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호텔 방으로 올라가자, 우서가 그제야 내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그의 미간이 점차 굴곡을 만들고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일부러 잠을 자지 않고 버틴 보람이 있는지, 우서의 눈동자에 연민의 빛이 깃든다.
나 불쌍하지.
불쌍하지, 우서야.
내 속마음에 반응하듯, 우서의 입술이 달싹거린다.
“왜 안 잤어요?”
대답 대신 쓴웃음을 보여주었다.
어차피 다 알고 있잖아.
우서와 함께 잠드는 것 대신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우서의 냉정함이 돌아오기 전에 내 초췌함이 그의 마음을 충분히 흔들 수 있었으면 했다. 조금이나마 회복한 우서가 그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날 보면 절대 매몰차게 대할 수 없을 거란 걸 알기에 한껏 지친 얼굴을 했다.
‘이깟 것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어.’
네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써준다면 이깟 피곤함이 대수일까.
“미련하게 왜 안 잤냐고요. 그러다 쓰러지면…….”
우서의 눈가에 금세 물기가 차올랐다. 몇 시간 잠들었던 정도로는 우서의 피폐해진 마음을 강하게 만들 수 없었던 건지, 타박하는 목소리와 달리 표정만큼은 내게 달려들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이것도 저한테 동정심 사려는 거죠? 일부러 버티다가 나보다 먼저 쓰러지면 제가 돌아봐 줄 테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죠?”
잘 알고 있네.
이미 내가 어떤 사고방식으로 어떤 수를 써왔는지 다 알고 있던 우서는 이번 역시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우서의 말은 전부 정답이었고, 난 그가 일찍이 알아채고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제가 좋아요? 그렇게 좋으면 옆에 누워서 그냥 같이 자버리지 그랬어요. 왜 미련하게 버티는 건데요?”
“네가 싫어할까 봐.”
함께 잤다가 눈을 떴을 때, 지쳐있던 심신이 회복된 후에 다시금 날 바라보면 역시나 눈을 돌리게 될까 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일부러 버텨서 이런 몰골을 본 우서의 마음도 흔들고 그가 날 두고 도망갈 일도 만들지 않기로 했다.
“말했잖아. 네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라고. 반대로 말하면, 네가 싫어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너한테만은 이렇게 착하게 굴고 있다. 다른 사람들, 심지어 가족과 나 자신조차 이용하더라도 너한테만은 이렇게 착하고 진심인데, 그래도 안 봐줄 거야?
습관처럼 우서의 얼굴을 쓰다듬으려다 손을 내렸다. 내 말의 신빙성과 조심스러움을 어필하기 위해 먼저 손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손대는 것도 신경 쓰이면 안 할게. 대신 너 재울 때 아예 접촉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손만이라도 잡게 해줘.”
예쁨받기 위해 안달 난 강아지처럼 뭐든 해주겠다고 말하며 초조해했다. 진심인지, 연기인지 모를 초조함이었지만 어떻든 상관없었다. 어느 쪽이든 전부 내 것이었고, 지금의 우서 역시 그걸 알고 있을 거다.
“지금 그 말도 형 계략에 있는 대사예요?”
우서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내려갔던 내 손을 붙잡아 보란 듯이 끌어 올린다.
“내가 형 신경 쓰게 만들고 마음 약해지게 만들려는 거, 맞죠?”
단념하듯 내린 내 손을 그 스스로 먼저 붙잡은 채 묻는 순간, 애써 지어둔 쓴웃음이 망가져 진하게 웃을 뻔했다. 우서는 그가 물었던 그대로 날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어서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우서는 내가 그걸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도 모두 짐작하고 있을 테지만, 난 굳이 내 입으로 줄줄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우서는 날 끌어 침대에 밀어 눕혔다. 그가 하라는 대로 얌전히 누워있자, 그가 내 몸 위에 가볍게 올라탄다.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우서가 며칠 전보다 확실히 가벼워졌다는 실없는 생각이었다.
“이제 형이 하는 말마다 전부 계획적으로 보여요.”
맞는 말이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전부 의미를 부여했다. 그 의미의 끝에는 언제나 우서가 서 있고, 그가 아니라면 의미 없는 일이었다.
계획은 쟁취를 위함이다. 뭔가를 쟁취하고 손으로 단단히 붙잡기 위해서 필요한 게 계획이자 계략인데, 어떻게 널 대할 때 백지처럼 순수해질 수 있겠어.
아마도 너에 한해서는 무계획적이 되거나 지석이처럼 순수해질 일은 없을 거다. 나도 그걸 알고 있었고, 한참 어린 동생인 강지석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되길 바랐겠지.
우서가 나의 모든 걸 깨닫고도 완전히 받아주길 원해서.
짙은 농도의 내 깊은 곳까지 모두 알고도 이어진다면 그때야말로 링이 완전해질 수 있을 테니까.
우서가 내 손을 붙잡아 그의 볼을 감싸게 했다. 스스로 나를 붙잡아 움직여 살결을 맞대게 한 그 작은 행위 하나가 곧 선명한 색채의 물감이 되어 내 농도 짙은 심해를 파고든다.
“이렇게 만져주는 것도, 쓰다듬어주는 것도, 날 위하는 말도, 전부 다 형의 계략이고 날 농락하려는 거 아는데…….”
우서의 떨리던 입꼬리가 점차 올라가더니 작은 호선을 만들어냈다. 닮아도 너무 닮은, 나와 같은 쓴웃음을.
“그게 왜 다… 진심 같냐고…….”
우서의 얼굴 위에 지금의 내가 겹쳐 보이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흔들리는 눈동자, 힘겹지만 모든 걸 받아들일 각오가 된 쓴웃음, 똑같은 체온의 잔잔한 떨림.
우서가 몸으로 천천히 나를 덮고서 내 심장 박동을 느끼기 시작한다. 음악의 크레센도처럼 점점 빨라지는 박자에 맞춰 그의 심장 역시 선명하게 따라 뛴다.
“형은 정말 못된 인간이에요. 최악이야.”
힘없는 비난이 그의 목소리를 따라 심장을 두드린다.
“날 속이고 모두를 이용하고…….”
손을 들어 우서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은 듯, 빠른 심장 박동과 반대로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거리며 편안한 얼굴을 한다.
“하나만……. 하나만 더 대답해줘요….”
“뭐든 다 대답해줄게. 숨기지 않고, 전부 다.”
“형은 나와 함께 했던 것들 모두… 진심이었어요? 아니면 계략이었어요…?”
이내 느릿하던 눈꺼풀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완전히 다물린다. 그것마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쓰다듬던 머리에 입술을 꾹 눌렀다.
“둘 다.”
우서는 내 짧은 대답을 듣자마자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대답을 들었기에 오히려 안심했다는 듯이.
그리고 나 또한 안심한 채, 그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우서가 먼저 일어나 있던 상태였다. 몇 시간이라도 잠을 청했던 우서와 달리 난 그야말로 사흘 밤낮을 꼬박 지새운 채 잠들었던 거라서 늦게 일어날 만도 했다.
잠이 완전히 깨기 직전, 몸을 압박하고 있던 무게가 줄어들자마자 본능적으로 팔에 힘이 먼저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고 단숨에 잠이 달아났다. 우서가 내게서 떨어지려 했다는 사실이 전신의 긴장을 일깨웠다.
그러다 점차 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서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서로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잠들었는지.
그때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우서는 날 두고 도망가지 않을 거다. 이미 확실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이때껏 내 품에 있었던 거니까.
“더 자.”
등을 토닥이며 잠긴 목소리로 말하자, 우서가 품에서 소심하게 꼬물거린다.
“저는 다 잤어요. 형 불편하실 텐데 제가 좀 내려가면…….”
“안 돼. 도망가지 마.”
이제 안 보내. 못 보내.
다행히 우서는 아무런 대답 없이 얌전히 안겨 있었다. 전신을 덮은 무게감이 기분 좋아, 이대로 평생 깔려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우서가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강지석이 우서에게 내 아침형 저기압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그딴 건 우서와 함께 잔 후부터 진즉에 다 사라지고 없었는데.
누운 채로 시선을 내리니, 우서의 흐트러진 셔츠 카라 사이로 그의 목 언저리가 보였다. 며칠 전에 내가 지석이에게 경고하기 위해 새겨 두었던 잇자국이 아직도 붉게 자리 잡고 있다.
과거를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압박감을 느끼던 매일 아침을 담백하게 말해주며, 우서의 머리에 키스하듯이 입술을 댔다.
“이젠 그 감각마저 다 잊어버린 것 같아. 눈을 뜨면 그저 좋아. 잠들고 일어난 후엔 내 옆에 네가 있을 걸 아니까, 그래서 좋아.”
내가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했고, 우서는 이런 말조차 수줍어하며 곱씹을 걸 알기에 서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전해 듣는 건 그에게 있어 아직 익숙지 않은 일일 거다. 그래서 더 떨리고 부끄럽고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거지.
어찌할 줄 모르는 것처럼 시선을 굴리던 눈동자가 날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말한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상체를 조금 일으킨 우서가 날 또렷이 내려다보았다. 몸과 얼굴로 햇볕을 가린 우서의 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진다. 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듯한 시선에 맞춰, 잔잔한 미소와 함께 눈가를 떨었다.
이 순간에도 우서는 내 표정이 진짜인지 계획적인지 분석하고 있겠지.
애석하게도 둘 다였다. 우서가 조금이라도 날 더 좋아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내 표정을 측은하게 다듬었다.
“우리에게 있는 링 때문인지, 아니면 형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모를 만도 하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몰라도 괜찮아. 하고 싶은 대로 해.”
“정말이에요?”
네가 원하는 대로 결정해. 어차피 그 결정이 어떤 답이 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네 행동, 네 표정, 네 말, 네 억양, 네 시선.
모든 게 힌트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링을 해제하자고 하면 그렇게 할 거고, 더 떨어져 있자고 하면 그럴 거예요?”
답을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블러핑에는 나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모든 걸 받아들일 각오가 되었다는 듯이 우서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링이 해제되면 우리 둘 다 서로를 잊는 거잖아요. 형은… 그래도 상관없어요?”
“잊게 되더라도 다시 쌓아 올리면 돼. 너와 있었던 모든 기록을 되짚고 분석해서라도 내 감정을 되찾을 거고, 비록 이번엔 실패했다 해도 네 감정 또한 날 향하게 만들 생각이야.”
지울 테면 지워봐. 각오가 있다면 지워도 좋아. 하지만 그로 인해 네가 날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 속내를 굳이 숨기지 않고 말 하나하나에 끼워 넣었다. 우서의 눈동자가 겁먹은 강아지처럼 크게 흔들린다. 그러다 점차 묘한 기색을 보이며 입술을 꾹 깨문다.
이때껏 누누이 말해왔지만, 집착과 광기의 표출 끝에 다다른 순간에야말로 확고히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단호히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해. 다만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너만 바라볼 거야.”
내 대답은 끝났어.
그럼 너도 답을 해야지.
우서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굳게 다물려 있던 붉은 입술이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우면서도 확실한 모양을 만들어간다.
“저는…….”
우서의 눈가가 조금은 허탈한 빛을 머금은 채 예쁜 굴곡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형이 좋은가 봐요.”
그가 내 왼손을 붙잡고서 조심스레 깍지를 낀 채 피식 웃었다. 그 작은 웃음이 너무 예뻐서 넋을 놓을 것만 같다.
“너무 좋아서 다 용서해버릴 것 같은데, 어떡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