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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96화 (96/99)

96화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네 생각.”

장난치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형의 눈이 의외로 냉정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나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지금의 상황을 보는 듯했다.

“이렇게 해야 내가 널 졸업할 때까지 당당히 데리고 있지.”

“예…?”

형은 빙긋이 웃으며 조금 전에 통화한 엄마의 휴대폰 번호를 그대로 저장했다.

“지석이한테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얘기는 들었어. 직접 통화해보니 어떤 사람인지 더 확실히 알겠더라.”

강지석이 엄마에 관한 험담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그나마 잘 안다고는 해도 원체 둔한 데다가 나쁜 소리도 못하는 녀석이니 아마 잘 포장해서 얘기해줬겠지.

하지만 형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엄마를 대강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을 거다. 게다가 직접 통화까지 했으니…….

“오늘 엄마와 처음으로 통화한 게 아니었죠?”

“네가 쓰러졌을 때 대신 전화 받은 적이 있어.”

그제야 형과 엄마의 통화가 좀 이해가 됐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통화로 미루어 보아, 두 사람이 단순히 안부만 물었던 건 아니었을 거라 생각했다. 일을 시켜보니 어떻냐는 둥, 정직원이 어떻냐는 둥의 알아듣지 못할 대화가 이어졌는데 쉽게 이해하는 게 이상하지.

형은 날 소파에 앉히고서 그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이 통화로 이제 난 전적으로 네 보호자이자 후원자야. 미래에 들어갈 회사의 상사도 되겠네.”

거창한 호칭과 달리 내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가까운 형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내 눈가를 상냥하게 쓸어주었다.

“넌 내 일을 돕는 정당한 대가로서 매 학비를 지원받을 거고, 난 네게 도움을 원활히 받기 위해 무상으로 이 집과 생활을 책임져 줄 거야. 그리고 졸업하게 되면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닐 필요 없이 곧바로 내 회사로 들어와 직원으로서 일하는 거지.”

듣는 내내 어리둥절했다.

“제가 형의 일을 도와요? 뭘……?”

“내가 푹 잘 수 있게 해주잖아. 이젠 너 없이는 못 자.”

형이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대며 살풋 웃었다.

“내 말이 틀려?”

또 또 저 여우짓.

형은 강지석과 닮은 걸 떠나, 자신이 잘생겼다는 걸 아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눈웃음을 치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형이 내 손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한다.

“난 네가 한시도 나와 떨어져 있지 않았으면 해. 네가 학생이고 내가 여전히 회사를 운영하는 동안은 어쩔 수가 없지. 하지만 졸업 후까지 떨어져 있어야 한다면 난 못 참아. 그러니 기회가 보이면 바로 납치해야 하지 않겠어?”

“납치….”

형의 단어 선정에 괜히 얼굴이 홧홧해진다.

“어머니가 원하는 것도 충족시켜 드리고, 난 나대로 널 정당하게 납치하는 거지.”

납치가 언제부터 ‘정당’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였는지 모르겠지만, 형의 눈빛이 진심이라는 건 알겠다. 이젠 그 눈빛 안에 담긴 집착의 색을 굳이 숨길 생각 없다는 것도.

가슴 속이 간질거리다 못해 배배 꼬일 지경이었지만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형이 의도한 것처럼 아마도 엄마는 내게 내려오라거나 일을 도우라는 말을 고집하지 않을 거다. 졸업할 때까지는 이대로 얌전히 형 옆에서 살 수 있겠지.

하지만 그다음은? 내가 과연 형 회사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신입을 잘 뽑지도 않을뿐더러 경쟁률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형 회사에 들어갈 수 있다면 분명 좋겠지만, 제 실력으로 가능이나 할까요?”

“무슨 걱정이야? 회사 대표가 학생 때부터 가르쳐온 사람이고 내가 필요하다는데 감히 누가 딴지를 걸어?”

당당한 얼굴과 말에 기가 빨리는 느낌이다. 형은 자신이 회사 대표라는 사실을 마땅히 이용해야 한다는 듯, 거침이 없었다.

“저는 정당하게 형 회사에 면접 보고 들어갈 거예요. 낙하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면접관으로 내가 앉을 건데?”

“…….”

어떻게 해도 형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형이 씩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들어오기 싫다는 말은 안 하네.”

“당연하죠, 저희 과에서 형네 회사는 워너비라고요.”

아마 졸업과 동시에 형네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하면 과에서 난리가 날 거다. 과 애들이 강지석을 부러워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형 때문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 들어간 후엔 내가 고정적인 수입을 얻게 되니, 엄마는 당연히 집요해질 거다. 연봉이 얼마인지, 보너스는 얼마나 나오는지, 매해 연봉이 오르긴 하는 건지 등, 귀찮게 할 요소가 다분했다. 그뿐이면 다행이겠지만, 엄마는 아마 내 생활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돈에만 주목할 게 뻔했다.

“어머니 일은 걱정하지 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형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제 내 번호를 아셨으니, 웬만한 건 내게 연락할 거야.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전부 다.”

“엄마가 강지석한테 담소 나누듯이 연락하던 것과는 다를 거예요. 형은 이미 사회인이고 회사 대표라는 것까지 다 알고 있으니까 당연히 엄마는 별의별 걸 다……!”

“그러시라고 한 거야.”

형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살포시 매만지고, 진정하라는 듯 얼굴에 입을 맞춰준다.

“원하시는 건 다 들어드리려고. 네게 신경 쓸 틈도 없이 내게만 집착하시도록.”

“무슨… 소리예요?”

“사람은 누구나 행동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법이거든. 그건 반대 역시 마찬가지고.”

얼굴에 닿는 형의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타인에게 신세를 지면 답례를 해야 한다는 ‘반보성’이라는 게 있어. 물론 그 개념이 희박한 사람도 있지만, 받는 게 거듭해서 쌓이고 쌓이면 상대가 큰 걸 요구하더라도 들어주기 마련이야.”

“쉽게 말해서… 엄마한테 계속 잘해주다 보면 형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예요?”

“잘 아네.”

칭찬하듯 얼굴에 간지러운 입맞춤을 남기던 형이 얼굴을 떼며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가 뭘 달라고 할 것 같아?”

“…….”

이제야 알 것 같다.

엄마는 강지석에게 그랬듯, 나보다도 형에게 가장 많은 연락을 하게 될 거다. 형에게 좋은 사람인 척 상냥한 말과 우아한 웃음을 담아 가까워지려 할 테고,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면 날 빌미로 이것저것 요구하게 될 수도 있다.

그거야말로 형이 바라는 게 아닐까.

형은 자신이 먼저 엄마가 원하는 걸 내어주되, 적절한 시기에 더 큰 걸 요구할 셈인 것 같았다.

‘그 큰 거라는 건 아마도…….’

얼굴에서 열기가 빠질 틈이 없다.

형이 달아오른 내 볼을 두 손으로 살포시 붙잡고서 눈웃음을 친다.

“걱정할 거 없어. 넌 그냥 지금처럼 내 곁에 있으면 돼.”

여우.

구미호.

형이 자꾸만 홀려서 머릿속에 무궁무진하던 걱정이 사르르 녹기 시작한다.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 한차례 한숨을 내쉬며 형의 두 손등을 내 손으로 덮어 감쌌다.

“…엄마라면 분명 점점 더 큰 걸 요구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 그럴 때마다 나도 널 자유롭게 해줄 정당한 요구를 하면 돼.”

형은 정말 대단하다.

내 속내를 다 털어놓은 것도 아닌데 마치 내 모든 걸 전부 꿰뚫어 보는 것만 같다. 이런 게 어른인가 싶다가도 형이니까……, 날 사랑하고 나만 바라보는 형이니까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형을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이런 게 애정의 깊이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딱히 뭔가에 대한 승부욕 같은 건 없었는데 지금만큼은 물밀 듯 밀려오는 느낌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형을 빤히 바라보다가 스스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두 입술이 가까워진다.

“저도 형한테 잘할게요.”

형의 눈가가 움찔했다. 입술만큼이나 서로의 긴 속눈썹마저 서로 닿을락 말락 한 거리라서 그런지, 형의 눈동자 속에 담긴 내가 너무도 또렷하다.

“형이 저한테 해주는 게 너무 많은데 솔직히 거절하고 싶진 않으니까, 다 받는 대신 진짜 잘하려고요.”

또 저렇게 눈을 휜다. 사람 설레게.

형의 입술이 애를 태우듯 내 입가에 살짝 닿았다 떨어진다.

“낮이든 밤이든 얼마나 잘해줄지 기대되네.”

어째 말 안에 묘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걸 깊이 생각할 새도 없이 두 개의 입술이 맞붙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이 뒤섞여, 곧 달콤한 간지러움이 기분 좋게 퍼져 나갔다.

서로의 입술과 혀를 통해 오고 가는 감미로운 감각에 취해 눈을 감고 있다가 살짝 눈을 떠 보았다.

역시나 형은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뭔가를 강하게 참는 듯하면서도 집요한 그 눈은 키스할 때마다 날 오싹하게 만든다. 그 감각에 중독돼버린 나 역시도 눈을 감기보다는 형의 눈을 이대로 자꾸만 바라보고 싶어진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형과 입술을 맞댄 채 깊이 키스하느라 연락이 온 지 한참 뒤에야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만날 수 있어요?]

[가능하면 우서 씨와 강지건 씨, 두 사람 다요.]

메시지의 발신인은 조만간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도진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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