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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2화 (2/85)

2화

“……하, 한다?”

“아! 얼른 해! 빨리!”

내가 계속 머뭇거리자 시훈은 짤똥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있는 대로 짜증을 냈다.

“권시훈. 너 나중에 잘못되어도 나 원망하면 안 된다? 진짜 딴말하기 없기?”

“아! 진짜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빨리 하라고오!”

“하여간 성질하고는…… 몸통이 작아지니까 소갈머리도 작아졌어?”

“……자기야. 내 입에서 기어코 욕이 나오는 걸 듣고 싶어?”

“……아니야.”

맹랑한 꼬맹이의 짜증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시간 좀 끌어보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은 무리겠네.

나는 지금 정직함으로 승부해 온 삼십이 년의 인생사에 오점을 남기려 하고 있다. 거짓말에 소질 없어 학교 조퇴 한번 못 해 본 나한테 공갈을 치라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었지만, 그래! 뭐 까짓것 사랑하는 연하 남친을 위해 못 할 건 뭐야. 내가 희생해야지.

다시 한번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명함에 적힌 번호를 꾹꾹 눌렀다. 자꾸만 눈이 시훈 쪽으로 돌아가려 하기에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절대! 네버! 권시훈이 쳐다보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다!-

drr – drr. 길고 긴 통화대기음이 이어졌다. 그런데 1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심 이대로 전화가 끊어지면 그 핑계로 빠져나가야지 생각했다.

“네. 여보세요.”

하지만 개소리하지 말라고 하는 듯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와! 진짜 심장 떨어져 터지는 줄 알았다!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심호흡했다.

“어, 여, 여보세요? 아…… 누구시죠?”

“네?”

“아, 아니. 이게 아니지. 혹시 전화 받으신 분 S필름 한성호 팀장님 되시나요?”

“네? 아,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아, 아아아 안녕하세요! 저는 권시훈 씨 형 되는 사.람.인데 지금 시훈이가 통화하기 좀 그런 상황이라 제가 대신 전활, 어 전화를 드렸습니다.”

하 씨. 식은땀 나네…… 너무 긴장해서 나도 모르게 로봇같이 말하고 있잖아!

도저히 호흡이 진정되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렸는데 시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크흠…….”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재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권시훈이 내 연기를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 그래도 소심한 나는 필요 이상으로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세상 한심한 눈으로 보지 말아줄래. 애기한테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 드럽거든?

“아. 혹시 형님분이 로봇…… 크크큭. 아, 죄송합니다.”

“아.저.는.로.봇.이.아.닙.니.다.”

“푸하하하하학.”

도저히 내 발연기를 못 봐주겠던지 결국 시훈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침대에서 뛰어내려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안하다. 나도 잘하고 싶은데, 너 나 알잖아. 소심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거.

“하, 씨이. 자기 미쳤어? 나 짤리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럼 어떻게 해…… 뭐라 말을 못 꺼내겠는데…….”

진짜야. 전화 걸기 전에 어떻게 말할지 대본도 만들었고, 시뮬레이션도 돌렸지만 막상 닥치고 나니 머릿속이 하얘져서 말이 안 나오는걸. 이라고 변명하려 했지만, 시훈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식은땀만 줄줄 흘리다 마지못해 다시 휴대폰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학학학학. 아이고. 형님이 참 재밌으시네! 역시 시훈 씨 가족다워요.”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가족은 맞으니 칭찬으로 들어야 할까.

“……네. 감사합니다.”

“엌. 크크크큭. 감사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크큭. 그런데…… 로봇…… 푸흡.”

미치겠네. 이걸 어떻게 수습한다. 로봇 같은 말투가 뭐 그리 웃긴 일이라고 수화기 너머 한성호 팀장은 지금 열과 성을 다해서 깔깔대고 있고-어찌나 목청이 큰지 수화기 터질 뻔- 졸지에 로봇 형을 두게 된 권시훈은 사자의 눈을 하고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어휴. 줘봐! 나이를 뭘로 먹은 거야. 정말.”

“여기서 나이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데…….”

“됐어! 사랑하니까 참는다! 어?!”

나도 너 사랑하는데 소리 지르는 건 좀 안 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 난감한 상황에 잔뜩 쫄아 버린 내가 어물거리며 바라보니, 나를 노려보던 시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고는 휴대폰을 뺏어 들고 제 귀에 가져다 대었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 시훈이 형아 막냇동생인데요. 저희 큰 형아가 좀 아파요. 그래서 큰형이 전화했는데 큰형도 제정신이 아니라…… 아, 저요? 전 권시혁이구여. 몇 살이냐고요? 그런 걸 알아서 뭐 할라고…… 하, 씨…… 일곱 쌀이요! 일곱 쌀!! 유치원 다녀요!”

한숨을 푹푹 쉬며 머리를 쥐어뜯는 시훈을 보아하니, 통화내용을 듣지 않아도 한성호 팀장이 시훈이, 아니 시훈의 가상의 동생 권시혁에 대해 어지간히도 꼬치꼬치 물어보는 모양이다.

일전에 시훈이가 한성호 팀장에 대해 말 한 게 떠올랐다. 일도 엄청 잘하고, 근태나 휴가, 휴직 같은 걸 쓸 때 쿨하게 결재해 주는데, 문제는 쓸데없는데 아~~~주 관심이 많고 오지랖이 미쳤다고.

“제 이야기는 그만 좀 물어보시고요. 네에…… 아니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시훈이 형아가 아파서 당분간 휴직계를 내야 한다고 전해 달라 해서…… 네? 아뇨. 병가는 아니고, 그냥 휴직계요. 아뇨! 일!반!휴!직!계!요! 기간요? 그건 형아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일곱 살치고는 조금 고급어휘를 사용하는 것 같은데……?

보통 일곱 살이 일반휴직계나 병가 같은 단어를 쓰나? 모르겠네. 애를 키워봤어야 알지.

“네에. 통화…… 아뇨! 시훈이 형이 당분간 전화로는 연락 안 될 거라고, 왜냐고요? 아, 말을 못 하는 병에 걸렸어요. 급한 거 있으면 메일로 보내 주시면 되어…… 하, 아니! 그럼 재택근무로 해 주시든가욧!!”

나는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데 다행히 한성호 팀장은 전혀 눈치 못 채고 있는 듯하다.

“그건 저한테 물어봐도 잘 모르고요. 네. 넷! 형아한테 메일을 보내면 되겠네요! 네! 전 잘 모르니까 끊겠습니다!”

얼마간 뭐라 뭐라 실랑이를 하던 시훈은 전화를 끊고 냅다 휴대폰을 침대로 집어 던졌다.

“아오 젠장! 진짜 드럽게 말 많네!”

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대는 게 꼭 아저씨 같구만. 아가에게 썩 어울리는 자세는 아니네. 역시 연륜에서 나오는 짬바는 무시 못 하는가 보다.

“시훈아. 근데 좀 너무 티 난 거 아냐?”

좀 걱정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성호 팀장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하지만 시훈은 짜증이 솟구친 듯 눈썹을 세우더니 팩 소리쳤다.

“뭐가! 이게 누구 때문인데. 자기가 잘만 했어 봐! 내가 나설 일이 있는가!”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발음이 이상하잖아. 약간 모자란 애처럼 보이면 어떻게 해.”

“내가 애기였을 때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 연기했다. 왜!”

“어휴 그래. 내가 죄인이고 죽일 놈이다. 응? 용서를 바란다. 어?”

“됐다. 됐어. 자기한테 맡긴 내가 바보천치지.”

그러게 누가 나한테 시키래. 처음부터 자기가 해 보든가. 이를 악물었지만, 저 성질을 감당하기 힘들어 속으로 화를 삭이고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쩌기로 했는데?”

“휴직하려고 했는데 지금 당장 바쁜 것도 없고 해서 재택근무로 전환해 준대……. 다행이지 뭐…… 일 아예 놓는 것도 좀 그렇고.”

옷이 없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급하게 마트에서 사 온 흰색 토끼가 그려진 티셔츠랑 파란색 반바지를 입고, 그 사이로 삐죽 나온 하얗고 가느다란 다리를 달랑거리며, 눈썹이 팔자로 축 처져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재택근무를 이야기하고 있는 권시훈 어린이.

하하. 정말 잘 어울리네.

“일단 일하려면 집에 뭘 좀 들여야겠네.”

“웅…… 뭐 별건 필요 없어. 어지간한 건 집에 다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 아마.”

순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저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꼬물대며 편집 장비를 만지고 있는 시훈이 상상되었다.

하씨. 솔직히 너무 귀엽잖아.

* * *

시훈은 영화감독이어서 그런 건지, 원래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성격 덕인지 현실 적응이 빨랐다. 전화를 끊자마자 아까 한 팀장에게 둘러대느라 했던 말을 바탕으로 자신의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했다.

이름: 박시훈(한정호 팀장 한정 권시혁)

성별: 남자

나이: 7세(난 6세 하자고 했는데 가오 안 살아서 싫단다. 뭔 차인데?)

직업: <고급> 사립 유치원생

형제 관계: 엄마, 아빠, 큰형, 작은형

장래희망: 건물주

“다 좋은데… 이 고급 사립 유치원은 뭐야?”

이 말 같지도 않은 설정은 대체… 인상을 팍 쓰고 시훈을 노려보니, 이틀 새 맛 들인 스크류바 모양의 사탕을 입에 물고선 제 발에 붙은 먼지를 손가락으로 떼어내며 대답했다.

“아아 그거? 이참에 내 한을 좀 풀어 볼까 싶어서.”

“한?”

“나 어렸을 때 우리 옆 동네에 디이-따 유명하고 큰 유치원이 있었거든? 거기 가고 싶어서 엄마한테 겁나 졸랐는데 아니, 엄마가 우리 돈 없다고 안 된다고 하는 거야. 그때 얼마나 서러웠는데.”

그래서 무려 이십몇 년 전의 한을 지금 와서 풀겠다고?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 나왔다.

“아, 지금 그래서 유치원에를 가시겠다?”

“웅!”

시훈은 자그마한 어깨를 쭉 펴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허튼짓을 하다 하다 아주 미쳐버렸구나. 서른 살이 유치원을 왜 가. 그리고 너 요새 유치원 비싼 데는 등록금만 몇천만 원 하는 거는 알고 있지?”

“하 씨! 돈 벌어서 어따 쓰냐? 이럴 때 쓰는 거야! 나도 돈 벌잖아! 돈 버는 유치원생 하면 되지! 얼마나 간지 나.”

하이고 대단하다 증말로.

영화감독 권시훈 대단하시지 암. 돈 쓸어모으는 거 제가 제일 잘 알지요.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안 된다고!

“야! 무슨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가 유치원에 뻘돈 쓰는 게 가당키나 하냐??”

“아까 그랬지! 이왕 이렇게 된 거 한을 풀어보겠다고!”

“자랑이다. 자랑이야. 빨리 어른으로 돌아갈 생각을 해야지. 유치원이니 뭐니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이런 데 쓰려고 그동안 개같이 일했냐? 아이고 정말 미치겠네.”

“그럼 이 몸을 하고 그냥 집에서 개처럼 일이나 하라고??”

“ 내가 뭐라 했어? 네가 네 입으로 재택한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출근하고 싶으면 어디 한 번 해 보시든가.”

“아 시러시러시러!! 유치원 가꼬야 가꼬라고! 비싼! 사립! 유치언!!”

“…….”

내가 계속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니 시훈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똑바로 발음할 수 있으면서 일부러 혀짧은 어린애 발음을 흉내 내기까지.

아니, 대관절 유치원이 웬 말이냐? 분명 아까 쇼핑하고 오다가 단지 앞에 있는 유치원을 본 게 틀림없다. 거기 이 동네 학부모들의 등골을 뽑아먹는 무시무시한 곳인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어휴. 진짜.”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권시훈의 고집을 절대 꺾을 수 없다는 걸. 저 굴러다니는 콩알 같은 놈도 어쩌지 못하는 나는 정말 등신이 틀림없다.

그런데 아이가 되니 어쩐지 떼가 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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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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