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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67화 (67/85)

67화

“뭐, 특별한 건 아니고….”

“응.”

“그게….”

“응.”

“아… 씨이.”

이렇게 뜸 들이면 의심만 커질 텐데, 어떻게 말하면 그나마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으려나. 김태준을 만났던 이야기까지는 굳이 하지 않더라도 규하에 관련된 이야기는 시훈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자칫 잘못 전달했다가는 괜한 오해만 사기 딱 좋을 것이다.

그래도 해야겠지. 연인 사이에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늘 강조했던 건 다름 아닌 박윤진이다. 나에게 조금은 불리하더라도, 사실을 말해야만 했다.

“규하가… 우리에 대해 알고 있었어.”

내 입에서 의외의 인물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시훈은 눈썹을 확 구기며 나를 바라보았다.

“김규하? 내가 아는 고딩 김규하?”

고개를 끄덕이자 의아한 얼굴을 한다.

“알고 있다는 게 정확히 뭔데.”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우리가 왜 학교에 왔는지, 그리고 우리 진짜 나이까지 알고 있더라.”

“뭐? 김규하 그렇게 안 봤는데 음흉한 새끼였네. 한참 형인 거 뻔히 알면서 반말 까고 맞먹었다는 거야?”

“…형보다는 삼촌이나 아저씨 쪽에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 뭐 어쩌자는데. 다 알고 있으니 본인한테 잘하라 이거야?”

또 꼴에 죽어도 나이 든 티는 내기 싫어서 ‘삼촌’이나 ‘아저씨’라는 단어는 싹 무시해 버리곤 제 할 말만 한다.

“그건 아니고… 처음부터 그 이야기 하려던 건 아니었어.”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어? 아, 그게 있잖아.”

“왜 이렇게 뜸을 들여. 걔가 자기한테 고백이라도 했어?”

정말이지 권시훈은 독심술사가 틀림없다. 무서울 정도로 정곡을 찌르는 저 능력은 어디서 배워오는 걸까. 배울 수 있다면 나도 좀 알고 싶네.

“뭐야. 그 반응은. 진짜야?”

“어?”

“맞나 보네.”

분명 가벼운 분위기였다. 무슨 말을 해도 좋게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그런데 장난스러웠던 시훈의 눈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하며, 입으로는 욕설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바뀐 그의 태도에 당황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아.”

무슨 나쁜 생각을 하는 건지 깊게 한숨 쉰다. 그 한숨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안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뭔가 이다음 말은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흔들렸어?”

하지만 내가 듣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뭐?”

“흔들렸냐고.”

“무슨…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왜? 나 없는 사이에 잠깐 재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내가 아는 권시훈은 이렇게 삐딱하게 말하지 않았다. 질투 나면 질투 난다,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금방 털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서 날카로운 말로 나를 찌르는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분명 내 연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기 그지없었다.

“야. 말을 왜 그따위로 해. 내가 그렇게 개념 없어 보여?”

“애인 없는 사이에 다른 새끼에게 고백받았다는 걸 애인 면전에 대고 말할 정도로 대담한 줄은 몰랐지.”

“좋아하니까 사귀자. 그런 종류의 고백이 아니야. 그냥 자기 마음 좀 알아달라고….”

“고백이 고백이지. 고백에도 종류가 있는지 처음 알았네.”

“아니, 시훈아. 내 말 좀 들어봐. 오해한 것 같은데 그 뜻이 아니라니까?”

“오해? 지금 네가 오해하게끔 말하잖아!”

억울함을 넘어 이젠 화가 날 지경이었다. 당최 권시훈이 이다지도 밉게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질투 나서? 화가 나서? 짜증 나서? 그 어떤 이유가 되었더라도 너무 심하잖아.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이래.

“…만약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규하가 나랑 사귀자고 고백했다면 어쩔 건데. 너는 나 보내고 싶어?”

이러면 안 되는데, 나까지 치졸하게 굴면 안 되는데. 시훈에게 못 할 짓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진심을 들쑤시며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대체 무얼 위한 확인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소리야. 너야말로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 해?”

“네가 꼭 보내고 싶은 사람처럼 말하잖아. 재미를 보네. 어쩌네 하면서.”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하고 기분 나쁘니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는 상황 아니야?”

“그래. 내가 말을 잘못해서 오해하게 말한 건 맞아. 하지만 너도 무조건 화만 낼 게 아니라 한 번쯤 내 이야기 들어 줄 수 있는 거였잖아. 기껏 왔더니 의미 없는 질투나 하고. 상처 되는 말만 하고. 이러면 힘들게 찾아온 내가 뭐가 되는데.”

“기껏? 넌 나한테 오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뭐?”

“그동안 연락이 안 되었으면 지금처럼 연구소에 직접 찾아와도 되는 거였잖아. 혹시 충분히 올 수 있었으면서 오지 않았던 건 건 아니야?”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우리 원도 아닌 다른 회사 연구소에 내 집처럼 드나드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 알 바야?”

이렇게 나는 권시훈에게, 권시훈은 나에게 또 한 번 생채기를 내었다.

우리는 좋다가도 왜 자꾸 이렇게 돌아오는 걸까. 절대 변하지 않는 굳건한 관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아마 우리는 일반적인 관계로 완성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겠지?

믿고 싶지 않은 건지, 믿고 싶은 건지.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자꾸만 서로에게 애정을 갈구하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하아… 시훈아. 나 너랑 싸우자고 온 거 아니야. 보고 싶어서, 너무 그리워서 정말 여기저기 부탁해서 어렵게 찾아온 거라고.”

답답함에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권시훈이 못된 말로 상처를 내도 감당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했으니까. 하지만 권시훈 스스로가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 흔들리고 갈등하는 것이라면, 그로 인해 무너져 내릴 우리의 관계가 걱정이었다.

“그러니까 싸우지 말자. 나, 너 없는 동안 너무 괴로웠어.”

“…….”

“정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마음대로 생각해.”

“박윤진.”

“시훈아. 나는 네가 우리를 좀 더 믿었으면 좋겠어. 이 정도로 흔들리고 못 믿게 될 사이 아니잖아. 우리 아직 사랑해. 내가 그 증거잖아.”

“윤진아. 나는 우리가 너무 걱정이 돼.”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집어삼킬 듯이 일렁였다. 차마 시선을 돌릴 수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닐 걸 아는데, 자꾸 네가 없어질까 봐 겁이 나. 하루에도 몇 번씩 네가 사라지는 상상이 돼서 미칠 것 같은데 여기서 나갈 수는 없고, 연락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정말 미치겠어. 그래서 네 이야기 끝까지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 네 입에서 다른 놈 이름 나오는 것만으로도 너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라.”

“시훈아….”

“난 치졸하고 속 좁은 놈이라 말로 해야 알고 눈으로 봐야 알아. 여태 늘 내가 먼저 다가갔잖아. 그러니 이번에는 네가 날 찾아와줬으면 했어.”

“…….”

“유치하지? 이런 나라서 미안하다.”

내가 시훈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푹 숙여졌다. 왜 네가 또 사과를 해.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나야. 너에게 상처 주려 한 게 절대 아닌데, 목구멍 끝까지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끝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 나는 왜 끝까지 솔직해지지 못할까.

“미안….”

“…….”

“내가 너한테 받기만 해서 주는 방법을 잘 몰라. 그러면 안 되는 건데.”

“…….”

“이제 어떻게든 자주 들르도록 해 볼게.”

시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시훈은 처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더 다가오지는 않았다.

“…가려고?”

“오형석 박사랑 약속한 시간 한참 넘겨 버렸어. 무시하고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

“…….”

“속만 썩여서 미안해. 지켜 주지 못해서 더 미안하고.”

이렇게 도망가는 게 최선일까. 하지만 지금 가지 않으면 시훈에게 매달리면서 그에게 더 부담감을 안겨줄지도 모를 일이다.

“가 볼게.”

“…….”

“…또 올게.”

탁.

“아….”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애써 손으로 감추며 비틀대며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을 내뱉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정말이지 쉬운 게 하나도 없어.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었던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이 타래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시훈아. 내가 너를 지키겠다고 다짐한 게 혹시 욕심은 아니겠지.

너와 나, 7년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우리, 정말 좋았었잖아.

닳고 닳아 버린 우리를 안타까워하다, 문득 우리의 처음이 떠올랐다. 너는 한없이 나에게 다정했고, 내가 어떤 슬픔으로 몸부림치더라도 묵묵히 내 곁을 지켰었던 날들. 한 번도 그때를 후회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만약 내가 조금 더 너의 마음을 빨리 받아들였다면, 그리고 너를 더 빨리 사랑했었다면 너를 더 잘 알 수 있었을 텐데.

“시훈아… 미안해. 내가 조금 더 참아볼걸.”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훈의 향이 사라지고 나니 갑자기 두통이 찾아온 탓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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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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