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Epilogue – 강지건
“대표님.”
노크와 함께 대표이사실 안으로 들어온 건 2년째 포마드 머리를 고수 중인 이 팀장이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팀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수룩한 구석이 많았는데, 그간 꽤 적극적으로 일에 임해온 덕에 제법 노련한 팀장다운 면모가 돋보였다.
“혜안 패션에서 시안 확인 메일이 왔습니다. 그런데 좀 문제가 되는 부분이…….”
이 팀장이 다가와 몇 장의 서류와 함께 작은 USB를 건넸다.
“그쪽에서 뷰어 부분 수정 요청이 왔는데, 이 뷰어가 예전에나 쓰던 방식이라서 지금은 오히려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큰 건이기도 하고 매스컴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의뢰인만큼 좀 더 신중하게 진행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예전 같았다면 클라이언트 요청에 웬만해선 다 맞춰주자는 쪽으로 얘기를 했을 텐데, 지금은 회사의 이미지까지 고려한 발언을 하고 있다. 팀장직에 앉힐 때 이런 점만 보강된다면 어느 회사에도 뒤지지 않는 실력 좋은 인재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나 보다.
“대표님께서도 확인하시기 쉽도록 서류와 파일로 함께 정리했습니다. 백업 파일은 공유 드라이브에 올려뒀고요.”
“알겠습니다. 확인하고 다시 호출하죠.”
“예,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인 이 팀장이 문을 향하는 사이, 그에게 건네받았던 서류의 첫 장을 훑었다.
“이 팀장.”
“예, 대표님.”
“아무래도 내가 직접 혜안 패션으로 가서 그쪽과 미팅을 하는 게 낫겠군요.”
“예? 대표님이 직접이요?”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을 내린 이 팀장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내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닿은 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 팀장이 말한 대로 매스컴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큰 건이에요. 이쪽에서도 대표가 직접 움직이며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걸 어필하면 그쪽에서도 이렇게 트집 잡듯이 수정 요청을 하진 않겠죠.”
“아, 역시 트집이었나요?”
“척 보면 알죠.”
내용을 대충 훑어보니 그쪽에서 보내온 수정의 사유는 어디까지나 혜안 패션 마케팅팀의 주관적이고 뭉뚱그린 내용만 가득했다.
이번 건은 일방적으로 클라이언트의 요구만 맞춰주면 되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협업 관계이다. 그런 만큼 누구도 서로 갑과 을이 되어선 안 될 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 하나마저 서로 객관적 지표를 기반으로 잘 조율해야만 했다. 이처럼 앱 개발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패션 쪽 마케팅팀이 누가 봐도 개인의 ‘취향’이라 부를 만한 주관적인 수정을 요청한다는 것부터가 그들 딴엔 나름대로 갑과 을의 포지션을 정하려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시안을 어제 오후에 보냈는데 당장 오늘 아침에 이런 되지도 않는 수정 요청을 하는 것만 봐도 이쪽을 퍽 얕잡아보는 게 분명했다.
‘이름 있는 대기업들은 꼭 한 번씩 이런 짓을 한단 말이지.’
서류에 정리된 내용은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확히는 한 자 한 자 꼼꼼히 정독하고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내일 바로 미팅 잡죠. 여럿 따라올 필요는 없고, 이 서류 작성한 신입만 붙여줘요.”
이 팀장은 얼마 읽지도 않은 이 서류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에 대해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미팅은커녕 이제 갓 입사한 신입이라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으실 텐데요.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에 눈꼬리가 꿈틀하긴 했으나 크게 티를 내진 않았다.
“이 팀장 할 일 많은 건 내가 가장 잘 압니다. 그쪽 팀에서 이 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이 팀장과 지금 이 보고서를 작성한 신입일 것 같은데, 아닙니까?”
이 팀장은 아니라는 말도 못 한 채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수습 딱지를 뗀 신입을 중요한 자리에 보내놓는 건 물가에 어린애를 내놓은 부모의 마음이나 매한가지일 거다. 그런 이 팀장을 향해 눈꼬리를 치켜떴다.
“일손 부족해서 뽑은 인재를 언제까지 잡일이나 시키려고 그래요? 이번 기회에 임시 비서 일도 시키고 현장 경험도 쌓게 하려는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 아뇨. 아닙니다. 그럼 혜안 패션 쪽에 곧바로 미팅 요청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이 팀장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미리 얘기도 해둘 겸 신입 좀 들어와 보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이 팀장이 나간 후, 다시금 서류에 눈을 두었다. 매섭던 눈꼬리가 알아서 스르르 내려가는 게 느껴지고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간다.
‘글도 예쁘게 잘 쓰네.’
타이핑한 서류에 불과한데도 직접 손글씨를 적은 것처럼 예쁘장하다. 문장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복잡한 내용도 가독성 좋게 잘 풀어쓴 게 보였다. 상대 쪽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부분조차 둥글둥글하게 다듬어 적어두었고, 적절한 곳에 보기 좋게 배치된 예시 사진 또한 마음에 들었다.
한 자도 놓치기 싫은 것처럼 꼼꼼히 읽어내려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똑똑-하고 노크한다.
“대표님, 신우서 사원입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을 떼려야 뗄 수 없던 서류에서 그제야 시선이 이동해 문에 닿는다.
“들어와요.”
안으로 들어온 건 말끔한 흰 와이셔츠에 네이비색 정장 바지를 입은 우서였다. 새삼 사회인이 된 우서가 너무 의젓해 보여, 입가에 묻은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조심스레 문을 닫은 우서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온다.
“혜안 패션 쪽 미팅에 대표님과 함께 가게 될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넥타이는?”
대뜸 물은 말에 우서가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흰 카라는 넥타이도 없이 단추 하나가 풀려 있어, 그 사이로 우서의 목 아래쪽의 움푹 들어간 쇄골 부분이 보일락 말락 한다.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서에게 다가갔다.
“아침에 형이 매준 건 어디 두고.”
“팀장님이 답답해 보인다고 하셔서 잠깐 풀어뒀어요. 그보다 대표님, 여기 회사인데요….”
“알아. 하지만 이 공간은 내 사적 공간이기도 해.”
조금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우서의 허리를 끌어 바짝 당겼다. 우서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굳게 닫힌 문에 닿았다.
손가락을 뻗어 우서의 드러난 하얀 목울대와 그 아래의 움푹 파인 부분을 쓸었다. 그러다 카라를 살짝 젖혀 그 안에 숨겨진 쇄골 라인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게 누가 이런 자리에 자국 만들라고 했어요?”
“목 뒤에도 있잖아. 카라가 이렇게 나풀거리면 옆에서 보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왜……!”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일 뻔한 우서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원망스러운 눈으로 귀엽게 날 노려본다.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어버린 우서에게 목으로 웃어주며 그의 첫 단추를 손수 채워주었다.
“오늘 점심은 나랑 같이해.”
“이틀 전에도 단둘이 먹었잖아요. 오늘도 그러면 이상하게 볼 거예요. 모처럼 다 숨기고 입사했는데 들키고 싶지 않아요.”
“미팅 핑계 대면 돼.”
“그러려고 미팅 같이 가자고 한 거예요?”
“안 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니 우서의 얼굴이 어이없다는 듯 굳어버렸다. 그러다 피식 웃는다. 보는 사람 설레는 줄도 모르고.
“형 때문에 미쳐요, 내가.”
“그러면 고맙지.”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우서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하는 그의 입술에도 입을 맞춰주고 더 아래로 내려가 목울대를 스쳐, 셔츠 사이로 보이는 쇄골 근처까지 내려갔다.
“아-!”
우서의 입에서 순간적으로 탄식 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셔츠의 벌어진 자리를 넓혀 잘근 깨물어버린 쇄골에도 입을 맞춰주고서 누구도 못 보게 단추를 완전히 다 채워버렸다.
“점심 먹으러 갈 때 넥타이 갖고 나와. 내가 매줄게.”
셔츠에 가려져 버린 자리를 매만지며 새초롬하게 눈을 치뜬 우서가 뾰로통한 목소리를 냈다.
“저도 맬 수 있어요.”
“형이 매주고 싶은데, 안 돼?”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물으니, 빤히 바라보던 우서가 내 어깨에 이마를 툭 댄다.
“…그런 거 진짜 둘이 있을 때만 해야 해요. 자꾸 아무나 홀리지 말고.”
“걱정하지 마. 내가 홀리고 싶은 사람은 너밖에 없어.”
달달한 목소리를 흘려 넣어주며 우서를 꼭 끌어안았다. 얌전히 안기다 못해 알아서 내 등에 팔을 둘러 셔츠를 꼭 붙잡는 우서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모처럼 따라가게 된 거, 열심히 할게요.”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어. 쉬엄쉬엄해도 돼.”
“아뇨, 절대 안 돼요.”
고개를 번쩍 든 우서가 결연한 눈을 한다.
“말했죠? 낙하산 소리 듣기 싫다고. 저 정말 그거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그래서 강지석 따라서 이튼 컴퍼니로 갈까 고민했다고요.”
“낙하산 소리 듣기 싫다고 내 경쟁사로 가는 건 너무하잖아.”
“강지석한테는 거기 가라고 했다면서요.”
“신입을 둘이나 뽑을 만큼 여유롭진 않았어.”
“그럼 차라리 저 같은 신입 말고 경력직을 뽑지 그러셨어요.”
“내 회사이고 내가 면접관인데 원하는 사람 뽑는 것도 문제가 돼?”
“…….”
또 한 번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우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살포시 웃었다.
“네가 유망한 인재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는데 그걸 고려하고 뽑은 것마저 뭐라 할 사람이 어디 있어? 네가 하도 숨기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지만, 난 이대로 쭉 숨어서 연애하고 싶은 생각 없어.”
“그건… 저도 그렇지만…….”
수줍게 눈을 내리깐 우서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제가 어느 정도 이 회사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 그때 밝힐래요. 지금은… 제가 아직 너무 실력도 없고 경험도 없어서 형 옆에 당당히 설 수가 없어요.”
마지막에는 나름의 다짐이 엿보였다. 실력이야 내가 근 2년간 이것저것 많이 알려준 것도 있고 관련 학과의 수석 졸업생이니 충분하다 못해 우수한 편이었지만 우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경험이 부족한 건 틀린 말이 아니네.”
“그렇죠?”
우서의 기세가 시무룩해지려 할 때,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며 당당히 내뱉었다.
“그러니까 이번 미팅은 역시 함께 가야겠어. 그렇지? 경험을 크게 쌓을 수 있는 기회잖아.”
내 당당한 말에 짧은 헛웃음을 흘린 우서가 이내 기분 좋게 웃었다.
“알았어요. 대신에 미팅 가서는 철저히 사원과 대표님으로 있는 거예요. 저번에 팀원분들이 형이 나한테 하는 거 보고 이상하게 신입 챙긴다고, 드디어 뉴비 귀한 줄 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음, 노력해 볼게.”
평소에는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분할 뿐만 아니라 웬만한 이들에 대해 냉담한 나였지만 우서에게만은 그게 힘들었다. 그래도 우서가 바라는 일이니 무작정 안된다고만 할 순 없지.
우서의 왼손을 들어 그의 약지에 있는 붉은 링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알아볼 수 없고 오로지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두 줄의 붉은 링은 오늘도 서로의 사슬이 되어 기분 좋은 간질임을 주고 있다.
붉은 링에 살짝 입을 맞추며 눈으로는 우서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상, 줄 거지?”
우서의 보고서만큼이나 단정하고 유려한 눈가가 매력적인 곡선을 그린다.
“형 하시는 거 봐서요.”
매일 내가 홀린다고 하지만, 우서는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게 틀림없다. 이쪽이야말로 7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홀린 기억밖에 없는데.
먼저 다가오는 우서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조금 전과는 다른 깊은 키스를 이어갔다. 그러는 중에도 서로의 왼손은 단단히 깍지를 끼어, 조금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한 쌍의 링은 지난 2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여전히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관계의 고리, 본편 (完)]
YumY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