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도진 형이 나가고 나서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실감이 났다. 우리의 링이 완전해졌다는 게.
“색이 바뀌게 될까 봐 걱정했어?”
깍지 낀 손을 들어서 내 링에 입을 맞춘 형이 싱긋 웃었다. 이런 건 이미 익숙해져 버렸기에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다가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단순한 연인이겠거니 생각할 테지만, 강지석의 성향에만 집중해왔던 탓인지 이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된다. 게다가 지건 형이 내가 짝사랑하던 강지석의 형제라는 것도 문제였고.
‘이젠 이럴 필요 없지.’
일일이 주변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혹여나 다른 사람 눈에 띄어서 강지석에게 들키는 건 아닌가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다. 형처럼 연인답게 스스럼없이 굴면 되는걸. 조금… 용기는 필요하겠지만.
대답 없이 생각에 잠긴 날 바라보던 형의 얼굴에 걱정과 긴장이 섞인다.
“무슨 생각해?”
형의 얼굴을 바라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심일까, 아니면 계산된 가짜일까.
한 번 무언가에 데인 사람은 또 데일까 봐 노심초사하기 마련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이 내게 계산된 행위들을 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이런 것마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링이 보여주고 있는 형의 감정은 평소와 다름없는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그게 증거가 되어 금세 안심하게 된다.
내 애정을 더 얻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낸 계산이라고 봐야 맞는 것 같다. 그건 곧 진심과 다르지 않기에.
웃는 얼굴로 나 역시 형의 손을 들어 링에 입을 맞췄다. 속이 간질거리고 이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든다.
“형 생각요.”
다소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형에게 한 번 더 웃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가는 아직 남았죠?”
“응, 남았지.”
대답하며 따라 일어난 형이 어깨에 팔을 둘러주었다. 그 손길이 기분 좋아, 자연스레 붙어서 기대어 걸었다.
카페를 나서자마자 형에게 대뜸 제안을 해보았다.
“그럼 남은 기간에 저희 데이트할까요?”
“뭐?”
형의 놀란 눈이 또다시 날 향했다. 형을 따라 하듯 링에 입을 맞춘 것도 그렇고 이번 제안도 이때까지의 나였다면 선뜻 하지 못할 일이었기에 이런 반응도 이해가 갔다. 너무 나댔나 싶어서 민망한 감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못 할 행동이나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어서 당당히 어깨를 폈다.
“이제야 정식으로 연인이 된 것 같아서요. 사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거든요.”
호텔에서 형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도,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 엄마와 통화를 할 때도 그랬다. 연인이라기보다는 애정 넘치는 보호자와 과분한 사랑을 받는 피보호자 정도의 느낌이었달까. 형의 올곧은 애정은 그대로인데 정작 내가 연인으로서의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하지만 도진 형을 만나고 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난 후에야 확신할 수 있었다. 형과 내가 애정으로 이어진 연인 관계라는 것을.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래서 그런지 형과 뭔가를 더 하고 싶어 난리다.
“데이트, 뭐가 좋을까요? 형은 저랑 뭐 하고 싶어요?”
차를 향해 걸어가며 밝게 웃으며 말하니, 형이 사르르 미소짓는다.
“다 말하면 도망갈걸.”
“어…, 연인 사이에 할만한 일이 아닌 거예요?”
“연인 사이에 할만한 일이긴 하지.”
그럼 왜 도망갈 거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인끼리 할만한 거라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형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정말 내가 겁내서 도망갈까 봐 초조해하는 것처럼.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내 어깨에 올려져 있던 형의 손을 내리고서 내가 먼저 꽉 붙잡았다.
“모처럼의 휴가이기도 하고, 형은 언제나 제가 하자는 대로 해줬는걸요. 그래서 이번엔 제 쪽에서 맞추고 싶어요.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형이 하고 싶은 걸 하죠.”
다짐하듯 결연하게 말하자마자 형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손을 붙잡고 있던 나 역시 당연하게 걸음이 빨라진다.
차에 도착한 형은 조수석이 아니라 뒷좌석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고선 날 밀어 넣은 채 자신 역시 올라탄다.
뒷좌석에 날 보낸 건 그렇다 쳐도 형까지 같이 들어오니 당황하던 찰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형의 입술이 달려들었다.
“읍-!”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키스도 모자라 날 꽉 옭아매는 팔에 내 당황은 더 배가되었다.
“하아…, 도망가지 않겠다고 했지?”
그새 거칠어진 숨과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이상하게 자극적이다. 형은 내 입술을 할짝거리다가 안을 깊이 파고들길 반복하며 야릇하게 속삭였다.
“마음 같아서는 별의별 거 다 하고 싶은데, 그래도 잘 참아볼게.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나 싫어하지 마, 응?”
“제가 왜 도망을……, 흐읍….”
“약속해줘, 우서야.”
형이 다급하면서도 절실하게 요청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키스는 그만둘 생각이 없는지, 자꾸만 할짝거리고 입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다.
이대로는 대답도 못 하겠구나 싶어서 고개를 뒤로 살짝 뺀 채 형의 입술을 손끝으로 꾹 눌러 막았다. 그새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내 왼손을 들어 보였다.
“도망 안 가요. 못 가요. 내가 이 링을 어떤 마음으로 완성했는데… 절대 못 가죠.”
이리저리 빙빙 돌려서 말할 것 없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형이 뭘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저 그렇게 어리지도 않고 겁이 많지도 않아요. 물론… 형이 그간 봐왔던 저는 겁 많은 어린애에 불과했을지 모르겠지만, 저도 제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만큼은 뒷걸음칠 생각 없어요.”
왠지 고백을 한 번 더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형에게는 꼭 해야 할 말인 것 같아서 막힘없이 내뱉었다.
“우리가 가진 링의 색은 둘 다 똑같다는 걸 잊지 말아요. 형이 뭘 한다 해도 제가 또다시 도망갈 일은 없을 거고, 싫어질 일도 없어요.”
뒤이어 형을 유혹하듯, 멈칫한 입술에 내가 먼저 짧게 키스했다.
“형이 그런 상황을 만들 리도 없겠지만요.”
배시시 웃으니 그제야 형의 얼굴이 묘하게 풀려갔다. 초조함과 긴장이 엿보이던 얼굴에는 형 특유의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고, 올라가 있던 눈꼬리는 다정하게 내려왔다.
조급하던 아까와 달리 상냥한 키스가 입술과 얼굴에 간지럽게 닿아 속삭인다.
“그럼 데이트는 한 곳에서 며칠간 해도 돼?”
“어디든 좋지만… 그래도 되겠어요?”
어딘가 펜션이나 리조트라도 가려는 걸까. 함께 경치를 보며 관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가끔 단체로 펜션을 간다든지 MT를 가본 적은 있어도 연인과 단둘이 여행을 가는 건 생각도 못 해본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저번에 친구들이 여행 가자고 목록 추려서 보냈던 곳 중에서 괜찮은 펜션을 봤어요. 거기 가볼까요? 경치도 좋고 근처에 구경할 곳도 꽤 많더라고요.”
“좋아. 하지만 경치 구경할 시간은 없을걸.”
형이 입술을 내 귓가에 가까이 가져가 또다시 야릇하게 속삭인다.
“형이 가르쳐줄 게 많아서 시간이 모자랄지도 모르거든.”
머릿속에 다양한 의문이 고개를 들다가 뒤늦게 의미를 깨달았다. 그러자 얼굴에 너무도 많은 열이 몰리기에 두 손으로 꾹 눌러 가려버렸다.
얼굴을 누른 왼손의 링 부분에 형의 뜨거운 입술이 닿는 느낌이 났다.
“도망가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연인이 되었으니 언젠가는 당연히 ‘연인다운’ 걸 하게 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처럼 빠를 줄은 몰랐기에 두 손 안에서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다 곧 마음을 내려놓으며 손을 뗐다.
“…도망 안 가요.”
눈 둘 곳 없는 사람처럼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하다가 형의 흔들림 없는 눈을 바라보니, 그제야 내가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의 얼굴에는 아까의 도망가지 말라며 매달리던 절실함 대신 예상대로 되었다는 듯한 시원스러운 미소만 걸려 있을 뿐이다.
알면서도 형의 계산에 또 당했다. 하지만 싫지 않다.
형의 그런 점까지 다 좋았다. 내 애정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겉으로 드러나는 고고함이 무색할 정도로 그 속에서 온갖 계산을 거듭하며 매달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는 게.
‘애초에 상대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이 계산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강지석을 좋아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그 녀석과 가까워지고 친구로서 누리기에 과분한 애정이라도 받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것처럼, 형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그걸 알기에 형이 해온 일들을 받아들였던 거고.
조금은 허탈하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형이야말로 3년 전처럼 도망가 버리면 절대 가만 안 둬요.”
허세가 담긴 패기로운 말에 형이 날 다시금 붙잡아 키스했다. 뜨거워진 두 개의 입술이 맞물려, 서로의 혀가 손쉽게 얽혀갔다.
마치 본능적으로 맞잡아버린 우리의 손에 담긴 한 쌍의 붉은 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