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Ym
14. 강지건
“미쳤어?! 돌았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민아가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높은 소리를 쏘아붙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를 사이에 두고 글라스를 닦던 바텐더가 깜짝 놀라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단골이 아니었다면 대화를 끊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당부의 말을 하러 다가왔을 거다. 그만큼 한민아의 목소리가 제법 컸다.
“네 수작질을 다 털어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그거 듣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던 한민아가 주변 눈치를 보더니, 홱 돌아가 있던 바의 스툴에 다시 앉고서 글라스에 반쯤 남아 있던 위스키를 단번에 들이켰다.
“반응이야 안 봐도 뻔하네. 너랑 말도 안 하고 웃어주지도 않지? 피해 다니지?”
글라스를 내려놓으며 묻는 말에 피식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 정도면 모르겠는데, 아예 도망쳐버렸어.”
“뭐?!”
또 한 번 놀란 한민아가 이젠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망? 어디로?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있어도 돼?! 당장 잠은 어떻게 하려고!”
“며칠 날 좀 샌다고 죽진 않아.”
“죽진 않겠지만 죽을 만큼 힘들겠지! 링 발현하고 나서 그 애랑 같이 자기 전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 안 나?”
링이 발현했을 당시는 한민아가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였지만, 내가 겪었던 불면증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타인에게 제대로 애정조차 주지 않는 내게는 그런 링이 절대 생길 리 없다던 한민아였기에, 링의 이야기를 하며 전해준 불면증에 관해 얼떨떨한 얼굴을 하기도 했다.
“도망갔으면 잡아야지, 뭐 하는 거야?”
“숙성.”
“…이게 진짜 돌았나.”
한민아가 헛소리하지 말라며 눈을 치켜떴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즐기듯이 잔을 기울였다. 목을 타고 넘어간 차디찬 위스키가 금세 후끈한 열이 되어 몸속을 달구는 느낌이 났다.
한민아의 답답함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메시지 앱에 들어가니 사적인 거라고는 우서에게 보낸 일방적인 안부 메시지가 전부다. 메시지 옆의 작은 숫자 마크가 사라진 거로 보아 확인했음이 분명한데도 우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마찬가지다. 받아주지도 않고 도리어 연락해주지도 않는다.
‘그래도 괜찮아.’
무시해도 좋을 텐데 매번 메시지를 보내면 얼마 가지 않아 확인한다. 그건 무시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날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잠을 못 이룬지 이틀째니 몸 상태 때문에라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이미 알고 있겠지.’
내가 이렇게 연락하는 것도,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것도, 직접 나타나 잡지 않는 것도, 전부 계획적이라는 걸 우서도 알고 있을 거다.
휴대폰의 다른 앱을 실행시켰다. 액정에 지도 형태로 펼쳐진 화면의 특정 부분에서 일정하게 점멸하고 있는 빨간 점이 보였다. 위치추적 앱을 삭제했다면 회색 점이 되어 움직이지 않을 테지만, 붉게 빛나는 점은 우서의 이동에 맞춰 그 위치를 아직도 세심히 알려주고 있었다.
전화를 걸면 시간이 다 되어 끊길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고, 메시지가 도착하면 꼭 확인해서 내용을 읽어본다. 위치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을 게 뻔한데도 앱을 지울 생각도 하지 않고, 휴대폰의 배터리 한 번 방전시킨 적이 없다.
내게는 큰맘 먹고 시작한 도박의 성공 가능성이 올라갔다는 걸 알리는 청신호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심신이 한계에 다다른 우서는 결국 선택해야만 한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나와 함께 그렸던 서툰 그림을 통째로 지워서 백지로 만들든, 그 위에 색을 입히고 완성하기 위해 다시금 붓을 들든.
“무작정 잡으면 안 돼. 더 흔들리고 고민하게끔 놔둬야 확실히 깨닫게 될 거야.”
“깨달아? 뭘?”
한민아의 의심스러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계산하고 갈 테니까 한 잔 더 마시고 가.”
“뭐? 나야 땡큐지만…….”
다가온 바텐더에게 한민아의 위스키 한 잔을 부탁하고서 돌아섰다. 뒤에서 한민아의 ‘더 늦기 전에 잡아. 땅 치고 후회하지 말고.’라는 말이 들려온다.
밖으로 나와 대리기사를 기다리며 차에 기대어 섰다. 늦은 밤임에도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 숨이 좀 답답하고 더운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선선한 바람이 좀 불어줘서 다행이다.
휴대폰을 들어 버릇처럼 메시지 화면을 띄웠다. 홀린 것처럼 메시지를 작성하다가 시간을 보고서 다시 전부 지워버렸다. 잠들지 못했을 게 뻔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새벽 3시에 메시지를 보내는 건 너무 배려심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럽다. 거래처 사람도 아닌 타인에게 이렇게 조심스럽게 굴어본 건 우서가 유일했다.
“하아아….”
깊은숨을 내쉬며 액정에 반짝거리는 붉은 점을 내려다보았다. 피곤함 때문에 핏발 선 눈이 붉은 점에 닿아 떨어지려 하질 않는다.
“보고 싶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고 나니 독한 술도 헤집지 못했던 속이 아플 정도로 쓰려진다.
고작 이틀간 거리를 두고 지켜본 것에 불과했지만, 도박의 성공 확률은 확실히 올랐다.
하지만 그건 100%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50% 정도일까.
‘더 오래 끌어봐야 우서만 힘들 텐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서도 제 몸이 더 버티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참을 각오를 하고서 이틀을 보낸 나도 온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이렇게 술을 마시게 되는데, 갑작스레 날 떠난 우서는 얼마나 힘이 들까.
‘심지어 그 엄마에게로 도망을 쳤으니…….’
사실 우서가 집에서 도망치듯 나가게 될 건 예상한 바였다. 충격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내가 섣불리 붙잡지 못할 만한 곳으로 갈 생각이었나 본데, 애석하게도 우서에겐 그럴 만한 곳이 그토록 꺼리던 엄마가 있는 곳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밀어내기 위해 차악(次惡)이나 다름없는 엄마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이틀 정도는 회사 일을 급박하게 몰아서 처리하느라 직접 얼굴을 보러 갈 수 없었기에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지만.
일주일은 족히 걸릴 일들을 어제오늘 전부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우서는 우서대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다. 우서는 그 엄마라는 사람에게 링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을 것 같았고, 상대방 또한 딱히 관심 가질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런 상황에 점차 정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한계가 오면 결국 도망칠 길 없이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될 텐데, 그 시간은 우서에게 있어 확실히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기다릴게.’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서 억지로라도 재우고 다시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하루, 이틀, 사흘, 점차 수명을 연장하듯이 한계 직전에 재우고 시간을 주고, 또 재우고 시간을 주는 일을 반복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서가 링을 갖고 있어 주는 시간이 늘어난다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끝이 없다는 걸 알기에 속이 쓰리고 걱정이 되어도 참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서의 확실한 결정이 있어야만 우리의 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집에 도착했을 땐 웬일인지 거실 불이 환했다.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강지석뿐일 텐데, 12시가 되기도 전에 잠들던 그 녀석답지 않게 멀쩡한 얼굴로 깨어 있다.
“오늘도 늦었네.”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강지석이 가까이 오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술 냄새가 장난 아닌데.”
“신경 꺼.”
차갑게 대꾸하며 술 마시는 동안 약간 풀어뒀던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 손에 쥐었다. 어째서인지 넥타이를 완전히 풀었음에도 답답한 숨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대로 방으로 향하려는데, 강지석이 내 앞을 막아섰다.
“우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걸 네가 왜 신경을 써?”
근래 강지석의 행동이 워낙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내 입에서도 그다지 곱지 않은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강지석은 내 목소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우서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았다.
“이제 사흘째야. 이틀까지는 어떻게 버틴다 해도 사흘째부터는 진짜 힘들다고. 그리고 신경 쓸 거 많으면 밥도 못 먹는 애란 말이야. 지금도 밥 한 번 제대로 못 먹고 있을걸.”
“그렇게 신경 쓰이는 놈이 왜 여기 있어?”
강지석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우서가 그렇게 걱정되면 너라도 가서 설득하지그래? 형하고 잠 좀 자라고 하든, 링을 해제하라고 하든.”
강지석이 왜 우서를 찾아가지 않는 건지 알고는 있었다. 우서는 짐을 챙겨 나가며 강지석에게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했고,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연락도 받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번 일은 강지석도 아예 무관하지 않은 거라 그 역시 걱정을 무릅쓰고 대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지석은 곧바로 대꾸하지 않고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형은 어떻게 할 셈인데?”
“말했지, 신경 끄라고.”
강지석의 어깨를 밀어내고 지나가려는데 도리어 녀석에게 붙잡혀 돌려 세워졌다. 눈높이가 같은 강지석의 눈이 정면에서 날 똑바로 바라본다.
“우서가 링을 해제하자고 해도 괜찮아?”
오늘 강지석은 확실히 이상했다. 왜 이제 와서 링의 해제가 괜찮은지 아닌지를 묻는 건지 모르겠다.
“그걸로 된 거냐고, 형은.”
그것도 주도권을 가진 우서가 아니라, 얌전히 결정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