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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97화 (97/99)

97화

도진 형과는 나중으로 미룰 것 없이 바로 만나기로 했다. 도진 형도 최대한 빨리 만났으면 하는 느낌이었고, 마침 지건 형도 휴가 중이니 곧바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장소인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미리 도착해 있던 도진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갑 낀 왼손을 들었다.

“어서 와요. 축하해줄 겸 불렀어요.”

도진 형이 링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건 맞지만, 그의 말은 꼭 만나기 전부터 우리의 일이 잘 해결되었을 거란 걸 예상한 것 같다. 전화 통화로 링의 형태까지 알아볼 순 없었을 테니, 당연하게도 형에게 의심의 눈길이 갔다. 형은 ‘내가 뭐?’라고 말하는 듯한 눈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통화할 때 거리낌 없이 함께 가겠다고 대답했잖아. 그러니 잘 해결됐을 거라 생각했겠지.”

형의 말에 동조하듯 도진 형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예상보다 우서 씨 목소리가 밝기도 했고요.”

괜히 멋쩍어진다. 평소와 별 차이 없다고 느꼈는데 그렇게나 티가 났던 걸까.

자리에 앉아 왼손을 들어 볼을 긁적이는데, 마주 앉은 도진 형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올라온다.

도진 형이 내 왼손 약지의 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빙긋 웃었다.

“감정에 따라 링의 색이 바뀐다는 거, 알아요?”

“정말요?”

처음 듣는 얘기라서 곧바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나 지건 형의 왼손 약지에 보이는 건 그저 붉은 링 한 쌍밖에 없었다.

“커넥터는 처음부터 링의 색을 볼 수 있지만, 당사자들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건 링이 완벽해진 이후부터예요. 지내다 보면 색이 바뀌는 걸 볼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붉은색으로만 보이는데…….”

이전에 있던 한 줄의 링과 색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굳이 색상의 농도를 따져보자면 지금이 좀 더 짙은 붉은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런지 도진 형의 말이 그리 와닿지 않았다.

도진 형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내 링을 상냥하게 바라보았다.

“링이 나타내는 건 상대의 감정 상태예요. 지금은 링이 완전해진 직후라서 두 사람 모두 가장 최적의 붉은색을 띠고 있을 거예요.”

상대의 감정 상태.

그렇다는 건, 이 붉은색이 나타내는 건 지건 형의 감정이 반영된 거란 걸까.

슬쩍 눈을 돌려 지건 형의 왼손 약지를 바라보았다. 형의 왼손에도 역시나 나와 같은 색을 지닌 링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감정 상태가 안정적이라는 뜻이에요. 서로에 대한 애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짙은 붉은색이 되고, 상대를 향한 감정이 혼란스럽다거나 부정적으로 변하면 검은색에 가까워지죠. 그리고… 서로의 관계에 대해 후회하게 되면 점차 흰색에 가까워져요.”

도진 형이 우리의 링을 바라보며 내뱉은 꽤 진지한 말에 어깨가 움찔했다. 언제나 붉은색으로만 자리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링에 기묘한 무게가 더해진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내 감정을 나타내주는 거라면 이처럼 링이 무겁게 느껴지진 않았을 것 같다. 내 감정의 영향을 받은 내 손의 링이 변화한다면 그거야 등 뒤로 감춰 숨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 감정은 나와 연결된 형의 링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 말은 즉, 형이 가진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변화한다면 난 싫어도 그걸 봐야 한다는 뜻이다. 내 링을 통해.

그렇게 생각하니 얼굴이 굳고 시선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내 왼손에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 붉게만 보이던 링이 멋대로 검은색이 되었다가 흰색이 되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런 내 손등을 지건 형의 왼손이 살포시 그러쥔다. 서로의 링이 가진 선명한 붉은색을 나란히 놓고 보니 우습게도 초조하던 감정이 한순간에 어그러진다.

“네 감정이 내게 드러나는 것보다 네 링의 색이 바뀔까 봐 그게 더 걱정돼?”

형이 작게 속삭였다. 당연한 걸 묻는다고 대답하려다가 형과 눈이 마주쳤다. 어째 기쁜 듯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속이 다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이 들어서 얼른 시선을 피했다.

“네 링의 색이 바뀔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해.”

내 불안감을 완전히 날려주는 듯한 간지러운 말에 시선을 둘 곳만 더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날려보고자, 소리 없이 웃고 있는 도진 형을 바라보았다.

“도진이 형은 사진 속 링으로 소유자의 감정 상태를 알 수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때요?”

지건 형이 내게 모든 걸 털어놓았을 때 들은 적이 있다. 사진 속 링만 봐도 그 안에 담긴 소유자와 링의 상대에 대해 알 수 있는 도진 형은 그도 모자라 감정까지 읽을 수 있다고.

지건 형의 감정을 읽는 거라면 나 역시 내 링을 보고 알 수 있게 되었다지만, 도진 형은 다른 것 같았다. 내 링을 보고 내 감정을 읽었다고 들었으니 의아할 수밖에.

도진 형도 내 말의 의도를 알아챈 듯, 숨김없이 밝혀주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해지기 전까지는 나도 링의 소유자가 가진 정보와 감정만 읽을 수 있어요. 그래서 사진을 받았을 때 우서 씨가 링의 상대를 모르고 있었다면 내게도 그 정보가 보이지 않았을 거예요.”

새삼 이 작은 링이라는 것에 그만한 정보가 들어있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내게는 그냥 누가 낙서라도 한 것 같은 붉은 문신에 불과한데.

도진 형이 나와 지건 형의 링을 힐끗 눈짓한다.

“나와 두 사람이 볼 수 있는 색상의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처음 봤던 우서 씨의 링은 내게 검붉은 색으로 보였어요. 사실 그래서 더 관심이 갔죠.”

상냥하던 도진 형의 얼굴에 약간의 장난기가 더해진다.

“이정도면 상대를 향한 애정이 낮은 편도 아닌데 어째서 링을 꼭 해제하려고 하는 걸까…. 궁금해서 꼭 만나보고 싶었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가 지건 형에게 이미 애정이 생긴 때라서 도진 형의 관심을 끌 수 있었나 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진 형은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까지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

옆에서 날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형, 볼이 따가워요.”

“신경 쓰지 마.”

대꾸하는 중에도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는 사이, 도진 형이 말을 덧붙였다.

“아,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감정을 볼 수 없으니 그건 안심해도 돼요.”

도진 형의 얼굴에 묘한 씁쓸함을 담겼다.

“이어지고 난 후엔 두 사람만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제삼자인 난 더 이상 두 사람의 관계에 관여하면 안 되기에 색도 알아볼 수가 없죠.”

“그럼 형에겐 어떻게 보이는데요?”

“붉은색의 완전한 링. 그게 다예요. 색이 바뀌게 된다 해도 내가 알아볼 순 없겠죠.”

씁쓸하던 기색을 완전히 감춘 도진 형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네요. 두 사람의 링도 완전해진 걸 봤고 색도 붉다고 하니 안심이에요. 요 며칠간 혹시라도 우서 씨가 링을 해제해달라고 전화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했거든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죄송은요. 나름 막장 드라마 보는 느낌이라서 스릴 있었어요.”

‘막장 드라마’라는 말에 잊었던 민망함이 다시 차오른다. 이건 지건 형 탓도 분명 있었지만, 애초에 짝사랑하던 오랜 친구의 형과 이어진 나 자체가 그야말로 막장이다.

“두 사람 휴대폰, 잠깐만 빌려주겠어요?”

도진 형의 말에 왜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재촉하는 듯한 미소였다. 머뭇거리다가 슬쩍 휴대폰을 건네주니, 자연스레 연락처로 들어가 도진 형의 휴대폰 번호를 삭제했다. 그러더니 내게 동의를 구한 후 우리의 대화 메시지 주소마저 전부 삭제한다.

“이제 나와의 연락은 없는 거예요. 앞으로 만나지도 말고, 연락하지도 말아요.”

“예? 이렇게 갑자기…….”

당황스러운 눈으로 휴대폰을 받아드니, 옆에서 지건 형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이미 지웠다고 말한다. 눈치 빠른 형은 이미 도진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벌써 짐작한 모양이었다.

“이건 두 사람을 위해서예요. 부디 서로 날 찾을 일 자체를 만들지 말아줘요.”

말만 들으면 크게 싸워서 관계가 틀어진 줄 알겠다.

냉정한 말을 저렇게 상냥한 얼굴로 들어본 건 처음이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지건 형이 그런 내 어깨를 감싸고서 슬쩍 끌어당겼다.

“그럴 일 없을 거야.”

“좋아요. 지건 씨만 믿을게요.”

볼일은 이게 다라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도진 형이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그 미소는 여태껏 봤던 도진 형의 수많은 미소 중에서 단연코 밝았으며, 무거운 뭔가를 내려놓은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식상한 행복 운운하는 건 관두죠. 언젠가 길 가다 만나면 인사 정돈 나눠요, 우리.”

그 말을 남기며 곧바로 뒤를 돌아 나가는 도진 형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그를 불러 세웠다.

“도진이 형!”

내 말에 발을 멈추며 뒤를 돌아본 도진 형에게 아쉬운 마음과 고마움을 담아 살풋 웃어 보였다. 도진 형이 우리의 링이 틀어짐 없이 영원하길 바란다는 생각이 들어, 붙잡기보다는 웃는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 봐요.”

도진 형은 그러자는 대답 대신 말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를 떠났다. 남아 있는 건 선명한 링이 담긴 왼손을 깍지껴 겹친 우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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