히 지금이야 몸 상태도 최상이고, 힘도 좋다고 하지만 황제의 기절초풍할 정력에 언제 몸이 축날지 모르는것 아닌가.

    힘들게 폐서인이 되었는데 황제에게 시달린 후유증으로 골골거리며 산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느냐 이 말이다.장시언은 자신의

    생각에 격하게 동의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굴 표정은 아주 비장했다.그래, 난 소중해! 게다가 보약을 먹고 힘을 비축하는

    것은 모두 폐서인이 되는 그날을 위해 필요한 것이야! 우후후후....

    "마마, 웃지 마시고 이거나 드십시오."

    언제 왔는지 윤상궁이 사기그릇에 담긴 보약을 슥ㅡ 내민다. 장시언은 '응?'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보약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입에서 '캬아~'하는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에 좋은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덤비는 사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비록,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윽, 써!' 하며 입가심으로 가져온 떡을 조청에 절이듯이 푹 찍어

    먹었지만.

    *********

    한바탕 질펀하게 몸을 섞은 후엔 언제나 나른한 여운을 즐기는 순간이 찾아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거하게 일을

    치르겠지만 일단은 이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이 좋았다. 황제가 쉬지도 않고 정욕이 담긴 손길로 만져왔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사실은 조금 기분이 좋아서 본인이 생각해도 닭살이 돋는 달콤한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남색을 혐오한다던 황제는

    대체 언제 이런 밤기술을 연마했을까.

    "남자를 안은 것은 네가 처음인데ㅡ."

    흠칫. 장시언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라? 내가 지금 밖으로 말을 꺼냈던가?

    "이제와 말하지만 사실 조금 놀랍다."

    다행히 자신이 생각을 말로 한 것은 아닌 듯했다. 황제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깜짝 놀랐네.

    장시언은 안도했다. 그리고 사실 자기도 가장 궁금해하던 것이라서 황제에게 물었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남자와 비역질을 한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 네게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널 보자마자 마음이 동했지만 그럴리가 없다고 계속 부정을 한 듯싶다."

    부정을 하려면 끝까지 했어야지. 이 줏대 없는 갈대 황제!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응? 예전? 장시언은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옆으로 누워 있던

    장시언을 돌려 눕히고 위로 올라왔다. 왜, 왜 이래? 황제는 천천히 장시언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눈이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가느스름해졌다.

    "폐, 폐하?"

    "영선이라는 곳을 알고 있나?"

    "예?"

    "남사당패와 거렁뱅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알고 있나?"

    "........모릅니다. 처음 들어보는 곳입니다."

    ".........."

    ".........."

    "훗, 그래. 그렇겠지. 네가 그런 곳을 알 턱이 없지."

    황제는 피식 웃으며 장시언의 입술, 그리고 목선을 따라 내려오며 입을 맞추었다. 날카로웠던 눈매는 이미 언제 그랬냐는 듯

    휘어져 있었다. 장시언은 뜨끔했다. 거짓말이다. 사실은 영선이라는 곳을 알고있다. 그것도 아주 잘. 어린 시절 남사당패에

    혹해 거의 살다시피 했었다. 근데, 황제는 왜 갑자기 그런것을 물은 것일까? 장시언은 생각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몸을

    타고 내려가는 황제의 입술에 고민을 멈추었다.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는 몸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뜨거워지고 있었다.

    ***********

    "어찌 생각해?"

    "무엇을요?"

    "폐하께서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글쎄요, 그건 잘..."

    "윤상궁은 내가 폐하의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난 솔직히 폐하의 속내를 모르겠어. 하는 말 하나, 하나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계신지 알 수가 없다니까."

    "폐하의 속내가 궁금하시긴 하십니까?"

    ".....그, 그야 내 일신의 안녕과도 관련이 있으니까 당연하지!"

    "일신의 안녕이요?"

    "뒷덜미가 잡혀 계획을 망칠 순 없잖아."

    아, 폐서인 계획이요? 윤상궁은 한숨을 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폐하의 마음을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 함께 밤을 보내신 마마께서도 모르시는데요."

    하긴. 듣고 보니 그렇다. 장시언은 혀를 차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벅벅 머리를 긁어대며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평소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윤상궁은 조용히 일어니 빗을 들고 다가갔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며 장시언의 뒤를

    따라다녔다.

    ".......폐하가 무서워."

    "제가 진작 무서운 분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게 아니라, 뭐랄까..., 사람을 조마조마하게해."

    "그렇습니까?"

    "그렇다는데도! 게다가 아까 잠시 들렀다 가시면서 내가 보고 있던 서책을 몽땅 찾아서 불태우고 싶다고 하더라니까!"

    윤상궁은 순간 멈칫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서책을요? 왜요?"

    "내가 서책을 보느라 폐하께서 들어오시는 것도 몰랐거든."

    "그래서요?"

    "서책 주제에 내 관심을 끈다고 전국방방곡곡을 뒤져 다 태워버리고 싶대.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건 좀..."

    "무섭지? 그렇지? 너무 무서워! 끄아악~!"

    장시언은 밖에 궁녀들이 밭일을 하러간 시간이라고 대놓고 소리를 질러댔다. '진짜 너무 무섭다구!!' 하며 난리를 쳤다.

    매사에 그리 집착을 해본 적이 없는 장시언에게 황제의 태도는 두려움이요, 광기였다. 한번씩 그럴 때마다 폐서인에 대한

    열망이 쑥쑥 자라났다. 윤상궁은 담담한 목소리로 '진정하세요, 마마.'하고 얘기했다. 장시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뚝 멈춰

    심호흡을 했다. 후아후아.

    "아무튼, 빨리 기회를 봐서 투기를 부려야해. 갖은 패악을 다 떨거야. 근데 문제는 그 기회가 안 온단 말이지! 그날을 위해

    손톱도 기르고 있는데!!"

    손톱까지..... 대단한 정성이다.윤상궁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렇다고 아무때나 투기를 부릴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장시언을 설득했다. 장시언은 '쳇.'하고 혀를 차며 그 말에 동조했다.

    "그건 그렇지. 그래서 기다리고 있잖아."

    투덜거리는 것이 얼마나 그 '때'를 열망하는지 잘 보여준다. 장시언은 에휴ㅡ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에게 투기의 기회,

    폐서인으로의 첫 걸음을 내디딜 기회가 온 것은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기회는 아주 간단한 이유로 찾아왔다. 처소를 찾지 않는 황제에게 비빈들이 눈물로 하소연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아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를 청하며 석고대죄를 시작한 후궁들은 며칠째 궁 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그녀들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지 멈추질 않았다. 땡볕 아래서 그러다 보니 픽픽 쓰러지는 비빈들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후궁들에 대한 말을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녀들의 뜻을 받아들이자도, 벌을 내리지도 않고

    방관했다. 황제를 움직이게 한 것은 네 명의 황자들이었다.

    현비의 아들은 너무 어려 상궁의 손에 이끌려 와 멀뚱히 서 있었지만 나머지 세 명의 황자가 어마마마를 비롯한 모든 비빈

    마마를 굽어 살펴달라며 황제의 앞에서 눈물을 흘려댄 것이다. 장시언은 윤상궁을 통해 이소식을 접했을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무리 냉정한 황제라지만 마음이 좀 움직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마마! 폐하께서ㅡ"

    "후궁전에 드신다 하더냐."

    "예, 그리 말씀을 하셨다 합니다."

    됐다. 이제 됐다!장시언은 폴짝폴짝 뛰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퍼진다.

    "후후후후...., 크크크큭..."

    윤상궁은 그 모습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가 좋다고 그리 뛰어다니십니까? 조금도 슬프지 않으세요?"

    윤상궁의 말에 장시언은 잠시 멈칫하더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슬퍼?"

    "마마를 두고 후궁들에게 가신다 하지 않습니까."

    ".........아...뭐.....바라던 거니까."

    바라던 거라고 하면서 갑자기 뭔가 깨달은 것 같은 '아...뭐...'는 또 뭡니까? 윤상궁은 솔직히 장시언이 황제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본인이야 절대 아니라며 극구 부인하겠지만 그녀가 보기엔 그래 보였다. 남에게 관심 없고 매사에

    의욕이 없는 상전이 누군가를 그렇게 신경 쓰고 속앓이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윤상궁은 모르는척

    다음 계획을 물었다. 그녀의 상전은 아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엉뚱한 의견을 내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제 어찌하실 것입니까?"

    "그야 물론 투기를 부려야지. 이런 좋은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절대 가시지 말라고 패악을 떨어서 질색을 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야. 우후후후..."

    역시나. 윤상궁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정말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시는구나. 다른 방면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시면서

    어쩜 저리 이방면에선 둔하실까. 아마 투기를 부리면 폐하께선 이게 웬 떡이냐며, 좋다고 잡아 잡수실 것이다. 윤상궁은

    기대에 차올라 눈을 빛내고 있는 상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속으로 무사 평안하십시오, 하고 기도를 해주는 것만이 그녀가

    할수있는 일이었다.

    ************

    "수라상을 받지 않았다고?"

    황제는 후궁전에 들리기 전에 황후궁을 먼저 들렀다.이러저러해서 그리되었다는 말을 해주러 온 것이겠지. 장시언은 나는

    이미 모든것을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힘없이 얘기했다.

    "예....,입맛이 없어...물렀습니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것이냐?"

    "아...., 아닙니다...."

    장시언의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고 떨리기 시작한다. 지금이다! 작전 돌입이야! 폐선인이다, 폐서인!!장시언은 처연한 얼굴로

    뚝뚝 눈물을 흘리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눈물이 줄줄줄 흘러나왔다. 황제는 급히 무릎을 꿇어 그런

    장시언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왜 이러는 것이야?"

    "우흑...., 흑흑...., 폐, 폐하..., 후궁들의 처소로...흑흑....., 가시는 것이....사실...흑...이옵니까?"

    "....뭐라?"

    황제는 장시언의 물음에 불쾌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모습에 장시언은 더 박차를 가했다. 곤룡포를 붙잡고

    매달리며 폭풍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흐흑...., 흑...., 흑흑.... 폐하께서 소첩에게 어찌 그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너무하십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세상에

    믿을 이 하나 없다더니... 그말이 딱이로군요.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와 같은 것인데....흐윽,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

    "........이제 전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가지 마시옵소서! 절 두고 가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흑흑..... 폐하께서

    가신다면....소첩  이자리에서....이 자리에서...."

    순간 대사가 막혔다.뭐라고 하지? 목을 매달아 죽어버린다고 할까? 아니야! 이건 너무 뻔해!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어버린다고

    할까? 아니야! 이것두 너무 뻔해! 게다가 접시물에 코를 박는다고 죽기야 하겠어? 그게 깊어봤자 얼마나 깊다고.뭐라고 하지?

    뭐라고.....

    "....혀, 혀를 깨물고 이 자리에서 송장이 되어 썩을 것입니다!!!!"

    좋다~! 과격하다!!!

    "후궁들에겐 가시면 아니 되십니다! 평생 저만 보시고...., 저만 품어 주시옵소서, 폐하...!!"

    눈물에 번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황제는 분명 기함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럴테지. 아주 식겁했을 것이다! 이리도

    추한 투기라니! 하는 나도 미칠것 같은데 보면 아주 눈이 뒤집히겠지! 우하하하~~!황제는 아무런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의 곤룡포를 절대 놓치지 않을듯이 쥐고 있던 장시언은 그런 황제를 올려다보다가 따라서 일어났다.뿌리치고 가려고

    하나보다! 최후의 일격이다!!

    "폐하! 절 버리고 가시면 제 원혼이ㅡ 흡!"

    황제를 향해 갖은 원망을 쏟아내려고 했던 장시언은 사나운 짐승처럼 달려드는 황제 때문에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읍!

    우으읍! 야, 야! 이거 왜 이래?!순식간에 옷이 벗겨지고 있었다. 아니,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눈 깜짝할새에 넝마를

    걸치게 된 장시언은 놀라 황제를 밀치다가 좌악ㅡ 그의 가슴에 긴 손톱자국을 내고 말았다. 황제는 그것에 더 자극을

    받았는지 바로 장시언의 다리를 벌려 자리 잡았다.아니야! 이러려고 기른 손톱이 아니야!! 이러려고 기른 것이....아악!!!!

    한순간에 꿰뚫린 몸은 여기저기서 곡소리를 냈다. 반쪽으로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 아앗! 폐하..!! 그, 그만...!"

    "크윽,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걱정마라, 시언아. 죽을 때까지 네 안에서만 머물것이다."

    크아악ㅡ!! 뭐엇?!! 망했다!! 완전 망했다!!!

    "시언아, 시언아....!"

    왜!!! 대체 왜!!!!! 장시언은 정신적 공황에 빠진 상태로 황제의 허리짓에 맞추어 교성을 내뱉었다.신음과 격한 호흡소리,

    해가 밝을 때까지 황후궁 안은 조용해질 틈이 없었다.....투기 부리기는 장렬히 실패했다. 아흥아흥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폐서인은 저 멀리 날아갔다.

    ************

    "제발 어젯밤 일이 꿈이었다고 말해줘."

    또........ 그 질문이십니까?윤상궁은 안타까운 눈으로 장시언을 내려다보았다.

    ".....꿈이 아닙니다."

    "이건 뭐가 잘못됐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 아읏!"

    "움직이지 마십시오. 무리하시면 안 되십니다."

    허리가 아파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난밤엔 짐승과 뒹구는 것인 줄 알았다. 체력이 좋기로 소문난 장시언도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뭐긴요, 삽질하신 것이지요.

    "마마, 진정하시고 좀 주무심이..."

    "잠은 무슨 얼어 죽을 놈에 잠이야!! 내가 지금 잠이 오게 생겼어? 평생 이렇게 살게 됐는데?!"

    장시언은 어흑어흑 베갯잇을적셨다. 좋은게 좋은거다,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평화로운 삶에 대한 그의 갈망이 너무나도

    컸다. 윤상궁은 어쩌지, 하고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장시언을 바라보다가 이불을 덮어주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은 무슨

    위로를 해주어도 상태가 좋아질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장시언은 쉬지도 않고 한참을 울다 결국 제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묵직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몸에 팔을 두르고 누군가가 잠들어 있었다. 보나

    마나 황제겠지.장시언은 팔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누워있는 황제를

    째려보았다.이 망할 짐승 황제! 뭐가 좋다고 퍼질러 자고 있냐?

    "왜, 더 자지 않고. 몸이 좋지 않을텐데 자라."

    갑작스러운 황제의 목소리에 장시언은 흠칫 놀라 눈을 깜박였다. 황제는 잠들어 있던 사람의 목소리라고 할 수 없는, 평소

    그대로의 목소리로 얘기했다.

    "...깨, 깨어 있으셨습니까?"

    "음, 원래 깊이 잠들지 않는다. 특히 너와 함께 잘 땐 더 그렇지."

    왜? 내가 뭘 어쨌다고? 황제는 손을 뻗어 장시언의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갑자기 사라지면 안되니까."

    쿵! 순간 심장이 내려앉고 숨이 막혔다. 장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지금까지 해온 모종의 계획을

    황제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네가 짐을 불안하게한다."

    ".........."

    "너의 그 침묵도 날 불안하게해."

    "마, 망극하옵니다."

    황제가 다시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지존을 불안하게 한다는데 대체 뭐라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라는 소리는 하지 않지, 너는. .....누워라. 아직 날이 밝으려면 멀었다."

    황제는 더 이상 그의 불안함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장시언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이 어색하고 갑갑한 분위기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장시언은 천천히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가 눕자마자 황제가 다시 팔을 감아왔다.

    "윤상궁."

    "예."

    "사가에 다녀오려면 폐하의 윤허를 받아야 하겠지?"

    "그야 물론이지요."

    장시언은 윤상궁의 확답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실망스럽다.

    "사가에 다녀오시고 싶으십니까?"

    "응. 좀 가서 쉬다 오고싶어."

    "......지금도 쉬고 계시질 않습니까."

    "이런 것 말고, 생각을 좀 하기 싫어서 밀이지."

    "......."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윤상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럼 폐하께 한번 말씀을

    드려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장시언은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하루만 다녀오겠다고

    말을 하고 싶다. 하지만 지난밤에 황제가 말한 그 불안함이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서 자신을 콕콕 쑤셔왔다.

    ".......솔직히 말하면, 폐서인에 대한 꿈을 접은 건 아니야."

    "예,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거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책임지기보다는 도망가고 싶어. 참 간사한 인간인것 같아 나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마마."

    "진짜 머리가 아파. 살면서 이렇게 복잡했던 적은 없었는데."

    장시언은 작게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러다가 문득 후궁들에 대한 소식이 궁금해졌다.

    "후궁들은 어떻게 됐어?"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별 탈 없이?"

    "예, 뭐..."

    뭔가 있었구나. 장시언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윤상궁을 보며 확신했다.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도 모자라

    후궁들에게도 몹쓸 짓을 해버렸다.

    "폐하께 청을 드려볼까..."

    "무슨 청이요?"

    "보나 마나 후궁들은 모두 유폐시키셨을 텐데, 명을 거두어 달라고...."

    "소인의 생각엔 그냥 있으시는 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역시 그렇겠지?"

    "예."

    하기야 서책에도 질투를 하는 황제다. 괜히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후궁들의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으으, 머리야!!

    "윤상궁, 바람이나 좀 쐬러가지."

    윤상궁은 바로 허리를 굽혔다.

    "바로 준비하겠사옵니다."

    "다른 궁녀들은 줄줄이 따라오게 하지말고."

    "예, 마마."

    바깥 공기를 좀 마시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다. 장시언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씨익 웃었다.

    "캬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마마, 조심하십시오. 사방이 뚫린 곳입니다."

    "아무도 없는데, 뭘."

    장시언은 별걱정을 다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보기는 누가 본다고.

    "그래도...."

    "야! 빠뜨려버려!"

    윤상궁이 한마디 더 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빠뜨려버려? 장시언과 윤상궁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급히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역시 아이들이 있었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잡아 연못에 빠뜨리려고

    하는 한 아이와 그것을 말리려고 하는 아이를 말리는 두명의 아이.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황자들. 제 어미의 손을 잡고

    왔을 적엔 순해도 그리 순해 보일 수가 없었는데 아이들이란 참 순수하면서도 잔혹하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저런

    짓을 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라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시언은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강아지를 잡고 있던 아이가 장시언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놀라 뒤로 자빠지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놓아버렸다.

    풍덩ㅡ!

    "안돼!!"

    강아지가 연못으로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한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자신을 잡고 있던 두 아이를 뿌리치고 연못으로

    달려갔다. 그것을 본 장시언은 재빨리 뛰어가 아이를 낚아챘다. 아이가 연못으로 뛰어들기 직전이었다.

    "위험하게 무슨 짓입니까!"

    "하, 하지만 금동이가..."

    금동이? 아, 강아지 이름인가 보군.

    "개는 어릴 적부터 헤엄을 잘 칩니다."

    장시언은 말을 하며 연못쪽으로 몸을 틀었다. 역시나 강아지는 이미 연못에서 나와 몸을 털고 있었다.

    "저것 보세요. 이미 나오질 않았습니까."

    "어, 아..."

    아이는 안도하며 한숨을 쉬었다. 장시언도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다시 몸을 틀어 황자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놀라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작다고 하나 엄연한 생명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귀하듯 동물의 생명도 귀한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장난은 치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예, 황후마마."

    강아지를 떨어뜨린 황자가 작게 대답했다. 장시언은 옆에 있는 나머지 두 황자에게도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둘이서 한 명을 상대하는 것은 비겁한 짓입니다. 사내가 할 짓이 아니지요, 그것은."

    "......잘못하였습니다, 황후마마."

    ".........용서하여주시옵소서, 황후마마."

    "후.... 다음부턴 그러지 않으시면 됩니다."

    어? 근데 내가 왜 갑자기 이렇게 불타올라서 아이들을 타이르는 거야?장시언은 순간 스스로가 머쓱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황자들은 그런 장시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의 팔로 시선을 옮겼다. 신기한 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입이 벌어진다. 응? 뭐지?

    장시언은 황자들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팔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히약!'하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순식간에 들고 있던 아이를 땅에 내려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장시언은 힐끗 윤상궁을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아이라고는

    하나 너무 가볍게 한 팔로 들고 있었다. 연약하고 가녀린 황후로 알려져 있는 장시언이!

    "......"

    "......"

    "......"

    "......"

    "아...팔이..."

    장시언은 아이를 들고 있던 팔을 감싸며 축 어깨를 늘였다. 찡그린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물론 팔은 너무나도

    멀쩡했지만 이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수밖에 없었다. 눈치가 남다른 윤상궁은 후다닥 뛰어와 장시언을

    부축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유, 윤상궁... 이만 돌아가야 할 듯싶네...."

    "예, 마마. 소인을 잡으시옵소서."

    장시언은 윤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날때까지 둘의 연기는 계속되었다.

    "팔은 괜찮으시지요?"

    "물론이지. 아이 한 명 들었다고 어찌 되었을라고?"

    장시언은 별걸 다 묻는다는 듯 휙휙 팔을 돌렸다. 윤상궁은 한숨을 내쉬며 '제발 조심 좀 하십시오.' 라고 잔소리를 했다.

    이번 일은 장시언도 느끼는 바가 있어 조용히 수긍했다.

    "그나저나 이상한 낌새를 채진 못했겠지?"

    "아직 어리질 않습니까. 크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깐 진짜 식은땀이 나더라니까."

    "저도요."

    "근데 아까 내가 든 아이는ㅡ"

    "황후가 팔을 다쳤다는 것이 사실이냐?"

    아까 그 아이는 누구냐, 하고 물으려던 장시언은 밖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에 하려던 말을 집어삼켰다. 한시름 놨다,

    좋아하고 있던 장시언과 윤상궁은 서둘러 아까의 역활을 연기했다. 장시언은 침상에 누워 골골거렸고 윤상궁은 괜찮으시냐며

    곁에서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쥐어짜고 있었다. 콰앙!

    "시언아!"

    그렇게 열 거면 그냥 문을 부수고 들어와라.

    "괜찮으냐? 대체 어디를 얼마나 다친 것이냐?"

    어디서 또 귀신같이 알고 달려왔을까. 정말 무섭다, 무서워.

    "너는 상전을 잘 모시지 못하고 무얼 하고 있었던게냐!"

    황제는 윤상궁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시언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에 추궁이 윤상궁의 몫으로 돌아간 것이다. 윽,

    안돼! 이러다가 윤상궁이 혼자 독박 쓰겠다!!

    "폐하..., 신첩 아무렇지도 않사옵니다."

    장시언은 절대 윤상궁을 두둔해 주지는 않았다. 이미 경험상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둔해주었다간 더 험한 꼴을 당할

    것이란걸.

    "별 것 아닙니다. 그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강희를 구해주었다고?"

    "예?"

    강희? 그게 누군데?

    "강희가 직접 와 내게 말해주었다. 자신을 구하다 많이 다치셨으니 가셔서 보살펴 달라 청하더구나."

    "아....예..."

    "제 한몸 추스르기도 힘든 이가 아이까지 구하다니, 나를 얼마나 더 걱정시킬 참이냐?"

    제 한몸 추스르기도 힘든 이....아.하.하.하.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정말 별일 아니었습니다. 응당 해야할 일을 하였을 뿐...."

    "하아...그래, 어미의 마음이란 다 그런 것이지."

    그래, 어미의 마음...응? 뭐? 뭐라고? 귀가 잘못되었나?

    "....예?"

    "네 모성에 탄복하였다."

    시방 무슨 소실 하는 거냐? 모, 모성?

    "내 아이가 곧 너의 아이라는 뜻이 아니냐."

    ....컥!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야!! 제발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와!!!그냥 아이가 연못으로 뛰어들려고 하기에 나도 모르게

    낚아챘을 뿐이다. 어미의 마음이니, 그런것이 아니란 말이다!!!에잇, 더는 못 참겠다.

    "폐, 폐하! 저는 단지ㅡ읍."

    황제는 참고 참다 드디어 이실직고하는 장시언의 용기 있는 도전을 손가락 하나로 막아버렸다. 졸지에 손가락으로 입술이

    막힌 장시언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이건 또 뭔 요상한 짓거리냐?

    "쉿.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아니,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폐하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게 틀림없어!!장시언은

    울상을 지었지만 이미 눈을 감고 입을 맞춰오는 황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

    엎친데 덮친 격이라더니, 딱 그 짝이구나. 황제 하나만도 감당이 안 되는데 이젠 황자까지.장시언은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황자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정말 많이 걱정하였습니다. 소자를 구해주시다가 크게 다치신 듯하여...."

    "하하....그랬습니까?"

    장시언은 힘없는 미소를 내비치며 작게 얘기했다. 아이의 눈이 눈물로 그렁그렁해지고 있었다. 으윽, 양심의 가책이...

    "괘, 괜찮습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황자."

    "아, 아닙니다. 소자 때문에, 소자가 어리석어...흐윽..."

    헉. 운다, 울어! 어찌하냐! 장시언은 윤상궁을 보며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윤상궁은 손을 뻗어 무언가를 알려주려 했다.

    뭐? 뭘 어쩌라는게야?이리 하시라는 말씀입니다!윤상궁은 허공에 무언가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장시언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조그만 머리통 위에 살짝 얹었다. 아이를 달래본 적이 없어 어색하기만 했는데, 윤상궁은 가만히 있지말고 어서

    쓰다듬으시라며 다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장시언은 그 모양새를 따라 손을 움직여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 울지 마세요, 황자."

    "흐흑...황후마마...소자가....어마마마라고 불러도 되옵니까...?"

    뭣이? 어마마마? 안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빼도 박도 못한다. 절대 안돼! 어서 얘기해! 안 된다고 말하라고! 장시언은

    결의에차 '그것은ㅡ'하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ㅡ그리하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아악! 이놈에 입이 제멋대로!!

    "흑....., 어마마마...! 어마마마...!!"

    ".....아하하하, 예, 황자."

    눈 밑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졸지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 생겼구나. 장시언은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다가

    윤상궁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금 순간에도 윤상궁에게 묻고 싶었다.우리의 목표는 뭐? 우리의 목표는 뭐?! 하지만, 윤상궁은

    장시언의 애절한 눈빛을 읽었음에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루종일 강희와 있었다고?"

    "...예, 폐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아이가 어찌나 달라붙던지 떨어지지도 않더이다.

    "내게 어미가 생겼다며 자랑을 하더구나. 생모인 귀비가 자신을 낳다 눈을 감은 것을 항상 슬퍼하던 아이였는데."

    ".........."

    그래. 바로 그 점 때문에 마음에 걸린다. 외로웠던 아이에게 어중간한 정을 주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나는 네가 바라는 그런

    어머니는 되어주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강희가 태자가 되길 원하나?"

    "....예?"

    장시언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눈을 깜박였다. 강희가 태자가 되길 원하냐니.누가? 아이가? 아니면 내가?

    "시언이 네가 바란다면 강희를 태자로 책봉할 수도 있다."

    역시 나냐!!!

    "그런 마음 전혀 없습니다!"

    장시언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순간 황제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져 장시언도 당황했다.

    "....전혀 없다?"

    "....예. 없습니다."

    "어째서?"

    어째서긴! 조정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까!!

    "태자 책봉은 신첩의 소관이 아니질 않습니까."

    날 제발 그냥 내버려둬. 부탁이다. 갑자기 아들이 생긴 것도 충분히 벅차다고!황제는 조용히 장시언에게 다가왔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의 걸음은 사냥감에게 다가가는 범처럼 느껴진다. 어딘가 느긋하지만 보는 이를 긴장시킨다.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뭐지?"

    물 흐르듯 평온한 삶이지. 장시언은 대답을 하지 않아다. 아무리 황후라 하나 황제의 묻는 말에 답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죄를

    물어 마땅한데 황제는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대뜸,

    "유명무실화된 내명부를 살려볼까 한다."

    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을 뿐이다. 장시언은 놀라 크게 눈을 뜨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 그것이 무슨....말씀이시온지...?"

    "말 그대로다, 내명부의 수장인 네게 그에 합당한 힘을 주겠다는 뜻이지."

    콰광!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졌다.

    "말도 안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장시언은 지나친 충격으로 머릿속 생각을 여과 없이 입 밖으로 내보냈다. 황제가 '뭐?' 하고 반문하지 않았다면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것이다.

    "예?"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나?"

    "어....글쎄요...., 제가 무어라 했던가요?"

    "말도 안된다고 한 것 같은데."

    ".........아하하하......, 그랬던가요? 기억이 잘......, 아하하하,,,,"

    장시언은 어색하게 웃었지만 황제는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씨익 웃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폐시켰던 후궁들을 다 원래대로 돌려놓을 것이다. 네 자애로운 심성이라면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물론, 후궁들을 다

    보듬어줄수 있겠지."

    보듬어?..........웃기지 마라! 난 그런 것 못한다!!!

    "폐, 폐하...., 신첩은..."

    "네가 잘 해내리라 믿는다."

    미친거 아니야?! 믿는다니! 대체 날 왜 믿는거야?! 한 나라의 황제가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황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장시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그 눈빛이 장시언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

    "마마의 은혜로 이리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어찌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래, 고맙기도 하겠지. 내 입장에선 너희들의 자유와 내 자유를 맞바꾼 것이나 다름없으니.... 씁쓸하다, 씁쓸해. 장시언의

    표정이 밝지 않자ㅡ어느때든 밝은 적이 별로 없긴 했지만ㅡ현비는 헛기침을 하며 원비를 바라보았다.

    "원비께서도 한 말씀 하셔야지요? 사실 가장 큰 은혜를 입은 것은 원비가 아닙니까?"

    원비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장시언은 볼 수 있었다. 원비는 코웃음을 치며 툭 던지듯 말을 내밷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후마마. 제가 청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원비!"

    "원비!"

    "원비!"

    "원비!"

    현비, 덕비, 무비 그리고 숙비가 동시에 외쳤다. 정작 소시를 쳐야할 장시언은 꽤나 치욕스러운가 보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적당히 하세요, 원비! 어찌 그리 무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당장 마마께 용서를 구하세요."

    "원비,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황후마마는 내명부의 수장이십니다."

    "흥! 누가 뭐라 했습니까? 황후마마께서 내명부의 수장이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원비의 비아냥거림에 나머지 비들이 다시 '원비!!'하고 소리를 쳤다. 장시언은 거기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괜한 기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열정적이기도 하지. 화낼 일도 많아 좋겠다. 난 황제와 진을 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싸우든 말든

    나는 몰라. 아무것도 몰라. 장시언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자체적으로 귀를 닫아버렸다.이것봐. 이럴 줄 알았다. 내가 뭐랬어.

    나를 믿는다구? 폐하는 대체 무슨 꿍꿍이야... 답답하다... 정말.상황이 종결되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장시언은 차를

    마시다가 별생각 없이 비들을 힐끗 보고는 바로 입에 있던 차를 '푸학ㅡ!' 뿜어버렸다. 방심했다. 또 이상한 데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비들의 얼굴은 모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씩씩거리는 것이 꼭 사나운 황소 같았다. 순식간에 곱게 단장한

    비들의 얼굴이 황소로 대치되며 남들은 전혀 공감 못할 장시언의 웃음보를 건드렸다.

    악! 내가 미쳐!장시언은 웃음을 참으려 옷깃을 부여잡고 안가힘을 썼다. 제법 멀리 떨어져있던 윤상궁은 또 뭐 때문에 웃음이

    터지셨다, 걱정스럽게 바라보았고 비들은 갑자기 바닥에 물을 토해낸 황후를 보며 안절부절 못했다.

    "황후마마! 괜찮으시옵니까!"

    "황후마마!"

    "황후마마!"

    "여봐라! 태의를 불러오라!"

    안돼! 부르지마!! 시도때도 없이 태의를 부르라고 하기는! 장시언은 이제 슬슬 괜찮은 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시언을

    가장 고깝게 보던 원비도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걱정은 장시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괜한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을까, 싶은 것일 테지만.

    "......괜찮습니다. 갑자기 사레가 걸린 것뿐이에요!"

    사레 두번 걸렸다간 장 끊어지겠다.

    "나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장시언은 혹여 붙잡을까봐 대답도 듣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상궁이 달려와 그를 부축해주었다.연약한 척하는 것도

    이럴때는 좋구나. 아깐 정말 망신을 당할 뻔했는데, 정말이지 황소가 다섯.... 장시언은 또다시 터질것 같은 웃음을 참느라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얼핏 어쩔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윤상궁의 모습이 보인 것도 같았다.

    *********

    "어마마마,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널 어쩌면 좋으냐, 하는 생각. 장시언은 잊지도 않고 매일 찾아오는 강희 황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무위도식하기 위해 입궁한 장시언이라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장시언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잘 말하더라도 아이는 상처를 받을게 분명할 테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덜 상처를 주고 싶었다.

    ".......황자, 제 말을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 예, 어마마마."

    "나는, ....황자가 바라는 그런 어머니는 되어주지 못합니다."

    "........"

    "나는 황자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외로웠던 것을 알지만, 그 외로움을 내가 모두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아니, 채워주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 이곳을 나갈지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장시언은 마지막 말을 삼키며 강희황자를 바라보았다. 황자는 그의 말을 모두

    다 알아들은 눈빛이었지만 의외로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강희 황자가 미소를

    짓는다.

    "아니요, 어마마마께서는 착한 분이십니다."

    ".........."

    "혹여 소자가 상처 입을까봐 그리 조심스럽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

    강희 황자가 '맞지요?' 하며 헤헤 웃는다.

    "저는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소자는 어마마마께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장시언은 말을 잃었다. 아이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속이 깊고 어른스러웠다. 듣기론 이제 고작 여덟살이라 하였는데.

    ".....쳇, 내가 다 부끄러워지네."

    "예?"

    낯선 말투에 황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시언은 피식 웃으며 '아닙니다.' 라고 말을 했다. 그는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금 그가 보여준 모습은 평소의 연약하고 처연한 황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황자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

    황실이라는 곳은 쓸데없이 절차가 까다로워 가족도 쉬이 만날수가 없는 곳이다. 윤상궁의 말대로 폐하의 윤허를 받아야지만

    사가에 다녀올 수 있었고, 이젠 가족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미리 연통도 없이 찾아오면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는데 황제의 엄명으로 철저히 지켜지게 되었다. 사실 하는 것도 없으니 그냥 '들이게.' 한마디만 하면 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미리 연통을 주지 않을 경우 장시언에게 오기 전에 안 된다고 가로막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하나뿐인 아우, 장영한이 찾아왔지만 만나질 못했다. 매번 쉽게 통과되었던 것만 생각하고 무턱대고

    찾아온 아우는 앞에서 가로막혀 '마마!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되돌아갔다. 간만에 입 좀 풀겠구나 싶었는데

    안타까울 따름이었다.하지만, 드디어 오늘. 아우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왔다.

    "아우야....!"

    "형님..."

    장시언은 아우를 반갑게 맞이하며 끌어안았다. 남다를 우애를 과시하는 형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말이 많기로 소문난 장씨 형제는 쉬지도 않고 입을 놀렸다. 전에 왔을 때에는 궁녀들이 바깥에 쭉 서있어 하고 싶은 말의 반의,

    반의, 반의반도 못했다. 오늘은 윤상궁이 궁녀들을 데리고 나가 이런저런 일을 시켜서 못다한 수다의 한을 풀 수가 있었다.

    "어찌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그냥저냥 그렇다."

    "폐하께선 아직도 밤마다 찾아오시구요?"

    "뭐? 밤마다? 밤마다 뿐이냐. 아침, 점심, 저녁,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신다."

    "아이고, 몸은 괜찮으십니까?"

    "보약을 벌써 몇 첩째 달여 먹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사랑받으시니 좋은 것 아닙니까?"

    "팔자에도 없는 내명부 수장 노릇을 하고 있는데 좋긴 뭐가 좋으냐?"

    "그러고 보니 형님,얼굴이 반쪽이 되셨습니다."

    "그렇지? 정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마음 편히 살려고 입궁했는데 다 말아먹었다."

    "그러게 적당히 좀 하시지요. 얼마나 가증스럽게 연기를 잘하셨으면 폐하의 눈에 든단 말입니까."

    "더 하면 할수록 싫어할 줄 알았지! 아이고, 내 팔자야. 어흐흑..."

    "우는 척하지 마십시오. 이젠 안 속습니다."

    "어흑.... 티가 나느냐? 크크큭.... 그동안 어찌 지냈느냐? 아버님은 잘 지내시고? 아무리 바쁘시다지만 아들 얼굴 한번

    안 보러 오신다."

    "아버님은 요즘 많이 바쁘십니다. 폐하께서 시키신 일들이 많이 모양입니다."

    장시언은 아우의 말을 듣고 '그래?' 하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영한이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지만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너는? 별다른 일은 없고?"

    "저야 뭐 잘 지내지요. 흐흐흐..."

    "응? 왜 갑자기 팔푼이처럼 웃는게야?"

    "으흐흐...형님, 저 말입니다. 흐흐..."

    ".........?"

    영한이 바보처럼 헤죽거리자 장시언은 이 곰 같은 녀석이 진짜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흐흐...., 형님..."

    "그놈에 형님 소리 그만하고 말이나 해라. 왜 그러느냐?"

    "저 말입니다. 제가 말이지요..."

    아악! 답답해!!

    "그래! 네가 뭐?!"

    "저 장가갑니다~~"

    "뭐?"

    "저 장가간다구요~ 으흐흐흐~"

    장가?

    "...뭐엇? 네가?!"

    장시언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위에 놓인 찻잔이 흘들거렸다.

    "예! 으하하하~!"

    장시언은 얼이 빠진 얼굴로 아우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목구멍이 다 보인다.사실 그가 이렇게 놀라워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의 하나뿐인 아우 장영한. 그로 말할것 같으면 만나는 여인들에게 죄다 퇴짜를 맞아 집안에서도

    안타까움의 눈믈을 흘려줄 정도였다. 그는 딱 한마디로 곰의 모습을 한 푼수였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우직해 보였지만 한번

    입을 열면 푼수끼가 줄줄 새어나왔다. 영한이 만난 여인들은 처음에 그의 듬직한 겉모습에 혹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본모습을 알고 휑하니 떠나버렸다. 하지만 지치지도 않는 그의 아우는 어느새 새로운 여인을 만나 애정을 갈구하고 그러다가

    또 퇴짜를 맞았다. 매번 이런 일의 반복이었다. 헌데, 그의 영한이 장가를 간다?

    ".....이젠 하다하다 못해 정신이 나간게냐?"

    장시언의 말에 영한이 '예? 정신이 나가다니요?' 하고 되물었다. 장시언은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또 퇴짜를 맞고 와서 결국 미친것 아니냐는 말이다."

    ".........예에?"

    영한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목청을 높이다가 꽥 소리를 질렀다.

    "아닙니다! 미치다니요, 저 멀쩡합니다! 제정신이라구요!"

    "아니야?"

    "예!!"

    "허면 정말 네가 장가를 간단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오래 살고 볼일이다. 세상엔 참 여러 여인이 있구나. 너랑 혼인을 할 생각을 하다니...."

    "형님!!"

    "아이고, 깜짝이야! 왜?"

    "너무하십니다! 제가 그동안 퇴짜를 좀 맞았기로서니 영영 장가도 못 갈 줄 아셨습니다까?"

    응, 못갈줄 알았다. 당연한 걸 왜 묻냐?장시언의 눈빛에 영한은 뜨악한 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작게 웅얼거렸다.

    "형님 같은 분도 장가를ㅡ아니, 시집을 가셨는데 저라고 못할 것도 없지요, 무얼."

    ㅡ뭐라?

    "무슨 뜻이냐, 그게?"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요것봐라? 이 곰 같은 녀석이 지금 내 성격을 운운하는 것이지, 지금?장시언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우야...."

    다정한 목소리에 영한은 눈에 물음표를 달고 장시언을 바라보았다.훗. 네가 감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너의 그 여인은 네가 열 살 때까지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는 것을 알고는 있냐?"

    "헉!"

    영한은 숨을 들이켜며 몸을 굳혔다.

    "홍가네 여식에게 따귀를 맞은 것은?"

    "커억!"

    이번엔 가슴을 부여잡는다. 알아서 기어, 인마! 아우의 눈이 곧 튀어나올 듯이 커진 것을 보며 장시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점을 쥐고 흔드는 것이 딱 불한당이었다.

    아우가 돌아가고, 한참을 기다려도 황제는 오지 않았다. 와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들려오는 소식도 없었다.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해?"

    "잠시만 더요."

    "졸려 죽겠어."

    "조금만 참으십시오."

    "오늘은 안 오시는것 아니야?"

    "설마요."

    "아.... 진짜 안되겠어. 잘래."

    장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마마!' 하고 애타게 부르는 윤상궁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눈이

    가물거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밖에서 '윤상궁마마님!'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상궁이 그 소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장시언은 철퍼덕 누워 이불로 쏙 들어갔다.윤상궁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자신을 찾는 궁녀 때문에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마마님! 크, 큰일 났습니다. 폐, 폐하께서...폐하께오서..."

    "폐하께서 어찌셨다는 것이냐?"

    "폐하께오서.... 원비 마마 처소로 향하고 계시다 하십니다.....!"

    "뭐라?"

    윤상궁은 언성을 높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오시던분이 어찌 그러실 수가 있단 말인가. 황후마마를

    두고 원비에게로 가시다니!

    "제대로 알아본 것이냐? 확실한 것이냐?"

    "예. 제가 몇 번이고 확인을 했습니다. 어흑...."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거라. 다른 궁녀들에게도 오늘은 이만 쉬라하고."

    "흑흑... 예, 마마님..."

    궁녀는 어깨가 축 늘어져 걸어갔다. 윤상궁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옆으로 돌아누워 있는 상전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마마...."

    "이미 들었어. 다시 말하지 않아도 돼."

    귀 밝은 장시언은 이미 윤상궁과 궁녀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황제가 원비의 처소로 향한다는 말을 들었을땐, 왠지 모르게

    멍해졌지만 내가 왜 이러는거야? 하며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단지 오늘 하루만 가신 것일..."

    "윤상궁, 난 괜찮아. 오히려 잘됐지 뭐."

    "마마..."

    "이만 잘게."

    장시언은 이불을 끌어올리며 이어질 윤상궁의 위로를 거부했다.위로는 무슨. 그래, 오히려 잘된 일이다. 이제 황후궁으로

    발길을 뚝 끊을 테니 다시 전처럼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것이다. 장시언은 깊게 숨을 내쉬며 잠을 청했다. 가슴에 느껴지는

    서늘함을 애써 무시하면서.

    '.....언아.'

    아우, 뭐야.... 가위에 눌렸나?

    '....시언아.'

    가위에 눌린 상태로 자면 죽는다는데..... 아, 몰라, 몰라. 그냥 죽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라. 난 그냥 잘란다. 가위에 눌린

    상태로 잠이 들면 죽는다는 속설도 장시언의 잠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진 못했다. 뒤척뒤척 거리다가 겨우 잠이 들었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피곤했다. 누군가의 손길이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바로 그 귀접인가,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을 뿐이다.

    '시언아.'

    "으응..."

    오, 귀신 주제에 제법인데? 그래, 거기도 좀 만져봐라. 장시언은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을 느끼며 몸을 내맡겼다. 귓가를

    간질이는 숨결도 마음에 들었다.

    "시언아...."

    그래, 내가 장시언이다. 왜 그렇게 불러.... 엥?! 장시언은 순식간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놀랐는지 말도 잘 나오질

    않았다.

    "........폐, 폐하?"

    "그래."

    "........... 이곳엔 어쩐 일로...?"

    "어쩐 일이라니, 황제가 황후궁에 오는데 달리 이유가 필요한가?"

    "아니, 그...."

    장시언은 자신을 직시하는 황제의 눈을 슬쩍 피했다.

    "....하자."

    "예?"

    "안고 싶다. 지금 당장."

    "어...저...그...."

    이러지 마라! 난 아직 아무런 준비가 안됐다! .........헉! 으악! 손, 손 빼!!

    "폐, 폐하!"

    장시언은 최대한 몸을 뒤로 빼며 황제의 손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찌나 집요하게 파고드는지

    가다가다 등이 벽에 맞닿았다.

    "으읏, 하아... 하아..."

    안을 관통하고 들어오는 손가락와 중심을 쓸리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관계에 익숙해진 몸이 젖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황제는 그의 몸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단시간에 흥분시키는 방법 역시 알고 있었다. 밀어내려고 황제의 가슴에

    대고 있던 손은 어느 순간부턴가 힘을 잃었다. 황제가 귀를 핥으며 숨소리를 불어넣는다. 발정한 듯한 거친 호흡소리. 황제는

    장시언을 안을 때면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여유롭다가도 순식간에 돌변했다.

    "으...흐읏....! 폐하... 그만...!"

    "기분이 어땠지?"

    뭐? 무, 무슨 소리야..?

    "화가 나던가?"

    "읏, 무, 무슨...말씀..."

    "눈물이 났어?"

    장시언은 황제가 낮게 속삭이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뭐에 화가 나고, 뭐에 눈물이 난단 말인가.

    "......무슨 말씀이신지...잘...모르.....으흣..!"

    "널 모르겠다, 시언아."

    마찬가지다. 나도 폐하, 널 모르겠다. 장시언은 헐떡이며 고조되는 감각을 억눌렀다. 이미 황제의 손은 그가 흘린 흥분의

    잔재로 젖어 있었다. 긴장을 풀면 바로 사정을 할 것 같았다.

    "흐읏...! 읏!"

    "네 마음속엔 누가 있지?"

    조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장시언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도, 아무런 말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었다.황제는 더 이상 장시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에게 몸을 겹쳐왔다.

    "내가 그렇게 사람을 불안하게해?"

    "예?"

    뜬금없는 장시언의 말에 윤상궁은 눈을 껌벅거렸다.

    "폐하께서 그러시더라구. 내가 자길 불안하게 한다고. ......전에는 사라져 버릴 것 같다고 하더니, 이젠 내 마음속에 누가

    있냐고 대뜸 물어보시던데."

    감이 좋으신 분이네요, 역시. 윤상궁은 그렇게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계속 고민하세요. 더요, 더!사실 은근히

    마음속으로 황제와 황후, 둘의 사이를 응원하고 있었던 윤상궁은 상전이 제발 좀 깨닫기를 바랐다. 매사에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관심없던 사람이 황제에 대해 저렇게 신경 쓰면서 왜 자각을 못 하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서 뭐라 하셨습니까?"

    "아무 말도 안했어. .....근데 그게 좀 이상했단 말이지."

    "예? 뭐가요? 폐하께서 그런 것을 물으신 것이요?"

    "음, 그것도 그렇지만...."

    장시언은 말을 하려다 말았다.사실 황제가 점점 달라지는 것도 이상했지만 어제 본인도 좀 이상하긴 했다. 황제의 애달파

    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속으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일부러 목소리를 안 낸것도 이제와 생각해 보면 심술을 부리고 싶었던

    것 같다.하지만, 왜? 왜 심술을 부리고 싶었을까?

    "마마."

    윤상궁의 부름에 장시언은 하던 생각을 멈추고'응?' 하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후궁들과 담소를 나누실 것입니까?"

    "아니, 오늘은 피곤ㅡ 잠깐."

    장시언은 피곤하다며 됐다고 말을 하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후궁들과의 담소라면.....

    "원비도 오나?"

    "....그야 오시겠지요."

    "음, 그렇단 말이지..."

    "......"

    "하는것이 좋겠어. 다들 모이라 해줘."

    "....예, 마마."

    윤상궁은 물러가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이고.....어찌 아직도 눈치를 못 채시는지, 참.

    비들만 모였던 저번 자리와는 달리 이번엔 모든 비빈들이 다 모였다. 내명부의 모임은 의외로 아주 조용했다. 장시언은

    이제껏 후궁들이 제각각 떠들어 대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원비는

    어디에 있....장시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원비를 찾다가 바로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른 비빈들과는 달리

    원비는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장시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만하고 당당한 눈빛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무시해버렸을 텐데

    장시언은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장시언을 본 원비는 피식거리며 비소를 날렸다.

    뭐야, 저거. 괜히 짜증나네. 장시언은 원비의 비소를 담담히 받아주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눈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지. 스스로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차들 드세요.' 하며 찻잔을 들었다. 후궁들이 그 말에 약속이나

    한듯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 순간, 원비가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소첩 회임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말에 찻잔을 들고 있던 비빈들이 일제히 원비를 바라보았다. 비들의 눈매는 특히나 사나웠다. 장시언은 잠시 생각하다

    '그렇습니까? 축하합니다, 원비' 하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있던 원인모를 앙금이 약간은 사라진 것 같다. 흐음,

    그래서 어제 폐하가 널 찾아갔구나? 그래, 후궁이 회임을 했다는데 당연히 가봐야 했겠지.장시언의 축하를 받은 원비는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감사합니다, 황후마마.' 하고 말을 했다. 뒤따라 축하의 말을 전하는 비들의 얼굴은 가히 좋지 않게

    일그러졌다. 혹여 황자를 낳으면 어찌하나, 하는 불안감이 그녀들의 얼굴에 서려있었다.

    사실 원비의 입장에선 이런 반응을 보여야 할 사람은 황후, 장시언이었다. 다른 비들은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 밖이었다.

    심신이 여린 황후가 자신의 회임 사실을 알면 황제의 사랑을 빼앗길까 두려워 섧게 눈물을 흘리거나 충격으로 픽 쓰러질거라

    예상했다. 그녀가 아는 황후라면 그러고도 남았으니까. 헌데....웃어? 원비는 순간 밀려오는 패배감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황후는 언제부턴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태연하고 당당해 보였다. 이가 갈린다. 어제 황제가

    자신에게 들렀을 때가 떠오른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황후에게 간다며 걸음을 돌리려는 황제의 다리를 잡고 추할 정도로

    빌었다. 가시면 안된다고, 함께 있어달라고 애걸복걸 사정을 했다. 황제는 한참 동안 이어진 그녀의 하소연을 다 듣고

    비웃으며 황후에게 가버렸다. 치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황후는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의 회임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가 눈에 거슬렸다.대체

    네가 무엇이기에! 아이도 못낳는 사내 주제에!!자신은 그토록 원하고 바랐지만 가지지 못했던 황제의 마음을 저따위 놈이

    가졌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다.저 비루한 사내를 황후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싶다. 다시는 보이지 않게 없애버리고 싶다.

    명줄을 끊어놓고 싶다.원비는 겉으론 미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검디검은 흑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

    윤상궁은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으아~'하고 벌러덩 누워버리는 상전을 보며 '옷은 좀 갈아입고 누우십시오.'하고 잔소리를

    했다. 장시언은 쉬이 멈출 것 같지 않은 잔소리에, 일어나 훌렁 겉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침상으로 엎어졌다. 아마 황궁에서

    가장 눕길 좋아하는 이는 바로 장시언일 것이다. 뒤집어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겉옷을 보며 윤상궁은 혀를 찼다.

    "옷을 뒤집어 놓으면ㅡ"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는 옛말이 있지. 나도 알아. 하지만 윤상궁이 해줄거잖아."

    윤상궁은 옷을 줍다가 멈칫했다......맞는 소리지만 좀 얄밉다. 입궁하기 전, 사가에 있을 적엔 이런 때 등을 찰싹 때릴 수

    있었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황후마마 등을 때릴 수도 없고....장시언은 뾰족한 윤상궁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으흐흐흐....'하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난 그래도 윤상궁이 날 좋아한다는걸 알고 있지~"

    "예?"

    "윤상궁~~~~"

    "아유, 징그럽습니다."

    윤상궁은 징그럽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이미 피식거리고 있었다. 장시언은 더 능글맞게 윤상궁을 불러댔다.

    "윤상궁~ 날 좋아하잖아, 윤상궁~ 좋아죽잖아, 윤상궁~~~"

    "풉!"

    계속되는 윤상궁 타령에 결국 터졌다. 게다가 표정은 어찌나 능글맞은지, 안 웃고는 못 배기겠다. 가만히 있으면 조용하면서도

    새침해 보이는 인상이라 더 그랬다. 안 그렇게 생겨서 무슨 넉살이 이리도 좋은지.윤상궁은 '에휴....'하고 투덜거리면서도

    뒤집힌 옷을 본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러면서 좀 전에 있었던 후궁들과의 자리가 어땠는지 물었다.

    "음...., 별거 없었어. 그냥 원비가 회임을 했다는 것 정도?"

    옷을 걸고 있던 윤상궁은 뜨악한 얼굴로 장시언을 돌아보았다. 웃음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뭐, 뭐라구요?"

    "원비가 회임을 했대."

    "그게 왜 별일이 아닙니까?"

    "으악, 깜짝이야!"

    "마마께도 큰일이지요."

    "뭐? 왜?"

    장시언은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황자를 낳은 다른 비들에겐 큰일이겠지만 왜 내게? 윤상궁은 답답함에

    퍽퍽 가슴을 쳤다.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응, 그냥 그런데."

    더이상은 안되겠다! 딱 집어 말해주지 않으면 평생 모르겠구나!

    "마마. 소인의 생각으로는ㅡ"

    "내가 질투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야?"

    장시언은 선수를 쳐 윤상궁의 말을 끊었다. 윤상궁의 눈이 땡글 해졌다.아, 아니, 뭐, 질투라기 보다는.....

    "그래, 솔직히 어제 일이 있고 나서 원비가 좀 신경 쓰였어. 인정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폐하께서 나만 볼 거라고 자만을

    하고 있었는지.... 뭐 아무튼 그랬어. 지, 질투를 아주 조금 했던 것도 같고..."

    장시언은 순순히 인정했다. 하루 종일 그를 괴롭히던 생각을 나름 정리하고 내린 결과였다. 윤상궁은 장족의 발전에

    놀라워했다.아아, 그럼 드디어...드디어...., 폐하를 향한 마음을....

    "하지만 회임을 한 것은 달라."

    응?

    "뭐가요? 뭐가 다릅니까?"

    윤상궁은 기대가 어긋나가자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물었다.장시언은 너무 뻔한 것을 묻는 윤상궁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야....'하며 말문을 열었다.

    "난 남자니까. 내가 왜 원비가 회임을 한 것까지 질투를 해야해? 아이를 가지고 낳는 것은 여인의 특권인데."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윤상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다시 '저...그래도...., 폐하의 아이인데요? 그래도 정말

    아무렇지 않으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녀는 쉽게 포기를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이번엔 장시언도 순간 멈칫했다. 원비의

    아이가 아니라 황제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느낌이 생소했다.응? 왜 이러지?

    "....사, 상관없어, 나랑은."

    장시언은 그래,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윤상궁은 그의 반응에

    이번에야말로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마마."

    "왜?"

    "제 생각엔 마마께서 폐하를 마음에 두고 계신것 같습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깊게요."

    "....무, 무슨 소리야. 아니거든?"

    "맞습니다."

    "아니라는데도?"

    "틀림없습니다. 마마께서 지금껏 놀고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연애에는 관심이 없으셔서 모르시는 거에요."

    "뭐엇?! 말도 안돼!"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마마께서 어디 다른 사람 생각을 하다가 머리가 아프신 적이 있던 분입니까? 누굴 그렇게 오래

    생각해 보신 적이나 있으세요?"

    ....물론 없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이나 쓰시던 분이셨나요?"

    ....당연히 아니다.

    "그것 보십시오. 틀림없습니다."

    장시언은 할 말을 잃었다. 확신에 찬 윤상궁에게 더 이상 그 어떤 반박도 할수가 없었다.내가 폐하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

    아, 그래. 인정한다. 황제는 종종 사람을 경악하게 만드는 집착을 내비쳤지만 그 이외에는 나쁘지 않았다. 장시언에겐 간,

    쓸개 다 빼줄 듯이 헌신적이었다. 처음부터 황제를 싫어한 적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성정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무서웠을

    뿐이다. 하지만ㅡ, 내가 폐하를 마음에 두고 있다라...? 윤상궁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애 상대로의 호감을 말하는 것이었다. 장시언이 황제를 상대로 그런 호감을 품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장시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뻑ㅡ! 하고 치고 간 듯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윤상궁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오지 않길 바라던 순간이 와버렸다. 황제는 정무가 많았는지 평소보다 늦게 걸음을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희한한 것이

    한번 각인이 되면 그 부분에 더 집착을 하고 신경을 쓰게된다. 마치 지금처럼. 장시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황제를 보자마자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으윽, 큰일났다. 어쩌지! 어쩌지!!

    "왜 급히 고개를 돌리느냐? 애를 태우는 건가?"

    황제는 손을 들어 장시언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아악ㅡ! 뭐야! 완전 부담스러워!

    "시언아...."

    계속 되는 부름에 장시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기를 잠시, 바로 또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말았다. 뭐야, 황제 얘! 오늘따라 멋있어 보여! 잘생겨진 것 같아!! '제 생각엔 마마께서 폐하를 마음에 두고 계신것

    같습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깊게요.'장시언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윤상궁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실 황제는 처음부터 잘생긴 외모였다. 키도 크고, 유려하면서도 탄탄한 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를 죽게 만들었다.

    (물론 장시언은 기가 죽지 않았지만.)

    "흠... 내가 널 화나게 한 일이 있었던가?"

    "..........."

    그런게 아니야!

    "어제 일 때문이냐?"

    응? 어제 일이라니?

    "널 두고 원비에게 가버린것 때문에 이러는 거냐는 말이다."

    그것 때문이 아니데....아, 다시 생각해보니 좀 화가 나는 것 같다. 가볍게 넘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원비에게 간 것은...."

    "원비가 회임을 하였다지요?"

    장시언은 이미 알고 있으니 말씀하실 필요 없다는 듯 얘기했다. 황제는 '그래.'하며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장시언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마주보았다.

    "회임을 했다하여 잠시 들렀던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늦게 오셨습니다."

    어라? 내 목소리가 왜 이래, 이거?자기도 모르게 쌀쌀맞은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장시언은 순간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황제는 뭐가 그리 좋은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무가 많아 원비에게도 늦게 갔었다."

    "..........."

    "혹 질투를 한 것이냐? 내가 원비에게 가서?"

    "........아, 아닙니다. 질투라니요."

    이 멍충이! 거기서 목소리를 떨면 어떻게 하냐!

    "이제 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원비를 마지막으로 황손을 가지는 후궁은 없을거라 약조하마."

    어..... 약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나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원비를 안았을때를 기억하고 있다."

    "............."

    "사실 그때 네 생각을 했었지."

    "....예?"

    스스로 이상하다 여기던 장시언은 황제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황제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눈빛은 정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네 안은 어떨까, 네 울음소리는 어떨까, 그 생각만 했다."

    "아....저..."

    장시언은 황제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뒷걸음질을 했다. 황제는 자연스럽게 장시언을 침상으로 이끌었다. 장시언은 이미

    누워 있었고 그의 옷깃을 헤치며 황제의 손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쾌감에 젖은 원비의 얼굴을 보면서 머리는 점점 차가워졌어."

    우와...... 나쁘다. 나쁜 사내야.

    "그래서 더 널 떠올렸다. 너와.... 이렇게 하는 것을."

    그순간, 황제는 장시언의 옷을 잡아 뜯어버렸다. 힘이 어찌나 억센지 순식간에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심장 뛰는 소리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폐, 폐하....."

    "계속 이리만 해. 마음을 드러내란 말이다."

    황제는 어딘가 들뜬 듯한 목소리였다. 장시언은 어쩔줄을 몰라 하며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황제의 목에 팔을 감았다.

    **********

    "하아...."

    "땅 꺼지겠습니다."

    윤상궁은 한참 전부터 푹푹 한숨을 쉬는 상전에게 한마디 했다. 어제 자신이 했던 말이 가져온 여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계속된 한숨에 조바심이 난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이게 다 윤상궁 때문이야."

    "예? 제가 무얼요?"

    "윤상궁 때문에 난 이기적이고 옹졸한 인간이 되어버렸어. 어흐흑....."

    "우는 척하지 마세요."

    "쳇."

    장시언은 바로 울상을 지워버렸다.아우도 그렇고, 윤상궁도 그렇고, 자주 보는 이들에겐 역시 안 먹히는구나.

    "헌데, 이기적이고 옹졸한 인간이라니요?"

    윤상궁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뜬금없이 이기적이고 옹졸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하는 상전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니 더 궁금했다.장시언은 다시 푹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말 그대로야.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굉장히 이기적이고 옹졸해졌어, 내가. 윤상궁때문에....어흐흑...."

    그리고 우는 척 다시한번 시도.

    "마마, 장난 그만 치세요."

    하지만 무참히 실패.아, 진짜 안 먹히네.

    "자세히 좀 말씀해 보세요. 뭐가 제 탓이란 말씀이십니까?"

    "윤상궁이 이상한 말을 해서ㅡ아니, 생각도 안 하던걸 깨닫게 해줘서 어제..., 어제...."

    "어제요? 뭡니까? 어제 뭔데요, 마마?"

    "어제..... 아무것도 아니야."

    장시언은 말을 하려다가 눈을 빛내고 있는 윤상궁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윤상궁은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장시언의 얘기를 멋대로 예측하고 있었다.

    "원비를 질투하셨습니까? 폐하께 막 티를 내셨어요?"

    ".......아니거든."

    "티 내셨어요? 이제 폐하를 좋아하는 것이지요, 마마?"

    "좋아하긴 누가!!"

    "아닙니까?"

    윤상궁이 진지하게 묻자 장시언은 우물쭈물하다가 딴 곳을 보며 얘기했다.

    "....조, 조금 호감이 생겼다 싶은 거지. 아직 좋아하는건 아니야."

    말을 끝내고 괜히 휘파람까지 분다.답지 않게 앙탈 부리시기는. 윤상궁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거렸다.

    "왜 웃는 게야?"

    장시언은 그런 윤상궁을 보며 샐쭉한 표정으로 톡 쏘듯이 얘기했다. 하지만 돌아오는것은 '글쎄요.' 하는 웃음을 머금은

    대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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