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쪽같은 내 남친-55화 (55/85)

55화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영화관이었다.

“너 이런 데도 와?”

“어? 난 이런 데 오면 안 돼?”

“그건 아닌데, 좀 의외…잖아. 그냥 영화도 아니고 독립영화라니.”

예상보다 평범한 장소선정에 왜인지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어디 거창한 데에 갈 것처럼 바람이란 바람은 다 넣어놓더니 싱겁게.

영화감독 남친을 두고 있지만 나는 영화에 영 문외한이었다. 일반 영화관조차 시훈의 손에 억지로 끌려간 몇 번의 경험이 전부일 정도로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독립영화관이라는 곳이 생소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랄까. 잘 지어진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보고 있노라면 ‘저게 실제로 가능한 일일까?’, ‘저건 좀 아닌데… ’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들이 감상을 방해하는 게 싫었다.

“난 스크린 속의 허상이 좋아. 화면을 보는 시간만큼은 내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재밌잖아. 다른 인생을 겪어보지 않고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게.”

“…시훈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나와는 정 반대구나.”

“권시훈이랑 엮지 마. 걔는 걔고 나는 나지.”

“정색할 것까지야….”

정색하기에 나도 인상을 써줬다. 기분 나빠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규하는 금세 표정을 풀고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여기 나랑 오고 싶었던 이유가 뭐야?”

“너랑 영화 보고 싶어서.”

“그럼 가까운 영화관 가면 되잖아.”

“네가 이미 다 봤다고 생각했거든. 권시훈이랑.”

“…응?”

“너 권시훈이랑 한 몸 아니었어?”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권시훈이랑’이란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고, ‘한 몸 아니었어?’라는 질문에 뜨악하며 앞서가는 규하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부모님끼리 잘 알아서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 권시훈과 내가 어느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할 터였다.

“너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인데? 너랑 권시훈이랑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붙어 다녔잖아.”

“그거야… 맞지.”

“그 뜻이야. 너희 둘이 정말 많이 친해 보인다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규하의 별 뜻 없는 말에도 혹시 권시훈과 나의 사이를 눈치챘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너도… 우리랑 친하잖아. 아니야?”

여기서 그냥 넘어갔으면 될걸. 경솔하기 짝이 없는 내 입은 기어코 한마디를 더 뱉고야 만다. 이번에는 나도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몸소 느껴 입을 마구 때리고 싶었지만,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규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움찔 걸음을 멈추었더니,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권시훈도 그렇게 생각할까?”

“…어?”

“어쩌다 내가 운 좋게 너희 사이에 끼게 된 거지, 결국 권시훈은 너일걸.”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아니야. 그런 거.”

“넌. 나랑 권시훈 둘 중에 한 사람 고르라면 고를 수 있겠어?”

권시훈의 연인인 박윤진으로서는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현)고등학교 2학년이자 권시훈, 김규하의 친구인 박윤진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친구 사이는 어느 정도 선까지 용인해 줘야 하는 건지 배우지 못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만 이리저리 굴려대었다.

이건 거의 엄마냐 아빠냐 급인 것 같은데. 굳이 대답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하자니 규하가 상처받을 것 같고, 규하의 손을 잡아주기에는 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대답 없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규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인데.”

“…어?”

“난 선택할 기회가 생기면 박윤진 널 선택할 거라고.”

“…어??”

세상 정말 좋아졌네. 남자애가 남자애한테 사방 탁 트인 길거리에서 서슴없이 낯간지러운 멘트를 날릴 수도 있다니. 아니, 이게 아니지.

이건 지나가던 삼척동자가 들어도 고백이 틀림없었다. 왜? 갑자기? 나한테? 이 상황에서?

“무, 무슨 뜻이야? 지금 그 말, 뜻?”

규하의 묘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눈빛에 꿰뚫려 버릴 것 같아 시선을 피하고 싶어도 여기서 피해버리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아 주먹만 꽉 쥐었다.

이 나이에 열 살이 넘게 차이 나는 학생에게 고백받을 줄이야. 이걸 기뻐해야 할지 고마워야 해야 할지, 아니면 민망해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아아. 어떻게 하지. 이다음 대답이 생각 안 나!

거절해야 하는데 거절하면 실망하겠지? 그럼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 학교는 계속 나갈 수 있는 걸까.

“둘 중에 선택하라면 윤진이 너랑 놀 거라고.”

엥…?

“넌 예쁘고, 조용하고 착하잖아. 권시훈은 좀… 징그러워서 질려.”

“아아….”

…아, 젠장. 어디 숨을 수 있다면, 도망갈 수 있다면 당장 땅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는 안 되겠지? 지나가던 삼척동자는 개뿔. 그냥 내 똥촉과 설레발이 만들어 낸 자아도취 유니버스일 뿐이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미치지 않고서야 난데없이 고백이 웬 말이냐.

다행이긴 한데 씁쓸하기도 해 입매를 굳히고 고개를 끄덕이며 괜히 툭툭 바닥에 튀어나온 돌부리를 운동화 끝으로 두드렸다.

“…윤진이 네가 이렇게 귀엽게 구니까 권시훈이 널 혼자 못 두지.”

“응?”

한 번 세게 걷어차면 정신 좀 차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또 난데없이 규하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다.

“아니야.”

그리고 바로 모른 척하며 다시 몸을 돌려 어스름한 조명이 드리운 돌길 쪽으로 앞서 걸었다.

더 이상 캐물었다가는 들어선 안 될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아 나 역시 입을 다물고 규하의 뒤를 따랐다.

좁게 난 돌길을 따라 나란히 걷다 보니 남자 둘이 내려가기엔 조금 좁아 보이는 계단이 나타났다. 특별히 간판이 있거나 이정표도 없는데 규하는 익숙한 듯 계단을 경쾌하게 뛰어 내려갔다.

잠자코 규하의 뒤를 따르며 시선을 내리니 교복 셔츠 깃 안쪽에 생채기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쯤 되면 누군가 일부러 저곳에만 상처를 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흔의 생김새가 비슷했다.

이상하다. 너무 이상했는데 지금 묻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 * *

뒤늦게 영화 타이틀과 브로슈어를 받았을 때,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갈 뻔했다.

우연도 이쯤이면 운명이라고 규하가 고른 영화는 권시훈… 아니 활동명 ‘시진’ 감독의 데뷔작인 ‘손안의 환영(幻影)’이었다.

본인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이라며, 특히 데뷔작을 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면서 눈을 빛내는 규하에게 ‘네가 그렇게 애정해 마지않는 시진 감독은 방금 네가 징그럽다고 했던 권시훈이란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뭐, 내가 말한들 믿지도 않을 것 같다만.

영화 내용은 이렇다.

한 남자가 청춘을 바쳐 사랑했던 이가 사실은 실체가 없는, 누군가가 만들어 낸 환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겪는 상실감을 그린 작품이었다. 뻔하다는 혹평도 있었지만, 배우의 몰입력 있는 연기와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1인칭으로 따라가는 카메라 워킹, 단순한 소재를 특별하게 만드는 연출력이 큰 호평을 받아 시진을 충무로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게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15세 관람가긴 했지만, 청소년이 이해하긴 다소 난해한 주제가 아닐까 싶었는데 규하는 영화 상영 내내 단 한 번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번이 34번째 관람이라던데 지겹지도 않은가보다. 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입술을 꽉 깨물며 무언가를 참아내는 듯 보였다. 보기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구나.

“저 주인공이 꼭 나 같아서 계속 눈이 가더라고.”

“어디가 닮았다는 거야?”

“그냥. 상황이.”

영화관을 나서며 대체 같은 영화를 계속 보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이처럼 대답했다.

“18년 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게 있었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모두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거였더라고.”

규하의 고개가 삐뚜름하게 기울어졌다.

“다들 오히려 더 잘된 일이니까 그냥 넘기고 누리라는데, 난 도저히 용납이 안 돼. 앞으로 계속 속기만 할 것 같고, 이용당할 것 같아서 화가나.”

갑작스럽게 알게 된 아이의 짐이었다.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한데, 본인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차마 내가 물을 수 없어 대답 없이 조용히 규하와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모퉁이를 돌았다.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몰랐지만 어쨌건 발 닿는 대로 걷고 있었다

갑자기 시훈이 보고 싶었다. 간간이 휴대폰을 보았지만, 여전히 연락은 없었고, 전화기도 꺼져 있었다. 연구소에 전화하는 것은 김태준이 걸려 관뒀다.

“윤진아.”

침묵 속에 길을 걷다 문득 규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 있던 시훈의 생각을 미뤄두고 규하를 바라보았다.

“응.”

“저 영화의 주인공처럼 스스로에게 함몰되지 않으려면 현실에 수긍해야 할까.”

무거운 표정과 낮은 목소리. 무언가 고민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게 묻기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한 것 같았다.

무엇이 늘 장난기 넘치고 밝은 아이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지.”

그래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김규하의 친구’가 아닌 온전한 박윤진으로 대답해 주고 싶었다.

“네가 좋으면 하는 거고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네가 지는 거야. 그 주인공도 자신을 버림으로써 사랑을 완성했다고 믿었잖아. 그거면 된 게 아닐까.”

“윤진아. 역시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 가봐.”

“…….”

“욕심내지 말고 쥐여준 대로 살면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데, 그러기 싫어. 알려야 하는 것을 나 편하자고 모른 척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규하야. 무슨 일인데 그래. 알아야 제대로 대답을….”

“그러니까 나도 그 사람들처럼 마음대로 해 봐야겠어.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말을 마치자 규하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 대답이 규하에게 정답이었는지, 적어도 최소한의 도움은 되었는지 모를 눈빛이었다.

저녁 시간인데 밖은 아직 대낮처럼 환했다. 옆 블록에서는 직장인들이 퇴근하느라 분주하고, 도로에는 차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데 어쩐 일인지 우리가 서 있는 이 길과 바로 옆 도로는 외딴 섬처럼 오가는 차도 없었고, 사람 또한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등 뒤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아 어깨를 움츠리고 잘게 떨었다.

마치,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이.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5)============================================================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