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걸 묻는 이유가 뭐야?”
시비를 걸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순수히 궁금했을 뿐.
강지석은 우서와 내 링을 해제하고 자기가 직접 링을 연결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있어, 내가 이처럼 우서를 집요하게 쫓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건 충분히 좋아할 만한 일임에도 어째 반응이 이상하다.
“우서는 자기 거라고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지금은 어떤 선택이 닥치든 다 받아들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 포기한 거야,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 거야?”
포기? 그럴 리가.
비웃어 주며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말해줄까 하다가 관두었다. 내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강지석의 머릿속에 든 게 뭔지가 더 알고 싶었다.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강지석이 순간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날 자극하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내일 우서에게 가볼 거야.”
다소 거만하게 팔짱을 낀 강지석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도발한다.
“형은 안 되겠지만, 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다가갈 수 있어. 같이 밥도 먹고, 몸 상태도 확인하고, 형 욕하는 것도 들어주고, 나도 같이 욕하고. 무엇보다 혹시라도 쓰러지면 그 어머니가 병원까지 같이 가줄 것 같지가 않거든.”
여전히 무표정한 날 가만히 보고 있던 강지석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제 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포기 못 할 거면 애 힘들게 하지나 말던가.”
타박하듯 말을 던지고선 들으라는 듯이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는다.
굳게 닫힌 문을 보고 있다 보니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좀 뒤통수 맞은 기분인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강지석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 * *
햇볕이 따가운 오후.
미리 위치를 알아둔 전자 매장에서 강지석이 튀어나왔다. 그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온 우서가 순간 휘청거렸다.
나도 모르게 운전석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하지만 내가 뛰쳐나가기도 전에 강지석이 우서의 어깨를 감싸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뭐라 묻는 듯했지만 거리도 조금 있고 차에 있었던 터라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강지석의 손이 내려가고 나자 그제야 우서의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그새 얼굴이 상했네.’
다른 건 다 흐리게 보여도 우서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창백한 안색,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싫어도 알게 되는 옅어진 혈색, 눈을 비비는 힘없는 손동작, 강지석을 밀어내며 지친 표정으로 내쉬는 한숨.
전부 다 눈에 그대로 박혀 안을 파고든다. 빈속에 독한 술을 털어 넣은 것처럼 속이 쓰려진다.
우서는 강지석을 밀어내고 다시 붙잡히다가 뭐라 대화를 하더니, 결국 그에게 끌려가듯 어디론가 향했다. 걷는 내내 위태해 보여서 걱정이 많았으나, 강지석이 옆에서 잘 부축해준 덕택에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이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그 근처에 잘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주차를 해뒀을 즈음, 전화가 걸려왔다. 회사의 김 부장에게서였다.
-대표님, 컨펌하신 대로 샘플 완성했습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샘플 파일과 관련 보고서 모두 공유 드라이브에 올려두었습니다.
“수고했어요. 이틀 뒤에 있을 세미나는 당부한 대로 나 대신 김 부장이 진행해 주세요. 중요 내용은 어제 정리해준 그대로입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죠.
“김 부장이라면 잘 해낼 겁니다. 정 대리도 같이 데려가요. 그쪽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서 미리 부탁해 뒀습니다.”
김 부장은 긴장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하다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저…, 대표님. 그럼 오늘부터 일주일간 휴가이신 거죠?
그동안 한 번도 휴가를 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김 부장은 꽤 의아한 눈치였다. 출근이 어렵더라도 재택근무를 하면서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던 나였던 터라, 그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그는 막상 내가 일주일 휴가라고 했지만 도중에 다시 회사로 돌아오진 않을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일주일 뒤에 출근할 겁니다. 그러니 중요한 일 외에는 되도록 연락하지 말아요.”
-예, 그럼요! 푹 쉬고 오십쇼!
어째 신난 분위기다. 샴푸를 바꿨더니 새치가 줄었다며 신나 하던 어떤 날처럼 오늘도 그런 들뜬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
전화를 끊고서 한동안 강지석과 우서가 들어간 식당을 바라보았다. 이것저것 많은 포스터와 안내 문구 시트지가 붙여져 있어서 그런지, 두 사람의 실루엣 정도 말고는 딱히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속이 더욱 답답해졌다. 슬슬 나도 한계에 가까워져서 수시로 가슴이 울렁거리거나 답답해지곤 했다.
차에서 내려서 바깥바람을 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불도 붙이지 않았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파진다. 어째 햇빛을 직접 쐴 때마다 머리가 아픈 것 같다.
‘우서도 이러려나.’
나와 똑같이 괴로울 우서를 생각하니 하루라도 더 빨리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지석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오늘쯤 해서 우서를 살피러 와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어제까지 일을 몰아서 해치웠는데, 아랫사람들이 들었다면 질겁할 일이지만 좀 더 빨리 처리할 걸 그랬다.
한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어렵사리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나마 두통이 좀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내 속은 점점 더 아파졌다.
식당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이어서 한 고급 빌라 안에 들어갔다. 굳이 사람을 써서 조사하지 않아도 그곳이 지금 우서가 지내는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늦은 밤이었다면 불이 켜지는 걸 보고 우서의 집을 알아낼 수 있을 텐데, 해가 길어지기 시작한 만큼 아직도 햇빛이 쨍쨍해 구별이 어려웠다.
우서의 집을 알아내는 걸 포기하고 시트에 등을 파묻었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우서의 얼굴을 그렸다. 내게 웃어주던 얼굴 대신 혈색 없는 아까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링을 해제하든 말든 상관없으니 우서가 편히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안 돼. 그럼 안 되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우서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힘들더라도, 아니, 힘들기 때문에 결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나를 선택할지, 버릴지.
순간, 우서에게 외면당하며 버려지는 날 상상하니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대비책을 세워뒀다고는 해도 그렇게 버려지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멀쩡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한 번 버려지면 지금보다 더한 광기를 갖게 되지 않을까. 원했던 것을 얻기 직전에 잃어버리게 되면 누구나 더 갈구하게 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기억을 잃고서 그 집착과 광기의 잔재를 맞닥뜨린 나는 우서에게 더욱 강한 관심을 갖게 되겠지.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었던 자는 대체 누구인가, 알고 싶다, 하는 생각 때문에.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 차창 밖을 바라보니, 강지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유리창을 두드린 채, 내가 창문을 내려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을 내려주자마자 강지석이 입을 연다.
“당장 병원 데려가고 싶은 거 참고 있는 거야.”
강지석의 말은 내가 아닌 우서를 향한 것이었다. 그는 내게 친절하게도 경고를 해주고자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눕혀두긴 했는데 언제 다시 나올지 몰라. 그러니까 잘 지켜봐.”
강지석은 그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미련 없어?”
강지석의 등을 보며 물었다. 멈칫하던 강지석이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없겠어? 당연히 있지.”
“그럼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건데?”
한차례 숨을 내쉰 강지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쉬운 거 아니야. 나도 어려워. 어려워 죽겠는데, 그래도 이게 맞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어깨를 으쓱해 보인 강지석이 배시시 웃는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형도 이미 알아챘잖아. 우서가 상처받고 고민할 거 알면서도 내가 굳이 두 사람 사이 들쑤셔놓은 이유.”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강지석은 홀가분한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고, 난 한동안 녀석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것마저 호구 같으면 어떡하냐, 지석아.’
처음 보는 타인에게마저 호구 소리를 들을 정도로 뭘 퍼주고 도와주던 성품은 좀 어른스러워졌다고 느끼던 지금도 여전했다. 하물며 강지석은 한 번 마음을 내준 사람에게는 한없이 헌신적이 된다.
동생을 이용해서라도 원하는 걸 쟁취하려던 나와는 달랐다. 똑같이 생겼어도 그 안에 있는 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강지석에게는 나도 중요하고, 우서도 중요했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아니, 좋아하는 사람들의 우열을 가리는 시도조차 가능하기나 할까. 냉정함과 거리가 먼 강지석인데.
‘다행이야.’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갔다.
‘나도 동생을 산산이 짓밟는 건 내키지 않았거든.’
링을 잃게 됐을 때의 대비책 중, 강지석을 짓밟기 위한 부분은 다행히 삭제해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