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윤진아.”
“…왜.”
“우리 어디 놀러 갈까.”
“…너 지금 제정신이야? 이 상황에서 뭐를 하자고?”
그러잖아도 좋지 않던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니 규하는 당황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어… 내 말은 윤진아. 이게 막 진짜로 신나게 놀자는 게 아니라 지금 네 기분도 별로일 거고 혼자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울 것 같아서… 어, 나랑 같이 있자는 말이었는데….”
“…….”
“어쨌건 기분 나빴다면 미안! 진짜 미안해!”
“…….”
“윤진아아….”
사과한답시고 냅다 끌어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떨어져 있자니 불안한지 내 새끼손가락 끝을 위태롭게 잡고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물론 나쁜 맘을 먹고 일부러 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따금 김규하는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했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있었고, 상황에 안 맞는 농담을 던졌다가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방금 그 말도 그저 슬퍼하는 내가 안타까워 위로하려 했던 것, 그뿐이었을 것이다.
“화난 게 아니라 당황한 거야. 규하야.”
“화난 거 아니야? 그럼 나 안 미워할 거야?”
“난 너 미워한 적 없는데….”
“헤헿. 다행이다.”
눈치 빠른 놈. 김규하는 시종일관 헤헤 웃으며 아무 생각 없이 다니는 것 같아도 타고나길 예민한 건지 미묘하게 엇나간 분위기를 간파해 내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분위기 망치는 짓을 일부러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규하의 말대로 난 화난 게 맞았다. 그런데 거짓말했다. 앞뒤 사정 모르는 아이에게 화풀이해 봤자 아이의 말 한마디에 발끈하는 치졸한 어른이 되는 격이었으니까.
하, 어른 흉내 내기 어렵네. 고등학생 시늉도 못 하고 그렇다고 어른처럼 의연하고 인자하게 허허 웃어버릴 수 없는 내가 치졸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후우.”
속이 답답하고 괴로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어내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되뇌어도 흙바닥에 쓰러져 미동조차 없던 권시훈의 파리한 모습이 필름을 되감듯 계속해서 떠올랐다. 확실한 데이터가 없는 약물의 해독제는 또 얼마나 많은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을까. 만약… 잘못된다면. 깨어날 수 있을까?
“아무 일 없을 거라 말하는 건 거짓말인 것 같고, 시훈이는 별일 없이 돌아올 거라 믿자.”
“…….”
“여기서 걱정한다고 아무것도 해결되는 게 없어. 남은 사람이라도 정신 차려야지.”
“…그러게.”
“봐. 내 말이 맞지. 혼자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니까 계속 걱정하고 걱정하다 가장 나쁜 일까지 상상하게 되잖아.”
어느새 장례식장에 홀로 앉아 있는 내 모습까지 상상했다가 규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기다리면 좋은 소식 있을 거야. 알았지?”
“으, 응.”
“대답은 예쁘게 잘하네.”
규하의 입꼬리가 시원한 호선을 그렸다. 이 모습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리고 이 말을 언젠가 들은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어나자.”
규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얼굴과 몸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눈을 찌르던 조명을 가려주어 한결 낫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규하와 눈을 마주하고 나니 등골이 쭈뼛 섰다.
김규하의 눈동자는 열여덟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었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고 난 어른의 것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기억력 참 안 좋네.”
규하는 고개를 저으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뭐가? 라고 반박하려는데 규하의 얼굴이 나에게로 불쑥 기울어졌다. 찰나에 당황해 버린 나는 상체를 조금 뒤로 물렸지만 이윽고 단단한 팔이 내 등을 감더니 나를 부드럽게 안아 일으켰다.
“말했잖아. 기분 전환하러 가자고.”
“…진짜 가는 거였어?”
“그럼 농담하는 건 줄 알았어?”
누군가 고개를 조금 기울이기만 하면 바로 입술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머리칼과 코끝에 규하의 숨이 닿아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고 명치가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얘는 평범하게 손을 잡아 일으키거나 말로 일어나라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왜 자꾸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어.
조금, 아니 많이 무안해져 규하의 가슴을 슬쩍 밀어내고 거리를 벌렸다. 규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물러났다.
아무 생각 없다 못해 무해한 얼굴을 보니 그제야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나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윤진아?”
“어, 어, 어??”
“어디 안 좋아? 몸 아프면 가지 말까? 집에 바래다줘?”
“아니. 아니야. 괜찮은데.”
“…그래? 나갈 수는 있겠어?”
“물론이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규하는 의아한 기색을 지우고 다시 웃어 보였다. 다행이다. 잘 넘어간 것 같네.
“그럼 이제 가자.”
규하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제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메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도 규하를 따라 우물쭈물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원론적인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그런데 어디로 가?”
“응?”
“우리 조합이면 갈 데가 없지… 않나?”
그러고 보니 권시훈 – 김규하(취미 메이트), 권시훈 - 박윤진(연인) 조합은 흔했는데 김규하-박윤진(친구?) 조합이 어울렸던 일이라고는 고작 학교에서 도란도란 수다를 떤 게 다였다.
피시방, 오락실, 운동. 보통의 남자아이의 루틴과는 조금 거리가 먼 나와, 자주는 아니더라도 또래와 어울려야 하는 자리는 피하지 않는 규하와는 여가 생활에 있어서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본인은 나와 같은 취향임을 어필했지만 데이터가 없으니 쉽게 믿기는 어려웠다.
대단하네. 이제 곧 여름 방학이 다 되어 가는데 우리 둘은 표면적으로만 친했던 사이였구나. 조금쯤은 같이 어울려 볼걸.
“넌 특별히 생각나는 데 있어? 가고 싶은 곳이라든가.”
“…집?”
딴생각하느라 나오는 대로 대답했는데 규하는 오히려 눈을 반짝 빛내며 반색했다.
“어? 나 너희 집 가도 돼?”
“아, 그건 시훈이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안 가.”
“왜?”
“걔가 아는 건 싫어.”
뭐가 다른 거지. 알면 뭐 어때서. 그리고 동거인이 있는 집에 손님을 초대하려면 당연히 동거인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안 가겠다는 거야?”
“응.”
짧은 대답 뒤에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여전히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규하는 그 큰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고작 놀러 가는 거 하나로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일인가 싶었지만, 눈꺼풀 끝에 길게 드리운 규하의 속눈썹이 예뻐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참 예쁘네. 어쩜 속눈썹마저 저리 길고 예쁘게 뻗었을까. 규하의 부모님은 당신 아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하실지. 저렇게 우수한 유전자는 합법적으로 나라에서 보관해서 널리 널리 퍼트려야 인류가 한층 더 발전할 텐데….
“특별한 의견 없으면 내 마음대로 가도 괜찮지?”
스물셋, 스물넷… 왼쪽 속눈썹 개수를 거의 다 세어 가고 있는데 눈꺼풀이 위로 들리며 규하의 눈동자가 완전히 드러났다.
깜짝이야. 속으로 엄청 놀라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아, 미안. 네 속눈썹이 너무 예뻐서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 뭐야.’라고 말했다가는 속눈썹 변태로 오해받을까 봐 가슴을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진짜?”
“아주 이상한 데만 아니면 괜찮아.”
“이상한 곳?”
“…뭐. 왜 그렇게 봐?”
규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음흉하게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가 생각한 ‘이상한 곳’은 위험이 도사리는 범죄 지역이라던가, 귀신이 나올 법한 을씨년스러운 별장이었는데 아무래도 규하의 머릿속의 ‘이상한 곳’은 몸과 몸이 만나 이런저런 것을 하는 장소인 듯했다.
“윤진아 무슨 생각하길래 얼굴이 빨개져?”
“아, 아닌데.”
“아니긴.”
“너, 너야말로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래? 난 진짜 아무 생각 없었다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 생각?”
“아, 말장난하지 말고!”
답답해 빽 소리를 질렀지만 당연히 깔끔하게 무시당하고 말았다. 저 곰의 탈을 쓴 여우 같은 놈. 멍한 듯, 별생각 없는 듯 굴면서도 알고 보면 권시훈보다 시꺼먼 속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끝까지 모른 척하는 뻔뻔함까지.
“윤진아. 얼마나 말 못 할 상상을 했든 간에 난 아무래도 좋아.”
“…….”
“나는 너라면 다 좋아. 네가 원하면 다 해 줄 수 있어. 이런 것, 저런 것 다. 그러니까 언제든 말만 해.”
역시 저 새끼의 입을 막아버리는 게 내 정신건강에 좋겠지. 쟤 분명 열여덟 아닐 거야. 절대로 무조건 내 동년배일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능글댈 수 있어? 아니면 내가 나이치고 너무 숫기가 없는 거야?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쪽팔려서 녹아 버릴 것 같기도 하고… 이쯤 되니 그냥 아무래도 좋으니까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제발.
“그런데 어쩌나 오늘은 윤진이가 좋아하는 곳은 가기 힘들 것 같은데.”
“…어디 갈 건데.”
“예전부터 생각해 둔 곳이 있거든.”
“그러니까 그게 어딘데.”
“언젠가 윤진이랑 꼭 가 보고 싶었던 곳.”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규하를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저 방금 전의 능글맞은 표정을 풀고 해사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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