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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94화 (94/99)

94화

“알면서 뭐하러 물어봐?”

우서는 강지석의 진지한 말을 마치 실없는 질문 대하듯 대답했다.

“이미 다 알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네 정확한 대답이 듣고 싶어서.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는데도 밀어내지 않고 함께 돌아온 이유가 뭐야?”

“이유….”

두 글자를 곱씹듯 말끝을 흐리는 걸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문틈을 엿보고 싶어졌다. 자칫 들키면 우서가 속 이야기를 삼킬 거라는 생각 때문에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귀를 기울였다.

“나도 내가 이상해.”

링이 자리한 왼손이 움찔 떨렸다.

“날 속이고 민아 누나나 너까지 이용한 사람인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이상하긴 해. 언젠가 또 속이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데.”

우서의 목소리가 점차 진지해졌다.

“그래도 좋은가 봐.”

왼손 약지가 이상하리만치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형이 내 마음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했다는 게 좋아. 갖고 있는 모든 걸 이용해서라도 나와의 관계를 만들고 영원히 엮고 싶었을 형의 마음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고 또 설레더라.”

우서의 진심 어린 목소리는 감미로운 선율이 되어 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알수록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방법은 다르지만, 나도 그랬거든.”

목소리 끝이 씁쓸하게 변해가다가 곧 밝은 음색을 띤다.

“강지석. 이제 와서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나 너 진짜 좋아했다.”

예전과 달리 우서는 이상하리만치 거침이 없었다. 짝사랑하는 강지석에게 5년간 고백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우서가 내뱉은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얌전히 듣고만 있던 강지석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하, 과거형이냐?”

“과거형이지.”

우서의 즉답을 들은 강지석이 침대 시트를 화풀이하듯 팡팡 두드렸다.

“현재형 안되냐고, 현재형!”

지석의 가벼운 투정에 우서도 몇 번 장난을 쳐주다가 곧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었다.

“고마워.”

“고마울 게 뭐가 있어. 차여줘서 고마워, 뭐 그런 거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강지석의 얼굴에는 아마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을 것 같다.

“난 지금도 겁나. 네가 나랑 멀어질까 봐.”

우서의 불안한 듯한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이 우서가 가장 두려워하고 걱정하던 순간일지도 모른다.

강지석과 거리가 생기고 멀어져 버리게 되는 것.

우서는 강지석을 좋아한 순간부터 그걸 가장 무서워했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강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왜 멀어져? 네가 어떤 사람이든, 뭘 하든, 넌 평생 내 친구야.”

강지석의 말을 들은 우서는 그제야 한시름 놓은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친구로서는 쭉 좋아해 줄 거지?”

“당연하지.”

우서가 5년간의 짝사랑을 정리하고 완전히 나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밝은 분위기였다.

엿듣던 걸 멈추고 방으로 향했을 땐 머릿속에 우서의 말이 겹겹이 쌓여버려,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 * *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

방문이 빠끔히 열렸다.

“형.”

문을 열고서 고개를 살짝 밀어 넣은 우서가 귀여워, 읽고 있던 책을 덮어 책상에 올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우서가 안으로 냉큼 들어오지 않고 문가에서 서성이고만 있다.

“왜 그러고 있어? 들어와.”

우서는 이 집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내 방에서 잠을 청하던 그때처럼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새삼스러워서 직접 문으로 다가가니, 우서의 굴러다니던 눈동자가 금세 결연해진다.

덥석, 손이 붙잡혔다. 훨씬 작은 우서의 손아귀가 내 손을 단단히 그러쥐는 느낌마저 귀엽다고 하면 난 좀 변태인 걸까.

“따라와요.”

그새 진지해진 얼굴의 우서가 내 방 불을 끄더니 날 붙잡아 방 밖으로 끌고 나간다. 버틴다면 못 버틸 것도 없지만 우서가 끌고 가다니, 이런 건 흔치 않으니 꼭 끌려가 줘야 한다.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얌전히 끌려간 곳은 우서의 방이었다. 날 들여보내고서 문을 꼭 닫은 우서가 패기롭게 싱글 침대의 이불을 반쯤 걷어낸다.

“오늘은 제 방에서 같이 자요.”

우서의 당당한 말에 순간 나조차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에서는 우서의 말이 뜻하는 바를 확실히 하기 위한 별의별 시뮬레이션이 다 돌아가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우서의 성격을 기반으로 한 현재의 상황 속 오류를 잡아내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그만큼 우서가 ‘자신의 방’에서 ‘같이 자자’는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아, 근데 지금 보니 제 방 침대가 너무 좁…네요.”

내 방의 퀸사이즈와 달리 우서의 침대는 싱글 사이즈였다. 우서가 왜소한 편이긴 해도 건장한 남자 둘이서 자기엔 확실히 좁았다. 멋쩍은 얼굴의 우서가 들었던 이불 끝을 슬쩍 내렸다.

“그냥 형 방에서 잘까요?”

“아니.”

멋쩍은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띤 우서 대신 내가 먼저 침대에 누워버렸다.

“좁긴 한데, 어차피 안고 잘 거잖아.”

내 침대라도 되는 것처럼 멋대로 누운 채, 이불을 보란 듯이 들어 보였다. 우서 정도라면 충분히 들어올 수 있을 법한 공간을 만들어 주며 빈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이리 와. 자자.”

우서의 얼굴이 금세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러다 의외로 머뭇거리지 않고 안으로 폭 들어와 안긴다. 반면, 그 짧은 시간에 귀가 온통 새빨개져 있다.

자연스레 내 팔을 벤 우서는 조금 더 용기를 낸 건지, 내 허리에 어색하게 팔을 둘렀다. 그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주며 침대 머리맡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불을 껐다.

“연인이 되면 적극적이 되는 타입인가 봐. 이건 몰랐네.”

“저도 몰라요. 그냥… 연인들 사이엔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하는 거라고 들어서…….”

“누가 그래?”

“강지석이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녀석이 한 말이라고 하니까 신빙성은 좀 떨어지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긴장이 풀린 듯, 우서가 속삭이며 농담한다.

어둠 속에서 우서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꼼꼼히 덮어준 후, 그의 등을 균일하게 토닥여주었다.

“기다려도 안 오면 내가 찾아가려고 했는데.”

“매번 이 시간쯤에 찾아갔잖아요.”

목 언저리에 닿는 우서의 숨을 느끼며 그의 이마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링이 완전해졌으니 이제 굳이 함께 잘 필요 없잖아.”

링이 완전해지면 서로 떨어져 있어도 보통 사람들처럼 똑같이 잠들 수 있다. 물론 함께 잠들면 극상의 수면을 맛볼 수 있다지만 불완전한 링이 유발하는 극한의 불면증도 사라졌으니 충분히 각방을 써도 될 일이었다.

“아…. 생각도 못 해봤어요.”

“생각하지 마. 불면증이 없어도 난 이제 너 없으면 못 자.”

실험해본 건 아니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우서 없이 혼자 잠드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걸.

“저도…….”

작은 목소리가 웅얼거리다가 수줍게 삼켜진다. 뒷말도 더 해주면 좋았을걸.

어둠 속에서 눈을 내리깐 채 머리를 굴리고 있을 우서에게 아까부터 묻고 싶은 말을 던졌다.

“오늘은 왜 이 방에서 자자고 한 거야?”

“역시 침대가 좀 좁죠? 그냥 형 방에서…….”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일어나려는 우서가 옴짝달싹 못 하게 꽉 붙잡아 안고서 다시금 등을 토닥였다.

“이유가 있다면 좀 기쁠 것 같아서.”

“어떤 이유인지 말도 안 했는데 미리 기쁘면 어떻게 해요?”

“그러게. 이상하게 미리 기쁘네.”

입을 닫은 채 작은 웃음소리를 내던 우서가 내 등을 꼭 끌어안는다.

“언제나 형 공간에서만 잠들었잖아요. 오늘은… 제 공간에서 같이 잤으면 해서요.”

우서의 말에는 꽤 큰 의미가 들어있었다.

일방적으로 내 공간에 들어오기만 하던 우서가 이젠 자신의 공간을 내게 내어준다. 그건 마치 내가 우서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공간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을 나타내주는 것 같아,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불을 미리 꺼둬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묘한 얼굴을 한 날 우서가 이상하게 바라봤을 것 같다.

우서가 완전히 내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래쪽에 뻐근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성의 두꺼운 실이 어느덧 머리카락만큼 얇아져, 툭 끊어질 것처럼 변해간다.

“우서야, 난…….”

입을 뗀 순간, 우서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뻐근하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완전히 잠잠해지고 만다.

남은 건 벅찬 감정과 약간의 허탈함 뿐.

‘그래, 시간은 충분하니까.’

우서의 등을 토닥여주며 나 역시 눈을 감았다. 연애에 관해선 순진한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우서이니, 너무 급하지 않게 천천히 나아가면 될 일이었다.

겁먹지 않게 천천히, 나중에는 우서가 먼저 원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가르쳐 보자.

우서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는 것만은 누구보다 잘 할 자신 있으니까.

사랑스러운 우서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기며 나 역시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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