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시탈 황후-1화 (1/8)

각시탈 황후

by 류은잔

<서장>

[ 이제나 오시려나, 저제나 오시려나. 달 밝은밤, 내 님은 오실 생각을 아니하고,사무친 외로움에 베갯잇만 젖어가네.]

뚝.뚝.뚝.뚝. 서러운 눈물이 하얀 종이를 적셔간다. 꽃이 피듯 글씨가 번진다.마음에 자리 잡은 그리움처럼 서서히, 서서히.....

푸하하하~! 아이고, 배야! 악! 이게 뭐냐고, 대체!!

종이 위에 하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비단 손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떨리고 있었다. 그에 맞춰 물방울이 군데군데 뚝뚝

떨어졌다. 장시언은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나머지 한쪽 팔로 당기는 배를 감쌌다. 웃음을 참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어느 정도 웃음이 잦아들었을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리를 곧게 세우고 깊게

심호홉을 했다.

아-, 간만에 하려고 하니까 더 웃기네. 이제 웃지 말아야지. 하지만, 각오도 잠시. 떨어진 물에 잔뜩 울은 종이를 보자 다시

웃음이 터지려고 한다. 장시언은 이번에도 참지 못해 고개를 돌리고 끅끅거렸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윤상궁은

이젠 너무나도 익숙해 별다른 타박도 주지 않았다. 덕분에 밖에서 듣고 있던 나인들의 걱정은 점점 커져갔다. 얼마나 외롭고

서글프시면 저리 섧게 우실까. 오늘도 눈물로 밤을 지새우시는구나, 그네들은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모시는 상전꼐서 단 한 번도 지아비로부터 따스한 정을 받지 못하셨다는 것이 그네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안의 상전이 웃겨서 자지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장시언은 자신이 만들어 낸 청승맞은 종이를

만족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글재주가 원체 없어 써놓은 글의 내용은 진부하고 비루했지만 떨어뜨린 물방울들은 누가

보아도 눈물이라 착각이 들법했다. 그는 책상 옆에 놓여 있던 영견에 손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밖에 궁녀들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얘기했다.

"나는 이만 자야겠네."

"예. 편히 주무시옵소서, 마마."

"오늘도 호롱불을 켜둔 채로 자야 하나?"

"물론입니다."

귀찮아 죽겠네. 장시언은 투덜거리며 침상으로 걸어갔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자 바로 잠이 오기 시작한다.오늘은 너무

피곤한 하루였어. 아, 내일은 뭘 할까.....밖에서 궁녀들의 울음소리가 커져갔지만 그는 그렇게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다.

제 1장

명문가의 장손이었던 장시언이 황후가 된 것은 어찌 보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그가 태어나 자란 신국은 대대로 남자를

황후로 삼았고 그는 과거를 통해 출세하려는 삶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신국이 황후의 자리를 남자에게만

허락하는 이유는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비빈들의 투기를 잠재우기 위함이 첫 번째였고, 외척 세력이 커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 두 번째였다. 황후는 내명부의 수장이었으나 말 그대로 하나의 상징일 뿐이었다. 신국의 내명부는 근엄한

황권 아래, 이제 있으나 마나한 것으로 전락했다. 비빈들은 나름 그 안에서 자신들의 세력 다툼을 하긴 했으나 모두다

고만고만한 정도였다.

현 황제가 즉위하고 제법 오랫동안 황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황제는 지독히도 남색을 혐오했다. 남자 황후라니 듣기만

해도 역겹다며, 공식 석상에서 말할 정도였다. 과거 몇몇 황제들 가운데 황후가 남자임에도 진심을 다해 사랑한 경우가

있었으나 이번 대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아니, 불가능해 보였다. 그 말을 아버지를 통해 들었을 때,

장시언은 쾌재를 불렀다. 모든 것이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는 입신양명이니 뭐니 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정말

시간이 가는 대로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하고 싶은것만 하며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더욱이 황제가 남색을 혐오한다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으랴. 황후만 되면 그저 황후궁에 틀어박혀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었다.

장시언은 아버지, 장인욱에게 황후가 되고 싶다고 얘기했다. 평소 그의 성격과 본성을 잘 아는 장인욱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얼굴. 그때 장인욱의 얼굴엔 체념이 섞여 있었다. 장남으로

입신양명하여 집안의 위신을 드높여야 할 장시언이 조금의 출세의욕도, 야망도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탓이다.

장시언은 그렇게 황후로 낙점이 되었다. 자신의 세력들과 모두 합심해 황후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수는 없다며, 자신의 아들

장시언을 황후로 삼아달라고 간청을 한 것이다. 황제는 계속 되는 주청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귀찮아 결국 허락을 했다.

그 역시 신국에 이어져 온 전통을 언제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장시언의 아우인 장영한은 황후 낙점 소식에 정말

황후가 되는 거냐며, 그럼 궁에 들어가서 사는 것 아니냐는 아주 당연한 소리를 해댔다. 재미난 수다 상대가 사라지게

생겼으니 녀석의 입장에선 아쉬울 법도 한 일이었다. 하지만 장시언은 아쉬워하는 아우를 뒤로하고 평생 놀고먹겠다는

황금빛 꿈에 부풀어 입궁을 했다.

황제와 조정 대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사뿐사뿐 천천히 걸음을 하며 장시언은 한 가지 생각만을 되뇌었다.겁이란 겁은

죄다 집어먹은 듯 가련하게. 그리고 아주 처량맞게!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여성상이 나약하고 청승맞은 여인이라는 것을

들었기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최대한 가증스럽게 연기를 했다.나는 연약해. 나는 지금 겁을 먹었어. 큰소리를 치면 바로

쓰러져 버릴 거야.예를 취하고 앉자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라.'

말을 듣자마자 발딱 고개를 쳐들고 싶었지만 장시언은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황제는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고개를 들라고 명했다. 장시언은 고개는 들되 눈을 내리깔았다. 당연히 일부러.

'짐을 보라.'

'........'

'짐을 보라 했다.'

귀도 멀쩡하면서 꼭 두 번씩 말을 하게 했다. 소심하고 답답한 사내로 각인되기 위함이었다. 장시언은 황제가 폭발하기

적전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장시언과 눈이 마주친 황제는 한참 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다가 눈을 찌푸렸다.

아주 좋은 징조였다.

국혼은 별 탈 없이 끝이 났다. 탈은 오히려 국혼을 치르고 난 후에 생겼다.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동방에서 도통 걸음 할

생각을 하지 않는 황제를 기다리는데, 밖에서 취객의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바로 아우인 영한의

목소리였다. 몸 쓰는 것만 빠삭하지 머리는 도통 굴리지 않는ㅡ청춘한 뇌를 자랑하는ㅡ그의 아우는 거나하게 취해

'형님~!혀~엉니임~~!!' 하며 애타게 그를 불러댔다. 오지 않는 황제를 그리워하는 척하고 있던 장시언은 놀라 동방 밖으로

나가 보았다. 그가 나가자 아우는 '우헤헤헤~~' 하고 모자란 웃음을 지으며 곰 같은 덩치로 그를 끌어안았다.

귀족들의 연회자리에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여기에...? 말술인 녀석이 혀가 꼬일 정도로 마시다니.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형님~ 형니임~~'

'........'

남다른 우애를 자랑하는 장씨 형제지만, 취한 영한과는 달리 장시언은 궁녀들의 시선 때문에 창피스러웠다. 그래서 계속

되는 형님 타령을 참고, 참다가 결국 남들의 시선을 피해 교묘하게 아우의 복부를 가격했다. 뼈밖에 없지만 장시언은 알아주는

돌주먹이었다. 영한은 끽소리도 못하고 쓰러졌고 장시언은 자신이 그리 만들어 놓은 주제에 걱정에 찬 얼굴로 어서 데리고

가 살피라고 말을 했다. 황제는 그 소동 후에 동방으로 찾아왔다. 그것은 황후가 되고 처음으로 황제와 독대를 하는 것이었고

소위 말하는 초야였다.

'초야라고 하여 설마 나보고 널 품어 달라 하지는 않겠지?'

'...........'

장시언을 계속 노려보고 있던 황제는 낮게 말을 했다. 황제의 말에 장시언은 그야 당연하지, 하고 생각하며 표정은 여전히

가련하게, 크나큰 상처를 받은 것처럼 꾸며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또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네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다. 남자 황후라니. 내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널 품어야 한단 말이냐?'

야, 고맙다. 정말 고맙다.장시언은 눈을 내리깔며 소박맞은 부인을 계속 연기했다.

'하다못해 네가 미동이었다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ㅡ.'

황제는 말을 끊고 그를 천천히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노골적으로 품평을 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멀대같이 큰 키 하며, 삐쩍 마른 볼품없는 몸뚱이를 보니 그럴 생각조차 싹 가신다. 비루해도 어찌 이리 비루할 수 있단

말이냐? 게다가 얼굴까지 박색이라니.'

절묘하게 흐르는 눈물 한 줄기. 박색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억울했지만 장시언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그래. 그 상태로

그냥 나가라. 피곤해서 자고 싶으니까 그냥 나가버려! 바람은 이루어졌다. 황제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장시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됐다. 이제 됐다. 이제까지 살면서.....아니, 죽을 때까지 이보다 더 큰 행운은

없으리라. 저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토록 염원하던 삶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좋아하는 것만 하며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찬란한 황금빛 인생이 말이다.

*******

으아~좋구나!장시언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맑은 초록의 향, 싱그러운 풀내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사시에서 오시로

넘어갈 무렵 궁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느긋하게 노닐며 경치를 구경하는 것은 장시언의 성격에 딱

어울리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황제를 그리워해서 그의 주변에 맴도는 불쌍한 황후로 각인될 수 있었기

때문에 장시언은 이것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장시언은 주변을 둘러보며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걷다가 멈칫했다. 평소와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후궁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거리기 바쁘다.

경박스럽긴. 사실 웃음소리가 경박스러운 걸로 치자면 자신도 누구 못지않은데 그녀들에겐 대적하기 힘들어 보였다.후궁들과

장시언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후궁들은 장시언을 보았음에도 본체만체하며 한 명, 한 명, 스쳐 지나갔다. 간간이

코웃음 소리도 들렸다. 그녀들에게 황제의 사랑은 커녕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황후는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장시언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 무시해라. 나 훨씬 더 무시해 줄 테다. 그러면 내가 이기는 거니까!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하면, 그래. 싫어해라. 내가 널 더 싫어하니까 내가 이긴 거다. 정말 자기 마음 편할 대로 생각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는 난 승리자, 넌 패배자, 하는 생각이 깊이 뿌리내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윤상궁의 말을 빌리자면,

기가 막힐 정도로 복 받은 성격이었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나만 떳떳하면 되지.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태평한 성격. 윤상궁은 화병에 걸릴 일이 없으니 늙지도 않고 오백살까지는 무리 없이 사실 거라는 말도

했었다.장시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줄을 지어 있던 후궁들이 모두 그를 지나쳐간 순간, 휘이익ㅡ 바람이 불어왔다.

악! 뭐야, 이거!! 바람을 정면에서 맞은 장시언은 눈에 먼지가 들어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몇 번 비비고 깜박이다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마음만 먹으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장시언에게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흐르는 눈물에 먼지가 씻겼는지 눈이 편해졌다. 장시언은 흘러내는 눈물을 아무렇지

않게 슥ㅡ 닦고 발을 뗐다. 헌데, 그때 마침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ㅡㅡㅡㅡ황제였다.

황제는 언제나처럼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오늘따라 더 심사가 뒤틀린 것처럼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표정이 일그러지고 홱 고개를 돌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는 다시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무래도 편전으로 가는 것인 모양이었다. 기회였다. 장시언은 황제의 뒷모습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애절한 마음을 손끝에 담아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힘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손은 쓸쓸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 만족스럽다. 지지리 궁상이었으며 치를 떨 만큼 청승맞았다. 보는 눈도

많았으니 분명 황제의 귀에도 말이 들어가겠지? 그럼 이제 황제는 한 달에 한번 형식적으로 하던 걸음도 뚝 끊을 것이다.

장시언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

아침에 눈을 뜨자 유독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어제의 가증스러웠던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랑스러웠다. 장시언은

오독오독 말린 과일을 씹어 먹으며 콧노래를 불렀다.오독오독. 흐으응~ 오독오독. 으흐응~

"마마, 수라상을 올리겠사옵니다."

화들짝!.........까, 깜짝이야.

"되, 되었다. 입맛이 없구나. 물리도록 해라."

그는 씹던 것을 급히 삼키며 얘기했다. 갑자기 목이 막혀 목소리가 작기도 했지만,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른하게 힘이

빠져 있던 터라 목소리가 실의에 잠긴 것처럼 들렸다. 밖에서 '.....예.' 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물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장시언은 다시 말린 과일을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윤상궁은 편한 자세로 퍼져 있는 상전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시절부터 장시언을 돌봐온 그녀는 장시언이 황후가 되었을 때 함께 입궁했다. 게으르고 마음 편한

도련님은 황후가 되고 난 후엔 더 심해졌다. 게다가 편하게 살기 위한 처세술이 어찌나 좋은지 황제의 이상형에 반대되는

청승맞고 가련한 여인 흉내를 기함할 정도로 잘 냈다. 어제만 생각하면 아직도 누가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친 것처럼 얼이

빠진다.

"오늘은 무엇을 하시며 보낼 생각이십니까?"

"음..........받이나 좀 갈아 볼까?"

"예?"

"벼농사를 지어보고 싶은데 궁에선 할 수 없으니 밭농사라도 해보려고. 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그러시면 지금까지 연기하신 것이 죄다 물거품이 되실 텐데요."

"후후......내 다 생각이 있지."

장시언은 비실비실 웃으며 그런 것쯤은 다 염두에 두고 일을 벌이니 걱정 말라고 윤상궁을 안심시켰다. 윤상궁은 '물론

그러시겠지요.' 라고 말하며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오, 신나! 장시언은 황후궁 내원에 텃밭을 갈며 돌을 빼내 저 멀리 던지고 다시 신나게 밭을 갈았다. 함께 일을 돕는

궁녀들은 그 모습을 보며 너무 슬프셔서 이젠 별짓을 다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밭을 어느 정도 다 갈고 씨를 뿌리고

있을 때, 장시언은 윤상궁에게 눈짓을 했다. 때가 된 것이다. 윤상궁은 재빨리 상전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순간,

장시언이 이마를 짚으며 '아....' 하고 몸에 힘을 뺐다. 기다렸던 윤상궁은 흐느적거리는 몸을 잡았다.

"마마!"

윤상궁의 목소리에 궁녀들이 놀라 몰려든다.

"마마! 정신 차리시옵소서! 마마!!"

"이, 이 일을 어쩝니까?"

"제가 가서 태의 영감을 모셔오겠습니다."

태의 영감을 불러온다는 소리에 장시언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되었다. 잠시 현기증이 난 것인데 무슨 태의 영감을 부른단 말이냐."

"하오나 마마........"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다."

장시언의 말에 윤상궁을 제외한 모든 궁녀들이 '마마.......' 하며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결국 태의는 부르지

않았다.하지만 이 일은 장시언의 의도와는 다르게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쓰러졌었다지?"

어쩐 일로 왔나 했더니.......장시언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찌푸렸다. 눈치없는 것들! 결국 폐하께 고했단 말이냐!

"아, 아닙니다. 그저 잠시 현기증이 나....."

"몸뚱이만 비루한 줄 알았더니 체력까지 비루하구나."

"........."

장시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린 시절부터 마른 체구에 비해 체력이 남달랐다. 힘도 세서 쌀포대 같은 것은 우습게 들고

다녔다.입을 다문 그를 보며 황제는 코웃음 쳤다.

"왜 아무 말이 없지?"

"........"

"돌을 앞에 두고 얘기해도 너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럼 돌이랑 얘기하던지.문득 생각을 하다가 장시언은 모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가 속으로 생각한 말이 너무 웃겨서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돌과 얘기하는 황제. 돌에게 비루하다가 욕하는 황제.....아으, 미치겠다. 장시언의

떨리는 손을 오해한 황제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한심하긴. 네가 그러고도 사내란 말이냐? 무슨 말만 하면 떨어대는 네가?"

"..........."

돌에게 네가 사내냐며 화를 내는 황제............악! 제발 그만 해라!

"너만 보면 화가 치민다. 너 따위를 황후로 들인 것은 내 치세에 더할 나위없는 치욕이란 말이다."

".......마, 망극...."

"집어치워라. 듣기 같잖다."

적절하게 한 번씩 '망극하옵니다.' 를 써줘야 하는데 집어치우라고 하니 하지않는 수밖에.장시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웃음을 참아 붉어진 그의 얼굴이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다.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아라. 내 눈에 뜨이지 말라는 소리다. 알겠는냐?"

마음이 통했구나. 그게 내가 바라는 삶이다.

".....예, 폐하."

황제는 고개를 숙인 그를 지나쳐 황후궁을 나가버렸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장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다 쑤셨다. 그는 허리를 몇번 돌려보고 책상에 앉았다. 귀찮지만 오늘 황제가 다녀갔으니 그리움에 사무친다는 마음을 글로

써야한다. 이제 쓸 말도 없는데...내일은 윤상궁에게 연시가 적힌 책을 더 사오라 해야겠다.장시언은 하품을 하며 붓을 들었다.

********

황후궁을 나와 후궁의 처소로 간 황제는 심기가 뒤틀렸다. 콧대 높은 그의 비빈들과는 달리 황후는 언제나 그를 불편하게

했다. 그 처연한 얼굴만 보아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거칠게 추삽질을 하며 교성을 뱉어내는 후궁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에 저만 있는 줄 아는 이 여인도 그의 아래에선 항상 나긋나긋한 고양이처럼 변모한다. 어찌나 색사에

능한지 그의 허리에 다리를 두르며 허리를 놀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황제는 허리를 박으며 탐스러운 젖가슴을

주물렀다. 후궁의 입에선 다시금 교성이 터져 나왔다. 머리가 점점 차가워진다. 반복되는 교접에 여인의 몸이 달아올랐지만

황제는 그 모습에 아무런 성욕도 일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감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폐하, 혹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사옵니까?"

몸이 녹진하게 풀어진 후궁은 그의 팔을 가슴에 가두고 콧소리를 냈다. 노골적인 뜻을 담은 교태로운 몸짓이었으나 황제는

그것을 철저히 무시했다. 더 이상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후궁은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소첩, 오늘 몸이 타는 것 같았사옵니다. 폐하께서 너무 뜨겁고 거칠으셔서....."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예?"

마지막이라는 소리에 후궁은 눈을 깜박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황제는 달라붙은 여체를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를 안아도 갈증이 채워지질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은 없을 거란 소리다."

"폐....하....?"

후궁이 망연자실하게 그를 불렀지만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황후에게 간다."

그의 말에 모든 궁인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황제가 이 시간에 황후를 찾아가다니. 황후를 맞이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상선만이 그 자리에서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후궁으로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폐하?"

"나이가 들어 가는귀가 먹었느냐?ㅡ그래, 황후궁으로 간다 했다."

상선은 담담한 얼굴로 '모시겠사옵니다.' 라고 말을 하고 앞장섰다. 황후궁으로 황제를 모시는 그의 걸음이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황후궁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당연히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반가움과 동시에

의아함이 번졌다. 윤상궁이 서둘러 예를 취하고 허리를 숙이자 황제는 그런 윤상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황후가 아직도 침수 들지 않았느냐?"

그럴리가. 아마 불을 켜두고 자고 있을 것이다. 윤상궁은 '저...그, 그것이...'하며 말을 끌었다. 황제는 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윤상궁의 얼굴이 망했다는 생각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장시언은 평소처럼

널브러져 자고 있지 않았다. 정말 다행히도 책상에서 구구절절한 연시를 쓰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있었다. 황제는 흘러내린

장시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불편하게 팔을 베고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뒤따라 들어온

윤상궁에게 '황후궁은 매일 이리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나?'라고 물었다. 윤상궁은 그렇다고 아뢰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잘 때에도 불을 켜두고 자니까. 그 말에 황제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래, 그렇군...'하고 계속 장시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죄책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윤상궁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만 나가보도록 해라."

".....예,폐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팔자 좋게 자고 있는 장시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어나십시오! 뭐나 위험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애타는 바람과는 달리 장시언은 그녀가 나갈때까지 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롱도롱 팔자 좋게 잘도 잔다.

황제는 곤히 잠들어 있는 황후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을 쓸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우음...'하며 피하는 모습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 보았을때부터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이성적인 그였으나

장시언의 앞에서는 그럴수가 없었다. 화가나고 답답했다. 자신이 사내를 마음에 두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부정했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황제는 장시언의 벌어진 입술에 살짝 손가락을 넣었다. 부드러운 혀가 느껴졌다. 단잠에 빠져 있던 장시언은 이상한 느낌에

가물거리는 눈을 떴다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로 주춤거리며 말을 더듬는다.

"폐, 폐하....., 이곳은 어인....일로...?"

"오늘 밤 너를 안을 것이다."

"........예?"

장시언은 눈을 깜박였다. 안아? 누굴? 나를?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꿈이라면 끔찍한 악몽이다. 두 번

다신 꾸고 싶지 않은 인생 최악의 꿈이다. 장시언은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어서 잠에서 꺠어나길 빌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황제에게는 긴장을 하여 치맛자락을 쥐어뜯는 것으로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널 안을 것이다."

"........"

"너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안다."

"마, 망극..."

"하지만 더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약조하마."

장시언은 반사적으로 '망극하옵니다.'라고 말을 하려다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악. 꿈이겠지? 그래. 꿈일거야.

피곤해서 악몽을 꾸는......헉! 황제는 어느새 장시언의 바로 앞에 서있었다. 장시언은 당황해 다시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러자 황제의 눈이 불만스러운 듯 가늘어진다.

"저, 저기..."

"후....안다. 네가 겁이 많다는 것은."

.........겁? 거~업? 그건 또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넌 내가 처음일테지."

대체 뭐가 처음이란 말이냐?

"소중히 할 것이다."

소중히 하다니, 뭘? ......헉! 야, 야! 다가오지 마!!장시언은 달아나려 문 쪽을 힐끗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 황제의 힘에

이끌려 침상으로 쓰러졌다.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황제의 아래 깔리게 된 그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 장시언의 입장에선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대참사가 일어났다.

********

짹ㅡ 짹짹ㅡ 짹짹ㅡ 찌르르......

"제발 어젯밤 일이 꿈이었다고 말해줘."

"....꿈이 아닙니다."

장시언은 윤상궁의 단호한 말에 절망했다. 남들은 듣지 못하게 이불 속에서 어흐흑, 절규하며 발을 찼다. 밤새 황제에게

시달린 그는 좋은 체력 덕에 움직임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침상 밖으론 나가지 말라고 명한 황제 때문에 계속 이렇게 누워

있어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황제는 그 젊은 나이에 노망이라도 났단 말인가! 장시언은 황제가 싫어하는

여성상을 완벽하게 연기한 자신을 되돌아보았다.대체 어디서 잘못된건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폐서인 되고 싶어."

"헉! 큰일 날 소리 마십시오!"

"이게 아니야. 내가 바란 삶은 이런 게..."

"황제폐하 납시오!"

황제가 들어온다는 소리에 장시언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습관이 되어 배어버린 비굴함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윤상궁은

이불을 덮고 가만히 굳어 있는 장시언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후의 몸은 좀 어떠하냐?"

황제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장시언이 이불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를 단단히 착각한 그는 지난밤에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고 반성하고 있었다.

"미열이 조금 있으십니다."

"탕약은 먹었나?"

"드시질 못하십니다."

"그래. 몸이 약한 사람이니 그럴 테지."

장시언은 이불 속에서 주먹을 움켜쥐며 원통함에 부들부들 떨었다. 몸이 약해서가 아니라 써서 안 마셨을 뿐이다. 더욱이

미열은 그를 받아들여서 생긴 것이 아니고,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혼자 난리를 치다가 난 것이었다. 황제는 윤상궁에게

나가보라고 하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황제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장시언은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오지 마! 오지 마!!

"괜찮으냐?"

".........."

"다음부턴 괜찮을거다. 처음이라 그런 것이지 익숙해지면...."

뭐? 익숙?! 장시언은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폭발이라도 할 것 같이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열이 있는 병자였다.

"폐하, 저는....!"

"밖에 누구 없느냐! 당장 태의를 불러오라!"

황제는 생각보다 더 아파 보이는 장시언을 보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마와 볼을 만지는 그의 손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다시 누워라. 또 열이 오르면 아니 된다."

"아니, 그것이 아니고...폐하, 저는..."

"짐을 너무 걱정시키지 마라, 시언아."

아악ㅡ!! 뭐냐, 그 친밀한 호칭은!!! 장시언은 속으로 울부짖으며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말 못할 답답함에

눈물을 흘렸지만 황제가 더 극성을 피우는 바람에 그것도 계속 하질 못했다. 바람처럼 도착한 태의가 진맥을 하며 한 말은

그의 속을 더 뒤집어놓았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하시어 몸이 많이 약해지신 듯합니다. 게다가 지난밤 무리를 하셨다 하시니....."

이 망할 돌팔이!! 그런게 아니야!!! 장시언은 속으로 절규했다. 황제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흐믓한 얼굴로 장시언을 바라보고

있었다.울컥울컥 치미는 잦은 흥분에 열은 오랫동안 내리질 않았다.

**********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지치지도 않고 이건 꿈이다, 이건 꿈이다, 자기 세뇌를 했지만 밤이 되면 현실로 돌아왔다. 황제는

지겹도록 얼굴을 내밀었다. 얼굴만 내밀면 다행일 텐데, 보면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홍두깨도 같이 내밀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이 정말 딱 맞아떨어지는 나날이었다. 황제는 끈덕지게 달라붙었고 장시언의 몸을 제 몸이라도

되는 양 주물러댔다. 삐쩍 말라 볼품없고 비루한 몸뚱이라고 하더니 뭐가 그렇게 좋다고 물고 빠는지 모르겠다. 장시언은

점점 부엉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황후가 되었을때, 가장 좋은 것은 잠을 많이 잘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고 뭘 해라 간섭하지도 않았다. 그가 책을 보든, 잠을 자든, 모두 다 그의 마음대로였다.

물론 지금도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여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황제에게 밤마다 시달리는 통에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낮에는 어찌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눈이 퀭해질수록 돌아오는 것은 황제의 걱정어린 목소리뿐이었다. 그가 달작지근하게 몸 상태를 물어올 때면 장시언의

얼굴은 급속히 굳어졌다. 황제는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라 해석했는지 귀엽다고 난리를 쳤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장시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상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미간에 깊은 주름이 져있었다.

"삭발이라도 해야겠어."

그의 말에 차를 마시던 윤상궁은 '풉ㅡ!' 하고 차를 뱉어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계속해서 기침을 해댄다. 어느 정도

기침이 가라앉자 진지하게 물어온다.

"삭발이라니요? 이제와 스님이라도 되시겠단 말입니까?"

그저 삭발을 해서 지금보다 추해져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장시언은 윤상궁의 말에 눈을 빛냈다.

"스님? 그거 좋은데?"

윤상궁은 그게 대체 뭐가 좋냐는 눈빛으로 '폐하께서 윤허하실까요?' 하고 물었다. 장시언은 '윤허, 윤허...' 하고

중얼거리다가 이내 다시 눈에 힘을 풀었다.

"안 하시겠지."

"아시니 다행입니다."

"이제라도 본성을 보여 드려야겠어. 오만정이 뚝 떨어지게."

"폐하를 능멸한 죗값은 무엇으로 치르시려고요.?"

폐하를 능멸한 죗값....장시언 본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목숨과 밭을 갈고 있는 호미뿐이었다. 나머지 것들은 죄다 황제가

마련해준 것이었다.

".......호미로 죗값을 치를 수는 없겠지?"

윤상궁은 한숨을 쉬며 어리석은 생각은 하시지 말라고 타일렀다.

"폐하께서는 무서우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평소처럼 행동하시면 큰 화를 당하실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으으, 그럼 어찌해? 계속 그 홍두깨질을 견디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목소리 좀 낮추십시오. 그리고 홍두깨질이 뭡니까? 낯 뜨거워 죽겠습니다."

"어차피 다들 밭 갈러 갔어. 몰라? 나도 나가려고 했는데 폐하가 못 나가게 했잖아!"

"마마 몸을 걱정하셔서 그런 것이지요."

"몸걱정? 하!"

장시언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어지간해선 쉽게 지치질 않았다.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윤상궁도 알고 있는 바였다. 윤상궁은 장시언이 무슨 뜻으로 코웃음을 치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어쩔수 없질 않습니까. 개다가 그리 싫어하시는 것 같지도 않던데요..."

장시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래, 황제가 홍두깨를 들이댈 때마다 경악에 차 속으로 왁왁거렸지만 결국 나중엔 좋다고

아흥아흥거렸다. 하지만 그건 어쩔수 없지 않나!

"내가 고자도 아닌데 당연하지!"

"마마! 제발 목소리 좀 낮추십시오!"

황후의 입에서 고자 소리가 나오다니! 윤상궁은 난감해하며 바깥을 살폈다.장시언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영한이 말론 폐하께서 우리 가문에 은천강 주변의 땅을 주셨대."

"예에?"

밖을 살피던 윤상궁은 놀라 목청을 높였다.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은천강 일대라면

신국에서도 가장 비옥한 토지로 유명하다. 게다가 영의정을 역임하고 있는 장인욱에겐 이미 녹으로 받은 토지가 많이 있었다.

"정말이십니까?"

"응. 그렇다고 하더군."

장시언은 좀 전에 다녀간 아우를 떠올렸다. 두살 터울인 아우는 어린 시절부터 장시언을 잘 따랐다. 큰 곰 같은 그의 아우는

재주는 부리지 못했지만 워낙 순진하고 놀려먹기가 쉬워서 그 역시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아우의 가장 좋은 점은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이었다.

'폐하께선 아직 나이도 젊으신데 노망이 나신 걸까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장시언은 역시 나의 아우! 장하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다니! 하며 놀라워했다. 장시언이 털썩 다시

자리에 누우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다.

"아버님이야 지독할 정도로 충신이시니 딴마음을 품을 일은 없겠지만. 대체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어. 외척

세력을 안 키우려고 그렇게 공을 들이시던 분이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그러게요...."

윤상궁은 동의했다. 그리고 '마마를 정말 많이 사랑하시는 모양입니다.' 라고 덧붙이려다가 그러면 또 장시언이 '끄악ㅡ!'

소리를 지를 게 뻔했기에 하지않았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장시언은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노려보았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렸다.

"오늘은 아우가 다녀갔다지?"

"예, 폐하."

"그대의 아우는 무관이라 들었는데, 맞나?"

"예, 폐하."

"무관이라면 제법 강골이겠군. 황후가 먹어야 할 것을 아우가 다 빼앗아 먹은 모양이지?"

무슨 소리냐, 그게?

"넌 이리도 마르고 몸도 약한데, 동생은 아니라고 하니 하는 소리다."

장시언은 할 말을 잃었다. 음식을 빼앗아 먹은 것은 동생인 영한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먹을 것이 풍족한 집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맛있는 것은 죄다 장시언이 골라 먹었다. 나중에 영한이 자기 것은 어디 있냐고 물으면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그는 미식가였으며 은근 대식가이기도했다.식사도 성격대로 느긋하게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많이 먹는다는 것을 다들 잘 모를 뿐이었다. 장시언은 해명을 하자면 끝이 없는 이 답답한 상황에서 그냥 네 맘대로 생각해라,

하고 이번에도 황제의 오해를 내버려두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하다, 아우야.

"......예, 폐하."

"역시. 그나저나 그놈에 '예, 폐하.' 소리는 이제 그만 좀 할수 없나?"

"망극..."

"그만. 망극하다는 소리도 되었다. 내 하지 말라 했을텐데."

"망..., ....."

장시언은 또다시 '망극하옵니다.' 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선 딱 망극하옵니다가 적절한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그냥 가라.' 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말이다.

장시언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황제는 그의 얼굴에서 난감함을 읽어냈다. 어수룩하고 요령이 없는 황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부르러워졌다.

"짐을 보라."

"........"

싫다. 분명 부담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이 뻔한데, 보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물론 어느 모로 보나 잘생긴 외모였지만

장시언은 그 눈빛을 보면 어쩔줄을 몰라했다. 참한 아가씨들이었다면 부끄러움에 그리했겠지만 그는 정말 황제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자신을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볼때마다 우수수 닭살이 돋았다. 이것은 몸을 맞대는 뜨거운 밤의 대화와는

별개의 일이었다.장시언은 왜 황제가 갑자기 자신을 마음에 들어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는 남색을 지독할 정도로

혐오했었는데...

뜬금없이 황후궁으로 찾아와 자신을 안은 그날부터 대체 이유가 뭘까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질 않았다. 혹시 황제의 취향이

바뀐 것인가 싶었는데, 그날 이후 후궁들 모두 청승을 떨어대며 밤마다 눈물을 흘렸지만 황제는 그녀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감히 황후에게 투기를 하는 것이냐며, 어디서 가증스러운 눈물을 흘리냐고 호통을 쳤다. 연회 때 그 모습을 지켜본

장시언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기서 제일 가증스러운 것은 바로 날세! 그러니 날 폐서인 시켜주시오! 나는 준비된

폐서인!!' 하고 당당하게 외치고 싶었다. 황제가 후궁들을 향해 살기 어린 시선을 날리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리 말을 했을

것이다.장시언이 계속 고개를 들지 않자 황제는 직접 그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보인다.

..........폐하, 대체 너에겐 무슨 사연이 있었느냐? 무슨 억하심정으로 날 이리 귀찮게 하는 거냐? 난 편하게 살고 싶어 이곳에

왔는데 너 때문에 다 말아먹었다. 장시언은 한참을 그렇게 황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답답하다. 답답해.

어차피 내 속마음을 황제가 알 턱이 없는데 원망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나.그랬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황제는 전혀

몰랐다. 자신의 눈을 바라보던 깊은 눈동자가 슬쩍 피하며 도망가자 그것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유혹을

한 장시언은 한숨을 내쉬다가 그 상태로 입술이 막혔다. 아니, 먹혔다고 보는것이 맞을 것이다.

"하아...., 읏, 흐읏...! 아! 아앗!"

"크윽, 헉. 헉. 헉."

황제가 허리를 추어올릴 때마다 그 힘에 따라 몸이 흔들렸다. 황제의 땀이 가슴으로 투둑 떨어진다.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몸은 그래, 너 오늘도 왔구나, 기다렸다, 회포 좀 풀어보자! 하고 그를 잡고 놔주질 않았다. 으으, 내 팔자야.

장시언은 헐떡이고 교성을 뱉어내면서도 신세 한탄을 하고 있었다. 밤마다 자신이 고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쾌락을 동반한 씁쓸함을 가져왔다. 결국 이성 따윈 저 멀리 던져버리고 에라 모르겠다, 매달리긴 하지만 고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몸이 연결된 채로 황제에 의해 몸이 돌려 눕혀졌다. 생경한 감각에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 으읏...."

황제가 다시 몸을 움직인다. 퍽. 퍽. 교접이 깊어졌다. 장시언은 이불자락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황제의 움직임에 어느

한 지점이 자극되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 뭐, 뭐야? 이거 뭐야?!색사에 무지한 게으름뱅이 장시언은 눈이 휘둥그레져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허리를 멈추지 않고 장시언에게 입을 맞춰왔다. 악! 악! 악! 숨 막힌다! 야, 폐하!

숨 막힌다고!!호흡을 하지 못한 장시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황제의 허리짓이 더 거세진다.

"아, 아아! 아아앗ㅡ!!"

뭐야, 뭐야 이건! 완전 신세계다!!!

"크윽ㅡ, 시언아! 시언아ㅡ!!"

장시언은 몸을 떨며 사정했다. 황제 역시 장시언의 이름을 부르며 깊게 허리를 박았다. 긴 사정이 이어졌다. 몸 안에 뜨거운

기운이 확 퍼져 나간다. 미지의 세계를 경험한 장시언은 허리에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황제는 장시언의 몸에서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목이며 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손으로는 부어오른 유두와 '나 죽었소. 이젠 정말 갱생 불가.'를 외치고

있는 성기를 지분거렸다. 위험하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몸이 또 반응을 하려고 한다. 장시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까마득한

곳에 던져두었던 이성을 냅다 주어왔다. 이대로 욕정의 노예가 될 수는 없었다.

"폐, 폐하..."

"음? 왜 그러느냐?"

"신첩..., 갑자기 현기증이..."

"뭐라?"

황제는 놀라 장시언에게서 떨어졌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펴보며 '태의를 불러야겠다.'라고 말했다. 홍두깨가 몸 안에서

나가자 민감해진 몸이 움찔 반응을 한다. 하지만 장시언은 일단 오늘의 밤일은 끝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흥, 현기증은 무슨 개뿔이 연기증.

"아닙니다, 폐하. 좀 쉬면 나아질 것을요...."

"아니다. 짐이 오늘은 너무 과하였다. 이리 몸이 약한데."

"그만 자고 싶습니다. 태의는 부르지 마십시오."

그딴 돌팔이 다시는 부르지마.장시언은 이제라도 곧 잠이 들 것처럼 눈에 힘을 풀었다. 황제는 그제야 알았다고 하며 태의를

부르자 했던 말을 무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갔다. 순간 어? 가나? 하는 약간의 기대감이 차올랐다. 하루라도

편히 자고 싶었다. 예전처럼 대자로 뻗어서. 하지만 아쉽게도 황제는 가지 않았다. 따뜻한 물과 영견을 가지고 와 땀과

정액으로 범벅이 된 장시언의 몸을 닦아주었다. 매번 이럴 때면 장시언은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뭔가 가슴이

콕콕 쑤시는 듯한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항상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 그래, 구석구석 잘 닦아라,

하고 잠이 들어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윤상궁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장시언을 보며 또 왜 저러시나, 하고 걱정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그녀의 상전은

머리는 영민했지만 엉뚱한 구석이 조금, 아니 사실 아주 많이 있었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정말 뜬금없이

'푸핫~!'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일상다반사였고 엄청난 방책이라고 내놓는 것은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결정했어."

결의에 찬 상전의 눈빛을 보니 익히 경험해본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무엇을요?"

"우리의 목표."

"우리의 목표...요...?"

불안하다. 정말 불안하다.

"폐서인이야."

역시 그거냐!!!!

"폐서인이야말로 우리의 목....읍!"

윤상궁은 기함하여 재빨리 장시언의 입을 막았다.

"큰일 날 소리 마세요!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대체 제 말은 어디로 들으신 겝니까, 예?"

장시언은 입이 막힌 채 웅얼웅얼 뭐라고 얘기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거냐,

난 이대로 살 수 없다, 뭐 이런 말일 게 분명했다. 윤상궁은 손을 떼며 한숨을 깊이 쉬었다.

"다시는 그런 소리 마십시오.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구요."

"난 이미 마음을 먹었어."

장시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순 없었다. 당초의 목적을 잃고 이대로 욕정의 노예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목표는 뭐라구?"

"......우리라니요. 전 모르는 일입니다."

윤상궁은 동참을 거부했다. 하지만 장시언은 궁내 유일한 동지를 절대 놓지 않았다.

"우리의 목표는 뭐?"

"........."

"뭐?"

"..........."

"뭐어?"

"......폐서인."

"그래. 좋아."

좋긴 뭐가 좋습니까? 윤상궁은 철딱서니 없는 상전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한마디 했다.

"폐하가 그리 싫으십니까?"

그 말에 장시언이 순간 멈칫했다.

".........사실 인간적으로 싫은 건 아니야. 그저 내 평온한 삶을 방해하는 것이 싫을 뿐이지."

"이제 좀 덜 평온하게 사셔도 되는데요."

그만큼 했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뜻이었다. 장시언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거야. 그러려고 황후도 됐던 거니까."

"........폐서인이 되면 어떤 삶을 사시는지 알긴 아십니까?"

"알아."

"마마께선 모르십니다. 모르시니까 그런 소릴 하시는 거라구요. 폐서인이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누려온 신분의 특권을

빼앗기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내가 바라는 바야.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신분의 특권 따윈 필요없어. 윤상궁도 알지 않어?"

있는 집 자제들보다는 평민들과 어울렸고 그들과 함께 할 땐 사대부 양반의 티를 내지 않았다. 그들이 입는 옷,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며 유년 시절의 전반을 보내온 장시언이다. 윤상궁은 그녀의 상전이 폐서인이 되어서도 잘 살 수 있는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아유, 내 팔자야......

".....그래서 이제 어쩌시려구요? 생각해두신 바는 있으십니까?"

윤상궁은 결국 장시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거 끝까지 거둬 먹여야겠다는 일종의 모성애가 작용한 것이다.

장시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특유의 비실비실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찬찬히 공을 들여 작전을 세워야지."

작전. 윤상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다.장시언은 그런 윤상궁의 모습을 무시하며 '뭐

좋은 수 없을까?' 하고 물었다대낮의 황후궁. 그곳에서 폐서인이 되기 위한 은밀한 작당모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

"혈색이 아주 좋아지셨습니다. 황후마마."

"하하....., 그렇습니까."

"폐하께서 어젯밤도 황후궁에 드셨다지요?"

"예, 뭐...."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그다지 좋지 않거든? 당과 먹는데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라.예전엔 연회에 참석해도 모두의 관심 밖에서 홀로 즐겼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황후임에도 황제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기 때문에 마음 편히 좋아하는 음식이나 골라

먹어가며 연회를 즐겼다. 그러다가 질리면 황후궁으로 돌아가서 마음에도 없는 청승맞은 시를 쓰고서 잠을 잤다. 하지만

오늘은 연회자리에 오자마자 후궁들이 몰려들었다. 귀찮게 왜들 이래? 단체로 쉰밥을 주위 먹었나? 하고 생각을 하다가 또

혼자 웃음이 터져서 혼났다. 모두 함께 모여 쉰밥을 주워 먹는 후궁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미칠 것 같았다.

후궁들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떠는 황후를 보며 '연약한 척 하기는! 우리가 뭘 어쨌다고!' 속으로 욕을 했지만

장시언은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웃음을 참는데 필사적이었다. 장시언은 시도 때도 없이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지는 않았다.

평소 후궁들이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기 때문에 그녀들을 신경 쓰며 일일이 더 약하고 처량 맞은 척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가련하고 연약한 여인을 흉내 내는 것은 오직 황제의 앞에서만 이었다. 물론 의도치 않게 후궁들

사이에서도 남자 주제에 여자보다 더 연약한 황후라고 인식이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한창 좋으시겠지만 폐하께서 영원히 마마만을 바라보실 거라고는 생각지 마세요. 행여 후에 슬퍼하실까 염려가 되옵니다."

응? 장시언은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깜박였다. 이 여자가 또 헛소리를 하네. 영원히 나만 바라봐? 미쳤냐, 내가?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다. 그는 어이가 없어 대꾸도 하지 않고 호로록ㅡ 차를 마셨다. 졸지에 철저히 무시를 당한 후궁은 자괴감에

입술을 깨물며 장시언을 노려보았다. 눈빛이 어찌나 사나운지 얼굴에 구멍이 날 것만 같았다. '뭘 봐? 차 마시는거 처음

보냐?' 라고 물을까 하다가 귀찮아서 관두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경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구나. 감히 황후를 그따위 눈으로 바라보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폐, 폐, 폐하..."

후궁은 사색이 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급히 허리를 숙이며 손을 떠는 그녀를 보고 장시언은 고개를 돌렸다가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황후는 일어나라."

"....예?"

황제는 장시언이 그의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장시언의 팔을 잡아 올렸다. 갑자기 황제의 곁에 서게 된 장시언은 머리를

조아린 후궁들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을 했다.

"후궁이라면 본디 황후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당연한 법이거늘, 마음이 착하고 여리다 하여 우습게 알고 핍박을해?"

핍....박....? 장시언은 얼이 빠진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혹시 황제가 아는 핍박과 내가 아는 핍박은 다른 뜻이 아닐까?

황제는 그의 눈빛을 보며 더 난리를 쳤다.

"내 너희들의 이 방자함을 더는 묵과하지 않을 생각이다. 원비는 오늘부로 자신의 궁에서 단 한 발짝도 나올 생각을 말라!

만약 밖으로 걸음을 하였다간 바로 폐서인이 될 것을 각오해야 할것이다!"

"폐,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뭣들 하느냐! 원비를 궁으로 데려가라!"

황후를 한 번 노려보았다가 자신의 궁에 유폐될 처지에 놓인 원비는 금군들에 의해 억지로 이끌려 궁으로 돌아갔다. 겁을

먹은 다른 후궁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오들오들 떨었다. 장시언 역시 떨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들과는 다른 의미로

떠는 것이었다. 폐서인!! 방금 폐서인이라고 했지?! 장시언은 폐서인에 한발 앞서간 원비의 뒷모습을 보며 그래,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투기였어, 투기! 하고 깨달음에 몸을 떨었다. 황제는 곁에서 떨고 있는 장시언을 보며 쯧, 혀를 찼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같잖은 투기로 황후의 심기를 어지럽힌다면 똑같이 된다는 뜻이다! 알겠느냐?"

후궁들은 모두들 '예......'라고 대답을 하며 황제의 노기가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황후에게 어서 이 분위기를 어떻게

좀 해달라고 속으로 간청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시언이 그런 짓을 할 턱이 없었다. 폐서인 되기 작전을 세우는데 몰두한

장시언은 그녀들의 속내를 한 치도 가늠하지 못했다. 황제는 그런 장시언을 연약한 병아리 보듯했다.

"네가 놀랄 필요 없다. 너에게 한 말이 아닌데 무슨 걱정을 그리 하느냐?"

그는 황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다정한 눈빛의 황제를 보니 안타까움이 번졌다. 알고 보면 참 불쌍한 중생이 아닌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뚱딴지 같은 소리만 골라하니 원.....황제는 장시언을 감싼 팔을 풀지 않은 채 상석으로

걸어갔다. 어쩔수 없이 따라간 장시언은 점점 얼굴이 창백해졌다.설마, 설마 황제의 옆자리인 것은.....

"!!!!!"

아니야, 아니야!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난 원래 자리가 좋아! 여기 싫어! 아악~!! 나 돌아갈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구석자리에서 모든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자리로 옮겨진 장시언은 속으로 왁왁거리며 절규했다. 연회의

평화도 이제 끝이었다.

"왜 더 먹지 않고. 입에 맞지 않나?"

"아닙니다........그냥 좀 입맛이 없어서........"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끊임없이 먹고 싶다. 흡입하고 싶다. 황제, 네가 계속 말을 걸지 않으면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젓가락을 가져가려고만 하면 말을 거는 거냐? 도대체 왜!! 그림에 떡이 따로 없었다. 이건 고문이다.

장시언은 고개를 돌려 연못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그의 마음과는 달리 연못은 고요하고 평화로원다.

호수라고 해도 믿겠구나..

"뱃놀이라도 시켜주랴?"

"예?"

황제의 말에 장시언이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뱃놀이? 지금 뱃놀이라고했냐?

"뱃놀이를 하며 연회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황제는 장시언의 침묵을 긍정이라 이해했는지 바로 배를 준비시켰다. 이번엔 황제의 착각이 아니었다. 솔직히 황제가

지금까지 한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짓이었다. 장시언은 기대에 부풀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뱃놀이는 즐거웠다. 황제가 곁에서 지분거리고 달라붙는 것만 빼면 정말 최고였다. 황제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장시언을

괴롭혔다. 특히 귀를 만져댈때는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오싹오싹해서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만 좀 해라! 내 귀가 무슨 만지면

아들 낳게 해준다는 부처님 코도 아니고, 다 닳아 없어지겠다!! 사색을 방해하는 황제의 손길은 계속 참아주기 힘들 정도로

집요했다. 장시언은 슬쩍 얼굴을 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속에선 천불이 났지만 표정만큼은 어디로 보나 함초롬했다.

"왜? 무슨 할 말아라도 있느냐?"

몰라서 묻냐!!! 답답함에 퍽퍽 가슴을 치고 싶다.

"보는 눈이 많은데 계속 그러시면...."

황제는 뭐가 그리 기쁜지 장시언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탕한 웃음소리는 배에 탄 모든 이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다들, 황제가 저리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내가 내 사람을 만지는데 무엇이 어때서?"

"........."

웃기지 마라. 난 네 사람이 된 적 없다. 난 나만의 것이다.

"시언아."

끄악! 얘가 또 대뜸 친근하게 부르네?!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마라. 그것이 짐을 안타깝게 한다."

아이고....., 안타까운 건 나다. 대체 폐하, 널 어쩌면 좋으냐... 장시언은 한숨을 내쉬며 황제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다가

황제와 자신을 경악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비빈들과 눈이 마주쳤다. 하기야 그럴 만도하지. 자신 역시 황제가 이런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였을땐 경악스러움에 말문이 막히질 않았던가. 황제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전에는 ㅡ

그러니까 황후궁으로 들이닥쳐 장시언을 홀랑발랑 벗겨 먹기 전에는, 멋진 사내였지만 좋은 사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도통

마음을 내비치는 일이 없어 후궁들 모두가 애달아 하는 것이 장시언의 눈에도 고스란히 보일 정도였다.

비빈들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황제가 한 말 때문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장시언은 그녀들의 얼굴에서 경악과 동시에

부러워하는 기색을 읽어냈다. 자신은 '당장 그만둬!' 하고 외치고 싶어하는 이 상황이 그녀들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시언은 괜히 미안해졌다.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랬다. 기대에 차 좋다고 시작한 뱃놀이는

씁쓸한 기분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윤상궁은 뱃놀이를 하고 돌아온 뒤로 상념에 빠져있는 상전을 가만히 쳐다 보다가 얘기했다. 둘만 있을때는 침상에 대자로

뻗어 누워 있거나 앉아 있더라도 다리를 쩍 벌리고 난 사내요, 하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지금은 너무나 곧은 자세로,

어느 모로 보나 아름다운 황후의 자태로 앉아 있다.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히 하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니신데요?"

"......."

"뭔데 그러십니까? 말씀을 해보세요, 마마."

윤상궁은 대답을 독촉했다. 장시언은 뜸을 들이다가 '오늘 말이야.' 하며 말문을 열었다.

"오늘, 폐하께서 또 그러셨거든?"

"그러시다니요?"

"또 날 보면서 좋아죽겠다는 눈빛을 보내시고 달디단 말씀을 하시더란 말이야."

"아, 예. 그러셨는데요?"

"근데 그 모습을 보는 후궁들 얼굴이 좀...."

좀? 좀 어땠다는 말인가? 윤상궁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미간에 주름이 진 채 말을 고르던 장시언은 '좀.....불편하더라구.'

라고 말을 덧붙였다.

"불편이요?"

"응. 좀 불편했어. 후궁들을 보는게. 날 보면서 부러워하는것 같아서 말이지. ........미안했다...랄까...."

윤상궁은 장시언이 후궁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호오~ 이것봐라? 하는 눈으로 장시언을 바라보았다.

이건 흡사........

"그야 당연한 것이지요."

"뭐?"

"후궁들이 그토록 바란 것을 마마께선 가지고 계시니 그런 것 아닙니까. 폐하의 마음을 쥐고 있으시잖아요."

장시언은 여전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근데 내가 왜 미안해하는 거야?"

답답하시긴.

"누구는 못 가져 안달 난 것을 제 발로 뻥뻥 차고 계시니 조금은 미안하셨겠지요."

"아...."

윤상궁은 장시언이 가지고 있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미안함의 정체를 알게 된 장시언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윤상궁은 내심 기대를 했다. 이제야 제 상전이 자신이 얼마나 큰 행운을 가진 것인지

깨닫기를 바랐다. 하지만 장시언은 언제나 예측불허의 인물이었다.

"하루빨리 폐서인이 되어야겠어."

"예, 하루빨리 폐서인이...예에?"

장시언은 놀라 눈이 커진 윤상궁을 보며 의아해했다.

"왜 그리 놀라?"

"아니, 왜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렇게 되다니,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기를 해."

"지존의 마음을 가진 유일한 이임을 알게 되었는데 다른 생각은 안 드십니까? 예?"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윤상궁."

"그야 물론ㅡ"

"난 폐하를 은애하지 않아."

"........."

윤상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연 은애한다는 것이 뭔 줄이나 알고 저런 소릴 하는걸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은 단호한

상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폐하의 마음을 바란적도 없어. 난 그저 마음 편히, 평화롭게 살고 싶었을뿐이라구."

알고있다. 하지만 그래도 지존의 마음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길 바랐다. 그러면 조금은 폐하를 향한 마음도

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담스러워, 정말. 폐하께서 내게 마음을 주시는 것도, 내 뒷배가 되어 줄 것이라며 집안을 신경 써주는것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어느새 권력의 중심에 와 있어. 어울리지도 않는 감투를 쓰고 있는 꼴이지."

"마마....."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 줄이야....윤상궁은 장시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말을 아꼈다. 그녀 역시 장시언이 권력욕이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

장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걸어갔다.

"좀 자야겠어. 폐하께서 오시면 몸이 좋지 않아 잠이 들었다고 말해 줘."

".........예, 알겠사옵니다."

윤상궁은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워있는 장시언의 뒷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물러갔다. 안 되는것은 역시 안 되나보다, 그리

생각하면서.

***************

다음날, 장시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팔팔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윤상궁은 드시라고 주전부리를 내놓으며 피식

웃었다. 그럴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참.....

"응? 왜 웃는게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윤상궁도 날 닮아가나?"

"예?"

"혼자 생각하다 혼자 웃는거 말이야."

"후후....예, 그런가 보옵니다."

윤상궁은 비어있는 찻잔에 쪼르륵ㅡ 차를 따르며 대답했다. 장시언은 꿀떡을 하나 집어 쩝쩝거리며 먹다가 '폐하께선 어제

오셨었고?' 하며 물었다.

"예, 오셔서 마마를 살펴보시다 가셨습니다. 한참을 계셨는데 모르셨습니까?"

"응. 푹 잠이 들었거든."

정말 몰랐다. 사실 한번 잠이 들면 누가 둘러업고 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잠이 들었지만 매일 황제가 들락거린 뒤로는 선잠만

잤었는데.

"....밭은 어때? 싹은 좀 많이 자랐어?"

"예, 물론이지요. 그러지 마시고 오늘은 좀 둘러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응.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야. 궁금하기도 하고. 오늘도 잘 부탁해."

"예?"

"쓰러지는 것 말이야, 쓰러지는 것."

윤상궁은 '아.....'하더니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밭일도 하고, 이젠 좋아하는 서책이나 읽고 뒹굴거리며 푹 좀 쉬어볼까 했더니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조금 있으면

또 황제가 찾아올 텐데 얼마 남지 않은 자유시간이 빼앗길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음, 그러니까 이 여자가.......

"예까진 어인 일이십니까,......현비?"

"진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이리 늦어 송구스럽습니다, 황후마마. 소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아, 다행히 현비가 맞나 보다.

"아닙니다. 벌은 무슨..... 그나저나 어인일로...?"

장시언은 말을 끌며 힐끗 어린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갓 걸음을 배운 듯한 아이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호기심에 온갖

물건들을 만져댔다. 윤상궁에게 눈치를 주어 못 만지게 막으라 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안된다는 도리질뿐이었다. 상궁인

그녀가 황자를 쉬이 만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시언은 은근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 때문에 입가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아이가 참으로 호기심이 많군요."

아이를 데려와 못 돌아다니게 하라는 말을 완곡히 돌려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돌려 말했는지 현비는 흐뭇한 눈으로

아이를 보기만 하고 데려올 생각은 하질 않았다.

"예. 아주 영민한 아이입니다, 마마."

거기서 영민하다는 말이 왜 나오는 거냐? 호기심이 많으면 모두 영민한 것인가? 장시언은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비의 자식 자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벌써부터 말을 한답니다."

뭐라는 거냐. 그래봐야 옹알이 수준이겠지.

"어찌나 용맹한지 넘어져도 울지도 않습니다."

둔한 아이인 모양이군.

"눈에도 총기가 서려 있습니다, 마마."

그래서 어쩌라고? 장시언은 속마음과는 달리 '그렇습니까.' '예.' '그렇군요.' 하며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어지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이 아이를 가졌을 때 무슨 꿈을 꾼 줄 아십니까?"

그걸 내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 알겠냐.

"용꿈입니다. 용이 다섯 마리나 하늘에서 내려와 저를 둘러싸고....."

어느 부모나 자식 자랑은 어쩔 수가 없구나. 장시언은 현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른 생각을 했다. 현비의 자식

자랑은 이제 영웅탄생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점점 알수가 없었다. 득고 있노라면, '안

물어봤거든?' 하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그때 마침 실마리가 잡혔다.

"폐하께는 다섯 분의 황자가 계십니다."

장시언은 순간 멈칫했다. 아, 그래. 그거군. 이제야 감이 잡힌다. 현비가 바라는 것은 아마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그중 이 아이가 얼마나 뛰어난 아이인지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황후마마."

현비는 자신에 차 얘기했다. 태자 책봉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우월한지 알리는 것은

그녀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황후를 찾아와 마음에도 없는 예를 취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만들어 달라

청하기 위해서였다.

"마마께서도 아시겠지만 신국에는 아직 ㅡ"

"현비."

"예?"

"아이가 볼일을 보고 있습니다."

"예? 그것이 무슨.....?"

장시언은 오줌으로 바지를 적시고 뚝뚝 흘리며 돌아다니는 아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현비는 그런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줌을 누고 울지도 않다니 확실히 좀 둔한 아이인것 같다. 솔직히 영민한

아이인것은 잘 모르겠지만 커서 자유인이 될 것은 분명하다. 오줌을 누고 눈물은 커녕 사방을 돌아다니는 저 당당함이라니.

"마, 마마...저. 그러니까 이것은..."

"난 이만 쉬어야겠습니다. 아이도 어서 옷을 갈아입히셔야지요, 현비."

"....예,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현비는 얼굴이 붉어져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 자랑을 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딱 그 순간에 일을 치다니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 나가며 괜히 아이의 등을 때렸다. 장시언은 그런 현비의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

아이가 사리분별을 못하고 오줌을 누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속이 상한다고 때리다니,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현비가

떠나고 윤상궁이 바닥을 닦을 나인들을 부르려고 하자 장시언은 되었으니 천이나 가져오라 얘기했다.윤상궁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설마 직접 닦으실 생각이십니까?"

"못 할 것도 없지."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마마께서 어찌 그 더러운 것을...."

"아이의 오줌이 더러워 봤자 얼마나 더럽다고."

"하오나...."

"여자들이 하는 것보다야 내가 하는 것이 낫지. 게다가 아이가 어딜 돌아다녔는지 봐둔 것도 나고. 윤상궁은 천이나 가져다줘."

장시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매를 걷어붙이는 그의 모습은 여인의 옷을 입고는 있으나 여러모로

듬직한 사내였다.

"으랏차!"

장시언의 힘에 침상이 옆으로 밀렸다. 장시언이 갑자기 침상을 밀며 힘자랑을 하자 바닥을 닦고 있던 윤상궁은 눈이

휘둥그레져 달려왔다.

"침상은 왜 미십니까?"

"아까 아이가 침상 아래도 들어갔는데 못 보았나?"

"예? 예, 전 마마와 현비 사이의 얘기를 듣느라..."

"침상 밑에서 나올 때부터 바지가 젖어 있었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윤상궁은 저쪽이나 닦도록해."

"......예. 저 근데...으랏차 소리는 좀 조심히 하십시오. 누가 듣습니다."

"후후....걱정마. 그럴 줄 알고 아까 윤상궁이 천을 가지러 갔을 적에 이미 다른 궁녀들에게 밭에 거름을 좀 주고 오라고

시켜놨어. 이 꼴을 보일순 없으니까."

주도면밀하다. 아마 그 머리로 과거를 보았다면 장원급제를 했을 텐데.윤상궁은 늘어진 치맛자락을 옆으로 묶어 다리를 다

드러낸 장시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장시언은 '.....과거 공부는 이거랑 달라.'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황제는 이제 너무나도 당연하게 장시언의 하루 일과를 물었다. 장시언은 오늘 하루 동안 있던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밭에 물주고, 현비의 자식 자랑을 들어주고, 아이 오줌을 닦느라 침상을 옮기고....

"몸이 좋지 않아 계속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다 말하지는 않았다.

"많이 안 좋으냐? 어제도 일찍 잠이 들었던데."

"아닙니다. 제가 워낙 몸이 약해 어릴 적부터 쉽게 지치고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습니다."

거짓말도 참 맛깔나게 잘한다. 잔병치레는 무슨. 한겨울에 홑옷을 입고 돌아다녀도 감기 한 번 안 걸려봤다.

"그러하냐."

"예, 그러니 너무 심려치...콜록! 마오...콜록!콜록!"

"이런, 많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고뿔인 듯 합...콜록! 콜록!"

장시언은 그래, 안좋다, 그러니 오늘도 건들지 마라, 라고 속으로 바라며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기침을 해댔다. 황제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점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황제는 장시언의 몸을 본인보다 더 잘 아는 듯했다. 어디를 만지면

자지러지는지 너무 소상히 알고 있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경험이 없는 숫총각은 헐떡이며 아흥거리는게 고작이었다.

"고뿔이 옮으실지도 모르니 오늘은 다른 처소에서..."

"현비가 다녀갔다 들었다."

황제는 대뜸 장시언의 말을 뚝 끊고 얘기했다. 장시언은 순간 흠칫 놀라 황제를 올려다 보았다. 하려던 기침이 안으로 쏙

들어갔다.

"현비와 무슨 얘길 나누었지?"

"아....저...."

현비가 다녀간 것을 어찌 알고 있지? 사람을 심어두었나? 장시언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불안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시언아."

"...예, 폐하."

"현비가 네게 무어라 하더냐?"

"아, 아무말도 하지 않았...."

"그럴리가. 태자 책봉에 대해 말을 했을 것이 분명한데."

귀신이다. 장시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게 거짓을 고하지 마라. 내 앞에서 다른 이를 감싸주지마."

...뭐? 감싸줘? ....누가? 내가? 그것도 현비를?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황제가 어떻게 현비가 다녀간 사실을 아는가, 하는

것이었다. 딱히 현비를 감싸주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대충 둘러댄 것일 뿐. 황제는 장시언의 일관된 침묵에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들어 눈을 맞추었다.

"그 어떤 누구도 위해선 안돼."

왜? 장시언은 자기도 모르게 진실된 생각을 눈빛에 담았다. 그리고 이어진 낮은 목소리.

"그것이 나를 화나게 하니까."

"ㅡㅡㅡ!!!!"

장시언은 예고도 없이 겹쳐진 황제의 입술에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이내 스르륵 눈을 감았다. 가슴에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질척이는 입맞춤에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시도라는 것은 그 자체로 높게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그 시도가 참기 힘든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면, 더더욱. 황제와의 잠자리는 위험해, 이제 웬만해선 하면 안돼, 라고 생각하던 장시언은 황제의 입술이 닿자마자

저항도 못해보고 쾌락에 무릎을 꿇었다. 자기변명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봐야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 아흣! 아...! 폐, 폐하, 아...아픕니다, 아앗...!"

"쯧, 고작 하루 안했다고 이리 좁아지다니. 조금만 참아라. 후우, 다시 내것에 딱 맞게 맞추어주마. 내가 아니면 쌀 수도 없게."

뭐어?! 아니야! 그딴 건 필요 없어!! 그딴 건!!!!

"아! 아앗! 아흣...! 아ㅡ!"

장시언은 내리찍는 황제의 허리짓에 지탱하던 팔이 꺽여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고의로 그런것이 아님에도 장시언의 목소리가

가려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황제는 다시 장시언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을 돌려 입을 맞추며 손으로는 유두를

쓸고 꼬집었다. 쾌감을 동반한 아픔에 몸에 힘이 들어갔다.

"크윽. 나를 망신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너무 조이지 마라."

야! 그게 내맘대로 되냐!! 힘이 들어가는걸 어쩌라고!!! 장시언은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에잇, 하며 황제의 물건을 세게 조였다.

너 망신 좀 당해봐라, 하고 한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황제는 더 불타올라 장시언의 안에서 날뛰었다. 악! 이 사기꾼!! 곧

파정할 것처럼 말하더니, 이게 뭐야!!!

"아! 아아앗! 폐하아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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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또 그리 하십니까? 사람 불안하게...."

"불안하긴 뭐가 불안하다는 게야?"

"생각에 잠겨 있다 하시는 말이 항상 절 놀라게 하시질 않습니까?"

틀린 말이 아닌지라 장시언은 변명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를 놀라게 할 만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체 폐하께서 어찌 아셨을까 생각하고 있었어."

"예? 폐하께서 무엇을요?"

"어제 현비가 왔었다는 것. 대체 어찌 아셨을까? 이곳에 사람을 심어두신건지...,아마 그런 것이라면.."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응, 그래. 윤상궁이.....뭐?!"

"제가 폐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니, 폐하께서 여쭈시기에 있는 그대로 아뢰었지요."

"........."

뭔가 좀 허무해졌다. 혹시 황제가 본성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혼자 속을 끓고 있었는데. 장시언은 헛웃음을 흘리며

윤상궁에게 시선을 주었다.

"폐하께서 뭐라 물으셨는데?"

"비빈들 중에서 다녀간 이가 없었냐고 물으셨습니다. 분명 다녀갔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며 물으시는데, 거짓을 고했다간 목이

날아갈 것 같아서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잘했어."

"헌데, 현비는 궁에 유폐되었다 합니다.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황명이 내려졌다고 하더군요."

"헉! ...정말?"

"예."

"날 만나러 와서?"

"음..., 그렇기보다는...."

윤상궁은 고개를 갸웃하며 전해들은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장시언은 윤상궁의 말을 기다리다가 어서 말을 해보라며

닦달했다.

"뭐, 뭔데? 뭐야?"

"그저 잘 이해가 안 되어서 말입니다."

"이해가 안 된다니, 뭐가?"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요."

"폐하께서 하신 말씀? 현비에게?"

"예."

"뭐라고 하셨기에?"

"마음에 안 드셨다 하셨답니다."

"뭐?"

장시언은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대체 뭐가 얼마나 마음에 안 들었기에 유폐까지 시킨단 말인가.

원비를 유폐시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게 말입니다.....짐의 정인에게 마음을 쓰게 했다고, 잠시나마 그 마음속에 있었다는것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유폐를

명하셨답니다."

장시언은 순간 멍해져서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짐의 정인?....일단 상황상 그건 나겠지? 그럼 내 마음속에

있던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현비를 유폐를 시켰다는 소리잖아? 아니, 나는 현비를 마음에 넣은 적이 없는데.... 장시언은

대체 뭔가 싶어 머리를 긁적이다가 지난밤 황제의 말을 떠올리며 멈칫했다.

'내게 거짓을 고하지마라. 내 앞에서 다른 이를 감싸주지마.'

'그 어떤 누구도 위해선 안돼.ㅡ 그것이 짐을 화나게 하니까.'

..헉! 뭐야! 뭐냐고! 이 무시무시한 집착은 대체!!!! 끼야악~~~!!장시언은 차마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평소 남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그는, 복 받은 성격이라 칭해지며, 늙지도 않고 오백년은 거뜬히 살 거라고

평가를 받는 그는, 황제가 지난밤에 한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 수명이 백년은 줄어든 것만 같았다. 윤상궁은 갑작스럽게

발작을 일으키는 상전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혹여 다치시지는 않을까 싶어 깨질 만한 것을 멀찍이 치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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