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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86화 (86/99)

86화

이번엔 꿈 한 번 꾸지 않고 푹 자버렸다.

포근함과 따뜻함이 어우러져 온몸을 감싼 기분은 잠에 빠져들 때처럼 깨는 순간마저 황홀하게 했다. 새삼 이런 기분마저도 쾌감이나 희열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되짚기 시작하자,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뜨였다.

“……!”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형’을 부르며 찾을 뻔했다. 다행히 입 밖으로 소리를 내기도 전에 내 시야에 한 사람의 얼굴이 들어찼다.

내게 깔린 상태 그대로 잠들어버린 건지, 형은 여전히 날 끌어안은 채 옷도 벗지 않고 있었다. 잠들기 전보다 훨씬 혈색이 도는 얼굴로 죽은 듯이 잠든 형은 누가 때리고 흔들어도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가 않았다.

형의 잠든 모습을 보는 건 이로써 두 번째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게 달라졌다.

잠든 곳도 달랐고, 형과 나의 안색도 달랐으며, 우리의 감정적 깊이 또한 달라졌다.

날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더 깊은 감정을 갈구하며 모든 걸 털어놓은 형. 그 모든 것 때문에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진 나.

형의 품에서 푹 잠들고 일어난 지금이기에 더 실감이 났다. 내 가슴 속의 두 개로 나눠진 공간을 삽시간에 먹어치운 게 누구인지,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가만히 형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뒤늦게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아무리 내가 좀 마른 편이라고는 해도, 성인 남자의 무게를 오롯이 받아내는 건 형에게 압박이 너무 심할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때까지 얹어져 있다시피 내 허리에 올라가 있던 형의 팔에 갑자기 힘이 실렸다. 일어나던 몸이 덜컥하며 다시금 형의 몸을 이불처럼 덮어버린다.

“…깼어?”

듣기 좋은 저음이 잠결에 섞여 훨씬 더 낮게 울려 퍼졌다. 내 머리에 닿은 큰 손이 습관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다가 아기를 재우듯 등을 토닥인다.

“더 자.”

“저는 다 잤어요. 형 불편하실 텐데 제가 좀 내려가면…….”

“안 돼. 도망가지 마.”

단호한 저음과 함께 몸이 더욱 꽉 붙들렸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한 몸처럼 붙어버린 내 얼굴에 조금의 열이 몰린다.

‘도망… 안 칠 건데…….’

눈을 굴리며 형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전날에 비해 형의 느릿한 심장 박동은 내 등을 토닥이는 박자와 똑같았는데, 그게 묘한 음률을 만들어 내어 듣기 좋은 자장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매일 기분이 나빴어.”

금세 잠들 줄 알았던 형은 돌연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일에 지쳐서 잠들 때도 그랬지만, 특히나 일어난 순간엔 그날 해야 할 일에 대한 압박이 가장 먼저 찾아왔거든.”

강지석이 형의 아침에 관한 얘기를 했던 게 떠올랐다. 강지석은 형이 그저 아침에 저기압이라는 말을 해줬을 뿐이고,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말하지 않았었다.

아마 강지석 역시 몰랐던 거겠지. 형 같은 사람이 차마 나이 차이 나는 동생들에게 낱낱이 털어놓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일개 회사원들도 그날 회사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한 압박감이라는 게 있을 텐데, 형처럼 주목받는 기업의 대표로서 모든 걸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자리에 앉아 있으면 당연히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동반되기 마련일 거다. 형에겐 그 스트레스의 형태가 잠에서 깬 직후에 다가오는 저기압이었던 것 같다.

“이젠 그 감각마저 다 잊어버린 것 같아.”

잠들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형이 내 머리에 입술을 내려 입 맞춘다.

“눈을 뜨면 그저 좋아. 잠들고 일어난 후엔 내 옆에 네가 있을 걸 아니까, 그래서 좋아.”

형의 말 한마디 한마디, 한 글자 한 글자가 내 가슴을 간질인다. 그 간질거림은 가슴을 밖에서 노크하듯 두드리는 게 아니라, 안에서부터 동그란 솜털 여러 개가 굴러다니는 듯한 기분 좋은 전율을 가져왔다.

내가 아는 지건 형은 아주 어른스럽고 머리가 좋으며, 한 기업의 대표 자리에 앉을만한 배포와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단점이라면 단점인, 어쩌면 실로 인간답다고 할만한 점 또한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하나 때문에 모든 걸 가차 없이 이용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신의 나약함을 무기 삼아 동정을 갈구하기도 한다. 주도권을 모두 내어줘서라도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휘감으려 들고, 진심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감정의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약았어.’

언젠가 형을 여우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다시금 그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별 볼 일 없는 나라는 사람이 형의 괴로운 순간을 변화시켰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어, 형의 차분한 박동과 어긋난 또 다른 화음을 만들어낸다.

얼굴을 들어 형을 올려다보았다. 잠결의 기색도 없이 또렷한 형의 눈동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을 맞춰온다. 그게 꼭 ‘넌 어때?’라고 묻는 것 같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형에게서 상체를 조금 일으켜, 시트를 두 손으로 짚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 그늘에 가려진 형의 얼굴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떤 답이 나오든 다 받아들일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눈가의 작은 떨림은 감추려 하지 않는다. 푹 잠든 덕분에 조금이나마 색이 돌아온 붉은 입술은 금방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고 간질거리는 사랑 고백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도 날 속이기 위한 형의 계산된 표정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둘 다겠지.’

허탈함과 설렘이 함께 요동치는 감각은 근래 가장 많이 느껴본 것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느낌의 시작과 끝엔 언제나 형이 있었다.

“우리에게 있는 링 때문인지, 아니면 형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내 감정에 확신을 가진 지금도 거듭 생각하는 바였다. 링에 의해 인간에게 필수적인 ‘수면’이라는 것의 절실함과 후희에 취한 나머지 아침이 기분 좋아진 건지, 아니면 모든 것의 초점을 내게 맞춘 형이 언제나 내가 눈뜨는 순간을 기다려주기 때문인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모르지만,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황홀한 잠에서 깨면 나와 링으로 연결된 형이 눈앞에 있을 텐데. 예쁨받으려는 사람처럼 상냥하게 웃어주며 지금처럼 온몸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있을 텐데.

바로 지금처럼.

“몰라도 괜찮아.”

형의 손끝이 흐트러진 내 앞머리를 조심스레 정리해준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머리카락과 내 신경이 연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정말이에요?”

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쑥 물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링을 해제하자고 하면 그렇게 할 거고, 더 떨어져 있자고 하면 그럴 거예요?”

날 바라보던 눈이 흠칫하더니, 점차 어둡게 가라앉는다.

“…그래.”

체념하듯 대답하는 와중에도 내 머리를 다듬고 쓸어주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형의 손이 닿은 부분마다 시작된 애타는 간질거림이 머리카락을 타고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흔들린다.

“링이 해제되면 우리 둘 다 서로를 잊는 거잖아요. 형은… 그래도 상관없어요?”

“응.”

가슴이 짧고 굵은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서로를 잊어도 괜찮다는 형의 짧은 대답은 내게 혼란만 가져다줄 뿐이었다.

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던 형의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뭔가가 서서히 떠오르는 듯했다.

“잊게 되더라도 다시 쌓아 올리면 돼. 너와 있었던 모든 기록을 되짚고 분석해서라도 내 감정을 되찾을 거고, 비록 이번엔 실패했다 해도 네 감정 또한 날 향하게 만들 생각이야.”

집착과 광기.

형은 마치 ‘완전한 포기’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무서운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우리를 속박한 링은 형에게 있어 무기나 다름없는 것일 텐데, 그걸 스스럼없이 버려도 괜찮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절대 포기하게 되진 않을 테니 상관없다는 것처럼.

집요하고 계획적이다. 무서울 정도로.

‘그런데도 그게 싫지 않은 건… 역시 내가 이상한 거겠지.’

두려움이 불러일으킨 가슴의 떨림마저 설렘으로 느껴지고, 날 올려다보는 흔들림 없는 집착 담긴 시선이 무서움을 넘어 짜릿한 희열을 전해준다.

“다시 말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해. 다만…….”

형의 눈동자가 내게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너만 바라볼 거야.”

한 번 드러난 집착과 광기는 사그라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과 없이 위세를 높이며 내게 어디 한 번 대답해보라 말한다. 내 솔직한 감정이 뭔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형의 눈을 내려다보며 감정을 다듬은 내 입이 천천히 열려 간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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