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계의 고리-95화 (95/99)

95화

15. 신우서

집으로 돌아온 당일에는 푹 쉬었지만, 다음날이 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엄마가 왜 연락이 없으시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거실을 서성거리던 난 습관적으로 엄지를 입으로 가져가 손톱을 까득 깨물었다.

이상하게도 엄마에게서 연락이 없다. 평소 같았다면 이처럼 말도 없이 가버린 걸 절대 용납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걱정되어서라기보다는 엄마의 일을 도와주기로 해놓고 자리를 비워서 일에 지장을 주고 말았으니 크게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강지석이 와서 날 데리고 나간 당일, 그리고 형과 집으로 돌아온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하면 벌써 사흘째다. 일손이 부족하다고 노래를 하던 엄마가 갑자기 사흘이나 사라진 쓰기 좋은 일꾼을 이렇게 방치할 리가 없다.

이대로 더 있다가 강지석에게마저 이상한 소리를 하신다든지, 그도 아니라면 여기까지 찾아오시는 게 아닐까. 강지석 성격이라면 엄마가 날 걱정하는 척 집을 물어보면 즉각 대답해드릴 게 뻔했다. 날 생각해서 강지석이 일부러 집 위치를 얼버무린다 해도 엄마의 집요함을 생각하면 결국 그에게 큰 폐를 끼치는 거나 다름없다.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게 낫겠지?’

엄마가 왜 연락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내가 먼저 연락해서 화가 풀리실 때까지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차라리 일찌감치 연락해서 내게 거친 말을 쏟아내셨더라면 이처럼 초조하진 않았을 텐데.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들어 노려보고, 다른 손은 엄지를 사정없이 씹어대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 화면에 다른 그림자가 끼어들더니, 깨물고 있는 손을 뒤에서부터 확 잡아챈다.

“깨물지 마. 또 상처 나.”

안타까움을 섞은 엄한 목소리가 날 제지한다. 허리를 붙잡힌 채 뒤로 당겨져, 탄탄한 가슴팍에 포근히 기대어졌다. 약간의 담배 냄새가 섞인 익숙한 체취가 훅 다가왔다.

그새 거칠어진 손톱 끝을 혀로 한 번 할짝 닦아준 지건 형이 내 어깨에 턱을 기대며 물었다.

“어머니께 연락이라도 왔어?”

형은 휴대폰에 버젓이 떠 있는 엄마의 연락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한창 휴가 중인 형은 어딘가 쉬러 가는 것 대신 얌전히 집에 머물고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회사 대표가 며칠씩 휴가를 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기왕 쉬는 거, 마음 편히 쉬게 해주고 싶어서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말도 없이 사흘이나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애써 웃어 보이며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형이 그대로 꽉 붙든 채 내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액정에 떠 있는 거라고 해봐야 엄마의 이름과 연락처뿐인데.

곧 형은 날 풀어주고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걱정할 거 없어. 어머니께는 내가 전화 드릴게.”

“예? 형이 왜 저희 엄마한테…….”

당황하며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형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선 조금 전 내 휴대폰을 보고 외워버린 엄마의 연락처를 키패드에 거침없이 입력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깐만요, 형. 엄마는 형 연락처도 몰라요. 그리고 형은 기왕이면 저희 엄마와는…….”

“네 엄마잖아.”

형이 엄마와 얽히지 않았으면 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 엄마는 이기적이고 이해 타산적이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걸 극도로 갈구하는 사람이자, 가까운 사람일수록 가면 속의 거친 부분을 마음껏 표출하고 마음대로 휘두르길 원한다. 아빠와 나에게 그러는 것처럼.

강지석까지는 어쩔 수 없다지만, 형까지 엄마와 얽혀버리는 건 바라지 않았다. 엄마라면 분명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자마자 머릿속으로 어떻게 하면 본인의 잇속을 채울지 고민할 게 뻔했다.

주체할 수 없는 걱정 때문에 형을 다시금 만류하려는데, 내 속도 모르고 오히려 마주 안아 토닥거려준다.

“괜찮아.”

다정한 속삭임에 말문이 막혔다. 그 찰나에 맞춰 엄마가 전화를 받아버리고 만다.

-누구세요?

형에게 안겨 가까이 있는 탓에 휴대폰 너머의 엄마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어깨가 움찔하고 몸이 굳어버린다. 안겨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손을 들어 엄지손톱을 또 깨물었을 것 같다.

“안녕하세요, 일전에 통화했던 지석이 형 강지건입니다.”

-어머, 지건 씨! 안녕하세요!

엄마의 목소리가 확 달라졌다.

형과 엄마는 분명 통화한 적이 없을 텐데, 어째서인지 첫 대화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안 그래도 조만간 연락드리려고 했어요. 어떻게, 우리 우서는 잘 있나요? 일 좀 시켜보니까 어떠신가요?

엄마의 말은 이상했다. 마치 내가 형에게 알바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형에게 찰싹 붙어 안긴 채 당황한 눈만 굴리고 있으니, 형이 또다시 안심시키듯 등을 토닥거렸다. 잠들 때마다 아기 재우듯 토닥이던 형의 손길이 고스란히 떠올라, 긴장과 초조함으로 뒤엉켜 있던 속이 조금씩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우서가 워낙 유능해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워낙 애가 소심하고 말수도 없어서 일 처리는 제대로 하려나 걱정했는데.

엄마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대학 졸업하면 바로…….

뭔가를 원하듯 엄마의 말끝이 은근히 흐려진다. 엄마와 형이 설마 나 몰래 모종의 계약 같은 걸 나눈 걸까.

“물론입니다. 우서가 원하기만 한다면 졸업 직후에 바로 정직원 자리를 줄 생각이에요.”

-당연히 좋다고 하겠죠! 우리 우서는 내가 잘 알아요.

알긴 뭘 알아요, 엄마.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쪽 업계 평균 연봉을 좀 알아봤는데…….

엄마의 말이 이어질수록 너무 황당무계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엄마에게선 IT업계의 평균 연봉이랍시고 절대 초봉으로 받을 수 없는 금액이 흘러나왔고, 덧붙여 내가 무슨 다른 유명 회사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라는 둥, 여태껏 직접 세심하게 케어하며 실력을 쌓게 했다는 둥의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거짓말 그만 해요, 엄마.’

케어는 무슨, 방치를 했으면 모를까.

내 학점이 얼마나 나오는지 관심도 없고, 그저 매 학기 장학금을 받아왔다는 것만 알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척 줄줄 이야기한다.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형이 이런 이상한 소리를 듣고 엄마뿐 아니라 나까지 실망한 눈으로 바라볼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형은 왜인지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조금은 흐뭇하게 올라가 있고, 차분히 맞장구를 쳐주는 것도 나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형은 날 바라보며 태연스레 입을 뗐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높은 연봉으로 열심히 꼬셔서 데려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우서를 많이 좋아하거든요.”

안 그래도 달아 있던 얼굴에 열기가 더해졌다. 앞은 엄마의 말을 받아주는 쿠션 같은 것에 불과했지만, 뒷말은 진심이 그대로 느껴졌다. 목소리 톤부터가 다른걸.

다행히 엄마는 그 말의 깊은 곳에 담긴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죠. 그때까지 잘 좀 부탁드려요. 우리 우서 좀 더 많이 좋아해 주시고요.

“물론이죠, 어머니. 그럼 대학 졸업할 때까지 잘 데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통화는 끝이 났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선 아직도 두 사람의 대화가 이리저리 반복 중이다.

형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목으로 웃은 형이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사랑하고 있다는 말까지 할 걸 그랬나?”

“안 돼요!”

형의 말 한마디에 고개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열기는 그대로이지만 잔뜩 굳어버린 얼굴로 형을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런 소리들을……. 하아…, 형, 저희 엄마 말 다 들어드릴 필요 없어요. 왜 연락도 형 휴대폰으로 한 거예요, 번호 다 드러나게…….”

엄마에게 갔을 때도 일부러 입을 꾹 다문 채 형 번호를 모른 체했다. 엄마가 아무리 형에 관한 관심이 지대해도 나만 입을 다물면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본인의 이미지 관리 때문에라도 강지석에게 대뜸 형 번호를 캐묻진 않을 테니까.

그랬는데 이렇게 당당히 번호를 노출해버리다니.

엄마에게 가 있는 내내 추궁당했으면서도 입을 다문 보람이 없다.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형의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예쁘게 내려와 호선을 만들었다. 그제야 형이 무턱대고 엄마와 통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