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서는 꽤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건 엘리베이터 같은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 때문인 것 같았다.
팔을 뻗어 우서의 어깨를 둘러 당겼다. 자연스레 기대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지석이 때문에 그래?”
질문을 던지자마자 움찔하며 날 바라본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우서는 강지석을 신경 쓰느라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변할수록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어제 저 있는 곳까지 왔더라고요. 아…, 형도 보셨겠네요, 참.”
우서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어제부터 내가 쭉 보고 있었던 것에 대해선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내 모든 걸 다 받아준 우서에게 그런 것까지 숨길 필요는 없어 보였고, 오히려 숨겼다면 우서가 쓰러질 때 맞춰 타이밍 좋게 나타난 일에 대해 해명할 말이 없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우서는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제 휴대폰의 위치추적 앱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을 뿐이다.
우서는 점차 표정을 바꾸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그날 강지석한테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것 같아서요. 걱정 많이 해줬는데…….”
작은 머리통 안에서 강지석이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강지석을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눈치 봐 온 우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고, 방해꾼이긴 했어도 결국은 조력자였던 내 동생을 떠올리는 거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아도 무작정 질투심을 보일 만큼 어리지도 않다.
우서의 어깨를 토닥이며 집 층수에 거의 다다른 엘리베이터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지석이는 그런 거 신경도 안 쓰고 있을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단순히 달래려는 말은 아니었다. 그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몰라도 강지석이라면 우서를 만나자마자 활짝 웃어주며 알아서 반겨줄 게 뻔했다. 어쩌면 우서에게 쓴소리를 들었더라도 그마저 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르지.
우서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전광판의 숫자가 멈추고, 짧은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집 앞에 서서 현관문을 열자마자.
“왔어?”
기다렸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나와 방긋이 웃는 강지석이 보였다. 녀석은 우서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팔을 붙잡아 안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오느라 고생했어.”
“아냐, 고생은 형이 하셨는데…….”
우서의 흐린 말도 듣지 못한 건지 강지석은 다짜고짜 그를 주방으로 데려갔다. 그러고선 식탁 위에 진열하듯 나열한 드링크와 영양제들을 보여주며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민다.
“널 위해 준비했……! 헉!”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강지석의 가슴팍을 우서가 주먹으로 퍽 쳤다. 운동으로 단단해진 가슴 근육 덕분에 그다지 아프지도 않을 텐데, 일부러 바위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숙여 진심으로 아픈 척을 한다. 우서는 강지석의 그런 장난을 자주 봐왔던 건지 태연하게 정색한다.
“또 갑자기 돈지랄하는 버릇 나오지.”
“돈지랄이라니, 엄연히 내 용돈으로 너 생각해서 산 건데.”
“그 용돈 주는 게 누군데?”
“그거야…….”
강지석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그러다 금세 갈 길을 잃은 것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왜인지 의기양양하게 우서를 바라보았다.
“너랑 형 생각해서 산 거야. 둘 다 요즘 얼굴이 워낙 안 좋아졌으니까 이런 거로라도 보충해야지. 둘이서 같이 잠만 자도 회복될 걸 알지만, 그래도 이 기회에 각자 몸 좀 신경 쓰라고. 그래야 예전처럼 뽀송하게 돌아오지 않겠어?”
가늘게 뜬 눈으로 강지석에게 한소리를 더 하려 했던 우서는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멈칫했다. 우리가 함께 자는 것을 전제로 한 강지석의 말만으로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 건지 알아챈 우서는 그의 머릿속에 들어찬 작은 혼란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당황한 우서의 어깨를 감싸 그의 방을 향해 등을 밀어주었다.
“영양제든 뭐든, 일단 씻고 좀 쉬는 게 좋겠어. 역시 밖보다는 집이 편하네.”
“아, 네.”
머뭇거리다가 도망치듯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우서에게 강지석이 ‘나오자마자 비타민부터 먹어’라는 말을 던졌다. 우서는 대답 대신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우서가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자상하게 웃고 있던 강지석의 얼굴이 그대로 나를 향했다.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가 조금 장난스럽게 삐죽거린다.
“잘 해결된 것 같네.”
“아무렴. 그래야지.”
강지석이 준비해둔 갖가지 영양제 약통과 드링크들을 보다가 그 안에서 피로해소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따서 한 번에 멈추지 않고 원샷하자 새콤달콤한 향이 목구멍을 지나 안쪽에 깊숙이 자리 잡는다.
깔끔하게 비운 빈 병을 테이블에 올려놓고서 방으로 향하는 동안, 강지석은 내 등을 집요할 정도로 바라보고 있었다.
씻고 돌아온 난 내 방 의자에 털썩 앉으며 참았던 숨을 내쉬듯 길게 호흡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며칠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어제오늘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형이 절 싫어하지 않고 계속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했으나 도통 움직이질 않는다. 우서 방에 불쑥 찾아가 일단 끌어안고 싶은 생각부터 든다.
‘우서야, 너 진짜…….’
우서 탓도 아닌데 탓하고 싶어진다. 뒤늦게 찾아온 타격은 기분 좋게 머리를 쓸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때,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우서의 얼굴이 후다닥 도망가듯 숨어버리고, 눈앞에는 문을 열고 들어온 강지석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노크는 어디 팔아먹었어?”
눈가를 찌푸리며 묻는 말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강지석은 무작정 내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잠깐 나와 봐.”
강지석은 짧은 말과 함께 날 끌었다. 내 팔을 붙잡은 손의 악력은 언제든 뿌리칠 수 있을 정도였으나 무슨 생각인가 싶어서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강지석이 향한 곳은 우서의 방 앞이었다. 무슨 생각인가 물을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날 그 문 옆의 벽에 밀어붙인 강지석은 내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우서의 방부터 노크했다.
“우서야, 들어가도 돼?”
“어.”
안에서 우서의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문 너머로 들은 목소리는 다행히 당황함이 많이 가신 듯, 차분한 음색이었다. 새삼 그 짧은 한 글자에 목소리를 담은 것뿐임에도 그의 상태를 알아챈 내가 신기할 따름이다.
별 표정 없던 강지석은 우서를 위한 밝은 미소를 걸친 채 안으로 들어갔다. 벌어졌던 문 사이로 강지석이 들어간 후, 다시금 문이 닫혀가는 걸 보면서도 가만히 서 있었다. 예상대로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고 아주 조금, 비스듬히 열린 채 멈춘다.
“몸은 좀 어때?”
“지금은 괜찮아.”
소리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문 바로 옆에 서 있는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 정도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잠은 좀 잔 거야? 여태 못 잤었잖아. 어제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얼마나 걱정했다고.”
강지석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우서의 한숨 같은 말이 대꾸한다.
“그래서 그렇게 무턱대고 몸에 좋단 거 다 사둔 거야?”
“좋은 걸 많이 먹어야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할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 그걸 어떻게 다 먹냐?”
“알잖아. 혼자 먹으라고 사 온 게 아니라는 거.”
“…….”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우서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러다 조심스레 묻는다.
“형이 말했어? 우리… 얘기.”
우리의 생각, 우리의 관계, 우리의 링이 변화한 형태.
강지석에겐 아직 그 모든 걸 말하지 않았으나, 우리의 모습만 보고도 확신했을 거다.
아니, 그보다 이전에 알아챘겠지.
어제 날 만나기 전, 강지석은 아마 우서와의 대화에서 나름대로 답을 내렸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우서의 곁을 맴도는 날 보며 또 한 번 마음을 다듬게 됐지 않을까.
“그럴 시간이 어딨었겠어. 나한텐 집으로 온다는 전화 한 통 안 줬는걸.”
투덜거리듯 말하던 음색이 점점 진지해졌다.
“그래서 좀 물어보려고.”
“뭘?”
“네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순간 가슴이 크게 뛰었다. 나답지 않은 긴장으로 가슴이 꽉 죄어오는 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려 내 왼손 약지의 링을 내려다보았다.
링의 형태는 여전히 두 개의 붉은 선이 얽혀 있는 모습이었다. 그걸 확인하고서야 조금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아예 마음이 편해진 건 아니었다.
우서가 내게 진심이 되었다는 건 알고 있다. 내 생각, 내 행동, 내 마음까지 모두 받아주었으니 우리의 링이 완전해질 수 있었던 거겠지만, 그래도 티끌만큼이나마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 눈을 바라보며 말할 때와 타인에게 털어놓을 때 나오는 말이 다를까 봐 약간 긴장되기도 한다. 평소 같았다면 내 판단과 지금의 결과에 실수가 있을 리 없다며 자신만만해 할 나인데, 우서에 관한 거라서 그런지 귀를 세워 그의 뒷말을 기다리게 된다.
곧이어 우서의 작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