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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90화 (90/99)

90화

그리고 이런 사람들일수록 수완이 좋은 반면, 제 직원들에게는 한없이 냉정하며 오로지 실적만 중요시하는 꽉 막힌 사람이기 마련이다.

‘알만하네.’

짧은 대화와 말투만으로도 우서의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타입이라면 오히려 다루기 쉽지.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네요.”

-그럴 수도 있죠. 그나저나 지석이 형이면 예전에 우서 과외수업해 준 분 아니세요? 창업해서 서울에서 IT회사를 운영하신다던 그……?

강지석을 통해서 이미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거로 아는데, 모르는 척 운을 떼는 걸 듣자니 작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과외 당시에는 찾아뵙지도 못했었네요. 지금은 모바일 기반 애플리케이션 위주의 작은 개발회사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어머, 아직 젊은 거로 아는데 대단도 해라. 그런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우서가 같이 고민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결정해줬으면 하는 것도 있고.”

거짓말은 아니다. 우서가 우리 관계에 대해 고민해주고 결정해줬으면 하는 건 진심이니까.

그 말 한 번에 우서 엄마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들뜬다.

-우리 우서가 서울에서 잘하고 있었나 봐요. 지건 씨 같은 분이 직접 찾아와서 조언도 구하고. 같이 살았다고 하던데, 우리 애가 민폐 끼치진 않았나요?

그녀는 은근히 ‘우리’를 강조했다. 둘도 없는 살뜰한 모자인 것처럼.

“민폐라뇨. 우서 없으면 일이 손에 안 잡힐 지경입니다.”

-우서 얘는 이런 얘길 통 하지도 않고……. 우리 애가 워낙 바르게 커서 착하기도 한데 머리도 좋아서 뭐든 시켜주시면 잘 할 거예요.

앞에서 봤다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우아하게 웃고 있겠지. 마치 자신 덕분에 우서가 바르게 잘 컸다는 듯한 뉘앙스는 역겹기까지 했고, 우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의 저런 모습을 진짜라고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답답함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앞서 생각했던 것처럼 이런 타입은 오히려 다루기 쉽고, 더불어 원하는 것만 잘 맞춰주면 단순하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우서의 도움이 좀 필요해서 이번 방학 때 제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러 왔습니다. 미리 일을 배워두면 졸업과 동시에 제 회사로 바로 입사할 수 있도록 조치도 취해둘 생각이고요.”

-아르바이트를요? 우서는 당연히 좋아할 거예요. 실무를 미리 배울 기회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죠. 꼭 그렇게 해주세요.

우서의 의사를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꼭 그렇게 해달라며 신난 듯 말을 한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물어온다.

-혹시 아르바이트비는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입사한다면 연봉은 얼마나……. 아, 이건 그냥 그쪽 업계 평균 급여가 어느 정도 되는지 제가 몰라서 그러는 것뿐이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멋쩍은 듯 웃는 그녀에게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주었다. 방학 동안의 짧은 아르바이트는 값비싼 대학 등록금을 충당해줄 것이고, 그가 남은 대학 생활을 쾌적하게 보낼 수 있도록 생활비 또한 지원해줄 예정이라고 답했다. 졸업 후에 곧바로 회사로 들어왔을 때의 대략적인 연봉 또한 읊어주니, 연신 ‘어머’라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우리 우서 좀 잘 부탁해요. 필요하면 언제든 데려다 쓰시고요.

“감사합니다. 가능하면 오늘 데려가려고 하니, 짐은 조만간 사람을 보내서 챙겨가도록 하겠습니다.”

통화를 하면 할수록 ‘우리 우서’라는 표현을 누차 강조하듯 말한 그녀는 신난 듯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우서가 받게 될 돈이든 연봉이든, 그녀는 그게 다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차단할 방법이 있으니, 지금은 그저 들뜬 우서 엄마가 내게 우서를 밀어내듯 떠넘기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우서가 다시 그녀에게 도망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도록.

‘이런 작업도 이젠 필요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어차피 우서는 또다시 나를 피해 그녀에게로 도망칠 여유가 없다. 이미 심신이 한계에 내몰렸으니, 늦어도 오늘내일 사이에 결판이 날 거다.

‘해결해야 할 일이 많겠네. 이 사람부터 시작해서…….’

우서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는 게 꽤 기분 좋다. 더불어 우서가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내가 벽이 되어 막아주면 그가 자연스레 기대게 될 게 뻔해서 짜릿하기까지 하다. 이때만큼은 내가 그의 케어를 위해 번듯한 회사의 대표직에 앉은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우서 엄마와의 통화를 끝낸 휴대폰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우서와 손을 뗀 지 8분여의 시간이 지났다. 때마침 발코니에서 나오자마자 우서가 눈가를 찌푸리며 뒤척이는 게 보였다.

얼른 다가가 손부터 잡아주니, 뒤척이던 몸을 내 쪽으로 돌려 옆으로 눕는다. 그러고선 절대 놓으면 안 될 것처럼 두 손으로 꼭 붙잡기까지 한다.

“으응….”

얕게 신음을 흘리며 두 손으로 꼭 붙잡은 내 손에 보드라운 볼을 비비던 우서의 눈가가 점차 펴지기 시작했다. 곧 편안해진 얼굴로 색색거리는 소리를 낸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

내가 어떻게든 버티는 동안, 우서만큼은 편안히 잘 수 있을 테니까 좀 더 손을 잡아주자고 생각했다. 이러다가 나조차 잠들 것 같으면 결국 손을 놓고 나가야 할 테지만, 한계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재우고 싶었다.

우서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내 손을 꼭 잡은 우서의 볼에 짧은 키스를 했다.

* * *

도망치듯 차로 돌아와 숨을 고른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명확히 찍힌 우서의 이름과 함께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예상대로 호텔방에서 나온 지 10분이 조금 지난 때였다.

“더 쉬지 않고.”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받고서 내가 먼저 말했다. 어차피 우서가 바로 전화할 것은 예상하고 있던 터라,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대로변의 소음을 듣자마자 차에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밖이야? 밤도 늦었는데 왜 나왔어?”

그냥 호텔에서 쉬고 있지, 몸도 성치 않은데 왜 밖으로 나온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초여름이라지만 밤공기를 쐐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깐 잤다고는 해도 아직 더 쉬어야 해. 어머니께는 내가 연락드려 뒀으니까 오늘은 호텔에서 푹 쉬어.”

-들어가 있으면 올 거예요?

우서의 목소리가 조용히 화난 사람처럼 단단하게 들려왔다.

-방에 들어가 있으면 다시 와줄 거냐고요.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 우서와 통화를 하다가 그의 허락이 떨어지면 그제야 다시 올라가, 이번엔 함께 잠들어도 되냐고 물은 후에 끌어안을 생각이었다. 그에게 모든 선택과 행동의 주도권을 줬다는 티를 팍팍 낼 타이밍이다.

하지만 그걸 시동 걸기도 전에 우서가 날 들쑤신다.

-왜 대답 못 해요? 호텔 방에 누워있는 것 정도로는 제대로 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요.

그 말을 하는 의미, 알고는 있니? 정확히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잘못 해석하는 건 아니겠지.

느릿하던 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호텔의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면 혹여 전화가 끊길까 싶어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가게 된다.

-형 때문에 힘들어요….

우서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왔다. 그에 맞춰 내 심장 역시 펄떡거린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아요….

나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 때문에.

그게 왜 이렇게 기분 좋은 건지, 왜 이렇게 기쁜 건지.

우서의 떨리는 말이 이어질 때마다 희열을 동반한 떨림이 전신을 지배한다. 내가 원하던 길보다 더 빠르게 나아가는 상황이 주체할 수 없는 벅참을 만들어내, 심장을 쥐어짜듯 조여온다.

우서를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속도가 붙었다. 우서가 나와 있을 호텔 밖의 대로변으로 뛰쳐나온 순간에도 내 발걸음은 느려지긴커녕, 어느새 조급히 달리고 있었다.

모든 게 어둠에 휩싸여 새까맣게 보이는 와중에 오로지 한 명.

우서 한 명만이 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밝게 빛나는 호텔의 빛과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량의 전조등 같은 건 이미 내게 어둠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주먹을 꽉 쥔 채 휴대폰을 들고 있는 우서의 뒷모습이 점차 가까워졌다.

-빨리 와서 나 좀…….

“빨리 와서 나 좀…….”

휴대폰을 통해서만 전해지던 목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두 팔이 뻗어 나가, 우서를 품에 폭 안아버렸다.

우서는 그를 끌어안은 게 누구인지 이미 알아챈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처롭던 어깨의 떨림이 점차 평온하게 가라앉아 간다.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탓에 우서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도저히 희열을 억누를 길이 없어서 내 심장이 그의 것보다 더 세차게 뛰고 있다는 것을.

미처 내리지 못한 입꼬리가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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